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해로
출판 : 북오션
출간 : 24.09.04
쌓아둔 책들은 대부분 계절이 바뀌어도 그대로 쌓여있다.
가장 표층의 책들만이 들고 날 뿐이다. 그 책들은 내 소유가 아닌 경우가 많으니까.
'가짜 욕망'을 걸러내는 연습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찾을 물건이 있어 서랍을 열어보니 나는 전혀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미래의' 내가 해주길 바라는 취미용품들은 제대로 분류도 되지 않은 채 잠들어 있었고. 어쩌다 한 둘 꺼내서 잘 쓰게 된 아이템이 있으면 그걸 잃을까 여유분을 비축했다.
정체되는 흐름.
생활환경은 곧 그 주인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박해로 월드에 빠져든 나는 '이런 상황을 타개할 힘은 이계의 거대한 어떤 것에서 나온다'고 믿고 싶었던 걸까. 혹은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빠져들 무언가를 찾고 있었던 걸까.
그도 아니면, 겉으로 드러난 현상들의 진짜 이유는 '쉽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깊숙한 곳'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재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박해로의 오컬트 포크 호러>는 그전까지 발표된 모든 작품들에서 작은 조각들을 떼어와 장식한 노리개다. 그 자체만 보아도 아름답지만, 하나하나 뜯어볼수록 깊은 맛이 있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물려받은 이의 품에 전해질 때까지의 모든 순간을 반짝이게 만든다.
<며느리는 약했지만 여인은 강했다>는 단독으로도 흥미로운 이야기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최수현 작가에게로 전해져 오는 과정은, 이새조의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는 흐름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체념 섞인 탄식을 불러오는 것이다. 그랬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박해로의 이야기 중 당장은 뜬금없어 보이는 부분이 있다면 조금만 기다려보자. 아마 다음, 그도 아니면 다다음 작품에서 작가는 '미진한 것처럼 보였던' 그 조각을 섬세하게 가공해 다시 들고 올 것이다. 그것이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인지, 글이 써지면서 다듬어진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직 모를 뿐' 이야기들은 이어져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사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다.
아. 섭주.
끊어내려고 몸부림치지만 결국은 다시 끌려들고 마는 이들을 보며,
나는 몸서리치면서도 흥분하고 만다.
태어났다는 것은 이어져온 뿌리가 있다는 것.
이어지고 이어진 굴레에 짓눌리고 얽매이고 반항하는 그들에게서 현재의 나와 나들을 보게 되어서.
아직 읽을 작품들이 남아있어서 기쁘고, 다 읽어버리기 전에 다음 작품이 발표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즐겁다.
- 지금은 폐교되고 없지만, 1986년 섭주 수면에 위치한 수낭 국민학교는 전교생이 50명을 약간 넘은 전형적인 시골 학교였다. 이상식 선생은 당시 수낭 국민학교에 갓 발령받은 총각 선생이었다. 이 선생은 음주운전을 항상 조심하라던 주변 사람의 경고를 무시했다가 단 1년의 근무 기간도 채우지 못한 채 비명횡사하고 팔았는데, 시신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 죽음에서 단순한 음주 사고로는 설명 못 할 어떤 초현실성을 보았다. 쉬쉬했던 과거사와 연관된 그 초현실성이야말로 수낭 국민학교가 일찍 폐교를 맞이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 당시 26세로 부모님과 살던 이상식 선생의 자택은 섭주군 소재지에 있었다. 자동차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선생은 군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수면까지 스쿠터로 출퇴근했다. <별궁다방> 스티커가 고스란히 붙은 이 스쿠터는 다방 아가씨들이 커피 배달용도로 사용했던 이동 수단을 폐업에 들어간 업주가 헐값에 매각한 것인데, 매수자가 바로 이상식 선생이었다. 선생은 가공할만한 절약 정신을 내세웠던 구두쇠로, 독립된 내 집 마련을 위해 스쿠터 아닌 자전거로라도 출퇴근할 정신무장이 확립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절약 정신만큼이나 부모를 향한 효도도 가공할만해 폭우나 폭설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기어이 이 스쿠터를 타고 퇴근했다. 말하자면 그는 외박을 전혀 하지 않는 남자였다.
- 성실하고 가정적인 이상식에게도 두 가지 단점이 있었다. 첫째는 술을 지독하게 좋아한다는 점, 둘째는 술을 마시고도 운전한다는 점이었다. 밭에서 일하던 농부, 자전거 페달 밟다가 느닷없이 추월당한 집배원, 수낭면 장거리 운전 택시 기사들은 술이 얼큰해 홍수철의 <철없던 사랑>을 부르며 S자를 그리는 스쿠터 운전자를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 "소변기가 따로 없는 대신 왼쪽 오른쪽으로 똑같은 푸세식 변소가 다섯 개씩 모두 열 개 있어. 근데 허락받고 사용해야 했지. 저 폐가 주인이 학교 화장실을 샀거든."
"화장실을 샀다고요? 이상한 사람도 다 있네."
"확실히 이상했지. 이곳 사람들이 저 폐가를 '아메리카 김 별장'이라고 불렀다지, 아마? 7, 8년 전쯤 수낭 국민학교 옆에 저 집을 지은 사람이 아메리카 김이었어. 성이 김씨라는 것밖에 모르겠는데, 미국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재미교포였어. 조상들 고향인 수낭에 낙향해 동네를 둘러보다가, 저 화장실을 발견하더니 자기한테 팔라고 하더래. 대신 학교에는 더 좋은 화장실을 지어주겠다면서. 학교 측은 파는 건물이 아니라고 그랬는데 이 양반이 얼마나 집요한지 서울교육청까지 빽을 동원해 저 화장실을 기어이 손아귀에 넣은 거야. 그 대신 학교에는 약속을 지켰어. 지금 교무실 옆에 있는 서양식 화장실이 바로 그 양반이 지어준 거야."
"아니, 무슨 미친 사람도 아니고 저런 푸세식 똥통을 그렇게나 원했대요?"
"똥돼지를 길렀거든."
- 이빨로 쥐포를 북 뜯었다. 민가의 불빛이 조금씩 멀어졌다. 원초적인 대자연의 어둠이 이상식을 삼켰다. 아직 정류장은 나타날 기미를 안 보였다. 술꾼들은 보통 자신이 취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의 이상식이 그랬다. 절반쯤 병을 비울 무렵 이상식의 정신은 오락가락했다. 난 아직도 멀쩡해하고 이상식이 혼잣말했다.
- 주위는 금세 컴컴해져 피아를 식별할 수 없었다. 오늘 하루 마신 술이 온 세상을 빙글빙글 돌렸다. 이상식은 길을 잃을까봐 정신을 집중해 앞으로 또 앞으로만 걸었다. 그렇지만 발은 자꾸만 이리저리 뒤틀렸다. 어느 곳으로 들어섰는지 수풀 사이로 검은 집이 한 채 등장하더니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는 머리를 때려 술기운을 쫓았다.
"수낭 촌구석 산신령을 모신 서낭당이로구나."
