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해로
출판 : 북오션
출간 : 21.11.04
신 전래동화는 新으로도 神으로도 읽히는 새로운 전래동화다.
익숙한 이야기에 약간의 비틀림을 더하는 것만으로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변하는데, 지조 있게 자신의 사랑을 지켰던 춘향과 몽룡이 종교적 신념으로 얽힌 동지가 되고, 효심으로 자신을 바쳤던 심청과 심봉사가 사채에 쫓겨 위험한 일에 손을 대다가 양이의 사특한 것을 조우하게 되는 식이다.
박해로의 이전 작품들을 전혀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게 뭐지?' 싶을 수도 있다. 그냥 읽어도 신선하기는 하겠지만, 물회 소스가 없는 물회 같지 않을까. 섭주, 원린자, 토린결 등 이전부터 쌓여온 이미지가 없다면 연결되기 어려운 고유명사들이 자세한 설명 없이 툭툭 튀어나오니까. 하지만 이미 그 느낌을 아는 이들에게는 꽤 흥미로운 스핀오프가 될 것이다.
즐겁게 읽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어차피 믿어주지도 않을 야담이도다."
- "사또, 암행어사로 의심되는 사람이 또 출현했나이다."
"뭐야! 또?"
이방의 보고에 변학도가 펄쩍 뛰었다.
"죽장망혜 단표자(竹杖芒鞋簞瓢子, 대지팡이와 짚신 차림에 표주박을 멘 모습) 차림으로 나타난 삿갓쟁이입니다. 허나 말투나 몸가짐이 예사롭지 않은 게 신분을 숨긴 암행어사 같습니다."
"어허, 이 사람! 모두가 솥뚜껑만 봐도 놀라는 이 마당에 자네만은 자라를 봐도 놀라지 말아야지! 두 눈을 크게 뜨고 보란 말일세, 겁먹지 말고! 겉만 보고 그자가 진짜 어사인지 이몽룡 소문을 듣고 나타난 사기꾼인지 어찌 안단 말인가?"
"이번엔 진짜 같사옵니다."
"어째서?"
이방의 목소리가 모기처럼 작아졌다.
"그자가 읊어대는 시구가 유려했고 현실비판적이었습니다."
- 문제는 변학도가 춘향에게서 느낀 감정이 사랑의 설레임이 아니라 비뚤어진 소유욕이었고, 그 같은 욕망의 실현에 권력을 악용했다는 점이다. 그는 신관사또 답지 않게 고을의 행정 상황을 파악하려 들지 않았다. 오직 춘향이란 한 여자의 신상 정보를 알아내는 데만 모든 정보력을 집중했다. 남원의 육방관은 신임 사또가 이상한 정열을 가진 별종이란 걸 눈치챘으나 '가는 날까지 모셔야 할 상전이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 "춘향이가 월매라는 기생의 딸이라면서? 못된 사대부 놈. 춘향이를 제 맘대로 갖고 놀다가 버리고 갔구만."
"그게 좀 이상하옵니다, 사또."
"뭐가?"
"이몽룡이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한양에 가서 정감록에 심취했다는 소문이 있는가 하면, 사교(邪敎)의 교주가 되었다는 소문도 있거든요."
"과거에 낙방하고 이상한 종교에 빠진 놈이 어디 한둘인가? 어쨌거나 놈이 안 돌아올 건 확실해 보이는데."
"춘향이는 이몽룡이 돌아올 걸로 굳게 믿고 있습니다요."
"그래? 춘향이란 아이가 점점 마음에 드는구나!"
- "물의 신 하백(河伯)을 자처하는 놈이 교주인 사교 말일세. 그놈들은 흰옷을 입고 다니지."
"나도 알아. 사해태평교(四海太平敎) 말이지?"
"그래. 이몽룡이가 바로 그 사해태평교의 교주 하백이었어."
"그럼 춘향이는 하백의 정인인가?"
"그런 셈이지."
- "난 사해태평의 격문을 본 적이 있어. '울퉁불퉁한 땅 위에선 높은 놈 가진 놈 서열이 있지만 흐르는 물속에선 모두가 평등하다. 황하의 신이며 물의 왕인 하백을 따르라. 평등한 세상이 온다...'"
"잘도 외우는군. 자네도 사교의 신도는 아니겠지?"
"난 자네 친구 허생일 뿐일세. 그렇다면 이몽룡이란 자는 보기보다 만만한 자가 아니로군 그래?"
- "생산되는 물고기가 없으니까! 어촌 마을은 매년 나라에 수산물을 진상해야 하는데 초진포에는 물고기가 나질 않아! 몇 년째 물고기가 없어 그물이 썩어나가는 곳이란 말일세! 나라에선 그런 사정을 알아주지도 않아! 그러니 '임무 소홀' 넉 자를 달고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지! 그 어사 놈이 장난친 거야! 먼저 강등 징계를 받고 초진포로 가서 또 징계를 받으라는 수작이 아니고 뭔가!"
"어촌인데 왜 물고기가 없어?"
"나도 몰라! 들은 얘기니까! 하지만 어물 진상을 못해서 징계받은 현감 놈들을 실제로 봤단 말일세!"
파발꾼이 허생에게 말했다.
"청나라 어부들이 몰려와 물고기를 싹쓸이해 가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럼 자네를 그리로 보내는 게..."
허생의 말에 오히려 얼굴이 노래진 건 변학도였다. 몰랐던 사실을 파발꾼 덕에 알았으니까.
"왜 오랑캐한테서 백성을 보호하랬는지 알겠군! 청나라 수적들하고 싸우다 죽으라는 소리야!"
- "사또, 미천한 것들이 눈이 까마득하여 마중이 늦었습니다요."
"너는 누구냐?"
변학도가 말에 앉은 채로 노인을 가리켰다.
"마을 촌장입니다요."
