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현구
출판 : 북오션
출간 : 22.12.05
박해로 작가를 통해 알게 된 북오션 출판사.
실전 투자서 같은 실용서와 기담/괴담 쪽을 주로 다루고 있는 출판사다.
출판사라고 하면 모든 분야를 아우를 것 같지만, 아무래도 주력 분야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덕업일치에 성공하여 관심 분야가 곧 수익 분야가 된다면 좋겠지만- 보통은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도 출판해주지 않아서 '내가 직접 내겠다'는 마음인 경우도 드물지 않다)
해서 '출간하고 싶은 책'을 위해 '수익이 되는 책'을 출간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북오션의 경우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언뜻 보기에 한 번에 연결되지 않는 두 분야라 생각이 튀고 말았다.
<아주 사적인 기담 전람회>는 북오션에서 출간된 기담과 괴담 사이의 단편집이다.
오타와 비문이 살짝 있지만 맥락 이해에 큰 지장은 없으며, 오싹하고 재미있다.
아쉬운 점이라면, '소설'을 너무 염두에 둔 나머지 '기담'이 흐려진 것 같다는 점.
매끄럽게 설명이 되는, 이야기가 되는 이야기를 만들고자 다듬어지다 보니 '기이한 느낌'까지는.
툭, 끊어지는 느낌의 결말이 더 많았다면- 싶다.
(물론 아주 개인적인 취향이다)
즐거웠다.
- 부천 업장에서 팀을 내릴 때 춘식은 지훈에게 그렇게 말했다. 일주일이라고, 일주일만 쉬면 다른 업소에 금방 비즈니스가 될 거라고. 일 주는 이 주가 됐고 이 주는 삼주가 됐다. 그때마다 춘식은 지훈에게 전화를 걸어 '글쎄, 페이가 너무 안 맞아서 말이다'라던가 '얘기된 업소가 있긴 한데 손님들 질이 너무 좋지 않다는구나. 조금만 참고 좀 질 좋은 업소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 보자' 등의 말로 회유했다. 지훈도 기타나 베이스처럼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래도 차마 춘식을 배신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훈은 '생존'과 '의리'라는 선택지에서 우유부단했다. 빨리 비즈니스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대한 춘식의 핑계를 딱히 말하는 대로 믿었던 것도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울이나 경기도도 아닌 춘천이라니. 지훈은 맥이 빠졌다.
- "아무튼 춘천으로 가는 것으로 결정됐으니까 내일 두 시까지 연습실로 다 모여. 기타하고 베이스까지 모여서 레바리 맞춰봐야 하니까 악보들도 잘 챙기고."
"아니 근데 신생 업소유? 아니면 우리 전 팀이 있는데 내리고 들어가는 거유?"
팀 내 춘식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영길이 춘식에게 물었다.
"우리 전 팀이 있지. 이번 주까지 하고 내리기로 했다. 그런 건 왜 물어봐?"
난데없는 영길의 질문에 춘식은 짜증을 냈다.
"아니, 알 건 알아야지. 뭔가 잘못해서 내리는 건지, 업소가 까탈스러워서 내리는 건지 알 건 알아야 우리도 무대 올라가기 전에 사전 준비를 하죠."
춘식의 짜증 난 소리에 영길은 볼멘 목소리로 되받았다.
"몰라, 그건, 아, 무슨 이유가 있겠지. 내가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 조건만 좋으면 장땡이지. 업소 페이도 쎄. 다른 업소보다 훨씬 더 많이 받고 가는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 의뭉스러운 춘식의 말투가 지훈에게 물음표를 던졌다. 춘식은 제법 꼼꼼한 사람이다. 새로 비즈니스가 되면 업소 분위기가 어떤지, 손님 계층은 어떤지, 업소 간부들 스타일은 어떤지, 전 팀은 무슨 이유로 무대를 내렸는지 세세히 조사해 팀원들에게 말해주던 사람이었다.
- 팀에 새로 합류한 기타 철준과 베이스를 맡게 된 도형은 학생 같은 이미지를 뿜어냈다. 철준은 물이 빠진 건지 색이 바랜 건지 구별되지 않는 통 넓고 허름한 청바지에 두꺼운 실로 짜인 회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청바지는 빨래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빨지도 않고 계속 입는 건지 판단하기 어려웠고, 회색 카디건은 보풀이 잔뜩 올라와 들러붙어 있었다. 지훈은 철준과 도형의 행색을 보고 난감한 마음이 들었는데 더 놀란 건 지훈의 기타였다. 허름하고 여기저기 흠이 생긴 하드케이스를 열자 황금색 깁슨 ...
(리뷰자 주 : 철준의 기타가 아닐까.)
- 지훈은 웃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받았다. 그러자 춘식은 정색하고 말했다.
"지훈아 너 무대 몇 년 섰니?"
"무대요? 아니 그건 갑자기 왜..."
