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류시은 / 박서련 / 조예은 / 최미래 / 함윤이
출판 : 와우포인트 퍼블리싱
출간 : 24.12.16
나날이 강퍅해지는 것 같다. 나이와 함께 쌓이는 아집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할 때는 낼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위안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무척 너그러우니까.
<지옥: 신의 실수>를 읽게 된 것은 제목 때문이었는지, 저자 때문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박서련 작가를 검색하다가 알게 되었던 것 같은데, 사실 실제로 읽은 건 몇 달 전이라 -리뷰를 꽤나 미뤄왔기 때문에- 자신할 수 없다. 넷플릭스에 동명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한창 유행일 때도 관심을 가지지 않다가, 원작도 아닌 앤솔로지로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다니. 순리대로 갈 길을 굳이 굳이 비틀어 흐르는 모양새가 최근의 나를 보여주는 듯하다.
원래는 5월은 미쓰다 신조, 6월은 박서련 작가로 정해두고 해당 작가의 작품만 읽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한 달이란 시간 안에 발표작들을 다 읽기에는 나의 집중력이 모자라서- 다소 경계가 모호하게 걸쳐 읽게 되었다. 그래도 한 작가의 작품 다수를 연이어 읽는다는 체험 자체는 그럭저럭 성공적으로 경험했는데, 확실히 한 작품씩 읽을 때와는 다른 맛이 있다.
집필된 시기도, 발표된 시기도 주제도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공유'되고 있는 부분. 어쩌면 작가로서의 코어에 가까울 어떤 것이 느껴지는 것 같다. (물론 모든 독서는 기본적으로 오독이라고 생각하므로 -저자 본인이 다시 읽는다 해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는 완전히 개인적인 감상이다)
<지옥: 신의 실수>는 여러 작가가 연상호, 최규석 작가의 <지옥>, <지옥: 부활자>와 같은 세계관을 바탕으로 쓴 단편 모음집이다. 원작이나 드라마를 접하고 읽었다면 훨씬 많은 것들이 보였겠으나, 내 경우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읽었지만 그 자체로 흥미로웠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몇 날 몇 시에 고통스럽게 죽는다'는 내용의 선언을 초월적인 형상에게서 듣는다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또 그것이 '나의 일'은 아니라고 믿고 싶은 다수에 의해 '단죄'로 해석되기란 얼마나 손쉬운가.
지금은 원작인 <지옥>과 <지옥: 부활자>를 모두 읽은 상황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백미는 '결국 그 현상은 무엇인가'를 설명하지 않는데서 빛난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현상으로 틀림없이 존재하지만, 명확히 정의할 수도 대응할 수도 없는 것들은 '고지'만이 아니다. 인식하지 못할 뿐, 혹은 인식하면서도 무시하고 있을 뿐 <지옥> 속의 '고지'와 '화살촉'과 '새진리회'는 이미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도'는 과연 이상적인 지향점인가?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지점은 여기라고 생각한다.
앤솔러지에 집중하자면, 개인적으로 가장 강렬하게 와닿았던 건 류시은 작가의 <지옥뽑기>였다. 뭐랄까. 제일 끝맛이 더러워서 좋았다. 표현이 좀 거칠지만 이 표현이 아니면 완독 직후의 감정을 표현할 수가 없다. 화살촉의 가장 이상적인 사례...? 같은 게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걸...? 자신이 이입하기 쉬운 쪽이 어느 쪽인가를 감각해 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박서련 작가의 <묘수>는 박서련 작가다워서 좋았다. 이 작품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내가 읽었던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라곤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마법소녀 복직합니다>, <몸몸> 등의 시니컬한 유머가 돋보이는 작품 위주라 결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현재 작가의 다른 작품 다수를 읽은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렇기에 <카카듀>, <채공녀 강주룡>, <폐월 : 초선전> 등의 현실에 기반한 '너무나 있을 법한' 이야기로 느껴져 다시금 좋았다. 한 작품을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차를 두고 전혀 다른 느낌으로 두 번 감상할 수 있어 즐거웠다.
조예은 작가의 <불경한 자들의 빵>은 '죄의 기한'에 대해, 그보다 본질적으로는 '무엇이 죄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다. 내가 조금 더 인류애에 차 있는 시기에 읽었다면 더 감동적으로 감상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아쉬워하며 읽었다.
최미래 작가의 <새끼 사자>는 흥미로웠다. 어떤 면에서는 가장 원작의 세계나 색깔과 결이 맞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개인의 파편화와 의식의 분절은 현대인에게 낯설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다. 가해와 피해, 본능과 초자아 등에 대한 생각의 흐름이 절로 번져나가며- 나 또한 가루로 흩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함윤이 작가의 <산사태>. 이 작품은 '고지'를 받은 자가 아니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영향을 받은 이의 이야기를 독특한 분위기로 담아냈다. 가장 마지막에 배치되어서일까, 내 경우에는 마지막 줄을 읽고 영화 <설국열차>의 엔딩이 떠올랐는데- '어떤 세계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남은 이들의 이야기' 같은, 일종의 후일담 같기도 한 이야기라 좋았다. 다른 작품들이 <지옥> 세계관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들을 풀어냈다면 이 작품은 자신의 세계관 안에 <지옥>의 설정을 품은 느낌.
읽는 순서에 관해서는, 딱히 추천하기가 어렵다.
