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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란포 기담집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1. 5.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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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에도가와 란포 / 김은희
출판 : 부커
출간 : 2024.07.31


       


에도가와 란포는 다자이 오사무와는 또 다른 기묘함이 빛나는 작가다.

삶의 무료함과 권태에 지쳐 기이와 괴이, 호사와 화려에 깊게 탐닉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것들을 가질 수 없어 비틀린 욕망에 사로잡힌 것 같기도 하고.

인간으로서의 란포는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작가로서의 란포는 확실히 한계를 추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란포 기담집>에는 유독 거울, 렌즈, 달빛 같은 빛과 반사에 대한 개념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래서인지 전반적으로 색채와 이미지에 치중한 묘사가 많은 편이다. 섬세하고 화려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로테스크한 일본화를 보는 느낌.

(반례라면 촉각이 강조된 수록작 <인간의자> 정도가 있겠다) 

그래서 중간중간 읽기를 멈추고 떠오른 이미지들을 정리하면서 읽어나가야 했는데, 조금 버거웠지만 즐거웠다.

이런 느낌으로 '읽기 힘든' 느낌은 드물어서 더더욱 좋았다.

 

환상이나 기담소설이 아닌 추리소설 작가로서의 란포가 드러나는 작품은 <사람이 아닌 슬픔>을 꼽을 수 있겠다. 다른 작품에 비해 환상적인 요소가 가장 적게 담겨 있으면서도 기묘한 분위기 자체는 극도로 강조된다. 드물게 여성 화자가 등장했다는 점에서도, 독자의 예상을 그대로 드러내 허를 찌른다는 점에서도 -그리고 다시금 반전이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인 작품.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기이함, 자타를 구분하지 않고 파괴하고 싶은 욕망, 자신의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다 결국은 광기에 빠져드는 집착 등은 여러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쌍생아>, <붉은 방>, <가면무도회> 등에서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춤추는 난쟁이>, <독풀>, <목마는 돌아간다>에서는 삶과 생활고, 그리고 비틀린 인간의 욕망을, <인간 의자>나 <애벌레>에서는 '인간' 자체의 경계를 더듬는다. 

 

개인적으로는 <화성의 운하>가 보여주는 화려한 꿈같은 이미지들이 가장 인상 깊었고, 스토리로는 <누름꽃과 여행하는 남자>, 구조로는 <사람이 아닌 슬픔>이 좋았다. <춤추는 난쟁이>는 짧았지만- 마지막 이미지가 강렬해서 기억에 남는다. 

 

가장 인간적이고 정상적(?)이었던 이야기는 <가면무도회>가 아닐까.

 

<붉은 방>에서는 믿을 수 없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있을 법하다고 느낀 '인간의 악의'가 충격적이었다. 결국 중요한 건 언행 그 자체가 아닌 의도인 걸까? 하지만 의도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을까? 등 많은 생각이 들었다.

 

좋았다.    

         

 


   

 

 

- [어느 사형수가 교도원에게 털어놓은 이야기]
선생님, 오늘은 꼭 말씀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제 사형일도 점점 다가오고 있는데 마음에 남은 이야기는 빨리 전부 털어버리고 최소한 죽기 전 며칠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보내고 싶습니다. 귀찮으시겠지만 부디 이 가련한 사형수를 위해 잠시 시간을 내주십시오. 

-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한 남자를 죽이고 그 사람의 금고에서 3만 엔(현재 가치로 약 1억 6,000만 원)을 훔친 일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아무도 그 이상은 저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더군요. 사형까지 선고받은 지금, 굳이 제가 실은 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게 있다고 고백할 필요는 없겠지요. 설령 그것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범죄라 할지라도 이미 극형을 선고받은 제게 더 큰 형벌을 가할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 "아니,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이제 곧 죽으러 가야 할 신세지만 악명은 조금이나마 덜고 싶은 허영심 비슷한 것이 있답니다. 그래서 저는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견뎌냈는지도 모릅니다. 그 일을 숨긴다고 해서 어차피 사형을 면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법정의 엄한 조사에도 저는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하는 것을 꾹 눌러 참고 그것만큼은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선생님께서 제 아내에게 자세한 얘기를 전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독한 악인도 죽을 날이 가까워져 오면 착한 사람이 되나 봅니다. 제가 만일 그 죄를 자백하지 않고 죽는다면 제 아내가 너무도 가엾습니다. 게다가 제가 죽인 그 남자의 집념이 너무 무서워서 더 이상은 견딜 수도 없습니다. 아닙니다, 돈을 훔칠 때 죽인 남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자백한 일이며 그다지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전에 또 한 사람을 죽인 일이 있습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저는 참으로 견딜 수가 없습니다." 

- "그건 바로 제 형입니다. 형이라고 해도 그냥 형이 아닙니다. 저는 쌍둥이로 태어났기에, 제가 죽인 남자는 형이라고 부르기는 해도 저와 동시에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난 다른 한쪽입니다."

- "어느 날 저는 형이라는 인간을, 쌍둥이의 한쪽을 죽일 결심을 했습니다. 형에게 그토록 원한이 깊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형은 맏이여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데 비해 제 몫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형편없었다는 것이라든지, 한때 제연인이었던 여자가 단지 형의 재산과 지위가 더 높다는 이유만으로 부모의 강요에 못 이겨 형의 아내가 된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부럽게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형의 죄라기보다는 형에게 그런 지위를 건네준 부모의 잘못이었습니다. 원망하려면 도리어 돌아가신 부모님을 원망해야 할 일이었지요. 게다가 형의 아내가 이전에 저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형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거든요." 

- "만약 제가 순조롭게 살아가기만 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불행하게도 저라는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악인이었는지 남들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게 대단히 서툴렀습니다. 무엇보다 잘못된 것은 인생의 목표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그날그날 하루살이처럼 즐겁고 재미나게만 살면 된다' '살았을지 죽었을지도 모를 내일 일은 지금 걱정해도 소용이 없다'는 식의 생각을 가진 몹쓸 인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 어쩌면 재산도 사랑도 얻지 못해서 자포자기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속받은 얼마 안 되는 돈도 순식간에 없어지고 말더군요."

 

<쌍생아>



- 미칠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처음 얼마 동안은 다른 사람들처럼 이런저런 도락에 빠졌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은 타고난 제 지루함을 위로해 주기는커녕, 도리어 '겨우 이것으로 세상의 즐거움은 모두 끝인가. 에이, 정말 시시하기 짝이 없구나' 싶은 실망감만 안겨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모든 것이 귀찮아졌습니다. 이를테면 누가 이러이러한 놀이는 너무 재밌어서 아마도 널 미치게 할 거라는 소리를 들으면, "정말? 그토록 재미난 일이라면 당장 해봐야지" 하고 벼르는 대신, 머릿속에서 먼저 그 놀이에 대해 요모조모 생각해 본답니다. 그리고 그 상상의 결과는 언제나 뭐 별거 없다는 식으로 결론이 나고 말지요.

- 이런 식이니 어떤 때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밥만 먹고 잠만 자는 생활도 했습니다. 그냥 머릿속으로만 온갖 상상을 해보면서, 이것도 별거 없고 저것도 시시하다고 하나에서 열까지 모조리 퇴짜를 놓으며 죽기보다 괴로운, 그러나 남들이 보면 참 더할 나위 없이 팔자 좋아 보이는 안이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 차라리 제가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형편이었다면 이렇게까지는 안 되었겠지요. 아니면 하다못해 강제된 노동일지라도 무언가 할 일이 있었다면 그래도 행복했겠지요. 또는 아주 엄청난 부자였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겁니다.  