변학도는 못마땅한 눈으로 거지꼴인 백성들을 살펴보았다. 관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에잉, 남원부 대고을의 수령이었던 내가 이런 시골구석으로 부임했거늘 어째 환영하는 모양새가 이따위더냐? 천총(千摠), 파총(把摠), 초관(哨官, 천총, 파총, 초관은 속오군의 지휘관)은 어딜 갔으며, 기패관(旗牌官, 기수)은 어디로 내뺐느냐? 내 천리 길을 멀다 않고 너희를 위해 일찍이 당도했거늘 풍악 잡는 악공 놈도 없으며 하다못해 북이나 장구라도 쳐야 도리가 아니더냐? 관헌은 그렇다 쳐도 풍헌, 약정 들조차 보이질 않으니 버르장머리를 알 만하겠다. 내 부임하는 대로 네 이놈들 기강을 바로 세우리라!"
"사또, 관헌들도 백성들도 창칼 쥘 줄 아는 사람은 모두 초진포 앞바다에 나가 있습니다요."
"첫 부임길부터 바다로 피해 있다니 본관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고 뭐란 말이더냐?"
"그렇지 않습니다요. 오늘 새벽에 청나라 배가 또 침입했습니다요. 그들 때문에 초진포 물고기들이 씨가 마르고 있습니다요."
- 헛것을 보았다. 돌담집 뒤편으로 어부 둘이 거대한 생선을 나르고 있었다. 상어라는 물고기라고 했는데 그 머리를 뱀으로 잘못 본 모양이었다.
"질기고 짜기만 해서 먹지 못하는 물고기인데 오히려 저놈들이 사람을 공격해 잡아먹기도 합니다요."
변학도와 허생은 상어라는 희귀한 물고기를 설명하는 촌장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허생이 물었다.
"이보오, 촌장. 왜 집에 사람들이 없소?"
"청나라 수적이 몰려오면 따로 대피를 시키는 장소가 있는데 거기 가 있습니다요."
"대피소는 전임 사또가 만든 건가?"
변학도가 물었다.
"북곽 선생이라는 훈장이 만들었습니다요."
"북곽 선생?"
"예.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해서 훈장질로 여생을 보내는 사람인데 유학보다 실학에 능통해서 여러 가지 발명품을 낸 우리 고을의, 아니 조선의 인재입니다요."
- 촌장의 손가락이 바다 반대쪽, 녹림이 우거진 산을 가리켰다.
"소도(蘇塗)라는 이름을 붙였습지요."
- "소도라면 도망자가 거기 들어가 숨어도 잡아가지 않는 거요?"
"이 늙은이도 삼한 시대의 소도는 도망자가 숨어도 잡아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초진포의 소도는 어민들이 숨어 있다가 수적에게 걸려도 잡혀 가지 말라는 의미에서 같은 이름을 붙인 겝니다."
“그런 의미의 소도였군. 촌장 당신은 배운 사람 같구려."
"아, 아닙니다요."
촌장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허생은 기시감 같은 게 느껴져 무심코 왼편 돌담집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거대한 토끼 대가리가 채광 구멍에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너무나 순식간의 일이어서 진짜인지 환각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 흰옷 입은 사람들이 촌장을 질질 끌고 갔다. 그들이 멈춘 곳은 낭떠러지 앞이었다. 눈을 가린 천은 치워졌으나 입을 막은 재갈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촌장은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촌장의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장검을 뽑았다. 촌장은 이제 막 지고 있는 해를 바라보았다. 장검이 태양 앞에 놓이며 빛을 반사했다. 태양이 내는 빛이 장검의 빛과 합세해 촌장의 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눈을 감으려 했으나 사람들이 강제로 벌려 눈을 감지 못하게 했다. 징소리 북소리가 바닷가에서 계속 들려왔다. 촌장의 눈가에서 연기가 솟았다. 비명이 터졌지만 입을 막은 재갈 때문에 소리로 나오지는 않았다. 장검의 위협적인 광채는 계속되었다. 마침내 촌장이 장님이 되고 나서야 장검은 다시 검집으로 들어갔다. 태양은 임무를 마쳤다는 듯 사라졌고 어둠이 빠르게 다가왔다.
- "일어나라, 당장! 이 작자들아! 수적! 청나라 수적 말이다!"
허생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잘못된 게 무엇인지 서서히 깨달음이 왔다.
"처음부터 이상했어. 청나라 수적이라니... 서해바다라면 몰라도 청나라 수적이 어떻게 동해바다까지 멀리 노략질을 온단 말인가? 차라리 왜나라 수적이라야 그럴듯하잖아."
그는 하인들을 바라보았다. 술병이 나뒹굴었고 뒤집어진 그릇도 있었다. 술에 취해 잠든 것이 아니라 약에 취해 쓰러져 정신을 잃은 모습 같았다. 예상대로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허생은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처럼 창호지 바른 문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비쳤다. 그들이 감시자라는 의심이 한층 더해졌다.
어둠이 내려 그림자들은 희미하지만 어딘가 묘한 변화가 있었다. 그들의 키가 더 커졌고 머리통이 더 커진 듯했다.
- 문을 열려던 허생은, 어떤 위기감, 혹은 예감 같은 것을 느끼고 갑자기 하인들이 메고 온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뒤진 끝에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초진포 현감으로 발령을 명하는 이조의 사령장이었다.
"이럴 수가..."
두루마리 사령장을 활짝 편 허생은 아연실색했다. 이조의 관인은 여전히 찍혀 있었지만 초진포 현감으로 제수하라는 사령장의 내용은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 문이 벌컥 열리면서 초진포 백성들이 들어왔다. 낫과 도끼를 든 그들은 키가 커지고 머리가 커진 채 허생을 둥그렇게 에워쌌다.
허생은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들이 머리에 쓴 거대한 탈 때문이었다. 하나같이 머리에 토끼 아니면 거북이의 탈을 쓰고 있었다. 돌담집 채광 구멍에서 본 괴물의 얼굴은 바로 이 탈이었다. 뱀이라고 착각했던 머리가 사실은 거북이임을 알아채자마자 허생의 입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별주부전이로구나. 이제 변학도는 간을 잃게 생겼어..."
