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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메 마나부] 8월의 고쇼 그라운드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3. 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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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마키메 마나부 / 김소연
출판 : 문예출판사
출간 : 25.08.22


       

           

저녁 산책 하기 딱 좋은 날씨다.

가볍게 걸친 자켓도 마음에 들고, 약간의 습기를 머금은 포근한 바람도 기분 좋게 시원하다.

벌써 이런 봄밤인가 하고 살펴본 일기예보 앱에선 지금은 13도지만 주말 밤은 다시 4-5도로 추워질 거라고 경고한다. 도톰한 아우터들을 완전히 치우는 건 아직 좀 이른 것 같다.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한 매화를 보며, 이제 막 찾아온 봄을 즐기며,

마음속으로는 작열하는 태양과 열기를 그리워한다.

막상 그때가 오면 한껏 흐늘흐늘 퍼진 채로 가을 바람을 고대할 거면서.

 

마키메 마나부의 신작이 나왔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모가와 호루모>, <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 <사슴 남자>. 

작품들 안에선 다양한 계절이 등장하는데도, 어쩐지 여름이 함께 떠오르는 작가 마키메 마나부.

 

이번에는 한껏 불타오르는 교토의 겨울과 여름을, 극을 오가는 두 계절에 빛나는 젊음들을 그려냈다.

여전히 '어딘가 미적지근한',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 기묘함을 한 스푼 얹은 유쾌한 이야기들이었지만 이번에는 가볍기만 하지는 않았다. 

 

'이대로 괜찮을 걸까' '잘 살고 있는 걸까' '생이란, 더 불타올라야 하는 게 아닐까'

 

12월과 8월의 두 주인공들을 보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울컥하게 된다. 

그건, 상대와 나를 구분한 채 서로의 입장을 맞춰보는 건조함과는 완전히 반대편에 위치한 열감이다.

나 역시도, 우리 역시도- 생에 한 번쯤은 느껴봤을- 혹은 느껴봤으면 하는-

뜨끈하게 차오르는 습기와 후끈함.

젊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특성이 아니라, 이것들이 있기 때문에 젊다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미 끊어진 생을 다시 이어 붙여서라도 한 번 더 즐기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을 찾았던 삶이라면.

그런 삶이야말로 '제대로 산' 삶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간 곧바로 소심한 몇 마디를 덧붙이게 된다.

하지만 그 표현형이 모두에게 같을 필요는 없을 거야.

왼쪽 오른쪽을 구분하지 못해도, 이래도 되는 걸까 불안해하면서도,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는 걸로도 괜찮지 않을까.

불씨는, 찾는 게 아니라 찾아오는 걸지도 모르니까.

그저, 평생 기억하며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목적일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작은 진동이 느껴진다.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처럼, 더 뜨거워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일단은 맛있는 것부터 먹으면서 생각해 볼까.

누군가가 한여름의 무대로 초대해 줄지도 모르니까.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어 질지도, 모르니까.

 


   

 

- 교토에서 처음 먹는 저녁 식사라서 뭐랄까, 일본 요리다운? 교토스러운? 그런 고상하고 품위 있는 음식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여관 식당 테이블에 놓인 음식은 흰살생선 튀김에 된장국, 샐러드, 밥과 장아찌. 가정식 백반과 별다를 게 없는 메뉴여서 완전히 실망 중인데,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유즈나 주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 "드디어 결전의 날이 내일로 다가왔습니다. 벌써부터 긴장한 친구도 있을지 모르지만 많이 먹고, 푹 자고, 최고의 컨디션으로 임합시다."
주장은 누가 봐도, 누구보다 긴장한 표정으로 이렇게 ... 

- "맛있네, 이거 무슨 장아찌지?"라면서 초록색 채소로 만든, 잘게 자른 장아찌를 오도독오도독 씹던 사오리가 갑자기 목소리 톤을 높였다.
"아, 깜박했다. 엄마가 선물로 센마이즈케(얇게 저민 교토산 순무로 만든 초절임이다) 사 오라고 했는데. 어디서 사는 게 좋을까? 근데 도대체가 이상해. 교야채 京野莱란 말이 있지만, 그 채소가 특별히 교토 都에서만 자라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도 이름 앞에 '교'를 붙이기만 하면 고급스런 느낌이 난단 말이지. 이런 게 바로 교토 매직이야."
그러자 평소에는 시끄러울 정도로 수다스러우면서 오늘은 식사 자리에 앉은 뒤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고코미 선배가 갑자기 스위치가 들어온 것처럼 "나도”라며 우리 쪽을 바라봤다. 
"나는 할아버지가 단밤 사 오라고 했는데 상점가 아케이드 지나서 맛있는 단밤 가게가 있는 거 같은데, 어느 출구로 나가야 하지? 아케이드가 두 개 같던데. 신교고쿠랑 데라마치였나?"

- 이때부터 옆 테이블까지 넘나들며 각자 부탁받은 선물 리스트를 소개하는 분위기가 되면서 경직됐던 분위기가 단번에 편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사카토는 뭐 부탁받은 거 있어?"
유즈나 주장이 물었다.
"향이요. 여기에 유명한 향 가게가 있나 봐요. 그치만 찾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내가 대답한 순간, 모두의 입에서 "아아" 하는 탄식이 흘러나오는 걸 들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오리, 같이 가줘라."
유즈나 주장의 말에 사오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명심하겠사옵나이다"라고 대꾸했고, 나는 "재미없거든"하고 겸연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 페이지를 펼치니 거기에는 우리 현의 남자대표팀과 여자 대표팀이 각각 위아래로 나뉘어 소개되어 있었다.
분명히 우리 학교 칸에는 정규 선수 다섯 명 외에 후보 선수 세 명의 이름이 올라 있었고, 사오리와 함께 내 이름도 인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건 '이름만 빌려주었을 뿐', 설마 진짜로 달리게 되리라고 꿈꾸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모, 못해요. 뭣보다 후보 중에 2학년 선배가 있는데 1학년인 제가 나가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1학년 짜리를 넣자는 건 고코미 생각이야. 알겠니? 고코미는 내년에 꼭 여기 다시 오겠단 각오야. 내년까지 생각해서 1학년 멤버를 한 명 넣어 실전 경험을 시켜야 한다고 하더라. 보통은 그런 말 잘 못해. 나도 혼자였다면 그렇게까지 과감한 결정은 하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고코미가 말을 꺼내줘서 결단을 내릴 수 있었어."
선생님은 마치 매초 결의가 더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고양이같이 구부정했던 등이 말을 하면서 점점 꼿꼿해져 간다. 

- "도리마루 거리, 거기서 반환점을 돌고, 다시 무라사키아카루이 거리, 호리카와 거리, 기타오지 거리. 아아, 복잡해."
지도를 보고 실전 코스를 따라가며 반환 지점을 정하는데 모두 뒤죽박죽이었다. 여기는 어디지? 나는 어디를 걷고 있는 거지?
"도리마루가 아니라 가라스마루야. 잘 봐."
옆에서 걷던 사오리가 고쳐주길래 "응?"하고 지도를 들여다봤다. 확실히 '도리마루 鳥丸 거리'가 아닌 '가라스마루 烏丸 거리'라고 표기되어 있다.
"'烏'라는 글자가 '鳥'보다 가로획이 하나 적으니까 더 쉬울 텐데, 왜 이게 더 어려운 한자 같지?"
나는 별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까마귀는 눈이 까매서 안 보이니까 '새 조 鳥'에서 눈동자 부분을 뜻하는 가로획이 사라져서 '까마귀 오 烏'라는 글자가 된 거 같아."
사오리가 생각지도 못한 깨알 지식을 늘어놨다.