- '그 노인은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하면서 별로 쓸데없는 일들까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답니다. 그러다 문득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내가 큰 실수를 했는걸."
전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정신마저 놓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노인을 M의원으로 보냈을까요?

- "왼쪽으로 두 블록 정도 가면 왼쪽에 붉은 등이 달린 집이 있는데..." 
전 제가 했던 말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오른쪽으로 한 블록만 가면 K 의원이라고 하는 전문외과 병원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가르쳐준 곳은 엉터리라고 소문난 곳인데, 외과 쪽으로 제대로 된 기술이나 가졌는지도 의심스러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M 의원의 반대쪽에 M 의원보다 훨씬 설비가 좋은 K 외과 병원이 있었고, 그 사실을 저도 잘 알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왜 엉뚱한 곳을 가르쳐주었는지 그 순간의 제 야릇한 심사에 대해서는 지금도 잘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순간적으로 깜빡 착각을 했던 모양이지요.

 

- 슬며시 걱정이 되어 일하는 할멈을 시켜 알아보게 했더니, 노인은 M 의원 진찰실에서 숨을 거뒀다고 했습니다. 밤 1시에 그런 환자라니 의사라도 그리 달갑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한동안 기다리게 한 뒤에 간신히 부상자를 받았는데 환자를 살리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뭐 이렇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의사가 자기는 전문의가 아니니 K 병원으로 데려가라고 했다면 노인은 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터무니없게 분수도 모르고 그 환자를 맡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결국 실패한 것이지요. 소문에는 M 의사가 당황한 나머지 환자를 말도 안 되게 오래도록 주물러대고 있었다는군요. 

- 그 소문을 들으니 전 다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답니다. 이 경우 가엾은 노인을 죽인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물론 운전사와 M 의사에게도 책임이 있겠지요. 법률상의 책임이라면 운전사의 과실일 테지만, 사실 가장 중대한 책임은 제게 있는 것 아닐까요? 만약 그때 제가 M 의원 대신 K 외과 병원을 알려줬다면 노인은 살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운전사는 다만 부상을 입혔을 뿐이지 죽인 것은 아닙니다. M 의사도 기술이 떨어져서 처치를 못 한 것뿐이니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혹시 그에게 책임을 물을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원인은 잘못 가르쳐준 제게 있습니다. 즉, 그때 제가 어느 곳을 가르쳐주었느냐에 따라 노인의 목숨이 좌지우지되었던 것이지요. 부상 입힌 것은 운전사지만, 노인을 죽인 것은 제가 아니겠습니까? 

- 이것은 제가 한 말이 어디까지나 우연한 과실이었을 경우입니다만, 만약 그것이 노인을 죽이겠다는 제 고의에서 나온 것이라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지요. 저는 사실상 살인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런데 법률은 운전사를 벌하는 일은 있어도 진짜 살인자인 저에 대해서는 의심조차 품지 않을 겁니다. 저에게는 생판 모르는 노인이니 죽일 만한 동기 따윈 도저히 찾을 수 없을 테니까요. 설령 의심을 받더라도, 전 그저 외과 병원이 빨리 생각나지 않았다고만 대답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건 순전히 마음속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이런 살인에 관한 법률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는지요? 전 이 사건으로 비로소 깨닫게 되었는데, 세상이란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더군요. 언제 어디서 나 같은 인간에게 걸려 아무 이해관계도 없이 부당하게 죽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 나중에 제가 실제로 해보고 성공한 일입니다만, 시골 할머니가 큰길을 지나려고 막 발을 내딛고 있었습니다. 큰길이어서 전차며 버스에 택시, 마차와 인력거까지 정신없이 지나고 있었을 테니까 할머니의 머릿속은 보나 마나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그때 자동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와 할머니 바로 뒤에까지 왔다고 합시다. 만약 할머니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 그냥 건너갔을 것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큰 소리로 "할머니, 위험해요!"라고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면 할머니도 당황해서 허둥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차가 급정거를 할 수 없는 경우라면, 굳이 그런 말을 함으로써 할머니를 일부러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전 언젠가 이런 방법으로 한 촌사람을 보기 좋게 죽여버린 일도 있답니다(T는 여기서 잠깐 말을 끊더니 우리를 둘러보며 기분 나쁘게 씨익 웃었다).

- 이 경우 "위험해요!"라고 외친 저는 틀림없이 살인자입니다. 그러나 누가 의심할 수 있을까요? 아무 원한도 없는 낯선 인간을 그저 재미로 죽일 사람이 있으리라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더욱이 "위험해요!"라는 주의는 아무리 해석해도 호의에서 나온 말처럼 보이니까요. 감사를 받을지언정 결코 원망을 들을 이유는 없지요. 여러분, 이 얼마나 안전한 살인입니까? 

- 세상 사람들은 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법에 의해 처벌받는다고 믿으면서 안심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일이지요. 살인을 저질렀는데도 법이 가만히 내버려 둔다고는 아무도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금 말씀드린 두 가지 예에서 보았듯이 법률에 저촉될 우려가 전혀 없는 살인이란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습니까?  


- "어이, N군. 그 옆은 위험하다네. 왼쪽으로 가게나, 왼쪽으로."

물론 일부러 장난처럼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의 평소 성품으로 보아 분명히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하고 오른쪽으로 비켜갈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요. 아니나 다를까, 그는 에헤헤헤 웃으면서 장난도 잘 친다는 등의 말대답을 하며 잽싸게 오른쪽으로 두세 걸음 물러났습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순식간에 하수도 공사를 하느라 파놓은 3미터는 족히 되는 구덩이 속으로 쿵 빠져버렸지요. 저는 놀란 척하면서 구덩이로 달려가 멋지게 성공했는지 확인했습니다. 그는 구덩이 속에서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잘못 떨어지면서 날카로운 돌에라도 찍힌 듯 머리에서는 시뻘건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고, 혀를 깨물었는지 입과 코에서도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얼굴빛은 창백했고 신음 소리를 낼 기운조차 없어 보였습니다. 

- 그렇게 몇 시간은 안마사의 목숨이 붙어있었지만 곧 절명해 버렸지요. 제 계획은 멋지게 성공했습니다. 과연 누가 저를 의심할 수 있을까요? 전 평소에 이 안마사의 친한 단골이었지 무슨 원한이 있었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을 테니까요. 게다가 겉보기에는 오른쪽에 구덩이가 있으니 피하라는 친절한 말을 해준 호의만 보일 테지 그 말에 무서운 살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 아아, 이 얼마나 끔찍하고 즐거운 유희입니까! 교묘한 트럭을 생각해 내면 마치 예술가의 창의성과도 맞먹을 환희를 느끼고, 그 트릭을 실행할 때는 두근두근 설레는 긴장감으로 흥분되고, 그 목적을 이루었을 때는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자기를 죽인 살인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피투성이가 되어 신음하는 단말마적 광경 따위는 저를 아주 자랑스럽고 유쾌하게 만들었습니다.

