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아서 매켄 / 이미경
출판 : 와이드마우스
출간 : 20.04.30
읽을 책을 선택하는 방식은 실로 다양하다.
매체나 지인의 추천을 통하는 경우도 있고,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알림을 설정해 두는 방법도 있다. 혹은 신간 코너를 서성이다 눈에 띄는 책을 고르거나, AI에게 마음에 들었던 책들을 알려주고 취향대로 추천해 달라고 해도 된다.
내 경우에는 가리지 않고 손 닿는 대로 읽는 편인데-
최근 들어서는 주로 본문이나 참고자료에 언급된 작가나 작품을 찾아 읽는 -일종의 수형도랄지 계보랄지 아주 느슨한 형태의 연결성으로 이어지는- 독서를 하는 중이다.
이 방식의 장점과 단점은 동일하다. 이전의 독서와 어떤 특정한 면에서는 이어진다는 점이다.
슬프지만 인간의 독서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물리적인 시간, 집중력, 언어적 접근성 등 다양한 제한 요소들이 존재한다.
한정된 자원 안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테크트리를 밟아나가는 법.
나는 아직도 그것을 찾지 못했다.
좋아하는 책들만 줄창 읽고 싶기도 하고.
아예 접해보지 못했던 양식이나 분야의 책, 혹은 버거운 책에 도전해보고 싶기도 하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책에서 충격적인 만족감을 느끼고 싶기도 하다.
해서 이전까지는 크게 의도한 바 없이 마구잡이로 읽었었는데-
불현듯 세상에는 수많은 식재료가 있지만, 레시피라는 것도 존재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손 닿는 대로 -수렵해 온 대로- 읽는 것도 좋겠지만, 어떤 의도에 따라 -레시피에 따라- 읽는 것도 해볼 만한 경험이 아닐까?
그럼에도 이전부터 몸에 밴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아서.
절충안으로 '한 작가씩 몰아 읽기'를 해보는 중이다. 그 사이 다른 작가의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건 아니지만, 큰 흐름은 놓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조절하고 있다.
장점은 몰입감. 아무래도 한 작가의 저작들을 연속으로 읽다 보면 모드가 그 작가에게 맞춰지게 된다.
단점은 분절감. 개별 작품 하나씩의 감상보다는, 전체적인 흐름으로 기억에 남게 된다.
-까지 근황에 관한 흰소리였다.
아서 매켄 단편선은 내가 아직 손 닿는 대로 읽기를 할 때 읽었던 책으로, 출간된 2권 중 2권부터 읽었던 책이다.
정작 읽고 나서야 내가 찾아 읽으려던 <위대한 신, 판>은 1권에 수록되어 있다는 걸 알고 다시 찾아 읽게 된.
실제 그의 작품을 읽기 전까지는 '고딕 호러 작가' 중 한 명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의 생애나 발표작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고, 이름 정도만 여기저기에서 언급되는 걸 접해본 정도였다. -실제로 읽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도 딱히 없었다-
읽고 난 소감은, '영향력이 컸을 것 같다'와 '나와는 잘 맞지 않는다'다.
해당 시대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난 뒤라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그렇다.
아서 매켄의 작품은 소설로 읽기에는 다소 모호하고 암시적이다. 그 자체로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닌데, 은근슬쩍 드러나는 '이런 세상이 있다네'라는 교조적인 자세와 비의적 상징들을 발견해야 훨씬 흥미로워진다. 아마도 실제로 대중 소설로 성공하기 위해 썼다기보다는 아는 이들 사이에서 더 유명한 작가가 아니었을까.
<위대한 신, 판>은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악마'에 보다 원초적인 악신으로서의 '판'을 덧씌웠다. 판이 가지는 목가적인 이미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메리에서 레이철로 이어지는 과정은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함, 자연의 비정함 등을 집약해 '판'으로 형상화한 듯도. -러브 크래프트와의 연결성은 이런 지점에서 나타나는 것 같다- 또 다른 관점에서는 적그리스도의 형상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괜히 메리는 아닐 것이다-
<내면의 빛>은 에메랄드 타블렛과 현자의 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힌다. 하지만 마지막에 주인공의 선택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진리는 두려움과 공포, 몰이해를 불러온다고도 읽히고- 그 자체로 악이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이것은 '뱀'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아직까지도 이어져오는 양분된 시각이기도 하다.
<붉은 손>은 일종의 추리 소설 형식이다. 살인 현장에서 발견된 독특한 '손 모양 그림'을 추적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 조금 더 찾아보니 두 사람 중 한 명인 '다이슨'은 오컬트 탐정으로 그가 등장하는 다른 소설도 있다고 한다. -찾아 읽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 그림을 추적해 가는 과정에서 언급되는 천궁도, 집(house), 핸드 사인 등이 오컬트에서 자주 언급되는 내용들이라는 점에서 다른 두 편과 충분히 연결성이 있는 작품이었다.
<아서 매켄 단편선> 1, 2권 모두 한 번쯤은 읽어볼 만 하다.
끝.
아서 매켄 Arthur Machen, 1863-1947
1863년 3월 3일 웨일스 남부의 칼리언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성직자 가문이었으며 목사였던 부친 아래 태어났다. 모친의 성인 매켄을 자신의 필명으로 사용했다.
어린 시절 웨일스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환경과 풍부한 문화유산들을 접하며 성장했다. 이후 헤리퍼드 대성당 학교에서 서양 고전학과 신학을 중심으로 수학하며 문학과 역사에도 관심을 보인다. 뛰어난 학업능력을 지녔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능력에 걸맞은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다. 젊은 시절부터 생계를 꾸리기 위해 런던에 정착했으며, 광활한 대도시의 풍경에 매료되어 런던 근교나 폐가를 탐사했다. 이러한 웨일스와 런던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공포소설, 환상소설을 주로 집필한다.
액자식 구성의 환상소설 <클레멘디 연대기>(1888)를 시작으로, <위대한 신, 판과 내면의 빛>(1894)을 발표한다. <위대한 신, 판>은 데카당트 문학의 화신으로서 폭넓은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된다. 그러나 데카당스 사조에 관한 비난 여론 때문에 매켄은 이후 몇 년간 신작을 발표하지 못한다. 첫째 부인이었던 아멜리아 호그의 사망 후 신비주의 단체 '황금 여명회'의 일원으로 활동하지만, 이후에는 이교도나 밀교에 두던 관심을 켈트 기독교로 돌린다. 1914년 영국과 독일의 전쟁이 발발하자 <이브닝 뉴스>에 <궁수>를 기고한다. 알 수 없는 하얀 형상이 나타나 수세에 밀리던 영국군이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다는 이 이야기는 영국 독자들에게 사실로서 읽히며 유명세를 탄다. 또한 빈센트 스타렛 등 미국 작가들의 지지 덕분에 미국에서도 인기를 얻는다. 그러나 꾸준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말년에는 다시 가난한 처지에 놓인다. 이에 T. S. 엘리엇, 버나드 쇼 등의 작가 등이 상소를 올린다. 이 상소가 받아들여져 이후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다가 1947년 12월 15일 버킹엄셔에서 사망했다.
앞서 언급한 작품 외에도 <붉은 손>(1895), <백색 인간>(1904), <삶의 단편>(1904), <궁수>(1915), <불타는 피라미드>(1923) 등 다수의 중단편 소설과 <세 사기꾼>(1895), <꿈의 언덕>(1907), <비밀의 영광>(1922), <그린 라운드>(1933) 등의 장편 소설을 집필했다. 소설 외에도 세 권의 자서전, <담배의 해부학>(1884), <상형문자>(1902) 등 논픽션과 다수의 에세이들을 집필했다. 오스카 와일드, W. B. 예이츠, 아서 코난 도일, H. P. 러브크래프트, 보르헤스, 스티븐 킹 등의 문인들뿐 아니라 기예르모 델 토로,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 더 폴의 마크 E. 스미스 등 다방면의 예술가들에게 지지를 얻었다.
- "클라크, 와 주다니 기쁘군. 정말 반갑네. 자네가 시간을 내줄 수 있을지는 몰랐어."
"며칠 정도는 손쓸 수 있었지. 당분간은 아주 바쁘지 않아. 그나저나 레이먼드, 불안하지는 않나? 완전히 안전하겠지?"
- 두 사람은 레이먼드 박사의 집 앞 테라스를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태양은 여전히 서쪽 산의 능선 위에 걸려 있었지만, 그 붉은 빛이 너무나도 흐릿했기에 그림자는 하나도 드리우지 않고 있었다. 대기는 온통 고요하기만 했다. 산허리에 있는 울창한 숲에서는 달콤한 내음이 풍겨 왔고, 그 향기와 함께 숲 비둘기들의 부드러운 속삭임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그 아래로 길게 이어진 근사한 계곡을 따라 강물이 외진 언덕들 사이를 굽이치며 흘러갔다. 하늘에서 맴돌던 태양이 서쪽으로 사라지자, 언덕에서 희미하게 순백의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레이먼드 박사는 친구를 향해 갑자기 몸을 획 돌렸다.
"안전하냐고? 당연히 안전하지. 수술 자체는 아주 간단하다네. 외과의라면 누구든 할 수 있어."
- "수술 외의 단계에서도 위험은 없고?"
"없고말고. 내 맹세하건대, 어떤 신체적 위험도 없어. 클라크, 자네는 늘 소심하게 군단 말이야. 하지만 자네도 내 경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잖나. 나는 지난 스무 해 동안 초월 의학에 전념해 왔다네. 돌팔이니, 허풍쟁이니, 사기꾼이라는 말도 들었었지만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 5년 전에는 그 목표를 이뤘고, 그 이후로는 하루하루가 오늘 밤 자네에게 보여줄 뭔가를 준비하는 시간이었어."
- 초월 의학. 인도의 전통적인 의학과 17세기 영국의 생물 의학에 뿌리를 둔 정신 철학적 치료법. 19세기에는 최면술, 심령술, 신비주의와 공통점이 있었다. 오늘날 초월 의학의 요소들은 신경 과학의 일부가 되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 1850~1894)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1886)에서 하이드가 래니언 박사에게 자신이 지킬이었다는 비밀을 드러내기 직전에 "초월 의학의 효력"에 대해 언급한다(데니스 데니소프, <아서 매켄의 데카당트와 오컬트 작품들>, 2018, 현대 인문학 연구협회, p. 43 주석 참고).
- "레이먼드, 자네 이론이 주마등 같은 것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겠나? 그러니까 근사한 상상이기는 해도 결국, 한낱 환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레이먼드 박사가 걸음을 멈추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누렇게 뜬 창백한 안색의 수척하고 야윈 중년 남자였다. 하지만 클라크에게 대답할 때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클라크, 주변을 둘러보게나. 산과 언덕을 따라 물결치는 산봉우리들을 볼 수 있을 걸세. 숲과 과수원, 무르익은 옥수수밭, 그리고 강가의 갈대밭까지 뻗어 있는 목초지도 보일 거야. 자네는 여기 옆에 서 있는 나를 바라보며 내 목소리를 듣고 있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말하자면- 그래, 지금 하늘의 빛나는 별에서부터 우리 발밑의 단단한 땅까지 꿈이나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고 싶네. 그 그림자가 우리의 눈에서 실제 세계를 가리고 있어. 실제 세계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베일에 싸인 채 이러한 매력적인 환상 너머에, 즉 '아라스의 헛된 추적들, 성공에 관한 꿈' 너머에, 이러한 것들을 모두 넘어선 곳에 있다네. 지금까지 그 베일을 벗겨 본 인간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군. 하지만 클라크, 자네는 오늘 밤 나와 함께 어떤 이의 눈앞에 쐰 베일이 벗겨지는 것을 보게 될 거야. 자네는 이 모든 이야기를 말도 안 되는 이상한 헛소리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전부 사실이라네. 고대의 선인들은 베일을 벗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지. 그들은 그것이 판과 마주하는 일이라고 했다네."
클라크는 전율했다. 강물 위로 응결된 하얀 안개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 "레이먼드,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우리는 괴이한 세상의 입구에 서 있는 것이야. 아마 수술용 칼이 꼭 필요할 것 같네만?"
"그래, 아주 살짝만 회백질을 건드릴 셈이야. 그게 다라네. 그러면 특정 뇌세포들이 미세하게 재배열되지. 뇌 전문의 중 겨우 1퍼센트 정도만이 알아차릴 극미한 변화라네. 클라크, 내 '작업' 이야기로 자네를 따분하게 하고 싶지는 않군. 자네에게 전문적인 세부사항들을 아주 많이 알려 줄 수도 있지만 그러면 많이 부담될 거야. 자네는 그냥 지금 수준의 교양인으로 남는 것이 나을 것 같아. 하지만 자네도 우연히 눈에 안 띄는 신문 구석에서 최근 뇌 생리학이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는 기사를 ... "
- 클라크는 주위를 둘러봤다. 벽에는 거의 빈틈이 없었다. 선반들 위로는 여기저기 각양각색의 병과 작은 약병들이 가득 차 있었고, 벽 모퉁이에는 작은 치펀데일식 책장이 세워져 있었다. 레이먼드가 그 책장을 가리켰다.
