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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다 신조] 붉은 눈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7. 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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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미쓰다 신조 / 이연승
출판 : 레드박스
출간 : 14.06.26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 <산마처럼 비웃는 것>,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집 시리즈>, <작가 시리즈>의 <사관장>과 <백사당>, <사상학 탐정 시리즈>, <일곱 명의 술래잡기>.

 

자신의 발표작들을 교묘하게 연결하는, 때로는 대놓고 소개하기도 하는 '괴이 단편집'.

알아차리면 그건 그것대로 오싹하고, 모른다면 그것도 그대로 오싹하다. 

비슷한 이야기가 변주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알면서도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느낌이랄까.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순수한 공포'라는 기준으로 보자면 <붉은 눈>이 가장 그에 부합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사관장>과 <백사당>이 주는 공포에는 약간은 관음적인 -제3자로서 느낄 수 있는- 면모가 있다면, <붉은 눈>은 조금 더 일상적이고 보편적이다. 다시 말해, 대상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이 주는 무서움이 있다.

 

<붉은 눈>은 다른 작품들을 읽기 전에 한 번, 그리고 읽은 후에 한 번 더 읽기를 추천한다.

작품 자체로서도 처음과 끝이 연결되는 일종의 수미상관 구조기도 하고. 

 

이렇게 작품들 간의 연결을 잘 활용하는 작가들은 처음부터 큰 세계를 구상했던 것일까, 아니면 새 작품을 구상할 때 이전 세계를 잘 참고하는 것일까. 

궁금하지만 깊게 파고들고 싶지는 않다. 

어쩐지... 알아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즐거웠다.  

 


   

 

-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참으로 기묘합니다.
첫 월급을 받고 가족들을 조금 비싼 식당에 데려간 자리에서 "네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이었지. 산책 중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낯선 아줌마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가려는 모습을 보고 정말 혼비백산했다"라는 술 취한 아버지의 이야기는 금시초문인데, "두부를 사 오라고 보냈더니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했단다"라는 어머니의 시시한 이야기에는 떠오르는 기억이 있으니까 말이죠.


- 아니, 심부름을 간 기억뿐 아니라 당시 거스름돈으로 받은 5엔짜리 동전을 아차 하는 사이에 함석판 틈새에 떨어뜨리고는 어떻게든 꺼내려고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찔러 넣던 것과 별의별 수를 써도 동전이 나오지 않아 울먹이고 있자 지나가던 생면부지의 아주머니가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준 것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결국 그 5엔 동전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까지도요.

- 아아, 당신은 작가이시니 저처럼 모호한 기억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아, 그런가요.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다행히도 이해해 주실 것 같네요. 조금 전 말씀드리다가 만 으스스한 이야기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부분과 불확실한 부분이 뒤섞인 탓에 작가님의 기대를 얼마나 채울 수 있을지 조금 걱정스러워서요. 답답하게 느껴지셔도 부디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 작가님처럼 저도 어린 시절 간사이에서 살았습니다. 우연이겠지만, 그 지역 초등학교에 들어가 한 학기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친구들과 놀아보려고 마음먹은 여름 방학 기간에 아버지의 일 때문에 시골로 전학을 가게 된 것까지도 같네요. 크게 다른 것이라고는 새로 다니게 된 초등학교 2학기 개학식에 나타난 전학생이 저 혼자만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 마도 다카리 目童たかり... 그 여자아이의 이름입니다만, 성은 한자가 틀릴지도 모릅니다. '마 目'는 맞겠지만 '도 童'는 왠지 한자의 형태만으로 기억해서 그다지 자신이 없습니다. 이름 쪽은 애초에 히라가나였던 것 같기도 하고 한자였던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전혀 기억나지 않네요.
긴 머리카락에 살결이 희고 예쁜 아이였는데 특히 양쪽 눈동자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째서인지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유심히 보니 오른쪽 눈보다 왼쪽 눈의 홍채가 색이 진하더군요. 그런 짝짝이 눈으로 저를 응시할 때면 뭐랄까, 쾌감과 전율을 동시에 맛보는 듯한 기분이... 
네? 아아, 첫사랑이었느냐고요?
아뇨, 아니... 글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첫눈에 반한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 건 사실입니다. 다만 그 감정이 며칠 만에 식었다고나 할까요. 그게,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쾌감보다 전율 쪽이 어느새 더 커졌다고 설명하면 이해하시려나요. 

- 실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무당이셨습니다. 그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저도 어렸을 때 아주 가끔이기는 하지만, 엮이면 안 되는 사람이나 물건, 장소를 알아볼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의식이 전혀 없어서 그냥 그 아이와 마주 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느끼는 정도였습니다. 

- 물론 저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역시 요네쿠라라고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제 의혹이 증명됐다는 사실에 내심 흥분했습니다. 그럼에도 요네쿠라에게 제 생각을 전하지 않은 까닭은 요네쿠라가 그 아이의 말과 행동에 주목하는 상황을 염려해서였습니다. 만약 요네쿠라가 그런 의혹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그 아이가 깨닫는다면... 그렇게 생각한 순간 팔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왜 그 아이에게 알려지는 상황이 두려운지, 저 자신도 만족스러운 설명은 할 수 없었습니다만... 

- "아, 혹시 머리가 너무 좋아서 그런 게 아닐까."
저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습니다만 요네쿠라는 "그런가?" 하더니 왠지 불만스러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위를 둘러보며 "그나저나 정말 먼 곳까지 와버렸네"라고 말했습니다.
"응? 아아, 그러네... 이 강을 거슬러 가면 옆 동네 통학 구역이잖아. 아니, 이미 그쪽 구역인지도."
요네쿠라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꺼낸 별 의미 없는 말이었지만 얄궂게도 그 말이 외려 마도 다카리에 대한 새로운 흥미를 불러일으킨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왜 굳이 이런 곳에서 우리 학교까지 다니는 걸까?"
요네쿠라는 걸어가면서 어른처럼 팔짱을 끼고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런 요네쿠라의 모습이, 아니 더욱 커져버린 그 아이를 향한 의심이 제게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꺼림칙하게 느껴졌습니다. 요네쿠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마음의 여유 따위 이미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 지금 이렇게 다시 떠올리면서도 그게 실제로 본 광경이었는지 어떤지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좀 더 어렸을 적에 영화관에서 본 영상 속 어떤 장면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거든요. 

- "어쩌지?"
교활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곧장 판단을 요네쿠라에게 떠넘겼습니다.
"일단 가보자. 빵이랑 숙제만 건네주면 되니까."
그 정도의 대화만으로도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 그래도 꼭 전해야만 하니 물건을 문 앞에라도 두고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쩐지 그 집이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집 바로 옆을 흐르는 강은 폭이 좁고 가뭄이 오면 바닥을 드러낼 만큼 수심이 얕았지만, 시골이라 그런지 물은 아주 맑고 깨끗했습니다.
하나 그 집은 맑고 깨끗한 강물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청아함과는 정반대에 있는 무언가를 온몸에 두르고 존재하고 있다. 잘 표현할 수는 없어도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분명 요네쿠라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문득 마도 다카리가 옆 동네 학교에 가지 않는, 아니, 오히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맑은 강물을 건너지 못해서가 아닐까. 초등학생도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얕은 강물이지만 늘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그 아이에게는 발을 담글 수 없는 일종의 경계선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저는 그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 강바람으로 넘실대는 억새밭 한가운데에서 뉘엿뉘엿 지는 석양의 칙칙할 만큼 붉고 무딘 빛을 흡수하며 선 폐가에 가까운 가건물을 향해 저희는 입을 다문 채 발소리조차 최대한 죽이고 천천히 다가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선혈처럼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기괴한 집 위를 비행하는 몇 개의 작은 그림자를 발견한 것은...
처음에는 새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움직임이 이상하더군요. 마치 나비가 나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들이 나비라면 터무니없이 큰 괴물 나비여야만 합니다. 
"박쥐다..."
요네쿠라가 중얼대는 말과 눈앞에서 미친 듯이 날갯짓을 하는 작고 검은 그림자가 바로는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 다만 안방에 누워 있는 그것을 본 순간, 저는 등줄기에 흐르는 지독한 오한을 느끼며 안절부절못하게 됐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그저 묵묵히 강가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뒤에서 요네쿠라가 쫓아온다는 건 어렴풋이 느꼈습니다만, 만약 그런 기색이 없었더라도 그대로 혼자 집에 돌아갔을 겁니다.

- 그날 밤 저는 섬뜩한 악몽을 꿨습니다.
방에서 자고 있는데 갑자기 눈이 떠지더군요. 뭔가를 감지하고 일어난 것 같긴 한데 이불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봐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습니다.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잠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 그 기운을 느꼈습니다. 어딘가 먼 곳에서 무언가가 저희 집에, 이 방에, 제게 다가오려 한다는 것을...
퍼뜩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습니다. 그 순간, 눈을 떴을 때 꿈속에서처럼 여전히 한밤중이고, 게다가 그때와 같은 기운을 느꼈으면 어땠을지를 떠올리니 오싹해졌습니다.

- 학교에 가자 요네쿠라가 곧장 다가와 아무도 없는 교실 구석으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어젯밤 이상한 꿈을 꿨어."
그 말에 저 자신도 안색이 변하는 게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요네쿠라는 꿈 이야기에 몰두해 제 반응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 요네쿠라의 모습을 본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다음 날 요네쿠라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틀째, 사흘째, 나흘째가 되는 날에도... 그리고 닷새째 되던 날, 급식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아침 일찍 요네쿠라가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알렸습니다. 사인은 뭔지 모릅니다. 선생님도 "병으로 급사했다"라고만 하셨으니까요.


- 다음 날이 철야였고 이틀 뒤가 장례식이었을 겁니다. 물론 저는 양쪽 다 참석했는데 때마침 그 무렵 외할머니가 집에 오셨습니다. 특별히 볼일이 있으셨던 건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덕분에 저는 화를 면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제가 친했던 친구의 철야에 간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마늘을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냄새나는 걸 어떻게 갖고 가요?"라며 질색하는 어머니의 말에 할머니는 "그럼 부추로도 된다”라고 하셨지만 공교롭게도 그날 집에는 부추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꼭 필요한 거라면 가는 길에 살게요"라고 할머니를 설득하며 제게는 얼른 준비하라고 재촉하셨죠.

 

- 하나 할머니는 분명 어머니의 말이 건성으로 하는 약속이라는 걸 눈치채셨던 것 같습니다. 갑자기 부엌을 뒤지기 시작하더니 국물용 멸치를 발견하시고, 작게 찢은 신문지에 그것을 조금씩 넣고 싸셨습니다. 그렇게 만든 뭉치 세 개를 제 재킷과 셔츠, 바지 주머니에 넣으시고는 "철야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절대 버리면 안 된다"라는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어머니도 멸치 정도면 냄새가 심하지 않으리라 여겼는지 할머니 마음대로 하게 놔두셔서 저는 그 지시에 따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철야 자리에서는 괜찮았는데 장례식 때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안 좋아져서 결국 어머니 등에 업혀 집에 돌아오는 처지가 되고 말았죠. 그날도 잊지 않고 멸치를 몸에 지니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 집에 다 왔구나 하고 생각할 즈음, 마치 저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현관 앞에 서 계신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제 모습을 보자마자 놀랍게도 양팔을 벌려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더군요. 어머니도 안에 들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화를 내는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내게 맡기려무나. 너는 근처 농가에 가서 키를 좀 빌려 오고."
할머니는 그 말만 하고 현관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범상치 않은 그 모습에 어머니도 예삿일이 아니라고 여겼는지 고분고분 저를 할머니께 맡기고 이웃 농가로 향하셨죠.

- 할머니께서는 현관 앞 포석에 저를 앉힌 다음 문에 몸을 기대게 하고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어머니가 키를 들고 돌아온 것과 거의 동시에 할머니가 불에 살짝 달군 냄비를 손에 들고 나왔습니다. 할머니는 따뜻하게 덥힌 냄비를 제 머리에 씌우더니 양손으로 키를 거꾸로 쥐고 마치 부채처럼 제 쪽을 향해 세 번 정도 부쳤습니다.
그러자 그 전까지 아팠던 몸이 사르르 나아지더군요. 물론 장례식에 가기 전의 건강한 상태로 돌아간 건 아닙니다. 뭐랄까. 이를테면 막 아프기 시작할 무렵의 몸 상태 같은 느낌이랄까요. 

