
저자 : 정명섭
출판 : 텍스티(TXTY)
출간 : 2025.02.10
근무처의 시스템이 바뀌며 업무 분장 및 시간이 대혼돈 상태다.
당일의 업무 흐름도 출근해 봐야 알 수 있는 수준.
원래도 찬 바람이 불면 바쁘던 직종이라 근무할 때마다 좌충우돌 주먹구구식으로 버텨내는 중이다.
그런데 의외로 짜증이 나거나 억울하지는 않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나 없나만 생각해 본 후 힘든 부분은 개선 요청을 하는 정도. 정 적응이 안 되면 그만두면 되고, 계획대로 안정되면 적응하면 되고. 오랜 기간 고착화되었던 곳에 찾아온 변화라 약간은 설레기도 한다.
일상에도 소소한 스트레스들이 있었는데, 그런 상태라는 걸 인정하고 어느 정도 표출했더니 그럭저럭 편안해졌다.
예전에는 갈등이 생기는 상황 자체를 피하고 싶어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는 편이었는데, 건강한 관계와 소통을 위해서는 자신의 경계를 주장하고 지킬 줄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너무 남에게 맞춰주고 희생하는 것도 스스로에게 못할 짓이다. 정말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속으로 꿍하면서 겉으로만 베푸는 건 선행이 아니라 일종의 위선이 아닐까. (물론 모든 일에는 적정선이 존재한다)
기꺼이 여유를 나누는 걸 지향하되, 그걸 위해 스스로에게 모질어지는 건 지양하기.
신년 목표는 이것이다.
<암행>은 예약 도서 서가에 꽂혀있던 걸 보고 관심이 생겨 읽은 책이다.
어두운 밤길을 걷는 행자에 관한 이야기인지, 암행어사에 관한 이야기인지 궁금했는데 작가는 둘 모두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아쉬운 점이라면, 단권으로 완결인 줄 알았는데 프롤로그에 가까웠다는 점.
탄탄한 현실에 기이가 살짝 곁들여진 것보다는 기이를 중심으로 현실이 뒤를 쫓는데- 아직 밝혀진 내용이 적어 사건의 전체 윤곽을 짐작키 어렵다. 뒷이야기가 더 나온 뒤에 몰아서 읽었다면 훨씬 즐거웠을 것 같다.
또 한 가지는, 명칭이나 직급 등 조선시대 중기를 배경으로 나름대로 탄탄한 고증을 의도한 작품인 것 같은데...
가장 처음 부분이자 이야기의 전체를 끌고 가는 주인공의 혼인에서 혼례 당일 새신부가 신랑과 함께 신행을 나서, 신랑의 집에 신방을 차린다는 다소 치명적인 오류가 있어 안타깝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신랑의 집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 수정이 어려운 옥에 티.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새신랑에게, 인생 최고의 날 닥친 시련이라는 설정 때문에 일어난 실수 같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아쉬운 부분.
이전에 읽은 <조선천일괴담>도 그렇고, <호랑낭자전>이나 <삼개주막 기담회>도 그렇고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기담 소설들은 대체로 비슷한 느낌이다. 먹어보면 아는 맛이라, 그게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추천 여부는 더 읽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 유독 선명하게 충격적인 아버지의 죽음 앞에 사내는 돌처럼 굳어 버렸다. 잘린 아버지의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잘린 목에서는 피가 역류하듯 흘러나와서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붉게 적셔 버렸다. 바로 앞에는 아버지가 아끼는 사인검이 떨어져 있었다. 진득한 피비린내가 방 안을 안개처럼 휘감고 있는 가운데 병풍에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피로 쓴 글씨였는데 핏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린 흔적이 보였다. 사내는 가까스로 글씨를 읽었다.
"무원(無原)?"
- 모든 게 완벽한 삶이었다. 부유하고 권세 있는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서 걱정 없이 먹고 살면서 공부했다. 머리가 좋아 과거에서 장원 급제를 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했기에 문제가 생긴 적도 없었다. 절친한 친구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했고, 암행어사로 나갔다 돌아올 일만 남았다. 일평생 남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 ...
