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미쓰다 신조 / 이연승
출판 : 레드박스
출간 : 15.08.23
미쓰다 신조의 작품은 여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다는 느낌이다.
초가을이나 겨울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사우의 마>도 그렇고 <사관장>, <백사당>도 그렇고 <노조키메>나 <죽은 자의 녹취록(구판 괴담의 테이프)>도 그렇고 주 무대는 여름이 많다. 아무래도 오봉이 있기 때문일까.
<사우의 마>는 <사상학 탐정 시리즈>의 2권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후로도 동 시리즈의 뒷 이야기들이 꾸준히 발표되고 있으나 한국에 정식 번역 출간되지는 않고 있는 상태. <도조 겐야 시리즈>나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가 비채 출판사와 김영사에서 긴 텀이라도 발간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라리다.
아무래도 <사상학 탐정 시리즈>는 호러보다는 추리에 더 중심이 맞춰진 작품이라 미쓰다 신조의 팬들 사이에서도 취향이 갈리기 때문인 것 같은데... 주인공 쓰루야 슌이치로의 조부모 이야기에 해당하는 <괴민연 시리즈>가 리드비 출판사에서 얼마 전 정발되었으니... 기대를 걸어본다.
<사우의 마>는 1권 <13의 저주>와는 달리 쓰루야 슌이치로가 중반 이후에나 등장한다. 자신만의 삶을 걷기로 결심하고 전공을 바꿔 국문학과로 편입한 이리노 덴코의 시점에서 오컬트 호러 동아리인 '백괴 클럽'과 그 활동에 얽힌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이들이 괴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슌이치로에게 의뢰하며 조우하게 된다.
뒷 이야기를 읽지 못해 짐작만 해보자면.
1권과 2권 모두 의뢰인들은 묘하게 다른 작품들과의 연결점을 가진다. 영매나 점술사 가계라거나, 국문학과라거나- 덴큐 마히토와 도쇼 아이를 연상하게 하는 설정이 있어서, 어쩌면 연속으로 등장하는 히로인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각 권마다 다른 인물이 등장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마가리야 형사가 다시 등장하는 걸 보면...?)
즐겁게 읽었다.
- 이리노 덴코(入埜転子)가 '백괴(百怪) 클럽'에 가입한 것은 그녀의 희귀한 이름 탓이었다. 적어도 조금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겪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만...
- "오, 쓰치코로비의 아이인가?"
덴코가 조호쿠 대학 학생 기숙사 월광장 2층 205호에서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열어 둔 문 너머 복도에서 기묘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응? 여긴 여자 기숙사인데...
이삿짐 상자에서 고개를 들어 조심조심 복도 쪽을 살폈다.
"안녕. 잠깐 실례할게."
늘씬한 키에 제법 잘생긴 남자가 느닷없이 문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뭐예요?"
"기숙사 반장 도무라 시게루(戸村茂)라고 해."
- "이번에 문학부 국문학과 2학년에 편입한 이리노 덴코라고 해요."
덴코의 인사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시게루는 도통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성이 이리린 맞지? 이름은 쓰치코로비코라고 읽어?"
"네?"
"아니, 만약 도덴시라는 말도 안 되는 발음으로 읽는다고 해도, 이건 누가 봐도 '쓰치코로비의 아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할 거야."
- 손짓을 하기에 복도로 나가자 시게루가 205호실 이름표를 손으로 가리켰다.
유심히 보니 상당한 악필 탓에 '入埜転子'라는 세로 글씨가 '入林土転子'로만 보였다. 성인 '入埜'이 '入林'으로 돼 있다. 그렇다면 이름이 '土転子'라는 말인데, 이것을 대체 어떻게 읽어야 할까.
- "쓰치코로비라니, 싫어요."
그제야 뒤늦게 덴코는 불안해졌다.
도무라 시게루는 자신을 반장이라고 소개했지만 아마 남자 기숙사 쪽일 테고, 이곳은 여자 반장이 따로 있지 않을까. 왜 굳이 여자 기숙사에 있는, 그것도 편입생의 방을 찾아온 걸까. 심지어 처음 보는 상대에게 기괴한 별명까지 붙이려고 한다.
조금 이상한 사람일지도...?
- 덴코가 살짝 주춤하자 시게루가 또다시 엉뚱한 말을 꺼냈다.
"쓰치코로비라는 요괴가 꼭 못된 녀석은 아니야."
"네?"
"오히려 사랑스러운 존재일지도 몰라."
"아,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요..."
- "그렇지, 겐타로?"
시게루가 복도 쪽을 향해 말하자 그와는 대조적으로 통통한 남학생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행자가 산길을 내려가고 있으면 뒤에서 뭔가가 따라온다더군. 그래서 무서워져서 달음박질 치면 와라우치쓰치(짚을 부드럽게 만들 때 쓰는 망치-옮긴이) 같은 게... 아, 그게 뭔지 모르려나? 아무튼 그렇게 생긴 게 굴러 내려온대. 나는 상상이 잘 안되지만."
"저어."
"아, 미안. 그래서 그게 여행자를 앞질러 가서 산길 아래에서 기다린다고 해. 그런데 그 옆을 지나간다고 해서 해코지를 하는 건 아니야. 오히려 그걸 피해 가면 산속에서 길을 잃게 되지. 그게 바로 쓰치코로비."
- "그래서 '쓰치(土)코로비'라고 쓰기도 하고 '쓰치(樞)코로비'라고 쓰기도 해."
매우 즐거운 표정으로 한자를 설명하는 인물을, 시게루는 건축학부 건축학과 3학년 다자키 겐타로(田崎健太郞)라고 소개했다. 참고로 시게루도 그와 같은 학부라고 한다.
"덴코라는 이름도 특이하긴 하네."
시게루가 감탄했다. 쓰치코로비의 아이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하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 덴코라는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줬다. 덴코가 태어나기 직전, 할아버지는 어느 골동품 가게에서 인도에서 신으로 모시는 '전륜왕'의 상을 구해 왔다. 전륜왕은 하늘에서 금, 은, 동, 철 등 네 가지 윤보(수레바퀴 모양의 보물로 이것을 굴려 모든 장애를 물리친다-옮긴이)를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데, 그 신의 이름 중 한 글자를 따서 '덴코'라고 지었다고 한다.
- 덴코는 시게루의 설명을 들어도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건축학부는 조호쿠 대학 유일의 엘리트 학부라는 평판을 듣고 있다. 실제로 건축학부에는 편입한 학생을 비롯해 이미 다른 대학에서 같은 학부를 졸업하고 다시 들어오는 학생도 많다. 조호쿠 대학에서 건축을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덴코처럼 문학부 국문학과에 편입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고, 덴코는 자신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했다.
- "나는 거의 이름 그대로였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보통은 성인 '이마가와'랑 이름인 '히메'를 띄어 쓰잖아. 그런데 이름표에 '이마' 띄고 '가와히메'라고 적히는 바람에 도무라 선배가 시끄럽게 군 거야."
"응?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다자키 선배 말로는 강가에만 나타나는 '가와히메'라는 요괴가 있다더라고. 젊은 남자가 접근하면 정기를 빨아들이는 미녀 요괴래."
"그래? 예쁜 요괴인가 보네. 난 쓰치코로비야..."
덴코가 불만스럽게 말하자 히메는 웃음보를 터뜨렸다.
"어차피 둘 다 요괴인 건 마찬가지야."
- 이리노 가는 교토에서 몇 대에 걸쳐 화과자점을 경영하고 있다. 외동딸 덴코는 어린 시절부터 장차 신랑을 얻어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렇게 세뇌를 당한 탓인지, 대학도 부모가 원하는 사립 여자 대학 중 집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의 전문대학 가정학부 식품영양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거기서 덴코는 평생지기가 될 인물을 만났다. 바로 '간사이의 호텔왕'이라 불리는 덴마지(天満路) 가의 지히로(千尋)다. 두 사람은 자라온 환경이 서로 비슷해 금세 의기투합했고, 반년도 채 되지 않아 뜻밖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모가 정해 준 인생에 대해 의문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주위에서 보면 '대학생이나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수준의 이야기겠지만, 두 사람은 그제야 자아에 눈을 뜬 셈이다. 자신이 정말로 배우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덴코와 지히로는 매일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 그 결과, 덴코는 도쿄에 있는 조호쿠 대학 문학부에, 지히로는 교토에 있는 가모가와 여자 대학 문학부에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같은 문학부라도 덴코는 국문학과, 지히로는 철학과를 지망했다.
