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해로
출판 : 네오픽션
출간 : 22.09.20
예측 불가능성이 주는 공포스러움을 절절히 체험 중이다.
완전히 생 신입을 맡은 건 진짜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과외를 쉰 지도 오래되었고, 가장 최근에 트레이닝을 맡았던 것도 4년이 지났다. 해서 간만에 예전 자료를 찾고, 수정하고, 컨펌받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결과적으로, 나는 매우 좌절스럽다.
스스로에 대해 재평가 중인데-
나는 꼰대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내 예상을 벗어나는 사고회로를 가진 사람에게는 정보를 입력할 능력이 전무하다.
동시에 입사한 두 신입이 있다. 모두 올해 갓 졸업하고 면허를 받은 동갑내기다.
한 명은 별문제 없이 실무 수행 중이고,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 행동한다.
등 뒤에서 멈칫 거리는 낌새와 타이밍만으로도 대강 뭘 고민 중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무력감을 넘어서면 공포가 찾아온다는 것을 배웠다.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을 상당히 강력하게 부정적 감정으로 이끈다.
초초초 마이크로 매니징으로 수행시키면 아예 기억을 못하고,
매크로 매니징으로 체험시키면 굉장히 어려운 방법으로 실수를 한 뒤 이렇게 배웠다고 주장한다.
소금은 짜다.
많이 넣으면 짜고 적절히 넣으면 맛을 돋군다.
단 음식에 살짝만 추가하면 단맛을 강조한다.
소금을 넣은 물은 그냥 물보다 낮은 온도에서 언다.
인간의 피와 육체에는 소금이 함유되어 있다.
이것은 모두 '소금'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모두 다른 데다 모순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피와 육체에는 소금이 '적절히' 들어있는데 달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보다 높은 온도에서 얼어죽기 때문이다.
뭐랄까...
어쩌면 그이의 사고가 보다 본질적이고 높은 체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이와 동료로 일하는 것이 매우 고되다.
등의 고민과 고통을 안고 <단죄의 신들>을 읽었다.
박해로의 다른 작품을 읽을 때는 대부분 주인공이나 화자의 입장에서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 했었지만.
이번만큼은 월선제력에 가까운 입장에서 세상과 사회의 온갖 부정적인 것들을 질타하고 등가교환과 책임과 속죄에 대해 부르짖었다.
(물론 월선제력의 논리와는 상당히 달랐으며 그들의 무차별 살인이나 기만 같은 행위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아아.
빛은 올 것인가.
salt. Salt.
- 1857년
온통 비명뿐이었다. 검은 동굴 안의 광경은 사찰에 걸린 지옥도(地獄圖) 그대로였다. 자욱한 안개 속에 벌거벗은 사람들이 있었고 벌거벗은 마귀들이 있었다. 마귀들은 형벌을 가하고 사람들은 형벌을 받았다. 민머리에 귀가 길고 이빨이 치솟은 마귀들은 거두(去頭) 톱으로 사람의 몸을 썰고, 끓는 물에 끓이고, 혀를 뽑고, 바늘판 위를 걷게 했고, 칼날 같은 나뭇잎이 빽빽한 수림 속으로 밀어 넣었다.
- 이제 막 고초굴(苦楚窟) 진입에 성공한 토포사(討捕使) 유중활은 몸이 굳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지옥은 환상이 아닌 실제였다. 저승의 심판이 하늘이 아닌 땅속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파와 귀파로 발 디딜 틈 없는 그곳은 가학과 피학의 절정이었다. 흉악스러운 고문 도구들은 마귀들의 것이었고, 사람들은 맨몸으로 내몰렸다.
- 거대한 솥에서 나오는 김으로 사방이 자욱했다. 부글부글 끓는 솥에는 피부가 벌겋게 부어오른 사람들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붉은 몸의 마귀가 단을 밟고 올라가 솥 위에 서서 거대한 국자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머리를 눌렀다. 그 광경은 화승(畵僧) 탁휘가 상주 남장사 <감로도(甘露圖)>에 묘사한 '확탕지옥(鑊湯地獄)'과 똑같았다.
푸른 마귀 두 명이 흥부 부부처럼 분주한 톱질로 사람의 몸통을 반으로 잘랐다. 허연 마귀는 열십자 형태로 누운 사람의 입을 벌리고 집게로 혀를 뽑았다. 검은 마귀는 노인의 목에 쇠사슬로 된 목줄을 채워 개처럼 끌고 다녔다. 노란 마귀가 바늘이 빽빽하게 박힌 이부자리에 엎드려 있던 아낙을 일으켜 세우자 전신에서 피가 쏟아졌다.
- 유중활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가는 곳이 바로 이곳임을 깨닫고 절대 죄짓고 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곳곳에서 지옥의 형벌이 거행 중이었는데, 이 아비규환의 꼭대기에 두 개의 대좌가 있었다. 검은 그림자 둘이 그곳에 앉아 있고, 그 아래에는 화려한 전포를 두르고 길게 수염을 기른 장수 네 명이 동서남북으로 앉아 있었다. 장수들은 비파, 보검, 용과 여의주, 작은 탑을 손에 쥐고 있었고, 그들 발아래에는 흉악하게 생긴 마귀들이 깔려 있었다. 사찰문(寺刹門)에 배치된 사천왕상(四天王像)과 정확히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유중활의 음성이 떨렸다.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
- 하나는 검은 수염을 가슴께까지 드리운 남자 신장, 또 하나는 옥처럼 깨끗한 얼굴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 신장이었다. 유중이 혼잣말하듯 물었다.
"저들이 사천왕을 거느린다는 제석천(帝釋天)과 이곳의 주인인 염마천(閻釋天)인가?"
"장군! 우, 우린 어찌해야 하옵니까?"
등 뒤에서 군사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군사들 역시 유중활처럼 공포에 질렸음이 명백했다.
여 신장의 음성이 안개를 뚫고 날아와 유중활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너의 죄를 고하라. 대오(大悟)하고 각성(覺醒)한 후, 무화(無化)를 받아들여라."
- "반야심 작가는 우리와 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연락을 끓어 지금 출판사가 막대한 손해를 볼 처지입니다. <단죄의 신들>은 3부작으로 나올 예정인데 2부까지만 쓰고 잠수를 탄 겁니다."
이종하에 이어 석도신애가 덧붙였다.
"이달 중으로 3부 원고 극락정토의 시작이 완성되지 않으면 우리도 우리지만 영화사를 비롯한 여러 투자사들이 줄줄이 곤란을 겪게 됩니다. 하 작가가 물어내야 할 위약금 역시 엄청난 액수가 될 테고요."
"저는 연대보증인이 아닙니다. 저한테 왜 걔 행방을 추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반야심 작가가 사고를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게 저희 생각입니다. 건강이 안 좋았거든요."
"연 끊고 살았다니까요. 20년 전쯤 행불되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각조차 해본 적 없어요. 내 얘길 했다고요? 분명 애틋한 얘긴 아닐 겁니다. 제 부모님은 서진이 때문에 골치 아픈 일을 정말 많이 겪었습니다. 돌아가신 것도 걔 때문이지요."
주생의 높아지는 음성에도 이종하와 석도신애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반야심 작가가 정말 무슨 사고를 당해 연락 두절이라는 게 입증되면 모두가 위약에 따른 불이익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있 ... "
- 완전히 제멋에 사는 사람 같았다. 두 사람이 떠나자, 주생은 이종하가 남기고 간 <단죄의 신들> 1,2권에 눈길을 주었다. 지옥을 묘사한 표지 그림이 서진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듯했다.