"저기 오즈월드 크롤리우스가 쓴 양피지 책 보이나? 내게 처음으로 비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지. 본인이 직접 알아낸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일세. 그는 이런 묘한 말을 했지. '밀알 하나하나에 별의 영혼이 숨겨져 있다.'"
- 오즈월드 크롤리우스(Oswald Crollius, 1563~1609), 독일의 연금술사이자 화학자.
- 이상하게도 50년대의 아주 덥고 불가사의했던 하루가 클라크의 상상 속에 다시 선명히 떠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저기 퍼져 있는 눈부신 햇살이 실험실 안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덮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뜨거운 공기가 열풍을 일으키며 다시금 세차게 얼굴을 휩쓰는 것을 느꼈다. 잔디에서 솟아오른 아지랑이가 보였고, 무수한 여름의 벌레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이 냄새 때문에 불쾌하지는 않았길 바라네, 클라크. 유해한 냄새는 전혀 아니야. 단지 좀 졸리게 할 뿐이지."
클라크는 그 말을 아주 똑똑히 들었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레이먼드라는 것도 알았지만, 아무리 안간힘을 다해도 무기력함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그저 15년 전의 고독했던 산책만 떠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그날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친숙하게 거닐던 들판과 숲을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화폭처럼 찬란한 빛을 내며 그의 앞에 펼쳐졌다. 무엇보다도 꽃들의 향기가 뒤섞인 여름의 냄새, 그리고 작열하는 태양이 만들어 낸 녹음 짙푸른 숲 속의 선선한 그늘 냄새가 그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게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양팔을 쭉 뻗고 누워서 맡았던 흙내음은 모든 것을 압도했다. 먼 옛날에 그랬듯이 환상 속의 그는 들판에서 숲길로, 너도밤나무 아래 빛나는 관목 사이의 ...
-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거실 밖에 높이 솟은 구식 괘종시계에서 똑딱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리고 이 느리고 단조로운 소리가 그들 중 한 사람의 아련히 먼 기억을 깨웠다. 그는 펜으로 작게 그린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 그림은 진정한 예술가가 무척 공을 들여 그린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여자의 영혼이 눈을 통해 드러난 것 같았으며 살짝 벌어진 입술은 기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클라크는 계속해서 그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얼굴이 오래전 어느 여름 저녁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다시금 길게 이어진 근사한 계곡, 언덕들 사이를 굽이치며 흐르는 강물, 목초지와 옥수수밭, 흐릿했던 붉은 태양, 그리고 강물에서 피어오르는 차갑고 하얀 안개를 봤다. 오랜 세월의 파도를 가로질러 자신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를 들었다. "클라크, 메리는 판 신을 보게 될 거야!" 그런 다음 그는 음침한 방에서 무겁게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를 들으며 박사 옆에 서 있었다. 그러면서 램프 불빛 아래의 녹색의자에 누워 있는 형체를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메리가 일어나자 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이내 그의 심장은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 "이 여자는 누구인가?"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쉰 채 메말라 있었다.
"허버트와 결혼했던 그 여자입니다."
- 클라크는 다시 그 그림을 봤다. 어쨌든 메리는 아니었다. 확실히 메리의 얼굴이었지만 뭔가 다른 점이 있었다. 메리의 외모에서는 볼 수 없었던 뭔가가 있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박사를 따라 실험실에 들어왔을 때라든지, 끔찍한 모습으로 깨어났을 때라든지, 또는 침상에서 멍하게 활짝 웃으며 누워 있을 때는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클라크는 그 눈빛에서 나오는 번득임, 도톰한 입술에 머금은 미소 아니면 전체적인 얼굴의 표정을 앞에 두고 영혼의 깊은 곳이 전율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필립스 박사가 "그토록 강렬한 악의 형상은 본 적이 없었다"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는 기계적으로 손에 든 그림을 뒤집어 뒷면을 훑어봤다.
- "사실 사무적인 성격이시지만 상당히 예리한 양반 이시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걸세. 단순히 업무상 예리하시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간과 삶에 대해 통찰력 있으신 분이라는 뜻이네. 그런데 내가 그 사건에 대해 털어놨더니, 확실히 깊이 인상을 받으신 것 같더라고. 내게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시면서 다음 주에 다시 오라고 하셨지. 그리고 며칠 후 이런 놀라운 편지를 받았어."
- 오스틴은 봉투를 건네받은 뒤, 편지를 꺼내 신기하다는 듯이 읽기 시작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친애하는 빌리어즈. 지난밤에 자네가 내게 상의한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자네에게 해 줄 충고는 이러하다네. 그 초상화는 불태워 버리게. 그 이야기는 머리에서 깨끗이 지우고. 다시는 생각도 말게나, 빌리어즈. 그렇지 않으면 후회할 걸세. 자네는 분명 내가 어떤 비밀스러운 정보를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할 테지.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내가 아는 바는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아. 나는 마치 어떤 심연을 응시하다가 공포에 질려 뒷걸음치는 여행자와 같다네. 내가 알고 있는 바도 충분히 이상하고 끔찍하지만, 내 지식을 뛰어넘는 곳에 더 깊은 심층과 공포가 존재하지. 겨울밤에 난로 곁에서 나눌 법한 이야기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이야. 나는 결심했다네. 그 무엇도 내 결심을 흔들지는 못할 거야. 더 멀리 탐색하는 일은 이제 없을 걸세. 그리고 자네도 행복을 소중히 ... ]
- "아이누 항아리는 어떤가?"
"괴상해 보이지만 나는 마음에 드는군. 그런데 메이릭의 유품 좀 보여 주지 않겠나?"
"그럼, 당연히 보여 줘야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유품은 좀 독특해. 아직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었다네. 내가 자네라면 그것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야. 저기 있네."
빌리어즈는 책을 들고 되는대로 펼쳐 봤다. "이건 인쇄된 책이 아니군?" 그가 말했다.
"아니야. 불쌍한 친구 메이릭이 직접 그린 소묘 화집이지.”
- 빌리어즈는 첫 페이지를 펼쳤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두 번째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짤막한 비문이 실려 있었다.
[우주는 온종일 고요하나 지금 막 공포가 암약하고 있느니. 밤이 되면 불길이 타오르고 사방에서 아이기판의 합창소리가 들리나니, 바닷가를 따라 피리와 심벌즈가 내는 굉음이 울려 퍼지리.]
- 세 번째 페이지에는 소묘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을 본 빌리어즈는 고개를 들어 오스틴을 쳐다봤다. 오스틴은 멍하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빌리어즈는 페이지를 넘기며 자신도 모르게 죽은 화가가 남긴 흑백 그림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발푸르기스의 밤과 기괴하고 극악무도한 악을 묘사한 그림들이었다. 그의 눈앞에서 파우누스와 사티로스 그리고 아이기판의 형상이 춤을 췄다. 잡목 숲의 짙은 어둠, 산꼭대기에서의 춤, 황량한 해안가의 풍경, 짙푸른 포도밭과 암석, 그리고 사막지대가 그의 앞을 지나갔다.
- 아이누(Ainu). 현재 일본의 홋카이도, 러시아의 사할린, 쿠릴 열도 등지에 분포하여 사는 선주민.
- 아이기판(Aegipan). 염소 모습을 한 판. 판과 동일한 존재로 보기도 하지만, 구별되는 존재라는 의견도 있다. 때때로 하반신은 물고기의 꼬리가 달린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 [우주는...]. 라틴어 문법학자였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솔리누스(Gaius Julius Solinus, 미상)가 3세기경에 저술한 <세계의 불가사의(De mirabilibus mundi)>에서 인용한 구절(데니스 데니소프, <아서 매켄의 데카당트와 오컬트 작품들>, 2018, 현대 인문학 연구협회, p. 70 주석 참고).
- 발푸르기스의 밤(Walpurgis Night). 독일, 북유럽 등지에서 매년 4월 30일 밤부터 5월 1일까지 벌어지는 민속 축제. 흑사병, 광견병, 흑마법 등을 내쫓기 위해 시작한 축제였으나, 16~17세기 마녀에 관한 문학과 마녀사냥과 결부되면서 마녀들의 퇴폐적인 축제로 의미가 변질되었다.
- 그러나 피커딜리와 메이페어에서도 끔찍한 자살사건들이 일어난 것을 두고 그들은 너무 놀라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왜냐하면 이스트엔드의 범죄를 설명하는 데 필수적으로 적용되는 단순한 난폭성이 웨스트엔드의 범죄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문이나 다름없는 치욕스러운 죽음을 각오한 신사들은 하나같이 성공한 부자들로서 어느 모로 보나 세상에 불만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어 보였다. 더불어 아무리 면밀히 조사해 봐도 일말의 숨은 동기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대기에는 공포의 기운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누군가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상대방이 이 이름 없는 비극의 다섯 번째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하고 의심했다
- 화이트채플(Whitechapel). 런던의 이스트엔드에 위치한 지역. 전통적으로 노동자,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 미상)가 활동했던 지역으로 유명하다.
- 메이페어(Mayfair). 런던의 시티 오브 웨스트민스터의 부유한 지역. 웨스트엔드의 일부이며 고급 저택과 상점, 레스토랑 등이 밀집해 있다.
- 이스트엔드(East End).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한 지명, 빈곤, 인구 과잉, 각종 사회문제로 악명이 자자한 곳이다. 공식적인 경계가 불명확하다. 여러 지방과 나라에서 이주한 이들의 다양한 문화와 섞여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는 곳이다.
- 웨스트엔드(West End). 시티 오브 웨스트민스터에 포함된 지명. 피커딜리, 소호, 부촌 지역인 메이페어 등이 속해 있으며 런던의 상업 문화의 중심지. 고급상가, 유명 명소 등으로 런던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 "일부러 힘을 내서 힘차게 걸었지. 그리고 시계가 2시를 가리킬 때쯤 애슐리가에 접어들었어. 자네도 알다시피, 그 길을 거쳐야만 했다네. 그곳은 어느 때보다도 조용하더군. 가로등 숫자도 적었고, 전반적으로 한겨울의 숲처럼 음산한 분위기였지. 절반 정도 거리를 지날 즈음 부드럽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어. 그래서 이런 시간에 나처럼 밖을 돌아다니려 하는 사람이 누굴까 자연스레 쳐다봤다네. 때마침 문제의 집 가까이 가로등이 있었기에 계단에 서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지. 그는 막 문을 닫고 내 쪽으로 향하던 중이었어. 그리고 나는 곧바로 크래쇼를 알아봤다네. 그와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었지만 자주 봤기 때문에 잘못 봤을 리는 없다고 확신해. 나는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네. 그러고는 -사실대로 고백하건대- 곧바로 그 자리에서 도망치기 시작했어.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줄기차게 달렸지."
"왜 그랬지?"
"왜냐고? 그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기 때문이라네. 그의 눈에서 지옥 같은 격정이 뒤섞여 뿜어져 나오더군. 내 생전 그런 눈빛을 지닌 인간은 결코 본 적이 없었어. 그를 보다가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지. 나는 영혼이 떠난 인간의 눈을 보게 된 걸세. 오스틴, 껍데기만 남은 그 남자의 내면에는 지옥만이 존재하는 것 같더군. 격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증오심에 불타오르고 있었어. 비록 입은 굳게 다물고 있었지만 모든 희망을 잃은 채, 공포에 사로잡혀 밤새 비명을 질러 대는 것 같았다네. 칠흑같이 어두운 절망 그 자체더군. 그는 나를 보지 못한 게 확실해. 그의 눈에는 자네나 나 같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들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을 테지. 하지만 그가 봤던 것을 우리가 보게 될 일은 절대로 없기를 바라네. 나로서는 그가 사망한 시점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그로부터 한두 시간쯤 후일 거야. 하지만 내가 애슐리가를 지나면서 그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는 순간, 이미 그는 이 세상에 속한 인간이 아니었네. 왜냐하면 내가 본 것은 악마의 얼굴이었으니까."
- 빌리어즈가 이야기를 마치자 방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땅거미가 지면서 한 시간 전의 소란스러움은 모두 잠잠해졌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오스틴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가렸다.
"대체 이 모든 것이 뭘 의미할까?"
한참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누가 알겠나? 오스틴, 과연 알 만한 이가 있기는 한 걸까? 흑막에 가려진 일이지만 어쨌든 이 이야기는 당분간 우리끼리만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군. 개인적으로 아는 경로를 통해 그 집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을지 알아볼 셈이야. 만약 우연히 뭔가를 알아낸다면 자네에게 알려주도록 하지."
- 3주 후, 오스틴은 빌리어즈로부터 그날 혹은 다음 날 오후에 들러 달라는 전갈을 받고는 바로 그날 오후에 들르기로 결정했다. 빌리어즈는 평소처럼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는 나른한 거리를 내다보며 명상에 잠긴 것 같았다. 그의 곁에는 대나무 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기묘한 풍경 그림이 그려진 환상적인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클라크의 사무실 못지않게 가지런히 정리한 서류 뭉치들이 놓여 있었다.