- 말이 당집이지 나무토막 몇 개를 주워 붙여 조악한 초가집 형상로 조립한 가건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예스러움과 비문명적인 분위기로 점철된 그런 조악함이야말로 사람의 원초적인 두려움을 자극하는 데가 있었다. 비바람 따위 자연의 풍화를 죽은 듯 견디면서도 영적인 분위기를 잃지 않고, 아무것도 없음에도 귀신이 가득한 것처럼 보여주는 환상성은 두려움을 생활의 본능으로 갖고 있는 인류에게 원형의 한 모습을 제공한다. 사람의 창조력이 입증되고 기술의 발전이 가속되어도 설명 못 할 자연과 초자연의 신비는 여전히 그 모든 것에 잠복해 있다는 원형.
- 이상식은 잠겨진 서낭당 안에 뭐가 있을지 궁금했다. 눈이 찢어진 신령이나 무녀의 그림, 그리고 그에 걸맞는 무구들이 있겠지. 저런 걸 하필 길가에 떡 만들어놓은 의도는 뭘까? 곧 21세기도 다가오는데.
서낭당 뒤편에서 나무를 스치는 사사삭 소리가 있었다. 이상식의 심장이 철렁했다.
"거기 누구요?"
대답이 없었고 소리도 나지 않았다.
- "저는 이곳 학교 선생입니다. 섭주 가는 막차 버스를 타러 가는데 어떤 여자가 길 안내를 해준댔어요. 따라갔는데 대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 첩첩산속에 있더라구요."
"막차는 8시에 있지 않소?"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놓쳤소."
아메리카 김이 손목시계를 보여주었다. 자정이 다가오는 11시였다. 이상식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 "이상하다. 나는 그 여자랑 잠깐 만나 걸었을 뿐인데..."
"그게 바로 토째비의 농간이오. 당신은 토째비한테 홀린 게요."
"토째비가 뭔데요?"
"도깨비지 뭐긴 뭐요. 사람을 낭떠러지나 강물 속 같은 곳으로 꾀어내길 일삼는 귀신이지. 심하게 홀린 사람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소."
"제가 도깨비한테 홀렸다고요?"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는 사람이라면 어느 날 갑자기 헛것을 볼 수 있소. 그 헛것이 같이 걷자, 나랑 대화도 하자 하는데 그걸 받아주면 시간 감각, 공간감각을 잃게 되는 거요. 안 당해본 사람들은 술 때문에 겪는 환각이라고 쉽게 단정 짓지만 웃기는 소리! 저 여자가 내 눈에도 빤히 보이는데 환각이라고? 이 섭주에는 토째비가 실재하오. 그보다 흉악한 귀신은 더욱 많고 말이오."
- "귀신이라니, 도저히 믿지 못하겠네요."
"그럼 당신이 조금 전에 본 걸 뭐라 생각하시오? 조금만 더 늦었다면 그 여자가 가시덤불숲 다음으로 냇가 깊은 곳까지 길 안내를 했을게요. 당신 시체가 발견되면 사람들이 그러겠지. 술에 취한 학교 선생이 발을 헛디뎌 익사했다고.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진짜 진실을 밝혀낼 방법은 없는 거요. 살아서도 주정뱅이, 죽어서도 주정뱅이 취급만 받고 말지."
"저도 섭주가 고향이라 이 땅에서 해괴한 사건이 많이 일어났단 건 어릴 때부터 들어서 알고 있어요. 10년 전쯤 돌아래 마을이란 곳에서 주민들이 몽땅 사라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 마을호수에선 목 잘린 시체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지요."
"젠장! 나 역시 마찬가지요. 미신과 현실이 서로 다르지 않은 이 꽉 막힌 촌구석에 내려오는 게 아니었소. 여기 놈들은 내 사업을 망친 것도 모자라 귀신의 명령으로 내 집에 불을 질렀소. 날 죽이려 했단 말이오."
- "그럼 없어질 건 무엇이겠소?"
"옛 시대의 유물이겠지요."
"바로 그거요. 저 서낭당을 부수고 당산나무를 베고 무당 깃발들을 다 꺾어버리겠지. 하루속히 그래야만 하오. 내가 여기서 양돈사업을 했을 때 전염병이 돌아 애들이 죽었소. 사람들은 돼지가 원인이라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오. 자기 터전이 개발에 사라져 버릴 것을 우려한 저 귀신이 무당을 통해 사람들을 부추긴 것이오. 귀신이 무당한테 살을 날리게 해 아이들에게 병을 퍼뜨린 후 내게 뒤집어씌운 거란 말이요. 수낭 마을을 자기가 살기 편한 원시마을로 만들려고!”
"그럼 왜 보건소 직원들 조사는 안 받으셨나요?"
"그것까지 알고 있소? 여긴 보건소 직원이 온 적이 없소! 다 그 귀신을 모시는 자들이 꾸민 짓이오. 놈들이 보건소 직원처럼 행세해 내 농가를 염탐하려 했소. 공무원증을 보자니까 한 놈도 내놓지 못했소. 날 이 땅에서 내쫓고 내 농가를 가로채려 했소. 이놈들은 아주 무서운 놈들이오. 귀신의 말에 맹신하고 귀신보다 더 큰 욕심이 한도 끝도 없소. 이 마을에 외지인이 왜 없겠소? 텃세의 방식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빼앗고 집단 괴롭힘의 방식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거요. 바깥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아무도 몰라 ... "
- 불에 탄 변소문들을 지나쳐 눈앞에 4자가 커다래질 때 이상식은 다시 눈을 폈다. 배설물 거름과는 다른 악취가 몰려들었다. 사악함과 연관된 그 어떤 냄새였다. 근육과 털로 부푼 짐승의 팔이 이상식을 잡아 번쩍 들었다. 이어서 어둠 속을 낙하하는 추락이 있었다. 이상식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나뒹굴었다.
- 정신을 잃을 틈도 없었다. 라이터를 꺼낸 이상식은 다리를 절며 어둠 속을 나아갔다. 그곳은 원형으로 울타리가 쳐진 사육장이었다. 울타리 밖은 튼튼한 벽돌을 쌓아 바깥에서 볼 수도 없고, 들어올 수도 없게 해 놓았다. 위를 올려다보니 열 개의 타원형 구멍이 보였다.
'여기가 돈사로구나. 저 위는 화장실이고, 여기서 돼지를 키웠던 거였어.'
라이터를 땅에도 비춰보았다. 검게 그을린 바닥 위에 희미한 그물의 존재이 되었다. 삼각형을 겹쳐 그린 것인지 별을 겹쳐 그린 것인지 헷갈리는 도형이었다. 도형 한가운데엔 뿔이 큰 염소의 얼굴이 있었고 그 위에 핏자국이 있었다.
- 그곳은 4번 변소 아래였다. 오줌 냄새가 나 머리를 들어보니 자신이 소변을 보고 손을 베였던 곳 아래임이 확실했다. 벽 곳곳에 라틴어와 도형기호가 조각되어 있었지만 시골 국민학교 선생의 지식으로는 읽을 수 없는 문자였다. 무엇보다 충격은 가장자리 벽에 새겨진, 무당의 벽화보다 무서운 그림이었다. 사람의 몸에 염소의 머리를 갖추고 등에는 날개를 가진 악마를 묘사한 인물화로 얼굴이 아메리카 김과 비슷했다. 이상식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4번 변소 밑에 돼지를 치는 자가 있다. 근데 그놈도 짐승이다."
밝은 빛 한줄기가 멀리서 뻗어 나왔다. 이어서 아메리카 김의 온화한 음성이 전해져 왔다.
"이제 좀 진정되었다면 빛을 따라오게. 자넨 제대로 온 거야, 선생."
