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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준, 펭귄, 황희, 안치우, 박해로] 섬 그리고 좀비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6. 30.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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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백상준 / 펭귄 / 황희 / 안치우 / 박해로
출판 : 황금가지
출간 : 10.06.28 


       

 

종일 기절한 듯이 잤다.

올해 들어 가장 긴 잠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일어나니 긴 시간 누워 있었는데도 몸이 가뿐하다. 

배도 별로 고프지 않고, 무지근한 두통도 없다. 

 

'아. 한 주기가 무사히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잘한 것들이 아직 남아있지만, 하반기는 내실을 다지는 시기로 살아볼까 한다. 

 

<섬 그리고 좀비>는 황금가지에서 '좀비 아포칼립스 Zombi Apocalypse'와 '섬'이라는 키워드로 주최한 공모전 당선작들을 모은 단편집이다.

각 작품마다 조금씩 다른 세계관을 설정했는데, 제각기 다른 매력이 있다. 코로나 시기 훨씬 이전인 2010년에 출간된 작품들이지만 -당시엔 신종플루가 있었다-, 지금 읽어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먼저 <섬> 같은 경우는 상당히 현실적이면서도 유쾌한, 생존을 위해서라면 용인될 법한 수준의 이기주의가 빛난다. 히어로처럼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먼저 챙기는 '이상주의'보다, 적절히 자신의 안위를 먼저 챙길 줄 아는 화자가 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다. 

 

<어둠의 맛>은 공기에 대한 감각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밤 공기의 맛'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 속의 좀비는 이성을 유지하며, 신체가 부패-훼손될 뿐 대체식(생고기 등)으로도 일상 유지가 가능하다. 감염된 자에게 찍히는 사회적 낙인, 눈에 보이지 않는 암묵적 계급을 '좀비'로 형상화한 작품이라 좀비소설보다는 사회소설로 읽힌다는 점이 장점이자 단점.

 

<잿빛 도시를 걷다>는 비틀린 모성애를 다룬다. 아이를 아끼고 지켜주고 싶어하는 마음과 동시에 너무 사랑해서 먹어버리고 싶다는 욕망을 결합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작품으로서는 조금 매끄럽지는 못한 부분이 있었다. 이미 사망했던 어머니의 감염 및 부활이나, 갑작스러운 딸아이의 등장 같은 장면이 살짝 더 다듬어진다면 좋을 것 같다. 어머니가 화자를 찾아왔던 이유가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도도 사피엔스>. 좀비나 감염병을 주제로 하는 많은 작품들이 천신만고 끝에 백신을 개발하거나 물리적 승리를 거두는 희망편이었다면, 이 작품은 절망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서 즐겁게 읽었다. 작가는 '사실 진짜 감염원은 인류인지도 몰라'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세상 끝 어느 고군분투의 기록>. 이 책을 읽게 된 이유. 박해로 작가의 발표작을 정주행하기 위해 찾아 읽게 된 것인데, 이 작품만 놓고 본다면 조금 실망했다. 아무래도 훨씬 초기작인 데다 주제도 좀비라 그렇겠지만 내가 매력을 느꼈던 박해로 작가만의 포인트들이 잘 보이지 않는 느낌. 끝까지 살아남는 어린아이와 희망을 말하려 했다는 점에서도 살짝 낯설다.

 

끝.  

 


   

 

ZA 문학 공모전 수상 작품집을 출간하며

 


'좀비'라고 하면 보통 주술로 시체를 되살려내는 '부두교의 좀비'를 생각하는 독자가 많을 테지만, 현대의 좀비는 드라큘라처럼 치명적인 전염성을 가진 질병의 개념으로 널리 쓰인다. 이는 1950년대 소설인 '나는 전설이다'에서 처음 선보였고, 이후 조지 R. 로메로 감독의 시체 3부작을 통해 영화 콘텐츠로 사용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현대에 이르러 '좀비 아포칼립스(Zombie Apocalypse)'는 다양한 형태로 변이 사용되어 왔는데, 잭 스나이더 감독의 <새벽의 저주>나 대니 보일 감독의 <28일 후>에서는 아예 달음박질을 하는 좀비들이 등장한다. 스피드 시대에 걸맞은 속도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모든 좀비물들은 몇 가지 핵심적인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선 무정부 상태의 혼돈 속 종말의 세계관과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들의 다양한 인간군상을 담아낸다는 점, 현실에 치여 고립된 현대인을 대변하듯 좀비들 사이에 고립된 등장인물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투영한다는 점, 항시 미래와 발전 ...

 




- 퀭한 눈으로 뒤뚱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막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이게 꿈이든 아니든 우선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인정사정없이 녀석의 명치를 걷어찼다. 녀석은 삭은 나무토막처럼 힘없이 쓰러졌고 나는 급히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고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 하지만 생각해 보니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냥 기다릴 순 없었다. 출근도 해야 하고, 어디서 샘솟은 사명감인지 사람들에게 좀비가 나타났다고 알려야 할 것 같았다. 다시 문을 열고 아직 바닥에 쓰러져 뒤집어진 채 거북이처럼 허둥대는 녀석을 뛰어넘어 거리로 나왔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다른 세계에 왔나 생각했다. 거리에는 온통 썩어 문드러진 얼굴들이 뒤뚱거리며 걸어 다니고 있었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건 내가 아는 세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꿈도 아니었다. 꿈이라고 하기엔 보고, 느껴지는 모든 게 너무나 사실적이었다.

 

- 나는 서둘러 차로 달려가 문을 잠그고 잔뜩 웅크린 채 거리를 살폈다.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사람들과 싸구려 장난감처럼 뒤뚱거리며 그 뒤를 쫓는 좀비들의 모습이 보였다.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라디오를 켰다. 평소 음악을 듣기 위해 FM주파수에 맞춰져 있던 라디오에선 긴장한 아나운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 수 없는 전염병이 퍼졌으니 절대 외출하지 말고 타인과 신체접촉도 피하라는. 외출? 나는 출근인데? 출근은 해도 되는 건가?

 

- 덜컥 부모님이 걱정됐다. 빌어먹을 재개발 때문에 우리 식구들은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가 동네를 떠나 혼자 심심하게 지내기 싫다고 우겨서, 부모님은 가까운 곳에 작고 싼 아파트 전세를 구하고, 나는 회사 근처에 오피스텔을 얻어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집이 작다는 건 핑계였다. 사실 나는 우리 동네의 재개발 수주를 따려는 회사의 특명을 받고 백방으로 뛰었다. 어머니 계모임에 식비를 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재개발 수주를 경쟁사에 뺏겼고 내 입장이 조금 난처해졌다. 그래서 괜한 트집을 잡아 어머니와 대판 싸우고 결국 집을 나왔을 뿐이다. 아무튼 나는 곧장 부모님 집으로 차를 몰았다. 거리는 온통 경찰차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와 보행자 신호쯤은 가볍게 무시하는 좀비들로 가득했다. 

