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해로
출판 : 북오션
출간 : 22.01.13
가볍게 식사를 하고 산책 삼아 도서관을 다녀오는 것이 휴일의 루틴인데-
하루하루가 다르게 더워지고 있다. 오늘은 나가기 직전에 샤워를 했는데도 돌아와서 다시 씻어야 할 정도였다.
벌써 여름인가. 설레면서도 두렵다.
<화승총을 가진 사나이>는 박해로 월드 중 <귀경잡록>, 즉 원린자 시리즈이자 일종의 좀비물이다. 박해로의 세계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첫째는 현대의 무속과 연결되는 섭주와 오래된 신들에 관한 세계이고 둘째는 <귀경잡록>을 기반으로 하는 박해로크래프트 적인 외계와 이계에 관한 세계다. 이 두 세계는 때때로 서로 교차하기도 하지만 현재까지의 발표작만으로 본다면 기본적으로는 분리되어 있다.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뱀 껍질 선비' 탁정암에 관한 이야기가 두 세계를 아우르는 고리가 되어주지 않을까 짐작만 할 뿐이다.
첫 번째 세계관의 인물들이 보다 반복적이고 강하게 연결된 '인연(因緣)'과 '지연(地緣)'의 얽힘을 보여준다면, 두 번째 세계관의 인물들은 <귀경잡록>이라는 공통된 매개체만을 공유할 뿐이다. 주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등장인물들 서로 간의 공통점이나 혈연 등의 연결은 강하지 않다.
이런 호흡의 차이가 박해로의 작품들을 읽어나가는 동안 들숨과 날숨처럼 강약을 조절해 주는데, 읽는 입장에서는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세계관에 깊게 매몰되면 제기되기 마련인 자가복제, 반복 노출에의 피로감 등의 부작용은 최소화하고 확장에 대한 여지도 열어둘 수 있다. 물론 취향에 따라 해당하는 작품만 읽을 수도 있다. 작가 후기만 읽었을 때는 여기까지 염두에 둔 큰 그림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건강과 안전을 고려한 선택이었던 듯하지만 중요한 건 결과니까.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 세계관을 더 선호하지만, <귀경잡록> 시리즈가 싫은 것은 아니다. 쉬어가고 싶을 때 읽기 좋다.
이제 대부분의 작품을 읽어버린 입장에서- 내가 밀린 리뷰를 다 쓰기 전에 신간이 나와주었으면 기대하게 된다.
모쪼록 26년에는 다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 주시기를. 화이팅.
- 현대의 사학자와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이 원린자는 오늘날의 외계인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 이들이야말로 밤하늘을 이부자리 삼아 3천 년을 잠들어 있는 육십오능음양군자의 근왕병(勤王兵)이며, 하늘 바깥에서 천하 대지로 끊임없이 침략을 꾀하는 이계 오랑캐들이다.
- 탁정암의 의도는 궁극적인 인류의 위기에 눈을 뜨게 하려는 우국의 발로였지만, 그의 진심과 상관없이 영악한 인간들은 이 책을 악용했다. 육십오능음양군자라는 지존 앞에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음을 깨우친 반항적인 백성은 이 책을 혁명반란의 기치로 삼았고, 탐욕에 눈먼 세력가들은 권력형 범죄를 숨기기 위해 보이지 않는 원린자에게 자신의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 멀쩡한 사람의 육체가 팟 하고 사라지는 사건은 그 임금 집권기에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전국에서 피해가 속출했지만 눈과 귀가 막힌 임금은 이 사실을 몰랐다. 실종인지 소멸인지 모를 사건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공포를 퍼트렸다. 그 가운데 특히 젊고 건강한 이들은 절망에 몸부림쳤다. 사라진 사람이 하나같이 '힘세고 체격 건장한 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신분도 남녀 구별도 없었다. 혼자 있을 때 당한 이도 많았지만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사라진 이도 허다했다. 곁에 있던 '힘세고 체격 건장한 젊은 사람'의 육체가 팟 하고 증발하는 기현상을 겪은 이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인간의 오관을 넘어선 현상에 관헌들은 개입을 해도 안 해도 난처했다.
