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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열] 조선을 홀린 무당 진령군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5. 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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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배상열
출판 : 추수밭
출간 : 17.03.07


       

           

제목이 자극적이라 읽어보았는데, 목적의식이 뚜렷한 책이었다.

혹시나 싶어 찾아보니 17년 초 발간.

아마도 대부분이 예상할 타겟을 향해 쏘아진 살인 모양이다.

 

책 자체로서는 아주 매력적이지는 않다.

발간 시기를 정해놓고 마감에 맞춘 듯 연도가 잘못 표기된 부분도 보이고, 제목과는 달리 진령군보다는 근현대사 및 명성황후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었다. 연결되는 다른 내용들은 기존 사료들을 참조하는 등 사실 관계를 따져나가는 편이지만, '진령군' 부분만은 소설로 작성되어 있는데 아마도 사료에 언급된 내용만으로는 흥미를 끌기 어려워 이런 형태를 선택한 듯. 뮤지컬 <명성황후>를 비판적으로 차용한 느낌인데 그 마저도 전체 분량 중 1-2할 정도다.

 

'진령군'에 흥미를 두고 읽어보실 계획이라면 말리고 싶다.

흥선대원군의 입장에서 본 근현대사의 개략적인 흐름을 살펴보고 싶다면 한 번쯤 읽어보시는 것도.

 

개인적으로 딴지를 걸어본다면-

고종의 독살 시도가 죽음이 목표가 아니었다면, 후에 서술된 황현은 어떻게 같은 방법으로 스스로 세상을 등졌는지.

아편 급성 중독에 대한 시각이 다소 편파적이지 않은지.

경고라고 해석할 거였다면 차라리 중독을 통한 꼭두각시화나 후계 쪽으로 보는 게 맞지 않았을지.

기왕 이를 황현과 이어서 마지막 장면을 쓸 거였다면 말이다.

 

출간된 작품들이 다 목적성이 있을지 궁금해져서 좀 더 찾아 읽기로 했다.

개굴 개굴.

 


   

 

 

신이 억만 백성의 입을 대신해 자세히 아룁니다. 

정사를 전횡하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며, 신령의 힘을 빙자해 임금을 현혹시키고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들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 요사스러운 무당에 대해 온 세상 사람들이 그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합니다. 
저 극악한 행위가 아주 큰 데도 문책하지 않으며 마치 아끼고 비호하는 것처럼 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어찌 풀리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상방검으로 죄인을 주륙하고 머리를 도성문에 달아매도록 명한다면 민심이 비로소 상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1894년 7월 5일 

지석영의 상소

 

굿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바치라는 대로 바치면서 수탈당하는 것을 의무로 알던 그때의 백성들도 왕비의 처신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왕비가 일만 이천 금강산의 봉우리마다 엄청난 재물을 바치게 했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는 누구도 믿지 못했다. 탄압의 대상이던 승려들과 같은 눈높이로 바라보지 않았던 무당들로 하여금 재물을 사용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소문의 진위에 의심을 더하게 했다.  

- 그러나 백미로 지은 눈부신 쌀밥이 가마니째 한강으로 뿌려지는 광경이 목도된 다음부터 뜬소문이 아니라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왕비가 거처하는 곳에서 김이 펄펄 나는 가마니가 날마다 밖으로 나가는 데다 오백석에 달하는 쌀밥이 강가에 뿌려진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되었을 때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어간 다음이었다. 

- 개돼지와 다르지 않는 삶을 순순히 받아들인 이들에게 쌀밥은 배를 채우기 위한 끼니가 아니었다. 쌀밥은 도리를 모르는 짐승과 구분되는 인간으로서 받들어야 할 제사 때가 되어야 겨우 한 수저 맛볼 수 있었던 신성한 것이었다. 죽을 때까지 구경조차 하기 힘든 쌀밥이 헛되이 사라지는 광경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거친 물살에 뛰어들었다가 산 제물이 되는 참사가 반복되었다. 

- 언어도단과 세기말이 합쳐진 것 같은 광경은 불가사의한 영험을 지닌 무당이 등장하면서 역사로 치환되었다.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아 어쩔 줄 몰라하던 왕비를 찾아온 무당의 '천기누설'은 단번에 모든 것을 역전시켰다. 직접 겪어가며 무당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던 왕비는 빠르게 포획당했다. 대궐을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고 언제든지 왕과 왕비를 만날 수 있는 무당이 비선실세로 변신하기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비선실세인 무당의 문고리는 바로 권력의 문고리였다. 그것을 잡기 위한 경쟁 또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한 가운데 나라가 홀수가 드러날 정도로 기울어졌다. 
 
- 농투성이에 지나지 않는 무지렁이가 하루아침에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제정신으로 믿기 어려웠지만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안동 김씨들이 데려온 왕이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깊이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밥을 축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허수아비보다 못한 왕이 죽었다는데 시골에서 상복을 차려입었다가는 핀잔밖에 받을 것이 없기도 했다. 

- 잠시 후 무당은 아낙에게 그만 돌아가라고 말했다. 저녁까지 차려 주고 설거지를 끝낸 데다, 더 이상 들일 손님도 없었다. 무당은 돌아가는 아낙의 바구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묻는 법이 없었다. 밥값을 충분히 해내는 이상 그 정도 아랑은 베풀어야 했다. 아낙을 보낸 무당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둑해진 하늘 구석에 구름이 덮이기 시작했다.
 
- 안동 김씨가 권력을 농단하기 시작한 시기는 철종이 승하하기 한참 이전부터였다. 노론의 색을 유지하면서 노른자위의 관직을 독점하는 방식을 사용하던 그들은 정조가 승하한 이후 60년이나 권력을 유지해 왔다. 그리고 일단 틀어잡은 권력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국혼만큼 좋은 방도가 없었다.   
  
- 21대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인 정조가 보위를 잇게 되는 것 역시 잘 알려졌다. 대단히 영명했던 정조가 세상을 뜬 다음 후궁이 생산한  아들이 불과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보위를 이으니 그가 순조 純祖였다. 순조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영조의 두 번째 왕비로서 서열이 가장 높은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순조는 정조가 신임했던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정순왕후가 삼 년 만에 수렴청정을 거뒀지만 열다섯의 나이로는 홀로서기가 가능하지 않았다. 순조의 외척 김조순 일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오래도록 유지되었던 당파정치는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세도정치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 순조는 그다지 존재감이 없지만 아들은 그렇지 않았다. 효명세자는 출신부터 달랐다. 19대 숙종이 왕후가 생산한 원자로서 현종의 보위를 이은 이후 처음으로 왕비에게서 태어난 적통이었다.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성취로 일찍부터 명군의 편린을 보인 효명세자는 순조를 대리해 다스릴 때에도 괄목할 성과를 거두었다. 순조도 안동 김씨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풍양 조씨의 문중에서 세자빈을 간택하는 등 지원에 나섰지만, 안타깝게도 효명세자는 스물하나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 뒤이어 겨우 여덟 살에 지나지 않은 효명세자의 아들이 즉위하니 그가 헌종이다.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순조의 왕비는 대비의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풍양 조씨를 압박하던 안동 김씨가 더욱 기세를 올리는 가운데 헌종은 그들의 문중에서 선발된 왕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순조의 당부를 받은 풍양 조씨가 반격에 나섰다. 풍양 조씨는 태생적으로 헌종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지만, 권력을 탐하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두 집안과 세상이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는 가운데 헌종 또한 재위 칠 년 만에 스물둘의 나이로 후사도 없이 요절했다. 

