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해로
출판 : 북오션
출간 : 21.09.03
점점 더워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버틸 만하다.
한낮 시간에 어떤 활동을 하느냐에 따라 개시 시점이 달라지지 않을까.
박해로 작가의 발표작을 모두 읽었다.
현대 무속, <귀경잡록>, 그리고 군대까지 대략 세 가지 주제로 나눠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게 되는 건 현대 무속 쪽이다. 원대신왕과 <귀경잡록>의 육십오능음양군자가 연결된다고 볼 수도 있긴 하지만, 글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시대 배경과 문체가 달라지니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전율의 환각>은 <귀경잡록> 시리즈 중 기준점이 되는 작품이다.
전체적인 구성, 파격성, 다른 작품들과의 유기성 등을 따졌을 때 가장 중간값에 위치하는 느낌.
어디 하나 빠지지도 도드라지지도 않는다.
라고 생각하고 발표 시기를 보니 역시 <귀경잡록> 계열 중에서는 가장 처음에 발표된 작품이다.
(실제로 가장 처음 저술한 책인지는 모르겠다.)
원린자에도 다양한 종족이 있다는 설정은, 아무래도 그레이, 렙틸리안, 플레이아디안 등의 설정과 겹쳐 보인다.
하지만 외형이 이질적일 뿐, 목표와 이익과 감정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하는 원린자들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어쩌면 곧바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마주했을 때 저도 모르게 그것을 '삿된 것'으로, '우리가 아닌 것'으로 분리시켜 바라보는 인간의 특성을 비틀어 담아낸 건 아닐까.
박해로도, 러브크래프트도.
즐겁게 읽었다.
- [귀경잡록(鬼境雜錄) 그리고 원린자(遠麟者)]
세종 20년(1438년), 건국신화를 부정하고 백성들을 미혹시킨다 하여 금서 처분을 받게 된 <귀경잡록>은 당대의 악명 높은 도참비서(圖讖秘書, 미래의 모습을 예언과 그림으로 담은 비밀스러운 책) 가운데 하나였다.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오로지하는 무변유일극존신(無變唯一極尊神) 육십오능음양군자(六十五能陰陽君子)가 우주 삼라만상의 진정한 창업자이며, 그가 부리는 이계 별천지의 원린자(遠麟者)들이 호시탐탐 인간세상을 노린다는 해괴한 예언서는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전대미문의 공포를 전염시켰다.
'뱀 껍질의 선비'로 알려진 저자 탁정암은 <귀경잡록>에서 조선이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을 '원린자'라고 예언하고 있는데, ...
- 한성부 좌윤(左尹) 구현담은 임금에게 간신을 멀리하고 충신을 가까이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그가 말한 간신이란 갓 보위에 오른 임금과 더불어 조정을 장악한 신진세력이었다. 그들은 바깥으로 청렴을 부르짖으면서 안으로는 부정부패에 손을 대 막대한 사익을 취했다. 관직을 팔고, 남의 땅을 빼앗고, 부녀자를 건드리고, 규정 외의 세금을 거두었다. 그 모두가 힘없는 백성이 짊어져야 할 멍에로 연결되었다.
- 권신들은 구현담에게 벌을 주라며 공세를 퍼부었다. 임금은 구현담이 강직한 신하임을 세자 때부터 알고 있었으나 '삭탈관직 후 유배' 호소가 워낙 커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유배의 사유는 '무고'였으되 실제로는 '괘씸'인 셈이었다.
- 유배죄인의 집 주위에 가시 울타리를 쳐 그 안에 가두는 위리안치(圍籬安置)를 당하게 된 구현담은 유배지인 해남까지 함거(檻車)로 이동하게 되었다. 함거란 나무 감옥이 널빤지 위에 얹힌 수레를 황소가 이끄는 교통수단을 말한다.
- 한양에서 해남까지 구현담을 동행 계호(戒護)하는 관원들은 금부도사 하나에 젊은 장교 세 명이었다. 차역 된 농민인 나장(羅將) 대신 훈련원 군관 셋을 금부도사의 보조 호송자로 지정한 것은 구현담의 죄가 가볍지 않음을 시사하기 위함이었다. 즉 구현담은 새 조정에 반항하면 이 꼴 난다는 '시범 케이스'였던 것이다.
(리뷰자 주 : 전체 소설의 분위기를 유지할 때는, 시대적 언어도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시범 케이스' 대신 '본보기'라고 표현했더라면 어땠을까.)
- 땅끝마을까지 걸어야 하는 임무는 목숨을 건 강행군이기도 했다. 죄인과 연계된 세력, 산적, 자연재해, 역질(천연두), 산짐승 등 위험요소는 여정 중에 숱하게 널려 있었다.
- 세 군관 중 가장 젊은 장소규는 이번의 해남행이 신경 쓰였다. 그는 출세지향적인 관리여서 윗선에 잘 보일 직무를 마다할 일이 없었으나, 며칠 전에 입은 상처는 걱정거리였다. 산악 훈련 도중 처음 보는 독초에 허벅지를 찔린 후 고열이 나고 어지럼증이 멎지 않았다. 그는 호송 임무에서 배제될까 봐 이 사실을 숨겼는데, 단골 주막의 여주인이 사정을 듣고 의원 하나를 소개했다. 특정한 거주지도 없이 이 지역에서 몇 달, 저 지역에서 또 몇 달 사람들을 치료하고 사라지는 그 '비공인' 의원의 이름은 정유현이었다.
- 이야기가 잠깐 옆길로 새지만 정유현은 <귀경잡록>에 물이 든 사람이었고 그 책에 등장하는 외계 존재인 원린자(遠麟者)를 연구하기 위해 팔도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연구방법은 원린자를 직접 해부하거나, 동물의 육신에 그들의 내부 장기를 넣어 의사소통을 시도하거나, 조선의 약초와 이계의 약초를 배합해 신약을 개발하는 것 등이었다. 표면적으로 의원 노릇을 하는 이유도 연구에 드는 비용 때문이었다.
- 정유현은 장소규에게 약을 지어주면서 말했다.
"건갈(乾葛, 칡뿌리)에 삼을 배합한 이 탕은 독성을 다스려 천리 길 행군에도 지장이 없게 할 것이나, 독초와의 상충 효과로 정신은 더 어지러워질 수도 있소. 이상한 광경이 보여도 두 눈을 크게 뜨고 속지 말아야 하고 틈나는 대로 쉬어야만 하오."
장소규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정유현의 약은 효험이 있어 열과 현기증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에 불안이 생겨났다. 환청이 들리고 환각이 보였다. 다시 주막을 찾았으나 이미 정유현은 사라진 뒤였다. 장소는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못했다.
- 해남으로 출발하기 직전, 평소 알고 지내던 무당이 장소규에게 경고를 했다. '객사의 살'이 보이니 이달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먼 길을 피하라는 것이었다. 젊은 장부답지 않게 그는 미신을 믿었는데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 10년 전, 지방 관아의 하급장교였던 그의 아버지는 30일 동안 물을 피하라는 무당의 말을 잘 지켜 29일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하지만 30일째, 단오절 씨름판에서 우승한 그가 기쁨에 취해 냇가에 뜨거운 몸을 담글 때 사신은 찾아왔다. 산 몸으로 물에 뛰어든 장소규의 아비는 죽은 몸이 되어 건져졌다. 사람들은 시합 도중에 마신 술이 원인이라 말했지만, 가족들은 무당의 예언을 더 믿는 눈치였다. 그 아버지는 평소 소규를 보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아비는 온갖 굴욕과 차별을 당하며 살아왔다. 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출세해야 한다."