"내가 무대 위에 서서 밥 벌어먹고 산 지 벌써 삼십 년이 넘었다. 별의별 일을 다 겪어 봤단 말이다."
"예. 알고 있죠."
춘식은 나이로 따지자면 지훈의 아버지뻘이었다. 지훈은 춘식을 처음 만났을 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썼지만 춘식이 정색하고 호칭을 형님으로 바꾸어 부르게 했다.
"너 무대에 올라가면 거기 사람만 서 있는 것 같지?"
춘식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은 갑자기 온몸에 오싹 소름이 올라왔다.
'이 형님이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훈은 춘식이 무슨 의도로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 "아니다. 내가 널 데리고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그건 그렇고 아무튼 당분간 철준이 네가 잘 감시해라. 쟤가 네 말은 잘 듣고 따르더라. 그리고 당분간 일 끝나고 술 마시러 나가지 마라. 숙소 안에서 마셔. 부엌도 넓고 좋잖니."
춘식은 다시 다정한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예. 형님. 그렇게 할게요."
지훈은 바로 대답했다.
"그래. 내가 뭔가 찝찝한 게 있긴 한데 그걸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아무튼 당분간 너는 철준이만 잘 지켜봐. 부탁한다."
- 여자를 한 번 본 경험이 있다.
자유로에서.
- 그때는 자유로 괴담이 알려지기 전이어서 내가 자유로에서 귀신을 봤다고 이야기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이 정도까지 가까이 본 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내가 뭘 본거야? 뭐야? 귀신이야 사람이야?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 요금소 지나는 길이 천 길처럼 느껴졌다. 차를 영동 고속도로에 올리자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밝은 가로등과 내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는 많은 차. 쿵쾅거리는 가슴은 서울로 들어서자 완전히 잊혔다. 휘황찬란한 네온 불빛에 공포심은 씻겨나가기 마련이다. 그저 길에서 마주친 지박령이거니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생면부지의 여자가 나를 따라왔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 집안 공기가 미묘하게 뒤틀린 것 같았다. 거실을 걸어 나가는데 이유 없이 '저릿' 하는 느낌이라던가, 집안 공기 밀도가 영문 모르게 평소와 다르게 느껴진다거나, 몸살 오는 정도로 치부하다 문득 언젠가 한 번 경험했던 감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방문했던 선배 형 방, 옥탑방 주제에 방이 세 개나 있던 그 집.
- 한구석에 있던 방문을 열며 선배는 말했다.
"이 방은 여자 귀신 두 명이 사는 방인데."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하하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지만, 방에 발을 디디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말이 진담이었다는 걸. 기묘하게 뒤틀린 것 같은 시각감, 거실과 완연히 다른 공기 밀도감, 들어가자 순식간에 축축해져 버린 것 같은 대기. 그 선배는 틀렸다. 방에는 여자 귀신 두 명 '만'이 아니었다.
- 내 집 공기로 선배 집에서 느껴봤던 기분을 받게 되다니.
- 처음 그녀는 새로운 집에 대한 탐색전을 펼쳤나 보다. 삼사 일간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나 또한 기분이 뭔가 이상하긴 한데 꼬집어 정체를 말할 수 없는 불쾌감만 가졌다. 일주일 여가 지나자 그녀는 정체를 드러내고 싶었나 보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히히힉' 하고 웃는 여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웃음소리는 기이하게 멀었다.
그게 아니라면
기이하게 가깝던지.
-처음 그 소리가 들렸을 때 '옆집 소리가 넘어오나?' 생각했다. 방음이 꽤 잘 돼 있는 아파트라고 생각했는데, 여자 웃음소리조차 막아내지 못한다니, 일견 실소가 났다.
- 그게 아니다.
옆집이라고 다음에는 소리가 너무 가깝다. 수마가 몰려오던 머릿속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 확 얼어붙었다.
이상하리만큼 가깝다.
공포감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 나는 잠들어 있느라 그 톡을 보지 못했다. 잠이 깬 건 열두 시경, 영수 전화벨 소리 때문이었다.
"형 갔다."
영수는 짧게 말했다. '아, 그래' 말을 하고 움직이려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거짓말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온몸은 신열로 덮여 있었고 목이 아파 마른침조차 삼키지 못했다. 카톡에 미확인 메시지가 떠 있었는데 그 메시지는 영범 형이 보낸 문자였다.
'이 문자는 뭐지? 정상적으로 온 게 맞는 거야?'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기이한 감정이 나를 감쌌다.
- 나는 장례식장에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 영수 아버지 가셨을 때도 모든 절차는 내가 다 처리했었다. 가족 같은 사람이 세상을 떠났지만 나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자리에 드러누워 통증과 함께 찾아온 상실감에 시달렸다.
- 아픈 건 별개 문제였다. 그즈음 나는 현실적인 시공간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땀을 흘리며 끙끙거리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아파트 앞에 서 있다. 쨍쨍 맑은 햇살, 적당히 기분 좋은 산들바람 나온 김에 마실거나 좀 사가야겠다. 마트에 가서 물을 집어 들고 계산도 했는데,
다시 나는 침대에 있다.