"그거, 진짜야?"

- 너무 그럴듯한 이야기라며 소풍 기분을 감추지 못하는 우리에게, 앞서 걷던 히시 선생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소풍 나온 거 아니다. 그리고 '가라스 마루'가 아니라 '가라스마'라고 읽거든. 그리고 '시메이 紫明 거리'. 길이름이 '무라사키아카루이'일 리가 없잖니." 
우리 둘은 머쓱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알겠어? 2구간 후반부하고 반환점 돈 다음인 3구간 전반부, 코너를 여러 번 도니까 응원 지점을 잘 기억해 둬. 그리고 담당을 정하겠지만 너희들, 내일은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오는 거야." 

- 대부분의 부원이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교토에 와봤지만, 분명히 여기는 모르는 길이다. 내일은 코스 중간이 아니라 경기장 안쪽 팀으로 배치되면 좋겠는데... 그러면 숙소에서 출발할 때부터 선배들 옆에 꼭 붙어서 오면 되니까 골인하는 순간도 볼 수 있고... 등등 덜떨어진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사건은 터졌다.

- "아까 거기 하고 여기 중에 어디가 더 앞이 잘 보이지?"

응원 지점을 반환점 전에 만들까, 지나서 만들까. 전후 레이스의 흐름을 더 잘 예측할 수 있는 장소를 골라야겠지.


- 몸이 저절로 스타트 자세를 취한다.
아스팔트를 차는 운동화 소리가 부쩍 가까워지고, 피부에 닿은 눈이 녹은 건지 아니면 땀인지, 흥건히 젖은 미리 선배의 얼굴이 훅 하고 들어왔다.
괴로울 텐데 미소를 띠고 있다.
"곧장 뛰다가, 한 번만 오른쪽!"
새된 목소리와 함께 미리 선배는 어깨띠를 건네주며 내 등을 팡, 하고 때렸다.

- 니시오지 거리를, 마냥 내리 달렸다.
교토에서는 도로가 바둑판 격자무늬처럼 생긴 특징을 살려 도로 이름 뒤에 '윗 상 上'과 '아래 하 下'를 붙여 주소로 쓰는 관례가 있는 것 같다.

- 역자 주 : 교토의 시가지 거리는 바둑판처럼 모두 직각으로 교차하는 특징을 살려, 주소를 표기할 때 일반적인 표기법 외에 남북의 거리 이름과 동서의 거리 이름을 조합하여 그 교차한 곳에서 북쪽으로 갈 경우는 '上ル'(아가루)', 남쪽으로 갈 경우는 ‘下ル(사가루)', 동쪽으로 갈 경우는 '東入ル(히가시이루)', 서쪽으로 갈 경우는 '西入ル(니시이루)'라고 표기한다

- 이 '상'과 '하'는 위치 관계를 나타내는 기호 대신 사용하지만 나는 말 그대로 니시오지 거리를 계속 내리달렸다.
왜냐하면 마지막 5구간은 니시오지 거리의 완만한 내리막길 중간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 "사카토, 브레이크 걸지 마. 어차피 잃을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는 거야!"
히시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며 경기장에서 셔틀버스에 올라타는 나를 배웅했는데, 내리막길은 속도가 붙는 만큼 허벅지에 부담이 크다. 다시 평지가 나왔을 때 갑자기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 차이를 계산하면서 달릴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코스를 연습 달리기조차 해보지 않은 나한테는 애초에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렇게 할 수 있을까?' 

- "녀석들 목소리도 들었어?"
"목소리라... '단칼에 쳐버리겠어'라면서 소리를 질렀던 거 같기도..."
문득 든 생각인데, 이 사람 굉장히 예쁘다. 가라아게를 넣기 직전, 입을 벌린 채 움직임이 멈춰 있는데, 그래도 예뻐 보이니 틀림없는 미인이다. 

 

- "그 사람들 조금 이상했어요. 왜 아무도 보지 않는 그런 곳에서 열심히 눈에 띄려 했을까요? 그렇게 옷까지 제대로 갖춰 입고서."
아라가키는 가라아게를 입에 넣고 천천히 씹으며 말했다.
"녀석들 모습이 어땠어?"
심문하는 듯한 말투다.
"모습이요?"
옆에서 뛰었으면 같은 걸 봤을 텐데,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일고여덟 명 정도였고, 다 남자였고,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깃발을 들고 있었다, 맞다, 상투를 틀고 있었다, 헬멧 같은 걸 쓴 사람도 있었다,라고 도중에 생각난 기억까지 보태서 말하고 있는데 아라가키는 어딘가 멍한 표정으로 내 얘기를 듣고 있었다. 

- "신센구미 자체보다는 검(?)을 더 좋아하는 거 같지만. 아무튼 그 녀석이 하도 가자고 귀찮게 굴어서 오전에 부원 전체가 미부 壬生까지 갔어. 거기에 신센구미가 이용한 진영이랑 무덤 같은 게 있거든. 지도에서 보니까 우리가 달렸던 니시오지 거리 하고도 꽤 가깝더라고. 딱 그 미부에서 니시오지 거리로 나온 그 지점이야. 내가 그들을 본 게."
"혹시..., 진짜 신센구미가 미부에서 나와서, 우리랑 함께 달렸다는 거예요?"
"그럴지도 몰라."

 

- "신센구미가 지금도 있어요?"
엥? 하고 아라가키 선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카토, 너 바보냐?"
가차 없는 비난으로 한 대 맞았다.
"그, 그러니까 지금, 진짜 신센구미라고..."
"내 말뜻은 옛날 신센구미를 진짜로 본 게 아니냐는 거지. 동영상에 찍히지도 않았고."

 

- 상대가 뭘 주장하려는 건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입에서는 제멋대로 반론이 튀어나왔다.

- "그, 그치만 신센구미 사람들은, 모두 파란 조끼 같은 걸..., 우리가 입는 코트보다 좀 더 하늘색 같은 옷을 입었잖아요. 기념품 가게에서도 그런 일러스트가 그려진 신센구미 상품을 많이 봤는데, 내가 본 사람들은 분명히 '誠' 깃발을 들고 있기는 했지만 옷은 거무스레했다고요."
"청록색 진바오리 말이지. 하지만 정말로 그 진바오리를 입었는지 어떤지는 자료에도 기록이 없고, 최근에는 시대극에서도 안 입는 거 같던데. 이건 아까, 미부에서 주워들은 거야."

 

- 역자 주 : 진바오리. 비바람과 추위로부터 갑옷을 보호하기 위해 입던 소매가 없는 겉옷이다. 원래 전장에서 갑옷 위에 걸쳤지만 17세기 이후에는 전장이 아니더라도 무사의 상징으로 걸쳤다.

