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해로
출판 : 북오션
출간 : 23.08.28
어라. 틀림없이 써두었던 글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약간은 억울하고, 또 당황스럽다.
내 착각이라면 이 생생한 기시감은 어쩔 것이며, 착각이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지워진 것인가.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내용은 이렇다.
...
이걸로 박해로 저자의 출간작 리뷰가 끝나간다. (<군대괴담>을 제외하면)
조금씩이라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끝이 나는구나 싶기도 하고, 더는 읽을 작품이 없구나 싶어 서운하기도 하다.
작가 후기에서 박해로 작가 스스로도 '섭주 유니버스'라는 표현을 쓴다는 걸 알았다.
여기에 대해서는 기분이 좀 묘하다. 가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묘하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작가가 확고한 자신의 세계관을 설정하고 쓰고 있다고 짐작하는 것'과 공식적으로 '작가가 의도적으로 세계관을 설정하고 연결 짓고 있다'는 것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
등등의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매우 당황스럽다.
처음에 어떤 리뷰를 쓰려고 했는지는 부분 부분이 지워져 도통 정리가 되지 않고
새롭게 쓰려고 하니 남은 조각 조각이 선명해서 거슬린다.
어쩔 수 없지.
<사악한 무녀>는 <올빼미 눈의 여자>와 거울상이다.
한 쌍이라고도, 속편이라고도 또는 못다 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어쩐지 두 이야기가 닮았지만 결코 같지 않은 서로의 거울상이라고 생각한다.
공통된 인물인 연진을 중심에 두고, 희생된 남자와 구원된 남자의 이야기가 각각 펼쳐진다.
한쪽에서는 사실은 그 누구의 희생도 없었던 순리의 흐름으로 매듭지어지고.
또 한쪽에서는 사실은 어디에도 진실은 없었던 역리의 흐름으로 흘러간다.
그들을 어느 이야기로 기억하느냐는 각자의 선택일 것이다.
한 사람의 삶에는 다디단 순간도 쓰디쓴 순간도 섞여있기 나름이니까.
누군가의 말년만으로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만 할 수 없듯이, 나쁜 사람이라고만 할 수도 없듯이.
지금껏 읽어온 박해로 작가의 작품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제목과는 달리- 대다수의 해피엔딩으로 끝난 작품인 것 같다.
(그러니 북오션 대표님의 말처럼 3부는 아니더라도, 다른 이야기들의 거울상에도 도전해 보시는 건 어떨까?)
즐거웠다.
- 거대한 불길이 다가왔다. 온 사물이 포위망을 좁히며 타들어왔다. 불 속에 갇힌 민규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지만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구석까지 몰리자 불길은 한순간에 극단의 기세를 올리며 민규를 덮쳤다. 절망적으로 몸부림치던 민규의 모습이 화염 속에 묻혀버렸다. 존재의 소멸이 지나간 후, 민규는 사라지고 어떤 글자만이 허공에 남았다. 육신을 잃었음에도 민규는 그 글자를 인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현실이 아닌 꿈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벌써 한 달 넘게 반복되어 온 꿈이다.
再臨(재림)
- 민규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이불도 베개도 리모컨도 휴대폰도 멀리 흩어져 있었다. 잠결에 걷어찬 모양이다. 지독한 악몽이니만큼 그럴 만도 했다. 이부자리가 땀으로 흥건했다. 7월이 갓 시작되었음에도 8월처럼 무더웠다.
-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불길이 사라진 현실은 다행이지만, 소리가 꿈이 아닌 현실은 고문이었다. 민규를 겨냥한 소음 공격. 서서히 피를 말리는 반복음. 팔을 뻗쳐 마우스를 건드리자 노트북이 빛을 발했다. 칠흑 같던 어둠이 약간 걷혔다. 지우지 않은 단어 '층간소음'이 검색창에 그대로 남은 가운데, 윈도우 시계는 새벽 두 시를 가리켰다. 잠에 빠진 지 한 시간 만에 또 악몽을 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새벽 두 시임에도 이런 짓을 서슴지 않고 있다.
- '악몽 때문에 깬 걸까, 소리 때문에 깬 걸까.'
소리가 이어졌다. 앞 동은 불 켜진 곳 없이 컴컴했다. 하지만 민규가 살고 있는 동의 그들은 잠든 시간임에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위층, 아래층, 양쪽 옆집 모두. 위쪽의 아이들 쿵쿵거림, 왼쪽의 크아악 가래침 뱉는 소리, 오른쪽의 흐느끼는 소리, 아래쪽의 욕설. 정확한 반복이었다. 찾아가도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는 이웃들. 그는 무서움을 느꼈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소음이 심할수록 열병이 혹은 화병이 생겼다. 점점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다. 그들 때문에.
- '이상해. 그리고 불안해. 저들 중 누군가 조만간 나를 잡으러 올 것 같아.'
- 언제나 그랬듯 대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의사는 민규가 질문하면 한참을 생각하다가 답을 했는데 아마도 경계심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았다. 나는 또라이가 아니니 괜찮아요 선생님. 하지만 민규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의사가 물었다.
"이번에도 똑같은 악몽인가요?"
"예."
"불길에서 도망치지 못했습니까?"
"소용없었어요."
"온 사방이 불이었습니까? 장소가 어딘지 짐작 가지 않습니까?"
"전혀요. 산불 같은 불이었거든요."
"나무나 짐승이 보였나요?"
"불의 크기 때문에 산불이라고 말한 거예요. 불 빼고, 그리고 '재림'이란 글자 빼고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같은 꿈이 몇 번째라고요?"
"한 달이 넘습니다.”
"매일 꿔요?"
"예. 매일요."
- 위의 대화 몇 마디를 나누는데 10분 이상이 걸렸다. 질문은 빨랐지만 대답이 느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답하기 전 질질 끄는 시간이 길었다. 그는 분명 환자를 경계하는 의사였다. <웰심신케어>의 정신과 전문의 구영훈의 눈은 선글라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착용한 의사의 진료라니, 희한한 면모였다.
'환자를 겁내는 의사야. 부처님 대하길 두려워하는 승려, 비닐하우스 들어가길 무서워하는 농부처럼.'
- "꿈에서 깨어났을 때 층간소음도 여전했습니까?"
"항상 그랬어요."
구영훈이 입을 다물었다. 침묵 사이로 <간호사실> 문 너머 키보드 소리만 작게 이어졌다. 이 소리가 없었다면 세상이 정지된 줄 알았을 것이다. 민규가 언제나 원하는 조용한 세상. 혼자서만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는 작가 김민규의 세상.
- "환자분과 한 달 가까이 면담을 해봤지만 차도가 없어요. 층간 소음은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건지 아니면 체감온도가 지나치게 큰 건지 제가 당사자가 아니라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환자분을 괴롭히는 외적 스트레스가 불의 악몽으로 변형되어 나타난 건 확실합니다. 어디로도 도망칠 곳 없다는 포위의 무력감이지요. 나아지지 않는 환경 속에서는 어떤 치료 요법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게 그 꿈이 보여준 무의식은 그 집에 있다간 몽땅 타버리고 말 거라는, 그러니까 어딘가로 도피하지 않으면 끝장일지 모른다는 진심을 잘 보여주는 거죠."
- "이해했습니다. 근데 통증은 왜 심해지는 걸까요?"
"의식과 무의식의 충돌 때문이죠. 정신의 스트레스가 육체에까지 장애를 갖고 오는 거란 말인데, 다만 그건 상상의 통증일 수도 있습니다. 환경이 바뀌면 사라질 통증인지도 모른단 말이죠. 이해되세요?"
민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음이 없는 가운데 키보드 소리만이 자그맣게 탁탁거렸다. 마치 어깨라도 두드리는 소리처럼. 구영훈도 모니터에서 고개를 들고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어렵게 집을 마련한 자부심, 먼저 떠난다면 내가 진 건 아닐까 하는 패배감, 새로 이사하는 데 드는 비용과 노력 같은 낭패감이 김민규 님의 자유를 향한 무의식을 계속 방해하고 있어요. 저는 현실적인 권고를 하는 겁니다. 자, 이제 일어나세요."
민규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일부러 그렇게 놔둔 건지 우연인지 의사 옆에 놓인 신문의 헤드라인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파트에서 또 층간소음 칼부림'
"도망이라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일종의 회피입니다. 최선의 결과를 향해 전략적으로 물러서는 일시적 후퇴 말입니다."
구영훈이 말했다.
- 하지만 우연히 발견한 卍 자 표식은 불길했다.
"윗집에 사는 분은 무당입니까?"
101호의 표정에 민규가 의혹을 품을만한 파도가 일었다. 그러나 너무 짧은 순간이라 아무것도 아닌 실룩거림일 수도 있었다.
"예. 무속인 아주머니가 살아요. 근데 생각하시는 것처럼 징치고 장구치고 방울 딸랑거리는 일은 없어요. 그런 일은 밖에서 다하지요. 직접 뵌 적도 있고 김치도 얻어먹은 적 있는데 아주 좋은 분이에요."
"손님들도 자주 오겠네요."
"오지요. 근데 얼마나 조용히 상담하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왜, 위층 소음 때문에 신경 쓰이세요?"
민규는 답하지 않았다. 혹시 이 사람도 무당 때문에 이사 가면서 아닌 척 연기하는 건 아닐까? 101호가 민규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 "그럼 혼자 사실 아파트 구하는 거죠?"
"네."
"말씀드렸다시피 이 집은 오늘 중으로 두 분이 더 보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중 한 분은 70대 노모한테 작은 아파트를 선물하려는 새댁인데 눈독을 단단히 들여놓으셨더라고요. 지금 선택 안 하시면 다음에 오실 땐 그분과 계약이 되어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저는 나이 드신 할머니보단 저처럼 집을 깨끗이 써 줄 독신남을 세입자로 받고 싶고요."
민규가 101호의 시선을 피했다. 나는 노이로제에도 강박관념에도 시달리는 사람이 아니야.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이 조용한 집은 마음에 들어. 그래도 선택엔 시간이 필요해. 민규는 손톱을 물어뜯고 싶었다.
"일단 생각 좀 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세요. 하지만 결과가 어찌 될지 장담은 못 드리겠네요."
"이사는 언제 가시는데요?"
"내일요. 오늘 여기 짐 다 들어낼 겁니다. 내일이라도 바로 이사 오실 수 있단 말이죠."
- 민규는 시원한 아파트에서 한증막 같은 바깥으로 나왔다. 걷다가 돌아보니 2층의 卍 자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나치 표식과 비슷한 붉은 한자는 눈알을 아래로 몰아 민규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불쑥 여자 하나가 표식 뒤에 나타났다. 머리에 비녀를 꽂고 한복을 입은 여자였다. 검은 음영 때문에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다. 깜짝 놀란 민규가 고개를 숙였다. 여자의 시선이 칼처럼 민규의 등에 꽂혔다. 그러나 뒤돌아 걸어가는 민규는 알지 못했다.
- 동신아파트 2층집의 목격 때문인지 내용이 낯설지 않았다. 여자가 페이지를 추르륵 넘기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또 다른 문장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굿을 하는 집주인이 부정해서 화를 입었다든지, 부정한 몸으로 성역에 들어갔다가 급사하였다든지, 제를 잘못 지내서 산이 덧난다든지 하는 것은 바로 신의 벌을 가리키는 것이다. 신에 대한 이와 같은 공포감은 신성의 극치를 전제로 하여 일어날 수 있는 종교적 공포의 극한 현상이라 볼 수 있다.
글·사진 김태곤(1991), 빛깔 있는 책들 112 한국의 무속, 대원사]
- 여자가 다시 몇 페이지를 넘기자 무서운 삽화가 등장했다. 손오공의 긴고아 같은 테를 이마에 두르고 양손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고리를 든 붉은 신이었다.
[화덕벼락장군님 : 무신은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물, 불, 땅 등의 자연물 계통의 무신이 가장 많이 봉안된다. 서울 지역에서 화(火)신으로 모시고 있는 무신도이다.]
- 여자가 뒤돌아보았다. 모르는 얼굴이었는데 왜 익숙한 인상을 받았는지 의아했다. 자신보다 열 살 정도 많았고 표정이 슬펐으나 좀 무섭게 생긴 여자였다. 여자의 오른쪽 눈 밑에 북두칠성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일곱 개의 점이 박혀 있었다.
- 호기심과 리얼리티를 동시에 주는 이런 상황은 일생에 몇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였다. 신작을 쓰지 못해 우울했던 나날이 벌써 몇 달째다.
온몸을 내리누르던 몸살이 약간 덜어졌다.
"안 돼, 현실과 소설은 구분해야 해. 위험한 일엔 끼어들면 안 된다."