꿈이었나? 하는 순간 다시 아파트 앞에 서 있다. 꿈과 현실의 나선형 경계를 지나는데 어느 지점이 꿈이고 어느 지점이 현실인지 도무지 분간되지 않았다. 목이 말라 부엌으로 나가면 꿈에 샀던 그 물이 까만 비닐봉지 안에 든 채 식탁에 놓여 있다. 너무 두려운 기분에 눈물을 흘렸는데 아파트 앞을 엉엉 울며 걷다 정신을 차리면 침대에서 엉엉 울고 있었고, 도대체 어디가 어딘가 하는 심정에 정신을 차려보면 계속 아파트 앞 도로를 걷고 있었다. 미궁에 빠진 현실에 괴로워할수록 침대 밑 여자 웃음소리는 크게 들렸다.
- "몸은 좀 괜찮냐? 도대체 얼마나 안 좋길래?"
형이 떠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시간, 영수가 나를 찾아왔다. 괜찮다는 나를 불러내 동네 죽 전문점에 마주 앉았다. '남자 둘이 죽집이라니' 뜨거운 죽을 앞에 두고 피식 웃었다.
"응. 몸은 뭐, 며칠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네."
몸이 조금 나아지긴 했다. 의식은 여전히 현실과 꿈속의 나선형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지만.
"형은 잘 보냈지?"
"응. 뭐, 잘 갔다. 양평 아버지 모신 가족공원에 같이 모셔놨지."
우리는 죽을 먹으며 형과 있었던 일화와 어렸던 과거를 추억하며 낄낄 웃었다.
- "그런데, 음..."
죽을 후후 불며 낄낄거리던 영수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너 별일 없냐?"
녀석이 생뚱맞게 물었다.
"아픈 게 별일이지. 팔다리라도 잘려야 별일인 거냐?"
나는 여전히 농으로 말을 받았다.
<북망산 가는 길>
- 그러니까 저기,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합니다.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은 밤입니다. 장마가 오려나 봐요. 비도 오고, 지금 시간은 새벽 열두 시 삼십구 분입니다. 아핫, 이거 시간은 빠르군요. 벌써 자정이 넘었다니, 무언가를 쓰기 시작하기 너무 늦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 누군가 같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혹은 누군가 같이 글을 보고 있는 듯한 밤입니다.
-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가 조금 있었지요. 이야기하자면 부끄럽지만 뭐, 어려서부터 생각했습니다.
크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사회적으로 아버지를 뛰어넘는 건 힘드니 아버지보다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 '이 옷이 얼마짜린지 알아?'라는 말을 쓰게 되는 유형의 인간은 흔히 말하는 졸부들입니다. 부의 상태를 드러낼 수 있는 물건으로 자동차나 시계를 생각하는데, 의외로 '옷'입니다. 가져보지 못했던 사람이 갑자기 많은 돈을 쥐게 되어 여태껏 살아온 계층과 확연히 다른 계층으로 뛰어 올라갈 때 가장 크게 괴리감을 느끼는 것은 옷입니다. 자동차나 시계는 우리가 평소 얼마나 비싼지 알고 있지요. 하지만 옷은 얼마나 비싼지 기실 알지 못합니다. 페라가모, 아르마니, 베르사체가 명품인 줄 알고 살았는데 그 위층층이 브리오니나 키톤 따위 브랜드를 알게 되면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리지요. 정장 한 벌에 천만 원이 넘고, 구두 한 켤레에 기백만 원을 지불하고도 싸게 잘 샀다고 생각하는 계층 말입니다. 그래서 입으로 드러내고 싶어 하지요. 얼마 전 영화 한 편을 보다가 웃었습니다. 정황상 재벌 2세로 나오는 배역의 대사가 "너 이게 얼마짜리 옷인 줄 알아?"였습니다.
웃었습니다.
정말 부자들, 대대손손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있는 계층은 그런 말 하지 않습니다. 진짜 재벌들은 천만 원짜리 옷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은 졸부들이 씁니다.
- 얼마 전까지, 제가 그 졸부였을지도.
갑자기 사업이 잘되었지요. 직장인 연봉을 한 달에 쉽게 쉽게 벌어들이기도 했습니다. 독일제 차와 브리오니 정장, 아테스토니 블랙 라벨을 신은 저는 흔히 말하는 졸부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가끔 삶은 그렇게 돌아갑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운이 '덜컥' 하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내 발 앞에 떨구어집니다.
- 끼리끼리 모입니다.
삶이 그렇게 바뀌다 보니 어느새 저도 '가진 자들 모임' 비슷한 만남에 끼었습니다. 충청도 어딘가 꽤 비싼 펜션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사용하던 모임이었습니다.
뻔합니다. 가진 사람끼리의 모임이란.
