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해로
출판 : 몽실북스
출간 : 21.07.05
즐겁게 읽었다.
독자 된 입장에서는 발표된 작품들을 연이어 읽기만 하니 모든 작품이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지만, 글을 다듬고 정리해 책으로 엮어내는 입장에서는 또 다를 것 같다.
<섭주>는 여러모로 이전까지 발표된 박해로 작가의 작품들의 연결고리가 되는 이야기다. '섭주'와 '다흥'이라는 지정학적 고리, <살>의 안미영과 차종환, <올빼미 눈의 여자> 등의 '나는 자연산이다', <신을 받으라>에서의 기독교와 무속의 대립...
또 한편으로는 처음으로 네오픽션이 아닌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이기도 하다. 이후로는 주로 북오션과 작업하시는 듯한데, <귀경잡록>에서 출발한 '원린자' 시리즈와 '현대' 시리즈로 딱 떨어지게 나뉘는 것도 아니라 명확한 기준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특이점이라면 <섭주>만이 몽실북스에서 출간되었다 정도. 출판사는 달라져도 작품 간의 유기성은 크게 변하지 않으니 TMI 정도로만 알고 넘어가기로.
박해로 작가는 이전 작품에서도 과거부터 전해져 오던 전승과 현재 일어나는 기이한 사건을 연결 짓는 구성을 많이 썼지만, <섭주>에서는 어느 쪽이 주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과거와 현재가 혼재한다. 본문의 표현으로는 현재의 어떤 행동이 과거를 깨워 불러냈다고 되어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되풀이되는 과거의 현상에 현재가 끌려들어 간 쪽에 더 가깝다. <살>이나 <올빼미 눈의 여자>가 과거를 끌어와 현재에서의 욕망을 추구하는 쪽에 가까웠다면 -그 욕망 자체가 과거에서 이어진 것이더라도- <섭주>는 과거의 재림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점이 더욱 섬뜩했다.
이런 경향은 추후 쓰게 될 <단죄의 신들>에서 더 강해지는데, 완전히 굳어지는지는 <사악한 무녀>까지 읽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신을 받으라>는 다소 중간자적인 작품으로, 어느 쪽으로도 분류할 수 있을 듯 하다.)
원린자들이 등장하는 <전율의 환각>, <화승총을 가진 사나이>, <외눈고개 비화> 등은 결을 달리한다. 이전에 발표했던 <귀경잡록>의 개정판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나는 작가가 쉬어가고 싶은 시기에 쓰는 시리즈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외세의 침입이 잦았던 시기, 특정 사건이 구전되어 오는 과정에서의 와전과 은폐가 후세에 미치는 영향 등에 관심을 두고 읽는다면 또 다른 오싹함을 얻을 수 있을지도.
(그런 점에서 <신 전래특급>도 엄밀히 보자면 원린자 시리즈지만, 이 작품은 일종의 스핀오프로 빼놓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다만 '사파왕과 우녀' 전설은 조금 묘하다. 우마왕과 나찰녀를 비튼 것 같기도 하고, 야츠후사와 후세히메 같기도 하고. 책 속의 책 느낌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현세와 전세의 이야기가 서로 겉도는 느낌을 받았다.
현재 읽고 있는 건 <화승총을 가진 사나이>, 남은 작품은 <사악한 무녀>와 <교도소 괴담> 정도다.
(<고문관>과 <군대 괴담>은 읽을지 건너뛸지 아직 고민 중이다.)
다 읽고나면 시원할지 아쉬울지 스스로도 궁금하다.
끝.
- 5년 복역을 마치고 출소한 최영우는 경북 다흥으로 내려갔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그곳에 일자리를 얻었다. 두 번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최영우는 자신의 활동무대였던 서울을 등졌다.
다흥에서 장기간 합숙을 필요로 하는 그 일은 어느 병원의 부속건물을 리모델링하는 대형 공사였다. 부속건물인 이 <다흥병원 장례식장>은 약 40년 전인 1980년대 말 조윤식이라는 청년이 계모를 살해하려고 네 번에 걸쳐 음모를 꾸민 바로 그 장소였다.
- 다흥은 안동과 영주 사이에 낀 소도시로, 섭주와도 잇닿아있었다. 무속과 연관된 괴이한 사건이 많기로 소문난 곳이 바로 이 다흥과 섭주였다.
- 말 잘 듣는 외국인 노동자는 넘쳤다. 최영우는 성질을 죽이지 못하면 또 교도소에 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기가 생겨 25번 버스를 탔다. 농광중학교 앞에서 내려 인적 드문 길을 걸어가니 정말 조장이 말한 대로 집 한 채가 있었다.
그곳은 흉가였다.
- "그건 몰랐는데? 벌써 건물 깨부쉈단 말이야?"
"아니, 말이 그렇단 얘기야. 철거는 아직 안 들어갔고 몇 군데 전기만 끊었어. CCTV도 다 수거해 갔고."
강도 전과 6범인 최영우의 귀에 'CCTV 수거'가 날아와 박혔다.
간만에 살아난 '직업 정신'의 눈으로 그는 건물을 살폈다. 수거해 간 CCTV란 장례식장 안의 것을 말하는 것일 테고, 바깥에 작동되는 방범 CCTV는 네 개 정도... 만약 이런 동네에서 도주한다면 머리를 푹 숙인 채 요 골목으로 들어가서 저 길로 해서 그 위의 담을 넘어서...
그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나 왜 이러니? 손 씻었다 그랬잖아.'
- "그럼 이 몸살은 뭡니까?"
"그러니까 병원에 가 보시라니까요."
약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최영우는 욕설을 내뱉고 약국을 나섰다.
걷는 사이 수십 개의 몽둥이가 내려치는 통증이 몰려들었다. 지옥 같은 욱신거림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한 줄기 바람이 얼굴로 불어 닥쳤다. 그는 바람 속에서 '쉭쉭세엑세엑하흐!' 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이 입으로 내는 휘파람과 비슷했다.
- 다른 약국에 가보았지만 똑같은 체온에 병원에 빨리 가라는 진단만 내려졌다. 해열진통제를 두 배로 먹었지만 소용없었다. 몸살은 덜어지지 않았고 호흡은 가빠졌다. '쉭쉭세엑세엑하흐!' 거리는 바람은 수시로 불어 닥쳤다. 머리카락도 날리지 못하면서 그의 귀를 고문하는 바람이었다. 거리의 사람들이 중환자 같은 그를 수시로 쳐다봤다. 돈을 훔친 마당에 사람의 관심을 끌면 좋지 않다. 결국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흉가로 진로를 정하자 아픈 몸이 조금 가벼워졌다.
- 흉가는 처음과 다름없었지만 보이지 않는 변화가 있었다.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니 발부리에 물컹한 게 밟혔다. 산비둘기가 떼로 죽어 있었다. 오늘 아침까진 없던 것들이었다.
- "저 여자 왜 딸랑딸랑 거리죠?"
그는 옆의 할머니한테 물었다.
"예?"
"아나운서 입에서 방울 소리가 나잖아요?"
"무슨 방울 소리가 나?"
남의 일에 관심 많은 노인들은 이상한 눈길로 최영우를 바라보았다. 최영우의 눈은 텔레비전에 못 박혔다. 아나운서가 방울 소리를 입으로 토해냈다. 몸이 욱신거리며 화면도 왜곡되었다. 뉴스를 전달하는 척하면서 아나운서는 간사하게 웃었다. 할머니들의 표정을 보니 최영우에게만 들리고 보이는 모양이었다.
- " ... 장소로 활용하려니까 이런 사고가 난 거지요. 그분한텐 뭐 브라보 마이 라이프 아니겠습니까? 제가 화장실에 있었어도 그런 상황이라면 돈 들고 튀었겠죠."
놈들은 화장실에서 누가 돈을 들고 간 사실까지 알아냈다! 짚단 더미 안이 걱정되었다. 흉가에 있을 소머리가 무섭긴 했지만 그는 여관을 나왔다. 새벽 1시로 바깥은 어두웠다. 숨이 차 쓰러질 것 같아 택시를 타고 농광중학교까지 간 뒤 남의 눈을 피해 흉가에 들어갔다.