 

- 그런데 할머니께서 제 베갯머리에 꼭 붙어서 세상을 떠난 친구에 대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남김없이 털어놓으라며 독촉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요네쿠라의 꿈 이야기부터 시작해 마도 다카리에 대한 이야기까지 전부 할머니께 털어놨습니다. 
"그 아이의 '마도'라는 성은 '마도 魔道' 혹은 '마도 魔導'라고도 읽을 수 있겠구나."
그렇게 중얼거린 할머니는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마가 지나는 길'과 '마가 이끄는 길'에 대해 가르쳐주셨습니다.
"게다가 이름인 '다카리'는 파리 같은 벌레가 꼬인다 할 때 쓰는 그 다카리(일본어로 다카루 集る는 '꼬이다'라는 뜻이 있다-옮긴이)란다."
물론 그때 저는 할머니의 말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제가 그 아이에게서 느낀 무언가는 절대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습니다.

 

- "할머니가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단 그 아이는 물론, 그 무엇이 와도 반드시, 절대 집에 들여서는 안 돼! 알겠지? 약속하지?"
"꾸, 꿈 속... 에서도?"
"그건 말이지. 꿈과는 다른..., 아니, 그래. 꿈속에서도 말이다."

- 그날 밤부터 2층 제 방 창문에는 마늘이 걸렸고, 자기 전에는 반드시 부추를 우물거려야 했습니다. 부모님과 할머니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던 것 같기도 한데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도 할머니 마음대로 하게 놔두시더군요.

- 이후로도 저는 여전히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마도 다카리가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집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그 꿈 말입니다. 매우 불길한 기운이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저로서도 집에 들일 방도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살짝 안도감을 느낀 저는 당초 예정한 날짜가 지나도 집에 머물러 계시던 할머니께 "그저 다가오려는 기운만 느껴질 뿐이니 괜찮지 않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안 돼! 절대 마음을 놔서는 안 된다. 아무래도 어떤 이유로 쇠약해져 있는 것 같긴 한데... 아니, 그래도 그건 말이지. 그 여자아이 따윈 문제도 되지 않을 만큼 무시무시한 거란다."
그런 호통을 듣고 저는 다시 공포의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죠.

- 그날 밤이었습니다. 저는 꿈속에서 창가에 서서 드리워진 커튼 틈새로 바깥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창문 아래에는 작은 정원이 있고, 울타리 너머로는 좁은 길이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즉 저희 집에 다다르는 부근에서 길이 울타리를 따라 좌우가 직각으로 꺾인 셈입니다. 고로 2층 창문에서 바깥을 보면 민가 사이를 지나는 그 길이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오게 되죠. 
평소에는 흉흉한 기운이 감돌기만 하던 길 끝에 언뜻 뭔가가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곧 사람 형태가 되어 슬금슬금 저희 집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길의 절반까지 왔을 때 흐릿하게 비추는 전봇대 가로등 불빛으로 그것이 마도 다카리임을 알아챘습니다. 
그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로 쓰윽 하고 미끄러지듯 다가와 창문 아래 울타리 너머에서 멈춰 서더니 서서히 고개를 들어... 쩌억 하고 웃었습니다. 네. 실제로 그런 모골이 송연해지는 소리가 확실히 제 귀에는 들렸습니다.

- 그런데 아무래도 교실에서 했던 고민이 허사가 된 모양으로, 씨앗을 퍼뜨리고 시들기 시작한 억새밭 강가에서 그 집과 다시 대치했을 때는 핏물이 스며든 것 같은 저녁노을이 주위 일대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런 음산한 경치를 배경으로, 작고 조잡하고 초라하기만 한 가건물이 왠지 모를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산하며 서 있는 광경이 제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더는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가건물을 똑바로 마주한 순간, 저는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발걸음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데 해가 점점 저물어가더군요. 만약 요네쿠라가 옆에 있다면... 하고 마음속 깊숙이 바란 순간, 요네쿠라가 결국 어떻게 됐는지 새삼 떠올린 저는 와앗 하고 입 밖에 내지도 못하는 절규를 마음속으로만 외쳐가며 눈앞의 집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발소리가 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다기보다는 필사적으로 무시해 가며,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구깃구깃해진 빵과 갱지를 우편함에 쑤셔 넣었습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되돌아가려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집 안에서 누군가가 저를 부른 것은...

 

- 아, 단순한 착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어떤 소리가 들렸는지 그 당시에도 알 수 없었으니까요. 하나 경솔하게도 저는 엉겁결에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강가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 바로 전날, 방과 후 마도 다카리와 둘이서 교정 뒤편 덤불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다는 같은 반 아이도 있었습니다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은 아무 일도 없었는지는 그 누구도 모릅니다.
하나 확실한 건 제가 더는 꿈을 꾸지 않게 됐다는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딱 한 번, 2층 창문에서 바깥 길을 내려다보는 꿈을 꿨습니다. 하지만 그때 느꼈던 건 뭔가 불길한 것이 제게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은... 그런 안도감이었습니다.

- 할머니는 제가 대학에 다닐 때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할머니를 찾았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할머니께서 갑자기 말씀하시더군요. 
"만약에 말이다. 또다시 그 꿈을 꾸게 된다면 그것이 가까이와 있다는 뜻이니... 최대한 빨리 다른 누군가에게 그 꿈 이야기를 털어놓으려무나. 그래. 누구든 상관없다. 훗날을 생각하면 되도록 모르는 사람이 낫겠지. 알겠느냐?"

 

- 그래서 지금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작가님도 한시라도 빨리 다른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아 작가님이시니 소설로 발표하셔도 괜찮겠군요. 네. 작가님은요.

 

<붉은 눈>

 

 

- 사이먼 마스든이라는 영국인 사진작가를 아는가. 일본에서는 십여 년 전, 지금은 사라진 트레빌 출판사에서 사진집 <유령성>과 <악령관>이 연이어 출간된 바 있다. 그러나 그 두 권 외에는 에드거 앨런 포의 괴기 소설 <검은 고양이>, <어서 가의 몰락>, <모렐라>, <타원형의 초상>, <베레니스>, <윌리엄 윌슨> 이렇게 여섯 편을 그의 사진 작품과 함께 엮은 <포의 흑몽성>(다이에이출판) 정도가 출간됐을 뿐, 유감스럽게도 일본에서는 일부 괴기 애호가들이 찬사를 보낸 정도로 끝난 느낌의 사진작가이지만...

 

- 마스든의 작품은 영국,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에서 찍은 사진이 많다. 주 무대는 영국으로, 각각의 사진에 절대 한데 묶을 수 없는 개성적인 분위기가 존재해 우리에게 괴이의 다채로움을 제공한다. 그의 피사체가 되는 것은 각 지방에 현존하는 고성이나 저택, 폐허, 섬뜩한 전설이 깃든 유적과 토지, 그리고 다양한 조각상이나 묘비 등 하나같이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건축물과 풍경뿐이다. 

- 그는 적외선 카메라를 이용해 각각의 장소에 잠재된 어둠의 세계를 거칠고 독특한 질감이 느껴지는 흑백 사진에 담는다. 그리고 그 순간 작품에는 독자적인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한다. 물론 피사체 자체가 묘한 분위기를 발산하기는 하지만 마스든에게는 그런 분위기를 증폭시키는 능력이 있어 보인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누구에게나 익숙한 베르사유 궁전도 예외가 아니다. 그의 손을 거치면 겉보기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정원에서조차 역사의 어둠에 묻힌 불길한 암부部가 순식간에 드러난다.

- 마스든의 시선은 명백하게 이계인 異界人의 것이다. 그의 눈동자에는 피사체가 명확하게 비치는 동시에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게 틀림없다. 그는 그런 시력을 이용해 이계를 현실 세계로 끌고 올 수 있다. 또한 눈앞에 나타난 광경은 단순히 괴기스럽게 비치거나 환상적으로 느껴지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공포 속에 아름다움이 있고, 아름다움 속에 슬픔이 있다. 그런 어쩐지 동양적인 정취라는 단어가 어울릴 법한 또 하나의 세계를 은근슬쩍 우리에게 선보인다.

- 더욱 대단한 건 그가 상당히 특이한 사진작가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이야기꾼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는 촬영 장소에 얽힌 꺼림칙한 기억, 기괴한 전설, 구슬픈 죽음, 불길한 귀신 이야기 등을 취재해 사진과 함께 전하려고 한다. 독자에 따라서는 비주얼만으로 충분히 마음에 와닿으므로 텍스트 따위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피사체에 얽힌 이야기는 하나같이 그 지역에서밖에 느낄 수 없는 수준 높은 독자성을 지닌다. 즉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은 철저하게 영국의 고성에서 전해지는 괴기이자 스코틀랜드의 저택에 잠재된 음울이며 웨일스의 묘비에 떠도는 애수라 할 수 있다. 영국에서 찍은 작품만 꼽아도 결코 대영 제국이라는 하나의 나라로는 한데 묶을 수 없는 시대의 어둠이 각각의 사진과 문장에 잠재돼 있다. 그는 역사의 어둠에 묻혀버린 지역과 지역에 얽힌 편력을 쌓아 이계를 촬영하고 다니는 나그네인 셈이다. 
 
- 내가 사이먼 마스의 사진을 보자마자 곧바로 그의 작품에 사로잡힌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당시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 나는 독일에서 출간되는 <GEO>라는 월간지의 일본판 부편집장을 맡고 있었다. 잡지는 세계의 민족, 자연, 동물, 문화, 과학, 모험 같은 폭넓은 주제를 다루는 비주얼 잡지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독일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독일판의 저널리즘적인 내용은 일본 시장에 맞지 않아서 다소 관광적인 시점을 ... 

- 병약한 인상을 주는 동시에 왠지 모를 우아함을 자아냈다. 전신에 기품이 감돌면서도 공허함이 느껴지는, 그야말로 미스터리한 여성이었다.
"무슨 용건이라도... 아니, 혹시 저를 부르셨나요?"
나는 잠시 그녀의 모습에 홀려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조금 빠른 어조로 물었다.

-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하는 이야기를 듣고 화들짝 놀랐다. 바로 조금 전까지 이 여성도 트레빌 출판사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G와 대화를 나눈 방의 안쪽 칸막이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소곤거리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서 다른 편집자가 전화를 걸면서 작업이라도 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실제로는 칸막이 너머에 그녀도 있었다고 한다. 목소리 자체가 원체 작은 데다가 G와 괴담을 나누는 일에 열중하느라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상황이 파악되자 문득 겸연쩍어졌다.

- "살고 있다는 건가요? 둘이서만?"
그때 노인이 갑자기 몸을 움찔했다. 표정에서 왠지 두려움이 느껴졌다. 마치 쓸데없는 말을 해서 모쿠노 가로부터 앙갚음을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처럼. 
"저기..." 
물론 나는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노인은 휙 등을 돌렸다.
"아무리 일이라고는 해도 나라면 절대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네."
노인은 그 말만 남기고 황급히 집 뒤편으로 모습을 감췄다. 대체 무슨 소리일까?

- 미즈키와 노인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마치 요시미가 심령 스폿 사진 촬영에 몰두하며 괴담에도 손을 뻗친 탓에 모쿠노 가가 터무니없는 재앙에 휩싸였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런 사례가 없지는 않지만 거의 한 일가가 전멸했다고 할 만한 상황은 역시 흔치 않다. 게다가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그는 작년에 그 원흉으로 여겨지는 사진들을 모아 개인전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의도였을까.

- 모쿠노 요시미와 만나기가 두렵다.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 그러나 객실 테이블에는 분명 찻잔 두 개가 비워진 채로 놓여 있었다. 물론 아버지는 그다음 날 돌아가셨다.
마지막에 나오는 '물론'이라는 부사가 문장 흐름상 부자연스러운데도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무서웠다.

- "오빠분께서는 어떤 식으로 텍스트를 쓰십니까? 즉 이런 건 피사체에 얽힌 실화나 실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찍힌 사진에서 영감을 얻어 이런 문장으로 표현하시는 건지요?"
"오빠는 굉장히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에요."
"그 말씀은 곧 텍스트는 창작이라는..."
"취재를 해요. 하지만 늘 사진을 찍는 게 먼저랍니다. 그다음에 피사체에 얽힌 괴담을 수집하죠."
"그런데도 늘 이런 괴담 같은 이야기를 찾아내시는 건가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여서 어째서 텍스트의 형태가 제각각인지를 물었다.
"구체적인 체험담에서 모호한 소문까지, 수집하는 이야기들이 천차만별이라서 그렇죠. 오빠는 그중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을 채용할 뿐이에요."

- "오빠는 아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꺼릴 만한 장소를..."

아무래도 그녀는 요시미의 작품에 대한 질문 말고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게 의도적인 것인지 자연스러운 반응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그렇게 보인다.