나는 <지옥: 신의 실수> - <지옥> - <지옥: 부활자> 순으로 읽었고 아직 드라마는 감상하지 않았지만 만족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드라마 <지옥>이나 원작 <지옥>을 읽고 앤솔로지를 읽는 편이 더 맛깔나지 않을까 싶긴 하다.
끝.
연상호 - 발문 : '지옥 앤솔러지'를 시작하며
최규석 - 오프닝 만화 : 비공식 1호
류시은 - 지옥 뽑기
박서련 - 묘수
조예은 - 불경한 자들의 빵
최미래 - 새끼 사자
함윤이 - 산사태
'지옥 앤솔러지'를 시작하며 - 연상호(감독)
- 저는 앤솔러지 작품에 대한 동경이 있습니다.
제가 사랑했던 많은 작품들이 앤솔러지 형태로 새롭게 창작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세계관에 마치 자연 그대로의 생태계처럼 생명력이 부여되는 것을 지켜보아왔기 때문입니다. 넷플릭스와 작업했던 시리즈 <기생수: 더 그레이>도 그런 생각에서 작업한 작품입니다. 이와아키 히토시 작가의 명작 만화인 <기생수>를 저만의 상상력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일은, 그 세계관을 사랑하는 저에게 너무나 매력적인 작업이었습니다. 만화 <기생수>는 제가 작업한 <기생수: 더 그레이> 외에도 많은 파생 작품이 있습니다. 오오타 모아레 작가의 스핀오프 <기생수 리버시>가 있고, 여러 만화 작가들이 단편 만화 앤솔러지로 만든 <네오 기생수> 같은 작품도 있습니다.
-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소비되고 사랑받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원작 자체가 고전의 형태로 오랫동안 사랑받는 방식도 있고, 한 작품을 시작으로 다양한 파생 작품이 나오면서 그 세계관 자체가 견고해지는 방식도 있습니다.
- 저는 저와 만화가 최규석 작가가 함께 만든 <지옥> 세계관을 바탕으로, 소설가들과 함께 그 세계를 더욱 견고히 확장해 나가는 것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이번 앤솔러지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개성을 가진 작가들이 자신만의 비전으로 자유롭게 창작하길 바랐습니다. 물론 그런 앤솔러지가 완전한 완성도를 가진 세계관으로 확장된다는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앤솔러지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상상력이 하나로 묶인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 '지옥 앤솔러지'를 기획하며 어떤 제약이나 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자유로운 작가적 상상력을 펼쳐주길 요청했습니다.
- 시각 작업에서는 느끼지 못할, 그들의 내면에 대해 알게 된 듯합니다. <지옥>은 작중 인물들이 겪는 내면의 문제가 더욱 중요한 작품입니다. 어쩌면 이 세계관을 견고하게 만들 최적의 형태는 소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이번 앤솔러지는 류시은 작가님의 <지옥 뽑기>, 박서련 작가님의 <묘수〉, 조예은 작가님의 <불경한 자들의 빵>, 최미래 작가님의 <새끼 사자>, 함윤이 작가님의 <산사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섯 편 모두 <지옥>의 세계관 안에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담은, 완성도 높은 작품입니다.
이 앤솔러지에 참여해주신 다섯 작가님들에게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를 전합니다.
이제부터 '지옥'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새로운 세상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 <연상호 - 발문>
- 고은은 천사의 목소리를 미리 들었다. 그가 읊어준 고지의 내용을 기억했고, 지옥으로 인도해 줄 커다란 손의 감촉을 알았다. 저세상 존재에게 두들겨 맞는 통증과 몸이 불에 타들어가는 고통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지옥의 입구도 생눈으로 본 듯 의식 속에 각인되어 언제든 되새길 수 있었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선명한 색으로 채워진 기묘한 시공간. 한눈에 다른 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생경하고 이질적인 곳. 고은은 각오가 되어 있었다.
- 한동안 고은과의 겸상도 피하던 동생이 이제는 고은이 내미는 무화과를 거부감 없이 받아먹는다. 문을 걸어 잠근 좁은 방이 아닌 식탁에서 밥을 먹고, 이틀에 한번 샤워를 하고, 가까운 곳으로 외출을 한다. 한 달에 한 번씩 상담 치료를 받고, 스스로 신청해서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 입시까지 준비하겠다고 의지를 다지는 날이 와주었다.
- 오랜만에 걱정 없이 잠드는 밤이라고 생각하며 침대에 누웠다. 새벽에 더워서 한 번 깼을 때도 그저 마음이 잔잔하고 평온했다. 미지근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이제 괜찮아, 다 괜찮아, 방 안에 그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중얼중얼 되뇌었다. 좀처럼 잠이 다시 오지 않아 침대에 누워 휴대폰 화면의 스크롤을 내리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가까스로 눈이 감기려 할 무렵 어두컴컴하게 드리워진 커튼 사이로 희끄무레한 빛이 비쳐왔다. 방 안에 온화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울렸다.
"너는 삼십 초 뒤 지옥에 간다."
고은은 쨍한 빛에 눈을 찌푸리며 "네?" 하고 물었다. 얼굴과 상반신 형태로 어른거리는 빛은 대답 대신 서서히 ...
