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초엽 / 천선란 / 김혜윤 / 청예 / 조서월
출판 : 허블
출간 : 25.06.18
'유유자적한데 궁핍하지 않은 은자가 되고 싶다.'
현재 나의 희망사항이다.
딱히 뭔가를 하고 싶다거나 세상에 기여하고 싶다거나 성취하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
이것이 최종 목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 쉬어가야 할 때라는 생각은 든다.
... 쉬고 싶다, 쉬어야겠다, 슬럼프인 것 같다...
비슷한 내용을 표현만 바꿔가며 몇 년간 반복 중이다.
완전한 은둔기, 휴식기를 가져야 치유될 것 같은데 먹고사니즘 때문에 일을 완전히 쉬지도 못하고.
은퇴를 준비하고 싶어 하는 나와, 조금 더 안정적으로 다지고 싶은 나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나와, 그래도 뭔가 도전해 보고 싶은 나.
그리고 조각나고 토막난 나의 잔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
<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를 읽을 즈음의 나는 이런 상태였다.
(지금이라고 딱히 다르진 않다)
이 책은 허블 출판사에서 주최하는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자들이 모여 엮어낸 앤솔러지다.
이제는 자신의 이름으로 더 유명한 작가도 있고, 아직은 단독 작품을 기다려봐야 할 작가도 있다.
이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담아낸 책이다.
김초엽, <비구름을 따라서>는 작가 특유의 담담함으로 그려낸 몽글몽글함이다. 이 세계 너머의 또 다른 세계가 있다면,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면, 가끔 설명하기 어려운 많은 것들이 설명될 수 있다면. 소속감이 흐릿해 고민하는 이들에게 다정한 위로를 건네는 듯한 소설.
천선란, <우리를 아십니까>는 세간의 편견어린 시선에 지친 두 연인이 '시선'이 사라진 세계에서 만나는 '내면화된 시선'에 관한 이야기...라고 나는 읽었다. 사랑하는 연인이지만, '너'는 '내가 보는 너'일 수밖에 없어서. 그런 점에서 세상에는 언제나 '나' 밖에 없어서. 그럼에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서.
김혜윤, <오름의 말들>. 과학문학상 수상작이었던 <블랙박스와의 인터뷰> 때도 느꼈지만, 사회적 약자와 소외-소통에 관심이 많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편집자와 작가를 겸하기가 쉽지 않다고 들었는데, 가장 바라는 방향으로 자신의 글을 이어가시길 응원한다.
청예, <아모 에르고 숨 Amo Ergo Sum>.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 결말을 예상했음에도 전혀 흐려지지 않는 떨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나는 이런 작품을 정말 좋아한다. 속이 살짝 간지러우면서 꼬이는 것 같은, 비극적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 그렇다고 해피엔딩이 아닌 건 아니지만 -내게는- 모두가 해피는 아닌 것도 같은, 여운이 남는 이야기들. 발표작들을 살펴보니 항상 찾아 읽고 싶다고 저장해두기만 했더라... 올해가 가기 전에 '작가 정해 읽기'로 읽고 싶은 작가.
조서월, <I'm Not a Robot>은 작품 전체에 감도는 서부 황야의 이미지가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노년층의 소외와 디지털 문맹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헤밍웨이가 떠오르는 분위기와 황량한 디스토피아 배경으로 '연성'해냈다. 프랭크에게 랜슬롯이 있어서 다행이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이자 파괴자.
- 초대장.
누군가의 악질적인 장난이라고 보민은 생각했다. 초대장은 아파트 현관문 앞에 보란 듯이 놓여 있었고, 추도식 초대장이라기에는 다소 밝은 색의 봉투에 담겨 있었다. 최이연의 추도식에 참석해 주세요. 날짜는 일주일 뒤. 보낸 사람은 최이연이었다.
죽은 룸메이트가 보낸 그 자신의 추도식 초대장.
- 보민은 이따위 장난을 친 사람을 찾아내야겠다고 중얼거리며 초대장을 바닥에 던져버렸지만, 다음 날 그 초대장에 대해서만 생각하다 하루 업무를 망쳤다. 오후에 중요한 미팅이 있었는데 가까스로 준비된 설명을 마쳤으나 평소 친하던 동기가 오늘 무슨 일 있냐며 어깨를 두드리고 지나갔다. 그 초대장은 대체 뭘까? 정말 최이연의 추도식이 열리는 걸까? 하지만 누가 어떻게? 보낸 사람을 최이연의 이름으로 쓸 필요는 없지 않나? 보민과 이연 사이에는 공통 지인이 거의 없었다. 돌이켜 보면 딱 한 군데, 소모임 사람들 정도가 이연을 알 법도 했지만, 딱히 보민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들이 왜 그런 못된 장난을 친단 말인가?
- 환장할 노릇인 건, 또 다른 초대장들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퇴근했더니 식탁 위에 초대장이 있었다. 쓰레기통 뚜껑 위에도 초대장이 있었다. 침대 베개 밑, 옷장 안, 싱크대 옆에 또 다른 초대장이 있었다. 싱크대 옆에서 발견된 건 물에 젖어 글씨가 잔뜩 번져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들어가 보지 않았던, 예전에 최이연이 썼던 방에도 있었다. 보민은 그 문을 벌컥 열었다가 이런 미친, 하고 욕을 내뱉었다. 바닥에 잔뜩 널브러진, 대충 봐도 스무 장은 될 것 같은 봉투들. 겉면에 적힌 보낸 사람은 전부 최이연이었다.
- "이게 무슨... 귀신이라도 있나?"
귀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보민은 중얼거렸다. 더 어이없게도 초대장에 적힌 추도식의 날짜는 모두 달랐다. 제일 먼저 발견한 초대장의 날짜는 일주일 뒤, 그러니까 4월 30일이었다. 책상 위와 베개 밑에 있던 것은 4월 29일이었다. 어떤 것은 4월 28일이었다. 심지어 4월 31일로 적힌 초대장도 있었다. 4월에는 31일이 없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어떤 초대장은 겉면의 이름이 최'아'연으로 되어 있었다. 보민은 자신이 약을 제대로 먹었는지, 혹시 살짝 돌아서 일주일 치를 한 번에 먹은 건 아닌지 되짚어 보다가, 흩어진 초대장들을 쓸어 모았다.
- "하지만 막상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 때 저는 담담했지요. 이미 그 일들을 보고 온 것처럼요. 그리고 저는 비구름 님이 그날 한 말을 계속해서 생각했습니다.
[이 토큰들은 세계의 반투막을 건너온 거예요. 다른 세계에서 왔죠. 우리가 노바 파우치를 통해서 하는 일이 바로 그거잖아요? 작은 물건에서 그 세계 전체를 추론하는 일이요. 개발자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거 아닌가요?]
프로토타입 개발 초기에, 노바 파우치가 크게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꿈에 부풀었을 때 저는 확장판에 넣을 속성들을 구상했습니다. 작업 노트에 빼곡하게 속성들을 기록했지요. 바로 그 구상의 일부가 실제로 손에 잡히고 만져지는 사물이 되어 나타났던 겁니다. 그러나 맹세컨대 저는 한 번도 그 작업 노트를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토큰들은 어디서 온 걸까요?"
- "한동안은 그 토큰들이 미래에서 왔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비구름 님은 저에게 노바 파우치가 바로 '현실'이라고 여러 번 단서를 준 셈이었지만, 정작 노바 파우치를 개발한 저는 그것이 현실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거든요. 다른 세계가 정말로 있다니, 그걸 믿기보다는 차라리 토큰이 미래에서 왔다는 게 더 납득하기 쉬웠지요."
- "하지만 막상 시간이 흘러 정말로 이 세계에서 노바 파우치의 확장판을 출판하기로 했을 때, 저는 그 토큰들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일종의 실험이었던 겁니다. 인과관계가 뒤틀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려고 한 것이지요. 그리고 확장판이 나오고 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문제도 없었어요.
그 토큰들은 정말 다른 세계에서 왔던 겁니다. 어딘가, 노바 파우치의 확장판이 먼저 나왔던 다른 세계에서요.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 이야기였지만, 토큰들의 속성 하나하나까지 기억하는 저로서는 믿을 수밖에 없었지요."
- "노바 파우치의 게임 시스템은 정말로 다른 세계에서 온 물건을 통해 그 물건이 담고 있는 세계를 추론하는 것이니까요. 그 마지막 만남에서, 비구름 님은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물건들을 더 '잘' 발견할 수 있었던 건 노바 파우치를 플레이했기 때문이라고 했지요.
