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이주란, 이종산, 박서련, 서연아] 아이의 슬픔과 기쁨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7. 16. 00:00

본문

반응형

 


저자 : 이주란 / 이종산 / 박서련 / 서연아
출판 : 서해문집
출간 : 22.06.13


       

           


드디어 기억 속의 여름이 돌아왔다.

덥고, 습하고, 끈적한. 

그닥 기분이 좋아지는 날씨는 아니지만 안도감이 불쾌를 대신한다.

이미 경험해 본, 알고 있는- 

익숙한 불행. 

 

박해로에 이어 미쓰다 신조의 출간작도 모두 읽었다. 

현재는 박서련 작가의 작품들을 반 정도 읽은 상태.

리뷰도 순서대로 쓸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언제나 계획은 계획으로만 남게 마련이라. 

<아이의 슬픔과 기쁨>의 리뷰를 먼저 쓰게 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어땠더라. 

한없이 밝고 행복했던 날도 드물게 있었던 것 같고.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대체로 어린아이 다운 일상으로 가득 찬- 하루하루가 많았던 것 같고.

잘 기억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날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본 적이 없어 어른을 대할 줄 모르지만 사랑하고,

어른들은 자신이 어렸을 때밖에 몰라 아이를 대할 줄 모른다. 

그렇게 경험해 본 적 있는 이들은 경험해 본 적 없는 이들에게 사랑받으며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는다.

 

<아이들의 슬픔과 기쁨>은 박서련 작가의 단편을 찾아 읽기 위해 찾아 읽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엄마만큼 좋아해>는 단편집 <고백루프>에도 수록된 작품이었다. 하지만 다시 읽어도 좋았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좋았기 때문에 만족한다.

 

<안나>는 문장들이 참 아프면서도 깊게 와닿았다. 아이들에게, 그리고 어린 날의 자신에게 조금 더 다정해질 수 있기를.

 

<웬디와 팅커벨>은 산뜻해서 좋았다. 코로나 시기와 여러 SNS의 특징에 이종산 작가 특유의 상상력이 잘 녹아든 것 같다.

 

<엄마만큼 좋아해>는 자신의 감정과 그 표현에 솔직할 수 있는 아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걸, 그때도 우리들은 조그만 머리로 열심히 고민하고 생각했었음을 기억나게 해 준다. 

 

<물고기의 밤>은. 송아가 영원히 아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좋았다.  

 


   

 

 

- 언젠가 어렸을 때 쓴 일기를 들춰본 적이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눈이 내린다. 외롭다.' 아홉 살, 아니면 열 살이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이야말로 외로웠을 거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외로움을 털어놓을 곳이 없고, 외로움을 말할 수 있는 언어가 무엇인지 잘 모르니까. 설혹 말한다 해도 어른들은 그런 말을 다 아니? 놀라워하거나, 너는 어려서 잘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을 테니까. 그들은 중요한 것을 묻지 않았다. 왜 외로웠는지, 어떻게 외로웠는지. 그것이 수십 년을 더 산 사람이 겪는 외로움과는 다를 수도, 어쩌면 비슷할 수도 있다. 세상에는 슬픔을, 기쁨을, 사랑을, 고독을 느낄 일이 아주 많고, 그걸 전부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이들이라면 평생 동안 느낀 슬픔을 기쁨을, 사랑을, 고독을 아주 커다랗고 벅찬 기억으로 갖고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더 슬프고, 더 기쁘고, 더 사랑하고, 더 고독할 수 있지 않을까.

시끄럽게 떠들고, 발을 쿵쿵 구르며 뛰어다니고, 큰 소리로 웃고, 까불고, 바지에 오줌을 싸고, 장난치다 어딘가를 다치고, 씩씩대며 싸우고, 옆에 앉은 아이가 울면 따라 울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을 떠안은 채 훌쩍 커버리는 아이들을 온 세상이 두 팔 벌려 안아주기를 바라며.

한때 아이였고, 지금 아이이며,

슬펐고, 기뻤고, 사랑했고, 고독했던 모든 아이에게.