- 헌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자 안동 김씨가 다시 칼자루를 잡았다. 자신들이 들인 순조의 왕비였던 순원왕후가 대비의 자격으로 후계자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입맛에 맞는 왕이 취임하는 것은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직계의 혈통이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에 계승권에 근접한 자를 찾아야 했는데, 어이없게도 무식한 청년이 적임자였다. 

- 당시 18세였던 이원범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전군의 핏줄이다. 은전군은 비슷한 처지의 왕자들이 그렇듯 권력자들에게 이용당하다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 정조가 어떻게든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정조가 승하한 다음에는 은전군도 목숨을 잃고 아들들 가운데 겨우 막내만 살아남아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그 아들이 다시 아들 삼형제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들 가운데 장남이 반란에 연루되는 바람에 죽임을 당하고 남은 형제 가운데 막내가 이원범이다. 이원범이 자랄 무렵에는 집안이 완전히 망한 다음이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연명할 지경이어서 기본적인 교육조차 받지 못했다. 그런 무지렁이 청년이 느닷없이 도성으로 모셔져 즉위하게 되니, 그가 25대 철종이다.

- 안동 김씨들로서는 실망스럽게도 철종 또한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철종이 서른둘의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생산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철종은 안동 김씨에서 선발된 왕비는 물론, 일곱이나 되는 후궁들과 열심히 생산 작업에 몰두했었다. 쾌락에 탐닉하는 것은 약간이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는 방도겠지만, 그것 역시 자신을 보위에 앉힌 자들이 계산한 내부에서 움직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철종이 성의를 다해 노력한 성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농사꾼 출신이라 그런지 자식농사도 소출이 좋았다. 왕비가 원자를 생산한 것을 필두로 도합 아들 다섯과 딸을 얻었지만, 무슨 마가 끼었는지 전부 요절하고 옹주 하나만 남았다. 

- 한편 순조 재위 15년이던 1815년 12월 19일에 왕실에서 논의가 있었다. 효명세자가 '자식 없이 죽은 은신군이 제사를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발의한 사안에 대해 예조가 의논하게 되었다. 은신군은 은전군의 동생으로 은전군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를 당했다가 병사한 왕족이다. 효명세자의 배려로 16대 인조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6대손 이채중이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남연군의 군호를 받았다. 정조가 은전군과 은신군의 이복형인 관계로 남연군의 위치는 양자로 입적되기 전과 현격하게 달라졌다. 왕실의 부스러기 냄새를 풍기는 '인평대군의 6대손'보다는 '정조의 손자'가 백 번 나은 데다, 군호까지 받으니 이전에 없었던 위엄까지 갖출 수 있었다. 

- 효명세자가 요절한 다음 헌종이 즉위했을 때만 하더라도 남연군의 존재는 크지 않았다. 남연군이 1836년(헌종 2)에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철종이 즉위하면서 주변에서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안동 김씨들이 철종을 택한 까닭은 다루기 쉬울 것 같아서였겠으나, 철종도 후사를 얻지 못하고 승하하고 말았다. 일자무식의 이원범도 보위에 오르는 세상에 정조의 손자로 거듭난 남연군의 아들들은 대단히 격이 높아진 상황이었다. 남연군의 아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하응 李昰應이다.

- 몸져누운 철종의 증상이 심각해질 무렵 후계자를 지명할 수 있는 대비의 자격은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에게 있었다. 누가 왕이 되든 간에 안동 김씨 문중에서 왕비가 배출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철인왕후가 대비로 승격하는 것은 체면치레에 불과했다. 순조와 헌종, 철종에 이어 다시 국혼이 성사되면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정치는 더욱 견고하게 이어질 터였다.

 

- 그런데 이하응이 예상 밖으로 움직였다. 이하응이 손을 잡으려는 대상은 철인왕후보다도 서열이 높은 효명세자의 빈이었다. 세자빈인 상태에서 남편을 떠나보내는 바람에 왕비가 되지 못한 조씨는 아들 헌종이 안동 김씨의 문중에서 왕비를 맞자 찬밥신세로 전락했다. 이후 헌종이 부친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존해 왕비로 승격할 수 있었지만, 헌종마저 승하한 다음에는 이름뿐인 어른에 지나지 않았다. 순조의 비가 대비의 전권을 행사하고 철종의 비도 안동 김씨 문중에서 배출되고 나서는 아예 존재감이 사라졌다. 이후 순조 비의 사후, 서열에 의해 대비가 되었음에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들에 의해 즉위한 왕이 다시 안동 김씨의 문중에서 보낸 왕비를 맞으면 철인왕후가 대비가 되고, 효유대비(효명세자의 세자빈) 조씨는 허울 좋은 대왕대비로 승진할 뿐이었다. 

- 철종의 뒤를 이을 허수아비 후보 가운데는 남연군의 손자들도 포함되었다. 남연군의 아들 넷 가운데 장남과 차남은 세상을 떠났고 장남의 아들인 이재원이 있었다. 이하응에게는 서출을 제외한 아들 둘이 있었으며, 그의 친형 이최응도 아들을 두었다. 이들 가운데 장손 이재원이 서른셋이고 이하응의 장남 이재면은 열아홉, 차남 이재황은 열둘이었다. 이최응의 아들 이재긍은 당시 일곱 살에 지나지 않았다.

- 그러나 남연군의 핏줄은 안동 김씨들의 구미에 맞지 않았던 데다, 철종의 조카들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그쪽에서 허수아비를 데려오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놀랍게도 이하응이 효유대비와 직접 거래를 시도했다. '둘째 아들을 익종(효명세자)의 아들로 입적하면 어떻겠느냐'는 그의 제안에 효유대비는 크게 놀랐다. 자괴감에 빠져 있던 대비에게 이하응의 제안은 복음과도 같았다.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양자를 들이면 계승권을 인정받을 수 있는 데다, 효유대비 또한 대왕대비로서 권한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친정인 풍양 조씨들도기력을 되찾게 될 것이며, 새롭게 왕이 된 이하응의 아들에게 풍양 조씨 문중에서 선발한 왕비를 맞게 할 수도 있을 터였다.

- 효유대비의 기대감이 막연하지만은 않았다. 이하응은 말만 내세우는 사기꾼이거나 능력도 없는 주제에 꿈만 큰 얼치기가 아니었다. 그동안의 구도를 단번에 뒤엎을 수 있는 놀라운 정치 감각을 갖춘 이하응은 기획력과 추진력 또한 남달랐다. 게다가 사심도 없어 미더워 보이기도 했다. 이하응도 효유대비의 수렴청정을 존중하면서 적절하게 협력할 수 있는 만큼 쌍방의 이해관계는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그 결과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명복(재황은 초명)이 열두 살의 나이로 보위에 오르니 그가 26대 고종이다.

