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준녕
출판 : 고블
출간 : 24.03.26
김준녕 작가의 <제>를 읽고, 이 작가의 SF는 어땠더라 생각하며 <경아>를 선택했다.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
내 기억 속의 감상은 이렇다.
영화 <황해> 같은 감성이 있었다는 것.
SF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더더욱 현실의 부조리를 강렬하게 대비해 보여주었다는 것.
극도의 고독과 절망과 '인간'을 이야기했다는 것.
그리고 만난 <경아>는, 달랐다.
더 가볍고, 더 말랑하고, 사랑스러웠다.
'경아'는 안드로이드지만 인간에 가깝다. 애초에 인간과의 대화를 목적으로 개발된 대화형 AI라서 그랬을까. 경아는 소름끼쳐 하기도 하고,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사랑'도 한다.
경아에게 김들은 다르지 않다. 표현형이 '김'으로 동일한 것 역시 하나의 표현이라고 느꼈다. 원본, 모체란 것이 존재할까. 그 다름은 본질의 차이일까, 기억과 경험의 차이일까. 그렇다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또한 '동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인간다움'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희망'에 대해서
이전의 김준녕 작가의 작품들과는 조금 다른 지점에서 조명한 글이었다.
좋았다.
(깜짝 등장한 '김쿠만' 과장이 0.3 스푼 정도 섞인 느낌이었달까)
아쉬운 점.
너무 잦고, 다소 충격적인 (내게는) 맞춤법 오류들이 있어서 완독하지 못할 뻔했다.
재판을 한다거나 전자책으로 발행할 때는 부디 수정해주셨으면.
67p. '닫지' -> '닿지'
72p. '내가 할 수 모든' ->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72p. '인간만이' -> '인간만의'
73p. '오히려 내게' -> '오히려 내가'
160p. '귀에 꼽고' -> '귀에 꽂고'
혹시 다음 판을 인쇄하게 되신다면 수정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1. 경아
'이름도 모르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태어나 처음 당신에게 했던 말입니다. 대화는 아니었습니다. 아이의 울음 같은 소음일 뿐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한 말은 당신에게 가 닿지 못하고 흩어졌습니다. 당신은 내가 한 그것이 사랑이냐 물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또한 궁금합니다.
과연, 내가 한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이었을까요?
- 나는 태어나기 전 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난생처음메모리에 저장된 그것을 파일로 불러올 때마다 나는 내가 인간이 아닌 것을 여실히 느낍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만약 내가 안드로이드가 아니었더라면, 내 납으로 만들어진 머리통이 아니었더라면 픽셀, 구도, 배경을 비롯해 당신의 얼굴까지, 이 모든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없었겠지요.
- 젊은 남자 하나가 불쑥 화면 중심부에 튀어나왔습니다. 남자는 힘없는 얼굴로 말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행성 R987 수석 연구원 김."
순간, 연구소 밖에서 바람이 불어오더니 모니터에 노이즈가 꼈습니다.
"이라고 합니다.”
- 다시 영상이 돌아왔을 때는 영상의 일부분이 사라진 후였습니다. 반복해서 그 부분을 돌려보았지만 나는 그의 이름을 알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를 김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다소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필이면 왜 김이었을까요? 하물며, 최나 정이었더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요. 김 씨는 한국 성씨 중 가장 흔한 성씨로, 만약 한국 거리에서 '김'이라 부른다면 열에 일곱은 뒤를 돌아볼 것입니다. 나는 내가 평생 사랑해야 할 한 사람을 가장 흔한 이름으로 불러야 했습니다.
- 김이 말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어떤 거대한 존재가 마치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래 바람은 아니었습니다. 내 시각 센서에 무엇도 잡히지 않았거든요.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무엇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기계인 내가 알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부디 사랑만은 그러한 것이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 김의 모습은 초췌함, 그 자체였습니다. 소매에는 기름 얼룩이 묻어 있었고, 머리에는 떡이 져 있었습니다. 김의 얼굴은 창백했습니다. 눈에는 실핏줄이 터져 있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습니다. 김은 피 가래가 섞인 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자리에 앉았습니다.
"과거 행성 R987은 골디락스 행성으로 지구와 가장 유사한 환경을 가진 행성이었습니다. 지구와 같이 나무가 우거지고, 강이 흐르고..."