- "사진작가가 되시기 전에는 뭔가 다른 일을 하셨습니까? 아, 글도 잘 쓰시니 혹시..."
"오빠는 사진 속에 담는다고 했어요."
확인을 위해 또다시 작품과 관계없는 질문을 해보니 예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사진들 속에 뭔가 담겨 있다? 그게 무슨 의미죠?"
일부러 파일을 들이밀며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피사체에 담긴 사념 같은 건가요?"
누구든 떠올릴 만한 발상이었지만 어쨌든 물어보았다.
"글쎄요.. 오빠 말로는 훌륭하게 촬영한 현장에서는 그 뒤로 더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고 해요."

- 매우 위험한 사진들이 나를 감싸고 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괴기 사진 작가>


- 이 책은 내 첫 호러 단편집이다. 그래서 뭔가 부록을 집어넣고 싶었다.

- 간사이에서 편집자로 근무하던 무렵, 취미로 실화 괴담을 수집한 적이 있다. 어느덧 자연스레 그만두게 됐지만 지금도 그런 부류의 이야기는 절대 싫어하지 않아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기꺼이 귀를 기울이곤 한다. 이 책의 부록으로 수록한 네 가지 이야기는 그렇게 우연히 얻어들은 이야기이다.

- 이건 작가인 S씨에게 들은 이야기.
규슈에 O가라는 수백 년에 걸쳐 이어온 오래된 옛집이 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지만, 현 집주인인 A씨는 모 업계에서 굉장히 유명한 분이니 혹시 몰라 이름을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 자손들이 살지 않게 된 낡은 집은 부수거나 매각 혹은 시에 기부해서 보존하는 형식의 말로를 맞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O가에서는 근처에 사는 어느 노파에게 관리를 맡기고 노파가 그 고장 향토 요리 등을 관광객에게 대접하여 역사적인 옛집을 존속하는 형식의 매우 흥미로운 시도를 벌이고 있었다.

 

- 그 취재를 위해 S씨가 O가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이웃들과 관광객까지 참여한 인터뷰와 사진 촬영을 무사히 마친 S씨는 노파에게 작별을 고하고 돌아가려던 참에 어째서인지 집 안에 노인 한 명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노인은 취재 중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았고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지만 아무래도 근처에 시는 이웃으로 보였다. 
거기서 S씨는 곧바로 노인에게 접근해 지극히 가벼운 마음으로 "이 정도의 옛집이니 괴담 같은 이야기 하나쯤은 전해 내려오지 않을까요?"라고 물어봤다. 아마 일을 끝낸 해방감과 더불어 애초에 그런 부류의 이야기를 싫어하지 않으므로 옛날이야기를 알고 있을 법한 노인을 발견하자 입에서 자연스레 그런 질문이 나왔으리라. 
그러자 그전까지 얌전했던 노인이 불현듯 몸을 앞으로 쓱 내밀더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한다.

-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O가의 주인이 업무차 잠시 집을 비웠을 때 미리 계획이라도 한 것처럼 부인이 주인의 오른팔 같은 존재인 지배인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갔다. 영문도 모르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주인은 물론 격노했다. 곧바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어떻게든 두 사람을 찾아내"라며 전국 방방곡곡을 샅샅이 뒤지게 했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이 현재의 주부 지방 모처에서 살고 있음이 밝혀졌다.
그 보고를 전해 들은 주인은 화를 내지 않고 되레 "책망하지 않을 테니 일단 돌아와라"라며 두 사람을 용서하는 식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주인의 부인을 빼앗은 지배인은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다시 가겠느냐며 돌아가기를 거부했고, 결국 부인만 홀로 집에 돌아가게 됐다.
그렇게 부인은 집을 나간 지 수십 일 만에 가마를 타고 O가로 돌아왔다. 가마가 집 앞에 도착해 그 안에서 부인이 내리려고 했을 때, 그전까지 몸을 숨기고 있던 주인이 나타나 지체 없이 일본도를 내려쳤다. 부인이 가마에서 고개를 내민 순간 목을 벨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내려친 칼이 부인의 머리 장식에 맞는 바람에 단칼에 목을 벨 수는 없었다. 칼은 어중간하게 목을 파고든 모양새가 됐고, 결국 부인은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발악하며 나뒹굴었다고 한다. 
부인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내 반드시 자손 대대로, 7대손까지 저주를 내리리라"라고 계속해서 외쳤다고 한다.

-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시점에 수다스럽게 떠들던 노인이 웬일인지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렸다.
S씨는 수상쩍게 여기면서도 "그 뒤로 정말 저주가 내렸나요?"라고 물어봤다. 그러나 노인은 "대대로 반드시 누군가가 XXX의 일부..."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더니 그 뒤로는 "대대로 불행이 따랐지"라고만 할 뿐 구체적인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xxx' 부분도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S씨는 알아듣지 못했다. S씨는 "옛날이야기든 뭐든 간에 그 뒤로 일어난 저주 이야기를 하기엔 역시 이런저런 지장이 있었겠죠"라고 노인이 이야기를 그만둔 이유를 추측했다. 

 

- 다만 현 주인인 A씨가 젊었을 무렵 모 업계에서 호평을 받으며 절정을 구가하던 시기에 큰 사고를 당한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게다가 그 사고로 A씨는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신체 일부분을 잘라냈다고 한다.
물론 그것이 정말로 저주인지는 누구도 단언할 수 없지만 A씨가 자손의 '7대' 안에 들어가는 것만은 틀림없다고 S씨는 귀띔했다.

<괴담 기담·사제 1 - 옛집의 저주>



- 본 원고의 주제가 '귀신의 집'이라는 것, 그것도 놀이공원에 있는 것이 아닌, 소위 말하는 '흉가'임을 알았을 때 문득 내 뇌리를 스친 집이 세 채 있다. 전부 내가 나고 자란 간사이에 실존했던 것은 물론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초등학교 3~4학년 무렵 집중적으로 얽힌 집들이다. 그저 단순한 우연에 불과할지라도 이제 와서 다시 떠올려보면 그때는 그런 특정한 집들에 홀리던 시기였던 것 같다. 

- 첫 번째 집은 사철 K선의 G역에서 동남쪽으로 이십 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신흥 주택가에 있던 매매 주택으로, 아마 우리 사이에서는 가장 유명한 흉가였던 것 같다. G라는 곳은 당시 오사카나 교토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베드타운으로 개발이 진행된 지역이었는데, 그런 곳에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소문 ... 

- 그러던 중 한 명이 거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히익" 하고 비명이라고도 할 수 없는 소리를 냈다. 남은 세 명이 무슨 일인지 따라 들어가 보니, 거실에 있던 먼지투성이 테이블 위에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잔 네 개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걸 목격한 순간 네 명은 밧줄에 몸이 꽁꽁 묶인 사람처럼 옴짝달싹 못 하게 됐다. 그때 갑자기 따르릉따르릉 하는 전화벨 소리가 울리더니... 

 

- 결국 그 전화벨 소리를 계기로 네 명은 일제히 그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이야기였다.

내 졸저 속에 등장하는 인물도 한차례 소개한 바 있는 추억의 괴담이다.

- 두 번째 집은 우리 집과 초등학교 사이에 있는 용수로 변에 있는 폐가였는데, 이곳은 실제로 나도 친구들과 셋이서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애초에 이 집을 흉가라고 부르던 건 우리 정도였고, 수상쩍은 소문 같은 것도 돌지 않았으니 정말로 단순한 폐가 탐험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나름의 비장한 결의를 가슴에 안고 그 폐가에 발을 들인 건 분명하지만 그곳을 흉가라고 단언하기에는 다소 무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실은 이 이야기도 역시 내 졸저 속에서 등장인물의 체험담으로 쓰였다. 친구가 마룻바닥을 밟아 구멍을 낸 에피소드 등도 그대로 채용했을 정도이니 이는 내 추억 속에서 그곳이 어엿한 흉가로 자리 잡았다는 증거이리라. 

- 이런 기묘한 느낌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따라서 내게 그 집은 매우 무섭고도 섬뜩한 존재였지만 모두에게는 어디까지나 수상쩍고 어딘가 이상한 집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는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 에도가와 란포의 '소년 탐정단' 시리즈가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른다. 즉 당시 아이들은 누가 봐도 악인의 아지트처럼 보이는 수상한 집에 들어가 그 비밀을 폭로하고픈 욕망에 휩싸여 있었다. 마음만은 괴도 이십 면 상('소년 탐정단' 시리즈에 등장하는 도둑으로 변신의 귀재이다-옮긴이)의 은신처로 향하는 소년 탐정단이었던 셈이다. 나 하나만을 제외하고.

- 아니, 불안해하는 녀석이 또 한 명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N가 교차점 근처에 사는 K로, 그 아이는 나와는 다른 이유로 그 집을 으스스하게 느끼고 있었다. K는 밤에 몇 번 그 집을 올려다본 적이 있는데, 그중 딱 한 번 지붕 위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를 봤다고 했다. 거리가 멀고 어두웠던 데다가 아버지에게 알리러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올려다봤을 때에는 이미 사라진 -사라졌다기보다는 지붕 위에서 떨어진 느낌이었다고 했다- 뒤였지만 어쨌든 머리카락이 긴 여자처럼 보였다고 했다. 게다가 몸을 기묘한 형태로 배배 꼬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고... 


- K는 그 이야기를 내게만 들려줬다. 전학생인 K는 유독 눈물이 많았는데 별달리 괴롭힘을 당하거나 하는 일 없이 아이들 무리에 흡수돼 있었다. 울음을 터뜨릴 때는 일부러 괴수 흉내를 내며 시치미를 떼는 묘한 버릇이 있기는 했지만 딱히 K를 울리는 아이도 없었다. 물론 나와도 사이가 좋아서 K의 집에는 종종 놀러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 특별한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내게만 그런 이야기를 털어놨을까...


- 하지만 그런 의문을 품을 여유는 전혀 없었다. K가 말한 지붕 위가 그 집 2층 바로 위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내게는 유독 그 이야기가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K와도 서로 두 번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둘 다 널리 퍼뜨릴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껴서였을까.

- "그 집, 다 같이 가서 조사해 보는 게 어때?"
따라서 누가 이런 말을 꺼낸 것도 모자라 실제로도 그 말처럼 점차 일이 진행돼 가자 나는 그야말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무서워서 가고 싶지 않다는 감정과 가서 아무 문제없는 평범한 집임을 아니면 정말로 악인의 은신처임을 속 시원하게 밝혀내는 게 낫다는, 그런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 우리는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침입할 수 있는 루트를 찾기 위해서였다.
"얘들아! 이쪽에 계단이 있어."
금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크게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는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다른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부지의 오른쪽 끝으로 가자 수풀이 우거진 산울타리에 거의 묻혀버린 것 같은 작은 나무문이 있었고, 그 안으로 왼편으로 빙 돌아서 내려가는 돌계단이 보였다. 
그곳을 들여다본 순간 나는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뭔가 특별한 게 눈에 들어온 건 아니다. 좁은 돌계단이 -벼랑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정원으로 이어진 것 같은 통로가- 단지 아래로 뻗어 있기만 했다. 하나 꺾여서 보이지 않는 돌계단 끝에 뭔가 무시무시한 게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돌계단을 내려가면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만일 돌아오더라도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돼버릴 것 같은 그런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내가 느낀 그런 형용할 수 없는 전율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했다.
 
- '점토 살인사건'으로 불린 듯하다. 다만 사건 현장인 산과 벼랑 위 집이 세워진 장소가 서로 떨어져 있어서 쌍방에 인과 관계가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게다가 그 점토 산은 우리의 놀이터 중 하나였으니 뭔가가 있었다면 한 번쯤은 괴이한 현상을 접했을 만도 한데 나를 포함한 아이들이 그런 체험을 한 적은 일절 없었다. 
결국, 그 집은 무엇이었을까...

- 원고를 여기까지 쓰고 나니 머릿속에 세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비상계단에서 굴러 떨어질 뻔한 녀석은 아마 벼랑 위 집에 함께 들어간 아이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또 K의 동생은 어쩌면 이사를 간 곳에서 높은 데서 떨어져 죽은 게 아닐까. 그리고 혹시 그날 동생이 가지고 놀던 유리구슬 개수가 당시 우리의 머릿수와 똑같았던 건...
물론 모두 단지 내 상상 아니, 망상이라고 부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 그러나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게 있다. K는 전학을 가기 전 내게 유리구슬 하나를 건넸다. 혹시 그때 K는 구슬을 나뿐만 아니라 그날 벼랑 위 집에 들어간 아이들에게 모두 한 개씩 나눠 주지 않았을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런 기분이 든다.

