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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련] 오늘은 예쁜 걸 먹어야겠어요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8. 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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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서련
출판 : 작가정신
출간 : 21.12.28


       

           

케이크는 산다 한들 먹지 않을 것 같은데
'날 위해' '예쁜' '케이크'를 사는 기분 자체를 갖고 싶어서

 

 

 

딱 이런 기분으로 조각 케이크를 사서 귀가했다.

 

마치 내 속을 현미경으로 살펴본 것마냥 헤집어 드러내 놓는 문장을 만나면

미칠 것처럼 좋은데 죽이고 싶을 만큼 부끄럽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라는 위로가 클 때는 감사하고 기쁘지만, 끝내주는 것 같았던 그 생각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는 걸 -이미 발표된 남의 문장으로 읽고 있으니 확정적으로 빼앗겼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화가 치밀기도 하고. 

비슷해서 좋은데 비슷해서 싫다니 이것이야말로 동족혐오가 아닌가 싶고.

 

... 같은 글을 써보고 싶었다.

박서련 작가의 문장을 조금이라도 닮아보고 싶어서.

 

타인의 일기를 읽는다는 것은, 

내밀함 측면에서 더할 나위 없이 관음적이고,

원래는 공개될 일 없었던 날것의 생각과 표현과 감정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강렬한 동질감과 위로를 줄 수 있고,

타인의 일기보다 재미없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에 슬프게도 만들 수 있는데, 

어차피 오스카 와일드의 것만큼 재미난 것도 드물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싶어 지는데. 

 

이렇게까지 드러내도 되는 걸까,

읽을 수 있게 해줘서 감사하다, 

아 나도 온수매트 체험해보고 싶다,

사 온 케이크 마르기 전에 먹어야 하는데,

 

등의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 나, 마들렌>을 생각했다.

아진과 드바를 생각했다. 

... 언젠가, 이제는 말해도 되는 것들 중에 하나였을까, 생각했다. 

 

 


   

 

작가의 말을 대신하여


2021년 12월 1일


갑자기 산문집을 내게 됐다. 초봄에 외서추천사 청탁을 해왔던 출판사와 늦봄에 미팅을 했고, 원래는 다른 책 이야기를 하려고 만났던 그 미팅자리에서 산문집 이야기가 나왔는데, "저는 제가 쓰는 글 중에서 일기가 제일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말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고... 그렇게 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난 몇 년간 쓴 일기 중 생판 남에게 보여도 되겠다 싶은 원고들을 추려 보낸 지도 몇 달이 지났고 늦가을에는 책을 낼 준비가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별안간, 갑자기 말이다. 편집자를 만나고 원고를 넘기는 등의 사건들도 서로 몇 개월의 간격을 두고 일어났기 때문에 책을 만드는 데에 통상 드는 시간을 생각하면 객관적으로 그렇게까지 뜻밖의 사건이 아니어야 할 텐데, 어쩐지 나에게는 그렇다. 

일기를 쓰지 않은 나날에 대해 한참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둔 내 일기가 책이 되어가는 동안에. 마지막으로 일기를 쓴 지는 2년이 넘었고 올 중순부터는 일기 대신 작업일지를 쓰던 참. 예전에는 어떤 일이 며칠에 일어났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홈페이지(일기를 '연재'하고 있었다)를 보곤 했는데 요즘은 메일함을 열어 날짜를 참고한다. 그나마도 과거사를 분명히 기억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차 일어날 사건이 정확히 언제 일어날지를 알기 위해서에 가깝다. 식사 약속이라든가 원고마감이라든가 꼭 참석해야 하는 행사라든가.  

그러면 일기를 책으로 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일기를 하나 더 써서 그걸로 작가의 말을 대신하면 어떨까 하는데요,라는 의견을 전하자 편집자님도 좋다고 했다. 그게 이거다. 원래는 일주일쯤 전에 쓰려고 했는데 하필 그날 컴퓨터가 고장 나 (11/24) 쓰지 못한 일기. 쓰려다 못 썼더니 첫 문장이 지치지도 않고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갑자기 산문집을 내게 됐다." '갑자기'가 '별안간'이 되거나 '됐다'가 생겼다'로 바뀌거나... 등등의 변형도 때때로 일어났지만 뜻은 그대로였고 그게 첫 문장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변치 않았다. 산문집의 첫 문장으로는 멋대가리가 없겠지만 오랜만에 쓰는 일기의 첫 문장으로는 더없이 정직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쓰는 일기에 무엇을 더 고백해야 하나. 일기라는 존재를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로 의인화할 때 내가 하고 싶은, 해야 할 것 같은 얘기는... 
나 차 샀다?
스스로 평가하기에 나는 자랑에 그다지 소질이 없는 편인데, 그사이 내게 일어난 또는 내가 일으킨 일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랑거리가 이것이다. 내게는 그동안 좋은 일이 많이 있었다. 서른세 살이 되어 첫차를 산 일 (객관적으로 빠르지 않다는 것 -더구나 중고로 구입한 경차- 을 알지만 동종, 인접 업계 종사자 대다수가 자가용 구입을 고려조차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정도는 우스울 만큼이나 좋은 일이 꽤 있었다. 물론 나쁜 일들도 있었지만... 일기가 의인화되어 나와 대화할 수 있다면 연락이 뜸할 동안에 일어났던 나쁜 일들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게 예의겠지. 자기가 모르는 사이 내게 있었던 좋은 일과 나쁜 일 모두를 나 자신보다 훨씬 예민하게 받아들일 테니까. 


나는 일기가 아니지만 일기는 나니까.




- 너무 자기 검열이 심한 거 아냐?라는 말도 있었다(8/3). 처음 보는 어른들이 잔뜩인 술자리에서, 그래도 두 번째 보는 조금 덜 어른인 사람이 해준 말이다. 물론 이건 내가 답정너처럼 나 오늘 실수하지 않았지? 정말이지? 하고 거듭거듭 물었기 때문에 귀찮아서 해준 대답일 가능성이 크지만.