- "위대한 신, 판을 우연히 마주쳤던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네. 더불어 현자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겨졌던 모든 상징 속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실로 그 상징들은 정교하지. 아주 오래전 만물의 핵심에는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하고도 은밀한 힘이 존재했는데, 그 힘에 대한 지식이 그 상징들 속에 감춰졌던 거야. 인간의 영혼은 그 힘 앞에서 검게 시들어갔다네. 그러다 죽게 되었지. 마치 전류에 감전되어서 몸이 검게 타듯이 말일세. 그런 힘들은 이름을 붙일 수도, 말할 수도,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지. 오로지 상징과 베일에 쌓인 채로만 알 수 있어. 그 상징이라는 것도 우리에게는 대부분 기묘한 시적 환상으로 나타난다네. 어떤 이들에게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야기로 나타날 테고. 하지만 어쨌든 자네와 나는 삶의 은밀한 곳에 깃들어있을지도 모를 어떤 공포에 대해 알고 있어. 그것은 인간의 육신을 통해 드러나지. 형태가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형태를 갖춰 나가면서 말일세. 아, 오스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을 두고 햇살은 암흑으로 변하지 않고, 그런 하중을 받고서도 단단한 대지는 녹아 끓어오르지 않는 걸까?"
빌리어즈는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도드라져 보였다.
- [오른쪽 귀퉁이에는 "1888년 7월 25일"이라고 날짜가 적혀있었다. 아래는 매더슨 박사의 원고를 환언한 것이다.]
- [이 짧은 기록들이 출판된다고 할지라도 과학 분야에 유용한 보탬이 될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아마 그러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나는 여기에 적힌 것 중에서 한마디라도 내 책임으로 출판하거나 공개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함께 참관했던 두 분에게 기꺼이 맹세했을 뿐 아니라, 그 세부적인 내용이 지독히도 끔찍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충분히 심사숙고하고, 선악의 경중을 따져본 후에 언젠가 이 기록을 파기하거나, 최소한 봉한 채 내 친구인 D에게 맡길 예정이다. 그가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선에서 이것을 사용하든지 아니면 불태우든지, 이는 전적으로 그의 재량에 달린 일이라 믿는다.
내가 착란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내 모든 지식을 동원했다. 처음에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만, 잠시 후 맥박은 정상 수치로 돌아왔고, 내 정신도 올바르게 되돌아왔다. 그때 나는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 차분히 응시했다.
비록 속으로는 공포감과 역겨움에 구역질이 일고, 썩은 악취로 인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침대에 잉크처럼 검게 퍼져 있던 그것이 변형되 ... ]
- [비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네. 우리 모두 그 죽음을 목도했던 존재가 어떻게 레이철이라는 소녀의 손을 잡고서 반은 볕이 들고 반은 그늘져 있으며, 여름꽃들에 둘러싸인 부드럽고 향긋한 잔디 위에 누워 동료들을 불러 모았는지 그 비밀에 대해서 빌리어즈는 전혀 알지 못하네. 우리가 발을 디딘 이 대지 위에 견고히 형상화된 그 공포는 오로지 암시만 할 수 있을 뿐이지. 단지 상징을 통해서만 이름을 붙일 수 있어. 전에 그 초상화를 보고는 마치 심장에 충격을 받은 것처럼 공포심에 차올랐었지만 빌리어즈에게는 이에 관해서는 물론, 비슷한 이야기도 절대 하지 않았네. 나는 이 일이 뜻하는 바를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어. 물론 내 눈앞에서 죽어 가던 것이 메리가 아니라는 점은 알고 있네. 그럼에도 그 존재가 마지막으로 고통받고 있던 순간에 메리의 두 눈이 나의 눈을 바라보고 있더군. 이 끔찍한 미스터리의 사슬에서 마지막 고리를 제시할 사람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 하지만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레이펀드, 자네일세. 더불어 자네가 그 비밀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말할지 말지는 자네에게 달린 일이야.
나는 시내로 돌아오자마자 자네한테 이 편지를 쓰고 있다네. 지난 며칠 동안 지방에 가 있었어. 아마 자네는 내가 어디로 갔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테지. 런던에서 공포와 불안감이 절정에 달해 있는 동안 -내가 말한 적 있던 "보몬트 부인"이라는 여자가 사교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때였지- 나는 친구인 필립스 박사에게 편지로 당시 런던의 상황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더 정확히 말하면 암시를 해 줬다네. 그리고 그가 내게 이야기해 준 사건들이 일어났던 마을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부탁했지.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름을 알려 주더군. 왜냐하면 레이철의 부모는 이미 사망했고, 남은 가족들도 6개월 전에 워싱턴주의 친척 집으로 떠났기 때문이라고 했지. 그가 말하기를 레이철의 부모는 딸의 끔찍한 죽음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일로 슬픔과 공포를 이기지 못해 사망한 것이 확실하다고 했어. 필립스의 편지를 받은 날 저녁, 나는 카마엔에 있었네. 1,700여 년이란 세월 동안 탈색되고 붕괴한 로마 성벽 아래에 서서 아득히 오래전 한때 '심연의 신 神' 사원이 세워져 있던 초원을 바라봤지.]
- 카마엔(Caermaen). 웨일스 가상의 도시, 마을. 아서 매켄의 다른 작품인 <꿈의 언덕들(Hill of Dreams)> 등에도 등장한다. 매켄이 어린 시절을 보낸 칼리언(Caerleon)에서 따온 듯하다(데니스 데니소프, <아서 매켄의 데카당트와 오컬트 작품들>, 2018, 현대 인문학 연구협회, p. 85 주석 참고).
- 심연의 신(The god of the Deeps). 켈트신화에 등장하는 치유, 바다, 개, 사냥의 신 노덴스(Nodens)를 의미한다. 리드니 공원(Lydney Park)에 로마인들이 세운 노덴스의 신전 유적이 남아 있다. 아서 매켄이 차용한 이 신은 H. P. 러브크래프트(H. P. Lovecraft)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Cthulhu Mythos)에서 엘더갓(Elder Gods) 중 하나로 등장한다.
- <위대한 신, 판>
- 런던의 흉물들이 어스름한 푸른 안개 속에 가려지고, 길게 뻗은 거리와 가로수들이 꽤 근사해 보이는 어느 가을 저녁, 찰스 솔즈베리는 단골 레스토랑을 향해 루퍼트가를 느릿느릿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포장도로를 검사라도 하듯이 눈을 내리깔고 걷다가 레스토랑의 좁은 문을 통과할 즈음, 길 저편에서 불쑥 나타난 한 남자와 부딪치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안 보고 걸어서요. 이런, 이게 누군가? 다이슨!"
"그래, 그렇다네. 잘 지내나, 솔즈베리?"
"잘 지내고 있지. 그런데 다이슨, 그동안 어디에 있었나? 자네를 못 본 지 5년은 된 것 같은데."
- 단골 레스토랑. 아서 매켄의 초기작인 <로스트 클럽(The Lost Club)>(1890)에 등장하는 피렌체 레스토랑. 루퍼트가 17번지에 있었으며, 루이지 아자리오(Luigi Azario, 미상)라는 인물이 운영했던 곳이다. 이 당시 루퍼트가는 많은 뮤직홀과 극장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매춘과 범죄가 만연했다. 더불어 인구 밀도가 높았으며 질병이 돌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가 출간된 이후, 매켄과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가 이 식당에서 함께 식사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자주 이 식당을 방문했다. 그가 퀸즈베리 사건(The Queensberry Case)으로 재판을 받던 중, 사적인 방에서 젊은 남성들과 식사했던 장소였다는 점이 언급된다(데니스 데니소프, <아서 매켄의 데카당트와 오컬트 작품들>, 2018, 현대 인문학 연구협회, p. 37 주석 참고).
- "무슨 과학인데?"
"대도시의 과학이지. 런던의 생리학, 문자 그대로 인간의 정신이 형이상학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주제라네. 이 살미 맛이 기막히군. 당연히 꿩의 종착지는 스튜 안이지. 그래, 나는 가끔 내 자신이 런던의 광활함과 복잡함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파리만 해도 어느 정도 적당히 연구하면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겠지만, 런던은 언제나 미스터리하단 말이지. 파리에서는 '여기에는 여배우가 살고 저기에는 보헤미안들과 인생에서 패배한 자들이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걸세. 하지만 런던은 다르지. 자네도 거리에서 세탁부들의 숙소가 어디인지 어렵지 않게 정확히 가리킬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 건물 삼층에서는 한 남자가 칼데아어의 뿌리에 대해 연구하고 있을 수도 있고, 그 건너편 다락방에서는 세상에서 잊힌 예술가가 서서히 죽어 가고 있을 수도 있지."
- 살미. 프랑스의 전통 요리, 구운 꿩이나 오리고기를 소스와 함께 만드는 스튜의 일종이다.
- 패배한 자들. 프랑스어로 "ratés", 실패자들.
- 칼데아어(Chaldee). 기원전 10세기에서 6세기까지 바빌로니아 왕국의 남부 지역인 칼데아에서 사용했던 고대 칼데아인의 언어.
- "자네, 역시 그 옛날 그대로의 다이슨이군. 변하지 않았어."
솔즈베리가 천천히 키안티를 음미하며 말했다.
"나는 자네가 어떤 강렬한 상상에 너무 현혹되었다고 생각하네. 런던의 미스터리는 자네의 공상 속에만 존재하는 거야. 내가 보기에 런던은 그저 따분한 곳일 뿐이라네. 런던에서 예술적인 범죄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하잖나. 하지만 파리에서는 그런 식의 범죄들이 잦다고 믿어."
"와인 좀 더 주게나. 고맙네. 이보게, 자네는 잘못 알고 있어.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알고 있군. 범죄 쪽만 보자면 런던은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다네. 우리에게 아쉬운 것은 아가멤논이 아니라 호메로스가 없다는 점이지. 자네도 알겠지만, 아쉽도다. 그곳에는 성스러운 시인이 없는지라."
"그 구절은 기억나네. 하지만 자네 말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군."
- 그곳에는 성스러운 시인이 없는지라. 아가멤논이 아니라 호메로스가 없다(Homers, not Agamemnons), 그곳에는 시인이 없는지라(Carent quia vate sacro). 고대 로마의 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Horace, BC 65~BC 8)의 <송가(Odes)>에서 인용.
- "글쎄, 쉽게 말해서 런던에는 그런 것들을 전문적으로 다룰 작가가 없다는 뜻이지. 런던의 기자들은 대부분 덜 떨어진 족속들이야. 그들이 해야 할 이야기들을 죄다 엉망진창으로 써갈긴다네. 안타깝게도 공포와 그것을 유발하는 것에 대한 감이 부족해. 그저 천박하게 유혈이 낭자한 것에만 만족하더군. 허풍이나 떠는 주제에 자기들이 그럴싸한 기사를 쓴다고 착각하지. 생각들이 하나같이 빈약해. 어떤 기이한 숙명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부분 진부하고 잔인한 살인극들뿐이더군. 세간의 관심을 끌기 위해 늘 다뤄지는 것들 말일세. 이를테면, 자네, 아마 할레즈던 사건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없겠지?"
"그래, 그런 사건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군."
"물론 그럴 테지. 그런데도 참 이상한 이야기야. 그 이야기는 커피를 마시면서 말해 주겠네. 할레즈던은 자네도 알다시피, 아니, 잘 모를 것 같지만, 런던의 근교에 있어. 자네가 사는 교외 지역인 고색창연한 노우드나 햄스테드와는 묘하게 다른 곳이지. 이 지역들도 각각 다르다네. 무슨 말인가 하면 햄스테드에는 3 에이커나 되는 대지에 주인이 누굴까 찾게 되는 중국식 소나무 저택들이 들어서 있지. 그럼에도 최근에는 예술적 분위기도 풍기고 있고, 반면에 노우드는 유복한 중산층 가족들이 사는 곳이야. 그들은 '궁전 근처'라는 이유로 그곳에 자리를 잡지만 6개월 후면 그 궁전 때문에 넌덜머리를 내게 되지. 하지만 할레즈던은 아무런 특징도 없는 곳이라네. 이제 갓 생겨난 곳이라서 아직 이렇다 할 특징이랄 것이 없어. 붉은 집들과 하얀 집들이 늘어서 있고, 집마다 연녹색의 베네치아식 블라인드가 쳐져 있는데, 출입문들에는 페인트가 부풀어 올라 있지. 그리고 그네들이 정원이라고 부르는 작은 뒤뜰도 있다네. 동네에는 몇몇 빈약한 가게도 들어섰고, 그렇게 그 동네의 인상을 파악했다고 하는 순간, 모든 것이 녹아 사라지는 곳일세."
- 할레즈던(Harlesden). 런던 브렌트(Brent) 자치구에 위치한 지역. 런던 북서부에 있으며 현재 카리브인, 아프리카인, 남미인 등 다양한 민족이 거주한다.
- 노우드(Norwood). 런던 크로이던(Croydon) 자치구에 위치한 지역. 런던 남쪽의 교외 지역이다.
- 햄스테드(Hampstead). 런던 북부의 교외 지역. 런던에서 가장 값비싼 저택들이 있는 부촌이다.
- 궁전. 런던 남동쪽에 위치한 크리스털 팰리스(The Crystal Palace)를 뜻함. 1851년에 국제박람회를 위해 건축되었고 박람회가 끝난 후 1854년 런던 교외 지역인 시드넘(Sydenham)에 재건되었다. 하지만 1936년에 화재가 발생해 사라졌고, 현재는 그 이름을 딴 지역을 의미한다.
-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집들이 눈앞에서 무너지지는 않을 텐데."
