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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경] 진령군, 망국의 요화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6. 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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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임나경
출판 : 밥북
출간 : 17.10.10


       

 

특정 시기에 진령군 관련 도서가 집중적으로 출간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 주제가 유행을 타는 경우도 드물지 않으니, 일단은 궁금함만 가지고 찾아 읽어보았다.

 

음... 안타깝지만 진령군 자체보다는, 무속정치와 연결 짓고자 하는 목적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조선을 홀린 무당 진령군>보다는 <진령군, 망국의 요화> 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전자는 -분류 자체가 소설이 아니긴 하지만- 근현대사에 진령군 한 꼬집을 흩뿌렸다면, 후자는 그래도 진령군에 대한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다. 또 사라져가는 고어나 당대의 표현을 적극 사용하려 애쓴 것이 보인다. 그 때문에 문장이 조금 깔끔하지 못한 점은 단점이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가산점을 주고 싶다. 

 

기획 소설을 곧바로 써낼 수 있는 -그러면서도 작품성이나 대중성을 챙길 수 있는- 작가는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대부분의 기획 소설이 앤솔러지 형태로 출간되는 건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마감 기한까지 적절한 분량의 매력적인 작품을 쓴다는 것이 무척 어렵기 때문에. 

 

그렇다면 미리 써둔 작품 중 기획에 맞게 약간의 손을 보아 발표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그러려면 평소에 계속해서 썼어야 한다. 

결국 성실함과 꾸준함으로 기회를... 어라. 왜 이야기가 이렇게 흐르고 있을까.

 

이 작품만 읽었다면 다소 아쉽게 느꼈을 것 같은데, 마침 비슷한 시기에 실존 인물과 사건을 바탕으로 한 <체공녀 강주룡>, <카카듀> 등도 읽게 되어 '팩션'이라는 큰 흐름으로 감상했다. 덕분에 의도적이거나 작위적인 부분도 크게 거슬리지 않고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추천하기는 어렵겠다.  

 


   

 

 

- 정수리에 꽂힌 사나운 땡볕에 가무러친 이들은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살점을 뜯어먹을 년."
치성을 드리는 이들은 모조리 한 여인만을 맹수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홍천륙과 전모를 걸친 그녀는 불 속에서 날갯짓하는 모시나비처럼 훨훨 날았다. 모두들 그 여인을 죽일 듯이 쳐다보았다. 무아지경에 빠진 그녀의 춤사위는 오랜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는지라 간동하고도 거쿨져 보였다. 저승과 이승을 이어준다는 이 여자의 몸짓은 희한하게도 신묘하기보다 느껍게 노래하며 날아오르는 홍새처럼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 "조용히 해요. 며칠 동안 곡기는 입에도 대지 못했으면서 잘못 하단 여기서 쫓겨나다 못해 죽을 수 있으니 그 입조심하시오."
무녀에게 저주를 퍼붓는 서방을 팔꿈치로 툭툭 치는 아낙네는 한겨울 나뭇가지처럼 파리했다. 지아비를 채근하는 그녀뿐만 아니라 치성을 올리는 모든 이가 오달진 눈빛으로 감시하는 한 사내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멋들어진 관복을 입고 거드름을 피우는 사내는 사력을 다해 치성을 올리는 이들에게 채근하듯 소리쳤다.
"이런, 이런... 이래서야 세자저하의 병환이 빨리 나을 수 있겠는가? 잿밥에만 다들 눈이 머니 용왕신께서 노하시겠구나. 어허!" 
땡볕보다 더 모지락스러운 불호령에 사람들은 구새 먹은 나무가 쓰러지듯 온몸을 그리며 손바닥을 비벼댔다. 그제야 사내는 아주 만족스럽게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호랑이 옆에 붙어사는 여우, 이유인, 계면떡 한 덩어리 얻어먹겠다고 ... 

- 스스로 한심하여 고개를 돌렸다. 등잔불이 만들어낸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죽을힘을 다해 는적거렸다.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살기 위한 가년스럽고도 애달픈 몸부림이었다.