18년 만이네. 어디서 뭘 하고 지냈는지는 몰라도 유명작가가 되어 나타나셨다고?
그것도 이런 끔찍한 소설로?
아빠도 엄마도 너 때문에 죽은 거야, 서진아.
하지만 돈으로 속죄할 수 있어.
날 좀 도와줘. 이 진저리 나는 일을 때려치울 수 있도록.
- 하주생은 4부제로 근무하는 교도관이었다. 1, 2, 3, 4부 네조로 나뉜 직원들이 순환 근무를 했다. 주생은 4부 소속이었는데, 첫날 철야근무를 하면 이틀을 쉬고 나흘째는 주간 근무를 했다. 네 번의 순환이 끝난 닷새째는 다시 4교대의 첫날로 18시부터 철야근무에 들어갔다. 요사이 그에겐 근무하는 날도 쉬는 날도 악몽이었다. 건설시공업체 사장 김만식 때문이었다. 그는 조직폭력배를 거느린 경제사범이었다. 창살 안에는 김만식이, 바깥에는 김만식의 수하들이 있었고, 그들 모두가 주생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다.
- 2004년 4월 4일 4시, 주생의 부모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가출한 후 감감무소식이던 서진이 흐느끼며 전화를 걸어온 날이었다. 주생의 부모는 서울에 있다는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에 길을 나섰다가 맞은편에서 오던 승합차와 정면 충돌해 즉사했다.
그 후로 서진과는 다시 연락이 끊어졌고,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친척이라곤 없던 스무 살 주생은 홀로 초상을 치러야만 했다. 친할아버지가 있었지만 속세와 연을 끊은 승려였다. 말없이 찾아온 주생의 할아버지는 빈소에서 목탁을 몇 번 두드리고 염불을 외운 후 그대로 떠나버렸다. 뒷바라지를 해주겠다거나 같이 절에 가자는 말조차 없었다. 주생은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조부에게도 증오를 품게 되었다.
- 2005년 주생은 스물한 살 최연소 교도관으로 영등포교도소에 발령받았다. 그리고 근무 하루 만에 교도소 업무가 자신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범죄자와 함께 갇혀 상호 감시를 하는 업무는 징역 아닌 징역이었다. 업무 자체가 신경이 곤두섰다. 모범수들은 괜찮았지만 문제수들은 협박으로 폭력으로 청원으로 소송으로 그를 괴롭혔다. 그들을 매일 상대하니 악성(惡性)조차 전염이 되었다. 주생은 카지노에 출입했고 도박을 배웠다. 향락에의 몰입이 과거의 충격과 현실의 괴로움을 진통제처럼 잊게 했다.
- 올해는 반드시 그만둔다는 계획은 매년 미뤄졌다. 카지노 출입을 끊어도 바다이야기와 주식 투자가 새롭게 흥미를 끌었다. 흥미는 탐닉이 되고 탐닉은 중독이 되었다. 젊은 나이에 가져볼 법한 미래 계획이 주생에겐 없었다. 새파란 나이의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탈에 심취했다. 과거의 단절, 현실의 도피는 핑계였다. 왜 심취하고 중독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길지 않은 기간에 전 재산을 탕진한 그는 낙향을 결심했다. 조용한 시골에서 새로 출발하면 모든 게 나아지리라 싶었다. 서울을 등진 그는 고향인 다흥의 구치지소로 전출을 갔다. 하지만 새 출발은 수월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 다만 단죄의 신들을 떠올렸다. 이산가족 상봉 목적이 아니라면 읽지 않을 책이었다. 추악하고 불결하고 끔찍하고 찝찝하며 환상적인 소설이었다. 줄거리는 이랬다.
- [현대를 살아가는 불특정한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신비한 일을 겪는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신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신은 "너의 죄를 고하라. 대오하고 각성한 후 무화를 받아들여라"라고 말하나, 당사자 말고는 아무도 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 사무실, 야구장, 비닐하우스, 초호화 유람선, 학교, 연구실, 카페, 쇼핑몰 매장, 어린이집, 국회의사당, 박물관, 유흥업소, 비행기, 군대, 가수 무대, 종교시설 등 모든 장소를 불문하고 신의 음성이 개인에게 파고든다. 소리를 들은 사람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규정하는데, 남자는 일선제력(日線帝力)으로, 여자는 월선제력(月線帝力)으로 스스로를 칭한다.
이 일선제력과 월선제력이 서로 만나 무작위적인 살인을 저지른다. 대학 여교수가 남자 환경미화원을 만나 길 가는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고, 여당의 남자 의원이 야당의 여자 의원과 함께 중산층 가정에 침입해 독극물로 가족을 죽이고, 수녀가 승려를 만나 학교 교장을 차로 치어 죽인다. '남혐' 여자와 '성범죄자' 남자가 합심해 공원의 노인을 죽이고, 남자 가수가 여자 팬과 함께 식당 주인을 죽이기도 하는데, 이들 일선제력과 월선제력은 살인을 이루고 난 후 "신의 단죄를 피하지 말라!"소리 지르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가해자와 피해자 간에 아무 원한 관계가 없고, 가해자들끼리의 연결고리조차 없어 수사는 난항을 겪는다. 그 와중에도 살인과 살인 후의 동반자살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사회는 패닉 상태에 빠지고 기존의 가치는 붕괴된다. 마지막에 반전이 있는 점은 특이했다. 이들에게 죽임 당한 이들이 겉으로는 모범 시민이었지만 실제로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짐승이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길 가던 사람은 동물학대자, 중산층 가정은 재산을 해외로 빼돌린 세금 탈루자들, 학교 교장은 성폭행범, 공원의 노인은 전직 고문경찰, 식당 주인은 시어머니 암매장범이라는 것 등 신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는데 3부작이라고 했으니 마지막에 나올 모양이었다.]
- 휴게소에 차를 세운 주생은 <단죄의 신들>을 펼쳤다. 우연히도 444페이지였다.
[정훈과 기숙이 동시에 흉기를 겨누었다. 전직 펜싱선수인 정훈의 에페칼은 최 사장의 오른쪽 눈을, 현직 경찰관인 기숙의 권총은 최 사장의 왼쪽 눈을 겨누었다. 온통 피투성이가 된 최사장은 이 남녀가 누구인지, 자신과 어떤 원한 관계가 있는지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알아낼 수 없었다. 정훈은 미투 운동이 왕성할 때 사회에서 매장된 성폭력 가해남이었고, 기숙은 '한 남충'의 씨를 말려야 된다고 누누이 외쳐오던 남성혐오녀였다. 물론 최 사장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의식이 일치된 둘은 지금 이 순간 똑같이 입술을 움직여 최 사장에게 선언했다.
"마지막 기회다. 너의 죄를 고하라. 대오하고 각성한 후 무화를 받아들여라."
"굴지의 기업 CEO로 전 세계의 칭송을 받는 나 최문선이야!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이야?"
"무지는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신은 그대의 죄악을 낱낱이 알고 있다!"