-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마치 실제로 겪은 듯한, 아니 실제보다 더 생생한 묘하게도 언젠가 일어날 일을 미리 겪은 것 같은... 언제 고지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고 여겨온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신기할 만큼 놀랍지 않았다. 지옥에 간다는 사실이 언젠가 죽는 날이 오리라는 사실만큼 순순히 받아들여졌고, 별일 없으면 내일도 출근할 것을 의심하지 않듯 자연스레 믿겼다. 고은은 자신이 예지몽을 꾸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미 일어난 일이 아니라면 반드시 일어날 일이었다. 다만 불시에 고지를 받을 날이 언제가 될지 몰라 조금 혼란하고 어수선할 뿐이었다.
- 한밤중 고은은 사람 없는 한적한 강가에 서 있었다. 수위가 높아진 여름의 강은 귀로 듣는 것만으로도 빠른 유속이 느껴졌다. 물 흐르는 소리에 사그락거리는 나뭇잎 소리와 매미와 맹꽁이 울어대는 소리가 얹어져 강가는 결코 고요하지 않았다. 전에도 이런 곳에 와본 적이 있었던가.
- "저기야."
갑자기 로은이 손을 뻗으며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브레이크를 밟았다.
- 차에서 내리자 잎을 늘어뜨린 버드나무 두 그루 사이로 자갈이 넓게 펼쳐진 강이 눈에 들어왔다. 고은은 자갈이 달그락거리는 강가를 걸었다. 로은이 갑자기 멈추어 설 때까지. 고은은 한동안 가만히 서서 강을 바라보는 로은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강 속에서 물길을 따라 자갈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미 소리와 풀벌레 소리 사이로 한 번씩 사람 비명처럼 새가 울었다. 간헐적으로 바람이 세게 불어 강가의 습기가 코로 스며들었다. 젖은 나무뿌리 냄새와 풀냄새, 시시각각 달빛에 반짝이며 빠르게 흐르는 물줄기, 검은돌 사이로 스미는 피와 등유, 떨어져 나가는 살점, 단죄를 받은 두 눈과 벌겋게 타오르는 불길... 모든 감각은 어느 지워버린 여름을 가리키고 있었고, 고은은 로은의 확언대로 알 수밖에 없었다. 그건 예지몽 같은 것이 아니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고은은 허리를 꺾고 바닥에 꿇어앉아 눈알처럼 둥근 조약돌더미 위에 아이스크림을 게워냈다.
- 고지받은 사실을 숨기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목격자의 말을 거짓 증언으로 몰아가다 법정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보았다. 그럴 만했다. 고은의 회사 인사팀에서도 고지를 받은 사실은 분명 입사 지원자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니까. 지원자가 고지를 받은 적은 없는지 비밀리에 레퍼런스 체크를 해보라는 지시가 윗선에서 내려오기도 했고, 실제로 이전 회사에서 몇 년 뒤 시연을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인사상 불이익을 받고 퇴직한 지원자가 같은 이유로 고은의 회사에 채용되지 않은 사례도 있었다. 물론 그 어떤 회사도 부당한 일을 행사할 때 곧이곧대로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 어쩌면 임예준도 우기는 인간 중 하나로 취급되었으려나. 그는 심지어 '증거' 영상이 떴는데도 불구하고 아니라고 잡아뗐으니까. 시연 시기가 언제냐고 본인도 모르는 사실을 추궁당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저기서 시달렸겠지. 새진리회나 화살촉 같은 곳에서 귀찮게 했을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로은이 고통받은 일에 비할까 싶었지만, 고은은 ...
-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기꺼이 손에 피를 묻히겠다고 다짐했다. 로은은 고은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약속 시간을 스물일곱 시간이나 늦추었으나, 임예준은 순순히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겁도 없이, 무방비한 모습으로. 고은과 로은은 계획대로 놈을 항거불능 상태로 만든 뒤 차 트렁크에 구겨 넣었다. 자매가 머리를 맞대고 힘을 합치니 약간의 부침은 있어도 못할 일이 없었다. 차를 몰고 몇 시간 동안 알아본 인적 드문 강으로 향했다. 그리고 준비한 도구들을 이용해 시연을 당한 것처럼 보이도록 처리했다. 페이스 아이디로 휴대폰을 열어 삭제할 것들을 꼼꼼히 체크하고, 인스타그램에 평소 그의 천박한 말투를 응용해 간단한 유서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결국 그가 영상에 찍힌 대로 시연당했다고 여길 수밖에 없도록.
- 그러니까 그 꿈은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일어난 일이었다. 저지를 미래가 아니라 저지른 과거였다. 부활로 어떤 특별한 예지력을 얻은 것이 아니라, 지워버린 과거가 생생한 악몽으로 튀어나온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소용없는 일이라고 했던 거구나. 역시 로은은 허튼 말을 하지 않는다. 고은에게라면 더더욱.
- 고은은 서서히 차오르는 기억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기억이 되돌아올수록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사람을 죽였는데 마음이 편해지다니. 살인을 했는데 잘했다는 생각이 들다니. 내내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얼굴 근육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임예준의 부활 가능성은 이제 희박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사라졌다. 기특하게도 과거의 우리가 싹을 뽑아준 덕분이었다. 손에 더러운 피를 묻혀가며 다시 돌아올 가능성 없는 '진짜 지옥'으로 인도해 주었다.