"아니,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다만 할레즈던이 실체가 사라진 곳 같다는 의미에서 한 말일세. 걷다 보면 거리는 어느새 한적하게 변해 있고 집들은 느릅나무로, 뒤뜰은 푸른 초원으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될 거야. 순식간에 도시에서 시골로 지나가지. 시골의 작은 마을처럼 전환점도 없어. 넓은 잔디밭과 과수원의 매끄러운 구분점도 없고. 집들이 점점 적게 밀집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끊기는 곳이라네. 내 생각에 그곳 주민들은 대부분 시내로 나가는 것 같더군. 한두 번쯤 그쪽으로 가는 만원 버스를 본 적이 있어. 하지만 그곳에서 한낮에 느낄 적막함은 한밤중의 사막에서 겪는 고독함보다 더한 것이지. 그곳은 마치 묘지와 같다네. 거리는 눈부시고 황량하더군. 그러고는 그 길을 걷다가 문득 여기도 런던의 일부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 흠, 몇 년 전에 어떤 의사가 그곳에 살고 있었다네. 현란한 그 거리 중 한쪽 끝에 청동 간판과 붉은 등을 걸어 놓고 개업했지. 집 뒤로는 북쪽으로 들판이 멀리까지 펼쳐져 있었어. 대체 그가 왜 그런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아마도 블랙 박사는, 우리는 그를 그렇게 불렀는데, 선견지명이 있어서 앞날을 내다봤을지도 모르겠군. 나중에 알려진 바이지만 친지들도 수년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더군. 심지어 그의 거주지는 물론, 그가 의사라는 사실조차 몰랐다지. 아무튼 그는 보기 드문 미모의 아내와 할레즈던에 정착했고, 간간이 개업의로서 활동했어. 사람들은 이 부부가 할레즈던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 여름 저녁에 함께 산책하는 모습을 보곤 했다더군.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다정한 부부였대. 그런데 이러한 산책은 가을까지 이어지다가 갑자기 중단되었다고 하더군. 물론 해도 짧아지고 날씨도 쌀쌀해지면서 할레즈던 주변 시골길이 삭막해져서 그랬으리라 예상하네. 그리고 그해 겨우내 블랙 부인을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환자들이 물으면 박사는 그녀가 '약간 몸이 불편할 뿐 봄이 되면 분명히 더 좋아질 것이다'라고 대답하곤 했다더군. 하지만 봄이 지나고 여름이 찾아왔지만, 블랙 부인은 나타나지 않았어. 마침내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소문을 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지. '오후 차 시간' 자리에서는 온갖 종류의 이상한 이야기가 오갔어. 자네도 들어봤겠지만 그런 변두리 사람들의 유일한 오락거리가 그런 거지. 블랙 박사는 그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아졌다는 것을 느꼈고, 이전부터 그랬지만 결국 그를 찾는 환자의 수도 눈에 띄게 급감했어. 간단히 말해서 그 지역 사람들은 ... "
- 시내. 런던의 세계적인 상업, 무역, 금융의 중심지인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을 뜻함.
- 영국에서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개업의 의원 표시로 붉은 등을 사용했음.
- 오후 차 시간. 늦은 오후나 이른 저녁에 홍차와 샌드위치 등으로 요기하는 가벼운 식사 시간. "high tea"라고 부른다.
- 저녁 내내 거의 말없이 듣기만 했던 솔즈베리의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확고한 형태의 지성을 지녔으며 수줍음이 많은 젊은 신사였다. 더불어 기질적으로 모순을 싫어했으며 미스터리나 비정상적인 것들을 대하면 뒤로 물러서곤 했다. 그날 저녁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면서 그는 천성적으로 오지랖이 넓은 친구가 묘한 허구의 이야기를 가미해서 독창적으로 엮어낸 비현실적인 미스터리에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어야만 했다.
- "그날 밤에 자네를 만난 뒤, 아주 이상한 종류의 ... 그러니까 모험이라고 할 만한 일을 겪었지. 그 일로 계속 심란하더군. 그리고 그중 제일 짜증 나는 점은 그 일이 단지 허튼수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세. 그 일에 대해서는 머지않아 자네에게 전부 말해 주도록 하지. 그전에 자네가 지난번 레스토랑에서 시작했던 그 괴이한 이야기부터 마저 들려주게나."
"그러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자네는 정말 구제불능이로군. 사실이라고 하는 것에 너무 얽매여 있어. 자네는 속으로 그 사건의 기이한 점들을 내가 지어냈다고 생각하고 있지. 더불어 경찰이 발표한 대로 모든 것이 명백한 사실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어. 그래도 이왕 시작했으니, 계속 이어가도록 하지. 하지만 우선 뭘 좀 마실 것을 준비할 테니, 그동안 파이프에 불을 붙이는 게나."
다이슨은 오크나무 찬장에 올라가 깊숙한 곳에서 둥근 병 하나와 독특한 방식으로 도금한 작은 유리잔 두 개를 꺼냈다.
"베네딕틴일세." 그가 말했다. "좀 마셔 보겠나?"
- 베네딕틴(Benedictine). 1510년 베네딕트의 수도사 돈 베르나르도 빈첼리(Dom Bernardo Vincelli, 미상)의 제조법에서 유래한 증류주. 27개의 향신료와 식물 등으로 만든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제조법을 발견하여 상품화하기 시작했다.
- " ... 유일한 사람은 블랙 박사뿐인 것 같았지. 그래서 그를 찾아보기로 결심했다네. 물론 할레즈던에서는 그를 찾을 수 없었어. 내가 들은 바로는 장례식이 끝난 뒤 바로 떠났다고 하더군. 집안의 모든 것들을 팔고 어느 화창한 날에 작은 여행 가방만 들고 기차에 탔다고 했지.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고. 만약 내가 그의 소식을 듣게 된다면 그건 우연이었을 거야. 그리고 마침내 정말 우연히 그를 만나게 되었지. 3월 초의 어느 날이었어. 나는 딱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평소처럼 주변을 살피면서 그레이즈 인로를 걷고 있었다네. 그날 돌풍이 거세서 모자를 꼭 잡고 걸어야 했는데, 어찌나 바람이 세찼는 지인의 가로수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쏠려 꺾어질 듯했지. 홀본을 빠져나와 씨오볼즈로에 다다를 즈음이었어. 어떤 남자가 지팡이에 의지한 채 내 앞을 걸어가는데 아주 허약해 보이더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그의 모습이 호기심을 자극했지. 나는 그를 앞지를 생각으로 속도를 내서 걷기 시작했어. 그런데 갑자기 그의 모자가 바람에 벗겨지더니 보도 위를 튀어 오르면서 내 발 쪽으로 굴러오더군. 당연히 나는 그 모자를 주워서 주인 =에게 다가갔어. 가면서 슬쩍 모자를 훑어보니 인생 자체가 녹아든 물건이었지. 안감에 피커딜리의 제조인 이름이 있었지만 아무리 거지라도 시궁창 냄새가 나는 그런 모자를 줍지는 않았을 걸세. 그러고는 고개를 들었는데 할레즈던의 그 블랙 박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정말 이상한 일이지 않나? 그런데 솔즈베리, 정말 많이도 변했더군! 블랙 박사가 할레즈던에 있는 자기 집 계단을 내려올 때만 해도 사지가 건장했던 그는 곧은 자세로 걸었었어. 뭐랄까, 인생의 최전성기에 있는 사내라 할 만했지. 그런데 내 앞에 서 있던 가엾은 존재는 볼이 움푹 꺼진 채 구부정해지고 허약해졌더군. 그새 머리는 백발이 되었고 팔다리를 흔들거리며 떨고 있었지. 두 눈에는 비참함이 서려 있었어. 그가 모자를 가져다준 것에 감사해하면서 내게 말하더군. '모자 줍는 일도 힘들군요. 이제는 달리기가 힘들어요. 오늘 바람이 참 세찬 날입니다. 그렇지요, 선생님?' 그러고는 그가 돌아서서 가려고 했지. 하지만 나는 그를 조금씩 대화에 끌어들일 의도로 같이 동쪽으로 걸었어. 그는 내가 꺼져 주면 좋겠다는 눈치였지. 하지만 나는 그대로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네. 이윽고 그가 누추한 거리에 있는 허름한 집 앞에 멈춰 서더군. 진심으로 여태껏 살면서 그렇게 비참한 동네는 처음이었다네."
- "내가 약속을 지킨 것을 두고 놀란 듯한 눈치였지만 내게 의자를 내줬고 이야기하는 동안 그는 침대에 앉아 있었네. 그 후로도 종종 그를 찾아가서 함께 긴 대화를 나누곤 했어. 하지만 그는 할레즈던이나 자기 아내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지. 내가 그 일에 대해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 혹은 내가 그 일에 대해 들어봤을지라도 할레즈던의 지체 높던 의사인 블랙 박사와 런던 후미진 곳의 가난한 다락방 거주자를 관련지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네. 그는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었어. 함께 앉아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종종 그가 정상인지 아닌지 의심했지. 왜냐하면 그 지저분한 소굴에서 그가 제시했던 이론은 파라셀수스와 장미십자회의 가장 황당무계한 몽상들조차도 평범하고 냉철한 사실처럼 보이게 했기 때문이지. 한 번은 내가 조심스럽게 넌지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 그의 설명이 모든 과학이나 경험에 완전히 모순된다고 말일세. '아니요, 다이슨. 그가 답하더군. '모든 경험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지요. 내 경험도 가치 있는 것이니. 나는 증명이 안 된 이론이나 팔아 대는 이가 아니오. 내가 말한 것은 나 자신이 직접 입증한 것이고, 그 때문에 끔찍한 대가를 치렀지요. 이 세상에는 당신이 절대 알 수 없는 지식의 영역이 있소. 현자들조차 마치 피해야 할 역병처럼 먼발치에서만 내다보는 영역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그 영역에 들어갔었소. 만일 당신이 우리가 사는 이 조용한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두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알게 된다면, 꿈속에서라도 그것을 본다면, 당신 내면의 영혼은 전율하며 졸도할 거요. 당신이 내게 들은 것은 진정한 과학의 외피에 지나지 않소. 그 과학이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지식을 획득한 이에게는 죽음보다 더 끔찍한 것이지. 아니, 다이슨,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별의별 기이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떠들어 대지만, 그네들 내면에 그리고 주변에 잠복하고 있는 경외스러운 공포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소.' 그에게는 나를 끌어당기는 일종의 매력이 있었어. 그런데 내가 한두 달 정도 런던을 떠나 있어야 해서 무척 유감스러웠지. 그의 기묘한 이야기가 그리웠어. 다시 도시로 돌아온 뒤 며칠 후 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를 불러내곤 했던 초인종을 두어 번 눌렀는데도 아무런 대답이 없더군."
- 파라셀수스(Paracelsus, 1493~1541). 독일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한 스위스의 화학자, 연금술사, 의학자.
- 장미십자회(Rosicrucianism). 고대에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유대교의 사상과 연금술을 지녔다는 비밀결사 단체. 창립자는 크리스티안 로젠크루이츠(Christian Rosenkreutz)로 밝혀져 있지만 실존 인물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17세기 초 독일에서 발표된 세 개의 선언문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반가톨릭적인 태도를 지녔으며, 개혁을 주장했다.
- 이렇다 할 단서가 떠오를 것 같지는 않았다. 가망은 거의 없어 보였다. 하지만 다이슨은 자신을 미스터리계의 웰링턴으로 여기고 조만간 올바른 궤도에 오를 것이라고 확신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 후로 며칠 동안, 다이슨은 주변의 절친한 친구들조차도 신기하게 여길 정도로 자신의 문학 작업에 깊이 몰두했다. 보통 그의 친구들은 다이슨이 독한 담배와 홍차를 벗하며 일본식 책상에 앉아 오랜 시간 작업한 결과물을 찾기 위해 헛되이 기차 역사의 대중서점을 뒤지곤 했지만 헛수고였다. 이 기회를 틈타 다이슨은 나흘 동안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펜을 내려놓고 거리로 나가 바람을 쐬며 휴식을 취했는데, 이는 진정으로 위안이 되었다. 거리에는 가스등 불빛이 켜지는 중이었고, 석간신문의 다섯 번째 판이 발행되었다는 외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다이슨은 문득 조용히 있고 싶은 마음에 시끄러운 스트랜드를 벗어나 북서쪽으로 향했다. 곧 그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메아리치는 거리에 들어섰다. 넓게 난 새 도로를 건너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면서, 다이슨은 자신이 소호의 깊은 곳까지 관통해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프랑스와 이탈리아산 희귀 포도주들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행인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치즈는 큼직하고 풍성했으며, 여기저기에서 올리브유, 라블레식 소시지들이 눈에 띄었다. 인접한 다른 가게에서는 파리에서 발간한 신문과 잡지들을 할인 판매 중이었다. 거리 한복판에서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어슬렁거리는 바람에 마차들도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창가 너머로 그 광경을 내다보며 즐거운 생각에 빠져 있었다. 다이슨은 자갈 도로 위의 인파에 뒤섞인 채 불어와 독일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로 웅성거리는 기묘한 소리에 귀 기울였고, 때때로 병들이 가지런히 진열된 상점들을 슬쩍 쳐다보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거리의 끝자락에 다다랐는데, 모퉁이의 작은 가게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가게는 이웃의 다른 가게들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전형적인 빈민가의 상점으로서 완전히 영국식이었다. 그곳에서는 담배, 사탕, 사기와 체리나무로 만든 싸구려 파이프를 팔고 있었다. 1 페니짜리 연습장과 펜대는 코믹 노래집과 함께 서로 앞줄을 차지하려고 경쟁하듯 진열 ...
