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준녕
출판 : 텍스티(TXTY)
출간 : 25.09.09
딱 기분 좋은 날씨다.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은 기분 좋은 바람결.
창밖으로 내다본 하늘은 벌써 파랗게 빛나는데, 휴일에 외출하면 얼마나 번잡할지가 저어 된다.
<제-지워진 이름들>은 제목만 보고 선택했었다. 박해로 작가에 영향을 받아 무속 관련 소설들을 찾아 읽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실물을 받아 들고 표지를 살펴보고 나서야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의 저자 김준녕이라는 걸 알았다.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지는 않았지만, 내 기억에 분명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은 SF였는데...? 조금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제>를 읽었다.
내가 느낀 김준녕 작가는, SF나 코미디나 풍자 같은 특정한 프레임에 가두기 어려운 작가다. 김준녕 작가는 언제나 '인간'과 그 본질을 바라보려 노력하고 그 심연 안에서 그가 본 것들을 쓴다. 장르는 그걸 담아내는 그릇의 무늬, 겉으로 드러난 표현형일 뿐으로 매번 달라질 수 있다.
<제>에 담긴 인물상들은 우리에게 무척 친숙하다. 그들의 마음과 고통과 고민을 내 것처럼 헤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인물이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이건, 외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이건 '알 것 같은' 그 느낌. 그것이 바로 준이 말하는 "아니, 넌 한국인이야. 그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야."일까.
그러나 다른 국적의 인물들이라고 아주 낯선 타인들인 것도 아니다. 그들 역시 나름의 문화와 규율을 가지고 테두리 안의 것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다.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이방인들이 '주류'에 들어오는 순간, '이물질'이 되는 것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는 이주자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 자리가 아니면 네 자리, 한 발 끝으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자와 비집고 들어오려는 자는 서로를 닮아갈 수밖에 없다.
엔젤타운의 주민들이 성경에 매달리고 이단에 날을 세우는 모습은 민경과 준의 가족들이 부적을 지니고 기원하는 모습과 닮아있다. 그들이 그렇게나 절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누군가가 '옳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옳다면 저들이 그릇된 것이요, 저들이 옳다면 내가 그릇된 것이다. 단 하나의 정답만이 있는 세계는 필연적으로 경쟁과 재단, 심판이 생겨난다.
흥미가 생기면 생기는 대로 끌려가 보자 싶어 손 가는 대로 읽었더니.
박해로, 김준녕, 아서 매켄, 미쓰다 신조와 에드거 앨런 포로 흘러들었다. 그렉 이건은 지금은 닿지 않아 다음 기회에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
읽힌 이들의 글들이 준과 준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합쳐지듯 겹쳐져 떠오른다. 분명 다른 작가들의 글인데도 묘하게 닮은 것 같다. 하나의 시리즈를 읽고 있는 듯 이어지고 연결되는 느낌이 기묘하다.
내게는 김준녕의 <제>와 배명훈의 <타워>보다는, 김준녕의 <제>와 박해로의 <섭주>다. 미쓰다 신조의 <기관>이다.
음. 아무래도 오늘은 읽기를 잠시 멈추고 바람을 쐬러 외출해야겠다.
<경여년>과 <서녀명란전>은 올해 안에는 다 정리할 수 있기를.
- 민경은 와인을 따라 놓고도 오래도록 마시지 못했다. 와인 향이 물안개처럼 테이블 위를 뒤덮는 동안 그녀는 오직 자신의 검은 눈동자만을 움직일 뿐이었다. 눈만 살아 있는 목각인형 같았다. 그녀의 시선은 붉은 와인을 거쳐 흰 접시 위 정갈하게 담겨 있는 반찬들에 잠시 머물렀다. 곰취부터 시작해 호박잎, 취나물, 고사리까지 모두 미국에서도 자라는 것들이었지만 한국에서 난 것에 비해 워낙 억세서 먹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민경은 부엌 한켠에 놓여 있는 박스들을 다시 보았다. 박스 상단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었다.
- 와인 냉장고 앞에 선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와인들을 훑었다.
와인을 꺼내 드는 한의 몸짓에서는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은 능숙하게 오프너로 와인을 열고 민경의 잔에 천천히 와인을 따랐다. 한이 따른 와인이 소용돌이치며 이미 민경의 잔을 채우고 있던 와인과 한데 뒤섞였다. 서로 다른 피가 섞이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마셔 봐."
한의 얼굴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민경은 식탁 위에 놓여 있는 두 와인병을 번갈아 보았다. 병에 똑같은 라벨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지역, 같은 회사에서 만든 와인인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둘의 생산 연도만이 달랐다. 각각 1982년산, 1979년산 와인이었다. 라벨에는 십자가를 거꾸로 들고 있는 목사님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민경은 MTV에서 본 악마 분장을 한 밴드들을 떠올리며 팝 록이 유행인 요즘 시대에 어울리는 라벨이라 생각했다. 한이 보채듯이 물었다.
"어때?"
민경이 조심스럽게 잔을 들고서 소리 내어 한 모금 마셨다. 한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는 민경의 반응을 살폈다. 민경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모르겠어."
- "이제 먹으면 안 돼?"
민경은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한은 민경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방에 들어가더니 무언가를 챙겨 왔다. 비커와 스포이트였다. 민경은 대답 없는 한의 반응에 다시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후 다시 한번 물었다.
"그건 왜?"
한은 냉장고에서 생수를 여러 병 꺼내 비커에다 따르고는 스포이트를 반복해서 씻어 냈다. 이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한은 민경의 와인 잔에다 스포이트를 가져다 대고는 물을 한 방울씩 아주 천천히 떨어뜨렸다.
"겉보기에 큰 변화는 없어 보이겠지. 색도 없는 데다, 냄새도 나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하나가 전부를 바꿔."
- 물에 와인을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과는 다른 광경이었다. 그것이 물이라는 거대한 집단에 와인이 침입하여 정복하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그 반대는 와인이 피라냐 떼처럼 물방울을 뜯어 삼키는 듯했다. 한은 민경에게 와인 잔을 건넸다.
"자. 이렇게 마셔 봐. 젓지 말고."
민경은 조심스럽게 와인 잔을 들어 올려 입술에 가져다 댔다. 전과는 다르게 풍미가 배로 살아난 듯한 느낌이었다. 민경은 와인을 연달아 삼키더니 상기된 표정으로 한에게 물었다.
"이런 건 어떻게 안 거야?"
- 데이브의 말에 폴은 양고기를 두 접시나 더 주문했고, 내친김에 칼은 와인을 한 병 더 주문했다. 데이브는 테이블 위로 넘나드는 음식들을 보며 셈을 해보았다. 이번 거래로 한은 회사에 이런 레스토랑 열 개는 한번에 열 수 있을 정도의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마냥 기쁘지는 않았다. 한국의 정치 스캔들에 한이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소문이 한에 대한 질투와 동시에 무시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데이브는 알고 있었다. 비리나 부패가 아니라면 동양인이 그런 막대한 성과를 낼 리가 없다고 다들 생각했으니까. 데이브도 한이 성과를 내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그럼에도 데이브는 은근슬쩍 한을 떠보았다.
"어떻게 알았지? 한국에 정보원이라도 있는 건가?"
한은 또다시 웃어 보일 뿐이었다. 폴이 입에 고기를 한가득 넣은 상태로 말했다.
- "로버트 존슨?"
"그 왜, 재즈 기타리스트 있잖아. 사거리에서 영혼 팔아서 유명세 얻은 후 한순간에 사라졌다는."
칼이 와인에 물든 검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아니면 동양의 저주라도..."
그 순간, 한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 희진은 한에 대한 것들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자산, 능력, 외모와 기타 등등. 미국 한인 사회에서 한의 등장은 영웅 출현에 비견되면서 후배들이 그를 보며 꿈을 키워가고 있다고.
민경은 한을 사랑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외면에 이끌리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으나, 그녀는 한이 설령 돈이 없다고 하더라도, 혹은 동화 속 왕자처럼 잘생긴 얼굴과 탄탄한 몸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다고 하더라도 그의 곁에 있으려 했다.
오히려 민경은 한이 조금은 평범한 인간이기를 바랐다. 그녀가 매번 느끼는 왠지 모를 위화감은 아마도 그의 외적인 면에서 비롯된 것일 테니까. 한과 함께 모임에 참석하거나 그의 지인을 만날 때마다 받는 시선들을 견딜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들은 유학생인 민경에게 출신 대학, 직장, 부모님의 직업 등을 물어보고는 자기들끼리 가난한 나라에서 와서 이 정도면 성공한 것이라며 은근슬쩍 그녀를 까내렸다. 민경은 손톱을 깨물었다.
"그래도..."
저토록 확신에 차서 말하는 희진에게 민경은 자신의 생각을 쉬이 말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민경은 보이지 않는 어떤 촉에 의해 자신이 좌우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희진이 콧방귀를 뀌었다.
- 세계화의 물결에 아시아계 아이들이 그야말로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오려 하는 중이었다.
아이들은 금세 괴롭힘에 반항하지 않는 다른 아이들을 찾아내 괴롭히기 시작했다. 중국계, 인도계, 베트남계 등 상대적으로 소수인 그들은 머리채를 붙잡힌 채 학교 이곳저곳으로 끌려다니며 불법 체류자, 마약 밀매상, 미국의 암 덩어리라는 말과 함께 침을 맞고, 바닥에 내쳐졌다.
그들은 민경을 향해 도와달라 손을 뻗었다. 민경이 그녀가 자기 자신을 위해 그랬듯이 자신들을 위해서도 이빨을 드러내 주기를 바랐다. 유일하게 다른 아이들의 괴롭힘에 용기 있게 맞선 사람이 바로 민경이었으니까.
- 민경이 여자아이를 노려보자, 아이는 잇자국이 남아 있는 팔뚝을 감싸 쥐었다. 금방이라도 싸움이 날 것만 같았다.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민경은 무표정하게 그대로 현장을 지나쳤다. 근근이 불길이 일렁이던 초가 완전히 꺼져 버린 순간이었다. 원망 섞인 외침과 기세등등한 욕설이 민경의 등 뒤로 몰려왔다.
민경은 속으로 되뇌었다. 지금 걸음을 멈추는 순간, 영원히 제자리걸음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저들의 손을 붙잡으면 발목에 벽돌이 묶인 조직의 배반자처럼 바닥으로 침전해 버리고 말 것이라고.
- 이 지옥 같은 삶에서 민경은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다. 맨손으로 이 기회의 땅에 도착해 마트, 세탁소, 세차장 등 어엿한 사장이 된 주변 한인들을 보며 민경 역시 이 땅에서 성공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냉정해야 했다. 죽어 가는 아이가 집에 있다며 매대 물건을 도둑질하다 걸린 이를 경찰에 넘겨야 했고, 추위에 몸을 떠는 노숙자를 한밤중에 쫓아내야 했다. 총을 들고 상점 지붕 위에 모여든 사람들처럼 내 것을 챙겨야 했다. 사회를 완전히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라면 사회에 올라서야 한다는 것이 민경의 생각이었다.