- 내 바람과는 달리 멀쩡한 건 집뿐이었다. 맞은편 1502호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을 때부터 덜컹 겁이 났는데, 역시나 자식도 몰라보고 물려고 덤비는 부모님을 간신히 안방에 밀어 넣고 거실에 멍하니 앉아 천장만 바라보며 낮을 보냈다. 빌어먹을 1502호 사람들이 이렇게 만든 걸까?

- 문득 출근을 안 한 게 생각났다. 월차라도 쓰려고 전화했지만, 한 시간 동안 20번을 넘게 걸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 전화가 고장난 건 아닌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갔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무작정 지난 수신번호에 찍힌 번호로 연결을 시도했다. 스팸번호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연결된,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방이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미친 새끼, 왜 이런 때 전화질이야! 다신 전화하지 마!"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한동안 그게 마지막으로 듣는 인간의 목소리가 될까 봐 우울하게 시간을 보냈다.

- 갑자기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걸까? 중국 황사를 타고 온 바이러스일까? 작년보다 한 달이나 빨랐다는 황사보도를 들은 기억이 났다. 입춘보다 먼저 봄을 알리는 황사가 왔다고 했던 직장동료의 말도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나는 전설이다>라는 책에도 모래폭풍 이야기가 나온다. 빌어먹을 황사!

- 어쨌든 먹고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어머니가 해 놓은 된장찌개와 이미 말라 바닥에 눌어붙기 시작한 밥으로 상을 차렸다. TV는 이틀째 먹통이고, 라디오에선 종일 녹음된 듯한 감염자 발견 시 행동요령이 흘러나왔다. 정말 쓸데없는 내용이었다. 행동요령의 마지막은 결국 112이나 119 같은 100번대 전화로 도움을 청하라는 건데, 사흘 동안 수백 번은 아니더라도 수십 번 전화를 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결국 우리 보고 알아서 하라는 말이다. 정부는 돈 먹는 하마인가! 도대체 정부는 뭘 한 거지? 이 빌어먹을 정부는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은 국민을 조용히 살지 못하게 한다! 내가 낸 세금과 부모님이 낸 세금이 그동안 총 얼마였을까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다. 

- ... 화장실이다. 같이 좀 쓰자는 데 불만은 없겠지. 우리 집은 꼭대기 층, 나름 펜트하우스라 옥상을 올라가는 데는 큰 위험이 없다. 우선 안전한지 확인하기 위해 조심조심 현관문을 열고 조용조용 옥상으로 올라갔다. 예전에 부모님 몰래 담배 피던 고딩 시절이 생각났다. 
똥을 싸고 휑한 옥상을 보니, 여기에 'HELP ME'라고 커다랗게 써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인트는 없고, 쓰다 남은 청테이프로 쓰자니 큼지막하게 'H' 하나 쓰면 끝일 것 같다. 

- 종일 뭐로 표시할까 궁리하다가 짜증만 났다. 좀비 영화에는 이럴 때 필요한 건 어떻게든 다 찾아내는데, 우리 집에는 이럴 때 쓸 만한 게 하나도 없다. 그러고 보니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이럴 때 사람들이 피신할 냉전시대 만들어진 방공호며, 서로 교신할 수 있는 단파무전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총, 손전등, 페인트 같은 게 쉽게 등장하는데 우린 이게 뭔가 싶다. 우리나라에서 냉전시대에 만들어진 방공호는... 군사기밀이고, 단파라디오는 있으면 간첩이다. 총은 예비군 훈련 때나 구경하는데 그나마 총알은 향방예비군으로 바뀌면 구경도 못한다. 손전등은 핸드폰 액정이 대신하고 있고, 페인트? 시너는 있어도 페인트는 없다. 80년대도 아니고 화염병을 만들 것도 아닌데 우린 재난에 너무 취약한 것 같다. 

- 위험에 처한 소녀를 발견했다. 낡은 옷가지와 지난 신문으로 'HELP ME'를 쓰다가 단지상가 건물 옥상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우리 집 베란다에서는 103동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이다. 소리쳐 불러볼까 하다가 상가 주변에 좀비들이 워낙 많아 포기하고 고민 끝에 손거울로 햇살을 반사시켜 신호를 보냈다. 아이가 신호를 보고 같이 손거울로 신호를 보냈다. 어떻게 이야기를 나눠볼까 고민하면서 모스부호를 알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또 나만 알고 있으면 뭐 하나, 어린 여자아이가 알긴 하겠나 싶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맞은편건물에 햇살을 반사시켜 큼지막하게 글씨를 하나씩 써서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눴다.

- 이름은 최선희. 고란다. 휴대폰이 있으면 통화를 하고 싶었지만, 선희의 휴대폰은 이미 방전된 상태였다. 반면 나는 정전이 되기 전까지 어머니 휴대폰과 예비 건전지까지 모두 충전해 둔 상태였다. 기회가 되면 건전지 모델이 같은 내 휴대폰의 예비 건전지를 가져다주기로 했다. 어떻게 보름이 넘도록 버텼냐고 묻자 아래 마트에서 과자와 라면을 가져와 견뎠다고 했다. 마트 주인보다는 좀비들에게 안 걸렸냐고 묻자, 선희는 자기가 내려갔을 땐 상가 안에 좀비가 한 놈밖에 없었고, 밤에 조용히 내려갔다고 했다. 밤이라고 해도 잠을 자지 않는 좀비에게 다를 게 있나 생각했지만, 어찌 보면 좀비들도 눈은 있으니 밤엔 잘 안 보일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밤에 시력이 우리보다 나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도 어두워서 녀석들을 잘 볼 수 없을 텐데, 우리도 썩 유리하진 않을 것 같기도 했다.

 

- 어제 그 웃음이 내가 본 선희의 처음이자 마지막 웃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실컷 웃게 할 걸 그랬다. 아니,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부터 옥상에서 선희를 보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섣부른 위로가 선희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들었고 죽음으로 몰아버린 것 같다.

- 선희는 다시 혼자가 된 걸 견뎌내지 못했다. 선희는 그날 밤 내가 준 어머니의 옷과 피부를 두르고 가족을 찾아 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좀비로 변한 엄마와 동생을 만났다. 그때 선희는 단호하게 돌아서야 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좀비로 변한 엄마와 동생의 모습에 울먹이다 그만 좀비의 이목을 끌어버린 모양이다. 방으로 도망쳤고 창문으로 나가려 했지만, 이미 창문 밖에도 좀비가 몰려들고 있었다. 옷장 안으로 숨었고,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그만 눈물이 나서 이렇게 됐다고 울먹였다. 이제 좀비가 방에 들어왔다고 옷장에 숨어 있다고 했다. 어딘지 묻긴 했지만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떨리는 선희의 목소리 너머로 옷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내 바로 옆에서 문을 긁는 것 같았다. '미친 새끼 왜 이런 때 전화질이야! 다신 전화하지 마!' 그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다. 전화를 끊고 싶었다. 마치 내 바로 옆에 좀비가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좀비들에게 들릴까 봐 조마조마하며 무조건 달아나라고 속삭였다. 그저 속삭이기만 했다. 그때 내가 두려워한 건 선희가 숨은 옷장 밖의 좀비인지, 아니면 내 머릿속의 좀비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선희는 계속 울먹였고, 살려달라고 말했다. 마지막엔 비명을 질러댔다. 수화기로 그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내 머릿속의 좀비들이 그 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밖의 좀비들까지 다 듣고 올라올 것 같았다. 나는 수화기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 선희의 자업자득이다. 나는 선희의 가족에 대한 집착이 화를 자초했다고 순간, 순간 그렇게 나를 위로한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도우러 간다 해도 좀비처럼 느릿느릿 걸어가야 한다. 그럼 1킬로미터나 떨어진 선희의 집까지 1시간은 더 걸릴 터였다. 어차피 그때까지 선희가 살아있을 확률은 없다. 어머니, 아버지를 죽인 게 후회된다. 이미 죽은 두 사람을 죽이고, 또 산 사람 하나를 죽게 만들었다.