그는 생각에 잠기며 집으로 걸어갔다. 불안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왜 그 제안이 절실히 와닿는 걸까? 내 직업 때문에?'
- 민규는 오늘 하루 경찰관을 만났고 아내를 감시하는 남자를 만났다. 그 설정은 추리소설의 구성요소를 넘어, 보다 근본적인 존재감으로 민규에게 와닿는 그 무엇이었다. 하지만 민규는 그 본질을 결코 알지 못했다. 나비 머리핀을 한 여자에게 '작두도 밟고 칭칭쾡쾡 굿도 할 거야?'라는 말을 왜 저절로 던질 뻔했는지 모르는 것처럼.
- "그 집 정말 조용하고 좋은 집입니다. 마음에 쏙 드실 걸요. 2층 무녀 아주머니는 아무 걱정 말고 친하게 지내세요. 이 섭주에서 아주 능력을 떨치시는 분이니까."
계약 후 추용수가 돌아가자, 성휘작은 친절한 음성으로 민규에게 살던 집도 전월세를 놓아 재테크를 하라고 했다. 복비 안 받을 테니 대신 자기를 좀 도와달라고 했다. 민규는 자꾸 그런 소리 말라며 거절했다. 하지만 호기심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근본적 존재감으로 와닿는' 그 일을 생각할수록 통증도 사라지고 스트레스도 잊을 수 있었다. 현실적 생활인보다 이상적 추리작가는 분명 한 사람을 이끌어나가는 의지였다.
- "작가님은 이번 일로 신작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어요. 얼마든지 활용하세요. 실명만 안 쓰면 되니까."
"소설 쓰는 거 중에 가장 아마추어스럽고 저열한 방식이 뭔 줄 알아요? 실제의 누군가를 표적으로 삼아 글자 몇 개만 바꿔 인신공격하고 더러운 감정풀이를 하는 거죠. 그걸 지적해도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이거든요. 중요한 건요, 사람들이 그런 글을 못 알아볼 것 같다고 생각하세요? 작가가 대강 쓴 어떤 글도 그게 다 생명력을 얻어요. 작가가 죽은 다음에도 살아남아 관 뚜껑 위에 책임과 무책임 글자를 새긴다니까요."
"작가님이 제 마누라한테 인신공격할 일은 없잖아요? 그냥 저 도와주시고 아이디어나 얻어가라 그 말이죠."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 민규가 부동산 사무실을 나섰다. 추용수처럼 성휘작도 민규와 악수를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성휘작의 눈빛도 추용수처럼 만족스러움을 띠고 있었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한 걸까? 내가 그 일을 수락했다고 넘겨짚은 걸까?'
민규는 은연중 내보인 흥분을 후회했다. 정말 성휘작의 제안을 받아들여 신작 아이디어를 얻고 싶었으니까.
- 5일과 6일은 나머지 이삿짐을 푸는 데 시간을 보냈다. 어제처럼 책상이 부딪치고, 가전제품이 쿵쿵거려도 누구 하나 딴지를 걸지 않았다. 슬그머니 와서 지켜보는 노인도 없었다. 책장을 설치하고 도서를 배열해 마지막 정리를 끝낸 민규는 가을 수확을 마친 농부처럼 집 안을 둘러보았다. 꽉 막혔던 가슴속 뭔가가 뻥 뚫린 기분이다.
- 몸에 묻은 먼지를 밖에서 털면서 민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더운 날씨였다. 하늘은 푸르렀고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노인이 아닌 민규 또래의 젊은 아가씨였다. 캔맥주를 옆에 둔 채 정자에서 책을 읽는 그녀는 독서보다 차라리 벨리댄스가 어울릴 정도로 건강미가 넘쳐 보였다. 민규는 큰 활자 때문에 제목이 보이는 책이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임을 알았다. 귀신을 봤다고 주장하는 가정교사가 주인공인 소설. 귀신이 실재의 존재인지 정신병에 걸린 가정교사의 환상인지 정답이 없는 소설.
여자가 민규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책에서 눈을 뗐다. 민규가 얼른 고개를 돌리자 2층의 <천지선녀> 간판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열린 문 너머로 '안동역에서' 노래가 들려오는 그곳은 여느 가정집처럼 평범했다. 슬쩍 뒤돌아보니 정자 위의 여자가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그새 나사의 회전>은 바닥에 놓였다. 얼른 고개를 돌린 민규는 도로 집으로 들어갔다.
- 소주 한 병을 생각했던 민규는 어느덧 세 병을 마셨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기분이 고양되었다. 말할 상대가 없음에도 노랫가락처럼 사설이 나왔다.
"술이 술을 마신다고, 내가 술을 마시는지 술이 나를 마시는지 이것부터 푸는 게 추리소설가의 임무지."
어디선가 "아이구머니나!"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컵이 깨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감각이 마비된 민규는 코어힐에 ...
- 차라리 소리가 있어야만 이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실 것 같았다. 누군가 소리를 숨긴 채 그를 관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해. 그리고 불안해, 누군가 조만간 나를 잡으러 올 것 같아.'
민규의 눈동자가 위로 돌아갔다. 침묵을 깨고 소리가 들려왔다. 위층에서 뭔가가 사부작사부작거렸다. 찍찍거리며 벽을 파는 소리, 차르르 흙이 쏟아지는 소리였다.
- 기왓장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다른 뭔가도 땅에 떨어졌다. 다시 침묵이 남았다. 민규는 꼼짝도 못 한 채 고양이가 쥐를 잡은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아파트가 아닌 기와집에서나 들을 수 있을 소리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길게 이어지는 휘이이 휘파람 소리와 방울을 내려놓는 딸랑 소리가 민규의 귀를 새롭게 자극했기 때문이다. 첨단 문명과 배치되는 원시적인 음향은 민규를 그대로 얼어붙게 했다.
천장에 가로막힌 여자의 음성이 띄엄띄엄 들려왔다.
"천신신장 오방장군... 일월성신 삼불제석... 지극정성 명산선생... 청배하고 청배하니... 터주에 신령... 집주에 신선... 이씨 아무개라 김씨 아무개라... 더 안 좋아 그늘지고 기 안 좋아 시끄러우니... 사방에서 화살들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빨리빨리 죽어라아..."
- 그 여자의 음성 같았다. 천지선녀. 민규의 지식에 의하면 무녀는 '귀신을 부리는 여자'였다. 코어힐 아파트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낯선 공포가 엄습했다. 방금 무녀가 흥얼거린 주문은 자신을 향한 저주일지도 몰랐다. 천장에서 찌이익 소리와 함께 허연 풀이 흘러내렸다. 갓 붙인 도배지가 너덜거렸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빨리빨리 죽어라아..."
추용수는 좋은 분이라며 천지선녀를 칭찬했다. 그게 거짓말이라면?
추용수의 성급한 이사 이유가 다른 것이었다면?
- 흥얼거리는 주문이 다시 들려왔다. 벽지의 너덜거림이 심해졌다. 찌익 하고 푸른색 벽지 귀퉁이가 활짝 펼쳐지면서 아래로 휘어졌다. 그러자 뻥 뚫린 위층이 드러났다. 검은 한복에 은비녀를 꽂은 무녀가 아파트 바닥에 입을 바짝 댄 채 엎드려 있었다. 번쩍거리는 눈이 민규의 뜬 눈과 마주치자 깜짝 놀란 그녀는 주문을 중단했다. 가위에 눌려 움직일 수 없는 민규의 눈과 천장의 구멍 사이로 내려다보는 무녀의 눈이 정확히 서로를 응시했다. 무녀 곁에는 검은 가방이 있었는데 뭐가 들어있는지 꿈틀거렸다. 무녀의 얼굴은 시체처럼 하얗고 입술은 앵두처럼 새빨갰다. 그녀의 뒤로 칼 쥔포도대장과 허연 머리 신령을 묘사한 벽화가 가득했다. 무녀가 바가지로 어떤 액체를 한 모금 마시고 가방을 향해 푸 뿜었다. 가방의 꿈틀거림이 격렬해졌다.
- 갑옷을 입은 장군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극을 찍다가 촬영지를 이탈한 배우를 연상시켰다. 붉은색, 황토색, 푸른색이 고루 섞인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머리에는 투구 대신 황색의 의관을 썼다. 전쟁터보다 작전회의에 어울리는 장군이었다. 우리나라 갑옷과 차림이 달라 보였는데, 삼국지 같은 중국영화에서 본 갑옷과 비슷했다. 자세히 보니 붉은 전포 위에 황금색 계통의 부분 갑옷을 여기저기 착용해 색깔이 일관적이질 않았다. 휘날림의 위용과 밀착의 강건함이 고루 갖춰져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소매 끝은 뱀을 연상시켰고 발목은 표범 가죽 보호대로 단단히 감싸여 있었다. 허리춤의 장칼도 짧게 기른 수염도 위풍당당했다. 긴 삼지창을 한 손에 쥐었는데 창끝 아래의 장식은 용의 머리였다.
비현실적으로 넓적한 얼굴, 과장되게 부리부리한 눈은 지금 시대를 사는 사람 같지 않았다. 나이가 많은 사람조차 이런 얼굴을 가진 이는 없었다. 고전적이란 설명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까마득한 과거의 인물로 국사 교과서에서 그대로 빠져나왔다 해도 손색없을 생김새를 갖고 있었다.
'외국인인가? 또라이가 다른 동도 아닌 우리 동에 살고 있는 건가?'
- 장군이 쳐다보았다. 현기증에 민규가 비틀거렸다. 세상이 회전하는 짧은 혼란이 지나간 후 고개를 드니 장군 차림의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2층 발코니에 무녀가 서 있었다. 이른 시각임에도 그녀는 녹색 한복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고 머리를 뒤로 묶었다.
- 엿듣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민규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소리 내지 않고 다시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바로 그때 머리 위를 떠도는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3층 계단 꼭대기에서 상반신을 쑥 내민 채 장군이 민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라이는 201호 천지선녀 집으로 들어간 게 아니었다. 위태로운 각도에서도 의관은 벗겨지지 않았고 눈알은 튀어나올 듯 민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팔다리가 휘어지고 꺾여지는 엄청난 통증이 몰려들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며 눈앞이 컴컴해졌다. 암흑 속에서 민규는 고려청자 같은 거대한 도자기를 보았다. 도자기 곁에는 봉황과 소나무, 그리고 희미한 문자가 세로로 새겨져 있었다. 문자를 확인하려 하자 도자기가 꿈틀거리며 요동을 쳐댔다. 뚜껑이 덜그럭거리면서 피가 넘쳐흘렀다. 요동은 다급한 경련이 되었고 도자기 여기저기에 금이 갔다. 균열 사이로도 피가 배어 나왔다. 유리가 박살 나는 굉음과 함께 피에 젖은 용의 머리가 뚜껑을 깨고 치솟았다. 장군이 쥔 창이었다. 이어서 장군의 팔이 솟아올랐다. 피에 흠뻑 젖은 얼굴은 맨 마지막에 올라왔다. 승전(勝戰)의 기백이 넘쳐흐르는 부리부리한 눈이 이쪽을 향할 때 민규는 현실의 소리를 들었다. 뒤쪽에서 누가 달려오는 소리를.
- 장무람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민규가 쓰러지자 장군도 도자기도 사라졌다. 희미한 형상들만이 빙글빙글 돌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났다. 걸어 다니는 형상들이 민규를 쳐다보면서 ...
- "정말 여기 귀신이 사는 걸까요? 김 작가님 윗집에 무녀가 사는 이 101동에?"
"사람 무섭게 그러지 마세요."
"무섭긴요. 어디 사람 죽이는 게 귀신인 줄 알아요? 능력을 주는 게 귀신이지."
그녀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민규도 함께 올려다보았다. '오셨구나, 오셨구나' 하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 띠링하고 장무람의 휴대폰에 문자가 왔다. 내용을 확인한 그녀가 눈썹을 구겼다.
"가봐야겠어요. 저도 볼일이 있거든요."
어르신이겠지. 민규는 그녀의 어르신이 누군지 궁금했으나 감히 물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장무람은 눈에 띄게 서두르며 민규의 집을 나섰다. 성휘작과 만날 시간을 확인한 민규는 잠시 장무람을 검색했다. 이름 없는 출판사의 인기 없는 공포 단편 모음집에 그녀의 작품이 있었다. <살육에 이르는 정신병>. 사진은 없었고 프로필은 간단했다.
[한국의 셜리 잭슨을 꿈꾸는 공포소설 작가]
- 일어나 옷을 갈아입는 데도 숨이 차고 옷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성휘작의 문자가 독촉장처럼 날아왔다.