 

- "신센구미는 아주, 아주 옛날 사람들이죠?"
"음, 160년 정도 전?"
"그럼, 우리가 죽은 사람들을 봤다는 거예요? 말도 안 돼!"
흥분했는지 음 이탈까지 내며 말하는 내게,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아라가키 선수이면서, 오히려 놀리는 듯한 눈빛으로 "그치만 한심한 대학생이 코스프레 놀이를 한 것보다는 그게 더 낫지 않아? 진짜로 있을지도 몰라. 여기는 교토니까"라며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투로 이어 말했다. 
어제보다 훨씬 따뜻한데도 섬뜩한 감촉이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뭐, 이런 건 전혀 없다.
"에이, 그게 뭐야?"
확 김이 빠진 느낌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 "찾았다, 사카토!"
그때, 저 앞에서 하이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사오리의 모습이 보였다.
"아, 다행이다. 무사히 만났네. 역시 사오리야."

무심코 중얼거리는 내 옆에서 "혹시, 지금도 미아 상태였어?"라며 아라가키 선수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곧장 달려올 줄 알았는데, 사오리는 가라아게 가게를 발견하자 급정거를 했다. 몇 번인가 나와 눈빛을 교환한 다음, 사오리도 배가 고팠는지 자석에 이끌리듯 대기 줄로 빨려 들어갔다. 

- <12월의 미야코오지 마라톤>



- 8월의 패자가 되고 말았다.
솨솨, 매미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쏟아져 내리는 가모강 강변길을, 자전거를 타고 따라 내려가면서 나는 통감했다.

 

- 예정대로라면 강은 강이지만 시코쿠에 있는 시만토강에서 시원하게 카누를 타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교토에 있다. 왜인가.

 

- 역자 주 : 시만토 강. 일본 남부에 있는 시코쿠섬의 고치현 서부를 흐르는 강으로 일본 3대 청류 중 하나다.  


- 편의점 간판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학교 식당에서 중국식 덮밥을 입에 쑤셔 넣고 있는데, 뒷자리에서 여학생이 가모강 언저리에 앉아 있자니 하류 쪽에 신기루가 보였다는 둥 교토 타워가 물 위에 떠 있었다는 둥 재잘거렸다.

 

- 8월의 교토 더위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그저 패자가 될 뿐.
연일 계속되는 더위에 지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뇌에서 온갖 긍정적인 의사와 의욕이 녹아내리고 콘크리트에 들러붙은 그림자와 함께 증발한다. 


- 누군가는 '교토는 독이 든 늪과 같다'라고 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상냥한 미소의 유혹에 못 이겨 바둑판처럼 생긴 이곳으로 끌려 들어오면 그걸로 끝. 풋풋했을 젊은이들의 마음은 애매하게, 확실히, 병들어간다. 안 그래도 물리적 사우나 같은 동네에 살면서 축축하고 독한 기운이 자욱한 정신적 사우나로 마음을 단련한 지 어언 3년 하고도 4개월 하고도 일주일. 내 몸에도 완전히 독 기운이 퍼진 건가. 4학년 여름 방학, 원래라면 눈이 뒤집혀 취업 활동을 해야 하는데, 아니 몸부림쳐야 할 시기인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고, 태만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도 끄떡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 

- 저녁 6시가 다가오는데 무더위는 전혀 수그러들 기색이 없다. 동네의 공기는 절망적일 정도로 끈적해 티셔츠가 등에 척 달라붙는다.
8월의 더위에 지고, 교토라는 도시에도 지고, 왜 나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산조키야마치를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는가.
그건 다몬이 야키니쿠를 사주겠다고 갑자기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 다몬은 돈이 있다. 자기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인지, 아니면 웨이터로 일하고 있는 기온(교토의 게이샤 지구이며 전통 가옥, 쇼핑, 관광지로 유명하다) 클럽의 마마가 준 용돈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공짜로 고기를 먹게 해 준다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다.

- 대강의 이야기가 끝났을 즈음, 다몬은 두 번째 맥주잔을 비우고는 상기된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말했다.
"뭐가, 역시냐?"
"네 스케줄은 이제 알겠어. 오봉 무렵까지는 아무 예정도 없고, 8월 내내 교토에 있는다는 거지."
"무슨 말이야?"

"내 얘기야. 연구실 일로 상의할 게 있다고 했잖아."
다몬은 직원을 불러 잔을 들어 보이며 "한 잔 더요"라고 했다.

 

- "나 5학년이잖아, 유급생."
다몬은 천천히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알고 있어."
"너한테는 아직 말 안 했는데 회사에 내정됐어."
"오, 그래?"
언제 내정까지 됐나, 완전히 허를 찔린 내게 다몬은 ...

- 역자 주 : 오봉. 매년 양력 8월 15일 전후로 치러지는 일본의 명절로 조상의 영혼을 모시는 날이다. 일본의 신도 신앙과 불교 문화가 결합한 축제로 이날 사람들은 성묘를 가거나 지역의 광장이나 신사 등에서 봉오도리 춤을 춘다. 오봉이 끝날 때는 영혼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배웅하는 불인 오쿠리비를 피운다. 

- "왜 갑자기 야구 얘기를 하는 거야?"
시커멓게 탄 피망을 "웩" 하고 인상을 쓰며 다 먹었다.
"내가 너한테 3만 엔 빌려준 거 있지?"
또 화제를 바꾼다.
호호, 하고 나도 모르게 입을 오므리며 귀여운 표정을 짓는 내 앞에서, 다몬은 좌선 중인 스님 같은 잔잔한 표정을 지으며 "인간이란 말이야, 돈 빌린 건 잊어도 빌려준 돈은 못 잊지"라며 온화하게 세상의 진리를 설파했다.

-"내일모레야."
"안 돼, 그렇게 빨리는 못 갚아."
"아니, 내일모레 시합이 있어."
"시합? 무슨?"
"당연히 야구지. 너는 우리 팀원으로 시합에 나가는 거야. 설마 여태 3만 엔이나 갚지도 않고 있으면서 내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겠지!"

 

- 자, 나는 탄 채소를 먹을 테니 너는 고기를 먹어,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라며 다몬은 갓 구워진 안창살 한 점을 내 소스 접시에 올려놓았다.
"공짜보다 비싼 건 없는 법이야, 구치키 군."
다몬은 오늘의 두 번째 세상의 진리를 설파했다.

- 교수의 부탁, 즉 졸업 논문의 교환 조건은 이랬다.
[다마히데 배에서 우승할 것]
다마히데 배가 대체 뭐지?
그건 야구 대회 이름이었다.

- "야구? 이렇게 녹아내리게 한창 더운 날씨에, 야외에서 야구라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난 절대 싫어."

괜찮아,라고 다몬은 한층 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경기가 아침 6시니까, 그렇게 덥진 않을 거야."
"6시? 농담하지 마. 당연히 못 일어나지. 그 시간에."

너무나 비상식적인 말에 나는 맹렬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 당연한 흐름과 같은 크기의 당연한 이유로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3만 엔이라는 빚에, 이렇게 호사스러운 야키니쿠의 은혜까지.

-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비 내리는 토요일이었다.
데마치야나기역에서 나오자마자 있는 가모 대교 아래에서 우산을 쓴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이별을 통보받았다.

- "너한테는, 불이 없어."
이유를 알려달라고 부탁하는 내게, 그녀는 긴 침묵 끝에 어두운 표정으로 내 가슴 언저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타고 남은 재도 없어. 처음부터 그냥 새까맸어. 아니, 새까맣다는 색조차 없는지도 모르지."