- 가지 않으려 해도 방법이 없었기에 이상식은 마음을 다잡은 뒤 걸어갔다. 그를 기다린 건 서양식 나선계단이었다. 계단 꼭대기로부터 빛이 흘러내렸다. 이상식은 좁은 나선계단을 돌고 돌아 밝은 상층으로 올라갔다. 얼룩말의 머리가 부조로 새겨진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밀고 들어가니 응접실이 나왔다. 오전에 봤던 그 집이었지만 화재가 난 폐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멀쩡했고 정상이었다. 고풍스런 소파와 가구가 질서 있게 갖춰진 그곳은 부르주아의 저택이었다. 벽에는 우아한 벨벳 커튼이 쳐져 있었지만 샹들리에 빛이 환해 어둡지 않았다.
- 격자무늬 벽지가 붙은 벽면엔 사진들이 가득했다. 검은 숲을 찍은 사진, 령 靈을 둘러싸고 찍은 듯한 집회 사진, 머리가 두 개에 날개가 붙은 동물을 찍은 사진, 학살당한 것으로 보이는 외국인 시체 사진 등이 있었는데, 그중 검은 양복을 입은 백인들 틈에서 역시 검은 양복을 입은 아메리카 김의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1925년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사진 속의 그는 지금보다 훨씬 젊었다. 그들 모두가 한 손을 머리 위로 올렸고 하나같이 손가락을 이상한 형태로 말아 쥐고 있었다. 자기들만의 어떤 비밀 신호나 단결 표시 같았다.
- 단체 사진 아래에는 돼지 농가 앞에서 찍은 아메리카 김의 단독 사진이 있었다. 드라마 <전원일기> 혹은 <초원의 집>의 배역처럼 허름한 농부 차림이었어도 귀티 나는 인상을 가리지는 못했다. 이 사진 속의 유일한 불협화음은 벽에 기대놓은 창처럼 긴 낫이었다. 외국 공포영화 속에서 두건 쓴 해골악마가 휘두르는 낫과 비슷했다. 보건소 조사단에게 낫을 들고 저항한 것도 사실이었고 창을 들고 저항한 것도 사실이었다.
- "여기가 한국이고 샤머니즘 깊은 마을이지만, 나는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인물이 아닐세. 여기서 허주란 '허공의 군주'를 말하는 걸세. 허공의 군주는 어둠의 왕자가 모시는 유일신이지."
이상식이 돌아보았다. 검은 로브를 걸치고 왕관처럼 생긴 테를 머리에 두른 아메리카 김이 서 있었다. 산에서 봤을 때보다 젊어 보였다.
"나를 깨어나게 해 줘서 고맙네, 이 선생. 자네는 내 생명의 은인이야. 자네가 흘린 4번 구역의 피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곳 귀신들이 걸어놓은 봉인에서 풀려나지 못했을 걸세."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내가 바로 어둠의 왕자일세."
- 이상식은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물 위를 뛰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되었다.
"토째비가 원래 그렇지. 이것도 다 속임수일 거야. 내 하나 물어봅시다. 여기 사람들, 나만 빼놓고 다 수낭 사람인가요?"
"교장도 네 동료 선생도 다 수낭 사람이다. 외지인도 이 마을에 몇몇 살긴 하지만 그들은 법칙을 지키고 산다. 이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은 뭐든지 알아도 모른 척을 해야 하고 함부로 이곳 비밀을 캐서도 안 된다는 법칙."
- 섭주에 살고 있지만 이상식은 수낭에선 자신이 철저한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낭면을 폐쇄적 집단공동체로 보았던 아메리카 김의 지적은 정확했다. 악마의 시각이야말로 사실은 가장 정확한 시각이 아닐까. 차갑고 고통스런 현실을 속이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니까.
- "당신들이 이 마을 주인이라고 해서 어떤 일을 꾸민다면 그 행위의 선악 판단은 누가 하지요?"
"내가 한다. 내가 여기 수호신이니까."
아낙의 누더기 같던 작업복은 이제 완전한 소복으로 변했다.
- 생각만 할 뿐이지 실행에 옮기진 않는다. 행동에 따른 처벌을 감수하게끔 합의되고 유지되는 게 이 사회니까.
정말 교장이 밑져야 본전의 심정으로 그랬다면?
수사가 개시되지도 않을 귀신 이야기로 맘에 안 드는 부하 직원을 해치려 했다면?
실제로 죽는 일이 생기면 속으로 놀라면서도 "정말 그런 일이 벌어졌네? 재수 없는 거지, 뭐." 하고 입 닫은 채 나 몰라라 살아갈 것이다.
- 그 가설이 맞다면 평범한 일상에서 교장은 농담처럼 진담으로 살의를 내뿜은 것이다. 살의!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 게 바로 인간의 본성이고 이곳은 저주와 미신이 엄연히 현실로 살아 숨 쉬는 섭주의 수면이니까.
- 그럼에도 이상식은 필사적으로 이성에 집중하려 애썼다.
"교장선생님은 그냥 내게 화장실을 가르쳐줬을 뿐이에요. 4번 변소에 들어간 것도 피를 흘린 것도 그 양반하곤 상관없어요."
"계획적으로 널 죽일 마음은 아니었겠지. 겉으로 소심하고 선량한 사람 모두가 그러잖아. '나는 누구를 죽일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라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까짓 거 죽으면 죽는 거고 살면 사는 거고 지 알아서 하겠지 뭐, 나는 몰라' 하고 말하는 걸 주변에서 많이 봤을 텐데."
"그렇죠. 가벼운 입으로 원인을 제공해 놓고 그게 문제가 되면 어떻게든 그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거죠."
- 이상식은 아메리카 김의 경고를 떠올렸다. 뿔을 가져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 정신 바짝 차리라던 말을. 수낭 마을 수호신 성모할멈은 그의 마음을 혼란시키고 있었다. 만약 내가 자물쇠에 손을 대면 심장마비라도 일으켜 죽는 건 아닐까? 아냐, 토째비는 사람한테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어. 속임수로 가시덤불로 유인하는 정도가 능력의 전부야!
- 성모보살을 대신해 다른 무녀가 건물 개창 굿에 참여했다. 어떤 사람은 술자리에서 그 무녀의 눈이 올빼미의 눈이었다고 얘기하다가 헛소리하지 말라는 빈축을 샀다.
- 외지인을 향한 수낭 사람들의 적개심 가득한 눈매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었다. 오직 자신이 몸을 담근 우물이 온 천하라고 자부하는 개구리들의 눈매. 사람들은 그런 섭주 수낭 사람들을 '귀신처럼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문명이 발전하고 시대가 변해도 수낭의 요상한 전설과 지역 이기주의, 그리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야담도 끝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상식 선생을 기억하는 이는 없었다. 작게 속삭이는 데는 능하지만 크게 떠벌리는 데는 눈치부터 살피고 보는 지방다웠다.