- 관왕묘 화랭이 길생. 나를 부를 때 모두들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이곳 한성에서만 그리 부를 뿐이다. 반년 전부터 고향에서 불렸던 다정한 그 이름은 떠올려서도 안 되었고 그리워해서도 안 되었다. 한성에 발을 디디던 그 순간부터 나는 화랭이 길생이었다.

- 그러고 보니 한성에 올라온 지 오늘로 딱 일 년이 되었다. 지난 초여름부터 겨울까지 난 왕비의 생질이자 민씨 일파의 수장인 민영준 대감의 사저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이 북묘의 음충맞은 전내(관운상제를 섬기는 무녀)를 위한 화랭이로 다시 태어났다. 신당 근처도 안 가본 나는 마치 허주굿을 기다리는 애동 기자처럼 되기 위해 한성에 있다는 무당집들을 죄다 들락거렸다. 
입춘을 앞두고 나를 관왕묘로 보내기 전 민 대감은 신신당부했다.
"힘들고 역겨워도 절대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되느니라. 네 반반한 낯색에 그 늙은 무당년이 넘어가 간이며 쓸개며 다 내놓을 때까지 들키면 안 된단 말이다. 알겠느냐? 명심하거라. 그 년은 사람이 아니라 백 년 묵은 구미호다. 허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번 일을 잘한다면 내 너에게 많은 재물뿐만 아니라 벼슬까지 내릴 것이다. 부귀영화만 생각하며 그 년의 마음을 흘려 놓거라." 

- "전 족보도 팔아야 할 파락호일 뿐입니다. 제 낯색을 사서 뭘 하시려구요? 설마 하니 대감의 자리라도 내어주실 요량입니까?"
술잔을 들던 민영준이 멈칫했다. 아주 찰나였으나 그 두 눈은 맹수의 살기로 가득했다. 미소로 덮고 또 덮어도 감추어지지 않는 차갑고도 포악한 천성, 그 날 것 같은 심성이 그대로 눈빛에 드러났다. 
"내어준다면 하겠는가?"
뜬금없는 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조선 최고 권세를 누리는 민씨의 족속이 제 자리까지 내어준다니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 되는 말이었으나 구미가 당기는 유혹이었다. 
"내어준다면 하겠냔 말이다. 시키는 일을 무사히 마무리한다면 내 너를 당상관 자리에 올려줄 것이다."
"농이 지나치십니다. 당상관이라니요? 어차피 조정의 요직은 대감의 친인척들께서 다 해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민영준은 품에서 검은 엽낭을 꺼냈다. 그가 걸친 도포만큼 좋은 청포로 만들어 은색 실로 화려한 수가 놓인 엽낭이었다.

"아버지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고 들었네. 이걸로 비석이라도 세워드리게나. 그래도 양반의 자손인데 체면치레는 해야지. 안 그런가?" 
눈앞이 흐려졌다. 떨리는 손으로 그가 던진 엽낭을 들고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그토록 원하던 것을 손에 쥔 환희, 재물 앞에 초라해지는 비참함, 이 잘난 위인 앞에서 느끼는 굴욕감 모든 마음이 뒤엉켜 나를 꼼짝도 못 하게 만들고 있었다.

 

- 민영준은 곁으로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잔잔한 목소리로 내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다.
"진령군 이성녀. 그 년을 자네 손아귀에 넣고 주물러주게. 그러면 되네. 그러면 되는 것이야. 나라면 부귀영화로 가는 이 쉬운 길을 피하지 않겠네." 


- 땀으로 흥건히 젖은 내 몸을 살뜰히 어루만진 무녀는 단죽에 불을 붙였다. 어둑시근하고 답답한 방 안을 헤집고 다니는 남초 연기가 그 어느 때보다 쓰디썼다.
"길생아, 참으로 좋지 않으냐? 더 바랄 것이 뭐가 있더냐? 갈수록 곳간에 재물이 쌓이고 이렇게 향기로운 술을 즐기며 너와 누워있으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구나. 참으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단물난 저고리마냥 몸 구석구석이 헤어지고 닳아 없어지고 있었지만 넌더리가 나면 날수록 더 오기가 생겼다. 그러나 어쩌면 죽을 때까지 이 망할 곳에 누워 저 늙은 요무의 먹잇감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위에 선 것처럼 두려움이 사정없이 밀려왔다. 