- 프랑수아 라블레(François Rabelais, 1483(?)~1553)의 소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Gargantua and Pantagruel)>(1532)에 묘사된 프랑스의 소시지의 일종인 앙두예트(andouillettes), 부댕(boudin) 등을 의미하는 듯하다.
- 램프에 불을 붙인 뒤, 꾸러미를 탁자에 올려놓고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 이 조명 아래에 어떤 괴상한 물건이 나타날지 궁금해했다. 그는 방문을 잠근 후, 꾸러미의 끈을 잘라 내고 겹겹이 싸인 포장지를 한 꺼풀씩 벗겨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소박하지만 견고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잠금장치는 없었기에 다이슨은 간단히 뚜껑을 들어 올렸고 그 순간, 긴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섰다. 램프의 불빛은 하나의 촛불이 불타듯 희미하게 빛나는 것 같았지만, 방 전체는 빛으로 가득 찼다. 더불어 빛뿐 아니라 천 가지의 색, 즉 스테인드글라스의 찬란함이 모조리 깃들어 있었다. 벽과 그에게 친숙한 가구 위로 반사된 광선은 다시 그것의 원천인 작은 나무상자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안의 부드러운 울 바닥 위로 아주 화려한 보석이 놓여 있었다. 다이슨으로서는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할 법한 보석이었다. 보석의 내부에서는 먼 하늘의 푸른빛과 해변의 초록 바다 빛, 그리고 루비의 진홍빛과 진보랏빛 광선이 빛나고 있었다. 그 중심에서는 마치 별처럼 불꽃을 튀기며 솟구치고 떨어졌다가 다시 되오르는 분수처럼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다이슨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생각에 잠긴 듯 양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보석은 오팔과 비슷했지만, 오랜 윈도 쇼핑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보통 판매되는 오팔보다 네 배 혹은 여덟 배는 더 되는 크기였다. 그는 거의 경외심을 느끼며 다시 그 보석을 바라봤다. 그리고 램프 아래의 탁자에 그것을 살며시 올려놓고는 그 중심에서 반짝이며 빛을 내는 그 경이로운 불꽃을 지켜봤다. 그런 다음 또 다른 놀라운 물건이 들어 있지는 않을까 궁금해져서 상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오팔이 놓여 있던 울 깔개를 들어 올려 그 밑을 봤다. 더 이상 보석은 없었지만, 대신 오래 사용해서 다 낡고 해진 작은 수첩 하나가 있었다. 다이슨은 수첩의 첫 장을 넘기다 다시 한번 경악하며 수첩을 떨어트렸다. 파란색 잉크로 가지런히 쓰인 수첩 주인의 이름을 읽게 된 것이다.
- 의학박사 스티븐 블랙, 오렌모어, 데번로, 할레즈던.
- 다이슨은 그 후 몇 분이 지나서야 다시 수첩을 펼칠 수 있었다. 그는 다락방에서 기거하던 비참한 유랑자와 그의 기괴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더불어 그가 창가에서 봤던 얼굴과 부검의가 했던 말이 기억 속에서 물밀듯이 밀려왔다. 수첩의 표지에 손가락을 댄 채, 그는 그 안에 무엇이 쓰였을까 두려워하며 몸을 떨었다. 마침내 그것을 손에 들고 페이지를 넘기니 처음 두 장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세 번째 장은 아주 작고 또렷한 글씨로 뒤덮여 있었다. 다이슨은 그의 눈에서 타오르는 오팔의 빛을 통해 그것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 "젊은 시절 이래로." 기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나는 내 여가 시간과 다른 학문에 할애했어야 했던 수많은 시간을 기이하고도 난해한 지식 분야를 연구하는 데 쏟았다. 흔히들 삶의 즐거움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나에게 아무런 매력이 없었다. 나는 런던에서 동료 학생들을 피해 혼자 지냈으며, 그들 역시 나를 자기만 알고 동정심이 없는 이라며 멀리했다. 다만 나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심오한 비밀이자 독특한 종류의 지식에 대한 욕망을 충족하는 것만으로도 미칠 듯이 행복했다. 내가 종종 어두컴컴한 방에 앉아 밤을 지새우며 생각했던 그 기이한 세계는 이제 막 다다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나 한동안 이런 비밀스러운 연구는 뒤로하고, 학위를 받기 위해 전공 학업에 매진해야만 했다. 그리고 의사면허증을 취득한 뒤 얼마 안 있어, 나는 아그네스를 만나게 되었고 곧, 그녀와 결혼했다. 우리는 이 외딴 교외 지역에 새집을 마련했고, 나는 소박한 개업의로서의 일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달 동안은 내 삶을 함께 공유하면서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았다. 한때 내 마음을 전부 사로잡았던 초자연적인 과학은 어쩌다 가끔 한 번씩만 생각나는 정도였다. 내가 발을 디디면서 알기 시작한 그 길에 대해 나는 충분히 배웠다. 그 길은 모든 수식을 넘어서는 난해하고 위험한 곳이며, 그곳에서 끈기 있게 버틴다는 것은 십중팔구 인생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끔찍하기에 그 생각만으로도 인간의 정신이 움츠러드는 영역으로 이끌 것이다. 나는 결혼 후 누려 왔던 평온함 때문에 평화가 머물 수 없는 곳에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불현듯 -내 생각에 그 일은 실로 하룻밤 새에, 내가 침대에 누워 어둠을 응시하다 일어났다- 말하자면 옛 욕망, 예전의 욕망이 다시금 살아났다. 심지어 그간의 부재로 열 배는 강력해진 힘과 함께 돌아왔다. 내가 휑한 눈으로 창밖에서 동쪽의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어느 새벽녘 즈음, 나에게 파멸이 선고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멀리 가 봤던 만큼, 이제는 흔들림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더 멀리 가야만 한다. 나는 아내가 편히 잠들어 있는 침대로 돌아왔고 다시 한번 하염없이 비통한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 누웠다. 왜냐하면 태양이 우리 두 사람 모두의 행복한 삶에 일몰을 드리우며 공포의 여명과 함께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후에 있던 일을 여기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겉으로는 예전처럼 하루의 일을 하며, 아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내가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실험실로 개조한 방에서 여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아직 수많은 가로등 불빛이 런던을 밝히고 있던 잿빛 새벽녘에 살며시 위층으로 올라가곤 했다. 매일밤, 나는 한 걸음씩 거대한 심연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 심연은 의식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 사이의 깊은 만으로서 나는 그곳에 다리를 놓고자 했다. 나의 실험은 그 성격상 복잡했으며 수없이 이뤄졌다. 그리고 여러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 실험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전부 깨달았다. 내가 이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얼굴은 창백해졌고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내게는 뒤로 물러날 힘도, 내 앞에 활짝 열린 문 앞에 서서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힘도 오래전에 사라진 상태였다. 길은 막혀 있었고 나는 그냥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 [그녀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그녀의 생명이 있던 곳에 무엇이 들어올 것인지를 설명해 줬다. 그리고 그녀가 겪어야 할 온갖 치욕과 공포에 관해 설명했다. 내가 죽고 난 후에 이것을 읽을 당신 -물론 내가 이 기록의 존속을 용납한다면-, 만약 상자를 열고 그곳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봤을 당신이 그 오팔 안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지! 어느 날 밤, 아내는 내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렸고 목과 가슴은 수치감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나를 위해 이 일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었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함께 하늘과 어두운 대지를 바라봤다. 별이 빛나는 맑은 밤하늘이었으며 기분 좋은 미풍이 불어왔다. 나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고 그녀의 눈물은 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날 밤 아내는 내 실험실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나는 빗장을 걸어 덧문을 닫고는 빈틈없이 두껍게 커튼을 드리운 채, 조금이라도 별빛이 방 안으로 새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램프 위의 도가니가 쉭쉭거리며 끓고 있는 동안, 나는 해야 할 일을 마쳤고 이제는 더 이상 여인이 아닌 어떤 존재를 생성해 냈다. 하지만 탁자 위에 그 오팔은 이전까지 인간의 눈이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법한 빛으로 반짝이며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보석 안에서 화려하게 번쩍이는 불꽃의 광채는 내 심장에까지 비췄다. 아내가 내게 부탁한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마침내 내가 그녀에게 말한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죽여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다이슨은 작은 수첩을 떨어트렸고, 다시 고개를 돌려 내면의 빛이 불타오르고 있는 오팔을 바라봤다. 그런 다음 가슴속에서 형언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공포가 솟구쳐 오팔을 움켜쥐고는 바닥에 내던진 후, 구두 굽으로 짓밟아 버렸다. 돌아선 그의 얼굴은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잠깐 속이 메스껍고 몸이 떨렸다. 그러다가 급히 방을 가로질러 문가에 기대어 섰다. 엄청난 압력에 증기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성나서 쉭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꼼짝도 하지 않으며 그 광경을 바라보는 동안, 보석의 중심부에서는 서서히 짙고 노란 연기가 피어올라 똬리를 튼 뱀처럼 보석 위를 휘감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느다란 백색 불꽃이 연기에서 터져 나오더니 허공으로 치솟고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 바닥에는 손만 대어도 바스러질 것 같은 시커먼 재가 놓여 있었다.
- <내면의 빛>
- "필립스, 내 말에 사족을 달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아까 한 말을 정확히 기억해 반복하자면, 나는 자네가 이 혼란스럽고 불가사의한 도시에서 원시인을 마주칠 기회를 기피한다고 했었다네. 이것이 정확히 내가 말한 그대로야. 과연 누가 생존투쟁의 시대를 규정할 수 있을까? 혈거인이나 호상 생활자, 어둠의 종족을 대표하는 자들은 어쩌면 아직도 우리 사이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지. 인간처럼 프록코트를 차려입고 세련된 장식을 걸친 채 어울려 지내면서도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는 늑대처럼 포악하고, 야생의 늪지대와 어두운 동굴 시대부터 이어져온 저열한 욕망이 들끓고 있을 거야. 이따금 홀본이나 플리트가를 거닐다 보면 본능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얼굴을 보곤 한다네. 그럼에도 나의 내면을 뒤흔드는 그 소름 끼치는 혐오감에 이유를 대지는 못하겠군."
"이보게, 다이슨, 자네의 문학적 '시도'에 나를 끌어들이지는 말게나. 유물의 존재쯤이야 나도 알지만, ... "
- 혈거인. 동굴에 거주하던 선사시대의 인류(troglodyte). 동굴인(caveman)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리스어로 "trogle"은 구멍, "dyein"은 들어간다(dive in)는 뜻이다.
- 호상 생활자. 호수 위에 움막을 짓고 거주했던 선사시대의 인류. 혈거인과 마찬가지로 살았던 공간에서 어원이 파생되어 "lake-dweller"라고 불린다.
- "제발 더는 말하지 말게나." 눈에 보일 정도로 두려움을 억누르려 필립스가 말했다. "자네는 내 방에서 내게 진실을 말해 줬어. 자네 말대로 혈거인들은 여전히 이 세상 곳곳에 몸을 숨긴 채, 우리 주변의 이런 거리에서 어슬렁거리다가 피에 굶주려 살인을 저지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겠군."
"잠시 자네 집에 들렀다 가도록 하지." 레드 라이온 광장에 다다르자 다이슨이 말했다. "자네한테 물어볼 것이 있다네. 우리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
필립스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외부에서 감실거리며 깜빡이는 빛 속에서 모든 것이 희미하게 허공을 맴도는 방으로 올라갔다.
- 촛불에 불을 붙인 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았을 때 다이슨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마도 자네는 내가 시신의 머리가 놓여 있던 곳 바로 위쪽의 벽을 유심히 살펴봤던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경감의 랜턴 빛이 그 벽 전체를 전부 비추고 있었는데, 뭔가 기묘한 것이 눈에 들어오더군. 그래서 자세히 관찰했지. 누군가 벽에 붉은색 분필로 대략적인 손 모양-인간의 손 모양을 그려 놓은 것을 발견했어. 그런데 손가락들의 위치가 특이해서 깜짝 놀랐다네. 이런 식이었어."
다이슨은 연필과 종이를 들고 빠르게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런 다음 그 그림을 필립스에게 건넸다. 그것은 손등을 대강 스케치한 것이었는데, 주먹을 꽉 쥔 상태로 엄지손가락 끝부분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마치 아래에 있는 뭔가를 가리키듯 아래쪽을 향해 있었다.
- "이건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끔찍한 표식이네." 필립스가 말했다. "사안 학설과 관련된 가장 끔찍한 표식 중 하나지. 이탈리아에서는 아직 통용되고 있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진 것이 틀림없어. 유물 중 하나인 셈이지. 인간이 최초로 탄생했다고 하는 검은 늪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하네."
다이슨이 모자를 집어 들고 떠날 채비를 했다.
"농담은 그만두게나." 그가 말했다. "나는 약속을 지켰다네. 그리고 내 말대로 심상찮은 낌새를 맡은 셈이지. 어쨌거나 내가 마치 자네한테 진짜로 원시인, 즉 그의 작품을 보여 준 격이 되었군."