-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민경은 네 군데의 대학교에 합격했다. 합격 통보를 받은 그 순간, 민경은 트렁크를 펴 놓고는 짐을 모조리 때려 넣었다. 몇 없는 옷가지에 구멍이 난 신발들을 쑤셔 넣어도 트렁크의 반절조차 챙기지 못했다. 챙길 것보다 버릴 것이 더 많았다. 나사가 빠져 오른쪽으로 크게 기운 책장에는 표지가 닳은 공책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쓰고 지우기를 수십 번 넘게 반복한 탓에 종이를 쥔 반대편 손가락의 지문이 비쳐 보일 정도였다.
민경의 서랍 안에는 손가락보다 짧아진 연필부터 잔뜩 때 탄 지우개와 더불어 둘둘 말린 헝겊이 있었다. 민경은 조심스럽게 헝겊을 펴 보았다. 주황색 부적과 염주 한 다발 그리고 누군가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 든 붉은색 주머니가 보였다. 민경은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절대 놓고 다니지마.'
- 그러나 민경은 그것들을 모조리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렸다. 어머니가 민경의 손에 들려준 그것들은 세탁소 아주머니의 폭력이나 학교 아이들의 괴롭힘으로부터 민경을 보호하지 못했다. 민경은 오롯이 민경 자신의 힘으로 역경들을 넘어왔다고 믿었다.
방아쇠가 당겨지듯 민경은 닥치는 대로 한국에서 가져온 것들을 쓰레기봉투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과거라 딱지가 붙은 모든 것들에 가난이 덕지덕지 묻어 있어 지긋지긋했고, 진절머리가 났다. 마음 같아서는 한국에서 난 것들을, 심지어는 민경자신의 몸과 기억마저도 내다 버리고 싶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민경은 탈피한 연체동물처럼 지난날의 흔적들을 말끔히 치울 수 있었다.
- 민경은 차마 집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현관에 서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왜 이래? 나 무서워, 그만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민경은 조심스럽게 한의 집 내부를 훑기 시작했다. 화장실과 거실, 부엌과 침실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다른 공간을 둘러본 적이 없었다. 한은 민경의 행동반경을 그 네 공간으로 제약했다. 민경이 방에 관심을 두려 하면 값비싼 음식으로, 혹은 화려한 뉴욕의 볼거리로 민경의 시선을 돌리려 했다. 그럼에도 민경이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하면, 그는 사람 좋은 얼굴로 자신의 결벽증에 관해 말하면서 이곳들은 자신만의 공간으로 두어 달라고 했다.
- 한의 방들은 낯설었다. 연애를 하며 한의 집에 동거하다시피 살아왔건만, 본 적 없는 물건들과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기묘한 분위기에 민경은 자신도 모르게 잔뜩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문고리를 돌려 보았다. 마치 잠든 연인의 살가죽을 벗기는 것만 같았다.
- 첫 번째 방은 드레스 룸이었다. 잘 다려진 하얀 와이셔츠들이 한쪽 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셔츠 목덜미와 소매에도 얼룩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옆에는 테일러 숍에서 달에 한 번씩 맞춘 정장과 구두들로 가득했다. 그 옆에는 베르사체, 아르마니 등 명품들이 늘어져 있었다. 물건이 놓여 있던 선반을 조심스럽게 검지로 쓸어 보았다. 먼지 하나 묻어 나오지 않았다. 이전 식사 자리에서 보았던 비커와 스포이트도 한쪽 구석에 전시되어 있었다.
- 두 번째 방은 예술 작품들로 가득했다. 회화부터 장식품들까지. 중심부에는 검은 돌이 하얀 천에 감싸인 채로 유리 케이스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묘하게 시선을 끄는 매력에 민경은 자기도 모르게 오랫동안 그 주변을 배회했다. 이어서 단연 민경의 눈길을 끈 것은 방의 끝부분에 위치한 완성되기 직전의 그림이었다. 민경은 유리 케이스에 든 검은 돌을 지나쳐 그림을 향해 다가갔다.
- 한이 따라 그리고 있는 그림은 네덜란드의 화가 히에로니무스가 인간의 쾌락을 주제로 그린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중에서도 작품의 오른쪽 패널 부분인 <지옥>이었다. 민경은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난해하다는 작품의 유명세에 걸맞게 독특한 색감과 어딘가 일그러져 있는 존재들이 그림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민경은 옆에 놓여 있는 1대 1 크기의 모사품과 한이 그린 것을 비교해 보았다.
한의 그림은 원작과 달리 고통받는 인물들의 인종이 더욱 다양했다. 백인, 흑인 그리고 동양인들이 곳곳에 보였다. 특히나 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한 늙은 동양인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그림 여러 곳에서 배가 갈라지고, 상처에 끓는 물이 부어지는 등 가장 심한 고문을 받고 있었다. 더욱 소름 돋는 것은 그가 웃고 있다는 점이었다.
- 그들을 지칭하는 '홍인(Red skins)'이라는 말과 달리 그들의 피부는 붉지 않았다. 죽은 인디언들의 얼굴에 붉은 것이라고는 자기 몸 안에서 뿜어져 나온 피뿐이었다.
- "모두 다 감옥에 처넣고 싶었지. 인종을 가리지 않고 말이야."
나는 아버지의 주정이 듣기 싫어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아버지가 외쳤다.
"넌 네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아?"
내 눈은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는 아메리칸 버번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꼭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몸속에 넣는 것 같다고 말했다. 스카치위스키에는 아일랜드인들의 영혼, 사케에는 조선인들의 영혼, 아메리카 버번에는 흑인 노예들의 영혼. 그렇다고 그가 그들에 대한 어떤 연민의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버번만을 보더라도 끝없이 늘어선 콘벨트와 그것을 경작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노예들, 옥수수를 운반하기 위해 철도 건설에 동원된 부랑자들이나 하층민들이 떠오른다며 술맛이 떨어진다고 했으니까. 술에 취한 아버지가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네가 누구 아들인데? 누구 손자인데?"
2층 끝자락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가서도, 두꺼운 솜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도, 아버지의 주정은 창문을 쳐대는 바람처럼 계속해서 들려왔다. 분명 이곳, 엔젤타운에 오기 전까지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창문 너머로 밤바람에 흔들리는 옥수수밭을 보았다. 처음 엔젤타운에 도착했을 때가 떠올랐다.
- 내 고향, 엔젤타운에 관한 최초의 기억은 푸르른 옥수수밭이었다. 아버지의 핑크 캐딜락이 아무리 굉음을 내며 도로를 내달려도 밭의 끝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드높게 솟은 옥수숫대들이 바람을 타고 일렁일 때마다, 햇빛이 잎 사이를 스치며 파도처럼 번졌다. 멀리서 보면 바다 같았다. 고요하고 평온해 보였지만, 그 키 큰 풀들 사이에 무엇이 숨어 있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곳은 풍경이자 경계였고, 침묵하는 벽 같은 장소였다.
- 두 번째로 떠오르는 기억은 사람들의 시선이다. 밭에서 일을 하던 이들은 아버지의 핑크 캐딜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창문을 내리고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으나 그들은 햇볕에 그을린 얼굴을 찡그린 채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 모습들이 옥수수밭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던 허수아비처럼 보이기도 했다.
차에서 내리기 직전, 우리 가족에게 쏟아지는 그들의 시선에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우리가 이사할 집 마당으로 모여든 그들은 자기 옷에 묻은 흙도 털지 않은 채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감된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
- 취업에 성공하고도 삶은 민경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마치 불행이란 구렁텅이가 민경을 갈망하듯, 사건은 출근한 지 3개월이 지난 여느 때와 같은 아침에 벌어졌다. 민경은 잠에서 깨 스트레칭을 하고 샤워를 한 후 출근했고, 커피를 한 잔 사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마주친 어맨다와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눴다. 딱히 나눌 이야기도 없었지만 그들은 그날의 날씨에 대해 말하거나 사무실 종이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억지 미소를 보였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민경은 문이 열리자마자 쏜살같이 빠져나가 책상 앞에 앉았다. 그제야 그녀는 무표정해질 수 있었다. 누군가는 파티션이 답답하다며 치워 버리자고 하지만 민경은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처음 합격했을 때의 간절함이 사라지는 데는 3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놀랍도록 무능한 상사와 비효율적인 시스템, 그리고 그로부터 반복되는 업무에 민경은 빠르게 적응했다. 밤을 새운 프로젝트들이 연달아 무산되는 것을 보며 남몰래 2년이나 3년 후에 이직할 회사들의 연봉이나 복지를 살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컴퓨터를 켜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친애하는 민경, 그간 당신이 회사에 보여 준 ... '
민경의 호흡이 가빠졌다. 어맨다가 보낸 이메일이었다. 특정 단어에만 눈이 갔다.
'당신을 해고하게 되었습니다.'
- 모든 일처리는 빠르게 진행됐다. 경비원들이 찾아와 민경에게 박스를 내밀더니 물건을 담으라 했다. 민경은 어맨다의 자리로 달려갔으나 회의에 들어갔기에 만날 수 없다는 말을 들을 뿐이었다. 동료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민경을 마주한 그들은 그녀를 위로하면서도 힘내라며, 다른 곳에 취직할 수 있을 것이란 영양가 없는 말들을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자리로 돌아와 어맨다에게 메신저로 해고 이유를 물으려 했다. 회사 재정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근무 태도와 퍼포먼스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동료들과의 관계? 그러나 이미 컴퓨터는 회수된 상태였다. 경비원들은 민경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고, 민경은 박스에 물건들을 쓰레기 담듯이 쏟아 넣고는 회사 정문을 나섰다.
- 현기증에 무너질 것만 같았다. 혼자는 아니었다. 약 열 발자국쯤 걸었을 때 민경처럼 멍하니 회사 로고가 박혀 있는 박스를 들고 있는 한 여자가 보였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간단했다. 바로 동양인에, 여성이라는 점. 여자가 고개를 민경 쪽으로 돌리는 순간, 민경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착할수록 무력감만 깊어질 뿐이었다. 민경을 비롯한 유학생 출신의 아시아계 친구들 대부분은 바꿀 수 있는 것에만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다리를 붙잡힌 게가 결국 스스로 다리를 잘라 내고 도망치는 것처럼.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 "민경아. 아버지가..."
불행한 일은 한꺼번에 몰려오기 마련이었다. 아버지가 석 달 전에 뺑소니를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숨기고 숨기다 곪아 터진 종기처럼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민경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민경은 급한 대로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려 했으나 다들 난처해하며 금방 전화를 끊으려 했다. 배신감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는 지구 반대편에서 죽어 가고 있었고, 민경에게는 당장 이틀 후를 살아갈 생활비도 없었으니까.
밤새 전화기를 붙잡고 있던 민경은 조심스럽게 성경을 펼쳐 들고 한 장씩 가만히 넘기다 한 지점에서 멈췄다.
- 엔젤타운은 변화의 물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옥수수밭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둘러싸여서 말이다. 땀을 흘리며 일하는 농부들, 아이를 돌보고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들도 교회 종이 울리면 모두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멀리서 보았을 때 엔젤타운은 지극히 평화롭고 아늑한, 향수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봤을 때는 전쟁터였다. 평화로운 풍경 속 살을 베는 식물들, 먹고 먹히는 동물들, 술에 취한 가장에게 매 맞는 아내와 아이들, 은행과 기업에 착취당하는 농부들, 그들은 절망을 삼켜 내며 하루를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그들의 평화는 보이지 않는 이들을 향한 폭력으로 지탱되었다.