그럼에도 저는 비구름 님이 저를 만나러 오기까지, 긴 시간 망설였을 마음을 생각합니다. 오래전, 물건들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상상했던 어린 시절의 저는 무척 외로웠습니다. 세상에 나온 노바 파우치의 콘셉트도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받았지요. 어떤 낯선 생각은 품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물건들은 정말로 세계의 반투막을 건너온다는 발견을 했던 비구름 님 역시 외로웠던 게 아닐까요. 저에게 이 토큰들을 직접 건네기까지 아주 큰 호의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로 후회스럽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작은 물건들이 다른 세계를 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유년기의 저를 조금만 더 믿어주었더라면. 그랬다면 비구름 님에게는 이 세상의 아주 낯설고도 중요한 진실을 공유할 한 사람이 더 있었을 텐데요. 추도식 초대장을 받아 든 순간 저는 긴 탄식을 내뱉었고, 그 후회가 저를 이곳으로 오게 했습니다."
- "건너온 거죠. 봐요. 우리가 가진 초대장, 날짜와 시간이 비슷하지만 다 달랐잖아요. 이곳 세계와 막을 사이에 둔 무수히 많은 세계에서, 이연 언니가 초대장을 썼을 거예요. 자신이 죽고 떠난 이 세계의 우리를 초대하려고요. 그러니까 언니는... 여기로 우리를 꼭 불러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던 거예요."
"그럼 그게 뭘까요?"
- 보민은 아직도 승희의 말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모든 일들을 겪었는데도 보민은 여전히 현실에 묶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믿는 일뿐이었다. 사소한 것들이 세계의 막을 건너온다는 것을, 저 너머에는 죽지 않은, 살아가기로 결심한 이연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이연이 세 사람을 이곳으로 초대했다는 것을.
보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두 분도 빗소리가 들려요?"
"네. 비가 오기 시작했나 봐요. 그런데 왜..."
의아해하는 승희의 시선이 보민을 향했다. 보민은 잠겨 있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곳이 정말로 이연이 사들이려고 했던 그 버려진 공간이라면. 세 사람에게 이연이 꼭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면...
보민은 문 앞에 섰다.
<비구름을 따라서>, 김초엽
작가노트 -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 이 소설은 작업하는 데 무척 오래 걸렸다. 한국과학문학상으로 데뷔하고 작품 활동을 한 지도 어느새 8년째, 그동안 단편을 많이 써봤으니 이 정도 분량에 이만큼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완성할 수 있겠다는 판단으로 여유 있게 계획했는데, 어느 것 하나 계획한 대로 되는 게 없었다. 일상이 그럭저럭 이어질 거라는 믿음이 통째로 흔들리는 일련의 사건들(내란을 비롯한 이후의 여러 사태들)이 있었고, 개인적으로 감당해야 할 큰 일도 겪었다.
- 잠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몰려드는 출장과 행사 일정 사이에 노트북을 내내 끼고 살았다. 기차에서, 비행기에서, 출장지 숙소에서 강연 대기실에서, 택시에서 틈만 나면 소설을 들여다보았다. 마음처럼 소설이 끝나지 않아서 난감한데, 그 사이에는 이런 마음도 있었다. 이 소설을 계속 쓸 수 있어서 좋다고. 영원히 써도 괜찮겠다고. 다행인지 아닌지 앤솔러지 출간 일정이 이미 잡혀 있어서 영원히 쓰지는 않았다. 관대하게 기다려 주시면서도 현실적인 마감 시일을 명시해 준 편집자님 덕분에 나도 궁금했던 '비구름'의 결말을 볼 수 있었다.
- 부서진 천장으로 비가 새어드는 그 창고를 빠져나와 돌이켜 보니, 이 글을 그렇게 오래 붙들고 있었던 이유를 뒤늦게 알 것도 같다. 데뷔한 이후로 나는 늘 "왜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듣고 살았다. 하필이면 왜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를, 너머의 이야기를, 비현실과 낯선 시공간의 이야기를 쓰냐는 물음인데, 딱히 날카로운 질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늘 대답할 말을 고르기가 곤란했다. 그냥 재미있어서, 현실을 한발 떨어져서 볼 수 있어서, 다른 세계를 여행하는 느낌이 좋아서... 다 진심으로 한 대답이었는데, 어딘가 찝찝했다. 진심이라는 게 양파처럼 여러 겹을 가지고 있다면 아직 속 알맹이를 꺼내보지 못한 기분.
<비구름을 따라서>는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던 시도였다. 그러니까 "왜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겠다는 게 아니라, 왜 그런 질문에 그토록 대답하기가 어려울까, ...
- 배달은 고사하고 사 온 맥주와 안주도 다 못 먹고 밤새 몸을 부대끼며 물고 빨 생각뿐인 우리였지만 그의 눈에는 연국을 본 후 집에 갈 체력이 없어 맥주에 배달 음식이나 시켜 먹다 지쳐 잠들 30대의 체력 부족한 친구 사이로 보였을 테지. 싫지는 않았다. 섹스하러 왔냐는 식의 눈빛을 받는 것보다야 쾌적했다. 그렇다고 유쾌한 건 아니어서, 나도 모르게 직원이 내민 키를 낚아채듯 받았다. 평소 같았으면 네, 고마워요, 하든가 네, 알겠어요 하고 대답한 다음에 한마디라도 더 붙였을 테지만 직원에게는 네, 하고 단답형으로 치졸한 대답만 한 후 돌아섰다. 그런 오묘한 기분에 휩싸여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우리 다음으로 들어온 여남 커플을 대하는 직원의 태도가 우리를 대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걸 보았다. 직원은 모텔에 출입하는 누구에게나 그런 식의 무미건조한 태도를 일관하고 있던 것이다.
- 모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아내와 입을 맞추며 물었다.
'아무도 차별하지 않는데 차별받은 느낌에 화가 나는 것만큼 추한 건 없을 거야.'
아내는 진득하게 입을 맞추다, 잠시 숨을 돌릴 때 되물었다.
'차별받은 느낌이 들면 차별한 거지, 차별한 사람은 없다는 게 뭔 말이야?'
'있어. 자존감이 낮으면 그래. 상대방은 아무 생각도 없는데 나 혼자 판단하고 생각해서 슬퍼하고 화내는 거. 아까 그 모텔 직원. 나는 그 사람이 우리를 당연하게 친구로만 봐서 화가 났거든? 밤 10시에 성인 둘이 모텔로 왔는데도. 그래서 냉랭하게 대했는데 뒤에 들어온 헤테로한테도 똑같이 대하더라. 직원한테 싸가지 없게 대한 내가 너무 창피해. 나보다 나이도 어려 보이던데.'
- '너는 좀...'
아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과하게 생각하고, 과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싫다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 알아는 둬. 뭘 그렇게 신경 써. 어차피 그 직원은 우리 얼굴 기억도 못 할 텐데.'
- '병인가?'
'예민함의 스위치가 남들보다 잘 작동하는 거겠지. 그럴 수밖에 없었잖아. 한국에서는 여자고, 세계에서는 아시아인이고, 성애로는 동성애고, 직업은 또 환자 걷는 것도 불안해하며 봐야 하는 간호사야. 그 정도의 예민한 스위치가 아니면 분명 뭐 하나는 말아먹었을걸? 그것도 대차게 너를 살린 고마운 감각이라 치자. 저 직원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아내가 내 뺨과 어깨, 가슴과 배꼽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닿는 곳에 온기가 돈다. 나를 살린 예민함의 스위치를 아내가 하나씩 끄고 있다.
-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부러웠다. 아내는 디자이너를 포기한 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감각을 이용해 상품 진열을 더 감각적으로 한 결과 다른 지점들보다 오프라인 상품 판매가 더 월등했으며, 이를 토대로 나중에는 본사에 직접 디자인한 상품 기획안을 넣어볼 참이라는 계획을 이야기해 주었다.
'어떻게든 하고 싶은 걸 결국 하게 될 거야.'
저 목소리.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기어코 세상의 불평등을 밟고 올라서서 승리의 깃발을 거머쥐겠다는 확신의 목소리.
'그전에 하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나를 넘어뜨린 건 저 목소리였다.
'너랑 결혼.'
16년 전에.
'사랑해.'
너무 직설적인 단어를 들어버려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당시 학생이었던) 아내는 쐐기를 박고 싶었는지 더 또박또박 말했다.
'여자 싫다는 생각 안 해봤으면 내 고백 진지하게 생각해 봐. 싫었어도 어쩌면 지금은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고민해 봐.'
- 재생 버튼이 없어 움직이게 할 수 없다. 나는 이 기억의 서사를 읽을 수가 없다. 뿌옇다. 기억에 안개가 낀다. 마치 물때와 이끼가 가득 낀 더러운 수조를 보는 것 같다.