- 나의 나 됨을 사과하는 것도 이제는 다소 촌스러운 일인 걸 안다. 그래도 그걸 매번 염려해 주는 사람들에게는 어쨌든, 포즈로서가 아니라, 진심을 담은 사과를 해야 한다. 어떻게 말하지. 나에게 실망하면 어떡하지. 나를 싫어하게 되면 어떡하지- 따위를 걱정하다가 결국 말하지 못한 일이 너무 많다. 내 입으로 전하지 않은 채 드러나버리는 비밀들은 감당하기가 더 어렵고, 나는 비밀이 너무 많아서 금세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데

- 그러니까 맹목적으로 맹목적으로 맹목적으로 나를 긍정해 주는 내 편이 내게는 필요하고, 그게 꼭 사랑이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는... 바로 이런 생각에서 미친 영화감독 지망생과 잤던 것 같다. 이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서 비밀인 동시에 내가 가지고 있는 비밀들 중 가장 나쁜 축에 드는 이야기인데, 이걸 들었으니 당신은 이제 나를 미워해선 안 된다.

- 그렇게 오래된 모델은 아닌지라 외부가 깨끗하다면 기능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나름의 도박을 벌인 것이었다.
필름을 받은 직원은 월요일에 웹하드를 확인해 달라고 했다. 나오면서 그것 참, 하고 생각했다. 월요일에 사진이 무사히 나온 걸 보면 화요일에 나올 면접 결과도 왠지 좋을 것 같아, 하는 유치한 생각을 하며 걸었다. 만약 내가 탄 배의 돛이 붉은색이면 내가 이무기를 이긴 것으로 알아주오... 뭐 그런
인과도 상관도 없는 것들끼리 미신적이고 자의적인 관계를 만들어 짝짓는
그런 건 인간만 하는 짓이고 그래서 그게 문학이 아닌가 하는 뭐 그런
그런 생각도 들었다.

- 달리 말해 나는 1년이나 무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망가진 카메라를 100유로나 주고 산 걸지도 모른다는 망상이 현실이 될까 봐(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는 생각 또한 늘 하고 있기는 했지만-그렇게 생각했다가 실망하게 되면 더 슬플 거란 생각이 후속으로 연속으로 자꾸자꾸 들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월요일에 카메라의 무사함을 확인받아서 화요일도 좋은 소식을 듣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말았다(위에서 괄호로 열심히 부연했듯이 역시 좋은 기대를 품었다가 반대의 결과를 마주하게 되면 받게 될 내상 같은 것도 물론 생각하고 ... )

- 공기 질이 아주 나빠서 담배 필터를 물고 숨 쉬는 게 차라리 몸에 좋게 느껴질 정도다. 아아 세계는 어찌 되려는 걸까, 하고 생각하며 어깨에 담요를 둘렀다. 세계 걱정을 자연스럽게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일시적으로나마 스스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할 게 없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 "없었던 일로"는 소위 '칼로리컷' 다이어트 보조제다(나는 기본적으로 소화제라고 믿고 있다). 90포에 거의 10만 원에 육박하는 고가의 제품이고 이따금 올리브영 등의 드럭스토어에서 세일할 때가 있어 작년에 한번 먹어봤다. 제품명이 멋지다. 마음껏 먹고, 그것을 "없었던 일로" 만든다는, 참으로 멋진 사고방식에서 나온 작명이 틀림없다. 물론 어떤 일도, 이미 일어난 일들은, 심지어는 상상된 일들 중 일부 또한, 결코 없었던 일이 되지 않는다. 이 사실 자체는 중립적이지 않냐, 가혹하기도 하지만 언젠가 도망칠 성역이 되기도 하는.

- 내키면 불러달라고 했고, 그 요청이 수락된 거였다. 악어에서 안주 세 개를 시키고 두어 시간 노닥거리다가 걸어서 한강에 가 캔맥주를 마신 다음 내가 가끔 혼자서 가는 코인 노래방으로 갔다. 

 

- H의 친구이고 나의 지인이기도 한 그 사람은 기상학을 전공하고 있으므로 이 일기에서는 기상학도라고 부르자. 기상학도는 시를 쓰고 기상을 공부한다. 나는 그 애가 나를 싫어한다고 오래 믿어왔고 그 애도 그런 이유에서 내가 그 애를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다. 하여 서로 섞일 일이 별로 없으되 딱히 서로를 떠올릴 이유는 없어서 많이 미워하지는 않는 채의 비非관계가 유지되어 왔는데 그저께는 어쩐지 그런 생각들을 청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영속되는 선의가 없다면 영속되는 악의도 없는 게 당연하지 않냐 뭐 그런 생각이었다. 만나서 첫 담배를 피우면서부터 다짜고짜 ...


- 개그팀들의 레퍼토리들을 한 일곱 시간 정도 쉬지 않고 봤다.

그런 것들로 시간을 보내면서 나 되게 부지런하구나 하는 착각을 하고 있다.

- 이 말로 의사가 전하고자 한 주된 메시지보다도, '보통'이나 '정상', '평범한' 등의 말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 착잡한 심정으로 밥을 안치고 전날 얻어온 찜닭을 데웠다. 뒤풀이에서 싸 온 것이다. 뒤풀이에서 음식이 남을 때마다 왠지 거의 유일한 자취인인 나에게 돌아오는데 고맙기도 하고 멋쩍기도 하고 조금은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랄지, 요즘은- 이랄지 알 수 없는 자격지심 같은 것도 들기 시작했다. 어제는 나 말고도 자취인이 한 명 더 있고 남은 음식도 너무 많아서 몫을 나누어 가져왔는데 일전에 그런 대화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작가가 자취한다는 사실을 알던 다른 누군가가 술자리에서 남은 치킨을 싸 가라고 권했는데 무척 차갑게 "저 그렇게 없이 살지 않습니다"라고 하셨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는 나도 모르게 "멋있다!"고 감탄하고 말았다.
(덧붙여 "그런데 오늘은 순순히 남은 거 가져가신다 함은... 지금은... 없이... 살고 계시다는... 하고 조심스레 물으니 다 그렇죠 하는 류의 맥없는 대답을 하며 하하 웃었다.)


- 내 입에는 조금 달고 얕은 맛이었기 때문에 (짠맛과는 별개로...) 냄비에 덜어 고추를 썰어 넣고 다시 끓였다. 그거 말고도 냉장고에는 던킨 도너츠가 다섯 개, 스타벅스 초콜릿 스콘이 한 개, 뼈해장국 1인분이 더 들어 있음을 생각하며 언제 어떻게 다 먹나 부질없는 고민을 했다. 무리해서 다 먹으려다 또 위경련이라도 오면, 아니 고등학교 때는 숫제 생리 기간엔 아예 단식을 했는데, 왜냐면 위장이 너무 쉽게 꼬여서, 하는 생각을 했다. 