- 그녀들의 결심에 양가는 발칵 뒤집혔다. 단호히 반대하며 학교를 옮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덴코 혼자였다면 순순히 부모의 말에 따라 그대로 전문대학을 졸업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덴코 곁에는 덴마지 지히로가 있었다. 그것은 지히로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각자의 부모에게 반항하며 자신들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부모들은 끝까지 외동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멋대로 학교를 옮기면 학비와 생활비를 끊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두 사람 다 아무런 부족함 없이 자라왔으니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부모들의 크나큰 오산이었다. 덴코와 지히로는 둘 다 가진 돈이 적지 않았다. 두 사람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부모들이 사 줬고, 자연히 용돈과 세뱃돈을 쓰지 않고 저축할 수 있었다. 또 두 사람이 지망한 대학에는 학생 기숙사도 있었다. 언젠가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테지만 당장은 학업과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결국 양가 부모들은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마음대로 해도 좋지만 졸업 후에는 고향으로 내려와 언젠가는 결혼해 가업을 잇는다는 조건으로 두 사람의 소원을 들어줬다.
덴코와 지히로는 대학을 졸업하고 얌전히 고향에 내려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부모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척한 것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이번 소동을 겪으며 그만큼 강해진 것이다.
-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나와는 대조적으로 한층 더 미소가 밝아진 히메가 물었다.
"악마라도 부르시려는 건가요?"
"이마가와, 장난에도 정도가 있어! 부장한테 실례잖아."
"오, 제법 예리한데."
후배에게 화를 내던 가나를 비롯해 당사자인 히메, 그리고 덴코도 '설마' 하는 표정으로 시게루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악마를 소환하는 의식이라도 치르겠다는 거야? 뭐 나름대로 재미있을지도 모르지만..."
처음에는 다소 어이없어하던 가나가 시게루의 제안이라면 반대하지 않겠다는 듯 삽시간에 목소리를 낮췄다.
- "애초에 의식 자체가 서양 건데 이런 동양의 섬나라에서, 하물며 백괴 클럽처럼 시시껄렁한 집단이 치른다고 정말 효과가 있을까요?"
덴코가 염려했던 대로 또다시 문제성 발언이 튀어나왔다.
"문화권이 전혀 다른데도 통하겠냐는 의미인가..."
그런데 시게루는 미소를 지었다. 히메의 공격이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었다. 그래서인지 가나도 쉽사리 화를 내지 못하고 히메를 노려보기만 했다.
"네. 저는 악마를 소환한다고 해도 기독교 신앙이 전제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과연, 배경이 문제로군."
"네. 그런 환경에 대해 백번 양보한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주문 자체를 읽지 못하잖아요."
"호오, 그건 왜지?"
"왜냐니요, 부장님! 우리는 일본인이라고요. 아무리 혀를 굴려도 원어민 같은 발음은 불가능해요. 더욱이 주문 같은 건 도무지 무리예요."
"주문이 반드시 영어라는 법은 없어."
겐타로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히메의 화살이 그를 향한다.
"그렇다면 더욱더 그렇죠. 어느 나라의 어느 시대의, 어떤 사람들이 사용했는지도 모르는 언어를 저희가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뭐, 적당히 중얼거려도 악마를 불러낼 수 있다는 건가요?"
- "이마가와가 지적한 대로 기독교 문화권이 아닌 지역에서 시도하는 악마 소환 같은 건 원래 가당치도 않아."
"역시 다자키 선배! 확실히 말씀해 주시니 속이 시원해요."
이때 시게루가 천천히 말을 보탰다.
"그렇다면 그런 주문 같은 걸 외지 않아도 효력이 있는 의식이 있다면 어떨까?"
시게루는 히메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가나에게, 뒤이어 덴코에게 돌리며 말을 이었다.
"실은 이 이야기를 하려고 뒤풀이를 마련한 거야. 백괴 클럽의 여름 방학 특별 기획으로, 월광장에 남은 우리끼리 '사우의 마(四隅の間)'라는 의식을 치러 보면 어떨까 해서."
- "뭐예요, '요소미('四隅'의 일본어 발음은 '요스미'로, 곁눈질을 뜻하는 '요소미(よそ見)'와 발음이 비슷하다-옮긴이)의 마'라는 게?"
"히메, '요소미'가 아니야. 네모난 방의 네 귀퉁이를 뜻해. '마'는 '마도리(間取り 방 배치-옮긴이)'의 '마'고."
시게루는 미소 지으며 정정했지만 덴코는 가나가 폭발 일보 직전인 것이 느껴졌다.
- "이건 일종의 악마소환 의식이야."
곧이어 겐타로가 기세 좋게 떠들기 시작했다.
"흔히 말하는 흑마술이지. 정사각형 방의 네 귀퉁이, 쉽게 설명하기 위해 그곳을 각각 A, B, C, D라고 치자. 눈을 가린 사람을 A에 두 명, B, C, D에 각각 한 명씩 배치하고 나서 방에 불을 끄고 캄캄하게 만들어. 그러고는 A에 있던 둘 중 하나가 B까지 가서 B에서 대기 중인 사람을 터치해. 그러면 B에 있던 사람이 C로 가서 역시 C에서 대기하던 사람을 터치하고, C에 있던 사람은 D로, D에 있던 사람은 A로 똑같이 이동하는 거야. 그럼 이 D에 있던 사람이 A에 갔을 때 A에 있는 사람은 처음에 있던 두 사람 중 남은 한 명이 되겠지? 이 사람을 a라고 치면, a가 B로 갔을 때 그곳에 있는 사람은 제일 처음 이동한 A일 거야."
겐타로는 지금까지의 설명을 나머지 세 사람이 이해했는지 각각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다음은 B에 가 있던 A가 C에 있는 B한테 가는 거야. 그런 식으로 반복하면 정사각형 방 네 귀퉁이를 다섯 명이 영원히 빙글빙글 돌 수 있어."
"응? 왠지 어디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히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겐타로가 즉시 반응했다.
"옛 괴담 중에 '설산의 조난'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기본적인 얼개는 같아."
- "하지만 선배, 아니, 차장님! 로슈타인의 회랑은 처음부터 다섯 명이잖아요. 별로 이상할 건..."
"분명 그래. 이대로라면 다섯 명이 끝도 없이 돌기만 할 테니까. 그런데 거기서 사전에 로슈타인 경과 입을 맞춘 한 사람이 적당한 때에 그 다섯 명의 고리에서 빠져나왔어. 회랑이니 고리라는 표현은 조금 이상하지만."
"한 명이 빠지면 순환의 고리도 끊어졌겠네요."
"그런데도 회랑 안에는 계속해서 귀퉁이를 도는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해."
입을 다물어 버린 히메 대신 이번에는 가나가 입을 열었다.
"그거, 실제로 있었던 일이야?"
"응. 로슈타인 경은 악마를 소환하는 흑마술이 엉터리라는 걸 증명하려고 이런 실험을 했어. 그런데 성공해 버린 거야.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진짜 악마가 나타났다며 패닉에 빠졌고."
이번에는 히메와 덴코뿐 아니라 가나도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겐타로는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조금 미심쩍기는 해."
"응? 왜?"
"흑마술은 원래 숨어서 하는 법이거든. 그런 걸 체면을 중요시하는 귀족이 일부러 공개적으로 했다는 게 무엇보다 미심쩍 ... "
- "서양에는 이와 비슷한 '스퀘어'라는 강령술이 있으니 그럴지도 모르지. 스퀘어, 즉 사각형이라는 뜻이야."
"그렇구나."
"다만 오헤야사마는 지어진 지 수백 년도 더 된 오래된 집에서만 나타난다고 하니, 그런 의미에서는 자시키와라시(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오래된 집 툇마루에 나온다는 일본의 요괴-옮긴이) 쪽에 더 가까우려나."
"듣고 보니 분명..."
"여담이지만 오오쿠(에도 막부 시절 쇼군의 부인, 하녀들이 거처하던 곳-옮긴이)에서는 첩실이 남자아이를 출산하면 특별히 전용 별실을 하사 받고 오헤야사마라고 불렸다고 해. 뭐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덴코는 그런 것까지 조사하는 사람은 다자키 겐타로밖에 없을 거라며 무심코 감탄했다.
- "그 밖에도 '스미노바사마'라는 의식도 있어."
겐타로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불을 끈 캄캄한 방 안 네 귀퉁이에 네 사람이 방 가운데를 바라보고 앉아. 그러고는 방 가운데를 향해 저마다 기어가는 거지. 가운데에서 네 사람이 만나면 제각각 손을 더듬어서 상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첫 번째 스미노바사마', '두 번째 스미노바사마', '세 번째 스미노바사마', '네 번째 스미노바사마'라고 숫자를 세. 그런데 아무리 세어도 머리는 모두 다섯 개래."