- 허나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팔도의 사건을 비교 분석하는 작업이 한성부 포도청에서 이뤄졌다. 목격자와 관련자의 탐문도 이어졌다. 그들의 진술은 대체로 일관성이 있었는데, 분산된 수사력이 한 곳으로 집중되자 연쇄증발의 이면에 있던 공통점 두 가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 첫째, 육체가 증발하는 사람은 그 전날 똑같은 내용의 꿈을 꾼다. 집채만 한 빛의 덩어리가 말을 걸어오는 꿈이다. 대지를 격동시키는 음성의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내세의 성은을 입어 특별히 차출된 그대는 이 꿈을 통해 내리는 전음으로 이제 육십오능음양군자(六十五能陰陽君子)의 왕토에 발 디딜 수 있는 신행통부(神行通符, 출입증)를 얻게 되었노라. 내일이면 병아리를 가둔 껍질은 깨어지고 그대의 어깨에서는 영원을 나아가는 날개가 솟구치리라.]
- 둘째, 뇌성(雷聲), 즉 벼락 소리다.
꿈을 꾼 사람은 다음 날 불특정한 시각에 증발의 변을 당하는데, 육신이 사라질 때 먼 곳으로부터 벼락 소리가 들려온다. 마른 하늘이라고 예외는 없다. 귀를 찢는 요란한 뇌성과 함께 '있어왔던' 사람은 연기처럼 사라져 더 이상 '없게 되는' 것이다. 막을 방도가 없는 일이라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작별 인사조차 나눌 수 없다.
- 일부 백성들은 이 뇌성이 육십오능음양군자가 꿈 바깥에서 내는 음성이라고 믿었다. 선택된 사람을 데려갈 승선일성(乘船一聲)이자, 남은 사람을 배려한 상여 소리라는 게 그들의 해석이었다. 금단의 학문을 접한 자들이 진정한 창개천하(創開天下)의 장본인이라고 일컬어온 육십오능음양군자는 <귀경잡록(鬼境雜錄)>을 읽어야만 알 수 있는 신화 속의 존재이다. 허나 <귀경잡록>은 소유하면 의금부에 끌려가고, 읽는 것만으로도 엄중한 처벌을 받는 금서였다. 생각 깊은 식자는 꿈의 내용을 전면 부정하며 사특한 요술사가 나라를 어지럽히려 눈속임으로 사람들을 납치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적극 호응한 포도청은 요상한 가르침으로 교세를 확장하는 사교의 토벌에 총력을 집중했다. 하지만 사라진 육체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아 지향점부터 흔들린 수사에는 사실상 한계가 있었다.
- "내일이면 귀신에게 유석이를 잃고 말아요. 어떻게든 막아야해요!"
그녀는 마당에 거적을 깔고 유석을 앉혔다. 불려 온 무당이 그 앞에서 무섭도록 펄펄 뛰었다.
"육십오능음양군잔지 병신육갑음매군잔지 물러나라! 꿈으로 사람 괴롭히는 몽달귀야! 대장군이 될 귀한 유석이를 두고 천리만리 밖으로 물러나라!"
무당은 체력은 있어 보였으나 체격은 건장하지 않고 나이 든 사람이었다. 꿈도 꾸지 않았기에 증발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녀는 잘 알지도 못하는 육십오능음양군자를 잡신으로 취급한 우를 범했다. 가만히 앉아 있던 유석이 벌떡 일어나 무당의 허리춤을 잡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놀란 무녀가 칠성검과 부채를 떨어트렸다.
"너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신을 하찮게 보았다. 눈이 있어도 보는 법을 모르니 내가 도와주리라."
유석이 무녀를 끌어당기자 하늘 끝에서 콰쾅 하고 뇌성이 울렸다. 두 사람의 육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토록 밀착했으니 가까운 데서 탄환이 날아왔다면 둘을 관통하기란 어렵지 않을 터였다. 이성한은 몸을 떨었고 부인은 엎드려 통곡했다.
- "헛소문에 불과해. 그 책은 거짓을 나열한 사악한 서책이야. 패관소설 쓰는 탁 아무개가 원린자란 개념을 창안해 퍼뜨린 가짜 도참비서(圖讖秘書, 미래의 모습을 예언과 그림으로 담은 비밀스러운 책)란 말일세. 우린 현실만 보는 사람들이고."