개정된 세법에 대한 정보와 괜찮은 투자 건 공유, 그 외 잡다한 바닷가 미역처럼 두둥실 거리는 신변잡기들.
- 저는 모임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반가량 일찍 도착했습니다. 태안 어느 바닷가였어요. 차를 세우고 가방을 들고 올라가는데 입구에 나이 지긋한 어르신 한 분이 앉아 계십니다. 청바지에 허름한 옷을 입고 머리는 하얗게 다 세어 버린. 돌계단을 올라가는데 웬일인지 그 어르신 행색이 제 발길을 부릅니다.
어르신, 여기서 뭐 하세요? 하릴없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 목이 좀 말라서. 초라한 행색의 어르신은 씩 웃으며 제 말을 받습니다. 마침 제 손엔 따지 않은 스타벅스 캔 커피가 들려 있었습니다. 어르신, 이거 커핀데 커피 드시나요? 제가 물었습니다. 아이고 고마워요. 초면에 이런 거까지.
저는 그 모임에 첫 참석이었습니다.
- 마담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강 대표, 회장님 예전 모습 모르나 봐요?라고 해서 예? 하고 반문했습니다.
예전에 회장님 여기 오시면 웨이터가 아무도 안 들어오려고 했어요.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병으로 얻어터지고, 싸대기 맞고, 그뿐인가, 여자애들은 열댓 명 다 불러서 홀딱 벗겨 놓고 괴롭히지, 가끔 말 안 듣는 거래처 사장들 데리고 와서 룸에서 혼자 반병신 될 정도로 줘패 놓지. 예전엔 정말... 아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강 대표, 나한테 이런 얘기 들었다고 하지 마요. 어이구 주책이야. 제발 부탁이니까 못 들은 걸로 해줘. 알았지?
- 이쯤 되니 어르신의 정체가 너무 궁금해집니다.
누구 얘기 들어 보면 감방도 다녀왔다고 하고, 건달도 휘어잡고 있다고 하고, 그런데 나랑 다닐 때는 뒷방 노인네처럼 허허실실 웃으며 쓸모없는 농담으로 소일하고. 그러면서도 그렇게 큰 회사를 손도 대지 않고 움직이고.
- 마담과 그 이야기를 한 날, 자리가 끝날 무렵 어르신이 무언가를 내게 건넵니다.
오다가 주웠는데 난 별로고 너 써라, 하면서 제게 툭 던져 주시더군요.
열어봤더니 파테크 필리프입니다.
이런 시계는 사진으로나 봤지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다니. 그런데 모르면 받겠는데 여러 가지 정황을 알고 나니 도저히 못 받겠더군요. 고백하자면, 시계를 건네받는데 손으로 뭔가 찌릿하고, 닿지 말아야 할 곳에 손이 닿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이건 피해야 한다고, 본능이 소리칩니다.
그래서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 어르신, 저희 모친이 누누이 말씀하시길 주운 물건 함부로 탐하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이런 시계 제가 손목에 차고 다닐 주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건 제가 받기 힘드네요. 저는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그래? 하고 저를 힐끗 쳐다보는데, 어르신 눈빛에서 '쌩' 하고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상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러더니 다시 웃는 낯빛으로 돌아와, 그래, 자네 좋은 어머니 두셨네 그려. 다시 시계를 거두어 가더군요.
- 이런 일반적 상식에서 어긋나는 경험을 어르신과 함께하며 많이 겪었습니다.
어딘가 드라이브를 가다가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는데 경치도 좋고 장사도 잘되겠다고 하자,
그래? 나도 그렇게 느꼈네. 하시더니 저를 보지 않은 채 혼잣말을 조용히 중얼중얼하더니 그 자리에서 건물을 통째로 사 버립니다.
뭐, 그런 패턴입니다.
-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왠지 어르신을 조금 멀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같이 다녔는데도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죠.
- 만약에 말이죠, 현재 내가 벌고 있는 돈보다 월 1~2백씩 더 번다면 어떨까요? 생각만 해도 기쁘겠죠?
당장 여기저기 숨이 막히는 돈들도 여유가 생길 것 같고. 친한 친구들에게 자랑도 할 겁니다. 친구들도 응당 축하해 주겠죠. 친구들과 저녁 약속 후 술값도 호기롭게 낼 테고 말이죠.
- 그러면 범위를 조금 바꿔서 지금 벌고 있는 돈에 영(0)이 하나 더 붙는 돈이 생긴다고 가정해 보시죠.
어떤 일이 생길까요?
과연 '나 좀 많이 벌어'라고 친구들 앞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 정도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눈빛이 바뀔 겁니다. 정말 친하다면 면전에서 '지금 자랑하냐?'는 식의 비아냥거림은 들을 수 있을 겁니다.