- 사안. 세계 곳곳에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미신이나 저주, 질병이나 상해, 불운을 부른다고 알려져 있다. "The evil eye"라고도 불린다.
- 심장병 분야에서 널리 존경받았으며 저명했던 전문의인 토머스 비비언 경의 괴이하고 불가사의한 살해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쯤 지난 후, 다이슨은 다시 친구인 필립스를 방문했다. 필립스는 평소와 같지 않게 고된 연구에 깊이 빠져 있었지만 잠시 편안한 자세로 안락의자에 기대 휴식하던 참이었다. 그는 따뜻하게 다이슨을 맞이했다.
"자네가 와 주니 정말 반갑군." 그가 운을 뗐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네.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선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어."
- "왜 이탈리아인이지?"
"그 손 때문이지. 피그 사인 말일세. 그 제스처는 이제 이탈리아인들만 사용하고 있어. 자네도 알다시피 사건에서 가장 모호한 부분이 알고 보면 가장 명료한 단서일 수도 있는 법이지."
"그래, 그렇군. 그렇다면 그 부싯돌 칼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그건 아주 간단하다네. 그 살인범이 이탈리아에서 우연히 그 칼을 발견했거나, 어쩌면 어떤 박물관에서 훔쳤을지도 모르지.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고, 친구. 그러면 언덕 아래의 까마득히 오래된 무덤에서 원시인을 끄집어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자네도 인정할 걸세."
"자네가 하는 말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군." 다이슨이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비비언 경을 죽였다는 그 이탈리아인이 친절하게도 마치 안내하듯이 분필로 손을 그려서 런던 경시청에 단서를 제공했다는 말인가?"
- 피그 사인. 남녀 간의 성교를 의미하는 손 제스처. 고대 로마와 에트루리아 등에서 사용됐으며 나라마다 의미는 다르나 보통 앞서 등장한 사안으로부터 보호해 주며 반대의 역할을 한다. "mano in Fica" 혹은 "mano fico"라고도 한다.
- "이 메모들은 직업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사적인 일들과 관련된 것들이었다네. 가령, 지인들과의 만남 약속, 연극 개막 공연 정보, 투르에 있는 괜찮은 호텔의 주소, 그리고 신간 소설의 제목처럼 어느 모로 보나 특별히 은밀할 만한 것은 없었지. 더불어 대강 적어 둔 이 메모들은 코트 주머니에서 발견된 편지와 거의 같은 글씨체로 쓰였어! 물론 둘 사이에도 차이점은 있지만, 전문가들만이 동일한 인물이 쓴 것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일 뿐이지. 이 점을 뒷받침할 만한 비비언 부인의 증언도 있다네. 내가 부인의 증언이 담긴 편지를 읽어주도록 하지. 작성된 쪽지를 가져왔거든. 이게 그녀가 했던 이야기야. '고인이 된 남편과 제가 결혼한 지는 7년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남편에게 온 편지 중 그 편지 봉투에 쓰인 글씨체와 닮은 것은 전혀 보지 못했을 뿐더러, 제게 제시하신 그 편지의 필체는 저로서도 생전 처음 보는 거네요. 저는 사망한 제 남편이 수첩을 이용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만, 그 수첩 안의 메모들은 모두 제 남편이 쓴 것이 확실합니다. 제가 그리 확신하는 이유는 우리가 지난 5월에 투르의 루 로얄에 있는 호텔 뒤 파장에 묵었기 때문이지요. 그 수첩에 그 주소가 있었답니다. 한 달 반 전에 그이가 <센티널>이라는 소설을 구입한 것도 기억나는군요. 토머스 비비언 경은 연극 개막공연을 놓치는 법이 없었답니다. 그렇지만, 평소 그이의 필체는 그 수첩에 쓰인 것과 전혀 달랐어요.'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그 편지 자체로 되돌아가지. 여기 사본이 있어. 친절하신 클리브 경감이 나의 아마추어적인 탐구심을 기특하게 여기시고 기꺼이 내가 사본을 갖도록 허락하셨다네. 읽어보게, 필립스, 자네는 모호한 명문에 관심이 많다고 이야기했지. 이게 바로 자네가 해독해야 할 과제야."
자기도 모르게 다이슨이 이야기하는 기이한 상황에 몰두하던 필립스는 그 사본을 받아 세심히 살펴봤다. 그 필체는 괴이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리고 다이슨이 말했던 것처럼 전반적으로 페르시아적인 느낌이 나는 글씨체였지만, 읽기에는 아무 무리가 없었다.
- 투르(Tours). 프랑스의 중서부에 있는 도시. 고성과 성당이 즐비했으며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의 고향이다.
- 호텔 뒤 파장(Hotel du Faisan). 오노레 드 발자크가 파리에서 문인으로서 데뷔한 뒤, 실패하고 고향인 투르에 돌아왔을 때 머물렀던 호텔. 그의 작품 곳곳에서 이 호텔이 언급된다.
- "손은 헛되이 가리키지 않는다. 별들이 의미하는 것은 더 이상 모호하지 않다. 이상하게도 검은 하늘이 사라졌거나 어제 누군가 훔쳐갔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천구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오래된 궤도는 불변인 채로 남으리. 그대는 내 표식의 번지수를 잊지 않았으리라. 잊었다면 어떤 다른 집을 정하겠느냐? 나는 달의 저편에 다녀왔고 그대에게 보여 줄 뭔가를 가져올 수 있겠노라."
- "어떻게 생각하나?" 다이슨이 물었다.
"이건 내게 순전히 횡설수설로 보이는군." 필립스가 말했다. "자네는 이런 글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
"아, 물론이지. 그 편지는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3일 전에 발송된 것이라네. 피살자의 호주머니에서 발견되었지. 게다가 피살자의 사적인 수첩에 사용된 그 기상천외한 필체로 작성했고. 이 모든 일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 게 분명해. 내 생각에 토머스 비비언 경 살인사건 이면에는 아주 추악한 뭔가가 숨겨져 있을 것 같다네."
- "아, 내 추론은 나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어. 결론을 말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것 같아. 하지만 내가 자네의 이탈리아인에 관한 추론이 틀렸다는 걸 입증한 것 같군. 필립스, 다시 말하는데 내 눈에는 이 모든 것이 추악해 보인다네. 나는 자네처럼 하지는 못해. 이런저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고 과거에도 발생한 적 없다는 식의 확고한 명제들로 내 자신을 무장하지는 못하겠다네. 자네도 그 편지의 첫 번째 단어가 '손'이라는 점을 알아 두게나. 내가 보기에 우리가 벽에 있던 손 그림에 대해 알아낸 것은 꽤 의미가 있어. 그리고 자네가 이야기해 준 그 상징의 역사와 의미라든가,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 내려온 아주 오래된 믿음과 신앙이 그 상징과 관련 있다는 점이라든가, 장난기로 가득 찬 이 모든 이야기들, 좌우간 이런 것들은 모두 내게 의미 있어 보이네. 아니, 나는 그날 밤 우리가 산책하러 나가기 전에 반 농담 삼아 이야기했던 것을 고수해야겠어. 우리 주변에는 선뿐 아니라 악을 위한 성례도 있는 법이지. 우리가 사는 미지의 세계에서 내 믿음은 변했어. 불가사의한 동굴과 그림자, 그리고 혈거인들이 있는 곳에서 말일세. 인간은 진화의 궤도상에서 간혹 뒤로 되돌아갈 수도 있고, 무시무시한 옛 설화들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이 내 믿음이야."
"자네가 하는 말은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겠군." 필립스가 말했다. "자네는 괴이한 것에 너무 관심이 많은 것 같아. 대체 뭘 어떻게 할 작정인가?"
- 필립스는 그토록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버릇 삼아 자랑하곤 하던 철저한 경계심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으로는 토머스 비비언 경의 사건에 대해 몹시 궁금해했다. 비록 그는 친구를 위해 겉으로는 대범한 척했지만 그의 이성은 다이슨이 내렸던 결론, 다시 말해서 사건의 모든 것이 추악하고 불가사의해 보인다는 결론을 거부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 사건에는 한 인간의 대동맥을 관통한 사라진 종족의 무기, 섬뜩한 신앙의 상징이자 피살자의 주검을 가리키고 있던 그 붉은 손, 다이슨이 찾기를 고대했으며 결국 실제로 찾았다고 공언한 저주의 손 문양이 새겨진 아주 오래된 석판과 그 아래에 아주 오래되었다고 하는 설형문자들조차도 최근의 것처럼 보이게 하는 기호들로 새겨진 전설, 이 모든 것 외에도 고민과 혼란을 안겨 주는 점들은 더 있었다. 시신 밑에 날이 드러난 채로 깨끗하게 놓여 있었던 그 칼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더불어 벽에 붉은 손을 그린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삶을 보냈으리라는 암시는 희미하고 무한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그를 전율케 했다. 그리하여 사실 그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적잖이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 "저의 긴 투쟁과 처량한 신세에 대해서 연연해할 필요가 없었답니다. 비록 이제는 두 배로 외로운 상황이었지만요. 저의 최후의 승리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절망한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같이 제 앞에 놓인 석판을 붙잡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지요. 그리고 해 질 녘에야 밖으로 나가 옥스퍼드가를 따라 걷곤 했습니다. 현란한 가로등 불빛과 소란스럽고 부산한 옥스퍼드의 밤거리에 매료되었다고 할 수 있겠군요.
어느덧 이 산책은 제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매일 밤 저는 날씨에 상관없이 그레이즈 인로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나아갔고, 때로는 북쪽 길을 택해 유스턴로나 토트넘 코트로를 따라 걸었지요. 또 어떤 때는 홀본을 지나가기도 했고 때로는 그레이트 러셀가에 들르기도 했답니다. 매일 밤 한 시간 정도 옥스퍼드가의 북쪽 보도를 돌아다니면서, 이따금 드퀸시의 소설과 그가 옥스퍼드 거리에 붙여 준 '무정한 계모'란 별명이 제 머릿속에 맴돌곤 하더군요."
- 토머스 드 퀸시 (Thomas de Quincey, 1785~1859)의 자서전적인 수필 <어느 영국인 아편중독자의 고백(Confessions of an English Opium-Eater)>(1821)을 지칭함. 작가 본인이 아편에 중독되고 벗어나는 긴 과정을 기억, 꿈, 환각, 신체적인 고통, 불안증 등에 대한 생생한 서술로 엮어낸 작품으로 어두운 무의식을 탐색하는 낭만주의 문학의 한 축의 효시라고 평가받는다.
- "제가 말했습니다. ' 아까 내가 손을 그렸던 벽이 어디인지 가리킬 수 있을 것 같네. 그리고 자네도 나처럼 그 산에서 신비의 손이 있는 곳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시냇물과 암석 사이를 기억해 두게나.'
그리고서 저는 몸을 굽혀 어둠 속에서 제 그림이 있다고 생각하는 곳을 살펴보고 있었어요. 그때 날카롭게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리길래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습니다. 팔 하나를 들어 올린 비비언의 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었고 그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다 군요. 저는 순전히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머니 속에 써 부싯돌 무기를 움켜쥐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는 단숨에 그에게 달려들었지요.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죽은 채로 보도 위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 "제 이야기는 다 끝났습니다."
셀비는 잠시 멈춘 뒤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다이슨 씨, 제가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해야 할 말은 한 가지뿐입니다. 댁이 어떻게 해서 저를 찾아내신 건지 도무지 짐작이 안 가는군요."
"여러 가지 표시를 따라 추적했을 뿐이었지요." 다이슨이 말했다. "그리고 몇 가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정확성의 측면에서는 인정받을 만한 것이 전혀 못 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건대 당신의 천체 암호는 제께 큰 문제가 아니었어요. 언뜻 보고도 일반적인 어휘나 구문 대신 천문학 용어를 사용하신 줄 알았습니다. 당신은 검은 물체를 잃어버리셨거나 도둑맞으셨겠지요. 천구의는 하늘의 사본일 테니 결국 당신이 잃어버린 물건의 사본을 간직하고 계신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문자나 상징이 쓰여 있거나 새겨진 검은 물체를 잃어버렸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요. 그 문제의 물체는 분명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고, 모든 정보는 반드시 문자나 그림으로 기록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오래된 궤도는 불변인 채로 남으리.' 이는 명백히 우리의 옛 노선이나 방식을 뜻하겠지요. 내 표식의 번지수는 틀림없이 살고 계신 거처의 번지수를 의미할 겁니다. 그리고 표식은 황도십이궁의 별자리를 일컫는 말이겠지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달의 저편'은 아무도 간 적 없는 어떤 장소를 의미할 테고요. '어떤 다른 집'은 어떤 다른 약속 장소일 테고 '집'은 오래된 용어로서 '천상의 집'이 되겠지요. 그리하여 제 다음 단계는 도둑맞은 '검은 하늘'을 찾는 것이었고. 그런 식으로 지난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해냈습니다."
"결국 그 석판을 찾았다는 말씀이신가요?"