"하지만 뇌성과 함께 사라진 사람을 직접 본 이가 하나둘이 아닙니다."
"약장사들이 눈속임으로 그런 기예를 펼치는 걸 본 적이 있네."
"기록상으로 400명 가까운 증발이 있었고 실제로는 수천 명일지도 모르는데 단 한 건도 꼬리가 안 밟히는 눈속임도 있습니까? 게다가 모두 증발 전날 같은 꿈을 꾸었다지 않습니까?"
서 종사관이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세 포교도 함께 잔을 비웠다.
- 서 종사관이 다시 물었다.
"총탄의 흔적은 있었나?"
이번에는 평양 사건을 맡은 최영로 포교가 답했다.
"이계의 광채(光彩)로 사람을 사라지게 하는 총일지도 모릅니다. 옛날에 경상도 섭주의 외눈고개에선 비천자(飛天者, <귀경잡록> <외눈고개 비화>에 나오는 날개 달린 원린자)들이 격섬채동포(毄閃彩動砲)란 무기로 고을 백성들을 사라지게 했습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그건 휴대용 화승총이 아니라 육중한 대포일세."
'종사관도 <귀경잡록>을 알고, 또 믿으면서 내색하지 않았구나!'
세 포교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 이번에는 박인좌 포교가 나섰다.
"최근 압수한 <귀경잡록> 사본에는 하나같이 33장이 찢겨 있었습니다. 아마 33장에 지금 사건과 관련된 내용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빛으로 사람을 사라지게 하는 무기 말이지요."
"33장이 언제부터 사라졌단 말인가?"
"육신증발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럼 증발 사건 전에 압수한 <귀경잡록>을 찾아보면 33장에 뭐가 적혀 있는지 알 것 아닌가?"
"모두 타버렸습니다."
- "그 인간성을 알 만할 것입니다. 괴무기는 바로 이 이승현 밑에서 주먹꾼 노릇을 해왔는데 말씀드렸다시피 옛날 중화의 몽환약이 밀거래됐을 때 포청의 추격을 받자 이승현 대신 옥살이까지 한 놈입니다. 그는 부두목 독발이에게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승현을 죽여야만 한다'고 누누이 말했답니다. 최근 들어 괴무기가 이승현을 협박했는데 그 내용이 좀 유별납니다."
"어떤 협박을 했지?"
"진유조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데 그와 맞서려면 비천자의 창(槍)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외눈고개에 들어갈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했습니다.”
"홍갑대장군(紅甲大將軍) 진유조 말인가? 그자는 가공의 인물 아닌가?"
"어떤 이에겐 실재하는 인물인지도 모르지요."
"그가 왜 괴무기를 죽이려고 해?"
"진유조가 사람이던 시절 산적이었던 괴무기가 한 고을을 불태워버린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진유조의 여동생 일가가 죽었답니다. 진유조는 인간과 원린자의 능력을 고루 갖춘 양웅동체(兩雄同體)가 되어서도 과거의 원한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외눈고개가 정말로 있을까?"
"그거야 우리도 모르는 일이지요. 가본 적이 없으니까요."
- "잘했네. 포도청에도 분명 첩자가 있으니 전부 믿으면 안 되네."
'대군'이란 임금 자리를 탐내 역모를 꾀하다가 진도에 유배가 있는 임금의 동생을 말한다. 형제의 정으로 죽이지 못하겠다는 주상전하의 말에 대군은 사약을 면했지만, 포도청은 늘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야심가인 대군이 여전히 왕좌를 노리기 때문이었다.
작년 11월에 진도 유배지에 마풍륜, 괴무기, 윤설원이 찾아들었다. 멀리서 감시하던 포교는 그들이 각기 서찰 한 통씩을 받아들고 나간 것을 알아냈다. 포도청에서는 음모의 냄새를 감지했지만 서찰을 압수하지는 않았다. 음모를 진행하는 세력이 이 사실을 안다면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잠수할 것이기 때문이다. 포도대장은 서찰의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들을 털끝 하나까지 감시하라고 명했다. 서 종사관은 대군과 서찰 얘기는 숨긴 채 석포교, 최 포교, 박 포교를 시켜 그들을 미행케 했다. 세 포교는 명을 수행해 마풍륜, 괴무기, 윤설원을 감시했는데 보란 듯이 요주의 인물인 이지산, 이승현, 이성한과 연결된 소식을 건진 것이다.