어둠이 짙은 수풀 안으로 들어섰을 때 최영우는 온몸을 휘감는 요상한 기운을 느꼈다. 수풀이 그를 짚단 더미 쪽으로 떠미는 느낌이었다. 그는 더미 속에서 가방을 꺼내 방으로 가져왔다. 방바닥에 쏟아부으니 오만 원권 지폐들과 함께 어제까지는 없던 낯선 물건이 떨어졌다.
"헉!"
그것은 방울과 거울이었다.
두 물건을 둘러싼 수백 명의 신사임당은 이 순간 무당처럼 무섭게 보였다. 방울은 녹슨 자루 끝에 일곱 개의 작은 쇠구슬이 달렸고, 거칠거칠한 거울은 앞이 볼록한 청동거울이었다. 두 가지 다 까마득한 옛날에나 사용되었을 물건이었다.
- 절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기껏 한 밑천 잡았는데 그걸 굿으로 날리라니. 보살이 돈만 밝히는 돌팔이인지, 거액을 줘서라도 믿어야 할 신령인지 머리가 복잡했다. 보살이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하나 물어보지. 왜 선생한테 한 달 후도 두 달 후도 아닌 이틀째부터 신병이 시작됐을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첫날은 괜찮았다면서?"
"예."
"그 꿈을 꾸기 전에 뭘 했어?"
"그건 왜요?"
최영우는 보살이 절도 사건을 예측한 줄 알고 기겁했다.
"그 집에서 뭘 건드린 후에 신열이 시작됐을 텐데."
- 방울과 거울로 계시를 받았는데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함부로 무속인부터 찾았다. 부정 탈 짓이란 바로 이 방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녀의 집이어서 그는 신과의 대화에 성공했다. 스마트폰이 와이파이 존에 들어선 꼴이었다.
야단을 맞긴 했지만 최영우는 깨워주지 않는 잠에 빠져든 신을 깨워낸 공로를 일부 인정받았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기로 약속한 대신 몸살을 반납할 수 있었다. 그가 앓지 말아야 할 병을 '그 신'은 거두어 가기로 했다. 뭔가에 조종당하는 사람처럼, 혹은 어떤 경지를 본 사람처럼 최영우는 몸도 가볍게 일어섰다.
"가 봐야겠수."
설신보살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푸른 눈화장을 지워 그녀의 얼굴은 귀신처럼 보였다.
-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를 화나게 하는 일은 절대 할 수 없었다. 민호는 동거라도 하고 나중에 알리자고 했지만 서경의 이마에는 땀이 흘러내렸다.
동거라니! 초등학교 교사가!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는 현실에 지친 민호는 결국 떠나버렸다. 그녀는 매달리지 않았다. 전화를 받는 테만 익숙했지 거는 데 익숙하지 않은 서경은 다시 성경책에 파묻혔고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보며 혀를 찼다. 그러나 성경 위로 떨어지는 눈물은 그녀 말고는 아무도 볼 수 없었다.
- 민호를 만나기 전과 만나기 후의 서경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대로였다. 말수 적고 표정 없고 심드렁한 모습의 여선생. 마음의 창을 보고 싶어 눈을 쳐다봐도 특유의 뿔테 안경으로 성채를 쌓은 자신 없는 여자.
그런데 어떤 여선생 하나는 화장실에서 강서경 선생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남의 상처에 배려는 없고 그저 남을 웃겨서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누군가는 '거 정말 B사감이네'라며 비평을 달았다. 안쓰럽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키득거리는 사람이 더 많았다.
어쩌면 화장실의 우는 소리도 팩트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B사감다운 행동이라며 주장하는 소리는 팩트가 되었다. 그녀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녀를 동정하던 사람들도 '주류에서 안 떨어지려고' 그들과 동류가 되었다. 침묵은 있어도 위로는 없었다.
- 세상사에 무지하고 사회활동에 미숙한 사람이라도 관심은 필요하다. 그 사람이 원하지 않을지라도 고난에 처한 사람을 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햇살이지 그늘이 아니다. 그늘에 있는 사람에게 악은 접근하기가 쉽다. 특유의 어두운 색깔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 서경이 붕평마을에 도착했을 때 보슬비는 폭우로 변했다. 검은 하늘처럼 그녀의 마음도 컴컴했다. 비는 순식간에 곳곳에 진흙탕 길을 만들었다. 골목마다 늘어선 장승들도 속수무책으로 젖었다. 관리인은 멀리서 덮개 씌우는 작업에 분주해서 서경의 존재를 몰랐다. 궂은 날씨 때문인지 관광객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의 차도 그녀의 아반떼 하나뿐이었다. 10월의 가을비가 인정사정없이 퍼부었다.
- 붕평마을은 인근 안동의 하회마을과 비슷한 고택 문화재로, 섭주의 유명한 명승고적이었다. 하회마을이 빛이라면 붕평마을은 어둠이었다. 예로부터 기이한 일이 많이 벌어진 섭주의 대표적 장소였기 때문이다.
서경은 그 사실을 몰랐고 알았더라도 의미부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 위로 죽음보다 진한 허무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녀는 붕평마을의 정자 쪽으로 힘없는 발길을 돌렸다. <칠정자 붕평마을>이란 별칭이 있듯 일곱 정자를 도는 동안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내는 일곱 마음을 겪은 뒤 진정한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다는 가르침의 건축양식은 수십 년 동안 관광객들을 끌어들였다. 그녀가 향하는 제선정은 일곱 개의 정자들 중에서 마을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욕망의 정자였다. 2000년대 초반에 올빼미 눈을 가진 무녀의 후예가 한기성이란 청년에게 어떤 의도를 행사하기 위해 동행을 제안한 곳도 바로 이곳, 제선정이었다.
- 비가 더욱 거세졌다.
제선정에 닿자 민호와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와 마지막으로 데이트를 한 장소도 이곳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가 제선정에 온 건 그 남자 때문도 추억 때문도 아니었다. 얼굴도 모르는 친엄마가 생각나서였다. 어젯밤 꾼 꿈에서 어떤 목소리가 이곳에 오면 너를 낳은 엄마를 볼 수 있다고 가르쳐줬다.
- 갑옷을 입은 채로 수난을 당한 그는 옛 시대의 장군이었는데 몸집이 매우 컸다. 머리도 손도 정상적인 사람의 두 배였다. 일당백으로 싸우다가 무참한 난도질을 당했는지 분리된 신체가 수 미터 밖까지 흩어졌다.
모래사장 위에 놓인 투구 쓴 머리는 피 흘리는 눈을 부릅떴고, 그 뒤편에 떨어진 오른팔은 장검을 꼭 쥐고 있었다. 검에는 피에 달라붙은 고양이털이 수북했다. 조각난 회색 갑옷 위로 스프레이 칠 같은 피 색깔이 섞여 들었다.
- 너무나 끔찍한 광경에 서경은 눈을 돌렸다. 눈부신 여름 햇살이 다시 제선정으로 쏟아지면서 까마득한 거리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어떤 물체가 등장했다.
- 백마, 흑마, 황마, 적마의 네 마리였다. 말 위에도 장군들이 타고 있었다. 넷 다 금빛 찬란한 갑옷 위에 뱀 무늬처럼 생긴 화려한 전포(戰袍)를 둘렀다. 투구 아래로 한 번 보면 잊히지 않을 얼굴이 드러났다.
- 백마에 탄 장수는 살찐 얼굴에 찢어진 눈을 갖고 있었고 긴 창을 손에 쥐고 있었다. 흑마에 탄 장수는 덥수룩한 수염에 눈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날이 구불구불한 칼이 무기였다. 황마에 오른 장군은 말고삐를 잡지 않고 양손으로 비파를 연주했다. 그는 젊었으나 머리칼이 백발이었다. 적마에 오른 장수는 양손에 쥔 불덩이처럼 두 눈도 붉은 얼굴도 화염처럼 타올랐다.
그들은 사천왕을 연상시키는 비현실적인 무장들이었다. 무녀의 탱화 속처럼 배까지 내려오는 수염에 휘날리는 눈썹을 가졌고 구슬처럼 커다란 눈을 부라렸다. 그들 역시 몸집이 컸지만 조각조각 찢겨 죽어 있는 회색 갑옷의 장군만큼 크지는 않았다.
서경을 추격하던 그들이 죽은 장군을 발견하고 일제히 말에서 내리더니 무릎을 꿇고 곡을 했다. 애달픈 곡은 길게 이어졌다.