- 몸도 완쾌되지 않았고 무당의 경고도 신경 쓰였다. 하지만 대죄인 구현담을 호송하는 일은 충절을 알릴 절호의 기회였다. 차출된 그가 병을 핑계로 거절한다면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뿐더러, 어명을 우습게 아는 반골로 낙인찍힐 수도 있었다. 그는 사흘 후에 한 첩을 더 달여 마시라던 정유현의 충고를 무시하고 하루 만에 약을 음용했다.
- 한양을 출발한 그들이 원주, 단양을 거쳐 풍기를 지나칠 때였다. 아직 하늘은 밝았으나 축축한 바람이 비를 예고했다. 고목 너머로 등장한 먹구름을 비슷한 색깔의 둥지로 여겼는지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장소규에게 푸드득거림은 태풍 소리였고 검은 날갯짓은 흑봉황의 비상과 같았다. 독초의 잔여 성분과 용법을 무시한 탕약의 조화 때문이었다. 그의 상태를 모르는 금부도사와 일행은 앞만 보며 걸었다.
- 풍기 다음에 나오는 곳은 섭주다. 어두워지기 전에 섭주를 통과해 예정지인 안동 역참에 닿아야만 했다. 섭주에서 묵기는 곤란했다. 섭주는 인간의 오관을 초월하는 괴사건이 빈번해 지방관조차 발령을 꺼리는 지역이었다. 소몰이꾼 한돌쇠가 황소를 다그치자 수레의 바퀴가 조금 빨라졌다. 덜컹거리는 나무 감옥 안에서 구현담은 멀어져 가는 풍기를 바라보았다.
"신재 선생께서 백운동 서원을 지으신 게 풍기 군수를 역임하셨을 때요. 이보오, 금부도사. 그대는 신재 선생을 알고 있소?"
나인철은 답하지 않았다. 세 군관도 답하지 않았다.
- 유학의 근본을 토론하던 사대부들은 입으로만 백성의 어려움을 논했지 행동으로 나서진 않았다. 고충을 이해하려 들기보다는 형벌부터 강화했다. 신분질서의 유지는 그들의 바뀌지 않는 기조였다. 반면 흉년과 풍년에 따른 조세의 경감, 포악한 수령을 고소할 수 있는 법의 신설, 공납을 지역 특산물로 대체하자는 의안, 반상(班常) 가운데 상에 유리한 군역 등 백성에게 유리한 발상은 모두 사대부인 구현담의 머리에서 나왔다. 이 제안들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는데, 신분제도의 질서가 사라진다는 양반들의 극렬한 반대 때문이었다. 반골로 찍힌 구현담은 곳곳에 적을 만들었고, 결국 한성부 좌윤에서 고령 현감으로 강등되었다.
- 구현담은 좌천에 동요하지 않고 고령의 영농법과 백성들의 생활상에 눈길을 돌렸다. 그는 유난히 더운 고령의 날씨와 풍부한 강수량에 주목해 서과(西瓜, 수박) 농사를 장려했다. 집집마다 씨앗을 나눠주고 약정, 풍헌을 시켜 고온재배를 가르쳤다. 주로 벼농사를 짓던 백성들은 처음에는 신임 사또의 시도를 탐탁치 않아 했다. 그러나 여름의 절정기에 수박의 대풍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는 사또를 농업을 주관하는 천지신명처럼 떠받들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감동한 건 구현담 사또가 수확의 날, 나라의 진상품을 따로 선별하기에 앞서 백성들에게 먼저 수박을 배불리 먹인 점이었다. 수확물은 '그 누구보다 수확을 위해 가장 피땀 흘린 주인공이 먼저 누려야 한다, 주상전하라도 예외는 없다. 고생한 만큼 보상을 해주면 수확량은 저절로 늘게 되어 있다...' 이것이 구현담의 현실주의였다.
- 이 애민사상에서 빚어진 불충한 행동은 반대편의 간자(間者, 간첩)에 의해 조정의 귀에 들어갔고, 그는 임금을 능멸한다는 누명을 썼다. 그는 고령 현감에서 다시 한성부 좌윤으로 복귀했으나 이는 그를 감시하고 처벌할 함정일 뿐이었다. 다음에 등극한 왕이 간신들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자 그는 바른 소리를 했고, 기다렸다는 듯한 탄핵으로 해남 유배를 받게 되었다.
- 상처받은 구현담에게 몇 배의 고통을 주기 위해 치사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사상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고령 백성들이 더 많은 조세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새로 부임한 고령 현감은 임금의 눈에 들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짜고 또 쥐어짰다. 수박 농사는 대규모로 행해졌지만 더 이상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없었다. 자연히 농사에 태만해진 백성들에게 날아든 것은 따뜻한 격려가 아닌 인정사정없는 매질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구현담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 금부도사 나인철은 중립주의자였다.
원래 그는 출세가 삶의 목적인 전형적인 관리였는데 최근에 겪은 사건 하나가 성향을 바꿔놓았다. 이름하여 '서린방(瑞麟坊, 현재의 세종로) 흡혈선비' 사건이 그것이다.
- 해남 호송 이전에 그는 포도청과 연합하여 범인을 잡아내라는 의금부의 특명으로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고 있었다. 서린방 전옥서(典獄署, 죄수를 관장하던 관서) 뒤에 부군당(府君堂, 서울 경기 지역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사당)이 하나 있었는데, 옥사한 죄수의 혼백을 달래는 제를 이곳에서 올리곤 했다. 죄지은 자들의 기운이 뭉쳐 있다 하여 아무도 이곳을 가까이하려 들지 않았다.
- 작년 초겨울, 11월이 시작되던 첫날부터 당집 안에 시체가 나타났다. 시체는 하나같이 미남자 소리를 듣던 명문 가문의 후예들로 강시처럼 허옇게 된 채 죽었다. 별순검의 검시 결과 몸속의 피가 남김없이 사라졌음이 밝혀졌다. 나이 든 사람, 부녀자, 미천한 신분은 없었다. 오직 양반 가문의 남자 후예들 뿐이었다.
높은 담벼락을 훨훨 뛰면서 피를 빠는 귀신이 있다는 백성의 신고를 나인철은 무시했다. 이러는 사이에도 시체는 꾸준히 늘어만 갔다.
부군당에 여섯 번째 시체가 던져지던 날, 의금부 제조(提調)는 무슨 일이 있어도 범인을 잡으라 명했다. 나인철은 무예가 뛰어난 포교들만 따로 뽑아 부군당 주변에 복초(伏哨, 매복초소)를 만들어 잠복수사에 들어갔다.
- 장소규는 검은 바위 표식이 또다시 푸른 빛을 발하자 벌떡 일어섰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오더니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나뭇가지가 사람의 팔처럼 움직였고 거대한 둥치가 그에게로 몸을 굽혔다. 그때 장소는 건너편 장승 쪽에서 어떤 남자가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환각을 조심하라 경고한 그 음성이 몹시 귀에 익숙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나무와 풀이 집어삼킬 듯 조여 오고 압박해 왔다. 잎들이 들썩이며 웃음소리를 냈다.