- 좀비처럼 퀭한 눈으로 뒤뚱거리며 걷다 보면 왜 그들이 청각이 예민한지 절로 느끼게 된다. 초점을 잃은 눈과 부자연스런 동작으로 굳고 뻣뻣해진 피부로는 주변의 정보를 제대로 얻을 수가 없다. 결국 주변의 정보를 얻기 위해선 다른 감각을 이용해야 한다. 시각, 촉각, 청각을 빼고 미각과 후각이 있지만 미각은 과연, 쓸모가 있을까. 그리고 후각은 금방 마비된다. 결국 주변 정보를 얻기 위해선 귀에 많이 의지해야 한다. 그러니 청각이 극도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어떨 때는 초원에서 풀을 뜯는 말이 전후좌우로 귀를 흔드는 것처럼 내 귀도 움직이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 좀비처럼 걸을 때 가장 고민거리는 방향 전환이다. 아직 좀비들이 무슨 생각으로, 무슨 이유로 방향을 바꾸는지 잘 모르겠지만 ... 

- 일주일이 지났지만 전화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하긴, 좀비 흉내를 내고 다니려면 앞만 보고 걸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옥상에 씌어진 주소와 전화번호를 보지 못할 것이다. 괜히 아까운 휴대폰 건전지만 낭비했다.

- 마트에서 가져온 식품을 구색이나 갖추려고 냉장고에 넣으려다 환하게 켜진 냉장고 안 백열등을 보고 전기가 다시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저녁에는 수도꼭지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놀란 나는 허겁지겁 수도꼭지를 잠갔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과연 이런 인류멸망의 상황을 대비해 모든 게 자동으로 복구되게끔 설계된 것일까? 아니면 정부가 아직 멀쩡한 국민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공급하고 있는 것일까? 서울에는 발전소가 없다. 경기도에는 있나? 어쩌면 서울만 이 난리일지도 모른다. 물은? 어딘가 수자원공사 직원이 최소한 한 명은 살아있는 게 분명하다. 자기도 답답하니 뭔가 조치를 취했겠지. 나는 그냥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 거다. 

 

- 전기밥솥으로 밥을 했다. 생쌀을 씹어 먹다가 밥을 해 먹으니 너무 부드럽고 온몸에 온기가 퍼지는 것 같다.
걸 곳도, 걸어올 사람도 없겠지만 낭비한 휴대폰 건전지를 충전했다. 어차피 꽂을 콘센트는 많다. 그리고 MP3플레이어를 충전하고 음악을 들었다. 걸그룹의 노래만 저장한 MP3였다. 그 많던 걸그룹은 다 어떻게 됐을까? 그 애들도 다 좀비가 됐을까? 상상만으로도 언짢아진다. 

- 분명 모든 인간이 좀비가 된 건 아니다. 전기도 그렇고, 물이 나오는 걸 보면 분명 사람이 살아있다. 설마 좀비들이 갑자기 지능이 생겨 그런 시설을 가동하진 않았겠지. 문득 어딘가에 누군가가 살아있다면, 그리고 그가 우리 아파트 단지와 가까이 있다면? 마트의 물건이 안전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종일 마트를 오가며 먹을거리를 옮겼다. 그러다 보니 이제 좀비쯤은 무섭지 않다. 오히려 인간이 더 무섭다. 내 먹을거리를 먼저 가져가는 인간 말이다! 

- 물은 다시 나오지만 화장실은 쓸 수 없다. 변기 물 내려가는 소리를 듣고 놈들이 올라올 수도 있으니까. 전기도 전기밥솥으로 밥을 할 때만 쓰고 있다. 불은 높은 층이라 괜찮을 것도 같지만 큰길 쪽 내리막 언덕에서 불빛을 보고 오는 좀비가 있을 수도 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 빌어먹을 인간 마트에 가는 길에 한 인간을 만났다. 이제 갈가리 찢겨 죽은 인간이라 욕은 하지 않겠다. 녀석은 처음부터 어수룩하게 행동했다. 비록 좀비처럼 위장은 했지만, 처음 그를 볼 때부터 나조차도 그가 인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내는 내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군복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어디서 부상을 당했는지 다리를 질질 끌며 걷고 있었다.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신선한 피까지 흘리는 바람에 좀비들의 시선을 끌었다.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게 기적이었다. 좀비들은 상처 입은 먹잇감을 쫓는 하이에나처럼 그 사내의 뒤를 졸졸졸 따라갔다.  

- 사람을 죽였다. 어차피 좀비라도 부모를 죽인 놈이 그깟 사람하나 죽이는 게 무슨 대수인가 싶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엔 진짜 사람이었다. 좀비가 아니다.

- 옥상에서 똥을 싸고 다시 내려오는데 좀비가 우리 집 앞에 서있었다. 너무나 놀랐다. 나는 맨손이었고, 녀석의 손에는 기다란 멍키스패너가 들려 있었다. 망설일 새가 없었다. 나는 재빨리 몸을 날렸고 특히 녀석의 머리와 목을 노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녀석의 손에서 멍키스패너가 떨어졌다. 그 소리가 요란하게 복도를 울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멍키스패너를 눌러 소리를 줄이고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사정없이 녀석의 머리를 내려쳤다. 처음엔 몰랐다. 피가 터져 나왔다는 걸.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야 바닥에 피가 흐르고 얼굴에 피가 묻은 걸 깨달았다. 덜컹 겁이 났다. 사람이었구나! 내가 사람을 죽였구나! 하지만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보다 계단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가 좀비들을 불러 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허둥대며 옷가지를 들고 나와 바닥의 피를 닦아내고 시체를 안방으로 옮겼다. 

- 어떻게 알고 온 걸까? 마트에서 내가 먹을거리를 옮기는 걸 보고 내 식량을 탐낸 걸까?
갑자기 옥상에 써놓은 호수와 전화번호가 생각났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문득 수류탄으로 자폭한 그 사내도 아파트 옥상 벽에 주소를 보고 나를 찾아오려고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옥상 벽에 쓴 주소와 전화번호를 다시 시너와 검은 페인트로 지워버렸다.

 

- <섬>, 백상준


- 머릿속에 전염병 세 글자가 떠나지 않았다. 나도 곧 아버지처럼 검은 피를 쏟아낼 듯 속이 메슥거렸다.
구급차 문이 열렸을 때,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구급대원이 날 불렀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병원에서 죽기 싫어서 그랬다. 어머니처럼 죽는 게 두려웠다. 