- 그렇게 길고도 짧은 여름밤은 정처 없이 흐르고 흘러갔다. 수많은 죄 없는 생명을 먹어치운 그 야멸찬 한여름의 야제와 생각도 하기 싫은 여름밤은 아직도 내 마음을 후벼 파며 괴롭힌다. 북묘의 전내와 함께 한 수없는 열락의 순간들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으나 이상하게도 그 밤은 어제처럼 또렷이 떠오른다. 

-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까딱 하단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을 터. 어찌 그런 당찬 결심을 하신 겝니까? 그래서 마마께서 나오시던가요?"

"그분께서 어떤 분이시더냐? 한 시진이 다 되어가도록 나를 보지 않으셨지. 더군다나 나를 막는 병사들은 내 입에 재갈을 물리기까지 하더구나. 더운 여름에 뙤약볕 아래 머리가 빙빙 돌았지만 이대로 물러나지는 않겠다고 버텼다. 조반까지 거르고 새벽부터 달려온 터라 목구멍에서 단내가 훅훅 올라오더구나. 그저 이 악물고 땅만 쳐다보았어. 어찌나 서럽고 분한지 눈물이 다 나오려고 하더구나. 이제 이러다 죽든지 아니면 이 촌구석에서 천대받는 당골년으로 죽게 되나 보다고 포기하려는 순간 문이 열리더구나."

"마마께서 부르신 겝니까?"

무녀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인의 돈바르고 강퍅한 심정이 못마땅하나 그 끈기와 인내에 늘 감탄하는 나였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기 위해 목숨까지 건 것을 보니 여태껏 저지른 구지레한 악행들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연유를 알 것 같았다. 
 
" ... 걸겠냐고 물으시더구나? 순간 오금이 저렸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포기하고 줄행랑을 칠 수 없었다. 다라지게 오십일 후에는 신흥동이 아니라 궁에 계실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지. 만약 내 말이 틀리면 거침없이 내 목을 베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야, 정말 대단하십니다. 오십일 동안 초조하고 겁이 나셨겠습니다."

"나도 사람일진대 당연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이미 목숨을 걸고 시작한 일 오십 일 살고 죽으나 진창에 오십 년을 살고 죽으나 매한가지라고 생각했다. 오십 일 후에 마마께서는 청의 도움으로 환궁하시게 되었고 매일 찾아와 마마를 위로해 드린 나의 노고를 잊지 않으시고 같이 한성으로 데리고 오셨지." 
"와, 그 판수한테 복채 두둑이 주셔야겠습니다. 그자 덕에 우리 어머니께서 진령군 여대감이 되신 것이 아닙니까? 하면 충주의 백운암도 그 노고에 상찬하고자 지으신 절입니까?"
"그렇지. 내 말이 들어맞고 난 뒤에는 마마께서는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으시더구나. 갑신년 난리가 나서 북묘에 몸을 숨기신 이후에는 더 각별하셨고. 사실 그 절이야 내가 꿈에서 철불을 만나 계시를 받았다고 했지만 그런 일이 있을 리 만무하지. 그 절에 보내주시는 전답과 노비는 내가 한양에서 살기 힘들 때 처분할 숨겨진 재산이나 마찬가지니라. 계속 이야기했더니 목이 타는구나. 한 잔 따르거라."
술잔을 들이켠 여인은 개운한 듯 큰 날숨을 내쉬더니 단삼을 벗어던지고 단고만 걸친 채 몸을 뉘었다. 노곤한 듯 이내 잠이 드는 그녀를 보며 나는 속이 타 술 주전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 "연모하는 이와 맺어지지 못하고 팔려가듯 늙고 고약한 이와 함께 살아야 하는 그 고통을 겪은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그게 무슨...?"
잠시 무녀는 팔과 어깨에 물을 끼얹으며 말이 없었다. 청아하고도 개운한 밤바람이 불자 조금 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잡다한 번뇌들이 마음속에서 하나둘씩 사라졌다. 고개를 들어 천상바라기처럼 한밤의 야천을 올려다보았다. 힘들었던 하루를 위로라도 하듯 남색 비단에 수없이 박힌 보석들이 반짝거리며 웃고 있었다. 연한 번루빛으로 반짝이는 백색 조각달 또한 천진하게 나를 구경하듯 내려다보았다. 

