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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자영, 박해로, 문화류씨, 정명섭] 군대 괴담 - 국내 최초 군대폭력 테마소설집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6. 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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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윤자영 / 박해로 / 문화류씨 / 정명섭
출판 : 북오션
출간 : 24.09.05 


저자 : 윤자영 / 박해로 / 문화류씨 / 정명섭
출판 : 북오션
출간 : 21.12.23


   

 

와. '박해로' 작품 마지막 리뷰다!

라고 하고 싶었는데 아직 단편집이 몇 권 남아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 앤솔러지 단편집은 애매하지 않나...?

하지만 몰랐으면 몰라도 알고도 넘기기엔 좀.

따지자면 <군대 괴담>(구판 <고문관>)도 앤솔러지인데. 

하고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본 작품 이야기로 들어가자.

<군대 괴담>을 먼저 읽었고, 며칠 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고문관>을 펴고 당황했다.

'내 착각인가...? 이건 같은 책 아닌가...?'

별 거 아닌 착각이지만, 공포 호러 작품을 읽다가 이런 일을 겪으면 아무래도 좀 더 놀라게 마련이다.

곧바로 개정 여부를 확인했으면 됐을 텐데, 수록 목록과 문장을 비교해 본 다음에야 찾아보고 안심하다니.

(개정하며 제목을 바꾼 이유는 아마도 수록작 중 하나를 표제작으로 삼는 것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혹은 보다 직관적으로 '군대 괴담'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었을 수도.)

 

<군대 괴담>에 실린 각각의 이야기는 체험담인가 싶을 만큼 디테일하기도 하고, 아 이건 조금 싶은 면에서 괴담답기도 하다.

(가장 오싹한 건 이야기 속 많은 부분들이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는 것 아닐까.) 

 

윤자영 작가의 <살인 트리거>는 반전을 선사하는 서술 트릭과 있을 법한 인물 설정이 매력적이었다. 지금은 구하기가 어렵겠지만, 시대 배경을 과거로 잡는다면 아몬드 향도 가능할 것 같기도. 현실 공포다.

 

박해로 작가의 <고문관>은 <박해로 오컬트 포크 호러> 수록작 <지옥에 떨어진 형제>가 떠올랐다. 연결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두 작품 다 읽어보신다면 어떤 점에서 닮았다고 생각했는지 아실 수 있을 것. 오싹하다기보다는 좀 찝찝한 공포감을 준다.

 

문화류씨의 <불청객이 올 무렵>은 그야말로 현실 공포. 이게 가능한가? 싶은 마음과 없으란 법도 없지 싶은 마음이 공존한다. 

 

정명섭의 <잃어버린 수첩>은 약간만 방향을 틀면 좋은 미스터리 소설이 될 것 같기도 하다. 부대의 특성, 간부 사이의 알력 등이 은근하게 표현된 점이 백미. 이쪽도 현실 공포다. 

 

재미있었지만, 기대했던 방향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박해로 작가를 찾아 읽던 중이었으니 현실 공포보다는 오컬트 호러를 기대했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교도소 괴담>이 조금 더 취향이었다. 

 

끝.    


    

 

- 드디어 나의 살의가 폭발했다. 살인 트리거가 당겨진 것이다.

 

- 충동적이지 않기에 머릿속은 차분했다. 먼저 가죽장갑을 끼고, 탄띠에서 탄창 하나를 꺼냈다. 소초장의 빨간 도장이 찍힌 봉인지가 보였다.
십오 발 두 탄창 이상 무. 수류탄 봉인 상태 이상 무.
매번 경계근무 후 탄창과 수류탄을 반납할 때 외치는 소리다. 한 탄창에는 15발이 들어있다. 나는 봉인지를 뜯어 K2 소총에 탄창을 밀어 넣고 노리쇠를 당겨 총알을 장전했다.

 

- 다음 수류탄이 들어 있는 원통형 종이박스의 봉인과 강하게 붙어 있는 검정 테이프를 어렵게 제거했다. 철책 근무에서 북한군과 마주하면 싸우라고 지급한 것인데 이렇게 강하게 붙어 있다가는 실전에서 잘 사용이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원통형 상자에서 계란형의 국방색 수류탄을 꺼내 들었다.  

- 군복을 입어 그런지 다른 군인들을 보면 높은 사람으로 보여 위축되었다. 하나둘 담배를 끄기 시작했지만 처음 말을 꺼냈던 삭발한 남자는 담배를 더욱 깊게 들이마시더니 도발하는 양담배 연기로 도넛을 만들었다.
"모두 쫄 필요 없어요. 같은 부대 안에서도 다른 중대라면 계급에 상관없이 그냥 아저씨래요."
남자의 목소리는 청명했다. 그만큼 목소리에서 믿음이 느껴졌다. 삭발 남자의 말에 불을 끄려던 몇몇이 계속 담배를 피웠다. 뒤 트럭의 군인들은 계속 노발대발 소리쳤다.
"쫄지 마요. 저 사람이랑 만날 일은 없어요."

- 정충식은 군화로 담배 불씨를 끄고는 주머니에 꽁초를 넣었다. 삭발 남자의 말이 맞더라도 훈련소로 끌려가는 지금 담배맛도 나지 않았다. 시골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트럭은 붉은 얼굴의 도깨비가 그려진 군부대로 들어갔다.
트럭이 들어가는 길 양쪽에는 조교 하이바를 쓴 군인들이 양팔을 허리에 올리고 서 있었다. 하이바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았다. 트럭 행렬이 멈추자 조교들의 욕설이 시작됐다.
"훈련병들 빨리 내려!"
"이 새끼들 어서 움직여!"
"앞사람 어깨 위에 손 올리고 고개 숙여!"

- 산동네 아이들에게 용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10원이 100원이 되는 기술은 가난한 산동네 아이들에게 커다란 마술이자 선물이었다.
최호남은 10원짜리 여러 개를 쌓아 둘레를 스카치테이프로 감았다.
"삼촌에게 배웠는데 정확히 일곱 바퀴 반이야. 그래야 지름이 100원짜리랑 같아져."

- 당신 아이들이 놀 만한 곳은 오락실이었다. 한 판에 100원 하는 오락은 재밌지만, 산동네 아이들은 돈이 없어 구경만 할 뿐이었다.
"근데 단점이 있어. 이걸 쓰면 이제 그 오락실은 못 가."
우주 오락실, 학교 앞에 있는 세 개의 오락실 중 한 곳이었다. 최호남이 보글보글 기계에 앉았고, 네 명의 아이들은 주위를 둘러섰다.
"그럼 넣는다."
최호남은 만들어진 동전을 투입구에 넣었다. 또링 소리가 나면서 화면 속 코인의 숫자가 올라갔다. 네 명의 아이들은 작게 환호성을 질렀다. 그날 아이들은 300원으로 3000원어치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정충식도 범죄라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 산동네 아이들은 어두운 산길을 올라왔다. 길 옆으로 주인 없는 산소도 있고, 연못도 있었다. 귀신이 나올 만큼 무서운 분위기지만 매일같이 지나는 아이들에게 공포감을 주지는 못했다. 아이들 다섯은 산소에 등을 기댔다. 최호남이 손가락 하나를 들고 말했다. 
"오락실에는 우리 말고도 사람이 많아서 우리가 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당분간 가지 않는 것이 좋아."
김재식이 산소에 난 마른 풀을 뽑아 하늘로 던졌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씨발. 어디서 돈 나올 데 없나?"