<서론을 대신하여>

 


 


- 한마디도 할 수 없고, 할아버지 대신 아파줄 수 없다. 나는 안나가 자신의 상황이나 기분에 대해서 편안하게, 혹은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늘 겁에 질려 주눅 들어 있던 나보다는 조금 더 표현하는 사람인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안나가 더 많이 자기 자신에 대해 표현하며 자랐으면 좋겠다. 생각보다 오래, 많은 기분과 기억들이 남아 있을 것이므로,

- 안나를 만난다면 어젠 잘 잤는지, 어떤 꿈을 꾸었는지, 무얼 먹었는지, 요즘 기분은 어떤지, 이번 겨울 방학은 어땠는지 물어보고 싶다. 나는 안나가 바라는 것, 배우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읽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고마운 것, 미안한 것, 불편한 것, 걱정되는 것, 잊고 싶은 것, 후회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 가끔 어릴 적 사진을 보면 어김없이 눈물이 난다. 울고 있는 걸 보면 슬펐구나 싶어서 슬프고 웃고 있는 걸 보면 슬픈데 웃었구나 싶어서 슬프다. 자기 연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군요, 겨우 한 마디를 할 수 있을 뿐. 나로서는 돌려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 그냥 단순하게 말하고 싶다.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는 식으로,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식으로. 그때의 상황들, 그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이해하기란 왜 이토록 오래 불가능한지 모르겠다.

슬픔, 이주란, <안나>

 


- 이 세계에서는 누구나 두 개의 방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현실에 있는 방이고, 다른 하나는 스크린 윈도우 속에 있는 방이다. 집 바깥에는 치명적인 전염병을 옮기는 무서운 벌레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녀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 안에 스크린 윈도우를 달고 산다. 스크린 윈도우는 벽면에 설치하는 종이처럼 얇은 화면인데, 사람들은 이 화면을 통해 바깥을 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여주기도 한다. 스크린 윈도우에는 카메라가 들어 있어서 현실의 방이 그대로 비친다. 

- 미소는 네 명의 보호자와 함께 산다. 함께 산다지만 집 안에서 보호자들을 마주칠 일은 거의 없다. 화장실이 방마다 따로 있는 데다 식사도 각자의 방 안에서 따로 한다. 식사는 그날의 당번이 준비해서 끼니때가 되면 방문 앞에 놓아주는 ...

- "모든 아기는 완벽히 혼자야. 아직 사람 사귀는 법을 못 배웠으니까. 그래서 외로운 거야."
그 말은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그래서 미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아기가 외롭다면 자신이 아기 때 외로웠던 기억도 별일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따뜻하게 대해줬던 기억도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 기억이면 충분했다.

- 미소는 세 살 때 네 보호자가 있는 집으로 왔다. 벌레폭풍 때문이었다. 그해에 대규모 벌레폭풍이 와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전 세계에서 벌레들이 폭풍우처럼 거대한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며 병을 옮겼다. 미소가 있던 시설에도 위기가 닥쳤다. 시설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병에 걸려 아이들을 돌볼 사람이 부족해졌고, 병에 걸린 아이들도 생겼다. 시설 안에서는 완벽한 격리가 불가능했다. 시설 원장은 이러한 상황을 호소하며 도움을 구하는 글을 스페이스에 올렸다. 그 시설만이 아니라 보호자가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많은 시설에서 비슷한 글을 올렸다. 그때 아주 많은 아이들이 아주 많은 가정으로 입양됐는데 그중 하나가 미소였다. 원래 아이를 원했던 빵이 그 글을 보고 나머지 친구들을 설득했다. 손톱이 가장 먼저 찬성했고, 눈알도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눈알은 세 명쯤 더 입양하고 싶어 했지만 다른 친구들이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자고 말렸다(눈알은 지금도 그러고 싶어 한다).  

- 미소는 마음속의 불만을 스크린 가득 타이핑한 다음 윈도우 밖으로 날려 보냈다. 스크린 속의 창문이 활짝 열리고 글자들이 스페이스로 날아가는 것을 보니 조금은 속이 시원해졌다. 
[새: 누가 볼 줄 알고 네가 쓴 글을 그렇게 막 밖으로 보내?]
가족 메시지 창이 반짝거렸다.
[눈알: 냅둬. 옛날 사람들이 유리병에 편지 넣어서 바다에 띄우던 거랑 비슷한 거지 뭐.]
[미소: 내 스크린 훔쳐보지 말랬잖아! 왜 보호자는 차단이 안 되는 거야? 내 인권보다 보호자의 권리가 더 중요해?]
[새: 보호자의 권리 때문이 아니라 널 보호하기 위한 거야.]
[미소: 보호를 명목으로 한 억압이겠지. 인간의 모든 역사에서 지배와 억압은 항상 그런 식으로 일어났어.]
[눈알: 오, 그건 맞는 소리인데? 요즘은 학교에서 애들한테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나 봐.]
[새: 눈알, 네가 그러니까 애가 자꾸 더 그러는 거야. 이 집에서 삐뚤어진 사람은 너 하나로 족해.]
[손톱: 쟤네 또 싸우네. (웃음) 웃겨 죽겠다. (웃음)]