'오는 게 아니었어! 출세고 뭐고 오는 게 아니었어! 독초에 찔린 건 나를 살리려는 천지신명의 계시였는데 내가 그걸 무시했어!'
- 검은 바위를 넋 놓고 바라보던 장소규는 새로운 목소리를 들었다.
"거기 계신 분, 혹시 한양의 구현담 대감이 아니시오?"
"귀하는 누구시길래 이 사람의 이름 석 자를 알고 계시오?"
"저는 섭주 현령 금인종입니다. 두 분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밤이 오기 전에 이렇듯 만났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아! 섭주의 사또 나리시군요."
살았다! 섭주 관아에서 우리를 찾으러 왔구나! 우리가 오는 걸 알고 있었어! 사교의 잔당들도 이젠 문제없어!
장소규는 기쁨에 넘쳐 신비의 바위도 잊고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섭주 현령을 직접 보았을 때 그가 받은 인상은 공포 그 자체였다.
- 섭주 현령은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십여 명의 나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거대한 개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개'였다. 사람 크기의 개들이 뒷발로 서서 걸었는데, 앞발은 자유로운 손가락으로 특이하게 생긴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만(卍) 자의 곡선 사이에서 본 눈 모양의 상형문자가 그들이 입고 있는 검은 갑옷에 새겨져 있었다.
- 인종이 먼저 내실로 들어가자 구현담이 뒤를 따랐다. 나인철과 장소규는 들어오지 않았다.
내실에는 겸재 정선의 그림이 걸려 있었고 그 곁에 서가가 있었다. 구현담은 빛바랜 서책들에 감탄했으나, 제목을 확인한 순간 감탄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안정복의 <임관정요(臨官政要)>, 이광좌의 <운곡정요(雲谷政要)> 등 지방관과 지방행정에 관한 책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일부일 뿐, 대부분이 나라에서 엄중히 수배 내린 사특한 서책들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시신을 불러내는 법이 담겨 있다는 <초혼원지(招魂援志)>, 이계의 언어를 나열했다는 <이언각서(異言覺書)>, 이계 존재 원린자를 다룬 <귀경잡록> 따위가 있었는데 이 책들은 소유하기만 해도 중형을 내리던 희대의 악서였다.
"아니, 영명하신 사또의 서가에 어찌 이런 불측한 책들이 두루 꽂혀 있단 말입니까?"
구현담이 깜짝 놀라 물었다. 금인종이 히죽 웃었다.
"아시다시피 섭주에선 괴이한 사건이 많아 참고용으로 읽어야만 할 서책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의 실제와 저 세상의 환각을 구별 못해 실성하기 십상입니다."
- "너는 정휘문이 아니냐?"
선비가 중얼거리던 입을 멈추고 눈을 떴다. 노란 바탕에 검정 바둑알 같은 점이 박힌 눈이다.
"흡혈선비 정휘문! 부군당이 폭파되었을 때 넌 죽었는데..."
"그 폭파는 나의 주인께서 일으킨 것이오. 진정한 장수란 수하를 헛되이 희생시키지 않는 법이오."
- "당신은 내 죽음을 확신한 게 아니오. 내가 죽기를 바랐을 뿐! 알겠소? 당신의 명성과 야망을 위해 나는 일부러 숨어 주었단 말이오. 나는 살아 있고 이렇게 당신 앞에 있소. 당신이 살아오는 동안 믿어왔던 관념은 이로써 모조리 부정당한 거요. 조정의 개로서 개만도 못한 짓만 하고 살아왔지만, 이제 당신은 하늘의 도움으로 섭주에 왔소. 갱생의 기회가 찾아왔단 말이오."
"이놈! 갇힌 놈이 잘도 입을 놀리는구나. 어떻게 붙잡혔는지는 모르지만 거열형을 당하도록 간곡히 청할 것이다. 능지처참이 되면 해괴한 요술을 지닌 네놈이라도 두 번 다시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하하, 이곳이 감옥이라 생각하시오?"
- "권력의 교체? 허허, 사또의 농담이 지나치시오."
"농담이 아닙니다. 이 비책은 그분께서 알려 주신 것입니다."
"누구 말이오?"
"이흑제천환형룡이지요."
- 종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아까보다 컸다. 구현담은 이번엔 놓치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번개같이 돌아보았다. 인왕제색도 그림이 바뀌어 있었다. 그림 속의 인왕산에 조금 전까지는 없던 동그라미가 수도 없이 그려져 있었다. 녹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의 동그라미, 그건 바로 수박이었다. 인왕산이 고령의 서과 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림 하단의 오두막은 그대로였는데, 지붕에 사람이 하나 새롭게 그려져 있었다. 말미잘처럼 꿈틀거리는 머리칼에 검은 눈 검은 몸을 가진 남자였다. 그림 속의 검은 남자가 고개 돌려 구현담을 바라보았다.
놀라는 것도 잠시, 몸이 허공으로 솟구치고 그림이 무한정 커졌다. 다시 보니 그림이 커진 것이 아니라 구현담이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절망적으로 뻗는 손을 나인철과 장소규는 잡아주지 않았다. 동심원의 빛이 회전을 하면서 망루도 빙글빙글 돌았다.
- 양초처럼 생긴 금인종의 긴 손가락이 원을 하나씩 가리켰다.
"탐랑성(貪狼星), 거문성(巨門星), 녹존성(祿存星), 문곡성(文曲星), 염정성(廉貞星), 무곡성(武曲星), 파군성(破軍星), 저 별 하나하나마다 각기 다른 원린자들이 거하고 있소. 귀갑자, 하층별인, 비천자, 교령의 문외한, 철갑선비 등... 그들 모두가 이 천하를 삼키려 각축을 벌이고 있소. 이 땅은 숨결과 물이 훌륭하고 자연환경이 그 어느 곳보다 좋기 때문이오. 그런데 그런 위기를 모르는 이는 정작 이 땅의 거주자인 당신네 인간들뿐이오."
- 구현담은 금인종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흑제천환형룡이라면 너희들은 거문성(이흑성 二黑星이라고도 불린다)에서 왔는가?"
금인종은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온화한 빛이 얼굴에서 뿜어졌다.
"그렇소. 이계의 원린자들이 호시탐탐 침공의 야욕을 드러내는 지금, 인간들끼리 싸울 때가 아니오."
"너희가 거문성에서 왔다면 너희들의 야심 역시 이 땅을 집어삼키는 것이 아니더냐?"
"싸움에는 힘으로 눌러 제압하는 법이 있지만, 지혜로 화친을 맺어 공동의 적에 대처하는 법도 있소. 우리와 함께하면 그대들은 우리와 더불어 천하 최고의 통치자가 될 수 있소."
"언제나 통치자는 한 명이다. 하나 이상이 통치를 하면 분쟁이 나게 되어 있다."
"우리가 그대들 인간과 같다고 생각하시오?"
- "그대는 섭주 현령이 아니다. 그대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는 육십오음양군자의 현령이오."
금인종의 투명 육신이 사라졌다. 구현담의 발밑에서 수백 개의 수박이 새로이 솟았다. 눈코입이 붙은 수박이 일제히 말을 했다.