폭발음과 함께 권총은 발사되었고 칼은 머리를 뚫고 나왔다. 얼굴이 박살난 최 사장은 힘없이 쓰러졌다. 꿈틀거리는 최사장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공허했다. 그러나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은 환희로 넘쳤다. 기숙이 정훈의 심장에 권총을, 정훈이 에페칼을 기숙의 목젖에 겨누었다. 기도문을 읊는 것처럼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신의 단죄를 피하지 말라."]
- 다시 차를 몰면서 주생은 상념에 빠졌다. 도대체 왜 이런 소설이 베스트셀러인지 알 수 없었다. 읽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고 등 뒤에 시커먼 그림자가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사람을 죽이는 대신 살리는 존재, 그것이 신이 아닐까?
<작가의 말>에서 반야심은 '신을 망각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서서히 깨우쳐가고 합의하는 참다운 신을 그리고 싶었다'고 창작 의도를 밝혔다.
그때 서진이 가출했던 이유가 사이비 종교 같은 데 빠진 건 아니었을까?
- 마지막 장 판권란에 기재된 44판의 발행 부수는 사실이었다. 초판은 작년이었다. 서진이 큰돈을 벌었음은 확실했다.
눈앞에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나갔다. 도로 표지판이 반사시킨 햇빛이 주생의 상념을 끊었다.
'신비의 고장 섭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알고 지낸 사이신가요?"
"네. 보시다시피 저희 애들이 하도 시끄럽게 뛰어다녀서 제가 먼저 케이크를 들고 찾아갔었죠. 그런 좋은 분은 처음이었어요. 절간처럼 조용하기만 한데 뭐 하러 이런 걸 갖고 왔냐 그랬거든요."
"이 아파트에 오래 살았습니까?"
“여자분이요? 아니요. 얼마 안 됐어요. 작년까진 아래층에 남자분이 사셨는데 베란다에서 담배를 계속 피워댔거든요. 아마도 우리 애들이 많이 뛰어다니니까 보복 심리로 그랬던 것 같아요."
"동거하는 사람은 없었나요?"
"혼자 사는 분 같았어요. 가끔 손님이 오시긴 했지만."
- 그 짧은 사이에 현관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주생이 맨 먼저 들어가며 서진아, 하고 불렀다. 18년 만에 불러보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부름에 응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구급대원들은 방과 욕실부터 살폈다. 경찰들도 보조를 맞춰 움직였다.
"집에는 안 계시네요."
시신과 맞닥뜨리지 않아 다행이라는 듯, 그들의 음성에서 안도감이 느껴졌다. 주생은 아파트 내부를 놀란 눈으로 둘러보았다.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거울이 너무나도 많았기 ...
- 집필을 위한 작업실이 분명해 보였다. 책상 옆에도 커다란 거울이 붙어 있어 기괴한 분위기를 풍겼다. 주생은 제일 먼저 <단죄의 신들> 마지막 편이 저장돼 있을지 모를 노트북을 찾았지만 책상 위에는 먼지만 가득했다.
'딴짓할까 봐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쳐 보면서 악착같이 쓴 건가?'
- 석도신애가 말했던 3부작 마지막 편의 자료가 있을까 싶어 방을 뒤졌다. 책장에는 책들이 즐비했다. 악마를 다룬 서양 서적, 한국의 무속신앙서적, 고대 사원 건축 서적, 약용 식물 안내서 등이었다. 문학 서적이나 사전 같은 종류는 없었고 단죄의 신들조차 없었다.
주생은 조금 열려 있는 책상 서랍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책장이 아닌 서랍에 보관해 놓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 보였다. 논어나 맹자의 한자판 같은 책이었는데 겉에 <오성밀법강령(悟醒密法綱領)>이라고 쓰여 있었다. 판매 정보가 없는 걸 보니 정식으로 출간된 도서가 아닌 모양이었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에 글씨가 세로로 쓰여졌다. 삽화도 들어가 있었는데 <단죄의 신들> 표지와 비슷했다. 훨씬 예스럽고 무서운 지옥 삽화였다. 주생이 책장을 넘기자 사진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양복을 입은 청년과 한복을 입은 청년이 나란히 서서 찍은 낡은 사진이었다. 양복 차림의 청년은 온화한 인상이었지만 한복 차림의 청년은 웃고 있음에도 좀 무섭게 생겼다. 주생은 이 사진도 핸드폰 카메라로 찍고는 도로 책장 사이에 넣었다.
- <오성밀법강령> 표지도 한 장 찍은 후 책을 다시 서랍 안에 넣었다. 아랫단 서랍을 열자 철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청룡검, 방울 그리고 부적 몇 장이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독사가 기어오르는 듯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주생은 1405호 주부가 알아챌까 봐 조심스럽게 서랍을 닫았다. 돼지머리, 방울, 청룡검 모두 점집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물건들이었다. 이것도 '생의 전당'과 관련이 있는 걸까?
- "집이 꽤 어지럽고 여행가방도 그대로 있어요. 노트북만 안보입니다."
"아, 노트북이 없다고요?"
석도신애의 어조가 실망을 띠었다가 다시 밝은 어조로 바뀌었다.
"어디 글 쓰러 가신 모양이네요. 집에서는 안 쓰고 바닷가 같은 데 주로 간다고 그러던데..."
"글 쓰러 간 거라면 불은 왜 켜놓고 갔을까요?"
"건망증 아닐까요? 집중하다 보면 사소한 건 깜빡하는 그런 ... "
- "그 소리는 밤마다 계속됐어요 경비원 아저씨들이 아무리 돌아다니고 조사해도 결국 어느 젊인지 찾아내지 못했는데..."
"그런데요?"
"그 소리가 멈춘 거예요 누님분이 안 보이게 된 날부터."
아파트를 나온 주생은 서진의 실종 신고를 하지 않기로 결실했다. 서진의 묘연한 행적에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들쑤시고 다니면 일을 망칠 수도 있었다. 황금 알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신중해야 했다.
- 통화를 끝낸 주생은 몇 가지 가설을 세웠다.
첫째, 소설 고증을 위해 서진이 선글래스 여자와 함께 있음. <단죄의 신들>은 전통 신앙이 가미된 소설. 무속인은 이런 옛 신앙에 전문가일 수 있음.
둘째, 고증이 아니라 신내림 때문에 무속인이 왕래하는 건지도 모름. 서진이 아프다는 건 어쩌면 신병일 수도 있음. 집안에 약은 없었고 부적이 있었음. 신을 다룬 소설 스토리도 증거. 그렇다면 행방불명은 신내림을 받기 위한 여행일지도 모름. 그 무속인이 누군지 알아볼 것.
셋째, 사진 속 네 여자가 서진에게 못된 짓을 했는지도 모름. 가장 걱정되는 가설. 사이비 종교 신도들일지도 모름.
넷째, 고수애라는 작가부터 캐볼 것. 그 사람에게서 '생의 전당'에 관해 알아낼 것.
- 지옥의 처형장에서 날뛰던 마귀들이 고문을 중단하고 몰려들었다. 신비로운 기운을 머금은 남녀 두 신장이 마귀들 뒤에 서니 한 폭의 인물화가 완성되었다. 마귀를 밟고 있는 사천왕의 형상화는 바로 이 장면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광경에 유중활은 몸을 떨 뿐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했다. 그러자 사위 이합정이 칼을 높이 들고 소리쳤다.