- "그럼 오후 수업 가능하겠소?"
"가능할 거 같아요."
임미화가 눈을 흘겼다. '네, 선생님!' 대신 '할 거 같아요' 따위로 대답하는 넌 항상 치가 떨려. 뭘 해도 임미화는 서경이 미웠다.
"음. 그럼 믿고 맡기겠소. 4반 아이들에게 오늘도 자습만 시킨다면 고양이 같은 학부모들이 발톱을 드러내지 않겠소?"
고양이! 발톱! 서경의 눈앞이 컴컴해지면서 거대 뱀을 물어뜯는 고양이 떼의 악몽이 살아났다.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피와 살점을 뿌렸던 뱀, 내장을 쏟으며 잔혹하게 죽었던 고양이들...
- 뱀은 반 토막이 나 있었다. 서경이 우웩 하고 헛구역질을 하자 임달구가 피식 웃었다. 서경을 우습게 보는 이는 선생들뿐만이 아니었다.
항상 서경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임미화는 교무실 창밖으로 서경이 구역질하는 모습을 보았다.
"저거... 저거... 설마가 진짜 아냐?"
그녀는 잊고 있다가 조주애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본 것을 얘기했다. '입덧'이란 단어가 무책임하게 등장하자 수업 중임에도 조주애는 어머어머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비슷한 성향의 선생인 장영화에게 즉각 문자로 내용을 전달했는데 악녀들의 뒷담화에는 팩트와 관련 없는 추측성 살이 잘도 붙었다.
이 입 함부로 놀린 살에는 살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걸 그녀들은 결코 알지 못했다. 조심하는 게 좋았을 것이나 이미 때는 늦었다.
- "그게 정말이라면 일이 커지기 전에 막아야지. 하지만 이런 건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오. 임미화 선생인들 가만있겠소? 무고라고 길길이 날뛰겠지. 팩트 체크가 우선이오. 강서경 선생이 당사자니까 정말 갑질을 당한다고 생각하는지 그것부터 알아봅시다. 만약 사실이라면 처벌을 원하는지도 물어봐야겠지. 강 선생과의 대화는 기록으로 남겨야 우리 모두 안전할 것 같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해요. 강 선생이 나으면 내가 한번 따로 만나보리다. 물론 여선생님들 선에서 먼저 자체 해결을 보면 좋겠지만..."
"얼렁뚱땅 넘기다간 더 큰일 터져요. 강 선생은 임미화 선생을 겁내요. 당연히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거예요."
교감은 눈치를 보다가도 어느 순간 눈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그래도 이런 일은 어느 한쪽 말만 들어선 안 돼요. 앞뒤를 냉철하게 따져봐야지. 강 선생은 아무 말도 않는데 송 선생이 너무 남의 일에 관여하는 건 아니오?"
선희는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하루 서경에게, 이어서 교감에게 비슷한 성향의 말을 반복해 들은 것이다.
- 임달구는 소싯적 장난꾸러기 같은 행위가 즐거운지 싱글벙글이었다. 뱀이 계속 나오는데도 그는 119를 부르지도 않고 스스로 치웠다. 처음엔 욕을 했지만 이제는 즐거웠다. 잡은 뱀으로 할 일이 있으니까.
- 윤 여사가 식사를 준비하는 사이 서경은 인터넷으로 신병(神病)에 관해 몰래 검색을 했다. 기이한 꿈과 연결된 채 방울이나 거울을 발굴해 신이 들리는 내용이 어딘가 와닿았다.
교회 다니는 여자한테 신들림이라니!
- 아무것도 모르는 윤 여사는 찬송가를 불렀는데 또다시 <야간열차>가 부실시공 건축자재를 통과해 흘러들어왔다. 이쪽에서 군사훈련을 하면 저쪽에서 대응훈련을 하는 식이었다. 후렴 부분은 '가자가자가자 당진열차야'였다.
<안동역에서> 가수가 영월 공연을 가면 노래가 <영월역에서>로 바뀌고, 구례 공연을 가면 <구례역에서>로 바뀌듯, 이 <야간열차>도 당진공연을 녹화해 둔 것 같았다. 노래를 튼 사람은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똑같은 부분을 끊임없이 재생시켜 이웃들에게 심리적인 두려움을 전파시켰다.
- 윤 여사가 찬송가를 멈추었다. 천장을 바라보는 서경의 노이로제는 점점 상승하고 있었다. 임미화의 괴롭힘은 집에 와서도 생각이 나는데 집에는 집대로 또 다른 스트레스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저 싸이코 자식은 내가 소리만 내면 저런 식으로 반응해! 죽여버리고 싶어!"
자신이 낸 욕설에 놀라 서경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핸드백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때였다.
- 서경이 슬픈 표정으로 남자 앞에 섰다. 그 모습을 본 세 개의 눈에서 빛이 번져왔다. 남자가 사슬을 철컥거리며 비단옷을 펼쳤다. 비단옷이 나비처럼 펄럭였다. 무한으로 물결치는 뱀 무늬의 천을 본 순간 무서움은 욕망으로 바뀌었다. 서경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쳤다. 등 뒤로 사천왕 같은 네 장군이 형벌을 집행하러 다가왔다. 세 개의 눈이 무서운 빛을 발하면서 장군들을 노려보았다. 장군들이 창칼을 거두었다. 그는 장군들에게 사로잡힌 죄수가 아니라 귀양을 왔음에도 그들을 거느린 위대한 존재처럼 보였다.
비단옷에 서경의 손가락이 닿을 때 발치에 기화요초(奇花瑤草)가 돋아났다. 파란 싹은 금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는데 어여쁜 새끼 뱀들이 꽃과 꽃 사이를 누볐다. 서경과 옷이 하나가 되자 남자에게도 혜택이 주어졌다. 먼저 사슬이 끊어졌다. 이어서 혼탁이 정화가 되며 피칠갑이 된 옷이 바람에 펄럭이는 도포 자락으로 바뀌었다. 산발한 머리칼이 잘 묶은 백발로 바뀌었다. 죄수 형상의 남자가 사라진 자리에 신령스런 절대자가 나타났다.
- 그는 속세에 근거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서경의 감각이 닿지 못하는 곳의 우주만물과 인연을 쌓은 장엄한 법체(法體)였다. 여전히 눈은 세 개였지만 인자하게 머금은 미소와 삼라만상을 초월한 표정은 대자대비의 석가모니를 연상케 했다. 아니, 무당의 탱화에서 본 '산신령'과 비슷했다. 그는 나이가 들었으나 옥을 깎아놓은 듯한 미남이었고 몸 구석구석마다 넘치는 존재의 무게감으로 범접할 수 없는 신비를 풍겼다.
- 그는 서경을 그대로 지나쳐 산산조각 시체가 된 장군 앞으로 가서 긴 시간 동안 곡을 했다. 네 장군이 무릎을 꿇었다. 서경은 달아나려 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비단옷이 세 눈을 가진 남자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옷을 갖고 싶었다. 모두가 슬픈 울음에 정신이 팔린 이때, 운만 따라준다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옷이 자기 것이 될 수도 있었다.
- 서경은 살아있는 소가 두 발로 걸어 나오는 줄 알고 경악했다. 하지만 그건 살아있는 소의 머리를 오토바이 헬멧처럼 뒤집어쓴 알몸의 여자였을 뿐이다. 죽은 소의 목에서 떨어진 피로 그녀의 몸은 붉게 채색되었다. 서경이 비명을 지르자 엎드려 있던 남자가 돌아보았다. 세 개의 눈에서 빛이 났다. 서경에게 흥미를 느낀 게 아니라 소머리 여자를 보고 반응한 ...
- 오히려 잡아당기는 두 사람을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빛이 일어나면서 두 사람이 하나로 합쳐졌다. 소머리가 허공으로 날아가고 서경은 차갑고 독성을 가진 어떤 물질이 자신 안으로 들어오는 기분을 맛보았다. 방울이 딸랑거렸고 거울이 그녀를 비추었다.
- 비단옷이 치수에 맞게 입혀지면서 서경의 얼굴에 다른 여자의 얼굴이 겹쳐졌다. 소머리가 사라진 그 여자는 반짝이는 눈에 피부가 하얀, 조선 시대 그림 속에서 등장할 법한 고전미인이었다.