- 그녀는 나와 동갑이었다. 현역으로 합격했기 때문에 이미 졸업해서 봄부터는 오사카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사회인이 된 후 싫든 좋든 갑옷 같은 것을 조금씩 걸쳐가고 있었고, 나는 일찌감치 취업 활동을 포기한 채 모든 게 벗겨져 나가고 있었다. 그런 우리 둘 사이에 골 같은 게 파이고 있다는 건 나도 느끼고 있었다.
시간 개념을 예로 들면, 그녀가 휴일에 계획한 일이 내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불발됐을 때, 전부를 포기한 듯하던 그녀의 어두운 눈빛...

- 다리 난간에 손을 얹으니 비에 젖은 차가운 돌의 감촉이 전해졌다. 강 표면에 비구름이 비쳐 부루퉁한 표정이 된 가모강 강줄기를 내려다보면서, 시만토강에 가기로 한 계획은 없던 일이 되겠구나, 뭐 별거 아니겠지, 같은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싫어지기 전에 헤어질래."
눈을 피하지 않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도망치듯 먼저 눈을 피한 건 나였다.

 

- 청각적으로도, 시각적으로도 아직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을 더듬으며 강가에서 가모 대교로 올라갔으나 이별을 당한 장소를 지나가고 싶지 않아서 도로 너머의 반대편 길을 택해 다리를 건넜다. 
그날 이후 그녀에게 연락은 없다. 나도 연락하지 않는다. 그녀가 말한 이별의 이유를, 나는 아직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듯도 한데,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을까 생각해 봐도 바로 막다른 길에 부딪히고 만다. 물론 지금의 내 상태가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불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확인할 ...

- 가모 대교를 건넜다. 그녀와 헤어진 곳에는 시선을 주지 않고, 오른쪽에 있는 가모강 델타라고 불리는 삼각주를 바라보며 강을 건너니, 이런 아침 댓바람부터 강가에서 체조를 하거나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 체조나 조깅은 혼자서 할 수 있다. 하지만 야구는 자기 팀과 상대 팀을 합해서 최소 열여덟 명의 멤버가 필요하다. 정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까? 이건 빚을 갚을 생각도 전혀 없어 보이고 불성실하게 대응해 온 나에 대한 징벌로 다몬이 꾸민 장난이 아닐까. 현장에 도착해도 개미새끼 한 마리 없는 거 아닐까...

아직 졸음이 안개처럼 표류하는 머리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고쇼를 둘러싸고 있는 산울타리를 따라 곁길로 들어서니, 한없이 예스러운 느낌의 문이 나타났다. 
기둥에 '石薬師御門'이라는 목판이 걸려 있고, 검은 징이 잔뜩 박혀 있는 문이 안쪽을 향해 열려 있었다.
목적지는 고쇼G.

- 역자 주 : '石薬師御門'. 이시야쿠시고몬. 교토고쇼를 둘러싼 정원인 교토교엔에 있는 아홉 개의 문 중 하나다.

 

- 애초에 고쇼G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쇼 그라운드'의 줄임말, 즉 교토고쇼 부지 안에 있는 운동용 광장을 뜻한다.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는 나도 '거짓말이겠지' 했던 기억이 난다. 교토고쇼라 하면, 역대 천황이 살던, 소위 말하는 일본 역사의 중추다. 그런 중요한 장소에서 야구나 축구가 가능하단 말인가. 
그런데 그게 얼마든지 가능하다.
광활한 고쇼 부지 이곳저곳에는 정비된 그라운드가 있고, 아마 별도로 정식 명칭이 있겠지만 일반 학생들 사이에서는 '고쇼G'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교내 게시판에 붙은 운동 계열 동아리 홍보물에서도 '매주 수요일에 고쇼G에서 연습'이라는 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 문안으로 들어가니 정면에 자잘한 자갈이 가득 깔린 넓은 길이 펼쳐져 있다. 거기에 한 줄로 가는 선이 그어져 있다. 교토 시민이 매일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서 생긴 바큇자국이다.

 

- 웃으면서 "더 앞으로 와도 돼”라고 손짓으로 알려주었다.
공을 던지는 건 오랜만이다. 그래도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던질 수 있었고, 1루수가 되던진 빠른 공도 놓치지 않고 받을 수 있었다.
시합 개시 전, 다시 한번 홈베이스를 사이에 두고 두 팀이 정렬했다. 상대 팀 선수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양복을 입고 도열한 모습은 장소와 완전히 미스 매치에다가 위압감도 강했으나 가벼운 목례 타이밍에 "잘 부탁합니다" 하고 비록 술에 잠긴 목소리이지만 박력 있게 먼저 인사한 것은 오히려 저쪽이었다. 
아침까지 열심히 일했으리라고 추정되는 상대 팀 남자들은 양복 상의를 벗고 셔츠 혹은 티셔츠 차림으로 무척이나 눈이 부신 듯 눈을 가늘게 뜨며 타석에 섰다. 창백한 피부에 술기운이 남아 있음을 말해주는 붉은 기운을 띤 채 방망이를 휘두르는 모습은 멀리서 보기에도 흡사 태양 아래로 끌려 나온 흡혈귀 같았다. 

- 시합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끝났다.

- 맥도날드 2층에서 아침 메뉴를 먹으며 다몬은 바로 시합 얘기를 꺼냈다.
주장인 다몬은 유격수와 좌익수에 경험자를 배치했다. 그 전략은 완전히 적중했다. 상대 팀의 타격은 왼쪽 방향으로 집중되었다. 땅볼은 유격수가 재빨리 처리하고, 뜬공은 좌익수가 침착하게 잡아내고, 야구 경험자들이 아웃 대부분을 만들어냈다. 라이트를 담당하는 내 자리로는 4회까지 전혀 공이 날아오지 않았다. 이 정도로 우타자가 왼쪽으로만 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5회 수비에서 딱 한 번, 늦게 휘두른 방망이가 타이밍 좋게 공을 포착해 높은 뜬공이 됐고, 결국 내가 지키고 있는 오른쪽으로 날아왔다.

- "뜬공 낙하지점을 예측하기가 어려운데, 잘 잡았어."

그건 완전한 우연이었다.
탕-, 하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하늘로 날아오른 하얀 공이 시야에 들어왔지만 어디쯤에 떨어질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계속 한자리에만 서 있기도 뭣해서 일단 몇 발자국 앞으로 나갔는데 갑자기 공이 죽죽 길게 날았다. 당황해서 뒷걸음질 친 다음, 힘껏 까치발을 하고 글러브 낀 손을 허공으로 쭉 뻗으니 둔탁한 타격과 함께 공이 글러브로 안겼다.

- 승리의 요인으로는 우리 팀의 수비가 견고한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투수의 차이가 컸다. 상대 팀의 투수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했다. 취기가 남아 있는 건지 원래 조절이 안 되는 건지, 창백한 얼굴로 연속 볼넷을 내주어 타자가 출루한 상태에서 또 안타를 허용하는 식으로 순식간에 점수차가 10점까지 벌어졌다. 나조차 볼넷으로 두 번이나 출루했다. 그 두 번 모두 홈까지 귀환할 수 있었다. 

- "앞으로 시합이 네 번 남았어. 잘 부탁해."
한없이 스스럼없이 말한 뒤, 다몬은 에그 맥머핀을 먹어치웠다.
이 과하게 건강한 아침이 네 번이나 기다리고 있다. 나는 완전히 우울한 기분으로 오렌지주스의 빨대를 빨았다.