[두 사람은 <붕평마을>로 갔어요. 거기 일곱 정자 있는 거 아시죠? 향활정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세입자는 내일 10시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월세 50만 원에 체결됩니다.]
2층에서 피리인지 휘파람인지 구분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야단치는 여자 음성도 들려왔다. 누군가에게 애원하다가 울음으로 바뀌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닫힌 문 너머 가스라이팅이나 그루밍 같은 비극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피리인지 휘파람인지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계속 듣자니 소름이 끼쳐 민규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 붕평마을은 섭주의 대표적인 명승고적 민속촌으로 걷는 사이 일곱 가지 감정을 체험할 수 있다는 칠정자(七亭子)로 전국 관광객들에게 알려졌다. 이웃한 안동에 빛의 하회마을이 있다면 섭주에는 그늘의 붕평마을이 있었다. 그 어두운 땅은 시대를 불문하고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사건들을 선보였다. 1970년대 붕평마을 최초 건립 시장승 보행로와 칠정자의 디자인에 도움을 준 섭주 출신 화가 조창화는 뱀의 신 사파왕의 꿈을 꾸고 군수에게 정자의 배열을 귀띔했다고 한다. 이들 일곱 정자는 높은 곳에서 보면 뱀 사(巳) 자 형태를 이루도록 배치가 되었는데, 아래의 일(一) 자 끄트머리에 놓인 제선정은 특히 여러 가지 소문의 근원으로 유명했다. 이 정자를 향하던 평택 공무원 한기성이 올빼미 눈을 가진 신명(神明)의 후예에게 꼬드김 당해 목숨을 잃었다거나, 정자 아래에서 고양이 떼와 큰 구렁이가 싸우는 광경을 본 강서경이란 교사가 얌전한 성격이 돌변하고 영덕 바다 한가운데서 갈매기를 반토막 내어 죽이는 등 기행을 일삼다가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 두 사람의 얼굴과 더불어 이 상황의 기시감이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한 번쯤 들어본 이야기일 수도 있었으나, 언제 어디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드라마의 한 장면일 수도 있으리라. 민규는 침침해진 눈을 닦았다. 머리가 아프고 어지럼증이 심해졌다. 사실 그가 할 일은 경우에 따라 법적 책임이 따를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정말 괜찮아요?"
성휘작이 물었다. 자기 일을 망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 그는 서두르고 있었고 민규도 그걸 알고 있었다. 민규는 대답 없이 <금오정(禁汚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지랑이가 박물관 입구를 일그러뜨렸다. 박물관 안에 들어서자 무더위가 가시고 시원한 느낌이 찾아왔다. 예상과 다른 내부 모습에 민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다란 카운터 데스크가 중앙에 있었고 그 위에 칸막이 창들이 구획 지어져 있고, 그 아래엔 의자들이 있었다. 의자가 너무 많았다. 민규가 들어선 박물관 입구 옆에도 긴 의자가 있고 데스크에 어울리는 작은 의자들도 여기저기 널렸다. 명승고적 박물관이 아니라 관공서민원실 같은 분위기였는데, 책상 위에 무전기가 있었고 벽에는 곤봉조차 걸려 있었다.
꼭 파출소 같군... 예리한 기시감이 또다시 엄습했다.
'하긴 여기도 관공서나 다름없는 곳이고 술 취한 진상들도 돌아다니겠지.'
- 민규는 성휘작을 무시하고 자신의 차에 올라 그대로 붕평마을을 떠나버렸다. 그 광경이 처음이 아니라는 데자뷔 상황과 장군이 여기까지 자신을 따라왔다는 공포로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이사 오자마자 주변에서 기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의식 중에 다시 손톱을 물어뜯었지만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 집에 돌아온 민규는 문이란 문은 다 잠갔다. 기온이 36도인데도 몸이 떨렸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휴대폰을 내던지고 털썩 주저앉아 단편적인 혼잣말을 쏟아냈다.
"그 상황이 낯설지 않아. 내가 어디서 그 광경을 본 걸까?"
"미래의 광경을 예지로 본 걸까?"
"그 장군은 대체 뭘까? 그자가 왜 날 따라다니는 거지?"
2층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예민한 민규의 귀가 레이더처럼 소리를 포착했다. 이방 저방 돌아다니는 발소리.
탁탁탁탁.
이어서 물이 흐르는 쏴아아 소리, 빗자루로 쓱싹쓱싹 씻어 내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누군가 분주하게 물청소를 하는 모양이었다. 비가 오는 것처럼 발코니 창 위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수도꼭지 트는 소리와 함께 가랑비는 소낙비로 변했다.
- "음모에 나를 연루시키려는 건 아닐까? 이 모든 게 어떤 데자뷔로 내게 암시를 주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누가?"
등골 서늘한 결론이 도출되었다.
"장군이?"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냐! 아냐!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내가 강박적으로 미쳐가는 건지도 몰라."
[무섭긴요. 어디 사람 죽이는 게 귀신인 줄 알아요? 능력을 주는 게 귀신이지.]
장무람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그는 정신과 의사 구영훈에게 전화 걸었다. 의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약을 먹으세요, 약을 먹으세요, 상담의 오랜 기억이 최면술처럼 다가왔다. 약으로 이 모든 심적 고통에서 탈출하라는 최면술. 민규는 서랍을 열고 오래전에 끊었던, 신경을 잠재우는 약을 용량을 초월해서 삼켰다. 그리고 모든 문을 잠그고 누워버렸다.
난 미치지 않았어, 난 미치지 않았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도 정상적이야. 이만한 일들은 다 겪고 살아. 난 미치지 않았어. 난 미치지 않았어. 그 데자뷔는 진짜였어. 그걸 풀어야 해. 난 추리작가니까...
- "그렇다면 새집 2층에 산다는 그 무녀를 찾아가 보는 건 어떻습니까?"
민규가 고개를 들었다. 구영훈이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정신과 의사지만 초현실적 현상을 전혀 무시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이사 후 빈 집에 그림이 나왔다는 사실로 보자면, 재림의 악몽을 꿨을 때도 사실은 그 그림이 집 안 어딘가에 숨겨져 있었던 게 아닐까요? 눈에 안 보이던 장군이 영험한 무녀의 집 아래로 이사했기에 김민규 님께 가시화된 건 아닐까요? 제가 처음 봤을 때부터 김민규 님이 앓던 열병과 근육통은 왜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걸까요?"
"선생님 말씀은... 내가 신들리려 하고 그 장군이 제게 올라탈 귀신이다 이런 건가요?"
"단언은 않겠습니다만 그런 유형과 비슷한 꿈을 계속 꾸고, 실제로 낫지 않는 몸살을 계속 달고 다녔잖아요?"
"그렇네요... 말이 안 되지만 이게 또 이런 식으로 설명이 되네요..."
민규가 고통스런 진실과 마주한 사람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데자뷔라고 생각한 낯익은 상황들도 '귀신 들릴 몸'이 보여준 예언적 화면의 하나였나? 그건 과거의 데자뷔일까, 미래의 예견일까? 장무람의 능력 발언은 사실이었나?
- "그냥 어릴 적 할머니한테 들은 이야기를 권고하는 것이니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마세요. 나는 귀신이 아닌 사람의 정신을 치료하는 의사입니다. 귀신이 보인다는 건 정신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선을 허물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서서히 그 경계선을 복구하는 방법이 치료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정신과 분야에서는 반드시 낫겠다는 믿음이 강할수록 환자의 상태가 정말 나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가 정해놓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치료 기간 동안 잠시 무시해서라도요. 물론 어떤 경우라도 외부에의 의지보다 내면에의 확신을 더 우선시해야 합니다. 끝까지 스스로를 믿어야 한단 말이지요. 치료법으로 처방 내린 게 아니니 그저 참고나 해보세요."
민규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정신과 의사가 무당을 추천하다니! 뭐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민규는 힘겹게 일어나 열린 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밖은 어두웠다. 사람들은 여전히 앞만 보고 걸어 다녔다. 민규의 고통은 모른 채.
- 동신아파트는 침묵에 싸여 있었다.
바람을 타고 향 냄새가 날아왔다. 무당이 향을 태우는 이유는 귀신을 부르기 위함이란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았다. 정자에는 장무람이 보이지 않았고 장군도 보이지 않았다. 땅에는 아직도 닭의 핏자국이 남았다.
불 꺼진 집에 민규는 들어갔다. 냉장고 안에는 술이 가득했다. 고개를 돌리면 장군이 서 있을 것 같아 무서웠다. 에잇 하고 술을 꺼낸 민규는 쓰러져 기억나지 않을 지경까지 마셨다.
사진 속의 그 남자 누구일까.
[거기서 잘 살아라.]
- 누군가 문을 두드려댔다. 이를 악물고 일어서자 가위가 풀렸다. 머리가 핑 도는 현기증에 몸을 못 가누며 그는 기어나갔다. 장군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망상이 멋질 않았다. 다행히 쾅쾅쾅 소리가 조금 누그러지더니 '이봐, 문 열어!' 하고 소리치는 여자 음성이 들려왔다.
문을 열자 그 여자가 트레이닝복 차림에 긴 생머리를 풀어헤친 채 서있었다. 꿈 때문에 민규는 공포에 질렸다. 열이 펄펄 끓는 민규를 보고 그녀는 잠시 말이 없다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당신 또 시작이야? 밤마다 이 무슨 짓이야?"
"네?"
"벌써 몇 번째야?"
"무슨 말씀이신지...?"
"몰라서 물어? 왜 밤마다 시끄럽게 해 다른 사람 수면 방해하냐고?"
"수면 방해라뇨? 그런 적 없는데요?"
"웃기고 있네! 벽 차고 물건 집어던지고 소리 지르고 그게 다 당신이잖아! 대체 왜 그러는 거야?"
- 여자는 방 안에 구르는 술병들을 눈으로 확 훑었다. 민규는 가재도구가 또다시 널브러진 자신의 집안 상황을 놀란 눈길로 바라보았다.
"당신, 며칠 전에 이사 온 사람 맞지? 당신 오고 나서 아파트 분위기가 엉망이야. 여긴 조용한 아파트야. 나이 든 노인들만 산다고. 술을 마시려면 곱게 마시지 왜 밤마다 소란 피우고 난리야?"
- 한번 만나기만 하면 죽인다는 협박도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잠이 들 시간에 그토록 소란을 피웠으니.
무녀가 득의만만하게 말했다.
"그래, 알겠어. 귀신 다루는 전문가 옆에 있으니까 귀신이 현현(顯現)한 거야. 당신 머리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이 일반인이 아닌 귀신 부리는 여자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갑옷까지 갖춰 입고 나타난 거란 말야. 하하하. 무슨 말인지 이해돼? 이 영험한 천지선녀의 영향권 안에 오니까 모습을 숨긴 채 당신을 괴롭히던 악귀가 완전무장까지 하고 직접 모습을 보인 거라고."
"그렇게 영험한 선생님인데 왜 장군을 못 봅니까?"
"그러니까 걱정이야. 내 눈에 안 보일 정도면 아주 못된 귀신이 당신을 문 거거든."
"그러지 마세요. 무서워요."
"정말 그 장군이 내가 피 뿌려놓은 경계선은 못 넘어왔지?"
"그건 확실해요."
"안심은 일러. 그 귀신이 우릴 갖고 노는 걸 수도 있으니까. 경계선을 정말 못 넘어온다면 당신이 무서운 꿈을 안 꿔야 맞거든."
- 천지선녀의 얼굴에 빛이 흘렀다. 학구적인 빛과 계산적인 빛이 섞인 복잡한 얼굴이었다.
"어쨌든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야. 안 그럼 당신은 죽어."
"죽는다고요! 설마요? 귀신은 사람을 못 죽이잖아요!"
"이 세상은 무당 말을 믿지 않는 꽉 막힌 세상이야. 그래야만 정상인 취급을 받거든. 그렇게 개무시해 시기 놓쳐 시름시름 앓다 칵 죽어버릴 때야 땅을 치고 후회하지. 저승 가서 후회하면 뭘 해?"
- "저도 모르겠어요. 왜 제가 저런 귀신한테 걸렸을까요?"
천지선녀가 신딸을 불렀다.
"호정아, 책 갖고 와 봐."
호정이 낡은 그림책 한 권을 갖고 다가왔다. 민규는 서점에서 당신을 봤다며 알은체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 중에 당신이 본 장군이 있으면 스톱해."