김재식이 말했지만, 가난한 산동네 판자촌에서 용돈을 넉넉히 줄 부모님은 없었다.
"재식아, 돈 벌 수 있으면 할 거야?"
김재식은 최호남 앞으로 다가왔다. 어두운 산이었지만,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뭔데? 방법이 뭐야?"
"드라이버."

- "아까 오락실 동전 넣는 곳 생각해 봐. 가끔 돈 먹었을 때, 주인아저씨가 어떻게 했지?"
정충식은 오락실을 상상했다. 가끔 오락기가 100원을 먹을 때가 있다. 주인아저씨에게 말하면 아저씨는 십자드라이버를 가지고 온다. 그리고 동전을 넣는 곳의 네 개의 나사를 풀고는 동전 넣는 부분을 밖으로 꺼낸다. 주인아저씨는 100원짜리가 지나가는 길의 핀을 건들어 본다. 그럼 오락기에 돈을 넣은 것처럼 코인의 숫자가 올라갔다. 정충식이 크게 깨달아 소리쳤다. 
"드라이버로 돈 넣는 부분을 열면 공짜로 오락을 할 수 있겠어."
하지만 정답이 아닌지 최호남은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오락을 하는 것이지. 돈을 벌지는 못하지."
"그럼 어떻게 해?"
"돈 넣는 부분을 밖으로 빼내면 거기로 손을 넣을 수 있어. 바로 아래 동전이 모이는 돈통이 있지."

- 최호남은 하얀 이를 보이면 웃었다.
"오락실 주인이나 다른 사람들이 못 보게 너희가 방어막을 잘 쳐야 해."
위험했다. 그리고 10원짜리를 사용할 때는 범죄의 느낌이 없었는데, 이것은 명백한 범죄였다. 정충식은 반대했다.
"너무 위험해. 오락실에는 사람이 많다고. 분명히 들킬 거야."
호남은 한쪽 눈으로 충식을 보았다. 분명히 자신을 째려보는 눈이었다. 그때 나머지 둘도 걱정하자 김재식도 걱정되었는지 말을 끌었다.
"하긴 학교 앞 오락실은 우리 얼굴도 잘 알 텐데..."
김재식마저 반대의 의미로 말을 하자 호남은 표정을 풀고는 하얀 이를 드러냈다.
"아직 그건 무린가? 그렇다면... 차 털기 먼저 하자."
 
- 호남은 지폐를 흔들며 말했다. 그 시절 일반 가정에서도 짜장면은 가끔 먹는 특식이었다. 산동네에서는 생일이 아니라면 먹지 못하는 음식이었다.
"가자~."
아이들은 길에 보이는 태양각이라는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 짜장면 다섯 그릇이요."
"애들끼리 왔어? 돈 있니?"

 

- 짜장면은 800원이었다. 다섯 그릇은 4천 원이라는 거금이었다. 호남은 주머니에서 5천 원권을 꺼내 내밀었다. 주인아주머니는 활짝 웃으며 돈을 받았고, 안쪽에 짜장면 다섯 그릇이라고 소리쳤다. 짜장면은 꿀맛이었다. 국민학교 6학년에게 짜장면 한 그릇은 배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 "아주머니 거스름돈 500원짜리로 두 개 주세요."
아이들은 배부르게 중국집을 나왔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호남은 돈을 꺼냈다.
"이제 돈을 나누자."
1000원짜리 지폐가 2장, 500원짜리 동전 2개, 100원짜리 동전이 7개였다.
"어떻게 나누지?"
호남의 말에 재식이 호남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 "고, 고마워."
충식은 돈을 받았다. 아까의 불만이 사라지고 고마움을 느꼈다. 짜장면과 오락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산동네 아이들에게는 호사였다. 그해 겨울 다섯 아이들은 동전을 찾아 옆동네를 돌아다녔다. 어쩌다 큰돈이 나올 때 짜장면을 먹을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나날들이었다.

- 산동네 다섯 명은 산학 국민학교 근처의 산학 남중학교로 진학했다.
그 시절 남중은 정글이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제외되려면 공부를 아주 잘하거나, 집이 아주 부자여야 했다. 국민학교와 다르게 여러 학교에서 모이다 보니 덩치 좋은 김재식이 짱급이 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약한 존재는 아니었다. 다섯 아이는 김재식 사단이었다. 키 작은 호남은 책사, 정충식과 둘은 병사였다. 호남은 화상으로 머리를 기르는 특혜를 받았고, 종종 머리를 들추어 아이들에게 겁을 주었다. 다른 짱급 무리들은 초원의 사슴과 얼룩말을 잡아먹는 것처럼 약한 아이들의 고혈을 빨았다. 그 시절은 모두 가난했고, 아이들도 초원의 생활에 적응했다. 

- 한 갑을 들어 보였다. 관심 있는 훈련병들이 다가왔다.
"어렵게 구한 담배 한 갑에 2만 원."
"1000원짜리 담배를 2만 원에 팔다니 같은 훈련병끼리 너무 한 거 아니야?"
"그렇지만 정말 어렵고 비싸게 구한 거야. 나도 비싸게 샀으니 어쩔 수 없어."

- 비쌌지만 담배에 목마른 자들이 구입했다. 두 갑이 남았다. 충식의 눈에 담배를 사간 훈련병이 보였다. 담배를 풀어 10개비씩 나누는 것이 보였다. 그때 아이디어가 생겼다. 호남에게 자신의 머리도 비상하다는 것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 한 개비 1000원."
10배 높은 가격의 담배는 고가라 사기 거북했지만, 개비는 살 수 있다. 충식의 예상대로 담배를 사기 위해 1000원짜리를 들고 왔고, 두세 개비씩 팔려나갔다. 
충식은 호남을 보았지만, 왠지 기쁜 표정은 아닌 것 같았다.
'흥, 너보다 훌륭히 팔아내서 그렇지? 이제 난 산동네 살던 만만한 놈이 아니다 이거야.'

- 담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것은 3일 후였다. 훈련소는 6주 코스다. 5주 차에 접어들자 저녁 식사 후 조교들은 보이지 않았 ...

- 정충식은 1대대로 배정되었다. 1대대는 파주의 한강 하류에서 강안 경계를 하는 일종의 GOP였다. 대대에 있으면서 간첩이 넘어올 상황에 대비에 수류탄, 실탄 사용에 대한 훈련을 받았다. 모든 게 평화로웠지만, 정충식의 옆에 최호남이 있는 것이 불안했다.
"크큭, 충식아. 간첩 잡으면 바로 제대래. 간첩이 내 앞으로 왔으면 좋겠는데."
충식은 호남과 더는 엮이기 싫었다. 생각해 보면 중학교 때부터 호남과 엮여서 끝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이번 군대에서 담배 사건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최호남 때문이었다. 