- 포도대장이 물었다.
"그놈들한테서 역모의 낌새는 없었나?"
"이지산은 아들이, 이승현은 본인이, 이성한은 아내가 증발했습니다. 팔도에 넘치는 증발 사건이 본인들한테도 닥쳤으니 지금 당장 대군을 옹립시키려는 시도 따위는 없을 것이옵니다."
포도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네. 지금은 이 연쇄 증발 사건이 가장 큰 난제지. 이런 기상천외한 사건이 우리나라에 터질 줄 누가 알았겠나? 대군의 역모 시도는 일단 미뤄지거나 좌절된 것 같아 다행이군. 그러니 이젠 병조판서의 실종 해결에 전력해야 하네. 여기에 우리 포도청의 명운이 걸려 있네. 사람을 사라지게 하는 총을 가진 놈이 있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잡아보세.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잡아야 할 것이네. 더 이상 조정 놈들한테 시달리다간 우리가 먼저 쓰러질 걸세."
- 서 종사관은 인사를 하고 포도청을 나왔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도 걱정은 덜어지지 않았다. 여러 사건이 겹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해결된 것은 실상 하나도 없었다.
그는 진도 유배지의 대군을 생각했다. 지난번 '왕자의 난'에 실패한 그가 야심을 포기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조선을 집어삼킨 증발 사건이 잠시 음모를 멈추게 한 것뿐이리라. 냉혹하고 야심 있는 그가 언제든 재기풍운해 무능한 현 임금을 폐위시키고 왕좌를 탈환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그는 백성의 지지를 얻고 있고 신망도 두터운 편이었다. 전하께서는 형제애를 물리치고 사약을 내리셨어야 마땅했다. 약하게 대처했기에 아랫사람들이 감당할 후환은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최종적으로 피해를 보는 이는 결국 백성들이다.
- 마풍륜과 괴무기와 윤설원을 보낸 이씨 삼인방은 반골기질이 뚜렷한 이들이다. 매우 위험한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상의 군대가 아닌, 원린자의 힘을 끌어들일 술법을 터득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남원 사또 이성한은 군사기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남방의 용장 출신이다. 그는 늘 처지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지산이 밀승신성교를 통한 이계군사를 끌어들이고 이승현의 막대한 자금이 그들을 뒷받침한다면, 재래식 무기밖에 없는 조선군은 이들을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역모는 충분히 성공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행히 이들 역시 증발의 변을 당했기에 당장은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길게 보면 두 다리 뻗을 일은 아니다. 이 연쇄 증발의 이면에 있는 육십오능음양군자는 그 어떤 이계 군대보다 무서운 최악의 공포였으니까. 적대적인 두 나라 사이를 역병이 파고들면 전쟁도 중단하고 역병부터 퇴치하듯이 지금 상황이 그랬다.
- 서 종사관은 장롱 속에 넣어둔 사건 기록지도 꺼냈다. 포도청에서도 해결 못한 팔도의 초현실적인 사건만 따로 모아둔 기록이었다. 그는 약 세 시간에 걸쳐 문서를 읽었다. 사특하고 어지러운 내용에 머리에서는 열이 났고 눈알은 빠질 듯했으며 입안은 바짝 말랐다. 마침내 기록을 덮고 눈을 비볐을 때 그의 뇌리에는 육십오능음양군자, 신비의 검은 돌, 웃는 낯의 남자, 빗살무늬 태양과 동심원의 달, 움직이는 흔들바위, 박고헌의 외눈고개 대첩, 아흔아홉 개 눈을 가진 붉은 승려, 철면선비, 당랑자의 날틀, 귀갑자의 사체부활법, 일신십두기문둔갑자의 수십 개머리, 흡반원린자의 기상천외 변신술, 하층별인의 초신파합체 등... 모독적이고 체제전복적인 상징들만이 남았다.