- 이명복이 보위에 오르면 이하응도 대원군 大院君으로 격상되어야 한다. 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승하한 탓에 가까운 종친의 아들이 보위를 이은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14대 선조와 16대 인조, 철종의 부친들은 죽은 다음에 대원군으로 추존되었을 뿐이다. 네 번째로 대원군이 될 이하응은 건강하게 살아 있음은 물론, 후세 사람들이 '흥선대원군'으로 기억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대원군들과 달랐다. 이하응은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살아 있는 권력이었다. 

- 이하응은 민영화로 대응했다. 환곡을 폐지한 다음 해당 지역의 명망 있는 이들로 하여금 업무를 대행하게 한 것이다. 이를 '사창제 社倉制'라 한다. 사창을 운영하는 '사수 社首'는 추천으로 선출하도록 해 아전 같은 자들이 농간을 부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 서원도 개혁을 피할 수 없었다. 공자의 가르침을 섬기면서 학문을 연성하고 지역 발전에 이바지했던 서원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부정적으로 변질되었다. 세금을 납부하지 않아도 되었던 서원은 가장 중요한 의식인 제사 등에 사용되는 비용은 물론, 전반적인 운영비용을 강제로 징수하고 관아와 결탁해 갖은 이권에 개입했다. 세금을 내지 않을 의도로 서원에 형식적으로 토지를 기부하는 자들이 줄을 이었고 서원에 적을 둠으로써 군역에서 면제되기도 했다. 지역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할 서원이 저지르는 폐해는 이루 말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이하응은 전국에 산재한 600여 서원 가운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47곳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철폐하도록 명했다. 곳곳에서 유생들이 떼로 몰려와 악을 쓰고 난리를 피웠지만 이하응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강경하게 진압하는 이하응에게 서원 역시 결국에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 이하응이 추진한 개혁의 절정은 호포제 戶布制였다. 이전의 성과들도 대단했지만 호포제는 부족한 것을 보완하는 개혁을 뛰어넘어 근본을 뒤집는 혁명에 가까운 제도였다. 군포 軍布는 국방세로서 병역자원인 16세부터 60세까지의 남성이 납부 대상이다. 국방에 대한 세금은 중요성만큼 수탈도 비례해 혹독했다. 이미 사망한 자는 물론 갓난아기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한 데다, 도저히 낼 형편이 되지 못하면 그만큼 이웃들이 부담해야 했다. 견디다 못한 나머지 도주하면 친척들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바람에 마을이 몰락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가혹한 군정 때문에 조선인들은 출산을 두려워했고, 더 이상 자식을 두지 않고자 생식기를 끊어내는 참상까지 나타날 지경이었다. 환곡과 군정을 비롯한 가혹한 수탈에서 살아남기 위해 백성들은 민란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라와 백성을 책임져야 할 이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 이하응은 그들에게 철퇴를 가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가구마다 인원수를 산정해 군포를 납부하게 했으니 이를 가리켜 '호포'라고 한다. 조선 건국 이래 수백 년이 지나도록 한 푼도 내지 않았던 양반들은 당연히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나 이하응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나마 체면을 보아 노비의 명의로 했지만 납부하는 양은 달라지지 않았다.  


-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따른다. 이하응은 세도세력과 그들과 연계된 파벌을 견제하고 친위세력을 늘릴 의도에서 종친들에게 급제를 남발했다. 그로 인해 과거 科擧의 권위가 실추되고 관료사회가 하향평준화되었다.

- 또한 1866년(고종 3)에는 무고한 피를 뿌리기도 했다. 이른바 '병인박해 丙寅迫害'다. 천주교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아홉 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8,000명이나 되는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지만 천주교가 들어간 나라들은 예외 없이 대규모의 탄압이 발생했다. '주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교리가 전통사회에서 수용되기 쉽지 않은 데다, 빠르게 확장되는 교세도 경계를 불렀다. 당시 천주교는 서얼과 여성 등 소외계층은 물론 심지어 사회 지도층과 이하응의 부인에게까지 접근했을 정도였다. 
이하응도 처음에는 천주교를 나쁘게 여기지 않았지만 국제정세가 개입되면서 상황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 첨단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사업권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고스란히 국부의 유출로 이어졌다.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금광의 개발권을 허가하는 등 조선은 열강에 의해 서서히 말라갔다. 강요된 것이든 자발적인 것이든 양분을 빨리다가 망하는 것이 열강에게 문을 연 국가의 운명인 만큼, 지금의 잣대로 이하응을 비판하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쇄국을 제외했을 때 이하응의 가장 중대한 실책으로 꼽히는 것이 경복궁 중건이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경복궁은 왕실이 담긴 그릇과 같다. 조선 자체를 상징했던 경복궁이 처참하게 불탄 까닭은 일본과의 전쟁 때문이었다. 1592년에 벌어진 일본과의 국제전쟁(임진왜란에서 14대 선조가 혼자만 도성을 빠져나가자 버림받은 백성들이 경복궁을 위시한 궁궐에 횃불을 던졌다. 창덕궁을 위시한 궁궐들은 이후 중건되었지만 경복궁은 그렇지 못했다. 궁궐 짓기를 취미처럼 반복하다 반역을 당한 광해군조차 경복궁을 중건하지 못할 정도였다. 

- 경복궁이 전소된 지 273년이나 지난 1865년(고종 2), 이하응이 경복궁을 중건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대감부터 노비까지 조선에서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400칸이 되지 않던 본래의 규모를 무려 20배에 가까운 7,225칸으로 확대해 중건하겠다는 계획에는 제정신이 맞느냐는 외침까지 ... 

- 아낙이 수집한 소문 가운데는 헛웃음이 나는 것도 적지 않았다. 왕이 지금의 왕비와 혼인하기 전에 승은을 내린 궁녀가 있었는데, 궁녀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혼인한 첫날밤에 몰래 빠져나가 궁녀와 동침했다는 소문이 바로 그랬다. 소문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궁녀가 아들을 낳자 이하응이 크게 기뻐하고 장차 세자로 삼기 위해 운현궁에서 양육했다는 이야기도 믿기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후 왕비도 아들을 낳았지만 희한하게도 항문이 막힌 상태로 태어나는 바람에 며칠 살지도 못하고 죽었다는 소문은 그럴듯했다. 겨우 정상적인 아들을 낳은 왕비가 중과 무당들을 불러 갖은 치성을 드린다는 소문도 사실일 개연성이 높았다. 궁녀가 낳은 아들이 올해 죽은 것도 사실이었는데, 왕비가 무슨 수를 썼다는 것을 흘려듣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소문에 나타난 왕비의 심성이라면 얼마든지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 무당이 그런저런 시답지 않은 소문들을 떠올리던 가운데 아낙이 사립을 열고 들어섰다. 차가워진 개울물에 빨래를 한 아낙의 손과 볼이 발그레했다. 빨래를 널고 무당과 아들이 먹을 저녁을 짓기 위해 부산을 떨던 아낙이 솥에 뜸을 들이며 한숨을 돌렸다. 잠시 후 '왕비가 금강산을 비롯한 전국의 명산에 쌀과 비단은 물론 돈까지 바친다더라'는 말과 함께, '한강을 비롯한 전국의 대천에 날마다 헤아릴 수 없는 백미로 밥을 지어 뿌린다더라'는 소문이 건네졌다. 

