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서련 / 정영롱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3.02.07
박서련 작가와 정영롱 작가의 <제사를 부탁해>는 소설과 만화가 결합된 독특한 형식이다.
원작과 각색이라는 형태가 아닌, 스토리와 작화라는 형태도 아닌, 소설과 만화의 결합.
글로 더 잘 표현이 될 부분과 그림으로 더 잘 표현이 될 부분을 고심해서 나눈 것만 같았다. (물론 반대였어도 좋았을 테지만)
소설 부분의 화자 권수현은 제사를 대행해서 지내주는 '제사 코디네이터'다.
작품 속에서도 이색 직업이라 소개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있을 법한 직업' 같다.
제목이나 설정에서 가부장제와 제사 문화에 대한 규탄이라고 생각해 피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제사를 부탁해>는 오히려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기억하고 추모하고 싶은 이들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제시하려 하는 작품이다.
어쩌면 형식에 갇혀 진짜 마음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는.
그렇게 기억하고 싶은 이들이 있는지,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소중한 이가 되었는지를 떠올리게 해주는.
때로 그런 소중함은 꼭 핏줄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까지도 깨닫게 해주는.
최근에는 삼일장도 사라져 가는 추세라고 들었다.
예전에야 정확한 사망 진단이 어려워 삼일은 기다리는 것이 통상례가 되었었다지만, 이제는 그럴 일은 드무니 일일장이 더 맞는 형태일지도.
그런 분위기여서일까. 확실히 관습으로서의 제사는 점차 간소화되거나 외주화(?)되는 분위기다.
(심지어 유튜브에서 진짜 스님 버튜버가 애니메이션 등장인물의 천도재를 지내는 걸 볼 수도 있다.)
전통 의례의 상실을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잘 정리된 기록과 영상이 전통에게 영원을 선물할 수 있다고 좋게 생각하자.
하지만 그런 세상이라도 직접 애도하고 싶은 상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갑작스레 맞은 상실이라면 해보지 않았던 제사를 지내기는 부담스러울 터.
그럴 때 전문가가 제사상을 차려 제를 주도해 준다면, 첫 주기만이라도 부탁드리고 싶어질 것 같다.
이런 작품을 접했을 때 한 번쯤 자신의 장례는 어땠으면 좋겠는지, 어떻게 기억되고 추모되고 싶은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소중한 이를 잃어 황망할 나의 소중한 이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가장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내가 존재할 때 선택하기 위해서라도.
- 성냥을 지그시 눌러 불을 옮긴다. 불이 옮겨 붙으면 상체만 돌려 성냥을 끄고 자세를 고쳐 술병을 기울인다. 투명한 술 줄기가 표표히 날아오르는 연기와 교차하여 아래로 떨어진다. 어쩌면 그 엇갈림이 삶과 삶 너머의 것들이 어떻게 갈라지는지를 보여주는 것도 같다. 무게를 가진 것은 아래로 무게를 잃은 것은 가볍게, 가볍게 위로.
하지만 이렇게 무릎을 꿇은 채 누군가를 등지고 있을 때, 내가 정말로 진지하고 절박하게 하는 생각은 양말에 구멍이 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다. 포장을 뜯어 새것을 신고 나왔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신경 못 쓴 사이 어디 걸려 올이 나갔을지도, 혹은 내 발톱이 나도 모르는 새 불쑥 자라 있을지도.
- "그럼 절 올리겠습니다."
이 집의 제사는 조금 특이하다. 피는커녕 호적에 잉크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내가 제사상을 차리는 것도 모자라 헌주며 축문 낭독, 하물며 절까지 대신해야 한다. 이 집안 사람들은 서너 발짝 떨어져, 죽은 지 사 년 된 저희 집 큰 영감 제사를 웬 여자가 대신 모시는 걸 그저 빤히 지켜만 본다. 이따금 아멘, 아멘 하는 소리가 날 때도 있는데 그건 고인의 생전에 이 집안 사람들 전부가 개종을 했기 때문이다.
- "이번에도 어찌저찌 넘겼네요."
지방과 축문을 불사르고 철상을 시작하려는데 맏며느리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정말, 권수현 선생님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는지."
"별말씀을요."