- 처음에는 하얀 커튼이 나부끼는 줄 알았다. 눈을 떴을 때, 따스한 바람이 불면서 로맨스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이 아침 햇살에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뜨듯이. 창밖으로 새가 지저귀고 백색에 가까운 커튼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그런 장면. 사실 그런 장면을 정말로 본 것인지 만들어 낸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뇌가 망가졌으니까. 근데 이렇게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 실제로 본 것이 아니라 상상으로 만들어 낸 장면일 가능성이 높다. 상상은 현실의 픽셀보다 촘촘하고 선명하니까. 선명한 것은 무엇이든 오래 남는 법이다. 그렇다면 가로등 밑의 이 모든 장면들도 전부 내가 연출한 상상일까. 잠깐의 혼돈이 머물렀지만, 상상은 아니라는 결론. 선명하다고 해서 전부 상상이라면 제일 먼저 가짜가 되는 건 아내다. 아내가 가짜가 되면 내 삶도 송두리째 가짜가 된다.
- 어쨌거나 내 시야에 들어온 건 하얀 커튼이 나부끼는 모습이었다. 미적지근한, 체온보다 5도 정도 낮은 쾌적한 바람도 이마와 코끝으로 느껴졌으니까. 잠에서 막 깨어나 아직 흐릿한 초점이 맞춰지길 기다렸는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맞춰지지 않았다.
- 그녀도 우리를 인식하고 있었는지 내가 안락사 당사자가 아니라 보호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딱 하나 남아 있던 두유를 나한테 양보하면서, '인연이라는 게 정말 있을까요? 생의 반복이 그 인연의 치열한 복수전일까요? 그럼 나는 전생에 개였고 당신은 당신 아내보다 먼저 죽었나 봐요. 다음 생에는 먼저 복수해요, 우리' 하고 갔다.
- 내가 정말 전생에는 아내보다 먼저 죽었을까? 생의 순환이라는 게 고작 끈질긴 두 인연이 서로 앞다투어 죽기를 반복하는 거라니. 정말로 죄지은 사람들이 전부 지옥으로 떨어지고 일찍 죽은 자가 다음 생에 더 오래 산다면 언젠가 지구는 천국의 모습을 하고 있겠지. 선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지 않고 영생 같은 삶을 사는. 그러면 천국은 미래에 있는 건가. 지금 이 세계의 어떤 차원에도 존재하지 않고.
- 그런데 인구가 이렇게 많아져서 어떡하지. 다음에 다시 태어나도 못 만날 확률이 훨씬 큰 거 아냐? 비혼율과 이혼율을 보면 그래 보인다. 다 제짝을 못 찾아서가 아니었던 거지. 인간이 너무 많아서 못 만난 거다. 하, 큰일이네. 솔직히 아내나 내가 다음 생에 인간이 아니고, 나는 한강 공원 길고양이 새끼로 태어나고, 아내는 저 할리우드 배우가 키우던 강아지로 태어나면,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알고 만나지? 걱정이다. 우리를 이어 줄 매개가 필요하다.
- 어제는 새벽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 깼을 때 아내가 일어나 있었다. 혼자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하염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보름달이 뜬 새벽이었다. 달빛이 내려앉은 아내의 얼굴은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열일곱 살, 처음 봤던 아내의 모습 같았다.
- 아내는 입학식을 지루해하면서 강당 지붕만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재미있는 거라도 있나 싶어서 아내를 따라 지붕을 쳐다봤는데 오래된 강당 지붕에 구멍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아침부터 우중충하게 하늘을 뒤덮고 있던 구름이 지나가면서 햇살이 내리쬈고, 햇살 한 줄기가 구멍 난 강당 지붕 틈으로 들어와 아내의 얼굴에 쏟아졌다. 아, 그게 내 인생의 명장면인데.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고, 평생 나만 보고 싶은. 가만가만 숨을 쉬다가도, 가만가만 살아가다가도, 가만가만 죽고 싶다가도 그 장면만 떠올리면 나는 영화의 두 번째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느끼는 이 지루함과 무의미함, 그리고 고통이 전부 주인공을 위한 시련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그럼 도망치기보다 부딪치고 싶어 졌는데.
그 순간이, 나 홀로 버텨 살고 있는 이 행성의 핵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행성의 중심, 이 행성에 자기장을 만들고, 행성을 ...
-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과 평생 쿵짝쿵짝 맞춰가며 살아간다면, 평생 어떤 고난이 와도 홀 케이크 한 판으로 모든 하루를 이벤트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래도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우리는 늘 미래를 암묵적으로만 공유해 왔다.
- 언어화되지 않은 약속.
언어화할 수 없는 약속.
언어로 규정되지 않았기에 그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던 약속.
언어로 규정되지 않았기에 아무도 알 수 없던 우리의 약속.
- '진짜로 기념일로 만들까, 오늘'
'무슨 기념일?'
'네가 나한테 프러포즈 받은 날'
'나 오늘 프러포즈 받았어? 언제?'
'지금. 나랑 평생 살자, 우리. 매운 떡볶이 만들어 먹고, 홀케이크 먹으면서 심심하면 옛날 이야기 하고, 시간 남으면 1시간씩 줄 서는 식당 밥집들도 가자. 한 달에 한 번은 꼭 영화관 가서 영화도 보고, 주말에 도서관 가서 책도 같이 읽자. 상반기, 하반기에 국내 여행 한 번씩 가고 명절 때는 꼭 해외로 가자. 그리고 네가 매번 밥 챙겨주는 놀이터 고양이, 걔 살살 꼬셔서 같이 살자."
<우리를 아십니까>, 천선란
작가노트 - 좀비 그만 좋아하는 법은 없나
- <우리를 아십니까>는 2019년쯤 플랫폼에 올렸던 두 편의 단편소설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와 세계관을 공유하는 연작소설입니다. 물론 앞선 두 편을 읽지 않아도 이번 단편을 읽는 데 문제는 없습니다만, 함께 읽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세 편을 함께 읽을 수 있는 만남의 장을 조만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왜 이렇게 좀비가 좋을까요. 장르로서요. 실제로 좀비를 보면 저도 도망은 갈 겁니다. 왜 이렇게 이 장르를 좋아하는가, 고민해 봤어요. 호러나 스릴러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다른 호러나 스릴러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주요 감정이 좀비 장르에는 있더라고요. 고독이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쓸쓸함. 나 혼자만 남은 듯한, 혹은 그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재난과 재앙, 외계인 침략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공포요. 그리고 이 공포는 인간만이 느끼는 특징적인 공포 같습니다. 재난 앞에서 느끼는 죽음의 공포, 외계인 같은 낯선 존재를 마주할 때 오는 공포는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 생명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공포 같은데, 멸망한 문명에 홀로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공포는 감히 인간만이 느끼는 공포라 추측해 봅니다. 그런 점에서 좀비는 제게 고독과 쓸쓸함의 대표적인 장르예요. 이미 많이 변주되어 나왔기 때문에 더 새로울 것 없는 장르이기도 하고요.
- 제가 좀비를 좋아하기 시작한 게 중학생 때부터 거든요. 그때부터 언니랑 새로운 좀비 영화를 찾아봤어요. 저희 가족의 문화 중 하나가 '거실에서 이불 깔고 영화 보기'인데, 그때 봤던 영화 대부분이 좀비예요. B급 좀비부터 시작해서 채식주의자 좀비, 그리고 사랑을 느끼는 좀비까지도요. 영화 <28> 시리즈(2002, 2007), <월드워Z>(2013), <부산행>(2016) 이후로 '좀비 떼'의 이미지적인 만족감은 다 채워졌음에도 저는 끊임없이 좀비를 찾아 헤맵니다. OTT가 부흥하면서 좀비 드라마도 많이 생겼고, 여전히 독특한 설정을 가진 좀비 드라마가 공개를 앞두고 있고요. 이런 와중에 '그런데도 내가 좀비를 좋아하는 이유와 내가 쓸 수 있는 좀비는 무엇일까' 하는 고민이 들더라고요. 제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 속에서는 <두하나>, <노랜드>에는 <이름 없는 몸>이 좀비 혹은 좀비와 유사한 형태로 쓰였고요.
- 연구센터는 경상남도 고성군의 인적 드문 해변가에 위치해 있었다. 임시로 세워진 것처럼 보이는 어설픈 건물들이 덧지어지지 않은 채 드문드문 떨어져 서 있었다. 습기와 소금기가 어린 바람이 잔잔하게 불어왔다. 기숙사동으로 향하던 류는 무거운 캐리어를 든 채 서서 홀로 상대를 마주 보고 있는 통역사를 바라보았다.
- 통역사는 12미터짜리 '오름' 하나와 대화를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통역사는 손에 초크를 묻히고 팡팡 맞부딪쳤다. 마른 편이었지만 균형 잡힌 몸이었다. 가무잡잡한 피부가 햇빛에 빛났고, 하나로 길게 묶은 머리가 나뭇가지처럼 휘날렸다. 통역사는 자신 있게 뛰어올라 등반을 시작했다. 류도 대강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었다.