토끼와 거북이 탈을 쓴 무리들이 허생을 난폭하게 끌고 나왔다. 허생은 저항하지 않았다. 바깥에는 더 많은 토끼와 거북이탈을 쓴 인간들이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 어둠이 오면서 횃불이 켜졌다. 마을을 가득 에워싼 탈 쓴 인간들, 멀리서 들려오는 징소리 북소리. 그것은 실로 기괴한 광경이었다.
대포 소리나 조총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화약 연기도 오르지 않았다. 전장터의 징소리가 아닌 게 분명했다. 약에 취해 곯아떨어진 하인들은 저항도 못하고 하나하나 묶였다.
- 토끼와 거북이 탈들에게 연행되어 나오던 허생은 향교로 보이는 건물 안에서 역시 토끼와 거북이 떼에 질질 끌려 나오는 여자 하나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여자는 머리에 은비녀를 꽂고 보라색 치마저고리를 걸쳤는데 얼굴에는 잘리다 만 수염이 붙어 있었다.
"학도! 자네 무슨 봉변을 당했나? 왜 여장을 하고 있어?"
"이것들이 연산군 놀이를 하자더니 나를 이렇게 만들어놨네!"
뒤로 손이 묶인 변학도는 마구 얻어맞아 얼굴이 크게 부풀어있었다.
- 변학도는 옆에 서 있는 이몽룡을 노려보았다.
"네놈이 그런 거지?"
"제지업을 핑계로 이조의 아는 사람한테 사령장 하나만 며칠 빌리자고 했지."
허옇게 분칠을 하고 볼에 붉은 연지를 넣은 이몽룡은 사교의 교주다웠다. 그는 더 이상 사랑에 빠진 철없는 선비가 아니었다. 토끼와 거북이 탈들이 이몽룡과 변학도를 빙 둘러쌌다. 그들이 손에 쥔 횃불이 활활 타올랐다. 저녁이 밤으로 변하는 시간조차 그들 마음대로 태워버린 것 같았는데, 실제로 타 지역과 다른 초진포에서의 시간 변화는 초현실적인 면이 있었다. 이몽통은 무서운 술법을 소유한 마성의 얼굴을 드러냈고, 횃불 아래 여장을 한 변학도의 모습마저도 기괴해 허생은 겁이 나 오줌을 쌀 지경이었다.
- "그때 남원에서 그냥 날 죽이지 그랬느냐? 네 계집을 탐했다고 기어이 이 꼴로 분장시켜 수모를 당하게 하느냐?"
"끝이 아니오, 변사또, 시작은 이제부터입니다."
"넌 네게 여러 번 수치를 안겼어. 저 짐승의 탈들은 별주부전의 암시야. 난 너에게 속아 여기까지 왔지. 이만하면 됐으니 그만 놀리고 죽여라."
"방자는 당신을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게 하려고 일부러 붙잡혀 순교를 택했소. 그 결과 당신은 용의주도함을 상실했소. 방자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전라 관찰사에게 문의해 초진포 발령의 ... "
- <이몽룡과 겟 아웃>
- 전직 내수사 별좌였던 김 대감의 오구굿(죽은 사람의 혼백을 위해 일정 기간 동안 하는 굿)은 성황리에 끝났다. 대감 아버지의 혼백이 저승에서 평온을 찾았으니 손자는 병을 털고 일어날 것이고 이제 집안에는 좋은 일들만 가득할 거라고 천왕보살은 자신 있게 말했다. 실제로 열병을 앓던 대감의 아들에게서 해열의 차도가 보이자 그녀는 복채를 많이 받았다. 천왕보살은 굿을 보조한 다섯 명의 아낙을 불렀다.
"오늘 수고들 하셨네."
음식 나르고 전물상 차리고 무녀의 몽두리(옷) 준비하고 금구(악기)도 나르는 온갖 잡일을 한 사람들이 이 다섯 여자였다. 그중에는 안성댁도 끼어 있었다. 천왕보살은 그들에게 충분한 보수를 나눠준 다음 따로 안성댁을 불렀다.
"포목점 주인을 통해 자네를 소개받았네. 이 마을 사람이 아니구먼."
햇님 어미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손을 다소곳이 모았다.
"과거를 물으려는 게 아니네. 난 자네 눈치와 일솜씨를 칭찬하려는 거야. 큰 박수 작은 박수도 하나같이 자네 준비에 전혀 실수가 없다고 하네. 어떻게 나하고 같이 계속 일해보지 않겠나?"
- "'토린결'은 나라에서 금하는 비밀 활동이었어. 너도 알고 있잖아."
"실제로 저런 게 하늘을 떠다니는 걸 보기 전까진 나도 아버질 원망했지."
"별똥별이라니까!"
"오늘이 5월 5일 단오야, 언니!”
"산속에서만 살았더니 네 머리가 이상해졌구나. 정신 차려, 홍련아. 우린 역적의 자식이야. 그걸 합리화하기 위해 어처구니없는 걸 맹신할 필요는 없어."
- 홍련이 벌떡 일어났다. 장화는 피난 갈 짐이라도 꾸릴 태세였다.
"어딜 가? 애들한테?"
홍련은 대답 없이 마당으로 나갔다. 삽을 가져와 마당 한 귀퉁이를 파기 시작했다. 저 멀리 남매의 집에는 촛불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홍련의 관심을 끌진 못했다.
- "아버지가 공부하셨던 책을 우리도 갖고 있어."
해록이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일단은 산을 내려가야 해요! 여기 있다간 불에 타 죽소! 불에 타 죽..."
그의 눈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타닥타닥 타는 소리 사이로 툭툭하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먹구름이 몰려왔는데 조금 전에 본 그 인공의 먹구름은 아니었다. 장화 홍련의 행복한 표정 위로 맹렬한 소낙비가 시작되었다. 세속의 때마저 벗겨주는 시원한 비였다. 불길은 서서히 잡혔고 뛰던 짐승들이 안정을 되찾았다.
"햇님이와 월녀가 내려주나 봐. 언니."