그는 달이 높이 뜬 하늘을 바라보며 육십오능음양군자에 대해 생각했다.
- 하늘과 땅이 아직 나뉘기 전의 상태를 혼돈(混沌)이라고 부른다. 태초에 천지개벽의 사업이 흥할 때 처음 나타난 인간의 조상을 중화(中華)에서는 반고씨(盤古氏)라 불렸다. 이 중화사상은 널리 영향을 끼쳐 고려 시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반고씨 ...
- "허나 인간끼리 싸우게 하려고 인간을 창조했다면 이는 어불성설일 뿐입니다."
"자네는 장기판 화투판이 왜 생겨났다고 보나?"
"인간이 만든 즐거움의 한 가지지요. 인간의 창조적인 슬기를 보여주는 아주 작은 예입니다."
"그렇다면 장기판의 말과 화투판의 화투장에게는 우리 인간이야말로 신이 아닐까?"
"육십오능음양군자에게는 우리 역시 장기말 화투장이란 말입니까?"
"그렇지. 신은 사물을 자신과 닮게 만들잖아?"
"장기나 화투 같은 대리 싸움 덕택에 인간이 실생활에서 피를 흘리는 일은 줄었습니다."
"인간이 본성을 드러내 칼을 뽑아 죽이기도 하는 곳이 도박판이란 사실을 유념하게."
"모든 사물은 신과 닮게 만들어졌다..."
"<귀경잡록>에 의하면 그렇다네. 인간이 살인, 투기, 절도, 강도, 불효 등 모든 패악을 저지르는 건 모두 육십오능음양군자와 닮게 만들어져서네. 다시 한번 강조하네만 신은 모든 사물을 자기를 닮게 만들었으니까."
- [육십오능음양군자의 꿈을 꿔 하루를 못 넘길 사람을 가족으로 둔 이는 종로의 '계룡산 정진인(鄭眞人)'을 찾으시오.]
이런 방이 저잣거리 곳곳에 붙자 한양 백성들은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돈벌이가 궁해도 그렇지 겁도 없이 저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는 돌팔이 사기꾼이 있구나. 금서에 나오는 저 긴 이름은 적국(敵國)의 왕을 만세 부르는 것과 같아서 자칫 잘못하다간 잡혀갈 수도 있는데. 그러나 아무리 찢어내도 방은 꾸준히 새롭게 나붙었다.
- 7월 초여드레.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려는 낮이었다.
종로 육의전의 선전(비단상점) 골목을 돌아서 걷다 보면 나오는 버려진 우물 앞에 울상을 한 늙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힘세 보이고 체격이 큰 젊은이를 하나 데리고 있었는데 그의 표정은 공허했다. 아까부터 이들을 관찰해 오던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가 골목 그늘에서 잽싸게 튀어나왔다.
"여긴 임자 있는 땅인데 당신들 뭘 하는 게요?"
"정진인을 찾으러 왔소."
"잘못 찾아왔수다. 그런 사람 없소."
"내 아들인데 이 아이가 오늘 낮에 꿈을 꿨소. 육십오능..."
늙은 남자의 어투가 절박해졌다. 우락부락한 남자가 불을 토하듯 소리쳤다.
"어허! 그놈의 입 좀 조심하잖구! 따라 오슈!"
- 그들은 한참을 걸어 마당에 감나무가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정진인은 상투를 틀지 않은 채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중년의 점쟁이였다. 호랑이 같은 눈에 총기인지 사기인지 구별할 수 없는 기운이 흘렀다. 그는 꿈의 내용은 대충 묻고 복채에 관해 길게 얘기했다. 믿음이 안 갔지만 늙은 아비는 사대독자인 이아이만 살릴 수 있다면 아깝지 않다며 스무 냥을 내놓았다.
"아들을 안 사라지게 하려면 제를 올려야 하오. 내일 날이 밝기 직전에 일영대계(日映臺契啓, 종로구 서린동의 마을)에 있는 버려진 절로 오시오."
- "그 총은 한 번 맞기만 하면 지정한 장소로 육신이 옮겨가는 경소전이장(境所轉移杖)이란 막대기로 만든 것입니다."
"공간을 이동하는 막대기? 그런 뜻인가?"