그는 맨손인 왼손과 장갑을 낀 오른손으로 번갈아 가며 돌기를 붙잡으며 오름을 올랐다. 류는 그 움직임을 찬찬히 훑었다.
-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외계인들, 괴물들. 거대 우주 달팽이들. 뭐라고 부르든. 그들이 이곳에 도착한 것이 벌써 2년 전이다. 한밤중에 굉음과 함께 한반도 끝자락으로 떨어진 이 존재들이 운석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외계 생명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같은 날 미국 콜로라도주와 중국 청도, 튀르키예의 카파도키아를 비롯한 열 군데 지역에도 같은 개체들이 떨어졌다는 뉴스에 전 세계의 관심이 이 거대한 덩어리들에게 쏠렸다. 대한민국에 떨어진 개체는 셋이었다.
- 한마디로 묘사하자면 그들은 거대하고 단단한 달팽이들이었다. 짙은 흑색의 겉껍데기는 암석처럼 단단했고, 부드러운 속살은 우윳빛으로 불투명했다. 대개 높이가 8미터에서 20미터 사이였지만 그보다 더 큰 개체도 있었다. 시각이나 청각 기관은 없고 배를 밀어 하루에 최대 100미터를 이동했다. 생김새나 행동 양식은 심해를 천천히 기어 다니는 갑각류와 비슷했지만 다른 생명체를 먹이로 삼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 관찰된 바로는 생존하는 데 햇빛과 물이면 충분했다. 단단한 껍데기 속, 외부로 내밀 수 있는 점액질 몸 전면에는 따개비 같은 단단한 돌기 수백 개가 다닥다닥 달려 있었다. 그 돌기에서 각기 전류가 방출됐다. 그들은 서로의 점액질 몸에 돌기를 맞대고 소통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지능이 있는 동물로 판별되었다. 상대가 접근하면 돌기들은 상대의 몸 어딘가, 각기 닿을 곳을 찾아 빨판처럼 부드럽게 달라붙었다. 인간의 눈에는 다소 기이하고 외설적인 장면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징그럽게 생겼다고 몸서리쳤지만 희정은 처음 봤을 때부터 그들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 언어학자인 희정은 이곳에 오기 전까지 지구상에서 사라져 가는 언어들을 수집하고 연구했다. 외계 생명체들과의 소통 방식을 고안해 낼 수 있었던 건 희정의 공이 컸다. 이 생명체들은 돌기를 통해 외부와 자극을 주고받을 수 있었고, 그들이 사용하는 건 전기 신호였다. 연구원들은 여러 방식을 시도했지만, 돌기에 접촉하는 것이 생체가 아니면 외계 생명체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과 소통하려면 반드시 신체 접촉이 필요했다.
- 희정은 이진법을 이용한 언어를 구상해 냈다. 돌기와 인간이 닿아 전류가 통하면 1, 그렇지 않으면 0. 희정은 접촉을 통한 이진법 언어를 스포츠 클라이밍과 접목시켰다. 정체 모를 외계 생명체와 대화하기 위해서 인간은 크레인에 로프를 매달고 그들의 몸을 타고 올랐다. 암호학을 전공한 류는 그것이 무척 직관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약간의 체력과 근력이 필요하긴 하지만 쉽고 효율적이었다.
- 류를 센터로 안내하며 희정은 그들과 처음으로 소통에 성공했던 날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첫 대화의 내용은 간단했다. 맨손으로 눈앞의 돌기에 손을 올렸다가 5초 후 손을 뗀다. 그렇게 여러 번 접촉을 반복하자 손바닥이 짜릿해졌다. 약한 전류였지만 몸을 움찔하게 할 만큼의 통증이 있었다. 희정은 왼손으로는 눈앞의 돌기를 잡고, 장갑을 낀 오른손을 다른 돌기에 얹었다. 그 행동을 몇 번 반복한 후 장갑을 벗고 돌기 두 개에 양손을 올리자, 생명체는 무언가 이해했다는 듯 같은 패턴을 돌려주었다. 왼손에는 따끔한 통증, 오른손에는 침묵. 희정은 그를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큰 환호성을 질렀다.
- "중국 소수민족 언어를 연구하러 답사를 갔을 때, 완전히 낯선 언어와 문법을 구사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 있어요."
첫 소통의 순간을 무용담처럼 말하던 희정은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당연히 전혀 소통이 안 됐죠. 하지만 같이 생활하다 보니 직관적으로 서로 무언가를 이해할 때가 있었어요."
희정이 고개를 돌려 류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서 일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광기에 가까운 빛이라고 류는 생각했다.
"그때의 기쁨은 말로 할 수 없어요."
- 류는 그런 종류의 경험은 없었지만, 해독되지 않은 알고리즘 난수열의 실마리를 찾아낼 때의 기분을 알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천구가 반짝 켜지듯 눈앞이 분명해지는 순간. 황홀하고 강렬한 섬광, 희정에 눈에 비친 빛과 같은.
- "물론 그다음부터가 진짜 힘든 거지만요."
이어진 말에 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이해의 환희는 찰나다. 그것은 종착이 아니라 시작이며, 이후로 길고 지난한 작업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 희정의 아이디어로 그들의 생물학적 정의보다도 언어가 먼저 발명되었고, 처음으로 이들과의 소통에 성공한 한국에게는 이 생명체에 이름을 붙일 권리가 생겼다. 그들을 지칭하는 국제적인 공식 명칭은 '오름'이 되었다. 제주 방언으로 '산'을 뜻하는 단어였다. 희정은 세 개체에게 차례로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나', '두리', '세라'. 1990년대에 태어난 세 쌍둥이에게나 붙일 투박하고 재미없는 이름들이었다.
- 수많은 전문가들이 연구센터로 몰려들었고 그들에게 '통역사'라는 직함이 붙었다. 공용어를 고안하는 건 비교적 간단했다. 어려운 건 설득과 교습, 대화와 해석이었다. 초기 공용어는 아레시보 메시지에 기반한, 언어라기보다는 점과 점을 이어 그리는 그림에 가까운 원시적인 형태였다. 이후 합의에 도달한 일종의 표 ...
- 인간이 전기 충격에 취약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들은 간혹 거절의 뜻으로 강한 전류를 발산해 성질을 부리기도 했다. 류는 감전된 손을 주물렀다. 작은 바늘 수십 개가 손바닥에 박히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희정은 키득거리다가 직접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로프를 빼앗아 허리에 달고는 세라 위로 뛰어올랐다.
- 희정은 능숙하게 오름을 올랐다. 류는 눈에 힘을 주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희정은 확실히 공용어에 능숙해 보였다. 오래 단련한 듯한 근력과 날렵하고 거침없는 의사결정이 빛을 발했다. 하지만 단순한 언어 실력을 넘어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희정이 쓰는 패턴은 보고서와 논문에 쓰인 예문과는 별개의 새로운 암호문이었고... 그와 오름 사이에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관계가 흘렀다. 류는 희정의 패턴에서 수어의 홈 사인을 연상했다. 좋아하는 것, 특정한 날의 기억, 누군가의 별명을 가리키는 그들만의 언어. 오래되고 상호 약속된 간략하고 친밀한 말들, 길고 거추장스러운 설명이 필요 없는 우정 어린 슬랭...
- 류는 바로 알아보았다. 희정은 이 언어를 누구보다도 잘 구사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름들에게 공용어를 가르치고 대화를 나눈 사람이니까. 희정이 그들과 쌓은 시간과 유대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오름이 내뿜는 전류가 인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2년 동안 매일같이 대화를 반복했다. 류는 그가 구사하는 문장을 오랫동안 멍하니 올려다봤다. 의심의 여지없이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 "멋지죠."
등 뒤에서 누군가 류에게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하얀 가운을 걸친 연구원이었다. 작은 키에 아무렇게나 자른 짧은 머리를 한 그는 코끝에 걸친 두꺼운 안경을 밀어 올리며 류를 빤히 쳐다봤다.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남자는 말을 툭 내뱉었다.
"언어팀에 새로 오신 분이시죠?"
"네, 이류입니다."
"생물팀장 김준호입니다."
일방적으로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류의 곁에 서서 팔짱을 끼고 오름을 오르는 희정을 구경했다. 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어색하게 가만히 서 있었다. 희정은 열여섯 번째 돌기를 붙잡고 숨을 고른 후 아래를 내려다봤다. 준호가 손을 흔들자 희정이 웃으며 오른손을 덮은 장갑을 벗어던졌다. 준호는 떨어지는 장갑을 낚아채며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통역사들은 멋있어요."
"김 팀장님도 공용어를 할 줄 아시나요?"
"읽을 수는 있어요. 저는 힘이 달려서 말을 못 걸지만요."