 

- "지난번에 얘기했었지? 귀하신 도련님을 연모하여 신역을 치른 일을 말이다. 자식을 위해 몸을 던지는 어미의 심성은 갸륵하기도 하나 반대로 그악스럽게 모질기도 하다. 종놈들을 보내어 나와 식솔들을 한겨울 눈밭에 내동댕이친 것도 모자라 또 그 댁 마님은 그 도령과 만날 것이 두려웠든지, 아니면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은 내가 노여웠든지, 그 고을 당골이었던 이모를 요망스런 악귀로 몰아대었다. 비싼 푸닥거리를 하고도 일부러 자신의 고명딸이 더욱 병이 덧나도록 하는 것도 모자라 밤마다 마을의 사내들을 신당에 꼬여내어 밤을 보내고 우물에 양잿물을 붓는 것을 보았다는 소문이 나도록 했지. 처음에는 사람들이 귀한 반가의 자제를 언감생심 마음에 품은 노여움이라 생각했지만 해가 바뀌어 봄이 되었건만 더욱 희한한 풍문이 왜자하고 거기다 역병까지 돌기 시작하니 이모에게 모든 원망을 퍼붓기 시작하더구나. 참으로 짐승보다 더 무섭고 잔인한 것이 사람이라고 하지 않더냐? 사람들은 관아에 고해 이모를 당장 옥방에 가두고 매번 매질을 하며 죄를 낱낱이 고하라고 몰아세웠어. 딸을 구할 생각에 할머니께서는 집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사나운 종놈들에게 얻어맞으면서도 머리를 처박고 빌어대셨지. 그러나 그 어린 나이에 무슨 분기가 있었던지 끝까지 그 진사댁 마님께 머리를 수그리고 싶지 않았다. 산송장이 다 된 딸을 보자 그 가련한 노인네께서는 결국 진사댁 마님께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사정을 하며 빌고 또 비셨지. 할머니를 막고 싶었지만 차마 붙들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구렁텅이로 처박은 이 모든 것을 더 나쁘게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지. 그 댁 마님은 넉넉히 돈을 줄 터이니 당장 나를 일흔이 다 되어가는 저자의 장사치에게 둘째 첩으로 보내고 이 고을을 떠나라고 했지. 할머니는 그리하겠다고 하셨지만 나는 차라리 죽겠다고 했다. 원하지 않은 사내와 가시버시 인연을 맺으며 산다는 것은 죽기보다도 더 싫은 일이니까. 죽으려고 양잿물을 마셔보기도 하고 물에 뛰어들기도 했지만 참으로 진사댁 마님은 모질고도 모진 위인인지라 사람을 붙여 스스로 숨통을 끊는 것도 쉽지 않도록 만들더구나." 
무녀가 자기 어깨를 주무르는 내 손을 갑자기 움켜쥐었다. 따듯한 물속에 잠겼던 손은 이상하게도 하나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늘 그러하듯 그녀의 손은 뱀처럼 차가웠다. 손등에서부터 전해오는 기분 나쁜 냉기가 점점 퍼지더니 이내 심장을 비집고 들어왔다.
"참으로 가련하지 않더냐? 차라리 그 고을에서 우리를 쫓아냈더라면 한동안 가슴앓이할지언정 금세 다른 사내를 만나 그 헛된 연정일랑 잊어버렸을 게다. 하나 그 진사댁 마님은 검질기고도 모진 이였다. 행여나 아들과 내가 미망을 품고 다시 연을 이을까 저어 되었던지 그리 모질게 끊어 ... "

 

- 우두망찰 넋이 나가 앉아있는 그녀를 보며 나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반절은 넘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연비 옆에 다가앉으며 아직도 떨고 있는 좁은 어깨를 끌어당겨 감싸 안았다.
"이 오라비보고 무슨 욕을 다해도 좋다. 어찌 네 고달픈 마음을 모른단 말이더냐? 내 어쩔 수 없이 그 늙어빠진 망할 요무와 잠자리 시중을 들었다만 항시 마음은 네게 가 있었느니라. 설마 하니 내가 좋아서 그리겠느냐?"
"애먼 짓 하지 마시오 나를 업수이 보고 이런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그럴 리가 있느냐? 천지신명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허튼소리는 하지 않는다. 다시는 관왕묘에 돌아갈 일도 없고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가끔 저자에서 이렇게 너를 보며 마음을 달래련다."


