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고마쓰 사쿄 / 이동진
출판 : 폴라북스
출간 : 12.11.30
26년도 벌써 절반에 가깝게 흘러가고 있다.
한 일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럭저럭 많은 듯도 하고.
시간의 흐름은 정말 객관적일까?
체감적인 길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처럼 물리적, 공간적 설정에 따라 시간은 '달라진다'.
고마쓰 사쿄의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는 그런 상대적 시간과 절대적 시간 모두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제목에서부터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라는 역설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 도입부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존재하지 않는 순간'은 감각되지 않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종말'이 존재하는 것은 '인식'이 아닌 '시간' 쪽이다.
과거의 나는 현대를 살고 있지만 미래의 나는 미래에도, 과거에도 존재한다.
M, N, 앤 등의 다양한 호칭 때문에 파편화되는 기분을 느끼신다면, 안심하시길. 소설 속의 그들 역시 바로 그런 감각으로 존재하고 있을 테니까.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를 즐겁게 감상하셨다면, 이어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에 도전해 보시는 건 어떨지.
- 초원 여기저기에 불이 붙었다. 처음 폭발한 화산탄에 맞아 다친 작은 동물의 모습도 여기저기 보였다. 스테고사우루스의 발이 어이없을 정도로 서툰 걸음으로 그런 생물의 사체 하나를 깔아뭉갰다. 큰 기포가 많은 화산탄에 머리가 깨져 쓰러진 그 사체는 가느다란 몸집에 길이가 2미터 정도 됐다. 다리가 길고 온몸이 검은 광택 나는 가죽 같은 것으로 덮여 있었으며 얼굴과 앞다리 끝 부분만 하였다. 한쪽 앞다리로는 뭔가 기묘하게 생긴 반짝이는 금속관을 들고 있었다. 물론 스테고사우루스는 그런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 겨우 절벽 아래에 닿았을 때, 스테고사우루스의 발이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우려했던, 비탈 아래의 바로 그 위험이었다.
뒷걸음질도 못 치는 둔한 스테고사우루스는 배가 방향을 틀듯이 비틀거리며 방향을 바꾸려 했다. 7미터 정도 높이에 있는 엄청나게 크고 잔인해 보이는 얼굴이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냉담한 눈빛으로 스테고사우루스의 그런 멍청한 움직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스테고사우루스가 겨우 몸을 옆으로 돌려 솟아오른 등을 흔들며 걷기 시작하자, 그 거대한 얼굴이 갑자기 입을 벌렸다.
분홍색, 주황색, 붉은색으로 빛나는 것이 마치 젖은 불꽃처럼 생긴 역겨운 구강 주변으로, 칼처럼 날이 서고 끝이 안쪽을 향해 굽은 이빨이 두 줄로 나란히 서 있었다. 입이 머리 뒤쪽까지 찢어져 있었다. 벌어진 입 가장자리로 그 거대한 턱을 죄는 수압기 같은 근육이 드러났다. 깜박이지 않는 그 눈은 한 쌍의 핏빛 불꽃이었다. 거목과 같은 꼬리로 대지를 쿵 하고 내려치고 나서 20톤이나 하는 거체로 가볍게 뛰어올라 단번에 ...
- 그는 거대한 피투성이 머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피거품으로 뒤덮인 앙다문 잇새로 내장과 힘줄이 붉은 핏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 차갑게 불타는 붉은 눈은 곧 소리가 울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소리는 바로 옆 절벽, 대지가 흔들릴 때마다 토사나 암석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리는 절벽 아래에서 났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흉포한 분노에 휩싸여 티라노사우루스는 먹던 사냥감을 내버려 둔 채 20톤 중량으로 대지를 짓밟고 이로 딱딱거리면서 소리 나는 방향으로 돌진했다. 달리던 기세에 못 이겨 절벽에 쿵 하고 몸을 부딪치고 머리에 토사를 뒤집어쓰면서도 개의치 않고 거친 숨을 내쉬며 소리 나는 곳을 바라봤다.
- 드디어 그는 소리가 뿜어져 나오는 곳이 어딘지 알아차렸다. 절벽 일부, 세로로 가늘고 깊게 갈라진 동굴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는 으르렁거리며 그 갈라진 곳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커다란 두개골이 양쪽 바위에 부딪치고 겨우 콧등 일부만이 들어갔다. 소리는 아직도 끈질기게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그는 그 틈 속으로 들어가려고 발버둥 쳤다. 바위가 후드득 떨어졌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겨우 눈 부위를 집어넣은 그는 어두운 동굴 안에서 소리를 내는 것의 정체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계속해서 진동하며 금속성 소리를 내는 기묘한 모양을 한 금빛 전화기였다.
- "노노무라군일세."
오즈미 교수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K대 사학부의 반쇼야 교수라네."
아, 그 사람이군 하고 노노무라는 생각했다. 이론 물리를 전공하는 그도 이 인물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K대 반쇼야, 팔방미인으로 재계, 정계, 해외와도 연줄이 있고 굉장히 정력적이며 추문도 도는 학자였다. 모두들 뒤에서는 학자보다는 정치가가 되는 편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주변의 웬만한 유명 교수보다 착실하게 강의해 나갔고 때때로 난데없이 화려한 업적을 올려 학술 저널리스트를 놀래기도 했다. 하지만 학자들로부터 고립돼 학계에서 백안시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연구내용이 종래 학문 체계의 맹점을 찌르면 찌를수록 적대시당했다. 대학은 그런 곳이지.
- 그런데 그 반야가 어째서 오즈미 교수를 찾아온 걸까? 오즈미 교수는 세상에 초연한 N대 이론물리연구소 안에서도 '은둔자'라 불릴 만큼 세속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진 존재였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완전히 늙은이 취급을 받았으며 연구 분야도 거의 평가받지 못했다. 아니,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망상광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사실 전임 대학에서는 교수가 이상해졌다고 여겨지는 사건이 발생해 야심가인 제자에게 자리를 빼앗길 뻔하기도 했다. 교수의 고등학교 교사 시절 제자인 N대 이론물리연구소 소장이 평생 돌봐줄 것을 각오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정말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이 연구소에서도 오즈미 교수는 거의 강의가 없었고 연구 발표도 하지 않았다. '명상실'이라 불리는 연구실에 드나드는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 조수인 노노무라뿐이었다.
- 오즈미 교수는 콧마루 끝을 바라보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고등학교 동창이라네."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라 불렸지."
반쇼야 교수가 듣기 좋은 목소리로 웃었다.
"다시 말해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여겨졌던 거지."
"둘 다 대단한 몽상가였어."
오즈미 교수도 소리 죽여 웃었다.
"학자가 되는 것보다 신흥종교를 만들든가 마법사가 되는 쪽이 낫겠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네. 나는 그때부터 '모순·배리론'을 주제로 삼고 반쇼야 교수는 '예외에 대한 연구'를 해왔지."
- "알프레드 자리의 포스트롤 박사의 행위와 견해를 읽은 적이 있는가?" 반쇼야 교수는 말했다.
"거기에 예외를 통일하는 '파타피직 pataphysic'이라는 이상한 학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입이 험한 녀석이 나를 그 공상적 형이상학자인 '파타피지션'이라고 불렀어. 녀석은 나를 놀릴 작정이었겠지만 나는 진지했지. 정말로 파타피직에 몰두했다고. 오즈미 군의 '퍼로직 Paralogic'과 좋은 대응을 이루었지."
"우리는 이른바 '매드 사이언티스트'였던 거야." 오즈미 교수는 쿡쿡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여러 학문의 경계가 모호해져 문제시되면 학문 전체가 마법 체계에 가까워진다네. 이미 물리학이 검증 가능한 영역을 벗어나 모델 형성 시대로 변하기 시작했다는 건 자네도 느끼고 있지 않은가? 불확정성원리가 감마 현미경이란 가상의 도구를 전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마지막까지 반대했다는 일화는 유명하지."
- 왜 나를 불렀을까? 노노무라는 머뭇거리며 생각했다. 활동적이며 융통무애한 반쇼야 교수와 은자인 오즈미 교수의 조합은 알겠지만 할 말이라는 건 도대체 뭘까?
- "특히 현실적인 의견을..." 오즈미 교수가 살짝 비꼬는 투로 덧붙였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말이지. 즉 공개 연구를 해야 할지, 아니면..."
