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미쓰다 신조] 사상학 탐정 1 - 13의 저주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6. 26. 00:00

본문

반응형

저자 : 미쓰다 신조 / 이연승
출판 : 레드박스
출간 : 15.01.19


       

 

  

미쓰다 신조의 작품들은 교고쿠 나츠히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에 준할 만큼 발췌 정리가 까다롭다. 한자나 발음을 이용한 언어유희도 많고, 각 지역의 독특한 풍습이나 문화를 나타내는 고유명사도 많기 때문인데. 

 

해서 4-5월에 읽은 미쓰다 신조의 책조차 아직 정리하지 못했다...

(사실 이미 그 이전에 <경여년>과 <서녀명란전>이 쌓여 있다)

 

이러다간 올해가 다 가도록 손을 못 댈 것 같아 일단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사상학 탐정>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미쓰다 신조의 세계관 또한 박해로의 '섭주 유니버스'처럼 서로 얽혀있다. 

하지만 나름대로 구분도 되어 있는데, 크게 보면 <도조 겐야 시리즈>와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집 시리즈>, 미쓰다 신조라는 동명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작가 시리즈>, 그리고 이 <사상학 탐정 시리즈>와 기타가 있다. 

 

발표된 시기와 작품 속 시기, 거기에 더해 한국에 정식 번역 출간된 시기가 모두 제각각이라 그냥 읽을 때는 연결 지점들을 찾기가 어려운데-

이번에는 얼마 전 읽었던 <걷는 망자>와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이 이 <사상학 탐정 1 - 13의 저주>와 연결된다는 걸 발견했다. 

 

사상학 탐정 본인이자 시리즈의 주인공인 '쓰루야 슌이치로'는 '쓰루야 슌사쿠'와 '쓰루야 아이'의 손자다.

그리고 '쓰루야 슌사쿠'는 <걷는 망자>에서 덴큐 마히토가 밝힌 자신의 본명이며, 같은 작품에 등장하는 '도쇼 아이' 또한 후일담처럼 '아이젠 님'이라고 불리게 된다고 나와있다. 이 두 사람의 손자가 일종의 오컬트 탐정으로 활약하는 시리즈가 바로 <사상학 탐정 시리즈>.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교고쿠 나쓰히토도 매니악한 인기를 누리는 정도이니- 미쓰다 신조가 한국에서 열풍을 일으키기는 쉽지 않은 걸까. 시리즈의 정발을 기대해 보는 건 너무 사치스러운 일인 걸까. 그래도 <사상학 탐정 시리즈>는 사상(死相)을 본다는 설정만 제외하면 추리 소설에 가까운, 시리즈 중에서는 가장 '이성적'이고 '캐주얼'한 입문용 시리즈인데. 

 

다시 돌아와서, 가가구시 마을에서 있었던 '나가보즈 이야기'는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의 가가구시 촌과 사기리의 이야기를 지칭한다. '나가보즈'를 '허수아비'로 번역했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던 모양. 해당 마을의 일을 할머니 아이젠 님도 도조 겐야도 겪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같은 마을에서 다른 시간대를 경험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사족으로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의 사기리 역시 같은 마을의 '사기리'이긴 하지만 시간대가 다르다. 그에 더해 도조 겐야도 <미즈치>에서는 아직 <염매>의 가가구시 촌에 방문하기 전이라 '사기리'라는 이름에 반응하지 않는다.)

 

해서 <괴민연 시리즈>는 사실 <사상학 탐정 시리즈>의 스핀오프이자 <도조 겐야 시리즈>와도 연결 짓는 고리 같은 작품이었다!... 는 소소한 발견을 기록해 둔다. 

 

올해 일독/재독을 가리지 않고 현재까지 읽은 건, 다음과 같다.

 

<사상학 탐정 시리즈> 

<도조 겐야 시리즈>

<작가 시리즈>

<노조키메>

구판 <괴담의 테이프>, 개정판 <죽은 자의 녹취록>

<집 시리즈> 중 구판 <마가>, 개정판 <괴담의 숲>

 

블로그를 접어 두었을 때 읽은 책들은 리뷰가 없어서, 이참에 아예 정주행 하기로 하고 읽고 있는데 몰아서 읽으니 오싹함이 두 배다. 아직 읽을 작품들이 남은 상태에서 맞는 여름이라니, 딱 좋다고 해야 할지 공교롭다고 해야 할지. 

(<죽은 자의 녹취록>은 꼭 비 오는 날 읽도록 하자...)

 

이 이야기는 동시에- 

전부 다 밀려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쪽도 만만치 않게 무섭다...)

 

그래도 미쓰다 신조의 미번역 작품의 정발에 대해 노래에 노래를 불러온 결과(?), 비채에서 <흉조처럼 꺼리는 것>과 <기명처럼 바치는 것>을 출간 예정작으로 리스트업 해주었으니 독자로서는 마땅히(?) 정주행 할 밖에. 

 

내가 남은 미쓰다 신조의 작품들을 다 읽기 전- 은 너무 이를 것 같고, 리뷰를 다 쓰기 전에는 새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비채 감사해요. 화이팅.

(<유녀처럼 원망하는 것>과 <사상학 탐정 시리즈>도 내주시면... 안 되시지 않는다면... 부디...) 

 

 


   

 

- 자신을 나이토 사야카라고 소개한 그 여자는 스무 살이라는 실제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보였다. 중학생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앳되고 귀엽다. 
귀여운 것은 얼굴과 몸매만이 아니었다. 말투와 몸짓 등도 하나같이 사랑스러웠다. 지금 당장에라도 모델이나 아이돌로 데뷔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적어도 쓰루야 슌이치로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인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슌이치로는 탁상 달력에 적힌 '4월 10일'이라는 오늘 날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책상 앞 의자에 앉은 여자에게 문을 가리키며 귀찮은 듯이 말했다.
사무소 문 상단에 끼워진 젖빛 유리에는 '쓰루야 슌이치로 탐정 사무소'라는 글자가 -이쪽에서는 반전돼 보이지만-고딕체로 적혀 있다.