- 쌍꺼풀의 여자가 자신의 몸에 내리자 서경은 일반인이 모르는 지혜에 통달했고 그들이 할 수 없는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 "살아있는 거 먹고 싶다고 했잖아."
서경은 차를 유턴해 횟집 '나는 자연산이다' 앞에 정차했다. 노숙자 하나가 횟집 앞 양지바른 곳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서경이 횟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저 수족관에 오징어 두 마리만 주세요."
"회로 드시게요?"
"예."
"금방 썰어 드릴 테니 거기 잠시만 기다리세요.”
- 금년 가을에 나온 오징어는 몸집이 크고 움직임이 활기찼다. 하지만 윤 여사의 기억으로 서경은 생선회는 물론 소고기, 돼지고기도 좋아하지 않았다. 서경은 수족관의 물고기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이상하게도 물고기들이 그녀를 피해 수족관 구석으로 도망쳤다. 그녀가 이동하면 물고기들도 반대방향으로 헤엄쳤다.
- "자, 다 됐습니다."
사장이 오징어회 포장 꾸러미를 내밀었다.
산 오징어는 썰어도 얼마 동안은 움직거린다. 서경이 안을 보니 잘게 썬 오징어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어디로 빼돌렸는지 다리가 하나도 없었다.
"아저씨 이 오징어, 오전에 썰어놨던 거랑 바꿔치기했네요."
- 삼사해상산책로는 바다 속에 튼튼한 철근을 박아 그 위에 교량을 설치한 관광지였다. 말 그대로 바다 위를 걸어 다니는 인상적인 길이었다.
이곳에 오르면 행차하는 임금, 귀양 가는 선비, 인당수 앞의 심청, 홍해 앞의 모세 등 수많은 인물에 감정이입을 할 수가 있는데, 항간의 소문에는 무속 공포 소설을 쓰는 박모 작가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섭주에서 똥차를 끌고 한 시간이나 달려와 이 위를 빙빙 돌다가 뭔가 계시를 받은 표정으로 내려가는 광경이 가끔 포착되었다고 한다.
-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까! 근데 그날 서경이가 쓰러지고 개네 엄마가 와서 데려갔을 때 깜빡 잊고 핸드백을 두고 간 거야."
"몰래 열어봤구나."
조주애의 목소리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뭐 일부러 열어보려 한 건 아니지만 김윤수 말이 하도 궁금해서..."
임미화가 그날 교무실이 빌 때 몰래 열어본 서경의 핸드백 안에는 정말 방울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울이 무속의 신방울임을 증명하듯 청동거울도 함께 있었다. 그녀가 청동거울을 꺼낸 사이에 핸드백을 뒤졌기에 김윤수는 방울 하나만 보았던 것이다.
- 이 거울을 만졌을 때 임미화에게 무서운 기운이 몰려들었다. 두 개의 먼 옛날 물건들은 귀신을 인정하고 귀신을 부르고 귀신을 쫓기도 하는 물건이었다.
한참을 들여다본 거울 표면에 자신의 모습이 왜곡되어 비쳤다. 얼핏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가 비친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쌍꺼풀이 없는데 거울 속 여자는 쌍꺼풀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그 미지의 얼굴은 몸살이 낫고 돌아온 서경과 너무나도 닮았다. 당시 임미화가 서경에게 '이럴 수가... 설마 니 얼굴은...'이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 패딩점퍼가 갑자기 바닥에 떨어졌다. 깜짝 놀란 임미화가 말을 멈추었다. 어디선가 휘파람 부는 소리가 몰려들어 그녀의 귀를 후벼 팠다. 전화기 속의 사람 말이 들리지 않고 말이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집안이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갑옷을 입은 장군이 황마를 타고 나타났다. 뱀을 그려놓은 깃발을 펄럭이며 달려오는 장군은 젊은 남자였지만 머리가 백발이었다. 말이 히힝거리며 임미화 앞에서 앞발을 쳐들었다.
장군이 손에 든 비파를 기타 치듯 퉁기자 기이한 음향이 신경을 끊어놓았다.
- 목사의 가늘게 뜬 눈이 과거를 파헤치는 듯했다.
"내게 서경이를 맡길 때 그녀는 말했소. 신왕님이 부르니 가야만 한다고. 서경이를 데려가면 방해가 되니 그들이 죽일지도 모른다고 말했소. 그래서 서경일 받아들인 거요. 섭주와 다훙의 미제 사건 중에 그 신왕이란 자의 이름이 거론된 케이스가 꽤 있다는 건 여러 사람이 알고 있소. 우연처럼 지금 서경이가 살고 있는 섭주 말이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그녀가 어떤 밀교 집단의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그건 헛소문이 아니오. 그녀의 정체는 신왕을 모시는 무서운 무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교 집단의 우두머리요."
"대체 그 여자 이름이 뭔데요?"
"안미영."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추억을 헤집는지, 과거를 후회하는지 목사의 굳은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 날씨는 따뜻하고 또 하루가 지났으니 대야 안의 뱀 사체에서 구더기 수백 마리가 수천 마리로 기승을 부릴 터였다. 닭들은 이 구더기들을 남김없이 먹어치울 텐데, 동생에 의하면 이미 뱀독이 번져 벼슬이 벗겨지기 시작하는 닭이 출현했다고 한다. 그 '뱀닭'을 삼계탕으로 만들면 보약 중의 보약이 되는 것이다.
- 커튼을 쳐 실내가 컴컴했다. 이제 그의 귀에는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내려준 처방 덕분이었다. 그러나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강서경 선생의 목소리였다.
'이 자식이 설마 내 핸드백을 뒤져보진 않았겠지? 나름 매너는 좋은데 쥐새끼 같은 구석이 있어'
김윤수 말고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먹구름 같기도 하고 그림자 같기도 한 것이 집 밖을 에워싼 느낌에 그는 줄곧 시달렸다. 원룸형 오피스텔 안쪽에는 도시적인 라이프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는 새끼줄이 걸렸는데 이 줄에는 날이 시퍼런 식칼이 세 자루 걸려 있었다. 베이지 색 현관문 안쪽은 피 칠을 해 붉게 물들였다.
- 어머니는 말했었다.
"네가 간만에 내게 연락한 게 이런 일 때문이라니 썩 반갑지만은 않구나. 그 귀신의 강약 대소를 내가 알 길은 없다만 신령이 있었다니 예사 존재의 물건은 아닌 듯하다. 네가 그런 물건을 만졌으니 귀신은 언제든 네게 침입할 수 있고 네 육신을 지배하에 두고 인격을 변화시킬 수 있다. 급한 대로 계책을 일러줄 테니 그대로 따르거라. 대문 안쪽에 새끼줄을 치고 식칼을 몇 자루 걸어 놓거라. 개 피를 구해서 문에다 뿌려야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한다. 백구를 직접 죽여서 바르면 효과가 좋지만 그러지 못할 테니 개고기 시장에서라도 구해 바르거라. 불기(佛器) 파는 가게에 가서 금강경 테이프를 사서 고음으로 계속 틀어. 내 머잖아 부적을 써서 내려가마."
- 금강경 테이프는 사지 않았다. 유튜브에 있었으니까. 그는 어머니의 지시가 있자마자 계속 금강경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그러나 강서경의 앙칼진 웃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인터넷이 끊기면서 금강경 독송도 사라졌다. 집안이 조용해지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툭, 툭 거리는 노크는 순식간에 쾅쾅 소리로 변했고 새끼줄에 걸린 식칼이 흔들거렸다.
- "너도 같이 만나러 가자. 그 총각들은 입이 무겁고 선을 지키는데 소문 없이 뒤처리까지 깔끔해."
선희는 와락 겁이 났다.
"너 왜 이러니?"
"뭘?"
"정신 차려. 왜 오밤중에 와서 이상한 소리 하고 그래? 무섭잖아."
"이상한 소리라니? 내 말이 이상하게 들려?"
"너 좀 이상해진 거 같아."
"정신병자 같단 말이지?"