"맞습니다."
"너는 그걸 어떻게 아느냐?"
"그 총은 납탄을 쓰는 것이 아니라 빛의 탄환을 씁니다. 경소전이장의 막대기에서 나온 빛이 육십오능음양군자의 신비력을 풀어 명중당한 사람을 다른 장소에 옮겨버리는 겁니다. 화승총 가진 사나이가 저를 쏘았을 때 저는 종사관님 덕분에 빛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그자의 지식이 일부 저에게로 '경소전이'된 것입니다. 물론 전부는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일부일 뿐입니다."
- "그자의 속셈은 시체의 대군으로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는 것이냐?"
"그럴 것입니다."
"잡을 방법은 없겠느냐?"
"그자가 쏴서 실패한 사람은 제가 처음입니다. 제 발로 이 몸을 찾아올 것입니다."
"너의 목숨은 내가 책임지고 지켜주마. 전에도 그랬듯이."
서 종사관은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 다음 날, 한양에서 쉬지 않고 행군해 막 도착한 포도청 군사는 섭주에서 가려 뽑은 속오군 부대와 합류했다. 섭주 현령은 그 사이 한 명의 물괴가 더 나와서 모두 네 명의 물괴를 처치했다고 한다. 서 종사관이 어디 있냐고 물으니 불에 태웠다고 했다. 태워야만 죽더라는 것이었다. 그 물괴는 무당이었는데 시험장에 출현한 최초의 물괴를 아는 듯 그를 태운 재 곁에 붙어 있으려 했다고 한다. 체격이 작고 움직임도 원활해 사로잡으려 했지만 계속 덤벼서 죽일 수밖에 없었다 한다.
'그 여자가 이유석이 잡아당긴 남원의 무당이로군.'
- 병조판서 심영주였다. 미스터리한 과거의 실종과 한층 미스터리한 현재의 실존은 모든 전말을 알려 주었다. 영서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자야말로 모든 증발 사건의 화근이었다. 스스로 증발한 것처럼 꾸민 뒤 이계 별천지의 사악한 세력과 결탁해 나라를 뒤엎을 역모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무능한 임금을 폐위시키고 귀양 간 대군을 왕으로 세우면, 그는 새 역사의 일등공신이 되어 부와 권력을 한꺼번에 누린다. 그다음엔 광기 서린 금단의 학문을 합법적인 필수 학문으로 널리 보급시켜 스스로 옹립시킨 왕마저 폐한 뒤 궁극적인 암흑의 천제(天帝)가 되는 것, 그것이 그의 야망이었다.
- 그런 그의 곁에는 채찍처럼 생긴 등채를 휘두르는 물괴가 있었다. 머리에 솟은 뿔은 사슴을 연상케 했지만 등에 붙은 원판과 녹색의 피부는 오히려 거북이와 닮았다. 서 종사관이 외쳤다.
"그래! 이 총은 공간이동의 역할만 할 뿐이다! 산 사람을 시체부대로 만든 건 바로 저놈이야!"
물괴가 등채를 휘두르고 이계의 언어로 주문을 외울 때마다 불가사리 모양의 빛이 검은 하늘에서 춤을 추었다. 땅에 누워 죽은 자는 빛이 절정에 달할 때 벌떡 일어나 잠에서 깬 어리둥절함도 없이 어가를 공격하려 전력질주해 갔다.
"저놈의 이름은 귀갑자야! 죽은 이를 살려내 용병으로 쓴다 ... "
- 심영주는 칼을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말의 가슴에 창이 박히자 땅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바로 그때 지엄한 음성이 군사들 사이를 갈랐다.
"놈을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라! 배후를 알아야겠다!"
군졸들이 허리 굽혀 길을 만들었다. 주상전하께서 직접 칼을 쥐고 걸어오고 있었다. 익선관이 날아간 머리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곤룡포도 찢어졌다. 서 종사관은 총을 놓고 급히 머리가 땅에 닿도록 엎드렸다. 임금이 병조판서를 향해 소리쳤다.
"내, 아들을 얻은 기쁨에 잠시 귀가 어두워 쥐새끼들이 기어가는 소리를 듣지 못했구나."