- 고인은 어디선가 그럭저럭 들어본 적 있는 중소기업의 대표. 별세하기 몇 년 전, 가족들의 뜻에 따라 얼마간 교회에 함께 다녔으며 집사 직분까지 얻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 나 가고 나면 꼭 제사상을 받아야겠다, 제사를 약속하지 않으면 유산은 아무에게도 못 준다, 대뜸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세상을 떠나기 불과 몇 주 전에야. 제사를 지내는 집이 점점 줄어가고 그나마 지내는 집들도 음식 가짓수를 줄이는 등 제사상 규모를 축소해 가는 요즘으로서는 혀를 내두를 만한 고집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알기로 그런 변덕을 부리는 사람이 그리 드물지는 않다. 남은 자들에게 심술을 부리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끝에서 별안간 사후세계를 믿게 된 것일까. 그렇게 이들은 따를 것인가, 무시할 것인가를 산 자의 숙제로 남겨둔 채 떠나버린다.
- "언제까지 이래야 될지 모르겠네요. 직접 모시자니 산 사람들이 난처하고, 눈 딱 감고 끝내자니 또 아버님 생전에 그 노발대발하시던 모습이 떠올라서..."
"제사에 딱히 끝은 없어요. 원래 조선시대에는 벼슬이 높으면 고조부모까지, 벼슬이 낮으면 조부모까지, 평민은 부모까지만 지내라고 했어요. 형편에 따라 지낼 수 있는 데까지만 지내라는 뜻이죠. 지내기 버거우면 안 지내는 게 맞습니다."
통상 제사라 부르는 것은 기일에 모시는 기제를 의미하고, ...
- 그냥 휴대폰 번호를 복사해 보내셔도 됩니다, 하려다 정장바지 주머니를 뒤져 명함 포켓을 꺼낸다. 물론 알고 싶은 것이야 전화번호일 테고, 문자 메시지나 통화로 바로 견적을 재는 게 손쉽고 실용적일 테다. 하지만 실용적인 것에만 의미가 있다면 세상에 예의와 예절이라는 것이 왜 아직 존재하겠는가. 무엇보다 죽은 사람 상을 차리는 내 직업에야말로 무슨 가치가 남겠는가.
- '제사 코디네이터 권수현'. 내 직업의 공식적인 이름이 적혀있는 명함.
"감사합니다."
얼굴이 둥글고 혈색이 좋아 나이에 비해 젊다는 소리를 들을 게 분명한 고객은 해사한 얼굴로 활짝 웃으며 명함을 받아 쥔다. 평소에는 사모님 소리를 들으며 아무에게나 존대하지 않을 사람. 나와는 터울이 좀 있을 듯한 사람인데도 그 웃음을 보니 영란이 생각이 난다. 아니, 이름을 바꿨지 바꾼 지도 꽤 되었지.
- 원래부터 나를 알던 사람들과 그 주변인들은 내 직업을 보고 본인이나 자기 가족의 제사, 즉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며 떨떠름해한다. 이래저래 내 직업이 좀 알려진 뒤로는 그나마 덜하지만.
- "근데 이거 실화야? Y 제사상 회전 테이블 가져다 차린 거."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니."
동창이 봤다는 인터뷰에서 나는 원로배우 Y의 제사상을 차린 일화를 털어놨었다. 생전에 그렇게나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는 Y는 죽어서 제사상으로도 세간의 이목을 사로잡고 싶어 했다. 그렇단 말이지. 나는 우선 중화요리 전문점에서 쓰는 회전 테이블을 수배했다. 일전에도 중식 회전 테이블을 대여해 대기업 회장의 제사를 모신 적이 있어 떠올린 아이디어로,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제사상 주변으로는 Y의 대표작 포스터를 장식한 병풍을 세웠고, Y의 유족은 어머니가 정말 흡족해하실 거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래, 뻥 하면 뻥영란이었지. 권수현이 아니라."
"영란이 아니고 정서."
"아, 맞다. 걔 개명했지."
- 아프다는 걸 숨길 수도 없을 만큼 아팠나 보구나.
어쩌면 그게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친 마지막 거짓말이었을 수도 있겠지. 자신이 하는 말이 거짓말일 거라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때, 딱 한 번 거짓말을 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때에 친 고도의 사기.
- "아줌마는 누구세요?"
문을 열어준 여자애가 교복을 입던 시절의 정서와 너무 닮아 나도 모르게 입을 막는다. 나오려는 것이 풋 하는 웃음인지 울컥하는 울음인지 헷갈리는 채로.
"나 기억 안 나니? 아줌마는 너, 엄마 장례식장에서 본 거 기억나는데."
한 해 사이 많이 컸구나, 같은 소리를 덧붙일까 어쩔까 하다 너무 친한 척을 해도 별로일 것 같아 말을 삼킨다. 아이는 누구냐면서도 그 누구인지 모를 어른이 겁나지도 않는지 빤히 쳐다보며 대꾸한다.
