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우케쓰 / 김은모
출판 : 북다
출간 : 23.07.24
우케쓰의 <이상한 그림>.
추천하고 싶다.
저자의 지난 작품인 <이상한 집>, <이상한 집 2> 까지는 흥미로운 책을 쓰는 작가라고만 생각했다. 취향을 탈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추천하기는 좀 망설여지기도 했다.
와. 하지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상한 그림>에서 작가는 정말 레이어를 쌓아나가는 것처럼 섬세한 조각 그림들을 거침없이 그려 나간다. 각각의 이야기는 따로 읽어도 흥미롭고- 겹쳐서 보면 실로 경악스러운- 거대하고 이상한 그림이 된다.
본문의 그림은 대체 누가 그린 걸까. 설마 우케쓰 본인일까
작가는 이 그림을 얼마나 고심해서 설계했을까.
그림이 먼저였을까, 이야기가 먼저였을까.
정말 흥미로웠고, 놀라웠다.
스포일러가 될까 조심스럽지만-
우타노 쇼고도 있고. 아비노 다케마루도 있고. 미나토 가나에도 있다.
마치 각 색의 물감을 다양하게 선택해 그려낸 점묘화처럼, 절대 어우러지지 않을 것 같았던 조각들이 더없이 조화롭게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따로 보아도 매력적인 조각들이, 모여서.
새로운 작가가 태어난 것 같다.
아니, 이전부터 그는 이렇게 존재했는데 알아보지 못했던 걸지도.
어째서인지 읽어봤던 것만 같은 기시감 속에
기묘한 느낌까지 즐길 수 있었다.
간만에 무척 재미있었다.
이런 작품을 읽으며 흥미와 재미를 느끼고 마는 독자들은, 구리하라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 대학교 강의실 칠판에 그림 한 장이 붙여졌다.
심리학자 하기오 도미코는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은 학생 여러분 앞에서 강의하고 있지만, 저는 예전에 심리상담사로 일하며 수많은 분께 상담을 해드렸습니다. 이 그림은 제가 심리상담사로 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에 담당한 여자아이가 그린 그림을 복사한 겁니다. 이름은 'A코'라고 할까요? A코는 열한 살 때 어머니를 살해했습니다."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충격적인 말에 학생들이 술렁거렸다.
- "저는 A코의 정신분석에 '그림 테스트'라는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림 테스트란 대상자가 그린 그림으로 심리를 파악하는 분석 기법이에요. 그림은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림에는 그걸 그린 사람의 내면이 드러나는 법이죠. 특히 인간, 나무, 집을 그린 그림에 그러한 경향이 현저해요. 여러분, 이 그림을 보고 뭔가 이상한 점을 못 느끼겠어요?"
하기오는 강의실을 둘러보았다.
학생들은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으로 칠판에 붙은 그림을 바라보았다.
- 사사키는 한동안 멍하니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갈 곳 없는 감정이 가슴속을 맴돌았다. 유키도 렌도, 따지자면 생판 남이다. 애당초 이 블로그에 들어온 것도 호기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기를 읽는 동안 어느덧 두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했음을 깨달았다. 살면서 이런 상실감은 처음 맛보았다.
- 사사키는 두 사람의 미래가 궁금했다. 유키의 죽음을 극복하고 렌이 아이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다음 일기로'라는 버튼을 클릭했더니 새로운 페이지가 표시됐다.
글 제목을 보고 사사키는 눈을 의심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2012.11.28.
오늘부로 블로그를 그만두겠습니다. 그 그림 세 장의 비밀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대체 어떠한 고통을 짊어지고 있었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지, 나로서는 가늠도 안 됩니다. 당신을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 렌
- 사사키가 제일 처음 읽은 일기였다.
렌은 2009년 10월 11일에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린 후로 일기를 한 번도 올리지 않다가 몇 년 후에 갑자기 이 글을 올린 셈이다. 다시 글을 읽어보았다.
- '그 그림 세 장의 비밀'. ... '그림'이라고 하면 유키가 출산예정일을 앞두고 그린 '미래 예상도'가 떠오른다.
그림 실력이 뛰어난 유키가 태어날 아이의 미래를 상상해서 그린 그림. 독특한 행동이지만, 특별히 이상하게 볼 일은 아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그렸으 ...
- "'오늘부로 블로그를 그만두겠습니다'라는 문장에는 '그 이전까지 정기적으로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는 거예요. 하지만 이 글의 이전 글인 유키의 죽음을 알리는 일기가 올라온 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가 올라올 때까지 몇 년의 공백기가 있어요. 그래서 전 이렇게 생각했죠. 사실은 렌이 그동안 계속 일기를 올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무슨 이유로 나중에 일기를 모조리 삭제한 건 아닐까 하고요."
- "자기 블로그에 올린 글을 지우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에요. 저도 고등학생 때 블로그에 올린 <신세기 에반게리온> 분석글은 전부 지웠는걸요. 그렇다 쳐도 렌은 좀 이상해요. 부인이 살아 있을 때 올린 일기만 남기고, 아이가 태어난 후에 올린 일기는 지운다... 어쩐지 찜찜하잖아요. 이유를 모르겠어요."
"듣고 보니... 난 짐작도 못 했네."
"이상한 점은 또 있어요. 10월 15일 일기를 보세요."