본능적으로 아이들을 비롯해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들의 규칙에 의문을 품었으며, 이 답답한 감옥 같은 마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문제는 기성세대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부자가 늘 부자이기를, 석탄 광부들은 사람들이 늘 석탄을 쓰기를, 성직자들은 사람들의 믿음이 변치 않기를 바라듯이 말이다. 이들은 규칙과 배제라는 도구들을 이용하여 젊은이들의 시선을 변화로부터 돌리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 사이를 갈라놓고 싸움을 붙여야 했다.
- 쉬운 방법이 하나 있었다. 그 방법은 수백만 달러의 돈을 쓸 필요도, 사람들 앞에서 목이 터져라 연설을 할 필요도 없었다. 단지 사람들 사이에 단 한 줄의 선을 긋기만 하면 됐다.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흑과 백, 남성과 여성 등. 사람들은 무리를 나누고, 시비를 걸고, 싸우고, 상대가 무너지면 고문했다. 이유야 만들어 내면 그만이었다. 키가 작아서, 살이 쪄서, 피부색이 검어서, 노래서, 여자라서, 남자라서, 눈이 찢어져서, 성기가 길어서, 짧아서. 일명 '평균'의 사람들이 모든 것을 정했다.
- 나는 영화 속 카우보이들이 말하는 개척자의 정의를 믿지 않았다. 야만의 정의는 피와 함께했으며, 기준에 들지 않는 것들은 먹을 수 있으면 사냥감이었고, 먹을 수 없다면 장난감에 불과했으니까. 무수히 많은 폭력 속에서 나는 그 사실을 체화했다.
- 다행히 적어도 나는 엔젤타운에서 물리적으로 심하게 차별을 받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선생들은 개인 경호원 수준으로 내 주변을 살폈고, 교장은 하루에 한 번 교실을 직접 찾아와 문제아라 낙인 찍힌 잭, 피트, 존을 불러다 말썽을 일으키지 말라면서 주의를 주었으니까.
아버지가 학교에 발전 기금을 잔뜩 쏟아부은 덕분이었다. 뉴욕에서 냈던 것의 절반도 되지 않았지만 이런 시골 학교 ...
- "이건 왜 하는 거야?"
내 물음에 잭이 침을 내 발치에 뱉고는 말했다.
"왜? 싫어?"
나는 마음을 바로잡았다. 이들에게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이 동양인 아이가 자신들과 비슷한지 아닌지가 중요할 뿐이었다. 나는 잭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 조심스럽게 거처를 향해 한 발자국 내딛었다. 연기를 향해 가까이 다가갈수록 눈이 뻑뻑해졌고,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콜록. 폐가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연기 속에 들어섰을 때 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체로키족이라고 알아? 그 인디언 놈들이 이렇게 연기를 피워 놓고 죽은 영혼과 대화를 했대."
눈물이 줄줄 흘러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디 한 군데라도 잘못 밟으면 거처가 폭삭 무너질 것만 같은 불안감에 나는 발을 내밀고서 더듬거렸다.
"언제까지 있어야 해?"
나는 밖을 향해 외쳤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임시 거처 한쪽에는 타다 남은 재들과 지난해 떨어진 낙엽들이 뒤섞여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꺼져 가는 모닥불이 보였다.
- 아이들에게 엔젤타운은 말 그대로 천국이었다. 당장 내일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할 필요도 없었고, 전쟁이나 기아는 어른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로만 전해져 올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전달된 이야기들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어른들은 대개 술에 취해 혀가 꼬인 상태에서 극히 일부의 사실에 자신의 과오가 드러나지 않게끔 살을 덧붙여 진실을 왜곡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자신이 적군 몇 명을 죽였는지를 말했지, 자신의 전우가 몇 명이 죽었는지는 말하지 않는 식이었다.
- 동심을 지키려는 어른들 나름의 마음이었겠으나 시대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라디오 속 수많은 이야기들과 상점 TV 속에서 방송되는 LA와 뉴욕의 전경을 보고 듣지 않 았더라면, 록 스타들의 노래를 듣지 않고 그들의 삶을 몰랐더라면, 당시의 많은 엔젤타운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처럼 삶의 한 순간일 뿐인 반항기를 보낸 후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하고, 주일이면 교회에 가고, 어느 순간병에 걸리거나 노화로 병원 신세를 지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외부 세계의 자극은 우리 가족의 등장과 함께 무참히 엔젤타운을 침범했다. 우리 가족이 타고 온 차와 들고 온 TV, 결정적으로는 농산물을 운반하기 위해 낸 도로로 도시의 것들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그러한 자극들로 인해 순간적으로는 즐거움을 느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얼마나 '지루한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되며 저주에 걸리고 말았다. 이른바 '권태의 저주'였다.
- 지옥에 고통이 있다면 천국에는 권태가 있었다. 이 권태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에 위협이 되지는 않았기에 우리들의 목을 얇게 쥐고 서서히 질식시키고 있었다. 아이들은 차라리 화를 내고, 맞설 수 있는 대상이 명확하게 있었으면 했다. 끓어오르는 피를 어디에다 쏟아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엔젤타운에서 할 수 있는 탈선이나 일탈은 기껏해야 부모님 몰래 찬장을 뒤져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 아이들이 나를 자신들의 무리에 넣어 준 것도 사실은 잠시나마 권태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나를 경계하는 것과 동시에 궁금해했다. 내게 온갖 것들을 물었다.
- 아버지 역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아버지가 포크를 집어드는 것과 함께 식사는 시작됐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옆집 사람들 좀 멀리 보내면 안 돼요?"
아버지는 접시에 시선을 두고서 말했다.
"왜? 거기가 무너지기라도 했어?"
"아뇨. 마을 사람들 시선 때문에요."
- 어머니도 엔젤타운에 오고 난 이후로 낯빛이 좋지 못했다. 부단히 마을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계속해서 집에만 있었다. 온종일 광고로 범벅인 라디오를 틀어 놓고는 메이시스 백화점에서 구매한 고급 찻잔과 접시들을 반복해서 마른 행주로 닦으며 하루를 보냈다.
외로웠을 것이다. 뉴욕 같은 대도시에는 동양인들은 물론이고, 한국인들도 많았다. 그들은 잘 훈련된 첩보 조직처럼 누군가 근처에 부동산을 계약하는 순간, 이사 오는 사람들의 집안 배경부터 소득 수준, 성격까지 알아내고는 자신들의 기준을 충족할 경우에만 서로에게 접근했다.
- 어머니는 그들의 모임에 충실히 참석했다. 그 모임의 이름은 '동양 여성 친목회'로 동양인 여성들의 인권 향상을 위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으나, 막상 그들이 모여서 하는 것이라고는 자신들이 산 명품이나 부동산, 더불어 자기 자식이 간 대학 등을 자랑하며 서로의 경쟁 심리를 자극하는 일뿐이었다. 어머니는 대부분 그들과의 경쟁에서는 승자에 속했다. 부동산업으로 쌓아 올린 할아버지의 재력 때문이기도 했으나, 동양인 남자도 대학에 거의 가지 못하던 그 시절에 동양인 여성으로서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학력을 이용하여 어떤 때는 해결사로, 또 어떤 때는 상담사로 모임에서 활동하며 주변의 존경을 받고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자극을 느낄 수 없었다. 이곳에서 장바구니를 들고 차를 끌고 나서더라도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아버지의 일터 혹은 교회뿐이었다. 다른 부인들을 만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파리에서 유행하는 옷을 입었다고 해서 드러내고 부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사람을 대함에 있어 목사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따르는지를 중요하게 여겼다. 백인, 남자, 기독교, 엔젤타운 출신 등 말씀이 그려 놓은 형상과 그로부터 다져진 이상은 명확했다. 그들은 뒤틀리고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어머니를 대학까지 나올 정도로 순종적이지 않고 드센 아내로, 나아가서는 도시 괴담과 추문의 주인공인 음란한 동양인 여성으로 바라보았다.
- 분명 우리를 겨냥한 말씀이었다. 그들 입장에서 백인이나 흑인들과 비교해 우리들은 신을 마주한 지 얼마 안 된 '미개한' 인종이었으니까. 아버지는 목사님의 말씀에 동조하듯 굳이 뭐라 대답하지 않고서 눈을 감은 채 혼자만의 기도를 이어나갔고, 정은 말을 알아듣지 못해 한국어로 된 기도문을 남들이 들리지 않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나는 준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준의 입술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기도문이 아니었다.
"태상 왈 황천생아 황지재아...”
말의 의미는 알 수 없었으나 말에 담긴 꺼림칙한 기운만은 명확하게 다가왔다. 갑작스레 등줄기에 한기가 느껴지며 누군가 등 뒤에 뾰족한 송곳을 겨눈 느낌이 들었다. 깍지를 강하게 쥔 채 나도 모르게 기도문을 속으로 외웠다. 정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고는 준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해."
잘 벼려진 칼날이 귓가를 스치는 듯한 서늘한 목소리였다. 정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말투였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눈을 감고 기도에 몰두해 있었다. 주변을 살피던 정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그는 내가 한국말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 듯 나를 향해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나는 시선을 피해 눈을 그대로 아래로 떨궜다. 정의 말과 표정이 따로 노는 걸보며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얼굴에 문득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졌다.
- 과거, 내게 친절했던 몇몇 얼굴들도 지금은 모두 뒷담화를 곁들인 조롱으로 변해 있었다. 한구석에서 잭이 담배를 피우며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다른 아이들은 무리 지어 작은 목소리로 수근거리며, 내 추락을 은밀히 즐기고 있었다. 폴이 주먹을 풀며 내게 다가왔다.
"잘됐다. 저거 언제 한 번 밟아 주려 했는데..."
금방 싸움, 아니, 일방적인 구타가 벌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나를 노리고 있는 아이는 폴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의 등 뒤에서 아이들은 한 명씩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시체를 마주한 하이에나들처럼. 주먹에 힘이 들어갔으나 마음 한켠에서는 무릎을 꿇고서 살려 달라 빌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싸워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거나, 죽이거나 끝이 예정된 결말이 눈앞에 그려졌다.
이전 학교에서도 그랬다. 한 번 얕보이기 시작한 순간, 아이들에게 먹잇감으로 인식됐다. 이유는 명확하면서도 명확하지 않았다. 남자답게, 어른답게 보이기 위해서 그들은 다른 아이들 앞에 서서 몸을 부풀리고는 다른 이들을 괴롭혔다. 내 시선에서 이런 행동은 전혀 남자답거나 어른답지 않았는데도.
- 아이들은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 쉽게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으로 너와 나의 편을 갈랐다. 키, 몸집, 운동, 그리고 피부색, 계산기를 두들기듯 아이들 간의 위계는 빠르게 정해졌고, 내가 엔젤타운으로 오기 전까지 그 위계는 계속해서 작동했다.