사무실에는 접객용 소파도 있지만 의뢰인에게 권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니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한 손에 들고 있던 버버리 트렌치코트를 받아 옷걸이에 걸어 주는 배려를 발휘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아직 정리하지 않은 이삿짐 상자들을 침실로 쓰는 옆방에 처박아 두긴 했다. 일단은 탐정 사무소다운 모양새를 갖출 필요가 있다고 슌이치로 역시 느끼고 있는 셈이다.

- 초면에 인사를 건네자마자 돌아가 달라는 말을 들은 여자는 놀라움을 뛰어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무것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
"그러니까 당신은 '이곳'에 올 필요가 없었다. 그런 뜻입니다."


- 슌이치로는 도쿄 진보초의 낡은 빌딩에 사무소를 열기 전부터 틈만 나면 할머니에게 의뢰인 상대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무뚝뚝한 성격이 그리 쉽게 바뀔 리 없다. 
그런 그를 보며 할머니는 "어릴 때는 착하고 좋은 아이였는데... 이게 다 그 힘 탓이다."라며 요란하게 한숨지었지만, 정작 슌이치로는 그런 자신의 성격 일부를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고 생각한다.

 

- 물론 당사자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정말 은혜도 모르는 아이로구나. 지금껏 음으로 양으로 애지중지 키웠건만. 그런 할미한테 잘도 악담을 늘어놓다니, 정말 무섭다. 알겠느냐? 그건 네가..." 하고 이야기를 시작해 슌이치로가 몇 살 때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 일로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으며, 지금껏 얼마나 자신을 희생하며 손자를 돌봐 왔는지를 장황하게 늘어놓을 것이므로 결코 입 밖에 내지 않는다.

- 게다가 할머니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타인에게 나타난 사상이 보이는 특수한 능력 -할아버지는 그것을 '사시'라고 이름 붙였다- 을 지닌 아이가 과연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까. 조금만 생각해 봐도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고 건전하게 자랄 리는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공허감에 시달리다 자살할 수도 있고, 반대로 다른 이들을 학살하는 살인귀가 됐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다...
슌이치로는 그게 다 할아버지, 할머니 덕이라며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다만 두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그런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다. 또 이제 와서 이런 성격을 고치기도 어렵다.

- 단어 하나로 쉽게 말하지만, 사상은 사람마다 보이는 방식이 달라 당사자를 직접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얼굴에 어렴풋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체 어딘가에 구체적인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당연히 전자보다 후자 쪽이 미래의 사인(死因)이 될 무언가를 밝혀내기 쉽다. 눈에 보이는 광경에서 다양한 정보를 얻은 뒤 그중에서 죽음의 원인이 될 법한 것들이 뭔지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인을 바로 알아낼 수 있을 만큼 증상이 뚜렷한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그대로 해석하면 완전히 빗나갈 위험도 있다. 

- 슌이치로가 이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유치원생 시절 여름, 간사이의 외가에 갔을 때 어떤 일을 겪고 나서부터이다.
앞뒤 사정은 알지 못한다. 어느 나른한 여름날 오후, 슌이치로는 안라 시 남쪽에 있는 안라 마을을 홀로 걷고 있었다. 유독 골목이 많은 오래된 사찰 마을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좁은 돌계단길을 더듬어 갔다.
당시를 돌이켜 보면 돌아도 돌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그 미로 같은 좁은 길에 완전히 빠져들어 도중에 멈춰 설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또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격자창, 무시코마도(바깥쪽 나무에 흙을 덮은 격자창-옮긴이), 평상 등이 남아 있는 안라 마을의 집들에도 꽤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정신없이 걷고 또 걸었다. 

- 약간 두렵기도 했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기 망설여지는, 자신이 점차 이계(異界)에 발을 들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집들이 한 데 모여 있는, 도쿄에서는 본 적 없는 낯선 광경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식적인 이유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마을에 감돌았던 것도 사실이다.
마치 그곳만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것 같은...
이따금 그곳에서만 이계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낼 것 같은...
마을에 완전히 흘려 버리면 두 번 다시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 그런 감미로움과 경외심이 뒤섞인 산책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슌이치로는 문득 이상한 냄새를 맡고 무심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주위를 둘러봐도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거나 딱히 이상한 냄새가 날 만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길 양옆에는 현관 폭이 좁은 집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을 뿐이다.  

- 그는 허리를 구부린 채 격자 사이의 젖빛 유리에 혀를 문댔다. 한가운데에서 시작해 아래까지 혀를 미끄러뜨리더니 거기서부터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뭐, 뭐, 뭐지, 이 사람은?
누런색 볼이나 시체 같은 보랏빛 입술과는 대조적으로 칙칙할 정도로 새빨간 혓바닥이 이리저리 꿈틀거렸다. 마치 별개의 생명체인 것마냥 츄르릅츄르릅, 할짝할짝, 온몸의 털이 주뼛 서는 소리를 내 가며 유리창에 더러운 회색 침을 묻혔다.
슌이치로는 너무도 기이한 광경에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아니야아.... 여어기가 아니야아...
지금껏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오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슌이치로는 눈앞에 있는 기괴한 양복남이 인간이 아님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무엇일까. 그건 알 수 없었다. 또한 자신이 왜 이런 것과 대치하고 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절대로 상대해선 안 될 존재라는 것만은 본능이 알려줬다. 