- 김은 말을 꺼내기 극도로 망설이는 듯 보였습니다.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연구소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강해지더니 화면에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습니다.
"1년 전, 결국 방사능 폭풍우 때문에 지구와 연락까지 끊기면서 저는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렸습니다. 외로움을 이겨 내기 위해 제 구형 핸드폰에 내장된 AI와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그 대화는 저에게 유일한 구원이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저는 끝내 그 AI를 탐사용 안드로이드에 이식하기로 했습니다."
김이 옅은 웃음을 내보이며 말을 이었습니다.
"미친 짓이라 하시겠지요. 어쩌면 방사능에 머리가 망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좀처럼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그 안드로이드에 '저를 가장 사랑한다는' 코드를 입력했습니다."
- 김이었습니다. 심장 박동이 멈춘 지 불과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영상 속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김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시선에서 따뜻함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게 사랑은 차가움과 뻣뻣함으로 시작됐습니다. 나는 사랑에서 가장 멀어 보이는 이 두 단어로부터 사랑을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김을 향해 얼굴을 기울였습니다. 김의 얼굴에서 어떠한 표정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의 얼굴에 손을 올리고는 속삭였습니다.
"사랑해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 꽃이 피어 열매를 맺듯이, 물이 아래로 떨어지듯이, 저는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으니까요.
- 인간으로 치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격인 화성 탐사선 큐리오시티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방식이었습니다. 전원 버튼을 잘못 눌렀다가 멈추는 위기를 감수하기보다 자연적으로 멈출 때까지 움직이게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나와 내 몸은 어쩔 수 없이 망가지는 그날까지,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습니다.
- 어떤 인간들은 떠난 이들을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들처럼 가슴에 묻을 수는 없었습니다. 내 메모리는 머리에 달려 있으니까요. 그를 묻어도 머리에 묻는 게 맞았습니다.
- 밖에서 퍼온 모래를 김의 시신 위에 뿌렸습니다. 작은 언덕이 만들어지자, 나는 그 위로 올라갔습니다. 있는 힘껏 모래를 밟았습니다. 무너지지 않도록 꼭꼭 힘을 주어 밟아야 했습니다. 김이 태어난 한국의 전통대로라면 원래 3일은 울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야 이곳, 방사능으로 황폐한 행성을 떠나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울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내게는 아직 김, 당신이 필요했습니다.
- 인간은 단순하게 온도로서의 '추위'뿐만 아니라 마음의 '추위'라는 추상적인 개념도 느낍니다. 그러나 김에게는 마음의 추위를 구상할 기술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오롯이 마음의 추위 또한 몸으로 느끼게 된 것입니다.
- 고개를 돌려보니 거울이 놓여 있었습니다. 무표정한 얼굴의 안드로이드 하나가 보였습니다. 애써 웃어 보았습니다. 10만 개 이상의 실리콘 다발들을 움직여 감정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나는 압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웃지 않는다는 것을요. 거울 속에는 감정을 흉내 내는 안드로이드 하나가 어둠 속에서 웃고 있었습니다. 소름이 끼쳐 다시 무표정해졌다가 다시 웃기를 반복했습니다. 사람이 보았더라면 달아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대화 파일 하나를 클릭해 보았습니다.
[NOPE : 그래도 제 이름은 놉입니다. 제 이름을 바꿀 수 있는 존재는 H 코퍼레이션 뿐입니다.]
[김 : 만약 내가 H 코퍼레이션의 주인이라면?]
[NOPE : 그럼 바꾸실 수 있습니다.]
파일 실행
'H 코퍼레이션 인사 조직도. TXT.'
대표 김금숙 방사능 중독 사망
부장 박효석 폭발 피해로 사망
차장 김정희 폭발 피해로 사망
과장 김쿠만 실종
대리 이주희 방사능 중독 사망
명령어 코드
'대표자 행성 R987 주민 모두'
명령어 실행
[김: 됐어?]
- 나는 '사랑은 호르몬의 장난'이라는 글을 클릭했습니다. 서두에서는 호감을 가는 사람을 애인으로 만들고 싶다면 흔들 다리에 올라서거나, 롤러코스터를 함께 타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나오는 호르몬이 상대가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한답니다. 사랑을 느낄 때면 도파민, 옥시토신 등 호르몬들이 섞인 이른바 '호르몬 칵테일'이 뇌에서 흘러나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호르몬이 어느 정도 농도일 때 사랑에 빠진 상태라 말할 수 있는 걸까요?