이것은 아이들이 영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학습된 본능이다. 먹잇감이 된 아이가 그들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세 가지뿐이었다. 졸업이나 전학, 아니면 자살. 단순하게 보았을 때 버티거나 부러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 준은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종종변화 여도합심 하신불복..."
폴이 놀란 얼굴로 내게 물었다.
"뭐라고 하는 거야?"
그러나 나 역시도 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교회에서 들었던 기괴한 준의 혼잣말보다도 더욱 뒤틀리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귓속을 파고드는 듯한 목소리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왔다. 아이들은 사탄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준을 보았다. 뚝, 하고 코드가 뽑힌 라디오처럼 기도가 멈추더니 준이 소리를 지르며 바로 섰다. 준은 몸과 두 팔을 빳빳하게 해서는 십자가 모양으로 서서 호숫가를 향해 돌아섰다. 폴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타고 흘렀다. 잭이 외쳤다.
"폴! 저 새끼 말려!"
- '한은 완벽하다니까.'
희진의 목소리가 민경의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한과의 첫 만남은 로맨스 영화나 소설의 도입부라 해도 무방했으나, 민경은 때때로 자기 자신을 매춘부, 창녀, 영혼을 팔아 버린 사람으로 여겼다. 자신이 한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 간의 만남이 지나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짜인 틀 같다는 것과 실직을 비롯한 민경의 모든 어려움이 한과의 만남으로 전부 해결되었다는 점에서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한은 민경에게 아무런 담보도, 심지어는 차용증도 쓰지 않고 돈을 빌려주었고, 민경은 아버지를 살릴 수 있었다. 그녀가 마땅히 한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한이라면 자신에게 빌려준 돈 정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라 억지로 합리화를 하려 했으나 무언가 쿡쿡 찔러 대는 통증이 한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아래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민경은 말을 흐렸다. 민경의 마음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솟구쳤다가 다시금 깊이 잠수했다.
'그 사람도 나를 이용하고 있는 거야...'
- 민경은 병원 관계자들의 태도에서 다소 어색함을 느꼈다.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서 불쑥 튀어나올 법한 불친절함은 이곳에 없었다. 의사들은 환자들 사이를 바쁘게 오가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한은 라일락 한 다발을 손에 들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민경의 손을 잡고 있었다. 축축한 민경의 손을 어루만지며 한이 말했다.
"긴장 풀어."
한은 민경을 향해 웃어 보였으나 그녀의 불안감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 바닥에는 '신의 전사들'이라 적혀있는 철제 현판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둘이 올라탄 엘리베이터는 25층 꼭대기에서 멈췄다. 엘리베이터 문은 곧장 병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병실 안은 1920년대 남부 대저택을 옮겨 놓은 듯 고풍스러웠다.
고동색 호두나무 의자와 책상, 두터운 벨벳 커튼이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고, 바닥에는 뒤덮은 페르시안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1층 로비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선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간호사 대신 푸른색 조끼 차림의 집사가 노크와 함께 시중을 들러 올 것만 같았다.
- 목사가 나타나자 한의 아버지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오래도록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의 어머니도 그 뻣뻣한 몸으로 목사를 향해 고개를 숙이려 애쓰고 있었다. 민경만이 목사를 빤히 마주 보았다. 목사는 살짝 미소를 짓고서 민경에게 말했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 민경은 더욱 강하게 구토감을 느꼈다. 누가 목구멍에 손가락이라도 넣고서 휘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목사가 민경을 보며 이어서 물었다.
"지옥을 믿으시나요?"
민경은 목사를 지나쳐 화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소리가 나지 않게 변기 물을 먼저 내리고 토악질을 했다. 속에 든 것을 모두 쏟아 낸 민경은 변기를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순간이었지만 검은 것을 토해 낸 것 같았다. 그것은 변기 속에서 첨벙거리며 꿈틀거리기까지 했다.
-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변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거울에 김이 서려 있었고, 그 위에는 한글로 '멈춰'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김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문 너머에서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레위기 20장 27절이라 말하는 한의 목소리에 이어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 돌로 쳐라..."
민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려고 했으나 차마 문고리를 당길 수가 없었다.
"... 제 피를 흘리고 죽어야 마땅하다..."
- "집중하세요. 지금도 봉사 시간입니다."
부목사님은 죄와 속죄, 그리고 구원에 대해 말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의 인도를 따르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고 했다. 그 신성한 과정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받은 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나는 부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준을 흘끗 바라보았다.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속죄받을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그들은 애초에 버림받은 존재들인가?'
- 그러한 의문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새 내 머릿속엔 과거 농장에서 할아버지에게 짓눌린 채로 나를 노려보던 노동자들의 얼굴이 준의 얼굴에 겹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탁 한 번 하지 않은 얼룩 묻은 작업복, 갈라진 입술, 그리고 검은 눈동자. 준의 얼굴은 그들과 기묘하게 닮아 있었고, 그 유사성은 내 안의 죄책감을 서서히 잠재웠다. 부목사님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교도들은 영원히 지옥 불 위에서 타오르리라.”
그의 말은 낡은 교회 벽돌처럼 무겁게 내 속을 짓눌렀다.
- 준은 배를 부여잡더니 바닥에 헛구역질을 했다. 그러자 패트릭이 준에게 다가가더니 쪼그려 앉아 턱을 강하게 잡아챘다.
"이단의 구정물로 바닥을 더럽힐 순 없지."
그러고는 걸레 빨던 파란 버킷에 준의 머리를 쑤셔 넣었다. 버둥거리는 준을 보던 패트릭의 표정은 고해성사를 할 때 나를 보는 목사님의 것과 비슷했다. 버킷에서 빠져나온 준은 꺽꺽 소리를 내며 억지로 구토를 참아 내려 몸을 비틀었다.
바닥에는 주머니가 떨어져 있었다. 주워 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먼저 주머니에 닿았다. 패트릭은 주머니를 주워 들고는 내부를 살폈다. 이상하게 내가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 패트릭의 손에는 노란 종이가 들려 있었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사용하는 지폐인가 싶었다. 그러나 종이 한 면을 가득 메우고 있던 붉은색 글자는 한글이 아니라 그림에 가까운 알 수 없는 문자였다. 교회에 있는 누구 하나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준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으나 본능적으로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즉, 없애 버려야 할 물건임은 알고 있었다.
준은 벌건 눈으로 패트릭을 노려볼 뿐이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패트릭은 부적을 하나씩 찢기 시작했다. 다시는 이어 붙일 수 없도록 아주 갈기갈기 패트릭은 그렇게 찢은 부적을 걸레 빠는 버킷에다 던져 넣고는 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 숲속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나도 모르게 절로 숨이 터져 나왔다. 숲속의 어둠은 빠르게 젖어들고 있었다. 전에 내린 폭우로 군데군데 파여 있는 도랑에 발이 빠질까 까치발을 들고는 조심스럽게 걸었다. 금방 옥수수밭이 보였다. 바람에 푸르른 줄기가 흔들리는 것이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옥수수 줄기들이 발걸음에 맞춰 넘어져 있었다. 꼭 사람 하나가 지나간 듯한 넓이의 길이었다.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우리 키보다도 높은 옥수수 줄기 벽들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이곳이라면 어떤 누구도 우리를 찾지 못할 것만 같았다.
- 고개를 돌렸으나 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고통에 떨리고 있으면서도 그 안온함을 놓지 않고 있었다.
"여기야."
나는 준의 목소리를 이정표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작은 바람에도 금방 끊어질 실타래 같았다. 한 발 한 발 나아갈수록 사방을 뒤덮은 어둠도 함께 진해져 갔다.
"다 왔어."
바로 옆에서 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속지 말거라.'
이상하게도 그때 마침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목소리가 발목을 잡아채는 것만 같았다. 악마의 속삭임, 배신자 등 속에서 피어오르는 말들은 섬뜩했다. 그러나 그와 달리 끝내 내 발걸음이 멈춘 곳에는 염소 머리를 하고서 피를 탐하는 악마가 아니라 상처 부위를 맨손으로 감싸 쥔 채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있을 뿐이었다.
- 세 번째 규칙은 싸움이 있는, 아니, 우리들만의 연극이 있는 날에는 꼭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거창한 일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대화를 하는 것뿐이었다. 먼저 나는 밤마다 준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식당에서 물건을 사는 단순한 회화부터 미식축구의 룰과 도시 전설 등 이야기의 가짓수는 무궁무진했다.
그날은 사스콰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날이었다. 전신주 같은 거대한 유인원이 숲을 돌아다니며 원주민들의 경고에도 겁 없이 캠핑하는 인간들을 말 그대로 찢어 죽인다는 유서 깊은 공포 설화였다.
- 나로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한국과 관련해서는 어느 하나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애초에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나를 미국인이라 부르지도, 그렇다고 한국인이라 부르지도 않았으니까. 준은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들어 본 적 없어?"
"난 한국에 대해 하나도 몰라."
준이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내게 물었다.
"왜? 넌 한국인이잖아."
"한국에서 산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난 한국인이 아니야."
그런데 준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 속에 있는 깊이 잠들어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내려는 듯이.
"아니, 넌 한국인이야. 그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야."
- 준의 말을 듣고서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구겼다. 과연 그렇게 단순하게 한국인이 될 수 있는 걸까? 나를 비롯해 우리 가족이 그곳에서 멀어지려 어떤 노력을 했는데? 예상치 못한 불쾌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이런 얼굴을 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준이 말을 이었다.
"언젠가는 너도 그걸 받아들이게 될 거야."
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만일 그의 목소리에서 일말의 주저함이라도 느꼈더라면 나는 그리 묻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내가 너랑 같은 한국인이라고? 아니야. 너도 그렇게 생각 안 하잖아. 너와 내가 어떻게 같아. 우리는..."
- 환하게 웃고 있는 한과 부모님의 미소를 보고는 그 마음을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한은 꽤나 능숙한 한국말로 말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한의 한국어에 민경의 부모님은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훤칠한 키와 잘생긴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골머리를 썩히던 집 문제를 해결해 주기까지 했으니까. 그들은 현수막이라도 걸 기세로 주변 친척들은 물론 동네사람들에게 한에 대해 자랑했다. 직접 만나 보니 성격까지 서글서글하니 웃음이 나지 않을래야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민경의 아버지가 한의 손을 잡아채고는 공항 밖으로 이끌면서 말했다.
"얼른 가자."
그때 앞서 가던 한을 살피던 민경의 어머니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민경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민경은 자신의 어머니가 주머니에 쑤셔 넣은 것을 꺼내 보았다. 부적이었다. 인사말보다 먼저 불쑥 내민 부적에 민경은 황당했다. 민경의 어머니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너, 기억하지? 그거 꼭 붙들고 있어야 한다."
민경이 가만히 부적을 손에 쥐고만 있자, 그녀의 어머니는 한이 볼세라 재빠르게 민경의 손에서 부적을 낚아채 민경의 주머니 속에 밀어 넣었다. 민경의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고리에 들어와 있는 이상민경이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 우직. 끝내 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의자가 무너져 내렸다. 다행히 밧줄은 간신히 기둥에 걸려 있었다. 준은 부서진 의자와 잘리다 만 전선을 번갈아 보다 밧줄 한쪽을 목에다 힘차게 감았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용기를 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띠리리링-
벨소리가 울렸다. 준은 화들짝 놀라 잠시 멈칫하다가 한번 더 울린 벨소리에 부모님이 깰까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수화기에서는 지직거리는 노이즈만 들릴 뿐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평소였더라면 끊었을 테지만 준은 누군가의 인기척, 아니, 누군가가 바로 옆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밥은 먹었니?"