-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한국의 동신 신앙은 그 마을의 번영과 안녕과 축원에 큰 뜻이 담겨있다. 공동체의 화목, 이웃사랑의 실천, 상부상조와 경조사 나눔이 다 여기서 나온다. 그러나 모든 마을이 다른 마을을 적대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다른 마을보다 앞서야 하는 '최고인 우리 마을'만을 바란다면 그 신앙도 언젠간 눈알 부라리는 경쟁이 될 것이다. 이 경우 내가 아닌 다른 쪽의 번영은 배가 아픈 경계대상이 된다. 남을 경계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
- <수면에 가면 수낭법을 따르라>
- 섭주군청 문화관광과는 최근 <열녀의 집>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열녀의 집>이란 별채 넷에 곳간 셋과 마굿간 둘을 갖춘 으리으리한 양반 고택을 가리키는 별칭인데, 정식 명칭은 <만석지기 최진사 고택>이었다. 네 개의 별채 중 끄트머리에 있는 '별당 부인'의 집이 가장 유명해 <열녀의 집>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사실이 별채만이 1800년대부터의 역사를 거쳐온 실물이며, 나머지 건물은 최신 기술이 들어간 모조품에 불과했다. 핏줄 모두가 사망해 진사 댁의 후손은 없다고 알려졌다. 따라서 건물의 임자도, 유지 보수의 관리주체도 섭주군청이 되었다.
- 군에서는 많은 돈을 들여 이 고택에 유서 깊은 분위기를 담아보려 했으나 보수 공사 때마다 하자가, 아니 문제가 생겨났다. 기둥을 박은 지반 아래로 그전에는 없던 물이 흘렀고 새롭게 치장한 기와 위로는 멀쩡하던 고목이 쓰러져 지붕을 쪼개버렸다. 진흙탕물이 아니라 시뻘건 피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고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사람이 내지르는 '불가不可(안 된다)!'처럼 들렸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가짜뉴스 취급을 받았다.
- 고택 안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세 차례나 일어났는데, 불길 한가운데서 쓰개치마를 입은 여자의 형상을 봤다는 목격담도 불길을 탄 듯 활활 번졌다. 신기한 것은 그 모든 흉한 일에도 열녀가 살았던 별당만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점이다. 바람을 정면으로 받는 위치에 있어도 별당에는 화재의 불길이 접근하지 못했고, 산사태가 볼링공처럼 굴려 보낸 바위는 열녀의 별당이 아닌 다른 별채만 박살 냈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 <열녀의 집>만이 '실물'인 것이었다.
- 공무원들은 희망을 갖고 수리와 홍보에 열심이었으나 별 특징도 없고 여타의 민속촌보다 나을 것도 없는 옛 가옥을 관광객은 찾지 않았다. 하자는 해마다 늘고 유지보수비도 급격히 늘어 ...
- 이해관계에 있는 군민들은 군수에게 은밀히 정보를 주었다. 저 고택은 귀신 들린 터 위에 지어졌으니 철거를 전후하여 반드시 액막이를 해야 한다고. 이는 군수를 위한 조언이면서 자신들을 위한 예방접종이기도 했다.
- 군수는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렇잖아도 뇌물사건으로 구속된 전임군수로부터 특이한 사건에 관한 인수인계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섭주경찰서 의경 하나가 갑자기 맛이 가 한밤중에 완전무장한 채 방독면까지 덮어쓰고 소대원들을 학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게 놈이 또라이여서 그런 게 아니라 그 지역 우물 속에 들어앉아 사는 귀신과 간접 접촉이 있어서 그런 것 같으니 조심하라는 인수인계였다. 섭주에 오면 섭주법을 따르라. 즉 정신바짝 차려 귀신을 경계하라는 얘기였다. 대간리에 있는 그 <화랑우물>도, 무속인들이 모여 사는 무속촌도 최 진사 고택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 매년 사주도 보고 점도 쳐 영혼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 신임군수는 철거에 앞서 원혼을 달래고자 밀본이라는 용한 남자 무속인을 불러들였다. 고택을 향한 밀본 법사의 해석은 군수를 오싹하게 했다.
"지금까지 최진사 고택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건 저 별당에 사는 열녀가 화가 나서 그런 것입니다."
- 공포소설 작가 최수현이 섭주 여행을 결심한 것은 기담을 수집하는 그의 레이더에 최진사댁 고택을 철거한다는 정보가 포착된 후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료작가 이새조의 소개가 있었고 그에게서 두툼한 자료를 받은 후였다. 본관도 섭주 최씨여서 여행에의 기대감은 드높았다.
- 최수현은 주로 민담과 전설을 채집하여 자기식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였는데 책을 읽은 독자들은 무슨 놈의 공포 작가 책이 도통 무섭지 않냐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최수현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무서움이 아닌 신비함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사람의 이성과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이 매일같이 일어난다. 오관으로 이해 못 할 일에 무서움부터 느낀다면 그것은 배척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신비함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답을 찾는 관심의 대상이 된다. 관심은 지식이 되고 지식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
- 이 작품들은 소실되어 전하지는 않지만 그 시대 여자로서의 법도, 시대를 앞서간 창의력, 드높은 예술정신까지 부인이 이룬 열녀의 성취는 오늘날에도 여전한 존경을 받고 있다.
- "호장과 결혼했다고? 진사댁 아들이 기껏 호장이었다고? 호장공은 오늘날의 하급 지방공무원이잖아?"
최수현은 팔짱을 낀 채 해설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비지정문화재 몇 호 따위 표기는 없었다. 중앙에서도 지역에서도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별당 초가집 옆에는 <고절부다흥김씨지문 高節婦多興金氏之門〉이라고 적힌 열녀비가 있었는데 이것 역시 인조대리석 같은 재질로 미루어 근현대의 동민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것 같았다.
"뭔가 조작의 냄새가 짙다. 검증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모르는데 완전 찬양 일색이잖아?"
"관광객이세요?"
젊은 여자가 불쑥 나타났다. 최수현은 돌아보면서 "예" 하고 대답하다가 갑자기 등덜미가 서늘해 다시 초가집을 돌아보았다. 화살 같은 요기가 엄습했다. 현악기의 고음처럼 귀청을 찢을 듯한 기운이었지만 실제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예전에 그 고택을 관리하던 분이 계셨어요. 공무원 출신인데 지금은 골동품 상점을 운영하세요. 오래된 문서란 문서는 다 보관하고 계시는 분이에요. 별당 열녀 관련 문서도 분명 있을걸요? 그분만큼 여기 역사를 잘 아는 분은 없죠. 알콜중독자라 매일 술을 마시지만 주사는 없으니 소주 몇 병만 사들고 찾아가 보세요. 원하는 정보는 다 들을 수 있을 거예요."
"거기가 어딥니까?"
"기선이 니가 안내해 드리고 와라.”
펜션 주인 부부가 빙긋 웃었다. 그렇게 최수현은 기선의 안내로 골동품 가게 <고문관 考文館>을 찾게 되었다.
- 장독, 절구통, 나무 궤짝 따위가 질서 있게 놓인 <고문관> 문을 열었을 때 방울이 딸랑하고 울렸지만 개량 한복 차림의 남자는 깨어나지 못했다.
"CCTV도 없는데 도둑놈 오면 물건 다 들고 가겠네."
기선이 음성을 높이자 졸던 남자가 눈을 떴다. 그녀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은 걸 안 남자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래서 가짜만 진열해 놓았잖니, 기선아. 네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그때 아저씬 면사무소에 계셨잖아요?"
"그랬지. 그때 진열한 사람은 내 아버지였어. 부전자전이지. 우리 집안 사람은 의심이 많아 출입문 근처에 값나가는 물건을 갖다 놓은 적이 없단다. 그나저나 빈손으로 왔니? 너네 아버지 왜 요샌 여기 안 온다니? 술 끊었다디?"
"여기 손님 안 보여요?"