"속지 마십시오! 저들은 불법을 교묘하게 흉내 낸 가짜들입니다. 겉으로는 불상에 사문(沙門)을 두고 경전과 법열을 포교하며 항마성도(降魔成道)까지 내세우고 있으나 속은 전혀 다른 이단입니다. 이름도 내용도 불법과 구분할 수 없게끔 꾸몄습니다. 저 남녀 두 장수는 염마천과 제석천이 아니라 일선제력과 월선제력입니다."
"일선제력, 월선제력?"
유중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불가의 일광제석, 월광제석과 비슷하게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무지한 민간 백성들조차도 일선제력은 범천존자(梵天尊者), 월선제력은 삼도천녀(三途川女)란 신명(神名)으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범천왕과 삼도천에서 글자만 조금씩 바꾼 것처럼, 불법의 수호신들을 참칭해 혹세무민하려는 것입니다. 저들은 가짜 신입니다. 아니, 신이 아닙니다."
- 야비한 웃음기가 전기처럼 핸드폰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행불이 아니라 잠수 탔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난 정말 몰라요. 약속 장소에 그 사람이 안 나왔어요."
"나한테 그런 말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생은 김만식의 유흥업소에서 김 전무를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웃음 가운데 약점을 잡고, 거래 이전에 보험을 확실히 하고, 물건을 살 때 절대 손해를 안 보는 그는 무서운 인간이었다. 언젠가 우럭은 그랬다. 아이돌 가수처럼 곱상하게 생겼지만 김 전무가 트렁크에 실었다가 땅에 파묻어버린 인간들을 합치면 야구단을 만들어도 될 거라고.
"징역 사는 사람은 한 달에 전화를 네 번밖에 못 하죠. 그것도 제한 시간 3분 내로 말이지요. 사장님께서 귀한 전화를 저한테 또 주셨습니다. 하 추임님 협조를 구할 배달 일은 잠시 늦추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사장님께 다시 연락이 오면 그땐 제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 주생은 좁은 섭주 번화가에서 쉽게 극장을 찾아냈다. 마침 상영 시작에 임박한 영화가 있었다. <그녀의 눈은 올빼미, 네 심장을 쪼기 위해 부릅뜨고 있다>라는 긴 제목의 공포영화였다. 정보 검색을 해보니 별 다섯 개 만점에 두 개였고 댓글은 100개 정도였는데 대부분 이런 내용이었다.
[이따위 삼류 공포영화 말고 단죄의 신들을 당장 만들어라.]
- <단죄의 신들>은 여기저기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었다. 거기엔 일반적인 문화 현상과는 다른 집단 광기 같은 섬뜩함이 있었다. 서진이 이런 기이한 문화 현상을 이끌고 있다니 주생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대중들은 사람을 마구 죽여대는 스토리 안에서 어떤 진리를 얻고 있었다. 그 진리라는 것도 대체로 통일되었다. 이견으로 넘쳐나는 현대의 사이버 상에서 <단죄의 신들>만큼은 이견이 없었다. 모두가 죄의 깨달음에 통감했고 회오와 반성의 각오에 일치단결했다. 속죄에 따르는 죽음과 살인에 그들은 사회적 책임을 토로하지 않았다. 책이 던진 진리는 마술이자 최면이었고 맹신이자 중독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이 책은 동양철학서가 아니었고 종교 서적도 아니었다. 그저 공포심을 조장하는 상업소설일 뿐이었다. 이런 책을 저술한 서진의 목표 ...
- 평범한 일상은 이기주의가 판을 쳐도, 피 흘리는 위기의 현장에선 이런 광경을 가끔 포착할 수 있다.
사람은 고난을 스스로 짊어지기 싫어하면서 남에게 전가시키고 싶어 한다. 없는 사람은 가진 사람에 비해 고난의 짐이 더 무겁다고 느낀다. 그래서 살인도 일어나고 폭력도 일어난다. 홀로 당하는 고난은 소외를 부추기지만, 모두가 당하는 고난은 동질감을 생성시킨다. 아침에 일어난 모든 사람들이 심장에 삼지창을 겨누는 마귀를 발견한다면 이기주의도 욕심도 사라질 것이다. 공통의 고통 앞에선 오직 해결을 위한 단결만이 극복을 위한 협력만이 남을 것이기에.
- 정미정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 얼굴을 보니까 서진이가 가까이 있는 것 같아요. 당신 몸에서 똑같은 기운이 풍겨 나와요."
예상외의 말에 주생은 전율을 느꼈다.
"친누나가 아니라 사촌누납니다. 말 돌리지 말고 진실을 얘기해 주세요. 김순심 지금 어디 있습니까? 한시가 급해요. 서진이가 어디서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도..."
음악이 울려 퍼져 주생은 말을 멈췄다. 정미정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받았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아 그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 "당신 전화번호가 어떻게 돼요?"
주생이 번호를 불러주었다. 정미정의 모습이 사라지고 잠시 후 119 구급차가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구급대원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고, 얼마 후 젊은 청년 하나가 들것에 실려 내려왔다. 잘생기고 키가 큰 청년이 꽈배기처럼 온몸이 꼬인 채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지를 한계 이상으로 비트는 모습이 끔찍했다. 자줏빛 얼굴은 시체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주생은 목이 돌아갔다던 우럭의 말이 떠올라 자신의 목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정미정이 청년을 끌어안고 울부짖으며 구급차에 올랐다. 가족으로 보이는 젊은 아가씨 둘도 동승했다. 주생에게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소통과 불통이 섞인 언어로 그녀는 자기 말만 했다. 주생은 다시 섭주 쪽으로 차를 돌렸다. 약속 장소는 '림보'가 아닌 '안다레 베니레'라는 카페였다. 그녀의 어투도, 만나자는 약속도, 만날 장소도 고수애의 경우와 비슷했다. 아무 생각 없이 검색해 보니 '림보'는 혼이 머무는 곳이라는 라틴어였고, '안다레 베니레'는 '가고 오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였다. 고수애의 최후를 주생은 선명히 기억했다. 뭔가 불길한 상황이 반복해서 펼쳐지고 있는 것 같았다.
- "나는 유물론자야."
리모컨을 잡은 주생이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텔레비전 뉴스에 종교연구가가 특별 출연해 논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모두가 돈밖에 모릅니다. [메리고라운드]라는 대기업이 마스크 사업 독점하는 것 보십시오. 사람 생명과 연관된 전염병을 그들은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바이러스를 퍼뜨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니까요. 코로나는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신의 벌입니다. 자기가 아닌 돈을 신으로 삼은 인류에게 진짜 신이 격노한 겁니다. 그런데도 정신 못 차리니 큰일입니다. 더 크고 무서운 벼락이 떨어질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또 다른 전염병이 생겨날 걸요? 예를 들어 눈코입이 아닌 머리카락으로 전염되는 병이요. 그럼 보호 헬멧 같은 게 또 벤처기업에서 개발되겠죠. 대기업은 아나콘다와도 같습니다. 저게 성공하나 실패하나 똬리 틀고 노려만 보다가 성공하면 확 삼켜버리겠죠. 언젠가 빅뱅의 대폭발이 다시 한번 일어나게 될 겁니다. 원시시대가 다시 도래하고 공룡이 부활해 걸어 다니겠죠. 새로운 시작이 일어나는 겁니다. 어쩌면 이는 지구의 윤회가 아니겠습니까?"