-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몹시 흐린 여름날이었는데, 저는 양옥집이 띄엄띄엄 서 있는 한적한 교외를 걷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콘크리트 건물을 뒤돌아갈 때였습니다. 문득 묘한 것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방금 제 코 끝을 스치며 날쌔게 날아가던 참새 한 마리가 그 집 지붕에서 땅으로 향해 있는 굵은 철사 위에 앉았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갑자기 튕겨져 나오더니 그대로 밑으로 굴러 떨어져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그 철사는 양옥집 지붕 꼭대기에 있는 피뢰침과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철사 표면에는 피복이 씌워져 있었지만 방금 참새가 앉았던 부분은 어찌 된 일인지 피복이 벗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전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

- 이리하여 오늘 밤 주인공의 기괴하기 이를 데 없는 신상 이야기도 끝이 났다. 그는 핏발이 서고 약간 광기 어린 희멀건 눈으로 우리의 얼굴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그러나 대답하거나 비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무의미하게 춤추는 촛불에 비추어진 긴장한 여섯 명의 얼굴들이 동상처럼 늘어서 있을 뿐. 

- 문득 출입문 근처 휘장이 잠깐 반짝였다. 보고 있으려니 은빛으로 빛나는 그 반짝임은 차츰 더 커졌다. 마치 보름달이 숱한 구름을 헤치고 드러나듯, 붉은 휘장 사이로 은빛 물체가 둥글게 드러났다. 
나는 처음부터 그것이 웨이트리스가 두 손으로 음료를 받쳐 나르는 커다란 은쟁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든 사물을 몽환적으로 바꿔버리는 이 '붉은 방'의 공기는 흔하디 흔한 은쟁반마저도 마치 살로메 극에서 노예가 내미는, 그 예언자의 목이 놓여 있는 은쟁반을 연상시켰다. 
 
- 드디어 멍청해진 우리 앞에 가 작은 원통형의 물건을 손바닥에 얹어 놓으면서 설명했다.
"이건 말이에요. 소의 고환으로 만든 탄환이라는 겁니다. 안에 붉은 잉크가 가득 들어있어서 명중하면 터지게 되어있지요. 그리고 이 총알이 가짜인 것처럼, 지금까지 했던 제 신상 이야기라는 것도 모조리 엉터리입니다. 그래도 제 연기력은 제법 그럴싸했죠? 그래, 지루하신 여러분들이 찾고 계신다는 그 자극이란 것은, 이것으로 어떻게 만족하셨습니까?" 

- 그가 트릭에 대해서 풀이를 하고 있는 사이에 지금껏 그의 조수 노릇을 하고 있던 웨이트리스가 스위치를 누른 모양이었다. 갑자기 대낮처럼 눈부신 전등 빛이 우리 눈을 찔렀다. 그 희고 환한 광선이 방 안을 떠돌고 있던 몽환적인 공기를 단숨에 걷어버리면서 밝혀진 마술의 트럭만이 추한 시체로 모습을 드러냈다. 주홍색 휘장이며 붉은 카펫, 붉은 테이블보, 안락의자, 심지어는 그토록 유서 깊어 보이던 은대마저도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해 보이는지! 이제는 붉은 방 어느 구석을 뒤져보아도 환영은 더 이상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붉은 방>



- 그것은 과연 대낮의 악몽이었는가, 아니면 진짜 현실로 일어난 일이었는가?

- 늦은 봄, 미지근한 바람이 두려움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달아오른 뺨에 부딪히던 후텁지근한 오후였다.
볼일이 있어 들렀는지 그냥 산책하던 길이었는지 그것조차도 기억에 희미하지만, 나는 어떤 변두리에서 끝없이 이어진, 곧고 넓은 먼지투성이의 큰길을 걷고 있었다. 
세탁을 많이 해서 누르스름하게 변해버린 홑겹 옷처럼 빛바랜 상가들이 말없이 늘어서 있었다. 석 자 남짓한 쇼윈도에 먼지로 켜켜이 염색한 초등학생의 운동복이 매달려 있거나, 바둑판처럼 나눠진 얄팍한 나무 상자 속에 빨강·노랑·하양 ...

 

<백일몽>


 
- 내가 그런 이상한 클럽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이노우에 지로라는 친구 녀석 때문이었다. 살다 보면 가끔 이런 부류들을 만날 때가 있지만, 이 친구도 상당히 특이해서 어두운 면에 대해서는 아주 제대로 정통했다. 예를 들면 그 뭐라고 하는 배우는 누구누구네 집에 가면 볼 수 있고, 포르노를 보여주는 유곽은 어디 어디이고, 도쿄에서 제일 근사한 도박장은 외국인 거리 어디 어디에 있다는 식으로, 내 호기심을 만족시킬 만한 각종 지식이 언제나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하루는 그런 친구가 집으로 찾아와 정색하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야 알 리 없겠지만, 내 친구들 사이에는 '20일'라고 하는 모임이 있다네. 좀 색다른 클럽이지. 쉽게 말하면 비밀결사 같은 건데, 회원들은 세상의 모든 유희와 도락에 지치고 싫증이 난 무리야. 일단 상류층이라 돈 걱정들은 없는 편이고, 뭔가 색다르고 특별한 자극을 구하는 게 클럽의 목적이라네. 대단히 비밀스럽게 운영되고 새 회원도 거의 받지 않지만..., 오늘 어쩌다 결원이 한 명 생겼다네... 클럽은 원래 정원이란 게 있으니까..., 딱 한 사람만 더 입회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래서 친구 좋다는 말도 있고 해서 내 자네에게 물어보러 왔는데 어떤가? 그냥 가입하게나." 

- 역시나 친구의 말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솔깃해진 내가 물었다.
"대체 그 클럽에서는 무슨 일들을 하는가?"
기다렸다는 듯이 친구가 설명했다.
"자네 소설은 읽어보는가? 외국 소설에 흔히 나오는 좀 이상한 클럽, 가령 자살 클럽 같은 거 말이야. 사실 그건 좀 지나친 감이 있지만 하여튼 그런 강렬한 자극을 얻고자 하는 일종의 결사 단체라고 할 수 있네. 물론 여러 가지 행사도 한다네. 우리는 매월 20일에 모이는데 그때마다 깜짝 놀랄 끝내주는 이벤트를 벌인다네. 지금도 일본에서 결투가 벌어진다고 하면 자넨 아마 못 믿겠지만 우리 모임에서는 비밀리에 그런 ... "

 

<가면무도회>

 

 
- "이봐, 로쿠 씨, 뭘 그리 넋을 놓고 있나? 이리 와서 자네도 한잔 상대해 주게나."
살색 속옷 위에 금실로 테두리를 넣은 보라색 비단 바지를 입은 사내가, 마개가 열린 술통 앞을 가로막고 서서는 묘하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투가 은근히 의미심장하였기에 술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극단의 남녀들은 일제히 로쿠 씨를 바라보았다.

- 멀찍이 무대 한구석에 세워진 굵은 원기둥에 기대앉아 동료들의 술자리를 바라보던 난쟁이 로쿠 씨는 그 말을 듣더니 여느 때처럼 순한 인상에 커다란 입을 비틀어 히죽히죽 웃었다.

"난 술 못 마셔."

 

<춤추는 난쟁이>



- 대체 어떻게 살아갈 작정인지 내가 다 궁금할 지경인데도, 저녁 무렵이면 그 열두 살짜리 맏딸이 빈 병을 끌어안고 늙은 아버지의 반주를 사러 나간다. 우리 집 2층에서는 그 서글픈 모습을 매일같이 목격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밤에는 겨우 젖만 뗀 세 살짜리 아들이 거의 병적인 히스테릭한 울음을 기력이 다 떨어진 채 밤새 울어대고, 머리에서 얼굴까지 종기가 난 다섯 살 먹은 그 위의 딸은 아픈 건지 가려운 건지 장단 맞춰 미친 듯이 울음을 터트리곤 한다. 마흔이나 먹은 그들의 어미는 대체 어떤 기분으로 그런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그런데도 다섯 달 된 또 다른 자식을 배 속에서 키우고 있는 심사는 무엇일까? 하기야 뭐 그런 일들이 비단 우리 뒷집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그 옆집도 마찬가지고 그 뒷집의 뒷집도 매한가지다. 그리고 이 넓은 세상에는 그 우체부 가족보다 열 배, 스무 배 더 불행한 가정도 널리고 널렸을 것이다. 