- 미지근한 강바람이 불어왔다. 고은은 손등으로 입을 닦고 조약돌 더미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 손으로는 문어 인형의 말랑한 머리를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로은의 손을 찾아 잡았다.
"미안해."
"뭐가?"
"혼자만 그 일을 잊어서."
- 어떻게 혼자만 그 일을 잊었을까. 언니만 믿으라고, 공범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하고 다짐했는데. 고은은 오로지 그 사실 하나만 신경 쓰였다. 동생을 끔찍한 지옥 속에 혼자 둔 사실 하나만 아프도록 중요했다. 역시 자신은 지옥에 ...
- <류시은 - 지옥 뽑기>
- "마지막으로 물을게. 정말 괜찮아요?"
방지민은 붓을 세우고 의뢰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의뢰인은 방지민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딴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냐고, 그 사람 지옥 가도."
지옥 방지민의 입에서 핵심적인 단어가 나오자 총기 없던 의뢰인의 두 눈에 빛이 돌아왔다. 의뢰인은 대답을 곧장 내놓지 못하고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정말 전형적이다. 방지민은 지루함을 내색지 않으려고 왼손으로 제 허벅지를 꼬집으며 생각했다. 어차피 대답은 뻔한데 이제 와서 뭘 고민하는 척이냐. 잠깐 더 고민하면 조금이나마 착한 사람이 된 기분이라도 드나. 방지민은 조심스레 눈동자만 굴려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를 쳐다보았다. 속으로 셋 셀 때까지 말 안 하면 그냥 가라고 해야지. 의뢰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며 작은 소리로, 그러나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방지민이 입속으로 둘까지 헤아렸을 때였다.
"네, 죽여주세요."
- 그럴 줄 알았다. 그냥 가라 했어도 소매 붙들고 잘못했다, 부적 제발 써달라 빌었겠지. 전형적이야, 이런 반응까지도 너무너무 전형적이야. 방지민은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바로 하셔야지. 제가 죽이는 게 아니고, 손님이 죽이는 것도 아니고, 죽게끔 하는 거예요."
"아, 맞아요. 죽이는 건 그... 사자? 사자죠."
"그렇죠. 그게 달라."
방지민은 참기름에 갠 붉은 경면주사 물감을 붓 끝에 적시며 툭 던지듯 덧붙였다.
"내가 무당이지, 킬러는 아니잖아요."
- 그럼요 그럼요, 맞아요 맞아요. 의뢰인은 제 턱 앞에 양손을 마주 모아 비비며 고개를 조아렸다. 영검한 무당 앞에서 작은 실언을 했으니 마땅히 그런 동작을 취해야 한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방지민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이래서 무의식이 무서워,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그래야 한다고 가르쳐준 적도 없을 텐데 알아서 저러는 게. 몸을 앞뒤로 흔들며 손을 비비는 의뢰인을 못 본 체하며 방지민은 누런 괴황지를 펼쳐 한가운데에 손바닥만 한 원을 그렸다. 세필붓으로 거침없이 그린 동그라미는 기세가 좋아 보이는 필치에다 컴퍼스로 그린 것처럼 모양이 정확했다. 의뢰인이 저도 모르게 와아 하고 내뱉은 작은 탄성에 방지민은 기고가 만장해졌다. 이쯤이야 기본이지. 얼마나 많이 연습한 건데.
"이런 거는 재액호출부라 해서, 오래 갖고 있을 물건 못 돼."
하도 많이 만들어봐서 눈 감고 써도 스스로 획이 달리는 부적이다. 방지민은 물 흐르는 듯한 손놀림으로 원 둘레에 붉은 글씨를 그려 넣으며 경고했다. 의뢰인은 꿇은 무릎 위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불안한 듯 물었다.
"그럼 어떡하죠?"
"건네줄 사람 얼른 건네주고, 그날은 집에 와서 눈에 인공눈물 넣고, 입 소금물 가글하고 집에 소금통 하나 있죠? 소금통을 귀에다 대고..."
- "아니, 중이염 걸릴 일 있나?"
방지민이 혀를 끌끌 차자 의뢰인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부끄러워서도 그렇겠지만 한술 더 떠 옅은 모멸감을 느끼는 듯한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이 무당, 아까부터 말이 조금 짧은데? 하는 불만이 적나라했다. 척 보면 알지, 눈칫밥으로 먹고산 게 몇 년인데. 방지민은 아차 싶은 내색을 숨기며, 그렇다고 쫄았다는 티를 내진 않으려 애쓰며 적당히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소금통 차카차카 흔들면서 소리를 들으세요. 그러고서 이 부적 본 적 없고 입에 담은 적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셈 치는 거예요."
- 규칙은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좋다. 의미가 모호하면 금상첨화다. 자잘하고 쓸데없이 많은 의미불명의 규칙들이 의식을 의식답게 한다는 것을 방지민은 잘 알고 있었다. 의뢰인은 좋은 걸 배웠다는 듯 아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근데요 선녀님, 제가 그 새끼하고 연락이 안 되거든요. 만나야 이걸 줄 텐데, 어떡하죠."
이마저도 전형적이긴. 이런 케이스에 대한 솔루션도 방지민에게는 별것이 못 되었다.