들려온 목소리에 준은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말하고 싶었다.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고서 대답하려 했으나 목소리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일들이 많았겠지. 그 먼 곳에 갔으니 그럴 수밖에."
인기척이 느껴져 준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존재를 보고는 대답하려는 마음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전화를 끊어야 했다. 그러나 준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네가 어디 있는지 말해 줄 수 있니?"
말해서는 안 됐으나 마음과는 달리 준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여긴..."
- "준!"
정의 목소리였다. 술에 취한 듯이 이리저리 발소리가 어긋나게 들렸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도 정의 발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네 배냇저고리 안주머니를 보거라. 도움이 될 거다."
발소리는 이제 지하실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문이 벌컥 열렸고, 동시에 상대가 말했다.
"언젠가 보자꾸나."
-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정이 차고에 도착했을 때 준은 그곳에 없었다. 술로 벌겋게 달아오른 정의 뺨에 찬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불어온 곳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차고 한쪽에 창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준은 눈을 감고서 있는 힘껏 마당을 가로질렀다. 어디로든 가고 싶었다. 이곳으로부터 가능한 먼 곳으로. 그러나 달리고 달려도 준은 벗어날 수 없었다. 옥수수밭은 파도처럼 바람에 일렁거리고 있었다.
- "세상에 신은 한 분뿐이야."
"아니,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신이 있어."
준은 공책을 다시 펴더니 펜으로 무수히 많은 원을 그린 후 서로를 연결하는 기다란 곡선을 그렸다.
"신들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쳐. 죽고 사는 모든 것에 말이야."
공책 맨 뒷면에는 한 남자가 붉은 옷을 입고 방울을 흔드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남자의 발 아래에 날이 선 칼날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림에서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준이 말했다.
"원래 나도 무당이 되어야 할 운명이었어."
"그런 운명은 없어."
준이 내 말에 고개를 떨궜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섞일 수 없는 두 물감이 층을 만들고 겉도는 느낌이었다.
- 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목에 선명하게 남은 자국과 밧줄의 탄 자국이 방금 일어났던 일이 현실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띠리리링-
전과 마찬가지로 전화벨이 울렸다. 준은 예상했다는 듯이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할게요."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짧게 침묵한 후에 답했다.
"누가 듣고 있구나."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이들은 겁에 질려 마당에서 도망치고 없었다. 단 한 명만을 제외하고서. 패트릭의 오드아이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다음 날 저녁, 나는 준의 집 앞을 서성거렸으나 그를 만나지는 못했다. 집으로 돌아가서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도 마당을 비롯해 엔젤타운 어디에서도 준의 실루엣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새벽녘에 커튼을 걷고서 준의 방을 바라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불은 꺼져 있었고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주 주일, 준은 교회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정과 희는 맨 뒤에서 자리만 채우다 사라졌고, 후에 이어진 '신의 전사들'모임에서조차 아이들은 전부터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준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 한동안 나는 거실 구석에서 잠을 잤다. 준과 규칙을 파기한 이후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잠을 잘 때마다 흰 수염을 가진 노인이 마을 입구에 서 있는 꿈을 반복해서 꿨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를 향해 손에 들려 있던 검은 돌을 휘둘렀다. 그의 머리가 으깨지면서 피가 사방에 튀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보자꾸나.
- 화들짝 놀라 눈을 떠 보면 목사님께서 아버지에게 건네 주신 검은 돌이 보였다. 돌은 선반 위에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돌을 어루만졌다. 표면이 까끌까끌한 데다, 한쪽 끝이 날카롭게 깨져 있어 금방이라도 손에 상처가 날 것만 같았다. 마치 총이나 칼 같은 무기처럼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돌만 있다면 그 누구도 나를 해치지 못할 것 같았다.
- "신병이 사라졌냐?"
노인의 말에 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손자가 아픈데, 말이 너무..."
노인은 정의 말을 잘랐다.
"넌 그럼, 자식이 아픈데 그대로 이런 위험한 곳에 처박아두기나 하고."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정의 머릿속에 장면들이 스쳤다. 병원비가 턱없이 비싸 정신과 문턱에서 진료를 받지 못하고 나왔을 때와, 어느 정도 돈이 모였을 때도 준의 치료 대신이 편의점의 인수를 선택했을 때. '다음에는 꼭.' 그런 다짐으로도 해결되지 않던 문제가 눈앞에 노인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노인은 가늘게 눈을 뜨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법사라도 됐으면 모르는데, 지금은..."
노인은 개처럼 코를 킁킁대며 말했다.
"화랭이 정도만 되어도 다행이군."
- 법사 : 주로 경을 읽는 남자 무당을 가리키는 말.
- 화랭이 : 굿에 참석하는 남성 악사를 낮춰 부르는 말.
- "여긴 미국이에요. 아버지. 화랭이는 무슨..."
정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제가 왜 애를 이 먼 곳까지 데려왔는데요? 왜 애한테 윽박지르고 때렸는데요? 신이 도대체 뭐예요? 그것들을 제가 존중해야 합니까?"
"이놈!"
일순간에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준은 숨이 턱 하고 막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낼 뻔했다. 두 손으로 입을 막지 않았더라면 들켰을 것이 분명했다. 정은 잠시 몸을 움찔거렸으나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신내림을 거부하면 신병에 걸려서 병원에서 죽어 버리고, 신내림을 받아도 노예처럼 평생 끌려다니면서 무당질하다가 어느 순간 버려지면 반병신이 되는 이게 맞습니까?"
노인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네가 뭐라 하건 신내림을 피할 수 없다. 미국이건 불란서건 도망쳐 봤자지. 평안도 만신은 외국에 신아들이 몇 명이더냐?"
그러고는 홱 뒤돌더니 기어가는 거미를 손으로 잡아채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다. 노인이 창문 밖을 살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해 놓고, 이제 와서 위하는 척은."
정은 달리 대꾸하거나 대답하지 못했다. 정의 그런 모습은 또 처음이었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안절부절 말을 얼버무리는 정에게서 회개하라 소리치던 얼마 전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의 얼굴을 살피던 노인이 말했다.
"오래는 안 걸릴 거다."
- 노인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정에게 건넸다. '서울대학병원'이라 적혀 있는 갈색 서류봉투였다. 오랫동안 펼치지 않았는지 봉투는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정은 다급하게 봉투를 받아 열고는 속에 든 서류를 읽어 내렸다.
"이게 뭡니까?"
노인은 자기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 가만히 벽을 등지고 기대어 보니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며, TV 소리며, 심지어는 부모님의 속삭이는 소리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설마. 결혼이 깨지기야 하겠어?"
말들이 목을 옥죄는 듯했다. 자신의 선택 한 번에, 그 단 한 번의 선택에 꿈에서 깨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지독하고 가혹한 지옥에서 눈을 뜬 것만 같았다.
'만약 한과의 결혼이 없던 일이 되면 여기에...'
작고 좁은 곰팡내 나는 방. 윗집 아랫집의 소음이 그대로 전달되며 속을 헤집어 놓는 이곳에서 감옥보다도 더한 갑갑함을 느꼈다. 민경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도 나아가는 그들처럼 과거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 늦은 밤, 경상북도 상주시 야트막한 산에 위치한 절은 입구서부터 소란스러웠다. 민경의 어머니가 일주문 기둥을 붙잡고서 울부짖고 있었다.
"내 딸! 내 딸 살려 줘!"
민경은 어머니의 그 모습이 너무나도 싫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는 어머니 면전에 삿대질을 하며 미친년이라고도 했다. 민경은 부끄러워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끌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열이 심하게 나는 데다 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귓가에는 자신들을 받아들이라는, 이상한 환청까지 들려왔다. 참다못한 민경이 자기 귀를 때리면서 소리를 지르자, 민경의 어머니가 눈을 번쩍 뜨더니 민경을 와락 안아 들었다.
"넌, 너만은 안 돼."
- 그때였다. 멀리서 스님 한 분이 내려오고 있었다. 얼굴을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강한 인상이었다. 민경의 아버지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봉투를 건네려 했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민경과 눈을 마주치더니 그 자리에 나무처럼 우뚝 서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민경은 속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바람이 일렁이더니 저 멀리 대웅전을 밝히던 초들이 한순간에 꺼졌다. 스님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다른 가족이 다칠 수도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민경의 어머니가 민경을 더욱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 애만 구할 수 있다면.."
몹쓸 짐승이다.
민경은 불현듯 친척들이 한 말들을 떠올렸다. 저만 살려고 한다. 신의 벌을 받을 것이다. 민경의 부모님을 향해 친척들은 그렇게 손가락질을 해댔다. 스님의 눈빛도 사뭇 그들의 것과 결이 다르지 않았다. 스님이 말을 이었다.
- "애 혼자 멀리 떠나야 하는데도 괜찮겠습니까?"
"어디까지요?"
스님은 말이 없었다. 민경의 아버지는 큰 죄를 저지른 것처럼 다시 고개를 조아리고는 시키는 것을 모조리 하겠다고 말했다. 스님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경의 부모는 그의 앞에 꿇어앉아 감사하다며 울음 가득한 목소리로 빌었다. 스님은 민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절대 여기로 돌아오지 말거라."
민경은 스님과 눈을 마주칠 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여기서 자신이 수긍하면 정말 영영 엄마, 아빠 품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독하구나."
스님은 그런 민경을 향해 혀를 끌끌 차면서 그녀의 어머니에게 부적 두 장을 건넸다. 한 장은 민경에게 들려 보내고, 다른 한 장은 언젠가 민경이 이 땅에 다시 돌아온다면 그 남편에게 사용하라 단단히 일렀다.
- 민경은 자신의 부모님이 정말로 스님의 말을 따를 것이라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님은 이제 결단을 해야만 했다. 민경의 상태는 점차 나빠지고 있었다. 제사를 지내거나 굿을 하고 남은 음식이 아니면 먹은 것을 모조리 토해 냈고, 경기까지 일으켰다. 바싹 마른 북어처럼 혀가 굳어 말도 제대로 못 할 지경이었다.
민경이 가족들이 모두 죽을 것이라 말하며 눈을 뒤집고는 까무러칠 때 민경의 아버지는 결심했다. 몰래 문중 땅문서를 처분해 해외여행 허가를 받기 위해 공무원에게 줄 뇌물과 비행기 푯값을 구했다.
온 가족이 야반도주하듯 새벽에 공항으로 향했다. 워낙 급히 문서를 처분하느라 남은 돈으로는 오직 한 장의 비행기표만 구할 수 있었다. 민경의 어머니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민경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고, 민경의 아버지는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는 친구의 친척에게 연락을 해 놨다면서 미국에서 몸 건강히 있으라고 주문을 외우듯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다. 비행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승무원의 외침에 민경의 아버지는 민경을 붙들고 소리쳤다.