- 그런저런 이야기들을 끝도 없이 하다 보니 어느새 짧은 가을날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푸르던 하늘이 희뿌옇게 흐려지면서 어두워졌고, 누르스름한 등불이 점점이 켜지면서 맨땅에 앉아있던 우리는 조금씩 한기를 느꼈다. 우리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지금까지 등을 지고 있던 그 언덕 위로 어떤 ... 

 

<독풀>



- 또다시 이곳으로 와버렸다는 소름 돋는 매력이 나를 떨리게 만들었다. 짙은 잿빛 어둠이 나를 둘러싼 온 세상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소리도, 냄새도, 촉각마저도 내 몸에서 완전히 증발해 버린 듯 연양갱의 고운 입자처럼 번진 색채만이 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 머리 위에서는 저녁 무렵의 느닷없는 먹구름처럼 층층이 겹친 새카만 나뭇잎들이 소리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그 위에서부터 거대한 흑갈색의 나무줄기가 폭포처럼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내 눈은 관병식의 병렬을 바라보듯 나무줄기에서 줄기로, 아득한 사방으로 옮겨갔지만, 여전히 깊이를 알 수 없는 암흑 속으로 사라져 갔다. 

- 하지만 청각이 없는 어둠의 세계는 이 세상 모든 생물이 사멸한 것처럼 느껴졌다. 또는 불길하게도 숲 전체가 온갖 괴물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썩은 끈 같은 산거미가 새카만 천장에서 낙숫물처럼 내 목과 옷깃으로 떨어지는 것이 상상됐다. 내 시야에는 살아 움직이는 게 하나도 없었지만, 등 뒤에는 해파리처럼 수상쩍은 생물들이 우글우글 서로 몸을 비비적대면서 소리도 없이 합창하듯 웃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 어둠과 그 어둠 속에 깃든 생물이 나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끝도 없는 무한한 숲이 한층 더 바닥 모를 공포로 다가왔다. 마치 금방 태어난 신생아가 넓디넓은 공간 앞에서 경의를 느끼며 손발을 웅크리고 겁에 질려 떨고 있는 것처럼.

- 나는 "엄마, 너무 무서워요"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꿀꺽 삼켜 참고, 일각이라도 빨리 이 암흑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안달했다.
그러나 안달하면 할수록 숲 속의 어둠은 한층 더 검은빛을 더해왔다. 몇 년 동안, 아니 몇십 년 동안인가? 나는 대체 얼마나 오래 이곳을 걷고 있었단 말인가! 이곳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밤도 낮도 없었다. 처음 걸음을 옮긴 것이 어제였는지, 수십 년 전의 일인지조차도 애매하게만 느껴졌다.

- 불현듯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어쩌면 영겁 동안 이렇게 커다란 원을 그리며 이 숲 속을 헤매야 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졌다. 외계의 어떤 것보다 나 자신의 불확실한 보폭이 훨씬 더 두려웠다. 오른발과 왼발 걸음걸이 사이의 불과 1인치 차이 때문에 사막 한가운데서 끝없이 원을 그렸다는 어떤 여행가의 이야기를 예전에 들은 적이 있다. 사막에는 구름이 없으니 해라도 떠 있겠지, 별이라도 보이겠지. 그러나 암흑의 숲 속에는 아무리 걸어도 무슨 표식이 될 만한 것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일찍이 세상에서 경험한 적 없는 공포였다. 그때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일어나던 공포를 어떻게 다 형용할 수 있으리! 

- 나는 태어나서 이 같은 공포를 몇 번인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맛보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알지 못할 두려움은, 거기에 동반되는 어떤 그리움 같은 것과 함께 커져만 갔고 결코 줄어든 적이 없었다. 기이한 사실은 내가 그런 경험을 수차례 거듭했으면서도 그때마다 언제 어디서부터 이 숲에 들어왔고, 언제 또 어떻게 숲을 빠져나갈 수 있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매번 완전히 새로운 공포가 내 영혼을 압박해 왔고, 죽음 같은 거대한 어둠 속을 나라는 콩알만 한 인간이 헐떡헐떡 거친 숨을 몰아쉬고 진땀을 흘리면서 그렇게 언제까지나 걷고 있었다.

- 문득 내 주위로 기이하게도 어슴푸레한 빛들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막에 비친 영사기의 빛처럼 이 세상의 것은 아니었지만 걸어갈수록 어둠이 서서히 물러가고 있었다.
"뭐지? 저기가 숲의 출구였던가?"
대체 어떻게 하다 그런 것까지 다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는 마치 영구히 이곳에 갇혀 있던 사람마냥 이렇게 겁에 질려 두려워만 하고 있단 말인가? 
나는 물속을 달리는 것과 비슷한 저항을 느끼면서 빛이 보이는 방향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숲의 잘린 부분이 나타나고, 그립던 하늘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 하늘색은 저것이 과연 우리의 하늘이 맞는가?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아아! 나는 역시 아직도 이 숲을 빠져나가지 ...

 

<화성의 운하>



- 온 집안 구석구석에 화사한 공기가 가득하고, 열아홉 살의 어린 신부는 마치 하늘에라도 두둥실 떠 있는 그런 기분이었답니다.
기뻤던 일 중에 하나는, 신랑 될 사람이 아무리 기이하고 까다롭다 할지라도 군계일학처럼 훤칠하고 늠름한 그의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게다가 그런 사람일수록 정이 많아서 어쩌면 저 혼자만을 지켜주고 모든 애정도 쏟아주면서 사랑해 줄지도 모른다고,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 처음에는 아주 먼일처럼 손가락을 꼽으며 헤아리던 혼례 날짜도 꿈꾸는 동안에 가까워졌고, 날짜가 다가올수록 달콤한 공상은 훨씬 더 현실적인 두려움으로 바뀌더군요. 드디어 그날이 되자 저희 집 문 앞에 혼례 행렬이 늘어섰습니다. 자랑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마을로서는 보기 드물게 10여 개가 넘는 거창하고 화려한 혼례 깃발이며 장식에 둘러싸여 차에 오를 때의 마음이란... 아마 누구나 맛보는 것이겠지만 참으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답니다. 마치 낭떠러지에 서 있는 양처럼 말입니다. 정신적인 두려움뿐 아니라 마치 몸 안에서 쿡쿡 쑤시는 것도 같고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 반성해 보았지만 한 번 뿌리를 뻗은 의혹은 좀처럼 풀 방법이 없었고, 또 그렇다고 제 존재조차 잊어버리고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그 사람을 볼 때면 역시 뭔가가 있다고, 틀림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가도노는 굉장히 우울한 기질을 갖고 있어서 자연히 내성적이고 방에만 틀어박혀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았답니다. 게다가 서재에서는 정신이 산란해진다면서 뒤뜰에 세워진 흙으로 지은 어두침침한 창고 2층으로 올라갔고, 밤에도 옛날처럼 호롱불을 밝히고 혼자서 독서를 하는 것은 그의 아주 어릴 적부터의 취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다행히 그곳에는 선조 때부터 전해져 오는 오래된 서적들이 잔뜩 쌓여 있었지요. 
그러던 것을 저와 결혼하면서 반년 정도는 모든 것을 잊은 듯이 그 창고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지 다시금 태연하게 그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그게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 흙으로 지은 창고 2층에서 독서하는 취미가 조금 색다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손가락질할 일도, 수상쩍은 일도 아니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최대한 배려를 한답시고 하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물건들을 조사했는데도 이상한 것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으니 꼬투리를 잡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 빈 껍질 같은 애정이나 허망한 눈길, 그리고 때로는 저의 존재조차도 망각한 듯이 사색에 젖은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 또다시 마음이 흔들리면서 그 창고라도 의심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 게다가 더 묘한 일은 그 사람이 창고에 가는 시간이 항상 깊은 밤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옆에서 자고 있으면 이따금 진짜로 자는지 살펴보는 것처럼 확인하고는 살짝 이부자리를 빠져나가는데, 혹시 화장실에라도 간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해 보지만 그대로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툇마루로 나가보면 그 창고 2층 창문에 희미하게 불빛이 보이곤 했습니다. 참으로 처량하고 복잡 미묘한 감정에 치받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흙으로 지어진 창고는 결혼 당시 한차례 안을 구경한 적도 있고 또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두 번은 들어간 적이 있어서, 설령 가도노가 그런 곳에 틀어박혀 ... 