- 저녁에 대학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근황과 <디아블로3> 이야기를 나눴고 결국 지금 <디아블로3>를 설치 중이다. 10월에 지구를 멸망시킬지도 모를 소행성이 온다는 뉴스를 줄곧 떠올리고 있다.

-
'이러한 사건과 경험이 있었고 그렇게 생각했다는 기억과 인상을 가지고 있다.'
거의 모든 일기가 이런 식으로 쓰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다. 몸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만큼 안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변화도, 아니 어쩌면, 안의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서른 언저리의 여자 모임(그 자리는 '여자 모임'이 아니었지만)에서는 '순수한 사랑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토크 에이스라는 말이 떠올랐고 (미네 나유카 만화 <아라사의 달콤한 일상> 시리즈에 나오는 말이다) 그 말을 그 자리에서 하니 다들 그렇지, 확실히 그런 얘기가 드물어졌지, 하고 끄덕였다. 

- 아진이라는 연극배우가 즉석에서 각자에게 별명을 하나씩 지어줬다. 나에게는 '달로’라는 이름이 어떠냐고 했지만 거절하고 '아니'라고 불러달라 했다. 원래 그렇게... 웃음이 없어요? 하고 아진이 물어서 저 지금 이게 굉장히 박장대소하고 있는 겁니다... 라고 웃음기 없는 얼굴로 대답하니 모두 웃었다. 지금 완전히 홍상수 영화 같아,라고 누군가 보충해서 그럼 저 지금 클로즈업 됐을까요?(홍상수 영화에서 클로즈업되는 인간은... 쓰레기잖아요...)라고 되물었고 또 모두 웃었다.

 

- 자리가 파하기 전에 일어났고, 나오려 할 때 누군가 내 손을 붙잡고 언니 연락처를 E씨에게 물어봐도 좋겠냐고 해서 (왜 직접 묻지 않으시고?) 그러라고 했는데 아직 연락이 안 왔다.
E씨의 파티인데 정작 E씨 이야기가 별로 없네. 건강해 보여서 좋았다. 이날 E씨의 별명은 드바였다. '아진'이 러시아어로 숫자 '1'이어서 '드바(2)'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 일명 햄파티 날은 무척 더웠다. 햄파티 며칠 전에 산 언니가 넌지시 뭘 사 오겠냐고 물었는데 이때 가지칠리튀김을 사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그 예행연습으로 E씨의 파티에도 같은 것을 사갔던 것이다. 결과가 대호평이라 내가 깜빡한 것이 있는데 가지칠리튀김을 들고 지하철을 타면 무척 자극적인 냄새가 나서 눈총 받기 딱 좋다는 점... 혜 언니네 집 근처 편의점에서 콜라와 아이스크림을 사서 양손에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을 나눠 쥐고 집 앞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들어갔다. 이날 카스타네르 에스파드류 그러니까 유럽 짚신을 처음 개시해서 걷기가 조금 고되었고, 흰 멜빵바지를 입었는데 하복부에 불길한 기운이 돌아서 하하 지금 생리 터지면 존나 웃기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집 안에 ... 

- 밤에는 친구와 영화를 봤다. 이 일기를 쓰기 시작할 즈음 타투이스트와 채팅을 시작했는데 방금 끝났다. 생각보다 집이 가까워서 좀 더 노닥거리다 나가도 좋겠다. 케이크는 산다 한들 먹지 않을 것 같은데 '날 위해' '예쁜' '케이크'를 사는 기분 자체를 갖고 싶어서 자꾸 생각난다. 초등학교 2학년쯤에 추석에 받은 용돈을 가지고 유리반지 두어 개를 샀다. 부친이 그걸 손수 깨뜨리고 벽에다 빨간 동그라미를 그리게 한 다음 양팔을 높이 든 채로 그것을 바라보며 "이것은 나의 사치다”라고 백 번 외치게 했다. 그런 일을 잊기는 아무래도 힘들다. 슬슬 나갈 채비를 하지 않으면 현금이 필요하니 은행에 들러야 한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이 문장을 최대한 담백하게 쓰고 싶어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

- 고2 여름에 서울에서 노닥거리다가 조모상 소식을 들었다. 조모는 말년을 온전히 우리 집에서 보냈고 내 방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욕을 바가지로 먹었지만 바깥에서 나를 향해오는 화살보다 자책이 훨씬 컸다. 남은 평생 동안에도 잊기 어려운 일이다. 하여 그런 식으로... 내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동안에, 한눈파는 사이에, 어딘가에서, 그러나 아주 모를 곳은 아닌, 나와 연결된 곳에서, 끔찍한, 나쁜, 상실이나 훼손이나 괴사 같은 것들이 일어나 사후적으로 나를 뒤흔들 것 같은 불안... 을 늘 가지고 있다. 새 핸드폰의 번호는 아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고 집에 두고 나갔던 핸드폰이 아직까지는 주된 연락책이라 뭔가 나쁜 소식이... 여기에 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틀간 쓴 카드값 SMS 메시지가 대부분이었고 나머지는 카카오톡으로 발신된 광고였다. 그 틈에 반가운 소식이 하나 섞여 있었다. 전날 오후 일곱 시쯤 온 것이었는데 등단지에서 드디어 후속 청탁이... 온 것이었다. 꼭 2년 만에.
아주 나쁜 일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구나

- ... 하는 안도와, 얼마나 더 나빠지려고 기쁜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하는, 관성에 가까운 불안이 동시에 들었고, 정말 나도 참 나구나... 하는 생각이 명판관이나 되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으스대며 찾아왔다. 
그 생각을 하니까 안심이 되어서 잠이 잘 왔다. 