- 워낙 전통적이어서 친근하기까지 한 원인들과 더불어 차별대우도 한몫했다. 강화도조약 이후 공사를 파견하고 교역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일본은 조선에 국가의 주요한 기간에 대한 근대화를 제안했다. 이에 따라 조선은 신사유람단을 파견하고 100명 규모의 별기군 別技軍을 창설한 다음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을 받게 했다. 

 

- 이러한 조치는 구조조정을 불렀다. 중앙군의 핵심으로 수도와 인근을 지키던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금위영, 수어청의 5군영은 구식군대로 전락해 경기 일대를 담당하는 무위영과 궁궐 외곽을 담당하는 장어영의 2군으로 축소되었다. 2군에 소속되지 못한 군인들은 실직을 당하기 이전부터 13개월이나 급여가 밀린 상태였다. 군복과 무기 등 모든 것이 새로운 별기군은 대우가 좋았던 데다, 2군영에 남을 수 있었던 군인들도 급여가 밀리지는 않았다. 박탈감이 들 수밖에 없었던 구식 군인은 그렇지 않아도 '왜별기'로 불렀던 별기군을 더욱 증오하게 되었다. 

- 그러던 가운데 전라도에서 보낸 세곡선이 6월 5일에 도착했다. 조정에서는 일단 한 달분의 급여를 지급하기로 하고 예산을 출납하는 선혜청에서 시행하게 했다. 극도로 궁핍했던 상황에서 한 달분이라도 받을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모여든 군인들은 곧 크게 분노했다. 한 달분의 급여로 지급된 쌀마저도 겨와 모래가 절반이 넘게 섞여 있는 데다, 그나마 분량을 불리기 위해 먹인 물 때문에 썩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군인들이 항의하자 창고지기는 오히려 그들을 모욕하는 등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마침내 분노가 폭발한 훈련도감 소속이었던 군인들은 창고지기 ...

- 그런데도 고종은 '가상하다'라고만 했다. 군인 가운데에는 자신이나 가족들의 질병으로 인해 부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굶주리는 자들이 반드시 포함되었을 터였다. 그런 그들에게 왕이라는 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이하응은 한숨이 나왔다.
만약 고종이 알고도 모른 체한 것이 아니라 13개월이나 급여가 지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당시 조선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고종이 직접 처리해야 할 주요한 사안에 대해서 결재를 하지 않았다면 철종 이상으로 허수아비였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 한동안이나 말이 없던 이하응이 모든 수하들을 소집하자 운현궁이 팽팽하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의 불만이 높아지는 것을 감지한 이하응은 날카롭게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무기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군인들은 썩어빠진 것들을 단번에 도려낼 수 있는 칼이 될 수 있다. 수하들 가운데에는 현직의 장교들까지 포함된 만큼 그들을 이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실직당한 군인들의 대부분이 이하응을 지지하고 있는 이상 이하응은 이번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다.

- 그들을 직접 분노하게 만든 선혜청의 창고지기들은 선혜청의 당상으로 있는 민겸호의 하인들이었다. 그들은 명목상으로만 하인일 뿐 돈을 주고 자리를 산 자들이었다. 창고지기라고 해도 막대한 예산을 집행하고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다른 부서의 예산까지 가져다 쓸 수 있었으며, 감사조차 받지 않는 선혜청 소속이면 보통 막강한 직책이 아니었다. 그런 직책에 민겸호의 하인들이 채용된 광경에서 당시 매관매직이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돈을 주고 자리를 얻은 자들이 돈을 바친 이상으로 부당한 이득을 취하려는 것은 농부가 추수를 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했다. 지방에서 걷은 세미가 경창으로 들어가기 전에 겨와 모래를 섞거나, 물에 불려 부피를 늘린 다음 차액을 빼돌려 착복하는 것 역시 관리가 업무를 보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이었다. 그렇게 빼돌려진 것 가운데 상당수가 상납되면서 먹이사슬 정점으로까지 올라갔다. 

- 뭇사람들도 그런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부당함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없었다. 부당하고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들었겠지만, 생각과 행동 사이의 연결고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식들이 굶어 죽어도 울부짖는 이상을 할 수 없도록 교육받은 그들은 수탈당하는 것 또한 백성 된 의무로 알고 있었다.  

- 끌어내렸던 궁인이 민자영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민자영이 구사일생으로 도주한 다음에도 몸통을 찾는 외침과 움직임이 끊이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고종에게 다시 전권을 이양받은 이하응은 민자영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난병들이 의아하게 여기는 가운데 이하응은 민자영의 옷을 관에 넣고 8월 2일에 장례를 마칠 것을 명했다. 이어서 군인들에게 밀렸던 급여를 전부 지급하고 폐지했던 5군영을 부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 계속해서 국정을 문란하게 만들고 백성을 괴롭힌 원흉으로 지목된 자들을 처벌할 것과 함께, 지금까지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일체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비로소 사태가 진정되었다. 

- 민자영을 태운 가마가 한강에 도착했지만 사공이 난색을 표했다. '도성에서 뱃길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한강을 건네줄 수 없다'고 말하는 사공은 의심의 눈길을 감추지 않았다. 민자영은 손가락에 끼었던 반지를 빼서 건넨 다음에야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 
성남을 거쳐 광주로 들어간 민자영이 가마를 멈추고 쉬도록 했다. 그때 어떤 촌 할미가 다가오더니 피난하는 것으로 여기며 '중전이 음란하여 난리가 일어나는 바람에 낭자가 여기까지 피난하게 되었구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노파의 말에 흠칫하던 민자영은 겨우 눌러 참았다. 안전한 곳으로 가기 전에는 정체가 노출되는 것을 반드시 피해야만 했다.  

- 아낙이 도성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문을 들고 왔을 때에도 무당은 심드렁했다. 그동안 접했던 소문이 조금이라도 사실이었다면 언젠가 벌어질 일이 벌어진 것에 지나지 않았다. 민자영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자업자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억울할 것도 없었다. 앞으로 이하응이 다시 집권하면 민씨들이 쫓겨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세상이 바로 잡힐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다만 당분간은 혼란스러울 것이기 때문에 이곳을 뜨려는 계획은 미뤄야 할 것 같았다.  

- 그런데 소문을 전한 아낙이 '상감마마가 불쌍하다'며 눈물을 찍어내는 것이었다. 의아해진 무당이 이유를 물어보자 '상감마마는 여우 같은 중전에게 홀린 죄밖에 없지 않느냐, 그런데도 흉악한 놈들이 난리를 일으키는 바람에 무진 고생을 겪으시니 어찌 불쌍하시지 않겠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게다가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상감마마를 불쌍하게 여긴다'며 말하자 무당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우에게 홀렸든 왕비에게 홀렸든 왕이 홀렸다는 자체가 문제였다. 만일 아낙의 남편이 기생에게 홀려 집안을 말아먹었다고 해도 아낙은 남편을 옹호해 줄까? 칠천인 무당에게 의지해 먹고사는 주제에 나랏님이 불쌍하다고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보니 흘려도 단단히 홀린 것이 분명했다. 속으로 혀를 차던 무당은 아낙에게 그만 돌아가라고 일렀다.  