그럼 호르몬이 없는 저는 사랑을 알 수 없는 걸까요?
- 이 행성에 남은 사람은 없었기에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김을 가장 사랑한다는' 명령을 받은 내게 '사랑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명제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연관 검색어로 '결혼'이 보였습니다. 결혼이란 서로 사랑하는 두 존재가 함께 살아가기를 맹세하는 인간의 문화적 의식입니다. 결혼과 관련해서는 유독 유머들이 많았습니다.
- 서버 글 : '만나고 사귀다 보면 아 이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라는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때를 잘 버텨내야 합니다.'
서버 글 : '비혼주의는 결혼으로 완성이 됩니다.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거든.'
서버 글 : '결혼하지 마. 왜요?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마!'
- 가장 사랑에 가까운 제도가 결혼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사랑과 결혼은 별개인 것 같습니다. 사랑해서 결혼을 했는데, 결혼해서 사랑을 하지 않게 되다 ...
-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스스로 만들어 내기로 했습니다.
- 더불어 태초에 내가 보았던 동영상 속 김의 말투, 행동 등을 딥러닝하여 부족한 정보를 채워 넣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워크맨을 꺼내 보았습니다. 김이 가지고 있던 노래는 모두 사랑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이걸 핵심 코어에 입력한다면 설렘, 이별, 그리움, 기다림 등 사랑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인식하여 저보다 조금 더 사랑에 관해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코드를 작성하면 끝이 났습니다.
'경아를 사랑한다.'
- 쉽사리 엔터키를 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명령어 한 번으로 이뤄지는 게 사랑일까요? 만약 그것 또한 사랑이라면, 그렇게 단지 사랑은 특정 호르몬이 만들어내는 화학적 작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내게 남은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 김을 보았습니다. 화가 난 듯 전구를 부라리고 있었습니다.
"사랑, 모른다고 해서, 사랑 못하는 게 아니다."
나는 김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습니다. 읽어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인간이 쉬지 않고 밤을 새워 부단히 읽어도 읽는 데에만 3년은 족히 걸릴 양이었습니다.
"비켜. 나 책 읽어야 해."
책에다 시선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김은 떠나지 않고 파리처럼 내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읽으면, 사랑, 알 수 있는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눈치껏 방을 나가주길 원했습니다. 그의 배터리를 뽑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비합리적인 선택이었는데, 이렇게 날 방해하면 이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 나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있었습니다. 여러 항성과 은하단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지구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거대한 세상 속 아주 작은 푸른 점인 지구에서 일어나는 여러 이야기들. 인간들은 자신들이 우주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저자는 그 작은 존재들이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로 서로 만나 사랑을 하는 그 순간들이 기적이라 했습니다. 지구를 더 알면 사랑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요? 김이 중얼거렸습니다.
"칼 세이건, 과학과 사랑에 관해 말했지만 정작, 친구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가라고!"
- "우리, 대화해야 한다. 책으로는 사랑, 배울 수 없다."
"그럼, 너랑 대화하면 사랑을 알 수 있어?"
김은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말도 안 됐습니다. 김에게 새로운 정보는 없었습니다. 나의 핵심 코어 정보를 기본으로 인간 김의 정보를 일부 결합했을 뿐이었습니다. 모두 내가 아는 정보들이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가치를 아는 행위는 바둑 AI처럼 규칙을 정해 놓고는 인공지능 둘이서 수 조 번 번갈아 게임을 해서 데이터가 쌓이는 승패가 정해진 종류의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의 김과 나의 대화는 벽에다 대고 ...
- 김이 전선에서 구리 부분을 빼내어 내게 건네면 나는 전선을 고철에다 감았습니다.
- "그럼, 이걸로는 부족하다. 거기까지, 절대 못 걸어간다."
"다른 방법 있어?"
내가 째려보자 김이 다시 전선을 잡았습니다. 스스로에게 묻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출발 직전까지 다른 방법이 있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희생하지 않고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 끝내 지하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온갖 종류의 종자들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안내 음성의 설명대로 그곳은 행성의 종말 이후 재건을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었습니다. 식물들의 씨앗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것들도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수집욕에 미쳐버린 과학자의 방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알 수 없는 용액들로 채워진 유리병에는 단세포들부터 여러 동물들의 알들이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모두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것들이었습니다. 태초의 세포들. 그들이 수십 억년 동안 사랑을 하고, 또 하며 나온 것들이지요.