<고문관>의 주인 금천수는 안경을 매만지며 그제서야 최수현을 바라보았다.
- "아, 기선이가 기특한 일을 했구나. 찾으시는 물건 있어요?"
"술 한잔 대접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별당 김씨 부인이 궁금해서 오신 작가님이세요. 성도 최씨고요. 섭주 최씨요.”
"본관만 그렇지 섭주에 오긴 처음입니다."
- 금천수가 잘 오셨다며 환영했다. 최수현은 섭주의 인심이 야박하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통상적으로 이방인이 토착민에게 지역정보를 얻어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랜 시간과 공들인 접근이 있어야만 꽉 닫힌 입을 열 수 있다. 기선의 중재로 일이 잘 풀렸다. 돼지두루치기에 막걸리 몇 병을 시키자 금천수는 금세 아는 것을 털어놓았다. 얼마 안 있어 포장 생선회를 손에 쥔 기선의 아버지도 <고문관>에 합류했다. 알고 보니 두루치기를 주문한 실내포장 <술을 받으라>의 사장은 기선 아버지의 처남이었고, 생선회를 산 <나는 자연산이다> 사장은 처남의 사촌형이었다. 최수현은 집성촌의 좁은 동네를 의식하면서 한층 더 열녀 김씨에 대한 궁금증을 키웠다. 술이 몇 순배 오가고 난 뒤 질문을 던졌다.
- "김 부인은 어떤 분이셨나요?"
"그 질문은 어떤 관점에서 물으시는 게요?"
금천수가 손가락으로 안경을 밀어 올렸다. 학구적인 분위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 "만약 이 세상 어딘가에서 과학으로 설명 못 할 일이 일어나고 귀신이 등장한다면 그건 다 이유가 있어 그러는 거요. 한이 서려야 원혼도 그 땅에 달라붙는 법이오. 결론적으로 말해 최 진사 부부는 칼잡이를 고용해 며느리인 김 부인을 죽이려 한 역사가 있소. 거기까지가 이 지역의 우리가 대충 아는 사실이오. 하지만 고택이 관광지가 된 마당에 그런 사실을 그대로 밝힐 순 없지. 자, 지금부터 내가 '거기까지의' 진실을 얘기해 주겠소. 그 뒤의 진실을 알아내는 건 작가 양반의 선택이고 그걸 책으로 써낼 책임과 용기도 작가 양반의 몫이오. 왜냐하면 '거기까지의 진실'만이 넘지 않는 선이기 때문이오."
"어떤 선을 넘는단 말입니까?"
"생명의 선이지 뭐겠소?"
금천수가 호탕하게 웃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을 지웠다.
- "저 고택을 일군 최 진사의 정체는 과거에 급제한 선비가 아니라 해산물을 유통하던 상인이었소. 막대한 돈을 벌어 제물포 최고의 부자가 되어 세간의 부러움을 사던 거상 최치선이 바로 그였소. 하지만 정승만큼의 부를 누린 최치선에게도 지울 수 없는 낙인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타고난 천한 피였소. 그는 어느 대갓댁 외거노비의 아들이었다고 하는데, 열 살 때 가족들과 헤어져 어느 상인단에 들어가 장사를 배운 후 고생 끝에 중년의 부를 이룩한 거요. 나이가 든 그는 양반이 되고 싶어 했고, 결국 돈을 써서 그 소망을 이루었어요. 자기를 알아볼 사람이 없을 곳에 정착하면 과거를 알 리 없다고 생각하고 경상도 섭주까지 내려왔소. 버젓이 종씨들이 사는 섭주에 말이오."
"아니, 어째서 그런 방법을 쓴 거죠? 토착민 성씨들이 대번 의심을 할 텐데요?"
"섭주에 같은 종씨들은 살아도 결속력 있는 문중 門中은 있지 않았소. 그들 중 양반은 아무도 없었단 말이오. 최치선은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 일부러 그곳을 정착지로 고른 거요."
- 골동품상 금천수가 알려준, 진사가 된 거상 최치선의 사연은 대강 이랬다. 최치선이 정착할 섭주 대간 마을은 반촌이 아닌 양반 없는 민촌이었다. 가난한 이 마을에 별채와 곳간, 마굿간과 외양간을 여러 개 거느린 으리으리한 고택이 들어섰다. 공사가 끝나자 사병 私兵이나 다름없는 건장한 하인들을 거느린 최치선 일가가 고택으로 이주해 왔다. 사람들은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며 텃세를 부렸지만 최치선의 힘은 문, 무 양쪽으로 강력했기에 오히려 ...
- 이새조 작가가 보내준 자료가 훨씬 풍부했다. 그 자료에 의하면 훨씬 무섭고 사악한 일들이 최진사 고택에서 디테일하게 벌어졌다. 2024년 지금 섭주의 이 사람들은 진짜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모르쇠로 입을 맞추고 있다. 이곳은 그들이 사는 곳이고 앞으로도 살아야 하는 곳이니까.
- 최수현은 다른 질문을 했다.
"김 부인이 남겼다던 <섬사비법>, <추비천>은 어떤 책이죠?"
"섬사주 蟾蛇酒를 알고 있소?"
"그게 뭔데요?"
"뱀과 두꺼비가 서로를 물고 다툴 때 둘을 한꺼번에 잡아 담그는 술을 섬사주라고 해요. 관절통에 명약이지. 김 부인은 양조 기술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했소. <추비천>은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 부인의 파란 가을 하늘을 향한 감회를 담은 수필집이 아닌가 해요."
- 최수현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새조가 가르쳐준 정보를 이 사람들은 하나도 언급하지 않았다. 진짜로 모를 수도 있는 마당에 일부러 흑역사를 먼저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이새조 역시 김 부인이 벌거벗은 여자와 있다가 아이에게 목격되었다는 사실, 삿갓 쓴 남자와 만난 사실을 언급했었다. 요상한 사건들 역시 기록으로 남겼다.
- 정숙한 부인이 벌거벗은 채 다른 여자와 있었다는 건 최수현에게 인상적이었다. 흔한 레즈비언 커플의 상상이 아니라 한국적인 산천초목 아래의 그 마술적인 장면이 아서 매켄 Arthur Machen의 단편 <위대한 신판>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포크호러를 추구하는 작가였고, 정체가 불분명한 상대방 여자에게도 미스터리를 자극하는 특징이 있었다.
최수현은 떠보듯 물어보았다.
"그 부인이 나체로 다른 여자와 있었다는 말은 뭘 의미할까요?"
"외로움을 못 이겨 동성애에 빠져들었다 그거요?"
"그런 말은 아닙니다."
"그건 헛소문에 불과해요. 소문 많은 사람에 대한 일종의 스캔들 같은 거지."
"악성댓글, 마녀사냥 같은 그런 거 말인가요?"
"그렇소.”
- 소설을 쓰는 이새조에 이르러 그가 찾는 소재거리와 비슷한 선조의 옛이야기가 커다란 흥미로 다가온 것이다.
때마침 집안의 전원주택 리모델링 건으로 할아버지의 생가를 철거할 일이 생겼다. 골동품이라도 나올까 친척들과 다락을 뒤지던 이새조는 무슨 선물처럼 거미줄과 먼지투성이의 옛 문서를 다수 발견하게 되었다. 한자로 쓰인 조선 시대의 기록물이었다. 이새조는 대학 시절 친분이 있던 한문학과 출신 선배를 불러 해독을 의뢰했고, 발견한 문서가 바로 섭주 최진사 고택에 시집 온 김수의 연인이자 자신의 선조인 이유열의 일기임을 알게 되었다.