돈! 돈! 자기를 보고 말하는 것 같아서 주생은 채널을 돌려버렸다. 또 다른 뉴스는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소설 단죄의 신들로 인해 시비가 붙은 살인사건이 또 발생했습니다. 이달 들어 세 번째입니다. 어젯밤 종로의 한 옷가게에서 손님 A씨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옷을 고르고 있던 B씨를 흉기로 찔렀습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A씨는 B씨가 이기주의라는 죄악을 퍼뜨려서 단죄할 수밖에 없었다고 범행 이유를 밝혔습니다. 아울러 B씨의 정체가 어린이집에서 학대를 자행한 원장이라고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조사 결과 B씨는 어린이집과 관련 없는 직업을 가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세 건의 살인사건이 황당한 사유로 인해 발생했음이 드러났음에도 오히려 소설의 판매량은 더 늘고 있습니다. 책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사회적 혼란도 따를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지만, 일각에선 이 소설이야말로 인류가 처한 혼돈의 치료제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 "왜 마음이 바뀐 거지?"
"그보다 서진이가 섭주로 온 게 이상하지 않아? 일부러 그쪽은 피해 다니다가?"
"맞아. 경북 쪽 교정시설엔 단 한 번도 살지 않았어."
"서진이가 날 부른 이유는 부탁이 있어서였어. 섭주는 자기가 있어서는 안 될 곳이라고 했어. 법무부 쪽에 자기를 섭주로 강제 이송 보낸 고위공무원이 있다는 거야.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섭주 교도소로 이송 왔다는 사실을 탄원서로 써서 넣고, 기자한테도 보내고, 청와대 게시판에도 올리라고 했어. 사람을 구해서 많이 넣으라고 했어. 그 말을 할 때 서진인 뭔가를 무서워하는 것 같았어. 이유는 끝내 밝히지 않았지만 서진이는 섭주에 단 하루도 있어서는 안 될 것처럼 얘기했어. 어떻게 해서든 그곳을 벗어나려고 날 찾은 거지. 난 시키는 대로 했어. 근데 아무 효과도 없었어. 교도소에는 서진이의 '섭주 교도소 직업훈련 바리스타 과정 신청서'가 있었거든. 위조서류라는 서진이 주장은 통하지 않았어. 강제로 찍었는지 어떤지 몰라도 서진이 지장도 있었으니까. 탄원도 안 통하고, 기자들도 관심 안 가지고, 청와대 게시판은 조회수가 100도 되지 않았어."
- "알겠습니다. 인사라도 드리러 가죠."
주생은 답하고 출판사로 향했다.
'도서출판 연옥'은 논현동의 어느 빌딩 7층에 있었다. 번쩍번쩍 빛이 나는 새 빌딩은 부의 상징과도 같았고 문명의 첨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사천왕 신장, 마귀 도깨비가 우글거리는 서진의 책과 전혀 조화롭지 않은 호사스러움이었다. 석도신애가 직접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머리를 묶고 귀에 연필을 꽂은 채 등장한 모습이 처음보다 사람답게 보였다.
- 손잡이에 손도 대기 전에 문이 열리더니 여자 두 명이 나왔다. 주생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마스크를 써도 알아볼 수 있었다. 선글라스 쓴 여자는 바로 <그녀의 눈은 올빼미, 네 심장을 쪼기 위해 부릅뜨고 있다>의 감독 노해조였고 그 옆 미모의 젊은 여자는 배우 박환경이었던 것이다. 멜로영화의 주인공을 도맡다가 마약 스캔들로 인해 주말연속극 조연으로까지 인기가 떨어졌지만 여전히 유명한 배우였다. 노 감독은 그냥 지나쳐 갔지만 박환경은 살짝 눈인사를 하며 주생을 지나쳐 갔다. 주생도 뭐라고 인사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 주생은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 빌딩의 겉모습과는 다른 이색적인 공간이 펼쳐졌다. 토속적이며 동양적이었다. 호랑이와 사자의 머리 박제품이 벽에 붙어있었고 그 아래에 방패와 철퇴, 옛 시대의 장총과 활이 배치되어 있었다. 난초 화분이 사무실 네 방향에 놓였고 표주박이라 부르는 호리병들이 그 사이로 무수히 진열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무심코 던져놓은 것 같은 자동차 열쇠가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십자가와 목탁의 액세서리를 보고 그가 벤츠를 몰고 다녔음을 기억해 냈다. 벽 여기저기 표창장, 방송 출연 화면, 정치인과 함께 서 있는 사진, 골프채를 휘두르는 사진 따위가 붙어 있었는데, 선반 위에는 어떤 물건을 떼어낸 사각형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게 이 독특한 공간의 유일한 흠이었다.
- 하지만 강남이 아닌 섭주에 살았어도 그랬을까?
- 이종하의 눈빛이 번득였다.
"사람은 돈을 보고 움직입니다. 나 역시 작품이 일으킨 사회적 물의를 좌시하는 건 아닙니다. 오늘 뉴스에 보니 원인을 알 수 없는 집단 사망사건이 세 번째라더군요. 관련자들은 하나같이 단죄의 신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야심 작가는 이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 않고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책이 양서인지 악서인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기 때문이죠. 최초의 성서나 불경 역시 믿는 사람들은 숭배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외면했을 겁니다. 그건 쓴 사람이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성서나 불경이 상업소설은 아니지 않습니까?"
"최초의 말씀을 남긴 사람은 아니겠지만 후세의 책 제작자들은 상업적인 목적이 있었기에 책 디자인도 화려하게 하고 홍보도 그만큼 한 겁니다. 안 팔리는 책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죠. <단죄의 신들>도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난 그 작품을 상업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종의 교리서로 보죠. 사람들을 움직이니까요. 앞서 말했듯 믿고 믿지 않고는 독자들 몫입니다.”
그는 아픈 발바닥을 호리병에 굴리며 기체조를 하듯 양팔을 활짝 펼쳤다.
"나는 신적인 업적의 기획 제작자 노릇을 해낸 겁니다. 반야심이란 대형 신인을 만나서 말입니다."
- "예. 서진이의 과거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무속인이나 신비한 일과 자주 연관된 것 같더라고요."
"그 아파트 안의 물건 얘긴 저도 석도 편집장한테 들었습니다.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 달린 겁니다. 일생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작가와 역사에 남을 작품을 만드는 일이 무슨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떨면서 지내는 것보다 내겐 훨씬 중요합니다."
이종하는 발바닥을 호리병에 문지르며 지압을 계속했다. 주생은 호리병 속에서 뱀이 기어 나와 이종하의 허벅지를 물 것 같은 불길한 상상에 시달렸다.
석도신애가 딱 소리가 나게 손가락을 튕겼다.
"반 작가의 신비로움을 3부 홍보에 적극 활용! 대박 날 거예요."
"저는 두 분이 걱정돼서 한 말입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게 진정한 예술인이거든요."