"불멸이오, 대감. 모든 욕망의 기운은 불멸 안에서만 다스려지는 법이오."
- 한돌쇠가 황소를 끌고 왔는데 그들의 머리는 뒤바뀌어 있었다. 한돌쇠의 몸을 가진 황소머리가 한돌쇠의 머리를 가진 소를 끌었다.
"천체천상(天體天像)의 외경(畏敬)은 무서워할 바가 아닙니다. 받아들여야 할 내일입니다."
나인철이 거대 개구리를 말처럼 타고 왔다.
"이흑제천환형룡을 부르면 대궐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 왕을 죽이는 역모가 아니라 새로운 싹을 나게 하기 위한 정화작업입니다."
하늘에 장소규, 안도협, 이호정이 떠 있었다. 흰색 법의를 걸친 그들은 새의 날개가 없어도 허공을 자유자재로 부유했다.
"세상이 화급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대감의 지혜를 저 하늘 높이 던져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영웅들에게 사기를 고양시키소서."
- 구현담은 머리가 복잡했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절대 현실이 아니야!'
그러나 모든 말은 매혹적이었다. 이승의 규약에 얽매여 개혁다운 개혁을 못 해본 그에게 이계의 제안은 참다웠고 어떤 면에서는 '현실적'이었다. 헌 육신을 폐기하고 새 정신으로 충만한 신비체가 되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그런 불만이 이 불합리한 세상을 개혁할 수 있는 방법이며, 그것만이 백성을 도탄에서 구할 수 있는 길이리라. 그들의 목적이 인간과 화친을 맺어 공동의 적에 대처하자는 것이라면, 그 적은 또 다른 이게 존재일 것이며 인간끼리의 분쟁은 더 이상 없게 될 터이다. 양반 상민이 사라지고 널리 복되게 할 '사람'만이 남는 것이다. 그는 능히 하늘의 별이 될 수도 있었다. 능히 부처가 될 수도 있었고 천지신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깨달음의 순간, 그는 일곱 개의 별을 보고 소리쳤다.
"이건 가짜야! 별이란 건 둥그렇지 않다! 모든 세상은 평평해! 귀신의 눈속임이다!"
- 앞이 안 보이게 되면서 모든 소리도 사라졌다. 복잡한 세상사에서 해방된 기분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어둠 속에서 일곱 개의 동그라미가 등장했다. 북두칠성이었다. 일곱 동그라미가 원을 그리며 하나로 겹쳐졌다. 원 안의 원, 동심원이 빛을 발해 장소규에게로 돌진했다. 눈부신 폐안(廢眼) 위로 별이 폭발했다. 일곱 차례 연속 폭발이 끝나자 그는 텅 빈 공간을 장악하는 희미한 거대 형체를 목격했다. 그 형체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그림으로 묘사할 수 없었다. 모든 시작과 끝이 이 거체로부터 비롯되었다.
시간과 공간의 감각이 사라졌다. 대신 장소규는 별의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고, 영원과 찰나가 하나라는 진리를 깨우쳤다. 하루살이의 삶을 살았어도 천년의 장수로 자족하는 것은 이 지혜의 터득이었다. 동심원이 회전의 빛을 거두어 갔다. 거체가 사라지고 빛이 소멸되었다. 남은 것은 참을 수 없는 통증과 견딜 수 없는 슬픔이었다.
- 꿈이 아니었던 별천지의 부유는 사라지고 그는 지상에 홀로 남았다. 보이지 않는 바닥을 그는 손으로 더듬어 기었다. 잡초가 손에 닿자 자신의 인생도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등 댈 수 있는 곳을 찾아 잠시의 휴식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마침내 그의 손이 편평한 나무 기둥을 찾아냈다. 어렵게 등을 대자 마음이 안정되고 기나긴 고생 끝에 보장받는 휴식의 기쁨이 있었다. 그때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우주의 지혜를 터득한 후 인간의 발소리를 접하자 반가움보다 이질감이 몰려왔다. 초(超)가 속(俗)에 자리를 내주면서 번뇌에 묶인 고통이 몰려들었다. 잠시 잊었던 살육의 경험이 기억 속에 살아났고 기억은 곧 공포로 대체되었다.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다가온 사람이 말을 걸었다.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거요?"
- "섭주에서 변을 당한 거요? 아니면 섭주 바깥에서 변을 당해 여기까지 온 거요?"
장소규의 충격은 눈에서 쏟는 출혈조차 잊을 지경이었다. 당신들은 죽었어, 분명히 죽었다구! 이곳 섭주에서! 아냐, 아니야! 이것도 환각의 일부일지도 몰라. 내 지난 삶조차 모두 환각이었을지도 몰라!
그는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너희들에게 환각이 일어난다! 그 환각이 너희들을 따로 떨어지게 만들고 너희들을 죽게 만든다! 속지 마! 믿지도 마! 아무도!"
- 정종 2년(1400년), 평양에 왕잔이라는 이름의 도적이 나타나 약탈과 살인, 방화를 일삼으며 횡횡했다. 체포는 고사하고 세력이 얼마인지조차 짐작 못해 관아가 유명무실할 때, 조영무가 평양부윤으로 부임해 왔다. 조영무는 포은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제거한 이방원의 최측근이자 조선 개국에 힘을 보탠 공신이었는데, 이 평양 부임은 왕의 명령에 불복한 결과로 얻은 일종의 좌천이었다. 불만이 가득한 상태로 평양에 온 그를 보고 겁내지 않는 관리는 없었다. 그들은 사소한 흠이라도 잡힐 게 두려워 한시바삐 왕잔 사건을 해결하기로 했다. 누구든 왕잔의 목을 가져오면 큰 상을 준다는 방이 곳곳에 나붙은 것이다.
- "당신은 의원이 아니오? 게다가 난 당신이 누군지도 알아. 당신은 원린자를 미워하는 인간들 중 하나야. 정유현 당신 말고 홍갑대장군 진유조도 있지."
"나는 온몸이 사람이지만 진유조는 절반만 사람이야."
칼이 황갈색 털을 쓸어내렸다. 개가 깨갱거리며 다급히 외쳤다.
"금와교주는 복면으로 입을 막고 그 위에 탈까지 덮어써서 가루를 마시지 않았소. 그래서 환각을 보지 않은 거요. 하지만 장소는 은빛 가루를 고스란히 마시고도 환각을 보지 않았단 말이오."
"장소규가 환각을 겪지 않은 건 내가 처방해 준 약 덕분이야."
- 정확한 시대를 알 수 없는 조선 후기, 대부분의 사람은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경상북도 간촌(幹村)은 까마득한 오지의 첩첩산중에 위치한 산간마을이었다. 산봉우리를 세 개나 넘어야 하는 불편한 교통 탓에 외부인의 왕래가 쉽지 않았고, 원시적 기운이 가득한 초목림 안에서는 방위에 정통한 사람도 길을 잃고 말았다. 관아의 호구 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행정구역의 관할 구분도 신통치 않았다. 간촌 주변에는 서식환경에 맞추어 퇴화된 산짐승들이 살았고 팔도의 여느 산에서 볼 수 없는 식물이 자랐다.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마을 사람들의 집단생활은 폐쇄적이었다.