"죄송해요. 엄마 친구들은 대충 다 비슷해 보여서요. 아무튼 그래서 어쩐 일로 오셨어요?"
- "엄마가 얘기 안 했나 보구나. 하긴 뭐라고 얘기해야 적당할지 아줌마도 잘 모르겠다. 아줌마는 이런 사람이야."
명함을 꺼내 문틈으로 건네자 아이는 아하, 하며 문을 활짝 연다. 명함을 보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 판단했다는 건 정서가 평소에 내 얘기를 종종 했다는 의미인가? 아이가 방에 들어간 사이 나는 캐리어들을 현관 안으로 밀어 넣는다. 신발을 벗으려는데 아이가 눈앞에 잡지를 들이민다.
"아줌마 이 사람이죠. 제사상에 마카롱이랑 아메리카노 올리는 사람?"
"의뢰 내용에 따라 그럴 때도 있어."
- 아이가 내민 잡지 인터뷰 기사 타이틀이 그랬다. "탕국 대신 '아아, 옥춘 대신 '마카롱' - 제사 문화 거부하는 MZ 세대 사로잡았죠." 애초에 내 직업은 제사 전도사가 아니고, 신세대가 제사 문화를 어떻게 여기는지 또한 내 소관이 아닌데 타이틀이 그렇게 나가버렸다. 그 덕에 홍보 효과를 누리기보다 괜한 오해를 더 많이 받은 기사였고.
- 그러니까 더더욱 내가 해야 하는 거지. 박정서는 애초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거고.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또박또박 말한다.
"너희 엄마랑 계약했어. 1주기 제사상은 내가 꼭 차리는 걸로. 돈도 벌써 받았어."
내가 생각보다 단호해서인지, 대금을 이미 치렀다는 말 때문인지 아이도 더는 따지지 않는다. 내친김에 나는 조금 더 세게 나가보기로 한다.
"네가 아줌마 좀 도와줘야겠다."
아이는 문을 열어주었을 때처럼 나를 빤히 볼뿐이다.
-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는 속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만한, 설령 간첩이어도 모를 리 없는 옛말이다. 나는 가끔 그 속담 속의 산 사람 입장을 생각한다. 정말 몰랐을까? 나와 같은 것을 먹고 있던 옆 사람이 죽어버린 것을 모를 수가 있을까. 그렇게 황망한 일이 일어나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맛있는 음식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정말 모를 수가 있을까. 같은 음식을 나누어 먹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지면 무엇이 잘못되었나, 설마 나랑 먹던 이 음식이 원흉인가, 독이라도 들었나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아니면 혹시, 오히려, 안도하는 것은 아닐까. 입이 하나 줄어 내 몫이 늘었다고 기뻐하는 것이 그 속담속산 사람의 본심 아닐까...
- 정서가 기억하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나는 아주 오래전 이 이야기를 정서에게 한 적 있다.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학교 매점에서 파는 쥐포를 먹으면서였다. 정서가 와, 맛있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는 게 이런 맛인가. 그런 말을 하길래 꺼낸 이야기였다. 넌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냐? 설마 먹다가 사람이 죽었는데 진짜 모르고 기뻐하고 있겠냐? 하는 핀잔을 듣긴 했지만. 그러는 자기는 겨우 쥐포 쪼가리의 맛을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겠다며 과장하는 주제에.
- 뭘 먹어도 그렇게 맛있다 맛있다 하던 애라 제사상에는 특별히 무엇을 올려야 좋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는 아직까지도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갑각류 알레르기를 숨기고 급식에 나온 새우튀김을 먹고서도 태연히 맛있다 하고 응급실에 실려간 전적도 있는 애였다.
-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가장 먼저 용기를 불어넣어 줬던 것은 얼토당토않은 거짓말 하나와 그 거짓말의 원작자 박정서였다는 것이다.
"암튼 우리 엄마 진짜 개구라쟁이였구나."
"... 개구라까지는 좀."
"설마 믿었던 거예요?"
"안 믿었지. 안 믿었는데, 예전에는 중동 쪽으로 돈 벌러 간 어른이 계신 집이 심심찮게 있었으니까 대충 그래, 그럴지도... 하는 생각은 들었던 거야. 우리 때는 인터넷이 없어서 찾아볼 수도 없었으니까."
"봐요, 없잖아요."
아이는 앉은 자리에서 휴대폰을 두드려 정서의 이야기에 나온 나라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 낸다.
"나도 찾아봤어, 예전에."