- 혹시 어떤 살아있는 영혼이 가도노에게 들어간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태생이 우울하고 어딘지 모르게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어 뱀을 연상시키는 가도에게는 (그 때문에 또 저는 얼마나 그 사람에게 빠져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영혼처럼 이상한 형태의 것이 깃들기 쉬울지도 모른다 싶다가, 결국에는 가도노까지 그런 마성의 존재로 보여서 너무도 기이한 기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 '차라리 친정에 가서 자초지종을 모두 털어놓을까? 아니면 시부모님께 이 모든 사실을 말씀드려야 할까?'
저는 너무도 두렵고 불길해서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했지만, 마치 뜬구름을 잡는 듯한 이 허황한 괴담 같은 이야기를 함부로 입 밖에 냈다가는 도리어 제정신이 아니라고 의심받거나 창피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어린 생각에 하루 이틀은 그 결심을 미루고 있었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저도 어지간히 고집이 셌던가 봅니다. 

- 그러던 어느 날 밤, 저는 문득 묘한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가도가 2층 창고에서 여자를 만난 뒤 내려올 때면 언제나 가볍게 쿵! 하며 어떤 뚜껑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다음에는 찰칵찰칵 자물쇠 잠그는 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희미하긴 했지만 잘 생각해 보면 항상 들려왔던 ... 

-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흙냄새 나는 창고 안으로 숨어 들어갔을 때의 기분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대체 어떻게 그럴 생각을 다 했는지 제가 더 신기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열쇠를 훔쳐내기 전이었는지 창고 2층으로 올라갈 때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천 갈래 만 갈래로 흩어지는 마음속에서도 저는 문득 웃기는 생각을 하고 있었답니다. 어떻게 되든 크게 상관은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 나온 김에 같이 털어놓겠습니다. 그것은 그 전날부터 혼자서 생각한 것인데, 혹시 가도가 혼자서 음색을 바꿔 대화를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습니다. 너무도 동화 같은 상상이긴 했지만, 어쩌면 소설을 쓴다거나 연극을 연습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는 그 창고 2층에서 홀로 남몰래 대사를 주고받는 연습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애초에 장궤 속에는 여자 따위는 있지도 않고 대신 연극 의상 같은 것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싶은 근거도 없는 상상이었습니다. 

- 장궤 한쪽에 다른 것과는 달리 석 자(약 90센티미터) 정도나 되는 커다란 장방형의 하얀 나무 상자가 귀중품인 양 놓여 있더군요. 그 표면에는 똑같은 글씨로 '배령 拜領'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궁금해서 살짝 꺼내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했습니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영감이라는 것은 이럴 때 사용하는 말이겠지요. 그 한순간에 지난 며칠 동안의 의혹이 완전히 풀어졌던 것입니다.

- 그토록 저를 놀라게 한 것이 고작 인형 하나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분명 '뭐야' 하면서 웃고 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아직 진짜 인형이라는 것을, 그 옛날 명인 인형사가 정혼을 담아 만들어낸 예술품을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다가 박물관 한 구석에서 그런 고풍스런 인형을 본다면 당신은 그 생생함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전율을 맛볼 것입니다. 그게 소녀 인형이나 유아 인형이라면 당신은 그것을 들고 이 세상 그 어떤 것에서도 맛볼 수 없는 꿈같은 매력에 푹 빠져들 것입니다.

 

- 당신은 선물용 인형이라고 불리는 것의 기이한 매력을 아시는지요? 혹은 그 옛날 남색 男色이 성행하던 시절 애호가들이 낯익은 어린 남자의 얼굴을 본뜬 인형을 만들어 낮이고 밤이고 애무하였다는 그런 기이한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아닙니다. 그렇게 먼 옛날 일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분라쿠 인형극에 얽힌 기이한 전설인 근대의 명인 야스모토가메하치의 살아있는 인형 같은 것을 아신다면, 제가 그때 단 하나의 인형을 보고도 그토록 놀란 기분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 제가 장궤 안에서 발견한 인형은 나중에 시아버님께 여쭤봐서 알게 되었습니다만, 영주님으로부터 하사 받은 안세이 시절의 인형 명인인 다치키라고 하는 사람의 작품이었습니다. 흔히 교토 인형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실은 풍속 인형 같은 것인데, 석자가 넘어 열 살 정도쯤 되는 어린 소녀만 한 크기로 손발도 완전히 붙어있고, 앞머리를 커다랗게 부풀린 올림머리에 전통 방식으로 염색한 커다란 무늬의 옷을 입고 있었답니다. 역시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런 특징이 다치키라고 하는 인형 명인의 작품으로, 그토록 예전에 만들어졌음에도 그 소녀 

- 분라쿠 인형극 : 분라쿠좌(文楽座)의 약어. 다이쇼 시대 이후 분라쿠좌가 유일한 전문극장이 된 데서 유래한 말로, 일본 고유의 인형극을 통칭한다.

- 야스모토 가메하치 :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약한 인형 제작자.

- 안세이 : 에도 말기에 해당하는 1854~1860년의 연호.

- 나중에 두세 명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서 저 혼자 상상하고 있는 일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몽상적인 기이한 성격을 갖고 있던 가도노는 인간인 여자를 사랑하기 전에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장궤 속의 인형을 발견했고, 그것이 가진 강력한 매력에 혼을 빼앗긴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창고에서 책 따위는 읽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 듣자 하니, 인간이 인형이나 불상 같은 것을 사랑한 일은 예로부터 결코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불행하게도 제 남편이 그런 남자였고, 더욱더 안타까운 일은 남편의 집에 우연히 그 희대의 명작 인형이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 사람이 아닌 사랑, 그것은 이 세상 밖의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으로서는 맛볼 수 없는 악몽 같은 혹은 동화 같은 기이한 환락에 영혼을 적시며 안타까움에 몸부림치는 것이지요. 가도노가 저를 아내로 맞이한 것도, 저를 사랑하려고 노력한 것도, 모두 그 애절한 고민의 흔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날의 속삭임, '교쿄에게 미안하다'며 운운한 말의 의미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남편이 인형 때문에 여자 목소리를 사용한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아, 저는 운명 아래 태어난 여자란 말입니까?