[빵: 쟤들은 저러고 사는 게 낙이지 뭐. 미소야, 재밌지?]

[미소: 하나도 재미없어. 다들 나한테 신경 좀 꺼주면 안 될까? 나 이제 잘 거야.]

- 미소는 메시지 창을 닫았다. 하지만 알림은 계속 떴다. 네 사람은 조용하다가도 한번 물꼬가 트이면 밤이라도 새울 기세로 수다를 떤다.
미소는 한숨을 쉬며 침대로 들어갔다.
'정말 지루한 인생이야. 내일도 오늘이랑 똑같은 하루겠지. 진짜 지겨워 죽겠어.'
바로 잠이 오지는 않아서 뒤척이는데 문득 스크린 윈도우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미소는 침대에서 나와 누가 자신의 윈도우에 노크를 보냈는지 봤다.

<팅커벨 님이 미소 님의 윈도우에 노크했습니다. 문을 여시겠습니까?>

- "팅커벨이 누구지?"
미소는 중얼거리며 <노크한 사람 보기> 버튼을 눌렀다. 노크한 사람의 정보는 대부분 비공개였지만, 나이와 얼굴은 볼 수 있었다. 미소와 같은 열두 살이었고, 얼굴도 나이에 맞아 보였다. '가짜 얼굴 아님'에 체크도 되어 있었다. 

 

- 미소는 팅커벨이 벌써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애를 보내지 않고 밤새 침대에서 수다를 떨고 싶었다.
"네 메시지 봤을 때 내가 뭐 하고 있었는 줄 알아?"
그 애가 물었다. 얼굴은 활기로 가득 차 있었고 온몸에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미소도 아주 얌전하기만 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 애만큼 활기찬 적은 인생에서 단 하루도 없었다.
"뭐 하고 있었는데?"
"너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어떻게 하필 이런 시대에 태어났지? 그 생각 말이야. 한 글자도 안 다르고 똑같아. 네 메시지를 보는데 순간 내 생각이 자동으로 타이핑되어서 떠다니는 줄 알았다니까."

- 스크린 윈도우에는 '창문 밖 보기' 기능이 있는데, 이 기능으로 아주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단순히 집 앞을 보는 것도 가능하다. 배달이 왔는지, 이상한 사람이 집 앞에 얼쩡거리지는 않는지, 바깥 날씨는 어떤지 보는 거다. 아주 먼 곳의 현재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이탈리아의 작은 섬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볼 수도 있고(오렌지가 얼마나 익었는지도 볼 수 있다!), 히말라야 산속의 새들을 보거나, 마데이라 바다의 돌고래들을 볼 수도 있다.
현실이 아니라 스페이스를 볼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스크린 윈도우를 탐색하거나 스페이스에 떠다니는 이미지나 글들을 보는 거다. 사람들은 아무 말이나 써서 스페이스에 날려 보내는데, 거기에 추적 허용을 해놓으면 누군가 그 글을 보고 스크린 윈도우로 찾아와 노크를 하거나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다. 팅커벨이 미소를 찾아온 것처럼 말이다.

- "다들 하는 생각 아닐까? 집 안에 갇혀 지내는 거 다들 똑같잖아. 오늘 학교에서 숙제를 내줬거든. 우리 세대를 다룬 뉴스 기사를 읽고 그에 대한 생각을 써오라고. 생각은 무슨 생각. 답답하고 심심해 죽겠지. 숙제에 그렇게 쓸 수는 없어서 내 스크린에 써서 밖으로 보낸 거야. 그걸 정말 누가 볼 줄은 몰랐어."
"그래도 운명이야! 딱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내 눈앞으로 네 글이 지나갔잖아. 그런 게 운명이 아니면 뭐겠어. 그걸 보는 순간 널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 이 글을 쓴 애랑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 그렇게 생각해 줬다니 고맙네."
미소는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지 몰라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은 제자리에서 방방 뛸 정도로 기뻤지만, 그런 행동을 해본 적이 없어서 마음과 달리 얌전한 말만 나왔다. 팅커벨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활기차게 말했다.
"내가 네 스크린 윈도우에 노크하기 전에 생각을 좀 해봤는데, 우리가 재밌는 걸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재밌는 거? 그게 어떤 건데?"
"그건 이제부터 우리가 같이 생각해 봐야지!"