- 드러나는 무시무시한 그림을 콧노래를 부르며 종이를 자르는 구리하라에게 사사키는 머뭇머뭇 물었다.
"저기, 구리하라. 어떤 그림이 나올지 아는 거야?"
"네. 어제 해봤거든요."
"그럼... 왜 그렇게 즐거운 표정인데?"
"즐거우니까요. 다 됐습니다."
- 완성된 '눈속임 그림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림 세 장의 비밀', 유키가 남긴 그림의 수수께끼. 그것은...
- "믿기지 않네... 이럴 수가..."
"이게 유키가 전하고 싶었던 '비밀'이겠죠."
- 여자의 복부에 쿠션이 겹쳐서 임신부로 보인다.
아기가 산타 복장을 한 진짜 이유를 깨닫자, 사사키는 등골이 오싹했다. 빨간색 삼각 모자는 임신부의 배를 절개한 자국을 표현한 게 아닐까. 그리고 빨간 옷은 온몸에 들러붙은 엄마의 피 배를 가르고 아기를 꺼내는 장면을 그린 그림.
- 너무나 창백한 피부.
크게 벌어진 무표정한 눈.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굳은 팔.
- 실제로 일어난 일을 눈속임 그림으로 표현했다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악취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이 그림은 유키가 죽기 전에 그려졌다. 유키는 출산을 앞두고 자기가 죽는 그림을 몰래 그려둔 셈이다.
- 곤노 유타의 아버지인 다케시는 3년 전 겨울에 죽었다.
당시 세 살이었던 유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울거나 슬퍼하지는 않았다. 다만 평소 온화한 엄마가 까무러칠 듯 난리 치는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뭔가가 일어났음을 느꼈고, 몹시 불안하고 무서운 기분을 맛보았다.
- 유타는 곧 여섯 살이 된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얼마 안 되는 기억은 전부 안개에 뒤덮인 듯 희미하다. 하지만 선명한 기억이 딱 하나 있었다.
3년 전 여름... 아버지가 죽기 몇 달 전이었다. 그날 유타는 아버지를 따라 성묘하러 갔다. 집에서 걸어서 10분쯤 거리에 있는 공동묘지였다. 땡볕이 내리쬐는 푸른 하늘 아래, 밀짚모자를 쓴 유타에게 아버지가 다정한 목소리로 뭐라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유타는 기억이 안 난다.
기억 속에서는 매미 소리만이 시끄럽게 울려 퍼진다.
- 어째선지 나오미는 말을 머뭇거렸다.
"아니요... 이제 하려고요. ... 저기, 그러니까 오늘 어린이집은 쉬는 걸로 할게요. 유타를 찾으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나오미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 "그랬구나... 걱정되겠다. 무슨 일 있으면 말해줘! 그럼 난 갈게!"
하루오카가 이야기를 마치자 이소자키는 짤막하게 한마디를 하고는 부랴부랴 직원실을 나섰다. 남이 보면 쌀쌀맞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하루오카는 잘 안다.
이소자키가 담당하는 '유아반'은 0세에서 2세로 구성된 이른바 '아기반'이다. 단 몇 초의 방심이 아이의 목숨에 직결될 수도 있다. 다른 반 아이의 일에 극진히 신경 쓸 여유는 당연히 없다.
혼자 남은 직원실에서 하루오카는 유타를 생각했다.
- "어린아이는 상상력이 풍부하니까요. 그리고 만졌을 때 느껴지는 따끔따끔한 '통증'도 상상했겠죠. 겐스케는 그 따끔따끔한 통증을 그림으로 표현한 거예요."
강사는 톱니 모양 그림을 가리켰다.
"우리 어른은 눈에 보이는 것... '실물'을 그릴 수 있어요. 하지만 아이는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그린답니다. 완전히 아티스트죠. '모든 아이는 예술가'라고 하는데, 꼭 틀린 말은 아니에요."
- 하루오카는 유타의 그림을 보면서 그 강사의 말을 떠올렸다.
아이는 눈에 보이는 '실물'이 아니라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그린다... 이 그림을 그렸을 때, 유타의 머릿속에는 '뭉게뭉게 피어나는 회색'이 떠올랐다는 건가.
유타의 마음을 알고 싶다. 하루오카는 그림을 들고 교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교실, 하루오카는 직원용 책상에서 크레파스와 도화지를 꺼냈다. 그리고 유타의 그림을 따라서 그려보기 ...
- 하루오카는 지금까지 얻은 정보를 다시 정리했다.
"유타 군은 가장 먼저 맨션 윤곽을 그렸어. 그리고 윤곽 속에 검은색 크레파스로 뭔가 그림을 그린 거야. 하지만 그 그림은 유타 군이 볼 때 '실패작'이었어. 그래서 흰색 크레파스를 덧칠해서 지웠지. 그 결과 흰색과 검은색이 섞여서 회색으로 떡칠된 거고 그 위에 '집'을 그려 맨션 그림을 완성시켰다..."
그럼 실패한 그림은 뭐였을까. 그걸 모르면 이 그림의 진상에 다다를 수 없다.
- 지금 자신이 조용한 주택가에 있다는 사실도 잊고 나오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온 힘을 엄지에 담아서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래도 분이 덜 풀렸다. 마음 같아서는 휴대전화를 땅에 내팽개치고 싶었다.