- 많은 분이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야, 그럼 내가 지금 삼백 벌어서 생활하니까, 이걸로 여전히 생활하고 나머지 돈은 몽땅 저금할 수도 있겠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 주위에 부자들이 혹은 돈 잘 버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데 왜 내 주위에는 없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뿐이죠. 남들보다 백, 이백 정도 풍족하게 벌면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평균치를 훌쩍 뛰어넘어버리면 입을 꾹 닫아 버립니다.
그런 이야기해 봤자 둘 중 하나거든요.
따돌림당하던지, 호구로 전락하던지.
- 상황이 그렇게 되면 당신은 어느새 그 정도 버는 수준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을 겁니다. 원하지 않아도 그렇게 돼 있을 겁니다.
자, 이제 당신은 그런 모임에 나가기 시작합니다.
알고 보면 우리 주위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못 알아볼 뿐이지.
왜 못 알아볼까요?
- 이외수 씨가 그런 말을 하셨죠. 고수는 하수를 알아보지만, 하수는 고수를 못 알아본다고.
예를 들어 보자면 말이죠.
당신이 어느 모임에 나갔는데 다른 사람들이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 스트라파타 잘 빠졌는데, 이거 리얼 버튼이지?"
- 물론 뭐 실제 이런 대화를 입 밖으로 내지는 않지만 말이죠.
아무튼, 이런 대화가 오갔을 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까요?
쉽게 말하자면, 당신은 상대의 비싼 옷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상대는 당신의 옷이 그저 평범한 기성복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봅니다.
참 무섭죠?
- 그런데 사실입니다. 당신은 아마 상대가 아무리 비싼 옷을 입고 나와도 결코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아마 '저 옷은 바느질이 왜 저래? 삐뚤빼뚤하게, 쯧쯧' 의류 전공자가 아니라면 이렇게 생각할 공산이 큽니다.
- 그러면 당신이 그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요? 그걸 알게 되면 당신은 인간관계에 대한 공포심이 느껴질 겁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당신의 생활이 여전히 현 상태 그대로 유지될까요?
그 생활 방식이 바뀌는 건 순식간입니다.
- 당신은 식당에 들어가서 메뉴판을 보며 뭐가 맛있을까? 먼저 생각하지, 가격을 먼저 보지 않을 겁니다.
페라가모나 아르마니를 보고 '어휴, 저 싸구려 브랜드, 저런 거 못써, 사지 마'라고 할지도 모르겠군요. 공항 면세점에 들어가 옷이 마음에 든다고 입어보는 중인데, 마음에 든다는 판단을 내리기까지 가격표를 보지 않을 공산이 큽니다. 아마 재질도 캐시미어와 실크가 50 대 50으로 섞인 제품일지도 모르고요.
카메라를 취미로 한다면 사무엘, 오이만두, 만투, 새아빠를 기본으로 갖추고 서브로 라이카에 녹티를 물릴지도 모르겠군요.
강남역 어딘가 신호 대기선에 서 있는데 부웅, 치고 나가는 포르쉐를 보며 '한 대 살까? 같이 다니는 ㅇㅇ도 한 대 샀다는데'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얘기하자면 끝도 없지만, 상상이 지나치면 해로우니 이 정도 하기로 하죠.
자, 당신은 이제 물질세계에서 남들이 말하는 풍요를 누리게 됐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심리는 어떻게 변할까요? 행복하네, 마네, 이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하지 말죠.
- 물론 당신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니 당연히 행복하겠다고 생각하지만, 행복은 물질과 무관한 개인 능력입니다. 이건 제가 단언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이런 생각을 할 겁니다. '아, (이 세계를 이미 알아버린 이상) 다시 평범하게 돌아가기 싫다.'
두 번째로, '이 정도 벌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줄 알았더니, 나는 여전히 하찮은 밑바닥이구나.'
이 두 가지 사실을 느낄 확률이 높습니다.
- 그리고 당신은 더 많은 부를 이루기 위해 (혹은 다시 평범하게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 온갖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합니다. 혹시 한방 크게 삐걱해서 다시 사는 게 힘들어지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사업을 더 안정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질 확률이 높습니다.
잠들기 힘들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 같고, 하루하루 서슬 퍼런 면도날 위를 걷는 기분을 느끼실지도 모르겠네요.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분노가 주체가 안 돼 사소한 일에도 주위에 소리를 지릅니다. 더더욱 무서운 건 정신세계가 이렇게 피폐하게 변했다는 걸 자신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 그러니까 말하자면, 제가 어르신을 만났던 그 시기가 그런 상태였습니다.
매사 신경은 곤두서 있었고, 정신은 황폐한 상태인데 정작 본인은 자각하지 못합니다.
빨리 더 올라가야 하는데, 혹시 잘못 삐걱하면 한방에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데 하는.
- 조직에서 좀 쉬다 오라고 보름간 필리핀으로 휴가도 보내주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살아야 하겠기에 다시 조금씩 힘을 내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그 여자가 어르신 앞에 나타났대요.