- 천지선녀가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판매용이 아닌, 어떤 의도로 펴냈는지 모를 무서운 책이었다. 까마득한 옛 시절부터 무당과 귀신이 함께 있을 법한 장소의 그림만을 모아 조악하게 인쇄한 책이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존재 자체가 신비로운 남자들이 나타났다. 갑옷, 혹은 관복, 도포나 구군복 차림의 그들은 비현실적인 믿음으로 엄연히 현실에서 지지를 얻고 있는 이들이었다. 시험의 합격, 운수의 대통, 잡귀의 방어, 병마의 치료에 검증 없이도 이들은 영험함의 자격을 얻었다. 이들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고 악귀를 굴복시키는 권위를 인간의 믿음으로 취득한 신령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완벽하게 선한 존재는 아니며 강신(降神)이 잘못되면 인간에게 해독을 끼칠 수도 있는, 절반은 위험한 신령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사와 치성과 굿 등의 편의로 그들을 달래며 일종의 이용을 해왔다. 지금 민규의 눈에 비친 칼, 창, 비파, 불덩어리 등을 쥐고 있는 그들은 하나같이 악독하게 생겨 선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인정사정없는 눈길은 그대로 종이를 뚫고 나와 민규를 코앞에서 노려볼 것 같았다.
- 그중 하나와 마주쳤을 때 민규의 전신에 털이 곤두섰다.
"아, 잠깐만요! 이 장군이에요!"
민규가 페이지를 가리켰다. 코어힐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그림이 거기 있었다. 동신아파트에 직접 현신(現身)했고 장무람의 손길을 그대로 관통해 버린 귀신 장군이었다. 천지선녀가 헉하고 뒤로 물러났다.
"큰일이다! 위뇌홍 장군한테 걸렸구나!"
- [위뇌홍장군은 중국 명나라 때의 장수다. 임진왜란 당시 명의 2차원병을 이끌고 참전한 방해어왜총병관(防海禦倭總兵官) 이여송 장군 휘하의 부총관 중 하나였다. 성정이 포악하고 사로잡은 포로를 고문하다 죽이길 즐기는 잔혹한 장수로 소문나 적들이 겁을 먹고 전투에 앞서 도망치기 다반사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593년 1월 조명 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때 고향의 부인이 바람을 피운다는 가짜 소문을 퍼뜨린 왜군의 간계에 걸려 전사했는데, 그 후 타향 땅에 발이 매인 위뇌홍의 귀신을 봤다는 목격담이 평양 백성들 사이에서 전해져 왔다. 전란 후 함경도와 평안도 백성들이 폐 질환을 앓다가 죽는 일이 잇따랐 ... ]
- "도전해 볼만한 일이긴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당신까지 목숨을 걸어야 해."
천지선녀는 이 일에 상당히 흥미를 갖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그게 뭔데요?"
"귀신은 산 사람에게 붙어. 당연히 죽은 사람한텐 붙지 않는다고."
"그런데요?"
"만약 내림받을 사람을 일시에 죽은 것처럼 꾸미고 귀신이 거기에 속아 넘어간다면 일은 끝나."
"그런 방법이 있어요?"
"말 그대로 귀신을 속이는 거지. 하지만 위험해. 귀신은 영리하거든. 속았음을 안 순간 화풀이를 하겠지."
"상관없어요. 당장 하겠어요! 저 장군만 떨쳐내 준다면 뭐라도 하겠어요!"
"진짜지? 잘못하면 우리가 다 죽을 수도 있어."
천지선녀의 눈이 빛났다. 민규는 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 의아해하면서도 물었다.
"돈이 많이 드나요?"
"돈은 많이 들지 않아. 위험해서 그래."
"그럼 할래요! 난 대한민국 최고의 추리소설가예요! 무당이 될 순 없어요. 아, 죄송해요. 이런 일로 내 인생을 바꿀 순 없다고요!"
"신을 받으면 좋은 일도 있어. 영험한 능력을 얻게 되거든."
"싫어요. 난 그냥 정상인처럼 살고 싶어요."
- 민규는 몸을 내리누르는 몸살을 떨쳐버리듯 소리쳤고 실제로 고통이 조금 덜어졌다. 천지선녀가 그런 민규를 노려보았다.
"귀신 속이는 일을 하게 되면, 온몸을 시체로 꾸미고 숨 안 쉬는 공연을 하는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런 거 하고 달라. 추리소설가? 저 귀신하고 숨바꼭질하고 서스펜스 자아내는 거하고도 달라.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해, 악귀가 접근 못 하도록 당신 혼을 쏙 빼놓는 일을 내가 하는 거란 말야. 그래도 좋아?"
민규가 대답하지 않자 천지선녀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할 건지 안 할 건지 진짜로 결정해 비용은 안 받을 수도 있어. 이런 경우의 굿판은 돈 벌려고 하는 푸닥거리하고 차원이 달라."
민규는 고민했다. 천지선녀의 등에 가려졌던 제단이 눈에 들어왔다. 청룡검, 부적, 촛불, 무서운 탱화들... 민규는 나이 먹은 할머니 할아버지나 행할 무속 행위를 머릿속에 그려보다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장군은 엄연히 실재했고 정체가 귀신임을 인정한 마당이다.
- "당신 목숨도 목숨이지만 이건 내게도 중요한 인생 도전이야. 난 대한민국 최고로 무력(巫力)이 왕성한 신의 대리인이 될 수도 있어!"
천지선녀의 눈이 흥분으로 활활 타올랐다.
"저 밖에는 지금도 장군이 있고 계속 당신을 노릴 거야. 명심해, 내 장담하는데 당신한테는 며칠밖에 시간이 없어."
"그게 무슨 소리죠?"
"강한 귀신이 눈에 실제로 보일 정도로 가까이 붙었는데도 받지 않고 버티면 아무리 길어도 사나흘이야. 후회하는 순간이 올 ... "
- [202( )년 본인 ( )는 상세불명의 이유로 인해 신병을 앓아 무가(巫家)의 치료법을 원하기에 천지선녀 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완전한 자의적 결심으로 일체의 무속 행위를 허용합니다. 이 서약서를 쓰기까지 상대측으로부터 어떠한 강압도 없었으며 오로지 본인의 희망으로 굿을 의뢰함을 이 서약서로 보증합니다. 치료를 위한 어떠한 방법도 수용할 것이며 결과에 대해 어떤 이의와 법적 조치도 제기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합니다.]
호정이 문가에 서서 민규를 바라보았다. 긴 머리칼이 얼굴을 가려 북두칠성 점도 그녀의 눈도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 먼저 당했을 저 사람이 서약서에 찍으라고 종용하는 걸까, 아니면 찍지 말라고 경고하는 걸까?'
- 온몸에 몽둥이찜질이 가해지는 몸살이 다시 시작되었다. 재림과 장군과 동영상이 스쳐 지나가자 생각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서약서에 이름을 쓴 민규는 손가락에 피를 묻힌 후 지장을 찍었다. 굿하다 의뢰인이 사망해도 무녀는 책임이 없단 말은 씌어있지 않았지만 문서 자체에 그 내용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서약서를 손에 쥔 천지선녀는 크게 만족해 고개를 끄덕였다.
- [죽음]
삶을 예측할 수 없듯이 죽음 또한 예측할 수 없다.
사람은 죽음을 향해 태어나고 죽음과 최대한 마주하지 않기 위해 삶을 연장한다.
그것이 죽음이란 대전제 안에 놓여진 삶이란 소전제다.
죽음은 크고 삶은 작다.
지상 최고의 영광을 삶 속에서 이루어도 그 모든 것을 거두어가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을 속이고자 해도 절대로 속지 않는 것이 죽음이다.
삶은 거짓이지만 죽음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거짓된 삶은 있어도 거짓된 죽음은 없다.
타인의 죽음은 거짓일지라도 스스로의 죽음만은 진실이다. 그것은 풀 수 없는 문제이자, 피할 수 없는 굴레이며, 어떻게든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인간이 온갖 것을 체험하는 삶에서, 죽음은 최후의 체험이다. 사색도, 반추도, 회고도, 혐오도, 반성도, 후회도 할 수 없는 단 한 번의 체험이다.
죽음은 체험과 동시에 끝이 나며, 체험 후 다시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죽음과 삶은 예정이 없다.
언제 던져질지 모르는 것이 삶인 것처럼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것도 죽음이다.
- "당신을 보호할 정화수예요. 마셔요!"
그릇이 강제로 민규의 입에 밀착했다. 호정이 턱을 잡고 액체를 부었다. 민규는 고개를 저었지만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감각이 목구멍을 넘어왔다. 머리카락인지 짐승털인지 모를 것이 오장육부로 들어와 체액 내를 유영하며 장기(臟器)를 찔러댔다. 눈앞의 풍경이 지워지고 또다시 환각이 보였다. 붉은 혀를 내민 흑견이 피 묻은 산야를 돌아다니는 광경이었다. 개가 맹렬히 짖는 소리가 수호신의 고성처럼 산야를 메우자 장군은 자취를 감추었다.
- 천지선녀가 손을 비비며 소리쳤다.
"아이고 죽어서 어떡하노! 원통해서 어떡할까!"
전물상은 장군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민규를 위한 전물상이었다. 천지선녀가 엎드려 빌고 두 탈바가지 법사가 경쟁이라도 하듯 무악을 두드리는 와중에 호정도 절을 했다. 그들의 대상은 전물상이었고 전물상은 장군이 아닌 민규를 향해 놓여 있었다.
- 김하영... 김화영...
이름이 귓가를 맴돌았다. 점점 의식이 흐려졌다. 오일이 타는 냄새와 함께 다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흑견이 입가에 침을 흘리며 맹렬히 으르렁거렸다. 산야를 달리는 짐승의 네 발 사이로도 피가 흥건했다. 몸은 손바닥만 하고 머리는 거대한 기형 인간이 웃었다. 피아노 소리는 어떤 노래의 전주가 맞았다. 여자 가수가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 호정이 언성을 높였지만 민규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까 굿할 때 천지선녀가 내게 했던 행위가 뭐지요?"
"장군을 속이는 거였어요."
"포기의 각인이라 이거죠?"
"죽음의 시늉이에요."
- "천지선녀가 외우던 주문은 내가 이사 온 날에도 들었던 거예요. 죽어라 죽어라, 빨리빨리 죽어라. 그땐 장군이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왜 내게 그런 소릴 했을까요?"
민규의 어조가 절박해졌다.
"꿈인 줄 알았는데 그건 꿈이 아닐지도 몰라요. 부탁이에요. 저 여자가 아무래도 나를 속인 거 같아요. 장군은 그녀가 데리고 있는 귀신일지도 몰라요. 나를 장군한테 제물로 보내려는 걸 거예요. 처음부터 내가 당했나 봐요. 물론 한패일지도 모를 당신한테 이런 걸 부탁한다는 게 무리란 건 알지만 제발 나를 보내주세요. 내 휴대폰을 좀 갖다 줘요."
- "당신에게 능력이 생긴 거예요."
"네?"
"어머니가 당신을 속인 게 아니라 그 장군이 가까워져 당신한테 과거와 미래를 보는 능력이 생긴 거라고요."
호정이 민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장무람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어머니가 처음부터 당신을 속일 생각이었다면 재림의 꿈은? 그건 어머니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당신이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겪었던 거잖아요. 나타나진 않았지만 장군은 그때도 있었어요."
그녀의 말을 반드시 부정할 순 없었다. 장군의 그림은 성휘작이 갖다 놓은 게 아니라 실제로 집 안 어딘가에 있었다는 쪽으로 생각이 몰렸으니까.
- "굿하면서 이상한 광경들도 봤을 텐데요?"
호정이 말했다.
"맞아요. 뭔가가 뒤죽박죽이었지만 이전보다 약간 선명해진 거 같아요. 거대한 고려청자 도자기, 재림의 불길, 경찰관과 권총, 자동차 오일 냄새, 의처증, 김하영, 김화영, 유리창엔 비, 벌레처럼 생긴 기형 인간..."
"그게 다 뭔데요? 누가 겪었던 일인가요?"
호정이 민규를 응시했다. 민규는 기억을 집중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순서가 없고 너무 단편적이에요. 경찰관이 누구를 쏘는지 잘 모르겠어요. 범인인지 자기 아내인지. 내가 이사 올 때 101호 집주인은 경찰이고 부동산업자는 의처증을 앓고 있었어요. 그 상황과 비슷한 거 같아요. 장군이 끼어들고 나니 그 모든 게 다 암시였던 거 같아요."
호정이 약간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지선녀는 영험한 분이에요. 감당해야 할 굿이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요. 장군만 가고 나면 당신은 편해질 테니까."
- "장무람 씨라고 이 아파트에 사는 작가가 있어요. 그 사람이 장군을 만졌어요. 손이 관통해 버렸지요. 그 사람이 지금 괜찮은지 궁금해요. 혹시 창밖 정자에 책 읽는 젊은 아가씨가 보이지 않나요?"