나오미는 아침부터 유타를 찾아 집 근처를 뛰어다녔다. 집집이 찾아가서 정보를 모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는 도중에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왔다. 유타의 담임 하루오카였다.
하루오카는 나오미에게 더없이 모욕적인 말을 꺼냈다.
- '망할 년! 내가 유타를 학대했다고...?'
너무 억울했다. 믿었던 선생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엄마 취급을 받았다.
'그럴 리 없잖아! 말도 안 돼! 유타가 태어나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손댄 적 없는데.'
'확실히 내가 어릴 때는 부모가 아이를 때리는 게 당연시되던 시대였어. 어머니한테 참 많이도 맞았지. 그래서 내가 부모가 됐을 때는 아이에게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했어.'
'내가 완벽한 부모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절대로 유타에게 손찌검을 하지는 않아. 그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어. 신께 맹세코.'
-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
'한번 더 거기 가고 싶어.'
- 다음 날 아침, 유타는 처음으로 혼자 외출했다.
무덤으로 가는 길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아버지를 따라서 걸었던 희미한 기억을 길잡이 삼아 걸음을 옮겼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길을 잃지 않고 고작 몇십 분 만에 도착한 건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유타는 아직 기적이라는 말을 몰랐지만, 마치 '뭔가가 이끌어주는 것 같았다.
- 남자는 나오미와 유타를 무덤 앞으로 안내했다.
'곤노 유키의 묘(今野由紀之墓).' ...이 글씨를 보는 건 1주기 법요를 올리고 약 5년 만이었다.
'곤노 집안의 묘'로 삼지 않은 건 유키를 여기에 홀로 내버려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나오미는 유키가 겁났다. 늘 저주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케시가 죽었을 때, 지하철로 한 시간이나 걸리는 곳에 무덤을 쓴 건, 다케시와 유키의 영혼이 서로 가까워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지금도 당장 유타의 손을 잡아끌며 여기서 달아나고 싶다.
하지만 그리움 어린 표정으로 무덤을 바라보는 유타를 보자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못마땅해도 유키는 단 하나뿐인 유타의 어머니다.
나오미는 작게 속삭였다.
"유타, 무덤에 두 손을 모아, 그렇지. 그리고 눈을 감고 속으로 말을 걸어보렴."
- 오후 2시가 지났을 무렵, 나오미와 유타는 공동묘지를 나섰다.
"유타, 이제 어린이집에 가자. 걱정 끼쳐서 죄송하다고 둘이서 선생님한테 사과하는 거야."
"... 응."
나오미에게는 사과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아끼는 감정에 휘둘려 마구 화냈지만, 생각해 보면 하루오카 나름대로 유타를 걱정해서 한 말이다.
앞으로도 유타 일로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화해해야 한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걸었다.
- 나오미는 휴대전화를 꺼내 어떤 웹사이트에 들어갔다. 다케시가 생전에 운영했던 블로그다.
'인터넷에 개인 정보를 공개하면 위험하다.'
나오미의 충고를 받아들여 다케시는 본명이 아니라 닉네임을 사용했다.
'렌.' ...닉네임을 왜 그렇게 지었느냐고 묻자, 다케시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가르쳐주었다.
"여기에는 일종의 트릭이 있어. 내 이름을..."
- 딩동.
추억에 잠겨 있던 나오미를 현실로 불러오듯 초인종이 울렸다.
시계를 보자 10시가 지났다. 이런 시간에 손님이라니, 이상하다.
등골이 오싹했다.
나오미는 발소리를 죽이고 현관으로 가서 외시경을 들여다보았다.
문 앞에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 교편을 잡은 이후로 미우라 요시하루는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쓴 적이 거의 없었다. 평일 낮은 수업에 쫓기고, 방과 후에는 학생의 진로를 상담하고 동아리 활동을 지도하느라 바빴다. 퇴근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시작하는 사무작업은 밤늦게까지 이어지기 일쑤였다.
휴일에는 졸음을 참으며 가족을 데리고 야외로 놀러 나가서 텐트를 치고,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웠다.
그뿐만이 아니다.
친구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몇 시간이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일자리 소개는 물론 가끔은 돈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학생, 가족, 친구... 그들의 행복이 미우라가 살아가는 보람이었다. 보답을 바란 적은 없었다.
- 다만 그런 미우라에게도 1년에 몇 번 자신만을 위한 날이 있었다.
집 근처 산에 올라 거기서 보이는 절경을 그림에 담는다. 그것이 미우라에게는 최고의 사치였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 하지만... 지금 미우라 앞에는 지옥이 펼쳐져 있다.
- [증언 ③ 미우라 요시하루의 아내]
... 남편이 죽은 일에 대해서요? 아직 실감이 안 나네요. 솔직히 부부 관계가 그렇게 원만하지는 않았어요. 육아 문제로 많이 다퉜죠. ...예를 들어 저희 아들은 집에서 책 읽는 걸 좋아하는데도, 남편은 늘 밖으로 데리고 나가 캠핑이니 바비큐니 억지로 시키고... 아들은 정말 질색했어요. 자식의 기분이 어떤지도 모르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면서 가족을 아끼는 좋은 아버지라니,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데도 정도가 있어야지... 죄송해요. 푸념하고 말았네요. ...분명 시간이 지나면 점점 슬퍼지겠죠. 이래저래 싫은 점은 있었지만, 제게는 단 하나뿐인 남편이었으니까요.