선희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평소처럼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가끔 말싸움 도중에 시선만으로 압승을 거두는 사람이 있는데 선희가 그랬다. 쳐다보기만 하면 불같은 성질을 가진 상대방은 먼저 할 말, 안 할 말 다하다가 안 할 말에 약점을 잡혀 패배를 거두었다. 예전에 선희가 정신과에 다녔을 때 의사가 가르쳐준 기법이었고 여러 번 가치를 확인한 전술이었다.
그러나 지금 서경은 정상적인 대화가 먹혀들어 갈 얼굴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변화로 쌍꺼풀의 강조점이 작아지자 서경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원래의 얼굴을 회복하자마자 표정에 가득 찬 건 특유의 난색이 아닌 독기였다.
- '전설의 사파왕과 우녀로구나!'
소머리 여자가 펄럭이는 살색 천을 던졌다. 진숙이 발아래에 떨어진 천을 주워 들다가 기겁했다. 눈코입이 뻥 뚫린 김윤수의 껍데기이자 뱀이 벗어던진 허물이었다. 장군들이 일으켜 세운 윤수의 표정이 변했다. 부정한 입무(入巫)에 성공해 악귀의 강신(降神)을 이룬 반 인간, 반 귀신의 모습이었다.
진숙은 잠에서 깨어났고 아들을 귀신들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전화해도 윤수는 받지 않았다.
- 달리는 차 위로 뭔가가 떨어졌다. 나뭇가지 같은 그것은 얼룩무늬 뱀이었다. 진숙이 놀라 핸들을 꺾자 차가 위태롭게 요동쳤다. 뒤에서 빵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속도계가 한계치 이상으로 상승했다. 있지도 않았던 음료수 캔 하나가 브레이크 아래 단단히 박혔다.
뱀의 눈과 보살의 눈이 마주쳤다. 눈이 셋인 거체가 환영처럼 떠오르면서 그녀는 모든 게 틀렸음을 깨달았다. 차는 앞서 가던 유조트럭과 전속력으로 충돌했고 폭발은 운전자를 삼켜버렸다. 그녀는 아들을 만나지 못하고 그렇게 죽었다.
- 날짜를 따져보니 서경이 붕평마을에서 기형의 회색뱀을 만난 이후부터이다.
지금 상황과 아무 관련이 없는데 가만히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그런 막연함이 선희는 불길했다.
- 방과 후 텅 빈 교실에서 책을 챙기던 조주애는 임미화를 생각했다.
"전화까지 해서 씹어댈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지 혼자 천사드립을 해?"
텅 빈 교실에서 노한 음성이 메아리쳤다. 그녀는 교탁에 손을 척 짚었다.
“나만 나쁜 년 됐잖아?"
- 노숙자 하나가 파출소에서 형사계로 넘어왔다. 그는 '나는 자연산이다' 횟집의 수족관을 파괴한 용의자였다. 낮에 차 형사와 함께 동아아파트를 찾았던 김 형사가 파출소 순경한테서 그를 인계받아 취조에 나섰다.
"어족 자원이 뭔 죄가 있어 수족관을 깼어?"
"변화하는 색깔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습니다."
"그게 뭔데?"
김만호 형사는 능글능글하게 물었지만 노숙자의 대답은 더없이 진지했다.
"숨 쉴 때마다 무늬가 바뀌는데 색상도 변화합니다."
"당신이 훔친 오징어 말하는 거지?"
"그것의 정체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건 기어 다니는 공포입니다."
"기어 다니는 공포?"
김 형사는 냄새나는 의복에 어울리지 않는 노숙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실생활과 동떨어지면서 현학적이었다. 오호, 혹시 이 사람 사연이 있어 숨어 다니는 학자는 아닐까?
- 설신보살은 인사도 생략하고 야단을 쳤다.
"보다시피 잡혔는데 뭐가 끊이질 않아? 형사한테 위촉받고 날 취조하러 왔어?"
"뱀 사건이 계속 터지고 있어. 다흥 말고 당신이 있는 여기 섭주에서!"
"뜬금없이 무슨 뱀 타령이야? 엮으려면 소하고 엮어야지."
"소머리 쓴 그 여자의 신랑이 바로 뱀의 왕이야!"
최영우는 푹하고 웃었다. 설신보살의 진지한 모습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뭐냐는 질문에 '수학 과목만 치는 대입 시험'이라고 대답하는 '사차원' 같았다.
- "무당은 부업이고 동화 작가가 아가씨 정체야? 내가 하자던 굿 안 해서 찾아온 모양인데 한 푼도 없어. 체포당하고 다 압수당했어. 훔친 돈이거든."
"이제 실토하네! 도박으로 딴 돈 좋아하네. 짚단 더미 안에 넣은 돈, 상갓집 돈이지?"
"맞아. 문제 있어?"
"저주받은 흉가가 죽은 자한테 가야 할 돈을 받아들이니까 귀신이 눈을 뜬 거야. 저승노잣돈하고 비슷하게 생각하면 돼."
- "이봐요 보살님, 나한테 그 사파왕인지 뭔지 얘기 좀 해줄래요?"
이 형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차 형사의 표정은 진지했다.
"저도 믿진 않지만 얘길 해보라는 건 방금 뱀을 언급하셨기 때문이에요. 사실 며칠 전에 제선정에서 큰 뱀 한 마리가 고양이들에게 죽은 사건이 있었어요. 고양이들이 죽은 건 그 뒤의 일이에요. 현장에 있던 여성은 지금 행방불명인데 그 사람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 "내 말을 이해하려면 예습이 필요해요. 이 책은 섭주에서 일어난 기이한 무속 신화를 열거한 책이에요. <붕평마을 전설>이란 부분만 읽어보면 돼요. 이걸 먼저 읽으면 다 얘기해 드리죠."
"원래 책을 안 좋아하는데 꼭 봐야 해요?"
"지금도 어딘가에서 사람들이 뱀한테 죽고 있을 거예요. 귀찮아도 읽으세요. 그래야 이해가 가능하니까."
차 형사가 책 표지로 눈길을 떨구었다.
- <통악산 무속 신화>는 대학교 전공서적처럼 크고 무거웠으며 낡았다. 바쁜 데 무슨 짓들이냐 투덜거리는 이 형사를 무시하고 그는 책을 펼쳤다. <다흥과 섭주의 동기감응>, <돌아래 마을 비화>, <올빼미 눈의 무녀, 치효성모 전설>, <귀경잡록은 실재하는가>를 넘긴 후에야 비로소 <붕평마을 전설>을 접할 수 있었다.
- <사파왕과 우녀의 전설>
일단 인용문을 들어 글의 분위기를 잡고자 하는데,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를 보면 이런 글귀가 나온다.
- 주 :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조선 중종 김안로가 유배지에서 기록한 야담 설화집. 위 인용문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 민속학자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의 저서 <조선의 귀신> 중 '민간에서 믿고 있는 귀신: 사정(蛇精)’에 소개한 용천담적기 내용을 발췌.
- 경북 용궁현 근처의 진산에 살고 있는 강 선비가 산길에서 해가 저물어 어떤 동굴 안으로 들어가 쉬려고 하였다. 그곳에 한 노옹이 숙박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사냥 나간 세 남자가 곧 돌아올 텐데 자칫 잘못하면 어떤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니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강 씨는 공포에 질려 도망쳤지만 사방은 어둡고 길도 보이지 않아 할 수 없이 가까운 숲 속에서 하룻밤을 지내려고 하였다. 잠이 들려고 할 때 산골짜기가 진동하는 소리에 놀라 눈을 뜨자, 세 마리의 큰 뱀이 스르륵 동굴 안으로 들어가 대장부로 변신하여 노인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한 장부가 산야를 찾아다녔지만 사냥감이 없어 물을 길러 온 용궁현 수리(首吏)의 딸 발뒤꿈치를 물어 기혈을 충분히 빨아먹고 왔다고 이야기했다.
노인은 이 이야기를 듣자 매우 놀라면서 큰 실수를 하였다고 질책했다. 현에서 으뜸가는 관리이고 보면 불가능한 일이 없으므로 각종 명약을 찾기도 하고 빌기도 할 것이고, 또한 만약 정월 상해일(上亥日)에 기름을 그 상처에 바르고 낫 이음쇠에다가 기름을 발라 울타리에 꽂아놓으면 우리 일족은 모두 죽게 되는데 정말 대단한 사람을 해쳤다며 탄식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선비는 다음날 아침 용궁현으로 가보았다. 과연 수리의 딸이 앓고 있었고 사람들이 야단법석을 피우며 모여 있었다. 강 선비는 산중에서 들은 이야기를 해주고 상처에 기름을 바르고 기름을 칠한 낫을 울타리에 꽂고 빌고 나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동굴에 가보았더니 네 마리의 큰 뱀이 겹쳐서 죽어 있었다.
