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미쓰다 신조 / 김은모
출판 : 한스미디어
출간 : 13.03.22

저자 : 미쓰다 신조 / 김은모
출판 : 한스미디어
출간 : 13.03.22
나는 주로 밤-새벽 시간에 깨어있기를 즐긴다.
자연스러운 신체 리듬에 맞추면 그렇게 된다.
하지만...
하지만 미쓰다 신조에 관한 작업을 하고 싶다면 낮에 깨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작자 미상>은 미쓰다 신조의 <작가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책은 <미궁초자>라는 동인지를 접하게 된 작가와 동명의 '미쓰다 신조'와 그 친구 아스카 신이치로가 겪는 기이한 현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동시에 <미궁초자>에 수록된 일곱 편의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미쓰다 신조가 즐겨쓰는 구성은, 본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그것을 외부에서 접하고 있는 다른 인물의 이야기를 교차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독자는 두 세계를 오가며 '책 속 책'의 흐름과 '책'의 흐름, 그리고 자신의 흐름을 겹쳐 읽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가가구시 촌, 사기리 등의 익숙한 명칭도 중간중간 등장하는데, 신조의 다른 작품들을 읽은 독자에게는 '미쓰다 신조' 뿐 아니라 이런 작은 부분들도 메타적으로 느껴진다. 어쩌면 저 세계가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개인적으로 <작자 미상 - 미스터리 작가가 읽는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건 <역자 후기>다.
짧은 단편으로 읽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의 강렬한 이야기.
미쓰다 신조와 만나면 현정수 역자도, 김은모 역자도 ...
아니, 신조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두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마지막 독자가 이 책을 읽고 수수께끼를 모두 푸는 것 뿐이다.
실패한다면 물론
- 나 혼자에게는 묘하게 마음이 편한 장소인데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 전에 의식이 다른 것에 쏠려서 결코 맞닥뜨리지 못하는 장소가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그 장소에 있으면 혹시 나를 제외한 주변 전체의 시간이 멈춘 것은 아닐까 싶은 공상에 사로잡히는 세계가 이 세상 어딘가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것은 그림으로 그려진 풍경이거나, 사진으로 찍힌 경치의 일부거나, 영화나 텔레비전에 비친 거리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 분명 사람에 따라 그 장소는 다르리라. 하지만 그림이나 사진이라면 다른 작품보다 좀 더 오래 바라보는 정도이고, 영화나 텔레비전이라면 "어?" 하기 전에 영상이 지나가버려 보통은 의식하지조차 못하는 장소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듯하다.
- 유감스럽게도 대다수 사람은 그런 장소의 존재조차 모르고 인생을 마친다.
설령 알아차린다 해도 찾아내기는 몹시 어렵다. 이따금 뭔가에 씐 것처럼 여행을 계속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신만의 장소를 찾아서 무의식적으로 방황하는 것은 아닐까.
-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대로 찾는 것은 가까이 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나는 안라 초와 만날 수 있었다.
- 안라 초는 나라 현안라 시의 민영 철도 종착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번화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조용히 자리 잡은 동네다. 태어나고 자란 곳인데도 어른이 되어 몇 년의 세월이 흐르기까지 나는 이 동네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당시 대학을 나온 지 4, 5년 정도 된 나는 졸업하자마자 취직한 교토 D출판사의 영업부에서 편집부로 이동해 별로 흥미도 없는 전문서의 기획과 편집을 담당하고 있었다.
옛날부터 책은 좋아했지만 딱히 편집자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이왕 일할 바에는 좋아하는 분야와 관련된 일을 하는 편이 나으리라는 극히 소극적인 동기에서 들어간 회사였다.
미스터리를 좋아해서 읽기도 하고 쓰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스터리 전문 출판사에 들어가거나 미스터리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내게는 재능이 없다고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애당초 재능이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지만) 그저 좋아하는 일로 먹고살 수 있을 만큼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다는 냉철한 사고방식을 일찌감치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런 나와 달리 친구들은 엄청났다. 가장 사이가 좋은 아스카 신이치로 飛鳥 信一郎는 "고등유민이 되겠어"라고 영문 모를 말을 늘어놓더니 구직활동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학창시절부터 영미 괴기소설 번역을 계속해온 경력을 인정받아 출판사에 번역 원고를 넘기는 한편으로 무엇에 대해서인지는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문학 연구 같은 것도 시작했다. 또한 내게는 비밀로 했지만 아무래도 미스터리나 기상 소설도 몰래 쓰는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 눈에는 대충 살아가는 것처럼 비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잘 알고 그의 재능을 인정하는 내가 보기에 신이치로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나보다는 적극적으로 살고 있었다.
- 또 다른 친구 소후에 고스케 역시 학창 시절부터 미스터리 잡지에 꾸준히 투고해 왔다는 '실적'에만 의지해 냉큼 도쿄로 가버렸다. 당연히 그런 실적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니 실제로는 낯설기 짝이 없는 곳에서 처음부터 시작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출판과 관련된 일을 하려면 역시 도쿄에 가야지" 하고 망설임 없이 상경했다. 무모하다면 무모하지만, 신이치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 아마 주변 어른들 눈에는 취직해서 정사원이 된 내가 제일 건실하게 보였으리라. 아무리 따져봐도 두 사람의 생활은 불안정하고 만족스레 홀로서기를 하지 못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견해도 옳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끊임없이 뭔가를 동경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동경심은 신이치로와 고스케에 대한 열등감의 표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나는 회사라는 조직에 소속되어 매달 제때 월급을 받으며 안정된 생활을 보낸다. 신이치로와 고스케는 좋아하는 일을 하지만 도저히 독립했다고는 할 수 없는 상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재능과 노력에 힘입어 몇 년 후에는 분명 그 분야의 어엿한 프로가 되어 있으리라. 나는 어떤가. 월급쟁이라는 처지에 안주한, 고작 그 정도의 인간이 되지는 않을까.
결코 공상이나 망상이 아니다. 우리가 장래에 어떻게 변해 있을지 그때 내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내가 겁쟁이로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 친구가 창피해하는 마음을 느낀 걸까. 그 무렵 신이치로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넌 조만간 작가가 될 거야."
- 친구들보다 뒤떨어졌다는 기분에 사로잡혀 지내던 때, 나는 휴일이 되면 갈 곳도 정하지 않고 자주 안라 곳곳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거기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 뛰놀던 그리운 풍경과 20년 넘게 살면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 있었다.
- 신이치로는 내 산책을 란포(乱歩,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어지러이 걷는다'는 뜻. 일본 추리소설가 '에도가와 란포'의 '란포'와 한자가 같은 데서 착안한 말장난이다)라고 부르며 재미있어 했다. 때로는 함께 '란포'를 했지만 대개는 도중에 헤어져서 끝까지 행동을 함께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란포를 할 때는 그때그때 자신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란포적인 충동을 최우선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골목에 들어가고 싶어도 신이치로의 생각이 나와 다르면 거기서 헤어지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란포'였다.
- 주변의 시간은 멈춘 듯한 기분이었다. 어떤 사람은 무서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기분이 좋아 언제까지나 몸을 맡겨두고 싶은 장소였다.
- 그렇게 안라 초를 방문하기 시작한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헌책방 하나를 발견했다. 출장 등으로 다른 지방에 가면 무엇이 가장 기쁜가 하니, 남는 시간에 헌책방을 발견했을 때다. 안라 초에 헌책방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신이 나서 덩실거렸다.
- 그 헌책방을 지금까지 못 보고 지나친 것은 골목길 안쪽에 있었던 탓이다. 자세히 쳐다보니 골목길 입구에 해당하는 벽에 붓글씨로 알기 쉽게 '후루혼도 古本堂'라고 쓴, 결이 고운 나무 간판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각각의 민가나 상점보다 거리 전체에 매료된 내 눈에는 정작 그 간판이 비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간판이 눈으로 휙 뛰어 들어왔다.
- 골목길 안으로 들어가 똑바로 나아가자 막다른 곳에 문이 있었다. 옆으로 드르륵 미끄러뜨려서 여는 유리 미닫이다. 가게 안은 뱀처럼 가늘고 길게 안쪽으로 뻗어 있다. 문이 없으면 골목길이 그대로 이어져 있다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들어가서 왼편 벽에는 주로 문예서 단행본이 죽 꽂혀 있고, 오른편 벽은 국문학, 사학, 심리학, 민속학 등의 전문서 책장이다. 끝부분에 가게 주인인지 나이가 분명치 않은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몸의 왼편밖에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가게가 거기서 U자 모양으로 구부러지기 때문이다. 거기서 다시 뱀처럼 가늘고 긴 가게를 계속 나아가면 전혀 다른 골목길로 빠져나가는 문이 나온다. 즉 U자의 두 정점에 문이 하나씩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문에 면한 골목길은 아무리 나아가도 교차되지 않는다. 놀랍게도 저마다 다른 곳으로 통하는 것이다. 참으로 미로 같은 안라 초에 어울리는 구조 아닌가. 에도가와 란포가 즐겨 사용한, 한 채의 집인데 앞과 뒤가 다른 지역에 속하는(마을 이름이 다르다) 트릭과 어쩐지 닮아서 이 구조를 알았을 때 나는 아주 기뻤다. 실제로 내가 처음에 들어간 골목길에 면한 곳은 안라 초 고메미치 米道라고 하고, 또 다른 출입구는 안라 초 야나카 家中라는 곳이었다. 덧붙여 U자를 돌아 들어간 곳에는 왼편에 신서판, 오른편에 문고로 이루어진 벽이 있었다.
- 두 사람이라면 흥미를 느낄 것이라 여겨 보관해 둔 모양이었다.
그것은 '미궁초자 迷宮草子라는 제목의 문고 크기 서적으로'라고 설명하는 것이 주저될 만큼 제본 상태가 엉망인 동인지였다. 아무리봐도 아마추어가 수작업으로 만든, 말 그대로 한 권씩 손으로 직접 만든 것이 아닐까 싶은 물건이었다. 그런데도 장정과 내부 레이아웃에서는 뜻밖에도 상당한 감각이 엿보였다. 요는 그러한 능력과 제본기술은 별개라는 뜻이다. 적지 않은 돈과 품을 들인 듯한 가죽 표지 역시 유감스럽지만 완전히 실패였다. 가죽을 잘 펴지 않아 무수히 많은 주름이 책을 뒤덮고 있었다.
- 그 자리에서 책을 펼쳐본 신이치로는 그것이 몹시 기묘하고 특수한 책임을 바로 깨달았다. 그래서 이름 없는 동인지 치고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구입했다. 내게 연락했을 때 신이치로는 그답지 않게 흥분한 목소리였다. 보통 책이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그의 들뜬 기분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 후에 신이치로와 나는 <미궁초자>라는 기괴한 책을 둘러싸고 몹시 묘한 독서체험을 하게 된다. 몹시 묘한, 이라고 했지만 이제 세세한 부분까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도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다. 강렬하지만 어렴풋한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은 체험. 그것이 머릿속 안쪽에서 안쪽의 안쪽 저 밑바닥에서 서서히 차례차례 되살아난다.
- 십수년 전의 아련한 기억이 되살아난 계기는 작년 여름 출간된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을 다 쓴 직후에 드러누운 일이다.
- 개인적으로는 그 집에서 일어난 갖가지 일과 이를테면 결별하기 위해 쓴 원고였다. 하지만 탈고 후에 몸 상태가 단번에 나빠졌다. 나중에 담당의사가 <기관>을 읽고는 "그런 사건을 겪은 것만으로도 문제인데 사건을 추체험하는 원고를 쓰고서 무사할 리 없죠"라고 꾸짖었다기보다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튼 일로든 취미로든 미스터리나 호러, 기괴 환상 같은 분야의 책은 당분간 읽지도 쓰지도 보지도 말라는 충고를 받았다. 느긋하게 요양하면서 정신적인 휴식을 취하라는 것이었다.
- 사실 나도 당분간 한가로이 지내고 싶기는 했다. 유급휴가가 쌓이다 못해 넘칠 정도였기에 회사 쪽은 문제가 없었다. 겨울철은 '호러 재패니스크 총서'의 기획 수도 줄기 때문에 일에도 별 지장이 없었다. 오랜만에 귀성해서 신이치로라도 만나 잡담이나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몹시 희미하게, 아주 어렴풋이 <미궁초자>에 관한 기억의 단편이 머릿속 깊은 곳에서 떠오른 것은...
- 당시 <미궁초자>를 한 편씩 읽어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그때부터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정신을 차렸더니 나는, 지금은 머릿속 가장 깊은 곳으로 완벽하게 아주 멀리 쫓아버린, 십수 년도 더 전에 일어난 사건의 한복판에 다시 서 있었다.
결국 미스터리와 호러, 기괴환상 분야의 책은 읽지도 쓰지도 보지도 말라고 했지만 나는 조금씩 당시를 떠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집에서 체험한 무서운 이야기를 쓴 것을 계기로 다른 무시무시한 기억의 봉인이 풀린 걸까...
아니, 기억의봉인이 풀렸다기보다 기억 그 자체가, 아니 정확하게 ...
- 어쩐지 초점이 맞지 않고 젖어 있는 특징적인 눈동자는 변함없이 수수께끼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귀여운 외모 속에서 어른거리는 신비로운 괴이함. 나는 이 불균형에서 위험한 뭔가를 느끼면서도 속수무책으로 소녀에게 끌리고 있음을 자각했다.
소녀는 저녁을 차리겠다며 우리가 들어온 문으로 나갔다.
혼자 남겨지자 갑자기 으스스 추워졌다. 난로를 쬐려고 방을 가로지르려는데 복도에서 희미한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건 유치한 짓이야.
그러면서도 호기심에 사로잡힌 나는 슬며시 문을 열고 머리만 복도로 내밀어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무슨 내용인지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나 때문에 말다툼을 하는 것 같았다.
-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집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런 산속에 사는 걸까?
뭐 하는 사람들일까...라는 의혹이 머리를 스치는 동시에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그제야 비로소 정체불명의 두려움이 느껴졌다.
- 이윽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조바심 덕분에, 두 다리를 묶고 있던 주술이 풀린 것처럼 겨우 발이 자유로워졌다. 허둥지둥 소파로 되돌아가 가만히 앉아 있던 체했다.
바로 문간이 희미하게 밝아지더니 소녀가 촛대 몇 개를 얹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불편하시겠지만 2. 3일 전부터 이 방의 커다란 전등이 안 켜져서요."
소녀는 촛대를 식탁 위에 늘어 세우고 나서 손짓으로 나를 불러 의자를 권했다. 그런데 이때 기묘하게 느껴진 점이 두 가지 있었다.
- 일단은 두 사람이 앉은 장소다. 소녀와 나는 긴 변이 난로와 평행하게 놓인 직사각형 식탁의 짧은 변에 마주 보는 형태로 앉았다. 마치 옛날 외국 영화에 나오는 고성의 커다란 홀에서 둘만의 만찬회를 연 것처럼.