- 최수현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어느 날 이새조가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새조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열녀 김씨 이야긴 도저히 못 쓰겠어요. 섭주에서 일어난 일을 내가 쓸 수는 없어요. 내겐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죠. 그분은 옛날 섭주의 돌아래마을이란 곳에서 뭔가를 찾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돌아가신 거예요. 시신의 눈에서 뱀독이 발견되었다고 했죠. 팔이나 다리도 아닌 눈에서요. 더 이상한 건 뭔지 알아요? 그 동네의 주민들 모두가 난정호라는 호수에서 목 잘린 시체로 발견돼 그물로 건져졌다는 거죠. 할아버지 이름은 이병호인데 나처럼 소설을 쓰는 분이었어요. 그분이 무슨 이유로 그때 섭주에 계셨는진 모르겠어요. 소설을 쓰시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건지. 어쨌든 난 그곳에 갈 수 없어요. 내가 1800년대에 섭주에 잠시 살았던 옛 선조에 관해 연구하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건강이 안 좋아지고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자꾸 눈에 보이는 거 같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란 거 알아요. 포기했어요. 난 절대 이걸 쓰지 못해요. 내가 죽거나 미쳐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버리기엔 아까운 소재예요. 최작가님은 포크 호러를 쓰니까 원한다면 자료를 그쪽으로 보내드릴 수 있어요. 물론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내 책임은 아니니 선택에 신중하세요."
- 최수현은 흔쾌히 그 자료를 받았다. 그는 초현실적이고 오컬트 느낌 가득한 책을 써왔지만 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어본 적은 없었다. 이야기는 이야기고 현실은 현실이다. '귀신은 없다. 귀신이 있다면 꼭 만나보고 싶다. 귀신 역시 유물론의 한 부류로 포함시켜야 한다.' 이것이 최수현의 사물을 대하는 태도였다. 이새조의 자료는 새로운 소재에 목말라하던 그에게 훌륭한 샘물이 되었다. 현장을 답사해 피와 살을 불어넣어 포크 호러오컬트 소설로 만들면 ...
- "마녀는 조물주의 틀 속에 갇히지 않는다."
- 혼혈인 그녀의 몸에는 안데스 산맥인의 피와 아메리카 인디언의 피가 함께 흘렀다. 조상들의 선례를 따라 리디아 역시 정착지에 코카 Coca나무를 재배했는데, 후에 코카인의 원료가 되기도 하는 리디아의 코카나무 열매는 미리 정착해 있던 인디언 원주민에게 도움을 주었다. 수렵하는 남자들에게는 피로회복의 효능을, 몸이 아픈 아낙들에겐 통증망각의 효과를 선사한 것이다.
- 그녀의 정착지 원주민들은 심성이 근본적으로 착해서 사심 없이 접근한 외지인 여인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때로 리디아는 인디언과는 다른 점성술로 사람들의 운세도 봐주었다. 이방인임에도 리디아 화이트필드는 곧 큰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길흉화복을 물었고 질병이 돌면 그녀의 약부터 찾았다. 리디아는 집과 터를 주고 함께 살게 해 준 사실 하나에 고마워해 점점 커지는 권세에도 그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려 들지 않았다. 리디아 화이트필드는 인디언 원주민들의 진정한 친구였다.
-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자 정착 원주민을 학살하고 땅을 빼앗아 악명을 떨친 뉴잉글랜드 개척민 중에서 리디아의 삼림지를 눈여겨본 이가 있었다. 슬리피 대령이라는 이름의 그 백인은 '위대한 아메리카 개척정신에 악의를 갖고 덤벼든 야만인 인디언들로부터 청교도를 지킨 전사'로 극우 전기작가들에게 미화되었지만, 실제로는 취미로 살인을 일삼는 인간쓰레기였다.
- 억울함과 원통함을 산 사람에게 내쏟는 게 귀신이다. 하지만 쏟는 대로 다 듣다 보면 정신줄이 온전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들어야 할 내용만 들은 후 그중에서도 고르고 편집해 한 이야기로 완성하는 게 소설가다. 무릇 글 쓰는 이란 이렇듯 이기적이고 비겁한 작자인 것이다.
- 최진사 고택이 리모델링마다 실패하고 보수작업마다 하자가 난 것은 자신의 억울함을 알려달라는 김수의 울부짖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짜 열녀문 따위로는 불행한 여인을 달랠 수 없었다. 강간하려 하고 살해하려 한 여자에게 표창장을 던져주고 그거 받고 입 닫으라는 말이 아니고 뭐겠는가.
- 고향을 그리워하고 사랑에 목말라하고 운명에 절망하고 내고 싶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여인의 고통을 나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여인이 겪었을 고통을 나는 겪지 못했으니까. 겪지 못했지만 그녀만큼 감당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절대로. 김수와 리디아 화이트필드는 강인한 여성들이었다.
- 김수가 죽을 때까지 바친 시부모에의 효도는 사실 무서운 고문이 아니었을까. 최진사 부부는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대가로 죽음보다 더 고통스런 삶을 죽을 때까지 살았던 건 아닐까.
- 이 모든 진실을 섭주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까 궁금해하며 내가 미끼를 문 것을 태연한 얼굴로 보고만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시치미 떼고 열녀문 따위를 세워 김수를 달랬을 생각을 하니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이 진리이긴 한 모양이다.
- <며느리는 약했지만 여인은 강했다>

- 이정욱 화백의 개인전은 대성공이었다. '마음의 고향'. 풍경화의 달인답게 이번 전시회도 비슷한 작품들로 채워졌고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찬사가 쏟아졌다. 신작 <이별>은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고 도시인과 귀농인 모두에게서 반발 없는 지지를 이끌어냈다. 나이 든 사람 젊은 사람 모두 울컥거리는 감동에 잠시 숨을 멈추었다.
- • "잃어버린 세대의 잃어버린 감수성을 일깨워주는 작품" _00일보
• "새가 아닌 로봇이 된 비둘기들의 도시에서,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감정을 화폭에 담다." _채널 ㅇㅇ
• "전원일기의 풍광 아래 상실된 가족을 서정적으로 묘사해 온 이정욱 화가의 대표작." _미술평론가 ㅇㅇ
• "마치 저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젠 눈물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뺨을 적셨습니다." _00 그룹 회장 000
- <이별>은 세 사람을 한 폭에 담은 풍경화였다. 이정욱의 모든 작품에 이 세 사람이 등장했다.
나이 지긋한 시골 아낙, 슬픈 표정의 비쩍 마른 키 큰 청년, 아직 어린 빡빡머리 소년.
- <이별>의 배경은 황금빛이 대지로부터 치솟는 가을의 보리밭이었다. 비쩍 마른 키 큰 청년은 양복 차림이었는데 근경에 위치해 그림 오른쪽을 장악하다시피 했다. 청년의 얼굴이 강조점이었다. 양손에 분홍색 보따리를 하나씩 쥔 청년은 하늘을 향해 절규하듯 울고 있었다. 그의 뒤 원경에는 이정욱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느티나무가 그려졌고, 그 옆에 시골 아낙과 그녀의 손을 잡은 빡빡머리 아이가 서 있었다. 이 두 인물은 너무 작게 그려진 데다 나무가 드리운 그림자까지 더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 천둥과 번개가 쳤다. 주인의 심상찮은 낌새를 알아채고 반려묘도 가까이 오지 않았다. 정나영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심정으로 이정욱의 비망록을 열었다.
