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해로
출판 : 북오션
출간 : 22.09.05
읽을까 말까 하다가 <교도소 괴담>도 읽기로 했다.
총 10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으며, 모두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다. 현대 무속에 가깝고 <박해로 오컬트 포크 호러>와도 유사한 느낌. 일종의 스핀오프 작품인데, 이전 작품들과의 연결성은 존재하긴 하지만 그리 강하지 않다.
아마도 작가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던 듯하다.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서술 트릭이나, 피아를 구별하기 어려운 혼란한 상황 등을 활용해서 '확실하게 독자까지 뒤통수를 치는' 반전을 노리기도 한다. 이전 작품들에서도 반전은 있었지만, 대개 큰 흐름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나는 편이었다.
이번에는 단편이기에 더 짜릿한 작품들도 있었으니 박해로를 좋아한다면 이 책도 읽어보시길.
- 섭주 교도소 2동 하층의 1실 감방은 늘 비어 있다. 늘어나는 범죄에 항상 감방이 모자라도 2하 1실만큼은 예외 없이 비워둔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이유를 알면서도 쓴웃음으로 넘기고, 젊은 사람들은 이유를 묻지만 답을 들을 수 없다.
- 그 이유란 요상한 가위눌림이다.
2하 1실에서 잠을 자는 사람은 누구라도 가위에 눌렸는데, 그 가위는 통상적인 가위눌림과 조금 달랐다. 어쩌면 많이. 이것 하나만 알아두자.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가위눌림은 궁극적으로 죽음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 원래 섭주 교도소의 한 사동은 12개의 수용 거실, 즉 복도식의 12개 감방이 가로 일렬로 늘어선 구조로 되어 있었다. 1980년대 후반 '범죄와의 전쟁'으로 수용할 죄수들이 크게 늘자 감방이 모자랐다. 한 명이 들어가야 할 독방에 두세 명이 들어앉게 되었다.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북적대니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싸움질에 도박, 성적인 음란행위에 폭동 모의까지 마찰은 가지각색이었다.
- 1990년대 초반, 섭주 교도소장은 지방청의 허가를 얻어 확장공사에 들어갔다. 각 사동의 1실 앞에 있는 콘크리트 벽을 부수고 8개의 감방을 추가로 지은 것이다. 그날 이후 한 사동은 12개 감방이 아니라 20개 감방으로 늘어났는데, 원래의 1실은 9실이 되고 새로운 1실이 사동 입구에 생겨났다.
확장공사가 무사히 이뤄지자 기공식이 벌어졌다. 그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흰 장갑 낀 손으로 테이프를 끊은 사람 중에는 교화 법회로 교도소를 찾은 어떤 승려도 있었다. 그는 세속적인 자기 자랑식 설법보다 범죄한 자에게 대자대비의 가르침을 주는 쪽으로 비범했던 존경받는 승려였다. 그가 막 새로 지은2동을 지날 때였다. 새로 지은 1실이 있는 쪽으로 손가락을 겨눈 그는 말했다.
"저 아래 물이 흐르는데 그 위에 사람이 기거할 곳을 지었으니 매우 좋지 않다."
법회가 끝나자마자 승려는 교도소를 나섰다. 그가 남긴 말에 귀 기울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김 교도관은 두 번 다시 거기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질문에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가 꿈속에서 장기를 둔 장소는 사형장이었다. 노인의 뒤로 허공에 뜬 발들이 보였다. 목에 건 밧줄로 둥실 떠다니는 발이었다. 노인이 장군을 부를 때마다 그 발이 움직였다. '어서 져라. 어서 져라, 어서 지면 너도 우리처럼 매달린다'는 음성이 허공에서 김 교도관의 귀로 날아들어왔다. 노름판에서 들었던 온갖 협박의 말들이 둥실둥실 떠다녀 그를 미치게 했다. 간신히 장기에 이기긴 했지만 화가 난 노인은 장기판을 엎었다. 김 교도관이 도망가자 노인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따라왔다. 지팡이 끝에는 화투장이 도끼날처럼 붙어 있었다. 김 교도관은 둥실 떠다니는 발들을 이리저리 밀어 노인의 추격을 교란시킨 후 꿈에서 깨어나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다. 그날 이후 김 교도관은 노름을 끊었다.