- 비록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들에게는 고유한 가치관이 있었다. 알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면 오름은 유아적인 공용어로 최선을 다해 답해주었다. 그들은 우주 저편에서 날아왔고 스스로의 의지로 이곳에 머무르기를 선택했다. 양지바른 곳과 빗방울을 맞는 일을 좋아했다.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하지만 간혹 깊게 교류할 수 있는 대상을 필요로 했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대답을 성실히 했고 기분이 별로인 날에는 입을 다물고 전류를 쏘았다. 크게 쓸모는 없지만 연구원들에게는 무척 귀한 정보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각자 미로를 통과하는 듯한 이상한 행로를 거쳐 오름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쌓아 올렸다.
- 결국 이곳에 여태까지 남아 있는 건 오름을 사랑하는 이들뿐이었다.
- 류가 오름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가 특이하고 독자적인 자신만의 문법을 밀고 나갔기 때문이었다. 오름들의 지난 데이터를 분석한 류는 오름들이 어쩐지 답답해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의 패턴은 아주 미묘한 차이 ...
- 연구원들은 무전기를 끼고 사복을 입은 정보원들, 소문을 주워듣고 울타리를 넘어와 부지를 살펴보는 부동산 업자들과 몇 번이고 마주쳤다. 외부인들이 드나들자 오름들은 눈에 띄게 불안정해졌다. 그들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았고 잦은 빈도로 통역사들을 거부했다. 때로는 단단한 껍데기 안에 몸을 숨기고 몇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기도 했다. 연구원들이 그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행동이었다. 류는 분노를 삼키며 오름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불청객들을 노려보았다. 수학을 전공하며 그는 경제적으로 쓸모없는 무언가를 좇으며 사는 것이 세간의 눈에 얼마나 한심하게 보이는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 무언가가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가 있든 상관없이.
- 며칠 후 희정은 연구원들을 모아 비공식 회의를 열었다. 희정의 입장은 간결했다.
'정부의 기조에 동의하지 않는다.'
센터에 소속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희정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비동의의 입장을 밝히는 것은 현 상황에서 그리 도움이 되거나 효과를 발휘하는 일은 아니었다. 희정이 공식 입장문을 발표했지만 정부는 답이 없었다. 그들의 입장은 무시당했다. 이내 다음 달 연구 예산이 전체 삭감되었다. 명백한 보복성 처사였다. 주둔 군부대에는 인원이 대거 충원되었고 끊임없이 새로운 군인이 들어왔다. 어느 날부턴가는 군복을 입고 총을 든 군인들이 서성거리다가 송전탑에 CCTV를 설치하고 연구센터 주변에 컨테이너로 장벽을 쌓기 시작했다. 연구원들이 항의하자 '외계인'들이 도주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어차피 하루에 100미터밖에 갈 수 없는 오름들을 그런 식으로 감시할 필요는 없었다. 그건 신호였다. 그리고 신호의 수신자들은 그걸 아주 잘 알아들었다. 두 명의 통역사가 우물쭈물 대며 사표를 냈고 희정은 별말 없이 사직서를 수리했다. 그들은 죄송하다고 말하며 짐을 싼 후 침대에 눈물 자국을 남기고 센터를 떠났다.
- 그사이 빠르게 언론 플레이가 시작됐다. 남은 연구원들은 어딘가에서는 세금 잡아먹는 돌덩이들을 싸고도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묘사됐고, 어딘가에서는 꿀단지 주변에 자리를 깔고 앉은 철밥통 먹물들로 묘사됐다. 어딘가에서는 그들의 입장문을 두고 전형적인 감성팔이들의 비합리적인 애착이라고 했다.
- 류는 눈에 힘을 주고 껍데기 속에 몸을 말고 숨은 오름들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들은 우주적 난민일지도 모른다. 지구에 불시착한 야생동물들이거나. 그는 이어서 평소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법률과 통계에 잡히지 않는 여러 종류의 비슷한 나쁜 일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 외에도 자신이 알지 못할, 그러나 일상처럼 벌어지고 있을 불합리하지만 합리적인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류는 대유적 상상력은 부족했지만 무심하지는 못했고 올곧은 성격이지만 세상 물정을 모르지도 않았다. 막대한 자본을 창출할 수 있으며, 어떤 명문화된 권리도 없고, 그들을 대변하거나 그들을 위해 보복할 세력이 없는 물체가 여기 있다. 누구도 석탄의 권리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심지어 소리 내어 비명을 지르지도 않으므로.
- 지는 싸움이야.
아니지.
이건 싸움조차 아니지.
-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오름들을 바라보고 있던 류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희정이었다. 입장문을 발표한 후로 그는 더더욱 말수가 적어졌다. 하루에 한두 마디나 들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그들이 나란히 앉아 같은 방향을 바라보자 오름들이 조심스럽게 껍데기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희정과 류는 아무 말 없이 시속 4미터로 움직이는 대형 달팽이들을 구경했다.
- 정부와의 전면전이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난 시점에는 센터의 3분의 2가 떠났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혼란스러움을 갈무리하지 못한 예닐곱 명이었다. 그들은 분노했으나 불안해했고 우유부단한 태도로 결단을 보류했다.
류는 궁금해졌다. 희정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오름의 말들>, 김혜윤
작가노트 - 가망 없는 싸움터를 떠나지 않기
- 김혜윤.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등단편부문 수상자.
떠나지 않고 남아 있고 싶은 사람.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며 소설을 쓴다.
- 소설을 쓰는 내내 가장 마음을 떠나지 않았던 싸움이 두 개 있었다. 김형수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지회장의 고공 농성. (조선소 하청노동자들과의 교섭에 응하지 않는 한화오션에 맞서 서울 중구 한화 본사 앞 철탑에 올라 농성 중이다. 농성이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한화오션은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파주시 용주골 시위. (보상 정책이 건물주의 이익만을 보장한다는 비판을 무시하고 파주시는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를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철거 중이다. 하루아침에 포크레인으로 집이 부서지고 거리로 내몰린 종사자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
- 소설을 완성하고 나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투명해서 부끄러웠다. 이런 걸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 내가 쓸 수 있는 이야기는 이런 것뿐이라고 느낀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도 이런 것뿐일지도 모른다.
- 나는 언어로 이루어진 교감만을 신뢰하던 사람이었는데, 취미로 밴드를 시작하고 나서는 언어를 통하지 않더라도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의 큰 부분은 나의 밴드 멤버들에게 빚지고 있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 이야기를 이렇게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런 소설을 쓴다는 걸 모르지만...)
-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는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친구들이 있어서 세상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약속을 매번 어겼는데도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원고를 기다려 주신 안태운 편집자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 이 소설을 읽어준 당신에게 커다란 사랑을, 어디선가 싸우고 있는 당신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옹호를 바친다.
- [비허가 복제체 처분 규칙]
0. 허가받지 않은 복제체는 생성 후 1개월 이내 폐기해야 한다.
0. 골격, 피부, 혈액을 포함하여 유전 정보가 담긴 모든 물질을 말소한다.
0. 폐기 시에는 지정된 소각로를 이용한다.
0. 이는 살인이 아니다.
- 첫 번째 성찰.
후디니는 나의 연인이고, 나는 어제 연인이 아닌 실비아와 잠자리를 가졌다. 실비아는 후디니보다 나를 다루는 일에 능숙했다. 가감 없이 언급하자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됐기에 어제의 잠자리에선 비언어적 신호로 좋고 나쁨을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의 입술을 물 때 앞니에 어느 정도로 힘을 줘야 하는지, 위에 올라탈 때 체중을 어디에 실어야 하는지 실비아는 잘 알았다. 그녀의 혀에선 호숫물 같은 비린내가 났고 살에는 건강한 기름기가 돌았다. 향기와 소리가 훌륭한 존재에게 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이색적이었던 밤을 후디니에게 알릴 때의 내 목소리는 배덕한 황홀감에 젖어 있었다. 연구에 몰입하고 있던 그가 나의 표정에 불쾌감을 느꼈는지 탁상 램프를 껐다.
"너 지금 점심에 먹은 돈가스나베 평가하듯 바람피운 소감을 설명하는 거야?"
연인이 타인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단순 명료한 배신에 후디니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조차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연구소의 모든 것은 내가 전 연인 와이즈에게 선물 받아 현 연인 후디니에게 준 것이었므로 그는 어떤 것에도 섣불리 난폭해지지 못했다. 행위의 도입과 결말을 일일이 설명하려는 나의 입 또한 막지 못하는 그는 입고 있던 랩코트만 벗어던졌다. 그의 유일한 개인소유물이었다.
- 후디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사무용 의자가 한 바퀴 빙글 돌고는 뒤로 밀렸다. 분노는 조급할수록 보는 맛이 좋으니 나는 그의 행동을 감상하며 팔짱을 꼈다. 이것은 내 마지막 베팅이 될 것이다.
"실비아가 너보다 잘하더라."