"빌라나 아파트 같은데 공동 현관 우편함 있잖아요. 거기 투입구 있죠, 우편물 집어넣으면 열리는 그 뚜껑 뒤에다 딱 붙여놔요. 절대 못 찾아. 우편함이 어떻게 생겼지? 네모 모양이죠? 그거를 작은 집이라고 보는 거거든. 집에다 부적 넣은 거랑 똑같은 거예요. 단점은, 가족들하고 같이 살면 표적 대신에 가족들한테 횡액이 끼칠 수가 있다는 거."
"다행이다. 그 새끼 원룸에서 혼자 자취하거든요."
의뢰인은 정말 마음이 너무나 놓인다는 듯 가슴을 들썩이며 긴 한숨을 내쉬고는 묻지도 않은 소리를 했다. 다행은 뭐가 다행이람, 누구 하나 꼭 지옥 가길 바라는 험한 마음 품고서는 죽는 게 그 새끼든 그 새끼 부모든 뭐 그리 다르다고. 의뢰인은 쾌재를 부르며 신당 문을 나섰고 방지민은 소반 밑에 두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복채는 계좌이체로 받고 수입 일정량으로는 주식을 사는 게 방지민의 철칙이었다.
이런 썅 또 떨어졌네.
주식 앱을 켠 방지민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 그런데 그 죽음이 '시연'의 대상이 되자, 그리하여 피할 길 없이 그 죽음을 목격하게 되자, 방지민은 당황했다.
- 살인이다.
피가 튀고 살이 끓는 살인이 방금 실시간으로 중계됐다. 비록 그 범행의 주체는 초자연적인 존재지만 피해자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인간. 범행에 휘말린 무작위의 타인들까지 상해를 입었다. 이게 살인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런데도 이게 방영됐다는 건 상황이, 세상이 돌이킬 수없이 바뀌어버렸다는 의미가 아닐 수 없다는 걸 방지민은 직감했다.
이용할 수 있겠다.
이거 써먹을 수 있어.
- 아이디어가 떠오른 건 위화감이 온몸을 쓸어내린 직후였다. 신이 내린 배우까진 아니어도, 신 내린 척이라면 나도 할 수 있어. 손끝이 떨리는 이유는 보고도 믿기 어려운 참상을 목격해서인지, 조금 전 떠올린 아이디어가 대박이라서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 방지민은 검색창에 정진수의 이름을 입력했다. 고지가 뭐고 시연은 뭔지, 고지의 천사와 지옥의 사자는 어떻게 다른지, 지금까지 어떤 사례들이 있었는지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방지민은 신의 의도를 전하는 대리자 정진수는 믿지 않았지만 고지 사례 연구자 정진수의 말에는 귀를 기울였다. 남들보다 빨리 이 현상에 대해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해 있을 때 나름의 이론과 체계를 만들어 무지에서 벗어난 선지자처럼 보여야 했다.
정진수가 그랬듯이.
그래, 그 신이 내린 배우가 그랬듯이 말이다.
- 손님은 익명 채팅 앱을 이용해 받는다. 방 제목은 개발자 출신 무당 명왕선녀. 방 설명에는 '간절한 소원 성취, 부적 써드립니다'라고 써두었다. 아무렴 죽이고 싶은 새끼한테 사자를 붙여 대신 죽여드리는 부적이라고 쓸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익명으로 활동할 수 있는 커뮤니티 사이트나 SNS 등지에는 손님인 척하며 직접 쓴 후기를 여럿 남겨두었다.
[개쓰레기 구남친 고지받은 썰. 친구들이 그렇게 헤어지라고 말렸는데도 나 혼자 눈 뒤집혀서 만나던 남자가 있었거든. 난 진짜 결혼까지 생각했는데 이 새끼 알고 보니까 ... ]
- 이게 다 마케팅이지, 바이럴 마케팅. 그런 차원에서는 댓글 모니터링도 업무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 야, 사이다 바가지로 퍼먹은 느낌이다. 역시 신의 의도는 정확하군요. 글 보니까 나이 별로 안 많은 것 같은데 고생 많았고 앞으로 쓰니한테 좋은 일만 있길. 물론 긍정적인 댓글만 달리진 않는다. 신의 의도는 지랄. 주작을 멈춰주세요. 사람 죽는 걸로 기뻐하는 너도 똑같음. 관리자님 안 계세요? 게시판 성격에 안 맞는 글 불쾌합니다. 우습게도 부정적인 댓글이 많을수록 문의 쪽지도 많다. 그 무당은 누군지, 어떻게 예약하면 되는지, 복채는 얼마쯤 되는지. 방지민은 답장으로 명왕선녀 채팅방 링크를 보낸다.
- 상담 예약 성사율은 사할 정도. 일대일 채팅방에 들어와 다짜고짜 자기 나이나 자기가 지금 하는 생각을 맞혀보라며 신기를 시험하는 인간, 욕설을 퍼붓거나 혐오스러운 이미지를 보내고 바로 퇴장하는 인간들을 제외하면 거의 백 퍼센트에 가깝다. 인터넷에 떠다니는 글을 보고서 글 속의 무당을 만나고 싶어 굳이 글쓴이에게 쪽지까지 보내는 수고를 감수하는 인간이라면 십중팔구 하루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싶은 존재가 있게 마련이고 그런 간절함을 품은 ...