"봐도 되겠습니까?"
- 모양은 아무리 봐도 흔한 모래시계였다. 네 기둥과 상하에 끼워진 원이 나시지와 비슷한 문양을 한 회색 금속이라는 점 외에는 여느 모래시계와 다른 점이 없었다. 북 모양의 유리 용기 안에서 빛바랜 담황색 모래가 위에서 아래로 잘록한 가운데 부분을 지나 보슬보슬 떨어지고 있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를 내며 모래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보통 모래시계가 아니라는 것, 모래시계로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은 2~3초만 바라보고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떨어져도 위쪽 모래는 전혀 줄지 않았으며 아래쪽 모래는 전혀 늘지 않았다!
- 나시지 : 옻칠한 위에 금·은가루를 뿌리고, 그것이 마르면 투명한 옻을 칠해 무늬가 배 껍질처럼 비쳐 보이도록 표면을 갈고 닦은 것.
- "이 용기의 위와 아래가 4차원 공간으로 연결돼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직선적으로 떨어져 있고 공간적으로 분리돼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용기의 위와 아래가 실은 4차원 공간으로 연결돼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위쪽 모래가 어디서 떨어지는 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마 직접 연결된 게 아니라 그 사이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 "가느다란 방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방 양쪽에 문이 있습니다. 이 3차원 방을 4차원적인 링 모양으로 구부려서 한쪽 끝을 반대편에 붙였다고 가정합니다."
말을 멈추자 그 녀석의 속삭임이 분명하게 들려왔다. 사각사각사각사각...
"그 방은 만곡 돼 닫힌 3차원 공간을 형성하게 됩니다. 방이 도넛 모양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의해 주십시오. 우리에게는 구부러진 공간을 인식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4차원 세계에서 봐야 비로소 3차원적으로 구부러졌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빛은 그 방의 끝에서 끝까지 직진하는 것처럼 보이고 천장과 바닥은 완전히 평행한 것처럼 보입니다. 즉 바닥의 끝에서 끝까지의 거리와 천장의 끝에서 끝까지의 거리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 방은 양 끝이 붙어서 닫혀 있기 때문에 만약 한쪽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가면 반대쪽 문을 통해서 그 방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 "빛도 그 만곡 된 공간에 따라 직진하기 때문에 한쪽 문을 열어서 밖을 보면 같은 방 반대쪽 문에서 문을 열고 밖을 보는 자신의 뒷모습을 보게 될 겁니다. 만약 그 뒷모습을 향해 총을 쏘면 자신이 쏜 탄환이 자신의 등에 명중하게 됩니다."
"알겠네." 반쇼야 교수가 말했다. "그럼 이 모래시계의 위아래는 우리가 감지할 수는 없지만 닫혀 있다는 말이군."
- "삼린망 몰라? 대안, 불멸일, 도모비키 같은 거 말이야."
노노무라는 수화기에서 귀를 떼고 잠시 멍하게 바라봤다. 사요코는 가끔 황당한 말을 한다니까.
- 三隣亡, 이날 건물을 짓기 시작하면 불이 나서 이웃을 망친다 해서 꺼리는 날.
- 大安. 여행 • 결혼. 이사 등 만사에 길하다는 날.
- 도모비키. 뭘 해도 승부가 나지 않는다는 날. 또한 이날 장례를 치르면 친구가 죽는다고 꺼린다.
- "도와줄게." 사요코는 말했다. "밥 먹을 시간 정도는 있겠지? 먼저 가서 짐 싸놓을게."
노노무라는 전화를 끊고 나서도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달콤하면서도 살짝 허스키하고 혀짤배기처럼 천천히 말하는 사요코의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이상하게 평온한 느낌이 들면서도 약간 권태감이 드는 일상생활의 상징이었다. 동시에 그의 마음은 방금 오즈미 교수의 방에서 본 그 기묘한 모래시계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그는 아무 의미 없이 가슴속에서 말했다. 평온하면서 살짝 감미로운 일상, 그리고 그 일상 뒤에서 거대한 암흑의 공동이 존재해, 언제나 평온한 생활을 발밑에서 삼키려는 듯한 무한한 인식의 세계. 한 주에 한두 번 있는 즐거운 데이트 시간과 대우주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무한대의 시간.
-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미 챙겨놓은 작은 가방을 건넸다.
"간사이 어디? 교토?"
"아니, 오사카 남부 와카야마 근처에 있는 K시라는 데야."
"어머." 사요코는 깜짝 놀라 말했다. "그럼 내 고향 근처네."
"그쪽 출신이었어?"
"응. 태어나서 몇 년 동안 와카야마에 있었어. 가쓰라기 산기슭..."
노노무라는 약간 놀랐다.
"세상에 기묘한 인연이네. 그 산 근처까지 갈 예정이야."
"가쓰라기 산을 알아? 엔노교자가 수행했던 곳이야. 가쓰라기 산에 사는 도깨비를 잡아서 긴푸산까지 무지개다리를 놓게 만들었다고 해. 그리고 요곡 중에 <쓰치구모>라고 있잖아? 거기 나오는, 종종 천황을 괴롭혔던 거미 요괴도 가쓰라기 산 고분에서 살았대."
- 엔노교자. 634~701년, 아스카시대부터 나라시대에 걸쳐 활동한 주술사로, 초자연력 획득과 주술 종교적 활동을 목적으로 한 수험도를 창시했다고 전해진다.
- 쓰치구모. 전설상의 거미 요괴.
- "그만."
노노무라는 넥타이를 다시 매면서 말했다.
"네가 말하기 시작하면 일본은 온통 괴물의 나라가 돼버리지."
"내가 좀 고리타분한가?"
사요코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나는 어렸을 적부터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보고 들었어. 절집 딸이라서 그런가?"
-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초과학적 현상 등에 흥미를 갖는 것은 지성이 부족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 코앞에 들이밀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도 외면하면서 이치에 맞지 않고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억지로 부인하고 무시하는 것이 지성인가?
- 괴담에 대해서도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일종의 은유로 보고 심리적, 상징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이른바 문학적 합리주의자가 잘난 척하며 말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역사적 사실이 각색, 변형돼 괴담이 됐다는 해석이다. 산사람이 도깨비로 변형되는 것이 그 예다.
마지막으로 괴담이 전해지는 그대로 존재했다는 해석이다. 이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진짜 유령을 본 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의 지성에 대한 모독으로 여기고 그런 것을 봐버린 것에 수치스러워해야 하는가? 아니면 유령의 실재를 인정하고 그 존재를 포함한 새로운 초합리주의적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가?
- "나는 학자가 돼서는 안 될 사람이었는지도 모르지. 나나 오즈미는 이른바 과도기적 존재야. 나 자신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네. 단순한 변종으로 끝날지, 미래로 이어지는 뭔가가 있을지는 지금 단계에서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노노무라는 망설이면서도 말했다. "교수님은 전공 분야에서도 훌륭한 업적을 올리고 계시잖아요. 학자라고 해서 전문 영역에 대해 금욕적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금욕적이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큰 혼란이 일어나니까. 그러나 아카데미즘의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전문 영역 간 상호 교류가 좀 더 잘 이루어져야 하네. 지금은 아직 지성의 효율이 너무 나빠."
"전자두뇌를 더 싸게 대량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노노무라가 말하자 주변 승객이 깜짝 놀라 돌아볼 정도로 교수는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군! 오즈미 이 녀석!" 교수는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학자 대부분을 실업자로 만들 셈이군!"
- 노노무라는 서둘러 말했다.
"다만 인류 전체의 '지성 경제학' 같은 걸 이제 슬슬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요? 인류가 냉철한 지성 체계와 이를 언제나 뒤집을 수 있는 파괴적인 유머 사이에서 새로운 주체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시대가 바로 코앞에 다가왔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인류의 물질생활, 즉 생산력이 좀 더 높아지고 분배 과정의 모순도 완전히 극복해야 하네. 인류가 물질적 부를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생활이 풍요로워져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 그리고 지성의 유통에 아무 저항이 없는 게 반드시 좋다고만은 할 수 없어. 지성의 발효는 반드시 정체된 곳에서 나타나니까 말이야. 오류나 도그마가 갖고 있는 역설적 가치는..."