- 몇 명인가가 손을 흔들었다. 이에 샤오 씨가 절도 있는 중국어로 응하자 바로 중국어 답변이 들려왔다.
샤오 씨는 중국인 유학생이다.
왜, 내가 그녀를 아는가 하면 그녀와 같은 학부 세미나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는 대학원생이고 나보다 연상이다. 세미나를 담당하는 교수님의 연구실 소속이라나, 뭐 그런 이유로 옵서버 자격으로 세미나에 참여하고 있다.

- 세미나에서 샤오 씨의 인상은 한마디로 '무섭다'. 샤오 씨는 세미나의 유일한 독설가다.
이전에 사마천의 <사기>를 다룬 수업에서 '열녀 烈女'라는 단어가 나왔다(원전의 표기는 '列女'다). 대체 열녀는 어떤 분위기의 여성일까? 어쩐지 구체적인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아 여자 프로 레슬러 같은 느낌인가, 하고 멋대로 상상하고 있던 차에 등장한 사람이 샤오 씨였다.

 

- "독은 담아두고 있으면 몸에 해롭다."
그녀는 트위터로 세미나의 멤버를 소개하는 시간에 '좋아하는 말'이라며 중국의 고사성어인지, 그냥 개인적인 신조인지 모를 관용구를 언급했다. 
이 말처럼 샤오 씨는 때때로 세미나에 출석한 모든 일본인이 헉 놀랄 만한 독을 내뱉는다. 평소에는 나이 어린 학부생에게도 반드시 존대를 하는 등 대단히 언행이 온화한 사람인데, "그런 얘기, 더 해봤자 의미 없잖아요. 토론을 위한 토론이 되고 있습니다. 한가한가요?"라고 가차 없이 말의 언월도를 휘두른다.
열녀다...
여자 프로 레슬러와는 극과 극인 작은 체구이지만 세미나에서 본 그녀의 모습에 나는 직감했다.

- 사마천이 전하려고 한 뉘앙스와는 조금 다를지 몰라도, 그녀에게 현장 분위기 따위는 어차피 공기와 같다. 설령 상대가 교수라도 "그건, 잘 이해가 안 갑니다"라며 이론을 제기한다. 그 강인한 정신력은 한눈에 반할 정도였다.
그런 '열녀' 샤오 씨가 지난 학기 세미나 종강파티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교토의 여름 더위는 정말 최악이야. 여기 남아 있으면 패배자가 되는 거라고."

 

- 순수하게 야구가 하고 싶은 경험자 두 명이 남았을 뿐이다. 대체 작년까지 어떻게 팀을 꾸렸는지 정말 의문이다.
"지금까지 잘 버텨왔네. 애초에 이런 여름 방학에 사람이 모일 리가 없잖아."
"그건 교수님한테도 말했어. 오봉 전이라 고향에 가는 사람도 많고, 시합마다 아홉 명을 모으는 것도 무리라고."
"보스는 뭐라고 해?"
"웃으면서 '어떻게든 될 거야' 그러더군. 전혀 상대해주지 않아."

- 확실히 다몬의 보스 말대로 이틀 전 2차전은 샤오 씨와 또 한 명의 조력자가 막판에 합류해 준 덕분에 어떻게 넘어갔지만 오늘은 무리일 것 같다. 어쨌든 야근 때문에 한 명이 더 빠졌고 노랑머리 한 명만 참가한다. 상황이 어렵다. 참고로 가게에서 부르는 그의 이름은 하야토. 나이는 26세. 고등학교 시절 야구부 소속. 분명히 아직 숙취가 덜 가신 피곤에 찌든 얼굴이지만 고지식하게 양복 차림으로라도 오는 걸 보면 순수하게 투수가 하고 싶기 때문인 것 같다.  

- 자전거를 탄 그는 수줍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전처럼 소나무 아래에 자전거를 세웠다. 그러자 그를 뒤따라온 두 대의 자전거도 멈춰 섰다. 
흰 티셔츠에 작업복처럼 보이는 수수한 컬러의 바지. 그저께와 같은 모습으로 자전거에서 내린 '에이짱'. 그리고 뒤를 이어 두 사람이 자전거에서 내린다.
설마 이렇게 때맞춰 구원의 손길이 등장하다니. 반신반의하는 나와 다몬의 시선에 환영받듯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에이짱'은 "좋은 아침입니다" 하고 모두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며, "저, 후배들을 데려왔는데, 혹시 인원수가 부족하면..."이라며 뒤따라온 둘을 손으로 가리켰다.
"엔도입니다."
"야마시타입니다."
후배라는 두 사람은 둘 다 귀 위가 깔끔하게 면도되어 있었다. 깔끔한 짧은 헤어스타일에 박력 있는 목소리로 이름을 말하면서 꾸뻑 고개 숙여 인사했다.

- 사방은 소리 없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부족하면, 정도가 아니다. 그야말로 기적적인 구세주 등장 타이밍에 다몬은 멍하니 그 셋을 바라봤고, ... 

- 후배가 아니고, 야마시타가 공장에서 일하는데 야마시타 공장의 선배가 에이짱이고, 야구는 에이짱이 가끔 야마시타를 통해 하자고 하면 하고 있다, 자기는 야마시타와 같은 중학교 출신이며 그는 후배다,라고 셋의 관계를 알려주었다. 
"용케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올 생각을 했네요."
캐치볼이 끝나고 벤치로 돌아가는 중에 엔도 군에게 말을 거니, 오랜만에 야구가 하고 싶어서 왔다고 산뜻하게 하얀 이를 보이며 말했다. 야마시타 군과 함께 에이짱과 같은 흰 티셔츠에 작업복 느낌의 바지를 입고 있는 것은 여름 방학 때만, 야마시타 군의 소개로 에이짱의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서라고 했다. 

- 다시 한번 아홉 명이 둥글게 모였다.
"저쪽 오타 팀에 아는 학부생이 있어서 들은 얘기인데, 투수가 고시엔 출전 경험이 있는 거 같아. 우리 팀 하고 대전하려고 오타 교수가 사회인 리그에서 용병으로 데려왔다고 하네. 그리고 같은 사회인 리그 소속이 세 명 포함돼 있어?"
다몬은 우리가 선공이라는 사실과 새로운 정보를 알리며 떫은 표정으로 상대 팀을 쳐다봤다.
 
- 무슨 일인가 싶어 옆을 확인하니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에이짱을 바라보고 있는 샤오 씨의 얼굴과 맞닥뜨렸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던집시다, 그리고 이겨요!"
샤오 씨는 번뜩 정신이 돌아온 듯, 입가에 힘을 꼭 주며 박력 있게 주먹을 치켜들었다.
에이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을 받았다.

- 다몬이 멤버들에게 새로운 수비 위치를 전달했다. 공을 던질 수 없는 하야토 씨는 1루수에, 나와 샤오 씨는 내야로 이동시켰다. 만약 외야까지 날아온 타구를 우리가 처리하지 못하면 바로 역전 홈런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외야에는 경험자를 배치하겠다는 작전이다.
"기본은 우익수에게 맡긴다. 만약 공이 정면으로 날아오면 잡지 않아도 되니까, 몸 앞쪽으로 떨어뜨려. 그걸로 충분해."
다몬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머리에 얹어놓은 마스크를 내렸다. 앞쪽으로 떨어뜨리기는 상당히 어려울 텐데,라고 생각하면서 새 포지션인 3루로 향했다. 