- <포탈2>를 설치했다. 설치에만 30분은 걸렸다. 그동안 뜸했던 <디아블로3>를 좀 하다가 껐다.
그러고 두 시간 동안 <포탈2>를 했다. 밤에 개썅피곤할 때 한 것보다는 조작감도 나았고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이 거둔 성공에 힘입은 것인지 그래픽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어서... 한마디로 우와 니네 돈 많이 벌었나 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포탈>도 재밌었지만 2가 훨씬 재미있었다. 게임 시나리오에 대한 스포일러를 Y에게 조금 들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재미있게 할 수 있었다. 아홉 시 오십 분쯤에 Y가 일어났고 나도 열 시 조금 넘어서까지 잘 안 풀리는 스테이지를 붙들고 있다가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

 

- 서울 가는 고속버스 정류장 뒤편 투썸 플레이스에서 초콜릿 케이크를 사 먹었다.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이러는 게 좋다. 뭘 하고 싶다고 마음먹으면 꼭 그렇게 하고 마는 게.

- (이해할 수밖에 없었지만)(그러고 보니 '느낌적인 느낌'도 고 故 신정구 작가가 만든 말일걸. <안녕, 프란체스카> 시즌 1, 2를 집필한 작가인데, '느낌적인 느낌'은 그가 1~2화를 집필하다 사망했다는 KBS 시트콤 <선녀가 필요해>에서 박희진이 하던 말).

- 수명이 무한한, 또는 무한에 가까운 어떤 존재를 사랑하는 것은 어떤 일일까? 최근에 틈틈이 네이버웹툰 <용이 산다>도 재독 했는데 주인공이자 용족 관찰자 포지션을 맡고 있는 인간 최우혁이 대략 이런 말을 한다. "지금 누나 눈에 나 말하는 강아지나 고양이로밖에 안 보일 거 알지만, 그래서 내가 이러는 거 징그러울 수도 있지만 저에게도 감정이 있다구요." 최우혁은 26세 인간이며 600살이 넘은 용인 김옥분에게 반한 상태다.

 

- 불로불사 모티브에는 언제나 관심이 많았다. 최고로 좋아했던 건 다카하시 루미코 <인어> 시리즈. (언젠가 "인어 고기를 먹으면 불로장생하죠"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건 사실 루믹 월드 고유 설정은 아니고 일본의 전설 같은 거라고 하며, 뭐 굳이 상식까진 아니다 보니 만화를 안 본 사람은 거의 모르는 얘기인데, 또 그 만화가 국내에서 그렇게 메이저는 아니잖아.) 무한정 수명이 늘어난 와우배거 생각도 난다. 수명이 무한하면서 시간을 초월할 수 있다면 거의 모든 개별 존재와 사랑할 수 있겠네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그건 신이겠네 하는 생각도. 그와 거의 동시에 신은 사실 개별 존재를 특정 시점에 특별히 더 예뻐하고 사랑하면 안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또 그렇다면 개념상, 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봐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 생각, 옛날 생각 많이 났다.
아침까지 엔딩을 보면서 일기를 쓰다가 존나 울었다.

- [And then fire shot down from the sky in bolts (뮤지컬 <헤드윅> 중 <The Origin Of Love>의 가사)]

2017년 10월 21일

 

- 무한정 수명이 늘어난 와우배거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나오는 외계 지성체로, 말 그대로 수명이 무한해서 우주선을 타고 어떤 시공이든 찾아가 전 우주의 모든 존재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는 것으로 그 무한한 생애를 어떻게든 견디려 하는 
그러니까 만약 내가 그렇다면, 욕 한마디 하고 돌아서는 것보다는 시간을 들여 전 우주의 모든 지성체와 연애해 보는 게 훨씬 낫지 않은가 하는 거였는데

- 어쩌면 와우배거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시간은 무한하고... 한 지성체가 와우배거를 꼭 단 한 번만 만난다는 법은 없으며(일단 와우배거의 원칙은 그런 모양이지만, 주인공 아서 덴트는 시리즈 통틀어 두세 번쯤 그와 마주친다) (이오인 콜퍼인가 하는 작가가 이어 쓴 프리퀄에선 와우배거가 주인공이라고 하며 시리즈의 히로인 격인 트릴리언과 로맨틱한 관계가 된다고 들었는데, 읽지 않았고 읽고 싶지 않다. 영국인들 중에는 가끔 되게 이상한 이름을 가진 녀석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럼 내가 사귄/앞으로 사귈 어쩌구 중 하나쯤은 와우배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은데

 

- 일전에 어떤 승려가 그런 내용의 설법을 했다고 한다. 윤회론의 핵심은... 그러니까... 전 우주의 모든 시간선의 삼라만상이 '나'의 환생이라는 것... 그러니까 나와 사랑하고 나를 죽이고 내가 먹고 나는 살리고 내게 잊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뭐 그런,

- 오늘 할 수도 있는 다른 일들이 좀 있었다: 일반부 백일장이 있으니 신청해서 가자고 한 사람이 있었고, 대학 때 새터주체 같이했던 같은 과 동기가 청첩장을 돌린다고 만나자 했었다. 정작 나는 오늘 뭐가 제일 하고 싶었냐면 대학로에서 헤드폰을 끼고 걸어 다니면서 듣는 형태로 진행된다는 인터랙티브 연극을 보고 싶었다.
약속이 취소되어서 오늘은 그냥 문학하는 날이 될 예정이고 그건 당연한 일이다. 요새 나는 문학 말고 다른 거 할 겨를이 없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 음, 멕시코 요리 먹고 싶다. 몹시 질펀한 섹스를 하고 나서 아주 매운 멕시코 요리를 먹으면 펑펑 울고 난 다음 찾아오는 안도감, 청량감, (이 느낌을 잡아 가둘 한 단어가 없나? 내가 모르는 건가?) 뭐 그런 비슷한 느낌이 들 것 같은데 
비용상 그냥 우는 게 훨씬 낫겠구나. 쓸쓸한 일이다.

- 일어나서 씻고(이 중간에 뭘 했는데 그게 뭐였는지 생각이 안 난다) (생각났다, 청소를 했네) 우체국에 갔다. 우체국 마감 시간에 맞춰 나와서 또 망원동을 두 바퀴쯤 돌았다. 아침의 통화로 저녁의 약속이 잡혔고, 그렇게 시간을 죽이다 보면 금방 오겠지, 하는 생각이었는데 밖에서 한 시간 가까이 서성여도 도착했다는 말이 없길래 집에 또 들렀다. 정신이 혼미하단 생각이 들 즈음 합정역이라고 해서 마중을 나갔다.