- 다음으로 마음에 걸린 것은 촛대를 놓은 위치였다. 네 개 중 둘은 내 바로 양 옆, 하나는 난로 반대쪽의 긴 변 중앙, 나머지 하나는 소녀 옆에 있었다. 얼핏 보기에 그냥 편한 대로 놓아둔 듯하지만 너무나도 균형이 결여된 탓에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으스스함이 감돌았다.
촛대를 이렇게 놓아둔 데는 무슨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었다. 예컨대 펜타그램처럼 의미를 지닌 형상이 식탁 위에 그려져 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도무지 웃을 기분이 아니었던 것은 그 자리의 괴이한 분위기 탓이었을까.
- 퍼뜩 정신을 차리자 맞은편에서 소녀가 젖은 눈동자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내 머릿속을 읽어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오로지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나는 소녀가 내게 마음이 있다고 착각했으리라.
- 뭐, 뭐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참으로 난감했다. 하지만 문득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자 건물 오른쪽으로 통하는 문이 소리도 없이 닫히는 참이었다.
아...?
정체 모를 공포가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 혹시 사기리는 내 뒤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등줄기가 오싹해지며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내 뒤에서 뭔가를 보았다면, 아니 내 뒤에 누가 있었다면 그것은 노파다. 하지만 그 노파가 실제로 내 뒤에 있었다 쳐도 사기리가 그렇게 놀란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어떤 광경을... 무얼 본 것일까...?
- 여기는 아다치가하라(安達ヶ原. 하룻밤 묵기를 청하는 손님을 잡아먹는 귀신 할멈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곳)의 외딴집도 아니고 그 노파가 귀신 할멈인 것도 아닌데...
어처구니없는 상상에 벌벌 떨다니 나 자신이 몹시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발끝에서 기어 올라오는 한기는 난로를 쬐고 있어도 쉬이 가시지 않았다.
- 방 한쪽을 가득 메운 엄청난 수의 책이 그 이유 중 하나다. 나도 책은 좋아해서 나름대로 많이 모았지만, 이 양은 예사롭지 않다. 사기리처럼 아직 소녀라 불릴 나이의 여자애가 이렇게 많은 책을 가지고 있다니 의아하다 해야 할지도 모른다.
- 사기리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창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예의 매혹적이지만 어쩐지 불안정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무심코 사기리를 반쯤 무시하는 태도로 책장 앞에 섰다. 어느 틈엔가 잡아먹을 듯이 책 제목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방대한 장서의 70퍼센트는 고금동서의 문학과 미스터리, SF가 차지하고 있었다. 나머지 30퍼센트는 정신의학과 이상심리학 종류의 서적이다. 개중에는 본격적인 오컬트 책도 있는가 하면 상당히 미심쩍고 유치한 내용의 책도 군데군데 눈에 띄어서 제법 흥미로웠다. 책장 제일 윗단에는 고전 작품이, 그리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현대 작품이 꽂혀 있다. 사기리 나름의 정리법이리라.
- 잘린 낱장이 아니다. 예컨대 400페이지짜리 책이라면 그 절반인종이 200장을 다발로 묶어 만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특수한 책이 아닌 한, 커다란 종이 한 장의 앞면에 8페이지, 뒷면에 8페이지를 얹고 접어서 16페이지 분량을 만든다. 이 16페이지 분량을 한 대라고 하는데, 책 한 권은 이 한 대짜리 종이가 여러 대 모여서 만들어진다. 즉, 커다란 종이 앞뒷면에 인쇄를 한 후 한 페이지 크기로 접어 만든 한 대를 순서대로 배열해 책 한 권을 만든다. 따라서 앞뒤의 8페이지를 구성할 때 실제 책 페이지 순서대로 늘어놓지 않는다. 접을 때 순서가 바뀌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접었을 때의 상태를 미리 예상해 터 잡기라고 불리는 페이지 배열 작업을 행한다. 말로는 설명하기가 참 어려운데, 실제로 직사각형 종이를 8등분으로 접어보면 안다. 덧붙여 224페이지짜리 책이라면, 224 나누기 16은 14니까 14대의 종이로 제본된 셈이다.
- 하긴 책배를 일부러 재단하지 않고 만드는 프랑스 장정이라는 종류의 책도 있다. 독자가 책을 읽을 때 페이퍼 나이프로 한 페이지씩 자르면서 읽어야 하기에 통근 전철 안에서는 도저히 읽을 만한 책이 아니지만, 사치스러운 독서를 맛볼 수 있는 우아한 책이기는 하다.
- 미궁초자는 마지막 한 대만이 이른바 프랑스 장정 상태였다. 마치 수제 같은 만듦새인지라 그런 실수가 일어났으리라.
- "그럼 자르면 되잖아."
당연하다는 듯한 내 말에 신이치로가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못 잘랐을 거야..."
- "이 책은 잊힐 때쯤 되면 돌연 헌책 시장에 나오지. 그것도 똑같은 한 권의 책인 것 같아. 즉 구입한 사람들이 차례차례 처분한다는 결론밖에 안 나와."
"그렇겠지."
"헌책의 가치가 전혀 없는 이런 책을 일부러 살 정도니 구입자는 아주 괴짜야. 그런 사람이 간단하게 처분해 버리다니 이상해. A씨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가 <미궁초자>를 손에 넣은 건 두 번 다 장서가의 책을 그 가족이 처분했을 때였어. 매입 방법으로서는 별날 것도 없지. 장서가 본인은 좋아해서 모았지만 가족은 전혀 흥미가 없고, 본인이 죽으면 자리만 차지하는 짐에 불과하잖아. 그렇다면 가족 입장에서는 당연히 전부 처분하고 싶을 거야."
"우리 둘 다 남의 일이 아니야."
"흥. 이런 경우 가족 중에 헌책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없어."
- 신이치로는 변함없이 주변에 눈길을 주면서 책장에서 <세계 불가사의 백과사전>이라는 책을 꺼내 잠시 찾아보다가 읽기 시작했다.
"너구리는 배의 털은 하얗고 등의 털은 검다. 너구리가 어둠 속에서 일어서면 목 아래쪽 털이 사람의 얼굴로, 배의 털이 하얀 옷으로, 즉 하얀 옷을 입은 아이로 보인다. 사람이 다가가면 너구리는 뒤로 돌아 도망치므로 한순간에 아이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아스카 신이치로는 또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이번에는 조금 즐거운 듯이 말했다.
"물론 언니 사기리 砂霧와 산속의 아이 둘 다 도플갱어였다는 해석도 가능해."
"야야, 그래서는 곤란해."
"아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인데."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오더니 그는 방 안을 보라는 듯이 양팔을 펼쳤다.
안개가 사라졌다.
- "걷혔어! 안개가 걷혔어!"
방에 뛰어들어 "신이치로"라고 부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상태가 이상했다. 또 뭔가에 귀를 기울이는 표정을 짓고 자꾸 주변을 신경 쓰고 있었다.
"왜 그래?"
한때의 환희가 한순간에 시들고 다시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니 그게, 난 두 번째 이야기까지 읽었다고 했잖아."
허겁지겁 <미궁초자>를 펼치자 <자식귀 유래>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이걸 읽었다는 건가...
"그래서 뭔가 이상한 현상이라도 일어났어?"
"응..."
기묘한 동작을 계속하던 신이치로가 이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말했다.
"네가 오기 조금 전부터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
- 하지만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로부터 몇 년이, 그렇다, 대략 19년이 지났어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19년 전에 일어난 그 사위스러운 일 때문에 뇌리에 철썩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듯하다.
- 역시 그때 우리 부부와 아내의 배 속에 있던 사쿠지는 자식귀의 사악한 기운에 해를 입었단 말인가. 그런 마물의 마력이 이제 와서 아내와 사쿠지를 내게서 빼앗았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그 부부는 그 후에 아이를 또 낳았을까. 아니면 그들 또한 자식귀의 주술적인 속박에서 달아나지 못했을까.
아내와 사쿠지도 없는 지금, 그 사건에 연관된 사람으로서 당시의 일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기록해두고자 한다. 지금까지 글다운 글을 써본 적은 없지만, 이 기록을 남기는 것이 아내에 대한 공양이라 믿고 싶다.
-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여름, 올해와 마찬가지로 달아오른 공기가 살에 착 감길 정도로 찌는 듯이 더운 날이었다.
그해 슈자쿠 신사의 여름 축제는 그야말로 불길함이 넘쳐흘렀다. 일단 축제 첫날, 벌건 대낮부터 술에 취한 타관 사람이 이 마을 여성에게 치근거렸다. 남자는 유카타(목욕 후나 여름철에 평상복으로 입는 무명 홑옷) 차림의 젊은 여자에게 집요하게 말을 걸다가 반쯤 억지로 신사 뒤편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여자는 의연한 태도로 대처했다. 화가 난 남자는 아기를 데리고 축제 구경 온 이 마을 중학교 ...
- 상당히 앞에 있는 아내가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아기를 데리고 온 부부(우리보다 조금 젊을까)와 함께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보통은 낯을 가리지만 분명 아기를 본 순간 무심코 말을 걸었으리라. 나는 아내를 따라잡고 부부에게 인사를 했다.
마스오 桝尾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편은 도쿄의 한 종합병원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하는 사람인데, 슈자쿠의 북쪽에 해당하는 아이젠의 본가에 가다가 축제를 구경하러 들렀다고 한다.
"저는 옆 마을에 살았는데도 슈자쿠의 여름 축제에는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밖에 와본 적이 없어요. 늘 근처의 지장보살 축제로 때웠죠."
마스오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듯 'T'라는 내 드문 성을 듣고 가가구시 촌 출신이 아니냐고 묻더니만,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어릴 적 추억을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기는 부인이 안고 있었고 그는 조그마한 파란 이불과 딸랑이 장난감이 놓인 빈 유모차를 밀고 있었다.
부인은 얌전하고 서글서글한 여자로 보였다. 태어난 지 몇 달밖에 안 돼 보이는 아기는 마음을 완전히 놓은 듯한 모습으로 푹 잠들어 있었다.
가능하다면 길동무는, 그것도 아이가 있는 부부 길동무는 사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가 즐거운 듯이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내게는 마스오가 끊임없이 말을 거는 통에 자연스레 동행하게 되었다.
- "그런데 자식귀에 대해서는 아시죠?"
추억 이야기가 일단락되었는지 마스오가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예, 그야 어릴 적에 귀에 못이 박일만큼 들었죠. 나쁜 짓을 하면 자식귀가 끌고 가서 머리부터 우적우적 먹어치운다고요. 그 부근 아이들은 모두 그 이야기를 듣고 겁을 먹은 경험이 있을 겁니다."
"어느 지방이나 똑같지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오로지 어린아이의 버릇을 들이기 위해 이용됩니다. 따라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의 내용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사람은 없어요. 저는 의사지만 각지에 전해지는 신기한 이야기, 그것도 요괴에 관련된 이야기를 엄청 좋아해서요. 아버지의 강한 희망이 없었다면 사실 민속학 공부를 하고 싶었을 정도라, 대학생 시절에는 후지모리야 박사의 책을 정독했습니다."
- "당신은 자식귀가 실제로 있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의사라는 직업과 겉모습 때문인지 마스오의 첫인상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느닷없이 기묘한 질문을 하는 바람에 나는 대답이 궁했다.
"당황하실 만도 하지만 제 이야기를 좀 들어주십시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 지방의 전설로 전해지는 자식귀는 슈자쿠 연산에 터를 잡은 일종의 요괴로서 다루어져 왔습니다. 옛날에 그들은 마을로 내려와 어린아이를 유괴해 잡아먹었지요. 어느 해 이 지방을 방문한 고승이, 일설에 따르면 고보 대사(弘法 大師, 헤이안 시대 초기의 고승으로 진언종을 일으켰다)라는데 영 미심쩍은 이야기죠. 아무튼 그 고승이 효가타케 산기슭의 암자 ... "
- 다른 의사들보다 고생이 심한지도 모른다. 나도 일 관계로 병원에는 자주 들락거린다. 그래서 마스오가 적어도 유능한 소아과 의사 같다는 느낌은 딱 왔다.
다만 병원에서 알게 된 부인에게 연인이 있는데도 끝까지 밀어붙여 결혼에 성공했다는 사실에는 놀랐다. 소아과 의사인 만큼 온화해 보이는데, 역시 사랑을 하면 사람은 바뀌는 법인가. 아니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에게 그런 사정까지 주저 없이 털어놓을 만큼 만사에 연연하지 않는 그의 성격 탓일까.
- 아무튼 지금은 아이도 태어났으니 두 사람은 행복의 절정을 누리고 있으리라. 그가 첫 문에서부터 밀고 온 유모차는 아기를 위해 특별히 주문하여 만든 물건이라고 한다. 비었다고는 하나 큼지막한 자갈이 깔린 길을 나아가기는 힘들 듯하다. 중문을 지나자 자갈은 없어졌지만, 포장된 길은 아니라서 곳곳에 크고 작은 돌멩이와 나무뿌리가 얼굴을 내민다. 아내와 아이를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유모차 같은 걸 밀고 갈 수 있겠는가.
"평소에 지긋지긋할 정도로 아이들을 많이 보는지라 아내가 임신을 하더라도 별 감흥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역시 내 자식은 다르더군요. 이상한 예를 들어 죄송합니다만, 아내가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다른 남자의 아이였다면 역시 이렇게까지 걱정하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 시선이 유모차에 쏠려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띠며 물었다.
"당신도 지금 그런 기분 아닙니까?"
- 오싹해질 틈도 없이 등 뒤에서 비명이 들렸다. 나를 떠밀다시피 하면서 마스오 부인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구부러진 통로 중간쯤 자식의 미라가 전시된 울타리 앞에 마스오 씨 부부의 유모차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마스오가 그 옆에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순간, 나는 꺼림칙한 예감의 정체를 알았다.
- 여기까지는 간신히 썼지만, 이후의 일을 과연 지금까지와 똑같은 마음으로 쓸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처음에 이 기록을 남기는 것이 내 임무라고 명기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제부터 쓸 이야기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다.
- 그 후, 나도 일단 '부모'라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여기는지는 잘 안다. 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비규환은 부모라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겪고 싶지 않은 상황이리라.
마스오 씨 부부에게 19년 전의 그 하루는 평생토록 결코 잊을 수 없는 섬뜩한 공포와 핏기가 가시는 전율로 채색된, 그야말로 악몽 같은 날이었음이 틀림없다. 그것은 나와 아내도 마찬가지다. 그 부부의 악몽을 공유하며 올여름까지 살아왔다고 할 수 있으니까...
- 분명 우리에게는 사쿠지가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여름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쿠지는 무사히 세상의 빛을 보았다. 감사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 악몽 같은 사건의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금, 앞으로는 나 혼자서 그 기억과 대치할 필요 ...
- 아무나 한 명 죽여보고 싶을 때
혼자 있느냐며...
... 친구가 온다고 한다.
- 친구를 죽인다.