"그건 파괴적 유머의 효용과 같아질 겁니다." 노노무라는 말했다. "진지한 지성을 언제라도 자기 스스로가 놀릴 수 있게 된다면 굳이 익살꾼을 설정할 필요도 없겠죠."
"전 인류의 익살꾼화군." 교수가 숨찬 듯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조반니 베르케트의 세미세리아 시대가 되는 건가?"
- 세미세리아. 조반니 베르케트의 시 <반쯤 심각한 편지 Lettera semiseria>에 나온 말로, 부르주아를 비롯한 상공업자, 농민, 소상인 등의 평민계급을 대상으로 했다.
- 야마토, 야마시로에 세쓰카센을 포함한 고대 야마토 조정의 중심지인 기나이의 남쪽을 구분 짓는 이즈미 산맥은 이즈미와 기이의 경계를 따라 동서 약 50킬로미터에 걸쳐 뻗어 있는, 높이 1000미터 안팎의 낮은 산맥이다. 동북쪽으로는 표고 1125미터의 곤고 산을 주봉으로 하는 곤고, 이코마 산지가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기노쿠니야 분자에몬의 출생지로 유명한 와카야마현 가다 근처에서 기탄 해협으로 빠졌다.
가쓰라기, 네고로, 곤고, 지하야 등 고분 외에는 별 볼일 없는 산맥이나 지질학적으로는 꽤 특이한 산괴다.
그 이유는 이 산지가 이토이가와, 즉 시즈오카 대지구대 大地溝帶부터 일본 열도 서쪽의 지질을 내대와 외대로 구분하는 구조선 북쪽의 서남일본 중앙 구조선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조선은 매우 특징적인 중생대 상부 백악기의 사암층이 노출돼 형성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지층은 기수도를 넘어 아와지 섬 남부, 시코쿠 사누키 산맥, 다카나와 산맥에까지 이어져 있으며 두께가 지하 7000미터에 달하는 '이즈미 층군'을 형성하고 있다.
- 봉토는 윗부분이 인위적으로 제거돼 거대한 바위 한 장이 드러나 있었고 그 아래가 현실 玄室인 듯했다. 풍화작용으로 변색된 부분을 보아, 제거되기 전에 봉토 일부가 유출돼 절벽 반대쪽 가장자리가 가늘게 노출돼 있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 천장 바위는 길이가 13미터, 폭이 7미터 정도였다. 윗면은 거의 완벽할 정도로 평평하게 깎였으며 곳곳에 사각형 홈이 있었다. 노노무라는 태곳적 사람들의 어마어마한 공사력에 숨을 삼켰다.
- "굉장하지?"
반쇼야 교수가 노노무라의 뒤에서 말을 걸었다.
"완전한 하나의 바위라네. 200톤 이상 될 거야. 유명한 아스카의 이시부타이 고분을 본 적 있나?"
"아니요." 노노무라는 고개를 저었다. "사진으로밖에 본 적이 없습니다. 소가노 우마코의 도원묘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더군요."
"그래. 야마토 다케지 섬 한가운데 있는 녀석이지. 그것도 거대한 바위를 사용하고 있지만 최대 77톤이야. 게다가..."
"게다가..." 노노무라가 말했다. "이 거대한 바위를 이렇게 높은 곳까지 도대체 어떻게 운반했을까요?"
- 소가노 우마코는 아스카시대 귀족으로 대신에까지 올랐으며 이후 소가노 가문 전성시대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그가 죽은 뒤 도원에 장사 지냈다고 하며 이시부타이 고분이 그가 묻혔던 도원묘라는 설이 있다.
- 경사는 30도가 넘는다. 산꼭대기에 있는 고분 중에서 가장 높은 데가 해발 몇 미터였지?
"규슈나 추고쿠 지방의 고고이시는 어느 정도 크기였죠?" 노노무라는 물었다. "그것도 산허리를 둘러싼 거대 석벽으로 꽤 큰 것도 있었던 것 같은데요."
"2~3톤에서 커봤자 4~5톤 정도가 아닐까요?" 학생이 말했다. "그러고 보면 그것도 꽤 대단한 거네요. 몇 백 미터 높이의 산허리를 7킬로미터 가까이 그렇게 큰 바위로 둘러쌌으니까요."
"좋은 착안점이군."
반야 교수는 처음으로 미소 지었다.
"여하튼 일본 고대 거석 문명은 미스터리투성이지. 고고이시와 스페인 타라고나 거석 벽의 관계에 주목하는 학자는 극히 드물어. 아무튼 이이시부타이 고분은 고대사에 수수께끼를 또 하나 던지게 될 걸세. 그리고..."
- "저 구멍은 뭔가요?"
노노무라는 거대한 바위 판 위로 뛰어올라 다가가며 말했다.
"아스카무라의 사카후네이시와 비슷하네요. 그쪽 구멍이 더 크지만..."
노노무라는 구멍 쪽으로 몸을 숙였다. 테두리는 마모돼 둥글었지만 한 변이 10센티미터 정도 되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구멍 네 개가 한 변이 ...
- 고고이시. 고대 서일본에 구축된 유적으로 문헌에는 나오지 않는 산성.
- 아스카무라. 아스카 정권 탄생지로 아스카 시대 궁궐 등의 유적이 많이 발굴되는 곳.
- 사카후네이시. 화강암 석조물로, 원형 홈들과 이들을 서로 연결하는 홈이 있다. 술이나 약을 만들 때 쓰는 돌이나 정원 구조물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몽환적인 비밀, 그리고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햇살과 너무나 평화로운 현실 세계.
정말로 일어난 일이었을까? 그는 문득 의심이 들었다. 모두 그 죽음의 방에 도사리고 있던 이색적인 어둠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었을까? 담배 연기도 가로막힌 암반 속으로 사라진 발소리도 모두 착각이 아니었을까?
- 가모노 씨는 퇴직한 우체국장으로, 지금은 약간의 논밭과 매실나무를 돌보며 생활하고 있다. 이미 여든에 가까운 나이다. 옛날부터 향토사에 흥미를 가지고 오래된 사당이나 불상 같은 것을 부지런히 조사하고 다녔다. 아이는 없고 품위 있는 노부인과 같이 살고 있다.
"그 사람은..." 교수는 안경을 벗고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저 산기슭에서 석문은 있는데 그 안쪽에 벽은 본래부터 없는, 기묘한 돌로 된 사당을 발견했네.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시텐노지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세진구의 구멍'을 떠올리고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고 하네."
"이세진구의 구멍?" 노노무라가 되물었다. "뭡니까, 그건?"
"시텐노지에 있다고 하네. 사당 안에 있는 동그란 구멍이 이세진구 쪽을 향하고 있어서 그곳을 참배하면 이세진구를 참배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네."
- 시텐노지. 오사카 시에 있는 불교 사원, 587년에 성덕 태자가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 이세진구. 태양을 신격화한 아마테라스오오가마를 모신 신사.
- 목관과 그 바깥을 둘러싼 차갑고 무거운 석관이 두 사람을 떼어놓는 건가? 죽어서도 따로따로라니 싫은데. 사랑은 아니야. 사랑 같은 건 스무 살 넘은 보통 사람에게는 귀찮기만 해. 다만 마음 통하는 사람끼리 하다못해 붙어 있지도 않으면... 보통 사람은 너무 외롭지 않을까?
- 천장이 희미하게 붉어졌다가 다시 파래지기를 거듭했다. 똑바로 그것을 보고 있었음에도 노노무라는 옆에 있는 사요코의 눈꼬리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은 가버릴 거야." 사요코는 목메는 소리로 말했다. "아주 먼 곳으로 기나긴 여행을."
"아직 죽을 생각은 없어." 노노무라는 일부러 웃음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이쪽에 있을 뿐이야. 도쿄, 오사카 간은 비행기로 사십 분, 기차로 세 시간이야."
"나는 알아..." 사요코는 계속했다. "나는 정말 알 수 있어. 왠지 모르지만 당신은 언젠가 돌아올 거야. 아주 먼 훗날에... 그래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돌아올 거야. 아주 나이를 먹고서. 끝없는 여행에 지쳐서..."
몸이 차가워졌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위팔에 닿는 사요코의 두 팔도 얼음처럼 차가웠다. 기분도 차가워져서 사요코를 안아줄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는 곧게 뻗은 손끝으로 바로 옆에 있는 사요코의 부드러운 손을 더듬어 깍지를 끼고 꼭 쥐었다.