 

- 오늘은 예쁜 걸 먹어야겠어요
라고 하고(저도 그렇게 생각해요,라는 대답을 들었다) 집 근처의 돈가스 가게에 갔다(별로 예쁜 음식 같은 느낌이 아니라서인지 이 얘기를 하면 다 웃는데 그 집돈가스는 예쁘다). 하이볼과 맥주를 마셨다. 집에 와서는 애플사이다를 마셨다. <비밀은 없다>를 봤다. 그게 <아수라>랑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 얘기했다.
아침에 역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와서 조금 잤다. 산 언니 새 책이 서점에 깔리는 날이었고 세 사람이 ...

- 잠을 한... 네 시간씩 끊어 잔다. 짧으면 세 시간, 길면 다섯 시간 정도 자고, 한두 시간 트위터 따위를 보면서 노닥거리다가 두 시간쯤 더 잔다. 잠드는 시간은 대중없는데 진짜 오늘 배터리 다 썼다 싶은 시점까지는 누워도 잠이 안 와서 어쩔 수가 없다.

 

- 잠 많이 잤냐는 말을 들어서 이런 생각들을 했는데 막상 대답은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런 걸 물은 까닭은 상대방은 나보다 더 수면 패턴이 나빠서일 것이다. 잠의 안부를 묻는 사이라니, 그런 걸 확인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니.

- 스물한두 살 먹었을 때의 잠들이 약간 지금과 비슷했다. 그때는 잠을 크레바스처럼 여겼던 기억이다. 절대로 건널 수 없는 어떤 것, 잠 이전과 이후의 내가 너무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 그래서 잠이 정말 간절하면서도 잠드는 게 너무 무서웠다. 잠깐 죽었다가 다시 사는 느낌이니까. 
(뭐 이런 생각도 당시 일기에 쓴 적 있는데 그건 ... 

- 난 슬플 때 목욕을 해

2017년 12월 11일

정확히는 생활의 퇴폐함이 극에 달했다고 느낄 때- 목욕 생각이 간절해진다.

- Y에게 필요한 책 있어요? 물었더니 책을 필요한, 이라는 말로 수식하는 게 이상하다고 했다. 그런가?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 그러니까 생활의 퇴폐함이 극에 달함... 같은 것은 방 꼬라지가 난잡해졌을 때 주로 느끼는 감정이다. 방이 지저분해지면 삶의 질이 떨어졌다 느끼고,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서 뭔가를 또 주문한다. 정리는 끝의 끝까지, 미룰 수 있는 데까지 미룬다. 가운데 놓인 20만 원어치 책 상자를 중심으로 잡동사니와 읽지도 않을 거면서 책장에서 꺼내온 책과 다른 택배 박스들과 새 물건을 뜯으면 생기는 비닐 쓰레기와 한번 입었다 벗었는데 세탁하긴 애매한 옷들과... 뭐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허리와 무릎을 이상한 각도로 틀지 않으면 드나들기도 어려울 만큼 
생각할수록 짜증 나서 문장을 맺지도 못하겠다.

그러면서 또 뭔가를 주문하고, 택배를 받고, 박스를 쌓고 있다...
뭐 그런 식으로 일주일을 났다. 쓰레기처럼.

- 한 과목 남았고 그 전날은 종일 아무 일도 없다길래 안성에 갔다.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을 나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 조금 기대했는데 버스를 타고 왔다. Y가 타고 있던 버스에 나도 탔다. 시내에 우정집 말고도 유명한 냉면 가게가 있다고 했다. 가보니 그쪽도 2월 28일까지 쉰다고 했다. 조금 걷다가 무난해 보이는 술집에 들어갔다. 2차는 봉구비어에서 마셨다. 
밤 아홉 시 반 무렵부터 112번 채널을 봤다. 그 채널 때문에 웃은 게 족히 닷새치는 될 것 같다.
맥모닝 시간을 놓쳐서 서브웨이에서 아침을 먹었다. 택시를 타고 학교 후문까지 갔다. 801관인가 하는 건물 3층에서 시험을 본다고 했다. 시험장에 올라갔던 Y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와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볼펜 있냐는 거였다. 젊은 사람이 딱하게도. 없다고 대답하고 어떡하지 고민하던 차에, 마침, 왠지, 전날, 어떤 이상한 직감으로 필통을 챙겼던 게 문득 생각났다. 하여 내게 필기구가 있다는 사실에 나까지 놀라서 대답을 여러 번 했다. 있어요. 있어요! 있어요! 있다! 아르키메데스도 유레카를 이렇게 간절히 외치진 않았을 거다.

- 시험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1층 계단 앞을 서성이는 동안 대학 시절 생각을 했다. 좀 좆같고 웃겼다.

- 안성 가는 버스를 타러 가기 전에 병원에 들렀다. 초여름에 내 자궁을 검사한 원장 선생님이 이민을 가서 이제 없다는 말을 들었다. 새 원장은 길고 검은 머리를 하나로 높이 묶어 넘긴 사람이었다. 줄무늬 히트텍을 입고 있어서 아 나도 이거 있는데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일어나려는 내게 올해 자궁암 무료 검진 대상자니까 12월이 가기 전에 꼭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나왔다. 1층 약국에서 이 약은 흡연자에게는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방금 병원에서 흡연자에게 그나마 덜 위험한 약을 여쭤보고 추천받은 게 이 약이라고 하니까 약사는 잠시 생각에 잠긴 것 같더니, 그래도 자기는 그렇게 안내를 해주는 게 의무라고 했다. 서로 머쓱하게 웃었다. 이런 일들 때문에라도 담배는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산 언니가 약간 체념조, 농담조로 여기가 우리 동네에서 제일, 아니다, 유일하게 힙한 카페야. 카페는 넓고 사람이 많았다. 안쪽에 있는 별실 비슷한 곳으로 갔다. 산 언니는 작업을 하고 나와 혜 언니는 이야기를 나눴다.

 

- 서련아,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해. 지금 쓰는 이 소설을 내가 완성하길 바라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세상이 원치 않는다고. 그러니까 안 좋은 일들이 자꾸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러니까 오히려 끝까지 써야 하는 거야. 아무도 원치 않는 이 글을.