-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삶에도 남들은 모를 곤란이 존재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최악의 삶을 살아도 남들은 모를 나름의 해결법을 찾기도 한다. 이 해결법을 찾는 능력은 인간에게 있지 신에게 있지 않다. 신은 인간의 고난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토록 갈구하고 기도하고 부르짖고 애원해도 신은 모른 척한다. 신이 없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신은 있다. 하지만 신은 악하기 때문에 인간을 복되게 하지 않는 것이다.
- 나는 악신과 함께 15년을 살았다. 그 긴 세월 동안 신의 무서움을 체험했기에 굴종으로 인간의 하찮음을 입증했다. 신의 힘은 인간 이상이다. 그렇다고 그 힘이 전지전능한 것은 아니다. 신이 전지전능하려면 유일신이어야 한다. 무당이 모시는 다양한 신은 인간의 믿음에 따라 존재유무가 성립된다. 기적과 신비 혹은 가스라이팅과 사기가 참된 믿음과 잘못된 믿음에서 우러나온다.
- 내게 고통을 준 그 악신은 힘이 한정되어 있었고 어느 날 형이 그걸 알려주었다. 그 결과 나는 자유를 얻었지만 고향을 잃었고, 미래의 빛을 붙잡았지만 혈육을 어둠 속에 버려야만 했다.
-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섭주는 차츰 사라져 가는 미신의 기묘한 힘이 여전히 현실의 중력으로 내리누르는 곳이었다. 개발은 퇴화에, 혁신은 보존에, 첨단은 복고에, 창조는 복지부동에 자리를 내준 도시. 보이지 않는 귀신들이 에워싸 사람들은 눈을 두리번거리며 걷고 이방인에게는 이유 없는 경계심부터 품는다. 같은 민족 같은 땅 같은 하늘 아래 전혀 다른 기운의 비밀이 새어나갈까 봐 소문에 민감하고, 그들만의 어두운 힘을 정복당할까 봐 외부인에게 텃세를 부린다. 그래서 외부 사람들은 섭주를 손가락질한다. 음침하고 지 얘기만 하고 남 손가락질하고 말도 안 통하고 없는 말을 지어내기도 하는 사람들의 고장이라고.
- 나는 신이 아닌 사람이며 당연히 사람에게서 태어났다. 이제는 기억도 희미한 어머니는 살아생전 내게 단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던 가련한 여인이었다. 그릇된 믿음이 이 여인을 망쳐버렸다. 달 밝은 어느 날 밤에 나를 낳은 어머니는 그보다 5년 전에는 내 형을 낳았다.
- 그래도 형은 울지 않았다. 어떤 매질과 괴롭힘에도 형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감내했다. 노예의 일을 하느라 늘 분주했던 형이 잠시 멈출 때는 학교를 지나칠 때뿐이었다. 아쉬움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표정으로 형은 학생들의 음성이 들려오는 학교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 이쯤에서 신차선녀의 악행을 알고도 사람들이 고아 형제를 외면했던 이유를 언급해야겠다. 조금 전 나는 신차선녀가 돈을 잘 버는 무당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름을 떨치기는커녕 돌팔이 소리까지 들었던 그 여자는 그러나 특별한 분야에서 배타적인 영험함을 갖고 있었다. 모두가 쉬쉬하지만 아는 사람은 알고 나 역시도 두 눈으로 확인했던 무서운 능력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만이 보유한 '신의 대행 능력'에 신비함보다 두려움부터 느꼈는데, 그 능력은 바로 저주와 방자술이었다. 신차선녀가 등에 업은 몸주신은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심지어 죽여버릴 수도 있었다. 그 악신의 이름은 신차대장군 神借大將軍으로, 인간계와 유명계를 왕복하다 인간 하실옥에게 내림한 신격 神格이 되기 전부터 악명을 떨쳤던 조선 시대의 ...
- 기생 중 미모 절색인 안희는 권두흡의 첩이었으나 보복의 마음을 품고 의도적으로 히토미에게 접근한 터였다. 춤과 교태로 히토미의 애간장을 녹인 안희는 오늘 밤 장군의 수청을 들 터이니 그 증표로 손수건을 달라고 했다. 히토미는 자신의 이름을 쓴 손수건을 쾌히 안희에게 주었고, 안희는 이 손수건을 몰래 심부름꾼에게 건네 통악산 동굴에 있는 이무에게 전하라 했다.
- 심부름꾼이 도착했을 때 이무는 붉은 옷으로 몸을 감싼 후 사람 키만 한 제웅(짚단인형) 앞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다. 손수건은 제웅의 짚단 속으로 깊숙이 박혔고 이무는 주문을 읊은 뒤 미리 준비해 둔 12개의 식도(부엌칼)를 신체 12부위에 박았다.
- 잔치 중에 히토미 고로사쿠는 팔다리가 마구 꺾이는 발작을 일으켰다는데,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무가 신차검으로 제웅의 얼굴 한가운데를 찔렀을 때 히토미는 한 말의 피를 토했으며 피가 더 나오지 않자 눈알과 혓바닥까지 한계 이상으로 내민 채 죽었다고 한다.
- 가공할 암살이 실현되자 기세를 탄 반격이 시작되었다. 권두흡의 제자 권상절이 다흥에서 이끌고 온 의병이 왜군을 공격한 것이다. 대장을 잃어 혼란에 처한 적군에게 권상절은 대승을 거두었고 전사한 스승과 충렬의병들에 관한 장계를 순찰사에게 올렸다.
- 아양에 가까운 신차선녀의 환대를 받으며 그 남자와 수하들은 고급차를 타고 돌아갔다.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신차선녀는 우리가 받은 돈을 도로 빼앗았다. 자기가 그 방에 있으라 해놓고 회장님 앞에서 망신당했다며 또 우릴 때렸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서당개 삼 년에 풍월을 읊는다더니, 정욱이 니가 나랑 살다 보니 이런 그림을 다 그리는구나. 언젠가 훌륭한 화랑이 될 수도 있겠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신차선녀의 칭찬이었다. 취미 삼아 몰래 그렸던 그림을 그녀는 대놓고 그리도록 허락까지 해주었다.
형의 표정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떤 감정을 감추고 있는지 입술마저 바르르 떨렸다.
- 3일 후 자정, 칠흑처럼 컴컴한 밤이었다. 신차선녀가 우리를 불러냈다. 그녀는 갑옷처럼 생긴 이상한 한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탈을 쓰고 있었다. 장승의 머리만 잘라 귀고리를 붙인 듯 무섭게 생긴 탈이었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마당으로 가니 시멘트 바닥에 사람의 형상이 분필로 그려져 있었다. 형상 안에는 와이셔츠 ...
- "도망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내 마지막 그림이 된 <이별>의 진짜 스토리는 바로 이것이다. 꼬맹이로 묘사한 나와 신차선녀가 느티나무 아래에 섰고 떠나는 형이 보리밭을 걸어가는 그림. 그림의 숨은 의미는 도시에서 온 아들에게 먹을 걸 싸 보내는 시골 어머니의 정성이 아니었다. 긴 세월에 걸쳐 남의 귀한 아이들을 학대하고 괴롭히고 고통을 줬던 악녀를 그림으로라도 남겨 잊고 싶지 않았던 것, 이게 바로 내 진심이었다. 사체 유기를 지시해 놓고 유기자의 동생을 인질로 잡은 희대의 악녀가 하실옥이란 여자였다.