 

- 그래도 충식은 호남이 나서 주길 기대했었다.
"난 그래도 네가 나설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걱정한 거야. 개비로 팔면 담배 피는 놈들이 많아지고 걸릴 줄 알았지. 난 분명히 한 갑씩 팔라고 했는데, 근데 넌 도대체 왜 개비로 판 거야?"
충식은 할 말이 없었다. 이놈은 중학교 때부터 자신이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가며 행동했다. 항상 만만한 누군가를 이용하는 이 악마 같은 놈과 더는 상종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같이 있지만, 이제 곧 중대로 갈리고 소대로 갈린다. 이놈과 같이 있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충식은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 

-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별미인 라면은 달랐다. 자정 근무 교대 때 라면을 준다. 배급량은 1인당 0.7개, 전투력 최강인 군인은 1인당 3개도 먹을 것이다. 수법은 야비했다. 먼저 일병이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일장 연설을 시작한다. 빨리 라면을 먹고 경계근무에 들어가야 하는데 말이다. 갈구는 일병은 시간을 보다가 거의 임박하여 식당으로 간다. 취사병은 갈구는 일병에게 나머지 라면을 부어주고는 두 이등병을 갈궜다. 
"이등병 나부랭탱이 새끼들이 빠졌구만. 빨리빨리 안 다녀?"

"죄송합니다."
"늦게 오면 라면은 없어. 꺼져!"

- 근무에 나가 흘러가는 한강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저절로 났다.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할까 말이다. 군대는 하나의 세포 같았다. '소대장에게 호소해 볼까?' 아니다. 소초는 작은 집이다. 아마 소대장도 이런 사실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군대가 제대로 굴러가기 위하여 모두가 유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라면을 안 주는 것도, 근무 때 선임병이 바뀌는 것도, 잠을 잘 재우지 않는 것도 모두 알고 있다.
그래도 충식이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최호남 때문이었다. 같이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 단풍이 절정인 10월 둘은 100일 휴가를 받았다. 오랜만에 나오는 사회였지만 충식을 반겨 주는 사람은 없었다. 집에 가도 어머니는 생업을 하느라 바빴고, 학교는 퇴학을 당했기에 만날 친구도 없었다. 그냥 하릴없이 책상을 정리하다가 안쪽에서 뭉친 신문지가 보였다. 신문지를 펼치자 작은 갈색 병이 나왔다. 청산가리다. 
아버지는 자살했다. 사업 실패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어 빚에서 벗어난 것이다. 아버지를 최초 발견한 것은 충식이였다. 토요일 학교를 마치고 들어왔을 때, 소반 위에 소주 빈 병 세 개와 유서가 있었다. 그리고 위화감이 드는 작은 갈색 병. 쓰러진 아버지 입에서 연한 아몬드 냄새가 났다. 정충식은 본능적으로 갈색 병을 신문지에 싸서 책상 깊은 곳에 숨기고, 경찰에 신고했다.
사인은 청산가리 중독에 의한 사망이라고 했다. 충식은 도서관에 가서 독에 관련된 책에서 청산가리가 맹독임을 알았다. 아몬드 냄새가 난다고도 했다. 

- "군대로 가져가자."
특별한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그냥 가지고 있으면 군대의 괴롭힘을 버텨 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충식은 병에서 꺼낸 청산가리 조각을 은박지로 겹겹이 싸고, 랩을 이용하여 여러 층 ... 

- 목욕탕에는 둘만 있었다. 뜨거운 물이 맞은 곳에 닿자 통증이 전해졌다.
"아, 씨발 졸라 아프네."
"정충식 일병님은 대단하십니다."
"뭐가?"
"어떻게 그렇게 맞으면서 웃을 수 있으십니까? 아마 윤성락병장님도 속으로 쫄았을 겁니다."
"내가 웃었어?"
김민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섬뜩했지 말입니다."
아마 청산가리를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난 널 언제라도 죽일 수 있다. 그러니 나를 더 괴롭혀 내가 살인을 저지를 수 있도록 트리거를 당기라고 속으로 생각한 것이 얼굴로 드러났을 것이다.
"넌 그러지 마. 더 맞을 뿐이야."

- 그 후 김민수의 자리는 윤성락의 옆자리로 바뀌었다. 윤성락은 자기 전 김민수의 가슴을 만졌다. 성추행의 개념도 약한 시절이었고, 더군다나 남자가 남자를 성추행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김민수는 모든 군인이 그랬던 것처럼 성추행 굴욕을 이를 악물며 견뎌냈다.

- 소총을 앉아 있는 김민수의 턱에 대고 세웠다. 장갑을 벗어 얼른 김민수의 손에 끼우고는 오른손 엄지를 트리거에 넣었다. 그리고 엄지를 눌러 총을 발사했다. 두 발이 나가며 김민수의 뇌가 터졌다. 정충식은 청산가리 쓰레기를 화장실 변기에 내리고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 사이로 누웠다.
'민수야, 네 복수는 내가 대신했다.'

<살인 트리거>


 
- 충북 진천이 고향이며 올해 스무 살이 된 심소남은 집에 갇혀 지내다시피 해온 특이한 청춘이다.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친구라곤 단 한 명도 없는 그는 왕따에 외톨이다. 소남이 두 살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해 어머니가 그를 키웠다. 일에 지친 그녀는 외동아들의 교육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 소남이 아홉 살 되던 해, 소남 엄마는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남편이 등장하는 악몽에 시달리게 되었다. "여보 나 좀 살려줘, 여보 나 좀 살려줘!" 뒤집힌 남편의 소름 끼치는 얼굴이 사라지고 나면 몽둥이로 맞은 듯 몸이 아파왔다. 악몽이 반복될수록 지나가던 맹견이 덤비거나, 버스에서 지갑을 잃어버리거나, 집안에 형광등이 떨어져 깨지는 등 기이한 사고가 잇따랐다. 사정을 들은 지인은 그녀에게 동자장군이라는 무당을 소개했다. 동자장군은 말총머리에 얼굴이 갸름한 미남형의 남자였으나 뱀을 연상시키는 눈은 심문자처럼 섬뜩했다. 신과 대화한 그는 남편의 묘에 문제가 있다는 점괘를 내렸다. 친지를 동원해 땅을 파헤쳐보니 과연 관 한쪽이 위로 쳐들려 있었다. 유골은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하반신이 위로 솟고 상반신은 아래로 눌린 형국으로 변해 있었다. 기겁한 시댁 식구들이 중장비를 동원해 묘의 위치를 바로 하자 악몽은 사라졌다.

- 하지만 몸살은 그대로였다. 동자장군은 혼백이 아직 부인을 놔주지 않고 있으니 남편을 삼도천 건너편으로 보낼 굿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기꺼이 응낙했고 동자장군을 찾아가는 횟수도 점점 늘었다.
언제부턴가 소남은 엄마가 동자장군을 만나러 갈 때 말이 많아지고 미소를 흘린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다. 엄마를 따라가 몇 번 본 동자장군 곁에는 늘 여자가 많아 꺼림칙했다. 하지만 엄마는 개의치 않고 더 자주 찾아갔다. 동자장군이 더 어렸지만 결국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갔고 엄마는 앞으로 장군님을 아버지라 부르라 했다. 