- 서서히 자신을 돌아보는 양복남을 목격한 순간, 오싹한 떨림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동시에 슌이치로는 말을 건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그때까지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남자의 두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텅 빈 구멍이라기보다 암흑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대신, 그 암흑의 두 눈에 담기는 생명체는 모두 그것처럼 속이 텅 비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상대의 존재 자체를 빨아들일 것만 같은, 그런 불길함이 가득 차 있었다. 
실제로 두 암흑을 바라보는 동안, 끝을 알 수 없는 검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동안, 자신의 몸에서 뭔가 중요한 것이 쭉쭉 빨려 나가는 듯한 너무도 섬뜩한 기분에 슌이치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 다행히 양복남의 두 눈은 실제로도 시력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상대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채고 그 무시무시한 암흑으로 응시한다면 슌이치로는 끝장날 것이다.
보면 안 돼. 절대. 눈을 다른 데로 돌리고 도망쳐야 해.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슌이치로의 두 눈은 이미 짙고 깊은 두 암흑을 집어삼킬 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몸 안에서 중요한 뭔가가 쭉쭉 빠져나가려 했다. 뭔가가 쑤욱-하고 몸에서 빠져나가려 할 때마다 무수히 많은 작은 벌레들이 온몸을 훑고 다니는 듯한 불쾌감에 휩싸였다. 피부 위를 기어 다닌다기보다 표피 아래에서 우글거리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만으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차라리 빨리 나가줘. 당장 죽여 달라고. 이렇게 애원하고 싶었다. 
동시에 그것이 완전히 빠져나가는 순간을 떠올리자 어쩌면 아주 근사한 쾌감이 느껴지진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들기 시작했다. 한번 그런 생각에 휩싸이자 온몸을 훑고 다니는 무수한 벌레들의 불쾌한 꿈틀거림조차 감미로운 열락의 감촉 같았다. 

- 그때까지는 공포와 증오밖에 느껴지지 않았던 두 암흑 속으로 슌이치로가 막 빠져들려는 순간이었다.
거기 있었구나아....
양복남의 시선이 곧장 슌이치로를 향했다. 기쁜 듯이 히죽히죽 웃는다. 미소로 움푹 팬 볼의 피부가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처음부터 자글자글했던 그의 얼굴에 수없이 많은 주름이 잡혔다. 비로소 자신을 방해한 상대를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웃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한마디가 슌이치로를 구했다. 그가 말을 건 찰나 암흑의 두 눈에서 벗어나 완전히 눈과 눈이 마주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시선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왔다. 온몸에 여전히 기분 나쁜 근지러움이 남아 있었지만 곧장 뒤로 돌아 걷기 시작했다.

- "뭔가 이상야릇한 것을 목격한 적이 있느냐?"
슌이치로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에게 앞으로 무엇이든 이상한 것을 목격하면 곧장 그 자리를 피할 것,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함부로 말하지 말 것, 그리고 반드시 할머니에게 연락할 것을 약속받았다.
"그런데 왜 나는 보일까? 다른 사람한테는 안 보이는 거지?"

"핏줄 때문이겠지."
"..."
"너는 이 할미의 힘을 물려받은 게야."

 

- "겨울 방학이 되면 다시 오려무나. 엄마한테는 잘 이야기해 둘 테니."
"응. 알겠어."

"너는 자신의 능력을 정확하게 알고, 능숙하게 다루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어."
"공부하는 거야? 나, 초등학교 들어가려면 아직 멀었는데."
"이 할미가 학교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 걸 알려 주마."

- "그래서 나에 대해서도 그 변호사가?"
"아, 아뇨 할머... 그러니까 외할머니가 선생... 이 아니라 쓰루야 씨의 조모님을 예전부터 알고 계셔서..."
"우리 할매를?"
엉겁결에 '할매'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만큼 슌이치로는 깜짝 놀랐다.
"아, 서로 알고 지내거나 하는 건 아니고요. 쓰루야 아이 선생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할머니도 점을 보거든요. 그래서 아이젠 님의 대단한 능력에 대해서는 잘 알아요. 어머니와 저도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한테 쓰루야 아이 님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겁니까."


- 슌이치로의 할머니 아이는 흔히 말하는 무녀였다.
그녀의 특수한 능력을 떠받드는 이들은 오래전부터 상황에 따라 그녀를 '신령님', '살아 있는 신', '도사', '예언자', '영매'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늘 "나는 그저 평범한 무녀일 뿐"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특별히 밀교 계통의 가지기도(병, 재난, 부정 등을 면하고자 부처에게 올리는 기도-옮긴이) 같은 것을 하지도 않는데, '아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아이젠 님'이라는 호칭이 가장 널리 퍼졌다. 본인도 "나한테 아이젠 명왕님(애염명왕, 애욕을 지배하는 신-옮긴이) 같은 매력이 있나 보구나."라며 그 호칭을 아주 싫어하지는 않는다.

- 할머니가 가와구치 마쓰타로의 <아이젠 가쓰라>의 애독자여서 그런 식으로 불리게 됐다는 소문도 있다. 슌이치로는 이쪽이 정답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할머니의 능력은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따르면 거의 인생 상담 같은 일이라고 한다. 상대가 원하면 불제도 해 주기는 하지만, 그 대부분은 '가짜' 의식이라는 놀라운 폭로를 슌이치로는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에게 자주 들어왔다.

 

- "왜 가짜로 그런 걸 해?"
"아무것도 씌지 않았는데 뭘 떨쳐 내겠느냐."

 

- 빙의 현상이라고 말하는 것 중에는 진짜도 있지만, 거짓말이나 단순한 억측, 정신병도 있다. 또한 그것들이 한데 뒤섞여 복합적인 형태로도 나타난다. 따라서 우선 그 실체를 알아내 각 증상에 맞는 '치료'를 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억측이라면 가짜 불제라도 상관없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가장 많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심각한 정신병은 의사를 찾아가 마땅한 진료를 받아야 한다.

- "옛말에 '빌어라, 먹어라.'라는 말이 있지."
'빌어라'란 기도하는 것, 즉 당신 같은 무녀에게 의지하는 것
이라고 할머니는 설명했다. 또 '먹어라'란 약을 복용하는 것, 한마디로 의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알겠느냐? 결국 둘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양쪽을 균형 있게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병은 마음으로부터'라는 말처럼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겨 그게 병으로 발전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다 보면 정말로 병에 걸려 버리고 마는 게 인간이야. 그럴 때는 최대한 빨리 이 할미 같은 사람을 찾아가 상담하는 편이 낫지. 만약 때를 맞추지 못해 정말로 병에 걸려 버리면 의사를 찾아야 하고." 
사고방식이 이런 인물이라, 외가는 늘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상담자와 환자로 붐볐다. 그러나 할머니의 말로는 그중 많은 수가 '병은 마음으로부터'인 사람들로, 그래서 가짜 불제가 필요했던 셈이다.
"그런 사람들한테는 이 할미 같은 사람도 도움이 되지. 덕분에 나는 다른 이들한테 도움을 주며 덕을 쌓고 있고, 감사한 일이야."