- [증언 ④ 미우라 요시하루의 친구]
미우라와는 미대 시절부터 친구였습니다. 졸업 후에도 미우라에게 이것저것 도움을 받았죠. 저는 일주일에 한 번 외부 강사 자격으로, 미우라가 교사로 있는 고등학교의 미술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네, 물론 미우라가 물어다 준 일감이에요. 박봉에 시달리는 제가 측은했던 거겠죠. 부업을 해서 생활비에 보태라더군요. 뭐, 그러니 고맙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음. 미우리를 좋아했느냐 하면... 어렵네요. 미우라는 너무 자기 위주거든요. 느닷없이 전화해서 내일 같이 하이킹 가자는 둥, 한잔하러 당장 나오라는 둥, 이쪽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제안하죠 ...뭐, 거절하면 되지만요. 하지만 그에게 신세를 지는 입장이다 보니, 싫다고 말하기는 힘들잖아요...
(취재: L일보·구마이 이사무)
- "음식물은 위장에서 세 시간에 걸쳐 소화돼 소화가 끝나면 위장은 텅 비지. 하지만 소화 도중에 사망해 위장이 활동을 멈추면 음식물은 위장에 남아. 다시 말해 음식물이 소화된 상태를 보면, 식사 후 몇 시간 만에 죽었는지 알 수 있는 거야. 미우라 씨는 식사하고 약 두 시간 30분 후에 사망한 걸로 추정됐어 미우라 씨가 '하나야기 도시락'을 먹은 건 14시 30분경. 그로부터 두 시간 30분 휴... 즉, 17시경에 살해당한 셈이야."
"그렇군요... 어? 잠깐만요. 미우라 선생님이 8부 능선에 도착한 건 17시 이후였잖아요."
"응, 요컨대 미우라 씨는 8부 능선에 도착하자마자 살해당한 거야."
- "회사에는 절대로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회사와는 관계없이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미우라 선생님 사건을 추적해보고 싶어요."
"추척하다니... 구체적으로 뭘 어쩌려고?"
"도요카와를 취재하고 싶어요. 미우라 선생님을 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직접 물어보고 동기를 알아내고 싶습니다."
구마이는 잠깐 생각한 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 회사에 비밀로 하면 문제는 없겠지. 하지만 난 반대야."
"어째서요...?"
"잘 들어, 체포는 되지 않았지만 도요카와는 범인일지도 모르는 자야. 그런 자에게 '사건을 조사 중입니다. 당신은 피해자에게 원한이 있었습니까?' 그딴 소리를 해봐. 사건이 파헤쳐질까 봐 두려워서 너한테 해코지할 위험성이 있어."
"..."
"기자는 위험한 직업이야. 그래서 저마다 자기 몸을 지킬 방법을 지니고 있지. 그건 간단히 익힐 수 없어. 경험이 필요한 법이야. 이와타 넌 기자 경험이 없거니와, 사회인으로서도 아직 미숙해. 위험한 짓은 하지 않는 게 현명해."
- "... 뭐, 꼭 도요카와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야, 잡담을 나누면 되지 않을까?"
"잡담이요?"
"도요카와는 예전에 미우라 씨의 도움으로 외부 강사 일을 했어. 매주 토요일에 미술부를 가르쳤지. 지금도 계속 강사로 일할 가능성은 있어. 넌 졸업생이잖아. 졸업생이 모교를 찾아가는 게 무슨 문제겠어? 기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반인으로서 도요카와와 접촉하면 돼. 만날 이유는 적당히 만들어내 그리고 잡담을 하면서 몰래 정보를 모으는 거야."
"그렇군요..."
"취재의 기본은 대화야. 일단 대화부터 시작해 봐."
- 다음 주 토요일, 이와타는 지하철로 30분이 걸리는 모교 근처역에 내렸다. 학교 다닐 때는 할아버지 집에서 매일 버스로 통학했으므로 이 역을 이용해 본 적은 거의 없지만, 역시 동네에서 그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와타는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
15분쯤 걷자 익숙한 목조 건물이 보였다.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운동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졸업하고 반년 만에 찾은 모교다. 이와타는 행정실에서 손님 명찰과 슬리퍼를 받아 교무실로 향했다.
복도에서 보이는 교실, 화장실, 계단... 하나도 안 변했다. 하지만 이와타는 어쩐지 불편한 기분이었다. 반년 전까지 당연하게 드나들었던 곳이 지금은 마치 다른 세상 같다. '넌 이제 여기 사람이 아니야.' ...서늘한 학교 건물이 어른이 된 나를 거부한다. ...그런 감각이었다.
- 준비하기는 간단했으리라.
단순한 트릭이다. 사실 이와타는 이 트릭을 알고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읽은 적이 있었다.
'피해자에게 억지로 음식물을 먹여서 사망추정시각을 속인다.' ...수많은 추리소설에서 사용된 고전적인 트릭이다.
- 하지만... 아니, 그렇기에 지금까지 이 트릭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럴 리 없다며,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라며 애초부터 그 가능성을 제외했다.
이 수법은 어디까지나 픽션에서만 성립할 뿐, 현실 세계에서는 그런 짓을 해봤자 경찰을 못 속인다.
왜냐하면 '위장에 남은 음식물' 말고도 사망추정시각을 알아낼 방법이 많기 때문이다.