<내려다보는 집>



- 필자가 어느 만화가 사무실 스태프에게 들은 이야기.
한때 모 잡지의 유능한 편집장이었던 K씨는 이미 오래전 은퇴해 당시에는 프리랜스 작가였다. K씨는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고령의 만화가의 자서전을 기획하려고 했다. 
하나 유감스럽게도 당사자인 만화가는 책을 쓸 만한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K씨가 대필을 하기로 했다.


- 그러나 원래라면 반년 정도면 나올 내용의 책이 무려 이 년이나 걸리고 말았다.
이런저런 원인이 있다고는 하는데 결정적인 이유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아주 작은 돌에 바퀴가 걸리는 '사고'였다고 한다. 정말로 작디작은 돌이었다. 하지만 K씨는 그 돌에 걸려 무려 대퇴골 골절이라는 큰 부상을 당했다. 

 

- 게다가 부상을 당한 K 씨가 집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집 정원에 낯선 남자들이 들어오더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 정원에 무단으로 침입하면 어떡하느냐?"라고 K 씨가 화를 냈더니 남자들은 되레 집이 매물로 나왔으니 얼른 나가라는 소리를 해댔다고 한다. 
소스라치게 놀라 확인해 보니 별거 중인 부인과 이미 독립한 아들딸이 멋대로 그 집을 내놓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그런 식으로 K씨를 둘러싼 환경은 눈덩이처럼 점점 더 나쁜 쪽을 향해 굴러갔다.
K씨는 생각했다. 왜 계속 이렇게 안 좋은 일들만 생기는 걸까.

그러다가 퍼뜩 깨달았다. 어떤 시기를 전후로 자기 주위에서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걸...

- 그날 K씨는 전철을 타려고 어느 역으로 향했다. 역에는 전철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플랫폼 앞으로 간 K 씨는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전철에 뛰어든 것으로 보이는 남자의 잘린 머리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머리는 선로 위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몸에서 잘려 나갔는데도 어째서인지 넥타이만은 여전히 목에 둘둘 감겨 있었다. 그리고 그 이상은 불가능할 정도로 양쪽 눈을 한껏 치켜뜨고 K씨를 쳐다봤다고 한다. 
그날 뒤로 K씨 주위에 흉흉한 일들이 속출했다는 이야기이다.

<괴담 기담·사제 2 - 원인>



-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호오, 일반 회사원이나 마찬가지군."
"그래. 출근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긴 해도...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한 사람은 그리 쉽게 밤낮이 바뀌지 않아."
"그렇군."
"근데 무슨 일이야? 이런 한밤중에..."
"후후훗. 지금 내가 어디서 전화를 거는 것 같아?"
"으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힌트를 좀 줄까. 힌트는 말이지, 오 년 전."

-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알아챈 것 같네."
"너, 설마..."
"헤헤."

"그 산에 가 있는 거야? 이런 시간에?"

"드디어 정신이 좀 드나 보지?"

"정말이냐....... 장난치는 거 아니지?"

"뭐 하러 그런 장난을 치겠어."

"그때 이미 데었잖아. 소문이 사실이었다고 하면서..."

"생각해 보니 네 호러 작가 데뷔도 축하할 겸 심령 스폿을 ... "

- "어때, 죽이는 아이디어 같지 않아? 그냥 이대로 소설로 써도 되겠다."
"호오, 사실 너는 이미 죽은 사람이고 이 전화는 유령이 건 전화다 같은, 그런 내용으로?"
"헤에. 역시 대단하네. 응. 진짜로 한 번 써보지 그래?"
"바보냐. 요즘 같은 때 그런 시시한 설정으로는 그 자리에서 퇴짜야."
"그럼 네가 죽은 사람이라는 설정은?"
"오히려 그쪽이 좀 더 가능성이 있겠군."
"흐음..."
"근데 만약 내가 죽은 거면 너는 어떻게 죽은 사람하고 통화를 하지? 그 설명이 필요하겠는데."
"아아, 그래. 근데 호러 영화 같은 데서도 자주 등장하는 소재 아냐?"
"영화는 소설보다 훨씬 대중 오락적인 측면이 있으니 그런 쪽으로는 좀 더 느슨해."
"헤에, 그런가... 어쨌든 너를 여기로 부르려고 한 건 사실이야. 근데 전화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래. 물론 전화해 준 건 고마워. 그래서 지금 어디쯤 있는데?"

"문에서 좀 더 들어간 곳. 기억나지? 맨 처음 기묘한 비석 같은 게 있던..."

- "왜? 잘만 쓰면 엄청 무서울 것 같지 않아?"
"덴잔 덴운이란 작가를, 아마 너는 모르겠지. 본가가 나라에 있고 전후에 데뷔한 괴기 소설가인데, 도조 마사야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어."
"그래? 잘 모르겠군. 유명해?"
"아니. 지금으로 치면 컬트 작가라고나 할까. 그 덴잔이 <진홍빛 어둠>이란 작품을 쓰는 도중에 돌연 행방불명 됐지."

"설마..."
"그래. 그 묘지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쓸 생각이었던 것 같아. 그래서 그 산을 취재하러 갔는데 그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정말이야?"
"당시에 이미 폐허 같은 곳이었으니 깊숙이 들어간 그가 조난을 당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 그래서 산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결국 못 찾았다더군."
"지금 겁주려는 거지? 그리고 논픽션을 쓴 녀석들도 있는데 다들 무사하잖아."
"응.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아무도 직접 현장에 발을 들이지는 않았으니."
"뭐야 그게. 소설을 쓰는 사람은 취재를 오는데 정작 논픽션 작가라는 작자들이 오지 않는다고?"

- "없을 수도 있지만, 뭐 어쩔 수 있나. 이미 발을 담가버렸으니까 말이야."

"..."
"그리고 너... 그때 일, 지금 글로 쓰려고 하고 있지?"
"어...?"
"집필 의뢰를 받았을 때 문득 떠올랐겠지."
"무, 무슨..."
"시치미 떼지 않아도 돼... 잘 어울리는 이야기니까."
"어, 어떻게, 그걸..."
"굳이 그런 곳을 소재로 삼을 생각은 없다면서, 속으로는 정말 좋은 소재라고 생각했겠지."

- "그때, 무슨 소리를 들었지?”
"그, 그때...?"
"너 그때 그 시커먼 전화의 수화기를 들어서 귀에 갖다 댔었잖아."
"그, 그건..."
"어서 말해... 뭐가 들렸지?"
"바, 바, 바람 소리... 같은..."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하는 소리 말이야?"

- "하아... 하아... 하아..."
"내가 그쪽으로 가면 되니까."
"... 앗..."
"다 왔다..."

<한밤중의 전화>



- 처음 대면하는 사람에게 "무슨 일을 하시죠?"라는 질문을 받고 "호러나 미스터리 소설을 씁니다"라고 답하면 "그게 대체 어떤 소설인가요?"라는 말이 되돌아오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런데 내 졸저들은 그 두 요소가 섞여 있어 간결하게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물며 일반 독자 중에는 호러와 미스터리를 구분 못 하는 분들도 꽤 있는 탓에 더욱 그렇다.

 

-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일부러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내 작품을 소개하게 됐다.
"주로 쇼와 20~30년대(1945~1964년) 농촌이나 산촌, 외딴섬 등 폐쇄적인 공간을 무대로 토속 신앙이나 장송 의례 같은 민 속학적인 테마를 소재로 삼아 기이하고 환상적인 색채가 강한 탐정 소설을 씁니다."

- 이때 상대가 흥미를 보이면 '도조 겐야' 시리즈(소설가 도조 겐야를 주인공으로 한 미쓰다 신조의 작품으로, 본격 추리의 틀에 토속적이고 민속학적인 괴담을 접목한 시리즈-옮긴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애초에 상당히 특수한 세계관을 지닌 소설이지만 표면적으로 요코미조 세이시의 작품과 닮아서인지 결국 이런 설명이 상대가 이해하기 가장 쉽다고 학습한 결과이다.

- 아니, 단순히 쉽고 어렵고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상대의 연배가 높을수록 대부분 그 시절 추억을 꺼내놓기 시작한다.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이다. 게다가 끊임없이 솟아 나오는 체험담 속에는 불가사의하고 기묘한 일, 음산하고 기괴한 사건이 불쑥불쑥 섞이고는 한다. 도조 겐야의 괴이담 수집벽 정도는 아니어도 그런 이야기들을 매우 좋아하는 내게는 환영할 만한 발견이다.

 

- 물론 그러려면 장황하게 이어지는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또한 아무리 상대해도 괴이한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전후 혼란기부터 고도성장기를 살아온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 건 무척 귀중한 경험이 틀림없다. 게다가 드물기는 해도 그 안에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섞인다면 더욱더... 

- 재작년 늦가을 무렵이었다. 나는 S 지방의 어느 온천 여관에 머무르고 있었다. S라는 지명을 들으면 누구든 항구 마을을 떠올리겠지만, 그때 내가 고른 곳은 산속에 있는 여관이었다. 산이라고 해도 저산 지대라서 매우 조용하고 한가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주위에는 찻집은커녕 따로 관광할 만한 장소도 없었다. 운동 겸 산책하는 것 말고는 오락거리라고 해봐야 노천욕을 마치고 방에서 쉬거나 대낮부터 술을 마시거나 독서를 즐기거나 수다를 좋아하는 여종업원과 잡담을 나누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즉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놓이니 매우 마음이 편했다. 

- I라는 이름의 그 여관은 북쪽에 늘어선 산에 둘러싸인 형태로 독특한 건물 세 채로 이루어졌다. 산의 경사면에 지은 서쪽 구관은 건물 내부에 가파른 계단과 좁은 복도가 사방으로 뻗어있어 마치 거대한 개미굴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정면에 있는 본관은 연회를 할 수 있는 넓은 방과 고즈넉한 분위기의 바, 널찍한 욕조에 몸을 담글 수 있는 대욕탕 등 충실한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어 좋든 싫든 일반적인 여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머무르던 동쪽 신관은 각 방이 독립적으로 분리된 형태로 방에는 작은 정원과 노천탕이 딸렸다. 그래서 온종일 방 안에 틀어박힐 수도 있었다.

- 여기서 이만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됐다.
뒤돌아보니 산길이 이어졌다. 다만 십 몇 미터 앞에서 왼쪽으로 꺾여 그 너머가 보이지 않았다.
저기까지만 가볼까... 
거기서 안쪽으로 길이 더 이어지면 그때 돌아가자고 마음먹었다.

- 무서울 정도로 불그스름한 석양을 뒤로하고 천천히 산길을 오른다. 왠지 폐가 앞에서 전방의 모퉁이까지가 경계선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산의 안과 밖을 가르는 잿빛 영역에 발을 들이는 느낌이었다.
경계선 끝에 다다른 시점에 조심스럽게 앞길을 엿본다.
여전히 뻗어 있다... 
길은 구불구불 갈지자를 그리며 산속으로 한층 더 위를 향해 끊임없이 이어진다.
거기서부터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걸었다. 고민이 사라졌다기보다는 이 길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 무언가를 상상하며 희미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것에 매혹됐던 것 같기도 하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고 나서부터 줄곧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도 들었다. 이 두 가지 기묘한 감각이 끊임없이 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 다행히 땅은 비교적 고른 편이었다. 맑은 날씨가 이어진 덕에 질퍽거리지도 않는다. 군데군데 고개를 내민 돌부리만 주의하면 문제없다.
그러나 불안정한 나막신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에 걸린다. 만약 달려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뭔가에 쫓겨 도망치게 될 경우에는...
문득 제자리에 멈춰서 뒤를 돌아본다. 산의 마물이 뒤따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염매(厭魅, 사람을 가위눌리게 하거나 정기를 빨아먹는다는 귀신-옮긴이)일까, 산마(山魔, 산속에 사는 도깨비-옮긴이)일까. 아니면...

- 순간적으로 몸이 떨려와 나도 모르게 유카타 앞자락을 여민다. 망상을 떨쳐내려고 머리를 한번 흔들고 다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경사가 완만해진 시점에서 왼쪽으로 꺾이는 샛길이 나타났다. 그 앞을 들여다보니 비닐하우스의 잔해 같은 게 보였다. 천천히 다가가 조심스레 내부를 확인하고 화들짝 놀랐다. 크고 작은 선반과 나무가 심긴 화분 몇 개가 보였다. 아무래도 원래는 화초를 기르던 온실이었던 것 같다.
이런 산속에서...?