서진이가 월선제력이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 사이드미러에 점점 멀어져 가는 연옥 출판사의 건물이 비쳤다. 그것은 볼 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고대 잉카제국의 황금도시처럼 보였다. 주생은 이제 서진이 말했다는 아버지의 정체와 광성도인이라는 자를 죽인 이유를 밝혀내는 데 신경을 집중하기로 했다. 어떤 결과가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있다. 이것이 주생이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왜 자신이 여기까지 왔는지, 어떤 인연이 있는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 "보았느냐 아이야? 너는 팔을 얻었지만 네 아내는 팔을 잃었다. 이것이 대척이니라. 모든 사물에는 바른 것(正)이 있고 그릇된 것(反)이 있다. 하지만 이 명제는 완벽하지 않다. 누군가에겐 그릇된 일이 다른 이에겐 바른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구별이 없고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없다. 오직 둘 간의 대척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대척이 하나로 합쳐지는 일은 결코 없다. 합쳐짐은 신이 만들어놓은 무한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범천존자 일선제력이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땅바닥에 앉은 이합정은 나약한 인간의 얼굴로 신을 올려다보았다. 한 팔을 잃은 초아는 남편의 두 팔에 안긴 채 누워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합정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마귀들아, 내 아내의 팔을 어떻게 했느냐!"
"천지신명을 마귀라 칭하는 아이야. 네 마음의 거울이 뿌옇구나. 닦지 않으면 더럽혀지는 것이 네 마음이다. 새 팔을 가지게 될 때도 그런 마음이 네 거울에 비쳤더냐?"
- "그렇다면 네 아내의 팔이 부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대척의 지론대로 제 팔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 네 아내의 팔을 되돌리는 대신 너는 새로 얻은 팔을 잃게 된다. 그래도 좋겠느냐?"
이합정이 고개를 들었다. 고통 가득한 표정에 고뇌가 가득했다. 신음을 멈춘 초아도 지아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일선제력이 창으로 땅을 찍었다.
"번뇌가 너를 놓아주지 않느냐?"
이합정은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남아로 태어나 입신양명을 향해 내달린 세월 동안 그의 팔은 훌륭한 아군이자, 배신하지 않는 충신 역할을 해왔다. 한 팔을 잃었을 때 오직 전진밖에 없던 이합정의 무용(武勇)은 꺾였고 그와 더불어 야심도 꺾였다. 이제 신의 법력으로 잃었던 팔을 찾았다. 두 개의 팔은 대척이 아닌 화합으로 삶의 목표란 불씨에 다시금 불을 지필 것이다. 그러나 꿀물이 입에 떨어지기 직전, 신은 또 다른 시험을 던졌다.
"왜 대답이 없느냐?"
이번엔 월선제력이 질문을 던졌다. 대답을 머뭇거리는 남편의 모습에 초아의 표정에도 보이지 않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적장의 목을 베고 귀환한 장수가 열리지 않는 성문을 맞닥뜨릴 때와 비슷했다. 월선제력이 미소를 머금었다.
"문제를 내는 것은 신이다. 그렇지만 답하는 것은 바로 너희 인간이다."
- 이합정이 간신히 답했다.
"다시 제 팔을 거두어 가주십시오."
"그게 너의 진심이더냐?"
"그렇습니다. 이 몸은 대척의 설법을 득음한 것에 만족하오이다."
이합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 무애자재(無碍自在)의 깨달음을 얻는 '해탈'이 궁극의 경지인 것이지요.
오성교의 교리 역시 지금까지의 업을 없애고 새로운 업을 짓지 않겠다는 불교의 업장소멸(業障消滅)과도 비슷하지만, 업을 벗어나는 궁극의 득도가 죽음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일종의 속죄인 '죽음'이 그들이 내세우는 최고의 경지입니다. 그들은 이 죽음의 경지를 모든 대척에서 해방되는 상태, 즉 무화라고 일컫습니다.
- 그럼 대척(對蹠)이란 무엇이냐?
종교적 윤리로 오성교는 '정반대'라는 이론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물, 성질, 환경은 이분화되어 있고 영원한 합치라는 건 없으며, 인간은 결코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론입니다. 생과 사, 햇볕과 그늘, 부자와 빈자, 남자와 여자, 하늘과 땅, 희망과 절망, 불과 물, 고통과 안락, 배고픔과 배부름, 소리와 침묵, 사랑과 증오, 이해와 몰이해, 협동과 독단 등등 세상 모든 원리에는 합쳐지지 않고 반대되는 두 가지가 있고, 하나가 옳을 때도 하나는 틀리며, 선으로 보이는 일도 누군가에겐 악으로 보인다는 상반(相反)의 이치가 대척입니다.
가령 우리가 화분에 물을 주면 식물은 살지만 흙 속에는 물 때문에 숨이 막혀 죽는 작은 생물이 있고, 맹수를 쏘아 죽여 사람을 구하는 선덕도 다르게 보면 그 맹수의 자연스러운 삶을 끊는 악덕이 됩니다.
- 불교에서 보는 이 세상의 관계는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연기(緣起)입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인연(因緣)이죠. 사람이 자라는 건 태어남이 우선하고, 열매가 맺히는 건 씨앗이 있어서입니다. 불가에서 보는 만물의 인과관계는 상호의 의존인 것입니다.
인과 연을 무시하고 상호작용을 부정하며 물과 기름 같은 대척만을 내세우는 오성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 주어진 것들은 반대를 찾아 움직이는데, 주어진 것들이 내던져진 '곳'은 우리가 사는 '삶' 속이며 이 삶의 대척점은 죽음이니 죽음만이 '무화의 극락'이요, '속죄의 궁극 지점'이란 논법에 의해 '지옥'이 그들이 지향하는 천국이 됩니다. 지옥은 죄인들이 가는 공간이니 삶을 사는 우리'는 '지옥 속의 죄인'이라는 그들만의 공식이 성립되는 거죠. 다시 말해 살아가는 일 자체가 죄악이며, 이 죄악들이 상호작용하는 세상에서 절대적인 합치란 없으니, 삶의 대척인 죽음으로 가자고 주장하는 염세적 세계관의 종교가 오성교인 것입니다. 무화에선 그 어떤 불합치도 없으며 무한 속에서 절대적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경전은 가르치고 있죠.
- 제 생각에 현대 문명사회에서 <단죄의 신들> 같은 책이 큰 인기를 얻는 이유도 소통보다 그 대척인 불통이 커지는 시대적 흐름과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무화를 혼돈의 답안으로 제시하고 그게 먹혀들어가기 때문이겠죠.
- 오성교가 떠받들어 모시는 신은 남녀 대척의 모습을 띤 두 명의 신입니다. 여자인 삼도천녀 월선제력, 남자인 범천존자 일선제력이 그들입니다. 제력(帝力)이란 명칭은 불신(佛神)인 제석의 이름을 교묘히 바꾼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 저승으로 가는 삼도천, 사바세계의 보호 신으로 숭앙받는 범천왕의 이름을 조금씩 바꾸어 그 앞에 갖다 붙인 것도 불교적입니다.
아마도 오성교의 신이라 추앙받는 최초의 남녀가 한때 불법에 의지했던 자들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독자적인 이론을 내세워 정교에서 이탈해 이단을 설립한 자들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 두 신적 존재를 목격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교세 확장은 이들 두 존재가 보였던 신통력과 연관이 있습니다. 일선제력, 월선제력은 불구자의 잘려진 팔을 새로 돋게 하고, 자신들을 믿지 않는 이의 머리를 손도 대지 않은 채 거꾸로 돌려버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 같은 이적이 두 사람을 신격화하는 데 공헌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저는 사기라고 믿습니다만.