 

기쁨, 이종산, <웬디와 팅커벨>



- 그걸 보면서도 주비는 신이 났다. 텔레비전에서 어른들끼리 서로 째려보고 소리 지르는 내용이 나오는 건 자야 할 시간이 지났다는 뜻인데, 어차피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이모가 머리를 빗겨줄 걸 상상하면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서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되었다.
이모 옆에 계속 있어야지. 이모가 아침에 까먹을 수도 있으니까 계속계속 졸라야지.
주비는 무릎을 껴안고 앞뒤로 몸을 굴리다가 균형을 잃고 이모 옆구리에 부딪쳤다.
"주비야, 이모 맥주 흘렸잖아."
"미안해!"
혹시나 이모가 기분 나빠서 머리를 안 땋아주면 어떡하지? 주비는 잽싸게 일어나 화장실 문고리에 걸려 있던 갈색 수건을 가져왔다.
"주비야, 그걸로는... 에휴 아니다. 어차피 빨 거지?"
이모는 주비한테 말한 것인지 혼잣말을 한 것인지 헷갈리게 중얼거리고는 갈색 수건으로 상과 바지를 닦았다.

 

- "이모."
"왜?"
"이모,"
"왜."
이모오, 이모오. 주비와 이모는 공을 던지고 받듯 몇 번 더 그렇게 부르고 대답했다. 결국 이모가 화를 낼 때까지.
"신주비!"
"왜?"
이모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줌마처럼 팩 소리를 질렀다. 주비는 이모랑 역할이 바뀐 게 재미있어서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한껏 인상을 쓰고 있던 이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다시 말했다.
"신주비, 이제 가서 자."
"이모도 자야지."
"이모는 어른이라 좀 늦게 자도 괜찮아."
"그런 게 어딨어?"
"너 빨리 안 자면 머리 안 묶어준다."
치사하게 이미 약속한 걸로 그러다니. 주비는 일부러 찰딱찰딱 소리가 나게 바닥에 발을 구르며 걸어서 방으로 들어갔다. 화가 났다는 걸 이모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어른이면 늦게 자도 된다는 법이 어디 있어. 어차피 텔레비전 틀어놓고 휴대폰만 보고 있으면서.
"신주비 너 어디 어른 앞에서 문을 꽝꽝 닫어!"
이모의 화난 목소리가 문을 건너 들어왔다. 참나, 자기는 엄마 자는데 막 소리도 지르면서. 이모는 정말 자기밖에 몰라. 아니, 어른들은 다 그래. 주비는 팔을 쭉 뻗어 불을 끄고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 그 이유는 아직은 비밀이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주비에게는, 주비네 집에 이모가 놀러 오는 것이 엄청난 행운이었다. 이모는 휴대폰으로 머리 땋는 영상을 틀어놓고 그걸 따라 주비의 머리를 빗어주는데, 내심 양갈래 머리를 싫어하는 주비가 봤을 때도 이모가 해준 머리는 정말 예쁘고 세련되었으니까. 주비랑 잘 놀아주지 않고 맨날 휴대폰만 보는 이모를 그래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래서였다.
그러니 어저께 들은 새로운 소식이 주비를 얼마나 기쁘게 했는지도 다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전에는 어쩌다 한 번 얼굴을 까먹을 때쯤에나 주비네 집에 놀러 오곤 하던 이모가 이제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꼭 주비를 보러 오기로 한 것이었다. 엄마가 너무 바빠져서 주비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 게 힘들어졌기 때문에.  
물론 주비는 엄마를 좋아하고, 이모랑 엄마 중에 누가 더 좋냐 하면 셋을 세기도 전에 엄마를 외칠 테지만, 엄마가 바빠진 건 참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 "어머, 주비 오늘은 이모랑 왔구나. 이모님 맞으시지요?"