어느 날 새벽, 잠결에 그렇게 느꼈답니다.
'난방을 틀어 놨는데 왜 이렇게 춥지?'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느껴보니 누군가를 팔베개해주고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어제 술을 마셨나? 그래서 술집 여자를 데리고 이차를 나왔나?라고 생각하며 팔베개해 준 사람을 자세히 보는데, 목 매달은 그 여자가 자기 팔베개를 한 채 씩 웃더랍니다. 소리도 못 지르고 그 상태로 딱 얼어 있는데 침대 옆으로 '찰싹찰싹' 하고, 누군가 맨발로 방 안을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립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엄마품에서 죽어 있던 아이가 웃으며 방에서 기어 다니며 놀고 있었다네요.
- 그때부터 그 모자는 쭉 어르신을 따라다녔답니다.
그런데 그냥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사업적으로 중요한 일을 판단해야 할 때 옆에서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 가르쳐 준답니다.
- 어르신이 두목의 신임을 받으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할 때, 사실기업 자금 세탁 일을 맡긴 것 때문에 그 조직 사람들의 엄청난 견제가 시작됐었다는군요. 이게 조직 핵심의 오른팔이 돼야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조직의 이인자 정도 되는 사람이 은밀히 부르더래요. 굉장히 친한 척하며 조직에서 승승장구하게 해 주겠다며, 강북에 있는 룸살롱 하나를 싸게 인수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답니다. 어르신 처지에서 평소 자기를 견제하던 사람이 도와준다고 하니 이게 화해의 몸짓인가 싶어 인수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 여자가 그러더래요.
이 등신아,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아냐? 그 터에 배고픈 귀신들이 바글바글 웃으면서 놀고 있는데 그런 가게를 왜 인수해?
- 그래서 이래저래 둘러대고 인수를 거부하고 있는데 그 가게를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던 바지사장이 빚을 잔뜩 지고 도망가 버리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후 그 가게에서 살인 사건도 일어나고, 누전으로 화재도 나고, 결국 그 가게를 떠넘기지 못했던 이인자는 어마어마한 손실은 물론이고 그 건으로 조직의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됩니다.
원래 그 가게 지분을 쥐고 있던 여자 바지사장이 자꾸 딴짓하는 것 같고, 종업원들도 삐딱하고, 또 터가 그래서 그런지 취객들 사고도 잦고 해서 은근히 챙겨 주는 척하며 어르신에게 떠넘길 심산이었다고 하더군요.
- 고요한 룸 안에 어르신과 둘이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데 이상하게 터무니없다거나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냥, '그럴 수도'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물었습니다.
그럼 어르신, 지금 이 자리에도 그 여자가 있습니까?
그럼, 있지.
아!
- 처음부터 자네 옆에 계속 앉아 있었지.
- 사실 이날 어르신과 술 마시기 전까지 제가 한동안 어르신을 피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의외로 사업하는 사람들이 운을 많이 따집니다.
제가 아는 많은 기업 대표 중 만나기만 하면 어디 사주 보러 가자, 어디 용하다더라, 점 보러 가자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닌데, 저도 사업은 '운칠기삼'이라는 말을 믿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날 펜션에서 어르신을 처음 만난 이후부터 자꾸 사업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 그럴 때가 있어요. 사업이 잘될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발주가 쏟아지고, 기대도 하지 않던 계약이 성사되고, 그래서 사업을 하면 할수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 이거 일은 사람이 하는데 운은 하늘이 내려 주는구나.
그런데 그 어르신을 만나고 같이 어울린 후부터 제 기운이 쇠해 간다는 느낌이 듭니다. 응당 이뤄져야 할 계약도 돌발적으로 생긴 변수로 어그러지고, 생각지도 않았던 부분들에서 클레임이 들어오고. 이런 악재들이 이유 없이 반복되다 보니 도대체 이유가 뭐지? 생각만 하고 있다가 어느 날 어르신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 저도 사람을 판단하는 느낌이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운 같은 걸 참 민감하게 빨리 눈치채는 편인데 어르신을 만난 후로 이 기운이 점점 쇠해 가는 게 느껴졌어요. 이해하기 힘들지 모르겠는데 예를 들어 누군가 만나 웃으며 악수할 때 제게 반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삐죽삐죽한 가시가 나를 찌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떤 계약서는 말도 되지 않게 황당한데 따뜻한 느낌이 들어 계속 진행하다 보면 이루어지고, 어떤 계약서는 도무지 빈틈이 없는데 뭔가 따끔따끔한 느낌이 들어 눈여겨보고 있으면 잘 가다 어그러지고.
사업을 하며 길러진 나만의 '감' 같은 것이 있는데 이게 어르신 하고 지낼수록 무뎌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한동안 어르신을 피했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점점 사업에 악재가 끼어들기 시작하자 조금씩 초조해지던 시기였습니다. 얘기했듯이 사업하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좋지 않은 징조들이 생기면 굉장히 불안해합니다.