- 사부는 정말로 시연을 받기라도 한 듯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불안감이 잦아들자 방지민은 방호부를 새로운 사업 아이템으로 사용하면 어떨지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난 혹시 천재가 아닐까, 위기를 기회로 삼기의 천재? 그러나 방지민이 방호부를 쓴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고지를 피하는 방호부라면 이미 다른 데에서도 많이들 팔고 있어 경쟁력이 없었고, 만에 하나 방호부를 사고도 고지를 받는 사람이 나타나면 뒤탈이 있을 게 뻔했다. 원래 팔던 재액호출부가 독약이라면 방호부는 백신이니까. 남에게 먹일 독약을 사는 사람의 마음과 제 건강을 지키려고 백신을 맞는 사람의 심정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몰래 독을 먹인 사람은 표적의 몸에 독이 퍼지는 걸 지켜볼 인내심이 있지만, 백신을 맞고도 병에 걸린 사람은 자기의 생활습관을 반성하기보다 곧장 백신을 탓하게 마련. 실상 방지민이 파는 것은 독약도 백신도 아닌 맹물이나 마찬가지였으나 괜한 후환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 <박서련 - 묘수>
- 대기업 식품개발팀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다. 모카빵 레시피를 사겠다며 거액을 제시해 왔지만 어차피 홀로 죽을 마당에 큰돈을 버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손님이 늘었음에도 만드는 빵의 양을 늘리지 않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지금 수임에게 중요한 것은 목숨이 다하는 날
가지 보통의 평화를 지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소복한 눈 위에 피를 흘리는 것뿐이었다. 수임은 매일 자기 전 사람들에 하는 신이 아닌, 생김새도 모르고 이름도 없는 신에게 이브날 폭설이 내리게 해달라고 빌었다. 늙은이 죽는 마당에 그 정도는 들어줘야지. 아니면 신이란 없는 거고. 있어도 무능한 것이고. 종교인들이 들으면 기함할 비아냥도 빠뜨리지 않았다.
- 수임의 시연일이 가까워질수록 줄을 서는 손님은 더욱 늘어났다. 통행이 불편하다며 근방 주택가에서 민원이 들어올 정도였다. 오랜 기다림에도 빵을 사지 못한 이들은 돌변하여 침을 뱉고 욕설을 뇌까렸다. 어떤 이는 수일의 손을 덥썩 잡으며 응원과 위로의 말을 건넸고, 어떤 이는 수임의 손이 닿을까 두려워 잽싸게 봉투만 가로채 도망쳤다. 거리는 더러워졌고, 단골들은 아쉬워했다.
- <조예은 - 불경한 자들의 빵>
- 너 공포가 무슨 뜻인 줄 아냐? 하긴 네가 알긴 뭘 알겠냐. 배워먹었어야 알지. 공포라는 단어는 말이야, '두려울 공'에 '두려워할 포'를 쓴다. 두려운 거랑 두려워하는 거. 이 두 개가 같아 보이는데 완전히 달러. 두려운 거 느껴봤지? 새끼야, 너 겁 많잖아. 경기장 들어가면 그냥 저절로 떨리잖아. 그게 두려운 거. 몸에 쫙 끼치는 거. 자기가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지 이게 어떤 감정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완전히 휩싸인 상태. 그거야. 그러면 두려워하는 건 뭐냐. 뭔지 아는 거야. 내가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있구나, 머리로 이해하는 거야. 차이점을 알겠냐?
- 그러면 딱 대답해. 너 지금 두렵냐? 뭐가 두려운데? 왜 말을 못 해. 이해는 했냐? 눈 똑바로 떠 이 새끼야. 너를 혼내는 게 아니야. 어차피 두려울 건데 뭐가 다른가 싶지? 달라 이 새끼야. 다르다고. 뭣도 모르고 벌벌 떠는 거랑 내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구나, 체감하고 있구나, 두려움 속에서 두, 려, 움, 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구나, 아예 다른 거라고. 두렵고 또 두려워하는 게 합쳐져야 진정한 공포가 되는 거야. 자기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거. 그게 관건이라고.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이제 알겠냐?
-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김지환의 요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요소. 혹은 물질.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태지, 김지환은 생각했다. 김지환이었던 것이던가. 김지환이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과 별개로 요소들은 점점 모여 하나로 뭉쳐졌다. 멀리서 바라보면 벌떼가 몰려들어 거대한 무리를 형성하는 것 같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들은 벌떼보다 잿가루와 비슷했다. 김지환을 이루던 영혼, 기억, 감정, 땀, 살과 피였던 것이지 않을까. 아마도. 김지환은 평소 잿가루와 비슷한 부스러기가 되어 흩어져 지냈다. 기억을 넘나들며 시공간을 헤맸다.
- 속에서 불이 탁탁 튀지. 내가 두려워하고 있구나, 그걸 제대로 느껴. 가봐.
그날 김지환은 첫 경기를 화려하게 마쳤다. 코치의 말이 맞았다. 상대를 타격할 때마다 불씨가 탁탁 튀었다. 불씨는 불꽃이 되고 김지환은 불 그 자체가 된 것처럼 경기장을 휩쓸었다. 경기가 끝난 후에는 아무도 모르는 지하 깊숙한 창고에 들어가 울었다. 지하 경기장보다 더 아래, 휴대폰 불빛이 없으면 계단도 문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김지환은 경기가 끝날 때마다 그곳에서 눈물을 훔치고 숨을 고르다가 올라왔다. 현재 요소로서의 김지환, 아니 바스러진 김지환의 요소들은 경기장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랬지. 거기서 나는 인생을 배웠지. 공포는 별 거 아니야. 두렵고 또 두려워하는 것. 삼촌은 그걸 알려줬어. 별것도 아닌 새끼가 진짜 공포가 뭔지도 모르면서.