"네, 안녕하세요? 당분간은 자주 인사드리게 될 것 같아요." 
이모와 어린이집 선생님이 인사를 주고받을 동안 주비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 삐딱하게 서 있었다.
"주비, 어디 아프니?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아픈 데는 없어요. 머리 안 땋아줬다고 저래요."
"어머, 주비도 참."
어른들은 꽤나 재미있는 얘기라도 주고받은 듯이 웃었다. 주비는 이모를 돌아보지도 않고 신발을 휘딱휘딱 벗어던진 다음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평소 신던 운동화라서 그래도 됐다. 이모는 머리도 안 땋아줬으면서 신발까지 마음대로 못 신게 했다.

- "제가 잘 타일러볼게요."
뒤에서 어른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낮춰가며 주고받은 이야기는 주비의 귀에도 다 들렸다. 뭐야, 이모는 꼭 내가 나쁜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약속 안 지킨 건 이모잖아, 이모가 나를 속였으면서. 눈물이 핑 돌았지만 울면 지는 것 같아서 주비는 참았다.
참아야 하고 말고. 다섯 살짜리도 아니잖아.
살짝 고인 눈물을 팔로 슥슥 닦았더니 눈이 따가웠다. 모처럼 입은 레이스 원피스 소매가 눈꺼풀을 할퀸 것이었다.

 

- "주비야. 오늘 엄청 예쁘다."
시아였다. 주비는 풀 죽은 목소리로 발끝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 왜 또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네가 그러면 내가 더 나쁜 아이처럼 느껴진단 말이야.

결국 주비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고 시아는 당황했다.
"주비야,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뭘 잘못했다는 거냐고, 대체. 주비는 우느라 숨을 힉힉 몰아쉬며 말했다.
"머리가 완전히 남자애처럼 됐잖아."
"나는 이 머리 좋은데, 주비는 마음에 안 들어?"
시아가 자기 앞머리를 이마 옆쪽으로 살짝 넘기며 물었다. 주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잘 어울리는 머리를 어떻게 마음에 안 들어할 수가 있겠어?
"아니, 멋있는 것 같아."
"내 머리 멋있어?"
"응."
주비의 솔직한 대답에 쑥스러워졌는지 시아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있잖아, 이따가 나랑 소꿉놀이 할까? 내가 아빠 하면 되잖아."
생각지도 못한 시아의 제안에 주비의 입이 떡 벌어졌다. TV에서 튀어나온 왕자님 같은 시아가 주비하고 소꿉놀이를 하고 싶어 하다니. 그런 시아와 짝이 되면 주비는 로즈 공주가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좋다고, 너무너무 좋다고 하고 싶었지만, 왠지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밤이 오빠 생각이 나버렸기 때문이다.

- "시아야. 우리도 엄마 시켜줘."
주비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다른 여자애들이 와서 시아에게 조르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다 같이 돌아가면서 엄마 역할을 맡으면 좋겠다면서. 시아는 그것도 좋지만, 자기가 엄마만큼 좋아하는 사람은 주비밖에 없으니까 주비가 엄마를 해야만 아빠 역할을 맡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어떤 여자애는 시아가 엄마를 하고 자기가 아빠를 해도 된다고 하고 있었다.
갑자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아진 시아를 보니 주비도 마음이 급해졌다. 시아랑 소꿉놀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딱 잘라 말하고 싶었지만, 자꾸 밤이 오빠 생각이 났다. 자기까지 다른 여자애들처럼 밤이 오빠를 배신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쳤던 눈물이 다시 났다. 주비가 어린이집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을 때, 웬걸 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린 애가 있었다. 
"시아가 남자애가 됐어!"
시아의 머리를 그렇게 만든 공범 주제에 뭘 잘했다는 것인지, 오영명이 세상 서럽게 울고 있었다.

 

사랑, 박서련, <엄마만큼 좋아해>

 

- 10년 전쯤 지하철에서 봤던 어떤 아이를 가끔 떠올린다. 내가 어린이집에 다니던 나이와 그때 내 동생의 나이, 그 사이일 듯한 어떤 아이가 자기 엄마를 부르던 장면. 아이는 해먹처럼 우묵하게 만든 캔버스 천 유아차에 앉아 있었고, 아이의 어머니는 내 근처 지하철 좌석에 앉아 있었다. 아이는 자기와 마주 보고 있는 어머니를 우러러 (그럴 수밖에 없는 각도라서) 보면서 길거나 짧게, 높거나 낮게, 또 애달프거나 장난스럽게 말투를 바꾸어가며 계속해서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 엄마아. 엄마? 엄마~ 엄마. 어머니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세 번에 한 번 꼴로 대답했다. 왜? 왜 왜! 왜... 왜.