- "고분이라... 마치 고분의 저주 같군요. '왕가의 계곡' 같은 이야기네요."
"왕가의 계곡?" 사요코가 되물었다.
"이집트 고대 왕조의 분묘가 모여 있다는 '왕가의 계곡' 이야기를 모르시나요? 아, 저는 이런 유의 이야기를 좋아해서 자주 읽는 편이라..."
형사가 수줍게 미소 짓는 것을 보고 사요코는 그의 말에 놀란 것이 약간 부끄러워졌다. 형사도 여러 가지 책을 읽고 여러 가지 취미를 갖는다. 사요코가 아는 경관은 후기 인상파 그림을 좋아해서 복제품을 여러 점 모으고 있기도 했다.
"왕가의 계곡은 19세기 말인가 20세기 초에 백인이 발견해 발굴했는데, 왕가의 계곡을 파헤치는 자에게는 저주가 내린다는 말이 있어서 그 말대로 처음 발견했던 관계자들은 모두 변사체로 발견되거나 발광했다고 합니다. 실화예요."
사요코는 갑자기 몸을 관통하는 전율을 느꼈다. 가쓰라기 산... 고대부터 주술적인 산... 가쓰라기 산에 사는 쓰치구모라는 전설의 거미 요괴 이야기를 노노무라에게 들려준 것은 그녀 자신이 아니었던가.
"뭐, 요즘 세상에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다지 고분이나 고총에 관련되지 않는 게 좋겠죠."
- "교수님은 어떻게 되신 거죠?"
"온몸의 피하 곳곳에 작은 출혈이 발생했습니다. 게다가 결합조직이나 혈관, 뼈 등이 말 그대로 흐물흐물해졌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해졌습니다. 숨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할 정도죠. 빨리 발견된 데다 요새 교통사고가 많아서 처치법이 발달한 덕택에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단순한 타박으로는 조직이 약해진 것과 체온 상승을 설명할 수 없을 겁니다. 교수님 체온은 현재 41~42도 정도니까요."
"선생님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진동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의사가 말했다. "이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요 부검 시의 초음파 메스나 분자증폭기에 의한 조직 파괴와 아주 유사한 증상이 부분적으로 보입니다. 즉 교수님은 아주 높은 에너지 진동에 조우해서..."
여기까지 말한 의사가 갑자기 입을 닫았다. 복도 건너편에서 회진하는 듯한 무리가 모퉁이를 돌아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시지 마세요."
그 젊은 의사는 갑자기 서먹서먹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뜨려 했다.
-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같은 사건의 실타래에 얽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실타래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미결 사건 배후에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 알 수 있었지만, 이를 파헤칠 방법이 없다는 것도 그녀는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반쇼야 교수나 오즈미 교수, 그리고 노노무라가 남긴 메모나 노트에도 이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만한 내용이 한 줄도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 고분으로 들어가는 연도는 그 좁은 동굴과 연결된 것뿐이었다. 조사 결과, 그 이시부타이가 약간 특이할 뿐 그다지 신기할 것 없는 고분 중의 하나로 결론이 났다. 죽은 자를 장사 지낸 흔적이 없는 건 뭔가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만 할 뿐이었다. 다만 산의 급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고 야마토 조정이 성립되기 전 가쓰라기 산의 오랜 사제 일족이었던 가모 일족의 묘지가 아닐까 추측됐다.
- 사요코는 지방 중학교 교사로 취직했다. 사이사이 두세 대학의 청강생이 돼 역사나 철학 강의를 들었다. 때로는 몹시 애쓰며 물리학 초급 강좌를 수강한 적도 있었다. 노노무라가 남긴 노트 한 권에 특히 끌리는 부분이 있어 가능하면 스스로 이를 해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B5 사이즈의 노트에는 "시간과 인식"이라는 제목 하에 그가 생각나는 대로 적은 것 같은 내용이 3분의 2 정도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 시작은 이랬다.
"인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시간에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2차원의 상 외에 '높이'라는 차원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의 극단적인 계시는 우리가 미래로 가면 갈수록 과거라는 것은 멀어지지만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체계보다 사실을 중시하고 기록된 역사를 겸허히 받아들인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 그녀에게 난해한 여러 학술 용어나 외국어를 섞어 쓴 문장들을 조금씩 읽어나가면서 그녀는 자신이 점차 노노무라의 사고 곁으로 다가가 그 생각의 음각이 자신에게 새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고 자체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의 마음, 특히 보기에 따라 아무 쓸모도 없는 지적인 호기심이라는 수컷의 비합리적인 충동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단편적인 이론은 곧 따라갈 수 없게 됐는데도 그녀는 계속 읽어나갔다. 그녀 자신은 그가 남긴 사유와는 다른 존재임에도 이를 감싸 안으며 노노무라와 온기를 나누고 있다고 느꼈다.
숙모로부터 혼담 이야기를 듣고 그제야 아직 노노무라와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이때는 이미 사랑이라는 말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와 내면적으로 밀착해 있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그녀 자신이 그와 섞여 있다는 것을 느꼈다.
- 그래서...
그녀는 계속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간혹 그 그랜드 호텔에서 보낸 밤에 자신이 충동적으로 했던 말이 당시에는 단순히 감정이 격해서 내뱉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사건 직후에는 떠올리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묘하게 예언적이었고 뭔가 자신의 깊은 직감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게 됐다. 그때 노노무라의 실종과 함께 귀환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의 예감이 맞았으니 나머지도 맞을지 모른다.
- 2000년 전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바라보며 제사 지내던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2000년 전 가모 일족이나 나가스네히코나 쓰치구모 등과 같은 고대 사람들에게서 이웃 같은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 당시에는 저 자동차 도로와 지금 파내고 있는 터널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산 모양이 1000년이나 2000년 만에 바뀌지는 않았으리라.
- 나가스네히코. 진노 초대 천황이 야마토를 정복했을 때 저항한 호족의 장.
- 쓰치구모. 여기서는 거미 요괴가 아닌 고대 천황에 저항하던 토호 세력에 대한 경칭.
- 인간의 문제도 1000년이나 2000년 정도로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낯선 토지로 갑자기 떠나버린 남편이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며 아침저녁으로 산을 바라보고 사는 아내의 역할도 옛날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머리를 깎지 않는 비구니처럼 불경 대신 노트를 읽으면서.
- 머리는 벌써 옛날에 흰 게 섞이기 시작했으며 이도 약해지고 겨울에는 추위를 심하게 타게 됐다.
제자들은 나날이 자라서 결혼하고 때로는 아이를 데리고 '가모노 선생님 댁'에 찾아오기도 했다. 같은 것을 매년 가르친다고는 하지만 점차 교재의 변화를 못 쫓아가기 시작한 것을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산들의 경치도 조금은 변했다. 이즈미-곤고 스카이라인이 더욱 연장돼 이코마 산에서 다쓰다 강을 건너 북쪽 시기 산까지 거대한 다리를 만들어 이코마-시기 스카이라인과 연결됐을 때 그녀는 아주 옛날 전설 중에서 엔노교자가 조복 調伏시킨 혈귀를 이용해서 가쓰라기 산에서 긴푸 산까지 돌다리를 놨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혼자 쿡쿡 웃었다. 인간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먼 옛날에 꿈에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엔노교자 설화. 전설에서는 엔노교자가 가쓰라기 산과 긴푸 산에 돌다리를 놓으려고 신들을 동원했다고 한다. 가쓰라기 산의 신 중 하나인 히토코토누시는 추한 모습 때문에 밤에만 일했는데, 이를 엔노교자가 심하게 나무랐다. 이를 못 견딘 히토코토누시가 천황에게 엔노교자가 모반을 꾸민다고 고발하는 바람에 엔노교자가 유배 가게 돼 결국 다리를 완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 학교에서 할머니라는 별명이 생긴 지 4년째 되던 해에 그녀는 퇴직했다. 그 중학교에서 두 번째로 나이 많은 선생이었다. 퇴직 뒤에는 별로 밖에도 나가지 않고 사람도 안 만나며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때로는 근처 초등학생에게 간단한 공부를 가르쳐주거나 했다. 습자도 조금은 가르쳤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도 거의 안 하게 됐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곳은 변하지 않았다. 가쓰라기 산은 역시 태곳적 모습 그대로였고 이를 올려다보는 오래된 초가도, 그 집을 둘러싼 매화나무 ...