- 개통시켜 주었는데 연락보다는 감시의 의도가 더 커 보였다.
자대 배치 전, 훈련소에서 경찰학교로 옮겨간 시기에 소남은 자신에게 탈출 기회를 알려준 꽃가게 주인 소식을 소현이한테서 들었다. 그녀는 원예 작업을 하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데 유가족들이 신고해 아버지가 경찰서에도 갔지만 곧 돌아왔다고 했다. 소남은 아홉 살 동생의 두서없는 말에서도 유가족이 아버지를 고소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음을 대번에 눈치챘다. 현재 유가족은 급히 가게를 처분하고 진천을 떴다고 한다. 
'겁이 난 거겠지! 아버지만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써서 그 아줌마를 죽인 거야!'
소남만이 믿어 의심치 않는 진실이었다. 군대에 와서도 그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날이 두려웠다.

- 그런데 문제는 군대에도 있었다. 군대는 탈출구가 아니라 계부가 보여준 폭력적 세계의 연장선이었다. 복무 기간 동안 싫어도 함께 생활해야만 하는 군대의 구성원들은 계부와 비슷한 방식으로 그를 괴롭혔다. 

- 중대장은 심소남과 유신이 소속된 2소대의 소대장과 부소대장을 불렀다.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라 두 사람은 긴장했다. 소대장은 50대의 경위, 부소대장은 30대의 경장이다. 둘 다 데리고 있는 의경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노심초사하는 이들이다. 아이들이 다치거나 사고를 치면 자기들이 징계를 먹기 때문이다. 
두 대원의 야간 호출에 2소대 의경들 29명은 난파선의 쥐처럼 잠들지 못한 채 긴장했다. 유신역과 심소남은 중대장실 바깥에서 열중쉬어를 한 채 서 있었다. 먼저 소남이 불려 들어갔다. 

- 주 : 의경 부대의 소대장 부소대장은 육군과 달리 병역 의무의 군인이 아니라 경찰공무원 중에서 차출된다. 이후 이들을 의경 대원과 구분해 기간요원이라고 한다. 

- 하용만마저 나가고 이경들만 남았다. 먼저 온 이경들이 심소남을 나무랐다.
"당하지만 말고 너도 유신역이 그 새끼하고 싸워! 니가 고참이잖아!"
"싸우다 얻어터져도 말 못 하고, 이겨도 말 못 하는 게 그 새끼야!"
"인터넷에 이름 올라가면 손해 볼 새낀 그 새끼야, 괜찮으니까 당하지 말고 줘 패 버려."
자기들이 못 하는 일을 부추기던 그들은 이제 소남에게도 책임을 추궁했다.
"니 행동에도 문제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
"너 하나 찍히면 우리 다 찍힌다. 제발 협조 좀 해라."
"자꾸 두리번거리고 땀 흘리고 그러지 마라. 군기 든 것처럼 연기라도 하란 말이다. 왜 일부러 미운털 박히게 하냐?"
"아무리 또라이인 척해도 편한 데로 못 빠진다. 괜히 우리까지 고생한다고."
소남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자기 말만 했다. 당사자의 진심을 들어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모두가 위하는 척 ... 

- 소대장은 그 시선에 움찔했다.
'왜 나만 갖고 그래요?'
실제로 그런 말을 들은 것처럼 소대장은 양심의 가책에 손을 내렸다. 소남이 다시 눈을 떨구었다. 소대장은 머리 때렸던 일을 후회했다. 왜 우냐는 질문도 하지 못한 채, 소남의 마음 상태도 묻지 않은 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괜찮다 괜찮다. 일어나자."

- 어떤 이들이 한 사람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면 그 한 사람의 창조적인 두뇌는 점차 제 기능을 상실한다. 창조적인 미래와 아무 상관없는 증오와 원한, 광기와 혼돈만이 뇌를 새로이 잠식한다. 그 결과 인생은 망가지고 훼손된다. 살려고 태어난 사람이 본의 아니게 죽음과 가까운 쪽에 서게 된다. 가해자는 이 사실을 모른다. 안다 해도 나 혼자 그런 게 아니라는 기괴한 동질감으로 도망갈 구멍부터 찾는다.

- "돌아오는 대로 아버지 일을 이을 테니 제발 제대 전까지 안전하게 군 생활을 할 수 있게만 해달라고 했지. 거기서 난 진실을 알았어. 소남이가 정말 겁을 내는 건 내가 아니라 군대 고참들이라는 걸." 
"무슨 소리예요? 소남인 입대 해서도 늘 주눅 들어 있었어요. 당신 때문에."
"니가 소남이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해? 그놈 바보 아냐. 항상 눈동자 휘휘 돌리며 상대방을 관찰하는 놈이지. 그런 놈이 '아버지를 피해 용감히 입대했는데 군대가 더 무서워요'라고 순순히 말할 것 같아? 내게 약점 잡힐 일을 하지 않는 놈이야. 지 동생을 들먹인 것도 절반은 쇼야. 2년 동안 참고 견뎌야 할 이유를 하나 정도는 갖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지. 그놈이 가족이 있어, 친구가 있어? 일종의 동기부여란 말이지. 소남인 불안증이 있었어. 괴롭힘 때문에 제대 전에 죽지 않을까 하는 불안증 말이야. 내가 아닌 군대 고참들의 괴롭힘! 그래서 그걸 해결하는 부적을 써 달랬고 난 써준 거야."
"아무리 무속인이라도 그런 엉터리 행위는 하지 말았어야죠! 그 부적을 갖고 다니면서 소남인 시름시름 앓았어요. 아마 잘못된 믿음이 마음의 병을 만든 건지도 모르죠. 당신 책임이 커요. 고참들은 몸살, 식은땀, 불안을 보이는 소남일 오히려 꼴통 취급 했으니까요."
"뭘 착각하고 있네. 그게 병을 앓게 하는 부적인 줄 알아? 그건 귀신을 부르는 부적이야."
"뭐라고요?"
진택의 표정이 굳어졌다.
"군대 고참들의 괴롭힘을 해결시켜 줄 귀신."

- "너무 위험해서 잘 부르지 않는 신격(神格)이 있지. 하지만 제대로 들리기만 하면 영험과 수호가 극치를 달리는 장군신이 있어. 이 신을 기어이 내리게 하려고 부적을 피로 쓴 거야. 소남이의 피로 말이야!"
동자장군이 고함을 치자 진택이 움찔거렸다. 장군이 긴 손가락을 들어 진택의 뒤를 가리켰다.
"저기가 소남이 갇혀 있던 신당이다. 그놈은 외박기간 동안 저 안에만 있었어. 스스로 원해서 말이지. 문이 열렸으니 봐라. 여기서도 탱화가 보이지? 바로 언월도를 지닌 저 신이야. 벽력신장(霹靂神將)! 음지의 요괴들을 처치하는 호법신인데 무엇이든 죽이고 보는 흉악한 성격을 지녔다고 하지." 


- 술 장식이 붙은 투구를 쓰고 숯 같은 눈썹을 꿈틀거리는 장군의 모습이 여기서도 보였다. 부리부리한 눈알이 유신역을 연상시켰다. 그 옆에는 장군을 보좌하는 검은 눈가의 할머니도 있었는데 그림이 살아 있는 듯 무서워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소남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해 나름의 죄의식으로 따지러 온 진택의 음성이 새로운 진실을 알게 된 경악으로 떨렸다.