이 생각에 사로잡힌 건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유메노 규사쿠의 엽기가(猟奇歌, 일본 탐정소설가 유메노 규사쿠가 지은 총 400여 수의 엽기적인 시조. 위의 시조 역시 규사쿠의 엽기가 중 한 수다)에 촉발된 것이 시초였던 것도 같고, 훨씬 전부터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충동을 이 시조가 깨운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어느 쪽이라고도 딱 집어 말할 수 없지만, 날마다 이 마음이 크게 부풀어 오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 하지만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특정한 친구 한 명에게 살의를 품고 있음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친구라면 아무든 상관없다. 나는 '친구를 죽인다'는 행위 그 자체에 흥미가 있고, 현재 그 흥미는 거역할 수 없는 하나의 충동으로 변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고 있다.
- 친구를 죽인다.
도대체 이 행위의 어떤 점에 나는 끌린 것일까.
내 등 뒤에는 하숙방의 유일한 창문이 있다. 밖에서는 아까 전까지 세차게 쏟아지던 눈이 아직도 나풀나풀 흩날리는 기척이 느껴진다. 벽에 걸린 고풍스러운 시계의 바늘은 새벽 1시를 가리키기 직전이다. 방금 전에 목욕을 마치고 나왔는데 몸이 벌써 식어가고 있다. 방의 불을 끈 후 커튼을 젖히고 창밖에 눈길을 주자 골목길 옆의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빛 속에 조용하게 내리는 눈의 환상적인 풍경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분명 온 동네 집들의 지붕은 한참 전에 검은 기와가 새하얀 색으로 빈틈없이 덧칠되었으리라.
커튼을 치고 불을 켠 후 다시 고타쓰(탁자 밑에 방열 기구를 넣고 그 위에 이불을 덮은, 일본의 겨울철 난방기구) 아래에 발을 집어넣고 창가에 놓인 책상에 등을 기댔다.
그렇게도 아름다운 눈이 춤추듯이 내려 쌓이는 밤중에 홀로 '친구를 죽일' 생각을 하는 나는 정신이상자일까.
- 살인이라는 행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모양이다. 하나는 질투나 원한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감정으로 누군가를 살해하는 격정범죄형. 다른 하나는 누군가에 대한 열등감이나 질투심으로 정신적인 갈등을 하던 끝에 결국 그를 죽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살인이 정신적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결론에 달하는 위기 범죄형이다.
내가 지금부터 행하려는 살인은 분류상으로는 위기 범죄에 포함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친구를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어떠한 정신적인 갈등에서 야기된 것이 아니다.
- 계획의 대부분을 실천하지 못할 수도 있을 테니까.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은 온갖 수사활동을 개시하는데, 개중에서도 피해자의 인간관계는 원한, 금전, 애증 등의 측면에서 철저하게 조사한다. 동기에서 용의자가 부각되지 않을까 싶어 그러한 인간관계 파악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의심받을 일은 없다. 왜냐하면 내게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동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가장 친한 친구인 내가 왜 그를 살해해야만 하는가? 처음부터 나는 완벽하게 용의선상에서 제외되는 셈이다. 설령 아주 불리한 상황증거가 나온다 해도 이 동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절대 안전하다.
- 이쯤 되면 어리석게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럴 바에야 친구를 죽이지 말고 처음부터 생면부지의 타인을 죽이면 되잖아. 아무리 동기가 없다고 해도 가까운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임의로 골라서 죽이는 편이 더 안전할 텐데."
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소리 높여 주장하겠다. 그런 묻지마 살인은 너무나도 미욱하고 시시하다. 그런 저급한 살인에는 피 한 방울 흘릴 가치도 없다. 아무렴, 묻지마 살인이 더 안전하기는 하다. 덧붙여 사건이 미궁에 빠질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내가 추구하는 것은 결코 피에 굶주린 잔학한 살인이 아니다.
-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범죄 역사상에 남을 몇몇 살인자들, 잭 더 리퍼나 H. H. 홈스, 욕조 속 신부 살인자 조지 조셉 스미스, 뒤셀도르프의 괴물 페터 퀴르텐, 뉴올리언스의 도끼 사내, 보스턴의 교살자 알버트 드살보, 에드 게인, 테드 번디 등에게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공감과 애착을 느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머릿속 또 하나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로 받아들인 경우에만 그렇다. 희대의 살인귀들이 저지른 범죄의 처참함과 무절제함, 그들이 지닌 기인 잔학성과 광기를 숭배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구체적인 형태로 눈앞에 나타난다면 한없는 불쾌함과 구역질을 느낄 뿐이리라.
- 책상에 기대어 실내를 둘러보거나 이부자리에 누워서 눈을 뜨고 있으면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진다. 방이 이렇게 좁은데도 오른편 벽의 바닥에서 천장까지 책을 잔뜩 쌓아놓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는 물론 앞으로도 쌓아 올렸으므로 책은 그야말로 두세 겹의 벽이 되어 솟아올라 있다. 그 책의 대부분이 고금의 탐정소설과 괴기환상소설을 비롯하여 범죄학이나 이상심리학과 관련된 책부터 흑마술부류까지, 넓은 의미에서 미스터리 관련 서적이다.
장서 중에는 선정적인 범죄 실화부터 아주 객관적으로 쓴 범죄기록에 이르기까지 실제 사건을 제재로 한 책도 꽤 많다. 하지만 내게 그 책들은 모두 '이야기'다. 그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 ...
- 어딘가에서 소리가 났다. 현관인가.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타닥타닥 복도를 걷는 슬리퍼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이윽고 한산한 하숙집을 희미하게 진동시키듯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 <오락으로서의 살인>.
A4 용지에 이런 제목으로 인쇄된 원고를 보고 처음에는 조잡한 소설인 줄 알았다. 그 사건과 결부시켜 생각할 때까지는...
- 내가 나사 茄叉兎叉라는, 아무도 어떻게 읽는지 모를 이름이 붙은 지방 마을에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인 열아홉 살 때였다.
아버지 말마따나 '계집애 주제에 재수를 한 것도 모자라 원하는 학교에 붙지 못해 4류 대학을 찾아 북쪽 지방으로 낙향하는 처지'였지만, 나는 마침내 잔소리 많은 부모 곁을 벗어났다 싶어 단순하게 기뻤다. 내 인생 최고의 시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음. 그렇게 따지면 지금이 비참해지는데... '도대체 내가 하는 일이 뭐 어때서' 따위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 도쿄에서 태어나고 자란 까닭에 초중고를 다니면서 사이좋게 지냈던 친구들과 헤어지려니 역시 섭섭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괴롭지 않을 만큼의 해방감도 맛보았다. 부모의 간섭이 없어진다는 생각만으로도 얼굴에서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러나 하숙집이 문제였다.
'젊은 여자가 혼자 살다니 언어도단'이라고 분개한 아버지가 특별한 연줄을 이용해 찾아낸 것이 숙부의 친구의 선배의 동료의 여동생의 남편의 숙모가 경영하는 이케와 池和 장이었다.
동네 부동산 중개소에 부탁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수준의 연줄이다. 아니, 이 정도면 연줄이라 부르기가 민망하다. 오히려 부동산 중개소에서 찾았다면 더 나은 물건이 나왔을 것이다. 적어도 마음에 안 들면 거절할 수나 있지.
- 뿐만 아니라 방도 아버지가 멋대로 결정했다. '여자애가 현관과 가까운 방을 쓰면 위험하다'며 1층 제일 안쪽으로 정했다.
"1층이면 치한이나 속옷 도둑이 노리지 않을까?"
그러자 아버지는 "2층이면 불이 났을 때 못 도망치잖아"라고 진지한 얼굴로 반박했다. 화재보다 치한이나 속옷 도둑에게 당할 확률이 훨씬 높을 것 같은데.
무엇보다 여자애가 현관과 가까운 방을 쓰는 게 위험하고 말고를 떠나, 하숙인이 전부 남자인 건 문제가 아닌가. 모두라고 해도 네 명이고, 내가 입학한 4류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었지만 남자는 남자다. 그것도 젊은 남자다. 그런 곳에 아가씨 혼자 들어가 사는 것이 현관과 가까운 방이 어쩌고 저쩌고 왈가왈부하는 것보다 훨씬 ...
- 내가 생각할 틈도 없이 시게하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미스터리와 호러에 등장하는 피해자가 하나의 말이나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건, 그 사람을 죽이는 범인이나 괴물과의 관계성 역시 그러한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말이지.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는 반드시 어떤 힘 관계가 작용하거든."
솔직히 말해 나는 시게하라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 내 표정을 보고 착각한 모양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어.”
그는 멋대로 해석하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즉 힘이 작용한다면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당연히 죽이는 쪽에서 죽임을 당하는 쪽으로만 작용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고 싶겠지.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개중에는 '피해적 가해자'와 '가해적 피해자'라는 예도 존재한단 말이지. 이건 말이지, 살인에 이를 때까지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뒤바뀌어 있었던 케이스로..."
"멘델존의 '가해자보다 유책성이 높은 피해자' 말이로군요."
시게하라가 입 밖에 꺼내기 전에 내가 말했다.
"... 자, 잘 아는구나."
잠시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의 말이 어지간히 의외였던 모양이다.
만약 다른 사람, 특히 도베나 후쿠리모토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면 그도 불끈 화를 냈을 것이다. 나라서 순수하게 놀란 것이다.
- 그는 자신의 장서를 한 권씩 눈으로 좇고 있는지, 미묘하게 변한 나의 태도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해당하는 책을 찾아서 내용이 떠오른 모양이다.
"레오폴드와 로엡 사건을 예로 들 수 있겠군. 시카고 대학교 법학과의 수재 청년 두 명이 완전범죄를 성공시킬 목적으로 유복한 실업가의 아들을 유괴해 살해한 사건이란 말이지. 당시 수재 청년의 실험 살인이라 불리며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어. 이 사건은 훗날 패트릭 해밀턴이 연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렸고, 그걸 히치콕이 영화화한 것으로도 유명하단 말이지."
- 한번 생각이 나자 자꾸 떠오르는지 시게하라는 연이어 말했다.
"그래 그래, 이런 예도 있었단 말이지. 어떤 여자가 안면이 있는 남자와 드라이브를 하다가 그 남자를 쏘아 죽였어. 그렇게 깊은 관계였던 건 아니야. 정말로 그냥 아는 사이였단 말이지. 동기는 '사람을 죽이면 양심이 아픈지를 시험해보고 싶었다'였단 말이지. 나는 수재청년의 실험 살인보다 이쪽이 좀 더 공감이 돼."
"심리학적으로는 무동기 살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모양이네요. 세상 사람들의 수용 여부와는 별개로, 범인에게는 엄연한 동기가 있다는 것 아니겠어요?"
도서관에서 공부한 내용과 시노하라와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내가 정리해 말하자 그는 몹시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무동기 살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말이지, 그건 어디까지나 생리학적 요인 때문에 일어난 살인이 아닐까 해."
- 쳐다보자 2단으로 달린 선반 안쪽에서 멋진 박스에 든 책을 꺼내 귀중품이라도 다루듯이 양손으로 들고 제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에도가와 란포가 쓴 평론집 중에 <속 ∙환영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거예요."
도베가 고타쓰 위에 책을 놓고 소개하기 전에 내가 재빨리 방석을 들고 원래 자리로 돌아온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는 유명한 '유형별 트릭 집성'이 수록되어 있죠. 미스터리에서 사용된 다양한 트릭을 말 그대로 유형별로 소개한 트릭 사전이라고도 불러야 할 역작인데요."
히죽거리는 그의 표정으로 보아 엄청 좋아하는 듯하다.
"그것과는 별개로 이 책에는 '탐정소설에 그려진 이상한 범죄 동기'라고 해서 동기만을 다룬 장이 있습니다."
아우, 씨... 그렇게 편리한 게 있으면 진작 내놨어야지.
- "란포는 프랑수아 포스카의 <탐정소설의 역사와 기교 Histoire et technique du roman policie>를 참고하여 이상한 범죄 동기를 크게 네 가지로 나눴습니다. 첫째, 감정의 범죄. 둘째, 이욕의 범죄. 셋째, 이상심리의 범죄. 넷째, 신념의 범죄죠. 이것들을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기 위해 괄호 속에다 감정의 범죄에는 '연애, 원한, 복수, 우월감, 열등감, 도피, 이타'라고 적고, 이욕의 범죄에는 '물욕, 유산 문제, 자기 보전, 비밀 유지', 이상심리의 범죄에는 '살인광, 변태심리, 범죄를 위한 범죄, 유희적 범죄', 신념의 범죄에는 '사상, 정치, 종교 등의 신념에 연유한 범죄, 미신에 따른 범죄'라고 각각 적었죠."
- 이야, 란포라는 사람은 그런 일까지 했구나.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괴인 20면상과 소년 탐정단>밖에 없었으니 놀라움과 감탄을 동시에 느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 바로는 '이상심리의 범죄'로 분류되는 '범죄를 위한 범죄' 혹은 '유희적 범죄'가 오락으로서의 살인에 해당하는 것 같았다. 또한 '감정의 범죄' 중 '우월감'이라는 것도 어쩌면 오락으로서의 살인에 감춰진 동기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 "란포가 쓴 <천장 위의 산책자>라는 작품에 아, 이건 일종의 도서 추리물이니까 트릭과 동기를 말해도 괜찮습니다. 그렇지, 도서 추리물이란 원래 오스틴 프리먼이 <노래하는 백골>에서."
그리고 도서 추리물의 내용과 역사에 대해 한바탕 강의를 들었다. 노래하는 백골이라는 작품에서 나도 아는 '형사 콜롬보'의 이름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
단기결전은 무슨 놈의 단기결전.
허나 뭔가 하나 정도는 도베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지 않으면 그도 욕구불만으로 폭발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천장 위의 산책자> 말입니다만."
그렇게 떠든 후에도 원래 이야기로 돌아오는 건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뭐, 좋다고 해두자.
- "호러를 싫어하는 사람은 분명 왜 굳이 그런 걸 읽거나 볼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할 거예요."
"어이."
과연 후쿠리모토도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는지 입을 뗐다.
"호러라고 한 마디로 뭉뚱그려놓았지만, 그 속에는 괴기소설이나 환상문학도 포함되어 있어. 고딕소설에서 몬스터 호러, 아니 지금은 포스트모던 호러인가,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랄까 변천이 있다고. 작품에 따라서는 문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부터 눈썹을 찌푸리게 만드는 별종 호러까지 폭이 아주 넓단 말이야. 호러 하면 스플래터라는 공식은 80년대에 일본에서 유행한 호러영화 탓이지."
"그런가요?"
이건 순순히 들어두자.
- 어젯밤(이라고 해도 자정이 지났으니 오늘이지만), 아스카 신이치로와 나는 어떻게 <미궁초자>의 괴이 현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 왜 이 책을 읽은 사람에게 괴이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확인을 했다.
아무래도 <미궁초자>에 얽힌 소문은 진짜인 듯하다는 것. 우리도 읽기 시작한 이상 이제 무를 수는 없으리라는 것. 괴이 현상은 읽은 작품의 내용에 무슨 형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 이 현상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각 작품에 기록된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일의 진상을 알아내야 한다는 것. 수수께끼 풀이에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몸으로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
- 나는 휴가를 하루 낼 테니 둘이서 남은 분량을 단숨에 읽고 한 번에 수수께끼 풀이를 끝내 결판을 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신이치로는 너무 위험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긴 작품 하나만 읽었는데도 그런 괴이 현상이 일어날 정도니 한꺼번에 다 읽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지 모른다. 또한 단번에 수수께끼를 다 풀어낸다면 다행이지만, 풀어내지 못했을 경우 우리가 입을 피해를 고려하면 주저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극히 위험한 도박이라고 할 수 있다.