- 김지환은 수많은 요소로 흩어져 여기저기 오만가지 기억에 머문다. 그중에는 진짜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기억은 원래 그래. 진짜 있었던 일에 착각이 끼어들고, 기억인 줄 알았는데 전부 착각에 불과한 것도 있다. 기억은 암기력이나 경험보다도 믿음의 문제에 가깝겠어. 진짜 있었던 일이라고 믿으면 진짜 기억이 되어버리니. 김지환은 또다시 부스러지고 흩어지면서 기억에 머물고, 또 다른 기억으로 간다. 부름이 있기 전까지. 그렇게 떠돌고 헤매다가 착각을 진짜 기억으로 만들어. 이건 나의 일인가. 저주인가. 업보인가. 삼촌은 내게 재능이 있다고 했다. 그건 사실일까. 나는 나의 재능 때문에 사자가 되어버렸나.
- 세상은 나를 버렸지만 나는 세상을 구하는 데 일조한다. 화살촉에 들어가 활동하던 시절 김지환은 정말 그렇게 믿었다. 어두운 새벽부터 해가 떠 오는 아침까지 경기를 뛰고도 에너지가 남아돌던 때였다. 번 돈을 쓰며 즐기는 방법도 있었겠으나, 김지환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형 요새 돈 잘 번다면서요. 소문났어요. 이민성이 연락을 해왔다. 가출팸에서 만나 친하게 지냈던 동생이었다. 김지환은 이민성이 햄버거 세트 하나에 단품 버거를 두 개 더 추가해 먹는 걸 바라보았다. 다른 애들은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에 이민성이 말했다. 뿔뿔이 흩어졌죠. 다른 팸 간 애들도 있고, 업소 들어간 애들도 있고.
- 눈을 뜨고서도 한 시간이 넘도록 자신이 다시 깨어났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김지환의 요소들이 가장 많이 머문 기억의 장면은 여기였다. 생각이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고, 요소는 또 다른 요소들로 쪼개졌다. 사자가 된 김지환이 가장 망설이며 지나치지 못한 기억. 부활은 기회였을까. 사자가 되지 않고 인간답게 생을 끝낼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을까. 다르게 살았더라면, 부활을 다르게 이용했더라면 내가 천 개 만개 흩어지고 다시 뭉쳐지기를 반복하며 헤매지 않을 수 있었을까. 사자는 뭘까. 이 짓을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해야 할까. 여긴 어딜까. 나는 누굴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김지환은 가능성에 붙잡혀 있었다. 만약에 한 번 더 부활한다면, 저 장면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산다면.
- 지하 창고에서 깨어난 김지환은 경기장으로 올라갔다. 텅 빈 무대와 관객석을 걸었다. 관객석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다가, 무대에 직접 서보기를 반복했다. 김지환은 가장 뜨겁게 살아 있던 곳으로 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소문 끝에 찾아간 새 경기장은 물류창고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폐공장이었다. 삼촌은 조금 늙었지만, 여전히 코치로서 ...
- <최미래 - 새끼 사자>
- 출발했는데도 고속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세상이 망해가고 지옥발 고지가 심심찮게 일어나도 사람들은 주말마다 서부간선도로를 타고 바다로 향하거나 자유로를 통해 철새들을 보러 갔다. 휴대폰 지도 속 붉게 칠해진 길을 보다가 다시금 문자를 복구하고, 한 번 더 영태라는 이름을 눈에 넣었다.
영태. 장영태.
- 군청이 있는 읍내를 지나 봉오산 일대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한 시 반. 점심시간이었으나 배는 고프지 않았다. 그래도 사생결단을 내려면 몸 안에 무엇이든 채워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곯이 소리가 대결의 순간 울려 퍼지면 그 민망함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수산나는 그런 상황에서 얕게 웃는 융통성조차 없는 애였다.
- 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왜 배낭을 뒤졌는지는 알 만했다. 그럼직한 세상이었다. 고지를 받은 이들이 죽겠다며 여기저기 찾아들고, 고지를 받은 이를 찾겠다면서 또 다른 인간들이 슬금슬금 기어들었다. 설사 고지를 받지 않았어도 세상 돌아가는 꼴에 덜컥 겁이 난 사람들이 인적 드문 곳에 가서 목을 매달거나, 남의 목을 매달기 위해 여기저기로 떠나곤 했다.
백반집 사람들이 무슨 심보로 배낭을 열었을지도 상상이 갔다. 기대 반 걱정 반이었을 것이다. 배낭 속에 플라스틱 약통이 가득하거나 질긴 밧줄이 둘둘 말려 있지 않은가 궁금했을 테다. 만일 내가 확실히 목숨을 끊을 듯 보였다면 경찰서든 병원이든, 혹은 새진리회든 화살촉에게든 연락을 넣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생을 하직할 작정으로 푸짐하게 식사하던 여자의 목숨을 구해낼 생각이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감히 신을 거스를 작정을 한 여자를 벌줄 생각이었거나. 이쪽이든 저쪽이든, 바득바득 하나의 선행을 베풀고, 그 선행이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여러 끔찍한 운명에서 비켜나게 해 줄 면죄부가 되게 해달라 기도했을 터였다. 잠깐 멈춰서 숨을 골랐다.