- 그중 하나가 사후경직이다. 인간이 사망하면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굳어진 후 다시 풀린다. 그 속도는 거의 일정하다. 즉, 시체가 얼마나 경직됐는지를 보고 사망시각을 역산할 수 있다.
그 밖에도 각막이 얼마나 혼탁해졌는지 조사하는 방법, 정체된 혈류를 조사하는 방법 등, 사망시각을 추정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위장에 남은 음식물은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 써늘한 구치소에서 나오미는 무표정하게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이나 지났을까. 그 남자... 구마이가 나타나 나오미와 유타의 작은 행복을 빼앗은 후로,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계속 빼앗겨왔다. 행복해지려고 하면 반드시 누군가가 방해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흘러갔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어린 시절이다.
- 나오미는 자신이 복 받은 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집은 도쿄에서 땅값이 제일 비싼 곳에 있었고, 상냥한 아버지는 나오미를 사랑해 주었다. 그런 아버지 옆에서 늘 온화하게 미소 짓는 어머니는 피부가 뽀얗고 긴 머리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미인이었다.
참관 수업 때면 교실 뒤편에 늘어선 거무스름하거나, 뚱뚱하거나, 잔주름이 자글자글한 반 아이들의 어머니 사이에서 탁월한 미모를 뽐내는 어머니를 보며 나오미는 우월감을 ...
- 이웃의 시선에서 달아나듯 점점 집에 틀어박혀 지내게 됐다. 안 그래도 이웃들과 데면데면했던 어머니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독, 슬픔, 분노... 어머니는 자신이 끌어안은 부정적인 감정을 전부 나오미에게 풀었다. 툭하면 폭력이 날아들었다. 그래도 나오미는 참았다.
'꾹 참고 착하게 지내면 엄마는 언젠가 원래 엄마로 돌아올 거야.'
나오미는 멍든 손으로 쪼꼬삐를 쓰다듬으며 몇 번이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어머니가 기뻐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청해서 청소와 빨래를 했다. 힘들어도 늘 웃었다. 간단한 것밖에 못 만들지만 요리도 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좋아하는 우엉 볶음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모아놓은 용돈으로 재료를 사서 두 시간 만에 우엉볶음을 완성했다. 모양새는 별로였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다.
- 어머니는 접시 조각을 주우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빠 말고 네가 죽었으면 좋았을걸."
- 그 순간 깨달았다.
어머니는 변한 게 아니다. 원래 이런 인간이었다. 원래부터 나오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오미는 어머니와 단둘이 이야기하거나 놀았던 기억이 거의 없었다. 즐거운 가족의 추억은 전부 아버지가 만들어준 것이었다.
어머니가 다정하게 미소 지었던 건 곁에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에게 사랑받기 위해 다정한 어머니를 연기했을 뿐이다.
동시에 나오미는 자기 마음이 어떤지도 깨달았다. 나오미는 어머니를 '예쁜 엄마'라고 자랑스럽게 여긴 적은 있어도, 애정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두 사람이 가족으로 지낼 수 있었던 건 아버지라는 접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죽은 지금, 두 사람은 그저 여자와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곤노네는 나오미가 생각했던 만큼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다.
-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기로 했다. 미술대학 부근에 자리한 카페라서 단골손님은 대부분 미대생이었다. 미우라 요시하루는 단골손님 가운데 한 명이었다.
염색하지 않은 짧은 머리에 청바지와 흰색 셔츠라는 미우라의 수수한 차림새는 개성적인 미대생 집단에서 오히려 두드러져 보였다. 별것 아닌 잡담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어느새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놓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미우라를 통해 새 친구도 생겼다. 미우라의 미대 동기인 도요카와 노부오라는 청년이었다. 미우라는 도요카와를 늘 '천재'라고 평가했다. 결코 과장이 아니라, 아마추어인 나오미가 보기에도 도요카와는 그림을 남들보다 월등하게 잘 그렸다.
더 친해지자 미우라와 도요카와는 가끔 나오미의 집에 놀러 오곤 했다. 두 사람은 공부하느라 바쁜 나오미 대신 식사를 준비하고 집을 청소해 주었다.
- 셋이서 함께 보내는 시간을 즐기면서도 나오미는 어렴풋이 감을 잡았다.
'미우라와 도요카와는 나를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어.'
자만이 아니었다. 나오미는 거울 앞에 설 때마다 확신했다.
'난 어머니를 닮았어.' ...뽀얀 피부 윤기가 흐르는 긴 머리. 아름다웠던 어머니와 판박이였다.
- 어느 여름날 오후, 결판이 났다. 단둘이 무더운 방에 있을 때 미우라가 나오미에게 말했다.
"난 내년에 졸업하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선생님이 될 거야. 나오미,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평소 모습처럼 투박한 청혼이었다. 나오미는 당장 "응" 하고 대답했다. 도요카와도 분명 매력적인 남자다. 하지만 나오미는 미우라의 직선적인 성격에 반했다.
과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 이듬해 봄, 미우라와 나오미는 각자 다니던 학교를 졸업했다. 취직과 이사가 겹쳐서 정신없었던 탓에, L현으로 이사한 지 1년 후에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에는 도요카와도 참석했다. 조금 멋쩍었지만, 도요카와는 웃는 얼굴로 축하해 주었다.