- 이 교도관도 자원해 들어갔다. 그는 살고 있는 아파트의 층간 소음에 애를 먹는 중이었는데 교도소에서 잠을 때워 하룻밤이라도 소음에서 해방될 심산이었다. 그는 9시 10분에 가위가 눌려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시선을 그의 얼굴에 둔 채 벽과 천장을 기어 다녔다. 시선을 이 교도관의 얼굴에 두었기 때문에 움직임에 따라 노인의 목은 비정상적으로 돌았다. 노인이 손으로, 발로 짚는 탁! 탁! 소리가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가위눌린 이교도관이 시선을 천장에 두었을 때 이제 그곳까지 막 기어 도착한 노인이 보였다. 노인의 목은 360도로 돌아가 있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노인은 부엉이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이 교도관만 쳐다보았다. 꽉 쥐었던 돌림이 풀리고 원래의 위치를 찾고자 노인의 목이 몇 바퀴나 돌았다. 겁에 질린 이 교도관은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 흐르는 소리가 물 흐르는 소리로 바뀌었다.
- 결국 2하 1실은 폐쇄되었다. 그곳에만 들어가면 가위에 눌리고 이상한 노인을 만난다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2하 1실은 7, 8년 동안이나 '손님을 받지 않는' 빈 방으로 남았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전설을 잊었고, 귀신의 존재를 잊었다.
- 승려가 경문 읽기를 멈추었을 때 인부들도 일손을 멈추었다.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백골이 발굴되었다. 백골은 다 헤진 군복 사이로 팔과 다리뼈를 온전히 갖추고 있었다. 국군복인지 북한군복인지 알아보기 어려운 상의 주머니에 사진이 있었다. 머리를 포마드 기름으로 넘긴 준수한 청년이 부인으로 보이는 우아한 여성과 찍은 흑백사진이었다. 2하 1실에서 가위눌렸던 사람들이 젊은 모습임에도 그 노인이 틀림없다고 앞다투어 증언했다. 기자들이 몰려왔고, 섭주 교도소의 유골 발굴은 뉴스에 널리 공개되었다. 이제는 할머니가 되었을 사진 속 여성을 찾는다는 공지도 있었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여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노인의 정체도, 땅 아래 갇히게 된 이유도, 그가 품은 한도, 그의 좌절된 꿈도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승려는 유골을 거두어 양지바른 곳에 묻어준 뒤 향을 피우고 극락왕생의 제를 올려주었다.
섭주 교도소 2하 1실은 새롭게 리모델링되었고 그곳에 수용되는 사람은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
- <2하 1실의 가위눌림 >
- 섭주 교도소에는 1부터 12동까지 열두 사동(舍棟)이 있다. 한 사동 안에 스무 개의 감방이 가로로 놓여 있는데 하층 중층 상층 구조로 되어 있으니 한 사동 당 60개의 감방이 있다. 그렇다면 열두 사동 안에 도합 720개의 감방이 있는 셈인데, 건물이 말을 할 수 있다면 720개의 입이 있을 것이고 건물이 볼 수 있다면 1,440개의 눈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720개의 감방은 범죄자들을 숙박비 없이 체류시키면서 그들의 어둡고 그늘진 사정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이 내뿜는 에너지를 말없이 받아들이는 가운데 벽은 균열이 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도주를 막아야 할 특유의 내구력에 어두운 힘이 응축된 결과다.
- 720개의 방은 섭주 교도소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방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과가 많은 재소자나 경력이 오래된 교도관들은 감방이 그들을 쳐다보고 그들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재소자가 감방 안에서 잠들 때, 혹은 교도관이 숙직실에서 잠들 때 그들은 바깥세상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악몽을 꾸었고, 진정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는 가위에 눌렸다. 어쩌면 그런 기현상들은 잠든 사람의 귀에 대고 비밀을 가르쳐주겠다고 하는 교도소의 속삭임인지도 모른다.
- "박주임님, 왜 병동 중층과 상층에는 빈 방만 있지요?"
"환자들이 없으니까."
"에이. 그건 아닌 거 같은데요?"
"내가 거짓말 한다는 거냐?"
- 전염병 19일 차, 19명의 육체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모든 활력징후가 정상이었고 의사소통도 자유로웠다.
"거봐, 의료 과장. 가만히 두면 괜찮아질 거랬지?"
소장이 이죽거렸다.
'니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니?'
의료 과장은 잘되면 제 탓, 안되면 남 탓의 언사에 답하지 않고 이제 9중 20명의 격리를 해제하겠다고 했다. 소장은 어서 그놈들을 원래 방으로 보내고 소독을 확실히 하라고 명했다.
- 그러나 그가 발견한 건 벽에 등을 댄 채 죽어 있는 덕팔이었다. 항상 히죽 웃고 다니던 덕팔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어떤 희망적인 암시도 얼굴에 씌어있지 않았다. 그의 신체는 9동에 들어올 때 그대로였다. 그제서야 교도관들은 덕팔이 애당초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너무나 늦은 깨달음이었다. 축구공만 넣어줬어도 그는 살 수 있었을지 몰랐다.
- "직접 올라가 봐야겠어!"