- ... '물에 떠내려간 집채만 한 뱀'으로, 문제의 뱀은 눈이 셋에 갑옷 같은 비늘 껍질을 갖고 있다 했다. 굵기는 통나무요, 길이는 대략 30자인데 긴 몸을 이용해 기반이 탄탄한 목표물을 척척 감으며 유연하게 떠내려갔다고 했다. 어떤 맹인은 이 광경을 보지 못했으면서도 뱀의 정체가 인간들에게 진노해 모습을 드러낸 동해바다 용왕이라는 풀이를 남겼다.
무수한 작은 뱀들이 떼를 지어 떠내려갔다는 징그러운 목격담도 있었다. 이 현상에는 비를 내리게 한 이무기들이 멈추는 방법을 알지 못해 저희들도 휩쓸려갔다는 해석이 따랐는데 사실상 이무기라는 전설의 동물을 직접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 이 눈을 믿지 못할 현상들의 해석은 긴 흉년에 시달려 오관의 기능이 저하된 사람들의 환영이라는 게 가장 그럴듯했다. 백성들의 고달픔이 하늘에 닿아 종말론적인 믿음이 대두되고 세상이 어지럽던 시절이었다.
- 또 다른 목격담 중에는 '소를 타고 떠내려 온 처녀'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소의 등에 업힌 채 조난 신호를 보내는 처녀를 실제로 보았다. 다흥에서 홍수를 만나 떠내려 온 이 처녀는 사공들이 내민 장대를 잡지 못하고 표류하다가 섭주 붕평마을에 이르러서야 구조가 되었다.
- 당시의 붕평마을은 남자들 없이 과부들만이 사는 촌락이었다.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지상으로 올라온 처녀는 소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촌장이 불상사의 원인을 묻자 처녀는 닷새 전부터 다홍에 장대비가 시작되었는데 집이 계곡 아래에 있어 변을 당했다 했다. 식구들이 피난 준비를 하는 동안 그녀는 외양간의 소를 꺼내오다가 순식간에 산사태가 일어나 집을 덮쳤다.
미처 나오지 못한 부모형제들은 그대로 파묻혔고 이들을 구하려다 동분서주하던 처녀도 불어난 물을 이기지 못하고 흙무더기와 함께 떠내려갔다.
떠오르고 가라앉으며 흘러가다가 죽음에 이르기 직전 따라온 소가 그녀를 등에 업었다. 방향도 없이 무작정 헤엄치던 소도 어느 때부턴가 힘이 다해 자맥질을 거듭하다가 죽음이 임박했을 때 한 무리의 여자들이 달려와 둘을 구조한 것이다.
- 이 가련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에 과부촌 사람들은 그녀에게 외양간이 달린 오두막을 한 채 주고 마을에 살게 했다. 오갈 데 없는 그녀는 크게 기뻐하며, 별심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촌장이 지어준 우녀(牛女)라는 이름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우녀는 섭주 사람이 되었다.
- 홍수가 그치자 우녀의 얼굴에도 재난의 상흔이 사라졌다. 그녀의 얼굴에 과부촌 사람들은 놀랐다. 악취 풍기던 외양 속에 은행나무 열매처럼 아담한 미모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혀 농부의 여식답지 않은 그 미모는 유명 기루의 기생을 떠올리게 했고 보기 드물게 큰 쌍꺼풀은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다행히 여자들만 모여 사는 마을의 특성이 그녀의 초월적인 미색에 남편이 흑심을 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잠재웠다. 쓸데없는 시비라도 있을까 봐 우녀는 항상 먼저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였고 묵묵히 소와 더불어 밭을 갈았다. 애초 오두막집을 얻을 때에도 그녀는 마을에서 가장 떨어진 헌 집을 달라고 했는데, 이 어둡고 외딴 주거의 선택으로 그녀의 겸손은 더 많은 칭찬을 받았다.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고 텃세를 부리지 않았다. 과부촌에 살기에는 아까운 청춘이라며 대처로 보내려고도 했으나 우녀가 생명의 은인들과 사는 게 도리라며 거절했다.
- 옥화는 지나친 우녀의 친절에 얼굴 가죽 안의 탈바가지를 본 듯했고 무엇이건 비위를 맞추는 행태에 상대방의 정신을 해이하게 하는 심리적인 전략을 느꼈다.
- 마을은 1인 1가구로 서른 채의 집에 서른 명의 과부가 살았다. 달도 없어 깜깜한 어느 밤이었다. 과부촌에 적응하지 못하고 늘 대처로 떠나고 싶어 하던 양평댁에게 우녀가 찾아왔다. 우녀는 상주 목사를 지내다 퇴임해 고향 다홍으로 낙향한 김목산 대감이 부정한 재물을 많이 갖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양평댁이 우녀에게 그 얘기를 왜 자기한테 하냐고 물으니 그녀는 지난 장마 때 떠내려 온 그 집 금궤를 자기 집 소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했다. 김 대감댁에 곡비(哭婢)로 일을 나가봤기 때문에 금궤를 잘 안다는 우녀는 아무도 몰래 둘이 차지해 한양으로 뜨자고 했다. 의심하는 양평댁에게 우녀는 뭔가를 보여주었다. 보자기에서 꺼낸 순간 촛불 끈 방이 환해진 그 물건은 황금이었다. 재물이 발하는 빛이 양평댁의 눈을 멀게 했다.
- 어디서나 징그럽게 턱을 이완시키는 뱀의 모습이 보였다. 냇가에는 개구리가 사라졌고 곳곳의 새둥지도 텅 비게 되었다.
뱀은 종류도 다양했다. 녹색 몸에 검은 눈을 가진 뱀, 얼룩무늬에 올빼미 같은 눈을 가진 뱀,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뱀, 능구렁이, 살모사, 까치독사, 산무애뱀, 백사...
그 많던 쥐도 씨가 말랐는데 살아남은 것들은 산으로 도망쳐 들쥐가 되었다. 하지만 산속에도 뱀이 늘어났기에 들쥐가 되어도 안전하지 않았다. 새끼 노루, 어린 승냥이까지 뱀에게 잡아먹혔다.
- 뱀의 출몰이 절정에 달했던 그날 아침은 통악산에도 변화가 있었다.
나무와 풀숲으로 가려진 산야마다 소리 없는 움직임이 있었다. 사람이 날개가 있어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마치 산 자체가 머리를 터는 듯한 요상한 광경을 볼 수 있을 터였다. 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 날이었음에도 풀이 움직거렸고 가지가 휘어졌다. 풀이 사사삭 소리를 냈고 그 안에서 어떤 것들이 잽싸게 움직였지만 과부촌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거나 느끼지 못했다.
- 비밀스런 움직임은 우녀의 집을 방향으로 잡고 있었다. 가까운 곳의 새가 날아오르고 사슴이 뛰어 달아날 때 우녀는 동서남북으로부터 신속히 좁혀오는 포위망을 눈치챘다. 그건 뱀들이 다가오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주문을 외우며 품속에서 방울을 꺼내 흔들기 시작했다. 딸랑거리는 다급한 음향이 온 마을에 울려 퍼졌다. 농사에 몰두하던 과부들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집을 에워싸고 돌던 움직임이 정체를 드러냈다. 무장한 군졸들이었다. 구군복 차림에 전립을 쓴 현감이 환도를 뽑자 창칼을 든 무수한 군졸들이 풀숲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들 뒤편에는 촌장의 은밀한 지시로 길 안내를 맡은 옥화가 있었다.
"요녀가 동패를 부르려 한다! 막아라! 방울을 흔들지 못하게 하라!"
-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았고 말을 걸지 않았다. 급격히 불러오는 배만큼이나 우녀는 바깥에서 무서운 계획이 형세를 불려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 옥사의 문이 열린 것은 이틀 후였다. 길게 늘어선 횃불 사이로 처음 보는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하나같이 늠름함과 냉혹함을 고루 갖춘 헌헌장부들이었다. 그들은 한양에서 파견된 다섯 명의 포도청 종사관들이었다. 천리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이들의 행적은 사건의 중차대함을 알려주고 있었다.