- "어찌 된 이유인진 몰라도 유신역이 옷에 그 부적이 들어갔어요. 그러자 유신역이는 소남이가 되었어요."
"유신역? 연예인?"
"예. 유신역은 그 귀신을 직접 봤다고 했어요. 장군 차림이었다고 했지요. 눈이 검은 할머니도 있었고요. 물론 사람들은 정신병으로 보고 있지만."

"아니, 유신역은 벽력신장과 성모할미를 직접 본 게 맞을 거야. 다른 사람은 부적을 갖고 있어도 그 신을 못 보겠지만."
"어째서죠?"
"소남이가 그때 이런 말을 하더군. '유신역은 따로 관리받는 귀족이라서 내가 신당 안에 있는 것처럼 도서관으로 사용되는 공간을 홀로 배정받아 생활한다'고. 거기서 그놈은 땀을 뻘뻘 흘리며 혼자 춤을 추고, 혼자 노래도 하고, 혼자 연기 연습도 했다지. 관중이 있는 것처럼 혼자 열광하고, 공연이 끝나면 득도한 성취감에 혼자 기뻐했다지? 그 모든 행위가 어떤 직업과 비슷하지 않나?"

- "무당과 예능인에게 비슷한 면이 있다면 신을 받는 능력도 비슷하지 않을까?"
"아냐! 믿을 수 없어요!" 

- 진택은 충격에 빠졌다.


- 동자장군은 떠나간 소남을 다시 맞아들이길 거부했다. 의가사 제대를 시켜주려고 무속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파멸시키기 위해 무속행위를 한 것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소남에게 붙여 안긴 건 칼부림으로 모두를 죽이는 무속 장군이었다. 진택은 그와 관련한 참사를 직접 겪은 사람이다. 밀본 법사가 들려준 녹음에서 들은 '다 죽여 버리고 싶다'는 고함, 그건 소남의 음성일까, 죽음의 신의 음성일까...

- 소남을 버렸다는 또 다른 증거는 이제 막 문을 열고 등장한 아이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열한두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지만 표정이 밝았고 눈이 신비로웠다. 동자장군과 매우 닮은 그 용모는 왕의 세자, 혹은 늙은 회장 아래의 젊은 사장을 떠올리게 했다. 완벽한 후계자의 모습이었다. 동자장군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남이가 앓았다 그랬지? 시름시름 앓는 거야 완전한 접신 ... "

<고문관>



- 어느 날, 학교 다닐 때까지 지원하기로 했던 집세와 학비가 끊겨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는 바뀌어 있었고 다시는 찾을 수 없게 이사까지 가 버렸다. 하늘이 원망스러웠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먹고사는 문제로 하루하루 지옥일 무렵, 작은아버지가 찾아왔다. 
"네 동생은 나한테 맡기고, 넌 고등학교 졸업했으니 군대나 가라.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 주고 얼마나 좋냐? 군대 일찍 다녀오면 좋다. 내 말 틀린 거 하나 없으니까, 자원입대해."

 

- 작은아버지 말대로 입대부터 해 버렸다. 고된 훈련을 거쳐, 자대에 배치되고 작대기 하나를 더 달기 전까지 사회로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버티기와 죽음 둘이었다. 적응하고 순응될 무렵, 뭔가 느껴졌다.
'군대란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문제 될 것 하나 없다.'

- 눈치껏 행동하니 처음으로 사회생활 잘한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병장 됐을 무렵은 제대가 두려울 정도였다. 제대를 3주 앞둔 날이었다. 박종운은 담배를 연거푸 들이키며, 후임들에게 푸념을 늘어놨다.
"나가면 좋을 것 같지? 하나도 안 좋다고... 내가 대학을 다니냐, 기술이 있냐? 뭐 먹고살지 갑갑하다, 갑갑해. 그렇다고 ... "

- 황춘효가 박종운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 박 뱀. 형수님,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군번 빠른 게 장땡입니다. 해병대 아시죠? 해병대는 나이가 중요치 않습니다. 기수 빠른 사람이 어른이고 형님입니다. 멀리서 눈만 마주쳐도 기수 낮은 사람이 인사하는 게 법칙이죠. 이해 안 가시겠지만, 이게 남자들의 세계입니다. 저희 부대가 후방이지만 군기가 해병대 못지않게 세기로 알아주거든요. 여기 계신 박종운 병장님은 저희보다 한 살 어리지만. 우리의 영원한 병장님이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짜기라도 한 듯 다른 조동기, 허정민, 김민구가 "맞습니다"를 연발했다.

 

- 구시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남자의 세계는 알 수 없는 곳이네요. 사회에 나와서까지 군대 시절 계급이 통용되다니... 그래도 기분 나쁠 것 같아요."
이번에는 서정후가 끼어들었다.
"형수님,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학교에서 나이가 많아도 학번이 느리면 후배 대우받는 거고요. 직장에서도 직급이 우선입니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부대 사람들은 사회에 나오면 형, 동생 한다고 하지만 그게 쉽겠습니까? 2년간 함께 생활한 것이 쉽게 바뀌기 힘듭니다. 민구랑 정민이도 그게 편하고 동의했고요. 안 그러냐?" 

-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려면 상급자가 원하는 걸 이루어줘야 했다고 생각했다. 위에서 시키면 최선을 다했고 그것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어도 상관없었다.
"이병, 박종운! 맡겨만 주십시오. 저는 잃을 것이 없습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계급은 올라가고 자신에게도 권력이란 게 생긴다는 걸 알았다. 그때까지 상급자가 시키면 목숨까지 바치는 시늉도 했다. 나이도 어리니 귀여움 받았고 사회생활 잘한다고 인정받으니 서로 자기 아래에 두고 싶어 했다. 계급 사회에서는 줄을 잘 타야 한다는 말에 염기철 중사가 아끼는 선임들 라인으로 들어갔다. 작대기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권력은 강해졌다. 단체 기합에서도 열외, 힘든 건 모두 피해 갔다.

 

- 염기철은 병사들이 위에서 다루기 쉬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군기가 흩어지는 걸 누구보다 싫어했기에 늘 엄격했다.

<불청객이 올 무렵>

 

 

- 박종운에게는 호재였다. 병사들의 행동을 통제하며 정신개조에 앞장섰다.
짬밥 좀 먹으니까 사람이 두 부류로 보였다. 다루기 쉬운 놈과 다루기 어려운 놈이다. 둘 다 다루기 쉬운 놈으로 만들어야 했다. 살다 보면 정의감이니, 희생이니 하는 위선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아주 짜증이 났다. 까라면 까는 것이 군 생활인데 말이 너무 많았다. 군대에 인권이 어디 있나? 위계질서가 무너지면 군대는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팔을 걷어 올렸다. 내리사랑이란 명목으로 후임이 실수하면 직속 선임을 폭행했고 개인적인 생각을 갖지 못하게 했다. 이등병은 맞선임 외에 대화를 걸 수 없게 했고 이등병끼리 대화도 금지했다. 그중 열심히 해 보려는 놈이 생기면 특별 대우해 주고 내 사람이란 인식을 심어줬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사람은 일거수일투족 쪼아야 실수를 하지 않는다. 괜히 사회적 동물이 아니란 말이다. 