- 상상 아니면 꿈의 세계에서.
보랏빛 언어가 다시 깜빡였다.
(너는 즉 나는 누구인가? 임무를 생각하라.)
'임무?'
그는 눈을 떴다. 안구 밖도 안처럼 먹물과 같은 암흑이었다. 암흑은 눈에서 넘쳐흘러 투명한 두개골 안에 소용돌이치며 차올랐다.
(인식은 언젠가 달성될 거야. 곧 될 거잖아?) 목소리가 말했다. (그때까지 의식은 멸망한다. 인간이라는 종도 그 의식도 멸망한다. 하지만 달성된 상태라는 건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래. 언젠가는 종말이 오겠지. 하지만 시간의 끝이 인식의 달성과 겹쳐진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 멸망할 때까지의 시간은 유한해. 그 범위 안에서 인식은 언제나 미완성이며 언제나 어중간한 상태에서 끝나겠지. 언어를...)
목소리는 갑자기 빨간색으로 강조하듯이 깜빡였다.
(언어를 생각해 보면 돼. '인식의 달성'이라는 개념을 명확하게 생각해 낼 수 있다는 건, 달성 가능하다는 거지. 안 그런가? 의식으로 떠오른 건 아무리 기발하다 해도 실현된다. 어떤 망상도 실재로서 정당성을 갖는다.)
'그래서?'
그는 조금씩 이해가 가는 듯했다. 이해가 간다기보다 기억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종언이라는 건 인식 체계에도 있는가?'
(아니, 시간 쪽에.)
언어는 파란색으로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 (인식에는 종언이 없다. 있는 건 시간이지. 공간은 휘어서 닫혀 있다. 그렇다면 시간 또한 유한하며 닫혀 있다. 공간처럼 시작과 끝이 이어져 있지. 종언은 시초와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끝난 뒤에도 인식은 발전한다. 인식한다는 건 시공간과는 다른 방향으로 의식이 탈출해 가는 거 아닌가?)
- (닫힌 시공간을 넘어서...)
목소리가 말했다.
종언이 시초와 이어져서 모든 현상이 완성될 때 인식은 그 고리를 완전히 벗어나 그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세계 모든 것을 알아낸 뒤에도 인식은 끝나지 않는다.
- 그는 자신이 암흑의 밤에서 회색빛 상공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암흑은 점점 사라지고 회색은 점차 밝은 흰색으로 변해서 이윽고 수면에 떠오르듯이 의식이 빛 가운데로 떠올랐다.
그는 눈을 깜박였다.
- "우리 초능력 연구 섹션에서 나온 소원이네." 소장이 속삭였다. "상당히 우수한 수동형 텔레파스이지. 독심술사라고나 할까? 아주 좁은 범위이지만 예지력이 나타날 때도 있네."
소장은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는 소원에게 말을 건넸다.
"괜찮아, 토니. 이 사람은 특별한 손님이야"
그는 희미한 초조함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생기는 것을 느꼈다. 왜 그런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 "보는 대로라네. 그리고 경비원은 창고에 세 명 있네. 여기는 명상실이라 불린다네. 혼자 가만히 마음을 가다듬고 많은 데이터 속에서 생각지도 않은 환상이 희미하게 모양을 갖춰가는 것을, 불교 승려가 깨달음을 얻기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린다네."
"이리하여 하늘의 계시를 얻었도다." 그는 놀리는 투로 말했다.
"웃을 일이 아니야. 찰스 포트 이후 조직적으로 모은 몇 억이라는 초자연현상이 여기서 겨우 하나의 패턴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단 말일세."
"포트라니 누구지?"
"역사상 처음으로 초과학, 초자연현상을 체계적으로 수집한 인물이지. 그런데..."
소장은 조작실 한쪽에 있는 거대한 투명 구체 앞에 멈춰 섰다.
- 심벨 소장은 측은해하는 듯한 시선으로 대답했다.
"어떤 기계도 완전히 같을 순 없네. 양산된 기계도 어느 정도 허용오차 안에서 같다고 여기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각각 고유의 버릇을 가지고 있어. 그 버릇에 이번에는 각자 특유의 경력이 더해지고 일의 종류나 다루는 사람의 버릇 등에 영향받아 하나의 안정된 성격, 즉 개성을 띠게 되네. 전자두뇌와 같은 기계도 여러 대 사용하면 그 개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되지."
"그렇군. 그래서 어떻게 됐나?"
"게다가 우리는 이 개성을 어느 정도 키웠네. 어떤 천재의 두뇌도 아주 길게 보자면 집단의 지혜를 이길 수 없지. 동양에는 '셋이 모이면 문수보살의 지혜가 생긴다'라는 속담이 있다는 걸 아나?"
소장은 아끼는 듯한 눈빛으로 구체를 바라봤다.
"각 전자두뇌의 개성에 따른 개체 간 차이의 간격에 어쩌면 생각지도 않은 진보의 싹이 있을지도 모르지. 또한 무한히 복잡한 조합을 무한히 반복해서 나오는 패턴이라는 것도 있을 거야. 예를 들어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하고 인간으로까지 진화한 것처럼 말이야. 이런 사고실험을 하기에는 전자두뇌의 용량에 한계가 있기도 해서 우리는 전자두뇌 다섯 개의 사고 조합에 대한 토론을 전기적인 모형으로 하는 대신 각 전자두뇌 자체를 하나의 사고 소자로 여기고, 전자기장에서 이뤄지는 사고과정에 따라 전자두뇌 자체가 위성 조종 장치에 지시를 내려 공간상 임의의 위치를 취하도록 했다네."
그는 구체 안에서 빛을 내는 모델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자 그것이 방 안에서 멋대로 생각하며 토론하고 있는 다섯 사람처럼 보였다.
- 어떤 남자들은 격렬하게 토론하고 있다. 옆에서 다른 한 사람이 가끔 끼어들어 비판한다. 어떤 남자는 두 사람의 토론을 가만히 듣고 새로운 가설을 세우려고 한다. 또 다른 한 남자는 토론하고 있는 그룹에서 벗어나 혼자 전혀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 구체 안의 모델은 말을 나누는 것처럼 녹색 빛을 주고받았으며 우주 공간에 있는 전자두뇌는 전자기장의 진동을 주고받고 있었다.
이 다섯 남자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는 서기가 우주선이었다.
- "토론에 전기적인 모델뿐 아니라 공간 위치 관계를 도입한 이유를 아직 잘 모르겠는데..." 그는 중얼거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우주 공간에서 다섯 개의 주사위를 던졌더니 에이스 다섯 개가 나왔나?"
"연속해서 세 번..."
소장은 입가에 살짝 경련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 확신이 설 것 같았네. 그런 찰나에 사고가 연속적으로 터진 거야. 알겠나? 우리는 실험 중이었단 말일세. 결론은 거의 내려지기 일보 직전이었네. 그런 우리가 보험금을 노리고 일부러 사고를 냈다고 생각하나?"
- "사실 사고 그 자체가 우리가 추구하던 문제와 미묘하게 얽혀 있네." 소장은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실험은 중단됐네. 하지만 우리는 남은 전자두뇌와 상담해 봤네. 전자두뇌들도 거의 같은 의견이었어. 사고는 오히려 우리가 내려던 결론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역할을 했지."
"그 결론이란?"
"미래로부터의 간섭..." 소장은 말했다. "공식적으로 결론이 난 건 아니네. 하지만 우리 감으로는 거의 100퍼센트 확실하네. 그것도 기묘하지만 그 간섭 방법에는 두 가지 패턴이 있네."
- "하나는 표지판처럼 역사의 여기저기에 뿌려두고 우리가 발견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네. 있을 수 없는 기묘한 일들을 통해 우리에게 뭔가를 주장하려는 거지. 우리에게 그 의미를 해석하라고, 그 표시를 읽으라고 외치는 것 같네. 하지만 뭘 말하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네. 우리가 모르는 글자가 적힌 비밀 쪽지 같은 거지. 각각의 현상은 완전히 동떨어진 카테고리에서 나타난다네. 어떤 때는 땅속 깊은 곳에 있는 오랜 지층 안에서, 어떤 때는 태곳적 유적 안에서 또 어떤 때는 갑자기 지상에 나타나는 기묘한 상징이 되고, 어떤 때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외쳐대는 이상한 유령의 형태로."