- 어째서인지 나는 그때, 아이 어머니를 대신해 내가 그 아이에게 대답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온 세상에 엄마밖에 없다는 듯, 그래서 사랑할 사람도 오로지 당신뿐이라는 듯 엄마를 부르는 그 소리에 맹렬하고도 순수한 사랑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겪었기 때문에 쉽게 감동하지 않는 어른의 마음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사랑이. 흔하다면 흔한 광경이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 아이와 어머니를 잊지 못한다.

- 내가 쓴 이야기에 나오는 아이들은 여러 방식으로 어른들을 흉내 낸다. 하지만 아이가 어른 같은 행동을 한다고 해서 마음도 어른과 비슷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이가 무언가를 또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어른을 보고 따라 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아이들의 마음은 어른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힘이 세다고, 특히 사랑 같은 것은 오히려 어른이 아이에게서 배우는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 지하철에서 만난 아이와 어머니를 떠올리며 종종 그에 대해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순정하고 강한 사랑은 양육자가 자녀를 아끼는 마음이란 인식이 보편적인 듯한데, 정말 그런지. 어른들의 세상에는 중요한 것이 너무 많아 사랑하지만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는 것 같다. 반면 아직 사랑을 방해할 요소가 끼어들지 않은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사랑하는 것을 있는 힘껏 사랑하는 일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막상 아이일 때는 사랑을 하고 있음이 몹시 기쁘고 설레 하루하루가 벅찼던 것 같다.  

- 몸이 우당탕 따라 구르는 듯한 그때의 사랑은 그 자체로 즐거운 놀이였다.
자라느라 바쁜 와중에도 누군가를 힘껏 사랑한 아이들이, 또 그런 아이였던 기억을 지닌 어른들이 이 이야기를 즐겁게 읽어주기를.
누차 말하지만, 사랑에 만큼은 우리 모두 소질이 있다.

- 죽어서도 느낄 수 있다면 그건 신일 것이다. 송아는 신이 된 기분이었다. 할머니! 할머니도 신이 되었어? 지금 나를 보고 있어? 하지만 송아처럼 이렇게 작고 나약하게 느껴진다면 신이라 해도 별 수 없을 것이다. 들리는 건 계곡물 소리뿐이었다. 송아의 몸이 물살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불어서 쪼글쪼글해진 손가락은 마치 어린아이가 아닌 나이 든 사람의 것 같았다. 웅덩이로 밀려 들어간 몸이 잠시 멈춰 빙그르르 돌았다. 감긴 두 눈 위로 나무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춥다. 무덤 속이었다면 따뜻했을 텐데. 

 

- 얼굴이 물에 잠겼다. 코와 입으로 물이 들어왔다. 눈을 뜨지 않을 거야. 숨을 쉬지 않을 거야. 하지만 송아는 참지 못하고 물속에서 숨을 쉬고 말았다. 가슴이 타는 듯했다. 송아는 발버둥 치며 물 위로 올라왔다. 헛구역질이 나왔다. 코에서 물이 졸졸 흘렀다. 송아는 허리까지 차는 물을 헤치며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 따뜻한 곳으로 나오자 머리가 저릿저릿했다. 손에서도 쥐가 났다. 송아는 계곡 반대편을 보았다. 다행히 이모는 송아를 보지 못한 듯했다. 이모는 피크닉 매트를 펼쳐놓고 점심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엄마는 송아가 물에서 혼자 이런 짓 하는 걸 질색했다. 이모도 송아가 이러는 걸 싫어할 게 틀림없었다.