- 그렇게 어떤 상담자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할머니였지만, 질색하며 문전박대하는 부류도 있었다. 바로 경영자나 정치가 같은 사람들이었다. 물론 정말로 '빌어라'를 해야 할 때나 사람을 살리는 상담은 별개였다. 그러나 그런 부류는 대부분 사리사욕을 위해 할머니를 이용하려 들었다.  
 
- "저, 저는 어째야 할지 몰라서 그이 방에서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마침 쓰루야 슌사쿠 선생님의 <나가보즈 이야기>가 책상 위에 있어서..."

슌이치로는 속으로 '하필 그 책이.'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 나가보즈란 예로부터 소류고의 미카미 초 오쿠야마(옛 가가구시 마을)에 있는 구구 산이라는 저주받은 땅에 산다고 전해지는 괴물이다. 딸이 그것에 씌었다고 주장하는 여자가 할머니를 찾아온 적이 있다. 그 마을에도 사십여 년 전까지는 대대로 마을 무녀 역할을 해 온 집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집안이 무너지는 바람에 사방팔방으로 불제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다가 가까스로 할머니에게 다다랐다는 것이다. 
불제는 매우 고생스러웠지만 할머니는 훌륭하게 해냈다. 그러나 너무도 직설적인 '나가보즈 이야기'라는 제목의 소설을 할아버지가 집필해야 했다는 점에서 그때 그 딸에게 씌었던 것이 상당히 성가신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가 쓰는 괴기 소설은 단순한 창작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 안라 마을에 있는 외가에는, 현관에서 안쪽까지 좁고 길게 이어지는 마치야(주로 유래 깊은 상가에서 상인들이 생업과 거주를 같이하던 형태의 집-옮긴이) 구조임에도 그럭저럭 넓은 뒤뜰이 있다. 대밭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뜰 한구석에 무덤이 있는데, 불제로 떨쳐낸 것들을 봉인하는 장소로 쓰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모이고 쌓이고, 괴인 것들은 머지않아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할 위험이 있었다. 어느 순간 무덤의 봉인을 파괴해 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불제로 떨어져 나온 사악한 것들을 소재로 글을 썼다. 소설이라는 일종의 닫힌 세계에 그것을 봉인해 버리는 이중의 방어책을 취한 것이다. 

- "그럼 그 소설을 읽은 사람들한테 무서운 일이 일어나거나 하지 않아?"
어린 시절 그런 의문이 들어 물어보니, 별채 서재에서 집필 중이던 할아버지는 원고지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쓰는 작품에는 특별한 액막이가 돼 있단다."
그러나 할머니 말에 따르면 사정이 조금 달랐다.
"괴기 소설의 소재가 부족해지니까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참고 삼아 쓰기 시작한 것뿐이야. 그러다가 놀랍게도 그런 효과가 있다는 게 우연히 밝혀졌지. 이 할미도 정말로 깜짝 놀랐단다."
그때 시작된 두 사람의 '기묘한 연계'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집필된 작품 중에서도 상당히 질이 좋지 않은 불길한 것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 바로 사야카의 눈에 띄었다는 ...

- 슌이치로가 보는 죽음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불특정한 인물의 목숨을 앗아 가는 죽음이고, 또 하나는 특정한 인물에게 씌는 죽음이다. 전자는 재해나 사고 등으로, 후자는 살인이나 질병 등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전자는 그 장소에서 도망치면 살 가능성이 있다. 후자는 그 근원을 없애면 목숨을 건질 수도 있다. 
슌이치로가 제대로 대처만 한다면...
그러나 아직 어린 그에게 그런 대처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때문에 할머니는 손자를 '교육'하려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런 할머니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마도 아이젠님이라 불리는 자신의 어머니가 가진 크나큰 능력, 또한 그것을 격세유전으로 물려받은 아들의 특수 한 능력을 몹시 싫어했으리라. 어머니에게 맡기면 이 아이도 언젠가는 아이젠 님처럼 돼 버리고 만다... 그렇게 염려했음이 틀림없다.

- 그러나 어떤 식으로 죽음과 대처해야 하는지 몰랐던 슌이치로는 점차 문제를 일으키게 됐다. 이웃이나 학교에서 슌이치로를 두고 '저승사자', '귀신 들린 아이', '괴물'이라고 쑥덕이기까지 ...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물론 슌이치로라고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초등학생 시절이면 몰라도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점차 커 갈수록 과거를 조사하는 이런저런 수단도 알게 됐다. 그러나 그는 굳이 조사하려 들지 않았다. 두려웠다. 어둠 속에 파묻힌 과거에 대한, 미지의 무언가에 대한 감정 탓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조금 종류가 다른 공포였다.
절대 모르는 편이 낫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 분명 나는 미쳐 버릴 것이다.
그런 본능이 맹렬하게 꿈틀거렸다. 그만두라고 경고를 보냈다. 캐내려 들지 말라고 절규했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 수행을 거듭한들 아이젠 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슌이치로 역시 깨달았을 정도이다.
이렇게 두 사람의 능력은 확연히 달랐다. 그럼에도 슌이치로에게 사람들이 쇄도한 것을 보면 인간에게는 죽음에 무관심할 수 없는 깊은 업보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아무나 상대하게 한 것은 아니다. 손자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없다고 판단한 인물은 한사코 막았고, 그렇게 해서 잘 고쳐지지 않는 경우에도 혼자서 감당했다. 
비록 평범하지 않은 가정환경이었지만 자신은 늘 조부모의 그늘에서 성장해 왔다. 슌이치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 그러다가 죽음과 마주하는 요령 같은 것을 터득하자 스스로 '본다/보지 않는다'를 전환할 수 있게 됐다. 그때까지는 눈앞에 죽음이 있으면 싫어도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수준에서 스스로 '본다'라고 의식하지 않는 한 그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눈동자에 비치지 않는 상태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두 해가 지날 때까지, 즉 올봄 전까지 슌이치로는 간사이에서 조부모와 함께 생활했다. 두 사람은 슌이치로에게 대학 진학을 권했지만 손자가 고개를 젓자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당분간은 집안일을 도울게."
슌이치로의 말에 입이 험한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대체로 백수들이 그런 구실을 댄다지?"
"아냐. 은혜를 갚는다고나 할까."
"그런 건 네 일생을 바쳐도 갚지 못해."
"내가 일생을 바치기 전에 할머니의 일생이 먼저 끝나."
"이, 이, 이놈은... 대체 누구를 닮아서 이런 못된 말들만 늘어놓는지. 정말 걱정스럽구나."
물론 할머니를 닮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정말로 화를 낼 테니 슌이치로는 입을 걸어 잠갔다.
다만 굳이 '백수'라고까지 한 점에서 손자의 장래를 염려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진하게 느껴졌다. 어떤 직종을 택하든 사람을 전혀 믿지 못하는 손자에게는 직장 생활 자체가 매우 큰 고통일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젠 님의 자리를 물려줄 마음은 할머니에게 전혀 없었다.