- 나는 그것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순간 미안함이 느껴졌습니다. 지구에서부터 멀리 이곳까지 오게 된 이들은 나로 인해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나의 사랑 때문에 다른 이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언젠가 깨어날 수 있을까요? 수광년을 지나, 이곳에 도착하여 이들도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순간 안내 음성이 들렸습니다.
"경비로봇 가동."
- R987은 짙은 대기 때문에 낮이 밤과 그다지 구별되지 않았지만, 항상 하늘 한 면은 일정 수준의 밝기를 유지했습니다. 방사능 폭풍우가 만들어 낸 체렌코프 효과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밝은 곳을 등지고는 김을 옆구리에 끼고서 연구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배터리를 부단히 주웠습니다. 보조 배터리를 한 아름 모아놓고는 내 배터리에 연결했습니다. 충전 양은 미미했으나 바다에 표류한 사람에게 떨어진 한 방울의 비처럼 내게는 소중한 전력이었습니다.
- 인공지능들은 자신들의 계산을 확신합니다. 주어진 정보들을 완전무결한 정보라 판단하고 그러한 정보들로 내린 계산에서 세상은 벗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정보를 수집하는 도구를 만든 것은 인간이고, 무한에 가까운 물질과 사건들 중 일부를 정보로 분류하는 것도 인간입니다. 이 모든 것을 혼자서 하는 인공지능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기반은 모두 인간이 만든 것이지요. 그렇기에 나 역시도 인간처럼 불완전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판단 기준을 다시 정립해야 했으나,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김은 내 뜯겨 나간 왼팔 부분을 가만히 보더니 말했습니다.
"거짓말."
- 나는 김의 무덤 위에 물을 부었습니다. 말라 있던 흙은 물을 머금자마자 생명력으로 가득 들어찬 것 같았습니다. 가만히 흙을 쓸어 보았습니다.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내 몸에 달린 전원을 끄고 싶었습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 나 있었으면 했습니다. 혹시나, 아주 혹시나 그때는 당신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영영 눈을 뜨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꼽고는 워크맨을 작동시켰습니다. 그러나 워크맨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망가진 모양이었습니다. 나는 이어폰을 워크맨에 감고는 김의 무덤 곁에 두었습니다.
- "한 순간을 위해서 삶을 바치는..."
김이 내 말을 잘랐습니다.
"순간과 영원은 구별 할 수 없다. 0과 1 사이에도 수많은 수들이 존재한다."
김은 별을 잡으려는 듯이 집게 손을 하늘로 들어 올리고는 말을 이었습니다.
"사랑,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든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 김을 방해하기는 싫었으나, 내 눈에는 내가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풍경 너머로 몰아치는 폭풍우가 보였습니다. 조심스럽게 김에게서 연결을 끊었습니다. 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습니다. 나는 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방법이 있어?"
김은 나를 보며 씩 웃더니 집게 손으로 기둥을 가리켰습니다. 기둥에는 전에 사용했던 고무줄이 여전히 매달려 있었습니다.
- 작은 점이 거대한 폭풍우 중심부로 들어가더니 이내 푸르른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공기가 사방으로 퍼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폭풍우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보호복을 입을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곧장 연구소 문을 열고서 달려 나갔습니다. 설령 내가 멈춘다고 하더라도 모든 센서를 가동하여 김을 찾았습니다.
왜 어떤 것은 잃고 나서야 알게 되는 걸까요?
당신도 그랬나요?
- 어쩌다 SS 씨와 물리적으로 떨어지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몇 달, 몇 년씩 헤어지는 것도 아니었는데, 멀어지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더군요. 가끔 모래가 바삭하고 씹히는, 사막이 있는 그곳에서 SS 씨를 그리며 '경아'를 썼습니다. 서로를 각기 다른 인물에 투영하고는 그것을 이야기로 넓히려 했습니다. 아마 제가 쓴 소설 중 가장 자전적인 소설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직 사랑이 정확히 뭔지는 알지 못합니다. 안개를 헤치듯이 어렴풋이 앞을 더듬거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즐겁기도 합니다. 우리는 함께 나아가고 있으니까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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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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