18명이 전부인 간촌 마을 사람들은 산에서 얻은 희귀 약초와 산짐승 털로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그들이 저잣거리 구경을 할 기회는 물물교환을 위해 산 아래 섭주 현으로 마실을 나갈 때뿐이었다. 그러나 그 마실이라는 것이 이른 새벽에 나가 쌀이나 생필품을 바꾸자마자 곧장 돌아오기 시작해 캄캄한 밤중에야 집에 도착하는 산악 등반인지라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처의 마을과 연대를 꾀하지도 못했다.
섭주 사람들은 긴 머리칼에 수북한 털이 솟아 있고, 특이한 억양에, 근골은 동물처럼 거친 간촌 사람들을 오랑캐 보듯 대했다. 간촌 사람들도 외부인과의 교류를 중히 여기지 않아 그들을 이끄는 촌장의 지도 하의 고립생활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외부와 단절한 채로 살았다.
- 어느 날 간촌 마을에 나그네 하나가 나타났다. 통영갓에 풍기인견 두루마기의 신수 훤한 나그네는 몰이꾼도 없이 직접 가축을 한 마리 이끌고 왔다. 문제의 가축은 집채만 한 몸집을 가진 소로, 비정상적 각도로 구부러진 뿔을 빼놓고는 몸 색깔이 검었다. 예고 없이 나타난 손님을 구경하러 마을 사람 모두가 몰려나왔다.
- 촌장은 평온한 일상에 예고 없이 끼어든 변화가 못마땅했다. 변화라는 건 늘 경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의혹이 넘치는 눈으로 소를 바라보았다. 먹물을 뒤집어쓴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소는 먼 산을 바라보며 눈만 껌뻑거렸다. 재수 없다는 느낌을 받은 건 모두가 마찬가지일까. 마을 사람들의 표정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노망이 들어 제정신이 아닌 덕구 노인만이 소 앞에서 껄껄 웃을 따름이었다.
- 이 서방은 소를 길들이기 위해 우선 마을의 수호석인 흔들바위를 촌장님 댁 옆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흔들바위는 얼기설기 붙은 그들의 촌락 입구에 원래부터 놓여 있던 거대한 자연석이었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신석(神石) 치고는 위치가 좋지 않 ...
- "장현이! 부디 조심하게!"
오춘교의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장헌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놈이 <귀경잡록>을 갖고 있다니... 내 출세를 가로막을 놈 같으니.
<귀경잡록>은 뱀 껍질의 선비 탁정암이 남긴 예언서로 조선팔도에서 일어난 기이한 사건들을 나열하고 있는 금서다. 어떤 예언이냐? 이 세상 바깥에 또 다른 세상이 있고 그곳에서 출몰한 기상천외한 존재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천하를 위협하리라는 예언이다. 다른 세상의 존재는 가치의 전복과 무질서의 확립이 목적이어서 반란자들의 역성혁명에 쉽게 연결되었다. 나라의 크고 작은 반란 뒤에는 언제나 이 서책이 함께했다. 또한 먹고사는 문제에 지장이 없는 한가한 양반 계층은 이 책의 지식을 빌어 금지된 욕망을 추구하기도 했다. 일부 식자들은 이 책을 꾸준하게 해독하고 주석을 달았다.
- 이계 세상을 향한 비밀의 문장 속에는 미지의 세상에 대한 접근 금지의 경고 못지않게 다른 차원의 색다른 쾌락에 다가가는 보이지 않는 징검다리들도 있었다. 그것은 불로장생이나 죽은 성현과의 대화, 혹은 금단의 성욕 따위였다.
이장헌이 듣기로 탁정암은 <귀경잡록>에서 신비의 술법만을 탐하고 진실한 인본주의를 알아보지 못한 인간들의 무모함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책을 악용한 자들이 만들어 ...
- 죽음에 대한 공포가 어둠으로부터 최소한의 승리를 거두어 결국 이장헌을 산 아래까지 달리게 했다.
다음 날 아침은 섭주에서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장사치들이 옷이 찢어지고 상투도 끊어지고 수염도 불타버린 피투성이의 이장헌을 구조했다. 하루 만에 머리가 허옇게 센 이장헌은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나는 보았어... 나는 보았어..."
- 사람들로부터 소식을 들은 훈장 오춘교가 곧장 이장헌에게 달려갔다. 가까스로 제정신을 붙든 이장헌은 모든 사람을 내보내고 오랜 벗을 들어오게 했다. 이장헌은 오춘교의 손을 꼭 잡음으로써 '아무것도 몰랐던 자'의 미안함을 표했고, 오춘교 역시도 이장헌의 손을 맞잡아 '이미 알고 있던 자'의 관대함을 보였다. 오춘교는 친구의 몸을 일으켜 벽에 편하게 기대게 해 준 뒤 품속에서 <귀경잡록>을 꺼내 피 묻은 손에 쥐여 주었다.
-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박혁거세는 신라의 창업을 다진 지 61년 만에 하늘로 승천하고 육신의 껍데기만이 땅으로 흩어져 떨어졌는데, 사람들이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려 하자 집채만 한 뱀이 방해를 해 결국 몸을 다섯으로 나눠 묻어 이로써 능은 다섯이 되었다 한다(五陵).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그럼으로써 백성들이 건국 시조를 상당히 신격화하고 있지만), 나는 이 믿지 못할 이야기에서 다른 무엇보다 '원린자의 냄새'를 감지한다. 육십오능음양군자와 원린자는 인간의 첫 조상이 이 땅에 나타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눈 맑은 사람들이 그들의 정체를 조금씩 깨달아 나가는 현세에 비해, 그 당시 사람들은 원린자의 출현에 의심을 두지 않았다. 무지함이 지나친 고대 세상에서 커다란 뱀이나 날개 달린 말, 혹은 색깔을 띠는 알 따위로 이계 세상의 사특한 마물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글로 찬양을 하고 창칼로 이견을 막고 제례로 기념을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둔갑술에 능란한 만큼 사람을 속이는 데도 탁월한 종자들이다.
오늘날의 후학들은 깨달아야만 한다. 기이함을 남긴 조상을 신격화하고 신화로써 전승을 확립하라는 교지조차 사실 원린자들의 병법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만노군(萬弩郡, 오늘날 충북 진천) 태수의 배다른 손자요, 서라벌의 이름 낮은 육두품 가문 출신인 향총(響聰)은 일찍이 장래가 촉망되는 화랑이었다가 중년이 되어서는 병권에서 기염을 토하는 병부시랑이 된다. 상식을 능가하는 출세에 신라 백성들은 그리 놀라지도 않았는데 향총이 출전한 싸움마다 패배라고는 없는 통쾌한 승리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전쟁이 잦아 민심이 흉흉하던 그 시절, 왕조와 백성들은 하나 되어 향총에게 두터운 신임을 보냈다.
향총이 거두었던 승리를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백전백승의 결과보다 실질적인 전투의 과정이다. 소문에 의하면 고구려, 백제군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창칼을 떨어트렸다는데, 향총이 거느린 군사가 멀리서 보이기 시작하면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깃발이 저절로 한 방향으로 젖히고 하늘에는 까마귀, 땅에는 뱀이 새카맣게 출몰했다고 한다. 재수 없는 날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 뒤로 향총의 검은 갑옷이 보이기만 해도적들은 공포로 몸을 떨었다. 향총은 '씨를 말려 버린다'는 포고로 무자비하게 적을 처단했는데, 항복하는 자를 받아주지 않았고 백기를 들고 오는 전령도 목을 베었으며 포로들도 극악스럽게 고문하여 악명을 떨쳤다.