- 무당이 결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급하게 달려온 아낙이 민자영이 충주에 들어와 숨어 있다는 것을 알렸을 때부터 무당은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민자영을 도운 자는 볼 것도 없이 민응식이다. 아직 충주목사로 있는 민응식이 잘 사는 집들에게 민자영을 부탁했지만, 후환을 당할 것이 두려운 나머지 거절하는 바람에 모녀가 사는 작은 집에 기거하고 있다는 소문은 사실이 확실했다.  

- 환궁한다는 것은 다시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니 옥체를 보존하소서!"
그러나 민자영에게는 무당의 확신에 찬 당부가 헛소리 이상으로 들리지 않았다.

 

- 이른바 '제물포조약'의 결과 조선은 일본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한 다음 공사관과 자국민의 안전을 확보할 명분으로 일본군이 상주하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군란이 발생한 까닭은 민자영 일파의 전횡으로 국고가 탕진되었기 때문인데, 일본에게 배상할 돈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묄렌도르프의 제안에 의해 조폐시설이 도입되고 당오전을 발행했지만 당백전과 다를 바 없었다. 

- 나라가 더욱 어지러워지는 가운데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묄렌도르프를 앞세운 청에 반대했다. 한참 아래로 얕잡았던 일본이 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근대국가로 변신한 것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들은 청을 멀리하고 일본에 차관을 요청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민자영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일본이 김옥균과 같은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이 방문했을 때 후대하며 자신들이 이룩한 개혁의 성과를 주입한 속셈 또한 수상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혼란 속에서 임오군란과는 전혀 다른 파괴력이 급격히 응축하기 시작했다. 

- 도성의 백성들까지 굶주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때에 상당한 규모의 공사가 벌어졌다. 창덕궁 동쪽의 성균관에 인접한 숭동 崇洞에 새로운 관왕묘가 건설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북관왕묘, 또는 북관묘로 불렀다.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 관우는 중국 곳곳에 사당이 있으며, 조선에서도 도성의 중심지에 동묘를 세워 극진하게 추모하던 터였다.

- 새로운 관왕묘의 주인은 무당이었다. 민자영을 따라 도성으로 들어온 무당은 자신을 관우의 딸이라고 소개했다. 무당이 그렇게 행동한 것은 적지 않은 다른 무당들과의 차별성을 가지기 위함이었다. 관우를 몸주로 섬기는 것은 어지간히 영험한 무당들도 엄두가 나지 않겠지만, 왕비의 총애를 받는 무당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민자영이 환궁하는 것은 물론 시기까지 정확하게 예언한 무당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격에 맞았다. 

- 고종과 민자영은 그에게 '진령군 眞靈君'이라는 군호를 내렸다. '진실로 영험하다'는 의미인 진령의 다음에 붙은 '군'의 칭호는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국대전 經國大典>에 따르면 왕의 아들이거나 왕실과 지근거리에 있는 종친, 또는 딸이 왕의 부인이어야 비로소 군호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드물게는 이하응처럼 왕의 부친이어야 군의 칭호를 받을 수 있는 정도였다. 신료의 경우 역사에 이름을 남길 공을 세우거나, 영의정을 역임하는 것은 물론 당파를 이끄는 영수로 활약하면서 군주의 신임까지 돈독해야 비로소 군호를 받을 수 있었다. 군호라는 것은 그만큼의 무게를 지닌 칭호였다. 

- 그런데 무당은 진령군이라는 군호를 받았다. 광대와 더불어 천민의 신분인 무당이, 그것도 여성으로서 군호를 받은 인물은 민자영이 총애했던 무당이 조선 역사상 유일하다. 유림을 대표하는 율곡 이이를 낳고 교육해 가장 뛰어난 여성으로 공인된 신인선도 당호를 받아 신사임당으로 불렸을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파격에 파격을 더한 특혜가 아닐 수 없다.

- 국가를 책임져야 하는 자들이 홀린 것을 보다 못한 나머지 재정을 담당하는 공조참판 이응진이 상소했다.
[신이 보니 동리 안에 아주 잘 지은 집이 있었는데 사람이 사는 집 같지 않았습니다. 듣건대 신사 神祠로서 백성들이 문미 門楣에 이따금 '복마성제 伏魔聖帝"라는 글을 써서 걸어놓는다고 하니, 이것은 모두 이전에 보지 못한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관우를 숭상하고 받들어서 이미 동관왕묘와 남관왕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북관왕묘를 새로 세워 의식제도도 존엄하니 도성의 남녀들이 푸닥거리할 곳이 없다고 근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만약에 무당을 위해서 집을 짓고 어지럽힌다면 매우 불경한 일일 것입니다. 
흙이나 나무로 만들어 놓은 괴이한 귀신과 각종 귀신을 위해 만들어 놓은 사당의 신령들은 법에 어긋나 조정의 명령으로 금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잘되고 못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 왕비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한 무당이 사인교를 타고 퇴궐하자 백성들이 수군거렸지만 손가락질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 바닥의 생리를 빠르게 깨우친 무당이 물을 만난 고기처럼 날뛰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북관왕묘로 돌아온 무당의 호사와 낭비는 여왕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도기로 만들어진 욕조에 은근하게 데운 석간수를 채운 다음 갖은 꽃잎을 띄운 시녀들이 무당의 옷을 벗겼다. 촌구석에서 아낙이 길어온 우물물로 겨우 몸을 씻던 때가 엊그제 같았지만, 이제 무당은 마을 아낙네의 하소연이나 달래주던 사람이 아니었다.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하던 무당이 가볍게 한숨을 뱉었다. 이렇게 사람의 앞날이 극적으로 바뀌는데 설령 귀신이 있다고 한들 헤아리지 못했을 터였다. 


- 민자영은 무당을 신임하는 수준을 넘어 숭배하기까지 했지만 미래를 내다볼 정도의 신통력을 갖춘 사람이 무엇이 아쉬워 벽지에서 푸닥거리나 겨우 하며 살았을까. 무당은 나랏일은커녕 자신이 그날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보통사람에 지나지 않았지만, 민자영에 대한 소문은 충분히 듣고 있던 터였다. 백성들의 어려움에는 전혀 관심도 없으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비용도 서슴없이 낭비하는 민자의 행태는 벽지에까지 소문이 파다했다. 무당은 신기 神氣와 영험을 펼친 것이 아니라 민자영이 애타게 원하는 것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을 뿐이었다. 

 

- 안전해진 다음 가장 먼저 여기를 찾은 것은 그렇게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무당은 총소리가 난무하자 겁에 질린 나머지 구석에 숨어 덜 덜 떨기까지 했지만, 고종과 민자영이 감사를 표하는 것까지 사양할 이유는 없었다. 준비가 미진했던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덕택에 어려운 시기를 두 차례나 함께한 것으로 되었으니 믿음이 더욱 돈독해질 것은 분명했다.