- 어머니는 위암 말기로 뼈만 남은 육신을 매일같이 저주했다. 몇 시간 후면, 생이 끝나는 와중에도 어머니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다. 아무리 진통제를 투여해도 어머니는 자신을 둘러싸고 울면서 자지러지는 친척들을 향한 혐오를 거두지 않으셨다. 육체적 고통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상황이 싫으셨고, 병원 벽에 스며든 약냄새와 꺼끌꺼끌한 환자복, 반복적인 천장무늬와 간호사가 자신을 곧 죽을 사람처럼 대하는 태도까지 모든 것이 어머니를 지치게 했다. 

 

- 어머니는 자식에게 사랑한다거나 남편에게 수고했다거나 친척에게 따로 부탁의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마지막 말을 하셨다.

"짜증 나."

- 세상만사가 짜증 났던 어머니와 억울했던 아버지는 희한하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이셨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에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물도 못 삼키시던 분이 너무나 또렷이 발음한 그 말이 나에겐 세상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다.

- 절대로 병실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처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위장된 슬픔 안에 그래서 언제 죽는 건지가 궁금한 친척들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하겠지만, 몸이 아프면 느낄 수 있는 법이다. 고통은 사람을 극단적으로 예민하게 하여 둔감한 오감을 깨운다. 한 번 오감이 깨어나면 그때는 통제 불가능이다. 만물이 보내는 아주 작은 신호도 놓치지 않게 된다. 겉으로 울고 있는 사람 어깨의 떨림과 목소리, 눈빛만으로도 그 사람의 진실함을 알 수 있다.

- 간혹, 고통에서 벗어나게 돼 그때 내가 봤던 표정은 아파서 괜한 오해를 한 거라고 착각하지만 그건 착각이 아니다. 고통이 예민한 오감을 깨워서 진실을 본 것인데 아쉽게도 고통이 사라지면 둔감한 육체는 오히려 자신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 그러니 어머니는 그때 친척들이 뱉어내는 안타까운 말들과 눈물 사이로 진실을 본 것이다. 친척을 향한 혐오의 눈길을 나는 이해했다. 그리고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향해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할 수 있는 말은 짜증 난다는 말 외엔 없다는 걸 안다. 
물론, 아버지의 시체를 두고 도망간 일은 죄책감이 들기에 충분하다. 본의 아니게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억울한 일만 겪게 됐으니까.

- 나는 지금은 어디인지 기억나지 않는 건물에 들어갔다. 아마 3층 화장실로 기억한다. 기억이 희미한 이유는 내가 인간에서 좀비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쩐지 겪기는 했지만 반신반의한 부분도 있고, 확실히 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술 취한 다음날에 전날 상황이 어땠는지 확실히 기억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인간에서 좀비로 변하는 일이 뭔가 대단한 것처럼 들리겠지만, 술 취한 상황 말고는 달리 비유할 수 없을 만큼 정신이 흐려지는 일이다.  

- 나병 환자나 에이즈 환자 취급하여 눈물샘을 자극했다. 혹은 그 둘을 비판하는 옴부즈맨 프로그램이 전부다. TV는 끊임없이 이미지를 만들고 가공해 나갔다. 대부분 편하게 누워서 봐도 머리에 각인될 만큼 좀비는 단순한 이미지였다. 

- 현실은 대단히 복잡했다. 보험처리만 해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전쟁처럼 느껴졌다. 보험사는 심장이 뛰지 않기 때문에 사람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했고, 좀비들은 의식이 있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라고 대응했다. 설사 재판에서 좀비들이 이긴다 해도 그건 최소 10년 후의 일일 것이다. 법원의 판결이 있기 전에는 좀비들은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존재. 즉, 정체성이 부재한 상태로 꼼짝없이 세종시 수용소로 들어가야 할 팔자였다. 

- 가끔 인터넷에 진지한 글들이 올라오곤 했다. 정신지체 장애인이나 나병 환자를 인간으로 본다면, 좀비 역시 인간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였으나 댓글은 '네가 좀비구나 신고해야겠다' 따위가 대부분이었다. 좀비는 인터넷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넷상 어딘가 좀비들이 활동하는 커뮤니티 사이트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몇몇은 걸려서 단체로 수용소행 버스에 올라타야 했다. 그밖에 좀비 커뮤니티를 모방한 사이트가 어린 학생의 유치한 장난으로 밝혀지기도 했고, 유명 연예인이 사실은 좀비라는 가십은 언제나 끊이지 않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좀비 목격담을 인터넷에 올렸다. 좀비를 찾는 행위는 일종의 놀이로 변질 돼 위성사진을 제공하는 사이트나 지도 사이트, 구글링을 통해 의심 가는 사람들을 뒤져 좀비를 밝혀냈다. 

- 그러나 눈을 까뒤집고 인터넷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는 것이 시골에 가면 밭을 가는 좀비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노인 좀비들이 어슬렁거리면서 내기 장기 한판 하러 마을회관으로 모이거나 한겨울에 고쟁이 바람으로 툇마루에서 닭 한 마리 뜯거나 좀비병이 아니라 은혜받았다며 지팡이를 불쏘시개로 쓰는 할머니는 이제 시골의 일상이 됐다. 도시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극도로 불쾌해했고, 발 빠른 유통사는 '친인간농산물' 등급을 발명하여 좀비가 아닌 사람이 만든 농산물을 몇 배 비싼 가격을 붙여 팔았다. 정말 인간이 만드는지 어떤지는 알 길도 없지만, 생산을 인간이 하더라도 유통과정에서 좀비가 쓰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소용없는 짓이다. 

- 좀비병이 퍼지고 나서 1년 후에 '6시 내 고향'부터 폐지됐다. 그야 당연히 고향에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우리 마을엔 좀비 그런 거 한 놈도 없응께."
방송에서 그렇게 말한 할머니조차 좀비가 됐다. 이장만큼은 사람을 뽑던 시골 어른들도 더 이상 마을에 사람이 없자 점차 좀비가 이장을 맡게 됐다.

- 시골뿐 아니라 공장에서도 좀비는 사람보다 인기가 많았다. 오감이 발달하여 위험감지능력이 좋고, 쉽게 다치지 않고 피곤도 모른다. 식사도 일주일에 한 끼만 주면 된다. 가끔 월급이 밀려도 신고한다는 협박에 별 수 없이 제자리로 가서 일하는 좀비는 부려먹기 알맞았다. 좀비는 외국인 노동자 자리마저 빠르게 흡수하여 실질적으로 우리가 쓰는 물품이나 먹을거리 대부분은 좀비가 만들게 됐다. 

- 안도의 미소를 짓던 혜선이 얼굴이 떠올랐다.
친절하면서도 결벽증이 있어서 남들이 자신의 물건을 만지는 걸 싫어했던 아이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자살이라니 이유가 뭘까 궁금했다. 달라진 외모에 충격을 받아서 그랬을까? 나처럼 얼굴이 썩지 않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보통 신체에서 70퍼센트 이상의 피부가 변형되는데 그 변형이 얼굴에 집중됐다면 여자 입장에서 견디기 힘들 수도 있다. 
멋대로 단정 짓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내심 확신했다. 나도 아직 벗은 내 몸을 보면 놀랄 때가 있다. 공주처럼 자란 혜선이는 적응할 수 없는 일이다. 