"물론이지요. 그리고 그 뒷면에 말씀하신 종잇조각이 있더군요. 'inroad'라고 쓰인 게 굉장히 아리송했는데, 마침내 '그레이즈 인로'를 생각해 냈습니다. 'inn' 중에 두 번째 'n'자 하나를 깜빡하셨더군요. 당신이 귀띔해 추신대로 '부정한 개...'를 보고는 바로 드퀸시의 구절이 연상되었습니다. 저는 제멋대로이기는 하지만 정확히 추론해 냈어요. 당신이 그레이즈 인로 혹은 큰방에 살고 있고 옥스퍼드가를 산책하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대로를 따라 난 산책로에서 작품 속의 아편중독자가 지친 발걸음으로 거리를 산책하는 모습을 기억하셨을 테니까요. 여기 있는 제 친구에게는 예전에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만 불가능성의 이론상, 어쨌든 저는 당신이 가끔은 길포드가와 러셀 광장, 그레이트 러셀가를 지나는 길을 택할 것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곳을 오랫동안 지켜보면 당신을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지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어떻게 당신을 알아볼 수 있을까였습니다. 제 숙소 맞은편에 거리의 화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에게 매일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그 제스처인 큰 손을 뒤에 있는 벽에 그려달라고 부탁했답니다. 미지의 사내가 그곳을 지나갈 때 문득 그 표식을 보면 분명히 어떤 감정을 드러내리라 생각했거든요. 그에게는 아주 끔찍한 상징일 테니까요. 나머지 이야기는 아시는 바대로입니다. 아, 솔직히 말하자면 한 시간 뒤에야 당신을 잡은 것에 관해서는 제가 좀 치밀하기 때문이지요."
- "여태껏 편하게 술술 잘 말씀하셨잖소."
"편하게라." 셀비가 가까스로 자신을 추스르며 말을 이어갔다. "그렇지요, 제가 겉으로는 편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에서는 영원토록 지옥의 불길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답니다. 저는 산속의 그 끔찍한 집에서 딱 하나만 가져왔을 뿐이에요. 부싯돌 칼을 발견했던 바로 그 지점 너머에 놓여 있었습니다."
"왜 더 가져오지 않으셨지요?"
이 가련한 사내의 건장한 신체는 눈에 띄게 움츠러들고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누렇게 질렸으며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떨어졌다. 역겹고 비참한 몰골이 되었으며, 더욱이 목소리는 마치 뱀이 쉭쉭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왜냐하면 파수꾼들이 아직 거기에 있었고 제가 그들을 봤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그는 기묘하게 생긴 조그마한 금 세공품을 하나 꺼내 들었다.
"보시지요." 그가 말했다. "고통받는 염소랍니다."
필립스와 다이슨은 혐오스럽고 음란한 그 물건에 충격받아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 <붉은 손>
해설
정보라
"저는 무엇 때문에 그가 죽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공포에 질려서 죽었어요. 순전히 끔찍한 공포 때문이지요. 의사 노릇을 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시신의 얼굴을 봐왔지만 그렇게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 <위대한 신, 판> 중, 50쪽
낭만주의와 데카당스
공포문학이라는 장르는 보통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 사이에 낭만주의 사조의 출현과 함께 나타났다고 알려져 있다. 낭만주의의 시조가 되는 작품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독일의 문학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시 <마왕 Erikönig>(1782)인데, 위협적인 초자연적 존재가 주는 두려움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공포문학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깊은 밤에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말을 타고 숲 속을 달리는데, 아들이 끊임없이 마왕(독일어 원뜻은 "요정의 왕")의 속삭임을 듣고는 겁에 질린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마왕이 자신을 유혹한다고 호소하지만 아버지는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일 뿐이다" 등 이성과 논리에 갇힌 틀에 박힌 답변만을 내놓으며 아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나 숲을 빠져나왔을 때 아들은 이미 사라졌다. 마왕이 아들을 데려간 것이다.
유럽에서 18세기는 계몽주의의 시대였고,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과 논리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여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사조가 인간의 감정을 가장 중요시하는 감상주의이다. 그리고 감상주의가 낭만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공포문학(특히 "고딕 호러"), 환상문학, 로맨스 등 현재 "장르문학"이라 통칭하는 대중문학의 하위 분야들이 태동했고 독자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기 시작했다.
불가리아 출신의 프랑스 연구자 츠베탄 토도로프 Tzvetan Todorov는 그의 기념비적인 연구서인 <환상문학 서설 Introduction a la littérature fantastique> (1970)에서 공포문학을 포함하는 고전적인 환상문학의 가장 큰 특징을 "현실과 환상 사이의 망설임"이라 정의했다. 이러한 소설들에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도저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을 법한 사건이 발생하고, 결말에서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암시하는 중거가 제시된다. 주인공도 독자도 그 일이 환각이나 상상의 산물인지 아니면 실제 일어난 일인지 판단하지 못하고 망설이게 되며, 그 상태로 이야기가 끝나 버린다는 것이다.
아서 매켄의 작품들은 이러한 고전적인 환상문학의 특징인 "망설임"을 특히 공포라는 감정에 중점을 두고 충실하게 구현한다.
두려운 아름다움, 아름다운 공포
아서 매켄은 영국 웨일스 출신의 작가이다. 오랜 창작생활 동안 그가 특히 활발하게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내놓았던 시기는 1890년에서 1900년이었다. 유럽에서 이 시기는 "세기말"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fin-de-siècle"로 지칭되는데, 이 용어에는 19세기가 끝나간다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뿐 아니라 세기의 끝과 함께 융성했던 유럽 문명도 함께 쇠퇴해 가고 있다는 우려와 불안감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정서를 바탕으로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문예사조는 "데카당스 decadence"이다. "타락, 쇠퇴, 퇴폐"라는 뜻을 가진 "데카당스"는 프랑스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의 작품 <악의 꽃 Les Fleurs du mal>(1875)의 출현과 함께 퍼져 나갔다. 보들레르는 밤, 뒷골목, 홍등가 등을 배경으로 한 기괴하고 부도덕한 형상들 속에서 뒤틀리고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며, 이러한 기괴함 속의 아름다움은 문예사조로서 데카당스의 근원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여기에 낭만주의와 데카당스의 공통점이 있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 사회 규범이나 도덕, 규율과 관습에 어긋나는 것, 엄격하게 규정된 주류의 삶에 편입될 수 없는 것에 대한 매혹과 호기심, 그리고 인간의 가장 강렬하고 본능적인 감정에 대한 존중이 그것이다. 아서 매켄의 작품들은 이러한 매혹과 호기심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에게 가장 강렬한 감정이자 생존을 위한 가장 깊은 본능이라 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매켄의 작품들에서 초현실적이고 비이성적인 사건들, "낯설고 ...
... 인 특징을 함께 보여 주는 것, 즉 기괴하고 두렵고 혐오스러운 것에서 신비하고 아름다우며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력을 발견하는 것이 데카당스의 특징이다.
주목할 점은 인간에게 파멸과 죽음을 가져오는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운 악의 상징이 그리스도교적인 악마가 아니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목양신 "판"이라는 것이다. 위대한 신, 판은 여러 연구자와 비평가들이 아서 매켄의 대표작으로 인정하는 작품인데, 여기서 매켄은 서양 문화 역사의 보편적인 바탕인 그리스도교보다도 더 오래된, 유럽 역사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적 상상력을 보여 준다. 매켄의 이러한 작품 특성에 대하여 연구자들은 "깊은 역사 deep history의 공포" 혹은 "비非진화적 퇴보"라 논평한다. 특히 이 "비진화적 퇴보"라는 표현은 <내면의 빛>과 <붉은 손>을 포함한 매켄의 다른 작품들을 이해할 때에도 유용하다. <위대한 신, 판>의 헬렌 본도, <내면의 빛>의 블랙 부인도 이러한 "비진화적 퇴보"를 겪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비진화적 퇴보"가 정확히 어떤 과정인지에 대해서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다. 작품을 읽기 전에 해설부터 읽어 보시는 독자분들을 위하여,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는 내용은 발설하지 않기 위함이다.
아서 매켄의 작품에서 이러한 "비진화적 퇴보"를 겪는 인물들은 모두 여성이며, 그러한 변화를 초래하는 장본인들은 남성이다. 이것은 현재의 기준으로 보자면 상당히 차별적인 이분법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은 매켄이 19세기에 태어난 사람이며 그의 작품들이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The picture of Dorian Gray> (1890)이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와 대략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데카당스시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19세기말 영국 빅토리아 시대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류학이 발달하던 시대였다. 이 시기에 유럽인들은 "인류학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볼 때 백인 남성의 가장 큰 특징은 지성 혹은 이성이며, 백인 여성의 가장 큰 특징은 (지성은 남성보다 떨어지지만) 도덕성과 윤리성 그리고 섬세한 감성이라 믿었다. 예를 들어 <위대한 신, 판>에서 레이먼드 박사에 의해 변화하는 메리가 레이먼드 박사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순수하고 순진한 소녀로 묘사되는 점, 헬렌 본이 아름다움, 호기심, 공포, 죽음 등 이성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의 스펙트럼을 구현하는 인물이라는 점 등을 통해 빅토리아 시대에 상식으로 여겨졌던 사고방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
결국 전문가의 설명이 도달하는 곳은 "불가지론"과 "악마"이다. 논리적 설명과 비논리적인 현상이 함께 존재하고 작가는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아무런 결론도 내려 주지 않으며, 주인공도 독자도 스스로 대답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앞에서 논의한 고전적 환상문학의 특징인 토도로프적 "망설임"이다.
영향
매켄의 작품들은 문학과 대중문화 전반에 알게 모르게 상당히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매켄의 영향을 받은 후대 작가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이는 바로 미국의 작가 H.P. 러브크래프트 Howard Phillips Lovecraft일 것이다. 러브크래프트는 "매켄의 작품에는 살아 있는 다른 모든 인간이 너무 둔하거나 너무 소심해서 포착하지 못하는 공포의 황홀경이 있다"고 평하며 "아서 매켄은 거인 Titan이다. 아마 살아 있는 작가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일 것이다. 나는 그의 작품을 전부 다 읽어야만 한다"라고 격찬한 바 있다. 물론 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의 철학적, 사상적 방향은 매켄의 작품과 전혀 다르지만, 겉보기에 현실적이고 평범하게 짜인 주변 세계의 구도 안에서 "오래전부터 세상에 존재하여 살아남은 악" 혹은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공포"에 집중한다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우리 주변에는 선뿐 아니라 악을 위한 성례 聖禮도 있는 법이지. 우리가 사는 미지의 세계에서 내 믿음은 변했어. 불가사의한 동굴과 그림자, 그리고 혈거인들이 있는 곳에서 말일세. 인간은 진화의 궤도상에서 간혹 뒤로 되돌아갈 수도 있고, 무시무시한 옛 설화들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이 내 믿음이야."
- <붉은 손> 중, 203쪽
러브크래프트로 대표되는 문학가들 외에도 대중문화 분야에서 이러한 매켄의 작품 세계에 매혹된 예술가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매켄은 영국의 음악가들에게 꾸준히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영국의 포스트 펑크 밴드인 더 폴 The Fall과 네오포크 밴드인 커런트 93 Current 93은 매켄의 신비하고 오컬트적인 작품의 특성과 소재를 음악에 차용했다. 더 폴의 마크 E. 스미스 Mark E. Smith는 인터뷰에서 필립 K. 딕 Philip K, Dick 혹은 에드거 앨런 포 Edgar Allan Poe와 같은 소설가들과 함께 아서 매켄을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 밝혔다. 더불어 커런트 93은 매켄의 작품에서 얻은 영감을 소재로 창작한 "내면의 빛"에서 매켄의 작품 제목을 노래의 제목으로 삼기도 했다. 음악만이 아니라 영화와 연극 등 다른 여러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아서 매켄의 작품은 지금까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사랑받으며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매켄을 읽는다는 것은 현재까지도 살아 숨 쉬는 영국 문학과 문화를 만나는 일이다. 그리고 더 넓게는 유럽 문학과 문화의 어떤 고전적이고 중심적인 사고방식과 관점을 조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찬란하고 두렵고 매혹적이며 기괴하고,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랫동안 등 뒤에 서늘하게 남아 있는 그림자를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독자분들도 그 즐거움을 함께 느껴 보시기를 바란다.
아서 매켄 연보
1863년 3월 3일 웨일스 남부, 권트 Gwent주의 어스크 Usk에 있는 칼리언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존 에드워드 존스 John Edward Jones는 카마던셔 Carmarthenshire에서 오랫동안 대를 이어온 성직자 가문의 후손이었다. 매켄은 부친과 어머니 재닛 매켄 Janet Machen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자녀였다.
1864년 부친이 칼리언과 가까운 곳에 있는 란데위 Llandewi의 교구 목사로 부임하면서 이곳에서 성장한다. "아서 루엘린 존스 매켄 Arthur Llewelyn Jones Machen"이라는 세례명으로 성공회 세례를 받는다. 매켄의 아버지는 부인의 성이었던 "매켄"을 아들의 이름에 사용한다. 후에 매켄은 아버지의 성인 "존스"를 뺀 채 아서 매켄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다. 매켄은 권트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환경을 접하며 성장한다. 이 때문에 매켄의 작품은 권트의 풍경을 환기한다. 더불어 매켄은 칼리언 교회 묘지에서 로마 비문과 조각을 발견한 조부의 영향으로 로마 점령기 시절의 이교도적인 유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켈트신 노덴스 신전의 발굴지에도 관심을 보였다. <위대한 신, 판>에서는 리드니 공원의 노덴스 기둥을 묘사한다.