"남은 하나는?" 그는 창가로 다가가며 물었다.
"남은 하나는 그 메시지를 저지하려는 미래로부터의 간섭이지."
- "우리가, 현대의 우리가 그 이상한 메시지에 귀 기울이는 걸 막거나, 손에 넣은 증거를 없애거나, 우리의 지식을 빼앗고 궁극적으로는 인류 전체의 관심을 그쪽 방면에서 돌리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네. 그리고 이 두 간섭 간의 갈등은 21세기 후반부터 갑자기 격해졌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네. 상식에서 벗어난 발견이나 현상이 갑자기 빈번하게 일어나고 또 이를 부정하는 사건이 이에 지지 않고 증가하고 있지."
- 그는 작은 상자형 기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크기로 다이얼과 스위치가 달려 있고 한쪽 면에 구식 브라운관 같은 형광면이 달려 있었다.
"구식 텔레비전 같은데."
"그렇다네." 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300년 전 물건이지. 하지만 꽤 잘 만들었어. 트랜지스터화된 것 중에서도 극히 초기 물건인데, 지금 우리가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유일한 대상이라네. 어쩌면 상실된 자료를 보상해 줄지도 모르지."
"무슨 뜻인가?"
소장은 잠자코 전기장발광이 사용되기 이전의 그 낡은 텔레비전을 만졌다. 철컥하고 희미한 소리가 나고 형광 면이 연둣빛으로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낡았지만 튼튼하지." 소장은 말했다. "극히 초기에 호사가의 손에 들어가서 별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네. 그가 자신의 수집 창고에 보관해서 오랫동안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고, 150년 전 스미소니언 박물관 초자연현상 섹션이 사들였던 거라네."
- "그럼 정말로 '그'일지도 모르겠군." 부장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가 직접 자네에게 말을 걸었다면... 자네는 '선발자' 후보가 됐을지도 모르네. 이례적인 일이지만 말이지."
"아직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 시험을 거쳐야 하잖아요. 게다가 저는 그다지 '선발자'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왜 선택돼야 하죠?"
"그런 질문해 봤자 소용없네. 왜 무한한 별 가운데 어떤 한정된 별만이 생명체를 품을 수 있나? 왜 생명체 중 어떤 종만이 지성이라는 걸 발달시키지? 왜 자네는 존재하고 여기에 있어야 하나? 누가 이런 걸 대답할 수 있겠나?"
"'그'만이 할 수 있죠."
"'그'도 우리가 '알고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는 알고 있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는 반대로 우리 의식이 만들어낸 건지도 모르네. '그'가 우리 상상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자유이지만, '그'가 우리가 그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 정당성을 가지겠지."
- "육체화했을 때는 상당히 구체적이었습니다. 근육통, 사지의 뻣뻣함, 어깨 결림, 머리가 무거운 느낌, 가슴이나 위의 답답함. 확실히 어디가 아프다 노곤하다고 지칭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피로는 전혀 구체적이지 않고 일종의 심리 상태에 불과합니다. 추상적인 기분을 어떻게 고치죠? 마사지받을 근육도 알코올로 활기를 불어넣을 혈관도 없는데."
"잊은 건 아니겠지. 아이?" 부장은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의 피로를 풀어줄 수 있는 게 광장 쪽에 있다고 생각하네. 게다가 새로운 지령이 내려왔네."
"잠시 존재하지 않을 순 없을까요, 부장님?" 그는 약간 비꼬아 말했다.
"그건 의미가 없네, 아이." 부장은 참을성 있게 말했다.
"존재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존재하지 않은 기간을 느낄 자네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네. 어쨌든 존재해야만 하고 존재할 수 있는 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숙명이지. 생각에 따라서는 무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말일세."
- "반역자를 몰아넣기 위해 좀 더 구체적인 자료를 모으는 거네. 자네는 제26공간에 가서 그곳 심판자들이 수확하는 걸 지휘하게."
"제26공간에서 말입니까?" 그는 놀라 말했다. "그 공간의 접수 대상이 벌써 수확기에 들어갔다는 건가요?"
"안타깝지만 더 이상 그곳이 직선형으로 순조롭게 발전할 거라고 기대할 수 없네. 당연히 별의 운명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 법이지. 수확은 적겠지만, 병이 발생한 밭에서는 서둘러 열매를 따야만 한다네."
"알겠습니다." 그는 포기한 듯 미소 지었다. "육체화도 심판자 급이면 편한 편이죠. 남은 감정의 응어리가 적으니까."
- 수만 명을 넘지 않았다. 그마저 대부분이 월면 개발에 종사했으며 외행성 개발은 21세기 후반에서 22세기에 걸친 프로그램으로 계획됐다.
우주 개발이 이렇게 늦어진 것은 결국 국제분쟁과 정치기구 문제 때문이었다.
각국의 프로그램은 국제 긴장 고조나 경기변동에 따라 종종 정체됐다. 국가 간 대립이 겨우 완전한 화해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시아에서 한정핵전쟁이 발발한 20세기 말이었고, 핵무기 전면 폐기, 전면적인 군비축소가 거의 이루어진 것이 21세기 초였으며, 지구 총생산의 계획 통일 분배기구가 겨우 활동을 시작한 것이 2010년대, 우주개발 프로그램에 세계 총생산의 10퍼센트가 배분된 것이 21세기 전반이 끝날 즈음이었다.
- 그즈음.
태양 주변을 돌던 여러 OSO(궤도상 태양 관측 위성 갑자기 태양 표면에 발생한 이상 현상을 보고했고 그로부터 겨우 8개월 뒤, 천문학자들은 2년 뒤로 다가온 '지구상 생명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태양의 이상 활동을 예언했다.
'최후의 시간'을 몇 시간 앞두고 지상은 오히려 일종의 평온과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 ... 동안 게을리했고 그 대가로 자연의 돌발적인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을 충분히 축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죽은 자식의 나이를 세듯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인가.
- 깊은 군청색 하늘에 반짝이며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선발된 사람들이 탄 우주선 1500척은 지구를 둘러싼 태양 대기권 밖으로 대피해 이미 화성 궤도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것은 섀도 계획의 인공위성일 것이다.
섀도 계획은 외행성 궤도로 인원과 기계를 도피시키는 계획과 지하 참호 대피 계획 중간에 놓인 계획이었다. 우주 공간에 투영된 지구 그림자를 이용해 태양풍의 강렬한 제트 기류를 피하는 것이다. 원거리로 보낼 수 없는 기계류를 가능한 한 많이 위성 궤도에 쏘아 올린 다음 가속시켜, 지구 바깥을 돌아 계속해서 지구의 그림자에 들어가 있도록 한다. 지구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계속해서 약간 가속시키지 않으면 안 되지만 달과 태양, 지구의 조석 작용을 미묘하게 이용함으로써 상당한 기간, 즉 반년 정도는 그림자 부분에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폭발 규모에 따라서는 이것도 무의미한 행동이 된다.
- 한스는 다시 한번 시계를 보며 예정대로 진행됐다면 이미 마지막 피난용 우주선이 화성에 도착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불길하고 이상한 징후로 가득한 하늘을 보면서 이 미친 지구 대기 밖에 펼쳐진 우주 공간을, 그 멀어져 가는 우주선 안에 탄 한 여성을, 그리고 지금 화성에서 가만히 이 지구와 태양을 바라보고 있을 옛 친구 마쓰우라를 생각했다.
- "어째서?"
한스는 바짝 마른 입술을 겨우 움직여서 뒤돌아보지 않은 채 생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동포와의 연대를 버릴 셈인가?" 등 뒤의 목소리가 말했다.
"죽어야 할 사람도, 살아야 할 사람도 모두 한마음으로 미래를 위해 선택된 것이다. 선택된 자는 남겨진 자의 모든 존재를 짊어질 책임이 있어. 이 모든 것은 이 시대의, 이 동포의 각기 다른 운명을 살다가 지금은 같은 절벽 위에 서 있는 종족 모두가 같이 선택한 길이네. 당신은 이 공동체의 운명을 버릴 셈인가? 이를 버리고 자신만 다른 존재에 의해 선택된 자의 길을 갈 셈인가?"