- 무당이 얻게 될 이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종과 민자영이 안전해진 다음 가장 먼저 북관묘를 찾았다는 자체가 무당의 힘을 입증했다. 이번 사태는 그렇지 않아도 막강한 실세로 떠오른 무당이 아예 차원이 다른 실세로 등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지금까지는 고기가 물을 만난 것 같았다면 앞으로는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것과 같았다. 이제는 무당이 마음껏 날뛸 일만 남았다. 무당은 자신에게 의지하는 고종과 민자영이 측은했고 그런 왕과 왕비에게 충성하는 백성들이 측은했다. 하지만 이득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그와 별개의 문제였다. 

- 전국 곳곳에 그런 자들이 산재했지만 전라도 고부의 백성들이 들고일어난 까닭은 동학과 무관하지 않다. 교주 최제우 崔濟愚가 처형당한 다음에도 동학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2대 최시형과 3대 손병희 孫秉熙로 이어지면서 민간의 깊숙한 곳까지 스며든 동학은 빠르게 골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특히 곡창지대로서 이웃의 긴밀한 협력이 필수적인 호남의 동학은 더욱 견고하게 결속되었다.

- 고부에 부임한 조병갑은 자신의 구역에 전봉준 全琫準이 있음을 알지 못했으며, 전봉준이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는 것 역시 알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조병갑이 가혹한 세금을 낮춰줄 것을 요청하던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을 비롯해 촌로 여럿을 죽이자 그렇지 않아도 끓어오르던 민심이 거세게 폭발했다. 임오군란이 터질 때의 상황이 끝까지 부푼 풍선에 바늘을 들이댄 것 같았다면, 갑오년 2월에 폭발한 동학혁명전쟁은 격류가 몸부림치는 둑에 구멍을 뚫은 것 같았다.  
순식간에 고부를 해방시킨 전봉준에 의해 인근 지역에도 혁명의 물꼬가 텄다. 김개남과 손화중, 최경선 등의 주요한 인물들과 손을 잡고 총대장으로 추대된 전봉준은 백산에 모인 백성들과 함께 역사적인 고성을 터뜨렸다. 이후 농민군은 전라도의 상징이자 조선의 발상지인 전주를 향해 북상하기 시작했다. 

- 1895년(고종 32년) 8월에 접어들면서 일본 공사가 교체되었다. 구관인 이노우에가 외교에 정통한 반면 신임 미우라 三浦梧楼는 일본육군 중장 출신의 무인이었다. 외교와 어울리지 않는 공사가 부임한 다음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일본인들이 삼삼오오 도성으로 들어왔다. 게다가 일본이 주도적으로 창설해 도성의 수비를 담당하던 훈련대를 폐지한다는 소문과 함께 불온한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도성에 들어온 30명가량의 일본 낭인들에게 하달된 작전명은 '여우사냥'이었다. 오카모토 류노스케 岡本柳之助를 중심으로 면밀하게 작전을 검토하고 도상연습을 반복하던 낭인들은 특히 민자영의 사진에 유의했다.

- 8월 20일 새벽, 훈련대가 먼저 움직였다. 이두황이 이끄는 1대대는 광화문으로 향했고 우범선이 지휘하는 2대대가 경복궁의 후문을 차단했다. 일본 공사 미우라와 다수의 일본군과 낭인들이 대기하는 가운데 연금 상태에 있던 이하응이 가마를 타고 나타났다. 그것을 신호로 작전이 개시되었다. 마침 전날 저녁에 연회가 베풀어져 곳곳이 환하게 밝혀졌기 때문에 작전을 전개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 역사는 이때의 참사를 가리켜 '을미사변'이라고 한다. 을미사변이 벌어진 이후 민자영은 다시 한번 죽음을 맞았다. 넋이 반쯤 나간 고종은 민자영의 폐위를 명해야 했다. 친러내각이 해체되고 친일내각이 들어섰지만 뭇사람들은 그런 것에 관심을 두려 하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는 어제까지 욕했던 민자영이 일본에서 보낸 자객들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당한 것을 원통하게 여기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 우리에게 당시를 살았던 지석영 池錫永은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그는 종두법을 도입해 천연두를 치료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실록에도 '의학교장 지석영이 천연두 치료법을 천명해 치료에서 힘입고 있으니 마땅히 상을 주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특별히 훈5등에 서훈하고 팔괘 훈장을 하사하라'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지석영을 극히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에는 무당들도 있었다. 질병에 걸리면 신에게 비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에 지석영은 무당들의 밥그릇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지석영을 적으로 규정한 무당들이 갖은 방해를 하는 바람에 지석영이 당한 피해도 적지 않았다. 그런 지석영이 민자영이 참혹하게 죽기 일 년 전쯤 무당 중의 무당인 진령군을 정면으로 조준한 사실도 있다. 
 
- [신이 전국 억만 백성의 입을 대신해 자세히 아뢰고자 합니다. 정사를 전횡하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을 수탈해 소요를 초래하고 원병을 불러들이게 만들며 난이 일어나자 먼저 도망친 간신 민영준 閔泳駿과, 신령의 힘을 빙자해 임금을 현혹시키고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에 대해 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합니다. 
저들의 극악한 행위가 아주 큰 데도 한 사람은 귀양을 보내고 한 사람은 문책하지 않으며 마치 아끼고 비호하는 것처럼 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어찌 풀리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어서 상방검 尙方劍으로 두 죄인을 주륙하고 머리를 도성문에 달아매도록 명한다면 민심이 비로소 상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숨어 있는 우수한 인재를 모두 뽑아서 각각 합당한 직무를 맡기고 협력해 충성을 바치게 한다면 빠른 시일 내에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가 강해질 것입니다.]  

- 민영준은 농민군이 기세를 올릴 당시 청에 파병을 청하는 과정에서 총대를 멘 최측근이다. 나중에 이름을 민영휘로 바꾼 민영준은 임오군란 당시 난병이 자택을 습격했을 정도로 원성이 높았다. 갑신정변 때도 하마터면 죽음을 당할 뻔했다가 청군이 개입한 덕택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민영준은 원세개와 결탁해 조정을 좌지우지하면서 매관매직과 수탈에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 가마 두 채가 외부로 나갔다. 궁녀들이 대궐을 출입할 때 이용하는 평범한 가마였기 때문에 경비병들은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건춘문에서 멀어진 가마가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가마가 향하는 곳은 정동에 소재한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공사 베베르 Вебер는 '전국적으로 의병이 궐기하는 등 극도로 혼란한 상황에서 공사관과 자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본국에서 병력을 충원받은 상태였다. 고종이 피신하기 이전부터 정동의 공사관은 요새처럼 변해 있었다. 궁녀대신 고종과 세자를 태운 가마가 들어가자마자 완전무장한 러시아군이 실탄을 장전하고 살벌하게 경계했다. 

- 고종이 러시아의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을 '아관파천 俄館播遷'이라 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가 외국의 공관으로 피신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사례를 찾기 어렵지만, 외국의 공사관에 몸을 의지하고 나서야 비로소 고종은 친일내각을 제거하라는 어명을 내릴 수 있었다. 일본이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다음 친일내각을 상징했던 김홍집을 위시한 관료들이 분노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 다른 친일파들은 살아남기 위해 일본공사관으로 도주한 다음 망명했다.