-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슬슬 때가 됐다고 판단했는지 시게루가 활동 일정을 발표했다.
"그럼 다음 클럽 활동은 8월 1일로 할게. 활동 내용은 사우의 마 실험, 장소는 월광장 지하실, 집합은 홀 담화실, 시간은 밤 10시를 반드시 지켜 줬으면 해. 물론 저녁밥은 각자 먹고 와야 하고, 활동 전 음주는 금물이야. 모쪼록 다들 무단결석은 하지 않도록."
그때 히메가 퍼뜩 숨을 죽였다.
하지만 대체 뭣 때문에?
- "왜 하필 지하실에서 사우의 마 같은 의식을 치르겠단 거야?"
"정 못 하겠으면 유령 부원한테 부탁해도 되잖아."
가나도 여름 특별 활동 참가를 망설이는 듯하다. 이제까지는 시게루의 제안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덧붙이자면 유령 부원이란 올 5월 월광장에 들어온 경제학부 경제학과 1학년 하타케야마 가히토(畑山佳人)를 뜻한다. 다행히 요괴와 비슷한 이름이 아닌 데다가 방문 이름표를 쓰는 업무가 악필인 사감에서 달필인 다카코 씨로 옮겨 간 덕분에 처음부터 이름이 틀릴 일도 없었다. 그래도 시게루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그를 백괴 클럽에 끌어들이려 했다. 이유는 가히토가 잘생겼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여자 부원 확보를 위한 부장의 원대한 계획이다.
그러나 당사자는 딱 잘라 거절했다. 다만 그가 기숙사생이고, 클럽 활동이 주로 홀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눈에 자주 띄었다. 또 시게루의 교묘한 말에 설득당해 몇 번인가 활동에 참가한 가히토는 어느새 유령 부원으로 불리게 됐다.
- 덴코는 고향에 있는 부모에게 올여름은 양과자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 뒀다. 이럴 때는 어디서 아르바이트를 하느냐가 관건이다. 덴코는 부모가 '우리 아이가 장래에 화과자점을 이으려고 양과자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생각할 게 틀림없으리라 계산했다.
작전은 멋지게 들어맞았다. 역시 덴마지 지히로다. 이건 지히로가 알려 준 꾀였다. 덴코는 지금도 주에 한 번꼴로 지히로와 통화했다. 백괴 클럽 활동에 대해서도 알려 주자 지히로는 자기도 들어오고 싶다고 할 만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때 여름방학에 고향에 내려가지 않을 방법을 함께 고민했다.
- 다만 지히로도 히메와 가나의 기묘한 반응이 왠지 수상쩍은지 덴코에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다.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쳐."
덴코는 여차하면 히메와 함께 도망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사실은 로슈타인의 회랑이나 오헤야사마, 스퀘어, 스미노바사마, 앞으로 치를 사우의 마까지 전부 이상한 것 아닐까. 아니, 그렇게 따지면 백괴 클럽 자체가 이상하다.
새삼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지경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자 덴코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 "중간에 빠진 별표는 방가운데로 가서 대기해 줘. 암흑의 릴레이가 중단됐다고 누가 말을 꺼내지는 않는지 잠시 상황을 지켜보는 거야. 모쪼록 이건 신중하게 판단해 줘."
"그래서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 사각형 고리가 계속된다면 어떻게 하나요?"
시게루는 히메의 질문에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 고리가 끊기지 않는 동안에 별표가 원 중심에 서서 소리 내어 비는 거야. 이루어졌으면 하는 자신의 소원을..."
- 사우의 마라는 것은 일종의 기원 의식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이마가와 히메도 진정된 듯 보였다. 악마 소환 따위 일본에서는 가당치도 않는 일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신경이 쓰였던 걸까.
- "별표가 소원을 말한 다음에는 어떻게 되나요?"
히메가 잇달아 질문했다.
"그 소원이 정말 이루어질지 어떨지는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겠지."
"아뇨, 소원성취가 아니라 여섯 번째 말이에요."
"어떻게 돌려보내느냐는 뜻인가?"
시게루의 말에 덴코는 움찔했다.
"사각형 원운동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 운동을 멈추면 다시 사라지겠지. 별표가 소원을 말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 즉시 다른 사람들은 움직임을 멈춰 줘. 그러면 여섯 번째도 사라질 거야."
"정말인가요?"
"그래. 암흑 속에서 나타난 건 다시 암흑으로 돌려보내면 그만이야."
정말로 납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히메는 더 이상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 "물론 손끝이 문에 닿으면 벽하고는 감촉이 다르니까 자신이 D에서 A 사이에 있다는 걸 알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도 역시 처음뿐이야. 몇 번이나 연거푸 빙글빙글 돌다 보면 어느새 손끝에서 느껴지는 작은 위화감 따위는 기억할 수 없게 돼. 그런 것보다는 계속해서 도는 행위 자체에만 집중하게 되지. 하지만 그걸로 괜찮아."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는 말이군."
겐타로가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래. 그러니까 별표를 뽑은 사람한테 부탁하고 싶어. 너무 일찍 대열에서 이탈하지 말아 줘. 빙글빙글 돌면서 이 방의 분위기가 기운이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느껴질 때까지 최대한 참아줬으면 해. 물론 판단이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남은 네 사람이 수긍했지만 누가 그래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시게루 본인일 수도 있다.
"이 방 가운데에 야광 도료를 묻힌 히토다마(인간이 몸에서 나온 혼. 우리나라의 도깨비불과 비슷하다-옮긴이) 인형을 놔둘게. 별표는 이걸 표지로 삼아 고리에서 빠져나오도록 해."
- 알 수 없게 된다. 그래도 멈출 수 없다. 멈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 몸을 터치하는 사람이 있는 한 자신도 똑같이 해야 한다. 그것을 중단해서는 결코 안 된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 자신들이 에스허르(네덜란드의 판화가.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띤 작품으로 유명하다-옮긴이)의 그림처럼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세계에 발을 들인 게 아닐까.
델코는 그런 상상을 했다.
일그러진 사각형의 수로를 영원히 흐르는 물.
아무리 오르거나 내려가도 영원히 이어지는 계단.
다만 에스허르의 그림 속 수로와 계단은 아주 조용히 무한의 순환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 비해 지금 사우의 마에서 형성된 고리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광기의 냄새가 감돌고 터무니없는 폭주가 일어날 것 같은 공포감마저 느껴진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다. 금단의 빨간 구두를 신은 것처럼, 언제까지나 춤을 춰야 하는 소녀처럼, 양 발목이 잘려 나가지 않는 한 이 암흑 속 윤무는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리뷰자 주 : 에스허르, 또는 에셔.)
- 너무나 몽롱해진 의식 속에서 네 개의 벽 중 어딘가를 더듬으며 걷던 덴코는 갑작스럽게 새로운 기운 공기의 움직임 같은 것을 느끼고 움찔했다. 그것은 순조롭게 이어지는 다섯 명의 순환과 동떨어진 이질적인 무언가였다.
앗, 별표가 고리에서 빠져나간 걸까?
거의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해도 무방한 상황이다. 그 인물도 비슷한 판단을 내린 게 아닐까.
머지않아 고리가 끊어지려나?
덴코가 뻗은 손끝에 가나의 등이 닿았다. 그 말은 곧 그녀는 별표가 아니라는 뜻이다. 겐타로일까, 히메일까, 아니면 시게루일까.
그러나...
잠시 후, 시게루가 덴코의 등을 터치했다.
응? 아직 이어지는 거야?
덴코는 뜻밖이라고 생각하며 다음 귀퉁이까지 종종 걸어갔다. 가나에게 왼손이 닿았다.
또 한 바퀴 돌았어.
- "사이코라고 적힌 기숙사 이름표를 봤을 때 곧장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지."
갑작스럽게 시게루가 끼어들었다.
"사이코 호러. 걔한테 그렇게 말하니까 싫어하기는커녕 기뻐하더라고. 백괴 클럽에도 흔쾌히 가입했어."
시게루는 분명 '사이코 호러의 사이코 씨'라고 불리고 싶지 않다면 백괴 클럽에 들어오라고 권유할 생각이었으리라.
- "작년 여름 일이야."
겐타로가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우리가 1학년 때에도 했던 여름 특별 활동을 하려고 했어. 그 전년도에는 심령 명소인 폐병원에서 담력 테스트를 했거든. 무섭기는 했지만 백괴 클럽의 활동 치고는 독창성이 너무 부족했어. 그 누구도 하지 않은 독창적인 게 없을까. 시게루와 둘이서 상의한 결과, 백물어(百物語)를 하기로 했지."