- "미안하긴 뭘 미안해?"
천지선녀가 다가왔다. 밀가루를 뒤집어쓴 듯 허옇게 분칠하고 입술은 빨갛게 칠한 그녀의 얼굴은 귀신조차 달아날 정도로 무서웠다.
"네게 뱀을 넣은 치료는 경압법(警壓法)이라 부르는 거야. 귀신을 놀래키고 위압하여 붙은 사람한테서 떠나게 하는 퇴마의 방법이지. 묶어서 귀신 쫓는 봉박법이 실패했으니 작전을 바꾸었어. 병에 걸린 사람을 절벽에서 밀어 떨어트리기, 환자 모르게 뱀을 목에 걸기 따위가 다 경압의 예시야. 네 경우는 좀 특별해. 너는 살아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에 더 가까워야 하거든? 혼이 빠진단 말 들어봤지? 난 널 그런 상태로 만들 필요가 있어. 장군이 너 따위 비실비실거리는 인간을 그냥 지나치도록."
"그래, 딸꾹질 멎게 하려고 놀래키는 거랑 비슷하다 이 말이죠?"
민규가 천지선녀에게 침을 뱉으려 했으나 기운이 없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관 속에 다시 쓰러진 그를 호정이 다가가 안아 일으켰다.
"당신한테 다 득이 되는 거니까 참아요."
- 자정을 갓 넘긴 시각이었다. 시간상 이틀째였지만 간격이 짧아 민규는 하루에 두 번이나 무서운 고문을 당하는 심경이었다. 풀 냄새, 시냇물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문명이 그리웠고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이 그리웠다. 바람에 움직거리는 나무만이 가득한 ...
- "내 오른편 45도 방향 바위 위에 네가 이사 왔을 때와 똑같은 기운이 느껴진다. 어때? 내 말이 틀려?"
"맞아요. 장군이 거기 있어요."
"널 포기 않으려는 게야. 속은 걸 알고 화가 나 있어! 쳐다보지 마, 장군을 쳐다보지 마! 아예 관심을 꺼버리란 말야!"
천하대장군 법사가 호정에게 칼국수 만들 때 쓰는 홍두깨 같은 몽둥이를 건넸다. 호정이 받지 않으려 했다. 천지선녀가 호정을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구타법을 시행할 거야. 구타법은 귀신 들린 자를 물리적인 타격으로 자극해 귀신이 은거할 공간에서 쫓아내는 방법이야.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많은 돌팔이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방법을 함부로 쓰다가 사람을 죽여 철창신세 지기 다반사였지. 잘 들어. 이건 장군에게 보여주기 위한 방법이야. 네가 죽어야 할 운명의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연극일 뿐이라고. 매 앞에 장사 없다고, 사람 아니라 귀신도 겁내는 게 매야. 좀 아프겠지만 죽이진 않아. 그러니 네가 연기를 잘해야 해. 최대한 고통스럽게 표현하다가 죽는 시늉을 해야 한다구."
"날 때린다고? 이봐요... 세상에 이런 굿이 어딨어요? 이건 범죄야. 그러다가 정말 사람 잡아요."
"입 다물어 못난 놈아. 장군이 다 듣고 있잖아."
"장군이 다 듣도록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한 건 당신이잖아?"
- 관 뚜껑에 붙은 눈구멍으로 벽시계가 보였다. 오후 4시였다. 그는 기억보다 탈옥의 가능성에 두뇌를 집중하며 대화를 이끌었다.
"내가 가장 충격받은 게 뭔지 아세요? 무당의 치료란 게 내가 평생 동안 알아왔던 지식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거란 점이죠. 뭔가를 흉내 내고 놀래키고 겁을 주고 으르렁거리는 게 어떻게 아픈 사람을 위한 치료가 될 수 있겠어요? 그런 미치광이 같은 행위를 신뢰할 수 없었어요. 근데 마지막 순간에 장군이 등을 돌려 걸어갔거든요. 똑똑히 봤어요. 그 무자비한 매질에도 난 죽지 않았고요."
"믿음을 보이다니 잘한 거예요. 어머니는 영검이 큰 신령을 몸주로 갖고 있는 무녀예요."
"솔직히 절반은 믿고 절반은 못 믿겠어요. 그분 몸주가 누군데요? 위뇌홍 장군보다 더 무서운 장군인가요?"
"어머니의 몸주는 치효성모(鴫鴉聖母)라는 신령이에요."
"그게 뭔데요?"
"성스러운 올빼미 신."
- "치효성모에 관해 알려면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옛날, 왕가의 혈통을 수태했다는 이유로 궁궐에서 쫓겨나 이곳 섭주까지 흘러들어온 궁녀가 있었어요. 그녀는 명목상의 남편인 어느 무관과 살림을 차렸는데 화려한 한양 생활을 잊지 못해 늘 불만을 품고 살았어요. 그녀가 만삭의 몸이 되었을 때, 올빼미 한 마리가 쥐를 잡으러 부엌에 들어온 적이 있었죠. 그녀는 몸을 돌보지 않고 올빼미를 잡아 불태워 죽였고 그 저주로 올빼미 눈을 가진 여자아이를 낳게 돼요. 그 아이는 흉측한 외모 때문에 수년 동안 골방에 갇혀 지내야만 했지요.
그 아이도 아이 엄마도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아이가 갇혀있던 방은 사실 몇 년 전 무당이 살다 떠나간 당집의 신당이란 거였어요. 거기 살던 이들 아무도 그걸 몰랐기에 급사하고 우물에 빠져 죽고 미치게 됐죠. 그 사실 역시 모녀는 알지 못했고요.
언제부턴가 아이는 벽에서 산신령을 보기 시작하고, 어느 날 그 신령을 직접 만나게 돼요. 신령의 안내로 아이는 잠긴 문을 열고 깊은 산속까지 따라가게 되죠. 산신령이 아이의 영력을 알아보고 인도한 장소는 신물(神物)이 숨겨진 어두운 골짜기였어요. 그 아이는 산신령의 계시로 신비함이 깃든 청동거울을 파내는 데 성공하지만 뭐가 잘못됐는지 이상하게도 물에 빠져 죽어요.
불로소득은 엉뚱한 사람이 차지하게 되죠. 근처를 지나가던 무당이 그 아이 시신을 건져낸 후 손가락을 자르고 명도(明圖) 받는 의식을 거행하자 아이의 혼백이 무당에게 지피었거든요. 선무당에 불과했던 그 여자는 그날 이후로 무엇이든 맞추고 무엇이든 해결하는 백발백중의 영험한 무당이 되죠. 그녀의 신통력이 얼마나 초월적이었냐면 산적 두목을 피가 다 빠진 시체로 잡아오기도 하고 고을 사또를 지붕에서 추락사시키기도 해요. 그녀의 몸주가 된 올빼미 아이의 혼 덕분이었죠. 그 혼을 치효성모라고 부르고 모시는 거예요. 버림받고 구박받아 사악함과 무자비함만 키운 악신, 영험한 힘을 갖고 있지만 올빼미처럼 다른 귀신을 잡아채는 일에 그 힘을 쓰는 신, 악한 음모에 활용하기 위해 근본이 잘못된 무녀들이 내림받고 싶어 하는 귀신.
치효성모가 몸을 차지한 무녀가 수명이 다해 죽고 나면 성모는 잠시 올빼미의 몸을 빌려 날아가 새로운 무녀를 물색해요. 한 번 받기만 하면 돌팔이 무당도 용하기 그지없는 신녀가 되니까 성모를 내림받으려는 무녀들이 전국 각지에 넘쳐나죠. 치효성모가 시대를 초월해 어디선가 계속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이거예요. 지금은 내 신어미 천지선녀가 치효성모를 몸주로 모시고 있고요."
- "두 분 나이가 자매뻘인데 어째서 신어머니와 신딸이지요?"
이야기에 빨려 들어 듣고만 있던 민규가 불쑥 물었다.
"신병 앓는 사람한테 신내림 받게 해주는 사람이 신어머니예요. 나이는 중요치 않아요."
"무병에 시달리는 분처럼 안 보이는데요."
"나는 어릴 적부터 이 병을 앓아왔고 그 때문에 가족도 내 모든 것도 산산조각이 났어요."
"당신이 천지선녀에 이어서 치효성모를 몸주로 모시게 됩니까?"
"치효성모는 나의 신이 아니에요. 선녀님의 신이죠. 내가 그분을 도와 일하는 건 개인적인 목적이 있어서예요. 동생이 많이 아파요."
"낫지 못하는 병까지 치료해 준단 말입니까?"
민규가 유도 질문을 던졌지만 호정은 답하지 않았다. 무서운 상상이 펼쳐졌다. 아직 강신(降神)이 안 된 그녀가 동생이 죽을 경우 그 혼백을 명도 받으려는 건 아닐까? 죽어 치효성모가 된 올빼미 눈의 아이처럼! 천지선녀라는 매개자를 통해서!
- "그럼 천지선녀에게도 한때는 그녀보다 능통한 분이 있었겠네요. 올빼미 귀신을 내림받게 해 준 신어머니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
"지금은 죽고 없어요. 백단보살 고현수라는 여자였죠."
"고현수?"
"전국에 크게 명성을 떨친 무녀였어요. 신통방통함은 물론 저주와 방자술을 이용해 사람까지 죽일 수도 있었던 사악한 여자."
"그분도 치효성모를 몸주로 모시고 있었나요?"
"아뇨. 그보다 더 큰 존재를 모시고 있었죠."
"장군보다 더 세고 올빼미 귀신보다 더 센 존재를요? 이건 뭐... 먹이사슬 같네요?"
"고현수가 모신 몸주는 사도세자가 빙의된 어떤 남자의 혼백이었어요. 애시당초 치효성모를 몸주로 가진 무당은 고현수의 어머니였어요. 어머니가 나이 먹고 병이 들자 후계자로 신기(神氣)가 왕성한 딸을 점찍은 거예요. 하지만 몇 차례나 치성을 드리고 강신의 노력을 해도 고현수에겐 내림이 되지 않았어요. 그건 그 여자가 애초부터 다른 신을 섬길 운명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몇 날 며칠을 기도한 끝에 올빼미한테서 계시를 받아냈죠. '네 딸의 몸주는 왕이 될 사람이다'라는 계시를요."
- "고현수는 사도세자와 생년월일이 똑같은 남자를 구해 사악한 방법으로 빙의의 단계를 밟게 만든 후 죽여버려 혼백을 취한 거예요. 시신은 버리고요."
"사람을 죽였다고요? 살인을 했단 말입니까?"
"천지선녀 앞에선 절대 그 말을 하면 안 돼요. 그래요, 증거도 없고 범인도 없는 완벽한 살인이죠. 하지만 고현수는 그날 이후로 사람에서 신으로 거듭난 거예요."
- 겪어온 며칠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호정의 말은 거짓이 아니리라.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였고 참으로 무서운 인간들이 많은 세상이었다. 인간의 상식을 불허하는 일이 현대에도 어떤 인간들 사이에선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그 불허가 남들이 이루지 못할 영험함을 이루고 믿는 자를 낳으면 불허는 기적이 된다. 이런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자들이 바로 무속인이다. 일반인들은 절대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 민규는 천지선녀의 스승 고현수가 어떤 남자를 사도세자 몸주로 취했다는 말을 듣고, 자신 역시도 비슷한 방식의 희생양이 된 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민규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정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평택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던 한기성이란 평범한 청년이었어요. 천지선녀가 세속인이었던 시절 대학 동창인 남자였죠. 그녀는 자신의 어떤 소원을 이루기 위해 아무런 원한도 없는 ... "
- 동이를 양손으로 들어 입으로 기울였다.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원래의 술동이에서 장군의 손이 닿는 대로 투명한 술동이가 새롭게 생겨나고 있었다. 술동이의 혼백이라고 불러도 좋을 광경이었다. 천지선녀가 다가왔다.
"장군이 뭘 하고 있지?"
"술을 마시고 있어요."
"귀신은 술을 좋아하지. 왜 우리가 전물상을 차렸는지 이제 알겠지?"
"허허실실인가요?"
"시간이 없어. 니가 죽었다고 믿지 않으면 장군은 인내에 한계를 느끼고 너를 죽일 거야. 내 점괘가 맞다면 내일이면 넌 끝장나. 자, 니가 갈 곳은 반대편이야. 몸을 돌려 저 숲으로 천천히 기어가."