- "여기서 수행하게 한 건 네가 자신의 능력을 제어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이 힘은 평생 따라오니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도록..."
"그건 너를 수행시키려고 한 소리였지. 자신의 힘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제어할 수 있게 되면 그걸로 충분하다."

- 사야카가 아키라와 처음 만난 곳은 신주쿠 가부키 초에 있는 룸살롱 '블루엔젤'이다. 사야카가 일하는 곳에 아키라가 손님으로 온 것이다.
가게에 들어와 처음 반년 동안 사야카는 벌이가 꽤 짭짤한 편이었다. 가게에서 내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신입'이라는 세일즈 포인트와, 실제로도 앳된 외모와 순진한 행동거지 덕에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가을 무렵부터는 먹히지 않게 됐다. 질려 버린 탓이었다.
이대로는 희망하는 수입을 얻을 수 없다. 처음 같은 수입을 원한다면 윤락업소로 옮길 수밖에 없다. 점장은 최근 그녀에게 넌지시 그런 뜻을 내비쳤다. 그렇게 궁지에 몰렸을 때 아키라가 친구와 함께 가게를 찾은 것이다. 

- 재작년 9월 초순, 오랜만에 휴가를 낸 아키라는 진보초고서점에서 평소 좋아하는 괴기 환상 문학과 탐정 소설 희귀본을 찾아다녔고, 밤에는 학창 시절 친구인 다마시로와 몇 년 만에 만나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신주쿠 가부키초를 꿰고 있는 다마시로가 "예쁜 여자가 있는 가게를 안다"라며 그를 이끈 곳이 바로 블루엔젤이었다. 
아키라는 가게에 갔을 때 이미 조금 취해 있었다. 그래서 사야카와 함께 테이블에 있던 미키가 적당히 장단을 맞출 의도로 자신도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자마자 "오늘 말이지, 엄청난 수확이 있었어"라며 허겁지겁 가방 안에 든 고서를 꺼내 들고 말을 이었다. 

- "바로 이거야, 이거. 도조 마사야의 몇 안 되는 순수 본격 탐정소설 <고문관의 참극>. 작가가 작품 완성도에 만족하지 못해 초판만 내고 봉인해 버렸다는 사정이 있는 책이지. 고서점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책이라고."
그는 눈앞의 여자보다 이제 막 손에 넣은 고서에 정신이 팔렸다.
"너 인마, 모처럼 룸살롱에 데려왔더니..."
다마시로는 어이가 없는 듯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개의치 않고 싱글벙글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아, 그렇게 희귀한 책이야? 그럼 값도 많이 나가겠네?"

  
- 그 모습이 사야카에게는 아키라처럼 보였다. 옷의 종류와 색이 그가 평소 입던 것과 꼭 닮았다.
그럴 리가... 
얼마간 멍하니 서 있던 사야카는 단순한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자신은 아키라를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그의 본가, 하물며 그의 방에 틀어박혀 있다. 마치 본인을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게 힘없이 쓴웃음을 지은 사야카는 방문을 연 순간 저도 모르게 "악!"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책상 위에 아키라가 자주 읽던 쓰루야 슌사쿠의 단편집 <괴담 억새풀 여자>가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옆에 있는 재떨이에서는 담배 연기까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야카는 제 눈을 의심했다.

- 아키라는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러나 고서에서 이따금 풍기는 담배 냄새를 좋아해, 좋아하는 책을 읽을 때 피우지도 않는 담배에 불을 붙여 옆에 두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그것도 고급 외국 담배를.
지금 재떨이에서 연기를 피우는 담배도 아키라가 좋아하던 브랜드가 분명했다. 마치 바로 조금 전까지 아키라가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 흰색 천에 노란색 꽃무늬 레이스가 달린 속옷과 베이지색 스타킹이 눈부셔 그때까지 아무렇지 않았던 슌이치로도 당황할 정도였다.
"속옷도... 전부 벗나요?"
양 볼과 목덜미가 발갛게 달아오른 사야카가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
"물론입니다..."
슌이치로는 최대한 냉정하게 대답할 심산이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기분 탓인지 시선도 허공을 맴돌며 왠지 초점이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 "저기 말입니다."
그제야 가까스로 슌이치로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건 건강진단 같은 겁니다."

- "아... 음, 뭐... 물론 노출된 피부만으로도 그것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지만, 이런 것은 반드시 정확하게 파악해 둬야 해서..."
사야카는 호기심에 물었다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눈빛으로 자신의 새하얀 피부를 내려다봤다. 

- 구불구불하고 퉁퉁한 지렁이 같은 거무스름한 것이 역겹게 꿈틀거리며 피부 속으로 파고들어 있다.