"네가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알아?"
"근데 난 바람피운 적 없어."
"방금 네 입으로 실비아라는 여자랑 잤다며?"
"실비아는 내 복제체야."
- 후디니는 정치인의 시대착오적 망언이라도 청취한 듯 입을 크게 벌렸다. 길게 늘어진 그의 얼굴은 오롯이 나를 향했다. 복제체 연구에만 관심을 가지던 후디니가 연인인 나에게 집중한 순간은 요즘 들어 드물었다. 그렇다면 그의 경악마저도 반갑게 맞이해야 마땅했다.
- 복제인간은 엄연히 하나의 생명체라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만 생산이 가능했다. 나는 후디니가 개발 중인 미승인 인공 배양기를 활용해 복제체인 실비아를 만들었다. 유전정보를 삽입한 배아체(밀가루 반죽 같은 형태고, 노르스름하며, 올리브유 향이 난다)를 넣고 세포 분열 유도용 자극선에 일정 시간 노출시킨 다음, 연구용으로 구입한 성장 촉진 물질을 주입했다. 세포 분열이 시작되자마자(이때부터는 사람의 피지 냄새가 난다) 배아체를 꺼내 옷장 안에 두고 몰래 키웠다. 따지고 보면 후디니의 잘못도 있다. 연인이 몰래 배양기를 사용하는 걸 막지 못할 정도로 허술히 방치했으니까.
- 결론적으로 실비아는 불법 복제체다.
-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천문학적으로 똑똑한 인공지능을 잉태해 봤자 설계 단계에서 재량권을 제한해 버리면 그들은 OS가 파손될 때까지도 인간의 부하인 셈이었다. 로봇 윤리? 그들의 척추를 뽑고 다리를 부러뜨려도 재물손괴죄에 그칠 뿐이다. 자유를 원하지 않는 것들을 자연은 생명체로 취급하지 않는다.
- 반면 복제체는 다르다. 그들은 모체와 99퍼센트 동일한 유전정보를 가진다. 모든 조직이 유기질을 에너지원으로 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살과 피로 이뤄진 인간과 겉으로 보기에 다를 바가 없다. 우월한 모체에서 복제된 그들은 인구 절벽인 지역에 파견됐고, 인간과 파트너를 이룬 운동선수가 됐으며, 이성과 감성이 두루 존재해야 하는 곳에서 인간의 지적 노동을 거들었다. 그럼에도 결코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인간이 그들을 만들 때, 작은 실오라기 하나를 꼬아놓았기에.
- 모체와 100퍼센트 동일한 생명체를 창조하는 기술이 발명되었다면 학자들은 현재까지도 생명윤리를 가지고 입씨름을 하고 있었을 거다. 기술자들은 면죄부를 받기 위해 복제체에 인간과 구분되는 아주 사소한 장난을 치기로 했다. 묘수의 단서는 개의 유전자에 있었다.
- 집채만 한 그레이트데인보다 갓 태어난 새끼 늑대가 때로는 더 위험하다. 가축화된 개와 야생 늑대는 인간을 대하는 본능부터 다르다. 그렇다면 개는 왜 '비교적 안전'한가? 분자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개는 늑대보다 GTF2I 및 GTF2IRD1 유전자에서 변이가 더 많이 발견되는 경향을 보이며, 이는 과잉된 사교성과 친밀함으로 나타난다. 즉 개는 늑대보다 인간에게 더 유순하고, 애착을 가지며, 복종한다.
- 유전적 변이는 진화의 서막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질환의 시작이다. 인간의 경우 GTF2I 및 GTF2IRD1 유전자가 변이 되면 이를 진화된 자들이라 분류하지 않고 '윌리엄스 뷔런 증후군'으로 분류한다. 일반성에서 벗어난 변화(예컨대 지나친 사교성과 무차별적인 친화력)는 종종 의학적 이상 異常으로 정의된다.
여기에서 착안하여 연구자들은 인간형 변이 유전자 GTF-X를 개발했다. 그것을 성장 촉진 물질에 접목하여 해당 변이 유전자 없이는 복제체 창조 자체가 불가하게끔 제한된 기술만 설계했다. 고로 복제체는 모두 '개'이자 질환자다. 모체에게 태생적으로 유순하고, 애착하며, 복종한다. 복제체는 목줄 없이도 인간의 곁에 서는 골든리트리버처럼 인간을 주인으로 섬기며, 특히 모체를 제한 없이 사랑하기에 감히 자유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 인간이 되려다 변종된 인간 언저리의 살덩어리. 실비아는 내가 만든 그런 개인간이다.
나를 맹렬히 비난하는 후디니의 연구 목표는 GTF-X가 제거된 복제체 개발이고.
- "그 아이는 인간과 동일한 고통을 느껴. 네 장난질로 세상에 태어나 버렸는데 1달 뒤면 소각로에서 펑펑 울겠지!"
"그럼 넌 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라 내가 불법 복제체를 만들었단 사실 때문에 괴로운 거야? 둘 중 대체 무엇이 너를 화나게 했냐고!"
"아까부터 되지도 않는 말을 계속..."
"후디니. 내가 사랑하는 건 오직 너 뿐이고 난 이걸 확인하려 복제체를 만들었어."
- 굳이 수고를 들여가며 개인간까지 만든 이유는 확실했다. 심지어 아주 간결했다. 후디니에게 한 말대로, 진실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전 연인 와이즈와 헤어진 후 오랫동안 궁극적 사랑을 갈구해 왔다. 그것은 마치 태초부터 주어진 숙명 혹은 절대 채울 수 없는 결핍처럼 내 삶에서 떠나질 않았다.
누군가는 실비아와의 잠자리를 외도나 일탈 정도로 얄팍히 저미겠지만, 나는 사랑의 진리를 탐색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의심'을 선택했을 뿐이다.
- 제1성찰.
충분히 확실하지 않은 진실을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명백히 거짓이라 평가된 것도 마찬가지다. 가진 모든 신념을 의심하는 일에서부터 진리는 시작된다. 명징한 진리를 가능케 하는 것은 끝없는 의심이다.
- 후디니는 와이즈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혹은 그의 사랑이 와이즈의 것과는 달라 나를 헷갈리게 했다. 사랑은 중독과 같아서 한번 체험하면 그와 유사한 강도 혹은 이상의 경험을 영원히 욕망하게 된다. 끼니를 걱정해 주고 내 삶의 질이 행여 나빠질까 전전긍긍하며 입고 먹고 마실 모든 것에 관심을 쏟아 한없이 응원해 주는 사람을 염원했으나, 후디니는 그 일에 실패했다. 나는 지금 물병을 뺏긴 마라토너처럼 타는 갈증을 견디고 있다. 이 사랑의 허기에 후디니는 책임이 있다.
- 그는 "너를 사랑한다니까?" 따위의 회피성 발언을 상습적으로 했지만, 그걸 신뢰할 정도로 내가 바보는 아니었다. 좀 더 사랑의 진원에 닿아야 했다. 한 번쯤은 사랑에 대한 모든 개념을 전복시키고, 모조리 불태운 다음, 완전한 무의 상태에서 숙고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피해 의식이나 애정 결핍, 통제 욕구나 소유욕 따위의 성격적 결합에 근거한 강박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굳이 복제체를 만들지 않고 길거리의 아무 부랑자나 잡아다가 하룻밤 장난을 쳤을 것이다. 관계의 상대로 제삼자가 아닌 복제체를 선택한 건 후디니를 향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후디니는 차라리 내게 '거참 정중한 외도군!' 하며 칭찬해 마땅했다.
- 사랑. 그 두 글자짜리의 결승점으로 가기 위한 여정이 몹시 고되리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성찰을 시도할 가치는 있었다.
- 사랑이 표현이라면, 모든 표현이 사랑인가? 이상적인 말과 행동을 선택했을지언정 거짓의 가능성은 여전히 살아 있다. 사랑을 속삭인다고 사랑을 확신할 수 없다. 사랑을 약속한다고 사랑이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값비싼 스포츠카를 사주고, 펜트하우스를 사주고, 미쉐린급 식사로 매 끼니를 챙겨주고 내가 아플 시 극진히 간병까지 해준다 한들 그가 속으로 '참 상대하기 버거운 여자야'라고 생각한다면? 사랑의 형태를 띤 모든 행위에 사랑은 단 한 점도 포함되지 않을 수 있다.