- 하지만 <이별>에서 가장 리얼하게 묘사된 인물은 형이었다. 그날, 덕삼의 시신 조각이 든 보따리를 들고 절망적으로 보리밭을 가로지르던 형은 그림에서와 똑같이 하늘을 향해 구슬프게 울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형의 통곡이었다. 형이 그토록 비통하게 울부짖은 이유는 뭘까. 엉망진창이 된 인생 때문이었을까? 차라리 죽고 싶어서였을까? 뒤에 남은 나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조차 어려운 현실 때문이었을까? 이 세상에 생지옥을 만들어놓고 대책 없이 가버린 부모님이 원망스러워서였을까? 아니면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 왜 당신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습니까'하고 신을 원망한 걸까?
- 그가 누군지 몰랐으나 미술계의 대화백으로, 고향이 섭주였다. 그 유명한 붕평마을 정자를 직접 디자인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천주교 신자였고 신부님과도 안면이 있었다.
조창화 화백은 내 스케치를 세심히 보더니 나의 과거 이야기를 경청했고, 나를 미술학원에 보내주었다.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가 30년 넘게 내가 닦아온 약간의 성공담이다. 사람들은 나를 풍경화의 달인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나는 형이 생각나 그림을 그려왔을 뿐이다.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조창화 화백만이 이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 같았다. 형이 말했던 듣는 귀, 안 듣는 귀, 못 듣는 귀 이야기를 조 화백도 했으니까.
- "아마 자네 형은 진심이었을 거야. 그 진심을 외면하면 안 돼. 섭주로 돌아가지 마.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딨냐는 소리가 통하지 않는 곳이 섭주야. 나 역시 붕평마을을 설계하고 그렸을 때 정말 기이한 일을 많이 겪었어. 그 후로 두 번 다시 그곳을 찾지 않았지. 원래 섭주라는 데가 기억해야 할 장소가 아니라 잊어야만 할 장소거든. 형이 말한 듣는 귀, 못 듣는 귀, 안 듣는 귀. 자넨 그 뜻을 아나? 두려움의 마을 섭주 懾州의 '두려워할 섭 懾'이 바로 그거야. 마음은 하난데 귀는 셋이나 되지. 형의 마음은 셋이 아니야. 무녀를 위한 것도 아닌,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닌, 오직 자네를 위한 마음 하나지.
섭주에서 오는 소문은 자네 귀로도 흘러들어 오겠지. 자네는 형이 생각나 일부러 그쪽을 향해 귀를 돌리겠지. 들려오더라도 어떤 것은 안 듣는 척, 어떤 것은 못 듣는 척해야 해. 자네가 나서지도 말고 사람을 보내지도 마.
형이 자네를 찾을 날이 있을 거야. 그때까지는 잊고 살아. 지금의 위치에서 건강히 잘 살아가는 것만이 형을 위한 길이야."
- 나는 섭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 귀를 의도적으로 안 듣는 귀로 만든 뒤 섭주에서 날아오는 소식을 차단했다. 그럴수록 한쪽 귀가 불구가 된 형이 떠올랐다. 나의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 수익으로 서울에서 기반을 닦을 때도 내게 떠오른 건 형이었다. 돈을 벌고 명예를 얻었지만 풍족함 가운데 있어도 추위를 느꼈고, 산해진미가 몰려와도 형의 비쩍 마른 얼굴만이 떠올랐다. 모두가 웃지만 나는 울었고 모두가 잠자리에 들 시간에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 정나영이 비망록을 다 읽었을 때는 어느덧 비도 그치고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깊은 한숨을 토해낸 그녀는 냉장고를 열어 독한 양주를 비웠다. 이 믿지 못할 이야기에 영혼의 일부가 흔들렸다. 그러나 이정욱을 위해 모험을 걸 자신은 없었다. 믿지 못할 이야기였지만 이상하게 믿음이 갔으니까.
이정욱 화백은 왜 섭주역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걸까? 신차대장군에게 당해서? 이제는 노인이 되었다던 그 무녀의 짓인 걸까? 아니면 약한 몸으로 감당 못 할 너무나도 큰 분노가 그 여자를 만나기도 전에 그를 쓰러트린 건 아닐까?
"이런 생각에 너무 깊이 빠지면 불행을 몰고 올 수도 있어. 세상엔 결코 알아서는 안 될 이야기도 있는 법이지."
그녀는 더 이상 이정욱에 관해, 그의 죽음에 관해 알고자 하는 마음을 접었다.
- 다음 날 출근한 정나영은 이정욱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비망록을 파쇄기에 갈아버렸다. 영화로 만들어지고 소설로 출간되어 억만금의 가능성이 있는 비망록이라도 살이 낀 물건은 없애버리는 게 맞다. 이것이 점을 치고 운수를 보고 굿도 믿는 정나영의 결론이었다. 파쇄기에 갈려지는 종이들이 화장 후 유골함에 담기는 형제들의 뼛가루 같았다. 마음속으로 명복을 빌고 마지막 종이 하나까지 없어지자 그녀는 아무도 없는 옥상에서 준비해 온 팥과 소금을 스스로에게 뿌렸다.
- 마을 사람 몇이 오랫동안 외부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은 그 집에 발을 들이게 했다.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신당 안에서 눈을 뜨고 죽은 신차선녀 하실옥의 시체였다. 신차대장군의 벽화들이 모두 떨어져 나갔는데 그중 풀을 짙게 바른 탱화 하나가 얼굴에 꽉 밀착해 질식사를 일으킨 것으로 보였다. 제단 위에 있던 장군의 등신상도 넘어져 박살이 난 상태였다. 신차대장군이 신차선녀를 떠났다는 상징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 그러자 용감하게도 신차선녀를 향해 험담을 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정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던 고물상 주인의 아내였다.
"악독한 것! 물귀신도 못 죽인 년을 기어이 그 불쌍한 애들이 데려갔나 보네. 천벌 받은 거야!"
"간밤의 비명소리가 그거였나? 정환이 정욱이 혼백이 저 벽화를 뜯어 코하고 입을 막았나?"
"불쌍한 애들 끝내 한을 품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노?"
"둘째 애도 저 할망구가 죽였을 거야. 서울 가서 성공했다더니 뭐 하러 돌아와서..."
- 형제가 살아있을 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동네 사람들은 신이 죽고 신의 대리인마저 죽자 참아왔던 욕설을 퍼부어댔다. 나 혼자 욕하는 게 아니라 다 욕한다는 군중효과가 안심보험 역할을 했다. 섭주 사람들, 그중에서도 신차선녀와 가장 가까운 이웃 사람들은 이 결말의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인과응보라는 격언이 긴 세월을 거쳐 너무 늦게 이뤄졌음을 직감한 것이다.
- 그러나 신차선녀가 살아있을 당시, 너무 지독한 고통을 겪은 두 아이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은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가해자가 확실히 저 세상으로 가자 비로소 입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신차대장군의 탱화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고 무섭게 그려진 눈이 자신을 쳐다본다고 생각하자 그들은 즉각 입을 다물었다.
- <지옥에 떨어진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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