- 향총은 '유한한 힘의 소용(所用)이야말로 짧은 생에서의 '무한한 실(實)'이라고 확고히 답했다.
- 산을 내려와 냇가 앞에 다다른 명봉은 걸음을 멈춰 서더니 건너편 숲에 있는 나무를 향해 빈 붓을 그어댔다. 놀랍게도 나무에는 "죽고 사는 길이 여기 있다(生死路隱 此矣)"라는 글귀가 또렷이 새겨졌다. 그러자 나무 위로 까마귀가 날아올랐고 가지에는 구렁이들이 또아리를 틀었다.
- 명봉은 고구려 평양성을 정벌하기 위한 대장군이 되려면 몇 번이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느냐 물었고, 향총은 열 번 정도의 큰 전투를 이기면 뒤를 봐주는 이벌찬 대감의 도움으로 병부시랑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명봉은 열여섯 가지 광채가 나는 기이한 팔각형의 금속을 향총에게 주면서 까마귀와 뱀을 앞세운 진격의 술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울러 그대가 평양성을 들이칠 대장군이 되면 다시 나타나겠다며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팔각 금속의 사용법을 연마한 향총은 열한 번의 전투를 거치면서 까마귀와 뱀을 앞세워 싸움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한 장군들이 옥에 갇히거나 강등되는 사이 향은 상승을 거듭해 정말 병부시랑이 되었다. 군권을 장악하다시피 하자 그는 즉각 왕을 배일해 고구려의 평양성을 칠 수 있도록 윤허를 구했다. 연전연승에 만족한 왕은 영토확장의 기치를 크게 휘날리며 군사 2만을 주어 북진을 허락했다.
- 더 이상 조선에 머물 이유가 없어진 고바야시 야스오는 홋카이도로 돌아왔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그는 임무를 완수했다. 기무라 겐지라는 가짜 이름을 군적에 올린 야스오는 자신이 전사자로 집계될망정 탈영병으로 몰릴 일은 없다고 확신했다. 그가 일본으로 귀환했음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반 식물인간 상태임에도 야스오는 진정한 공포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 영주(大名) 사가모리 도시로는 귀환자들의 모습에 크게 놀랐다. 야스오와 함께 보낸 9명의 가신들은 2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들은 최고의 실력을 갖춘 닌자 특작대(忍者 特作隊)였지만, 기당천의 기백은 사라지고 없었다. 탄탄한 젊음의 육체는 죽음을 앞둔 노인의 외양으로 바뀌어 있었다. 검은 머리칼은 하얘졌고 원기로 응집되었던 눈동자는 풀려 버렸다. 영주는 미지의 거대한 손이 그들의 몸통을 사로잡아 혼백이 삐져나올 때까지 쥐어짠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이야기할 때 상대방의 뒤에 시선을 두었는데 마치 거기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이 모든 게 불과 다섯 달 만의 변화였다.
영주는 그들이 조선에서 가져온 물건을 불안과 홍분이 뒤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검은 천에 가려진 그것은 살아 있지 않음에도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아래에 눈을 뜨지 못한 야스오는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 "네가 고바야시 야스오냐?"
노인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키가 작고 너구리처럼 생겼지만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영주님이 묻고 계신다! 답하라!"
그를 납치한 자들의 우두머리가 칼집으로 어깨를 쳤다. 야스오는 눈앞의 노인이 30만 석 곡식의 영주인 사가모리 도시로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붙잡혀 온 이곳은 100여 년 센코쿠(戰國) 시대의 숱한 전투 역사를 자랑해 오던 요새인 호시노 성채였다. 엄청난 숫자의 가신들과 무사를 거느린 사가모리 가문은 조상 대대로 홋카이도 지방에서 막강한 자치 권력을 행사해 어느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었던 무인집단이었다. 때로 그들 가문은 나라를 위한 일에도 앞장섰는데 과거 미나모토 가의 반역으로 천황이 암살위기에 처하자, 도시로의 증조부 사가모리 다카시는 오사카로 정예병들을 출동시켜 단숨에 난을 평정했다. 이후 사가모리 가는 전국에 이름을 날리는 구국공신의 벌열(閥閱) 가문이 되었다.
- "항간에는 네가 낮 올빼미라고 불리고 있다지?"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해가 떠서 누구든지 보아도, 달이 져서 아무것도 안 보여도 눈독을 들인 물건은 반드시 훔친다는 도둑놈."
"왜 저를 데려왔습니까?"
"도쿠베이."
영주가 이름을 부르자 납치를 이끈 우두머리가 단도를 꺼내들었다. 저항할 틈도 없이 단도가 다시 팔을 그었다. 영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야스오가 흘리는 피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놀랍구나... 네가 세 나라 말을 할 줄 안다는 게 사실이냐?"
- "저는 일본 사람입니다."
"네 아비 이름은 박영걸이고 옛날 탐라국이라고 부르던 섬의 어부야. 풍랑에 휩쓸려 죽을 뻔하다가 해적들에게 발견되었지. 나가사키 수군에게 구조될 때까지 거기서 온갖 고생을 했고."
"그럼 저를 데려오신 건..."
"조선에 다녀와야 한다."
영주는 하나밖에 없는 팔을 들어 보였다.
"나는 동원령에 응하지 않기 위해 내 스스로 한 팔을 잘라 버렸다. 원대한 야망을 이루려는 마당에 타국에서 전사할 수야 없으니까. 하지만 너는 가야 한다. 조선에 가되 일개 사병으로 참전하지 않는다. 내 아들을 수행하는 특작대의 일원이 될 것이다."
- "그렇다면 아드님은 전사해도 괜찮은 겁니까?"
"이놈! 말을 삼가라."
도쿠베이의 칼집이 야스오의 어깨를 찔렀다. 이번의 타격에 야스오는 고통의 신음을 토했다. 드러나지 않게 힘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노련한 검객임이 틀림없었다.
- 야스오는 이 조선행이 매우 위험하니 절대로 가서는 안 된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영주가 다가와 시야를 가렸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찾아야 할 사람이 있느니라. 그자가 네 피를 보고 나면 틀림없이 박영걸의 후손이란 걸 알게 될 것이다. 이제 전쟁이 나면 조선은 어수선해진다. 그 틈을 타 그 자한테서 뭘 빼앗아 오는 거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너다."
- "아버지는 나이를 먹지 않았고 항상 똑같은 외모였습니다. 영주님께서 알고 계신 게 있습니까?"
"네 아버지는 아마 백 살도 넘을걸?"
도시로 영주가 씩 웃었다. 그는 더 이상 질문에 답하지 않겠 ...