- 실제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쓸데없는 생각이라 여겨 잊으려고 노력했다. 밤이 되도록 어디에서 잘지 결정을 못 해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졸린다고 누워 있으면 순찰 돌던 경찰에게 끌려가는 수가 있으니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어둠의 맛이 알싸했다. 오감이 발달하자 공기의 맛이 느껴졌다. 전과 다르게 사 먹는 생수에서도 상품별로 약간씩 맛이 달랐다. 같은 공기도 시간대에 따라 다르다. 정오의 공기가 삼삼하다면, 저녁은 시원했다. 해가 완전히 진 어둠의 맛은 좋게 표현하자면 박하사탕처럼 화하다. 톡 쏘는 맛이 있다. 눈이 내릴 때, 입을 벌려 눈을 맛보는 아이처럼 혀를 내밀고 밤 공기 맛을 음미했다. 

- "너도 어둠의 맛을 알았을까?"
밤에 하는 혼잣말은 확신을 갖게 한다. 혜선이가 좀비가 됐다면, 이 맛을 알게 됐을 것이다. 좀비는 지나치게 예민하다. 나만해도 인사담당자가 나를 그냥 쓸지 소매를 걷어 올리라고 할지 말하기 전에 알 수 있다. 만약, 그런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내가 먼저 일 못하겠다며 빠져나오곤 했다. 혜선이는 자신을 위로하는 말 중에 진짜는 단 한마디도 없다는 걸 알아차렸을지 모른다. 모두가 혜선이의 '변신'을 안타까워만 하지 어깨에 손을 올리며 힘을 주는 말을 했을 리 없다. 가족구성원 모두가 반드시 지키려는 노력이 없다면, 혜선이는 추락할 수밖에 없다. 추락은 정말로 순수하게 계급적 추락을 의미한다. 

- 좀비는 새로운 계급의 출현보다는 발현의 의미가 더 크다. 그전에는 좀비가 없었을까? 외모만 좀비가 아니었을 뿐이지 늘 있었다. 다만, 이번 좀비 사태가 벌어지면서 암묵적인 계급이 드러났다. 정부통계상 10만 명, 실제로는 그 몇 배에 해당하는 수드라 계급 혜선이는 브라만에서 한순간에 수드라가 됐다. 수용소로 가게 되면, 세면대가 없거나 뜨거운 물이 안 나오고 벽은 합판이라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한다. 끊임없이 불편을 강요당해야 한다.  
친구가 몇 명이나 왔는지 확인하며, 안도하던 아이. 외모보다 자신의 위치에 대해 더 큰 불안을 품는 아이가 좀비가 되면, 자살 외에는 길이 없을 수도 있다.

- <어둠의 맛>, 황희



- 나이트 비전 고글을 쓰고 밤길을 드라이브하는 것은 지원의 넘버원 취미였다.
물론 헤드라이트 따윈 켜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야 어둠의 바다에 완벽하게 잠수할 수 있으니까. 자동차 카세트테이프에서 레이디 가가의 살짝 맛이 간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가사를 따라 흥얼거리며 천천히 레드우드 빌리지 근처를 돌았다. 언제나 이 시각의 도로는 차 한 대 없었고 그녀는 이 황량한 어둠을 사랑했다. 이곳은 도시와는 동떨어진 고지대 산동네라 공기가 신선했고 가끔 새벽엔 야생 사슴과 토끼가 나타나기도 한다. 공동묘지 겸 공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공원길을 천천히 드라이브했다. 6개월 전에 죽은 엄마의 묘 앞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사거리로 나왔다. 
 
- 입술은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거무튀튀한 색이었다.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한쪽 팔에 뭔가를 쥐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의자 밑으로 들어가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 마치 죽음에서 돌아온 시체 같다. 밤이란 것이 늘 알 수 없는 얼굴이지만 오늘 밤은 어딘가 몹시 이상하다."
중얼거리며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릴 때였다. 지원은 헉. 하고 숨을 멈추었다. 머리끝이 뾰족하게 일어나고 등골로 오한이 달렸다. 단 몇 초 사이, 아까 횡단보도를 걸어오던 그 노숙자가 바로 앞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노숙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힘이라고는 없어 보이던 노숙자가 두 팔을 앞으로 내밀더니 힘껏 상체를 뒤로 젖혔다가 보닛을 꽝 하고 내리쳤다. 

 

- 머리끝이 쭈뼛 섰다. "씨발." 험한 욕지기가 절로 튀어나왔다. 약속이라도 한 듯 도로 옆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던 남자도 뒤뚱거리며 도로를 건너오고 있었다. 지원의 차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남자의 손엔 정육점에서 고기의 뼈를 자를 때 사용하는 도끼칼이 쥐어져 있었다. 숨을 헐떡이던 지원은 후진해 차를 뺀 다음 가속 페달을 힘껏 밟고 줄행랑을 쳤다.

- 아파트로 돌아온 지원은 혹시라도 좀 전에 자신이 겪은 해괴한 사건이 나올까 싶어 TV를 틀었다가 TV 요금을 내지 않아 한 달 전에 TV가 끊겼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아파트 월세를 내야 할 날도 다가오고 있었고 인터넷 요금을 지불해야 할 날도 가까웠다. 자동차 보험금도 내야 했고 난방비와 수도세, ...


- 쇠봉으로 후려쳤었다. 거의 무의식적인 반사작용에 불과했지만 머리를 맞고 쓰러진 아인 다시 일어나 덤비지 못했다. 아이의 정체가 무엇인지 따위를 떠나 그런 식으로 아일 때리다니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던 것이다. 아직도 아이의 후두부를 후려칠 때 났던 빠각, 하고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귓전에서 웅웅 거려 그녀는 어깨를 떨며 진저리 쳤다. 누가 우리 신애를 그렇게 때린다면... 그녀는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빠드득 이를 갈며 신애의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은 길게 늘어졌다. 신호가 가는 동안 수십 번은 그냥 끊고만 싶어 입술을 깨물며 참아야 했다. 

- '돈 십 원도 못 벌어오는 게 무슨 작가라고.'
'책 냈잖아. 그것도 장편으로.'
'팔린 게 200부가 고작인 장편? 너 그걸로 끝났잖아.'
'끝난 게 아니야 난 아직도 쓰고 있다고. 이번엔 대박 날 거야.'
'관두고 착한 아내, 성실한 엄마 노릇이나 해!'
머릿속에서 전남편과의 대화가 뱅뱅 돌며 분노를 끌어냈다.
끊어버릴까 끊어버릴까.
냉장고 속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원아. 엄마. 원아. 엄마."

- "엄마?"

혀 짧은 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이혼과 동시에 남편에게 뺏겨버린 딸아이였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며 코끝이 시렸다.
"신애야!"
"엄마!"