 

<사람이 아닌 슬픔>



- 어느 날 그의 공부방을 찾아갔더니 책상 위에 오래된 오동나무 상자가 하나 나와 있었는데, 아마도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인 듯한 오래된 금속 거울을 그가 들고 햇볕에 비추면서 어두운 벽에 대고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때, 재미있지? 저거 봐, 이렇게 평평한 거울인데 저곳에 비치면 묘한 글자가 생겨나."
그의 말에 벽을 바라보니 놀랍게도 하얗고 둥근 형태 안에 다소 모양이 뭉개지기는 했지만 목숨 수 壽자가 백금처럼 강한 빛으로 나타났습니다.

- "신기하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어린 제게는 어쩐지 마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신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그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원리는 몰라. 대신 비밀을 가르쳐줄까? 알고 나면 별 거 아냐. 여기를 봐, 이 거울 뒤를 여기 수라고 하는 글자가 두드러지지. 이게 표면으로 비쳐 보이는 걸 거야."

- 과연 그의 말대로 청동처럼 누런 거울 뒤에 글자가 번듯하게 양각으로 새겨져 있더군요. 그래도 그것이 어떻게 표면을 뚫고 나와서 그런 그림자를 만드는 것일까요? 거울 표면은 어느 각도에서 비춰보아도 매끈한 평면이고 얼굴이 울퉁불퉁하게 비쳐지는 것도 아닌데 빛을 반사하면 기이한 그림자가 만들어졌습니다. 마치 마법 같다고 생각되었지요.

- 어안이 벙벙해진 제 얼굴을 보더니 그는 너무도 즐겁게 웃으면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영국의 어떤 물리학자가 고안한 일종의 마술용품으로 비밀은 역시 오목거울이었습니다. 자세한 이론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진짜 지폐는 상자 바닥에 놓고 그 위에다 오목거울을 비스듬히 장치한 뒤 전등을 상자 내부로 끌어들여 빛이 지폐에 닿도록 하면, 오목거울의 초점에서 얼마만큼의 거리에 있는 물체는 특정 각도의 특정한 곳에 상을 맺는다고 하는 이론에 따라, 상자 구멍에 지폐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거울로는 절대로 실체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오목거울을 사용하면 기이하게도 그런 허상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었지요. 정말이지 완벽하게 그곳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이더군요. 

- 그런 식으로 렌즈나 거울에 대한 그의 특별한 호기심은 나날이 깊어졌습니다. 결국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상급 학교로 진학할 생각도 하지 않고, 완전히 성인이 된 기분으로 정원 한구석에 작은 실험실까지 새로 짓고는 그 안에서 혼자 그 기이한 취미 생활을 시작하더군요. 그의 부모들이 너무 오냐오냐하고 키운 탓도 있고 자식의 말이라면 대개는 억지도 통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거울 지옥>

 

- ... 초라함이 도리어 마음 편하고 서로 걸맞다고 생각한 것이겠지만. 둘째로는 집이 같은 방향이어서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면 늘 서로 함께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오후유만 잘 따라준다면 자신이 젊은 처녀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남들 눈에 그리 꼴사납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 "그럼 내일 또 봐요."
교차로에서 서로 헤어질 때면 오후유는 정해진 듯이 살짝 목례를 하면서 다소 어리광 섞인 말투로 이렇게 인사를 했다.

"그래, 내일 봐."
그러면 가쿠지로도 잠시 어린애가 되어 '바이바이' 하듯이 도시락을 딸깍딸깍 울리며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결코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도리어 초라하게까지 보이는 오후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달콤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 오후유의 형편이 자기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은 퇴근할 때 푸른 목면 양복 대신 갈아입는 옷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이 되었고, 또는 함께 노점 앞을 지날 때 그녀가 눈을 반짝이면서 사뭇 갖고 싶은 듯이 들여다보는 장신구의 질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 묘한 일은, 숄 얘기를 꺼낸 지 어느덧 보름 정도가 지났지만 오후유가 월급날 이후로 두 번 다시 그 얘기는 꺼내지 않으면서, 완전히 포기한 것처럼 언제나 그 유행 지난 숄을 어깨에 걸치고 하지만 내내 조신한 얼굴을 잊지 않고 목마관으로 통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 가련한 모습을 보니, 가쿠지로도 자신의 가난에 대해서는 일찍이 가져본 적도 없는 어떤 분노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7엔 얼마 하는 돈이,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도 아주 만만히 볼 수 없는 금액인 것을 생각하면 한층 더 부글부글 속이 끓어올랐다.

"어지간히 불어제끼십니다?"

옆자리 젊은 고수가 느물느물 웃으면서 그의 얼굴을 봤을 정도로 가쿠지로는 아무렇게나 나팔을 불어댔다.

'될 대로 되라지'

그는 그런 심정이었다. 

- "나팔이 미쳤나 보군."
다른 세 명의 악사들도 당황해서 서로 눈짓을 하면서 이 늙은 나팔수의 폭주를 의아해할 정도였다. 비단 한 장의 숄이 문제가 아니었다. 요즘의 모든 분노가 히스테릭한 아내며 제멋대로인 아이들, 가난, 노후의 불안,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청춘, 그런 것들이 금비라의 배로 구절을 바꾸면서 시끄럽게 나팔을 불어대게 했다. 

 

- 그러니까 그 젊은이의 목적은 형사의 눈을 돌리기 위해서 태연한 척하면서 곁에 있는 오후유에게 말을 건네며 희롱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가쿠지로에게는 그게 더 화가 나고, 슬프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오후까지도 제 잘난 줄 알고 들떠서 은근히 기뻐하는 것처럼 보여 한층 더 부글부글 분노가 끓었다. 
'아아, 대체 뭐가 좋다고 저렇게 부끄럼도 모르는 거지 같은 계집애와 사이좋게 지냈단 말인가. 바보, 멍청이, 저런 못생긴 계집애를 위해 7엔이 넘는 숄까지 사줄 생각을 다 했다니. 젠장, 이놈도 저놈도 모두 다 썩어서 뒈져버렸으면 좋겠다!'

- "붉은 석양에 물들어 친구는 들녘 돌 아래..."
그의 나팔 소리는 점점 더 기세 좋게, 한층 더 쾌활하게 울려 퍼졌다.

- 그런데 한참 지나서 슬쩍 보았더니 이미 젊은이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고, 오후유는 다른 손님 곁에 서서 무심한 얼굴로 자기 할 일인 티켓을 끊느라 분주했다. 그리고 그 엉덩이 호주머니에는 여전히 실처럼 하얀 봉투 끝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녀는 봉투 같은 건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 모습을 보자 가쿠지로는 다시금 미련이 생기면서 역시 천진하게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 잘생긴 젊은이와 경쟁해서 이길 자신은 털끝 만큼도 ...

 

<목마는 돌아간다>



-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를 그런 '기적'이라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신문은 스나가 중위의 혁혁한 무훈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의학계의 기적 같은 일을 대서특필했다. 

- 꿈처럼 반년이 지나가버렸다. 상관이며 동료들과 더불어 스나가의 산 몸뚱이가 집으로 운반되자마자 거의 동시에, 잃어버린 사지에 대한 보상으로 공5급 금치훈장이 수여되었다. 도키코가 불구자의 병구완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세상은 개선을 축하하느라 떠들썩했다. 그녀에게도 친척이며 지인, 동네 사람들로부터 명예, 명예 하는 소리가 비처럼 쏟아졌다.