상상을 초월하죠. 밤에 잠을 못 이루고, 혼자 술 먹는 날들이 많아지고, 사소한 것들로 직원들한테 소리 지르고.
- 이봐. 강 대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던 어르신이 은근한 목소리로 제게 말을 건넵니다.
사실 내가 이룬 것들, 모두 내가 이룬 게 아니야. 다 그 여자가 이뤄 준 거지.
갑자기 어르신 눈빛이 차갑게 변한 게 느껴져 머리털이 쭈뼛 섭니다.
아... 그... 그렇습니까? 그런데 왜... 다른 사람한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를 저에게.
- <모자의 복수>
- "딛고 꼿꼿이 서 있었어. 왜 그런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묻지 마. 기억이 잘못됐을 수도 있지만, 어쨌건 내 머릿속에는 그렇게 기억돼 있어."
종현은 자신의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굳이 항변하지 않았다. 믿어도 그만, 믿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게 형, 익사한 영가들은 자기 죽은 자리에 다른 사람 영혼을 붙잡아 놔야 그 자리에서 떠날 수 있는데, 그렇게 죽는 사람들은 물속에서 꼿꼿이 선 채로 죽는대요."
"그래? 처음 듣는 얘기네."
종현은 소품의 말이 신선했다. 종현은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했다. 다만 구룡포 바닷가 이야기에 조금 이상한 후일담이 존재했다.
- 종현이 서울 집으로 올라가기 전 삼촌과 할머니는 구룡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엄마와 아빠에게 절대 말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종현은 아빠 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는 내내 구룡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방학 기간 내내 포항에서 재미있게 놀았고, 조금만 기다리면 엄마도 볼 수 있었다. 웅덩이에서 있었던 일은 어린 종현의 머릿속에서 이미 까맣게 잊혔다. 엄마를 보면 김치찌개와 양파 계란 볶음을 해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집에 도착해 아빠는 현관 벨을 눌렀고 엄마는 환한 웃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우리 아들 잘 놀다 왔어?"라며 종현을 맞았다. 그러다 아빠 뒤에 서 있던 종현을 보자마자 표정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잠깐만 들어오지 말고 거기 서 있어."
종현의 엄마는 빠르게 뒤돌아 집으로 들어가더니 손에 무언가를 잔뜩 움켜쥐고 나왔다. 그리고 손에 쥔 굵은 소금을 힘껏 종현을 향해 뿌렸다.
- "아니, 그때 아빠 뒤로 네가 서 있는데 어떤 젊은 여자가 네 뒤에 씩 웃으면서 서 있지 뭐니. 아이고 무서워라. 지금 생각해도 오싹하다. 내가 그때 너 따라온 그 여자 때문에 절에 가서 얼마나 기도를 드렸는지 아니?"
종현의 엄마가 그 얘기를 한 건 종현이 스무 살이 넘어서였다. 덕분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구룡포 이야기가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 "그런데 정말 어제 채팅할 때 내 뒤로 누가 서 있던 게 보였어? 설마 너 장난한 거 아니지?"
탤런트는 소품에게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장난이라뇨. 누나, 어제 내가 말했던 거 맞지 않아요? 얼굴 반쯤 화상 입고 생머리 길고 쌍꺼풀 없이 눈 좀 크고. 누나가 미리 말도 안 했는데 내가 그 여자를 알고 있을 리 없잖아요."
그 말을 듣자 종현도 호기심이 동했다. 탤런트가 아는 여자는 누구이며 왜 그렇게 놀랐는지, 소품은 또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탤런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머릿속 생각을 먼저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요즘 내가 잠을 잘 못 자. 아니 이렇게 말하니까 별거 아닌 것 ... "
- 백뚱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도시의 차가운 바람이 종현의 탐을 휘갈기고 지나갔다. 어두운 길 위로 지나가는 승용차의 헤드라이트가 백뚱의 얼굴로 길게 드리웠다가 오렌지색 음영을 남기며 빠르게 사라져 갔다. 백뚱은 까치발을 들더니 종현의 귀를 잡아당겼다. 종현의 귀를 입에 가까이 댄 백뚱이 말했다.
"오빠, 나 사실, 이 바닥에서 꽤 알아주는 무당이야."
- 30여 년을 살며 종현이 마주했던 공포감은 현실적인 문제들이었다. 시험성적이나 진학에 대한 문제들, 부모님이나 가족의 건강이나 친구들의 건강 문제, 그리고 군대에서 M16 A1 자동 소총에 첫 실탄 장전 후 과녁판을 바라보며 사격 대기할 때, 학창 시절 느꼈던 취업에 대한 불확실성, 취업하게 될 회사 간판으로 결정되는 사회적 위치, 취업 후 꼬박꼬박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카드 결제일.