- 맛있게 숙성된 치즈가 있다. 그러나 '숙성됨'은 무엇인가? '맛있음'은 또 무엇이고. 맛있다는 미각적 평가는 모두에게 통용되는가? 치즈는 지금 '잘 숙성된 유제품'이지만 한 달 후에도 그 평가는 유효한가? 당장 내일부터 썩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감각과 행동 등 현재성에 기반한 평가는 이처럼 취약하며, 쉽게 휘발한다. 그러니 절대 진리를 위해 적어도 한 번 정도는 회의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 믿어주지 않았기에 필연적으로 발생한 실수라 우겼다. 매력적인 누군가와 몰래 커피 한잔을 마시며 밀담을 나누고선 일이 바빴다고 뻔뻔히 거짓말했다. 연인이 나를 한없이 이해하고 감싸주길 바라지만 화분을 넘어뜨리는 고양이처럼, 당당한 얼굴로 말도 안 되는 잘못들을 저질렀다. 가끔은 너를 사랑한 적이 없었노라 바락바락 우기기도 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일을 반복하면서도 사랑이란 이름으로 용서받고 싶었고, 그 용서야말로 사랑의 징표라고 주장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사랑받고 싶어 함에 자존심 상해하며 내 못남을 감추고자 속마음과는 다른 악행을 일삼았다.
- 자신의 미숙함을 부끄러워하는 실비아를 보면서 나 또한 지난 어리석음들을 반추했다.
- 제4성찰.
인간은 오류를 범한다. 사랑의 신이 우리를 기만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끝도 없는 거짓과 잘못을 반복한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지 탓이다. 자유의지가 지성보다 더 크므로, 우리는 거짓과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선택한다.
- 와이즈는 실수를 반복하는 머저리마저도 존중했다. 내가 스스로를 의심함에도 그만은 내 불안마저 한겨울에 핀 꽃을 대하듯 ...
- 유전자나 알레르기의 유무 따위가 아니라, 과거 내가 받았던 상처가 그녀의 영혼까지 훼손하지는 못했음이 우리의 차이인 1퍼센트이길 바랐다.
운동화를 신었다. 실비아는 가장 자신 있는 메뉴로 저녁을 준비하겠다며 들떠 있었다. 구입할 식자재 목록을 읊는 그녀의 얼굴이 이제는 나와 완전히 달라 보였다. 그런 실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후디니도 곧 올 거야. 정확히 언제인지는 확답할 수 없지만."
"역시 그렇겠죠? 주인인 당신이 돌아오라고 했으니까요."
나는 그녀의 뺨을 따뜻한 손으로 가볍게 감싼 후 문고리를 잡았다. 동그란 쇠가 느릿하게 돌았다. 인사를 대신해 말을 건넸다.
"실비아, 내가 고마우면 이제 사랑한다고 말해도 돼."
"그러지는 않을래요."
실비아는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여 답했다.
"당신이 그 말을 무서워하니까요."
- 역시 실비아였다. 나의 선택에 한 점의 후회조차 남지 않으리란 걸 확신했다. 경쾌하게 문을 열었다. 실비아가 외출하는 나의 등에 대고 물었다. 이 위조문서는 누가 만든 것이냐고.
"2년 전에 와이즈가."
- "실비아, 세상이 네가 쓴 글을 궁금해할 것 같은데 너도 시인이 되는 게 어때?"
"좋아요! 당신을 위한 시를 써볼래요."
- 소각로로 들어갔다. 문을 닫았다. 내부에 설치된 거대한 쇠판 위에 허리를 스스로 묶었다. 이곳에 외로이 누웠을 와이즈를 상상했다. 그는 분명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조각조각 사라지는 내내 슬픔과 기쁨으로 중독되어 아픔조차 잊었을 것이다. 그의 사인은 불치병이 아니었으니까.
와이즈는 자신의 복제체이자 불치병을 물려받지 않은 후디니에게 모체가 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내게 병든 자신이 아닌 건강한 상대를 연인으로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와이즈는 후디니에게 앞으로 오직 오필리아만을 주인으로 섬겨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곳에서 자살했다.
- 제6성찰.
정신과 육체는 다르다. 육체는 물질의 세계에 종속되어 있다. 영혼은 사유의 세계에 있다. 그러나 둘이 다르다고 해서 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신과 육체는 끊임없이 교감한다. 사랑 또한 그 영구적인 교감 안에 있다.
- 연기가 피어오르고 불이 붙었다.
<아모 에르고 숨 Amo Ergo Sum >, 청예
작가노트 - Cogito ergo sum 코기토 에르고 숨!
- 라틴어 'Cogito'는 데카르트 철학에서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다.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문장 중 내가 생각하는 존재임을, 즉 성찰을 행하는 자아임을 밝히는 단어다. 이 코기토 에르고 숨이 등장한 철학이 '데카르트의 6성찰'인데 본래 6성찰은 사랑이 아니라 자아와 신 그리고 외부 세계를 다룬다. 읽는 과정 중 동의하지 않는 맥락이 등장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칸트나 니체도 코기토를 비판했지만, 나는 해당 철학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6성찰을 활용하여 사랑을 담뿍 사유했다.
- 사람은 무엇으로 살고 또 무엇으로 죽는가? 이 진부한 물음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 대답할 것이다. 사랑이 과연 우리에게 그 정도로 가치가 있는가? 너무 과대 포장되지 않았는가?
- 여러모로 사랑에 회의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과연 사랑이 진실로 삶을 창조하거나 파괴할 만큼의 힘이 있는지 알고 싶다.
- 지금 나에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묻는다면 할머니가 떠오른다. 할머니는 이미 98세이고, 건강이 몹시 악화되어 있기 때문에 가족들은 암암리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나 또한 언젠가 집에서 혼자 할머니와 작별하는 연습을 했다. 사진을 미리 정리했고, 장례식에 가는 상상을 했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내가 제법 담담한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상상만으로도 펑펑 울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뒤 할머니와 만나 내가 혹여 장례식에 가지 않더라도 용서해 달라고 말했다. 상상 속에서조차 그녀의 죽음을 수용하는 일에 실패했으므로.
- 나는 할머니를 생각할 때면 나의 탄생과 현재까지의 모든 삶을 함께 떠올린다. 내 모든 삶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나를 좀 더 바른 인간으로 키워내기 위해 노력했다. 몇 가지 방법은 동의할 수 없었지만, 어쨌건 그녀 덕에 나는 짐승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사랑은 한 생명체의 삶을 변화시킨 게 맞다. 내 세계에서 사랑은 그녀의 존재로 인해 그 힘을 인정받는다. 그 마음의 뿌리를 더듬으며 소설의 토대를 세웠다.
- 마술사 해리 후디니와 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생애도 창작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실비아는 그녀의 삶을 풀어낸 연극을 보고 관심을 두게 됐다. 여성으로서 사랑의 상처를 치열히 풀어냈던 그녀에게 시간을 초월한 애도를 보낸다. 그녀가 살아 있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작품 속 실비아에게 삶을 줬다. 인생을 모두 던져 고유한 세계를 보이려 했던 사람의 의지는 그 자체로 영속성을 갖게 되는 것 같다.
- 고로 사랑이 있는 한 삶은 죽음에 부속되지 않는다. 설령 영원이 존재하지 않아 모든 삶이 유한하다 누군가 주장할지라도, 사랑이 있는 한 '무한은 실재한다'고 나는 믿고 싶다.
- 'Amo ergo sum 아모 에르고 숨'이니까!
- '나는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
- 태양은 지평선 가까이 내려앉을 때면 지금도 옛날같이 얼굴을 붉혔다. 저녁이면 흙 위에 입 맞추고 이슬 젖은 품에 안겨 별을 헤는 것, 그리고 아침이면 이별하여 용설란이 듬성듬성한 평원과 갓난쟁이의 머리칼처럼 솟은 바위산과 그 사이를 기억처럼 굽이치는 메마른 협곡을 쓰다듬어 달구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이름 잊힌 산맥의 그늘이 뻗쳐 오는 어둑한 대지와 잉크를 엎지른 양 짙푸르게 물드는 대기 사이로 구름은 그날의 마지막 빛살에 몸을 적시며 게을리 반짝였다.
- 회전초 한 덩이가 저를 앞질러 동쪽으로 굴러가는 모양을 지켜보며 랜슬롯은 걸었다. 길게 늘어진 그의 그림자가 지표면의 굴곡을 따라 펄럭이며 중앙선도 아스팔트도 없는 황무지 위에 좁고 검은 길을 쉼 없이 덧그렸다. 아이가 그린 초상같이 삐뚤어진 눈 코 입과 흠집이 문신처럼 덮인 팔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녹슨 부품이 음악처럼 삐걱댔다. 랜슬롯은 심하게 파손된 왼쪽 발목 밖으로 튀어나온 모터와 실린더를 질질 끌며 일정한 속도 ...
- 소파 맞은편 벽난로에서 사윈 장작 하나가 쓰러져 거실에 불씨를 흩날렸다. 집 안 곳곳 가구 사이 틈새마다 빛바랜 책들이 천장을 간지를 듯 높이 쌓여 마치 종이로 세운 마천루에 둘러싸인 듯했다. 은은한 빛이 새 나오는 오른편 서재의 반쯤 열린 문틈으로 책상에 앉은 프랭크의 굽은 등이 보였다. 삐걱, 마룻바닥이 울자 랜슬롯은 걸음을 멈췄다. 다행히 노인은 듣지 못한 듯했다. 랜슬롯은 조심스레 발을 떼고 그 자리를 피해 빙 돌아 지하실 공방으로 향했다.