- 역에 있었습니다. 탄광 회사에 다녔죠. 물론 무시무시한 일도 겪었습니다. 팔로군(항일 전쟁 때 화북 지역에서 활약한 중국 공산당 군대-옮긴이)의 스파이가 붙잡혔는데, 고문으로 자백을 받은 것으로 모자라 목을 베어 길가에 박아둔 굵은 말뚝에 매달아 두더군요... 여자아이들뿐 아니라 저희까지도 벌벌 떨었죠. 
하지만 당신이 궁금하신 건 이런 종류의 무서운 이야기는 아니죠? 좀 더, 뭐랄까... 그래요, 괴담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요 예전에 제가 공연했던 '재나방 남자의 공포' 같은...

- 다행히 저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도내는 이미 저마다 구역들을 꿰차고 있어서 멋대로 끼어들 수 없었죠. 그래서 본가가 있는 무사시사고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제게는 이미 이야기의 대략적인 복안이 서 있었죠. 초등학생 무렵 해 본 그림 연극 '괴기와 공포! 박쥐 남자의 저주'에 대한 기억과 전쟁 전 발생한 아이들의 실종 사건을 소재로 한 줄거리가, 막연하긴 해도 머릿속에 있었습니다.
이 박쥐 남자란 것은 단순한 이야기 속 괴인이 아닙니다. 네. 실존했다고 할까요. 당시에는 그런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까맣고 큼지막한 망토를 두른 남자가 초등학생들을 채 간다는 무시무시한 소문. 망토를 활짝 펼쳐서 아이를 감싸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고들 했죠.

 

-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소문과 연극, 둘 중 어느 쪽이 먼저였을까요... 어쨌든 당시 아이들은 그야말로 공포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박쥐 남자의 저주' 연극이 널리 퍼지고, 저희는 또다시 공포에 몸을 떠는 그런 나날이 반복됐던 것 같습니다.
당시 무사시사고는 크게 농가와 서민촌, 고급 주택가 세 곳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박쥐 남자가 출몰하는 곳은 오로지 주택가 주변이었습니다. 그러니 저희 같은 서민촌 사람들이 겁낼 필요는 없었습니다만...
호오, 알아채셨나요. 그렇습니다. 저만은 두려워할 이유가 충분했죠. 주택가 쪽으로 원정을 다녔으니까요.
앗, 호박 남자요? 무사시나고이케 지역 주택가에서도 몇 년 ...

- 아뇨, 그전까지 재나방 남자가 목격된 건 거의 주택가에서였습니다. 그러니 단순한 아이들의 망상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연극 영향도 있었을 테죠. 하지만 실은 저 역시도 어린 시절에 같은 장소에서 박쥐 남자를 본 기억이... 
아,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원래 이야기로 돌아올 수 없을 테니까요.

- 연극이 끝난 건 거의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주택가 아이들도 총총걸음으로 집에 돌아가더군요. 그중 딱 한 명, 서민촌 아이가 있었습니다. 후나고시라는 선술집의 셋째 아들이었는데, 나중에야 이름이 가즈오인 걸 알았습니다. 그 아이는 서민촌에 있는 신사에서 연극을 보지 않고 늘 수호신 숲까지 왔었죠. 
저도 어린 시절 그랬습니다. 주택가 아이들을 동경한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조용히 연극을 관람할 수 있었거든요. 공연하는 장소에 따라 정말 놀라울 만큼 아이들의 질이 다릅니다. 공장 지역에 사는 아이들은 성미가 거칠고 번화가에는 약아빠진 아이들이 많습니다. 상점가가 많은 마을은 빈틈이 없고 산촌 아이들은 겸손하고 어른스럽죠. 야유가 날아오는 곳이 있는가 하면 마냥 조용하고 예의 바른 곳도 있는데, 굳이 고르자면 수호신 숲은 후자였던 셈입니다.  
저는 가즈오에게 함께 돌아가지 않겠느냐고 말을 걸었습니다. 신사에서 남쪽 길로 가는 사람은 저희 둘 뿐이었거든요.

 

- "호오..."
"가즈오 군은 나이에 비해 몸집이 왜소하다고 하셨습니다. 비둘기가 어느 정도 모이면 그런 작은 몸은 충분히 숨길 수 있습니다."
"호오..."
"신사에 비둘기 떼는 으레 있기 마련이고, 평상시에도 수호신 숲 경내에 비둘기가 많다는 건 곤도 순경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비둘기가 좀 모여 있는 모습도 그다지 부자연스럽게 보이진 않았을 겁니다."  
"호오..."
"두부장수가 가즈오 군을 발견했을 때 비둘기가 시체를 쪼고 있어서 황급히 손으로 쫓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대부분의 비둘기는 곤도 순경이 지나가고 두부 장수가 오기까지 콩을 전부 먹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겁니다. 하나 몇 마리는 남아 있었죠. 그걸 두부 장수가 목격한 거고요." 

 

- 노인의 "호오...” 하는 맞장구가 귀에 박혀 더는 참을 수 없게 될 무렵에야 나는 노인의 모습이 암흑 속에 완전히 묻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검게 물결치는 노천 온천물 속에 녹아든 것처럼... 
같은 탕 안에 양다리를 담그고 있다는 걸 떠올린 순간, 발꿈치 쪽에서 조금씩 느껴지는 떨림이 단숨에 목덜미까지 타고 올라왔다.
"호오..."
내가 입을 닫고 있는데도 어째선지 노인의 맞장구만이 어둠 속에서 들려온다.

- 여전히 노인의 맞장구가 뒤에서 들려왔다.
몸은 물기가 말랐다기보다는 완전히 식어버렸다. 목욕 수건한 장만 두르고 밤바람을 맞고 있었으니 당연하다. 서둘러 탈의실로 들어간다.
"호오..."
노인의 목소리가 노천탕 가운데쯤에서 들려왔다. 분명 가장 안쪽에서 서서히 앞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 그런데도 온천물이 물결치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나는 목욕 수건을 집어던지고 잽싸게 새 속옷을 입은 다음 유카타에 팔을 집어넣고 단젠을 둘렀다.  

- "어머... 그런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시다니... 주의하세요. 다치시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나는 동요하는 모습을 최대한 숨기며 그곳에 누가 살고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선대 사모님의 오라버니가 오랜 세월 그곳에서 사셨다고 들었는데... 아,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살았다...?
과거형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 황급히 되물었다.
"네. 그게 말이죠, 손님. 몇 년 전인가, 한밤중에 노천..."
종업원은 거기서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나중에 다시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허둥지둥 방을 나갔다. 

 

- 분명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으리라.
'몇 년 전인가, 한밤중에 노천탕에서 물에 빠져 죽었답니다.'

- 그날 오후 나는 일정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십몇 년 전 S 마을에서 발생했다는 아동 살인 사건을 조사해야 할지 지금도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재나방 남자의 공포>



- 이 이야기는 필자가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D씨는 당시 결혼 오 년 차였다. D씨와 부인 둘 다 아이를 원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에 대한 보상 심리였는지 두 사람은 처가에서 기르던 개(포메라니안)를 종종 집으로 데려와 자식처럼 귀여워하고는 했다.

 

- 나이가 많은 그 개는 같은 조건인 다른 개에 비해 몸집이 작고 매우 허약했다. 이윽고 털이 빠지기 시작해서 진료를 받으러 갔는데 당시 수의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개는 주인의 애정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사를 놓을 수는 있지만 쇼크로 수명이 줄어들 수 있어요. 그냥 이대로 키우시는 편이 가장 좋을 것 같네요."
그에 D씨 부부는 그전보다 더 많은 애정을 개에게 쏟아부었다. 
그러나 삼 년 정도 지나자 결국 개는 죽어버렸다. D씨와 부인은 큰 충격을 받아 서로 일주일 정도 말문을 열지 못했다고 한다.

- 그로부터 얼마 뒤 부인이 임신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두 사람은 매우 기뻐했다. 가까스로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다.
마침내 부인은 무사히 남자아이를 출산했다. 그때 D씨는 문득 별생각 없이 날짜를 세어봤다고 한다. 그러자 아이가 태어난 날이 개가 죽은 날로부터 정확히 십 개월 열흘 뒤라는 것을 깨달았다.

- 그 사실에 D씨는 아연실색했다. 왜냐하면 부인이 임신했을 시기에 두 사람은 일절 잠자리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차 쇠약해지는 개, 그리고 결국 맞이한 죽음. 그런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은 도저히 잠자리를 가질 여력이 없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그 시기에 부인이 바람을 피웠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너무도 실례되는 말이었지만 그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그러나 D씨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내를 믿는다든지 그런 여자가 아니라는 식의 이유는 아닙니다. 저는 아내가 개에게 쏟아붓는 애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거든요. 애초에 바람을 피울 여유 따위는 눈곱만치도 없었습니다."
D씨는 자신의 아이가 애견의 환생, 아니면 적어도 개가 자신들에게 내려준 아이라고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괴담 기담·사제 3 - 애견의 죽음>



- 몇 년 전 <백사당 白蛇堂, 괴담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장편이 출간됐다. <사관장 蛇棺葬>의 속편 혹은 후일담에 해당하면서도 전작의 존재 자체를 주제로 한 이 기묘한 작품은 처녀작 <기관, 호러 작가가 사는 집>부터 시작된 '작가 3부작'의 완결편이기도 하다.

- 다분히 메타 소설적인 이 작품은 도쿄에서 교토 그리고 나라로 무대를 옮겨가는데, 교토를 묘사한 부분에 '가이 초 거리를 북상해 도카야쿠시 골목으로 들어간다'라는 기술이 나온다. 모 원고를 저술한 인물의 집이 그 주소에 있어서 당시 편집자로 근무하던 나는 그곳을 방문하게 됐는데...
아니, 그 체험담은 이번 이야기와는 관계없다. 게다가 애초에 이미 지난 일이다.

- 실은 <백사당>을 집필하기에 앞서 문제의 골목을 취재했을 때 또 다른 골목에 얽힌 으스스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바 있다. 편의상 취재원을 야카게 씨, 체험인을 E 씨라고 지칭하겠다. 그 이야기는 괴이담 애호가인 나의 심금을 울리는 참으로 기묘한 이야기였다. 따라서 애초에는 <백사당> 안에 집어넣은 많은 괴담처럼 그 이야기 역시 포함할 생각이었다.

 

- 그러나 취재를 마치고 만약을 대비해 야카게 씨에게 허가를 구하려고 하자 그는 내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어린 시절 이야기이긴 하지만 E씨는 아직 그곳에 살고 계시니까요..."

물론 본인의 실명과 골목 이름을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도 난색을 표했다. 무심코 E 씨의 체험을 입에 담은 스스로의 경솔함을 명백히 후회하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는 뒤이어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잠시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어쨌든 재고해 주십시오.”
야카게 씨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까지 정중하게 거절하면 나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무리한 부탁을 했다며 사과하고 취재 사례금을 전달한 뒤 그와 헤어졌다. 

- 그러나 작가란 원체 종잡을 수 없는 인종이다. 내 지인의 친구가 어느 유명 문학상을 받은 작가에게 "절대 소설 소재로 삼으면 안 된다"라고 단단히 약속받고 자신의 부끄러운 체험담을 털어놨는데, 몇 달 뒤 그 이야기가 어느 소설지에 단편으로 발표된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일정 부분 각색이 이루어졌다고는 해도 이야기 속 상황이 지극히 특수한 탓에 관계자가 읽으면 등장인물을 특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 미리 말해두는데 처음부터 야카게 씨를 배신할 생각이었던 건 아니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백사당>을 쓰기 시작하고 나서 무대가 교토로 옮겨갈 무렵 자연스럽게 펜이 움직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꼭 집어넣어야만 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로 E씨의 체험담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문제의 그 작가처럼 안이하게 부도덕한 행위를 할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우선 상당한 수준의 각색을 거친 뒤 인물과 장소도 절대 특정할 수 없도록 했다. 게다가 수많은 괴담 속에 묻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만 도드라질 리도 없다고 예상했다. 그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나는 그 이야기를 사용할 준비를 마쳤다. 

- 이상하리만큼 서늘했던 늦가을, 아침부터 잔뜩 찌푸린 하늘이 펼쳐진 어느 날 저녁이었다. <백사당> 원고를 집필하다가 앞서 밝힌 E씨의 체험담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딩동...