(서둘러라, 한스!)
정면의 키 큰 남자는 중력에 눌린 듯한 어눌한 동작으로 비틀비틀 두세 걸음 앞으로 나왔다.
(서둘러라. 자네는 내 명령을 따라야만 한다. 머뭇거리거나 감상에 젖을 시간이 없다. 빨리 타라, 한스!)
- "지구의 지적 생명체를 가능한 한 많이 구하려 노력하는 우리의 선의를 제발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낮 쪽 관측소에서 서둘러 본부로 돌아온 마쓰우라는 몰래 본부 대광장에 가득 모인 사람들의 표정을 훔쳐봤다.
모두 가면을 쓴 듯이 딱딱하고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 굳은 표정 뒤에서는 격렬한 감정의 동요와 혼란이 일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모두 90억 동포의 죽음을 앞에 두고 하나의 결의를 했던 사람들이었다.
90억 동포 중에서 선발돼 죽음을 극복하고 우주로 진출하겠다는 의지와 희망을 맡은 사람들. 90억의 씨를 맡고 재난을 피해 우주로 나가 살아남아서 씨를 심고 키워야 하는 사명이 주어진, 피난이 강제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까지 불철주야 계속된 악전고투는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 능력의 한계까지 쥐어 짜낸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갑자기 우주 저편에서 날아온 본 적도 없는 종족이 그들의 예상은 잘못됐으며 노력은 모두 소용없고 전력을 다한 그들의 계획으로는 누구 하나 구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 홀에 가득한 사람들의 얼어붙은 듯한 표정 너머로 울고 싶을 만큼 자신감이 붕괴되는 것이 보여 마쓰우라는 자신도 모르게 눈길을 돌리고 싶었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어 있는 힘껏 살아남을 노력을 해왔던 불쌍한 고아가 갑자기 나타난 현명하고 돈 많은 어른에게 이런 판잣집은 곧 무너질 거라는 말을 들은 심정이었다.
-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 말이야."
"다른 곳에 있네." 우주인이 대답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제3계단 생활이 기다리고 있네.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아."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군."
마쓰우라는 테이블 끝을 잡았다.
"훈련? 학과? 무슨 소린가? 우리를 어쩔 셈인가?"
"자넨 우리 동료가 된 거네." 옆의 남자가 말했다. "앞으로 여러 가지 일을 알게 될 걸세, 마쓰우라. 고향에 대한 추억, 멸망한 별에 대한 기억, 동포에 대한 기억을 버리고 새롭게 보다 높은 사회의 일원이 된 거야."
- "자넨 지구인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고 우주선에서 말했지." 대장은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대로네. 17세기 카나카 원주민에 대한 롬버그의 비유도 꽤 탁월했지. 하지만 우리는 스페인 사람만큼 야만적이진 않다네. 단지 우리에게는 자네를 새로운 고차원 문명인으로 훈련하고 교육할 의무가 있네."
목소리가 갑자기 사라졌다. 마쓰우라는 귀가 잘못됐나 싶어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대장과의 대화는 계속됐다. 계속되는 말이 목소리가 아니라 마쓰우라 머릿속에 직접 들렸다.
(인간이 야수의 계단, 직립한 원숭이, 원시인의 계단을 넘어 정신을 가지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진화론적 시련을 극복해야 했나? 인간이 정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사회로 아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얼마나 많 ...
- "지구는 무사했어!" 그는 외쳤다. "봐라, 지구는 무사했어. 인류는 타 죽지 않았어! 저 거리, 저 거리가 그대로 재해도 입지 않고..."
갑자기 눈물이 넘쳐흐르려 했다. 그가 알던 시대에서 4세기 뒤의 모습이라 해도 지구가 무사하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저 사람들의 표정이나 미소는 4세기 전과 같았다.
"우리를 속였어!" 마쓰우라는 분노하며 외쳤다. "지구가 타서 인류 문명이 완전히 멸망한다고 속였어! 봐라! 지구는..."
"진정해라." 목소리가 차갑게 말했다.
"여기서 기초 훈련을 좀 더 한 다음에 알려주려고 했는데... 저건 확실히 지구이고 여기가 25세기의 화성임에는 틀림없지만 저건 자네의 지구가 아니라네."
- "여기에는 제2계단 기초 훈련소가 있었다. 25세기의 인간은 반쯤 뭐가 뭔지 모른 채 동의해 줬다. 우리와 알게 된 지도 꽤 오래됐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적에게 파괴당하고 말았다. 녀석들이 저 뒤집힌 공간을 파괴하는 방법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어쩌면 스파이가 있을지도 모르지. 아무튼 마쓰우라 자넨 지금부터..."
"지구이지만 내 지구는 아니다..." 마쓰우라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설명해 줘. 내가 알기 쉽게. 당신은 지금 어디 있나?"
"여기 있다." 목소리가 말했다. "조금 지나면 융합이 끝난다. 자네는 내가 된다."
- "나는 책임져야 한다." 목소리는 냉랭하게 말했다.
"책임지게 돼 있지. 어차피 강등당하기도 하고. 내 일의 뒤처리는 내가 해야만 해. 자네는 나다. 계단으로 치면 자넨 여러 계단을 뛰어넘게 된다. 수속은 내 부하에게 시켜놨다. 자네가 내가 되고 내가 자네인 것은 누구에게 감출 필요도 없다. 나는 자네보다 훨씬 위 계단의 존재이며 책임 수행만이 문제이지 어떤 방법을 취하든 그건 내 자유이니까. 다만 지금 자네의 존재를 빌리면 나는 활동할 수가 있다."
- "존재의 계단을 오른다... 가르쳐줘. 계단이란 뭔가? 그걸 오른다는 건 어떤 뜻인가?"
"설명하는 건 어렵다." 목소리가 말했다.
마쓰우라는 이미 그것이 자기 내면의 소리인 것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른다는 건, 뭐 자네들이 알고 있는 가장 유사한 개념으로 설명하면 '회심 回心'하고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마쓰우라의 의식은 목소리의 의식에 대부분 침투당했지만 희미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명확하게 자신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보통 인간의 잠재의식에 해당하는 위치로 밀려가는 것을 느끼면서 마쓰우라는 의식이 있을 때 묻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서둘러 생각해 내려고 미약하게나마 발버둥 쳤다.
- "이제 그곳으로 돌아갈 순 없어, N." 남자는 가슴에 매단 금속성 원반을 꽉 쥐며 말했다.
"꼴을 보니 자네는 모르는 것 같은데, 이제 돌아갈 수 없게 됐어. 많은 동료가 당하거나 잡혔지. 르키프는 쫓기고 있어."
- "르키프는 자신이 잡힐 경우를 대비해 후계자로 자네를 지목했어."
"뭐라고?"
N은 눈을 크게 떴다.
"난 신입이야. 신입인데..."
"그는 자네의 이론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그걸 높이 평가했지. <시간과 인식>이라는 논문을 쓰지 않았나?"
"아..."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N은 떨기 시작했다. 굉장히 멀리 떨어진 하나의 기억이 되살아나려 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발상을 메모한 건데..."
"르키프의 메시지는 그걸 말하고 있었지. 만약 자네가 무사하고 동료들과 연락이 되면 자네가 나머지 사람들의 리더가 되라고 말이지. 그리고 자네에게는 '에너지 보존법칙이 왜 성립되는가' 하는 비밀을 풀면 우리의 원리가 명확해질 거라는 전언을 남겼어."
- "그게 도대체 어쨌다는 거지?"
"나도 모르지. 우리는 그렇게 전달하라고만 들었을 뿐이야. 그리고 자네 메모 중에 있었던 세 개의 가설. 즉 '맥동 시간론', '초다원 超多元 우주 구조론', '현상 인식의 무시간 無時間 모델'이라는 걸 중첩시켜 보라고도 했어."
- 침묵이 흘렀다.
삼나무 껍질로 인 허술한 지붕에서 이슬이 떨어졌다. 어딘가 멀리서 천둥소리가 났고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갔다.
"비가 내리려나?" 그가 불쑥 말했다.
"그런 건 상관없네. 이해하겠나?"
"전혀 모르겠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옛날에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그게 현재 우리 행동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전혀 모르겠어."