김재혁은 담당실로 돌아와 손전등을 챙겼다. 다른 직원을 부르려고 했으나 겁쟁이라고 손가락질 받기 싫어 혼자 오르기로 했다. 만약 불렀다가 중층에 아무것도 없고 환청으로 밝혀지면 망신을 당할 것이었다. 김재혁이 중층으로 올라가자마자 하층의 재소자들이 하나둘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바보가 또 덕팔이를 깨웠구나."
"아무도 모르는 신참들이나 덕팔이를 깨우지."
"놔둬. 한 번씩 겪어야 할 일이야."
- 김재혁이 중층 앞에 도착했을 때도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1방에서 20방으로 멀어져가는멀어져 가는 소리였다. 그는 사동 출입문을 열었지만 전기가 끊겨 칠흑 같은 어둠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으로 손전등을 들이댔다. 멀어져 가는 소리가 반대가 되어 점점 가까워졌다. 사동 끝으로 달려갔던 발걸음이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는 걸음이었다. 아직 손전등 빛이 닿을 거리는 아니었다. 김재혁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뎌 그 옛날 격리 사동이었던 9동 중층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9동 중층의 입이 김재혁을 삼켰다고 봄이 무방하리라. 컴컴한 감방에 자줏빛 고구마처럼 부풀어 오른 전염병 환자들이 한 방에 한 명씩 들어앉아 창살을 잡은 채 이쪽을 바라보았다. 김재혁이 손전등을 비추면 텅 빈 감방 안에는 거미줄밖에 보이지 않았다.
- <격리 감옥의 귀신>
- 섭주 교도소는 출소 후 재취업의 희망을 가진 재소자들에게 직업훈련을 가르쳤다. 자동차 정비, 제과제빵, 한식 조리, 바리스타 등 다양한 종류의 훈련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헤어디자인'도 있었다. 말 그대로 이발, 미용, 염색, 두피 관리 등 헤어 디자인에 관련된 기술을 가르치는 훈련과정이었다.
'헤어디자인' 훈련 인원은 50명인데, 훈련장에는 각자의 실습대가 놓여 있고, 사람과 똑같이 생긴 마네킹 머리가 하나씩 붙어있다. 고정판에 굵은 나사로 붙은 이 머리는 방향을 이리저리 돌릴 수는 있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결코 떼어지진 않는다. 헤어디자인 훈련장의 출입문을 여는 사람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건'들어오는 사람을 바라보는 이 50개의 인공 머리다. 가로 다섯 줄 세로 열 줄로 앞을 쳐다보는 똑같은 표정의 얼굴들.
- 아마도 학자들도 정확히는 모를 어떤 심리상의 문제일 텐데 도스토옙스키도 답을 내놓지는 못할 것이다. 여섯 가해자 중 하나가 피해 학생을 미워했다. 보기 싫다는 게 표면상 이유였지만 왜 보기 싫은지는 그 조차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나머지 다섯 학생들은 이 대장과 어울리기 위해 폭행에 가담했다. 그것이 남자 다움의 표시이자, 하이에나다운 습성이었다. 그들 역시 어울리지 않고 혼자가 된다면 언제든 피해 학생의 위치로 전락할 수 있었다.
- 그가 차단기를 내렸기 때문에 불이 꺼져 있었다. 한 점의 빛도 없었다.
그러자 길게 하늘을 찢는 번개가 차단기 역할을 대신했다. 온 사위가 대낮처럼 밝아지면서 정훈은 헤어디자인 훈련장 쪽 창문에 새까맣게 달라붙어 이쪽을 내려다보는 51개의 머리를 볼 수 있었다. 입도 눈도 찢어진 채 노려보는 귀신 마네킹의 얼굴들이었다. 정훈은 비명을 지르며 차가운 물 바닥 위로 넘어졌다.
"같은 일을 겪어놓고도 어떤 사람은 아주 쉽게 그걸 잊어버려. 하지만 어떤 사람한텐 평생을 못 잊을 지옥이지."
정훈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골목길에서 기다리다 칼을 들고 자신을 노리던 그 아이의 목소리였다. 정훈은 비를 맞으며 기어가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배수로가 막혔는지 물은 불어 있었다. 신발에 물이 들어오며 첨벙첨벙 소리를 냈다. 등 뒤에서 웃음소리들이 커져갔다.
- 엄연한 현실이었다. 정훈은 실신하기 전 거울 속에서 보았다. 마네킹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머리를. 그 얼굴은 미소를 지을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헤어디자인 공과의 마네킹은 이제 52개가 되었다.
- 아무리 무전을 쳐도 받지 않자 선배들이 정훈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이순신 장군 동상 옆에 쓰러져 기절한 정훈을 발견했다. 그 옆에는 시선을 하늘로 둔 마네킹 머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사람의 잘린 머리로 착각한 선배 한 명이 비명을 질렀다. 비에 흠뻑 젖은 정훈은 열이 39도까지 올라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
- 선배 교도관들이 대화를 나누었다.