- 다 봤다.
그 순간, 해가 진 줄 알았다. 밖은 암흑천지였다. 그러나 불과 몇 초 전에 매화나무에 드리운 저녁놀을 보지 않았는가.
문 바로 앞에 누군가가 서 있다...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다시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문너머에서 들려오는 그것이 실제로는 전혀 다른 소리라는 것을 가까스로 깨달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때 막 그 장면을 쓰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황급히 책상으로 돌아가 집필 중이던 E 씨의 체험담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 '작가 3부작'이라는 메타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따금 현실과 허구가 뒤섞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 매우 음산한 일과 맞닥뜨리는... 그런 체험이 몇 차례 있었다. 불가사의한 현상 대다수는 있는 그대로, 혹은 형태를 살짝 바꿔 작중에 집어넣었다. 그러던 중 나는 차츰 그런 기묘한 체험 중에는 글자로 남길 수 없는, 남기려고 해도 거부당하는 게 존재한다고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무리하게 기록하려고 하면 소설 그 자체가 이상해진다. 작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이야기가 부쩍부쩍 야릇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린다. 자신이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다가 결국 펜이 뚝 멈춘다. 그때 전개가 이상해진 부분으로 돌아가 해당 사건을 지우고 다시 쓰면, 거짓 ... 
 
- ... 가 적혀 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 내용을 읽다가 화들짝 놀랐다. 거기에는 'E씨가 돌아가셨습니다. 동봉한 복사용지를 참고해 주세요'라는, 본문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무뚝뚝한 문장이 적혀 있는 게 아닌가.

- 그러나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본문이 '주'이고 추신은 '종'으로 보인다. 적힌 내용이나 분량으로 봐도 틀림없다. 하나 실제로는 반대일지도 모른다. '동봉한 복사용지'야말로 그가 진정 보내고 싶었던 것이며 내가 읽었으면 하는 내용이 아닐까... 
왜냐하면 문제의 복사용지에 E 씨가 체험한 섬뜩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전 그에게서 취재한 것보다 훨씬 자세한 내용이 기술돼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대체 그는 어떻게 이런 걸 입수했을까. 또 왜 내게 보냈을까. 아니, 애초에 E씨는 무엇을 위해 그 이야기를 기록해두려고 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특히 세 번째 의문은 이유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팔에 소름이 돈을 지경이었다. 


- 우선 야카게 씨에게 보낼 답장을 썼다. 안부 인사와 편지를 보내줘서 고맙다는 내용을 적당히 적고, 세 번째 의문점과 함께 E씨의 기록을 발표해도 문제없겠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 "제대로 된 걸로 바꾸도록 하마."
그러나 어머니의 말과는 달리 문패는 계속 그 상태 그대로였다. 가족 중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옛 문패를 사용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 여름 방학 동안 난데없이 교토 시내로 이사한다는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이상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너무 갑작스러웠던 데다가 왜 XXX보다 월세가 비싸 보이는 곳을 골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 일과 관련이 있나 싶었지만 그것도 아닌 듯했다. 할머니의 지인이 소개했다는데 그냥 어린아이 앞에서 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로만 들렸다. 
그러나 새로운 주소를 누구에게도 심지어 친한 친구에게도 절대 알려주면 안 된다는 말을 어머니께 들은 나는 그제야 평범한 이사가 아님을 눈치챘다. 다만 그 이유는 무서워서 차마 묻지 못했다. 다행히 여름 방학 기간이라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전학을 가게 됐다. 물론 나는 전학 가기 싫었지만 왠지 부모님께 반항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어서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 가장 걱정하던 월세 문제에 대해서는 새로운 이웃집 할머니와 친할머니의 대화를 엿듣고 곧바로 이해했다. 마치야(주로 유래 깊은 상가에서 상인들이 생업과 거주를 같이하던 형태의 집-옮긴이)라고 불리는 옛날 구조의 집을 별다른 개조 없이 원상태 그대로 사는 조건으로 아주 싼값에 빌릴 수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부 府나 시 市에서 지원금이 나왔을 수도 있다. 또 전에 살던 XX씨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가버리는 바람에 때마침 집이 비어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 할머니들의 대화를 통해 이곳이 한때 '뒷골목'으로 불렸다는 사실도 알았다. 정식 명칭이 'XX 골목'이라서 처음에는 'XX'를 비꼬아 '뒤'라고 부르는 줄로만 알았다. 
전학 간 중학교에서 친구가 된 T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아냐.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없을 걸."
분명 이웃들이 예전에 부르던 속칭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유래를 부정당한 나는 살짝 놀랐다. 'XX'와 '뒤'의 어조가 매우 닮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자 T는 살짝 주저하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 할머니가 자주 그랬어. '저녁에 그곳을 지날 땐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무나. 머리와 마음을 비워두고 있으면 뒤에서 뭔가가 쫓아올 테니...'라고."
 
- "어쩌면 그곳은 다른 차원과 연결된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
"응? 사차원 같은?"
"음... 오히려 전혀 다른 세계랄까. 그래서 저녁 중 어떤 시간대가 되면 골목과 그곳이 서로 연결돼버리는 거지. 근데 대부분의 사람은 알아채지 못해. 정신적으로 아주 무방비한 사람만이 우연히 다른 세계의 뭔가를 느끼는 게 아닐까. 그것과 파장이 맞는다고 할까..."
그때 분명 나는 매우 불안해하는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근데 어차피 옛날 얘기니까...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으니..."
T가 재빨리 부정해서 나도 조금은 안도했지만... 얼마 뒤 '뒷골목'의 공포를 몸소 체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전학 오고 나서 한 달 반 정도가 지난 늦가을 어느 금요일, 오후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가까스로 수업은 들었지만 방과 후 독서 동아리 활동에 빠지고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아마 머리에서 열도 났던 것 같다. 짙은 안개가 들어찬 것 같은 무겁고 흐리멍덩한 머리를 부여잡고 홀로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발걸음이 무거웠던 게 꼭 열 때문만은 아니다. 어젯밤 화장실에 가다가 부모님의 말다툼 소리를 우연히 엿들은 나는 우리가 XXX에서 야반도주나 다름없이 이사 왔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뭔가 부득이한 사정이 있는 줄은 알았다. 하지만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는 것과 심각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접하는 건 천양지차이다. 어쩌면 그런 정신적인 충격이 하루 사이에 천천히 몸에 악영향을 끼쳐 결국 발열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났을 수도 있다.
온몸의 진이 빠진 나는 다리를 질질 끌듯 걸으며 새로운 우리 집으로 향했다.

- 이사한 집과 인접한 골목은 시내를 동서로 가로질러 뻗어 있다. 교토에서는 남북으로 뻗은 거리를 '아가루 上ル' 또는 '사가루 下ル'라고 표현한다. 북쪽이 '아가루'이고 남쪽이 '사가루'이다. 그에 반해 동서로 뻗은 거리는 '이루 入ル'라고 표현한다. 우리 집은 XX골목 동쪽 끝에 있었고, 내가 다니는 중학교는 집의 남서쪽에 있었다. 즉 나는 매일 골목 서쪽에서 'XX 거리 아가루 XX 골목 이루'인 우리 집을 향해 귀가하는 셈이었다.

 

- 그날 나는 점차 짧아지는 석양을 등으로 맞아가며 평소처럼 좁은 골목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오는 도중의 기억이 무척 모호하다. 학교에서 T의 배웅을 받았고, XX거리에서 검은 고양이를 발견했던 건 기억한다. 그리고 곧 또다시 이사를 가야겠지... 하는 비참한 기분에 휩싸였던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하굣길에서 접한 거의 모든 풍경이 안개 낀 것처럼 부연 데다가 그밖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몽롱하니 확실치 않다.
어쨌든 나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한 상태로 XX 골목에 접어들었다.

- 얼마나 걷고 나서야 위화감을 느꼈을까. 우선 주위가 매우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골목에 접어들면 XX 거리를 달리는 차들이 내는 소음이 줄어 그곳이 정말 교토 시내인지 의심될 만큼 정적에 휩싸이곤 한다. 하나 그렇다고 쳐도 이건 너무 고요하지 않은가. 마치 이른 새벽이나 한밤중 같다고 느끼면서도 문득 '아냐, 만약 아침이면 이웃집 사람들이 집 앞을 쓰는 소리가 들릴 테고, 밤이면 멀리서 달리는 차 소리가 들릴 텐데' 하고 생각한 나는 조금 전부터 골목이 완전한 무음 상태임을 깨닫고 무심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주위는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단순히 소리가 들리지 않는 수준이 아니다.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나를 제외한 모든 생명체가 교토 시내에서 소실된 것마냥 적막 그 자체이다. 
귀가 이상해졌는지 확인하려고 목소리를 내보자 잘 들린다. 손뼉을 치고 발을 굴러본다. 역시 잘 들린다. 아니, 그러나 범상치는 않았다. "아, 아아" 하는 내 목소리나 짝짝 치는 손뼉 소리,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전부 공허하게 울렸다. 흡사 밀폐된 어떤 공간 정중앙에서 홀로 소리를 내는 듯한...

 

- 10센티미터 정도 열었을 때,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여자가 바깥에 서서 웃고 있었다.
이럴 수가...


- 그때 갑자기 누가 왼팔을 움켜쥐는 바람에 비명을 내지르는 내 귓가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퍼뜩 정신을 차리니 앞쪽 방의 열린 장지문 사이로 할머니가 오른손을 뻗어 내 왼팔을 붙들고 있었다. 현관 미닫이문 쪽을 바라보니 문이 10센티미터 정도 열려 있다. 그러나 그 여자의 모습 대신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돌아왔다...


- 그때 할머니가 왜 내 왼팔을 붙들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그 여자에 대해 말하자마자 할머니는 몹시 당황하며 내게 자세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라고 다그쳤다. 그리고 아마 그 이야기를 부모님에게도 전한 것 같다. 그러나 그 뒤로 아무리 졸라도 할머니는 그날 이야기를 입에 담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지난 일이란다"라는 말만을 반복하며... 

- 그로부터 이 주가 지난 토요일, 우리는 XX의 XX으로 이사했다. 나를 배웅하러 온 T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그 여자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며, 그때 누구를 찾아왔던 걸까.

- 몇 년 만에 E씨의 체험담을 다시 접한 나는 어떤 의문을 떠올렸다. 원고의 마지막에 그녀는 다시 전학을 갔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취재했을 때 야카게 씨는 E씨가 아직 XX 골목에 산다고 했다. 이 기묘한 모순은 무엇을 의미할까.
덧붙여 여기까지 원고를 쓰는 동안 인터폰은 울리지 않았고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이제 괜찮을지도 모른다.
나머지는 이 원고를 읽은 독자 여러분 중 누군가의 집에 혹시 그 여자가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는지, 그게 궁금할 따름이다.

 

<뒷골목의 상가>



- 이것은 필자가 몇 년 전에 체험한 이야기이다.
어느 찻집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가까운 자리에 앉은 젊은 남녀 중 여자 쪽이 갑자기 이상한 말을 입 밖에 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평범한 대화를 나눴으므로 굉장히 놀랐다. 처음에는 같이 온 남자와 말싸움이라도 하는가 싶었는데, 왠지 조금 달랐다.
호기심이 동해 계속 책을 읽는 척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여자가 자신이 다니는 헬스클럽에서 마주친 어떤 남자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즉 여자는 그 남자와 얼굴을 맞대고 욕설을 퍼부었다는 이야기를 같이 온 남자에게 털어놓는 중이었다. 
평상시라면 그쯤 해서 흥미가 사라질 법한데 그때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 여자가 남자에게 퍼부었다는 욕설이 차마 들을 수 없는 방송 금지 용어를 가득 담은 악다구니인 동시에, 그 말투에서 명백히 여자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문제의 남자의 이름을 알기는커녕 단지 헬스클럽에서 마주친 것 말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생면부지의 타인임을 알아챈 탓도 있다. 

- 여자가 이상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곧바로 근처 자리에 있던 다른 남자 손님의 몸이 완전히 굳는 게 느껴졌다. 어느새 여자 주위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괴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나 역시도 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
이윽고 어떤 식으로 그 남자에게 욕설을 퍼부었는지 대강 설명을 마친 그녀는 마지막으로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그렇게 내가 저주를 내리니까, 그 남자, 바로 그다음 날 죽어버렸어."