- 이 얘기를 할 때 혜 언니가 엄청난 희열로 빛나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약간 눈물이 날 뻔했다.

 

- 그러니까 네 소설도. 네 소설이 완성되는 게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일인 존재들이 있는 거야.
그런 존재들.
그런 존재들을 이기는 거란 말이죠. 글을 끝까지 쓴다는 건.

- 그런 대화를 했다. 절대로 이 대화를 잊지 말아야지. 꼭 일기에 써야지. 영원히 기억해야지. 기뻐서 약간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카페에서 내가 주문한 건 아이스크림을 추가한 브라우니였는데, 잠시 후에 밝혀진 바 점원분이 아이스크림을 깜빡하고 브라우니만 주신 모양이라 곧 아이스크림과 서비스 쿠키가 왔다(생각난 김에 일기를 쓰면서 먹고 있다).
저녁은 오리로스 식당에서 들깨감자옹심이와 제육볶음을 먹었다. 들깨 가루로 되직해진 국물, 뭐 그런 걸 별로 안 좋아해서 글쎄 하는 느낌 반 산 언니의 미각을 믿는 마음 반으로 따라간 거였는데, 진짜 너무 존나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혜 언니는 결국 그걸 2인분 포장해 갔다.

- 집에 와서는 식곤증으로 거의 바로 잠들었다. 자고 일어났을 즈음에 루미(룸메이트라는 말을 요새는 '루미'라고 줄여서 쓰는 모양이다)와 루미의 친구분이 와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혜 언니가 만들어준 레몬청에 스프라이트를 타 가지고 루미 방으로 가 ...

- 이상하게 여겨도 되겠지. 일기 말고는 내 편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지나고 보면 더 그럴 것이다.

- 야경을 배경으로 찍을 때는 여자가 붉은 드레스를 입는 것이 관례인 듯싶었다. 그러고 보니 호텔 결혼식의 신부도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문화란 뭘까... 문명이란... 이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여전히 습하긴 하지만 걷기 썩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더위에도 추위에도 그렇게 예민한 편이 아니다. 그렇지만 곧이곧대로 와이탄-남경동로 코스를 그대로 따라갔더니 인파 때문에 죽고 싶었다.

- 신세계다이마루(한국 SSG그룹과는 관련 없어 보인다) 뒤편의 허름한 식당에 들어갔다. 점원이 우리 가게에 외국인이 온 건 개점한 지 3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메뉴에는 사진도 영어 설명도 없었고... 그런 것이 당연히 있기를 기대하는 것도 무척 오만한 태도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했다. 우육면이라는 글씨를 간신히 읽어내서 손가락으로 짚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점원이 무슨 말을 했는데, 눈치와 감으로 메뉴판을 뒤집어 콜라를 가리켰다. 그리고 귀동냥으로 배운 콜라의 중국 발음을 한번... 발음해 봤다... 커. 라. 커라. 커라? 롸잇?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쪽이 고개를...

 

- ... 망하려야 망할 수가 없겠구나 싶었다.

- 다 먹고 호텔 방향으로 걷다가 아냐, 아니지 하고 다시 신세계다이마루로 돌아와 지하 슈퍼마켓에서 야식거리를 좀 샀다. 여행 중에는 가능한 한 한국에서 못 먹는 맥주에 도전하는 편인데 그런 고집을 세울 마음도 들지 않아서 그냥 잘 아는 데릴리움 -그나마 비교적 파는 곳이 많진 않은 맥주니까- 하고 애플사이다 한 병씩을 샀다.

 

- 슈퍼마켓 안에 있는 이런저런 먹거리를 구경하다가 모리나가 드롭스를 발견했다. 이거 그거잖아, <반딧불이의 묘>에서 나온 그런... (찾아보니 해당 작품에 나온 사탕은 다른 회사 제품이라고 한다). 그도 그렇거니와 원래 틴케이스만 보면 지갑을 여는 병이 있어서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날은 사지 않았다. 대신 바로 앞에 있는 릴리안 베이커리에서 에그타르트 두 개와 치즈타르트 하나를 샀다.

- 욕조에 장미 꽃잎이 들어 있는 입욕제를 풀었다. 욕조에서 맥주를 마시려는 구상이었는데(정말 위험한 일이지만 위험을 감수할 가치도 있다는 입장이다) 오프너를 찾을 수가 없어서 로비에 전화를 걸었다. 곧 룸서비스를 올려 보내겠다는 답변을 받고 미니바에 놓인 와인 오프너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앗 이걸로 맥주 뚜껑을 열 수가 있구나 하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이윽고 방에 당도한 호텔 직원은 영어를 잘 못했고 나는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손짓 발짓을 하다가 이미 따버린 맥주를 다시 따는 시연까지 해 보였다. 호텔 직원은 그리 납득한 것 같지 않은 기색이었지만 웃으며 돌아갔다.
적당히 따뜻하고 향긋한 물속에서 야식과 맥주를 먹었다.

- 셋째 날
새벽 한두 시쯤 잠들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리 늦지 않게 일어났다. 여유롭게 조식을 먹었다. 전날 복통을 일으킨 문제의 음식이 뭐였을까 생각하면서도 느긋하게 과식을 했다.

- 신춘문예 당선작의 url이 부여되는 방식이야 뭐... 
http://신문사홈페이지도메인.com/ 신춘문예/연도/장르
대충 생각해도 이런 형식이 되지 않겠는가. 물론 신춘문예 당선작 페이지를 따로 운영하는 경우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보통은 신춘문예 심사평과 당선작과 당선 소감 및 인터뷰를 모두 '문화' 또는 '기획' 카테고리에 넣어 자체 기사로 소화하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url을 유추하기는 어렵다. 

- 정리하면 이렇다: 2020년 당선자가 이미 결정되고 당선작 공개 페이지 또한 개설되었으나 '2020년 당선작' 링크 버튼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점에, url을 살짝 고치면 이틀 또는 사흘 뒤 공개될 당선작을 미리 볼 수도 있었다. 심사위원과 당선자와 당선자 주변 사람들과 신문사 사람들, 특히 페이지를 개설한 사람이 벌써 알고 있는 당선작을.
 
- 자세히 말할수록 김이 새는 느낌이지만 이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부분적으로나마 시간여행을 경험하는 것 같은 작은 흥분이 있었다.