홍련이 활짝 웃었다. 장화가 홍련을 끌어안았다. 해록은 그런 누나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장난기 가득하고 다정했던 소녀들의 얼굴엔 이제 득도한 고승의 표정만이 남았다. 해록은 그녀들을 데려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 다음 날 해록은 홀로 산을 내려왔다.
속세에 내려온 그는 글솜씨를 발휘하여 섭주 통악산에서 겪은 일을 패관소설로 남겼다. 하지만 가까스로 일으켜 세운 가문이 또 멸문당할 게 두려워 그는 내용을 대폭 변경했다. 원린자 대신 말하는 호랑이를 등장인물로 내세웠고, 원린자의 비행기구는 동앗줄 내려주는 하느님으로 대체했다.
- 지금까지가 전래동화로 알려진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실체적 진실이다. 이 전래동화는 저잣거리에 배포되어 큰 인기를 끌게 되는데, 소심한 해록은 그 같은 시선집중조차 두려워 작자의 이름에 박해록 대신 무명씨(無名氏) 세 글자를 크게 써넣었다. 차라리 이름을 밝혀 돈벌이에 도움 되도록 하는 게 어떠냐는 주막집 주모의 권유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어차피 믿어주지도 않을 야담이도다."
- <해와 달이 된 오누이와 우주의 침입자>
- 주막에 들어섰을 때 심 봉사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술병 깨지는 소리, 도박판 고함소리, 식기 부딪치는 소리 등에 깜짝 놀랐다.
"여기가 주막이냐, 황산벌 전쟁터냐?"
"지방 주막하고 달라요. 한양 큰 주막에는 손님이 백 명도 넘어요."
"얼마나 큰데?"
"대청마루만 수십 개고요. 주모 말고도 일하는 점원이 열 명은 족히 돼요."
"과연 한양은 한양이구나."
그곳은 심청이 일하는 한강과 가까운, 여각까지 겸하는 유명한 주막이었다. 구석 자리까지 아버지를 데려간 그녀는 돼지고기 국밥을 시켰다. 심 봉사는 딸과 간만에 겸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 누가 다가왔다.
"어머나, 너구나? 청이?"
심학규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언니."
심청의 목소리가 밝았다.
"모시고 온다더니 아버지야? 이분이?"
"네, 아버지, 이 언니가 저를 도와주시는 다모, 채옥이 언니예요."
"여기서 말하면 안 돼지 내가 하는 일을 다 도망가겠다 범인 ... "
- "어떤 천지신명이?"
"그건 말할 수 없어. 비밀을 지키라고 했으니."
- 혹부리영감이 할멈의 곁에 앉았다. 할멈은 눈을 흘겼지만 비키지 않았다. 오히려 영감의 곁으로 조금씩 붙어 앉았다. 영감은 서서히 애가 탔다. 젊은 시절 유명한 기루의 기생이었던 할멈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상의 여인이었다. 정승을 지낸 어느 유림과 나루터에 물놀이를 나갔던 그녀는 파도 때문에 군함에서 굴러 떨어진 포탄에 부딪쳐 허리를 크게 다쳤다. 거동이 불편해지자 기생 생활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남자들은 더 이상 그녀를 찾지 않았다. 정승 출신 유림도 그녀를 외면했다. 돈이 떨어지자 그녀는 동네 한량인 수양아들에게 의지하는 상태로 전락했다. 기생 생활로 풍족히 벌어준 돈으로 노름판이나 기웃거리던 수양아들은 더 이상의 물질적 지원이 없자 망나니로 변해 봉양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 사정을 아는 혹부리영감은 꼬부랑할멈을 자기 곁에 두고 싶어 했고 끈덕지게 구애해 왔던 것이다.
"자, 혹을 뗐으니 나랑 같이 살자. 내 돈도 갖고 왔다."
영감이 주머니에서 엽전 뭉치를 꺼냈다. 할멈은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고 갑자기 불어난 엽전과 떨어진 영감의 혹을 계산적인 눈빛으로 번갈아 살폈다.
"안 돼! 어떤 천지신명인지는 몰라도 내 허리도 펴야지."
- 뒤에서 누가 쿵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두 남자가 놀라 동시에 악 비명을 질렀다. 돌아다본 뺑덕이 소리쳤다.
"깜짝 놀랐잖아요!"
"누구시냐?"
심학규가 물었다. 채광창 바깥을 향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 집에 무서운 신령이 살아요."
"직녀보살이시구먼."
심학규의 눈썹이 꿈틀 했다.
"세 번째 집을 말하는 거요?"
"바다를 건너서 온 흉악한 신이 저기 있어요."
- "이름을 알 것 같아요... 잊지 말아요... 그녀의 이름은 해골과 시신을 몰고 다니는 노파예요."
"해골과 시신을 몰고 다니는 노파?"
"그래요. 그 여자가 가는 곳마다 해골과 시신이 넘쳐나지요 그녀의 나이는 사백 살이에요. 그래서 처녀들의 피가 필요한 거예요. 헉!"
- "그가 날 알아봤어! 나는 이제 여기 있지 않을 거야! 저 노파가 모두를 죽일 거야!"
심학규는 다급히 직녀보살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내 딸은 어디 있소? 저 노파가 연관되어 있소?"
"모르겠어요. 저자의 능력이 내가 다가가려는 걸 방해하고 있어요 위험한 자예요. 없애버려야만 해요."
"보살이 살을 날려 없앨 수는 없소?"
"난 조선 무당이에요. 내 신통력은 조선귀신한테만 국한되지 서양귀신한텐 어쩔 수 없어요."
- "어떻게 없앨 방법을 모르겠소?"
"방법은 알아요. 그자 앞에서 그자의 이름을 부르면 돼요. 서양귀신은 자기 이름이 불리게 되면 어둠으로 돌아가요."
"뭐 그리 간단해? 부적도 아니고 이름 부르면 죽는다고?"
뺑덕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직녀보살은 공포에 질렸다.
"해골과 시신을 몰고 다니는 노파야... 난 살고 싶어. 아직 죽기는 싫어."