- 기회가 생기면 또다시 이런 이야기들을 졸저에 담고 싶다. 그때까지 매력적인 괴담이 내 주변에 모인다는 조건이지만.
이건 사족인데, 첫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대까지 저주를 내리리라..."라는 말은 영화에나 나올 법한 대사 정도로 들려서 되레 진실성이 느껴졌다. 두 번째 이야기는 '재수가 없었다'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장본인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그저 연민이 느껴질 따름이다. 세 번째 이야기를 제삼자에게 듣는다면 분명 필자도 합리적인 생각 -부인의 바람이나 남편의 망각을 ... - 

 

<괴담 기담·사제 4 - 찻집 손님>



- 에도가와 란포의 단편 중 <거울 지옥>이라는 작품이 있다. 어느 날 대여섯 명이 모여 무섭거나 기묘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K라는 인물이 친구의 체험담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 어린 시절 그는 사물의 모습이 비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흥미를 느꼈다. 유리나 렌즈, 거울 등 종류를 막론하고 허상이 비치는 것이라면 무엇에든 마음이 이끌렸다. 그러다가 스스로 거울을 이용한 장치까지 만들고 거기에 기괴한 광경을 비추며 K를 놀래 주곤 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중학교에 진학했는데 물리 수업이 시작되면 그는 렌즈나 거울 이론에 심취했다. 그 결과 그전보다 더욱 기묘한 장치를 제작하는 일에 골몰했고, 일상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상을 나타나게 하며 혼자서 기쁨에 잠겼다.
그 후 자산가인 그의 부모가 연이어 세상을 뜬다. 유산을 마음껏 쓸 수 있게 된 그는 정원 한구석에 실험실을 세운 뒤 온갖 거울을 들여놓고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실험실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그는 정원에 유리 공장까지 짓고 그 안에서 터무니없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 그렇게 거울의 마력에 홀린 남자의 광기를 소름 끼치는 필치로 그린 괴기 단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란포의 작품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걸작으로 꼽는다. 집필 속도가 느리기로 유명한 란포가 하룻밤 사이에 완성한 작품인 만큼, 광기라고도 할 수 있는 남다른 열의가 밴 문장으로 남자의 악몽과도 같은 어떤 계획을 묘사하는 게 실로 훌륭한 시너지 효과를 발산하기 때문이다. 

 

- 남자의 '터무니없는 시도' 혹은 '악몽과도 같은 어떤 계획'이란 무엇이었을까. 아직 작품을 읽지 않은 이들의 흥을 깰 수 있으므로 공개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그 작품의 아이디어는 당시 어떤 과학 잡지에 실린 독자의 물리적인 의문이었다. 다만 그것이 <거울 지옥>이라는 걸작으로 승화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물론 란포의 뛰어난 작가적 재능 덕분이지만, 그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렌즈를 좋아했던 영향도 크다. 그런 취향은 그의 에세이 <렌즈 기호증>에도 언급되고 있고, 그 작품 말고도 <호반정 사건>이나 <누름꽃과 여행하는 남자> 같은 작품 안에서 때로는 탐정 소설 같은 장치, 때로는 환상적이고 탐미적인 장치로 거듭 그려진다.

- '현실은 꿈, 밤에 꾸는 꿈이야말로 진실'(란포가 평상시 자주 쓰던 말-옮긴이)이던 란포에게 현실 밤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변화무쌍한 환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거울이자 렌즈였으리라. 아니, 이런 서두로 시작했다고 이번 원고에서 란포를 다루려는 것은 아니다. 쓰려고 마음먹은 어느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놓으면 좋을지 고민하던 찰나에 문득 당시 기억이 떠올랐을 뿐이다.

- "거울 지옥..."
그 광경을 처음 접했을 때 무심코 내가 중얼거린 말이다. 그 덕분에 그 남자와 대화를 나누게 됐고, 지금부터 소개하려는 어떤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으니...


- 벌써 지금으로부터 십 년은 더 된 이야기이다. 교토에 있는 D 출판사의 편집자였던 나는 가끔 도쿄로 출장을 가곤 했다. 그날은 어째서 캡슐 호텔에 묵었는지 지금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당일치기 예정이 어긋났거나 늘 예약 없이 묵던 호텔이 만실이었다든지 하는 정도의 이유였으리라. 
술에 취한 기억은 있으니 직전까지 누군가와 술을 마셨던 건 틀림없다. 다만 어떤 일로 어디서 누구와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깨끗이 잊어버렸다. 분명한 건 오차노미즈 역 근처에 있는 캡슐 호텔에 들어가 1층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마치고 지정된 9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중앙 통로 왼편을 지나 거대한 누에고치처럼 보이는 캡슐이 주르르 놓인 방에 도착해 내가 누울 고대 로마 노예의 묘소 같은 좁은 공간에 짐을 던져놓고 곧바로 소변을 보러 화장실로 향한 것. 그렇다. 신기하게도 호텔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기억이 뚜렷하다. 

 

- 소변을 본 나는 복도 오른편에 설치된 세면실로 들어가고 나서 기겁했다. 화장실과 마찬가지로 직사각형 모양의 세면실 좌우에는 큼지막한 세면대가 다섯 개씩 놓였고, 세면대 앞에는 하나같이 커다란 거울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맞거울이 아닌가.

- 캡슐 호텔이 처음이었던 나는 그런 구조가 일반적인지 어떤지 알지 못했다. 일상생활 중 맞거울이 설치된 공간에 들어갈 기회 역시 드문 법이다. 게다가 다섯 개씩 늘어선 커다란 거울은 경계선이 어딘지 알 수 없을 만큼 꼭 달라붙어 있었다. 좌우의 벽 자체가 거대한 거울처럼 보일 정도였다. 따라서 세면실에 들어선 순간, 과장일지는 몰라도 그야말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앞에 내가 있고, 그 뒤에도 내가 있고, 눈앞의 내 맞은편에 내가 있고, 뒤에 있는 내 뒤에도 내가 있고, 그 맞은편, 또 그 맞은편, 그 맞은편의 맞은편에도 내가 있는... 그런 광경이 계속 이어진다. 끊임없이 이어진다. 영원히 이어진다.

 

- "거울 지옥..."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란포인가요."
갑자기 등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와 등골이 오싹했다.
조심스럽게 돌아보자 40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로 보이는 키 작은 남자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짧게 친 곱슬머리, 크고 반짝이는 눈, 작고 잘생긴 귀, 오뚝한 코, 얇은 입술이 동안이라고 할 만한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모여 있다. 호텔 최상층에 있는 목욕탕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유카타를 단정히 차려입은 모습이 말쑥해 보인다. 
그런데도 왠지 첫인상으로 '일그러진 남자'라는 단어가 뇌리에 떠올랐다. 결코 추남은 아니다. 아마 일부 여성들은 귀엽다며 선호할 만한 용모가 아닐까. 물론 그런 잘생긴 남자라서 반감을 느낀 건 아니다. 단순히 그저 왠지 모르게, 일그러졌다...라고 생각해 버렸다.

- 그런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남자는 갑작스럽게 말을 건 무례에 대해 사과하면서도 즐거운 표정으로 란포의 <거울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어쩌다 보니 맞장구를 쳐주는 처지가 됐다. 그러자 남자는 뒤이어 란포의 에세이 <괴담 입문>을 언급하는 것도 모자라 동서고금에 걸친 다양한 괴담 기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 이야기들을 싫어하지 않는 나는 어느새 캔 맥주를 한 손에 들고 남자와 통로에 있는 벤치에 궁둥이를 붙였다. 그렇게 투숙객들의 왕래가 뚝 끊긴 심야 시간에 남자와 둘이서 도란도란 기묘하고 으스스한 이야기들을 주고받게 됐다. 

- 몇 번째 맥주 캔을 비운 때였을까.
"맨 처음 이야기로 돌아갑니다만 거울이란 거, 무섭지 않나요?"
우리가 몸을 기댄 벽 건너편 즉, 맞거울이 있는 세면실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남자가 말했다.
"예로부터 점을 치는 도구로 쓰인 것도 다 거울이 지닌 신비성 때문 아닐까요."
내가 대답하자 남자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물을 쫓는 부적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병자가 있거나 죽은 사람이 나온 집에서는 오히려 불길한 물건으로 취급받았죠."
"거울이 병으로 쇠약해진 사람이나 생명체의 영혼을 비추지 않아서라고 어떤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흡혈귀가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는 속설도 녀석들의 영혼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닐까요."
남자는 종종 상당히 날카로운 통찰력을 드러냈다.

- "거울을 깨뜨리면 칠 년 동안 불행이 지속된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지역도 있더군요."
내가 이렇게 별생각 없이 이야기를 꺼낸 것만으로도 상대는 곧장 그야말로 벽을 치면 대들보가 울리듯 반응해 왔다.
"아아, 거울을 깨뜨린 자가 어린아이라면 그 집 아이 중 하나가 일 년 안에 죽는다는 그 얘기 말이군요."

 

내가 시간을 잊고 남자와의 대화에 열중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남자가 마술에 쓰이는 거울의 제작법을 설명할 때였다. 중세 마술사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가 남긴 기록 중 거울 표면에 어떤 주문을 쓰고 홀수 시간대에 십자로에 묻은 뒤 사흘째 되는 날 같은 시간에 다시 파내는 방법이었는데, 그때 절대로 거울을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고 한다. 
하나 그래서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거울을 마술에 쓸 수 없지 않은가. 그런 의문이 들어 물었다.
"인간이 보기 전에 먼저 개나 고양이가 들여다보게 하면 됩니다."
남자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해서 나는 호기심이 동해 다시 물었다.
"그럼 거울을 본 개나 고양이는 어떻게 되는 거죠? 아니, 그전에 왜 인간이 먼저 거울을 보면 안 되는 겁니까?"
그러자 갑자기 남자가 입을 닫았다. 그전까지 쉴 새 없이 떠들어댄 만큼 느닷없는 침묵이 어딘가 이상했다. 심지어 어떤 발작 같은 건 아닐까 당황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남자에게서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 그때 처음으로 중앙 통로가 오싹할 정도로 적막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물론 캡슐이 늘어선 커다란 방 쪽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화장실과 세면실도 마찬가지이다. 애초에 통로에서 짧은 복도로 향하는 투숙객을 한참 동안 한 명도보지 못했으니 당연하다고 할까...
문득 이 남자와 둘이 있는 지금 상황이 매우 무서워졌다. 그러고 보면 남자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왜 오늘 밤 이 캡슐 호텔에 묵게 됐는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했다. 
이 남자는 대체 누구인가?

 

- 별안간 한시라도 빨리 남자에게서 떨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을 빠져나가 욕탕에서 몸을 덥히고 그대로 잠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 이제 슬슬 자러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가볍게 말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러나 갑자기 고개를 든 남자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는지 그는 지그시 나를 바라봤다.
"맞거울의 오른쪽에서는 과거의 귀신이, 왼쪽에서는 미래의 귀신이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아십니까?"

- "들여다보면 안 되는데 들여다보고 만 남자의 일화가 있습니다."
"..."
"듣고 싶으신가요."
생각이라는 행위를 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남자는 자기 동생에게 일어났던 일이라고 운을 떼고는 차분하게 다음과 같은 으스스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 당신 손으로 돌봐야만 했던 할머니에게 얄궂게도 며느리가 남기고 간 꼴 보기 싫은 물건이 유모 역할을 톡톡히 한 셈입니다.
동생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뒤로도 친구들과 놀기보다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저녁밥을 먹기 전까지 혼자 경대 앞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뭔가 특별하게 노는 건 아닙니다. 경대에 붙은 작은 서랍을 여닫거나 머리핀을 여러 개 이어 붙이는가 하면 립스틱을 크레용 대용으로 쓰는 등 시시한 놀이가 많았죠. 
그 기묘한 세계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 어머니의 경대는 삼면경이었습니다. 가운데 거울 위에 먼저 왼쪽 거울을 덮고 그 위로 오른쪽 거울을 덮어 닫는 형태로, 세 장의 거울 위에는 하얀 천이 달려 있었죠. 
동생의 희미한 기억 속에서 화장하는 어머니는 마치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매우 엄숙했다고 합니다. 우선 정중하게 하얀 천을 거울 뒤쪽으로 넘기고 좌우 거울을 문을 여는 것처럼 서서히 연 다음 서랍에서 화장품을 꺼내 하나씩 늘어놓습니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화장을 시작하죠. 
동생이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주는 어머니를 보는 건 이렇게 화장할 때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통해서만이 아니었을까 하고 훗날 떠올릴 정도로 경대 앞에 앉은 어머니는 평소와 다르게 생기가 넘쳤습니다. 

- 갑자기 누가 호통을 쳐서 동생이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복도에 낯선 노파가 서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분은 저희의 큰할머니에 해당하는,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할머니의 언니였습니다. 오랜만에 동생 집을 찾은 김에 갓난아기 때 보고 못 본 체 동생도 만나고 가겠다며 동생을 찾던 중이었죠. 