- 그 기묘한 묘지를 발견하고 다쓰노리가 맨 처음 내뱉은 감상이었다.
"왠지 춥지 않아?"
그러나 슌이치로는 눈앞의 묘비에서 느껴지는 독특함보다 그 구역에 감도는 냉기 쪽이 신경 쓰였다.
한여름이었는데도 이상하리만치 추웠다. 게다가 그건 피부에 흐르는 땀을 사르르 없애 주는 에어컨의 시원한 냉기가 아닌, 몸 깊숙한 곳의 뼈마디가 시려오는 듯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음산한 냉기였다.
"으음, 어디서 바람이 부나."
그러나 다쓰노리에게는 그런 냉기가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슌이치로가 계속해서 춥다고 하자 "그럼 저기 가서 놀자."라며 문제의 묘비에서 떨어졌다.

- 그날 이후, 그 근처에는 가능한 가까이 가지 않았다. 정신없이 놀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쪽으로 가거나 하면 슌이치로는 곧장 알아챌 수 있었다. 그곳에는 늘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계절과 상관없이 추웠으며, 가까이 다가가면 반드시 기분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그날은 오랜만에 둘이서 묘지 쪽으로 향했는데 어디선가 고오오, 고오오, 고오오오 하고 해명(바다에서 나는 천둥과 같은 소리. 태풍이나 저기압의 징조로 여긴다-옮긴이)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 별생각 없이 봉투를 뒤집어 보낸 이를 확인한 슌이치로는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 짧은 작대기가 하나, 둘, 셋... 모두 열세 개가 역시 떨리는 필치로 그어져 있었다.
물론 의미 같은 건 알 수 없었다. 다만 엄청나게 사악한 기운이 느껴졌다. 한낱 작대기에 지나지 않은 것들로부터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오싹한 악의가 전해졌다. 마치 원한으로 똘똘 뭉친 덩어리에서 태어난 괴물의 끔찍한 서명을 본 것 같았다.

 

- 조심조심 봉투에 든 싸구려 갱지를 꺼냈다. 솔직히 읽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슌이치로는 어쩔 수없이 천천히 종이를 펼쳤다.
갱지에도 하나, 둘, 셋... 모두 열세 개의 짧은 작대기가 역시 떨리는 필치로 그어져 있었다. 그러나 검은 매직잉크가 아닌 거무스름하게 붉은 빛이었다...
"피?"
"여, 역시 그렇게 보이죠?"

- "유산 상속을 둘러싼 살인 사건이 그리 드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 이유로 쓰루야 씨를 데려가면 가족의 협력은 얻지 못하지 않을까요?"

사야카의 정확한 지적에 슌이치로는 말을 잃었다.
원래라면 이리야 가에 가기로 마음먹은 단계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인간관계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그에게는 그런 상황을 예상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 "괴현상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다는 구실은 어떨까요?"
잠자코 있는 슌이치로에게 사야카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오호라."
그 제안에 슌이치로는 이상할 정도로 반색했다.

다만 그때 슌이치로의 머릿속에는 마틴 헤셀리우스 박사 콘셉트로 갈 것인지, 같은 의사라면 존 사일런스 쪽이 나을지, 아니면 이 경우에는 유령 사냥꾼 카낙키로 가야 할지, 혹은 의사보다는 학자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며 반 헬싱 교수부터 헨리 아미티지 관장까지, 이리야 가에서 연기할 자신의 역할에 대해 상당히 마니악한 콘셉트들이 떠돌고 있었다. 

 

- 덧붙이자면 헤셀리우스 박사란 레퍼뉴의 단편 <녹차>에 등장하는 독일인 의사로 기괴한 원숭이가 보인다는 환자의 섬뜩한 체험에 담긴 미스터리에 도전한다. 이 오컬트 탐정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박사의 영향을 받아 창조된 캐릭터가 바로 앨저넌 블랙우드의 사일런스 박사와 윌리엄 호프 호지슨의 카낙키다. 다만 전자가 기괴한 사건에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접근하는데 반해 후자는 수상쩍은 오컬트 도구들을 사용하기도 한다.
헬싱 교수는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에서 드라큘라 백작과 대결하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오컬트 탐정일 것이다. 아미티지 박사는 H. P. 러브크래프트의 <더니치 호러>에 등장한다. 그는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시설인 미스카토닉 대학의 도서관 관장이자 마도서(魔導書) <네크로노미콘>의 비밀을 알고 있다.

 

- 따로 말할 것도 없이 슌이치로는 이 괴기 소설들의 애독자였다. 미스터리도 굳이 고르자면 고전적인 탐정 소설을 선호하는 편이다.
"저, 저기... 쓰루야 씨?"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슌이치로에게 사야카가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음? 아아, 실례. 그럼 아미티지 관장으로 하겠습니다."
슌이치로는 뜻 모를 대답을 던지곤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사야카는 아랑곳 않고 책상 서랍에서 포켓판 도쿄 지도를 꺼내 책상 위로 노선도를 펼쳤다.

- 네쓰키에 도착했을 때 슌이치로는 이미 피로에 찌든 상태였다. 다행인 것은 역에서 이리야 가까지 가는 동안 마주친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그 길을 걸어가는 동안 그는 부지런히 상태를 회복하려 애썼다. 

 

- 이윽고 이리야 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집'이라기보다 '저택'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아르데코풍 양옥이었다.
"아르누보 쪽을 더 좋아하지만 저 3층, 2층, 1층으로 이어지는 정면 구성은 확실히 흥미롭군요."
갑작스럽게 슌이치로가 기운을 되찾았다.
이리야 저택은 동쪽 정면에서 바라보면 남쪽이 3층 건물, 중앙이 2층 건물, 북쪽이 단층 건물로 마치 흘러내리는 듯한 외관이다. 슌이치로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런 기분은 문에서 포치를 지나 실내로 들어가 현관홀에 깔린 모자이크 타일을 볼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그곳에서 거실로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슌이치로는 "윽" 하고 신음한 것을 끝으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거실 벽면은 호두나무 판자로 마감됐다. 그런 짙은 갈색 벽이 천장에 달린 희미한 조명에 반사돼 차분하고 기품 있는 공간을 연출했다. 어디까지나 공간에 한해서...
"뭐지? 이 조악한 취미는?"