민규는 시키는 대로 했다. 술 마시는 일에 팔린 장군은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장군에게서 멀어져도 몸 상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 울창한 숲 안에 나무를 베어내고 인공적인 개활지를 만들어놓은 공간이 있었다. 그 안에 기둥이 하나 서 있었다. 철봉만 한 굵기의 나무 기둥이 10미터나 될 높이로 하늘 높이 솟구쳐 있었다. 왜 산속에 이런 걸 지어놓았는지 해괴했다. 까마득한 꼭대기에 붙여놓은 닭과 비슷한 새 조각상이 간신히 보였다.
"이걸 솟대라고 하는 거야."
- [솟대: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혀 마을 수호신으로 믿는 상징]
- "눈치 채이지 말고 조용히 돌아봐, 장군이 아직도 술자리에 있나?"
"지금도 술을 마시고 있어요. 정말 신기해요."
"뭐가?"
"장무람이란 아가씨가 만졌을 때 손이 장군 몸을 관통했거든요. 지금이 그래요. 술동이를 들어 올리는데 영상이 겹친 거처럼 보여요. 상에 놓인 술동이와 장군이 들어 올린 술동이가 두 개로 분리되네요."
천지선녀의 음성이 조금 온화해졌다.
"우리가 제사상에 음식을 왜 올리겠어? 단순 전시용일까 봐? 귀신이든 조상이든 저런 식으로 임해서 보이지 않게 인간의 정성을 받는 거야. 보이는 것에 정성을 다하듯 안 보이는 것에도 소홀하면 안 돼. 그게 참다운 마음이야. 안 보인다고 무시 안 하고 믿음을 가지니까 수천 년이 지나도 살아남는 것들, 그게 바로 전통이지. 진짜 전통은 결코 미신(迷信)도, 미신(未神)도 아냐."
- "올라가."
"뭐라고요?"
"솟대 꼭대기까지 올라가라고."
"미쳤군요. 이걸 어떻게 올라가요?"
"시간이 없어. 저기 올라가야 장군이 널 포기하고 간다."
"대체 여길 왜 올라가야 되는데요?"
"이건 차력법(借力法)이야. 다른 물질, 다른 기운의 힘을 빌려 몸을 굳세게 하는 거지. 저 위에는 이 땅의 토지신이 있거든."
- "장군도 보는 난데 왜 토지신은 안 보이는 걸까요?"
"장군을 못 보는 내 눈이 토지신은 보고 있다. 어서 올라가."
고통 때문에 이를 악문 민규가 화난 음성으로 답했다.
"나보고 죽은 척을 하라더니 지금 당신은 몸을 굳세게 하라고 해요. 그거 모순 아니에요?"
천지선녀는 허를 찌른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민규의 공세는 한발 더 나아갔다.
"내가 모를 줄 알고? 날 여기서 떨어뜨려 죽게 만들려는 거지? 당신 날 진짜 죽이려는 거지? 저 제사상 위에 죽은 내 몸이 얹히는 건 아냐?"
"네 놈 의심은 부처도 구제 못 하겠구나. 장군이 칼을 뽑으면 네 혼백은 영영 구천을 떠돈다."
"구천이든 구만이든 마음대로 해. 턱걸이도 못할 기력인데 뭘 올라가란 말야?"
민규는 정말 힘이 없음을 입증하듯 자리에 드러누웠다.
"일어나! 올라가!"
"싫어! 난 한기성이가 아냐!"
- 법사들이 등을 돌린 채 풍악을 울려댔고 그 앞에 장군이 앉아 술동이를 입으로 가져다 대고 있었다. 언제 봐도 눈을 믿지 못할 장면이었고 왜 평범한 자신이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됐는지 암담했다.
"장군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는군요. 천지선녀는 다음번엔 나를 정말로 죽일 거예요."
"천지선녀가 무서운 건가요, 장군이 무서운 건가요?"
민규가 돌아보니 호정이 곁에 와 있었다. 민규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부탁이에요! 저를 살려주세요!"
"그러고 있잖아요."
"아니에요. 이건 사람을 죽이려는 거지 살리려는 게 아니에요. 제발 여기서 내보내주세요. 내 나이 이제 스물여섯이에요. 난 앞날이 창창한 소설가였어요. 층간소음 때문에 삶이 꼬여 여기로 이사 왔는데 저런 귀신은 생각도 못 했고 무속 행위로 사망하는 건 더더욱 생각 못해봤어요. 이렇게 죽기는 싫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내 동생과 동갑이 맞군요."
호정이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민규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따뜻한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무릎을 꿇었다. 눈물이 민규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호정은 고개를 외면했지만 표정엔 더 크고 지독한 괴로움이 찍히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를 동생처럼 봐주세요! 제발 한 번만 저를 살려주세요. 누나! 제가 여기서 나간다면 경찰에 신고할게요. 누나를 구하고 동생도 구하도록 협력할게요. 당신은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 "
- "이젠 그자에게 죽는다 해도 상관없어요. 천지선녀에게 먼저 죽을 테니까요. 어쩌면... 장군은 나를 도와주려는 존재인지도 몰라요.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할게요. 아무 책임도 묻지 않을게요. 제발 한 번만 나를 못 본 척해주세요!”
"당신이 사라지고 나면 내가 당할 곤란은 생각해보지 않았나요?"
막힌 갱도를 뚫고 또 뚫고 나아가다가 석벽에 막힌 기분이었다. 그녀의 한마디는 민규의 행동을 멈추게 했다. 민규는 무너지듯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미처 그걸 생각 못 했네요."
호정은 민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 섭주는 내 고향이에요. 나는 서른 살 이후로 여기를 떠나 살았어요. 옛날, 내 친엄마는 신혼 초부터 무당이 될 기질이 있다고 해 신내림을 받을 처지였는데 그것을 받지 않았어요. 그러자 신병을 보러 왔던 무녀가 엄마에게 경고했어요. '지금 신을 받지 않으면 너는 어찌어찌 무사히 넘어가겠지만 너의 후대에는 반드시 큰 화가 미칠 것이다'라고요. 그 후에 내가 태어났어요. 이 북두칠성 점을 날 때부터 얼굴에 붙인 채로요. 엄마는 살아가는 내내 불길함을 버리지 못했고, 내 나이 여덟 살 때부터 실제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저런 장군이나 사극 주인공 같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고 6.25 때 ... "
- 옆집 남자가 떠올랐다. 그 사람은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중환자였다. 호정이 창문을 열었다.
- "누나는 어쩌고요?"
"중요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명심해요. 당신이 어디 있든 천지선녀는 알아내고야 말 거예요. 잡히면 안 돼요. 절대 잡히지 말아요. 천지선녀가 말하는 죽음의 흉내보다 차라리 위험하고 험난한 도망살이가 나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에겐 의지가 있어요. 당신이 쓰는 소설이 그 의지의 원동력이란 걸 나는 알아요. 쓰고 싶은 걸 쓰는 건 장소가 문제가 아니에요. 언제든, 어디서든 쓰고 싶은 소설을 쓰면서 잘 살면 돼요. 그게 귀신의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벌이는 이런 굿판보다 더 나을 수도 있어요.”
민규는 마음의 갈등을 겪었지만 여유가 없었다. 여섯 시가 되면 천지선녀가 돌아올 테니까.
- 죽음의 경험에 접근할수록 환각은 강화되었다. 의처증을 앓는 경찰관이 아내와 내연남을 쏘아 죽였고, 손바닥만 한 몸통에 팔다리가 붙은 기형 인간이 경찰관의 머리 위에 있었다.
'그 이상한 형상은 경찰관이 과거에 유산했던 아이가 아닐까?'
떠오를 듯 말 듯한 기억이 거기서 끊어졌다. 민규에게 정상의 인간을 능가할 영적 능력이 생긴 건 확실했다. 문제는 그 영향력이 장군에게서 온 건지 천지선녀에게서 온 건지 모른다는 점이다.
-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604호가 민규를 맞이했다. 간만에 방문한 내 집인지라 정겨웠다. 어린애가 무서움을 겪을 때 종종 하는 말은 '집에 가고 싶어'이고, 이 '집'은 흔히 '엄마 아빠'와 연결된다. 엄마 아빠와 같은 안식처가 내 집이니까. 어깨에 힘이 풀리고 통증도 되살아났지만 마음은 편했다. 귀신의 출현과 무당의 고문까지 겪은 민규에게 층간소음은 더 이상 살아있는 공포로 다가오지 않았다. 차라리 소음이 있어야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이 입증될 거란 묘한 기분마저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민규는 옆집으로 고개를 돌렸다.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605호 아가씨 집 앞에 꽃다발과 메시지 쪽지가 놓여 있었다. 요즘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프로포즈였지만 작가인 민규는 이 같은 장면에 애틋한 감동을 받았다. 저렇게 관심을 받는 아가씨가 뭐가 억울한 걸까? 모르지, 저 꽃의 주인은 스토커일 수도 있으니.
- 경련이 일고 발작이 일어날 것 같았다. 간신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까지 내려간 민규는 우편함을 뒤졌다. 확인 결과 603호 남자의 이름은 위태용, 만나면 죽인다는 504호 남자는 위철규였다. 이호정의 가족은 거기 없었다.
"모두 위 씨라니... 이것들은 한패야 그렇구나! 비현실적인 충간소음이 이유가 있었어. 이것들이 처음부터 나를 목표로 무서운 음모를 꾸몄던 거야!"
장군을 속여 퇴치하려는 천지선녀의 치성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사람을 제물로 받는 장군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애초부터 알았던 것이다.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위뇌홍 장군은 한국의 시골 아파트까지 동서남북에 추종자들을 갖춘, 현실과 저승에 양발을 걸친 진정한 악귀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민규는 어느 날 불쑥 그렇게 장군 귀신의 제물로 낙인찍혀 버린 것이다. 추종자들은 제물에게 보이지 않는 저주의 영력을 퍼부어댔다, 바로 층간소음으로! 그냥 살았더라면 ‘재림의 불'에 인신공양이 되었을 민규는 섭주 최고의 무녀 천지선녀를 만났기에 그들이 신으로 모시는 장군을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심쩍은 게 하나둘이 아닌 천지선녀를 백 퍼센트 믿을 마음은 없었다.
이사를 제안했던 <웰심신케어>의 의사 구영훈이야말로 생명의 은인이었다. 이제 방법은 하나였다. 구영훈에게 돌아가야 했다. 민규가 막 발길을 돌리는데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 나뭇가지가 공격해 오자 뼈를 깎는 고통이 몰려들었다. 선글라스가 약간 기울어지면서 사람 눈 대신 박힌 거대한 올빼미 눈이 드러났다. 호박처럼 둥그런 원형에 바둑알 같은 점이 박힌 올빼미의 눈.
이 눈을 감추기 위해 천지선녀는 네 시에서 여섯 시까지 숨어 지냈다. 올빼미가 암약을 준비할 신시(申時)와 유시(酉時) 사이에 드러날 본색을 몸을 숨겨 가렸던 것이다.
- 사사사삭!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가 민규의 눈을 쓸어버렸다. 무수한 잎이 가시로 변해 눈을 찌르고 들어왔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천지선녀의 음성이 귓구멍을 찌를 듯 들어왔다.
"이건 복숭아나무 가지야. 복숭아는 오목의 정수로 사악한 기운을 다스리고 야행하는 백귀를 쫓아내는 힘을 갖고 있다. 귀신 묻은 너를 딱 다루기 쉬운 도구라구. 봄철의 정으로 늦봄 잎이 돋아나기 전에도 꽃을 피우는 게 복숭아나무야. 그러니 다른 나무보다 생기가 충만해 구마의 힘도 왕성하단다. 내가 이런 신비한 물건으로 그 무서운 장군을 막아주는데 너는 그걸 왜 모르니? 네게 시간이 남은 줄 아니?"
민규가 두 손을 모아 빌면서 소리쳤다.
"장군이 날 집요히 따라온 이유를 알았어요. 추종자들이 있어요! 내 몸을 제물로 바치려는 무서운 자들이 있다고요!"
"추종자가 있다고? 하하, 니가 뭘 모르는 모양인데 그자에겐 추종자 따위 없어."
"아니에요,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장군의 후손들이 내 아파트 동서남북에 살아요! 모두 위 씨들이에요! 우리나라 사람인지 중국인인지 화교인지 조선족인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들이 날 피 말려 죽이려 한 거예요! 위뇌홍 장군에게 제물로 바치려고요!"
"목소리 죽이고 입 다물어! 죽는 일에만 집중해! 죽는 걸 확인해야 장군이 물러간단 말이다!"
"그 재림은 사교가 결부된 재림이야! 귀신 속이는 일이 문제가 아니야! 이 돌팔이 무당아!"
- '나보고 준찬이라 그랬어. 불쌍한 여자.'