- 이윽고 얼마 안 되는 연금으로는 살림이 어려웠던 그녀는 전쟁터에서 남편의 상관이던 와시오 소장의 호의를 입어 이 저택 별채를 세도 없이 빌려 쓰게 되었다. 시골로 이사 간 탓도 있겠지만, 그 무렵부터 그녀의 생활은 완전히 쓸쓸하게 변해버렸다. 개선 당시의 떠들썩한 열기도 식어버리고 세상은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제 남편의 병문안을 오는 이조차 없어졌다. 세월이 지나면서 승전의 흥분도 가라앉고 전쟁 공로자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희미해졌다. 스나가 중위에 대한 일은 아무도 입에 담지 않았다. 
남편의 친척들도 불구자는 꺼려졌는지 아니면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일이 귀찮아졌는지 거의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도키코의 부모님도 이미 돌아가셨고 오빠나 여동생들은 모두 ... 

- 도키코는 남편의 의식이 이젠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해서 다시 그의 가슴에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용서해줘요'라고 쓰면서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살덩이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눈으로 보지 못한다고는 하나 고개를 흔들거나 미소를 짓는다거나 어떤 식으로든지 대답을 못 할 것도 없건만, 더는 몸을 움직이지도 않았고 표정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숨 쉬는 모양으로 보아 잠든 것도 아니었다. 가슴에 쓴 글자를 이해할 힘조차 잃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분노 때문에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는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제 남편은 포동포동하고 따뜻한 물체일 뿐이었다. 

 

- 도키코는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살덩이를 바라보면서 난생처음 느껴보는 두려움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여기 누워 있는 것은 하나의 생명체일 뿐이었다. 폐나 위는 있지만 사물을 볼 수는 없다. 소리도 못 듣는다. 한마디 말도 할 수 없고, 뭔가를 잡을 손도 없고, 일어설 다리도 없다. 그에게 이 세계는 영원한 정지이자, 부단한 침묵이며, 끝없는 어둠일 뿐이다. 일찍이 누가 그런 무서운 세상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세상에 사는 사람의 마음을 과연 어디에 비할 수 있겠는가. 그는 아마도 살려달라고 목청껏 외치고 싶을 것이다. 어떤 희미한 빛이라도 상관없다. 사물의 모습을 보고 싶겠지. 아무리 희미한 소리라도 상관없으니 ... 

<애벌레>

 


- 만약 이 이야기가 내 꿈이거나 일시적인 광기로 인한 환상이 아니라면, 그 누름꽃과 여행하던 남자야말로 틀림없이 미치광이일 것이다. 허나 가끔은 꿈을 통해 어쩐지 이 세상과는 다소 어긋나는 별세계를 살짝 들여다볼 때가 있는 것처럼, 미치광이들이 우리가 전혀 감지할 수 없는 것을 보거나 듣는 것처럼, 이것은 내가 용기를 내서 들여다본 기이한 렌즈 장치를 통해 이 세상 밖 다른 세계의 한구석을 한순간 얼핏 훔쳐본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언제였던지 모르겠지만 따뜻하고 엷은 구름이 깔린 그런 날이었다. 일부러 우오즈까지 신기루를 보러 갔다가 돌아오던 길이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친구들은, "넌 우오즈 같은 덴 가지도 않았잖아" 하면서 반박할 때도 있다. 물론 그런 소릴 듣는다고 해도 내가 언제 그곳에 갔었는지 확실히 증명할 방법은 없다. 그러니 역시 그건 꿈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일찍이 그토록 농후한 색채를 띤 꿈을 꾼 적이 없다. 꿈속에 나오는 풍경은 늘 흑백 영화처럼 전혀 색채감이 없었는데, 그때 기차 안에서 본 경치만큼은, 특히 그 누름꽃 중심부에서 선명하게 두드러지던 보라색과 연지색은 마치 뱀의 눈알처럼 지금도 생생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천연색 영화 같은 꿈도 있는 것일까? 

- 그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기루라는 것을 보았다. 조개의 숨결 속에 아름다운 용궁성이 떠 있는 그런 고풍스러운 그림을 상상하고 있던 나는, 나무 같은 신기루를 보고는 기름땀이 배어 나올 것 같은 공포에 가까운 경이감에 사로잡혔다. 

- 건너편 구석의 남자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그자가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도리어 그에게 다가간 것이었다. 
나는 그와 마주 보는 의자에 살짝 걸터앉아서, 가까이서 보니 더욱 이상한 주름투성이의 하얀 얼굴을 마치 요괴라도 보는 심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숨을 죽이면서 빤히 노려봤다.
그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부터 계속 눈으로 나를 맞이하듯이 바라보았는데 그렇게 내가 그의 얼굴을 들어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턱으로 한쪽에 놓인 그 평평한 짐을 가리키면서 아무런 전제도 없이 불쑥, 마치 당연한 인사라도 되는 것처럼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이것 말이오."
그의 말투가 너무도 당연하게 들려서 내가 도리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보고 싶은 거요?"
내가 아무 대답이 없으니까 그는 다시 한번 더 같은 말을 했다.

 

- "보여주시겠습니까?"
나는 상대의 분위기에 휩쓸려 마침내 이상한 소리를 입 밖으로 꺼냈다. 결코 그 짐을 보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지만.
"가까이 보여드리리다. 나는 좀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오. 자네가 분명 이것을 보러 올 거라고."

- 나는 한 번 슬쩍 그 그림을 보고는 무심결에 눈을 감아버렸다.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몇 초 동안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앞에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묘한 것이 놓여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 '기묘'한 점을 분명하게 설명할 재주도 없지만,

- 액자에는 가부키 연극에 나오는 궁궐의 배경처럼 푸른 다다미방과 격자무늬 천장이 극도의 원근법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남색이 주가 된 디스템퍼로 강렬하게 칠해져 있었다. 왼쪽 앞에는 검은 먹으로 그린 어설픈 서원풍의 창문과 같은 색으로 된 책상이 각도를 무시한 채 멋대로 놓여 있었다. 그러한 배경은 에마의 독특한 화풍을 닮았다고 하면 아마도 가장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 디스템퍼 : 풀가루를 섞은 진흙같이 생긴 불투명하고 탁한 물감.

 

- 에마 : 기원이나 보시를 하기 위해 사찰에 봉납하는 나무판 그림.


- 그 배경 속에 키가 한 자 정도 되는 두 인물이 부각되어 있었다. 부각되었다고 한 이유는, 그 인물들만이 누름꽃 기법으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풍스런 검은 벨벳 양복을 입은 백발 노인이 심심한 듯 앉아있노라면 (기이하게도 노인의 용모는 머리색이 하얀 것만 제외하면 액자 주인과 너무도 흡사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입고 있는 양복까지도 똑같았다) 주홍빛 홀치기염색을 한 긴 소매 기모노에 흑색 공단 띠가 잘 어울리는 열일곱 열여덟 살 정도의, 금방이라도 물이 떨어질 것 같은 머리카락을 둥글게 올려 묶은 미소녀가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교태를 담아 그 노인의 양복 무릎에 기대고 있는, 이른바 연극의 정사 장면에 해당하는 화면이었다. 

- 양복 입은 노인과 요염한 소녀의 대조가 대단히 이상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내가 기묘하다고 느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어설프게 처리한 배경과는 달리 누름꽃의 정교한 세공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얼굴 부분은 새하얀 비단으로 요철을 만들어 세세한 주름까지 하나하나 모두 표현해 놓았고, 처녀의 머리카락도 진짜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심은 뒤 사람 머리 만지듯 올려서 묶어 놓았으며, 노인의 머리카락도 진짜 백발을 정성껏 옮겨 심은 것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양복에는 반듯한 재봉 땀이 있었으며 적당한 자리에 밤톨만 한 단추까지 붙어있었다.   