- 그들은 하루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 경상북도 섭주에 다다랐다. 김국도가 산다는, 평지내륙과 산간촌락의 특징을 절반씩 갖춘 지방이었다. 야스오는 섭주의 공기를 대하자마자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흙이 붉은색을 띠고 토질은 미숫가루처럼 부드러웠다. 한눈에 봐도 식물이 잘 자랄 수 없는 환경이었다. 초저녁의 시야에 희미한 야산의 나무들은 붉은 토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 기형적으로 휘어지고 꺾였다. 엉망진창으로 뒤엉긴 나뭇가지들은 교미하는 뱀을 연상시켰다. 그들의 뿌리를 받은 산 역시도 굴곡이 격심해 요상한 인상을 주었는데, 마치 철없는 도깨비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온갖 주무르고 뒤틀어 분탕질을 치다가 내버려 둔 것 같았다. 개화를 기다리는 4월의 새싹은 고개를 숙일 대로 숙였는데 앙증맞다기보다는 꼬리의 독으로 사람을 공격하는 전갈과 비슷했다.
산 아래 펼쳐진 초가집도 마찬가지였다. 이웃과 간신히 붙어있는 가옥들은 소금을 맞아 뒤틀리고 발악하다가 마지막 숨을 토한 후 죽어 버린 지렁이처럼 보였다. 변색되고 탈색된 낡음의 징후도 죽은 지렁이의 그것과 똑같았다. 불이 켜진 곳은 하나도 없었다. 가축의 울음도 산짐승의 기척도 찾아볼 수 없었고 밥 짓는 연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 "왜놈? 흥, 김국도! 잘 봐라. 네 앞에 있는 이 사람이 누군지."
류노스케의 단도가 야스오의 팔을 긋자 선명한 녹색 피가 흘러내렸다.
- "이럴 수가... 청록혈(靑綠血)을 가진 자가 드디어 나타나다니. 대체 너는 누구냐?"
야스오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 그가 아는 건 태어날 때부터 피가 녹색이었다는 사실뿐이다. 수차례나 이유를 물었지만 아버지는 끝내 대답해 주지 않았다.
- "지옥은 없어! 하지만 이제 우리가 지옥을 만들 수 있지!"
천장이 우르릉거리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벽에 금이 갔다.
"동굴이 무너지려나 봅니다."
"야스오가 해냈어. 일단 여기서 나가세, 도쿠베이."
도쿠베이가 야스오를 일으키려 하자 류노스케가 급히 만류했다.
"안 돼! 돌을 만지면 안 돼! 센자부로가 돌에 접근하다가 재가 돼 버렸어."
류노스케가 저고리를 펼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것은 이세룡이 준비한 옷이 아니었다. 류노스케의 아버지 사가모리 도시로가 직접 하사한 옷이었다. 도쿠베이는 저고리 안쪽에 미지의 문자와 기호가 깨알처럼 씌여진 걸 보았다.
"그건 뭐죠?"
"다른 세상의 물질로 만든 천이라고 하셨네."
- "더듬이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 머리도 죽지 않고 다시 움직였습니다."
"그런데도 궁금하지 않다?"
"말씀드렸잖습니까? 가신에게 의문은 필요치 않습니다. 무사는 오직 수행할 임무에만..."
류노스케가 손을 들었다.
"됐네. 도쿠베이. 자네라면 사건의 전말을 알 만한 자격이 되네."
류노스케가 옆에 놓인 보검을 집어 들며 "내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도...”라고 은밀히 말했다. 도쿠베이의 시선을 무시한 채 그는 양손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칼집에 꽂힌 보검이 긴 손잡이만 따로 분리되었다.
"독을 넣을 수 있게 고안됐군요. 암습은 사가모리 가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적을 위해서가 아닐세. 이 검이 부러질 때의 나를 위한 거지."
류노스케가 손잡이를 털었다. 그 안에서 나온 건 독액이 든 주머니가 아니라 둘둘 말린 종이였다.
"피곤하지 않다면 지금 읽어보게. <귀경잡록>이란 책의 일부분을 옮겨 적은 걸세."
- 두 사람 중 비쩍 마른 자는 어린아이의 몸통만 한 돌을 품에 안고 있었는데 돌의 형태가 벼루처럼 사각형의 형태를 띠었다. 두 사람 중 살이 통통히 오른 자는 아첨하듯 잠시도 웃음을 거두지 않았는데 그 낯가죽이 지나칠 정도로 희었다. 어디서 온 누구냐고 묻자 이들은 서툰 조선말을 더듬거리며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윤부성은 이들이 이단으로 금하는 사교를 떠받드는 종자들이며, 해괴한 산불은 비밀스런 제사를 치른 결과일 것이라고 추리했다. 지체 없이 섭주 관아로 연행해 신원과 범죄 여부를 조사할 것이라며 윤부성은 장계를 마쳤다.
- 그로부터 사흘 뒤 관찰사는 또다시 섭주에서 달려온 급보를 맞이하는데, 파발마를 타고 온 피투성이의 차인꾼은 윤부성의 서찰을 전달하자마자 말에서 굴러 떨어져 숨을 거두었다.
보고는 수수께끼의 두 남자를 취조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윤부성은 '웃는 낯의 사내'가 조선말을 잘하는데 비해 '돌을 안은 사내'는 우리말에 능통치 못하다고 했다. 웃는 낯의 사내가 말하길, 자기들은 화란국(和蘭國, 네덜란드)에서 배를 타고 온 선교사들이요, 야소교(기독교)를 전파하려는 게 아니라 조선의 유학을 배우러 왔다고 했다. 아울러 방화는 자기들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며, 옷을 입지 않은 까닭은 간밤에 산적들을 만나 노략질당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윤부성은 이를 믿지 않았다. 허옇게 웃는 낯가죽이 마음에 들지 않음이 첫째 이유요, 검은 돌을 가진 사내의 수상한 행태가 둘째 이유였다. 돌을 안은 자는 서툰 조선말로 입을 열기 전에 항상 돌에 귀를 바짝 들이댔다. 마치 생명 없는 돌이 이렇게 저렇게 답변하라 가르쳐 주는 듯했다. 윤부성은 그의 행동이 요사스런 주문을 읊는 주술 행위이며 귀 기울이는 돌은 그가 모시는 신령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웃는 낯의 사내는 거듭하여 자신들이 선교사임을 주장했으나 윤부성은 형틀을 준비하고 본격적인 신문 준비에 들어갔다.
- 얼마 후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돌을 가진 자를 형틀에 엎드리게 해서 묶자 돌이 저절로 날아올라 그의 등짝에 철썩 붙어버린 것이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웃는 낯의 사내는 몰살당하기 싫으면 당장 자신들을 석방하라고 소리쳤고 윤부성은 통인을 시켜 가까운 사당으로 달려가 무당을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웃는 낯의 사내는 돌을 써서 모두를 죽이라고 동료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돌을 가진 사내는 이를 듣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윤부성이 "놈을 매우 쳐라" 하고 추상같이 명을 내렸다. 돌이 등허리를 막았기 때문에 집장사령은 돌 가진 자의 넓적다리를 곤장으로 쳤다. 살가죽이 찢어지고 녹색의 피가 솟아나 아전들을 놀라게 했다. 삽시간에 주위가 어수선해졌다.
- 돌 가진 자가 탈바꿈을 마치자마자 돌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더니 하늘을 집어삼킬 만큼 시커먼 연기를 내뿜었다. 날아오던 화살들은 검은 연기를 뚫지 못하고 부러져 떨어졌다. 정효탁은 웃는 낯의 남자가 돌 가진 남자에게 말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고 한다.