"어떻게든 살아남거라. 여기 생각은 하둥 말고."
- 민경은 혼자서 자기 몸보다도 거대한 캐리어에 짐을 꽉꽉 눌러 담고는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말기 암 환자가 신약을 쓰듯이 반쯤 포기하는 심정이었다. 민경은 창을 내다보다가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과 동시에 깊은 잠이 들었다. 환청 때문에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던 민경은 그날 오랜만에 꿈을 꾸지 않았다.
- 창밖을 살피던 민경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이 골목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가로막힌 오토바이가 클랙슨을 울렸고, 한바탕 벌어진 소란에 온 동네 사람들이 창문에 몸을 내밀고 있었다. 한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미안해! 민경아! 제발!"
사람들은 한의 시선을 쫓아 그 끝에 있는 민경을 바라보았다. 이 집도, 이 불안정한 삶도 어느새 모두 한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 민경의 어머니가 뭐라 말도 하기 전에 민경은 겉옷을 챙겨 들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한은 사람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자신이 사과를 해야 한다면서, 안 그럼 차라리 여기서 죽어 버리겠다고 소리치며 몸싸움을 했다. 장정 셋이 와도 한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단 골목에서 비킨 다음에 이야기하자며 한을 설득하려고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 "미안해..."
민경은 한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를 안아 주었다. 그간 그와 함께 보냈던 순간들, 그리고 앞으로 보낼 순간들이 빨리 감기 하듯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섬뜩한 장면이 나올 때면 자신의 등 뒤에 남겨진 부모님의 눈빛과 그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쌓아 올린 부와 명예를 떠올렸다. 그것들이 드리운 그림자에는 눈을 감기로 했다.
누구 하나만, 단 한 사람만 선택을 내리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었다. 민경은 모든 것을 묻어 두기로 했다. 한의 발작이든, 준이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든 민경이 마주하지 않으면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촉이라는 근거 없는 불안함보다 한이라는 사람이 명확하게 자신에게 보이는 것에만 순응하기로 했다. 민경에게 한은 구원의 대상이자, 동시에 구원자였다.
- 어둠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빛이 있기에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낼 수는 있었지만 그 존재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나는 이 마을의 어둠 속에서 내가 알 수 없는, 안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일들이 몸집을 키우며 서서히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준의 할아버지를 마주친 이후 단 한 번도 빙의를 경험할 수 없었다. 누가 들으면 하루아침에 병이 치료된 ‘기적’이라 생각하겠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잠을 자려고 해도 가슴 한 부분이 꽉 막힌 것처럼 조여 왔다. 빙의를 하지 않으니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을 준의 가족이 벌이고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 아버지가 아니고는 할아버지를 대체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약점이 있는 사람의 뒤에 서는 것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까지도. 나는 촨 아저씨에게 물었다.
"정말요?"
내 물음에 그는 합장을 하더니 혼잣말을 했다.
"金山."
나는 흠칫 놀랐다. 준이 교실에서 반복해서 뱉던 말이었다. 촨 아저씨는 그 말이 골드 마운틴(gold mountain)과 같은 말이라고 했다.
- "다들 금이 산처럼 쌓여 있다고 생각했어."
아저씨의 설명에 따르면 광기에 사로잡혔던 골드러시의 바람은 미국과 유럽을 넘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모두가 희망을 가지고 미국을 향해, 서부를 향해 나아갔다고. 아저씨가 속삭였다.
"그런데 황금산은 무슨. 그때 여긴 지옥이었어. 동양인들이 미국을 삼킬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황색 위협(Yellow peril)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호들갑을 떨 때였거든. 그것도 <뉴욕 타임스>에서 말이야."
이주민들은 금을 캐는 대신 철을 땅에 박아 넣었다. 그들은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잇기 위해 철로를 깔았다. '야생'이라 불리던 땅 위에서 백인들이 희망을 쫓아갈 수 있도록 발판이 되었으나 정작 그들이 받은 대가는 최소한 집과 식사는 보장받는 노예보다도 못한 대접이었다. 촨 아저씨가 눈을 크게 뜨더니 말했다.
"철도가 완성되자마자 학살이 벌어졌어."
- 그의 입가가 얕게 떨려 왔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지."
그의 발음은 꼭 혀가 굳은 것처럼 뻣뻣했고, 나를 향해 핀 손가락 마디에는 굳은살이 가득했다.
"이유야 다양했어. 이상한 주술을 부린다는 소문만으로도, 자기네들 물건을 도둑질한 것 같다는 의심만으로도 타겟이 됐지. 백인들은 차이나타운에 불을 지르고, 총을 쐈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
그는 스스로 목을 조르고, 머리에 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말로만 들어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나는 그의 행동을 멈추기 위해서라도 얼른 입을 열었다.
"들어 본 적 없어요."
이 땅 위에 그렇게 큰 사건이 벌어졌다면 내가 적어도 한 번은 들어봤어야 말이 됐다. 촨 아저씨가 말했다.
"역사는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사라져."
- 자리가 불편했다.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나눈 것만 같았다. 그에게 물었다.
"그럼, 뭉쳐야 하나요? 우리들이?"
촨 아저씨가 정색하며 내 손을 잡아챘다. 그리고는 내 눈을 바라보며 힘주어 말을 이었다.
"아니, 잘 생각해 봐. 여기서 누가 살아남았지?"
그때, 쿵 하고 무언가 부서지는 굉음이 났다. 촨 아저씨와 나는 문 밖을 내다보았다. 부서진 가구 앞에 널브러진 흑인 직원 한 명이 보였다. 아버지의 고함이 들려왔고, 다른 직원 둘이 쓰러진 흑인 직원을 들고는 어딘가로 옮겼다. 촨 아저씨가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네가 살아남기 위한 답은 거기에 있어."
- 마침 어머니가 나타나 촨 아저씨에게 봉투를 건넸다. 봉투를 건네받은 그는 밖에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지 확인하고는 종종걸음으로 차에 타 흙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그는 어쩌자고 내게 그런 말들을 했던 걸까? 나는 전병을 풀숲에 내던지고는 방으로 돌아섰다.
죽은 것들은 말이 없었다. 흩뿌려진 피는 빗물에 씻겨 내려갔고, 육체는 구더기에 뒤덮여 썩어 갔다. 남겨진 뼈도 벌레와 미생물들에 의해 풍화되어 흙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하나의 죽음이 둘의 죽음이 되고, 끝내 셋의 것이 되면 맥락을 형성했다. 사람들은 그 맥락을 뼈대 삼아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 여름날 도요새들의 떼죽음도 그랬다.
늦여름 물길을 따라 새들의 사체가 가득 들어찼다. 천사들의 계곡이라 불리던 이곳은 불과 몇 년 사이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폐허가 되어 있었다.
- 찔러.
귀에서 속삭임이 들려왔다.
죽여.
저 놈이 문제야.
이 순간을 목격하기 위해 나는 이끌렸던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잭의 칼이 노인의 심장을 난도질하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툭.
그때 하늘에서 뭔가 떨어졌다.
- 그뿐이었다. 어른들은 눈치를 보며 각자의 이해타산 때문에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으려 했다. 움직인 건 어른보다도 아이들이었다.
흰 가운을 차려입은 아이들은 숲 속 공터에 모여들었다. 천막처럼 드리운 침묵 속에서, 그들은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된 의식을 치르듯 조용했다. 그 한복판에는 패트릭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낡은 성경책이 들려 있었고, 입술은 허옇게 바짝 말라 있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패트릭은 성경의 한 부분을 읽어 내렸다. 한 번 더. 그리고 또 한 번 더. 반복적이었지만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보다는 경전을 외우는 사제 같았다. 패트릭은 반복해서 문장을 곱씹었다. 아이들은 패트릭의 말을 따라 했다. 그러더니 이내 어떠한 결론에 다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멸해야 해."
패트릭이 내린 결론에 토를 다는 아이들은 없었다. 이단은 죽어야 한다. 거짓말쟁이, 음란한 자 등 죄를 지은 사람들 중에서도 믿음을 저버리는 이들은, 혹은 거짓된 믿음을 가진 이들은 구원과는 가장 거리가 먼 존재들이었다. 아이들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망설임이 보이지 않았다. 패트릭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칼을 꺼냈다. 그는 기도와 함께 칼로 손바닥을 그었고, 흘러나온 피를 두 손가락으로 찍어 자신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저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패트릭의 손끝은 준의 편의점을 향하고 있었다. 멀리서 플라스틱 통을 들고 달려온 폴의 몸에서는 기름 냄새가 났다. 패트릭이 눈짓하자 폴을 비롯한 아이들이 모두 각자의 위치로, 각자의 역할로 마치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배치되었다.
- 나는 홀로 패트릭에게 다가갔다. 패트릭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속에는 강렬한 믿음이 견고하게 세워져 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맞는 걸까?"
패트릭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총이었다. 얼마 전 교회에서 사라졌다던 그 총. 패트릭이 가지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네가 끝을 내."
내가 받아 들기를 망설이자 패트릭은 총구로 나를 겨누며 말했다.
"안 그럼 너도 똑같이 될 거야."
함정에 걸린 것 같았다. 회색 지대에 있던 우리 가족은 이제 한중간에 서 있게 됐다. 이쪽이 아니면 저쪽, 저쪽이 아니면 이쪽. 이제는 생존을 위해 선택해야 했다. 거절한다면 준의 가족과 함께 분류될 것이었다. 나는 총을 받아 들었다.
- 대화를 나누며 웃거나 무표정하게 있었다.
"돼지는?"
한국말이 들려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한국말이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희는 커다란 검은 비닐 봉투에 무언가를 쓸어담고 있었다. 화려한 파티용 모자에, 동양풍 그림이 그려진 부채, 그리고 방울이었다. 희가 방울을 집자마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내가 그간 들었던 방울 소리임을 알아차렸다.
이어서 상점 주인은 마약이라도 건네듯 경계하며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무언가를 서랍에서 꺼내 들었다. 몸통이 납작하고 길이가 긴 칼 한 자루였다. 날이 바짝 서 있었다. 누굴 찌르기라도 하려는 걸까? 희는 누가 볼세라 칼을 받아 들고는 신문지에 둘둘 말기 시작했다. 순간, 거리에서 중국인 하나가 불쑥 나타나 내게 무언가를 물었다. 중국어라 뭐라고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겁하며 그에게 말했다.
"난 미국인이에요.”
그럼에도 그는 내 얼굴을 가리키며 손을 내젓더니 계속해서 무언가 말했다. 두려움을 느낀 나는 그를 밀쳐 내고는 다시 차로 돌아갔다. 트렁크에 올라탄 후에는 두 손을 모으고서 기도했다. 악을 몰아내어 달라고, 부디 우리에게 빛을 달라고. 그리고 어서 엔젤타운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 희가 차고에다 상을 펴고 그 위를 닦자 정은 오색 천들을 묶어 문 주변을 치장하기 시작했다. 오색 깃발도 함께였다. 희가 커튼을 치려 하자, 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들이 오지 못할 거야."