- "미리 심지 백 개에 불을 붙여 두고 괴담이 하나 끝날 때마다 하나씩 불을 끄는 거지. 그렇게 하룻밤을 새워 백 가지 괴담을 이야기하는 거야. 백 번째 괴담이 끝나고 백 번째 심지가 꺼진 후 괴이 현상이 일어난다고 전해져."
- "그럼 완벽하게 백물어를 구현하신 건가요?"
"아니, 요즘 같은 시대에 백 퍼센트 똑같이 하기는 어려워."
"하아."
"심지를 준비하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야. 등유를 채운 접시에 심지 백 개를 방사형으로 늘어놓은 다음, 파란 종이를 붙인 사방등 안에 넣어야 해. 흔히 양초에 불을 붙인다고 착각하는데, 초를 백 자루나 켜면 실내가 더워서 느긋하게 괴담을 나눌 수 없지. 그리고 그걸 떠나 너무 위험해.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등유도 요즘 것과는 질적으로 달라. 그런 걸 모르고 시작했다가는 난리가 날 거야."
- "실제로 괴담회를 할 방에서 두 칸 떨어진 방에 사방등을 놔둬. 즉 괴담회장이라고 할 수 있는 방에는 불빛이 일절 없는 셈이지. 물론 사이에 있는 방도 마찬가지야. 백물어는 달빛 으스름한 밤에 행할 것. 이런 말도 있으니 달빛이나 별빛도 거의 기대할 수 없어. 그리고 사방등 옆에는 작은 책상을 준비하고 그 옆에 거울을 기대어 세워 둬. 이렇게 무대 장치를 마치면 참가자들은 회장에서 빙 둘러앉아 한 명씩 괴담을 시작하는 거야. 그리고 이야기 하나가 끝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은 두 칸 떨어진 방으로 가서 심지 하나를 꺼. 그러고 나서 옆에 있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원래 방으로 되돌아오는 거지. 다만 캄캄한 옆방을 지날 때나 거울을 들여다볼 때 뭔가 이상한 게 보이거나 해도 결코 입을 열어선 안 돼. 혼자 가슴속에 담아 둬야 하지. 애초에 백괴 클럽의 백괴란..."
- "우리는 결국 그 지하실에서 백물어를 했어."
"사우의 마를 한...?"
"그래. 그 방을 백물어 회장으로 삼았어. 이야기 하나를 마친 사람은 그때마다 복도로 나가 가장 안쪽 방까지 가야 했지. 거기에는 책상 위에 양초 하나가 켜져 있고 옆에는 노트가 있어. 노트에는 참가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옆에 정(正) 자를 적어가는 거야. 정자 하나를 다 쓰면 다섯 개의 괴담을 마쳤음을 알 수 있지."
"그 방의 불빛은요?"
"캄캄하게 하고 싶었는데 그러면 복도로 나가서 돌아올 때 힘들잖아. 실내에서 백물어를 할 경우에는 아무리 달빛 으스름한 밤이라도 눈이 어둠에 익기 마련이야. 게다가 두 칸 떨어진 방이라고 해도 심지 불빛이 있지. 하지만 지하실은 덴코, 너도 경험했다시피 불빛이 없으면 정말로 암흑 그 자체야. 그래서 각 방에 양초를 한 자루씩 세워 둔 거야."
- "안쪽 방 책상 위에 거울을 뒀어. 그런데 한 장이 아니었어. 정면과 좌우에 하나씩, 이른바 삼면경이었지. 노트에 정자를 적으려면 어쩔 수 없이 정면 거울을 볼 수밖에 없어. 하물며 머리는 좌우 거울 사이에 들어가게 되지. 그러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냐니요?"
"맞거울이야, 맞거울, 한밤중에는 맞거울을 들여다보면 안된다는 말이 있지. 그런데 백물어를 하는 내내 맞거울을 들여다봐야 했던 셈이야."
덴코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하고 생각했다. 이건 이미 괴기의 수준을 넘어서서 단순한 악취미다.
- "그래. 여러 번 들은 괴담도 그런 상황에서 들으니까 어마어마하게 무서웠지. 별로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게 차곡차곡 쌓이면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법이니까."
"나는 제일 처음 안쪽 방에 갈 때부터 너무 무서워서, 아무리 가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러다 중요한 사실을 떠올린 듯 히메가 다시 말을 이었다.
- "그거랑 이건 별개잖아. 정말로 사람이 죽었어."
"그렇다고 사자를 모독한 건 아니야."
"백물어는 일종의 강령술 같은 행위야. 그걸..."
"물론 아흔아홉 번째 괴담까지만 하고 그만할 생각이었어. 그럼..."
"그런 문제가 아니라."
- "죄의식 때문이었다면?"
"앗."
"물론 무의식 중에 불쑥 튀어나왔겠지. 다만 자신의 말에 깜짝 놀라 죽는 건 부자연스러우니까 쇼크를 받은 원인은 따로 있을 거야."
"물론 뭣 때문에 쇼크를 받았는지는 나도 짐작이 가지 않아. 하지만 네가 설명한 상황을 생각해 보면 가나의 정신 상태가 심상치 않았던 것만은 확실해. 가나는 쇼크사를 해도 결코 이상하지 않을 환경에 있었어."
미호가 설명한 사와나카 가나의 쇼크사설 한 마디로 자연사였다는 해석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자신이 제삼자였다면 별 무리 없이 받아들였을지도...
그렇게 생각했을 정도다. 그러나 덴코는 당사자다. 그 속삭임의 주인공이 가나일 리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 방 안에서 여섯 번째를 느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느낌은 더욱 선명해졌다.
- 그러나 겐타로가 농담을 받아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시게루는 구체적으로 대화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령 여섯 번째가 사이코였다고 치자.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정말로 사이코가 나타났다고 해도 가나를 죽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잖아. 그녀의 출현에 가나가 소스라치게 놀라 쇼크사했다고 볼 수도 있어."
"하지만 그 속삭임이 있어."
"...."
- "알겠어. 그래서 어쩌라고? 지하실에서 굿이라도 할까? 일단 불러낸 사이코의 영혼더러 이번에는 다시 돌아가 달라고 빌어야 하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 정도겠지."
"굿을 하지 않으면 그 지하실에서 사이코의 영혼이 계속 떠돌기라도 한다는 거야? 그렇다면 지하실 자체를 봉인하는 건 어때? 학교는 조만간 월광장을 폐쇄할 거야. 그때 건물을 통째로 팔아치울지, 철거하고 공터로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되면 사이코도 더는 나타나지 못할 거 아냐."
- "그런 의미도 있지만 그건 부차적인 문제인지도 몰라."
"그러면 근본적인 문제는 뭔데?"
"앞으로의 일이 아닌, 바로 지금에 대한 걱정이야."
"지금?"
"사와나카 하나로 끝날 거라고 생각해?"
일순간, 시게루는 겐타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깨닫자마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식당에 돌아가고 있는 에어컨이 필요 없을 만큼 한기를 느꼈다.
- 시게루는 문득 사이코의 고딕 패션이 떠올라 모골이 송연해졌다.
"긴 머리카락에 거무스름한 옷을 입은 여자 비슷한..."
"비슷하다니, 확실하지 않은 거야?"
"언뜻 보이기만 해서..."
- "담화실에서 연 백괴 클럽 모임. 결국 그게 마지막이 될 것 같지만, 아무튼 그 모임을 마치고 나서 각자 방으로 돌아갔잖아. 나는 기분도 전환할 겸 책을 읽었는데 영 집중이 안 돼서 목욕을 했어. 그렇게 몸을 덥히고 나서 맥주를 한잔하고 자려고 했지. 그런데 잠이 안 오더라고. 위스키도 마셔 봤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였어. 그래서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중간하게 술이 들어간 탓에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고. 그렇다고 텔레비전을 볼 기분도 아니었고, 왠지 사면초가 같은 상태였어. 그래서 기왕 이렇게 된 바에 커피라도 마시고 정신을 차린 다음 졸음이 올 때까지 책을 읽자고 마음먹고 홀로 나갔어."
다른 날과 달리 오늘 밤 겐타로는 쓸데없이 말이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시게루는 뒷이야기를 재촉했다.
"물론 홀에는 아무도 없었어..."
상야등만 켜진 어둑어둑한 홀 남쪽에는 자동판매기가 두 대 놓여 있다. 그중 하나에서는 여름에도 따뜻한 커피와 홍차를 살 수 있다. 겐타로는 뜨거운 블랙커피를 사서 가까이에 있는 담화실 의자에 앉았다.