- 결혼 생활은 힘들었지만 알찼다. 미우라는 고등학교 교사로 임용됐고, 나오미는 작은 병원에 조산사로 취직했다. 시설 직원이 적당히 꺼낸 말을 듣고 선택한 직업이었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자 조산사가 천직처럼 느껴졌다.
출산은 세상 남자들이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신성한 의식이 아니다. 몇십 시간에 달하는 진통에 몸부림치고, 고통에 겨워 울고, 악을 쓰고, 죽을 각오로 몸에서 아이를 끄집어낸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고문이다. 하지만 나오미의 눈에는 그러한 과정을 극복한 산모의 얼굴이 아름다워 보였다. 나오미는 출산에 임하는 임신부들을 정성껏 격려하고, 야단치고, 돕고, 칭찬했다.
- 몇 년 후, 드디어 나오미도 임신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아야 할지 고민됐다. 제일 큰 걱정은 어머니라는 존재였다. 어머니는 죽은 후에도 늘 나오미에게 들러붙어 있었다. 거울을 보면 어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난 엄마를 닮았어. 아이를 낳으면 그 여자와 똑같아지지 않을까. 애정이라고는 일절 없이, 아이한테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을까.'
그럴까 봐 너무 무서웠다.
그런 두려움과는 반대로, 아이를 낳아 훌륭하게 키워서 어머니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난 당신과 달라.' ...가슴을 쭉 펴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낳기로 결심했다. 나오미의 육아는 복수심에서 시작됐다.
- 출산 당일은 상상을 초월하는 난산을 겪었다. 기절할 것 같은 통증을 견디며 나오미는 무아지경으로 힘을 썼다. 분만대 위에서 갓난아기를 안자 몽롱한 머릿속에 그리운 감정이 되살아났다. 아주 오래전에 맛보았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행복. 소중한 생명을 지켜냈다는 기쁨. 마르지 않는 애정... 그렇다, ...바로 그때다.
어머니 시체 옆에서 쪼꼬삐를 끌어안았을 때와 똑같은 기분이었다.
어쩐지 섬뜩했다. 불길한 운명의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한 기분이었다.
- 아이 이름은 다케시'로 정했다. 남편이 지은 이름이었다.
임신했을 때 느낀 불안감... 어머니처럼 나도 아이에게 애정을 품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은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날아갔다. 나오미는 다케시가 정말 사랑스러웠다. 연약하고, 덧없고, 위태위태해서 나오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아들에게 애정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다케시 덕분에 나오미는 드디어 어머니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하지만 성장할수록 다케시가 여느 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극적'이라고 하면 많은 육아 선배들은 "우리 애도 어렸을 때는 그랬어" 하고 웃는다. 하지만 다케시의 소극적인 성격은 도를 넘었다. 나오미 외에 다른 사람과는 거의 의사소통을 하지 못했다.
초등학교에 올라가자 더 심해졌다. 반 아이들은 저마다 친구를 만들어 학교가 끝나면 밖에 나가서 기운차게 뛰놀건만, 다케시는 늘 혼자 집에 와서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다.
- 남편은 그런 아들이 마음에 안 드는지 가끔 야단쳤다.
"다케시! 사내놈답게 밖에서 기운차게 뛰놀아야지."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못 써. 친구도 많이 사귀고 그래야 해!"
"밖에서 이웃 사람을 만나면 큰 소리로 인사해! 꼴 보기 싫게 우물쭈물하지 말고!"
- 나오미는 남편의 교육 방침에 반대했다. 밖에 나가기 싫으면, 집에 있으면 된다. 남과 이야기하기 싫다면, 억지로 이야기할 것 없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면 트라우마 때문에 더 내향적으로 변한다. 그렇게 주장하면 할수록 서로 의견이 부딪쳐서 부부관계가 서서히 냉각됐다.
- 그러던 어느 날, 나오미가 부엌에서 요리하고 있는데 다케시가 겁먹은 얼굴로 품에 안겼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 이야기해보렴." ...다케시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한테 맞았어."
나오미가 즉시 남편에게 따졌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까 다케시한테 밖에 나가 놀라고 했어. 그랬더니 녀석이 혀를 쏙 내밀더라고. 부모한테 태도가 그게 뭐야? 지금 예의를 단단히 가르쳐놔야 나중에 가서 다케시가 고생을 안 해."
"하지만... 그렇다고 때릴 건 없잖아?"
"아니, 때릴 때는 때려야지. 아이는 열 살이 넘는 무렵부터 자아가 강해져. 말로만 혼내봤자 들은 척도 안 한다고.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다소 체벌도 해야겠지. 그게 부모의 사명이야."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됐다. '열 살을 넘으면 체벌하는 편이 좋다.' ...그딴 식의 논리는 처음 들어봤다.
남편은 예전부터 자신의 독특한 가치관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 완고한 성격이었다. 젊었을 때는 나오미도 남편의 꿋꿋한 성격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런 인간과 가정을 꾸리다니, 지옥이다.
- 그 후로도 남편은 걸핏하면 다케시를 때렸다. 나오미가 항의했지만 남편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쉬는 날에는 싫어하는 다케시를 억지로 캠핑에 데려가서, 먹고 싶어 하지 않는 고기를 잔뜩 구워 먹였다. 벌레를 질색하는데도 강제로 밖에서 재웠다. 다케시가 반항하면 예의가 없다며 머리를 후려쳤다.