- 안라 역까지 걸어가서 전철을 타고 교토 역에서 내려 회사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계속 긴장을 유지했다. <안개 저택>을 읽고 나서 안개의 습격을 받았고, <자식귀 유래>를 읽은 후에 아기가 덤벼들었으니 <오락으로서의 살인>을 읽은 다음에는 정신이상자, 그야말로 묻지마 살인범 같은 놈이 갑자기 칼을 휘두르는 것은 아닐까 싶어 잔뜩 겁이 났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 받은 부적을 만질 때마다 딸랑, 하고 울리는 종소리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출근은 했지만 잠이 부족해서 머리가 몽롱했다. 그래도 일에 집중했다. 아니, 집중한 것처럼 꾸몄다고 해야 할까. 이날은 늦은 오후 시간에, 모 대학 교수가 진종(정토진종의 준말. 정토진종은 정토종에서 분리되어 나온 일본의 독자적인 종파다)의 역사를 테마로 쓴 논고의 재교 원고를 그에게 전해주러 가야 했다. 필자의 자택을 방문하려면 나라의 사이다이지라는 민영철도역에서 내려야 한다. 때문에 볼일을 마친 후 거기서 바로 퇴근할 예정이라 평소보다 상당히 일찍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회사를 나설 시간이 되기까지 나는 오로지 일에 몰두하는 척했다.
필자의 집에 가는 도중에도, 귀갓길에 오르고 나서도 살인귀가 몰래 다가오지는 않는지 계속해서 주변을 주의 깊게 살폈다. 긴장한 탓인지 집에 도착하자 위가 좀 아팠다.
집에 돌아오자 6시 반이었다. 저녁을 가볍게 먹고 바로 신이치로네 집으로 향했다. 이렇게 일찍 시작하면 오늘 밤은 다음 작품까지 읽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 "아마 필명이 맞을 거야. 하지만 읽는 법을 표기해두지 않다니 역시 이상하지 않아?"
"목차에는 루비(한자 옆에다 읽는 음을 작게 표기하는 것)를 잘 안 다니까."
"그럼 작품의 속표지에 달면 되지. 아니, 거기다 읽는 법을 표기하지 않으면 판권장 정도밖에 표기할 곳이 없어. 그거야말로 이상하잖아."
"그건 그런데."
"실은 자식귀 유래를 읽다가 작자 이름 표기가 기묘하다는 게 다시금 마음에 걸리더라고. 그 작품에 나오는 '마스오'나 '야마가'에는 루비가 제대로 달려 있었어. '고바'랑 '히가시다니' 같은 등장인물도 마찬가지였고. 그런데 정작 중요한 'T'에는 달려 있지 않았지. 확인했는데 루비는 모든 인명에 달려 있어. 그런데 서술자인 작자 이름에만 달려 있지 않단 말이야."
"왜 그럴까?"
"분명 읽.기.를. 바.라.지. 않.는. 거.야."
"뭐..."
"혹시 작자들의 이름을 읽어내면 이 책에 숨겨진 비밀이 밝혀지는 건지도 모르지."
- 신이치로가 기묘한 이름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이해가 갔지만 우선은 <오락으로서의 살인>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 급선무다 싶어서 처음에는 굉장히 초조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나도 작자 이름의 수수께끼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어떻게 읽는지 알아내면 <미궁초자>에서 달아날 수 있는 건가?"
- "만약 세 사람 중 누군가가 범인이었다면 아무리 뭐래도 경찰이 알아차렸겠지."
"마토자키가 '나'였다? 자기 방에 온 '그'를 독살하려고 했다? 그런 짓을 저지르고 뒤처리는 어떻게 하려고?"
변함없이 내 해석을 무시하는 말투로 그.것.이 반론했다.
"사고로 위장할 작정이었다든가."
"독살해 놓고 사고라니 통할 리 없을 텐데."
"마토자키 입장에서는 가능했을지도 모르지."
"입장...?"
"자기중심적인 여대생이 썼잖아."
- [마토자키 씨도 고향으로 돌아갈 낌새 없이 모두와 마찬가지로 하숙집에 남았다.
안 돌아가세요?
내 물음에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돌아가면 가게를 도와야 하거든.
요코미조 세이시가 가게를 잇지 않고 도쿄로 나온 것과 비슷하달까,라고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자영업자의 대를 이을 아들인 모양이었다.]
"여기서 잠깐. 요코미조 세이시의 본가는 무슨 일을 했지?"
"..."
"꼼꼼한 아스카 신이치로라면 알 거야."
"..."
"고베에서 약국을 했잖아."
- 산의 밤은 일찍 찾아온다.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를 한 후 나와 노인은 일찌감치 침낭에 들어가 잠이 올 때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나는 초등학교 시절 임해학교(여름철에 바닷가에 임시로 마련한 교육시설)에서 겪은 무서운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노인이 자신은 딱 한 번 살인사건을 경험한 적이 있다며 들려준 것이 다음 이야기다.
- 이번에는 내 차례로군.
난 자네의 세 곱절도 넘는 세월을 살았지만 공교롭게도 남에게 새삼스레 들려줄 만한 이야기는 없어서 말이야... 가장 눈부실 청년 시절은 전쟁이라는 어리석은 행위 때문에 엉망이 되었고, 그 후의 인생에도 차질이 생겼지. 이 나이를 먹고 혼자 이런 산에 오를 정도니까 제대로 된 인생이 아니었다는 것쯤은 상상이 갈 거야.
응?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최고라고?
그렇지.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몸이 제대로 움직이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아. 뭐, 사람에 따라서는 폭삭 늙고 나서도 현세적인 욕심을 부리는 사람도 있지. 하지만 나는 욕심도 점점 없어져서 언제까지는 이렇게 하고 싶다, 언제쯤에는 이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도 많이 사라졌어. 그렇게 되면 사람은 자연스레 추억을 곱씹으며 살아가려고 하지 내게 가장 즐거운 추억은 어릴 적이야.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살아 계실 적인데... 묘하게도 지금은 ...
- 다미코가 있어. 가사키도, 시지마도, 야오도, 나카스기도 있지.
마치 사진을 인화할 때 감광지에 옮기는 음화의 흑백이 뒤바뀐 화상처럼 내 머릿속에는 별채에 모였던 모두의 얼굴이 그 모습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어.
이렇게 눈을 감으면.
다미코가...
거기에 있어.
- 조용해졌나 싶더니만 노인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처음 한동안은 그렇게 집중해서 듣지 않았다. 그러나 이야기가 사건에 접어들자 흥미가 생겼다.
난감한 것은 소설과는 달리 사건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 나름대로 추리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정보가 부족한 게 아닐까 싶었다. 내일 노인에게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도 잠들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흔적이라곤 일절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산에서는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것이 상식이라고는 하나 사람이 머물렀던 흔적을 이렇게까지 말끔히 지울 수 있는 건지 의문스러울 만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문득 그 노인이 정말로 나와 함께 있었던 건지 의심스러웠다.
산과 바다에서는 때때로 인간은 상상도 못 할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 "응, 그럴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아스카를 바라보며 나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수수께끼 풀이에 성공한 걸까...
"아스카, 좋은 추리였다."
신이치로는 동생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동생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자, 오늘은 이만 돌아가렴."
툇마루에서 뜰로 나간 아스카는 몸을 휙 돌리고 손을 흔들었다.
"신산, 나중에 또 봐."
- 나는 손을 마주 흔들며 작은 목소리로 신이치로에게 물어보았다.
"잘 해결된 것 같아?"
"모르겠어."
그의 표정이 바로 험악해졌다.
"아스카는 일단 할머니께 부탁드리는 수밖에."
"<미궁초자> 이야기도 할 거야?"
"아니, 이 상황에서 할머니까지 끌어들이기는 절대로 싫어. 괜찮아. 할머니는 이유 같은 건 안 물어보셔. 그냥 아스카의 상태가 이상해지면 바로 알려달라고만 부탁해 둘게. 그럼 알아들으실 거야."
- 신이치로가 안채로 간 후 나는 가슴주머니에서 할머니가 준 부적을 꺼냈다. 신이치로에게 말하는 걸 잊었는데, 어젯밤의 괴이 현상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다 이 부적 덕분이다.
그런데 손에 든 부적을 보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할머니가 준 부적의 표면에 곰팡이와 비슷한 기분 나쁜 얼룩이 두드러기처럼 생겨 있었다. 마치 부적을 썩히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 "우왓!"
나도 모르게 내던진 부적이 화로 속에 떨어져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마치 호마(護摩, 불을 피우고 그 불 속에 공양물을 던져 넣어 태우는 의식)를 행하듯이 불길이 30센티미터 정도 확 솟아오르다가 이윽고 하얀 연기가 풀풀 피어오르더니 부적 모양의 재만 남았다.
- 놀라서 멍청하게 쳐다보던 나는 불길이 가라앉자 자연스레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부젓가락으로 부적의 재를 화로의 재와 뒤섞었다.
그리고 신이치로가 안채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려 함께 후루혼도로 향했다.
-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내가 여기에 싣는 원고를 도대체 누가 썼는가. 또한 그 내용은 철저히 허구인가, 아니면 한없이 진실에 가까운 실제 사실의 재구성인가이다.
누가, 무엇을 위해 썼는가...
- 나는 모 대학 부속기관인 민속학 관련 연구소에 소속된 몸으로, 일의 성질상 다양한 현지조사를 하러 지방 촌락을 찾을 때가 많다.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지방의 각 촌락 이촌자의 가산 처분 방법을 실태조사하러 갔을 때 우연히 G촌의 어느 옛 가문이 소유한 광을 살펴보게끔 허락을 받았다. 광 안은 민속학 관련 자료의 보고라고 할 만한 상태였지만, 공교롭게도 조사에 필요한 문헌의 열람만 허가받았기에 유감스럽게도 흙광 내부를 자유로이 조사하지는 못했다.
그건 그렇고 문제의 흙광은 몹시 으스스한 곳으로, 다양한 지방의 광을 수십 채나 보아온 나조차도 처음으로 체험할 만큼 등줄기가 선뜩해지는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흙광 그 자체가 의지를 지니고 끊임없이 나를 살피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광 안에 있자니 뭔가가 가만히 나를 응시하거나 계속 엿보고 있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 나오미가 큰 공을 세우기라도 한 듯이 의기양양하게 빙긋 웃으며 리요코에게 고자질했다.
"미요, 혼잣말이나 말대꾸를 하면 어떤 벌을 받는지 알지?"
리요코는 차갑게 쏘아붙이고 나서 "흥" 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아케미와 즐겁게 무슨 이야기를 하며 언덕을 올라갔다.
"역시 하쿠쇼 白庄 안뜸으로 들어오니까 조용해서 좋네."
빈손을 좌우로 흔들며 리요코는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다.
- 슈자쿠 연산의 아라레가타케 산기슭에 위치한 하쿠쇼 일대는 메이지(1868~1912) 시대 중엽부터 화족(작위를 가진 사람과 그 가족. 화족 제도는 메이지 초에 시작되어 1947년에 폐지되었다)의 별장지로 개간되어 왔다. 쇼와(1926~1989) 시대에 접어들자 민간 재벌의 별장이 속속 세워지기 시작했는데, 원래 있던 화족들의 별장과 구별하는 의미와 별장지의 지형적 관계에서 각각 윗하쿠쇼와 아랫하쿠쇼로 불리게 되었다.
리요코의 집안은 대대로 슈자쿠 신사의 신관을 맡아왔기 때문에 이 지방에서는 상당히 큰 위세를 자랑했다. 현재는 리요코의 큰아버지가 신사를 주관하고 있고, 리요코의 부모님은 리요코와 함께 도쿄에 살고 있다. 그래도 리요코는 어릴 적부터 여름방학과 정월에는 슈자쿠로 귀성했다고 한다.
정월에는 아버지의 고향집에 묵지만 여름방학의 대부분은 하쿠쇼 안뜸에서 지내는 모양이다. 왜냐하면 윗하쿠쇼보다 더 깊숙이 들어간, 거의 아라레가타케 산의 산맥에 접한 곳에 리요코의 증조할아버지가 세운 광대한 산장 암벽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요코는 어릴 적부터 반드시 산장에서 여름을 보냈다고 한다
- 미요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늘 약하게 왕따를 당하는 축에 들었다. 왕따를 당해도 철저하게 당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늘 미요보다 더 왕따를 당하는 희생자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Y는 달랐다. 나카노하라 中野原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이전 중학생 시절부터 아주 가혹한 왕따를 당했다.
미요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요에게 가장 큰 공포는 자신이 Y의 대역이 되는 것이다. 언제 자포자기할지 모를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미요가 간신히 리요코 패거리의 왕따를 견뎌냈던 것도 Y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요에게 Y는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에 위치하는 아이였다.
자신보다 아래가 있다. 자신보다 더 비참한 사람이 있다.
미요의 마음속에는 항상 그런 의식이 존재했을 터이다. 지금 미요는 분명 자신의 입장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두려워하고 있다. 왕따를 당하면서도 열일곱 살까지 어떻게든 버텨온 것은 자신보다 더 참혹한 입장에 처한 사람이 있다는 선별 의식 덕분이었다.
- 그런데 최근 미요에게 변화가 생겼다. 하기야 미요 본인은 아직 모르는 듯하다. 다만 눈치 빠른 리요코는 이미 알아차린 것 같다.
그 변화란 리요코 패거리와 반 아이들 모두에 대한 거센 분노다. 지금까지도 물론 화는 났으리라.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공포가 차지하는 비율이 더 컸다. 특히 괴롭힘을 당할 때는 아무튼 빨리 끝나서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바랄 뿐, 분노를 느낄 여유 따위는 없다.
그런 감정이 겉으로 표출되는 것은 자기 방이나 욕실에 홀로 있을 때뿐이다.
그런데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부터 미요가 묘하게 될 대로 되라는 듯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것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 뭔가 계속 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리요코 앞에서는 아직 예전의 미요였지만...
- 미요의 뺨에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미요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를 악물고 언덕을 올려다보았다.
기괴한 요철이 있는 반고개 언덕을 아래에서 바라보자 언덕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꿈틀 요동치는 듯이 보였다.
그 으스스한 언덕 위를 야스히로가 앞장서서 올라가고, 그다음에 리요코와 아케미, 조금 처져서 나오미, 그 뒤에 고타로와 시게키 그리고 미요가 맨꽁무니에서 납작 엎드리다시피 하여 따라간다.
- "우아, 아버님에다 할아버님이래 난 옛날부터 아빠랑 할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출신이랑 자란 환경이 다르니까."
- "나카노하라 고등학교에는 도롱이벌레라는 놀이가, 아니 의식이랄까 그런 관례 같은 게 있어. 도롱이벌레는, 도깨비나 덴구(天狗, 얼굴이 붉고 코가 큰 상상의 요괴)가 들고 다닌다는 도롱이 알지? 뒤집어쓰면 투명인간처럼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는다는 그거 말이야."