직녀보살은 더 얘기하지 않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뺑덕은 쓰개치마가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어딘가로 걸어가는 광경을 보았다.
- 귀화인 멜테부레가 찾아와 하벨과의 접견이 이뤄졌다. 조선어와 외국어에 능통한 멜테부레 덕에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에스파냐에 살던 네덜란드인 하벨은 악의 화신 파브리지오를 쫓고 있던 신성우호동맹(神聖友好同盟)의 백인대장이었다. 파브리지오는 쌍둥이 연금술사인데 형인 파브리지오가 악, 동생인 노베르토가 선인 카인과 아벨 같은 존재였다. 사특한 연금술로 죽은 시신을 살리다가 추방된 파브리지오는 고향 이탈리아로 돌아가 마의 존재를 신비의 영약으로 되살려낸 후 에스파냐 국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루시퍼라는 이름을 갖고 있던 이마의 존재는 처녀의 피를 빨고 생체기관을 섭생해 400년이나 젊음을 유지한 마녀였다. 심 봉사가 한자로 부르짖은 '루시파(髏屍婆)'라는 이름이 불렸다고 생각한 루시퍼는 심장이 여덟 개로 조각나 지옥의 먼지로 사라졌다.
오랜 옛날, 루시퍼는 이탈리아 토스카냐 지방에서 아이들을 납치해 자신의 수명을 늘이려다가 분노한 농민들에게 잡혀 손목에 못이 박힌 후 화형당했다. 주술사는 그녀가 부활하지 못하도록 영혼을 비너스 여신상에 가두어 십자가 사슬로 묶은 후 지중해에 던져버렸다.
- <심봉사와 이창>
- 그날, 길 잃고 첩첩산중을 헤매던 나무꾼 앞에 집 한 채가 나타났다. 벼락을 동반한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세찬 비는 넘어진 사람을 짓밟듯 기울어진 나뭇가지를 더 눌렀고, 벼락은 물고문당하는 숲을 번쩍 보여주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갔다.
이상한 집이었다.
방 안에서 촛불빛이 새어 나왔는데 그보다 밝은 빛이 집 자체에서 뿜어져 나왔다. 두 개의 채광창은 침입자를 지켜보는 눈 같았다. 지붕을 둘러싼 허연 기운은 안개가 집을 감싼 건지 굴뚝이 안개를 토해낸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없소?"
나무꾼이 소리쳤다. 거세지는 빗소리만이 대답을 대신했고 벼락이 가끔 끼어들었다.
- 흠뻑 젖었기에 나무꾼은 무작정 사립문 안으로 들어간 뒤 방문을 열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산속 오두막 치고 내부가 깔끔했다. 세상을 등진 선비의 은둔지 같았다. 나무꾼에게도 그 정도의 분별력은 있었다. 벽에는 어떤 선비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통영갓에 보라색 두루마기는 높은 지위를 암시했지만, 귀까지 찢어진 입에 하나밖에 없는 애꾸눈은 사악한 빛이 감돌았다. 짙은 눈썹도 수염도 이 같은 성격의 강조에 한몫했다. 자신의 지엄한 위치를 드러낸 초상화라기보다는 그만한 몸값이 걸린 현상수배자의 용모파기에 가까웠다.
- 서안에는 화선지가 놓여 있었는데 쓰다 만 것 같은 글귀가 있었다.
"그자들은 검은 갑옷에 검은 투구, 나는 걸음에 입을 움직이지 않는 말하기로 저세상의 위풍을 떨치며 목숨을 취하는 위세를 드러내나, 그럼에도..."
글은 중간에서 끊어졌다. 쓰다가 어딜 나간 건지 다른 사정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서안 주위로 술병들이 길게 놓여 있었다.
"마시면서 쓰다가 취해서 나간 건가?"
병도 그 안의 빛깔도 이상했다. 한 모금 마시고픈 생각이 간절했으나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댈 수는 없었다. 그 밖에 가재도구라고는 책뿐이었다. 서가가 사면 벽을 차지했는데 온통 책이 가득했다. 은둔 선비의 집이 틀림없었다.
- 그날 이후, 나무꾼이 사는 마을의 '백곡벌'이라는 벌판의 땅이 여기저기 파헤쳐지는 일이 잇따라 발생했다. 그곳은 예전부터 버려진 땅이었다. 땅이 파였을 뿐 못 쓰게 된 농작물도 없고 범죄 관련 희생자도 없어서 관아에서는 수사를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멧돼지 같은 육중한 산짐승의 소행으로 여겼는데 그런 동물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울러 시간과 노력을 들여 탐문하는 이도 없었다. 백곡벌은 저주받은 곳이라는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70년 전 무자비한 전투가 벌어져 많은 사람이 죽은 벌판이었다. 명색이 전쟁터인데 전승비나 기념비 따위가 없었고 누가 누구와 싸웠는지 등 정확한 사연을 아는 이도 없었다. 모두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랑캐 격퇴에 관해 아는 척을 했다.
- 나무꾼은 신수가 훤해졌다. 그는 쌀을 풍족히 사고 좋은 집을 장만했으며 깨끗한 새 옷을 갖고 다녔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는 눈에 띄는 사치를 부리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부지런하면 하늘이 알아본다고 그를 칭찬했다. 그들은 남들보다 더 많이 나무를 베어서 그가 재산을 모은 줄 알았다. 나무꾼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선 그 어느 때보다 일에 열심이었으나 사실 이는 알리바이를 만드는 행위에 불과했다. 남들이 보지 않으면 그는 침을 뱉고 도끼를 허리춤의 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감투를 썼다. 백곡벌의 땅을 파헤친 범인은 바로 이 나무꾼이었다. 그는 감투를 써서 벌판 아래에 묻힌 백골들을 보았고 백골만큼이나 많은 광채를 보았다. 그 광채는 창, 칼, 방패 따위에서 나왔다. 아무도 모르게 발굴한 골동품 병장기를 그는 도시의 뒷골목에 내다 팔아 돈으로 만들었다. 누구도 이 사실을 몰랐다. 나무꾼 역시 백곡벌에 왜 그리 많은 병장기와 시체가 묻혀 있는지 몰랐다.