- 고요한 홀 안에는 자동판매기가 발산하는 희미한 소음과 기숙사 정원에서 나는 벌레들의 울음소리만 들렸다. 커피를 홀짝이는 소리가 괜스레 시끄럽게 느껴질 만큼 한밤중의 홀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그런데 갑자기 묘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뭔가를 치는듯한 단조로운 소리였는데, 상당히 깊숙한 곳에서 들리는 느낌 ...
- 어라?
바람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리 창문을 활짝 열어도 방 안에 들어온 바람이 어딘가로 흘러갈 리는 없다.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바람이 방을 빠져나가는 것은 복도 쪽 문이 열려 있을 때뿐이다.
분명 문을 잠갔을 텐데...
- 잠들기 어려운 한여름 심야에 부는 그것은 청량한 바람일터였다. 그러나 서늘한 밤바람의 움직임이 목덜미에 닿는 순간, 털이 주뼛 섰다.
히메는 창을 등진 채 정면 문을 보고 누워 있었다. 조심스레 실눈을 뜨자 어둠 속인데도 문이 안쪽으로 약간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말도 안 돼. 설마 잠그는 걸 깜빡했나?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침대에 눕기 전에 분명 문을 잠갔다.
- 불빛이 새어 나올 뿐 거의 모든 집이 잠들어 있다.
편히 잠드는 집...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부러워졌다. '인간도 저런 식으로 금세 잠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괴괴한 주택가의 인적 없는 밤길을 비틀비틀 걷고 있자니 왠지 다른 세계로 빠져들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니, 불안감이 아닌 일종의 희열일까.
- 이 세상에는 오컬트적인 현상이 존재한다.
시게루는 그렇게 믿었다.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괴기스러운 분위기나 환상적인 정취만 체감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다. 조건만 충족시킬 수 있다면 실화 괴담뿐 아니라 괴기소설, 호러 영화, 심령사진, 귀신의 집, 심령 명소 등 뭐든 상관없었다.
무서운 느낌을 주는 것, 그것이 제1 조건이다. 웬만한 수준만 되면 그것이 실제든 창작물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 앞에 나타나지만 않으면... 이란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기분 좋게 느껴져야 할 밤바람에 몸이 살짝 떨린 시게루는 걷는 속도를 조금 높였다. 다만 취기가 돌아 발이 갈지자를 그렸다.
- 굳이 따지자면 겐타로는 논리였다. 오컬트의 세계에 논리적인 사고가 맞을 리 없지만 겐타로의 태도는 늘 일관됐다. 어떤 의미에서는 시게루와 비슷했다. 괴이, 그 자체의 존재 여부보다 그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인간은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믿는지 하는 구조에 더 흥미가 있어 보였다.
그런데 그 녀석이 어젯밤, 지하에서 올라오는 검은 여자를 목격했다.
자신과 달리 겐타로는 고지식한 성격이라 이런 이야기를 꾸며 낼 리 없다는 것은 시게루가 가장 잘 안다. 평소에도 그런데 사람이 죽은 지금 상황에서는 더욱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가나...
그녀가 별표를 뽑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애초에 A1과 A2, 그리고 B, C, D를 적은 종이에 시게루는 별표 따위 그려 넣지 않았다.
"정말로 여섯 번째가 나타나면 어쩔 거야? 그것도 내 앞사람이나 뒷사람이 그것이라면...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이상해지는 느낌이야."
그렇게 말하며 사우의 마 참가를 망설이던 그녀에게 시게루가 꺼낸 타협안이 처음부터 별표 역할을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만약 여섯 번째가 나타난다고 해도 그건 네가 사각형 고리에서 나간 다음이야. 이러면 안심이 되지? 게다가 너는 네가 바라는 소원을 말해도 돼."
- 다만 문제는 그 해결 방법이었다. 공양, 굿, 불제.
그러나 지인 중에 그런 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없다. 영매에게 부탁한다고 해도 신뢰할 만한 인물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자칫 잘못하면 아무 효과도 보지 못한 채 터무니없이 비싼 요금을 뜯길 가능성도 있다. 신사나 절에 부탁한다고 해도 요즘 같은 시대에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닌 신관이나 승려가 있을까.
- 그런 생각을 하며 국도로 나갔다. 이렇게 밤이 깊은데도 여전히 교통량이 많다. 그에 반해 인기척은 전혀 없다.
질주하는 차들의 소음으로 가득 차 있는데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소란 속에서 묘한 적막이 느껴지는, 매우 기괴한 풍경이었다.
눈앞을 지나는 차에는 사람이 타고 있다. 운전자뿐 아니라 동승자까지 포함하면 상당한 수가 가까이에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몇 초 뒤에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또 새로운 차와 사람이 와서 똑같이 사라져 간다. 즉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실은 나 혼자뿐이다.
- "정말이지, 추천장이 없었다면 오지도 않았다고, 이런 데."
우치다가 미심쩍어하는 것도 당연했다. 쓰루야 슌이치로는 아무리 봐도 스물이 채 되지 않은 듯한 데다가 붙임성이라곤 전혀 없다. 건방진 것을 뛰어넘어 상대에게 지극히 차가운 인상을 준다.
- "죽음이라고 간단히 말해도..."
지금도 슌이치로는 의뢰인의 불만에는 대답을 않고 담담히 죽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자연재해나 교통사고 등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 무차별 살인이나 보험금 때문에 살해당하는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 등 그야말로 각양각색입니다."
"..."
"누군가가 당신의 목숨을 노리는 경우만 놓고 봐도 당신이 불특정 다수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인지, 어느 그룹 안의 한 사람인지, 아니면 개인으로서인지에 따라서도 차이가 큽니다."
- 슌이치로의 설명에 우치다도 일단은 납득한 듯하다.
"다만 당신은 그런 경우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가..."
우치다는 눈에 띄게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할 위험은 없다는 말을 듣고 무심코 마음을 놓았으리라.
- 지금은 이 능력을 활용하기 위해 도쿄 진보 초의 우부스나 빌딩에 '쓰루야 슌이치로 탐정 사무소'를 개업했다.
그에게 독립을 권한 사람은 나라의 안라에 사는 할아버지 쓰루야 슌사쿠다. 애초에 사상이 보이는 특수한 힘을 '사시'라고 이름 붙인 사람도, 일부 열광적인 애독자를 거느린 고고한 괴기 환상 계열 소설가인 할아버지다.
- "나는 말이다, 실은 <사상학>이란 원고를 계속 써 왔단다."
도쿄로 오기 전, 할아버지는 슌이치로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줬다. 슌이치로가 보는 사상을 시각적인 요소를 기반으로 분류, 정리하고 항목별로 보이는 방식을 분석해서 최종적으로는 체계화를 목표로 하는 학술서라고 한다.
그때까지 할아버지가 쓴 작품은 소설 중심이라 이런 작업을 해 왔다는 말에 슌이치로도 깜짝 놀랐다. 다만 사상학을 쓰는 동기에는 특수한 능력 때문에 고생하는 손자를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 하는 할아버지의 애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 최대한 협력하겠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할아버지는 "좋은 소재가 될 것 같으면 소설 소재로도 쓸 거다."라고도 해서 어디까지 손자를 생각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 할아버지는 지금껏 부인인 무녀 아이가 치른 굿이나 불제, 액막이 의식 등을 실컷 괴기 소설의 소재로 삼아 왔다. 그런 전과가 있어 슌이치로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위해 연구하고 있다고 단순히 고마워해도 좋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 그러나 '아이젠 님'이라는 호칭으로 추앙받으며 전국 각지에서 상담자가 몰려오는 할머니의 업무 면에서 할아버지의 이러한 행동은 큰 도움이 됐다. 할아버지가 내놓는 괴기 소설이 단순한 창작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라 마을에 있는 조부모의 집 뒤뜰에는 무덤이 있는데, 할머니가 불제로 떨쳐 낸 것을 봉인하는 장소로 쓰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모이고, 쌓이고, 괴인 것들은 머지않아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할 염려가 있었다. 어느 순간, 무덤의 봉인을 파괴해 버릴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거기서 할아버지는 봉인된 사악한 것들을 소재로 글을 써, 소설이라는 하나의 닫힌 세계에 봉인하는 이중의 방어책을 고안한 것이다.
- 그러나 할머니의 말은 달랐다.
"그건 그 사람이 괴기 소설 소재가 부족해 곤란해하다가 내 상담자의 이야기를 참고한 것이 계기였어. 놀랍게도 그게 그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 그때는 이 할미도 정말 깜짝 놀랐다."