- "걱정 마. 신애야. 엄마가 주소 찾아서 금방 갈게."
그녀는 일단 전화를 끊고 주소, 주소, 하며 거실을 서성였다. 새 여자의 집으로 이사 들어간다고 남편이 언뜻 말을 한 것 같다는 기억이 났다. 그녀는 국방색 배낭을 거꾸로 뒤집어 가방 안의 것을 모조리 쏟아냈다. 담배, 라이터, 볼펜, 수첩, 지갑, 구깃구깃해진 영수증들, 사탕 하나, 이쑤시개,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책 한 권, 안경통이 바닥으로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소설책을 집어 들고 책장을 좌르르 넘겼다. 그녀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책을 읽던 중 남편의 전화를 받아서 건성으로 통화하면서 낙서를 했던 기억이 났다.

 

- 차가 후진하자 후미로 달려들던 놈들이 속속히 떨어져 나갔고 운전석에 악착같이 매달렸던 엄마도 차에서 떨어져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아파트 입구를 빠져나오며 흘끗 사이드 미러를 보았다. 한 무리가 되어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그들의 모습 속으로 엄마의 모습이 도드라져 보였다. 지원의 차바퀴가 타고 넘은 엄마의 한쪽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꺾여 있었다. 

- 현실은 레드우드 빌리지를 벗어나 도심으로 접어들면서부터 확연히 드러났다. 한낮의 도심을 질주하는 차는 지원의 차뿐이었고 곳곳에서 차들은 전복되거나 부서져 있었다. 가게는 시꺼멓게 불에 타 있었고 내장이 드러나고 살점이 뜯겨나간 시체들이 군데군데 누워 있었다. 지원은 종말 같은 풍경을 목격하면서 가슴 한구석으로 분노가 치밀었다.
'어떻게 이렇게 되도록 까지 내겐 전화 한 통 해준 사람이 없었을까!'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죽어도 무덤에 찾아 올 인간 하나 만들어 놓지 못했다니. 인생을 잘못 살았다. 거짓웃음, 체면치례, 아부와 인간관계의 갈등과 맞부딪쳐 싸울 생각보다는 무조건 피하고만 살아왔다. 싫고 불편하면 도망쳤고 제 취향이 아닌 것은 절대로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사람을 사귄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라 삶을 불편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쓸데없는 짓이었다. 지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회 부적응자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모두 그들처럼 괴물로 변해버렸을까. 그렇다면 남편도? 신애의 새엄마도?

- 추억이라는 추상적인 그리움 속에 고스란히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몹시도 그리운 살 냄새였다.
냄새를 뿌리며 바람을 타고 아이가 달리고 있다.
펄럭이는 계집아이의 치맛자락 아래로 연하고 연한 내장과 피와, 살 냄새가 풍긴다.
수초처럼 일렁이는 아이의 짙은 머리카락이 넘실넘실 육즙을 흘린다.
심장이 벌컥거리기 시작했다.
어서, 어서 빨리 그 생살을 한입 가득 베어 물어봤으면...

- 지원은 아이의 살 냄새를 쫓아 잿빛 도시를 걷기 시작했다. 문득 등 뒤에서 비바람이 불어왔다.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 하나가 그녀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 <잿빛 도시를 걷다>, 펭귄


- 매일 아침 세면대 거울에서 마주치는 내 얼굴보다 부검대에 누운 변사체가 더 친숙해져 버렸다. 심지어 내가 저들을 해부하는 것인지 저들이 날 해부하는 것인지 물아일체의 경지마저 느끼곤 한다. 여기 실려 오는 사체들은 똑같은 화두를 던져주고 떠난다. 인생은 한낱 미망이라는 깨달음을 모든 사체들이 유언으로 남긴다. 일순간에 무너질 줄도 모른 채 만세동락을 꿈꾸는 미욱한 존재가 인간임을 증명해 준다. 진수성찬을 즐기다 급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혼 여행길에 유명을 달리하거나 적금 만기일을 며칠 앞두고 횡사하기도 한다. 심지어 법의관을 아비로 둔 어린아이가 변사체로 실려 온 경우도 있었다. 인간의 삶이 한순간에 반전된다는 개념은 철학자의 허세가 아니라 현실인 것이다. 삶이란 건 참으로 하찮게 꺾이는구나, 오늘도 쓴웃음을 삼키며 메스를 든다. 

-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작품을 둘러보았다. 그중 유독 괴상한 작품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갖가지 동물들이 죽은 채 널브러져 있는 섬뜩한 광경이었다. 놀이동산같이 산뜻하고 동화적인 배경위에 눈깔이 뒤집혀 나자빠져 있는 동물 인형들이라. 작품 앞에 세워진 팻말에는 '도도 사피엔스(dodo sapiens)'라는 제목이 붙어있었다. 

- "도도 사피엔스? 무슨 뜻이죠?"
"도도(dodo)는 인류에 의해 최초로 멸종된 조류예요. 사실 그 이전에도 수두룩 했겠지만 어쨌거나 인간이 멸종시켰음을 자인한 첫 번째 생명체죠. 인간의 생태계 파괴에 관한 한 상징적인 존재랄까요. 저기 벽 쪽에 자빠져 있는 새가 도도예요." 
그러고 보니 작품 속 동물들은 죄다 멸종된 종이었다. 황금두꺼비, 회색곰(?), 늑대(?), 처음 보는 짐승들... 화려한 전성기의 모습으로 박제돼 있는 오브제들은 미학적인 조형미를 빌려 인간의 만행을 조소하고 있었다.
"도도는 새고 사피엔스는 인간이고. 그럼 '도도 사피엔스'는 뭐예요?"
"멸종 인간이죠. 도도새처럼 멸종되는지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씨가 마르는 겁니다."
말투가 이기죽거리다 못해 재밌어하는 듯이 들렸다.
"다른 멸종 생물과 차이가 있다면 자기들 스스로 멸망한다는 거죠."

- "못난 인간들이 김 화백 충고를 새겨들어야 할 텐데."
"충고가 아니라 저주예요."
그녀의 나직한 음성이 공포 영화의 효과음처럼 소름 끼쳤다.
"인간은 절대 달라지지 않을 걸요. 설사 깨닫는다고 해도 기껏해야 지연시킬 수 있을 뿐이죠. 인간 멸종은 운명이에요."
민망할 정도로 의기양양한 어투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골 예술가의 허풍이라며 웃어넘길 테지만, 삶의 허망함에 쪄들어 사는 나한테는 피할 수 없는 신탁처럼 들렸다.

- "예에? 탄저병이요?"
"폐 상태로 봐서는 급성호흡장애를 일으키는 폐탄저 변종일 수도 있어. 포자가 없어서 탄저균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깜빡했던 거지. 포자를 남기지 않는 경우도 있거든."
"그럼 사망자들이 탄저균에 오염된 고기를 먹은 거예요? 소나 돼지?"
"아니. 이 경우는 흡혈곤충에 의해 옮겨진 것 같아. 드물지만 가능한 얘기야. 우선은 혈청 검사와 농포 표본 조사를 통해서 병원체를 확진해 봐야 해." 
"탄저균은 사람 대 사람 감염은 안 되는 걸로 아는데, 맞죠?"

"그렇긴 하지만, 곤충이 옮겨온 게 맞다면 문제가 심각해. 아무래도 단순한 탄저균이 아닌 것 같아. 변종일 가능성이 커." 