-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다몬이 "침착해"라는 제스처와 함께 에이짱에게 공을 던졌다.
공을 받은 에이짱은 알았다는 듯 모자챙을 매만지며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타자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느낌이 많이 다른지 그 후에도 에이짱의 제구는 불안했고, 풀카운트에서 상대가 공을 지켜만 보는 바람에 볼넷을 허용하고 말았다. 
원아웃, 1루, 2루.
상대의 타순은 3번. 지금까지 우리를 마음대로 괴롭혀 온, 고시엔 투수 출신인 그가 성대한 환호를 받으며 타석에 들어섰다.
에이짱에게 맞은 3루타 복수를 직접 하려면 지금밖에 없다는 듯, 힘차게 방망이를 휘두른 다음, "얏" 하고 삼진을 잡았을 때보다도 더 크게 포효했다.
그에 반해 에이짱으로 말하자면, 이상할 정도로 침착해 보였다. 안타 하나면 역전이 되는 대위기인데도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듯 눈가에 희미한 미소마저 띠고 있다. 

- 에이짱은 제자리에서 폴짝 위로 뛰어 스트레칭을 한번 했다. 원래 자세로 돌아온 다음에는 가슴을 펴고 팔을 좌우로 벌리고, 어깨를 돌리고, 모자챙을 매만졌다. 이런 일련의 동작은 묘하게 그럴듯해서 투수라는 포지션에 익숙해 보였다.
1루와 2루의 주자를 힐끔 확인한 후, 에이짱은 투구 준비 자세에 들어갔다.


- 단, 3구였다.
그다음 들려온 고시엔 투수 출신 선수의 포효는 패배에 대한 분노였다. 이전 타자에게서 감을 잡았는지, 아니면 긴장이 풀렸는지 에이짱은 전혀 다른 사람 같은 좋은 템포로 잇달아 공을 꽂아 넣었다. 결코 공이 빠른 것 같지는 않은데, 타자의 타이밍이나 예측을 비껴가는 데 탁월했는지 대단히 간단하게 삼진을 잡고 말았다. 
수비진에서 일제히 환호가 터졌고, 저마다 큰 소리로 "투 아웃"을 외쳤다. 나도 소심한 승리의 포즈로 그 무리에 합류했다.
다몬이 내야, 외야 쪽으로 검지를 높이 들어 승리까지 아웃 수 '1'을 표시한 후, 한쪽 다리를 펴면서 포구 자세를 취했다.

- 방망이가 허공을 가르고, 공이 다몬의 포수 미트를 맞고, 백네트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공을 피하려고 심판까지 몸을 웅크렸다. 모든 사람이 너무 놀라 시간이 정지한 듯한 고요가 아침의 그라운드를 휘감았다.
세 번째 스트라이크를 포수가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낫 아웃' 상태다. 하지만 타자는 1루를 향해 달리지도 않고 방망이를 쥔 채로 망부석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철망을 맞고 튕겨 나온 공을 주운 다음 다몬은 처음에는 덤벼들 듯한 기세로 타자를 향했지만 상대가 달릴 의사가 없다는 걸 알고는 천천히 다가가듯 해 4번 타자의 팔에 터치를 했다.
심판의 시합 종료 선언이 울려 퍼지자 내야와 외야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 오랜만에 그녀, 전 여자 친구에게 라인 메시지가 왔다. 지금 고치의 본가로 가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멋진 시만토강 사진을 첨부했다. '오봉에는 뭐 해?'라고 묻길래 '야구하고 있다'라고 했더니 '어디서 해?'라고 물었다. '고쇼에 있는 메이지 천황이 태어난 곳 바로 옆에 있는 그라운드'.
간결하게 설명하니, '더운데 야구를 해?'라는 답이 왔다. 시합이 오전 6시에 시작이라 그렇게 덥지는 않지만, 그렇게 말하면 당연히, '왜 그렇게 아침 일찍부터 야구를 하느냐'라는 식으로 질문이 더 깊어질 것이다.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한테는, 불이 없어.'
그녀가 이별을 통보한 이유는 쐐기가 되어 아직도 내 가슴에 박혀 있다.

- 그녀는 고치에서 교토로 관광을 왔을 때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그녀 어머니의 근황을 일방적으로 전했다. 남녀 관계라는 것은 갑자기 단절되는 게 아니다. 다시 무 無로 돌아가려 완만하게 차츰차츰 사그라드는 것이리라. 지금의 라인은 그를 위한 의식이다. 그 증거로 그녀는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낼 만한 틈을 보이지 않았고, 나도 어떻게 따져 물어야 할지 몰랐다. 그 말은 그녀가 계속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겨우 찾아낸 말의 형태 같기도 하다. 이제 그녀에게는 과거에 존재했을 나에 대한 마음이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물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도 든다.
'야구 열심히 해.'
메시지와 함께 동글동글한 캐릭터가 방망이로 공을 치고 있는 스탬프가 전송되면서 대화는 끝났다.

- 교토에 와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여름의 살인적인 무더위와 겨울의 무자비한 추위를 번갈아 경험하면서 교토의 젊은이들은, 대장장이가 쇠를 새빨개질 때까지 달구고 그걸 다시 찬물에 담금질하듯, 좋든 싫든 기묘한 절삭력을 가진 인간도로 단련되어 간다.

- 오봉 연휴 기간에 젊은이들이 아침 6시부터 야구를 한다. 게다가 하루 걸러 총 다섯 경기. 이건 별나고 엉뚱한 게 아니라 그냥 '미친' 짓이다. 그래도 젊은이들은 이런저런 일에도 아홉 명이 모여 우직하게 시합을 해나갔다. 우리가 시합을 하는 같은 시간, 다른 네 팀도 다른 장소에서 대전을 펼쳤다고 하는데 인원수가 모자라 실격 처리된 경우는 아직 보고된 바 없다고 한다. 

- 왠지 어둡게 느껴졌다.
"괜찮아요?"
"커브는 가장 오래전에 발명된 변화구입니다. 어렸을 때 조개껍데기를 돌리며 던지고 놀던 야구 선수가 거기서 착안해 커브라는 변화구를 만들어냈어요." 
혹시 열사병은 아닐까 싶어 얼굴을 슬쩍 들여다보며 물어본 말에,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들며 지식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열사병 아니에요."
샤오 씨는 아, 하고 당황하는 내 손에서 메뉴판을 가져가더니 선수를 치며 말했다.
그녀는 지난번과 같은 '바지락 버섯'을, 나는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지난번에 말했잖아요. 지금 야구 공부하고 있어요."

잔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머금고 앞머리에 손가락을 넣더니, <게게게의 기타로>처럼 한쪽만 머리카락을 넘겼다.

- 태블릿 저편에서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운 외눈의 시선이, 어떤 표정의 변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이건, 에이짱... 이군요. 그쵸?"
혼란스러우면서도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아무리 봐도, 어제도 고쇼G에서 함께 야구를 한 얼굴이 있었다.
아니에요, 하고 샤오 씨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사와무라 에이지예요."