- 사물이 그런 식으로 드러나는 것을 나는 예전이나 나중에도 본 적이 없기에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과연 어떻게 이해시킬지 꽤 난감한 일이다. 그것에 가까운 느낌을 떠올려본다면 마치 배 위에서 바다로 잠수한 해녀의 어떤 순간적인 모습과 닮았다고 형용해야 할까? 해녀의 나신이 물속에 있을 때는 푸른 수면의 복잡한 움직임 때문에 그 육체가 마치 해초처럼 부자연스럽게 흔들흔들 일렁이고 윤곽도 희미해져 새하얀 괴물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쓰윽 떠오름에 따라 수면의 푸르름도 점점 엷어지다가 형태가 확실해지면서 불쑥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에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는 것처럼 말이다. 수중의 새하얀 괴물이 순식간에 인간임이 드러나는 그런 느낌으로 누름꽃의 처녀는 쌍안경 속에서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실물 크기의 살아 숨 쉬는 처녀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 19세기의 고풍스런 프리즘 쌍안경 너머에는 생각도 못 할 놀라운 별세계가 있어, 그곳에서 머리를 올려 묶은 요염한 처녀와 고풍스런 양복을 입은 백발노인이 기묘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봐서는 안 될 것을 지금 이렇게 마법을 사용하여 훔쳐보는 듯한 야릇하기 그지없는 기분으로, 거의 홀린 것처럼 나는 그 불가사의한 세계를 들여다보고 말았다.

- 처녀가 실제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전신의 느낌이 육안으로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생기가 가득하고, 파르스름하니 새하얀 얼굴은 점차 복숭앗빛으로 상기되면서 가슴이 두근대고(실제로 나는 심장의 고동조차 들었다), 주홍빛 의상 속 육체로부터는 젊은 처녀의 생기가 물씬물씬 증발하고 있는 듯했다. 

 

- 나는 일단 처녀의 전신을 쌍안경 끝으로 훑듯이 살펴본 다음, 그녀가 몸을 기대고 있는 행복한 남자 쪽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노인도 쌍안경의 세계에서 살아 숨 쉬듯 생생한 것은 똑같았다. 얼핏 봐도 마흔 살이나 차이 나는 젊은 처녀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너무도 행복한 듯이 보였지만, 묘한 일은 렌즈에 가득 들어차게 바라본 그의 주름 가득한 얼굴에서, 그 수백 개의 주름 밑으로 수상쩍은 고민이 드러났다. 노인의 얼굴이 렌즈 때문에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가까워져서 대단히 크게 보인 탓도 있겠지만, 보면 볼수록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비통함과 공포가 뒤섞인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나는 그 모습에 신음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더는 쌍안경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떼고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쓸쓸한 밤 기차 안이었고, 누름꽃 액자도, 그것을 보여준 노인의 모습도 다 그대로였다. 창밖도 여전히 새카맣고, 단조로운 차바퀴의 울림 ...

<누름꽃과 여행하는 남자>

 


- "그리고는 마침내 자살해 버렸답니다. 왜냐하면 원숭이가 점점 흥이 나는 걸 보고 여행자가 나뭇가지로 자기의 목을 때렸기 때문이지요. 원숭이는 그대로 흉내를 내려고 칼로 자기 목을 때렸으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피를 흘리고, 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여전히 자기 목을 칼로 내리치다가 결국 절명해 버렸지요. 여행자는 칼을 되찾은 것은 물론이고 커다란 원숭이 한 마리까지 선물로 가져갈 수 있었다는 얘기랍니다. 하하하하."
청년은 얘기가 끝나자 웃었는데, 묘하게도 음울한 웃음소리였다.

- "하하하하. 에이, 설마?"
내가 웃자 그는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원숭이란 녀석은 그토록 슬프고도 끔찍한 숙명을 갖고 있는 거지요. 한번 실험해 볼까요?"
청년은 근처에 떨어져 있는 나뭇조각 하나를 원숭이에게 던져준 뒤, 자기는 짚고 있던 지팡이로 턱을 자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자 과연 어떠했겠는가. 이 청년은 원숭이에 대해서는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는지, 원숭이는 나뭇조각을 주워 들더니 갑자기 자기 목을 쓱쓱 베는 것이 아닌가! 
"저것 봐요. 만약 나뭇조각이 아니고 진짜 칼이었다면 저 원숭이는 벌써 황천으로 갔을 테지요."

 

- 넓은 원내는 텅텅 비어서 사람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무성한 나무 그늘에는 이미 음습한 어둠이 테두리를 치고 있었고, 나는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내 눈앞에 서 있는 저 창백한 청년이 보통 사람이 아닌 마법사인 것처럼 느껴졌다.
"흉내 낸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겠죠? 인간도 마찬가집니다. 인간 또한 흉내를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슬프고도 무서운 숙명을 갖고 있으니까요. 타르드라고 하는 사회학자는 인간 생활을 결국 '모방'이라는 두 글자로 정리하려고 했을 정도가 아닙니까?" 

 

- 이제는 하나하나 전부 다 기억할 수 없어도 청년은 그로부터 '모방'의 공포에 대해 여러 가지로 설을 풀었는데, 그는 또 거울에 대해서도 이상한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거울을 오래 들여다보면 무서워지지 않습니까? 전 그렇게 무서운 건 또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체 왜 무서울까요? 거울 너머에 또 한 사람의 자신이 있어서 원숭이처럼 인간의 흉내를 내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런 말을 한 것도 기억한다.

- 거무스름한 입술이 어쩐지 기묘하고 두렵게 보였다.
"달은 거울과 연관이 있지요. '수면에 비친 달그림자' 같은 말이나 '달이 거울이면 좋을 텐데'라는 말이 생긴 것은, 달과 거울이 어딘가 공통점이 있는 증거지요. 보십시오, 이 경치를."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그을린 은처럼 퇴색한 시노바즈 연못이 대낮보다 배는 더 넓어 보이게 펼쳐져 있었다.

 

- "실은 낮의 경치가 진짜이고, 지금 달빛에 비치는 이것은 잔상처럼 남은 거울 속 그림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창백한 청년은 그 자신도 역시 거울 속 그림자처럼 희미하고 뿌연 모습으로 그런 말을 했다.
"당신은 소설에 쓸 얘깃거리를 찾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제가 실제로 경험한 것 중에 당신에게 적당한 얘깃거리가 하나 있는데, 말해도 될까요? 들어주시렵니까?"
사실 나는 소설의 소재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별개로 치더라도 이 묘한 청년의 경험담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지금까지 말하는 폼으로 미루어 결코 흔하거나 지루한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았다.

 

- "이것입니다. 이 기이한 달빛의 마력이지요. 월광은 차가운 불처럼, 음기의 격정을 유발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불꽃처럼 타오르게 하지요. 말하자면 그런 기이한 격정이 <월광 소나타>를 낳은 것이지요. 시인이라면 반드시 달의 무상을 배우게 됩니다. '예술적 광기'라는 말이 허락된다면 달은 사람을 '예술적 광기'로 이끄는 것이 아닐까요?"
청년의 화술이 조금씩 나를 질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결국 월광이 그 사람들을 목매달게 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거의 월광의 죄이지요. 그러나 달빛이 금방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전신에 달빛을 받고 있는 우리도 곧 목을 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울에 비친 듯이 보이는 청년의 창백한 얼굴이 기분 나쁘게 웃었다. 나는 괴담을 듣는 어린아이처럼 두려움을 느꼈다.

<메라 박사의 이상한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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