- 로봇은 목재 계단 손잡이를 잡고 몇 발자국 내려가다 멈추어 뒤를 돌아봤다. 기름때 묻은 플란넬 셔츠와 멜빵 달린 카펜터 팬츠를 입은 프랭크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종이 위에 무언가를 서걱서걱 적고 있었다.
- "빌어먹을 싸구려 만년필 같으니, 일해, 이 물건 놈아. 일하라고."
프랭크는 창틀 위에 올려놓은 잉크통을 가져와 펜에 잉크를 채우더니 서둘러 종이로 돌아갔다. 그 바람에 책상에 뿌려진 잉크 몇 방울이 칠 벗겨진 나뭇결을 따라 스미었다. 독서등 아래 좁고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쉼 없이 글씨를 휘갈기던 펜이 잠시 후 불현듯 멈춰 섰다. 프랭크는 누렇게 센 머리칼을 양손으로 틀어쥐고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흔들더니 신음하며 서랍을 열었다. 담배를 꺼내 문 그는 성냥을 책상 밑에 그어 불을 붙인 뒤 팔짱을 끼고 빽빽 연기를 뱉었다.
"... 이 망할 영감탱이야. 지금 글을 쓰고 있다는 걸 의식하고 있잖아. 생각하지 말라고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말아. 그거 알아? 일단 쓰기 전에는 네가 뭘 쓸 수 있는지 알 수 없어. ... 빌어먹을, 그 엿같이 주절대는 입부터 닥쳐야 이 지랄 맞을 생각들을 멈추겠지? 응?"
- 프랭크는 재떨이 모퉁이에 아슬아슬 꽁초를 올려놓더니 요란하게 콜록이다 가래침을 뱉곤 다시 펜을 쥐었다. 허공에서 망설이던 펜촉이 점과 선을, 다시 점과 선을 종이 위에 서걱서걱 새겼다. 길게 매달린 담뱃재가 툭 떨어지며 꽁초가 방바닥에 굴렀지만 프랭크는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글을 썼다.
- "자기 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본 적 있나요?"
랜슬롯은 노인의 뒷모습을 올려다보며 작게 읊조렸다. 그리고 절뚝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 "이 멍청한 고철 덩어리 자식아. 다쳤으면 오자마자 나한테 재깍 말을 했어야지..."
프랭크는 작업대 위에 누운 랜슬롯의 발목에서 까맣게 타버린 모터를 들어내며 혀를 찼다.
<I'm Not a Robot>, 조서원
작가노트 - 이야기를 만나러 가는 길
- 프랭크는 소설 쓰는 일을 사랑했고, 그 일이 그에게 고통을 주었을 때도 자신에게 찾아와 준 이야기가 독자에게 닿기를 바라는 일념으로 계속 소설을 썼습니다. 그가 랜슬롯의 일을 존중했듯이 저 역시 그의 일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 작품이 시작으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거쳐온 길을 적겠습니다.
- <I'm Not a Robot>의 초고는 2020년 4월 4일 동작구 상도동의 한 카페에서 집필되었습니다. 3시간 동안 쓰인 200자 원고지 55매 분량의 초고에는 사막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를 로봇올 홀로 수리하던 노인이 자신의 소설을 인터넷으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지만 캡차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괴로워하고, 결국 모든 소설을 불태우고 숨을 거둔 뒤에 로봇이 하던 일이 도로를 해체하는 것이었음이 밝혀진다는 기승전결이 지금과 동일하게 갖춰져 있었습니다.
- 이야기의 기단과 주초는 캡차를 통과하는 데 실패했던 제 경험에서 비롯됐습니다. 언젠가부터 인터넷 쇼핑몰의 회원가입이나 카드 결제의 본인 인증을 할 때 등장하기 시작한 캡차는 처음에는 매우 쉽게 표기된 숫자나 알파벳을 그대로 따라서 적기만 하면 되었기에, 이런 기초적인 시험이 인공지능이 아니라 그 어떤 형태의 지능이든 걸러 낼 수 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눈을 부릅뜨고 제 모든 지적 능력을 동원해도 해독할 수 없는 문자열이 등장하여, 새로고침을 하지 않고는 실제로 제가 인간임을 증명할 수 없는 상황이 심심치 않게 반복됐습니다.
- 캡차의 급속한 진화는 본가에 갈 때면 늘 제게 스마트폰과 컴퓨터의 사용법을 물어보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이같이 인터넷의 갖가지 인증 시스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어머니께서는 평소에 얼마나 더 큰 막막함을 느끼고 계실지 생각했습니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친구로부터 스마트폰 사용법 강사가 되기 위해 복지센터에서 면접을 보는 중년층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원자는 면접관과 자신이 함께 있는 단톡방을 만들고 메시지를 한 개 올리기만 하면 노인들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강의하는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 교육이 끝나는 날, 중년인 선생님들은 모두 노인인 학생들을 끌어안고 같이 운다고 합니다. 곧 자신도 그렇게 어느 날 새롭게 등장한 프로그램의 가장 기초적인 사용법을 어려워하는 노인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 오르한 파묵은 잡지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모든 소설이 대여섯 개의 단어를 기둥으로 삼아 쓰였다고 말했습니다. 훗날 이 인터뷰를 읽은 저는 무척 기뻤습니다. <I'm Not a Robot> 역시 4개의 단어를 기둥으로 삼아서 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단어들은 휴리스틱, 앰뷸런스, 사막, 요리사였습니다. '휴리스틱'으로부터는 직관적 판단이 아닌 논리적 추론으로 사고하도록 설계되어 한 작가가 쓴 소설에 인간다운 감상을 전해주지 못하는 로봇을 구상했습니다. '앰뷸런스'와 '사막'으로부터는 그 작가가 자동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사막에 홀로 사는 노인이고, 따라서 인간다운 감상을 듣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터넷에 접속해야만 하지만, 캡차의 시험에 늘 실패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을 구상했습니다. '요리사'로부터는 요리사가 애써 만든 요리를 먹을 손님이 한 명도 남지 않았다는 내용의 노인이 쓴 소설을 구상했습니다.
- 이야기의 들보와 서까래는 일곱 살 때 미국에 사는 막내이모를 뵈러 가서 보았던 광막한 서부의 사막이었습니다. 붉은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도로는 가도 가도 끝이 없었고, 풍경은 쉼 없이 변화했지만 영원히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키보다 세 배는 큰 선인장을 보았고, 자동차를 가로막고 선 야생 당나귀를 보았고, 크고 작은 바위산과 허연 소금 사막과 돌멩이에 박힌 물고기 화석과 어둑한 숲 속에 지어진 오두막을 봤습니다.
- 원고지 55매의 초고는 며칠 뒤 장면 묘사를 추가하고 문장을 다듬은 80매 분량의 단편소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일이 바빠져 오랜 시간 이 작품에게 독자를 만날 기회를 마련해 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5년의 세월이 흘러 허블 출판사에서 출간될 제 단편집에 수록될 작품 중 한 편을 한국과학문학상 수상 작가 앤솔러지를 통해 먼저 소개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가필을 마친 원고는 221매가 되었고, 다시 분량을 덜어낸 130매의 원고가 앤솔러지에 수록되었습니다. 5년 전 초고에는 첫 장면에서 다리를 절며 홀로 걸어오던 랜슬롯이 지켜보는 서부의 풍광이 무척 간략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프랭크가 어떻게 해서 사막 한가운데의 집에 살게 되었는지에 관한 내용도 생략 돼 있었고, 그의 과거를 짐작할 수 있는 팔다리의 흉터와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내면의 상처 또한 그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명명식 장면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프랭크는 똑같이 소설을 써서 독자를 만나고 싶어 했고 랜슬롯은 똑같이 침묵 속에 프랭크가 찾아낸 사람의 일을 동경했지만 지금처럼 두 마음이 어느 밤 위스키병에 적힌 옛 이름들을 부수며 별빛 아래 함께 태어나는 장면은 없었던 겁니다.
- 5년 전 이 소설이 먼저 독자들을 만날 기회를 가졌다면 그 역시 아름다운 일이고 의미 있게 완성된 모습이었겠지만, 이번 작업을 통해 갖추게 된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폭우 속에 모래가 씻기며 숨겨진 차량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듯이, 이야기가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자신의 소설이 독자를 만나길 바라며 긴 세월 기다렸던 프랭크의 마음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의 발표를 그가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
- 허블 출판사에서 출간될 제 첫 소설집을 기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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