"저 마네킹 업체는 유명한 곳이야. 교도소 말고 여러 미용실에도 독점 납품을 하지. 인공모를 안 쓰거든."
"무슨 소리야?"
"오리지널 사람 머리카락을 마네킹에 붙인 거라고."
"그래서 감쪽같았구나. 그런 걸 어디서 구해?"
"나도 몰라. 숱 많은 사람이 머리칼을 잘라 팔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죽은 사람 머리칼일 수도 있겠지 뭐."
"죽은 사람 머리카락?"
"나도 들은 얘기야."
- <51개의 마네킹 머리>
- 이성오와 장혁천은 26세 동갑내기 남자들이었다. 이성오는 전직 간호사였고, 장혁천은 전직 응급구조사였는데 둘 다 법무부 특채 과정을 거쳐 정복 교도관이 되었다. 둘은 섭주 교도소의료과로 발령받아 2년 동안 별 탈 없이 근무했다. 2년 1개월째 되는 어느 날 밤, 둘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기괴한 사건을 겪게 되는데, 섭주 교도소의 폐쇄된 시체 안치실에 처음으로 들어가게 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 "그럼 확인해 봐."
"내가?"
"성오 니가 계속 정한호의 눈을 봐왔잖아. 난 일부러 저 사람 눈을 안 봤어. 들어 옮길 때는 뒤에서 붙잡았고."
"나쁜 놈 같으니."
이성오가 끙 소리를 내며 정한호의 시신으로 걸어갔다. 장혁천은 이성오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다. 잠시 후 이성오가 말했다.
"됐어. 이제 봐도 돼. 내가 눈을 감겨줬어."
"야, 부검할지도 모르는데 시신에 손을 대면 어떡하냐?"
이성오는 장혁천의 말을 듣지 않았다.
"뭘로 덮어 줘야 해. 이불을 가져와야겠어."
"야! 같이 가! 나 혼자 두고 가지 마!"
- 장혁천이 무의식 중에 정한호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그는 편안하게 눈을 감은 채 누워있었다. 이성오가 감겨준 덕이다.
그는 죽었어. 눈을 뜨지 않아.
하지만 만약 뜬다면?
119는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그때였다.
멀리 복도 끝에 있는 의료과 사무실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동시에 반응했다.
"내가 받을게!" 성오가 소리쳤다.
"아냐, 내가 받을게. 니가 여기 있어." 혁천도 지지 않았다.
"오늘 숙직자는 나잖아. 니가 여기 있어."
- <시체 안치실의 숨 귀신>
- 징역형을 선고받고 입소한 사람은 교도소에서 일을 할 수 있다. 교도소 안에는 여러 가지 공장이 있고, 취사, 세탁, 이발, 시설관리 등을 맡은 작업장도 있다. 그중 '구내 청소'는 말 그대로 교도소 구내 곳곳을 돌며 환경미화를 하는 일이다. 구내 청소에서 일하는 재소자들은 교도소 내 모든 장소의 쓰레기를 아침마다 수거한 후 분리 재활용하고, 풀 깎기나 해충 박멸 같은 일도 한다. 외부 위탁이 아닌 관용(官用) 작업인 데다가 삽이나 낫, 곡괭이 같은 위험한 도구를 취급하기에 사고의 위험이 적은 모범수들이 주로 채용된다.
구내 청소 반장인 1321번 정원걸도 사고 한번 치지 않은 모범수였다. 그는 동물을 괴롭힌 사람이었지 사람한테 모진 짓을 한 적은 없었다. 그가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된 사건은 무더운 올해 여름에 일어났다.
- 무속인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한참 만에 눈을 떴다.
"무속은 불교와 대립관계가 아니오. 어떤 학자도 그런 소릴 했지만 불(佛)은 큰 집(大家), 무(巫)는 작은 집(小家)이오, 불교와 무속은 본가(本家)와 분가(分家) 같은 것이오. 방금 저기 부처님을 통해 몸주께서 계시를 줬소."
"뭐라고 계시를 줬는데요?"
"당신이 죽인 뱀은 그냥 뱀이 아닌 신충(神蟲)이오. 사파왕의 무력대신(武力大臣)이오."
- "당신은 건드려선 안 될 존재를 건드린 것이오."
"그럼 어떻게 하면 돼요?"