남편에게 악의가 없다는 건 안다. 제 나름의 애정을 보여준 것이리라. 부모로서 사명감을 느끼는 것이리라. 그래서 더 골치 아팠다.
다케시가 너무 가엾다.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와 한 지붕 아래 지내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나오미는 너무나 잘 안다. 어느 시기부터 진심으로 이혼을 생각하게 됐다. 다케시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불안한 점이 있었다.
조정 이혼을 하면 어지간한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친권은 어머니가 가진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오미에게는 지울 수 없는 과거가 있다.
남편은 그 사실을 모른다. 어머니는 '병으로 죽었다'고 둘러댔지만 조사하면 금방 밝혀지리라. 그러면 법정에서 나오미가 불리해진다. 최악의 경우, 남편이 한부모 자격을 얻어 다케시를 데려갈 가능성도 있다.
- 이와타가 사망한 상황은 미우라 요시하루 사건 때와 완전히 일치했다. 경찰은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에 나섰다. 그런 와중에 미우라 사건의 중요 참고인 중 하나였던 도요카와 노부오가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로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유서에는 죄를 뉘우치는 말이 적혀 있었다. 경찰은 범인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수사를 종결했다.
- "그럼 경찰에게 말하는 수밖에."
"... 그것도 안 돼..."
"이만 단념해, 이 망할 년아. 학생 때 나랑 미우라를 저울에 달면서 실컷 가지고 놀다가, 미우라가 청혼하니까 대번에 나를 버린 거... 안 잊어버렸어. 난 말이야... 너희 부부의 행복을 박살 내는 꿈만 꾸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 나오미는 마지못해 '거래'를 받아들였다. 도요카와는 매주 토요일 밤에 나오미를 찾아왔다. 도요카와의 애무는 징그럽고 자기 위주라서 불쾌하기만 했다. 도요카와에게 남자를 탐하는 기질은 없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적어도 다케시가 피해당할 일은 없다. 나만 참으면...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비극이 발생했다.
- 아들이 결혼한다니 섭섭한 기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보다는 가족이 한 명 늘어나서 기쁜 마음이 더 컸다.
결혼식은 미리 의논했던 대로 다른 사람을 초대하지 않고, 셋만의 오붓한 홈파티로 대체했다. 식사를 마치고 다케시가 취해서 잠든 후, 나오미와 유키는 부엌에서 드문드문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유키가 갑자기 표정을 다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 저, 지금까지 숨겼던 일이 있어요."
"응? 느닷없이 무슨 소리야?"
"저... 미우라 선생님을... 좋아했어요."
"... 죽은 내 남편 말이니?"
"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좋아했죠. 당시는 단발머리였는데, 선생님의 부인이 긴 생머리라는 이야기를 듣고 기른 거예요. 지금 이 머리도 따지자면 어머님을 따라서 한 거죠."
유키는 그렇게 말하며 윤기 흐르는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
"1년 전에 다케시와 다시 만났을 때, 정말 깜짝 놀랐어요. 미우라 선생님이 살아서 돌아오신 줄 알고..."
"확실히... 닮았지. 요 몇 년은 특히나."
"아! 그렇다고 다케시를 미우라 선생님의 대용품으로 여기는 건 아니에요. 다케시는 다케시 그 자체로 사랑해요. 하지만 앞으로 어머님과 함께 살기로 했으니 역시 이건 말씀드려야 ...
- 나오미는 두 사람을 축복했다.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유키의 배가 커질수록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부풀어 오르는 걸 느꼈다. 정체는 모르겠다. 그러나 떳떳하지 못한 감정임은 분명했다.
- 어느 날 밤, 나오미는 꿈을 꾸었다.
품에는 작은 아기를 안고 있었다. 옆을 보자 다케시가 있었다.
"다케시, 유키는 어디 있니?"
"유키? 그게 누군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아이의 엄마잖아."
"하하하!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이 아이의 엄마는..."
다케시가 나오미의 얼굴을 가리켰다.
- 잠에서 깬 후에도 그 광경은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았다. 나오미는 자각했다. 나는 아직 어머니이고 싶은 것이다. 유키가 없는 세상에서, 아기의 어머니가 되고 싶은 것이다.
이 얼마나 역겨운 소망인가.
- 하지만 참으로 감미로운 꿈이기도 했다.
- 유키가 정기 검진을 받을 때는 반드시 나오미가 담당했다. 보통은 '시어머니'라는 이유로 그런 특별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오미가 일하는 산부인과는 보통이 아니었다. 의사는 원장 한 명뿐, 그것도 부모에게 병원을 물려받아 세상물정이라고는 모르는 금수저 도련님이었다. 업무 대부분을 조산사에게 떠맡기고,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병원을 돌아다니는 게 그의 일과였다. 그 결과 조산사들이 권력을 쥐게 됐다. 처음에는 거만한 동료들 사이에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꾹 참고서 일하다 보니 어느새 나오미가 조산사 중에서 제일 고참이 되었다.
병원에서 나오미에게 참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나오미가 생각하기에 유키의 출산에는 두 가지 과제가 있었다.
첫 번째는 연령. 유키는 이미 서른다섯 살을 맞이했다. 고령 출산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혈압이다. 유키는 혈압이 높았다. 특히 긴장했을 때는 한순간이지만 ...