- 고종이 탈출에 성공할 수 있는 배경에는 엄상궁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엄상궁이 정해진 시간마다 자신과 궁녀를 태운 가마로 건춘문을 반복해서 출입해 경계를 무디게 만들었기 때문에 탈출이 주효할 수 있었다는 주장에는 신빙성이 적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엄상궁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는 데 있었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승은을 입어 아들을 생산한 다음에는 더욱 그랬는데, 어떤 상황에서는 예전 왕비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 일 년 정도 유지된 아관파천 기간 동안 고종은 정동에서 어명을 내릴 수 있었지만, 러시아도 공짜로 해주지는 않았다. 자국과 인접한 지역에서 광산을 채굴하고 목재를 채벌 할 권리를 요구한 러시아는 심지어 울릉도에서의 채벌까지 요구했다. 러시아의 요구를 거절할 명분이 없던 고종이 이권을 넘겨주자 다른 열강들까지 입을 벌리고 덤벼들었다.


- 게다가 러시아와 일본이 가까워지는 조짐이 나타났다. 1613년(광해군 5)부터 러시아를 통치하던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1896년 5월에 성대한 대관식을 가진 다음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일본도 러시아가 내민 손을 굳이 뿌리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영원히 유지되는 조약과 협정은 존재하지 않거니와, 일본은 러시아를 제압하지 않고서는 원대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자각한 다음이었다. 그저 일본에게 러시아는 청과 전혀 다른 상대였기에 속셈을 감추고 체력을 기르기 위한 목적으로 살갑게 웃으면서 협정에 응했을 뿐이었다.  

 

- 1897년(고종 34) 2월 20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했던 고종이 드디어 환궁했다. 그러나 고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들어간 궁궐은 경복궁이 아니었다. 아관파천 이후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경운궁이 증축에 들어갔다. 성종의 친형 월산대군의 사저였다가 임진전쟁 당시 경복궁이 전소당하는 바람에 선조가 입주한 다음, 광해군은 물론 인목대비까지 거주했던 정릉동 행궁(서궁)이 경운궁으로 증축된 것은 러시아 공사관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다. 경복궁으로 환궁하라는 주청이 빗발쳤지만 고종은 이번에도 듣지 않았다. 경운궁의 규모가 계속 확대되어 국고의 부담이 증가하는 것 역시 전혀 개의치 않았다. 

- 구례의 봄은 도성보다 훨씬 빨랐다. 서재에서 집필에 열중하던 황현 黃玹이 대청으로 나와 포근한 숨결 같은 공기를 들이켰다. 마흔세 번째로 맞는 봄은 더욱 새롭고 달콤했다. 집필을 시작하면 시간 가는 것을 잊기 때문에 마련한 자명종이 아주 요긴했다. 하인들이 대청에 놓아둔 자명종의 시간을 맞추고 태엽을 감아두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담당을 두기까지 했다. 
하인들이 준비한 점심을 물리고 차를 마시는 황현은 원래 시골에서 소일할 사람이 아니었다. 황희의 후손으로 만만치 않았던 집안은 인조반정 이후 내리막을 걷다가 전라도 광양에서 자리를 잡은 다음 부친의 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넉넉해졌다. 

- 황현의 문재는 보기 드물게 뛰어났다.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다가 상경한 때는 스물네 살이 되던 1878년(고종 15)이었다. 당대의 인사들과 교류하며 안목을 넓히던 그는 서울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황현은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지만 그의 부모는 그렇지 않았다. 효도를 하기 위해 스물아홉이던 1883년(고종 20)에 장원으로 급제했지만 기쁨도 잠시,  ... 

- 고종이 운현궁을 찾은 때는 이하응이 세상을 떠난 다음 두 달이 훨씬 지난 5월 12일이었다. 실록은 이때를 가리켜 '운현궁에 나아가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 興府大夫人의 영좌 앞에 곡임 哭臨하고 나서 진헌을 행하였다'고 기록했다. 고종은 모친인 여흥부대부인이 돌아갔을 때도 운현궁을 찾지 않았다. 1월 11일에 비로소 망곡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경운궁 내부에 빈소를 차렸을 따름이다. 이후 부친상을 당한 다음에도 경운궁에 빈소를 차린 다음 5월 12일에야 운현궁을 찾아 모친상과 함께 합동으로 곡을 하고 술을 올렸다. 

- 이하응은 죽은 다음에도 편하지 못했다. 죽은 지 11년이나 지난 다음 대원왕에 추봉 되었는데, 그때는 고종이 죽고 순종이 즉위한 해였다. 이하응의 묘는 부인과 합장되어 이리저리 옮겨지다가 1966년 경기도 남양주 화도로 이장되었다.

- 고종이 황제로 승격한 다음 궐내에서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아관파천 당시 공이 컸던 엄상궁이 아들 영친왕을 출산한 때는 1897년(고종 34) 10월이었다. 민자영 사후 가까이서 고종을 섬겼던 엄상궁이 승은을 입은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문제는 고종이 자신의 아들을 낳아준 후궁 가운데 하나 이상으로 대하려는 데 있었다.  

- 고종 덕택에 황태자로 승격한 세자(순종)가 1874년에 태어난 다음, 1877년 궁인 장씨가 의친왕을 낳았다 


- 10월 중순, 신문을 받아본 황현은 절로 한숨이 났다. 감히 황제와 황태자를 해치려 했던 김홍륙 金鴻陸 등 3인이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기사의 전말은 여기서도 파다했다. 통역관 출신인 김흥륙은 고종과 황태자가 즐겨 마시던 가비(커피)에 아편을 넣어 살해하려 했다.

 

- 본래 통역관은 중인계층에서 나왔지만, 함경도 출신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자주 드나들면서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김홍륙은 어렵지 않게 역관으로 채용되었다. 이후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져간 데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과 러시아 공사의 통역을 전담하면서 김홍륙은 출셋길이 훤하게 열렸다. 고종의 전폭적인 신임을 등에 업은 김홍륙은 내각의 중책을 맡을 정도로 출세했지만, 권력의 맛을 보자마자 부패했다. 뇌물을 밝히기에 여념이 없었던 김홍륙은 심지어 인사에까지 간여하고 전횡을 자행했다. 김홍륙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던 나머지 그를 노린 자의 칼에 중상을 입었을 정도였다. 그때까지는 고종도 감싸고 돌았지만, 친러파가 주춤하는 상황에서 김홍륙이 갖은 이권에 개입하고 횡령까지 일삼았다는 날 선 비판이 고종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 신하들의 주청을 받아들인 고종이 김홍륙을 흑산도로 유배할 것을 명하자 김홍륙도 가만있지 않았다. 흑산도로 떠나던 날 김광식의 집에 머물던 김홍륙이 한 냥의 아편을 찾아내어 친하게 지내던 공홍식 孔洪植에게 주면서 어선 御膳(수라)에 섞어 올릴 것을 사주했다. 공홍식은 서양음식을 담당하다가 솜씨가 좋지 않아 그만두게 된 자로, 거액을 제시받자 아편을 소매 속에 감추고 주방으로 들어간 다음 마침 끓고 있는 찻주전자에 넣었다. 