"사흘 동안 방에서 냉수를 떠 놓고 기도만 하시오. 속죄의 기도를 하란 말이오. 당신이 신충을 죽인 건 내 눈에는 사신(蛇神)에게 부정 탈 짓이지만, 일반인의 눈엔 '동물 학대'요. 당신은 그간 무수한 뱀을 죽이고 괴롭혔어요. 뱀이란 짐승이 개나 고양이처럼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니까 사람들은 그간 당신의 악행에 관대했던 거요. 당신이 저지른 동물 학대를 반성하시오. 나만이 알 수 있는 부정 탄 짓을 바로 잡으시오. 만약 사흘 동안 당신 눈에 뱀이 보이지 않으면 신충은 당신을 용서할 기회를 준 것이오. 그러면 나흘째 되는 날 아침에 뱀을 죽였던 자리로 돌아가시오. 반 토막이 난 뱀의 사체가 수로 위에서 썩어가고 있을 거요. 그걸 거두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시오. 그럼 당신의 고생은 끝이 나오."
- <독사의 저주>
- 글공부에 몰두하거나 책 읽는 즐거움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는 모습을 일컬어 우리 흔히 쓰는 '책에 빠지다'라는 표현이 있지만, 이 문장을 절대 쓰지 못하게 하는 지역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섭주다. 조선시대 재야 사림(士林) 학자들을 다수 배출한 문리적 전통과 무관하게 섭주 사람들 사이에서는 언제부턴가 '책에 빠지다'라는 문장 사용을 금지하는 암묵적 동의가 체결되었는데 거기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보였다. 혹은 알 수 없는 의혹이...
- 섭주의 한 중학교에서 제자의 학업 성취를 치하하는 젊은 교사의 '너, 방학 동안 책에 빠져 지냈구나'란 문장이, 뿔테 안경이 흘러내려라 달려온 주임 선생에 의해 '너, 방학 동안 학업에만 열중했구나'로 정정되었다는 사실은 유명한 일화이다. 애당초 아무것도 모르고 책에 빠졌다는 말을 꺼낸 담임교사는 타지에서 갓 발령받아 온 사람이었고, '담임 선생님이 책에 빠졌다란 말을 썼어요'라고 일러바친 학생이나 '이달의 저축 현황' 점검을 팽개치고 달려 나간 주임 선생은 모두 섭주 토박이였다.
- 외지 사람에겐 기이하기 짝이 없는 언어 금지 조항이 섭주 사람들에겐 생활의 일부분인 양 하나의 관습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였다. 정당한 칭찬을 하고도 욕을 먹게 된 신참 교사는 뜻하지 않은 반응에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그런들 어찌할 것인가. 외눈박이들만 모인 동네에 양쪽 눈 다 가진 사람이 나타나면 누가 비정상으로 취급받을 건지는 물으나 마나 아니겠는가?
- 경악에 찬 대처 방식은 나이를 먹어도 변함이 없었다. 뿔테 안경이 금테 안경으로 바뀌긴 했지만 안경알 속 공포에 질린 눈동자 또한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이 모든 게 내가 섭주에서 살았을 때 만났던 '책 귀신' 때문이다.
- 놀랍게도 그것은 책이었다. 울창한 나무 사이,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음지에 떨어져 있는 한 권의 책.
- 녹색 자연의 통악산 깊은 골짝에 불현듯 나타난 책은 의아함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고등학교 교련 교과서였다.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새것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수색 직원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호기심 때문인지, 아니면 무엇에 홀렸기 때문인지 워커 끈을 풀고 그 자리에 앉아버렸다.
'왜 이런 새 책이 깊은 산 속에 놓여있는 걸까?'
'꼭 나를 기다린 것 같아. 왜 내 앞에 똑바로 놓여 있는 거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나는 책을 주워들었다. 그것이 악몽의 시작이었다.
- 나는 참나무 밑동에 등을 댄 채 책을 내려다보았다. 그냥 평범한 교련 교과서였다. 상당히 깨끗한 책의 상태는 원시 자연림과 대조되어 이상한 느낌을 가져왔다. 나는 연쇄살인마도 잊고 천천히 책을 폈다.
- 책이 좌우로 갈라진 순간 닥쳐왔던 기운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책을 편 순간 폭염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마치 냉동고를 열었을 때처럼 시원하다 못해 차갑기까지 한 기운이 몰려와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버렸다. 온몸이 덜덜 떨리며 근육이 굳었다.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기운은 맹렬하고 차가웠으며 또 독했다.
- 그때 나는 보았다.
오솔길 맨 끝에 하얀 점 하나가 있는 것을. 백여 미터 앞에 위치하여 나를 마주하고 있는 하얀 점을.
- 그때 뺨에서 철썩하는 소리가 나더니 뜨거운 기운이 확 뻗쳤다. 몸의 중심을 잃은 내가 넘어지자 울창한 나무와 눈부신 햇살, 그리고 동료 교도관 손창희의 얼굴이 마구 뒤섞였다. 눈 없는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를 보는 손창희의 얼굴엔 공포가 가득했다.