- 과연 진실이 무엇인지는 슌이치로도 알지 못한다. 다만 이 두 사람의 '연계'가 지금도 이어진다는 점에서 효과가 확실한 것만은 틀림없다. 조부모의 다양한 자질을 자신이 물려받은 점도 포함해...
- "내 얼굴에 주, 죽음의 그림자가 보인다는 거지?"
실제로는 얼굴만이 아닌 데다가 사시 결과를 알려 주는 것을 삼가고 있지만, 슌이치로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병원에 보내야 한다고 판단해서다.
처음에는 우치다의 나이와 명함에 적힌 직함을 보고, 어쩌면 회사에 적이 많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저주를 의심했다. 사실 자신의 출세에 거치적거리는 라이벌이나, 파벌이 달라 번번이 다투게 되는 존재에게 저주를 거는 그런 사건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물론 경찰은 알지 못한다. 아니, 설령 알아챈다고 해도 수사는 불가능하다. 피해자 대부분이 사고사나 자살, 병사하기 때문이다.
- 저주로 인간을 죽음에 내몬다.
굳이 말할 것도 없이 실제로 그런 짓을 벌이기는 매우 어렵다. 지극히 특수한 수행을 쌓은, 일종의 술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런 인물조차 자칫 잘못하면 자기 자신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과 늘 어깨를 맞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의 술사는 그런 능력을 지녔어도 결코 함부로 쓰지 않는다. 상대가 아무리 부탁해도 그런 의뢰는 즉시 거절한다. 오히려 사심에 휩싸이면 큰일 날 수 있다며 상대를 회유할 것이다.
그러나 주술을 앞세워 돈을 버는 족속이 이곳 일본에도 존재한다. 대부분은 저주를 거는 대상의 목숨까지는 앗아가지 않지만 병에 걸리게 하거나 부상 혹은 사업 실패나 재산 손실 등 모종의 불행을 반드시 불러일으킨다. 그런 경멸스러운 행위를 생업으로 삼는 술사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 이런 이들의 면면에 대해서는 할머니도 대략 파악하고 있다. 피해자에게 상담을 받으면 확실히 대응할 수 있었다. 간혹 너무도 악질인 사람에게는 저주의 대가를 치르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할머니도 애먹는 술사가 딱 한 명 있었다. 경력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고 의뢰인조차 직접적으로는 만나지 못한다는, 말 그대로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슌이치로도 예전부터 그 술사에 대한 소문을 종종 듣곤 했다. 실제로 그의 주술로 목숨을 잃은 피해자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굳이 말하자면 소문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어디까지나 이 업계 안에서 떠도는 괴담 같은 이야기였다.
- 그것이 올봄 무렵부터 묘하게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본인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다만 그 술사가 뒤에서 조종한 것으로 보이는 사건이 늘어난 것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올봄 세타가야 구 네쓰키에 있는 이리야 저택에서 일어난 이리야 일족을 둘러싼 연속 괴사 사건이자, 쓰루야 슌이치로 탐정 사무소의 첫 번째 사건이다.
'13의 저주'라고 부를 만한, 완전히 새로운 술법을 구사한 연쇄 살인을 해결하기 위해 슌이치로는 이리야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간신히 승리를 거머쥐었다.
- 흑술사...
어느덧 업계에서는 누구랄 것 없이 그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그 이름을 입에 담을 때 사람들은 반드시 두려움에 휩싸인다고 한다. '아이젠 님' 하고 할머니의 애칭을 부를 때 경애의 마음이 담기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 "뭐, 뭣 때문이지? 모종의 저주 같은 건가?"
우치다는 몸을 더욱 앞으로 내밀었다.
사상이 나타나는 것은 곧 재앙이나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어서 놀랍지 않다. 사시 능력을 제어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의 일을 도우며 수행해 와서 가끔 우치다같이 반응하는 사람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뭔가가 당신에게 몸의 이상을 알리고 있습니다."
- 슌이치로에게는 사시 능력밖에 없지만, 아마 의뢰인의 조상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하고 짐작은 했다.
우치다의 이야기를 유심히 들으니 그럴 것 같았다.
- 가령 최근에 자주 같은 꿈을 꾼다. 자신이 물가에 서 있는데 오른발만 물에 잠겨 있다. 그 시원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져 그대로 온몸을 담그려고 하면 하얀 기모노를 입은 노파가 왼손을 잡아당겨 어딘가로 데려가려고 한다. 그 얼굴이 무척이나 무섭다. 머리와 어깨, 팔꿈치와 무릎 등을 어딘가에 자꾸 부딪히는데 부딪히는 부분이 모두 몸의 오른쪽이다.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어디서 향내가 풍긴다. 그러나 어디에도 향 같은 것은 없고, 다른 사원들은 그런 냄새를 맡지 못한다. 이 역시 캐물은 결과, 항상 그의 오른쪽에서 냄새가 풍겨 온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최근 며칠은 꿈속에 나타난 노파가 현실에서도 보인다. 물론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도 없다. 오로지 그의 눈에만 보이는 듯했다. 그런 상황에 대해서도 자세히 캐물으니 역시 그는 오른쪽 시야에만 노파의 모습이 보인다고 설명했다.
- 이 이야기와 사시로 보인 사상을 통해 슌이치로는 우치다에게 뇌경색의 위험이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 '죽음'으로부터 구하는 탐정.
'사인'은 탐정에게 사상의 수수께끼를 들이밀며 피해자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하는 범인.
슌이치로는 할머니 아래에서 오랜 세월 수행하며 이러한 삼자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그래서 사시 능력을 활용해 독립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가장 먼저 탐정 사무소 개업을 떠올린 것이다.
- 급히 병원으로 향하는 우치다를 배웅하고 책상 의자에 앉은 슌이치로는 소파로 시선을 향하며 "이봐, 보쿠. 좀 전의 그 사상, 뇌경색 맞지?" 하고 바로 조금 전까지 자신이 앉았던 소파뒤에 있을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다.
"검은 안개가 아직은 옅었으니까."
'보쿠'는 조부모 집에서 슌이치로와 거의 함께 자란 회색 얼룩무늬 고양이다.
"지금 당장 병원에 가면 목숨은 건질 것 같은데."
보쿠는 도쿄로 온 슌이치로를 쫓아 머나먼 나라에서 상경했다. 개도 곤란할 거리인데 고양이인 보쿠가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그런데 설마 의학적인 지식까지 필요할 줄이야..."
- 사상의 정체가 병마일 경우, 슌이치로에게 관련 지식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사시의 해석에도 큰 차이가 생긴다.
지금까지 두 명 정도, 지주막하 출혈과 심근 경색 등 굳이 말하자면 돌연사에 가까운 '미래의 사인'을 지닌 의뢰인이 찾아온 적 있다. 비록 사상을 올바르게 해석하지는 못했지만 만약을 위해 병원에서 진찰을 받도록 조언한 덕에 두 사람 다 목숨을 건졌다.
- 다만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두부 외상에 의한 급성경막외혈종으로 뇌부종에 빠진 의뢰인의 경우에는 슌이치로가 사상 해석으로 골머리를 썩이는 사이 세상을 떴다. 상담을 받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슌이치로는 의학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통감했다. 전문적으로 공부할 생각은 없다. 다만 현대인이 걸리기 쉬운 병을 나이대별로 정리해 그 특징 -어떤 증상이 나타나고 어떤 죽음을 맞이하는지- 을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사시 해석에 큰 도움이 된다. 오늘 온 의뢰인의 사례에서도 슌이치로는 새삼 실감했다.
- "하지만 사인이 병마라면 나로서는 안심인 셈이야."
만약 슌이치로가 사상 해석에 애를 먹다가 결국 병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해도 딱히 문제는 없다. 의뢰인이 병원에 가기만 하면 그다음은 의사가 맡기 때문이다.
- "이젠 누가 오든 일단 병원부터 가라고 말해야 할까?"
그러나 만사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어지간한 자각 증상이 없는 한 인간은 제 발로 병원에 가지 않는다. 젊을수록 더하다. 더군다나 쓰루야 슌이치로 탐정 사무소를 찾는 사람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오컬트적인 세계관을 믿고 있다.
"병이라고 해도 좀처럼 납득하지 않으니 문제지."