"응, 고전 시간에 나왔잖아."
"즉, 도롱이벌레가 된 사람은 완전히 생까이는 거야."
"생까이는 게 뭐야?"
"무시 말이야, 무시. 도롱이벌레는 반 아이들 모두에게 무시당한다고. 즉 완전한 투명인간인 셈이지."
"보이지 않는 사람이로군."
시게키가 불쑥 중얼거렸다.
- "하지만 여기에도 암묵의 규칙이 있어. 수업 중이나 야외 활동, 그룹 연구 등 어떻게 해도 그 녀석을 무시할 수 없을 때가 있잖아. 그럴 때는 상대해도 된다는 예외 조항이 달려 있지."
"다만 도롱이벌레가 먼저 접촉할 수는 있어도 그 반대는 안 돼."
웬일로 시게키가 보충 설명을 했다.
"우아, 참 대단한 걸 생각해 냈네."
아케미는 단순히 감탄한 듯했다.
- 애당초 야스히로는 안중에 없다.
"시게키가 보고 싶다면 할아버님이 모으신 자료를 보여줄게."
리요코가 포기하지 않고 추파를 던졌지만 시게키는 리요코가 아니라 야스히로에게 말을 건넸다.
"대개 '주작 朱雀'이라고 쓰고 '스자쿠'라고 읽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지방에서는 '슈자쿠'가 되지(일본어로 '주작'은 '스자쿠'와 '슈자쿠' 두 가지로 발음된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어.”
- "풍수에서 말하는 사신상응 四神相應 몰라? 사신이란 동서남북의 상서로운 짐승을 가리키는데, 동쪽은 청룡, 서쪽은 백호, 남쪽은 주작, 북쪽은 현무야. 이것들은 지형의 상징이기도 한데, 청룡은 하천, 백호는 가도, 주작은 연못과 바다, 현무는 산을 가리키지. 에도와 교토 거리는 이 사신상응을 의식해서 만든 걸로 유명해."
- "이 지방의 주작은 발음이 달라서 그런지 지리적으로 보면 남쪽과는 정반대인 북쪽이 되고, 연못이나 바다를 상징하는 것도 아니야. 슈자쿠 신사가 있는 슈자쿠 연산을 볼 것까지도 없이 명백히 산을 상징한다 할 수 있지. 즉, 원래 같으면 북쪽의 현무에 해당하는 지방이야."
"그럼 그 슈자쿠 신사에 무슨 이유가 있는 거 아닐까?"
아케미의 지적에 시게키의 표정이 확 변했다.
- 오른편 위쪽 구석을 향해 히라가나(일본의 표음문자)가 순서대로 쭉 적혀 있다. 히라가나는 오른편 위쪽 구석에서 오른편 아래쪽 구석을 거쳐 종이를 한 바퀴 빙 돌아 원위치로 돌아온 시점에서 마지막 글자로 끝난다.
종이는 테이블의 긴 변 중앙에 앉은 리요코 앞에 놓여 있다. 리요코의 오른쪽에는 나오미가 맞은편에는 아케미가 있다. 세 사람 다 맨바닥에 앉아 있다. 아케미의 왼쪽에는 고타로가 불안한 듯한 표정으로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야스히로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다. 고타로 뒤쪽에 자리 잡은 시게키는 방구석에 몰아놓은 소파 하나에 앉아 어디까지나 방관자라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문간 근처에 있는 미요는 저녁식사 시중을 드느라 지쳤는지 털썩 주저앉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대각선 방향에 있는 야스히로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미요 뒤쪽의 문은 리요코의 지시대로 반쯤 열어두었다. 거실 앞 복도 창문도 역시 미리 절반만 열어놓았다. 리요코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이 곳쿠리상이 다니는 길로 쓰인다고 한다.
거실의 불은 껐기 때문에 테이블 양쪽 가장자리에 놓인 촛불의 요사스런 불빛만이 이 방을 밝히는 유일한 빛이었다.
- 리요코가 천천히 작은 자루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다도에서 묽은 차를 끓일 때 사용하는 나쓰메(秦, 말차를 넣어두는 뚜껑이 딸린 용기, 나무로 만들어 옻칠을 한다)를 넣어두는 비단 자루 같은 것이다. 리요코는 거기서 바둑돌보다 약간 크고 평평한 돌을 꺼내 종이에 그린 도리이 위에 안치했다.
"슈자쿠의 신체 중 일부야."
시게키가 몸을 쑥 내밀었다. 목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마치 "뭐라고!"라는 고함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질 듯한 기세였다.
리요코는 시게키의 그러한 반응을 충분히 예상한 듯했고, 실제로 그의 마음속 동요를 감지한 모양이지만 완전히 무시했다. 바비큐를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뭔가 귀기 어린 분위기가 리요코 주변에 감돌았다.
"그럼 지금부터 곳쿠리상을 모셔올게."
- 어쨌든 빨리 신이치로네 집에 가자.
원래 길로 돌아가려다가 멈춰 섰다. 안개는 이미 걷혔으나 슈자쿠의 괴물은 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능묘를 지나 신이치로네 집으로 향하는 도중에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이대로 모탄 초로 들어가면 괴물이 쫓아오지 못하는 것 아닐까.
나는 다시 방향을 돌려 종종걸음을 쳤다.
다리 건너 쭉 뻗은 길의 끝까지 걸어가 왼쪽으로 꺾자 양쪽에 흙담과 판자담이 이어지는 완만한 언덕길이 나타났다. 똑바로 나아가자 언덕길은 민가의 현관으로 막혀 있고, 현관 훨씬 앞에 오른쪽으로 꺾이는 길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꺾이는 길로 들어서서 잠시 나아가자 마치 거대한 미로 속에 발을 들여놓은 기분이 들었다.
- 모탄 초는 원래 성하 마을이었던 만큼 안라 초처럼 길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좁은 골목길이 종횡으로 뻗어 있고, 깜빡 잘못해서 묘한길로 들어서면 막다른 곳이 나오기도 한다. 이제 괜찮다고 생각하면서도 막다른 골목에는 들어가면 안 된다고 자신에게 경고했다. 물론 달아날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재미있는 동네가 있는데 왜 어릴 적에는 여기서 놀지 않았을까. 중학교 반 친구 중 두세 명의 집이 분명 이 동네에 있었을 것이다. 걔들과는 그럭저럭 친하게 지낸 기억이 있으니 여기서 놀았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그런 추억이 없다. 중학생 정도 되었으니 근처를 뛰어다니기보다 다른 놀이를 했던 걸까.
-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자크마르와 세네칼의 <열한 번째 작은 검둥이 Le Onzieme Petit Negre> 등이 그렇고, 일본에서는 니시무라 교타로의 <살인 쌍곡선>, 나쓰키 시즈코의 <그리고 누군가 없었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 등이 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어. 하지만 어느 작품이 해당하는지 엄밀하게 따지기 시작하면 이게 꽤나 어려워."
"애당초 열 꼬마 인디언형 미스터리의 정의는 뭐야?"
대답하는 신이치로의 모습을 보니 역시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 풀이는 끝난 듯했다. 그렇지 않다면 더 조바심을 내고 있을 것이다.
안심한 나는 <슈자쿠의 괴물>의 형식적인 문제부터 차근차근 공략해 나가기로 했다. 열 꼬마 인디언형 미스터리에 속하는 작품으로서 해석하려는 것이다.
- "해당하는 작품에 필요한 조건은, "
신이치로가 조건을 하나하나 제시했다.
"첫째, 사건이 일어나는 무대가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어 있어야 한다. 둘째, 등장인물이 완벽하게 한정되어 있어야 한다. 셋째, 사건이 마무리된 후에는 등장인물이 모두 사망한 상태여야 한다. 적어도 독자에게는 그렇게 보여야 한다. 넷째,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없어야 한다. 적어도 독자에게는 그렇게 보여야 한다. 이 네 가지 정도일까."
"그렇군."
"다만, 이 네 가지를 엄밀하게 충족시키는 작품은 극히 적어."
"그것도 그렇지만 첫째와 둘째는 원래 '폭풍 속의 산장 테마'에도 적용될 텐데? 덧붙여 둘째는 모든 본격 미스터리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테고."
나는 소박한 의문을 던졌다.
"아니, 이 경우의 한정이란 누구 하나 차별하지 않고 모든 등장인물을 균등하게 무대에 올린다는 의미야."
- "분명 본격 미스터리에서는 2, 30명쯤 되는 다수의 인물이 등장해도 결국은 등장인물이 반드시 한정되지.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대우가 천차만별이라는 거야. 즉 살인사건이 발생했을 때 등장인물들은 동등한 위치에서 사건과 대치하지 않아. 사건과의 연관성이라는 점에서 저마다 독자적인 거리를 유지하지. 요는 사람 수만큼의 차이가 생긴다는 거야. 그러므로 작가는 그 복잡하고 특이한 상황 속에 범인을 숨길 수 있는 거야."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겠는데..."
"그런데 열 꼬마 인디언형 미스터리의 경우는 상황 설정이 극단적인 까닭에 등장인물들은 좋든 싫든 사건에 관여할 수밖에 없어. 모두에게 똑같이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지고, 비추어져야 하지."
"그렇구나. 이 경우 한정이란 등장인물의 수를 제한한다는 의미도 있는 건가? 과거의 작품들을 보면 많아도 열 명 전후니까."
겨우 신이치로의 말이 이해되었다.
- "그래서 셋째와 넷째가 중요해."
"응, 모두 죽는 게 이 플롯의 가장 큰 특징이니까."
- "어쩌면 가가구시 촌 출신으로, 나카노하라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는 고향에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Y와 예전부터 알고 지냈을 가능성이 있어."
- "충분히 그렇게 해석할 수 있어. 할 수는 있는데."
"뭔가 말이 안 되는 부분이라도 있어?"
"그렇다면 시게키는 마지막에 스스로 불타 죽은 셈이야.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나오미와 마찬가지로 술을 잔뜩 마시면 문제없겠지."
"방법은 그렇다 치고, 그렇게까지 귀찮은 짓을 할 필요가 어디 있지? 아침식사를 하다 독을 먹고 죽은 세 사람의 시체 사이에 자신도 독을 먹고 드러누우면 그만인데."
"그런 짓을 하면 기록 노트와 모순이... 앗!"
"응, 노트를 쓴 사람이 범인인 시게키라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었을 테니 그거야말로 모순이야."
-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럼. 지기 싫어서 바로 뱉어낸 말에 불과하다.
"그리고 시게키가 범인이라면 이상한 부분이 있어."
- 신이치로의 표정이 조금 험악해졌다.
"이 기록 노트에 적힌 내용의 신빙성을 의심하면 우리가 행하는 사건의 해석 그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
"그렇지만... 하지만 그럼 시게키가 내용을 고치느니 마느니 하는 것도 이상해지는데."
앗,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기록을 읽었을 때 내가 무심코 무섭다고 느낀 건."
그러고 보니 신이치로는 처음에 "이 이야기는 좀 무섭지"라고 중얼거렸다.
"이 노트를 쓴 이유를 생각했기 때문이야."
- "사건의 진상을 적어서 고백하는 것도 아닌데..."
"그래.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역시 자기현시일 거야. 범죄자 특유의 심리지. 게다가 이 정도로 규모가 큰 살인사건인데 미궁에 빠졌으니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고, 누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욕구는 상당히 컸을 거야."
"그런데 사건의 전모를 쓰지 않았다?"
"도리어 여전히 사건의 진상을 감추려고 했지. 노트를 읽고 사건을 추리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까지 예상하고 미요라는 가짜 범인을 제공하려고 했어. 그 심리를 생각하면 정말로 무섭기 짝이 없어."
"..."
"한편으로 그런 범인에게 동정... 과는 좀 다르군. 음... 뭐라고도 하기 힘든 연민 같은 감정마저 느껴져."
"연민이라고?"
"그리고 실은 읽는 사람이 그런 감정을 품을 걸 확실히 계산했을지도 모르는 범인이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을 만큼 무서워."
- 마구잡이로 던진 내 질문을 슬쩍 피하듯이 신이치로는 부젓가락을 들고 의미도 없이 화로 속을 휘저었다.
수수께끼를 풀기 시작하면 아무리 해도 <미궁초자>의 괴이 현상에서 벗어난다는 당초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사건의 해석 그 자체에 집중하고 만다.
수수께끼 풀이가 분명 우리를 지킬 유일한 수단이므로 필사적으로 덤벼드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어찌 됐든 진상을 원하는 나 자신이 존재한다. 무엇을 위해 해석을 시도하는지 완전히 잊어버려서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 "'부의 답례품 등 주술 전반의 권위자'라고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이 중에서 '깨우기'만은 아무 설명도 없는데, 정확하게는 '죽은 사람 깨우기'의 약칭일 거야."
"만약 장례식 놀이를 당해도 '죽은 사람 깨우기'로 되살아날 여지가 있다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구제 조치는 아닐 것 같은데?"
"물론 아니지. 부활시켜서 또 괴롭히기 위해서야. 야스히로의 말에 따르면 리요코는 무녀야. 즉 모든 '의례'를 담당하는 왕따의 주동자인 셈이지. 추측건대 '부의 답례품'의 진짜 뜻도 따로 있을 거야. 분명 장례식 놀이를 당한 사람의 소지품은 본인에게 소유권이 없다고 간주해 반 아이들이 자유롭게 쓸 수 있다든가, 뭐 그런 것에 가까운 내용이겠지."
"이건 그저 괴롭히는 수준이 아니잖아!"
"그래, 인권을 무시한 범죄지."
- "이름 모를 필자가 발견한 기록 노트는 전부 Y.의. 시.점.으.로. 쓰.여. 있.어."
"..."
"이 <슈자쿠의 괴물>이라는 제목의 기록 노트를 쓴 작.자. 자.신.이. 범.인.이.었.던. 거.야."
말로는 다 표현하기 힘든 한기가 느껴졌다.
-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기록할 작정이었으나 무심결에 드러내고 만 건가.
- 될 수 있으면 <미궁초자>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기록노트를 다시 읽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말했다.
"즉 시게키와 고타로가 신경 쓰고 있던 건."
"미요가 아니라 Y였어. 무엇보다 Y는 귀여운데 미요는 그렇지 않지. 리요코가 말하길 남자가 친절하게 대해주는 게 처음인 미요에게 느닷없이 두 사람이 말을 걸며 접근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 "그 후에 Y는 어떻게 됐을까...?"
신이치로의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이건 신이치로도 모를 테니까. 다만 Y를 생각하다 보니 어떤 가능성이 떠올랐다.
"혹시."
그런데 신이치로의 상태가 묘했다. 툇마루 쪽 장지문을 가만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방의 나머지 세 부분에 눈길을 주고 나서 마지막에는 천장까지 올려다보았다.
"야, 왜 그래?"
- "암벽장에 말이지?"
"본가의 흙광 안에."