"무능한 주상이여! 무엇이 왕도라고 생각하는가?"
"의금부로 끌고 가자! 내가 직접 놈을 문초하리라!"
묶인 병조판서는 분노의 눈길을 임금에게 박은 채 끌려갔다.
- 임금은 서 종사관에게로 걸어왔다.
"이 충신은 누구이며 그가 지닌 희대의 병기는 무엇이더냐? 이 많은 물괴들을 단 한 번에 쓰러트리다니."
"신은 좌포청 종사관 서만주이오며, 이 무기는 사람을 사라지게 하는 화승총이옵니다. 이미 많은 변란을 겪은 총임에도 음모자를 찾지 못해 옥체에 칼이 겨누어진 불충을 초래하였나이다."
임금의 눈에 잔혹한 빛이 돌았다. 전쟁을 갓 겪은 그는 광기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미 많은 변란을 겪었다고? 그래, 너희들은 알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왕인 나는 이런 무기에 대해 전혀 몰랐단 말이더냐? 너희가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더냐?"
"전하! 신들의 불충을 용서하소서! 이 무기는 금서 <귀경잡록>에 언급된 사악한 원린자의 병기입니다. 물증이 없어 알려드림이 늦었을 뿐이옵니다.”
"원린자라... 나도 그 말을 들어본 적은 있지..."
임금이 뒤편으로 슬쩍 눈짓했다. 서 종사관은 머리에 몽둥이를 맞고 기절했다.
- 그는 옥에 갇혔다.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제 임금은 아무도 믿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충신'이라고 잠시 불렸던 그 순간만 말 그대로 충신이었을 뿐, 이제 서만주는 역적이 되어 있었다. 임금을 구해낸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아랫것 주제에 눈을 믿지 못할 가공할 무기를 숨겨 왔다는 사실, 그것만이 중요했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했다. 심문관들이 들어와 그를 취조했다.
- "저놈은 그냥 죽일 수 없소!"
"그렇다면 눈을 노릴 테니 노인장은 도망치시오!"
전평경이 무사의 눈을 겨냥했다. 그 순간 왜나라 무사가 검을 거두고 전평경을 향해 무슨 말을 지껄여댔다. 일본 말이라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협박이 아니라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 같았다. 전평경이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노인이 석장을 뻗쳤다.
"활을 겨누시오! 도와주리다!"
노인의 석장이 활에 닿자 전평경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기분에 싸였다. 머릿속에서 무한의 어둠과 검은색 일색의 기이한 절간, 눈코입이 붙은 가마, 그 안에 타고 있는 장막 너머의 여자, 살아 있는 소를 제물로 바치는 고대의 제천의식, 거대한 알과 날개 달린 뱀 같은 심상이 펼쳐졌다. 석장이 닿은 활에서 일곱 가지 빛이 흘렀다. 전평경이 시위를 놓자 화살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힘을 싣고 왜나라 무사를 향해 날아갔다.
무사의 이마에 화살이 정통으로 명중했다. 무사는 쓰러지지 않았다. 팟 하고 육신이 사라졌을 뿐이다. 전평경은 자신이 본 것이 믿기지 않아 눈을 비볐으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더 이상 무사는 그곳에 없었다.
- 조선시대 어느 왕 때, '토린결(討麟結)'이라는 모임이 있었다. 발목에 편지를 묶은 비둘기가 도착하면 각지에 흩어져 있던 토린결의 동맹인들은 평택의 어느 서당에서 은밀한 만남을 가졌다. 남자 15명으로 구성된 그들은 양반 사대부라는 것만 알 뿐,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었고 알려고 들지도 않았다. 동맹인의 신원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것, 본명 대신 가명을 사용할 것, 토론에 임할 때는 탈로 얼굴을 가릴 것, 사적인 이야기는 배제할 것, 포도청에 잡혀가도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것 등이 이 모임의 철칙이었다.
- 이들은 도적집단이나 혁명분자들보다 더 위험한 회견을 하고 있었다. 토론 연구의 대상이 나라에서 법으로 금하는 불온서적이기 때문이다. 뱀의 피부를 갖고 있다는 선비 기답각자(奇踏覺者) 탁정암이 남긴 <귀경잡록>이 바로 그것이다.