- 송아에게 맨 처음 송장헤엄을 가르쳐준 건 아빠였다. 시체처럼 똑바로 누워서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거라고 했다. 가슴을 내밀고 고개를 뒤로 젖히기만 하면 몸이 가라앉을 염려가 없었다. 가라앉더라도 양팔로 나비 날듯 물을 밀어주면 몸이 다시 떠올랐다. 송아는 아빠처럼 송장헤엄을 잘 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아빠는 얼굴에 물이 튀어도, 옆에서 말을 시켜도, 심지어 머리가 돌에 부딪혀도 죽은 사람처럼 물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언젠가 온 가족이 함께 이모 집에 놀러 갔을 때였다. 엄마 생일이었다. 아빠는 송장헤엄을 치다가 계곡 급류에 휩쓸렸다. 아빠는 순식간에 물거품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송아가 외치는 소리에 식구들이 달려왔다. 이모부가 급류로 뛰어들었지만 아빠를 찾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빠는 이미 계곡 하류로 쓸려 내려가 송장 헤엄을 치고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계속 아빠를 찾았다. 얼마쯤 지나 아빠가 쫄딱 젖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엄마는 화를 냈고 이모는 부랴부랴 구조대 출동을 취소하는 전화를 걸었다. 아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상에 앉아 남은 술을 마셨다. 아빠는 케이크를 자르기 직전에 잠이 들었다. 그 때문에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송아와 오빠는 엄마에게 나비 모양 머리핀을 선물했지만 엄마 머리가 너무 짧았다. 머리를 다시 길러야겠다며 웃음 짓던 엄마가 갑자기 울어버렸다. 오빠는 채집통을 들고 혼자 풀숲으로 사라졌다. 송아는 불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배탈이 났다. 송아는 엄마의 새 옷에 토하고 말았다. 그게 끝이었다. 송아네 가족은 다시는 함께 나들이를 가지 않았다. 아빠의 송장헤엄을 본 것도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 지난 며칠 동안 벌어진 일들이 송아에게는 꿈처럼 느껴졌다. 송아를 결국 집에서 데리고 나온 사람은 옆집 아줌마였다.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한참을 버틴 뒤였다. 송아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아줌마는 송아를 안고 이제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송아는 고개를 들었다.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었고, 구경하는 사람이 있었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에 어떻게...", "아이를...", "그 엄마가...", "설마..." 같은 말들이 귀에 꽂혔다. 구급차 두 대가 나란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경찰차에서 빛이 번쩍거렸다. 송아는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낯선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다. 경찰과 말을 나눈 것도 처음이었다. 사람들은 뭔가를 궁금해했 ...

- "야행성이 뭔데?"
"낮에 자고 밤에 돌아다니는 거야."
"캄캄한데 어떻게 돌아다녀?"
"캄캄한 데서도 잘 다닐 수 있게 진화했으니까."
"사람은 야행성이야?"
"아니."
"토끼는 야행성이야?"
"아니."
"고양이는?"
"고양이는 야행성이야."
"쥐는?"
"쥐도 아마 야행성일걸?"
"뱀은?"
"글쎄."
 
- 오빠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에게 물었지만 조용히 하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송아는 곧 그런 게 궁금하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 물고기는 천장을 맴돌다가 깊은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물고기는 여전히 혼자였다.
왜 혼자니?
밤이니까. 밤엔 누구나 다 혼자야. 물고기는 수염을 실룩거렸다.
하지만 낮에도 혼자였잖아.
낮에는 자야지. 잘 때는 누구나 혼자야.
그렇구나.

 

- 송아는 물고기와 계속 이야기하고 싶었다. 물고기도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송아는 캄캄한 밤에 어떻게 볼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물속에서 어떻게 숨을 쉬는지, 먹이를 어떻게 먹는지, 혹시 오줌은 싸는지. 물속의 밤은 어때?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밤은?
창밖으로 구름이 몰려왔다. 어둠이 짙어졌다. 방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송아는 물고기가 계속 헤엄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둠 속에서 뻐끔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송아는 물고기가 별을 쫓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 이모와 이모부가 밖에서 다급히 속삭이는 소리에 송아는 잠에서 깼다. 밤중인지 새벽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송아는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갔다. 환한 불빛이 송아의 눈을 찔렀다. 이모는 배에 손을 얹고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송아, 깼니? 이모 데리고 병원에 좀 갔다 올게."