손창희는 그 책을 즉각 불살랐다. 이유가 있었다.
- 알 수 없는 이유로 낭떠러지에서 실족했다. 허리가 박살 나고 두 눈이 나뭇가지에 꿰뚫리는 처참한 최후로 그는 공직생활을 불명예스럽게 마감했다.
문상을 갔다 온 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손창희의 관 위에 1988년의 그 여자가 앉아있는 꿈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소복에 긴 머리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나는 눈이 뚫린 손창희의 죽음으로 그 여자가 얼굴을 회복하는 데 실패했음을 알았다. 나는 그녀에게 왜 관 위에 앉아있는지 이유를 물었다. 여자는 손톱으로 나를 가리켰다. 대화는 없었지만 나는 알아들었다.
'관 속에 있는 남자가 내가 사는 책을 태웠기 때문이다. 나는 오갈 곳이 없다.’
그리고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책이 다 타도록 지켜보기만 했지?'
- 나는 잠에서 깼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절망적인 무력감이 따랐다. 귀신은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도 없는 이유로 한을 품기 때문이다. 귀신의 표적이 되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소명도, 변명도, 해명도, 구명(求命)도 통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방에서 컴퓨터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새벽 두 시다.
아내는 잠들었고 아이들은 객지에 나가 있다. 깨어있는 사람은 나 혼자다.
섭주를 떠났을 때 책 귀신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섭주에서는 '책에 빠지다'라는 말이 금지되어 있으며, 나는 그 후 단 한 번도 섭주에 내려간 적이 없다. 얼마 전 손창희의 장례식 때 한번 내려간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가지 않았어야만 했다. 그녀의 한은 끝나지 않았다.
- 이제 이곳에는 책 귀신이 없다.
- 그러나 지금 나는 뒤를 돌아보기가 두렵다.
내 등 뒤에 누군가가 있다. 분명히 알고 있다. 이 때문에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끝맺음을 제대로 하고 싶지만 집중이 안 된다. 손창희의 죽음 이후로, 그녀를 만난 꿈 이후로 누군가에게 주시당하는 감각이 멈추질 않고 있다.
- 내 등 뒤에 책이 한 권 놓여 있을지 모른다.
- <책 속에 길이 있다>
- 이 이야기는 경비교도대(警備矯導隊)가 교도소에 있던 200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섭주 교도소에 자대배치를 받기 전까지 양군석은 경비교도대가 무엇인지 몰랐다. 훈련소에서 차출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전투경찰로 빠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국방부가 던진 그의 신분은 경찰청이 아닌 법무부가 받았고 그는 경비교도대원이 되었다.
- 경비교도대란 교도소를 지키는 군부대였다. 이병, 일병, 상병, 병장이 경비교도대에선 이교, 일교, 상교, 수교로 불렸다. 얼룩무늬 군복 대신 교도관 제복과 남색 기동복이 주어졌다. 양군석은 섭주 교도소 경비교도 중대의 무서운 고참들에게 근무 요령을 배우게 되었다.
- 경교대(경비교도대)의 가장 주요한 임무는 죄수의 탈옥을 감시하는 일이었다. 대원들은 철망이 쳐진 감시탑에 올라 5미터 아래의 지상을 두 시간씩 교대로 감시했다. 감시탑의 전망은 탁 트여서 누가 땅을 파는지 누가 펜스를 훼손시키는지 누가 운동장에서 싸움질 하는지 훤히 보였다.
- 감시탑 근무는 낮에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밤은 그렇지 못했다. 섭주 교도소가 산속에 세워진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어둠이 내린 산은 보이지 않는 그 무엇들로 가득 차 있었다.
- 감시탑 안쪽은 교도소, 바깥쪽은 산이었다. 철망 쳐진 높은 담장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안쪽에는 운동장과 직업훈련장 따위 문명의 요소들이 있었지만 바깥쪽은 완전한 자연이었다. 낮에는 경치도 좋았다. 훼손되지 않은 나무들과 수풀이 바람을 타고 움직였고 강이 흐르는 소리는 복잡한 세상 버리고 '나는 자연인'이고 싶은 운치를 더했으니까.
- 이미 말했듯, 문제는 밤이었다.
어둠이 찾아오면 재소자도 교도관도 감방 안으로 돌아가 담 안쪽은 텅 빈다. 마치 좀비 영화의 버려진 도시처럼. 감시탑에 홀로 있는 사람을 의식하듯 담 바깥쪽에도 본격적으로 어둠의 기운이 몰려온다. 자연이 마술을 부리는 시간이며 자연이 사람을 갖고 노는 시간이다.
- "이 자식! 너 술 마셨지?"