오성교의 본산지는 정해진 곳이 없었습니다. 전국 어디든 은밀한 동굴 같은 곳에 있어왔고 각 장소마다 신도들이 모여 의식을 치렀습니다. 여러 본산지 중에 두 신이 재림지로 선택하면 그곳은 오성교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교주와 신도들이 이 본산지 모두를 공히 지옥의 형상으로 구현했 ...
- 하지만 오성교의 지옥은 죄지은 자를 처단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처형장입니다. 지옥의 대척은 극락이니, 죽음에 처한 신도는 지옥을 지키는 마귀들에게 죽임 당하면서 동시에 극락 승천하는 것입니다. 무화로 갈 수 있다는 광신적인 믿음을 위해 이들은 희귀한 마약을 이용했습니다. 어떻게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아프리카 대륙에서 들여온 피아초(彼我草, Iotubis)가 당시 오성교 집단의 관리 아래 몰래 재배되었습니다. 극단적 환각과 초월적 쾌락을 준다고 알려진 독초는 이 세상 너머의 비경을 볼 수 있다는 소문으로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했습니다. 환각의 효과가 지나칠 정도로 강렬해 한번 중독되면 창칼에 난도질당해도 신비한 쾌감으로 느끼고 몸이 가루가 되어 떨어져 나가도 세상의 주인이 되는 기분에 빠져든다고 할 정도입니다. 이 쾌락은 짧고 유한한 것이 아니라 고문당하는 내내 길게 매우 길게 이어집니다. 극도의 쾌락, 즉 극락을 위해 호기심 강한 사람들은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죄를 속죄한다는 허언을 내던지고 자신의 몸이 잘리고 끓여지는 것도 모른 채 죽음에 빠져든 그들은 마약에, 사이비종교에 희생당한 것입니다. 오성교의 동굴에 멋도 모르고 따라갔다가 살아 돌아온 이들의 증언이 입소문을 더욱 자극했습니다. 피아초를 맛본 그들은 이 세상에서 겪을 수 없는 저세상 ...
-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무서운 재래(在來)를 피하고 싶어 후손을 버리고 책임에서 회피했으니 내 죄가 너무나도 크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우리 가문은 저주를 받았다.
우리 핏줄 중 선택받은 누군가는 일선제력과 월선제력이 재림할 운명을 타고났단다. 그들은 오성교라는 천년 믿음의 유이신(唯二神)이야. 외형이 비슷하지만 그들은 석가세존, 여래보살이 아니야. 그들의 설법도 불가의 말씀과 달라.
누구나 태어남을 선택할 수 없는 게 우리네 사람이다. 그들 두 악신은 우리 가문 악연의 호주(戶主)란다.
그들의 설법에 의하면 부처님은 그들의 '대척'이야. 정반대란 말이지. 그들은 대자대비가 아닌 무자무비로 불법을 농단해 왔고 부처님의 극락정토를 살생의 지옥토로 바꿔놓았단다. 악덕의 근절 없는 윤회를 믿어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인정하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지옥을 만들어 멋대로 사람들을 심판했단다. 불교와 대척되는 믿음을 만들어 사람들을 속이고 희생시켜 온 것이지.
지난 시대 나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네 고조부는 이 믿음에 크게 빠졌단다. 몰락한 한학자이자 보부상인이기도 했던 그분은 접장(接長)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신도를 포섭하고 교리를 ...
- "쳐봐! 쳐봐! 치지도 못할 새끼가!"
아파트 고층에 있던 남자가 소리쳤다.
"야! 상대하지 말고 빨리 타! 기계 조종해!"
지원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이더니 주생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의 입에서 익숙한 문장이 나왔다.
"대오하고 각성하라, 그리고 무화를 받아들여라."
"혹시 일선제력은 지원 씨 당신 아냐? 대답해 줘요!"
"답은 듣는 것이 아닙니다. 찾는 것입니다."
주생은 점점 멀어져 가는 지원을 바라보기만 했다. 흙먼지와 함께 강풍이 재차 불었고 거울 하나가 산산조각 났다. '동전유리' 사장이 "내 이럴 줄 알았다"며 고함을 쳤고 이삿짐센터 사장도 소릴 질렀다.
- 그 순간 또다시 주생 앞에 환영이 펼쳐졌다. 정미정 계장에게 관을 던졌던 도깨비들이 시가지가 사라진 길 끝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들이 둘러멘 관 속에는 팔다리가 잘린 정미정의 시체가 있었다. 죽은 그녀의 눈이 저절로 움직여 아들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벌떼가 몰려와 지원의 몸에 내려앉자 사악하게 변형된 자는 마침내 굵은 글씨로 완성되었다. 나한, 도깨비, 마귀, 아수라 등 무수한 이름으로 불렸던 벌거숭이들이 켈켈켈켈 웃으며 무쇠 관을 던졌다.
- 이삿짐센터 직원이 경찰에 연행되고 그와 시비가 붙었던 트럭 기사도 연행되었다. 그러나 주생은 이번에도 통과였다. 방역.
역(疫)은 돌림병 말고도 귀신, 역귀 등의 다양한 뜻이 있다. 사람 목숨을 노리는 귀신의 존재가 곳곳에서 느껴졌지만 주생은 누누이 그곳을 벗어났다.
'난 누구지? 서진이 넌 어딨지? 날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거지?'
그는 머리를 싸안고 쪼그려 앉아 한참을 울었다. 자살하거나 무인도로 가버리라는 서진의 메시지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 "혼백은 있어! 쿨럭쿨럭! 그런 아이의 영기와 혼백을 명도 받으면 돌팔이 무당도 위대한 능력자가 되는 거야. 예수 부처보다도 더! 쿨럭! 난 어릴 적부터 그런 걸 숱하게 봐왔어! 살아있는 신이 될 수도 있어! 세상에 예수가 어딨고 부처가 어딨어? 성서와 불경 속에서만 존재하잖아? 쿨럭쿨럭! 하지만 제력의 영기를 가진 사람의 혼백을 취하면 정말 일선제력 월선제력이 될 수도 있단 말이야!"
돼지머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범천도인은 종교적 환희에 취해 있는 게 분명했다. 그 불같은 열망이 돼지머리 속 눈빛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주생은 수건으로 입을 막은 채 고함을 질렀다.
"혼백 따위는 없어! 네가 무당이니까 그따위 미친 소릴 하는 거야! 사진 속의 서진인 비쩍 말랐고 아파 보였어. 전부 너희들의 욕심 때문이야! 너희 같은 놈년에게 서진이가 당한 고통을 생각하니 나 같은 쓰레기도 눈물이 다 나는구나. 이 죽일 놈!"
"혼백은 있다니까! 일선제력과 월선제력은 사람들의 혼백을 흡수해. 콜록콜록! 혼백을 취하고 혼백을 저장하지! 인간의 영혼을 관장하는 신이니까! 도깨비가 창을 휘두르고 신장이 심판을 내리는 저승의 이미지는... 엄연한 현실에서 나온 거야, 콜록콜록! 뭘 잘 모르나 본데 서진이는 그것까지도 이미 다 알고 있었어. 왜냐하면 네 아버지가 오성교 교주니까.”.
"아버진 그런 사람이 아니야!"
주생이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갑자기 돼지머리 속 두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 술수에 넘어가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주생은 범천도인과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알지 못하는 과거가 궁금했고 자신의 정체가 궁금했다. 흥분한 범천도인이 입에서 침을 튀겼다.