- 그때까지 마주했던 공포감은 대부분 사람이 경험하는 실체적인 것들이었고 형태는 명확했다. 그 감정은 '공포심'이라기보다 '두려움'에 가까웠다.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라는 것은 아주 강력한 힘을 전해준다.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고,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라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공포심이라기보다 그저 조금 두렵다거나 번거로운 일에 가까울 수 있다.
- 그렇지만 '나만 겪게 되는 일'은 이야기가 다르다. 북풍한설 몰아치며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겨울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맞이하기에 당연하게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봄, 여름, 가을만 순환되고 내게만 겨울이 찾아온다면 이건 다른 문제의 이야기가 된다. 종현은 미증유의 사태가 두렵기도 했지만, 본인이 왜 이런 상황에 맞닥뜨려야 하는지 의아했다.
- "오빠, 오빠는 왜 탤런트 언니랑 만났는지 모르지?"
백뚱은 점점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모르긴 왜 몰라. 내가 채팅방 만든 죄로 만났지."
종현은 몰려오는 두려움을 최대한 유머러스하게 희석하고 싶었다.
"참, 나 띨띨하기는. 사람 인연이라는 게 오빠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백뚱은 거침없이 단어를 선택해 말했다. 백뚱이 말하는 함의를 파악조차 하기 힘든 종현은 화를 내야 하는 건지 그냥 듣고만 있어야 하는 건지 판단할 수 없었다.
- 종현은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어휴, 뭘 좀 아는 사람하고 말해야지. 그게 오빠 말처럼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고..."
백뚱은 말끝을 흐렸다. 말없이 도로를 바라보고 있던 백뚱은 종현을 보며 다시 씨익 웃었다.
"아무튼 오빠. 사람은 자기한테 도움이 될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아보고 이끌리기 마련이야. 나중에 내가 무슨 말 했는지 오빠도 다 알게 될 거야."
백뚱은 말을 마치며 슬며시 다시 종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빠 나 춥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우리 어디 따뜻한 데 가서 얘기하자."
- 백뚱은 소품에게도 화상 입은 여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하자 테이블을 치며 크게 웃었다.
"야, 너는 지금 나하고 소품에게까지 꿈속에 그 여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웃음이 나오냐."
종현은 백뚱에게 짜증을 냈다.
"꿈? 그래 오빠는 꿈이라 치고 소품 오빠는 아닐걸."
백뚱은 의외의 말을 했다. 종현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꿈이 아니라니? 그럼 소품은 현실에서 그 여자가 나타난다는 얘기야?"
"아마 그럴걸?"
종현은 심각하게 말했지만 백뚱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 "아니, 소품은 자기가 영적 능력이 어느 정도 있다 그랬잖아? 그런 걸 해결하는 능력은 전혀 없는 건가?"
"영적 능력은 개뿔. 오빠, 소품 오빠 같은 사람들을 바로 '선무당'이라고 부르는 거야. 영적 능력 좋아하네. 당장 몸주 모셔야 할 사람이 자기 운명은 생각지도 못하고 쓸데없는 소리만 떠들고 다니는 거지. 근데 어떡하나. 내가 그 오빠 몸에 영가들 잘 보이게 아주 기를 빵빵하게 충전시켜 줬거든."
"뭐? 설마..."
"가만 보면 애매하게 신이 내린 사람들이 꼭 그렇게 까불고 돌아다니다 아주 크게 혼쭐이 나요. 소품 오빠도 딱 그런 경우였지. 빨리 신을 받아야 하는데 본인은 그것도 모르고 영적 능력이네 뭐네 떠들고 돌아다니니까 몸주가 잔뜩 화가 나 있었어. 내가 그 오빠 영 안을 확 트이게 해 줬으니까 이제 당분간 오만 잡귀들까지다 보일 거야. 신병이라고도 하지."
백뚱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킥킥거리며 말했다.
- "그럼 너, 첫날 소품한테 일부러 그런 거야?"
종현의 질문에 백뚱은 샐쭉하게 눈을 떴다.
"오빠. 이쪽 세계는 일반인들이 모르는 규율이나 법칙 같은 게 우리들끼리 존재하는 법이야.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
"그런데 너 나한테는 왜 그랬어? 둘이 따로 술 한 잔 더 하자는 둥 수작질했잖아."
"어머, 이 오빠 좀 봐. 수작질이래. 내가 오빠한테 수작을 왜 걸어. 오빠는 이 모임에서 빠지라고 얘기하려 그랬지. 다른 사람들 있는 데서 얘기하기는 그렇잖아. 탤런트 언니는 원귀한테 당하는 당사자고, 소품 오빠는 아까 말한 대로 까불고 돌아다니니까 엮인다 치고. 난 암만 봐도 오빠가 이 인연에 왜 끼어 있는지 이해하기가 힘들었거든. 딱 보아하니 속도 여리여리해서 상처도 잘 받을 것 같고. 그래서 빠지라고 하려고 했지. 뭐 오빠가 듣지도 않아서 문제지만."
- <방배동에서 생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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