뇌경색으로 추정되는 사상이 보인 우치다와 비슷하다. 구체적인 증상이 없으니 한사코 다른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 "대부분의 병은 검사로 판명하고 조기에 발견하면 치료법도 있어. 목숨을 구할 가능성도 커지는 셈이야. 하지만 저주나 지벌, 재앙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아. 외려 의뢰인들은 사상의 원인이 병마로 밝혀지면 기뻐해야 해. 이른바 일병식재(一病息災, 한 가지 병을 앓거나 체력이 약하면 자기 절제로 몸을 다스려 오히려 오래 살게 된다는 뜻-옮긴이) 같은 거야. 그런데도..."
슌이치로는 그제야 소파 뒤에서 아무 반응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봐, 보쿠. 내 말 듣고 있어?"
- "알겠어. 이렇게 부르면 되지? 보쿠냥."
그러자 곧장 소파 뒤에서 "야옹." 하는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회색 얼룩무늬 고양이 보쿠가 모습을 드러냈다.
"... 못 말리겠군."
보쿠는 투덜거리는 슌이치로에게 다시 한번 "야옹." 하고 대답하고는 아까까지 그가 앉았던 소파 팔걸이로 풀쩍 뛰어올라 다소곳이 앉았다.
- 조부모 집에 맡겨졌을 때, 아직 어린아이였던 슌이치로는 어떤 사정으로 인해 거의 말을 하지 못했다. 간신히 입 밖에 낼 수 있는 단어라고는 '보쿠'라는 자신을 가리키는 일인칭 대명사뿐이었다.
그즈음 쓰루야 가에는 할아버지가 '슌타'라고 이름 붙인 회색 얼룩무늬 고양이가 있었다. 그런데 이 새끼 고양이는 묘하게도 "슌타, 밥 먹으렴." 하고 불러도 가만히 있다가 슌이치로가 "보쿠..."하고 입을 열면 그제야 "야옹." 하고 대답했다. 그러다가 '슌타'는 자연스레 '보쿠'가 돼 버렸다. 다만 슌이치로가 자신을 지칭하는 '보쿠'와 고양이를 부르는 '보쿠'를 구분할 수 없어서 '보쿠냥'이라고 부르게 됐다.
슌이치로는 나이를 먹을수록 보쿠를 애칭으로 부르기가 쑥스러워졌다. 슌이치로도 지금은 자신을 지칭할 때 '오레(성인 남자가 자신을 다소 거만하게 일컫는 말-옮긴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제는 '보쿠냥'이 아닌 '보쿠'라고 불러도 괜찮을 듯한데, 보쿠는 ...
- 그 인물에게서 사상이 보이면 그 뒤로 얼마간은 마음이 언짢다. 본인에게 사실을 알리고 사상의 정체를 밝혀서 목숨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 봐야 미친놈 소리를 듣거나 사이비 종교의 신도라는 의심을 살뿐이다.
이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슌이치로의 정신적 부담도 늘어난다. 그래서 가능한 사람이 많은 곳에는 가지 않으려고 하지만, 탐정 일을 하다 보면 어쩔 수가 없다.
- 다만 이 정도라면 그리 문제 될 것도 없다. 슌이치로가 마음을 굳게 먹고 줄곧 '보지 않는다' 상태를 유지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매우 피곤한 일이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보지 않는다' 상태로 전환했는데도 갑자기 시야에 뛰어들어 와 억지로 보게 되는, 싫어도 볼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죽음이 이 세상에는 존재했다.
- 슌이치로가 아직 나라에 있을 무렵, 조부모 집 근처에서 그런 죽음을 맞닥뜨린 적이 있다.
그 순간, 슌이치로는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격렬한 현기증을 느껴 쓰러질 뻔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 남자에게서 떨어지고 싶었지만 너무도 신경이 쓰인 나머지 뒤를 쫓았다.
남자는 지하철을 타고 오사카까지 가서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에 섰는데, 바로 뒤를 걷던 슌이치로는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다른 승객 몇 명에게서도 남자와 똑같은 사상이 보였기 때문이다.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날 조간에 실린 항공기 대참사 기사는 지금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그 남자와 버스 정류장에 줄을 선 다른 몇몇 사람은 사고기의 승객이었다. 따로 조사하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을 것이다. 만약 그대로 슌이치로가 공항까지 갔다면 분명 로비에서 같은 사상이 보이는 사람을 수십 명 아니, 수백 명 발견했을 것이다.
- 그날 이후, 슌이치로는 점점 더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게 됐다. 반드시 외출해야 할 때는 최대한 다른 사람을 보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 정신적으로 어두워지고 세상이 싫어지기 마련이다.
- 여전히 불안감이 남아 있다고는 해도 지금은 이렇게 그럭저럭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됐다. 할머니의 지도를 받으며 수행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슌이치로가 정신적으로 강해져서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스스로 나서서 주위를 둘러보거나 하지는 않는다. 최대한 다른 사람을 보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은 예전과 마찬가지고, 고개를 들어도 반드시 걸어가는 방향 쪽만 바라본다.
- 흑술사...
역시 관련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리야 가 사건을 해결하면서 흑술사와 얽혀 버렸다. 이쪽은 다 끝난 일이라고 생각해도 그쪽은 다를지 모른다.
"아니, 끝나지 않았나."
슌이치로는 불쑥 중얼거렸다.
저주를 생업으로 삼은 자를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다. 그쪽도 장사를 방해하는 특수한 탐정은 최대한 빨리 말살하고 싶을 것이다. 즉 서로 상대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젠가는 맞이할 흑술사와의 대결...
슌이치로는 그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전율에 휩싸였다.
- "덴코 씨와 히메 씨한테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슌이치로는 이 사람이 기숙사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는 다카코 씨라는 것을 금세 알아챘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바로 두 사람을 불러올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관찰하듯 그를 잠시 훑어본 것은 여학생들을 돌봐야 하는 책임감 때문일까. 두 사람이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는 몰라도 숙박 건까지 말했다면 이렇게 경계하는 것도 당연하다.
"홀 쪽에 담화실이 있으니 거기에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빙긋 웃는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심사에 통과한 모양이다.
- 예전에 할머니는 잠자코 서 있는 슌이치로의 모습을 이렇게 평가했다.
"어디 출신 좋은 도련님이라고 생각할 게다. 너는 이 할미를 닮아 제법 잘생겼으니까. 성격도 근본은 순수하고 정말 좋은 아이고. 네가 그런 힘을 짊어진 탓에 차갑고, 어둡고, 비뚤어진 성격이 돼 버린 거지. 아니, 그 부분은 그 사람을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할미만 닮았더라면 겉과 속 모두 완벽한, 그야말로 장밋빛 인생을 살았을 텐데..."
쌀쌀맞게 굴지만 않으면 처음 대면하는 사람에게 그리 나쁜 인상을 주지 않는다. 덧붙이자면 할머니가 말하는 '그 사람'이란 배우자인 할아버지를 뜻한다.
- 뭐지, 여기는...
창고라기보다 쓰레기장 같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앞의 두방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렇군, 알겠어.
방의 불을 켜고 전체를 둘러본 슌이치로는 그제야 눈치챘다. 도무라 시게루와 다자키 겐타로가 사우의 마 의식을 치르려고 첫 번째 방을 정리할 때 일단 방해가 되는 짐을 닥치는 대로 안쪽 방으로 쑤셔 넣은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것이리라.
하지만 이래서는 조사도 불가능해.
그렇게 생각하고 불을 끄려는데 또다시 향내를 맡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첫 번째 방의 잔향인가?
그러나 앞의 두 방에서는 전혀 냄새를 맡지 못했다. 그런데도 가장 깊숙한 이곳에서 향내가 나다니, 아무래도 이상하다.
- "그러면서도 텔레비전이나 잡지에 나오는 별자리 점 같은 건 믿는 사람이 많죠. 특히 오늘의 운세 같은 것."
"저는 전혀 아니에요. 점성술은 천동설 시대부터 있던 거잖아요. 그 뒤로 지동설이 자리를 잡고, 새로운 행성이 발견된다든지 하면서 하늘의 사정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점성술은 그 시절과 변함이 없죠. 아니, 점점 더 정확해졌다는 소리 따위를 하고 있으니 전혀 믿을 만하지 못해요."
"과연."
"애초에 천체의 움직임이 지구에 사는 수십억 명이나 되는 사람 중 단 한 명의 운세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믿을 수가 없어요. 하물며 그 사람의 건강, 연애, 경제 같은 사소한 부분에도 영향을 끼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죠. 게다가 동물은 왜 영향을 받지 않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화성이 어째서 전쟁의 별인지 아십니까?"
"붉은색이 피를 연상시키니까요."
"정답."
- 미호는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슌이치로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쓰루야 씨는 제 말에 화를 내거나 반론하지 않으시네요."