"이교 양군석!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이런 당나라 군대를 봤나! 죄수가 언제 탈옥할지도 모르는데 신병이란 놈이 술 처먹고 잠이나 자고 있어!"
그 남자가 뒤돌아보았다. 군석은 그 남자의 뒤에 눈치를 살피며 서 있는 당직 소대장과 행정병들을 보았다.
"이봐요, 박 소대장! 대원들 복무기강이 왜 이 따위에요! 이놈 당장 영창 보내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디서 술을 반입했는지 저도 몰랐습니다."
군석은 사팔뜨기 남자가 목에 건 공무원증을 보았다.
'대구교정청 기동감찰반 교위 강익열.'
- 신정택의 '강압에 의한 음주 사실'이 밝혀져 양군석은 영창행을 면할 수 있었다. 기동감찰관은 소대장, 중대장이 거듭 사정하는 바람에 이 사실을 비밀에 묻고 넘어가기로 했다. 국방의 의무를 진 군인이 초소에서 술 먹고 곯아떨어진 일은 자기 얼굴에 침 뱉기로, 널리 알려져 봐야 좋을 일이 없었다. 그는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겼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놓은 뒤 돌아갔다.
- <감시탑의 공포>
- 앞에는 어둠에 싸인 통악산이 펼쳐졌다. 복잡한 나무가 얽혀 어디가 어딘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잡히지 않기 위해 산으로 뛰어들었다. 통악산은 최근 어린이 연쇄 실종 사건으로 괴소문의 근원지가 되었으나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6개월 전부터 섭주 어린이 다섯 명이 실종되었는데 그중 세 명이 짐승들에게 뜯어 먹힌 시신으로 통악산에서 발견되었다. 호랑이, 반달곰, 늑대, 간첩, 색정광 등이 증거도 없이 용의 선상에 올랐다. 경찰과 포수들이 숱하게 이 산을 순찰했고 지금도 어디선가 수색이 이뤄질지도 몰랐다. 두 탈옥수는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 만약 칠흑 같은 야산이 입이 있다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너희가 내게 뛰어든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삼킨 것이다."
- 어떠한 명산도 밤이 되면 관광객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 산은 밤이 되면 얼굴을 바꾼다. 낮에 손님으로 받았던 사람을 더이상 손님으로 대하지 않는다. 특히 혼자 있는 사람쯤은 충분히 죽여 버릴 수도 있다. 추위로, 산의 세입자인 동식물들로, 산이 부리는 환각으로, 그리고 어둠의 시대와 손잡은 비밀스러운 일들로.
두 탈옥수를 막아설 방해꾼은 경찰과 포수가 결코 아니었다.
- "그럼 이리로 올 수도 있겠네?"
"옷이나 찾아봐. 챙기면 바로 떠야 해."
두 사람이 민가라고 착각한 그 장소는 나무와 나무 사이에 오색 줄을 쳐놓은 일종의 당집이었다. 가운데가 오목하게 파인 바위 두 개가 출입문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 안에 향이 나는 물을 부어놓았다. 마당으로 들어가니 신발 벗는 섬돌 위로 거대한 그림을 안치한 제단이 있었다. 두 사람이 본 불빛은 바로 이 제단 앞에 무수히 놓인 촛불이 내는 빛이었다. 밤중에 산속에 있는 것만도 무서운데 제단의 그림은 더욱 무서웠다. 무당의 집에서 보는 탱화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산신령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빛이 바랜 채색은 오싹했으며 그림의 내용은 기괴함의 절정을 드러냈다.
- 그림은 어떤 제례 의식 같은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화폭의 아랫부분에서 하얀 옷을 입은 한 떼의 사람이 절을 했다. 그들의 얼굴은 살색이 아닌 우윳빛을 띠었고 머리와 허리엔 붉은 끈을 동여매고 있었다. 무리의 앞에는 제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역시 허연 얼굴로 머리에 커다란 고깔을 쓴 채 꿇어앉아 있었는데, 그는 양손으로 받친 거대한 그릇을 신적인 존재에게 내밀고 있었다. 그릇에는 구슬처럼 빛나는 물체가 담겨 있었다. 신적인 존재란 세 개의 높은 대좌에 앉은 세 마리 거대한 새였다. 의인화된 새들이 장군의 갑옷을 입고 창칼을 쥔 채 사람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학이나 두루미와 흡사했지만, 그보다는 가히 괴조라는 명칭이 그럴싸했다. 조금 전에 그들이 보았던, 그들이 죽였던 괴조.
- <탈옥 그리고 야산>
- 1129번 김인석은 사채업을 하는 건달이었다.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선이자를 뗀 금액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붙인 원금을 받아냈다. 빌려줄 땐 살살 웃는 낮이었으나 받을 때는 살벌한 낮으로 변했다. 돈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욕설과 협박은 기본이었고 때때로 납치, 감금, 폭행이 이어졌다.