민규는 숨을 가다듬고 천지선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만져보았다. 이번에도 손은 그대로 관통했다. 추용수, 성휘작, 김진석 역시 안개처럼 손이 관통했다. 하지만 호정의 북두칠성 점이 있는 뺨에는 손이 닿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추리작가가 아닌 공포작가의 사고방식으로 민규는 섬뜩한 결론을 도출해 냈다. 다섯 명 중 넷은 귀신이며 하나만 사람이라는 결론. 호정이 이들 귀신에게 부림 받는 척했지만, 사실은 부렸던 유일한 무당이라는 결론.
이들을 내버려 둔 채 민규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귀신이 가득한 섭주, 귀신과 연관된 무서운 사람이 가득한 섭주를 속히 벗어나고 싶었다.
- [洞神堂(동신당)]
2층의 만(卍) 자는 천지선녀네 집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아파트 발코니 창이 아니었다. 커다란 장대 깃발에 붙은 만 자였다. 지붕에서 큰 쥐가 뛰어내리고 얼룩 고양이가 그 뒤를 맹렬히 추격했다.
파파파파파팍! 우당탕! 쾡그랑! 키야아아옹! 찌이익!
쫓고 쫓기는 축생은 민규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민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차장이라고 생각해 왔던 공간도 잡초가 무성한 평지였을 뿐이다. 정자는 그대로 있었지만 그 옆에는 전에는 못 봤던 비석들이 서 있었다. 공동묘지 같은 느낌이었다. 아파트 통로는 나무 대문으로 바뀌어 있었는데 지금은 활짝 열린 상태였다. 민규는 자기 집이라고 생각해 왔던 통로 입구로 들어갔다. 빗발이 거세지고 천둥이 쳤다.
- 이삿짐이 하나도 없었다. 살림도구, 노트북, 술병도 사라지고 없었다. 단지 노란 종이들이 즐비했을 뿐이다. 부적으로 여겨지는 그 종이에는 역할을 맡긴 것처럼 <소주병>, <노트북>, <가방> 따위의 붉은 붓으로 쓴 글자가 붙어 있었다. 민규가 충격받은 건 자신의 저서가 보이지 않는 대신 <떼부잣집 탐정> 글자가 붙은 부적이 해당 권수만큼 놓여 있단 사실이었다. 그중에는 성휘작의 휴대폰에서 보았던 '사인'도 있었다.
"그 책은 분명 내가 쓴 거야. 어떤 술법도 내 업적을 속일 순 없어."
- 벼락이 치면서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머리를 강타했다.
'누가 내 머리를 조종하는 건 아닐까?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3편까지 내놓은 <떼부잣집 탐정>의 주인공 이름은 준찬이었다. 이준찬.
그는 그 사실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동신당이 동신아파트로 보였을 때는 떠올리지 못했었다.
- 민규는 부적을 타고 넘어 무녀의 집이었던 2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이곳에도 열린 문으로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무녀의 아파트는 시골 농가의 오래된 헛간처럼 보였다. 불상과 불단이 폭격 맞은 듯 부서져 있었고 그가 썼던 서약서도 비에 젖어 나뒹굴었다. 서약서는 다시 보니 피가 묻어있는 부적이었다. 누가 보다가 팽개친 것 같은 진짜 도서가 있었는데 <나사의 회전>과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었다. 전자는 장무람이 읽던 것과 같았고 후자는 1980년대에 출판된 삼중당 문고의 낡은 중고본이었다. <현기증>과 <다이알 M을 돌려라> DVD도 있었다. 민규는 케이스에 적힌 <현기증>의 스토리를 읽었다. 스코티라는 탐정이 부자 친구에게 매일 바깥으로 나도는 아내를 감시해 달라 의뢰받는다는 서두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 장무람이 책 한 권을 갖고 왔다.
"지금 이럴 시간이 없어. 천지선녀에게 배신당한 난 널 도와주러 온 거야. 니가 불쌍해서 널 그냥 놓아주고 싶어. 물론 이미 죽은 몸이긴 하지만. 사자가 그렇게 빨리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우린 순탄하게 일 처리를 했을 거야."
"자꾸 사자 사자 그러는데 왜 장군이라고 부르지 않지?"
"그는 장군이 아냐. 위뇌홍이란 이름은 지어낸 거야."
장무람이 민규에게도 익숙한 책을 펼쳤다. 처음 갑옷 입은 남자에게 시달렸을 때 천지선녀가 니가 본 장군을 고르라며 보여준 책이었다. 장무람이 몇 장 넘기자 칼집을 허리에 차고 용머리 창을 어깨에 걸친 위뇌홍 장군이 나왔다. 하지만 그녀가 그림 아래의 종이를 떼어내니 위뇌홍 장군의 설명 대신 전혀 다른 글이 나왔다.
- [감재사자(監齋使者) : 죽은 이를 감시하고 보살피며 저승으로 데려가는 사자. 죽은 사람 중에 저승으로 가지 않으려고 빈틈을 보아 도망가는 영혼도 있기 때문이다.]
- "이제 알겠어? 위뇌홍은 지어낸 이름이야. 그는 저승에서 죽은 혼을 데리러 오는 감재사자라고. 사찰에 가면 이 그림도, 이 그림을 본떠서 만든 조형물도 수두룩해. 이 자가 바로 저승사자란 말야. 그리고 네 혼백은 육신이 죽었는데도 살아있는 걸로 믿고 있고."
-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정말 몰랐어요... 이제는 이해하겠습니다. 얼마나 괴롭고 억울하셨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어요. 지켜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해요..."
그러자 억울하다는 울음이 마법처럼 잦아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눈을 감은 민규는 인자한 중년 부인과 준수한 청년과 아름다운 아가씨가 다가와 새로 이사 온 이웃에게 이곳에 정말 잘 오셨다고 맞아주는 광경을 보았다. 그들은 예정을 앞당겨 원치 않는 죽음을 당한 불행한 사람들이지만 역시 원치 않는 신세로 이곳을 찾은 새 이웃에게 슬픈 내색 대신 밝은 미소를 선사했다. 특히 김혜령은 할 말이 있다는 듯 한참이나 바라보아 민규의 관심을 끌었지만 결국 말을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눈을 뜨니 그들은 사라지고 유골함만 보였다.
'나 역시도 605호 아가씨를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하지만 기억이 안나.'
- 민규는 504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머리가 길었을 당시의 정철규 사진이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고 유리막 바깥을 보고 있었다. 그의 유골함은 파손되고 깨져 있었다. 정철규가 웃으며 유리막을 손으로 막았다.
"너보다 열네 살 많다는 것만 알아둬. 난 삶이 싫어 자살한 사람이야. 이제 이렇게 밖으로 튀어나왔으니 두 번 다시 돌아갈 수도 없지. 재림 추모공원 관리자는 저게 저절로 깨져 식겁했을 거야."
민규는 고개를 끄덕이고 드디어 자신의 유골함이 있는 604호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604 봉안실에 유골함은 없었다. 정철규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틀렸다. 감재사자가 준찬이를 끝내 데려가는구나. 혼백을 편히 쉬게 하고 살인귀를 잡으려던 우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어."
사자의 칼이 천천히 민규의 머리로 이동했다. 민규가 사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이제 저는 죽은 사람인 걸 깨달았습니다. 제가 죽음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겠습니다.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높은 권위에 반항하려 한 게 아니었어요. 하지만 가까스로 살아난 기억이 마구 섞여 명확하지가 않아요. 제가 어떻게 죽었는지만 알고 싶습니다.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 채 가면 평생의 여한이 될 것 같아요. 모든 사실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분이 제 혈육이 맞다면 먼 길을 달려온 정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부디 작별인사라도 하게 해 주세요."
- 사자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멈추는 듯하더니 이내 조금 전보다 더 위협적인 제스처로 칼을 쳐들었다. 무당들과 결탁해 몇 번에 걸쳐 자신을 속이고 따돌린 죄수였으니 단단히 화가 났으리라. 밤하늘에 먹구름이 뭉치고 자연의 조화가 인간의 지식과 역행했다. 저 너머 세상의 칼이 하늘 높이 꼿꼿하다가 낙하해 민규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러나 칼날로 친 것이 아니었다. 민규의 이마에 놓인 것은 감재사자의 칼등이었다. 그러자 민규의 머리로 한 줄기 빛과 함께 마지막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 "상우 씨, 이 사람은 여기 자주 오는 사람이야.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러지 마."
"근데 왜 여길 뻔질나게 찾아오지?"
총구가 떨고 있는 지현아를 향했다. 투블럭컷이 준찬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찼다. 준찬은 쓰러질 듯 휘청거렸고 지현아가 간신히 붙잡았다. 부축하는 포즈의 두 사람을 본 남자가 눈썹을 구겼다. 지현아가 얼른 준찬의 몸에서 손을 뗐다. 파출소장이 나섰다.
"야, 배상우! 너 미쳤어? 총까지 빼 들고 이게 무슨 짓이야!"
"두 번 다시 나보고 미쳤다 그러지 마요! 소장님도 손 들어요!
"배상우가 총을 겨누자 소장이 손을 들었다. 김강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배 경위, 우리 진정합시다. 그 총 내려놓고 얘기로 풉시다."
"나 몰래 지원 무전만 쳐봐, 당신부터 쏠 거야, 김강오 씨. 당신들은 가만있어. 저것들만 처치하면 되니까."
소장이 다시 한번 배상우를 달래려 했다.
"상우야, 이거 문제 엄청 커진다. 내 너 안 다치게 약속할 테니 총 내리자. 저 젊은 친구, 내 잘 아는 사람이다. 나이만 MZ 세대지 고아나 다름없는 불쌍한 친구야. 엄청 불행하게 자라서 여자한테 관심 둘 만한 형편도 못 돼. 절대 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다. 지 경장 항상 너만 믿고 의지하는 모범적인 부인인데 저런 친구 쳐다보기라도 할 것 같니?"
"소장님은 왜 저놈 편을 들어요? 좀 전에 커피 준거 못 봤어요? 생긴 것도 기생오라비같이 멀끔한 게 무슨 정비공이에요? 저러니 저 계집이 빠져들고도 남지."
"정신 좀 차리자! 언제까지 이럴 거니?"
"왜 내 편은 하나도 안 들어? 왜! 왜! 내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 왜 날 이해해 주는 인간은 하나도 없어?"
- "말했잖아, 지망생이라고! 이야기 쓰는 데 참고할 질문을 하러 종종 오는 거라고!"
"근데 왜 네가 있는 붕평파출소만 찾아오냐고? 내가 모를 줄 알아! 저놈은 여기에 벌써 열두 번째나 왔어."
준찬이 들어 올린 손을 떨면서 말했다.
"다, 다, 다른 파출소에선 저를 귀찮아하고 쫓아내서 그랬던 겁니다."
하늘을 향해 총이 불을 뿜었다. 파출소장과 김강오가 움찔거렸고 지현아와 준찬이 서로를 붙잡았다.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의 본능적인 움직임일 뿐 욕망에 사로잡힌 남녀의 포옹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총 가진 자에겐 그 모습이 결정적 증거로 작용했다.
- 그러자 마취라도 걸린 듯 유골함은 움직이지 않았다. 추용수와 성휘작이 조심스럽게 함을 빼내어 개집처럼 생긴 상자에 옮겨 넣었다.
천지선녀는 네 사람을 둘러보았다.
"지금 이준찬이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입장에 처해있는지 모를 거야. 혼백이 죽음을 인정치 않고 이승을 떠돌면 저 하늘에서 혼을 관리하는 누군가가 나타나는데 이 친구는 현실주의자라 그런 걸 부정하거든. 다른 원혼들의 원성도 층간소음쯤으로 여길 테지. 그래도 저세상의 힘은 이 친구에게 고스란히 작용해. 아마 이준찬인 '누군가 자기를 잡으러 올 것 같은 불안함과 이상함'을 느껴 불안해지기 시작할 거야. 그게 감재사자인 줄은 모르고 원한 가진 사람인 줄로만 알 테지."
- "정말 감재사자가 있단 말입니까?" 성휘작이 물었다.
"사람들은 유명계니 저승이니 따위의 공간이 허구라고 떠들어 대지만 허구라는 건 모두 사실에 근거해서 만들어져, 현실에 혼돈이 몰아칠까 봐 지어낸 이야기로 바꿔치기되는 거지."
유골함을 바라보던 천지선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나가 있구나. 이 아이의 누나를 데려와야 해."
"이 사람 누나가 누군데요?"