- "한데, 지금은 어디에 계시오? 그리 빈손으로 쫓겨나 어디 가서 이리 멀끔하게 차려입고 양반 행세 하시는 게요?"
뾰로통한 연비의 목소리에는 독기가 빠져있었다. 늘 뿌다구니처럼 삐죽거리던 그녀가 제법 음전한 여인네처럼 이리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하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순한 숫보기였다. 이제 한 보만 더 걸으면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있지만 이 한 보를 걷기가 매우 힘들었다. 여인의 마음을 미혹하는 것이 스스로 마음을 열게 하는 것보다 백배는 쉬운 일이다. 미끈한 사내의 낯색을 보고 잠시 마음이 동하기는 하나 모든 여인네가 그 사내를 위해 다 희생하지는 않는다. 내가 아는 연비라면 필시 지금도 이리 재고 저리 재며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 마지막 한 보를 위한 숨 고르기로 나는 연비의 손을 잡고 다감하게 속삭였다.
"난 원래 반가의 자제다. 내가 그 늙은 요무가 좋아서 몸을 섞었겠느냐? 밤 시중을 들 때마다 내가 왜 대취했겠느냐? 제정신으로 그 힘든 세월을 버틸 수 있었겠느냐? 매일 밤 너를 안고 싶은 마음에 미칠 것 같았지만 행여나 너에게 위해가 갈까 우려되어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이제는 참지 않으련다. 연비가 나의 내자가 되어주겠느냐? 고향에서는 쫓겨났지만 난 엄연히 양반의 핏줄을 이어받은 몸이니 내 내자가 되어 우리를 모르는 곳에서 홍지게 살자꾸나." 
"반가의 자제인데 허줏굿을 받아들였다는 거요?"
"어찌하겠느냐? 그러지 않으면 홀로 계신 어머니께서 다치실 수도 있다는데."

쌀쌀맞던 연비의 눈에는 촉촉하게 이슬이 맺혔다. 아무리 강퍅한 여인네라도 지긋하고도 깊은 모성은 품고 있기 마련일 터,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만큼 강한 비책은 없었다. 맑은 하늘에 몰아치는 소나기 같은 품성을 지닌 이 계집아이가 어느새 당장 혼례라도 올릴 수 있을 만큼 소곳한 얼굴로 수줍게 웃고 있었다.
"내가 그리 좋소? 각시로 받아들일 만큼?"
"더 어찌해야 믿겠느냐? 못 믿겠다면 같이 북묘로 가서 너를 데리고 나오마."
"아니오, 됐소. 충분하니 그러지 마시오. 그 마음이면 되었소. 오늘은 청포전과 교자전에 들러야 하니 금방 돌아가지 않아도 되오. 매일 나오는 건 힘드니 열흘 뒤에 오늘 만난 곳에서 봅시다."
마지막 한 보를 위한 숨 고르기가 성공이었다. 나는 연정에 들뜬 사내의 설레는 낯색으로 연비의 그 초강초강한 얼굴을 부여잡고 입을 맞추었다.
 