관할 구역인지라, 섭주 현감이 우녀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네가 그간 여럿 마을을 결딴낸 영악한 계집이란 걸 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오랑캐를 쳐부수는 손자병법은 물론 귀신 다루는 음양비법까지 통달한 분들이다. 네가 아무리 사람들을 속이는 구미호 일지라도 이 종사관들 앞에서는 소용없다. 그동안 사람들을 어떻게 해쳤는지 순순히 자백해라."
- 다섯 명의 종사관은 포도청의 인재들이었다. 한양의 미제사건은 물론 지방의 대형 사건도 이들이 관여하면 해결을 보았다. 그들 역시 불온서적 <사파대왕현신록>을 읽은 적이 있고 우녀를 따르는 신비스런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뱀 신이 결부된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믿지 않았고 오히려 우녀와 장문도를 지능적인 살인마 부부로 보았다.
- 확실했다. 눈 셋의 거대 뱀이야말로 그녀의 진짜 지아비였던 것이다. 과연 사파왕이 떠난 후 그녀의 건강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었다.
현명한 이방의 권고로 현감은 마침내 그녀를 옥에서 꺼내 죽을 먹게 했으나 그녀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결국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그녀는 죽었다. 그녀가 죽은 자리에는 신방울과 청동거울 하나가 놓여 있었다. 현감은 땅에 묻은 황소의 시신을 꺼내 우녀와 함께 태워버리라 명했는데, 토막 난 황소의 신체는 조금도 부패하지 않아 모두를 놀라게 했다.
- 현감은 인근의 무당을 불러 굿을 한 뒤 사악한 요물의 처리에 관해 심각하게 논의했다. 무당은 우녀의 머리에 소대가리를 씌워 그녀가 마지막으로 악행을 떨쳤던 붕평마을의 제선정 아래에 묻으라 했고 관헌들이 이를 집행하자 무덤 주변에 부적 붙인 말뚝을 여섯 개나 박았다. 붕평마을 과부들은 저주받은 땅을 떠났고 세월이 흐르면서 과부촌은 천민촌이 되었다가 전설의 망각과 함께 평범한 민촌이 되었다.
- 우녀 가까이 두면 좋지 않은 기운이 생겨난다 하여 신방울과 청동거울은 우녀의 시신에서 백 리나 떨어진 다흥으로 보내졌다. 풍수지리에 능한 도인이 음기가 가장 약한 땅을 선택해 깊숙이 파묻게 했다. 도인은 절대로 이 위에 집을 지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저주의 흉사를 모르는 후대 사람들이 이 땅 위에 집을 지었다. 그 집에 살먼 사람들은 하나같이 병을 앓거나 사고를 당해 죽어 나갔고 마지막으로 지은 집은 3일 만에 주인을 돌연사로 보내 오두막집 대신 흉가라는 이름을 당당히 얻게 되었다.
짚단이 층으로 쌓인, 저승길 입구 같은 이 집은 현재도 다흥의 어느 학교 앞에 가면 볼 수 있는데, 건드리면 무서운 일을 당한다 하여 관청에서도 철거하지 못한다 했다.
- 우녀가 묻히고 나서, 붕평마을 제선정에는 이상한 목격담 하나가 돌았다. 키가 장승처럼 크고 회색 갑옷을 입은 장군이 무당이 땅에 박아놓은 말뚝을 다 뽑아 강물에 던진 후 스스로 땅속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이었다.
목격자는 풍을 맞아 정신이 혼미한 과부였다. 사람들이 확인하려 했지만 우녀를 묻은 땅이 평탄하고 잡초도 변화가 없었기에 과부의 정신상태를 파헤치려 들었지 굳이 땅속까지 파헤치려 들지는 않았다.
- 어느새 책에 빠져든 차 형사가 복잡한 머리를 드니 설신보살 이희수는 잠시 밖에 나가고 없었다. 믿지 못할 이야기였지만 신비롭고 경이로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환상과 현실의 연결지점 때문이었는데, 이전까지 차 형사의 발이 철저히 현실 쪽에 서 있었다면 지금은 양쪽에 한 발씩을 담근 기분이었다. 강서경의 아파트에서 보았던 뱀도 헛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에 그는 퍼뜩 머리를 흔들며 부정했다.
- 차 형사는 강서경이 이 책을 보고 외운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저절로 똑같은 대사를 읊었다고 생각했다. 김목산, 오음과 한성. 송선희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개입되고 있다는, ...
- "학교의 허락을 맡아야 수색도 가능하겠죠?"
"그렇죠. 잘 아시네요."
차 형사의 입장을 고려해 그녀는 홀로 교장실을 찾았다. 차 형사는 설신보살과 함께 가고 싶었는데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가 무녀가 아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설신보살은 후회할 거라는 말만 남기고 학교를 나왔다.
"경찰도 나를 믿어주는데 이 학교 선생들은 정말 고리타분해요."
"경찰도 경찰 나름이죠. 나 말고 다른 경찰은 안 믿을 겁니다. 사실 저도 다 믿진 않고요."
"차 형사님은 어째서 나를 믿는 거죠?"
"여긴 섭주잖아요."
그는 커피를 두 잔 가져와 하나를 보살에게 권했다.
- "아까 먼 인연이 있다 얘기하셨는데.. 생각해 보니 저의 삼촌도 형사였거든요. 보살님처럼 다흥 사람이었어요. 예전에도 무속과 연관된 어떤 사건을 수사하신 적이 있어요."
"지금은 계급이 높겠네요."
"그때가 경장이었으니 지금은 서장쯤 되었겠지요. 행방불명된 지 30년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요."
"전 원래 섭주 사람이에요. 5년 전에 다흥으로 이사 갔지만."
"난 다흥에서 섭주로 이사 왔는데 가만히 보니 우리는 이상한 대조를 이루는군요."
"사파왕의 거울 이름이 뭔지 알아요? 회연경(回緣鏡)이에요."
"그게 무슨 뜻인데요?"
"돌고 도는 인연의 거울이라는 뜻이죠."
차 형사에게 처음으로 보인 보살의 미소가 매력적이었다. 여자 친구가 없는 차 형사는 왜 그녀의 사파왕 전설을 쉽게 신뢰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그런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가 일순간에 구겨졌다.
"그 방울과 거울을 파괴해야만 두 번 다시 뱀의 왕이 다른 시대에 부활하지 못할 겁니다."
- 그녀를 관찰하는 느낌이었다. 거울 속에서.
- 윤 여사는 몸살을 앓고 난 서경의 기행을 떠올리며 여럿의 실종이 그녀와 연관이 있다는 무서운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등이 간지러워 그녀는 다시 한번 뒤돌아보았다. 거울 속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줄기가 거울에 반사되어 목사의 머리를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건 마치 창 모양의 빛이 목사의 머리를 관통한 듯한 인상이어서 여사는 공포로 몸을 떨었다. 속히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
- 유명 블로거들이 올린 섭주 맛집 중에 '돌아래 매운탕'이 있었다. 돌아래마을 난정호수에서 잡힌 민물고기를 매운탕으로 조리해 파는 수십 년 전통의 식당이었다. 자연산만 고집하는 사장의 양심에 특유의 양념이 조화되어 풍미는 소문을 만들었다. 어떤 블로거는 저주받은 호수 난정호가 1976년에 받아들인 목 없는 시체들 때문에 물고기 살이 풍부하다는 글을 올렸다가 삭제했는데, 괴소문이 자꾸만 번져 결국 '돌아래 매운탕'은 저지대 붕평마을로 이전했다. 관광객 덕에 가게는 여전히 번창했고 악소문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기에 사장 부부는 옮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 아직 죽지 않은 채 몸통이 지상에 붙은 그녀는 하늘을 보며 얘기했다.
"난 이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여자였지만 스무 살 때 받은 몸주를 통하여 신의 세상에서 살 수 있었어. 두 세상을 오가며 돈도 명성도 모았지. 세속의 욕심이 신이 내린 직분을 잊게 했어. 이제야 내 할 일을 깨닫고 처음으로 후세를 위해 좋은 일을 했어. 하지만 내가 졌어. 저 귀신을 너무 가볍게 보았어."