- 문제는 자신보다 4개월 빠른 선임이었다. 이름은 현성문, 애들 좀 잡으려면 어느새 나타나 훼방을 놓는 놈이었다. 병장 달고 난 뒤부터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것처럼 애들 손도 못 대게 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고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로 타협이란 없었다. 우리 세대에는 가혹행위 없는 군 생활을 만들자며 박종운을 찾아왔으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얼어붙은 하늘에 떠 있는 조각달을 볼 여유가 생긴 상진은 시린 입김을 내뱉었다. 얼어붙은 바람이 그의 귓가를 스쳐 지나가면서 이제 때가 되었다고 속삭였다. 상진은 가죽 장갑을 입으로 뽑아낸 다음 안에 들어있는 탄창을 하나 꺼내 들었다. 20발이 들어가는 탄창에는 15발이 장전되어 있었다. 탄창 입구에 붙여 놓은 종이를 뜯어내고 노리쇠를 후퇴시킨 소총에 탄창을 끼워 넣자 딸깍거리는 작은 소리가 났다. 


- 온몸을 그물처럼 옭아맨 탄띠를 벗은 상진은 노리쇠 반대편에 있는 노리쇠 고정 장치를 살짝 당기자 뒤로 밀려나 있던 노리쇠가 천천히 앞으로 미끄러졌다. 철커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노리쇠가 장전되자 방아쇠 앞쪽에 달린 안전장치를 안전에서 단발로 바꿨다. 심호흡을 한 상진은 총구를 앞으로 하고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잘 열리지 않는 초소의 문을 잡아당긴 상진은 스티로폼 위에서 잠자고 있는 권 상병의 가슴에 총구를 갖다 댔다. 그리고 가슴이 눌린 권 상병이 눈을 떴다. 
"씨발! 뭐 하는 거야?"
상진은 대답 대신 방아쇠를 당겼다. 예상했던 것보다 총소리는 크게 들리지 않았고, 피도 많이 튀지 않았다. 땅 위로 살짝 튀어 오른 권 상병은 바보같이 입을 벌린 채 눈을 부릅떴다. 검게 변해 버린 구멍에서는 피 대신 연기가 피어올랐다. 

- 상진은 목에 걸려 있던 야경을 벗어서 여기 옆에 내려놓고는 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는 막사 쪽으로 걸어갔다. 신임 연대장의 순찰에 대비해 취침시간을 반납하고 작업한 막사 앞 화단에는 근처 산에서 뽑아온 이름 모를 작은 나무들이 애처롭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막사 앞에서 멈춘 상진은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왼쪽에 자리 잡은 상황실을 쳐다보았다. 상황실을 지키고 있는 것이 소설가 지망생인 부산 출신의 신 상병이라는 것을 안 상진은 갈등했다. 그에게 잘해주는 몇 안 되는 고참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무전기 앞에 앉아있던 신상병이 의아한 눈빛을 던졌다. 
"아직 근무도 안 끝났는데 여긴 왜 왔노? 또 권 상병님이 라면 가져오라디?"
유독 하얀 얼굴 탓에 백설기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신 상병의 말에 상진은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뒤늦게 상진의 총을 본 신 상병의 얼굴이 굳어졌다. 상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벌리고 있는 신 상병의 하얀 얼굴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야!"

- 삐걱거리는 문을 연 상진은 먹먹한 어둠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눈 좀 붙일 수 있겠네."

- "일을 벌여 놓고는 죽지도 못해? 머저리 같은 놈!"
분을 참지 못한다는 듯 험한 말을 내뱉던 박 소령은 박 중사 옆에 서 있는 강 상사를 보고는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자넨 여기 왜 온 거야? 사단에서 서류나 정리하지 그래."
"다음 주까지는 사단 헌병대입니다. 제가 현장에 나오지 않으면 게으름 피운다고 뒤에서 씹어댈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차분하게 웃으며 대답한 강 상사는 박 소령의 눈을 노려보았다. 서로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처음 대면 때부터 알아볼 수 있었다. 박 소령 역시 강 상사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헛기침을 한 박 소령이 말했다.
"일이 너무 커졌어. 오는 동안 합참에서 두 번, 육본에서도 세 번 연락이 왔네. 오후에 서울에서 기자회견이 있을 거라고 하더군. 군 감찰대와 기무사에서 구성된 합동조사단이 오후부터 들어올 거야. 사단 헌병대는 연락 업무만 유지하고 빠지게 사단에서 다루기에는 덩치가 너무 커. 박 중사가 연대 파견관이었으니까 연락 업무를 담당하게." 

- "총알로 안 뚫리니까 배식창 안으로 수류탄을 던져 넣었습니다. 안에 숨어 있던 네 명 모두 수류탄 파편에 갈기갈기 찢겨져서 살점이 냄비랑 그릇 사이로 다 달라붙었고 말이죠. 아까 연대 의무관이 무심코 안을 들여다보고는 문 앞에다가 오바이트를 했지 뭡니까."
고 중사의 설명을 들은 강 상사는 허리에 손을 대고 살육의 현장을 돌아봤다.
"두 명이나 있는데 침착하게 한 발씩 쏘고는 돌아서서 배식구안으로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는 얘긴데, 군대 들어오기 전에 킬러였었나?"
강 상사의 농담 섞인 물음에 고 중사가 피식 웃었다.
"관심사병이었습니다. 중대장 면담도 여러 번 할 정도였고, 대충 분위기를 보니까 엄청 갈굼 당한 거 같았습니다. 아무튼 수류탄 한 발이랑 총알 일곱 발로 여섯 명을 죽였으니까 원 샷 원킬이긴 하죠."

 

- "양다리 걸친 레지한테 복수한다고 하고서는 정작 찌른 건 다방 마담이랑 그날 처음 출근한 어린 레지였어. 나중에 내가 물어봤지.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었는데 왜 그렇게 백주대낮에 일을 저질렀느냐고 말이야. 그 친구 얘기가 복수를 하고 싶었다더군.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년을 죽이면 아무도 몰라줄 것 아니냐면서 말이야. 이제 그년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히죽거렸어."

주변보다 낮은 취사장 주변에 고여 있던 찬바람이 새 바람에 떠밀리면서 눈 부스러기들을 허공에 뿌렸다. 군용 점퍼의 깃을 바짝 조인 강 상사가 계속 말했다.
"한두 명도 아니고 20명이나 죽였다면 뭔가 분명 할 얘기가 있었다는 뜻이야. 그런데 다 죽여 놓고 아무도 보지 않는 창고 안에서 자살을 기도했다는 게 이해가 안 가." 
"그거야 뭐 막상 죽여 놓고 나니까 겁이 나서 그랬던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짓 저지르는 놈들의 마음이야 손바닥 뒤집듯 변해 버리잖습니까."
"진짜로 겁이 났다면 멀리 도망가서 자살을 하든지, 아니면 21사단 GP처럼 총을 버리고 모른 척했을 거야. 안 그래?"
동의를 구하는 듯한 강 상사의 물음에 고 중사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침 휴대폰이 울리자 그를 남겨두고 떠났다.