- "만약 구치키 군이 이 인물을 만났다면, 그건 사와무라 에이지를 만났다는 얘기입니다."
"뭐, 뭐라는 거예요? 사와무라 에이지라면 옛날에..."
"그래요."
말문이 막힌 나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는 조용히 태블릿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사와무라 에이지는 죽었어요. 1944년, 필리핀으로 가는 도중 미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습니다."

- "처음에 동생이 농담을 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동생은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 아니었고, 평소에 그런 공상 얘기는 전혀 하지 않는 아이였죠.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해 몇 번이나 확인을 했습니다. 동생은 완고하게... 동생이 당시에 아빠, 엄마와 함께 자던 방에, 진짜 토토로가 있다, 지금도 이불 위에서 자고 있다고 주장했어요. 그럼, 같이 보러 가자며 내가 의자에서 일어섰지요. 빨리 오라며 흥분해서 침실로 향하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토토로를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이상한 일은 누군가에게 말하면 사라져 버리니까요. 이상한 일은 호접몽처럼 그 사람에게만 찾아옵니다. 거기에 외부인을 초대하면 지금까지 통해 있던 길이 갑자기 막혀버려요. 어릴 적부터, 왠지 나는 그걸 알고 있었어요. 기억은 나지 않지만 비슷한 경험을 했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가령 동생이 진짜 토토로와 만났다 하더라도 나는 볼 수 없다, 뭔가가 우리를 방해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샤오 씨는 잠시 말을 끊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고개를 숙이면 바로 내려오는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옆으로 넘겼다.

- "미안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어요."


- 네 번째 아침에야 처음으로 다몬의 모닝콜 없이 일어날 수 있었다. 사실은 조금 더 자고 싶었는데, 아침 5시 넘어서부터 눈이 떠져 있었다.
긴장한 상태로 향한 고쇼G에는 다몬 혼자 백네트 옆에 서서 콧노래를 부르며 스윙 연습을 하고 있었다.

"어이."
방망이를 치켜든 그 표정은 참으로 해맑다.
그도 당연하다. 미후쿠 팀은 3전 3승으로, 현재 다마히데 배의 선두를 달리고 있으니까. 숙적인 오타 교수팀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접한 미후쿠 교수에게 "잘했네, 다몬 군"이라는 승리 치하의 문자가 득달같이 도착했다고 한다.
졸업을 향한 앞날이 열렸다는 정신적 충만감 때문인지 오늘 다몬은 얼굴빛이 좋다. 


- 얼마 후, 다몬의 연구실 후배 두 명이 졸린 듯한 얼굴을 이끌고 나타났고, 이어서 하야토 씨도 자전거를 타고 백네트 바로 뒤쪽으로 왔다. 그쪽도 가게가 휴무에 들어갔기 때문이리라. 평소의 양복 차림과는 다른 모습... 티셔츠에 반바지, 양키스 모자를 쓴 모습이 신선하다. 이틀 전 시합과 마찬가지로 에이짱을 비롯한 3인조를 기다리는 여섯 명이 모였다. 이 인원이 오늘, 다몬이 끌어모을 수 있었던 최대 인원이라고 한다. "1차전에 와주었던 사람들은?" 하고 물으니 "모두 교토 밖으로 나갔어. 오봉이니까"라고 체념한 얼굴로 답했다. 시합이 가능하려면 에이짱을 비롯한 세 명이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는 얘기다.

1루 쪽에서는 상대 팀 선수들이 일찌감치 캐치볼을 시작하고 있었다. 백네트에 걸린 스코어보드에는 이미 선공 '향련', 후공 '미후쿠'라고 적혀 있었다.
"'향목점연합 香木店連合'을 줄여서 '향련 香連'이야."

한자로 쓰인 상대 팀의 이름을 못 읽어서 우두커니 서 있자, 다몬이 답을 가르쳐주었다.

"향목점?"
"란자도 蘭麝堂라는 향 가게 사장이 팀 대표야."

- 그 순간, 아주 단순한, 왜 그들이 나타났는지 그 답을 얻었다.
"다들 야구가 하고 싶었던 거야."

- 목에 걸치고 있던 수건을 머리에 두르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라운드를 둘러싼 펜스의 그물 너머로 낮지만 완만한 능선을 그리며 자리 잡은 다이몬지 大文字산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옅게 떠 있고 그 아래 산 표면에 눌어붙은 듯 펼쳐져 있는 '大' 자를 보고 내일은 오쿠리비가 아닌가, 아니, 그전에 오늘이 종전일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 역자 주 : 오쿠리비. 매년 8월 16일에 교토의 다이몬지산을 비롯한 다섯 개의 산에서 열리는 고잔노오쿠리비 五山の送り火를 의미한다. 교토 4대 전통행사 중 하나인 여름의 풍물로 유명하다. 산마다 각자 다른 문자나 그림을 본뜬 불자리에 불을 붙이며, 타오르는 불꽃이 죽은 이의 영혼을 저세상으로 보낸다고 전해진다. '다이몬지'는 총 다섯 곳의 오쿠리비 중에서 가장 유명한 화톳불인데 최고의 감상지는 '교토고쇼'다.
 

- "만약 예정대로 오늘 아침에 시합을 했더라면 샤오 씨가 없는 우리 팀은 인원 부족으로 패했을 거야. 비 덕에 내일은 시합할 수 있고, 뭔가 신비로워."
분지가 통째로 조용히 어둠 속에 잠겨가는 마을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다몬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항상, 어떻게든 채워지는 느낌이야."
"뭐야, '느낌'이라는 건."
"전에 말했잖아. 다마히데 배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 교수님한테 오봉 연휴 기간에 아홉 명이나 모일 리가 없다고 하니까 어떻게든 될 거라며 웃었다고. 우리 연구실에는 성실한 녀석들이 많으니까. 그 얘기를 듣고, 어떻게든 되진 않습니다, 싫습니다, 시합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데 아침 6시에 고쇼까지 가다니! 라며 반항한 녀석이 있었거든."
"완전히 바른말이네."
"그러자 교수님이 그랬어. 걱정 말게, 항상 어떻게든 인원이 차거든, 지금까지 줄곧 그래 왔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고쇼로 가면 되네,라고. 그때는 터무니없는 조언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교수님 말대로 됐어. 네가 우연히 샤오 씨를 만났고, 샤오 씨가 갑자기 에이짱한테 같이 하자고 했고, 그리고 에이짱이 엔도 군하고야마시타 군을 데리고 왔잖아." 

- 중간부터는 다몬의 말에 맞장구를 칠 수 없었다. 다몬의 반바지 아래로 보이는, 햇빛에 탄 무릎을 바라보며, 만난 적 없는 다몬의 연구실 보스에게 의문 하나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지금까지 줄곧 그래왔다.'
어쩌면, 교수님은 조언이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게 아닐까?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인원수가 부족해도 어딘가에서 반드시 구원자가 고쇼G에 나타난다는 것을.

- "오랜만에 방 청소를 했거든. 가방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곳을 치웠는데 거기에서 떨어져 있는 명함을 발견했어. '기온 다마히데'. 아아, 그때 명함을 받았던가, 생각하면서 뒷면을 보니까 거기에 마마의 이름이 적혀 있더라고."
야마시타 세이코.
다몬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소리로 이름을 말하고, "마마는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는 것 같아"라며 개인 정보를 덧붙였다.