- 감염균 분석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사체 몸에 있던 물린 부위의 농포에서 탄저균 양성 반응이 나왔다. 탄저균에 감염된 사례는 몇 번 있었지만 탄저병에 걸린 가축이나 산짐승을 먹어 감염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번에는 드물게도 흡혈곤충을 통해 감염된 경우였다. 병균은 생물종을 여러 차례 이동하면서 치명적인 변종으로 진화하곤 한다. 이번 병균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온 것인지 그 연결고리부터 찾아내야 한다.
비밀리에 대대적인 역학 조사가 진행되었다. 테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에 경찰 측에서도 특별 전담반을 구성했다. 

- 내가 소속된 조사반이 현장으로 급파됐다. 토양 채취 작업을 마치고 주변을 계속 탐색했다. 우리들을 따라붙던 모기 십여 마리가 어딘가로 무리 지어 가기도 하고 다시 그쪽에서 무리 지어 오기도 했다. 그중 몇 놈을 잡아 살폈다. 작은빨간집모기였다. 방독장갑을 향해 침을 꽂으려는 기세가 살벌했다. 원래 이리 표독스런 종자였던가 싶을 만큼 채집망에 갇혀서까지 용맹스런 발광을 멈추지 않았다. 경찰서에서 나온 강력팀장이 몇 마리를 손으로 잡아 뭉갰다.
"거, 쪼끄만 녀석들이 꽤나 지랄 맞네." 
"쪼끄맣지가 않은데요."
"예?"
"겉모양으로 봐서는 작은빨간집모기가 맞는데... 이름처럼 소형기 종이라 5mm도 안 되거든요. 그런데 이놈들은 일반 모기만 하네요."
"그래요? 왜 커진 걸까요? 산 좋고 물 좋아서 무럭무럭 자란 건 아닐 테고."
나도 그게 궁금하다. 왜 이런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것인지. 성체 크기는 물론 습성까지 더 포악해졌다.

- 어처구니없는 것은 항생제 비료가 있었다는 점이다. 골프장 공사 중에 나온 건축 폐자재 틈에 병원 폐기물이 버려져 있었다. 주사바늘에 남아 있던 항생 물질이 웅덩이 밭으로 흘러들어 흙속의 탄저균과 융합돼 강력한 변종 균으로 진화된 모양이다. 항생제 저항성 실험결과에서 페니실린에조차 내성이 있었던 이유가 이제야 납득이 간다. 부검 중에 맡았던 그 독특한 냄새 역시 항생 물질의 흔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탄저는 흙과 오염된 물웅덩이, 의약품 폐기물, 그리고 모기 유충이라는 수차례의 변이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의 괴질로 무장했다. 그러나 결국 괴질을 키워낸 가장 핵심적인 배양액은 '인간들의 비양심이었다. 인간에 의한 환경오염이 수십 배의 칼날로 되돌아온 셈이다. 

- 탄저균 치료는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문제는 누가 언제 탄저균에 걸렸는지 신속히 처방할 수 있는지 여부다. 워낙 급성이라 죽어서 오는 경우가 태반이니 예방법이 있다 한들 손쓸 틈도 없는 상황이다. 최근 한 달 안에 치양산에 다녀온 사람들에게만 탄저균 백신을 놓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호응 없이 사그라졌다. 백신 조달 문제도 큰 데다 비감염자일 경우 백신 부작용이 클 것이고, 무엇보다 탄저병균이 돈다는 사실을 세상에 떠벌려야 한다는 것 자체가 꺼림칙한 눈치였다. 전염병은 아니니 조용히 지켜보자는 입장이 지배적이었다.

- 수많은 단백질 중의 하나가 바이러스와 결합된 걸 수도 있다. 오로지 인간에게만 발달된 전두엽의 신경물질이 바이러스와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급격한 뇌손상을 초래하는 것으로 추정만 하고 있다. 이 괴상한 현상이 그토록 우려했던 불특정 비리온과 뇌염바이러스의 결합에서 발생된 것인지 아니면 변종탄저로 죽은 사체에서 새로운 괴바이러스가 배양된 것인지 판가름하기가 어렵다. 뇌에 치명적인 손상을 일으키는 걸로 보아, 뇌염바이러스가 다른 독성물질들과 혼합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른바 칵테일 현상이다. 바이러스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여러 개가 뒤얽혀 정체불명의 괴질로 합체된 지경이라 의학팀은 무기력에 빠진 채 넋 놓고 있을 따름이다. 지금까지 인류역사에 등장한 그 어떤 바이러스보다 돌연변이가 심해 백신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상황이다. 

- 아직 대중에게까지 알려진 것은 아니다. 정부는 집단 식중독 사건이라고 얼버무렸다. 지금 인터넷 여론을 달구고 있는 건 강원도 일대에 번진다는 미확인 질병에 관한 추측과 성토가 전부다. 평상시 같으면 그것만으로도 두려운 여론이겠으나 진상을 알고 있는 관계자들에게 그 정도 여론은 공포 축에도 끼지 못한다. 지금이야 팔자 좋게 음모론이나 읊조리고들 있지만 수다스런 입방아가 얼어붙을 날도 멀지 않았다. 

- 케케묵은 옛 기억이 다시 조여 온다. 국과수 일도 손에 익고 사명감도 충만해지던 시절, 찌를 듯한 자신감을 단번에 꺾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오랜만에 전화 준 동창 녀석과 수다를 피우고는 경쾌한 마음으로 들어선 부검실, 그리고 창백히 누워있는 어린아이의 사체- 처음에는 내 아들과 참 많이도 닮은 아이라고 생각했었다. 팔뚝에 있는 점이 모양과 위치까지 똑같다는 걸, 며칠 전 넘어지면서 생긴 상처 자국마저 똑같다는 걸 알아채기까지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충격과 절망으로 달아오른 채 아이의 식어빠진 육신을 더듬었다.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뒤늦게 사체의 신원을 알아차린 동료들 손에 끌려가면서 얼마나 지독한 통곡을 퍼부어댔는지 모른다. 어린 아들의 주검 앞에서 느꼈던 고통의 순간들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번쩍번쩍 떠오른다. 이번 사건에서 당시 보았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때만큼이나 절망적인 기분이다.

- 내 가족을 피신시켜야 하나? 그래봐야 무슨 소용 있냐는 절망이 곧장 의욕을 떨어뜨린다. 하지만 특별한 비밀을 먼저 알았다면 이기적인 가족애를 발휘할 줄도 알아야 사람이 아니냐. 서울로 보내야 하나? 아예 제주도는 어떨까. 아직까지는 강원도 이외 지역에서 보고된 바는 없다. 그러나 바이러스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선 전국적으로 번진다는 비관적인 추론을 할 수밖에 없다. 

- 아직 완공은 안 됐지만 집에서 가까운 횡성에 외부와 차단된 의료연구단지가 하나 있다. 격리기능은 물론 방독시설까지 갖춘 데다 거주지로도 쓸 만하다. 완공 전이라 연구원들도 소수인 데다가 내가 관리감독을 맡았기 때문에 식구들을 잠입시키는 건 어렵지 않다.