- "내가 그놈을 치워주랴?"
움막 안으로 단정하게 갖추어 입은 한 사내가 쑥 들어와 날 덮친 이의 주검을 옆으로 제쳐 나를 일으켰다. 온화한 얼굴의 그 자는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던 이였다.
"홍 대감의 사람이다. 아까 주막까지 따라갔었는데 나를 보지 못했나 보구나. 끝까지 이놈들이 어찌하나 지켜볼 요량으로 돕지 않고 있었는데 역시나 너를 해하려고 그리 끌고 갔나 보구나." 
"홍대감께서 보내신 분이십니까? 전 한 번도 봐온 적이 없습니다."
"네놈이 북묘로 돌아간 뒤 계속 네 주변을 살피고 있었느니라. 행여나 네가 다칠까 우려되어 대감께서 명을 내리셨지. 몰랐겠으나 닷새 전부터 수상한 자들이 북묘와 시전에서 너를 지켜보고 있었다. 자, 어서 전방으로 돌아가거라.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 것이니." 
"곧 제 어머니를 해할 것입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걱정 말거라. 대감께서 네 어머니는 이미 지난여름부터 다른 곳에 모셨느니라. 아무도 찾지 못할 것이다."

사내의 말에 얼른 움막을 뛰쳐나와 정신없이 전방으로 향했다.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던 눈은 이내 굵어져 함박눈이 되어 세상을 하얗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두 번이나 살아난 이 순간 걷는 눈길은 마치 이 세상이 아닌 선계의 꽃길처럼 여겨졌다.
홍계훈은 참으로 의로운 이였다. 이미 총기를 잃고 무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왕비에게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간언을 할 정도로 그는 성정이 바른 이였다. 그의 사려 깊은 마음에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 ... 

- 연전에서 들은 연비의 말을 하루 종일 곱씹고 곱씹었다. 이제 내가 죽여할 이가 누구인지는 확실하게 정해졌다. 나에게 한 모든 것들은 용서할 수 있었지만 죄 없는 어머니를 그리 무참히 돌아가시게 한 것은 내가 죽더라도 용서할 수 없었다. 
홍 대감은 끝까지 참으라고 했지만 난 그리할 수가 없었다. 하루에도 열두 번 장사를 뒤로 하고 그 똥내와 짠내가 뒤엉킨 시전을 휘젓고 돌아다녔지만 민영준은 코빼기도 보이지도 않았다. 무녀에게 연비의 말을 전하려고 해도 그것은 나 스스로 정체를 탄로 나게 하는 일이었기에 홍대감의 일까지 그르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려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놈을 죽여야 했다. 꿈을 꿀 때마다 단도를 들고 그 원수의 멱을 따고 있었다. 붉은 피를 쏟으며 땅 위로 나부라지는 그놈을 바라보며 난 온몸에 피를 묻히고 웃고 있는 꿈이었다. 꿈에서 깰 때마다 그것이 현실이 아님을 애통해하며 나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 괴로워하던 나를 보다 못한 홍 대감은 내게 무녀와 함께 민영준 또한 다시 조정에 돌아오는 것을 막자고 했다. 허나 이미 민 대감을 석방하자는 의견이 중신들 사이에 분분한지라 그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 왕비가 도륙당한 지 이틀째, 홍 대감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수문장이자 왕비의 호위무사인 그가 어떠한 운명을 맞이했는지는 그 어떤 풍문으로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기에 몇 번이나 찾아갔다. 그러나 홍대감 집 사람들은 궁에 여러 번 연통을 넣었으나 소식이 없다고만 말하며 발을 동동거리고만 있었다. 


- 내 우려가 사실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이틀 동안 그의 무사안위를 빌었다. 다른 이는 몰라도 그만은 살아 돌아와 굳건히 내 앞에 듬직한 그 풍채를 보여주기를 바랐건만 현실은 그악스럽고도 모질었다. 그 참변이 일어난 지 삼 일째, 나는 초라한 수레에 실려 볏짚으로 덮인 온몸에 총알이 박혀 구멍이 나고 사지가 여기저기 잘려나간 그의 주검을 보고 오열해야 했다. 그리 허망하게 가면 안 되는 인물이었기에 그 안타까운 죽음이 더욱 노엽고도 슬펐다.  

- 그 초여름 날 밤, 서낭목 아래에서 목 놓아 슬피 울던 홍 대감이 떠오른다. 아마 이 참담한 최후를 직감하고 그리 서럽게 울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목숨처럼 최선을 다해 모셨던 주인을 끝까지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리 울었던 것일까? 내가 아는 홍 대감은 스스로를 위해 울지 않았다. 그것은 한 번도 그는 사사로이 일신의 편안함을 위해 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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