상 위에는 금방 음식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사과와 배 등의 과일들과 여러 식물의 줄기와 이파리를 데친 것들. 과거 할아버지 집에서 제사를 지낼 때와 비슷한 양상이었으나 몇 가지가 달랐다. 돼지머리가 하나 상 중앙에 놓였고, 살아 있는 문어가 박스째로 그 옆에 놓였다. 그 모습을 보니 문어의 다리가 내 속을 훑고 있는 것처럼 구역질이 나왔다. 나는 불현듯 혼잣말을 했다.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우리 가족이 행했던 제사들이 떠올랐다. 절을 하고 또 하면서 샘솟는 자기혐오와 동시에 느껴지는 일종의 죄책감. 아버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 나는 손톱을 깨물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상차림을 마치자 희가 정에게 말했다.
"아버님, 모시고 올게."
정이 희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이게 맞는 걸까?"
정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희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이젠 방법이 없어."
희는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를 벗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정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코를 찌르는 듯한 피 냄새와 함께 내 목이 답답하게 죄여 왔다. 검은 형체들이 사방에 득실거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숲에서, 옥수수밭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기괴한 몸짓으로, 제자리에서 뜀뛰기를 하듯이 움직이며 마을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 노인은 그을린 등을 보이며 미친 듯이 웃고 있는 준을 보았다. 노인이 그를 보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준의 입 모양이 점차 노인의 입 모양과 같아지더니 두 사람은 이내 같은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목소리는 점차 화음을 만들었고, 이내 거대한 한 목소리가 되어 그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자 불길이 한데 뭉쳐서는 전에 보았던 도깨비불의 형상을 하며 우리 머리 위를 맴돌았다.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찢어질 것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웃으면서, 동시에 쉴 새 없이 위아래 치아를 맞부딪히고 있었다.
딱딱딱딱...
준은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랍도록 무표정했다. 그가 아주 낮게 읊조렸다.
"생사."
그 말을 끝으로 둘은 동시에 쓰러졌다.
- 어떤 의사는 새롭게 연구되고 있는 약물을 사용하자고 말했고, 또 다른 의사는 과거 유행했던 전기 충격 요법을 사용하자고도 제안했으나 그때마다 정의 표정은 굳어졌다. 의사들은 모든 치료를 거부하는 정이 노인을 죽이려 한다고 뒤에서 수군거렸으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정은 기억하고 있었다. 3년 전, 파트타임으로 무덤 파는 일을 했을 때 보았던 병원 이름이 적힌 커다란 비닐 백들을. 관도 아닌 버석거리는 얇은 플라스틱 통에 담긴 시체들은 목사님의 기도문도, 사람들의 묵념도 없이 샌드위치처럼 한데 층층이 쌓여 묻혔다. 땅을 고르던 인부들이 관리인 몰래 속삭였다.
"대부분 유색 인종들이었어요. 대부분."
그렇다고 정에게 다른 마땅한 선택지는 없었다. 집으로 데려가자니 노인의 상태가 위중했고, 마을 밖 병원으로 데려가자니 또 돈이 문제였다. 노인을 이송하기 위한 구급차를 부르는 데만 해도 수백 달러가 필요했고, 장고 끝에 돈을 낸다고 말해도 정의 발음과 이름을 듣고는 전화를 대뜸 끊어 버리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났다. 노인은 제대로 된 치료한 번 받지 못한 채 방치됐다. 수확되지 못한 채 밭에 버려진 모난 옥수수처럼 침상 위에서 말라비틀어져 갈 뿐이었다.
- "잠깐만요."
간호사가 희를 복도로 불러 세웠다. 희는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맹수는 가장 약한 사냥감이 혼자일 때를 노린다. 겁에 질린 채로 간호사와 대화하던 희는 영수증을 받아 들고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간호사가 떠난 후 희는 오줌통을 받아 들고는 노인 앞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누구든... 제발 저희 좀 그만 괴롭히세요..."
희의 기도가 닿은 것일까?
그날 밤부터 노인의 상태는 빠르게 나빠졌다. 의사가 임종을 준비하라는 말을 전하려 했지만 병원에 그의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정은 다른 마을의 농장에서 급전을 마련하기 위해 죽어라 일을 하고 있었으며, 희는 경찰서 조사실에 있었다. 경찰은 그녀가 보험금을 수령하기 위해 일부러 편의점에 불을 낸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희는 억울했다. 분해서 경찰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용기도, 힘도,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희는 고개를 숙인 채 경찰이 말하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듣기만 했다. 동양인들은 영악하다. 그들은 수학에 능해서 돈에 미쳐 있다. 그때 희는 정해야 했다. 자신의 수중에 있는 돈으로 변호사를 선임할지, 아니면 노인의 병원비를 낼지.
- "너희 신은 너희를 지키지 못할 것이다."
준이 내 귀에 말들을 속삭였다. 내지른 비명은 부푼 목에 막혀 속에서만 달음박질칠 뿐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일부러 숫자를 입으로 셈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10, 9, 8..."
다시 눈을 떴을 때 준은 주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주머니에 든 권총을 있는 힘껏 손에 쥐었다.
- 신랑 입장을 기다리는 한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불과 수 분 후면 문이 열리며 결혼식이 시작될 것이었다. 이곳에 서기 위해 그가 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갔다.
-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돈과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지위가 필요했다. 계획이 세워진 직후부터 한은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약까지 복용해 가며 밤을 새워 공부를 하고,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은 끝에 좋은 대학에 진학했다. 수석 장학생으로 졸업을 앞두고는 육군에 입대하여 이라크에 파병을 다녀오기도 했다.
귀국한 한은 곧바로 직장에 취업했다. 직장에서는 할아버지와 교회 네트워크를 각각 활용하여 능력을 발휘해 빠르게 인정받았다. 돈을 쓸어 담듯 벌어도 그는 자기 계발을 멈추지 않았다. 식단을 철저히 하고 운동을 하면서 누가 봐도 매력적인 몸을 유지하려 했고, 각종 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며 사회생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덕분에 주변 사람들은 한을 완벽한 인간이라 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남자들은 그를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숭배했고, 여자들은 그와 결혼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그에게 접근했다. 그럼에도 한은 유혹에 단 한 번도 넘어간 적이 없었다. 그는 오직 단 한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다만, 계획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민경과 교제를 시작한 직후에 발견됐다. 민경을 바라볼 때마다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윤기 있는 까만 머리칼에, 몸에서 스치듯이 나는 향 내음과 더불어 따스하면서도 또렷한 민경의 눈빛은 한으로 하여금 어둠이 내려앉은 옥수수밭에서 자신을 마주 보던 눈빛을 떠올리게 했다.
민경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한의 머릿속에서 준의 형상이 점차 또렷해져 갔다. 눈을 감고서 기도문을 외워봐도 소용없었다. 이윽고, 다시 눈을 뜨면 민경은 온데간데없었고, 그 자리에 준이 서 있었다.
"널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그때마다 한은 발작을 일으켰다. 내면에서 피가 끓어오르다 못해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발작이 멈추고 나면 한은 발가벗은 상태로 기도하며 마음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만두어야 한다는,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연약한 생각들이 사라지지 않는 악취처럼 그를 뒤따랐다. 한은 그가 마주한 이들이 과거 드러냈던 본모습을 떠올려야만 했다.
- ... 붙은 채였고, 코는 뭉개져 있었다. 흰자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검고 커다란 동공만이 나를 응시했다. 그것이 내뿜는 기운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말했다.
"왔니?"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총알은 준을 맞추지 못했다. 오히려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권총이 손에서 미끄러지면서 손등에 상처를 냈다. 피가 바닥에 뚝뚝 흘렀다. 준은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왔다. 뒷걸음을 치려 했으나, 여전히 다리가 밧줄로 묶인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내 앞으로 다가온 준은 어느새 본래 자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내 손등에 흐른 피를 어루만지고는 자기 얼굴에 바르기 시작했다.
"더러운 피..."
그 모습을 보다가 왼손에 들고 있던 검은 돌을 놓칠 뻔했다. 준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이제껏 들었던 웃음소리 중 가장 기이했고, 뒤틀려 있었다. 소리는 고통스러움과 동시에 해방감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이 상황과 이 모든 존재들이 가소롭다는 듯이 낄낄거리며 소리 내어 웃던 그것이 말했다.
"자유로워."
어둠이 목소리를 가지면 그런 목소리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을 휘젓듯이 두통이 몰려왔다. 그것은 이번엔 피로 물든 자기 몸을 어루만졌다.
"너희가 방해꾼들을 죽였어. 고마워."
- "나? 누구... 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말과 영어, 그리고 알 수 없는 언어들이 섞여 들려왔다.
"도대체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건데!"
"왜냐고?"
그것은 그 깊고 검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너희도 너희 자신이 사람이라 생각하잖아. 우리도 그런 거야."
나는 검은 돌을 있는 힘껏 쥐었다. 분노에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준은 나를 힐끔 보더니 웃으면서 한 손에는 넓적하고 긴 칼을, 다른 한 손에는 방울을 들고 흔들며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저주하듯 속으로 다짐했다.
죽여야 한다.
필히 죽여야 한다.
이제껏 보아 온 준의 모습들이 빠르게 스쳐 갔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부터 함께 규칙을 정하고 밤마다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순간들. 아름답지 않았다. 악마는 언제나 인간을 유혹하는 모습으로 다가왔으니까. 그와 보냈던 모든 순간들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만해!"
- 뼈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을 향해 돌을 내던졌다. 눈을 감고서 두 손을 마주 잡고는 기도문을 외우려 했으나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오직 내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고마워."
눈을 뜨니 준의 턱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이제 난 너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게 됐어."
- 민경이 조심스럽게 한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 했다.
"오빠, 왜 이래?"
그런데 한이 거칠게 민경의 손을 뿌리치더니 민경의 얼굴을 향해 경고하듯 삿대질을 하며 힘주어 말했다.
"더러운 손 치워."
민경은 몸을 움츠렸다. 자상하고 배려심 많던 한은 어디에도 없었고, 충동적이고 핏발 선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자신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있는 한 성난 짐승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민경이 혼잣말을 했다.
"오빤, 미쳤어."
그러나 민경의 우려와 달리 한은 전혀 미치지 않았다. 그는 룸미러를 반복적으로 확인하며 뒷자리를 보고서 말했다. 자신을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나는 너덜거리는 턱을 가지고도 한의 입 모양을 정확하게 따라 했다.
네 이름이 뭐야?
- 누구도 말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된다.
누가 말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죽은 날의 기억은 단편적으로만 남았다. 멍하니 차고에서 기도문을 중얼거리며 서 있던 한은 그의 아버지에 의해 내 집에서 밖으로 끌려 나갔으며, 그와 동시에 집에는 큰 불이 났다. 마을 사람들은 내 집에 치솟은 불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울었다. 검은 연기와 함께 하늘로 치솟는 불길 속에서 무언가 뛰어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지옥의 풍경 속 불과 함께 온몸에 그을음을 안고 다가온 그것은 마을 사람들을 향해 저주하겠지. 한의 머릿속에서 그것은 내 얼굴을 따라 하고 있었다.
- '경제적 문제로 인한 일가족 자살.'