돈이 쌓여 배가 부르고 나서야 그 사실이 알고 싶었다. 정작 그가 궁금해야 할 것은 머리에 쓴 감투의 출처와 감투의 능력이겠지만 다섯 괴인이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나타나지 않자 그는 현실적인 것만 궁금해하기로 했다. 거기 왜 귀한 병장기가 묻혀 있는지, 얼마나 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는지 따위 말이다.
그가 특히 궁금해하는 건 백곡벌 꼭대기에 묻혀 있는 유독 커다란 해골의 주인과 그가 가지고 있는 긴 광채에 대해서였다. 보검이 틀림없는 것 같아 몇 번이나 파보려 했지만 불길한 예감이 실행을 미루게 했다.
- "어르신이 이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인 최 씨 어르신이 맞습니까?"
"맞긴 하오만 누구요?"
"예. 저는 지역 역사를 연구하는 초보 향사입니다. 어르신이 이 마을 역사에 관해 모르는 게 없다 해서 찾아뵈었습니다. 물론 그냥 오지는 않았지요."
나무꾼은 손에 든 막걸리와 안주를 들어 보였다. 백골은 기뻐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아무도 찾아줄 사람 없는 늙은이라 좋아 환장하는구먼.'
"잘 오셨소, 젊은 선달! 선달의 말이 정확하오! 이 늙은이만큼 이 고장 역사를 잘 아는 이는 없소이다!"
"그렇군요. 그럼 소피를 좀 보고 올 테니 제가 궁금해하는 걸 가르쳐주십시오.”
해골이 아양조가 되어 뒷간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었다. 나무꾼은 빙그레 웃으며 뒷간에 가 감투를 벗었다. 소피를 보고 나왔을 때 그의 앞에는 해골이 아닌 인자하게 생긴 할아버지가 들마루에 술상을 봐놓고 있었다. 나무꾼은 그 앞에 앉아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겠다며 묻고 싶은 소재를 꺼냈다.
- "백곡벌 전투에 대해 듣고 싶다고요?"
노인의 반응이 반갑지가 않았다.
"예. 제가 궁금한 건 그것입니다."
"어째서요?"
"역사 연구 중에 전쟁사가 가장 흥미롭거든요."
"음, 그곳에서 전투가 벌어진 건 사실이오..."
노인이 우물쭈물하는 기색을 보였다.
"허나 그건 별로 우리 마을에 좋은 역사가 아닌데... 그러지 말고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얘기는 어떻소?"
"좋은 역사건 나쁜 역사건 역사는 다 엄연한 사실입니다. 후손은 전대의 진실을 알 권리가 있고요. 온고지신."
- 노인이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약은 영감이로군, 시간을 질질 끌면서... 나도 같은 방법을 써야겠다. 나무꾼은 찹쌀막걸리를 잔에 가득 따른 후 노인에게 건넬 듯하다가 자기가 쭉 마셔버렸다. 기대하던 노인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나무꾼은 다시 잔에 막걸리를 따른 후 공손히 잔을 건넸다.
"그저 이런 것도 연구하고자 할 뿐 사실을 알려준 사람 이름까지 밝히려는 게 아닙니다."
노인이 잔을 붙잡더니 오아시스를 찾은 사막 횡단자처럼 단숨에 막걸리를 들이켰다. 나무꾼이 명태포를 찢어 한층 더 공손히 건넸다. 노인은 기세도 좋게 명태포를 뜯은 후 말했다.
"그건 사실 전투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오. 같은 편끼리 피를 흘린 싸움이라서..."
"오랑캐 격퇴라고 들었는데요?"
"사실이 아니오. 그건 검은 역사요."
- 노인이 마침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 사이사이 나무꾼은 노인에게 안주를 먹였고 술을 더 사 오기도 했다. 그래서 모든 진실을 알 수 있었다.
- 백곡벌 한켠 고지대 아래 묻힌 키 큰 해골의 주인은 박양곤이었다.
노인은 그 전투를 '박양곤의 화(禍)'라고 불렀다. 경북 섭주가 고향인 박양곤은 스무 살에 무과에 급제한 강인하고 무서운 인물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군인인 그는 두터운 전우애보다 불복 없는 명령체계를 중시했고, 자비보다 기강을 강조했다. 수많은 전장터를 누빈 그는 병력의 수에 상관없이 나아감에 물러섬이 없었고, 후퇴하는 아군은 가차 없이 목을 벨 정도로 무섭게 싸웠다. 그가 가는 곳마다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피가 강이 되어 흘렀다. 수많은 싸움에서 승전보를 올린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함길도 병마절제사를 지냈고 북방 오랑캐를 토벌해 영토를 개척하는 데도 이름을 날렸다. 박양곤이 온다고 하면 적들은 겁부터 집어먹어 도망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 아군 또한 그를 무서워했다. 무수한 참전 무모한 진격 명령을 받을 때마다 보검을 든 그가 뒤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여마검(勵魔劍)이란 이름의 그 검은 스치기만 해도 살점이 잘려나가고 칼에는 피가 묻지 않는 가공할 병기였다. 앞에는 적군이라는 죽음이, 뒤에는 박양곤이라는 더 무서운 죽음이 있었기에 군졸들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앞을 뚫어야만 했다. 숫자가 많아도 적들의 방어선이 매번 무너진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 전쟁이 없을 때에도 박양곤은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는 수시로 시찰을 다니며 복무를 점검했는데,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기보다는 징벌을 부과하기 위한 목적 쪽이 더 큰 것 같았다. 그는 사소한 군율 위반으로도 과도한 형벌을 내렸다. 고문에는 그가 직접 설계한 도구가 사용되었는데, 상반신과 하반신을 반대로 틀며 잡아끄는 의자나 생식기를 덮어서 지지는 인두 따위가 있었다. 고문을 가할 때 그는 늘 술을 마셨고 풍악을 울렸다고 하는데 마치 피를 봐야만 살 수 있고 피를 보기 위해서 사는 사람 같았다. 군졸들은 그가 무서워 차라리 전쟁이 일어나길 바랐다. 전쟁이 없을 때, '사적인 흥밋거리'를 찾는 그의 모습이 전시 때보다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 이 같은 잔인한 고문이 그가 이동하는 군영마다 잇따라 발생하자 조정은 박양곤과 연관된 투서를 받게 되었다. 덮어서 쉬쉬하기도 한두 번이지, 사람을 재미로 죽이는 그를 처벌해 달라는 투서가 끊이질 않았다.