- 지어낸 이야기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꾸 돌이켜 떠올리며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것은 내가 그 정도로 바보여서가 아니라, 그 이야기에 담긴 마음이 좋아서다. 뜻하지 않은 행운과 기상천외한 기회가 있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어 친구의 울음을 그치게 하고 싶었던 어떤 여자애의 마음 이야기가 참이 아니라고 해서 그 마음까지도 참이 아니라곤 할 수 없다. 내가 알고도 속아준, 알고도 믿고 싶었던 정서의 거짓말들에는 늘 그런 참이 숨어 있었고 아도로코나이의 한식 셰프 이야기는 박정서 인생의 무수한 거짓말 가운데 내가 최고로 치는 것이었다.
- "아줌마 몇 시에 가요? 제사 언제 지내요."
"제대로 하려면 자정쯤에 모셔야지."
“열두 시요? 아, 나 자야 되는데."
"엄마가 나한테 부탁한 게 올해 한 번뿐인데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니."
아이는 대답하지 않는다. 제대로, 제대로라. 나는 정서의 가족이 아니다. 아무리 제사를 대신 지내주는 것이 내 일이라고는 해도, 내게 들어온 의뢰는 정서의 1주기다. 모시고자 하는 가족의 뜻과 허락이 없으면 제대로 된 제사를 지낼 수 ...
- "이제 슬슬 시작할까."
내 말에 아이는 갸우뚱거리며 상 앞으로 다가온다.
"자정에 제대로 지내자면서요? 이제 열한 시 좀 넘었는데."
"지금부터 슬슬 하지, 뭐."
"제사란 게 원래 이렇게 지내는 거예요?"
"그럼. 상 차려놓고 상 주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 게 제사지. 별거 없어."
- 제사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제사상 앞에 이부자리를 편 부부의 이야기다. 부부는 해도 지지 않은 초저녁에 상을 차리고 제사상을 받으실 시어머니 묘까지 산보를 다녀온다. 돌아온 후에는 상 앞에 자리를 깔고 잠깐 누웠다 다시 어머니 묘에 간다. 그렇게 날이 저물기도 전에 제사가 끝난다. 어느 해에 제사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유식한 학자가 그 집 앞을 우연히 지나다 부부를 보고 무슨 짓이냐고 묻는다. 남편은 대답한다. 어머니가 늘 말씀하신 소원이, 내가 금슬 좋은 부부 사이를 이루는 것이었으니 아내와 사이좋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마땅하고, 어머니는 눈이 어두워 밤길을 다니지 못하시니 모시러 갔다 다시 모셔다 드리는 게 이치지요. 학자는 그들의 제사야말로 가장 훌륭한 제사임을 인정하고 만다.
제사란 그런 것이다. 결국은 마음이 으뜸이고 형식은 거들뿐.
- "그럼 엄마 좋아하게 엄마 가수 노래 틀어줄까요."
아이는 휴대폰으로 뮤직비디오를 틀어 상 끄트머리에 비스듬하게 올려둔다. 정서야, 네 딸이 나보다 낫다. 자기 엄마라 그런가, 네 제사상에 뭘 올리면 좋을지를 나보다 훨씬 잘 아네. 나도 나름 전문가 입네 하는 사람인데.
- 사랑과 죽음의 관계를 운운하는 괴상한 아이돌 노래가 제사상 위에서 울려 퍼지는 풍경이라니, 별별 상을 다 차리고 온갖 상황에서 제사를 모신 나로서도 본 적 없는 풍경이다. 슬그머니 웃으면서 아이가 정서의 가수라 표현한 이의 이름을 휴대폰으로 검색해 본다. 별 뜻 없이 찾아본 이름 아래 화려하게 치장했으나 숨길 수 없이 못난 남자아이들의 사진이 줄줄 나온다. 정서는.. 이런 애를 좋아했구나. 못생긴 건 둘째치고 새파랗게 어린애잖아. 나이나 알자 싶어 눌러본 프로필 정보에서 무언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 제사를 모시는 게 직업이어서, 제사상이라면 지겹도록 차려봐서 이 일에 익숙해진 줄 알았다. 남들의 마음을 대신해 내 마음을 바치곤 해서 내 진짜 마음은 한참 전에 닳아 없어진 줄 알았다. 아니야, 착각이었지. 마음이란 것을 어떻게 정말 다 갈아 없애겠어. 꼭꼭 잘 숨겨두고는 없어졌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쳤던 거지.
- 그걸 갑자기 깨달아버린 나는 지금, 뛰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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