 

- 표현할 수 없는 맵고 싸한 느낌이 강 상사의 가슴을 채웠다. 뭔가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 그는 한 손으로 점퍼를 더듬거려서 늘 가지고 다니는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버튼을 눌렀다. 디지털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부식 창고 안이 환해졌다가 도로 어둠에 잠겼다. 그때마다 이곳에 뭔가 숨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그는 촬영을 멈추고 부식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 삿대질과 발길질을 당한 소대장의 고개를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아마 울고 있겠지. 일상이 폐허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에 낯선 침입자들의 시선에 자신만의 세계가 난도질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게 슬프겠지. 그런 게 인생이라고 속으로 되뇌인 강 상사는 취사장 뒤편으로 걸어가서는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담배 연기를 차가운 공기 속으로 내뿜은 강 상사는 눈을 껌뻑거렸다. 

- 군에서 내릴 결론은 뻔했다. 상급자의 폭행과 가혹행위에 못 이긴 후임 병사의 우발적인 총격사고, 죽은 선임병들 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골라 가혹행위와 폭행을 가했다고 뒤집어씌우고, 살아남은 소대장과 중대장, 대대장에게 지휘책임을 물어서 처벌하고, 나머지는 시간이라는 무덤 속에 묻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현장은 분명 다른 얘기를 들려줬다. 대부분의 총격 사건은 계획했든, 혹은 충동적이든, 온갖 변수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이번 총격 사건은 초 단위로 계산을 하고 그대로 실행했다. 얼마나 소대원들을 죽이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소원을 이룬 셈이다.
"뭔가, 아니 누군가 있어."

- 도대체 어떤 일이 관심사병 수준의 이등병을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병기로 만들었을지 궁금했다. 그러면서 폐 속으로 스며 들어간 담배 연기를 밖으로 뿜어내면서 어떻게 하면 몰래 이번 일을 조사할 수 있을지 궁리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얄미운 사단장과 감찰과 박 소령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담배를 다 피운 강 상사는 막사 쪽으로 향했다. 사단장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괴롭힘을 당했던 소대장은 사단 헌병들의 부축을 받으며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소대장을 바라보던 강 상사는 막사 쪽으로 향했다. 

- "덮어버리기로 위쪽에서 결론이 난 모양인데요. 다음 주 내에 현장조사 마무리 짓고 국방부 장관한테 결과 보고 한답니다."
"그렇게 빨리?"
"괜히 질질 끌면 어느 누가 유탄을 맞을지 모르잖습니까."
휴대폰을 고쳐 잡은 강 상사가 물었다.
"사단 의무관으로 있던 백 소령이랑 아직도 연락하고 있지?"
"가끔 연락 주고받는 정도입니다."
"백 소령한테 연락해서 동기 중에 철정 병원에 군의관으로 있는 친구 있는지 물어봐."
그러자 잠시 뜸을 들인 박 중사가 물었다.
"생존자들을 만나보실 생각이십니까?"
박 중사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그의 반문은 마치 '위험합니다.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마세요'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 몇 번이고 뚫어지게 바라보던 강 상사는 뭔가 빠진 게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수첩이 없네."
진중수첩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물론 버리거나 잊어버릴 수 있긴 하지만 이등병에게 수첩은 필수였다. 소대 고참 이름부터 암기해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첩이 없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고 있는 와중에 휴대폰이 드르륵거렸다. 박 중사가 보낸 문자였는데 철정 병원에 근무 중인 군의관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 "사단 수사과에서 나오셨습니까?"
굵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강 상사는 눈처럼 하얀 가운을 입은 키 큰 의사가 눈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가운의 오른쪽에는 과장 오기민이라는 이름의 명찰이 붙어 있었다.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강 상사는 손을 내밀면서 입을 열었다.
"사단 헌병대 수사과 강민규 상사입니다. 사무실로 찾아뵐 생각이었는데 직접 내려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단 의무대 백 소령 말이 공식적인 게 아니라고 해서요. 그렇다면 사무실은 좀 그럴 것 같아서 시간 맞춰서 내려와 봤습니다. 마침 식사 시간이 조금 남아서 말이죠. 따라오십시오. 환자들은 6층에 있습니다." 

 

- 납작한 1층 로비를 가로질러 가는 동안 환자들과 간호사들이 알은척을 하는 바람에 오 과장에게 제대로 말을 건네지 못했다. 침대가 들어갈 수 있도록 길쭉하게 만들어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간호장교들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6층에 멈추고 문이 열렸다. 6층은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둠이 바닥과 벽 곳곳에 짙게 배어 있었다. 

- "어떻게 살아남은 겁니까?"
"이 친구는 마침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느라고 살 수 있었던 겁니다. 막사에서 살아남은 다른 두 명은 수류탄 파편을 뒤집어써서 살아남아도 온전한 사람 구실은 못 할 겁니다."
현장 보고서에 끼워져 있던 끔찍한 현장 사진들을 떠올린 강 상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아마 평생 몸과 마음의 상처에 짓눌려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그런데 말입니다."
문고리를 잡은 오 과장이 은밀한 목소리로 물었다.
"공식적인 조사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만, 혹시 국방부에서 발표가 난 것과 다른 사실이 있는 겁니까?"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군 병원에 몇 년 있다 보니까 눈치가 좀 생기죠. 이번 경우는 사실 조사 시작 전부터 결론이 난 것 같았습니다. 부상자들을 조사했던 건 그들의 입을 단속시키고, 말을 맞추기 위해서라는 인상을 받았고 말이죠. 그런데 별다른 연관이 없는 사단 헌병대에서 이렇게 조사를 하는 게 좀 이상하다 싶은데요."
"사무실에 처박혀 있기 심심해서 돌아다니는 겁니다. 그렇게 의심스러우셨으면서 왜 면회를 허락하셨습니까?"
강 상사의 물음에 오 과장이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사실은 저도 박 소령이랑 좀 사이가 안 좋아서요. 그 작자 불알을 잡아당길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허락을 했습니다."
"그건 제대로 추측하신 겁니다."
금을 씌운 어금니를 드러내며 씩 웃은 오 과장이 문을 열어 주었다. 진한 알코올 냄새가 섞인 공기가 그의 코끝을 파고들었다.
 
- "자꾸 아픈 기억을 되살리게 해서 정말 미안하네. 하지만 전날까지 웃고 떠들던 동료들이 스무 명씩이나 죽어나갔네. 요즘은 예전처럼 쉬쉬하고 덮을 수도 없고, 죽은 병사들 가족한테 입 다물고 살라고 윽박지를 수도 없어. 그 얘기는 마지막 남은 한 톨까지 조사해서 규명하지 않으면 나는 물론이고 자네들 모두 평생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는 뜻이야." 
심문의 첫 번째 원칙은 처음에는 부드럽게 나간다는 것이다. 겁을 집어먹고 있는 상대방에게 같은 고민을 공유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줄 것, 그가 벌인 행동을 이해하고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었으며, 나 역시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할 것. 그리고 속 시원하게 다 털어놓으라고 얘기하면 열에 여덟아홉은 털어놓았다. 