- 일 년 전쯤 그는 돈을 빌려준 어떤 청년이 제때 이자를 갚지 않는다고 한 창고에 가둔 뒤 공범 3명을 불렀다. 4인방은 야구배트와 회칼을 들고 청년을 위협했다. 새파랗게 질린 청년은 신체포기각서를 쓰고서야 풀려났다. 청년은 작은 샌드위치 가게를 운영한 소상공인이었는데 장사가 잘 안돼 많은 빚을 떠안고 있었다. 신체포기각서를 받고 나서도 4인방의 협박 전화와 문자는 끊이질 않았다. 소심한 성격에다가 이렇다 할 가족도 없던 청년은 가해자들의 행적을 장문의 편지로 적어 경찰에 보낸 후 어느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수사가 이루어졌고 4인방 중 김인석과 2명은 구속되었지만 1명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 "김인석, 면회 왔다."
섭주 교도소에 구금되어 6개월째 징역을 살고 있던 김인석에게 접견 담당 교도관 정호준이 찾아왔다.
"날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가 왔습니까?"
"어디 보자. 접견인 이름은... 강영자 씨네."
"모르는 사람입니다. 면회 안 할래요."
"그분은 널 안다던데?"
"난 모른다니까요."
"그러지 말고 한 번 만나봐. 모르는 사람이 일부러 찾아왔을까."
"모른다는데 내가 왜 만납니까?"
"아는 사람인데 니가 기억을 못 하는 걸 수도 있지."
"나한테 원한 가진 사람들, 바깥에 하나둘이 아니에요."
"최고 안전한 데가 교도손데 무슨 걱정이야?"
"안 만난다니까요!"
"알았다. 접견 거부! 여기 지장이나 찍어."
- "방금 전화한 친구가 그 사람이야?"
"예. 절 엿먹이겠다고 해서요. 그냥 폐기해 주세요."
"알았다! 원, 별난 꼴도 다 보겠군."
그는 괜히 왔다는 듯 자존심 상한 모습으로 커다란 상자를 손수레에 쾅 소리가 나도록 올리고 다른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인석은 상자 안에 들어있는 구렁이가 그를 노려본다는 상상을 했다.
- 오후가 되고 일과 종료시간이 가까워 올 무렵, 영치품 담당이 자동차 정비 담당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와 1129 김인석에게 알려주라고 했다.
"무협지 스무 권 들어있는 게 맞네요. 스스로 폐기한다고 도장까지 찍었으니 폐기하겠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해요. 무협지 1권을 넘기다 보니 노란 종이가 하나 나왔거든요. 도깨비 얼굴이 그려져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아무래도 이거 부적 같은데요. 무당들 쓰는 부적. 왜 이런 걸 넣었는지 모르겠어요. 장난친 거 같은데... 이것까지 다 폐기하겠다고 알려주세요."
- 정비 담당은 인석에게 전화내용을 그대로 전달했다. 인석은 새파랗게 질려 식사를 할 수도 없었다.
- 피를 쥐어짜는 공포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병들게 한다. 곡물이 썩어나가면 창고 밖으로 악취가 새어 나가듯 육신도 점점 건강미를 잃는다. 마음과 육신의 악화는 헛것을 보게 하고 이상한 소리를 듣게 하고 혼이 빠진 기분이 들게 한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지옥인지, 아니면 '있다고는 느껴왔지만 믿지는 않았던 어떤 힘'이 공기 중을 떠돌다가 약해진 그를 표적으로 삼은 건지 알 수 없다.
- 인석의 경우도 그랬다.
일과가 끝나고 감방으로 돌아온 그는 헛것을 보았다.
헛것은 만덕이 보았다던, 털이 없는 그 남자 같았다.
- 인석이 교도관의 눈치를 살피며 유리막 너머로 만덕의 편지를 펼쳐 보였다. 역시 화장실에 흘려보내지 않길 잘했다. 만덕이 흉계를 꾸몄다면 반드시 함께 죽어야만 한다. 감히 날 갖고 장난을 쳐? 안되지 만덕아, 나 혼자선 절대 못 죽는다, 같이 가자 만덕아. 인석의 분노 게이지가 상승했다.
강 보살이 무서운 기세로 들이닥쳤다.
"너 그대로 가만히 있어!"
편지를 치우려던 인석은 유리막 너머 눈을 보고 팔을 거두지 못했다. 강 보살의 눈은 불길에 타오르는 듯했다. 인석이 옆을 보니 다행히 교도관은 다른 곳으로 가 있었다.
"지독한 놈이로구나! 어떤 놈인지 부적에다가 편지를 썼어!"
"뭐라고요!"
인석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 <끔찍한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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