- 비극이 벌어지기 한 달 전, 그가 나타나자 보신각 근처에 구름처럼 몰려 있던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물러섰다. 그가 병조판서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해도 박쥐 문양이 새겨진 통영갓에 산호와 호박으로 꿰어진 패영이라는 갓끈이 둘러져 있었고, 하늘색 도포에는 얼룩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관복을 입거나 몸종들을 잔뜩 거느리지 않았지만 부유하고 여유로운 집안 출신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기다 얼굴은 백옥처럼 하얗고 손도 고왔다. 뒤로 물러나 준 사람들에게 환하게 웃은 그는 종이가 붙어 있는 벽으로 다가갔다. 그가 말없이 지켜보는 가운데 갑자기 뒤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 혼례는 훈련원이 있는 동대문 근처 이명천의 집에서 열렸다. 좁은 마당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원래는 상객으로 신랑인 송현우의 아버지가 가야 했지만 병이 있다는 이유로 송현우 혼자서 가야만 했다. 원래 아버지가 가지 못하면 친척이나 형제 중 한 명이 가야 했지만 송현우는 친척도 없었고, 외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 송현우의 집안이 대단해서 아무도 그걸 문제 삼진 않았다. 말에서 내린 송현우가 기럭아비에게 받은 나무 기러기를 전안상에 올려놓고 절을 하면서 혼례가 시작되었다. 송현우가 기다리는 가운데 문이 열리고 화장을 마친 신부가방에서 나왔다. 수모의 도움을 받으며 나오는 신부의 화사한 모습에 사람들은 다들 탄성을 내뱉었다.
- 떠들썩한 낮이 지나가고 은밀한 밤이 찾아왔다. 송원우는 아내가 된 이명천의 여동생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모님은 송현우의 아내를 환영했다. 가마에서 내린 아내가 부모님에게 인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송현우에게 먹이가 다가왔다.
"도련님, 별채를 치워 놨습니다. 며칠 동안 거기서 지내시면 됩니다."
(리뷰자 주 : 조선시대에 혼례 당일 신부가 신행을 나서는 일은 없다. 신방은 신부의 집에 차리고, 신랑이 처가살이를 하다가 신행을 나선다. 안타깝지만 고증 오류.)
- 조선이 성리학을 국교로 삼고 있지만 상서롭지 못한 기이한 일들은 모두 임금의 책임이었다. 거기다 정원석은 물론 그 누구도 입에 올리지 못하지만 지금의 임금은 결정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일이었고, 임금도 딱히 그걸 부정하지는 않았다. 정원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조아리자 임금이 침묵을 깼다.
"내금위 중에 칼솜씨가 뛰어난 자를 하나 붙여 주겠다. 내일부터 병조판서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을 한 치의 티끌 같은 의혹도 없이 철저하게 조사하되 오직 과인에게만 보고하라."
"그러시는 연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밝혀야 할 일을 밝히려는 것뿐이다."
- "세상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보이는 것만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하지만 과인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 봐야만 한다."
- 숨을 헐떡거리며 말하는 덕이를 바라보던 이명천이 옆에서 지켜보던 무당을 노려봤다.
"무슨 술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만약 그놈이 여기 있다가 나간 게 확실하면 너도 무사치 못할 것이다."
"몸조심하십시오. 예전의 그가 아닐 테니까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한 무당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잠시 노려보던 이명천은 서두르라는 덕이의 채근에 부하들과 함께 오솔길을 내려갔다.
-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길은 저에게 물어보시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묻고 답하셔야 하죠."
"내가 죽어 있는 건지 살아 있는 건지도 스스로 알아내야만 하는 건가?"
"그거야말로 제가 정말로 답하기 힘든 문제로군요."
"가슴이 뛰지 않아. 살아 있을 때는 분명 왼쪽 가슴이 뛰었는데 지금은 미동도 하지 않아."
"삶과 죽음은 희미한 경계선으로 나눠질 뿐이죠. 언젠가 답을 찾으실 겁니다."