 

- 여기서 도출할 수 있는 얘기는 하나밖에 없다. 서로 말하지 않았지만 다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의 수긍을 했다.

- "나는 곧장 교수님에게 문자를 보냈어. '올해는 그가 왔나?'에 대한 답장에 그의 이름을 알려주세요...,라고. 오봉 연휴로 바쁠 거 같아 답장 같은 건 기대도 안 했는데, 오늘 교수님한테 답장이 왔어. 다마히데 마마의 오빠 이름이 쓰여 있었지?"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점화를 기다리는 들뜬 분위기가 그대로 씐 것 같은 주변의 술렁임 속에서 다몬의 목소리가 들렸다.

- 조심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어수선한 기운을 띠는 술렁임과는 동떨어져, 마치 다몬과 나 둘은 밤의 일부가 된 듯이 조용히 호흡했다. 부채의 면이 어둠 속을 나는 나방처럼 돌계단 여기저기서 팔랑거리고 있었다.
샤오 씨는 지금쯤 교토로 돌아왔을까? 돌아왔다면 지금 어디서 오쿠리비를 보고 있을까...
"구치키."
구부정하게 있던 등을 펴며 다몬이 입을 열었다.

맨 처음 던진 질문은 "왜 사와무라 에이지는 어깨를 다친 거야?"였다.

- 사와무라 에이지에 대해 처음 조사했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다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와무라 에이지가 스무 살 때 1차 소집이 됐다는 것. 군의 수류탄 던지기 대회에서 보통은 30미터를 던지면 잘한 건데, 90미터 이상이나 던졌다는 것. 아마 전쟁터에서도 수류탄을 여러 번 던지면서 어깨가 소모됐을 거라는 것. 프로 야구에 복귀했지만 2년이라는 공백은 커서 예전 같은 야구는 할 수 없게 됐다는 것...

 

- "수류탄이라는 게, 무겁구나."
"경식구보다 세 배 정도 무거운가 봐. 전쟁터에서는 사람이 살이 빠지니까, 근육도 빠져서 어깨에 엄청 나빴을 거야. 복귀했지만 예전처럼은 던질 수 없어서 사이드암으로 전향했지."
무릎 위에 올려놓은 다몬의 주먹에 어느새 힘이 들어가 있었다.
"최악이네."
다몬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뭐야, 그게. 나도 중학교 때 무릎 다쳤는데 자기가 잘못해서 다친 거라면 이해가 가. 그런데..."
여기까지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 그러고 보니 고쇼G에서 포수를 할 때 다몬은 항상 왼쪽 다리를 쭉 펴고 허리를 굽히거나, 아니면 엉거주춤한 자세로 공을 받아내던 모습이 생각났다. 양 팔꿈치를 구부리고 허리를 내리며 앉는 포수의 표준 자세를 본 기억이 없다. 지금도 오른쪽 다리보다 조금 낮은 계단에 왼발을 올리고, 무릎을 살짝 편 듯한 자세를 하고 있다. 나와 다몬이 다닌 고등학교는 야구부가 없었다. 그래서 다몬이 야구를 그만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 눈치채지 못하게 슬쩍 옆얼굴을 보니 분노를 억누르는 듯한, 그러면서 슬픈 듯한 검게 젖은 눈동자가 오쿠리비가 타오르는 곳이 아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내 얘기, 어땠어?"
흐음, 하고 다몬은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더니 그걸 지지대 삼아 손바닥 위에 턱을 괬다.
"오봉... 이니까."
"뭐야, 그게."
"오봉 때, 저 너머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잖아? 그런 게 아닐까?"
"그런 이치라면, 내일 시합에는 아무도 안 오겠네. 지금 한창 저 너머 세상으로 보내주고 있으니까."
그런가, 그거 곤란한데, 하며 다몬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웃었다.
"음, 여기는 교토니까."

- "스물한 살이라고 본인이 그랬어?"
"우리보다 한 살 어리네."
세 번, 왼손에 넣으려던 주먹의 움직임이 멈췄다. 잠시 그 자세로 멈춰 있다가, 목에서부터 신음하는 듯한 불확실한 소리를 내며 왼쪽 미트를 오른쪽 주먹으로 소리 없이 쳤다. 
"다들... 살고 싶었던 거야."

- 돌아갈 준비를 마치고, 돌계단을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밤의 바닥으로 잠겨가는 마을의 불빛 앞으로 지나는 사람들의 형체가, 마치 그림자처럼 비치는 것을 내려다보며 아아, 하고 소리 없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있잖아, 구치키. 우리, 잘 살고 있는 걸까?"
바로는, 대답할 수 없었다.
오쿠리비를 수놓았던 불꽃의 선은 이제 의지할 곳 없이 가늘어졌다. '大'자는 앙상한 뼈가 산화되듯 천천히 점으로 쪼개졌다. 불꽃은 이따금 생각났다는 듯이 크게 부풀어 올랐지만 이내 깜박이다가 정적 저 너머로 소리 없이 사그라들었다.
종료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 <8월의 고쇼 그라운드>




 

옮긴이의 말

 

... 마라톤을 소재로 삼은 이유는 구치키의 독백처럼 "여름의 살인적인 무더위와 겨울의 무자비한 추위를 번갈아 경험하면서, 대장장이가 쇠를 새빨개질 때까지 달구고 그걸 다시 찬물에 담금질하듯, 좋든 싫든 기묘한 절삭력을 가진 인간도로 단련되어"가는 교토의 젊은이들을 그려내기 위해서였으리라.

그리고 작품에 직접 언급된 단어는 아니지만 두 작품 모두 청춘에 대한 '애도'가 있다(여기서는 한일 간의 정치적, 역사적 견해는 잠시 접어주면 감사하겠다). 하층민 신분에서 시작해 천황의 역적으로 생을 마감한 12월의 신센구미는 '마코토'라는 신념에 청춘을 바쳤고, 열일곱의 나이에 메이저리거를 상대로 삼진을 아홉 개나 잡은 8월의 사와무라 에이지도 전쟁으로 청춘을 강제 종료당했다. 

<8월의 고쇼 그라운드>를 읽다 보면 어, 이거 앞에 나왔던 거 같은데 싶은 소재들도 있다.

우선 '파란 야구 모자'. 12월에는 역전 마라톤의 진행 요원이 썼고, 8월에는 샤오가 썼다. 다음은 '란자도'. 12월에는 사카토가 엄마 심부름으로 향을 사러 갔고, 8월에는 란자도의 사장이 '향목점연합' 팀의 대표로 등장한다. 8월의 선수들이 다마히데 배에서 우승하는 날 축하 파티를 열기로 한 '베로베로 바'는 산조키 야마치 거리에 있는데, 이곳은 신센구미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이케다야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불씨'도 빼놓을 수 없다. 12월, 내년에도 미야코오지를 달릴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을 때 사카토의 마음에는 불씨 하나가 날아와 박혔다. 그리고 8월, 여자 친구가 너한테는 없다고 단정해버린 그것을 구치키는 밤의 한가운데에서 움켜잡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 이 두 작품의 청춘들은 하고 싶은 게 있다! 내년에도 미야코오지를 달리고 싶고, 내년에도 야구를 하고 싶다!

역전 마라토너를 응원하는 연도의 관중처럼, 모든 곳에, 모든 청춘을 응원하는 호의와 환대가 있기를 바라며 이 책을 한국의 독자 여러분께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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