- 보육원은 꽤 오랜 시간을 버텼다. 성인이 되어 보육원을 떠난 아이도 여럿 있었고, 도중에 회개했는지 혹은 사정이 핀 건지 돌아온 가족이 도로 데려간 아이도 있었다.
나와 수산나, 영태는 그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남들이 오든 가든 우리는 수녀님들 곁에 머물렀다. 당번을 정해 밥을 주던 토끼들이 여덟 마리 정도 죽거나 달아났으며, 그중 살아남은 새끼들이 자라나 또 새로운 새끼를 낳았다. 그사이 우리의 몸은 점차 부풀어 올랐고, 길쭉해지거나 단단해졌다. 자라나는 내내 우리는 보육원과 이웃한 마을이나 읍내, 그리고 뒷산 부근을 함께 맴돌았다. 수산나와 나는 늘 가운데에 영태를 끼고 다녔다.
- 영태에게는 특별한 구석이 많았다. 이름부터 그랬다. 수산나와 에스더는 성당이 지어준 이름이었으나, 영태의 이름은 성당 바깥에서 온 것이었다. 영태의 어머니는 자신의 사진과 함께 영태의 이름 세 글자를 반듯하게 보관해 두었다. 전 재산을 박박 긁어모은 듯한 기부금 또한 맡겼다. 그것은 아이를 제대로 생각하는 가족이 할 법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영태는 우리 중 유일하게 진짜 이름을 가진 아이였으며, 가장 덜 버림받은 아이였다.
- 수산나와 내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보육원에서 자라는 내내 우리는 성가와 칠성사 그리고 낯선 사람을 조심하는 방법을 반복하여 배웠다. 모르는 이가 준 음식은 그중에서도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돗자리를 펴고 앉아 식사를 준비하는 여자의 인상이 너무 온화해 보였고, 3층짜리 도시락에서 풍기는 냄새는 기막히게 절묘했다. 우리는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바위 끄트머리에서 서성였다.
- 먼저 돗자리에 앉은 이는 역시 영태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누굴 의심할 줄도 몰랐고, 세상이 저에게 호의적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유부초밥이며 소시지, 보온병 뚜껑에 따른 주스 등을 빠르게 먹어치웠다. 나와 수산나는 조심스레 영태 옆에 앉았다. 여자 역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안심해도 되겠지, 우리는 그런 눈길을 주고받은 후 김밥에 손을 뻗었다. 모든 게 맛있었다. 이모님이 만들어주던 음식과는 사뭇 다른 맛이었다. 기름이 가득했고 짠맛과 단맛이 넘쳐흘렀다.
감자튀김도 먹어. 여자가 또 다른 상자를 열며 말했다. 내가 직접 튀겼어.
- 전혀 모른 채 그 문장을 따라 해보았다. 사자들의 손바닥이 토해내는 불길을 바라보며 영태는 다시금 그 기도문을 되새겼다.
이윽고 지옥이 시작되었다.
- 그날 영태에게 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실은 영태 역시 무엇 하나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나와 수산나가 지난 이십 년을 도무지 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우리 중 누구도 영태가 겪은 지옥을 상상한 적 없다는 사실이었다. 지옥은 우리의 예상과도 기대와도 달랐다.
- 어느 순간부터 나는 수산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옆얼굴이 서서히 무너지는 과정을 내내 지켜보았다. 이마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비탈을 타고 바위와 흙, 나무가 쏟아지고 뒤집혔다. 그 산사태는 영원토록 끝나지 않을 듯 보였다.
"왜 되살아났는지는 나도 몰라."
영태가 말했다.
"애초에 왜 지옥이 나를 불렀는지도 모르겠어. 내 죄가 그토록 큰 것이었을까? 어쩌면 아무 의미 없는지도 몰라. 그냥 신의 실수일지도 모르지."
- 침대 위 작은 창으로 노르스름한 빛이 스며들었다. 해가 뜨는 중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창 너머의 풍경을 보자 얕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무너진 성당과 잔해만 남은 양옥집 그리고 오래전 부서진 토끼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 그 너머로 내가 세워둔 차가 보였다. 그제야 어제 본 창고가 떠올랐다. 등 뒤에서 영태가 말했다.
"여기서 이 년 정도 살았어."
내가 비켜서자 영태가 창문 앞에 섰다. 눈을 찌푸린 채 손바닥만 한 창 너머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다. 나는 시간 여행자처럼 보이는 어린 얼굴을 향해 물었다.
"왜 우리를 불렀니?"
영태가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황당한 질문을 받은 듯한, 그리하여 상처받은 것 같은 눈길이었다.
"보고 싶어서지, 누나."
영태는 말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보고 싶어져서 불렀어."
나는 입을 벌렸다. 또다시 어딘가 무너지고 있었다.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울음이 터진 곳은 내 입이 아니었다. 나는 뒤돌아섰다. 수산나가 울고 있었다. 어린애처럼 바닥을 치며 꺽꺽댔다.
- <함윤이 - 산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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