- 송현우가 마패와 안에 든 엽전 같은 것을 챙기는 걸 본 진운이 허리 뒤에 차고 있던 대나무 막대기를 건넸다. 건네받은 송현우가 살펴보니 겉에 글씨가 새겨진 낙죽장도였다. 슬쩍 뽑아 본 송현우가 칼날에 새겨진 글씨를 보고는 진운에게 물었다.
"이게 내 무기인가?"
"아뇨, 어사님의 무기는 머립니다."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진운이 송현우의 손에 들린 낙죽장도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이건 도구이고요."
- "여긴 한림이라는 마을이고 계방촌입니다."
"계방촌이라면?"
"나라에 내는 세금과 부역을 면제받는 대신 향리들의 주머니를 채워 주는 곳이죠."
- 계방촌은 별도의 급여를 받지 못하는 향리들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관내의 부유한 마을을 골라서 지정한 다음에 착취하는 곳이다. 보통은 부유한 곳을 지정하지만 향리들이 사사롭게 요구하는 것들이 많다 보니 계방촌의 주민들은 아주 고통스러워했다. 나라에서도 없애려고 했지만 향리들의 반발로 인해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걸 알고 있는 송현우는 계방촌이라는 말을 듣고는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 접이식 의자에서 일어난 사또는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서 있었다. 얼마 전까지 포도청 포교였던 이명천보다 품계가 몇 단계는 위였다. 거기다 무관 출신이라 승진에 한계가 있는 이명천과는 달리 사또는 문관이라 정1품인 영의정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명천이 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암행어사에게 걸려서 파직을 당하거나 평점이 깎이면 승진은 물 건너가게 된다. 그걸 잘 알고 있던 사또는 조금 전까지의 오만함을 버리고 공손한 모습을 보였다. 일단 들어 보기로 결정한 이명천은 아전을 따라 사또에게 다가갔다.
- "어사께서는 호장의 말을 믿지 마소서."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곳은 관아의 각종 비용들을 채워 주는 계방촌입니다. 나라에 내는 세금과 부역을 하지 않는 혜택을 받고 있지요."
"들었네."
"약은 놈들이라 내야 할 것들을 내지 않고 매번 없다는 얘기만 합니다. 특히, 젊은 놈들이 주동이 되어서 공공연하게 반항을 하는 중이지요."
-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 안개는 삽시간에 일행을 둘러쌌다. 평상시에도 자주 안개가 낀다고 말했던 범우 역시 이제는 적잖게 당황한 것 같았다. 삽시간에 한 치 앞도 안 보이게 되자 진운이 말했다.
"눈을 감아야 보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눈을 감고 볼 수 있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죠."
송현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진운이 덧붙였다.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심연으로요."
"심연이라면 깊은 연못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어둠을 보려면 어둠에 익숙해지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제 말대로 눈을 감고 눈을 뜨십시오."
- 이해할 수 없는 얘기였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범우와 마을 청년들이 가는 폐사찰에 애꾸눈이 있다면 반드시 만나야만 했다.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은 송현우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감은 눈 속에 어둠이 찾아왔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던 송현우는 질끈 감은 눈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보려고 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송현우가 진운의 이름을 부르려는 찰나, 이상한 점을 느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 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주변으로는 온갖 소음들이 들렸었다. 이름 모를 새가 우는 소리에 바람이 사그락거리며 풀잎을 치고 지나가는 소리, 나뭇가지가 흔들거리면서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복잡하게 들려왔었다. 하지만 눈을 감은 송현우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어둠 속에서 착 가라앉은 진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 "죽음이 보이는군."
"세상은 억겁과 같은 죽음에 둘러싸여 있으니까요. 삶과 죽음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 같지만 때로는 그 경계가 희미하기도 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 집안을 몰살시키고, 사찰을 폐허로 만든 악령들이 날뛰는 것인가?"
송현우의 물음에 진운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심연은 그걸 찾게 만들어 줄 겁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진운이 앞장서 가는 범우 일행을 바라보면서 덧붙였다.
"그걸 어떻게 찾아내느냐는 온전히 어사님의 몫입니다."
- "처음에 암행어사로 임명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뻤지.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을 직접 처벌할 힘을 얻었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그냥 어두운 길을 걷는 신세가 되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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