"거슬러 올라가야 해. 누가 처음으로 재림의 165년인 금년에 서진이와 너를 만나게 하려 했지?"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 같았지만, 생각해 보니 답이 있었다.
- "그 출판사 이름이 어떻게 돼?"
"연옥."
"연옥? 지옥의..."
"이어지는 집이란 뜻의 연옥이야. 원래 이름은 신유림이고."
돼지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유림은 신라 시대 명랑대사가 '사천왕사'를 세운 곳의 지명이야. 1857년에 일선제력과 월선제력은 고초굴에 재현한 사화사빙 지옥에 자신들만의 사천왕상을 세웠지."
-
"내겐 다르게 들리는데... 발음상 석은 삼(三)이지? 그리고 신애는 시내랑 발음이 같지?"
"그런데?"
"시내는 한자로 내 천(川)이지."
- 그 순간 이종하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문장이 귀에 쩌렁하게 울렸다.
"나는 모든 일을 하늘에 감사드리는 수행자일 뿐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다. 이 말은 기독교에서 흔히 쓰는 말이다. 그런데 그는 감사를 주님이 아닌 하늘에 드렸다. 주생은 급히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 검색창에 '존자'를 쳤다.
- 주생이 고개를 떨구었다. 비통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 돼지머리 좀 벗겨줘.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두 사람을 도울 책사가 되어주겠어. 나는 이런 일에 정통한 사람이야. 문신을 새겼다는 그놈이 아무래도 꺼림칙해. 그놈 신상부터 파악해야 해."
주생은 가스총을 쥔 손을 관자놀이에 댄 채 고개를 저었다. 정수리가 미칠 듯 가려웠지만 참았다.
"넌 사이비야. 날 혼란시키지 마. 난 피와 살로 이루어진 평범한 인간일 뿐이야. 혼백을 저장한다는 말 따위 씨부려대는 너희 무당들을 난 믿지 않아."
"이런 일들을 겪고도 안 믿어?"
"눈에 보이지도 않는 혼백을 어떻게 저장한단 말이야!"
"호리병에 저장하지."
- 주생이 외면했지만 이종하는 커다란 거울을 가볍게 움직여 계속 주생을 비추었다. 주생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는 인간 하주생이다! 나는 인간 하주생이야! 너희는 가짜신이야! 깨우침을 준다고 해놓고 사람을 죽였어!"
"그 모든 것은 선택받은 중생의 대오와 각성을 위해 무화로 향하는 길을 인도한 것이었다. 눈이 있어야만 앞을 제대로 볼 수 있겠느냐?"
"아냐, 신은 사람을 살리지 죽이지 않아. 너희는 불법을 흉내 낸 사이비들이야!"
"그렇다면 부처를 불러보거라. 너를 도와주러 오는지. 예수를 불러도 좋다.”
"난 지옥의 심문관이 아니야! 삼지창 든 마귀가 아냐! 흐흐흐흑."
- "전생을 알고도 끝내 귀의를 거부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순교가 아니다. 서서히 기억이 돌아오면 너는 짝을 잃은 슬픔으로 고통받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사무치는 원인 모를 슬픔, 기분이 좋다가도 우울해지는 기분, 어딘가를 가보면 이전에 와봤던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 모두 전생의 업에서 비롯한다."
"제발 꿈이라고 말해주세요."
"너의 장인으로 유중이란 자가 있었지. 그도 네가 아는 누군가로 윤회를 했었다. 하지만 그자는 165년 전에 우리에게 큰 죄를 지었기에 무화의 경지에 들게 했다."
"그게 누군데요?"
"네 여정에서 유일하게 네 의식 바깥에서 움직인 사람이다. 생산의 주체이기도 하지. 직접 알아보거라."
작가의 말
나는 유물론자이지만 가끔 신의 존재를 느낄 때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우연=신'이겠지만 어떤 우연은 그 자체로 불가사의한 면이 많아 도무지 우연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마다 살다 보면 나름의 신비가 섞인 우연한 기적을 겪기 마련인데 거기에 섭리를 부여할 때 신은 존재의 자격을 얻는다. 그러면 신은 그 사람 위에 서서 착하게 살라 가르치고 죄짓지 말라 가르치고 사랑하라 가르치고 자비로워지라 가르친다. 사람의 내면이 하는 말과 똑같다. 그럼 이게 신이 맞을까? 그냥 우연과 마음이 빚어낸 자기 합리적 환상은 아닐까?
한낱 사람이 위대한 신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인정하는 건신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모든 의문은 사라지고 복종만 남지 않을까? 신의 은혜를 좋아하고 신의 징벌은 겁내는 게 인간이니까.
나의 이 생각은 발전을 거듭했다.
만약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선할 것인가, 악할 것인가? 사람에게 도움을 줄 것인가, 훼방을 놓을 것인가?
내 답은 이렇다.
아마도 신은 믿는 자에겐 복을, 안 믿는 자에겐 벌을 내릴 것이다.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진 피조물이 인간인데, 인간은 착하기도 하지만 나쁘기도 하다. 즉, 신 역시도 착하기도 하지만 나쁘기도 한 불완전한 존재일지 모른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이 세상을 활보하고 다닌다면 사회는 혼돈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신은 사람들이 모르게 존재해야 하며 신을 알아본 사람이 있다면 입을 막아야만 한다. 여기서 또 의문이 생긴다. 신은 사람을 복되게 하려고 존재하지, 심판하러 존재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 모든 생각을 담아보려고 애쓴 작품이 <단죄의 신들>이다. 사람에겐 사람이 우선이지 결코 신이 우선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이런 불경한 생각 때문인지 집필하는 동안 이상한 일을 참 많이도 겪었다. 묘지 옆을 지날 때 차의 라디오가 저절로 켜지기도 했고, 내 전작들이 오디오북으로 큰 인기를 끌 때 정작 나는 고막을 다쳐 이어폰을 귀에 댈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뭔가가 내게 <단죄의 신들>을 집필할 힘을 선사하는 동시에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신일 수도 악마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나는 이 모든 현상을 어떤 '에너지 혹은 기운의 과도한 소모 탓이라 여긴다. 그것은 내가 <단죄의 신들>의 완성에 강박적으로 집요하게 매달리느라 소모한 체력, 정신력과 무관하지 않다. 다행인 것은 소설을 끝내면서 정신이 평온을 찾았고 이비인후과 치료도 성공적이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사이먼 보스웰(Simon Boswell)의 <Burning the bed>라는 음악을 듣다가 영감을 받아 써나가기 시작했는데, 집필하며 3천 번 이상 들은 것 같다. 덕분에 소설의 분위기를 한결같이 유지할 수 있었다.
간만에 네오북스에서 낸 작품이다. 네오북스는 내 초창기 무속공포 3부작을 연이어 출간한 친정 같은 출판사이다. 내 욕심으로 여러 출판사와 작업을 하고 있어 수년 만에 뵌 네오북스 관계자분들께 미안함이 있었다. 강병철 사장님과 정은영 대표님은 출판사보다 작가를 우선시한 조건으로 창작에 격려를 보태주셨고, 김정은 편집자님은 여전히 박해로 소설은 어디를 강조하고 어디를 줄여야 할지 정확히 꿰뚫고 계셨다. 집필하는 동안 과부하가 걸릴 정도로 정신력을 소모했는데 결과는 만족스럽다. 당분간 <단죄의 신들>을 능가하는 소설은 쓰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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