마을 신문에 사건은 한 줄로 기록될 뿐이었다. 장례는 치러지지 않았다. 한의 아버지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같은 한인으로서 우리들의 죽음이 안타깝다고 말했으나 맺음말로는 지역 커뮤니티에 더욱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고 약속하며 추도사 같지 않은 추도사를 남겼다
교회에서는 한동안 기도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아침부터 밤까지 자리가 가득 차다 못해 바닥에 꿇어앉아 기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건 직후 마을 사람들은 매일같이 교회를 찾아와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그들은 전보다도 더욱 악을 쓰고, 소리를 질러 댔다. 그들은 틀리지 않아야 했으니까. 그들이 믿는 것은 옳아야 했으니까. 그래야 우리를 죽인 사실을 합리화할 수 있었으니까.
김준녕 : ... 작품마다 장르나 색깔이 되게 많이 다르거든요. 블랙 코미디도 있고, SF도 있고. <제> 같은 경우에는 좀 무거운 느낌이 있지만 가볍게 읽기 좋은 작품도 많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독자님들이나 평론가님들이나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 들어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아직 모르겠다'라고 하시는 분들이 좀 있기는 해요. 아무튼 이런 자리가 좀 낯설어요.
정지은 : 그러면 우선은 간단한 이야기로 시작해 볼게요. 이 작품에 대한 소개를 작가님께서 먼저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김준녕 : <제>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1970, 1980년대 미국에 정착한 한인 가족이 신내림과 종교적 광신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쓴 작품 중에서 가장 메시지가 강조된 작품이에요.
작품 집필은 '텍스티' 쪽에서 먼저 저한테 사회파 호러에 대한 제안을 주셔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안을 받았던 당시에 쓴 에세이가 있어요. 그 에세이의 첫 문장이 '사회파 호러라는 건 없다'였거든요. 왜냐하면, 호러라는 장르에는 사실 사회와 관련된 인간의 공포심 같은 것들이, 말하자면 생존에 위협이 되는 사회적 문제들이 직결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결국에는 모든 호러가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고, 이런 흐름으로 '사회파 호러'가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제>가 제 작품들 중 가장 메시지가 드러난 작품이기는 하지만 특정 메시지를 드러내기 위해 썼다기보다는 호러라는 장르 자체를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메시지가 강조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쓰면서는 배경이 국내가 아니라 미국에 있는 한인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다 보니, 한국에서 글을 쓰는 작가로서 자료 조사나 인터뷰 등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저 나름대로 좀 새로운 도전을 했던 작품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지은 : 작가님께서 실제 미국에 사셨던 경험이 있으실까요?
김준녕 : 방문을 한 적은 있지만 제가 직접 살지는 않았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가족들이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유럽이나 아시아 등 외국을 오가며 느꼈던 제 개인적인 경험을 담아내기도 했고요. 꼭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살았던 경험이 없어도 해외에 나가 본 경험이 있는 한국인, 아시아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 수위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인종 차별을 받아 본 경험이 있을 테니까요. 이런 여러 경험들이 다층적으로 쌓여 탄생한 작품입니다.
정지은 : 제목으로 정하신 <제>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요. 제 생각에는 개인의 죄로부터 시작된 업보를 청산하거나 계승하는 방식으로서 '제(祭)'를 의미하는 것 같아요. 희생양을 바치며 대대로 이어 오던 폭력을 ...
김준녕 : ... 말하자면 재현인데, 제가 <제>라는 제목을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건, 과거의 사건 혹은 사람이 현재의 사람들한테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한 것이었어요. 한국의 제사를 비롯해 여러 문화권의 제례의식은 계속해서 과거를 생각하고 기억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정지은 : 그렇군요. 제목에 대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제 주제적인 측면으로 넘어가 볼게요. 죄와 벌, 구원, 폭력. 이런 주제들이 작품 속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소재를 떠나 주제적으로도 더 종교적인 느낌을 풍기는데, 이런 것들은 전통적으로 문학에서 굉장히 많이 다루는 주제잖아요. 하나하나가 다 무게감 있는 이 주제들이 단일한 서사로 관통되는 게 흥미로웠어요. 주요 인물마다 주제와 관련된 역할이 부여되고 마지막에 한과 준, 민경까지 주제 안에서 연결되는 구조니까요. 그런데 준은 물론이고 민경 역시 신내림을 피해 해외로 도망가는 인물로 등장하잖아요.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해외로 도피하면 실제로 신내림을 피할 수 있나요?
김준녕 : 이번에 <제>를 쓰게 되면서 직접 무당분들도 만나고,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요.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벗어날 수 없다고. 그래도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면 신병이 좀 약해진다고 하긴 하더라고요. 물론 사람마다 좀 다르긴 하겠지만요.
신내림을 피하기 위해 많이들 하시는 또 하나의 선택이 교회에 나가는 거예요. 물론 교회에 나간다고 해도 모두가 신내림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높은 확률로 피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제가 만나 봤던 무당분 중에서는 교회 신자였던 분들도 있었어요. 모태신앙이 기독교였는데 신병을 앓으시고는 무당이 되셨죠. 그래서 제가 인터뷰를 위해 신당에 방문했을 때 한구석에 십자가가 걸려 있더라고요. 조사를 하다 보니 무속을 명확한 하나의 범주로 묶는 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무당이나 샤머니즘에 대한 기록, 서술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정리를 하자면 해외에 나갔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 거리가 멀어질수록 증상이 좀 덜할 수 있긴 하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그랬어요.
정지은 : <제>에는 신내림과 빙의라는 무속적 현상이 기독교와 대비되는 형식으로 서술되고 있는데요. 준과 민경의 신내림, 그리고 한의 빙의까지. 기독교 기반의 커뮤니티가 형성된 마을에서 개인을 철저하게 외로운 상태로 만드는 그런 현상들을 보면서, 저는 무언가를 믿는 마음이 어떻게 보면, 디아스포라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작가님께서는 디아스포라에 관해 어떤 시선을 갖고 계신지 궁금했고요. 좀 다른 얘기지만 무속과 관련된 취재를 많이 했다고 하셨는데, 아마 못지않게 기독교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하셨겠죠?
...
김준녕 : 일단 이주 노동자와 관련해서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제가 옛날에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을 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태국, 필리핀, 캄보디아에서 오신 분들이랑 좀 접점이 있었어요. 당시 환경이 되게 안 좋았거든요. 인격적으로 어떤 이슈가 있다거나 그런 건 없었는데, 그냥 환경 자체가 엄청 힘들다 보니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어요. 그 과정에서 그분들이 해주시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요. 이런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좀 더 시선이 많이 가게 됐던 것 같아요.
요즘은 옛날에 비해서 더 자유롭게 외국계 회사에 취직하거나, 한국 회사라고 하더라도 외국 지사에 나가서 일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 우리가 아무리 무뎌졌다고 해도 최소한의 날은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군다나 문학은 항상 그런 무뎌진 감각을 일깨우는 역할을 해 온 장르잖아요.
사실 저는 문학이 굉장히 쓸모없고, 어쩌면 가장 쓸모없다는 생각도 하거든요. 나아가서는 거대한 사회적 담론을 문학이 꼭 의무적으로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해야 하는, 그리고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역할이 있다면 우리가 쉽게 흘려보낼 수 있는 것들을 예민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인 것 같아요. 그게 문학을 창작하는 사람의 의무이자 사명이라고 생각하고요. 이야기를 만드는 기술이나 미학적인 부분은 개인의 역량이니까 제외하고, 이건 '우리가 왜 문학을 읽느냐'라는 질문과 연관된 얘기인 것 같아요.
- ... 아이에게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 가족 B는 미국에서 심리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특정 주에서 심리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주로 한인들을 상담하는데, 상담내용 중 절반 이상이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이라고 말한다. 이민 1세대 혹은 2세대 부모는 자식들이 "열심히 하지 않는다"라며 이해할 수 없다 말하고, 그들의 자식들은 부모가 "지나치게 성공을 강요한다"고 말하며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한인 부모의 강요는 단지 욕심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알고 있다.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대학교에 가지 못하고, 좋은 대학교에 가지 못하면 안정적인 직장을 얻기 어렵다는 현실을. 그들에게 의사, 금융가 같은 직업은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 '안전' 그 자체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에서도 수십 년째 언론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입시 지옥'과 '취업 지옥'이라는 단어가 그것을 입증한다. 마냥 부모들을 탓할 수는 없다. 그들은 미국이든, 한국이든 좋은 직업이나 직장이 없다면, 그로 인해 돈이 없다면 과거 자신들이 겪었던 삶을 자식들이 겪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으니까. 자식을 위하는 마음으로 부모는 자식들을 학교에 밀어 넣고 어마어마하게 압박을 가한다.
이에 일부 부모는 자녀가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어떤 문제에 연루되었을 때, 그 문제를 드러내기보단 덮고 지나가려 한다. 그건 그들의 천성이 '잘 참아서', '다른 인종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코너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가난한 이들이 실패하면 재기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군사 독재를 겪으며 살아온 한국의 부모 세대와 문화가 전혀 다른 먼 타국의 땅에서 초기 미국 사회의 이민자들이 마주했던 어려운 상황들을 함께 떠올려 본다면 그 절박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는 그러한 이들에게 "동양인들은 어떻다", "한국인들은 어떻다" 등의 스테레오 타입을 덧씌운다. 더 큰 문제는 우리들이 맞서기보다는 그런 프레임에 맞춰 살아왔다는 점이다. 스테레오 타입의 형성 자체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나는 계속해서 그 틀에 저항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문학은 저항에 최적화된 매체라 생각한다. 독자는 자신과는 다른 화자의 시각에서 스토리를 따라가며 책을 덮고 나면 그 시각을 내면화하게 된다. 어느 나라, 어느 인종, 어느 계급의 시선이 아니라, 한 개인의 시각을 말이다. 주류의 시선과 비주류의 시선들, 둘의 충돌과 갈등, 그것을 벗어나는 방식 등. 나는 역사가 담지 못한 개인들의 속삭임을 통해 그 모든 저항의 과정을 담아 보고자 했다. <제>가 쓰여진 것은 그러한 모든 시도의 일환이다.
- 사실 가족들은 내가 이런 소설을 쓴다는 것에 매우 큰 걱정을 안고 있다. 예전에도 종교 관련 소설을 쓰기 위해 취재를 하다가 스토킹을 당했었고, 살해 협박까지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까지 많은 망설임과 함께 시간이 필요했다.
이 작품이 사회에 어떤 물결을 일으킬지 나는 알지 못한다. 거대한 물결을 일으키기는커녕 저기 저 창고 속에 묻혀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미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한국어로 썼기에 더더욱 그럴 확률이 높기도 하고.
하지만 미국을 배경으로 작품이 쓰였다고 해서 미국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싶다. 나는 내 가족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소설을 쓰는 동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문화 혐오와 이주노동자들의 죽음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최근 한국에서 농장주의 괴롭힘에 시달린 끝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네팔 청년의 소식을 들으며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주 노동자 40만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해 볼 때이다. 한국에 사는 우리들 역시 복잡하게 연결된 사회 속에서 비슷한 두려움과 생존의 고민을 안고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28세 네팔 청년 툴시 푼마가르의 명복을 빌며 마지막으로 묻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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