 

- 강 상사는 자신의 구슬림이 병사들의 마음을 어떻게 흔들어놓을지 천천히 기다려 보았다. 움찔하던 병사들의 눈은 가습기 옆에 있는 뚱뚱한 병사에게 향했다. 다른 동료들의 시선을 받은 그가 말아쥔 주먹을 입에 갖다 대고 헛기침을 했다.
"합동조사단 단장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이번 사건은 불행한 일이지만 누군가 책임을 져야만 한다고요. 자살을 기도한 상진이는 그렇다 치고 소대장님도 처벌받을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 뚱뚱한 병사의 말이 끝나고 무미건조한 침묵이 흘렀다. 

"그게 전부일까?"
"전 일련의 가혹행위에 직접 가담하거나 실행한 적이 없습니다. 지난달에 병장 진급휴가를 갔다 오기 전까지 상황근무를 서고 있었기 때문에 소대 내부의 일에 직접 가담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뚱뚱한 병사는 이제 옅은 미소까지 지으며 대답했다. 강 상사는 더 이상 뚫고 들어갈 만한 구석이 없다는 걸 느꼈다. 따로따로 심문했다면 혹시라도 다른 사실을 털어놓을 사람이 있을지 몰랐겠지만 한 병실에 모여든 여섯 명은 똑같은 말과 이야기들로 충분히 무장했다.

- "병원? GOP에서 어떻게 병원을 오갈 수 있었던 거지?"
"모릅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버럭 고함을 지른 뚱뚱한 병사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강 상사는 병실의 다른 병사들을 바라봤다. 하나같이 겁먹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강 상사는 가볍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피해자가 아니라 공범들이었군."
모욕적인 얘기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강 상사는 천천히 돌아서서 병실 밖으로 나갔다.  

- "종종 찾아옵니까?"
"아무래도 같이 살아남았으니까요. 방금 연락을 받았는지 중상을 입은 병장 한 명이 사망했다고 하더군요. 그나마 후유증 없이 살아갈 친구들은 저들이 전부입니다."
오 과장의 설명을 들은 강 상사는 굳게 닫힌 병실의 문을 바라봤다. 총기 난사를 한 정 이병이 최전방 GP에서 이곳까지 진료를 왔다는 사실은 사건 관련 보고서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누군가 보고서에서 빼라고 지시했을 것인데 그 정도로 손을 쓸 수 있는 건 몇 명 없었다. 
"사단장이랑 감찰과 박 소령."
사라진 정 이병의 수첩이 떠올랐다. 팔다리가 멀쩡했으니, 이곳에서는 정신과 진료를 받은 게 분명했다. 만약 그 수첩에 그 사실이 적혀 있다면 엄청난 파장이 일어날 게 뻔했다.

- 저장되어 있는 이름들을 차례차례 끌어내리던 그는 '연대 수송관 이호신 상사'라는 이름을 찾아내자 통화 버튼을 엄지손가락으로 힘껏 눌렀다. 통화대기음이 한참 들리고 나서야 상대방은 전화를 받았다. 
"아이구, 우리 강상사가 어쩐 일이십니까?"
호들갑을 떨어대는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를 들으며 강 상사는 피식 웃고 말았다. 상대방이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목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 자식이 왜 나한테 전화했지?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몸속에 남은 긴장감을 잔뜩 끌어올린 그가 안부를 묻는 이호신 상사의 말을 잘랐다. 
"뭐 그렇게 호들갑 떨 건 없고,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했어."

"아니,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헌병대 상사님께서 기름밥 먹는 연대 수송관한테 무슨 부탁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올 초에 내륙 5초소에서 원주에 있는 철정 병원까지 운행한 차량이 있는지 확인해 줄 수 있겠어? 날짜는 작년 11월 초부터 1월 중순이었는데 말이야." 

- "공식적인 조사라면 공문 보내 주시고 처리해 주시면 안 될까요?"
상대방의 나름 완강한 저항에 강 상사는 짐짓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야, 임마! 내가 지금 옷 벗는다고 버티는 거야? 가기 전에 연대 수송부 비리 다 풀어놓고 갈까? 좋은 말로 할 때 협조하지? 그게 서로한테 좋을 테니까." 
"아이, 그냥 해본 소립니다. 화 푸세요."
비비 꼬는 것 같은 목소리로 대꾸한 연대 수송관이 말을 이어갔다.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될까요? 날짜 알려 드리면 되는 겁니까?"
"행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니까 선탑자를 찾아서 나랑 연결시켜 줘. 물어볼 게 몇 개 있으니까."
"말씀은 알겠는데 바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을 끌겠다는 상대방의 수작을 간파한 그가 쏘아붙였다.

"요즘도 수송일지 말고 비밀장부 따로 쓰는 거 다 알고 있어."

- "할 얘기 없으니까 기자 불러!"
"불러드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여기까지 못 올 겁니다. 그러니까 일단 폭탄부터 해체하고 얘기하시죠."
"이대로 묻어 버리려고 하는 거 다 알아!"
"그럴 단계는 지났으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디서 온지 아십니까? 내륙 5초소에 있는 폐분초에 갔다 왔어요."

 

- "쪽지에 자기가 당한 거랑 소대장님이 당한 거 다 적어 놨더군요. 거기에 병원 진료까지 받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는데 전방에서 빼내지 않은 것도 확인했습니다."
"씨발, 데려올 때는 나라의 아들이고, 다치면 남의 자식, 죽으면 개만도 못한 취급을 하지. 난 분명히 걔가 문제가 있으니까 빼야 한다고 중대장한테 쪼인트 까이면서 얘기했어. 그런데 들은 척도 안 하다가 일이 터지니까 쉬쉬하고 있잖아." 
두꺼운 철문 너머였지만 울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소대장의 얘기를 들으면서 정상진 이병이 굳이 진중수첩을 없애지 않고 숨겼는지 이해가 갔다. 혹시나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 "소위님이 폭탄 터트리고 끝내면 누가 좋아할 거 같아요?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한 인간들입니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문 안에서 무슨 그림이냐는 물음에 강 상사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소대장이랑 병사가 쌍으로 미쳐서 사고를 쳤다고 하고 넘어갈 겁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고, 악당은 말이 많은 법이잖아요."
"그래서 기자를..."
"기자 안 온다고요. 차라리 재판정에 서서 얘기하십시오. 그게 더 쉬운 방법입니다."
"나보고 자수하라는 얘기야? 나를 괴롭히고 정 이병을 때린 놈들이 그냥 놔두고?"

- 때마침 복도에 있던 TV에서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안경을 쓴 남자 앵커가 강 상사가 말한 것과 비슷한 내용을 얘기하는 중이었다. 박 소령의 표정이 무너지는 걸 본 강 상사는 껄껄 웃었다.

"너 같은 놈 때문에 군대에서 폭력이 없어지지 않고 이런 사고가 벌어지는 거야. 반성하는 대신 감추고 속이려고 하니까 말이야 잘해 보라고."
박 소령의 어깨를 손으로 토닥거린 강 상사는 서글프게 웃으며 복도를 걸어갔다. TV에서는 남자 앵커가 보고를 받은 대통령이 강도 높은 조사를 지시했으며, 국방부 장관이 사표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었다.

<사라진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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