왕과 집권세력의 대신들은 난감했다. 무섭고 이단적인 별종이긴 해도 박양곤은 싸움터에 나가면 지지 않는 용맹한 무장이었다. 반란이 일어나도 박양곤이 진압하러 온다는 소문만 내면 폭동의 불씨는 저절로 사그라들 정도였다. 권력 가진 자에게 '명령에 복종하고 확실하게 질서를 세우는' 박양곤은 필요악의 존재였다.
하지만 평소 그를 알던 무관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임금 앞에 나아가 탄핵에 앞장섰다. "싸움에서는 뒤에 숨고 진급에서는 앞장서는 정치군인들을 다 죽여야 한다"고 함부로 말하고 다니는 박양곤이 선배 무신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그들은 박양곤을 귀양 보내라는 상소를 올리고 왕실이 그를 감싸고도는데 이의를 제기했다.
- 결국 박양곤은 삭탈관직을 당하고 고향인 섭주로 낙향했다. 무수한 전쟁을 겪은 그가 무수한 흉터를 얼굴에 달고 왔을 때는 52세였다. 식구들부터 시작해 온 집안 하인들이 새로운 공포에 떨었다. 그들 역시 자신의 위치가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닌 잠재적 먹잇감이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광기 서린 눈빛을 보고 그가 여전히 피에 목말라하고 폭력에 굶주렸으며 부당한 처우에 원한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모두가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그 앞에서 조심했다. 고개를 숙이고 일에 몰두하는 척했다. 박양곤은 우울한 마음을 사냥으로 달랬는데 운 나쁘게 그에게 사로잡힌 산짐승은 말 못 할 정도로 잔혹하게 죽고 말았다. 죽어가는 생명을 보며 미소 짓는 박양곤에게 사람들은 질려 버렸다. 말수가 줄어든 그는 핏속의 욕구를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해 표정까지도 악독해졌다.
- 그가 낙향하자 군대의 기강이 해이해진 것처럼 전국 각처에는 오랑캐의 약탈이 빈번해졌다. 범죄가 들끓어 민심이 흉흉해지는가 하면, 사교가 부흥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유혹하는 사건도 늘었다. 박양곤의 눈에 이 모든 것은 질서가 붕괴된 절망이었으리라. 반어적으로, 그는 이 절망감 때문에 어떤 믿음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성향과 아주 잘 맞는, 피와 생명을 요구하는 어떤 사악한 종교였다.
- 어느 날 그는 홀연히 사라져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사람들은 달라진 그의 표정에 놀랐다. 득도한 사람의 미소가 얼굴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얀 옷 대신 검은 신과 검은 두루마기를 입었고 죽을 때까지 이 복식을 바꾸지 않았다.
- 쉬쉬하는 가운데 열띤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중 가장 유력한 소문은 그가 '붉은 미륵불의 대법회'에 참석했다가 왔다는 말이었다. 붉은 미륵불은 혼돈에 빠진 인간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만겁(萬劫, 지극히 오랜 시간)의 시공간을 뚫고 강림했다고 자처하는 존재로, 가는 곳마다 눈을 믿기 어려운 기적 ...
- "아까 저승사자들이라고 했잖소? 사자는 한 명이 아니란 말이오?"
"다섯 명이에요."
- 일주일이 지나도 대감은 그대로였다. 허예지고 뻣뻣해진 채 부패는 진행되지 않았다. 그 상태로 대감은 저승사자를 데려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음성이 차츰 무서운 기운을 띠게 되어 아무도 대감이 누워있는 방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 세상의 음성이 아닌, 얼음 같은 한기를 몰고 오는 기괴한 음성이었다. 듣기만 해도 귀가 떨어져 나갈 듯했고 팔등에 닭살이 돋았다. 모두가 말을 안 해도 대감이 어서 가주길 원했다. 마가 낀 집안 흉사는 외부에 새나가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매장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매장만 하면 대감도 비밀도 한꺼번에 묻힐 터였다. 후손들은 어서 빨리 그렇게 되길 바랐다. 남종들은 상여 맬 준비로 어깨를 두드렸고, 여종들은 곡비 노릇을 위해 눈물 흘리는 연습을 했다. 그래서 나무 하는 일이나 음식 하는 일 등은 바깥사람을 쓸 수밖에 없었다.
- "숨겨, 이 바보야! 저승사자들이 알아본단 말이다!"
승려는 무릎에 손을 올린 뒤 숨을 몰아쉬었다.
"그건 저승사자의 감투다. 죽은 사람을 유명계(幽冥界, 저승)로 인도하는 물건이야."
"그랬었구나! 그래서 조금 전에 저 대감 댁에서 감투로 빛이 들어온 거요?"
"무식한 나무꾼인 줄 알았더니 똑똑한 구석도 있구나. 어서 그 팔을 내리라니까!"
나무꾼은 승려의 고함에 팔을 내렸지만 감투를 안 뺏기려는 듯 꼭 끌어안았다. 버리려던 물건도 타인의 등장이면 애착의 물건으로 종종 바뀐다.
- "난 그냥 해골하고 쇠붙이만 보이는 줄 알았는데..."
"쇠붙이는 사자들이 저승 갈 노잣돈을 밝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다. 명심해라. 이제 너는 두 번 다시 그걸 쓰면 안 된다. 내가 대감댁으로 간 것도 니 감투의 빛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야. 내 눈에도 보이는데 사자들 눈에야 오죽할려구. 사바세계에 있어선 안 될 물건이니까 어서 그걸 나에게 넘겨라."