- 러시아 공사관에 있으면서 고종과 황태자는 커피에 맛을 들인 터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커피를 마시다가 고종은 바로 토했고 황태자는 그대로 실신했다. 옆에 있던 궁인들도 커피를 맛본 다음 토하면서 복통을 일으키고 쓰러지는 바람에 경운궁이 발칵 뒤집혔다. 황제와 황태자를 독살하려던 흉모는 어렵지 않게 전모가 밝혀졌다. 주범과 공범들은 가혹한 고문을 당한 다음 자백했다.

- 대역무도한 범죄자들이 교수형에 처해진 다음 저잣거리에 방치되자 분노한 백성들이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어버렸지만, 황현은 그들이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김홍륙이 고종을 독살할 이유 자체가 없었다. 비록 고종이 흑산도로 유배하라는 명을 내리기는 했지만, 저지른 죄에 비하면 처벌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또한 재산이 몰수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흑산도에서 요양하는 셈 치고 느긋하게 때를 기다리면 될 김홍륙이 고종을 독살한다는 것은 무당이 민자영을 독살하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 '황제독살미수사태'는 독살 시도가 아닌 경고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고종을 제거할 수 있다고 경고할 수 있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동안 수집한 자료와 정황을 앞으로 예상되는 움직임에 대입하면 하나씩 압축할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당사자인 고종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임에도 애꿎은 김홍륙에게 덮어씌우고 종료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였다. 

- 육군보다 해군의 근대화가 훨씬 어려운 것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이 제대로 된 해군을 가지기 위해 준비한 기간이 20년 가까이 걸렸다는 역사를 감안하면 황제를 보위할 제국해군의 존재는 코빼기조차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그것도 당시 시점에서 3년 이후의 상황이 저러했다. 
 
- 황현은 1899년(광무 3)을 돌아보며 이렇게 기록했다. 진령군과 같은 고장인 충주에서 성강호 成康鎬라는 자가 귀신을 볼 수 있다 해 고종이 불러 민자영을 볼 수 있게 하라고 명했다. 하루는 민자영의 신위가 모셔진 경효전에서 다례를 행하던 성강호가 갑자기 계단 아래로 엎드렸다. 고종이 연유를 묻자 "황후께서 임하사 탑 榻(좁고 길게 만든 평상)으로 오르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고종은 탑을 어루만지며 대성통곡했고, 성강호가 "통곡이 심하면 신령이 다시 임하지 않나이다"라고 말리자 그제야 눈물을 거뒀다. 
이후부터 공식적으로 제사를 지낼 일이 있으면 고종은 반드시 성강호에게 물었다. 성강호는 '황후가 왔는가?'라는 물음에 '저승과 이승은 서로 달라 내려오시기도 하고 내려오시지 않기도 합니다'라고 답하곤 했다. 고종은 황후가 생각날 때마다 성강호를 불렀다. 불과 일 년 만에 성강호의 관직이 협판에 이르렀으며 그의 문전이 저자 같았다. 진령군은 끌어내려졌지만, 대한제국에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1900년 연말 즈음 황현은 그동안 작성한 기록과 수집했던 기록들을 거슬러 살폈다. 12월에 청의 공사 서수붕 徐壽朋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참찬관 허태신 許台身이 서리공사로 집무했었다. 고종을 처음 알현했던 서수붕이 이렇게 아뢰었다.
"조선와 와보니 기수 氣數가 왕성하고 풍속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외교관으로서 입에 발린 칭찬이었겠지만 고종이 의아해하며 칭찬하는 이유를 물었다.
"어떤 연유에서 그렇게 생각하시었소?"
"본국은 벼슬을 팔아먹은 지 십 년도 되지 않았는데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종묘사직이 위태로울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폐하의 나라는 벼슬을 팔아먹은 지 삼십 년이나 되었다는데도 제위가 아직 편안하니, 기수가 왕성하지 않거나 풍속이 아름답지 않고서야 어찌 지금까지 이를 수 있었겠습니까?"
이에 고종이 크게 웃으며 부끄러운 줄 모르자 서수붕이 나가면서 '슬프구나, 대한의 백성들이여'라고 한탄했다. 황헌은 그 대목에서 함께 한탄했다.

- 11월의 기록에서는 지리산에 웅거한 비적두목 김태웅 金太雄이라는 자가 처형당했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지리산에서 가장 깊숙한 청암동 진주암 일대에 웅거해 주변의 백성들을 규합한 김태웅의 세력이 자못 강성했어도 세상을 뒤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 윤웅렬이 그렇게 주청 했거니와, 일 년 뒤 의정부찬정으로 재직하다 역시 사임한 권중현 權重顯의 상소도 다르지 않다.
"근간의 일을 가지고 말하면 군부에서 구입한 총과 탄알을 만들기 위한 기계와 군함 양무호입니다. 만일 국고의 재물이 넉넉해서 쓰고 남는 것이 있다면 군품을 구입하는 것에 대해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허나 지금은 경비가 고갈되고 연례적인 지출도 오히려 당하지 못할까 봐 걱정인 때입니다. 하물며 긴요하게 쓸 것도 아닌 것에 어찌 거액을 소비한단 말입니까?"  
노후한 선박을 국가 예산의 10%나 되는 거액을 들여 구입한 데다 유지비와 수리비로 인해 국가 재정에 무리가 올 지경이었다. 그렇게 1903년은 엄상궁이 황귀비로 승격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 열강에 의해 의화단이 격파당한 다음 미묘한 기류가 만주를 덮었다.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일본에게 넘겨주지 않도록 압력을 가했던 러시아와, 대승을 거두고도 원했던 대가를 얻지 못한 일본이 날카롭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의화단을 진압할 때 함께 파병했던 일본과 러시아는 서로에 대한 경계를 감추려 들지 않았다. 이후 진압이 끝난 다음에도 러시아가 만주에 파병한 대규모의 군대를 철수하지 않자 열강들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 일본은 열강 가운데서도 최강을 자부했던 제정 러시아의 자존심을 꺾었지만 정작 러시아를 무너뜨린 것은 무당이다. '라스푸틴 Распутин'은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종교인으로 진령군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다. 라스푸틴은 혈우병을 앓던 황태자를 치유하는 믿기 어려운 능력을 발휘하면서 황후를 완전히 홀렸다. 이후 라스푸틴은 황후는 물론 귀부인들까지 농락했다.  
인사권을 비롯한 거의 모든 권한을 손에 넣고 세금까지 멋대로 징수하는 라스푸틴에 의해 나라가 엉망으로 돌아가도 황태자를 치유할 사람이 오직 라스푸틴 밖에 없다고 믿었던 니콜라이 2세는 그를 퇴출하는 데 주저했다. 황제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라스푸틴의 권력은 계속 강해졌다. '피의 일요일 사건'은 라스푸틴이 발포를 명령한 결과라는 소문이 시민들 사이에서 신빙성 있게 나돌 정도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황제가 전쟁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자 라스푸틴은 러시아를 완전히 장악했다. 


 

황현(1855~1910)의 영정, 보물 제1494호



 - 그는 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녹을 받은 적도 없어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그러나 망국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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