- 큰할머니는 경대와 동생을 번갈아 바라보며 언제부터 맞거울을 들여다보게 됐는지 집요하게 캐물으셨습니다. 그것이 몇 달 전임을 알자 이번에는 매우 엄한 표정으로 "네 모습 말고 다른 걸 본 적은 없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동생은 바로 조금 전 자신이 본 얼굴에 대해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왠지 몰라도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고개를 가로젓는 동생을 보고 큰할머니는 언뜻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삼면경을 닫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잘 들으려무나. 이렇게 거울과 거울을 마주 보게 한 걸 맞거울이라고 한다. 근데 이건 절대 사람이 만들어서는 안 되는 공간이야. 알겠느냐? 거울 두 장을 꼭 맞붙이는 건 괜찮다. 하나 조금이라도 떨어뜨려서 두 장 사이에 틈을 만들면 안 돼. 하물며 거울과 거울 사이에 사람이 들어가선 절대 안 되지." 
차분한 말투에 반해 큰할머니의 말에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박력이 느껴졌습니다. 매우 중대한 경고를 듣고 있다고 동생이 어린 마음에도 깨달았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동생도 왜 안 되는 건지 물었겠죠. 

- "... 귀신이 찾아오니까."
거의 일순간이었지만 사십 몇 번째 거울 속 거울집의 건너편 세계에서 보인 얼굴이 동생의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무표정한 아이의 얼굴이었습니다. 이쪽을 정확히 응시하는 묘하게 창백한 남자아이의 얼굴이었습니다.

 

- "맞거울의 오른쪽 세계는 과거로, 왼쪽 세계는 미래로 통하는데...."
동생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큰할머니는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그걸 가만히, 오랜 시간에 걸쳐 들여다보면 찾아온단다."

"귀신이..."
“그래. 오른쪽에서는 그 사람을 뒤쫓아 과거의 귀신이, 왼쪽에서는 그 사람을 찾아 미래의 귀신이 오는 게지."
"만약 오른쪽 귀신한테 붙잡히면..."
"거울 세계로 끌려가 그 사람의 과거에서 가장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사건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다시 체험하게 된단다. 알겠느냐? 지금껏 불쾌하다고 느낀 것들과 똑같은 행동을 평생토록 영원히 계속해야 하지." 

- 수염이 자라 대학생이나 사회인의 얼굴로 보이다가 지금은 20대 후반, 아니 30대로 접어들었을까요. 가까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커지며 조금씩 나이를 먹고 늙어가다가 마침내 얼굴이 그 얼굴이, 얼굴이... 
뭐야?
이게 대체 뭐지?
현재 나 자신의 얼굴로 변화해 버린, 이 얼굴은...?

- 좀 더 빨리 알아채야 했습니다. 제일 처음 나타난 얼굴은 네 살 무렵의 자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거울 속의 자신은 마흔일곱이 된 자신으로 성장하려고 합니다.
불쑥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다시 불쑥 나타난 얼굴... 
바로 코앞까지 얼굴이 다가옵니다.
이제 거울의 세계도 몇 장 남지 않았습니다.
아아, 옵니다!
온다! 그 얼굴이...

- 불쑥 첫 번째 거울집 건너편에서 나타난 얼굴은, 바로 조금 전 눈앞의 거울에 비친 마흔일곱이 된 수척한 자신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거울에, 제일 처음 얼굴이 나타나고 나서 마흔일곱 번째인 거울에 비친 얼굴은... 
ㅡ한 얼굴이었습니다.

<맞거울의 지옥>



- 그 남자에게 사상은 보이지 않았다.
사시한 결과 의뢰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발견되지 않으면 슌이치로의 입에서 나오는 대사는 정해져 있다.
"돌아가시겠습니까?"
올봄, 도쿄 진보 초에 있는 우부스나라는 낡은 빌딩에 문을 연 '쓰루야 슌이치로 탐정 사무소' 사무실에서 조속히 퇴장해 주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 그러나 '이누마'라고 이름을 밝힌 젊은 남자 앞에서는 왠지 평소처럼 말이 나오지 않는다. 사시를 실패했을 수도 있어 '본다/보지 않는다' 전환을 여러 번 했지만 역시 눈앞의 남성에게 죽음의 그림자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군...

그런데도 슌이치로는 사무실 입구에 우뚝 선 이누마에게서 새카맣고 터무니없이 불길한 무언가를 느꼈다. 게다가 문제의 무언가는 오랜 세월 슌이치로가 마지못해 접해온 '죽음' 그 자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슌이치로는 타인에게 나타나는 사상을 볼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지녔을 뿐이다. 영감 靈感 따위는 전혀 없다.
슌이치로는 이를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일종의 격세유전(생물의 성질이나 체질 따위의 열성 형질이 한 세대나 여러 대를 걸러서 나타나는 현상-옮긴이)으로 해석했다. '아이젠 님'이라 불리며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할머니는, 이른바 무녀이다. 상담을 받으러 전국에서 나라의 안라 마을로 사람들이 몰려올 정도로 이쪽 세계에서는 유명인이다. 


- 할머니는 평범한 사람에게는 없는 다양한 특이 능력을 지녔다. 그래서 예로부터 그녀를 떠받들며 교주로서 숭배하려는 이들, 영매로서 텔레비전 출연을 종용하는 이들, 점집 동업을 제안하는 사람 등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어떤 제의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저 평범한 무녀일 뿐." 
그러고는 언제나 평범한 서민들을 상대하며 그들의 문제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 태도가 할머니의 인기를 더욱 높이는 ... 

 

- 광적인 애독자를 거느린 괴기 환상 작가 쓰루야 슌사쿠가 바로 그이다. 자신을 길러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 년 동안 조부모를 곁에서 돕던 슌이치로에게 상경을 권한 사람도 할아버지였다. 심지어 탐정 사무소를 개업할 빌딩까지 알아뒀다는 말에는 슌이치로도 깜짝 놀랐다. 

 

- 조부인 쓰루야 슌사쿠는 소설 집필 말고도 목표로 하는 필생의 사업이 있었다. 손자가 본 사상을 수집해 분류와 분석을 거친 뒤 그것을 연구한 '사상학'이라는 서적을 저술하는 일이다.
단순히 사상이라고 해도 슌이치로가 의뢰인에게서 보는 죽음의 그림자는 그 형태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애초에 인간의 죽음을 초래하는 원인이 자연사, 병사, 사고사, 자살, 타살처럼 여러 갈래로 나뉘는 만큼 그 양상에 변화를 보이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타살 하나만 놓고 봐도 보험금 살인의 피해자가 될 사람과 무차별 살인의 희생자로 선택될 사람은 당사자에게 떠오르는 사상의 '표현'이 엄연히 다르다. 
슌이치로의 임무는 의뢰인에게 보이는 사상을 해석해서 가까운 미래에 그를 찾아올 '죽음'의 원인을 밝혀내 방지하는 일이다.  
 
- "폐사에서 혼자 생활하는 것도 모자라 학교까지 다닌다니 예닐곱 살 아이한테는 무리 아냐?"
가이즈카가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자 요코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린 건 어떤 녀석인데?"
"야야, 그런 걸 알 수 있을 리 없잖아. 닉네임이 '갓파(물속에 사는 어린애 모습을 한 상상의 동물-옮긴이)의 꼬리'인 걸 보면 아마하도 근처에 살지 않을까 하는 것 말고는."
요코카와가 면박을 주자 가이즈카는 얼굴을 붉힌다. 그러나 이누마는 왜 자신이 이 이야기에 반응하는지 신경이 쓰여 견딜 수 없었다.
"그 여자애... 왠지 묘하게 마음에 걸리는데."
"너도 인터넷에서 본 거 아냐?"
"아니, 아냐."
이누마가 부정하자 가이즈카는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이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래서 그 애가 실은 유령이었다는 이야기?"
"글쎄. 어떨까. 근데 아주 인상적인 아이라고... 뭐였지? 오드 어쩌고인데, 그 양쪽 눈 색이 다른..."

- "... 아, 아니다. 얼굴에 해당하는 부분에 눈처럼 움푹 파인 구멍이 하나 있었대."
"외눈박이인가."
"그럴지도. 어쨌든 여자애는 보이지도 않고, 왠지 무서워져서 집으로 돌아갔대. 그날 밤, 그 애가 찾아왔다고..."
"'갓파의 꼬리' 집에?"
"응. 집 창밖에 그 아이가 서서 '놀러 왔어'라고..."
그 순간 이누마의 양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날부터 매일 밤, 그 아이가 왔다고 해."

-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게시판에서도 꽤 인기를 끌었지만 '엉터리 소설 집어치워!'라는 비판도 많았어. 그런 와중에 '갓파의 꼬리'의 글도 서서히 줄더니..."
"뭐야, 그렇게 끝?"
"아니, 그러다가 어느 날 '거드름 피우지 말고 그 아이를 들여봐'라는 도발에 '오늘 밤 그 아이를 방에 들이겠습니다. 보고는 내일'이라는 대답이 올라왔어."
"그래서?"
"그 글이 마지막이었지... 그 뒤로 '어떻게 됐지?', '누가 좀 가르쳐 줘'라는 글들이 몇 개 올라오긴 했는데, 결국 그대로 아무것도... 문제의 사찰을 찾아서 조사했다는 녀석도 나왔 ... " 

- "크으, 이걸 올라야 해?"
정문을 들여다본 가이즈카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이누마도 따라서 들여다보니 좁은 돌계단이 위를 향해 끝없이 뻗어있다.
"너, 이런 돌계단이 있다고는 안 했잖아."
"그랬나?"
툴툴대는 가이즈카에게 요코카와가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곧바로 의아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이, 뭐 해? 얼른 내려."
이누마가 돌아보자 이와세가 아직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야?"
차로 돌아가는 요코카와를 보고 이누마도 뒤따른다.

"여기서 기다릴게."
운전석의 열린 창문 너머로 이와세가 대답했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차 안에 있겠다고?"
"여기서 기다릴게."

- 그러나 이와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야! 그런 겁쟁이는 그냥 놔두고 얼른 가자!"
정문에서 얼굴을 내민 가이즈카의 재촉에 요코카와도 포기했는지 더는 권하지 않고 차에서 떨어졌다. 이누마도 어쩔 수 없이 뒤따랐지만 도중에 돌아보니 창문을 닫는 것도 모자라 도어록을 확인하는 이와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기분이 매우 찜찜했다.

- 두 사람이 정문으로 들어서니 손전등을 손에 든 가이즈카가 이미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갓파의 꼬리'란 녀석, 아까 그 마을에 사는 고등학생이 아닐까."

- "그 여자애를 만났어?"
"그러니까 그런 여자애는커녕 갑궤나 상자도 없었다니까."

말을 가로막힌 요코카와가 퉁명스럽게 되받아쳤다. 그러나 이와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만났어?"
"너, 대체 무슨..."
"그 여자애를 만났어?"
그제야 가까스로 세 사람은 질문이 이누마에게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 백미러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와세에게 이누마가 고개를 가로젓자 요코카와가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뭐야 대체? 너희 뭔가 숨기고 있지? 그래, 맞아. 이누마는 정확히는 몰라도 뭔가가 마음에 걸린다고 했어. 그럼 이와세, 넌 뭔데? 시치미 떼지 말고 빨리 불어."
"기억 안 나?"
이와세가 또다시 뒷좌석을 향해 물어온다.
"뭐가?"
"우리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때 전학 온 여자아이..."

그 순간, 이누마의 머리가 찌릿했다.
"한없이 새하얀 피부에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아직 어린데 ... "

- "오면 안 된다고... 경고해 주더군요. 그러다가 어제 다시 세 사람이 찾아왔는데... 그럴 때 이와세는 아무 말 못 하고 두 사람을 따르기만 해서요. 그래서 왠지 조만간 끌려갈 것 같은 기분에..."
"그러는 편이 낫겠군요."
"네? 뭐, 뭐라고요!"
슌이치로의 말에 이누마가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아마 반대일 겁니다."
"네? 반대라니..."
"제 말은 곧 죽은 건 세 사람이 아니라 당신 혼자라는 소리입니다. 아니, 아직 죽진 않았군요. 사고 이후로 의식 불명 상태가 계속되자 무사한 세 사람이 당신을 부르는 거죠. 죽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 그럼 이와세는..."
"물론 서로의 입장이 바뀌면 그 말의 의미도 완전히 반대가 되겠죠."

- "넋, 영체, 영혼, 생령,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지만, 어쨌든 다시 당신 몸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군요. 그렇게 방황하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누마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슌이치로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번 건넨 뒤 그대로 묵묵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모습을 드러냈는지 그런 이누마를 배웅하는 것처럼 책상 옆에 보쿠가 앉아 있다.
"사상이 보이지 않는데도 묘하게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졌어. 상대가 거의 죽은 자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렇게 중얼거리자 보쿠가 야옹 하고 대꾸했다.

- 병원으로 돌아간 이누마가 목숨을 구했는지 슌이치로는 알지 못한다. 굳이 확인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만약 그가 죽었다면 다른 세 사람에게 사상이 나타나지는 않을지, 그리고 이번에는 이누마가 그들을 부르지는 않을지 냉정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죽음이 으뜸이다: 사상학 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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