"저것이 바로 인간이다. 나약한 상대가 있으면 원하는 대로 괴롭히려 하고 강하게 보이는 상대라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서둘러 해쳐 스스로의 안전을 꾀한다. 그대가 아무리 진심을 보인들 저들은 그대를 죽여 의학(醫學)하는 것들에게 넘긴 후 초록색 피를 발본색원하려 할지언정, 그대와 동등한 입장에서 교류를 맺지는 않을 터이다."
- 돌이 주인에게 돌아오고 나서 곧 사상 초유의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군졸들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상대의 눈알을 뽑고 목을 물어뜯고 팔다리를 잘라 마구 죽였다. 그들은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을 살려두려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은 구석까지 몰린 쥐가 죽기 살기로 고양이에게 달려드는 형국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이처럼 집단적인 발광사태에 군졸들 대부분은 끔찍한 모습으로 죽고 눈이 풀려 버린 이수형 역시도 땅에 세워진 창에 목을 겨냥하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벌판에 시체들이 즐비해지자 돌은 주인의 품으로 떨어졌다. 연기도 광채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돌의 주인은 자신이 얻은 승리에 별로 기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이 같은 술법을 부리느라 보통 이상의 기력이 들어갔는지 곧 쓰러져 죽을 것처럼 보였다.
- "김국도는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진 원린자야. 놈이 부닥친 문제는 손에 넣은 보물의 이용 방법이지, 인간들처럼 위험한 물건을 알아보지 못하는 무지는 아니라네. 그런 목적과 의지가 아니고서야 그 오랜 세월을 끈기 있게 기다려 왔겠나?"
"으음, 박영걸은 포기를 해서라도 싸움을 피했다... 애당초 둘은 한패인 줄 알았는데요."
"아냐. <귀경잡록>의 저자는 다른 장에서 이들을 또 한 번 언급하는데, 목적도 종족도 다르다고 알려주고 있어. 아마 이 둘은 각자의 영역에서 나와 인간 세상을 탐사하는 공동 사절단 같은 자리에 있었을 거야. 박영걸은 학문 교류를 위해서 이 땅을 시찰하려 했지만, 음흉한 김국도는 처음부터 박영걸의 돌을 노렸다고 보면 맞아."
"김국도는 그 돌을 갖고 뭘 하려 했습니까?"
"우리를 정복하거나 아니면 다른 원린자들을 정복하려 했겠지. <귀경잡록>을 상세히 읽어 보면 이계 별천지의 종족들은 대부분 서로 나뉘어 영토 싸움을 한다고 했어. 그들을 다스리던 천구의 제왕 육십오능음양군자가 3천 년 동안이나 재기풍운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지. 내가 아는 바로 박영걸은 전쟁을 싫어한 예외적인 종족이고, 실제로는 많은 종족이 서로 죽이려 안간힘을 쓴다고 했네. 죽은 시체를 되살려 무기로 쓰는 종족도 있고 남의 생각을 훔쳐서 자멸하게 하는 종족도 있지."
- "대영주께선 어떻게 박영걸과 알고 계셨던 거지요?"
"해적들에게 조난당한 박영걸을 살려 준 분이 아버님이셨네. 원래 아버님의 목적은 조선의 포로를 이용해 그 나라의 정황을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었네. 매질과 고문을 하는 대신 집을 주고 귀한 대접을 해서 첩자로 키우고자 했지. 그런데 조선에서 도망 다니고 해적들에게 호되게 당했던 박영걸이 처음으로 따뜻한 대접을 받게 되자 그만 아버님한테 정체를 드러내고 만 거야. 인간의 학문을 연구하려던 원래의 정신이 살아난 거지. 모든 인간이 희망 없는 건 아니다, 선한 마음을 가진 권력자도 있다. ... 아버님은 그의 정체를 알자마자 귀동냥으로 들었던 <귀경잡록>을 구해 읽으셨고 한층 더 정이 많은 인간의 탈을 쓰셨지. 박영걸은 백제시대의 아직기 박사만큼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나 봐. 그래서 새 정착 생활에 서서히 감동된 나머지 어느 날 검은 돌에 관한 사실까지 털어놓게 된 거야. 야스오의 가슴을 덮은 천도 아버님이 그에게서 직접 선물 받은 것이지."
류노스케의 설명은 열기를 더했지만 도쿠베이의 표정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시던 대영주께서 어느 날 갑자기 변한 이유가 박영걸 때문이었군요."
- 류노스케는 노승에게 마쓰헤이를 업으라고 윽박질렀다. 노승은 손을 모아 빌기도 하고 땅에 절을 하기도 했지만 젊은 악당들이 겁박하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비쩍 마른 늙은 중은 덩치가 큰 적국의 무사를 가까스로 일으켜 부축해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디디지도 못해 마쓰헤이가 우웨엑 하고 검은 토사물을 쏟았다. 노승은 겁에 질려 온몸을 떨었다.
첩첩산중에 지어진 절 치고 규모가 컸다. 7층짜리 석탑이 어둠 속에서도 대사찰의 위용을 뽐냈고 누각 안의 범종은 아무리 봐도 황금으로 제조된 것 같았다. 대웅전은 3층 건물이었는데 꼭대기에 안치된 불상은 그들이 동굴에서 보았던 지네보다 거대했다. 불이 켜지지 않은 석등이 수십 개에 달했고 부속 건물만도 열 채가 넘었다. 그러나 사람의 기척은 어디에도 없었다.
- 류노스케는 잠시 법당에 내걸린 벽화를 감상했다. 한 동자가 도망가려는 소의 목을 잡아당기고 있고 구름 탄 관세음보살이 이를 내려다보는 그림이었다.
- 머리를 잃은 세이잔의 목으로부터 누렇고 끈적거리는 물이 폭포수처럼 솟구쳤다.
깜깜한 밤하늘에 서서히 붉은 달이 나타나더니 나무들이 사라지고 범종각이 사라졌다. 햇살에 녹는 눈처럼 법당이 희미해지고 건물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사찰 구석구석이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당간 기둥까지 투명해지자 유일하게 남은 건 여기저기 솟은 석등뿐이었다. 그 석등이 서서히 본래 모습을 찾았다. 묘지였다. 도쿠베이와 류노스케는 감았던 눈을 뜨고서야 알았다. 그곳은 군데군데 들짐승이 파헤친 흔적이 현저한 공동묘지였던 것이다!
- 죽었던 노승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눈을 뜨지 않았는데 감았다기보다는 새 살이 눈과 입을 뒤덮어 버렸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그것은 인공적인 가짜 얼굴이었다. 허리를 편 노승이 옷을 찢어발기자 가슴팍에 올빼미를 닮은 눈과 맹수의 입이 나타났다. 커다랗게 찢어진 입이 정확한 일본말을 건넸다.
"돌을 원래 있던 곳에다 가져다 놓으라."
무덤 곳곳에서 징그러운 털과 더듬이들이 움직거리며 등장했다. 엄청나게 많은 다리를 가진 지네들은 죽은 자들이 묻힌 원형의 탑을 굴곡 있게 기어가며 대가리를 까딱거렸다. 노승의 몸속에서도 지네들이 쏟아졌다. 등에서 뚝 떨어져 바닥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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