- 설신보살의 몸주는 특이하게도 자신과 같은 세월을 살다가 죽은 친할머니의 혼백이었다. 이 할머니는 이문보살이라고 불렸다. 그녀는 1980년대 후반에 정금옥이란 여자에게 내림굿을 해주다가 강신을 성공시켜 주고도 무서운 살을 맞았다. 정금옥과 그녀 몸주와의 관계에 대해 누설하지 말라는 벌인 셈이었는데, 이 살로 이문보살은 가슴팍에 닿도록 뽑혀져 나온 혀를 죽을 때까지 입안에 넣지 못한 채로 살아야만 했다.
반면 이 접촉에 의해 그녀의 무력도 원기 왕성해져 사업이나 혼인 같은 데서 용함을 발휘했다. 병 주고 약 주듯, 살 내리고 부를 안겨준 셈이었다.
- 이 할머니가 죽자 손녀가 꿈을 꾸었다. 혀를 가슴까지 늘어뜨린 이문보살이 나타나 손녀를 호랑이에 태워 산천초목을 달리게 했다. 땅속에 묻힌 사람과 동물의 시체들이 소녀의 눈에 보였다.
잠에서 깨어난 소녀는 팔다리가 마비되고 허공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를 30일 간이나 듣게 되었다. 그것은 죽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였다. 백약이 무효였고 병원에 가도 소용없었다. 30일이 지나자 소리만 들려오던 시체들이 이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허공에 가득 찬 시체들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려고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소녀는 악착같이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병이 악화되었다.
-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남자는 신분증부터 내보였다.
"경찰입니다."
"혼자서 오셨어? 단속하러?"
안미영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나도 구경하게 해 주십시오."
"형사 나리가 수사를 해야지 귀신 쫓는 굿은 왜 보고 싶은데?"
"내가 아는 무녀가 죽었어요."
"설신보살을 말하는 거로군."
안미영이 차 형사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젊고 강인한 형사의 숨결에서 술 냄새가 났다. 즐겨서 마신 게 아니라 괴로워서 마셨음을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안미영이 빙그레 웃었다.
"내가 옛날에 알던 누구랑 닮았는데? 혹시 성이 차 씨는 아니겠죠?"
"맞습니다."
"과연 사파왕의 회연경이로군.”
- "인연의 거울? 혹시 제 삼촌 차종환 씨를 아세요?"
"몰라요. 난 이걸 보고 얘기한 거예요."
안미영이 인터넷 화면을 가리켰다. 지도가 사라진 화면에는 옛날 어떤 민속학자가 찍은 거울과 방울 사진이 있었다. 그 오래된 사진 속에도 뱀은 있었다.
- "사파왕에겐 오성신장이라고 불리는 다섯 아들이 있어. 세속의 눈으로 보면 더듬이가 붙은 다섯 마리 뱀에 불과하지만 저 너머 세상의 눈으로 보면 갑옷 입은 다섯 장수야. 우녀가 그들을 낳았을 때 포도청 종사관 다섯 명이 이 뱀들에게 몸을 빼앗겼다.
사파왕의 장수가 된 다섯 종사관은 곳곳에서 사람들을 뱀의 공물로 바치다가 인간의 수명이 다하자 땅속에 몸을 숨겨긴 잠을 잤어. 그들이 수면 중에 흘린 염파에 감응하는 자는 꿈속에서 그들을 보게 되고 홀리게 되지.
이곳 CCTV를 확인하니 서경이의 신통력에 반응해 가장 먼저 깨어난 놈은 거울과 방울을 지키던 장남이었어. 그놈이 지상에서 맞닥뜨린 건 사파왕이나 우녀가 아니라 굶주린 길고양이들이었지. 더듬이 하나로 사람을 조종하는 뱀이라도 고양이 앞에선 한낱 지렁이일 뿐이야. 깨어나자마자 싸움에 휘말린 놈은 갈기갈기 찢겨 죽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네 마리 동생은 더 깊이 모습을 숨겼어. 우리는 그 놈들부터 찾아야 해."
- 윤 여사는 언제나 뉴스부터 확인하고 틈틈이 교회에 나가 이제는 볼 수 없는 남편과 서경을 위해 정성스런 기도를 올렸다. 새로 부임한 목사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현장예배를 지양하면 그녀는 순순히 명을 받들어 영상예배를 드리고 집에서 기도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교회에서나 집에서나 전혀 다르지 않았다. 아마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윤 여사 같은 참 신앙인을 가장 먼저 천국으로 인도하리라. 하지만 그런 윤 여사도 두 번 다시 섭주를 찾지 않았다.
저주받은 장소라는 걸 알았기에.
- 앞으로도 섭주는 예기치 못한 공포로 사람들을 노릴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어 공포를 강화시키고 아픔을 알아내어 약화시킨 후 깊은 어둠으로 유인할 것이다. 그것이 섭주 땅을 기름지게 하는 자양분임을 알기에. 아무리 멀어지고자 노력해도 섭주는 또다시 사람들을 부를 것이다. 아니, 사람들이 제 발로 섭주를 찾을 것이다.
- 그것은 눈을 가리면서도 공포영화를 즐기는 이치와도 비슷하다. 혹은 젊어서 고향을 떠나고 싶어 한 사람이 막상 떠난 후엔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치와도 통한다. 지긋지긋하지만 그립기도 한 곳, 초과학적인 비극과 고통과 죽음이 살아서 숨 쉬지만 향수와 교훈과 새로운 삶을 가져볼 수도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섭주다.
- 우리 모두가 자라온 고향 안에는 작은 영역과 큰 영역을 아우르는 나름의 섭주가 있다. 폭력에 시달린 곳, 돈에 고통받은 곳, 사람 때문에 아파한 곳, 눈물 때문에 눈을 뜰 수도 없지만 그마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 그늘이 볕을 가려 사람의 얼굴을 어둡게 만든 곳.
그곳이 바로 섭주다.
- 누구나 공포를 피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희망은 계속될 것이다.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삶은 계속될 것이다.
작가의 말
<피할 수 없는 상갓집의 저주: 살>과 <신을 받으라>를 쓸 땐 괜찮았는데 <올빼미 눈의 여자>부터 집필만 시작하면 몸이 아프고, 꿈자리가 어지럽고, 헛것이 보이고, 눈 속에 불덩이가 들어앉은 듯해 완성에 애를 먹었다.
내 스스로가 무서워지자 방향을 바꿔 한국의 유명한 전래동화를 SF 해학 호러로 바꾼 <신 전래동화>를 쓰는데 작년 한 해를 보냈다. 그 결과 육신이 건강해지고 혼백도 맑아졌다.
그러자 원진살(元嗔煞)을 맞은 것처럼 잠시 미워했던 무속소설이 다시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소설에 나오는 영덕군의 삼사해상공원에 수시로 가서 플롯을 짜고 캐릭터를 구상했으며 스토리를 써 내려갔다.
완성하고 보니, 몸이 아픈 건 운동을 게을리해서고, 꿈자리가 어지러운 건 걱정이 많아서고, 헛것이 보인 건 음주의 증가 때문이었으며, 눈 속의 불은 시력저하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올빼미 눈의 여자>를 집필할 때 산에서 봤던 대감 차림의 수염 기른 남자는 정말 환각이었을까?
무속과 연관된 뉴스를 많이 접하는 요즘이다.
신을 빙자하여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가짜 무속인은 처벌받아야 마땅하지만, 신을 의탁하여 타인에게 선을 행하는 참무속인은 존중받아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 들어오지 않은 한국전통의 무속은 우리 민족의 기복신앙이었고 궁극적으로 '널리 사람을 복되게 하는데' 존재의 가치가 있다.
무서움보다는 아름다움이 많고, 꺼림칙함보다는 신비로움이 넘치나, 허구적 공포물로만 보이는 무설(巫說)을 선 보여드림은 필자의 재주가 용렬한 까닭이다.
그런 만큼 독자님들께 부끄럽지 않은 장르소설이 되도록 열과 성을 다했다.
<섭주>의 원고를 처음 받아본 대표님과 편집자님이 필자가 놀랄 정도로 좋아해 주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의 작은 꿈(夢)을 풍족하게(實) 이뤄주신 그분들(books)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2021년 7월
박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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