"사건을 일으킨 Y는 본가로 되돌아갔어. 거기서 가족에게 이야기를 했든지, 아니면 범행이 들통났어. Y는 그 후로 내내 흙광 안의 자시키로 엄중하게 칸막이를 하여 미치광이나 죄인 등을 가두어두는 방에 유폐되어 있었어. 이름 모를 필자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으로 보아 숨겨진 방이겠지. Y는 거기서 이 기록 노트를 쓴 거야."
"그 그런..."
"물론 확실한 증거는 없어. 추측일 뿐이야."
"..."
"그래서 나는 이 기록 노트가 무서웠는지도 몰라."
툇마루의 젖빛 유리문을 가만히 열고 뜰을 내다보자 슈자쿠의 괴물은 없었다.
- 그녀의 머리는 가죽 한 장으로 몸체와 이어져 있었다.
그렇다. 말 그대로 정말 목의 가죽 한 장으로 머리를 포함한 목부분과 몸이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주위에 튄 엄청난 양의 선혈을 깨끗하게 닦아내고 나자 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인쇄소에서 사용하는 종이 재단기에 머리를 집어넣고 자기 목을 잘라버렸다.
- 재단기는 필요한 종이의 크기를 컴퓨터로 입력하면 자동으로 용지를 가지런히 잘라내주는 업계 전문 기계다. 종이 한 장은 가볍고 강도도 약하지만, 종이 다발은 무겁고 한꺼번에 자르려면 상당한 힘이 필요하다. 게다가 그냥 자르는 게 아니라 일정한 크기를 유지하려면 수작업으로는 무리다.
반면 재단기는 단두대 같은 칼날로 일정한 압력을 두꺼운 종이 다발에 가해 단번에 절단한다. 오차는 겨우 영 점 몇 밀리미터에 불과하다. 때문에 실수로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가 종종 발생하므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긴급 정지 버튼이 달려 있다. 하지만 칼날은 눈 깜짝할 새에 내려오므로 긴급 정지가 정말로 가능한지는 의문이다.
- 그렇다. '나'도 늦었다. 그녀가 자기 목을 자르려고 프로그램을 재단기에 입력하고 실행 버튼을 누르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나'는 ...
- 제목과 필명은 다음과 같다.
제1화 안개 저택 ∙ 依武相
제2화 자식귀 유래 ∙ 丁江州夕
제3화 오락으로서의 살인 ∙ 泥重井
제4화 음화 속의 독살자 ∙ 廻数回一藍
제5화 슈자쿠의 괴물 ∙ 필자 미상
제6화 시계탑의 수수께끼 ∙ 舌渡生
제7화 ? ∙ ?(대표 겸 총무)
- 대표 겸 총무란 미궁사의 관리자(이 사이트를 만든 사람)로 <미궁 초자> 발행인이기도 하다. 즉 미궁사의 대표이자 미궁초자와 관련해 총무 일도 하는 셈이다. 이번 모임은 <미궁초자>의 제작을 협의하는 모임이므로 이제부터는 총무라고 적으려 한다. 실은 총무의 본가에서 인쇄소를 경영하는지라 염가로 인쇄 제본을 할 수 있어 <미궁초자>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는 뒷사정도 있다. 물론 멤버들 모두 자금을 부담하지만 인쇄소에 정규 가격으로 의뢰하는 것보다 돈이 훨씬 적게 든다.
- 그렇다면 총무가 제7화의 필자임이 드러난 것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아무도 총무의 핸들네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 일곱 명이 채팅방에서 대화를 나눌 때 대표자는 자기 핸들네임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여섯 명 중 누가 대표자인지 나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리고 미궁사와 관련해 공적인 발언을 할 때만 '대표자'로서 등장한다. <미궁초자>의 기획이 시작되고 나서는 거기에 '총무'의 입장이 더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대표 겸 총무'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채팅을 악용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난처하지만, 그런 꼼수는 자연스레 들통 나는 법이다.
- 지금 내가 이 원고를 쓰는 이유는 총무가 쿠비 섬에서 가진 미궁사의 첫 모임 내용을 기록해 <미궁초자>에 부록으로 넣자는 아이디어를 냈기 때문이다. 총무가 직접 부탁해서 내가 기록 임무를 맡았을 뿐 결코 자청한 것은 아니다. 상당히 갑작스런 이야기였지만, 꼭 부탁한다고 간청하기에 받아들였다. 부록으로 넣기로 한 만큼 나도 가능한 한 재미있게 쓰고 싶다.
- 서론이 길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일반 독자를 위해 <미궁초자> 제작에 얽힌 이야기를 해달라고 총무가 부탁했기 때문이다. 양해해 주기 바란다.
- 실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네가 바로 총무 아니냐고...?
자기 자신을 기록자로 임명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 아니겠냐고...?
과연 <미궁초자>를 읽을 정도의 독자는 혜안을 지니고 있다. 그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겠다고만 써두겠다.
- 원래는 미궁사 멤버 일곱 명이 모두 참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신도 마쓰지는 불참하기로 했는지 집합 시간이 되어도 약속한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일단 이 사람의 핸들네임이 멀쩡한 이름이라서 어쩐지 성실한 사람이 아닐까 상상한 나로서는 조금 실망이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만 모이는 이런 모임에서는 견실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 편이 낫다. 핸들네임만 보고서 나는 멋대로 그런 역할을 신도 마쓰지에게 기대했던 셈이다.
파이는 아이스박스에 마실 것을 넣어가지고 왔다. 열어보자 맥주와 주스 옆에 우유가 있었다. 나는 피처에다 우유를 약간 덜어 설탕과 함께 쟁반에 얹었다.
쓰치코로비는 커피를 아주 좋아하는지 커피 전문점 점원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커피를 끓였다. 틀림없이 맛있을 것 같았다.
- "쓰치코로비라는 핸들네임, 요괴 쓰치코로비 맞아?"
무료한 듯 부엌을 어슬렁거리던 고타로가 쓰치코로비 옆에 와서 물었다.
"예, 산을 타는 선배 중에 요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옛날에 산장에서 들은 요괴 이야기에 쓰치코로비가 나왔어요. 그게 인상에 남았는지 핸들네임을 정할 때 문득 떠올라서... 그냥 그걸로 했죠."
"핸들네임은 다 그런 법이지. 란포 씨는 역시 에도가와 란포?"
"센스가 없어서 부끄럽지만, 맞아요."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거리는 척했다.
- "혹시 고타로라는 핸들네임은 갓파에서 따온 건가요?"
세 사람 중 두 사람이나 핸들네임의 유래가 판명되었기에 그다지 자신은 없었지만 물어보았다.
"잘 아네. 이거 원, 센스는 내가 없었군."
- "갓파는 지금이야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호칭이지만, 쇼와 시대 이전에는 그렇지도 않았어. 옛날에는 지방마다 갓파를 부르는 이름이 다 달랐지. 일설에 따르면 4백 종류 정도 됐다나 봐. 예를 들어 가우코, 메도치, 가와소, 엔코 등 정말로 다양하게 불렸지. 개중에 고타로라는 호칭이 있었는데 그걸 한자로 표기해서 핸들네임으로 쓴 거야."
"아, 맞다. 고타로 씨는 민속학 전문가시죠."
쓰치코로비의 말에 고타로가 피식 웃었다.
"민속학이라고 하면 듣기는 좋지만, 결국 요괴를 좋아하는 별난 인간이지."
- "리치(마작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한 패가 하나 남았음을 선언하는 행위, 또는 그 선언으로 성립되는 패의 조합을 가리킨다) 아저씨는 마작을 좋아하려나. 파이는 전공이 이공계니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원주율이겠지."
"마작을 좋아한다는 건 이해가 가는데, 원주율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까요?"
내가 놀리듯이 말하자 고타로는 약간 진지하게 대답했다.
"세상은 넓으니까. 하지만 확실히 센스가 없는 이름이기는 해. 내가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 드디어 쓰치코로비가 배큐엄 브루어에서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앞서 나온 두 사람보다 마이마이의 이름에 무슨 뜻이 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음, 뭘까? 달팽이를 좋아한다든가(일본어 '마이마이쓰부리'는 달팽이의 별칭이다)..."
"엇, 징그럽지 않나요?"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자 고타로가 다시 말했다.
"실물은 어쨌거나 캐릭터로서는 여자가 귀여워할 만한 부류일지도 몰라. 게다가 파충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 달팽이를 예뻐한다고 해서 그렇게 신기할 건 없지 뭐."
- "내가 거실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리치 씨가 있었지. 그렇다면 그때 이미 편지를 발견했다는 말이로군."
고타로가 확인하듯이 리치를 쳐다보았으나 리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파이가 얄밉다는 듯이 톡 쏘아붙였다.
"그래요.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했죠. 말하기는커녕 아무도 없을 때 혼자 몰래 읽으려고 했다고요."
편지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자리를 누가 어떻게 수습하느냐가 문제였다. 이거 야단 났다 싶었는데 쓰치코로비가 제안했다.
"여러분, 애써 끓인 커피가 식으니까 앉으시는 게 어떨까요?"
쓰치코로비의 말에 일단 모두 자리에 앉았다.
앉으면 마음도 조금은 가라앉겠구나 싶어 감탄했지만, 어쩌면 커피가 식는 것이 정말로 싫었는지도 모른다.
쓰치코로비는 소파에 몸을 묻자마자 아주 만족스런 표정으로 커피를 입에 대더니 혼자만의 행복한 시간을 맛보기 시작했다.
- 봉투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일어선 리치는 그대로 커피를 들고 창가 의자로 가서 냉랭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넣지 않은 커피를 마셨다.
쓰치코로비와 리치가 커피를 마시는 소리만이 거실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아무도 봉투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커피만 없으면 바로 쓰치코로비가 읽겠지만, 당분간은 무리일 듯했다.
- "그래, 상식 말이야. 모두 상하관계없이 평등한 미궁사 멤버인데 당신 혼자 멋대로 하려고? 이럴 때는 공평하게 제비를 뽑는 게 상식이잖아."
"당신이 말하는 상식이 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집단생활을 영위할 때 적재적소를 고려하는 것이야말로 상식이겠죠. 협의의 사회자 역할은 감당할 수 없어도 냉동식품으로 간단한 요리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각자가 잘하는 걸 맡기는 편이 낫죠. 그게 가장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괜히 우르르 뭉쳐서 제비를 뽑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 "지당한 말씀입니다만, 우리는 처음 만났습니다. 아직 누구에게 무슨 일이 맞는지 몰라요. 이번에는 공평하게 사다리로 정하는 게 어떨까요?"
"간단한 자기소개를 했을 텐데요. 각자 직업과 나이를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객관적으로 볼 때 누가 사회자 역할에 어울린다고 생각합니까?"
"대학교수라고 해봤자 수업할 때 일방적으로 지껄일 뿐이잖아. 협의를 진행해서 모두의 의견을 정리할 수 있겠어!"
쓰치코로비의 커다란 몸 뒤편에서 얼굴만 내민 파이가 시비조로 내뱉었다.
- ... 엘러리 퀸의 <샴쌍둥이 미스터리>, 오구리 무시타로의 <흑사관 살인사건>, 후지모토 센의 <시간을 새기는 해류>, 케네스 피어링의 <빅클락>, 에도가와 란포의 <외딴 섬 악마>, 니쓰타 지로의 <산이 보고 있었다>, 반다인의 <비숍 살인사건>, 이렇게 일곱 권이었다.
완전히 무작위로 골라서 넣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책들이었다.
- "냉동식품을 빼서 아이스박스가 가벼워진 게 들통나지 않도록 도서실에 있던 책을 적당히 넣었겠죠."
"그래서 노블스 판과 문고도 섞어서 무게를 조절한 거군."
고타로가 책을 살펴보며 말했다.
분명 책의 판형은 제각각이었다. <샴쌍둥이 미스터리>와 <비숍 살인사건>은 소겐 추리문고, <빅 클락>은 하야카와 포켓 미스터리, <산이 보고 있었다>는 카파 노블스, <시간을 새기는 해류>는 고단샤 하드커버, <외딴 섬 악마>는 쇼와 44년(1969)에 고단샤에서 간행된 에도가와 란포 전집 3권, <흑사관 살인사건>은 도겐샤 복각판이다.
"그런데 왜 <빅 클락>만 반으로 찢어져 있는 걸까요?"
나는 부엌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책 중에서 반으로 찢어진 <빅 클락>을 집어들었다.
"무게를 조절하려고 찢었는데 누가 오는 바람에 놀라서 그냥 집어넣었다든지, 뭐 그런 거겠지."
고타로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고 여긴 듯했다.
- 들고 온 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듯 쓰치코로비가 나를 쳐다보았다.
"젖어서 책장에 꽂기는 좀..."
"닦아 올까요?"
"아니요, 물을 먹은 종이는 자연스레 마르게 놔둬야 해요. 저기 테이블 위에 놓아두죠."
커버가 씌워져 있는 것은 커버를 벗기고, <외딴 섬 악마>와 <흑사관 살인사건>은 박스에서 꺼내 잘 마르도록 펼쳐놓았다. 직업 때문인지 다른 사람의 책이라도 함부로 다루는 꼴은 못 본다.
- "란포 씨가 걱정한 대로 폭풍우가 심해져서 섬에 갇혀도 일주일은 버티겠어."
고타로가 기쁜 듯이 식료품 저장고 겸 비품실 상황을 알려주었다. 살펴보니 쌀은 물론이고 파스타 따위의 건면과 통조림이 많은 데다 음료수도 충분히 갖추어져 있어서 아껴 먹으면 이 정도 사람 수로도 3주는 굶주리지 않을 듯하다고 했다. 그리고 쓰치코로비와 고타로가 가져온 채소와 달걀, 빵과 햄은 무사하니 통조림만 먹다 질릴 일도 없을 거라고 했다.
- 천천히 암벽을 기어올라 고개만 살짝 내밀어보았다.
내려다보자 그곳은 투우장처럼 널찍하고 평평한 바위터로, 분지와 비슷한 지형이었다. 거기서 뭔가 기묘한 것이 꿈틀대고 있었다. 한순간 나는 눈앞의 광경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와오오오오우우우우!"
미친 듯이 춤을 추는 그것은 복장으로 보아 리치였다. 하지만 본인인지 아닌지 확인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머리가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이이이이이이이이익!"
비에 젖어 새카매진 암벽을 배경 삼아 불타오르는 리치의 머리는 작은 태양처럼 보였다. 다만 암흑의 우주를 돌아다니는 태양이다. 마치 환상적인 영화의 한 장면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귀를 틀어막고 싶어지는 괴성만 들리지 않는다면...
- 리치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두 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빨리 걷는 좀비와도 같은 발걸음으로 사방을 쏘다녔다. 춤꾼 자신이 불타오르는 참으로 기묘한 불춤이 계속되었다.
어느덧 나는 홀린 듯이 불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몸을 지닌 작은 태양의 춤을...
이윽고 태양은 땅에 떨어졌고, 요란한 비명도 뚝 그쳤다. 그러자 그때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머리카락과 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러 나는 그만 아침으로 먹은 것을 바위터에 다 토해버렸다.
- ... 잠에서 깼다. 머리맡에 놓아둔 손목시계를 보자 새벽 2시 42분이었다. 토요일 오후에 자리에 누웠으니 열 시간 넘게 잔 셈이다.