- 이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내가 작은 우회를 통해 방문하려는, 일반에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웹 사이트가 이미 개설되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미래'의 엄청나게 직접적인 메타포처럼 느껴지니까.

- 한편 이 이야기를 듣고는, 예전에 네이버 웹툰을 보다가 좀 이상한 댓글을 본 기억도 났다. 내가 그 웹툰을 보던 시점에는 그것도 이미 좀 지난 작품에 속했던 기억이 나는데 (안타깝지만 정확히 어떤 작품의 몇 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로부터도 대략 5~6년 전에 달린 댓글이 있었던 것이다.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하하, 헐, 뭐 그런 식의, 웹툰 내용과 관계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완전히 별개인 것 같기도 한. 그 댓글 다음에 달린 몇십 개의 댓글은 웹툰 내용이 아니라 그 댓글을 보고 놀랐다는 얘기를 쓴 것이었다. 

- 웹스터나, 훗날 소위 거장이 되었는데, 그들의 초중등 시절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들이 그렇게 성장하리라는 걸 전혀 예감하지 못했을까? 철자법 때문에 그들을 구박했던 사람들은 그들이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사실 이 문단도 처음 하려던 이야기와는 영 동떨어진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이지만 일단은 이대로 두겠다. 

- 원래 하려던 이야기의 주제는, 글쎄, 명확한 주제를 품고 이 글을 시작한 것은 아니어서 확신이 잘 서지 않지만, 아마도... 몇 살 때 어떤 버전으로 그 책을 읽었는지가 개인의 의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같은 것이었을 듯하다. 첫 문단에서 이야기했던 대로 책 읽기에 대한 글을 쓰면서 최근 다시 한번 <키다리 아저씨>를 읽었는데 그 어떤 때보다도, 심지어는 처음으로 읽었을 때보다도 훨씬 감동이 컸다. 왜였을까? 일단은, 이 이야기가 고등학교 졸업생이 대학교에 진학해 졸업할 때까지를 담은 것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감동의 진폭이 무엇보다 컸던 것 같다. 이전에 마지막으로 <키다리 아저씨>를 읽은 것은 내가 고등학생이던 때, 즉 대학생활을 경험하기 전이었다. 키다리 아저씨는 자기 물건을 가져본 적도 별로 없고 자존감도 터무니없이 낮던 여자아이가 대학 생활을 거치면서 능력 있는 사회인 -그중에서도 소설가- 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다. 한국 나이로 서른두 살이 되어서야 나는 드디어, 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준비가 되었고, 우연찮게 준비된 채로 다시 읽고 만 것이다.

- 그러고 보면 온전한 독서란 무엇일까, 어떤 일일까. 어떤 책을 소리 내어 읽어 한 글자 한 글자 빠짐없이 보고도 완전한 이해에 다다르지는 못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이 쓴 글이 그 자신을 초과하는, 그리 드물지는 않은 경우들을 보면, 온전한 독해란 저자에게조차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문단도 원래 논하려던 주제와는 영 동떨어진 이야기인 데다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현학적인 생각인 것 같지만 일단은 이대로 두겠다.

- 아무튼 아무도 내게 삶의 위기를 돌파해 나갈 지혜를 전해주지 못하고 있는 관계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삶을 어떻게든 가누려 애쓰며 지혜 (성이지. 이름이 혜, 본명, 소설가) 언니가 어떤 면접 자리에서 했다는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고 있다.
"잔고가 20만 원일 때랑 200만 원일 때랑 문장이 달라요."

이 이야기의 교훈은 사람이 꾀주머니가 없어도 살지만 돈주머니가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 어울리지 않는 몸이어서 반지는 주로 구경만 하고 사지 않는 편이었는데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너무 갖고 싶은 반지가 마치 사고처럼 나를 덮쳐왔다. 윈도쇼핑을 하러 가끔 들어가던 온라인 빈티지주얼리 숍에서 클라다 링을 발견한 것이다. 어 뭐야, 이거 되게 <마법소녀> 물건같이 생겼다 했는데 (나는 <마법소녀> 관련 아이템 라이트 콜렉터이기도 하다) 아일랜드 전통 반지라지 뭐냐. 아니, 이렇게 깜찍하게 생겼는데 '전통' 같은 기품 있는 단어가 붙어버리면 어떡하냐. 가운데에 하트가 있고 하트 위에 왕관이 있고 하트 옆에는 한 쌍의 손이 붙어 있는 반지... 하트는 심장(말 그대로)과 사랑을, 왕관은 충실함을, 양옆에 새겨진 손은 우정을 의미하는 모티브라는... 그 반지... 그러니까 옆에 장식된 한 쌍의 손을 살짝 잘못 봐서 날개 장식으로 착각하거나 하면 <웨딩피치> 반지인 줄 알 수도 있는 그런 디자인의 '전통' 반지... 아니, 어떻게 이렇게 예쁘고 의미 있는 물건이 있을 수가... 그런 물건이 어떻게 이렇게 비싸고 나한테 안 맞을 수가... 그 물건이 존재한다는 걸 안 이상 손에 넣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 불안한 점이 많지만, 그건 사실 정말 뭔가 빠뜨려서라기보다는 내 기질적인 면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사의 근사한 면을 더 많이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사를 하고 나면 키친테이블 라이터 kitchen table writer가 될 것이다. 칠판 페인트칠을 해둔 벽면에 탁자를 붙이고 거기서 글을 쓰고, 잘 모르겠을 때는 벽에다 낙서를 할 것이다. 페인트칠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허락해 준 집주인은 내가 이럴 거라고 상상하진 못했겠지, 페인트칠을 허락한 대신 도배는 새로 해주지 않고 장판을 조금 비싼 걸로 깔아준 친절한 집주인은... 대신 오래 살게요, 저 다음에 이사 올 사람이 제 살림살이를 보고 이 집에 이사 오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될 만큼 멋지게 살게요, 어차피 이 글을 못 보실 테지만 약속할게요. 

 

- 그리하여 현 상태 다시 한번 업데이트: 나는 - 지금 - 슈퍼두퍼 - 기대감에 - 차 - 있다!

- 관용구를 제목으로 삼는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한 달 동안 서련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라는 뜻입니다(<미란다> 오프닝 시그널 송을 틀어주세요).