나무꾼은 실제로 갈등했다. 대감 댁에서 죽지 않던 시체가 그를 보자마자 사자가 왔다며 죽어나간 광경을 '감투 쓴 머리'로 느꼈으니까. 죽음이 그를 따라붙을 것 같았고 죽음이 그를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 "혹시 다섯 명의 갑옷 입은 이가 사자요?"
"너도 그걸 봤구나! 그렇다! 그들이 저승사자다! 그걸 갖고 있으면 사자들이 너를 해친다."
나무꾼은 감투를 갖고 있긴 싫었으나 남 주기는 아까웠다. 그러다가 잊고 있던 박양곤의 보검이 생각났다.
"이봐요 스님. 난 이걸로 사람 목숨을 장난친 적이 없소. 난 쇠붙이만 관심이 있단 말이오. 지금까지 땅을 파서 쇠붙이를 여럿 파냈지만 한 번도 위험한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소.”
"지금까지는 그랬겠지. 조금 전에 이 씨 부인네 대감이 죽고 그 혼백이 천상으로 솟았어. 그걸 잃어버린 다섯 저승사자는 이제 그게 어디 있는지 안다는 말이다. 네가 그걸 쓰면 그들에게 위치를 알려주는 거나 마찬가지다."
"스님 아버지란 분은 대체 누구요?"
"춘강 선생이라고 사후세계를 심도 있게 학문하신 분이야. 우리나라에서 아무도 안 해본 학문을 하셨지만 이단으로 몰렸지. 저세상의 물건으로 이 세상을 바꿔보려는 야심을 가진 분이셨어."
"언제 돌아가셨소?"
"그런 게 뭐 중요하나? 이미 오래 전이야.”
"내가 이걸 스님한테 주면 스님은 이걸 갖고 어쩌게?"
"저승사자에게 다시 돌려줘야 해. 그건 이 세상에 있으면 안 돼. 다시 돌려줘야 세상이 복잡해지지 않아."
- "그 오두막집에 술병을 본 적 있지?"
"다섯 명이 마시던 술병 말이오? 봤지요."
"불사(不死藥)의 풀로 빚은 술이야. 저승사자를 꾀어낼 수 있는 술이지. 사자들은 술이라면 환장을 하는데 아무 술이나 꺼내놓는다고 오질 않아. 불사약주를 준비해서 다시 한번 사자들을 불러들여야 해. 그 감투만 찾으면 그들은 만족하고 더 이상 분란을 일으키지 않아."
"이걸 건네면 나도 안전하다 그 말이우?"
"당연하지!"
승려가 히죽 웃었다. 나무꾼은 그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스님 아버님은 왜 죽었소?"
승려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 "오두막집에서 저승사자를 부르는 건 성공했는데 쫓아오는 자들의 습격을 받았지. 그분은 비용이 많이 드는 학문에 심취하신 만큼 빚이 많았다. 미처 다락방으로 올라갈 여지도 없이 산을 내려가 도망치다가 빚쟁이들한테 변을 당한 거야."
"그건 당신 얘기가 아니오?"
승려의 안색이 굳어졌다. 나무꾼이 승려의 얼굴에 눈을 바짝 들이댔다.
"내가 방금 뭘 발견한 줄 아슈?"
"뭘?"
"스님 오른쪽 눈에 너구리 멍처럼 허연 애꾸눈 자국이오."
승려가 흠칫 놀랐다. 나무꾼은 승려의 머리를 보았다.
"머리도 여기저기 파인 게 급하게 깎은 것 같은데. 아버지 좋아하네. 당신이 그 초상화의 주인공이잖아!"
- "스님이라면 불경을 외워보슈! 천수경 외워봐!"
"이놈이 보통 나무꾼이 아니구나! 고양이 새낀 줄 알았는데 호랑이 새끼야!”
"외워보라니까! 나도 아니까! 나무아미타불!"
- "이렇듯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다녀. 붉은 미륵불한테는 속았지만 염라대왕은 나를 속이지 않았어. 나는 그분 덕에 새로운 교훈을 얻었지. 한 사람의 단점으로만 생각해 왔던 어떤 성향도 잘 계발하고 가꾸기만 하면 장점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 말이야."
"그게 살인욕망이라도 말이지요?"
"어떤 인간도 병적인 성향을 고치거나 완화할 방법이 있어. 단지 그 방법을 모르거나 방법이 맞지 않으니까 세상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거야.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발전하면 이런 혼돈은 더할 거야."
"다섯 사자는 어떻게 됐어요?"
"모두 벌레로 환생했어. 일 안 하고 술이나 퍼마시는 그놈들은 저승사자의 자격이 없는 놈들이거든."
"날 왜 오늘까지 살게 했나요?"
"내가 어떻게 알아?"
"죽음을 관장하는 분이잖아요?"
"네가 죽고 사는 건 너한테 달렸어. 모든 사람이 다 그래. 난 죽은 이를 데려가는 역할을 할 뿐이야. 내가 안 오면 네 혼백이 떠나지 못할 뿐이라 그 말이지."
"그렇군요. 그것도 모르고 매일매일을 겁내면서 살아왔네요."
"죄지은 놈의 죄책감이지. 죄책감 없는 것들도 이 세상에 태반이니 그보다 나은 놈이다, 너는."
- 나무꾼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혼백이 육신에서 일어나 저승사자와 나란히 하늘을 날았다. 저승사자는 그가 박양곤이었을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어 동행을 지루하지 않게 했다.
- 이 이야기를 다 읽은 독자분은 어째서 '전설의 고향'을 비롯한 무수한 방송매체에서 저승사자가 검은 두루마기, 검은 신, 허연 얼굴의 스테레오 타입화된 모습을 보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도깨비 감투를 훔쳐 쓰다 나무꾼이 알게 된 박양곤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 <도깨비 감투와 X레이 눈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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