- 토린결은 이승과 이계(異界)의 경계를 허무는 비결이 숨어 있는 <귀경잡록>에 주석을 달고 해독에 힘을 기울여 상식적인 세상이 불허하는 지식을 추구했다. 연구에 정통한 자는 티끌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고 찰나에서도 영원의 감각을 느꼈다. 그러나 일부 동맹인은 이계세상의 지혜보다는 불로장생 비법이나 인간의 오감을 넘는 쾌락에 집착해 '순수 학구파'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 순수 학구파 가운데 박순탁(당연히 가짜 이름일 것이다)이란 자가 유독 총명했다. 언제나 말뚝이탈을 쓰고 나타나는 그는 확고부동한 언변과 거침없는 학설로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상대를 압도하는 지적 소양 때문에 적도 많이 두게 되었다. 최근의 모임에서 박순탁은 신비학의 비전(秘傳)에 짧은 생을 바칠 것을 충고하고 인간의 분수에 어긋나는 욕망을 경고하다가 격분한 선비 하나와 몸싸움이 붙어 버렸다.
먼저 시비를 건 이는 박순탁이었다.
"거기 하회탈을 쓰고 계신 안경수 선생(역시 가명일 것이다)! 앞으로 선생은 모임에서 빠져 주시오! 선생의 검은 마음은 우주합일의 비밀이 아니라 환갑 나이에도 어린 처녀 열 명을 상대할 방중술 쪽으로만 기울고 있소!"
- 이 세상에 완벽한 게 어디 있겠냐마는 그중에서 가장 완벽하지 않은 것 중 하나가 인간의 기억이다. 지금 이웅수의 경우가 그랬다.
탈이 벗겨졌을 당시 그는 박순탁의 얼굴을 보았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의 대면에서 기억나는 건 잘생긴 얼굴이라는 전체적 윤곽이지, 얼굴에 점이 있거나 짝눈이거나 여덟 팔자 눈썹이거나 하는 자잘한 사항은 아니다. 그의 앞에 나타난 암행어사도 잘생긴 얼굴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박순탁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다.
- 사람의 얼굴이란 제각기 다르면서도 조금씩 닮았다. 어사는 박순탁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이웅수의 주관은 이자가 틀림없는 박순탁이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어사의 잘생긴 얼굴은 말뚝이탈이 벗겨졌을 때 보았던 그 얼굴과 너무나도 똑같았다.
박순탁은 토린결에서 가장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한 자였다. 가장 말이 많았고 표현도 유창한 달변가였다. 그러나 탈박에 가로막힌 목소리와 귓가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구분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놈이 그놈인 듯한데 달리 보면 그놈이 그놈이 아닌 것 같다.
- "지체 높으신 이응방 대감께 잘못 보이면 내 목이 온전하겠소?"
"흠..."
이응수가 뒷짐을 졌다. 비가 오려는 듯 하늘이 우르릉거렸다. 윤상일이 이응수의 팔을 붙잡았다.
"지금 당장 갖고 있는 약이 열여덟 환이오. 원래는 스무 환이었지요. 어제 이야기가 통했으면 전부를 선물로 드렸을 텐데, 칼까지 뽑아 그 난리를 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두 환을 같이 나눠먹었던 게요. 자, 이 열여덟 환을 먼저 드리겠소. 나로서는 더 이상 방법이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순간에도 사또가 15년 전에 옥에 처넣은 마당쇠는 이제 낙안거사의 이름으로 복수를 꾸미고 있어요. 그자는 나 혼자선 절대로 당해낼 수 없는 자요. 창칼에도 죽지 않는 시신들만이 안전하게 그를 처치할 수 있어요. 괜히 호기 부리시다가 최후를 맞이하든지 아니면 나의 제안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시든지 양자택일하세요."
하늘이 또다시 우르릉거렸다. 이응수는 갈등했다. 체포된 토린결 놈이 낙안거사이고 그놈이 불어서 어사가 나를 잡으러 온건 아닐까? 아냐, 어제 그 약을 같이 먹었잖아.
정말 그 신비한 약이 30근이나 있긴 한 건가?
이래도 의심, 저래도 의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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