- '난 과연 사회에 도움이 됐을까? 기자가 아무리 사건을 취재한들 범인을 붙잡는 건 경찰이야. 기자는 경찰의 등에 달라붙어, 흘러나온 정보를 대중한테 팔기밖에 못하지. 나는 이십 수년간 구경꾼들의 호기심을 채우는 데 힘쓴 것 아닐까?'
한 청년이 떠올랐다.
'반면에 이와타는 나보다 훨씬 의의 있는 일을 했어. 녀석은 경찰보다 먼저 진상에 다다랐지. 범인에게 습격당해 죽기 직전에도 정보를 남기려고 했고. 내 20년과 녀석의 몇 주일. 뭐가 더 가치 있을까?'
- 구마이는 그날 L현경으로 가서 한 남자를 만났다.
구라타 게이조... 기자 시절에 제일 사이좋았던 형사다.
- "살아남더라도 쓸쓸한 여생을 보내야겠지. 난 마누라도 자식도 없잖아. 물론 손자도 ...부탁이야. 죽기 전에 소원 하나 들어주는 셈 치고 좀 도와줘. 이왕 죽을 거면 가치 있게 죽고 싶어."
"...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겠어?"
- 며칠 후 구라타에게 전화가 왔다.
구마이의 부탁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단, 조건을 한 가지 제시했다.
"방검 조끼를 입어. 절대로 죽지 마. 약속이야."
- 2015년 4월 20일, 구마이는 도쿄의 호텔에 방을 잡았다.
오후 5시경, 회색 코트를 입고 밖으로 나갔다. 주택가에 외따로 자리한 편의점의 기둥에 몸을 숨겼다.
30분쯤 지났을까 모자(母子)가 편의점 앞을 지나갔다. 구마이는 어머니의 얼굴을 확인했다. 틀림없다. 곤노 나오미다. 구마이는 두 사람의 뒤를 밟았다. 미행을 시작하고 겨우 몇십 초도 지나지 않아 나오미가 뒤를 돌아보았다.
'눈치가 빠르군...'
- 몇십 년 전,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동자립지원시설에 들어간 소녀, 곤노 나오미가 그린 그림.
하기오는 일찍이 이 그림을 보고 갱생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가시처럼 뾰족한 나뭇가지는 나오미의 반항심과 공격성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무속 구멍에다 귀여운 문조를 그렸다. 하기오는 이 점에 주목했다.
'약한 존재를 보호하고 싶다는 다정한 마음이 표출됐다. 동물과 거듭 접촉함으로써 모성애를 키우면 반항심과 공격성은 서서히 약화될 것이다.'
그것이 하기가 나오미를 진단한 결과였다.
- 하지만... 지금 다시 그림을 보자 다른 해석이 떠올랐다. 혹시 반대였던 걸까. 나뭇가지는 문조를 보호하기 위해 뾰족해진 것 아닐까.
약한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적을 해칠 수 있는 인격. 이 나무는 바로 살인귀 곤노 나오미 그 자체를 상징했던 것 아닐까.
하기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옮긴이의 말
이상한 작가 우케쓰의 재기 넘치는 도전
복면 작가라는 말이 있다. 이름, 얼굴, 경력 등을 비밀로 해서 베일에 가려져 있는 작가를 뜻한다. 여기서 복면은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일본에는 실제로 복면을 쓰고 활동하는 작가가 있다. 바로 우케쓰(雨穴)다.
지점토로 만든 듯한 흰색 가면, 온몸을 감싼 검은 타이츠, 변조한 목소리. 온라인 세상에 모습을 공개하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신원은커녕 성별조차 알 수 없는(남자로 추정되긴 하지만),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복면 작가다.
우케쓰는 그 기괴한 겉모습에 어울리게 웹사이트 ‘오모코로'와 자신의 유튜브 채널 '雨穴'에 다양한 오컬트 콘텐츠를 올리고 있다. 특히 유튜브의 '미스터리 목록'에 올라오는 콘텐츠는 상당히 공을 많이 들였고, 내용도 아주 재미있다.
...
일단 각 장을 단편 미스터리처럼 읽을 수 있다. 그림을 통해 제시된 각 장의 수수께끼가 해당 장에서 완결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림과 글 속에 뿌린 단서를 솜씨 좋게 짜 맞추어 수수께끼를 풀어내고 독자의 허를 찌르는 진상을 선사한다. 그런 한편으로 각 장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큰 이야기를 완성한다. 단편 미스터리로 이루어진 장편 미스터리 소설인 셈이다. 그렇기에 텍스트가 늘었어도 가독성은 줄지 않았다. 마치 우케쓰가 제작한 영상 콘텐츠를 보듯 흡입력 있는 문장으로 독자를 책 속에 끌어들인다.
가독성 넘치는 문장, 절묘한 구성과 허를 찌르는 진상 등 그야말로 잘 쓴 웰메이드 미스터리 소설이라 하겠다.
소설은 그야말로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오락거리다. 하지만 이제 읽는 재미보다 보는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지 않나 싶다. 그렇듯 변화하는 세상에서 우케쓰는 읽는 재미와 보는 재미를 동시에 안겨주는 새로운 소설에 도전하는 중이다. 두 마리 토끼를 손에 넣은 우케쓰의 실력을 <이상한 그림>으로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2023년 7월
김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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