- 설령 그들이 사는 곳을 알게 되더라도 배나 비행기로만 오갈 수 있는 그곳에 오랭이가 쉽게 들이닥칠 리 없다. 오랭이는 고소공포증이 있었고 뱃멀미도... 아, 뱃멀미를 했던가? 뱃멀미도 심하게 했다. 오랭이 배 안에 이미 바다가 들어 있어 조금만 출렁거려도 속에 있는 것들이 최다 쏟아져 나왔다.
어머니는 임시 숙소와 아파트를 오가며 몰래몰래 짐을 정리했다. 내다 팔 수 있는 물건들은 팔았고, 버릴 건 버렸다. 가져갈 짐은 여행 가방 두 개면 충분했다. 누이동생은 장난감이 다 없어졌다며 울고불고했다. 오빠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묵묵히 어머니를 도왔다. 어머니는 너무 일찍 철이 든 첫째가 안쓰러웠다. 오랭이는 유독 첫째를 미워했다. 어머니가 제 발로 오랭이 굴에 들어갔을 때 첫째는 아직 어리고 행복했다. 어머니는 큰애를 자기 자식처럼 키우겠다는 오랭이 말을 찰떡같이 믿었다. 오랭이가 사람인 줄 알고 같이 살면서 둘째도 낳았다. 아, 그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어머니가 오랭이 굴을 빠져나가기로 결심했을 때 이미 아이의 몸과 마음은 상처로 가득했다. 어머니는 어린 첫째를 제때 보호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어머니는 자기 자신과 아이들을 지키고 있었다. 
평일 오전이었다. 아파트 단지가 여느 때보다 조용했다. 몇 분 뒤면 어머니와 오누이는 이곳을 떠날 예정이었다. 

- 동생은 얼른 강아지들을 내려놓았다. 그곳에 얼마나 있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5분? 10분? 어쩌면 한 시간? 어머니가 깼을까. 화를 내고 있을까. 동생은 급히 계단을 뛰어 올라가다가 하마터면 청소부와 부딪힐 뻔했다.

 

- 집에 도착했을 때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동생은 숨을 쉴 수 없었다. 그 문은 절대로 열려 있어서는 안 되었다. 성문처럼 굳게 닫혀 있어야 했다. 어머니가... 갔다. 동생은 어머니와 오빠가 자기를 두고 떠나버렸다고 생각했다. 동생은 거실로 들어섰다. 집이 텅 비어 있었다.
"엄마!"
플라스틱 팔과 다리와 몸통 조각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여행 가방 두 개가 모로 쓰러져 있었다.
"오빠?"
동생은 로봇 부품을 주웠다.
"엄마?"
대답이 없었다.

- 나비 한 마리가 동생의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또한 마리가 파닥거리며 지나갔다. 그리고 또 한 마리... 나비들이 연달아 방에서 빠져나왔다. 그들은 서로 부딪히며 날아다녔다. 나비들이 뿌린 꽃가루가 어느 틈에 벽지와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붉은 동그라미, 붉은 콧수염, 붉은 구름, 빨간 도로, 빨간 자전거. 동생은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옆집 아줌마가 소리를 지르며 들어와 동생을 끌어안을 때까지...

- 송아는 잠에서 깼다.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눈물을 흘린 것 같은데 얼굴이 말라 있었다. 송아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뜨기 겁났다. 아직 긴 밤이 끝나지 않았을까 봐,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을까 봐 무서웠다. 송아는 바짓가랑이를 더듬었다. 잠옷이 조금 젖어 있었다. 몸에 한기가 들었다.
바닥이 축축했다. 마치 물속에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뜨지 않을 거야. 숨을 쉬지 않을 거야. 세상이 텅 비고 혼자만 남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모든 신들은 다 이런 기분인지도 몰랐다. 오빠는 왜 신이 되려고 하는 거야? 

- 송아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무도 송아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아무도 송아 말을 듣지 않는다. 내 말은 엉터리 같아. 하지만 신이라면 엉터리 같은 말도 알아들을 수 있을 거라고 송아는 생각했다. 낯선 사람들에게 하려고 했던 말을, 이모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오빠라면 들어줄 것 같았다. 오빠처럼 어린 사람도 신이 될 수 있다면 말이다. 오빠는 내 목소리가 들려? 송아는 울지 않으려고 했다. 울음이 말을 다 먹어버리게 할 수는 없었다. 송아는 숨어 있던 말들이 빠져나와 하늘을 날아다니고 구름을 지나다니고 마침내 달에 닿는 장면을 상상했다.  

고독, 서연아, <물고기의 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