- 이사한 지 이제 만 1개월이 되어간다. 그간 이 집에는 포장이사 업체 기사님 세 분과 가스검침원 분과 정수기 설치기사님과 LG U+ 기사님과 모친과 나의 친구 여섯 명과 거대한 바퀴벌레 두 마리(무슨 수사가 아니라 진짜로 바퀴벌레가), 그리고 세스코 기사님이 방문했다.
세스코 기사님은 다른 기사님과 구분하여 'Knight'라고 써드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러 의미에서 그런 생각이 드는데, 이 얘기는 읽는 사람의 비위를 위해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지만 새집이 바퀴벌레 소굴로 오인될 수도 있으니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세스코 기사님이 (내가 찍은 바퀴 사진을 보시더니) 이런 바퀴는 절대로 집안에서 살 수 없다고 했다. 안심 또 안심. 

- 10월 한 달간의 소비 중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온수매트. 제일 후회되는 소비는 전기온열매트. 그러니까 온수매트도 샀고 전기온열매트도 샀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 일어난 일과 나의 감정 변화를 시간순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내 침대 사이즈가 슈퍼싱글 사이즈니까 대충 맞겠지, 침구류는 대체로 사이즈가 통일되어 있는 편이니까, 하고 슈퍼싱글 사이즈 전기매트를 먼저 주문했다. 도착해서 개봉해 본 물건은 내 침대 가로 너비보다 10센티미터가 더 넓었다... 그리고 설명서의 취급주의란에 전기매트를 접거나 침대보 밑으로 밀어 넣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었다. 나름대로 고르고 고른 양품인 데다 저렴하게 잘 산 것 같다고 생각했건만, 막상 펼치고 보니 한쪽이 항상 뜨거나 접혀 있어 함부로 켤 수도 없고, 이미 펼쳐서 침대에 깔아본 다음인지라 환불 요청을 하기도 애매한 것 같고... 즉 꽤 잘 산 한편 엄청나게 잘못 샀다는 모순을 뼈아프게 느끼던 중에, 공장 제조 양품 크라우드 펀딩 업체에서 온수매트 매물을 발견한 것이다. 그간 내가 이 업체를 통해 산 물건은 설거지 비누와 샴푸바 정도가 전부였지만 난 나를 믿었었던 만큼 이 업체도 믿었기에 온수매트 펀딩에 망설임 없이 참여했고 이 소비가 아주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 청소년기에는 모친이 생활용품 방문판매업에 종사하는 지인을 통해 장만한 옥장판과 함께 겨울을 났고 성인이 되어서는 주로 전기온열매트를 사용해 왔기에, 겨울마다 은은한 두통과 목이 찢어지는 듯한 갈증과 함께 깨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처음으로 직접 전기온열매트를 샀을 때(4년 전이다) 허, 전기온열매트라는 물건은 이렇게나 저렴하구나 했던 기억도 문득 떠오르고... 아무튼 아무리 전자파를 잡았다고 해도 작동 원리상 인체에 온기와 함께 미묘한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는 전기온열매트와 달리 온수매트는 두통도 갈증도 내게 주지 않았다.
요새는 온수 온도를 39도 정도로 설정하고 자는데 자리에 누울 때마다 배나 등이 넓고 평평한... 즉 나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체온이 약간 높은 어떤 짐승의 품에 안기거나 업혀서 자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온수매트가 인체에 열을 전하는 원리는 혈관에 피를 돌리는 것과 매우 유사한 방식일 것이어서 이 느낌이 아주 큰 착각은 아닐 거라는 믿음도 있다... 온수가 매트 속의 미세한 관을 채울 때 뭐랄까 "꾸르륵~?" 하는 소리가 나서 더더욱 그렇다.

- 한편 아무래도 잘못 산 것 같다는 전기온열매트는 우리 집에서 뭘 하고 있냐면 바닥에서 러그인 척하고 있다. 그 위에 좌식 테이블을 두고 보드게임을 하면 친구들이 덥다고 한다. 나는 원래부터 이러려고 전기온열매트를 산 척한다.

- 10월 한 달간 유튜브나 인스타 라이브에 몇 번 나갔다. 한편 올해 단행본을 낸 친구들, 평소 내가 관심 있어하던 작가님들도 인스타 라이브를 촬영해서 10월에는 출연자로서도 시청자로서도 참여할 기회가 많았다... 고 할 수 있겠다. 궁금한 점은 이것이다: 시청자일 때는 너무 재미있는데 출연자일 때는 뭐가 뭔지 모르겠어서 아무 말 페스티벌을 벌이는지라 내가 출연한 클립들도 ...

- 알게 되겠죠

2020년 12월 1일


1. 근 한 달여 사이에는 그리 특별한 사건이 없었다. 바쁘게 이것저것 했으니 할 말이 많아야 옳겠는데, 그 바쁜 일이란 대부분 지원사업 신청이나 에세이 쓰기 같은 것이었고 딱히 밖에 나가 바람 쐴 일도 없었고... 새로운 얼굴은커녕 익히 아는 얼굴들도 별로 마주하지 못했다. 즉 집 안 한자리에 앉아 무슨 얘길 더 하기도 어려운 마감을 하염없이 반복했을 따름이라 떠오르는 글감이란 온통 내면이나 과거를 향하고 있는데,

 

- 2. 요즘은 내면이나 과거 얘기를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이유는 옹색하다. 필연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어조가 될 만한 이야기들밖에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작가로서) 밝혀야 할 사연들이 있다는 것은 나도 의식하고 있으나, 내 삶에 얽힌 논픽션이 내가 쓰는 픽션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아직은. 말하자면, 저 사람이 이러이러한 소재와 모티프를 즐겨 쓰는 이유는 어렸을 때 이러이러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라고 상상하는 건 독자의 자유지만, 그런 힌트를 일찌감치 주지 않으려는 것만은 내 마음이지 않나. 

- 조수미 씨가 로마에 도착해서 쓴 첫 일기는 그가 유학 생활 내내 지킬 원칙을 담은 것이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 늘 도도하고 자신만만할 것."

조수미 씨는 이렇게 쓴 다음, 원칙을 철저히 지키되, 오랜 세월 동안 비밀로 했다.

- 언젠가 내게도 이제는 말해도 좋을 것 같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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