- 즉 실로 우연히 열세 계단이 된 것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우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슌이치로는 죽음이란 여러 가지 상황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죽음 쪽이 여러 가지 것들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렇다. 특히 불길한 것들을...

 

- 이 저택에서 열세 계단은 매우 흉한 기운이 감도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따라서 죽음이 그것을 놓칠 리 없다.
그런 생각이 든 시점에 슌이치로는 다시 멈칫했다.
거실에 있는 관음상과 십자가는 반대로 완전히 성스러운 것들이 아닌가. 간지 장식물도 굳이 따지자면 길한 물건이다. 어떻게 봐도 죽음이 이용하는 불길한 것에 해당할 리 없다.
어떻게 된 일일까.
슌이치로는 열세 계단에 대해 자신이 너무 넘겨짚은 것은 아닐까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죽음이 과연 그런 절호의 기회를 모르는 척하고 넘어갈까. 하지만 다른 괴현상들과 균형이 맞지 않는 것도 분명했다. 
"설마."
슌이치로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머릿속에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할머니와의 통화를 마쳤다.
뒤이어 2층의 다른 방들을 멋대로 들여다봤다. 대부분이 개인적인 공간이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또한 각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한눈에 얼추 짐작이 갔다. 

 

- 동쪽 복도에 면한 하루미의 방은 옷 천지였다. 미처 옷장에 집어넣지 못한 옷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가구 중에는 특히 화장대와 등신대 거울이 호화로웠다. 또 화장대 위에는 갖가지 화장품과 사치스러운 보석함이 놓여 있어 그녀의 흥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여실히 증명했다.

 

- 같은 동쪽 복도에 있는 나쓰키의 방은 들어가자마자 벽에서 천장까지 빽빽하게 붙은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모두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미소녀 캐릭터였다. 책장에는 만화책과 게임 소프트웨어가 꽉꽉 들어차 있다. 굳이 말할 것도 없이 하나같이 미소녀와 관련된 것이었다.

 

- 남쪽 복도와 이어진 후유코의 방에는 책이 산더미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컬트 관련 서적이 책장뿐 아니라 방을 가득 메운 상태였다. 책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DVD였다. <엑소시스트>, <오멘>, <서스페리아>, <인페르노>, <악마의 왈츠>, <로즈메리의 아기>, <안티크라이스트>, <악령의 밤>, <레이스 위드 더 데블>, <엔젤 하트> 등 주로 악마와 마녀를 테마로 한 작품이 많았다. 책과 DVD가 꽂히지 않은 책장에는 아름답고 거대한 수정, 오래된 위저보드(악령을 소환할 수 있다는 점술 판-옮긴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해골, 손때 묻은 타로, 자루와 날이 정교하게 장식된 단검, 낡은 천구의, 더러운 지푸라기 인형 등 이상야릇한 물건들이 넘쳐 났다. 

- 같은 남쪽 복도에 있는 시키미의 방은 다른 네 사람과 비교하면 개성이 없고 지극히 평범했다. 굳이 특징을 꼽자면 가정교사로 일할 때 쓰는 영어 관련 참고서와 미스터리 문고본이 책장에 꽂혀 있는 것 정도일까. 물론 아키라의 컬렉션과는 질과 양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 "여기서 구관조를 키웠다고 했지."
텅 빈 새장을 발견한 슌이치로는 사야카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갑작스럽게 새가 죽은 것 역시 괴현상의 일환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흠. 새만이 아니었군."
갑자기 슌이치로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방 한구석에서 고양이 밥그릇과 물그릇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문득 이번 상경 때 외가에 두고 온 애묘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가다듬고 나머지 2층 방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 좀 더 희미하고, 은밀한 움직임이다.
술렁이는 소리?
예를 들면 쥐 죽은 듯 고요한 산속 한복판이라도, 유심히 귀를 기울이면 작은 동물이 살금살금 수풀을 헤집고 다니고, 벌레들이 바닥에 떨어진 바싹 마른 나뭇잎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알 수 있듯이,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 슌이치로가 문고리에 살짝 손을 갖다 댄 순간이었다.
열면 안 돼...
갑자기 본능이 그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슌이치로는 다른 이들에게 나타난 사상을 보는 특수한 능력을 지녔을 뿐 영감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즉 사람이면 누구든, 아니 동물이면 어떤 종이든 느끼는, 위험을 감지하는 육감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다. 


- 슌이치로는 주저했다. 굳이 나서서 무서운 것, 위험한 것, 불길한 것을 접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사시 능력이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비는 그였다. 
그러나 슌이치로는 문을 열었다. 자신이 지금 업무 중이라는 자각 때문이었다. 그래도 우선 살짝 연 문 틈새로 얼굴만 내밀고 복도를 살폈다.

- "전문가는 쓰루야 씨 쪽이죠."
그러나 사야카는 또다시 대화를 나누려 했다.
"이쪽은 평범한 탐정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럴 리가... 평범한 탐정이 아니라는 건 쓰루야 씨 본인이 가장 잘 아시지 않나요?"
"그 말을 뒤집으면 다른 사람의 사상을 본다는 점을 제외하면 오히려 일반적인 탐정 이하라는 뜻이 됩니다."
"자기 자신한테 내리는 평가가 혹독하네요."
"그렇습니까.”
“설마 후유코 씨의 오컬트 관련 지식을 질투해서..."
"최소한 야랑자대는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만."
"네? 그게 무슨 뜻이죠?"
"자신의 역량도 모르고 으스댄다는 의미입니다."
슌이치로는 일부러 이쪽의 화를 돋워 대화를 이어 나가려는 사야카의 의도를 쉽게 간파했다.

- 사야카는 소스라치게 놀랐는지 이번에는 몸을 앞으로 쭉 빼고 인형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한 집안에서 한 해에 사망자가 두 명 생길 경우 반드시 세 번째가 나온다고, 일부 지역에서 그렇게 믿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피하려 세 번째 사망자로 위장한 종이 인형을 이런 식으로 매장했습니다."
"효과가 있나요?"
"글쎄, 어디까지나 민간 신앙이라. 아니, 그렇다고 엉터리 취급을 하는 건 아닙니다만."
인형 무덤으로 과연 그 검은 지렁이가 불러오는 재액을 막을 수 있을지를 떠올리면 역시나 걱정스러웠다.
그런 슌이치로의 마음이 표정에도 드러났는지 사야카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일단은 되돌려 놓읍시다."
인형을 다시 나무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아 흙구덩이 안에 안치한 뒤 그 위에 흙을 덮었다. 그다음에 원래 형태대로 작은 무덤을 만들어 일을 마무리했다.
 