1874년 11세부터 17세까지 헤리퍼드 대성당 학교 Hereford Cathedral School에서 수학한다. 서양고전학과 신학에 집중하는 동시에 문학과 역사에도 관심을 보이며 독특한 시야를 형성한다. 학업 능력이 뛰어났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능력에 걸맞은 학교에 입학하지는 못한다.
1878년 헤리퍼드에서 윌리엄 슈웽크 길버트 William Schwenck Gilbert와 아서 시모어 설리번 Arthur Seymour Sullivan의 오페라 <전함 피나포어 HMS Pinafore>의 제작 과정을 보게 된다. 매켄은 훗날 첫 번째 자서전인 <먼 옛적의 것들 Far off things>에서 <전함 피나포어>를 본 경험이 연극을 사랑하게 된 계기였다고 밝힌다.
1880년 처음으로 런던을 방문한다. 부친과 함께 런던의 오페라 코미크 Opera Comique에서 길버트와 설리번의 <펜스의 해적 Pirates of Penzance>을 관람한다. 또한 이때 앨저넌 찰스 스윈번 Algermon Charles Swinburne의 시집인 <일출 전의 노래들 songs before Sunrise>을 구입한다. 그는 <먼 옛적의 것들>에서 이 시집을 접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부친인 존 에드워드 존스가 파산을 선고받는다.
1881년 익명으로 엘레우시니아 밀교의 신비에 관한 시집 <엘레우시니아 Eleusiniay>를 소량으로 100부 출간한다. 매켄의 부모는 매켄에게 언론인이 될 것을 권유하고, 매켄은 이러한 부모의 의견을 받아들여 런던으로 떠난다. 이후 런던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가난하게 생계를 꾸려나간다. 런던의 근교와 폐가에 매혹되어 런던의 광활하고 신비한 풍경을 탐험한다.
1884년 로버트 버턴 Robert Burton의 <멜랑콜리의 해부학 Anatmoy of Melancholy>을 모방한 공식적인 첫 작품 <담배의 해부학 The Anatomy of Tobacco>을 출간한다. <담배의 해부학>은 흡연의 즐거움에 관해 다룬 에세이다. <담배의 해부학>을 출간해 준 출판업자 조지 레드웨이 George Redway의 소개로 런던의 코번트 가든 Covent Garden에서 <월포드의 고미술 Walford's Antiquarian>의 부편집자로서 일한다.
1885년 새뮤얼 리들 맥그리거 매더스 Samuel Liddell MacGregor Mathers와 A. E. 웨이트 A. E. Waite 등 오컬트 작가의 작업물을 출판하는 조지 레드웨이와 함께 일하기 시작한다. 매켄은 편집과 번역, 리뷰 기사를 작성한다. 더불어 레드웨이의 요청으로 <오컬티즘의 문학과 고고학 The Literature of Occultism and Archaeology>이라는 고대의 예배, 점성술, 연금술에 관한 카탈로그 작업을 엮고 편집한다. 11월 10일 모친 재닛 매켄이 사망한다.
1886년 조지 레드웨이의 요청으로 오래된 프랑스 저작 마르그리트 드나바르 Marguerite de Navarre의 <헵타메론 Heptameron>을 번역해 출간한다. 더불어 프랑수아 베로알드 드 베르빌 François Béroalcle de Verville의 <처세술 Le Moyen de Parvenir>과 이탈리아 작가 자코모 카사노바 Giacomo Girolamo Casanova의 <회고록 The Memoirs>도 출간한다.
1887년 8월 31일, 24세에 런던 문학계에서 만난 13살 연상의 음악 교사 아멜리아 호그 Amelia Hogg와 결혼한다. 매켄은 결혼 직후 스코틀랜드의 친척에게 유산을 받아 글쓰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된다. 호그는 매켄에게 작가이자 오컬티스트인 A. E. 웨이트를 소개하고, 매켄은 M. P. 실 M. P. Shiel과 에드거 젭슨 Edgar Jepson과 같은 문인과도 친분을 쌓기 시작한다. 9월 29일, 부친 존 에드워드 존스가 사망한다.
1888년 그의 첫 번째 소설인 <클레멘디 연대기 The Chronicle of Clemendy>를 출간한다. <클레멘디 연대기>는 신비한 혈통을 지닌 웨일스 술친구들의 액자식 구성 판타지 소설이다.
1890년 성공한 동시대 소설가들처럼 당대 방식으로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신문과 문학잡지에 단편을 발표한다. 일상적인 현대사회의 풍경을 환상적인 공간으로 묘사한다. 더불어 고딕적인 주제를 포함한 공포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프랑스의 투렌 Touraine을 여행한다. 90년 여름, 오스카 와일드에게 단편 작업을 권유받는다. 그 후 <월윈드 The Whirlwind>에 알 수 없는 쾌락을 주는 비밀스러운 사교계에 관한 짧은 공포소설 <로스트 클럽>을 발표한다. 위대한 신, 판의 첫 장이기도 한 "실험 The experiment" 역시 이곳에 발표한다.
1891년 부인인 에이미 호그와 함께 남은 유산을 가지고 칠턴 Chiltern의 작은 집에서 살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실험"의 뒤를 이어 <위대한 신, 판>의 나머지 부분을 집필한다.
1894년 과학자의 엇나간 지식욕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을 그린 미스터리 단편 <위대한 신, 판>과 <내면의 빛>을 묶어 존 레인의 저명한 "키노트 시리즈 Keynotes Series"의 하나로서 출간한다. <위대한 신, 판>과 <내면의 빛>은 성적이고 끔찍한 내용이라고 비판받았으나, 재판을 찍을 정도로 성공한다.
1895년 오컬트 탐정 다이슨이 기이한 표식 아래 살해당한 남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미스터리를 그려 낸 <붉은 손>과 한 남자가 길에 나타난 돌의 표식을 추적하는 짧은 공포 이야기 <빛나는 피라미드 The Shining Pyramid>를 발표한다. 또한 <위대한 신, 판>과 <내면의 빛>에 이어 여러 편의 이야기들로 구성된 소설 >세 명의 사기꾼 The Three Imposters>을 "키노트 시리즈"의 하나로서 출간한다. <위대한 신, 판>의 성공과 함께 매켄은 데카당트 문학의 화신으로서 폭넓은 대중적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스카 와일드를 둘러싼 스캔들과 당시 데카당트 문학에 대한 비난 풍조 때문에 더 이상 신작을 발표하지 못한다.
1898년 오늘날 <타임스 문학 Times Literary> 증보판의 선행격인 <문학 Literature>의 부편집자로 저널리즘에 복귀한다. 이곳을 그만둘 때쯤부터 <상형문자, 문학의 황홀경에 관한 노트 Hieroglyphics: A Note upon Ecstasy in Literature>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1899년 7월 31일에 부인 에이미가 암으로 사망한다. A. E. 웨이트는 부인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매켄에게 신비주의 단체인 "황금 여명회 Hermetic Order of the Golden Dawn"의 가입을 권유한다. 매켄은 일 년 동안 "황금 여명회"에 소속된 "이시스 우라니아 사원 Isis-Urania Temple of the Golden Dawn"의 회원으로서 "황금 여명회"에서 활동한다. 매켄은 신비주의적이고 영적인 가치에 언제나 열정적이었으나, 부인의 죽음 직전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켈트 기독교에 두기 시작한다. 데카당트 사조에 관한 비난이 거세지면서 이교도, 밀교의 주제에서 벗어나 그동안 좇던 영적인 가치를 좀 더 건전한 방식으로 모색한다. <오컬티즘의 문학 The Literature of Occultism>을 발표한다.
1901년 프레드릭 벤슨 Fredrick Benson의 레퍼토리 극단에 들어가 1907년까지 활동한다. 벤슨의 극단은 에이미의 사별로 실의에 빠진 매켄에게 희망과 열정을 불어넣으며 그의 성격을 외향적으로 바꾼다.
1902년 1899년에 집필을 완료했던 <상형문자>를 출간하며, <상형문자>에서 진정한 문학은 황홀경을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03년 6월 25일 배우 도로디 퓨어포이 허들스톤 D orothie Purefoy Hudleston과 재혼한다. 그 후 허들스톤과 영국의 레퍼토리 극장을 순회하기 시작하며 몇 년 동안 연극과 같은 다른 예술 분야에서 활동한다. 또한 종교적, 영적인 관심을 영국의 성공회에 두기 시작한다. A. E. 웨이트와 함께 운문극 <신성한 성배의 숨겨진 성례 The Hidden Sacrament of the Holy Graal>를 집필한다. 이 작품은 1906년 웨이트의 <수면의 낯선 집 Strange Houses of Sleep>에 실리며, 이 작품에서 매켄은 익명의 "미스터리의 동료"로서 소개된다.
1904년 1899년 이래로 작업한 <삶의 단편 A Fragment of Life>, <백색 인간 The White People>을 발표한다. <삶의 단편>은 한 젊은 부부가 영적인 삶을 위해 물질적인 삶의 진부함을 거부해 가는 과정을 묘사한다. <백색 인간>은 어린 소녀의 일기로 제시되며, 점점 더 깊은 마법에 빠져드는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A. E. 웨이트와 암호화된 신비로운 서신에 관한 이야기 <숨겨진 빛의 집 The House of the Hidden Lighty>을 세 부만 출간한다.
1906년 1890년대의 주요작을 모은 <영혼의 집>을 출간하며 새로운 독자층을 형성한다.
1907년 예술가의 어둡고 신비로운 광기, 경외, 관능, 공포와 황홀감을 묘사한 소설 <꿈의 언덕>을 출간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연인이었던 알프레드 더글러스 Alfred Douglas가 편집자로 재직하던 성공회 문예지 <아카데미 The Academy》의 저널리스트가 된다. 성배의 기원에 관한 문제와 예배에서 의식의 중요성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물질적 가치를 구제할 수 있는 종교성에 관해 묘사한 <비밀의 영광 The Secret Glory>을 집필한다. 복음주의 개신교에 관한 작품 <스티긴스 박사, 그의 견해와 원칙 Dr. Stiggins: His Views and Principles>을 발표한다.
1908년 경제적 안정을 위해 알프레드 함즈워스 Alfred Harmsworth가 운영하는 <이브닝 뉴스 Evening News>에서 일한다.
1910년 타블로이드지였던 <데일리 메일 Daily Mail>의 자매지인 <이브닝 뉴스>의 통신원이 되면서 전업 저널리스트가 된다. 예술과 종교 분야의 기자로 지내며, 다양하면서도 절묘한 방식으로 기사를 쓰면서 저널리스트로서 인정받는다.
1912년 아들 힐러리 Hilary가 태어난다.
1914년 영국과 독일의 전쟁이 발발한다. 매켄은 그가 일하는 <이브닝 뉴스>에서 영국군이 불리했던 8월 몽스에서의 첫 교전과 관련한 글을 기고한다. 이 글은 독일군에게 화살을 쏘는 천사 궁수에 관한 이야기로, 영국군이 패배를 면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보국적인 주제는 전시 상황이라는 이유로 독자들에게 픽션이 아닌 사실로서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궁수 The Bowmen>는 대중들에게 "몽스의 천사들 Angels of Mons"이라는 에피소드로 홍보되면서 매켄에게 유명세를 안긴다.
1915년 <궁수>의 성공으로 전쟁에 관한 이야기 <위대한 귀환 The Great Retum>을 출간한다.
...
1932년 매년 100파운드의 시민연금을 받으며 지낼 수 있게 되었지만, 어니스트 벤의 출판사로부터 일이 없어지자 경제적 상황이 다시 어려워진다. 이후에 존 고즈워스 John Gawsworth의 지원으로 저작을 출간할 수 있게 된다.
1933년 <그린 라운드 Green Round>를 출간한다. 한 남자가 해변에 있는 "그린 라운드"를 방문한 후 난쟁이에게 시달리는 공포작품이다.
1934년 런던의 숨겨진 세계와의 만남을 묘사한 단편 소설 <엔 N>을 발표한다.
1936년 짧은 공포소설 모음집인 <풀장의 아이들과 다른 이야기들 The Children of the Pool and Other stories>과 <안락한 방과 다른 이야기들 The Cosy Room and Other stories>을 출간한다. <풀장의 아이들>에는 <고원한 오메가 The Exalted Omega>, <풀장의 아이들 The Children of the Pool>, <쾌활한 소년 The Bright Boy>, <생명의 나무 The Tree of Life>, <어긋난 의도 Out of the Picture」, <변화 Change>가 수록되어 있다.
1937년 런던의 아이들이 행하는 어두운 의식에 대한 짧은 이야기 <의식 Ritual>을 발표한다.
1943년 매켄의 여든 번째 생일을 맞아 맥스 비어봄 Max Beerbohm, T.S. 엘리엇 T. S. Eliot, 버나드 쇼 Bernard Shaw, 월터 드 라마레 Walter de la Mare, 앨저넌 블랙우드 Algernon Blackwood, 존 메이스필드 John Masefield를 포함한 작가들이 문학적 상소를 올린다. 이 상소가 받아들여져 매켄은 이후 여생을 비교적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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