- 언덕 위는 삼나무가 우거진 숲이었다. 어느 쪽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공터에 엔이 있었다. 장식용 칼을 차고 가슴에 삼중 구슬 장식을 걸었으며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들킨 것 같아." 엔이 말했다. "정말이야. 아까 기비 쪽에서 하늘 배가 내려왔다며 큰 소동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하지만 이 시대에는 녀석들의 조사선이 꽤 자주 왔잖아." N이 말했다. "20세기 뉴기니 원주민이 비행기 모형을 나무로 만들어 놓고 신을 기다리며 숭배한 것처럼 바위로 우주선 모형을 만들어 놓고 모신 녀석들도 있다고 하잖아."
"아데노이와후네라는 녀석을 말하는 거지? 하지만 대부분 산 정상부에 있지. 녀석들이 산 정상부에만 내려오기 때문이야. 평야 쪽으로 내려오면 소동이 커지니까."
후안이 끼어들었다.
- 아데노이와후네. 아마테라스 신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탄 배. 오사카 가타노시 남쪽 아마노 강 부근에 있는 높이와 길이가 각각 12미터 정도 되는 배 모양 바위가 그 배라는 전설이 있으며 이를 기리는 신사가 있다.
- "크로니엄을 발신기로 사용할 수 있다..." N이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그래서 오즈미 교수가..."
이렇게 말하다가 N은 스스로도 놀랐고, 두 사람의 묘한 얼굴에 더욱 당황했다.
"오즈미 교수?" 엔이 수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누구지, 그건?"
"몰라. 나도 누군지 모르는데 왠지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왔어."
- "마을 젊은이의 부모가 요전에 죽었지. 아버지는 오랜 병고 끝에 죽었고 어머니는 따라 죽었다는군. 부모 세대부터 세금 연체가 계속돼서 결국 징세관이 병사를 데리고 거두러 왔어. 낼 게 없으면 아들을 데려가서 복역시킨다는데, 아들 쪽은 지금은 아버지 장례식도 할 형편이 못되니 적어도 장례 치를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하고 있어."
"징세관이라."
나중에 나타난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자는 못마땅한 듯이 미간을 찌푸리고 침을 퉤 뱉었다.
"스페인에도 나라님이나 군인, 경찰은 늑대와 돼지를 합친 것 같은 녀석들뿐이었지. 이런 시대부터 녀석들은 제멋대로 날뛰었던 건가?"
"다시없이 짧은 건 끄트머리마저 자른다는 속담과 같이..." 누워 있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뭐지?"
"야마노우에노오쿠라의 빈궁문답가야."
- 빈궁문답가. <만요슈>의 <빈궁문답가>는 백제계 도래인으로 알려진 만요가 야마노우에노오쿠라의 작품으로, 나라시대 지방으로 가난과 세금과 부역에 시달리는 농민의 비애를 장가에 담아 노래했다.
- 갈대가 밀생하는 모래섬을 둘러싸고 낮은 곳이 있었고, 무너진 토담 건너편은 사람이 들어가지 않는 일종의 성역이었다. 대가 바뀔 때마다 도성을 새로 건설하는 고대 제왕의 기묘한 풍습에 따라 이곳도 200년 전에 버려진 왕성의 폐허였다.
와오산이라 불린 고대 제왕 중 최대 존재였던 닌토쿠가 만든 다카쓰노미야의 흔적이었다. 전설의 제왕은 지금은 울창한 초목에 뒤덮인 궁전터 망루 위에서 한때 동쪽에 있는 가와치 쪽 마을을 내려다보며 백성들의 아궁이에서 나는 연기를 바라봤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두커니 서 있자니 토담 사이로 후루요도 강이 둔탁하게 빛나며 굽이쳐 흐르는 것이 보였다. 별빛이 북쪽 히가시이코마구릉 사이에 펼쳐진 폭넓은 하구의 파도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 와오산. 동진이나 송에 조공해 외왕국에 책봉된 왜나라 다섯 왕 중의 하나. 사료상 왕으로 보지 않으며 일본서기에서 닌토쿠 천황에 해당하는 자라 추측은 하나 정확하지 않다.
- 후루요도 강. 오사카 평야를 북동에서 남서로 흘러 오사카 만으로 흘러가는 강.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방을 통해 지금의 요도 강 흐름으로 바뀌었다.
- 그 광경을 보는 중에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몇 년 전, 시대로 치면 천 몇 백 년 뒤에 이 강 근처에 들어선 14층짜리 호텔, 불을 끈 방 안에서 그는 어두운 강 표면에 비치는 네온 불빛을 내려다봤다. 창 건너편에는 매연으로 뒤덮인 대도시의 밤이 있었고, 등 뒤에는 뺨에 눈물 흔적을 남긴 채 잠든 여성의 흰 알몸이 있었다. 그때 그는 지금 이 폐허 아래를 흐르는 강과 같은 강을 내려다보고, 대도시의 실루엣을 바라봤으며, 더러운 밤하늘에 빛나는 단 하나의 별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시간과 생명의 한계를 벗어나, 얼어붙은 별의 세계와 영겁의 시간과 그 무한히 깊은 곳을 떠돌았던 일을 생각했다.
- 마침내 그는 그 생각을 이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에서 미래, 우주의 끝으로, 시간도 없고 끝도 없는 희미한 빛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쫓기는 몸이지만 그는 달려왔다.
- 그와 동시에 그는 이곳, 이곳 위에 있는 짐승의 소굴로 변한 7세기의 폐허 도시 안에 있었다. 조잡한 삼베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서 눈 아래 흐르는 어두운 강과 호텔 창문에서 내려다본 오색 찬연한 네온이 빛나는 강은 동일한 강이면서도 그 사이에 그의 과거로 수년, 미래로는 천수백 년의 간격이 있었다.
- 그의 앞으로 이윽고 나라, 헤이안의 무르익은 시대가 지나가고 800년 뒤, 사방에 기마의 소음과 피비린내 나는 바람이 불 즈음에는 이곳도 동쪽에 육지가 생기고 곶 위에는 렌뇨가 혼간지 탑 기둥을 세울 것이다. 노부나가에 의해 불탔다가 후에 히데요시가 찬란한 황금 지붕에 벽에는 거대한 학을 금박 장식한 망대를 쌓고 해자를 둘러쳐서 마을을 만들지만, 역시 다시 불타버릴 것이다. 수백 년 뒤에 철과 콘크리트와 매연으로 된 혼잡한 도시가 나타나 북쪽 호텔 한편에서 과거의 그가 그 다정한 여성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제 그때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갑자기 그 여성에 대한 견디기 힘든 그리움이 솟아났다. 육신에 새겨진 시간은 어떻게 해서도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다. 그의 뒤에 있는 몇 년은 지금 7세기에 있는 그와 그 시대의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천 수백 년 보다도 훨씬 ...
- "이번에는 당신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노파가 재촉했다.
"이야기라고 해봤자 저는 50년간 잠만 잤고 그 이전은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어서..."
"잠든 사이 꿈도 꾸지 않으셨나요?"
문득 노인은 가만히 마당을 바라봤다. 잠시 후 그는 진지하고 쉰 목소리로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꿨지요." 노인은 아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뭔가 굉장히 황당무계하고 사람들에게 말하면 비웃음 당할 듯한 전혀 뜬금없는 이상한... 그리고 단편적으로만 기억나는..."
"그래도 상관없어요."
노파가 약간 들뜬 듯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 노인은 잠시 동안 가만히 마당을 바라봤다. 축축한 땅 위에 거적이 깔려 있고 그 위에 아직 담그기 전 햇매실의 녹갈색 휘파람처럼 반질한 표면이 둔탁하게 빛나고 있었다. 닭의 흰 깃털이 따뜻하게 빛나고 병아리의 금빛 솜털이 그 사이를 부드러운 연기 덩어리처럼 거닐고 있었다. 참새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개미가 긴 행렬을 만들고 파리가 햇빛 속을 붕붕거리며 날아다녔다. 마당 한편에는 색이 선명한 연보랏빛 들깻잎이나 기세 좋게 뻗어나가는 청록색 머위, 매화나무, 팔손이나무, 식나무, 남천, 때찔레꽃, 단풍나무 등이 푸른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사이로 삼백초 등 작고 흰 꽃들이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노인은 이 식물들을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봤다.
- "그렇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그건 기나긴... 마치 굴레와도 같은... 저의 꿈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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