일어나자 조금 어지러웠다. 다행히 열은 내린 듯했다. 분명 신이치로가 물에 적신 수건을 바지런히 갈아가며 이마를 식혀준 덕분이리라.
삐걱... 소리가 났다.
집 울림인가. 나무는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기 때문에 목조주택에서는 자주 이런 소리가 들린다. 옛날 사람들은 야나리 家鳴り라는 요괴가 집을 흔드는 것이라고 믿었다.
삐걱, 끽.
엄청 시끄럽다 싶었는데 바로 이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음을 깨달았다.
- 방이 마구 압축되고 있다. 마치 중세시대 성의 석실 천장이 내려오는 장치처럼 방이 압축되고 있다. 그런 착각에 빠져들었다. 아니, 내려오는 천장이라면 천장이 떨어져서 짓뭉개질 것이다. 하지만 이 방에서는 사방과 천장, 바닥 모든 면이 울렁울렁 꿈틀대며 다가오는 듯했다. 마치 거대한 괴물의 위장이 꿈틀대는 모습을 그 속에서 직접 보는 것 같아서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 "아무래도 시작된 모양이군."
아스카 신이치로가 얼굴을 내밀었다.
서재에는 불이 밝게 켜져 있고, 화로에는 불도 타오르고 있다. 아무래도 신이치로는 자지 않고 대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너, 너무 빠른 것 아니야..."
일요일이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새벽 3시도 되지 않았다.
"마지막 이야기이자 마지막 날이니까."
분명 신이치로는 예상하고 있었으리라. 나와 달리 차분했다.
"이쪽으로 와."
그의 재촉을 받고 허둥지둥 신이치로가 있는 서재로 피신했다. 할머니의 부적이 붙어 있는 덕분인지 집이 울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묘한 압박감도 없었다.
- 안심한 것도 잠깐, 네 귀퉁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봤어?"
냉정한 신이치로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서야 그가 각오를 단단히 했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방 네 귀퉁이에 붙어 있던 부적이 네 장 모두 거무스름해졌고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부적과 똑같다... 신이치로가 괴이 현상에 씌었을 때 도와준 그 부적에 일어난 현상과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신이치로가 <미궁초자>를 내밀었다.
"그래."
나도 마음을 다잡았다. 주저 없이 책을 받아 들고 마지막 이야기 <목 저택>을 읽기 시작했다.
"커피 끓일게."
요 한 주 동안 하루에 한두 잔 마시는 습관을 무시하고 그는 얼마나 많이 커피를 끓였을까. 이로써 그것도 마지막이다. 결과가 어찌 되든 마지막이다...
- <목 저택>은 일곱 단편 중 제일 길고 깜짝 놀랄 만한 내용이라 다 읽는 데 시간이 걸렸다. 사실 이유는 또 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 침실에서 또 집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이치로가 서고로 쓰는 앞쪽 방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삐걱, 삐걱, 삐걱, 끽... 집이 흔들리는 소리가 점점 심해졌다. 거기에 다른 소리가 섞이어 들렸다. 삭, 삭, 삭... 묘한 마찰음이 안쪽 침실에서 들려왔다.
뭘까 하고 귀를 기울이다가 다다미 위를 스치듯이 걷는 소리임을 깨닫고 모골이 송연했다. 그것은 원을 그리며 방 안을 돌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 이따금 원에서 벗어나 이쪽 방에 면한 장지문 앞에 서서 우리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가만히 살피고 있을 것만 같아서 몹시 불안했다.
스윽, 스윽, 스윽... 이어서 앞쪽 서고에서 또 다른 마찰음이 들려왔다. 뭔가가 배를 깔고 엎드려 다다미 위에서 꿈지럭거리는 모습이 바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 빨리 결판을 내고 싶다는 일념으로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신이치로는 대답을 얼버무리듯이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눈치챘어?"
"뭘?"
"이것도 열 꼬마 인디언형 미스터리라는 거 말이야."
"... 그러고 보니."
"그것도 거의 완벽하다 할 수 있지."
"무슨 뜻이야?"
신이치로는 또 내 질문을 무시했다.
- "<슈자쿠의 괴물>에서 열 꼬마 인디언형 미스터리의 필요조건을 정의했는데, 기억나?"
"야, 지금 그렇게 느긋한 소리 하고 있을 때야?"
대각선상에 남아 있는 방구석의 부적 두 장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나는 답답한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어. 논리적인 결론을 내려야 할 때는 특히 더 그렇지. 순서를 무시하고 결론만 내려고 해 봤자 소용없어. 자칫하면 시간을 더 뺏길지도 모른다고 뺏기는 게 시간 만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신이치로의 의미심장한 말을 들으니 나도 불안해졌다. 나는 기억을 되살리려 안간힘을 쓰면서 열 꼬마 인디언형 미스터리의 필요조건을 이야기했다.
- "자신을 상징하는 책으로 엘러리 퀸의 <샴쌍둥이 미스터리>를 고른 건 마이마이가 샴고양이를 기르기 때문이 아니라, 아니지, 일단 그것도 맞으려나. 하지만 자신이 쌍둥이라는 사실이 책 제목에 부합된다는 게 더 중요했어."
"불공평해!"
"녹스의 십계나 반 다인의 이십 법칙이라도 들고 나오려고?"
"그건 네 입맛에 맞는 상상이잖아."
- "이때 복도는 어두웠고 방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어. 방 안에서 문 앞에 서면 복도에서 그림자가 보였겠지. 하지만 그 반대는 절대로 말이 안 돼. 어떻게 따져봐도 사기리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반응한 것이 분명해."
"게다가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은 똑똑하게 발음하기 힘들 거야. 적어도 사기리처럼 말을 유창하게는 못 하겠지."
귀가 들리지 않으므로 자신의 발음을 듣지 못한다. 따라서 말을 할 때도 지장이 생긴다.
"네 해석이 틀렸다고...?"
"그래. 하지만 과연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을까?"
"난 못해."
바로 대답했다.
"실은 아무도 못 한다면?"
슥, 슥, 슥... 천장 위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뭔가가 기는듯한 낌새가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올려다보지 않았다.
- "아스카가 <음화 속의 독살자>를 읽은 게 아닌가 싶어 우리 둘 다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지."
"아아, 하지만 다행히 뜰에서 우리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라고 했어."
"정말로 그럴까?"
"..."
"분명 나는 가사키 독살사건의 경위를 정리해서 네게 들려줬어. 하지만 그건 소설의 플롯을 뽑아낸 것에 불과해. 따라서 ... "
- "물론 사연이 있는 동인지 <미궁초자>에 진실미를 더하기 위해서지. 넌 혼자 <미궁초자>를 집필하고 편집하고 제작했어. 인쇄와 제본은 계열 인쇄회사의 지인에게 도움을 받았고, 완성된 책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루혼도의 가미치 씨에게 맡겼어. 굉장한 장난을 칠 거라고 설명하고서 말이야. 그 후에는 기회를 보아 나를 후루혼도에 데려갔어. 가미치 씨한테는 미리 나와 친해지고 나면 내가 혼자 가게를 찾아갔을 때 <미궁초자>를 보여주라고 부탁해 놓았겠지. 그리고 적당한 시기가 되자 가미치 씨에게 사라지는 연기를 해달라는 부탁까지 한 거야. 또한 내게는 <미궁초자> 집필자의 필명 및 '미궁사'라는 글자에 숨긴 암호를 실마리로 제시했어. 내 취미와 기호를 잘 아는 너는 가격이 얼마든 간에 내가 <미궁초자>를 구입하리라고 확신했겠지. 게다가 책을 읽은 내가 탐정 비슷한 추리를 시작하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을 거야."
"내가 왜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있지?"
"아마도 이 책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겠지."
- "하지만 <미궁초자>는 허구라면서? 여기에 적힌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게 아니야. <목 저택>에서 <미궁초자> 살인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어. 미궁사도 존재하지 않고. 그런데 무슨 속박?"
"허구이기 때문에 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
그는 나를 애처로워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허구니까 벗어날 수도 있지만, 원래 아무것도 없으니 완전히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고도 할 수 있어. 그렇잖아."
신이치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더 이상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어...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아..."
전부 포기하고 내던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애써왔는데 그럴 수는 없다. 무엇보다 다 포기하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 조금 뜸을 들이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분명한 건 <미궁초자>에는 괴이 현상이 들러붙어 있다는 것. 일단 읽기 시작한 사람은 책의 괴이 현상에 습격당해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는 책에 실린 작품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는 것. 이 세 가지야. 그리고 너는 지금까지 멋지게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왔어. 그런데 미궁초자 그 자체가."
신이치로가 느닷없이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수께끼의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추리하는 사람이 시점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해석은 천차만별로 바뀌어. 따라서 내가 밝혀낸 진상은 어디까지나 어떤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해석에 불과해. 아무 증명도 되지 않는다고."
그는 더욱 자신에 찬 모습으로 덧붙였다.
"내가 <미궁초자>를 놓고 수많은 해석을 내렸으니 이제 충분히 알 만도 한데."
문득 정신을 차리자 안쪽 침실 장지문이 닫혀 있었다. 허둥지둥 뒤를 돌아보자 앞쪽 서고의 장지문도 닫혀 있었다.
- 울창한 나무들에 가려 눈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그 아이가 서 있었다. 흐릿하게 떠오른 아이를 본 순간 흠칫 놀랐지만 그 아이가 휙 사라지는 바람에 바로 등에 소름이 쫙 끼쳤다.
뭐, 뭐지 이건...?
우연히 눈에 들어온 글자를 읽자 기시감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이건... <안개 저택>에 나오는 문장...?
나는 황급히 다른 곳을 훑어보았다.
- 모두 사라지자 미요가 중얼중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미쳤어... 정신이 나갔다고... 머리가 이상해..."
그래도 잠잘 준비를 하고 긴 소파에 드러눕더니 바로 잠들고 말았다. 곳쿠리상을 하려고 열어둔 복도 창문에서 서늘한 밤공기가 거실로 스며들었다. 밤기운이 안쪽 부엌으로, 그리고 2층으로 퍼져나갔다. 건물 안에 냉랭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 역시 <미궁초자>에 실린 <슈자쿠의 괴물>에 나오는 문장이었다. 방 안 여기저기를 오가는 내 눈앞에 미궁초자의 이야기가 차례차례 나타났다.
어느덧 나는 무수히 많은 글자들에 둘러싸였다. 종횡으로 내달리는 글자가... 비스듬히 적힌 글자가... 거꾸로 적힌 글자가... 사방팔방으로 기어 다니고 있었다. 빽빽하게 들어차서 기분 나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 "시, 신이치로! 이건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고 물으려다가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마치 귀 없는 호이치(일본 괴담. 무사 유령이 귀만 빠뜨리고 온몸에 경문이 적힌 호이치를 부르러 왔다는 증거로 그의 귀를 떼어간다)의 온몸에 적힌 경문처럼 신이치로의 얼굴과 드러난 두 손등에도 글자가 새카맣게 적혀 있었다. 분명 그의 온몸에도 글자가 적혀 있을 것이다.
"이제 알겠어?"
신이치로가 다정하게 미소 짓자 얼굴 움직임에 따라 글자가 일그러졌다.
"전부 네가 만들어낸 세계야."
- "실제로는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는 건가..."
- 다시 눈앞이 새하얘졌다. 이번에는 새하얀 공간에 글자들이 침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온통 새하지만 순식간에 새카만 글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일제히 우르르 몰려온 글자들이 제각기 굼실대기 시작했다.
글자에 파묻힌다...
- 새하얀 공간이 새카매졌을 때 나는 무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문득 뇌리에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몹시 그립고, 아주 사랑스러운 얼굴이.
-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말한 모양이다.
"...."
의아하다는 듯이 신이치로가 얼굴을 찌푸렸다.
- "뭐라고?!"
되묻는 신이치로의 얼굴에서 글자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 "과연."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난 신이치로는 오묘한 빛이 깃든 눈으로 <미궁초자>를 바라보았다.
"위험했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
나는 눈앞의 그가 <오락으로서의 살인>을 읽었을 때의 그.것.은 아닌지 여전히 약간 의심스러웠다.
"기억나. 내 생각을 말했다는 자각도 있고."
"하지만,"
"음. 하지만 실은 이 책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닌가 싶어."
- 사로잡히고 말았다.
손에 든 <미궁초자>에는 나. 자.신.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지난주 월요일, 회사에서 돌아오는 길의 내 모습이 책 속에 있었다.
- "자, 그렇다면... 드디어 <미궁초자>에 얽힌 무시무시한 소문이 진짜라고 밝혀진 셈인가."
가벼운 말투였지만 이쪽을 향한 눈빛은 진지했다.
"진짜고 뭐고 실제로 우리는 위협에 노출되었잖아. 아니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야. 빨리 <자식귀 유래>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해."
지금은 괴이 현상이 발생할 낌새가 없지만, 어젯밤의 위협적인 안개와 오늘 저녁의 무서운 아기를 생각하면 방심해서는 안 된다.
- 나.와. 신.이.치.로.의. 이.야.기가 <미궁초자>에 적혀 있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미궁초자>에 갇혀버린 것이다.
- "도대체, 언제부터..."
"모르겠어."
신이치로는 설레설레 고개를 젓다가 씩 웃었다.
"하지만 이걸로 한 가지 가설은 세울 수 있지."
"무슨 가설?"
"이 새로운 변화는 아주 일찌감치 <미궁초자>에 일어났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어째서일까?"
"그건... 우리에게 패배를 인정하기 싫어서겠지."
"그래서 우리를 <미궁초자>의 등장인물로 만들었다?"
"아니야?"
"아마 그렇겠지. 다만 다른 목적이 있는지도 몰라. 아니, 없어도 상관없어. 이런 상황에 처하는 바람에 어떤 가능성이 생긴 건 틀림없으니까."
"무슨 소리야?"
또 신이치로가 이상해졌나 싶어 한순간 섬뜩했다. 하지만 그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넌 우리가 미궁초자의 단순한 독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지."
"그래."
"하지만 우리 자신이 등장인물이 되었다면, 그런 우.리.의. 말.과. 행.동.을. 눈.으.로. 좇.는. 입.장.의. 독.자.가. 존.재.할. 거.야."
"..."
"내가 여러 번 느낀 어떤 시선, 그건 그. 독.자.의. 시.선이었어."
- "우리가 살아날 길은 단 하나."
신이치로는 갑자기 엉뚱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허공을 응시하며 소리쳤다.
"지금, 제 대사를 읽고 있는 당신이 미궁초자』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것입니다. 다만 실패했을 때는 물론
가사이 기요시(笠井潔)
미쓰다 신조는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을 시초로, 도조 겐야가 탐정으로 등장하는 시리즈를 통해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시기적으로는 작가와 이름이 같은 인물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작가 3부작이 도조 겐야 시리즈보다 먼저 나왔다. 전부 고단샤 노블스에서 간행된 작가 3부작은 <호러작가가 사는 집>, <작자 미상>, <사관장 蛇棺葬 / 백사당 百蛇堂>이다. <호러작가가 사는 집>은 문고화될 때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또한 <사관장>과 <백사당>은 한 권의 장편을 상하권으로 나누어 간행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도조 겐야 시리즈에는 '호러와 미스터리의 융합'이라는 평가가 으레 붙어 다닌다. 이러한 점에서 도조 겐야 시리즈의 토양이 된 작품으로서 작가 3부작 중에서도 특히 <작자 미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중 인물 미쓰다 신조(앞으로 작가는 미쓰다, 작중 인물은 신조라 ...