- 지배인이 직접 내선 전화를 걸고 방문을 다시 두드렸지만 반응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그제야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호텔 측이 마스터키로 방 안에 들어가 보니 하루미가 침대 위에서 죽어 있었다. 호텔 전속 의사가 진단한 결과, 사인은 급성 심부전이었고, 죽은 지 두세 시간 정도 흐른 상태였다고 한다. 

- 그날 오후 이리야 가는 떠들썩해졌다.
관할 경찰서에서 형사가 정황 파악을 위해 찾아왔다. 보건소에서도 현장 검사를 나왔다. 하타모리 의사의 제안으로 대학병원으로 옮겨진 나쓰키의 시신과 함께 하루미의 시신도 사법해부를 받게 됐다. 상황에 따라서는 아키라의 유골까지 조사할 가능성도 생겼다. 후유코가 문을 걸어 잠그고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시키미는 모든 미각을 잃었다. 도시코가 거실에서 마호라 대장(열두 신장 중 하나-옮긴이) 상부터 진달라 대장(열두 신장 중 하나-옮긴이) 상 사이를 빙글빙글 돌며 왔다 갔다 했다. 사야카는 거실의 해태와 여우 석상 앞에서 괴물 고양이 혹은 괴물 여우가 자신을 습격할 것이라며 무서워 벌벌 떨었다. 
결국 경찰과 보건소에 대한 대응은 전부 후미에 혼자 떠맡게 됐다. 이리야 가의 어느 누구도 도움이 되지 않는 마당에 그녀가 도맡을 수밖에 없었다. 

- 그러나 정신과 전문의가 도착하기도 전에 모든 이들의 증상이 거짓말처럼 깨끗이 나아 버렸다. 도시코는 자신이 왜 신장상 앞을 오락가락했는지 알지 못했고, 사야카 또한 자기 눈에 해태와 여우 석상이 왜 괴물 고양이 혹은 괴물 여우처럼 보였는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했다. 시키미도 갑작스럽게 미각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만약을 대비해 모든 이들이 정신과 진찰을 받았지만 누구에게도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고, 단순히 정신적 피로를 지적받는 수준에 그쳤다. 

- 아니, 모두는 아니었다. 후유코는 보건소의 검사는 받겠다고 했지만, 자기 방에서는 나오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 나온 직원은 카펫을 걷어 낸 바닥 위에 정체 모를 마법진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고 전했다. 직원이 당사자와 방을 검사하는 동안 줄곧 그 마법진 가운데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는 후유코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정신과 전문의는 드디어 자신의 환자를 찾았다고 느꼈는지 곧바로 후유코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당사자와의 면담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의사는 방문 앞에 서서 뚝심 있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어쩌면 지금 마법진 가운데에 있다는 후유코만이 안전한 지도 모른다. 슌이치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 "쓸데없는 것들? 뭔가? 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시키미 씨를 혼자 둘 것. 아니, 당신은 물론 여기 함께 있으면서 그녀를 지켜봐야 합니다."
"혼자 두라면서 지켜보라니..."
"한마디로 심심할 것 같아서 책을 건넨다든지, 목이 마를 것 같아서 음료수 같은 걸 준다든지 하면 절대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 무엇도 시키미 씨 가까이 가져가서는 안 됩니다. 이불과 베개도 필요 없습니다. 맨몸으로 침대 위에 앉아 있게끔 하는 겁니다. 사실 옷도 벗는 편이 안심인데 괜찮겠죠." 
"아, 알겠어요."
사야카는 그저 슌이치로의 기세에 눌려 대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대답하자마자 그는 복도로 튀어 나가 그대로 거실로 향했다.

- 슌이치로는 간접 조명을 받아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내비치는 그림과 상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쓸 만한 게 있는지 신중하게 거실을 돌아다니며 조사했다. 다음 문제뿐 아니다. 그다음도 준비할 필요가 있다.
이윽고 딱 어울릴 만한 뭔가를 발견한 슌이치로는 서둘러 대식당에서 가져온 의자를 어떤 진열장 뒤에 뒀다. 그러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사야카를 복도로 불러내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질문은 금지. 차차 설명하겠습니다."

- "그럼 바로 조금 전까지 시키미 씨께 하신 행동은..."
"네. 그건 역(逆) 카운트다운이었던 셈입니다."
슌이치로는 어리둥절해하는 도시코와 후미에에게 셋이서 한밤중에 치른 불제의 내용을 대략 설명했다.
"시키미 씨는 이미 '1'까지 진행된 상태였습니다. 만약 그대로 뒀다면 오늘 아침 마지막 '0'에 도달해 '죽음'을 맞겠죠. 따라서 나는 우선 '2'의 상태로 돌리기 위해 2층에서 그녀를 밀었습니다. 뒤이어 '3'으로 돌리려고 세 원숭이 장식물을 진열장 위에서 떨어뜨렸죠. 그렇게 4, 5, 6... 을 지나 13까지 되돌린 다음, 확실히 굳히기 위해 목각 인형 열네 개를 시키미 씨를 향해 집어던졌습니다." 

- "13까지 되돌렸다가 거기서부터 새로운 죽음의 카운트다운이 발생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것에는 역시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니까 말입니다."
"용케도 거기까지..."
도시코가 감탄하자 슌이치로는 "아뇨. 별거 아닙니다"라는 ...

- 일단 코앞으로 다가온 5월을 버텨 내기 위해 슌이치로는 어떻게든 할머니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때 누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네!"
서서히 문이 열리고 쓰루야 슌이치로 탐정 사무소 안으로 들어온 것은 외가에서 사라졌다는 고양이, 보쿠였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