"너희들은 무가에 발 담근 몸으로 나처럼 귀신을 볼 수 있지. 하지만 이 아이의 누나는 무가를 회피해 사는 데도 너희보다 한 수위야. 귀신을 보는 건 물론 만질 수도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아이야."
선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때문에 가족이 저주를 받았어. 2대째 신내림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 아이가 죽은 거야. 아까 저 605호를 봤을 때 내 몸주는 강한 암시를 내렸어. 김혜령과 이준찬은 같은 범인이 죽였다고."
"하나는 교도소에 있고 하나는 자살했다잖아요?"
- "추모공원 대표가 그놈 있는 교도소를 알려줄 테니 넌 곧장 가서 그놈을 면회하고 와. 왜 죽였는지 무슨 원한이 있는지 살인할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이상한 물건을 줍거나 만진 게 있는지 그걸 알아내. 정신병 있는 놈들 머리를 타고 앉아 살인을 부추기는 귀신을 난 알고 있어. 모두 잘 들어."
그녀는 다른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이준찬이는 지금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어. 유명작가쯤으로 여기는 거 같아. 살아있을 적 소망의 의지가 너무 강해서 그래. 대단한 청년이야. 우린 이 청년한테 죽은 경과를 성급하게 알려주면 안 돼. 혼백이 놀라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차근차근 알려줘야 해. 생전의 기억을 잃었을 테니 우리가 마지막 기억을 상기시켜 줘서 어떤 악귀한테 살해당했는지를 알아내야 한단 말이지. 감재사자가 도착하기 전에 해야 해."
"언제 도착하는데요?"
"7월 12일이 이준찬이가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이야. 그날사자는 준찬의 혼백을 데려갈 거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모습을 드러내 준찬을 관찰하고 말없이 대접도 요구할 거야. 이준찬이는 아무것도 모를 테니 사자의 접대는 우리가 한다. 술을 몹시 좋아하니 용수와 휘작인 달걀을 넣은 술을 입구가 좁은 술동이에 담아놔."
- "새 숙주를 찾은 거겠지. 붕평파출소 CCTV 보면 배상우도 사살당하기 전에 돌을 던지는 모습이 찍혔잖아?"
"제주도에서 주은 돌이겠죠?"
"제주도 갔다 와서 성격이 변했다 하니 그렇겠지. 그래, 귀신이 떠난 최시행이 지금은 범행을 후회하고 있어?"
"말은 그렇게 합니다만 진심이 아닌 거 같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 귀신이 제아무리 엔진 첨가제 역할을 한다 해도 살인의 주 엔진은 인간이 이끄는 거야."
- "여기 우리가 짠 연극 시나리오가 있다. 네 동생 혼백의 구제를 위해, 또 그 악령을 잡기 위해 우린 힘을 합쳐야 해. 또다시 억울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유골함이 흔들거렸다. 민정이 유골함을 안으려 하자 천지선녀가 매섭게 뿌리쳤다.
"시작부터 약한 모습 보일 거니? 이민정은 잠시 잊어. 넌 이제부터 내 신딸 이호정이야! 내가 가스라이팅을 한다 해도 넌 받아들여야 해!"
성휘작이 천지선녀의 집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좋지 않은 소식이 있습니다. 준찬의 혼백을 임시 안치할 동신당 주위로 감재사자의 기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 황금 테두리를 벗어난 준찬을 향해 사자가 눈을 부릅떴다. 손을 잡고 어깨를 붙잡고 울먹이는 네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던 사자가 잠시 후 칼의 방향을 돌려 추모공원 바깥을 가리켰다. 황금빛이 구름처럼 이동하더니 그곳에 깃대 하나가 섰다. 천지선녀가 천수경을 멈추고 눈을 떴다. 올빼미로 변한 그녀의 눈은 깃대에 가지가 뻗어 나오고 푸른 잎이 울창해지는 기적을 보고 있었다.
- "신간(神竿)이로구나! 준찬아, 어서 저기 올라가!"
이웃들이 천지선녀의 말을 듣고 대번에 손을 놓았다. 준찬이 깃대를 돌아보았다.
"신간이 뭔데요?"
"단 한 번이라도 대꾸 없이 내 말 좀 들을 순 없겠니?"
천지선녀가 꾸짖자 민정이 준찬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신간은 신의 하강로야. 아무래도 사자께서 네게 기회를 주시는 거 같아. 선녀님 말씀 믿고 올라가, 준찬아."
깃대가 계속 높아지고 있었다. 천지선녀의 말에 의문을 보였던 준찬은 민정의 말을 듣고 순순히 깃대로 걸어갔다. 빛이 그를 에워싸고 깃대에서 뻗어 나온 가지와 수목이 점점 풍성해졌다.
- "사자께서 네 동생을 우리에게 통용될 방식으로 보내주시는 거야! 사람 사는 세상에도 물의를 끼치지 않도록! 지금 저분 역시도 하늘의 지시를 어기고 있다고. 하지만 명심해. 이걸로 넌 동생과 영영 이별이 될지도 몰라."
"누가 내림받지요? 제가 받나요?"
"안 돼! 지금 넌 평생 네 가족에게 미친 무(巫)의 족쇄에서 벗어난 거야. 다른 사람이 필요해."
- 보라색으로 변하고 뺨에는 한자마저 찍힌 저주받은 얼굴에 천지선녀는 놀랐다. 장무람은 불안한 본심과 달리 여유마저 보였다.
"내 얼굴이나 어머니 눈이나 다를 게 있나요? 감재사자를 직접 만진 사람도 나밖에 없는데 다른 사람 선택할 입장이 되냐고요?"
- 장무람이 깃대 아래에 서자 도구도 없이, 무의도 입지 않은 천지선녀가 펄펄 뛰면서 내림굿을 벌이기 시작했다. 추용수와 성휘작이 박수와 발 구름만으로 무악을 대신했다. 민정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굿의 성사를 바라는 진심 어린 축원을 보냈다.
천지신명이시여 내 동생을 저승도 이승도 아닌 스스로 원하는 장소에 살게 하소서
- "고현수를 위해 널 해친 기억이 아직도 날 놓아주지 않아, 기성아, 네가 나를 죽인다 해도 난 기꺼이 받아들일 거야."
"네가 천지선녀가 된 건 재물과 애욕에 눈이 멀었던 세속인이 착한 일 하라는 하늘의 명을 받았기 때문이야. 넌 방금 흉살에 일생을 시달려온 남매를 동시에 구제했어."
"하지만 널 죽인 건 나야! 이건 평생 변치 않는 사실이라구! 내 눈을 봐! 고현수의 어미 치효성모처럼 내 눈도 올빼미로 변해버렸어! 이건 죽을 때까지 날 쫓아올 천벌이야!"
"연진아."
한기성이 천지선녀의 속세 시절 이름을 불렀다.
"네가 올빼미 눈을 얻은 데는 쥐처럼 밤을 휘젓는 어두운 기운을 찾아내 박멸하라는 섭리의 목소리가 있는 거야."
- "그때 이미 난 눈을 감을 운명이었던 거야, 연진아. 한 여자의 눈을 뜨게 한 대가로 그 여자가 앞으로 많은 생명을 구하게 될 대가로."
활짝 핀 미소를 남기며 기성의 몸이 사라졌다. 천지선녀는 기성의 흔적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곁에 있는 사람들한테 눈길을 돌렸다. 장무람과 민정이 서로를 안고 울고 있었고 성휘작과 추용수가 이제 막 택시를 타고 도착한 구영훈과 김호순을 맞이하는 중 ...
- 한기성과 천지선녀 이연진에 관해 더 궁금한 이야기는 저자의 2020년작 <올빼미 눈의 여자> 참조
- "암소의 탯줄이다. 넌 잡혔어, 왕래대감!"
"왕래대감?"
홍사준의 눈에서 어두운 빛이 사라진다. 추용수가 이죽거렸다.
"떠돌뱅이 귀신이지만 그 돌멩이에 붙은 놈은 조금 달라. 그놈은 시샘의 귀신이랄까, 인간의 나쁜 습벽에 빌붙어 그 나쁜 성향을 강화시키는 아주 질 나쁜 귀신이지."
- "네가 나를 죽이고 내 이웃도 죽인 놈아구나."
민규의 손에 잡힌 기형 인간이 몸을 흔들며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넌 내가 죽였는데 어떻게 저 무당에게 지피어서 돌아왔지? 나하고 같은 신세가 되었구나. 네겐 우월한 힘이 있어. 네 능력을 저런 애들을 위해 쓸 필요 없어. 나한고 손잡고 다 쓸어버리자. 귀신은 인간과 손을 잡으면 안 돼. 귀신이 인가보다 위대하거든. 지금의 나처럼 자유롭게 다니면서 이간질을 해 서로 죽이게 만들자구. 필요 없는 것들을 죽여야 해, 여자, 어린아이, 동물... 죽여야 할 것들은 이 흥겨운 세상에 너무나도 많아."
"하나같이 힘없는 존재만 노리는구나. 대체 네 살육의 이유가 뭐니?"
민규를 흉내 낸 음성으로 장무람이 물었다. 신기(神氣)의 왕성함에 그녀의 눈은 번쩍거렸다. 기형 몸집을 대신한 왕래대감의 눈은 광기로 빛났다.
"귀신은 인간을 질투하니까. 인간들은 이걸 결코 이해 못 해."
"왜?"
"그런 기록이 없으니까. 귀신이 되어서 그 진실을 글로 남긴 자는 없으니까."
- "난 네게 죽은 인간 이준찬이면서 살아있는 귀신 작가 김민규야. 여기 장 여사의 손을 통해 <떼부잣집 탐정> 시리즈를 쓸 거야. 넌 내 글의 소재가 되고, 내 주치의의 일 등급 환자가 될 거야."
"주치의라니?"
"저기 오네."
민규가 가리킨 방향에 일곱 가지 색깔의 빛이 생겨났다. 감재사자가 쇠사슬을 끌고 성난 표정으로 걸어왔다. 종로의 시민들은 사자를 볼 수 없었지만 왕래대감은 똑똑히 보았다. 자벌레처럼 온몸을 오므렸다 펴며 또 새롭게 떨던 왕래대감은 스스로 쇠사슬 고리에 머리를 집어던졌다. 어느새 감재사자의 손에는 수막새 얼굴무늬와 비슷한 돌이 쥐어져 있었다. 신참 때 놓쳐버린 범인을 드디어 검거한 정년퇴직 전의 형사처럼 사자는 왕래대감 악령을 거칠게 잡아끌고 갔다.
작가의 말
이 소설은 과거 내가 취재했던 어떤 여성의 이야기에서 귀한 소재를 얻었다. 그분은 어릴 적 자신에게 닥친 신내림의 운명을 거부했기에 문학가 지망생 남동생이 이른 나이에 이유 없는 절명(絶命)을 당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어떻게 확신하냐는 내 물음에 그분은 '신이 꿈속에 나타나 너 대신 혈육에게 짐을 지우겠다 했어요'라고 답했다. 닿을 수 없는 영역에서 진실을 얘기하는 그분 앞에 나는 어떤 반론도 제기할 수 없었다.
이 애달픈 비화(悲話)에 내가 생각해 왔던 플롯을 접목하면 공포도 주면서 감동도 줄 수 있는 소설을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진행해 오던 다른 소설 작업이 있었고 분주한 일상사까지 겹쳐 이 계획은 오랜 기간 잊히고 말았다. <단죄의 신들>을 완성하고 났을 때 그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고, 장르의 법칙에 충실하면서도 ...
... 쓰다 보니 이 이야기는 나의 2020년작 <올빼미 눈의 여자>의 속편 격인 소설이 되었다. 인간의 이기심을 주제로 다룬 그 소설을 쓸 때 나는 악한 생각에 물든 캐릭터의 감정에 과몰입하느라 에너지를 많이 소모했다. 기회가 되면 악당인 등장인물이 선인으로 갱생하는 후속작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애당초 '섭주 유니버스'에서 <신을 받으라>와 연관될 이야기로 설정했던 이 소설은 구조의 변화를 거쳐 <올빼미 눈의 여자>와 연결되었다(물론 그 이야기를 접하지 않고 이 책을 봐도 무방하다).
올빼미의 눈은 무섭지만 아름답다. 올빼미는 밤의 수호신이자 공포의 천사다. 선과 악 양면을 지닌 이미지가 특유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다. 어디선가 그런 존재가 우리가 잠들어있을 밤의 허공을 날아다니며 나쁜 마음들을 정리해 주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원고를 받자마자 '올빼미 2부를 썼으니 3부는 어떻습니까?'라는 농담으로 나를 기겁하게 하고, 이 소설이 나오는데 기꺼이 시간과 인내와 믿음과 의리를 제공해 주신 박영욱 대표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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