...
<미궁초자>에 수록된 소설, 요컨대 작품 속 '허구'의 사건이다. 탐정 캐릭터가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직접 수사하고 추리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으로서 제공되는 사건을 추리하는 탐정소설은 조세핀 테이의 <시간의 딸>을 비롯해 지금까지도 적지 않게 존재했다. <미궁초자>에 수록된 작품들은 전부 다 이를테면 해결편이 없는 탐정소설로, 탐정 캐릭터가 소설에 제시된 수수께끼를 논리적으로 풀어낸다는 설정은 그 극단적인 일례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미궁초자>라는 기괴한 책이 존재하고, 그 책을 읽은 두 사람에게 괴이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품 속 '현실'이다. 한편 작품 속 '허구'에서 제기된 수수께끼에는 현실적인 해결이 적어도 논리적으로 수미일관된 해석이 주어진다. 이를테면 '현실'이 허구적이고, '허구'가 현실적인 것이다. 현실이 허구로 허구가 현실로 뒤바뀌어 독자는 작품이라는 뫼비우스의 띠에 갇히고 만다.
이쯤 되면 메타픽션이라는 말이 떠오르리라. 신조가 등장하는 작가 3부작에는 메타픽션적인 장치가 사용되는데, 개중에서도 <작자 미상>이 독자에게 야기하는 환혹감은 다른 두 작품을 압도한다. 공포감이라는 점에서는 <사관장/백사당>이 우위에 있지만.
<작자 미상>의 메타픽션적인 환혹감에는 상응하는 근거가 있다. 작가에 따르면 <호러작가가 사는 집>은 괴기소설, <사관장/백사당>은 괴담, 그리고 <작자 미상>은 탐정소설을 테마로 썼다고 한다. 원래 미쓰다는 탐정소설을 현실과 허구가 뒤틀린 관계에 있는 특이한 이야기 공간이라고 여긴 듯하다.
...
또한 현실과 허구의 상호침범이라는 메타픽션적인 성격도 이미 내포되어 있었다. 라캉파의 사상가 슬라보예 지젝은 메타픽션적인 산물을 다음과 같이 비평했다.
현대 예술을 접하다 보면 종종 '현실'로 회귀한다는 거친 발상을 실현시키려는 작품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런 작품은 관객(또는 독자)에게 너희가 보고(읽고) 있는 것은 허구임을 강조해 달콤한 꿈에서 각성시키려고 한다. (중략) 우리는 그러한 방식을 브레히트의 소외효과 기법의 일종이라고 평가하지 말고, 그러한 방식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그들이 하고 있는 짓은 그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현실'로부터의 도피이자. 환각 그 자체인 '현실'에서 달아나려는 필사적인 노력에 불과하다. '현실계'는 환각적인 볼거리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 슬라보예 지젝, <라캉은 이렇게 읽어라!>(일본: 기노쿠니야쇼텐), <HOW TO READ 라캉>(한국; 웅진지식하우스)
여기서 '현실'이란 우리가 생활하는 명료한 일상 세계가 아니다. 일상 세계에 내재된 리얼리티의 근거인 리얼, 씹어 으깰 수 없을 만큼 단단한 핵, 직시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현실 그 자체다. 라캉이 주장한 바로는, 우리는 산문적이고 매력이 희박한 현실에서 꿈(정의적인 의미에서도, 비유적인 의미에서도)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꿈에 나타나는 '현실'의 공포에서 달아나기 위해 명료한 일상성이라는 현실로 도피하는 것이다. 이른바 현실이란 꿈에서 달아나기 위해 엮어낸 제2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제1의 꿈(허구)과 제2의 꿈(현실)을 반전시키고 침범시키고 침투시키는 메타픽션은 원리적으로 불철저하고 '환각 그 자체인 현실에서 달아나려는 필사적인 노력에 불과하다'.
그래서 미쓰다는 작가가 작품 속에 등장한다는 기본 설정을 포함해 메타픽션적인 장치를 집중시킨 작가 3부작의 세계를 떠나, 고전적인 탐정소설 형식에 충실하다고도 할 수 있는 도조 겐야 시리즈로 방향을 전환한 것 아닐까. 분명 탐정소설에서 현실과 허구는 기묘한 형태로 비틀려 있다. 다만 이 비틀림은 포스트모던적인 메타픽션의 발상을 훨씬 뛰어넘은 것이다.
탐정소설에는 무슨 형태로든 '호러와 미스터리의 융합'이 나타난다. 대다수 탐정소설은 제1의 꿈(허구)을 제2의 꿈(현실)으로 해체해 회수한다. 예외적으로 제2의 꿈(현실)으로 완전히 회수되지 못해 잔여물로 남은 제1의 꿈(허구)을 작품의 결말에서 부분적으로 점묘하는 작품도 있다. 더욱이 메타픽션적인 탐정소설은 제1의 꿈(허구)과 제2의 꿈(현실)을 반전시켜 혼탁하게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모두 탐정소설 형식에 포함된 본래의 가능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분명 현실계는 '환각적인 볼거리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법'이지만 그 공포에 견디다 못해 제1의 꿈(허구)에서 제2의 꿈(현실)으로 도피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인간이다. '수수께끼/논리적 해명'이라는 탐정소설 형식의 깊은 의미가 여기에 있다.
허구에서 현실로 도피한다는 인간적 필연성을 배제하지 않고, 그 필연성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현실'의 단편을 건져 올리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물론 수수께끼는 논리적으로 풀어내야 한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니, 사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무슨 소리가 나서 잠에서 깼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자 새벽 3시 15분이었다. 교정지를 보고 잠깐 눈을 붙인 후 역자 후기를 쓰려고 했는데 잠에 푹 빠진 모양이다.
다행히 이번 작품도 무사히 끝마쳤다.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보다 두 배는 긴 데다 풀어내기도 힘든 문장을 주야장천 번역하려니 지겹기도 했지만, 역시 분량이 많은 책을 마무리하고 나면 뿌듯하다. 그리고 번역료로 목돈이 들어오지 않는가(들인 시간을 고려하면 짧은 책을 빨리 번역하는 것과 똑같지만).
기지개를 펴는데 눈에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이 들어왔다. 별 생각도 없이 집어 들어 앞부분을 휙휙 넘기는데 그 단어가 눈에 확 띄었다.
오마가도키...
아아, 이건 오마가토키인데 오마가도키로 적고 말았다. <작자 미상 - 미스터리 작가가 읽는 책>을 번역할 때는 오마가토키로 옳게 적었다.
무사히 끝나기는 뭐가 무사히 끝났단 말인가. 교정을 보았지만 분명 <작자 미상>에서도 오타가 나올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내용에도 무슨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솔직히 말해 가사이 기요시의 해설은 무슨 소린지도 잘 모르고 옮기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을 하니 위가 찌릿찌릿 아팠다.
거울을 보자 웬 폐인이 있었다. 핏발 선 눈, 깎지 않아 다보록한 수염, 개기름이 흐르는 탄력 없는 피부, 거기다 인상까지 오만상 찌푸리고 있으니 정말로 꼴 보기 싫었다.
그냥 드러누워 자고 싶었다. 분명 시간이 다 해결해 줄 리는 없다. 역자 후기를 써야 한다.
이 작품은 요즘 국내에서도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호러 미스터리의 대가 미쓰다 신조의 '작가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입니다. 작가 시리즈의 특징은 작가 자신의 현실을 작품에 끌어들이는 메타 구조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작자 미상 - 미스터리 작가가 읽는 책>은 메타 구조와 더불어 본격 미스터리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미궁초자>라는 동인지를 읽은 미쓰다 신조와 아스카 신이치로는 괴이 현상에 시달리는 피해자이자 각 단편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탐정과 조수이기도 합니다.
그냥 읽어보면 다 아는 소리를 왜 적고 있는 걸까.
지금까지 역자 후기를 꽤 많이 썼지만 수월하게 술술 써 내려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역자 후기를 잘 쓸 수 있을까. 다른 번역가들의 역자 후기를 읽으면 기가 확 죽는다. 역자 후기 쓰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원이 있다면 수강료가 좀 비싸더라도 다녀보고 싶은 심정이다.
자판에 올린 손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자 한숨이 푹 나왔다. 동시에 다시 잠이 쏟아졌다. 지금 잠들면 내일 낮까지 일어나지 못하리라. 편의점에 가서 커피라도 사와야겠다 싶었다.
합정역 부근에는 밤이 없다. 홍대가 가까워서 그런지, 아니면 높디높은 메세나폴리스가 세워져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새벽에도 차들이 쌩쌩 지나다니고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띈다(왜 팔짱을 끼거나 손을 꼭 붙든 남녀가 새벽에 돌아다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큰길에서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입을 꾹 다문 어둠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가로등이 아무리 밝아도 주택가 구석구석에 묻은 어둠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다. 어둠은 잠뿐만 아니라 침묵을 몰고 온다. 나는 어둠이 몰고 온 침묵을 깨뜨리며 터벅터벅 걸어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어느덧 발길이 한강 쪽을 향하고 있었다. 절두산 성당으로 향하는 도로로 나온 것이다. 내가 아무리 길치라지만 만날 다니་는 편의점을 못 찾을 정도는 아닌데... 하지만 이왕 내친걸음이다. 요 며칠 바빠서 두문불출했으니 새벽바람을 맞으며 한강변을 거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합정역 7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앞에 김밥천국과 뚜레쥬르가 보인다(공교롭게도 현재 두 군데 다 공사 중이다). 뚜레쥬르와 약국 사이에 있는 넓은 도로를 따라 쭉 내려가면 지하차도가 나오는데, 지하차도 옆의 횡단보도를 건너면 절두산 성당 주차장으로 통하는 나무계단이 보인다. 나무 계단을 올라 주차장을 가로질러 제법 높은 돌계단을 내려가면 한강이다.
나는 윗도리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그 길을 느릿느릿 걸었다. 3월 하면 봄이라는 인상이 있지만 새벽바람은 여전히 차다. 나는 찬바람에 머리가 맑아지기를 기대하면서 성당 주차장의 돌계단 위에 섰다.
시간이 시간이라 그런지 역시 아무도 없었다. 새벽 5시쯤 되면 운동하는 사람들도 드문드문 눈에 띄지만 지금은 너무 이른 시각이다. 계단을 내려가자 한강이 펼쳐졌다. 밤하늘과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거무튀튀한 강물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강물에 비친 가로등 불빛 역시 물결의 흐름에 맞추어 흔들거렸다. 마치 심해의 발광생물 같은 느낌이었다. 나를 현혹하듯 흔들리는 가로등 불빛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눈이 어질어질하고 머리가 띵해서 고개를 들었다.
미소를 머금어 입꼬리가 올라간 입이 보였다. 초승달... 아니, 그믐달인가. 이 시간에 저 위치에 달이 뜨는 게 맞나 의심스러워서 중고등학교 때 배운 과학 지식을 되새겨보았지만 이미 굳어버린 머리로는 십수 년 전에 배웠다가 수능을 치고 나서 잊어버린 지식을 떠올릴 수 없었다.
아무튼 달은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암흑색으로 물든 하늘을 교교하게 비추며 요염하게 미소 짓는 달. 그 달이 나를 부르고 있는 듯했다. 어떻게 하면 달을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까. 그렇지, 다리에 올라가면 된다.
서둘러 양화대교로 향했다. 계단을 두 단씩 뛰어올라 다리 어귀에 서자 숨이 찼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하늘과 다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치 언저리까지 가면 달이 잘 보일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걷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다리 위가 이렇게 침침했던가? 예전에 새벽에 산책을 나와서 올라와 봤을 때는 분명 흰 빛이 눈을 찔렀는데? 하지만 오늘은 다리에 설치된 가로등 불빛이 묘하게 흐릿하여 명도와 채도가 낮아 보였다. 마치 흐린 날 땅거미가 질 때처럼, 오마가토키가 찾아올 때처럼...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주위를 휘휘 둘러보자 도로에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이럴 리 없다. 아무리 새벽의 어중간한 시간대라 해도 다리를 건너는 차가 한 대도 없다니 말이 안 된다. 뭔가 잘못됐다.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자 달은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 전까지 머금고 있던 요염한 미소는 온 데간 데 없었다. 달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여기까지 올라온 나를 조롱하는 듯한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나서 강으로 고개를 돌렸다. 먹물처럼 새카만 수면이 눈에 들어왔다. 가로등 불빛도 달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암흑. 뜬금없이 '죽음의 심연'이라는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다리와 강은 두 가지 의미에서 죽음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투신자살과 익사. 수백 수천 년을 흐르는 동안 한강에서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불행한 사고와 자의뿐만 아니라 타의에 의해 저 심연으로 끌려 들어간 사람도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강물 속에서 당장이라도 손 같은 것이 쑥 뻗어 나와 나를 잡아당길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을 들고 난간에서 약간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보자 몇 발짝 앞에 사람 한 명이 강을 향해 서 있었다.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었는데 도대체 언제 나타난 걸까.
짙은 베일로 가린 얼굴에 긴 생머리, 자루처럼 펑퍼짐하고 땅에 끌릴 듯이 기다란 원피스를 입고 흰 장갑을 낀 여자다. 멍하니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여자가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분위기는... 이 여자는 본 적이 있다.
십여 년 전, 나는 태어나서 딱 한 번 기이한 체험을 했다고 할까, 기이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비 오는 날 새하얀 원피스, 새하얀 장갑, 새하얀 구두 차림에 새하얀 우산을 쓰고 길가에 서 있던 여자. 어쩐지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그 여자가 틀림없다! 당시 나는 도저히 여자 곁을 지나칠 용기가 나지 않아 길을 건너 집으로 줄행랑쳤다.
십여 년 전에 대구에 있던 여자가 이 새벽에 왜 서울 양화대교 위 ...
...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그저 편의점에 가려다가 발길 닿는 대로 산책을 나갔을 뿐인데 이런 괴이 현상을 체험하다니.
그러고 보니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나는 <작자 미상 -미스터리 작가가 읽는 책>을 번역하면서 작품 속 작품인 <미궁초자>에 나오는 수수께끼 일곱 가지를 단 하나도 풀어내지 못했다.
그래서인가. 그래서 나도 미쓰다 신조와 아스카 신이치로처럼 괴이 현상을 체험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괴이 현상은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되는 걸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 누구세요?"
이런 시간에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사는 남자의 방문을 누가 두드린단 말인가. 하지만 무심코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똑똑.
아아, 이건 나를 불러내는 소리구나. 잠에 빠진 나를 깨운 것도 바로 이 소리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갈 수 없다. 나가면 또 어떤 괴이 현상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내가 살아날 길은 단 하나. 이 후기를 읽고 있는 당신이 <미궁초자>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것이다. 다만 실패했을 때는 물론
김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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