"왜 그래야 하죠?"
"사상학 탐정이라면 대체로 이런 쪽 세계를 인정하고 부정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슌이치로는 그 이유를 묻는 듯한 미호의 얼굴을 보고 대답했다.
"내 조모는 무녀입니다. 그 능력이 상당해 전국 각지에서 상담자가 찾아오죠. 선조의 영이 화를 내렸다, 악령에 씌었다, 이사한 집에 유령이 나온다, 모종의 재앙을 입었다, 연적의 저주를 받았다, 그러니 어떻게든 해 주길 바란다는 의뢰가 끊임없이 들어옵니다."
"우아, 대단하네요."
"다만 조모의 말로는 그 의뢰의 99퍼센트가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의뢰인에게는 아무것도 씌지 않았다, 화가 내리지 않았다, 재앙을 입지 않았다, 이런 말입니다. 문제는 그 사람의 머리나 마음에 있죠."
- "조모님은 의뢰인한테 그 사실을 전하시나요?"
"상대에 따라 다릅니다. 가르쳐서 알아들을 만한 사람, 가르치는 편이 효과적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역효과가 일어나는 사람도 있죠. 또 할머니가 불제를 치름으로써 본인의 억측이 간단히 나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는 말이네요."
"네. 물론 필요하면 전문의를 소개하기도 합니다."
"그런가요?"
미호는 깜짝 놀라는 동시에 매우 감탄하는 듯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서 나도 일단은 의심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 "그나저나 사상이 정말로 보이나요?"
"그 원인이 반드시 오컬트적인 거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 그렇겠네요.”
미호는 납득했는지 미소를 짓고 나서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이번 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판단하고 계시나요? 현실적인 사고가 가능한 여지가 있나요?"
"아무리 괴이한 사건이라도 합리적인 해석을 할 수는 있습니다."
"든든하네요."
"물론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만."
- "하지만 슌이치로 씨의 추측이 아예 빗나간 것 같진 않네요."
미호의 날카로운 관찰안에 슌이치로는 무심코 쓴웃음을 지었다.
"누군가의 관여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네. 하지만 슌이치로 씨는 처음부터 그럴 가능성이 적다는 걸 알고 계셨죠?"
"..."
슌이치로는 살짝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조금 전 지하실에서의 체험을 미호에게 털어놨다.
- "백괴 클럽은 사우의 마 의식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간의 '마(間)'가 아닌 마물의 '마(魔)'를 뜻하는 의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 의뢰인과 관련된 사건의 관계자 중에 사상이 보이는 자가 있다면 똑같이 구해야 한다.
탐정 사무소를 꾸려 가는 동안 슌이치로는 점차 고민에 빠졌다. 다만 이 명제가 사상학 탐정으로서의 긍지에 집착해서 나온 것인지, 인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인지는 슌이치로 자신도 알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수많은 '죽음'을 접하고, 사시 능력 탓에 '사신', '악마', '괴물'이라는 놀림을 받고 차별당한 과거가 있으니 평범한 사람과는 생사관이 다른 듯하다. 그것은 슌이치로 자신도 이따금 어쩔 수 없이 실감하는 부분이었다.
사상학 탐정으로 활동하며 조금씩 변하고 있는 걸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슌이치로에게는 꽤나 생소한 경험이었다. 다만 이런 변화가 사상학 탐정이라는 일에 좋은지, 좋지 않은지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기도 했다.
- "받을 걸 다 받고 나면 얼마든지 조사해 주마."
"그러니까 다음 달에 한꺼번에..."
"그러면 일을 받는 것도 그 이후가 되겠구나."
"자린고비가 따로 없네."
"무슨 섭섭한 말을. 일반적인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야 그렇지만, 할머니와 손자 사이니까 조금은..."
"또 물렁한 생각을 하는구나."
"하지만 그게 바로 가족의 특권……….."
"슌이치로, 너는 이 할미가 없어지면 대체 어쩔 작정이냐?"
"응?"
"그러니까 이 할미가 죽으면 어쩔 거냐고 묻는 거다."
"그야 물론 할아버지와 둘이서 그만한 장례식을 치러 드려야겠지."
"멍청이! 누가 그런 걸 물었느냐? 그리고 나보다 그 사람이 먼저 저세상에 갈 거다!"
"뭐, 평균수명은 여자 쪽이 길지."
"그래그래... 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아니, 잠깐만, 그만한 장례식이라는 건 또 뭐냐? 보통은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드리겠다고 하지 않느냐?"
"할머니는 번드르르하고 호화로운 장례식이 좋겠어?”
"그렇지. 금색 연꽃이 있고... 가 아니라, 됐다. 다 필요 없다."
- 마물을 물리칠 힘이 없는 내가 과연 검은 여자를 막아낼 수 있을까?
할머니 밑에서 수행을 거듭하며 불제도 대략은 익혀 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어깨너머로 봐뒀을 뿐 지금껏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조만간 원치 않아도 그 능력을 써야 하는 상황이 분명 찾아올 것이다. 유사시를 대비해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했지만 좀처럼 결심이 서지 않는다.
-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칸막이 틈새로 엿보니 지하실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 나왔나?
극도의 긴장에 몸이 얼어붙었다. 양어깨에 이상하리만치 힘이 들어간다. 꼼짝도 하지 않고 그저 칸막이 틈새에 시선을 고정한다.
이윽고 문 뒤에서 검은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빛이 희미한 데다 상대의 몸이 거무스름해서 어떤 모습인지 알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머리 부분이 검은 것은 문제의 레이스를 쓴 탓일까? 아니면 실제로 얼굴이 새카매서일까?
칸막이 한 장만 사이에 두고 검은 여자와 대치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슌이치로 역시 무서워졌다.
- 마가리야는 얌전히 귀를 기울였다가 이내 물었다.
"정말이지, 어째서 네가 연관되는 사건은 모조리 괴기하고, 음산하고,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들 뿐이지?"
"형사님이 담당하는 사건은 비참하고, 살벌하고, 비애에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 그래, 그렇다고 치자."
마가리야는 화를 내는가 싶었지만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 다만 빈정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네가 관련됐다는 건 우리가 다룰 필요가 없는 사건이라는 뜻이니 편하다면 편하다고 할 수 있어."
"그렇게 단정 지어서야 되겠습니까?"
"어차피 피해자는 저주나 재앙, 귀신같은 것 때문에 살해된 것 아닌가? 만약 저주를 내린, 가해자라고 부를 만한 녀석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런 녀석을 법치국가인 일본에서 체포할 수 있겠어?"
"내가 보는 사상이 꼭 그런 원인으로만 나타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무슨 뜻이지?"
"지금부터 사흘 뒤 무차별 살인마에게 살해당할 사람에게도 사상은 나타나니까요."
"호오."
- "그때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초미지급'과 '안녕질서' 같은 사자성어였습니다."
"어째서?"
미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사자성어를 잘 아는 탐정에게 혹시 들키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뭘 들킨다는 거죠?"
"다도 사이코 씨와 하타케야마 가히토 씨의 이름을 조합하면 '재자가인(才子佳人)'이라는 사자성어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요."
"아아."
"'재자가인'은 재주가 뛰어난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부모는 분명 그런 바람을 담아 두 사람의 이름을 지었을 겁니다."
- "글쎄요. 다만 여동생이 어떤 상황에서 죽었는지, 그걸 알아볼 생각으로 조호쿠 대학에 입학한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하지?"
마가리야가 파고들었다.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조호쿠 대학에서 엘리트 학부라고 일컬어지는 곳은 건축학부뿐이란 걸 알게 됐습니다. 이리노 씨는 문학부에 편입했을 때 자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비차지는 않을까 걱정했을 정도였다니까요. 그런데 하타케야마 씨는 일부러 재수까지 해서 경제학부에 입학했습니다."
- "나는 무당이나 퇴마사가 아닙니다."
그렇게 거절했지만 세 사람은 어떻게든 해 달라며 간곡히 부탁했다.
- 다음 날 아침, 다섯이서 지하실을 간단히 청소하고 슌이치로는 할머니에게 배운 불제를 치렀다. 이것으로 과연 해결될지는 솔직히 스스로도 불안했다. 자신의 임무는 사상이 보이는 의뢰인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고, 그 이상의 문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도 사람들과 헤어질 때 "또 뭔가 괴이 현상이 일어나면 즉시 연락 주십시오. 그때는 그에 걸맞은 사람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이 무심결에 튀어나온 것은, 이 세상에 나온 이상 자신의 역할이나 영역이 아니라고 해서 그냥 지나쳐선 안된다는 현실을 배워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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