 

- "갑자기 바뀐 거래요."
"이상할 것도 없지. 바이러스야 스스로 진화하니까."
"진화한다니 그건 또 무슨 뜻이에요?"
"숙주 안에서 더 오래 더 강하게 살아남는 방법을 체득한다는 뜻이야. 초기에는 바이러스가 사람 몸을 잘 다루지 못해서 숙주가 바로 죽어버리지만 숙주가 죽으면 바이러스도 끝장이니까 숙주를 죽이지 않는 쪽으로 스스로 학습하게 돼. 숙주가 살아있을 때 다른 숙주로 옮겨가는 게 바이러스가 살아남는 비결인데, 감염을 시켜야 한다는 뜻이야. 감염경로나 감염시간이 단축될수록 자기들한테 이득이니까. 이번 바이러스도 진화하고 있잖아. 감염자가 정상인을 물어뜯기만 해도 전염되고 있어. 모기라는 중간숙주의 도움 없이도 새로운 인간숙주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된 거지." 
"아니, 바이러스 따위가 무슨 전략회의를 하는 것도 아니고 박사님 말대로라면 바이러스가 인간보다 우월한 게 되잖아요."

"인간의 착각이지."
"네?"
"지금 방 형사는 인간이 바이러스보다 더 똑똑하다는 전제를 갖고 있잖아."
"아니라는 말이에요?"
"아니고말고. 바이러스는 인류보다 더 집요한 데다가 장구한 생명력까지 지녔어. 생존전략은 다른 어떤 생명체보다 더 뛰어나. 지금껏 다른 종족의 생명 메커니즘을 정확히 파악하면서 생사를 쥐락펴락 해왔잖아. 바이러스 세계에 월드컵이나 오락영화, 도서관이 없다고 해서 인간보다 열등하다고 말하는 건 인간 중심의 사고일 뿐이지.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현대과학도 바이러스의 변이 메커니즘에 대해선 아는 게 별로 없어 이젠 심지어 종 자체를 바꿔버리고 있잖아. 인간에서 좀비로."

- "그럼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좀비처럼 천하무적에다가 영생불사 뭐 그런 거예요?"
"그렇진 않아. 그게 현실과 판타지의 다른 점이지. 그나마 다행이랄까. 지금 감염자들은 인간의 몸인 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이거든. 다만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하지 않는 과도한 행동을 하고 있는 거지. 한마디로 신진대사가 과부하된 상태야. 저들이 무슨 슈퍼맨유전자로 바뀐 게 아니라, 인간 주제에 슈퍼맨 흉내를 내고 있는 셈이지." 
"과부하 상태라면 스스로도 오래 못 버틴다는 거예요?"
"그렇지. 지금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얼마못가서 쓰러질 거야. 24시간짜리 배터리를 한 시간 만에 다 써버리는 경우라고 볼 수 있어. 평생 쓸 체력을 한 번에 몰아서 쓰니까 괴력이 나올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와 동시에 수명을 단축하는 일이기도 해. 다른 질병들이야 힘 한번 못 써보고 누운 채로 사망하지만 이 병은 정반대인 거지. 좀비 증상 자체가 치사율이 높다는 증거야. 쉬면서 치료받아도 시원찮을 판에 과로를 자처하는 꼴이니까. 게다가 생살을 가열하지 않고 뜯어먹기 때문에 세균감염까지 보태져서 생명을 더 단축하게 되지." 

- "희망적이라고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면역자를 직접 데려오신 분은 박사님이 아닙니까? 그런데 희망이 없다니요?"
"면역자가 아니니까요."
냉철한 표정들에 동요가 일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김민해 씨도 양성으로 나왔습니다."
회의실 안이 술렁거렸다. 다른 관료가 다급히 물었다.
"아무 감염증세도 없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양성인 겁니까?"
"잠복기가 긴 걸로 추정할 뿐이에요. 이 바이러스의 감염 메커니즘은 전혀 종잡을 수가 없어요. 왜 김민해 씨만 잠복기가 긴 건지 알아내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 침묵이 이어졌다. 강력한 희망 하나가 추락하자 관료들의 침착한 표정에도 틈이 벌어졌다.
"그래서 박사님 마음이 흔들렸나 본데, 그 맘 이해 못 하는 거 아닙니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에요. 국민들 속이는 게 우리라고 좋겠어요? 그냥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거예요.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건 진실을 안 대중입니다. 진실을 감당 못하고 폭도로 변할 테니까요."
"저도 알아요."
"안다면서 왜 이러는 겁니까?"
"진실을 안 대중보다 더 무서운 게 있으니까요."
"...?"
"없어진 대중이죠."

- 황당해하는 실소가 관료들 얼굴을 따라 도미노처럼 번졌다.

"무슨 소린지, 원."
"대중이 아예 없어진다고요. 멸종이요."
관료들 얼굴에서 실소가 곧장 사라졌다.

- "멸종? 진짜 멸망이 뭔지나 알고 떠드는 거요? 차라리 한꺼번에 다 같이 멸망하는 거라면 이렇게 골머리 썩어가며 걱정할 것도 없어요. 그냥 죽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진짜 두려운 건 따로 있다고요. 우리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발표했다간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고립될 거요. 입국 금지령이라도 떨어지는 날에는, 그게 어떤 건지 모르진 않겠죠? 국가 경제 자체가 완전히 붕괴된단 말이에요. 박사는 우리나라 식량 수입량이 어느 정도인지나 아시오? 자급자족으로 얼마나 버틸 것 같소. 물자 부족, 식량 부족, 아주 지옥이 따로 없을 거요. 그뿐인가, 가장 끔찍한 건 심리적 절망감이에요. 풍족한 생활에 익숙한 세대들이잖소. 물자고 문화생활이고 다 끊기는 날에는 병에 걸리기도 전에 상실감으로 쓰러지는 국민이 태반일 거요. 바이러스로 죽기 전에 고립돼서 먼저 죽을 거라고요. 그 지경이 되면 백신이고 치료제 개발이고 지원해 줄 정부 인력도 남아있지 않을 걸요."  
무간지옥 같은 상상이 국장의 설명을 따라 머릿속에서 생생히 재연됐다.

- "아직 전국으로 퍼지지도 않은 질병을 그깟 양심 나부랭이 때문에 떠벌릴 순 없어요. 누구 좋으라고? 경쟁국가들? 허, 다른 나라 놈들이라고 다를 것 같소? 우리보다 더 할 놈들이에요. 장담컨대, 고립 사태는 국민들조차 원하는 게 아닐 거요. 지금은 진실을 밝히라고 난리들이지만 내막을 알고 나면 차라리 비밀을 지키라고 응원할 거요. 이상주의자들 눈엔 우리가 냉혈한처럼 보이겠지만 나라를 책임지는 사람들은 최대한 실리적인 선택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거라고요."

- 반박할 수가 없다. 그래, 맞는 말이다. 나란 인간도 다른 사람들한테는 함구한 채 내 식구들만 챙기지 않았던가. 역겹다, 내 자신이. 적어도 저 사람은 제 식구만 챙기는 이기주의자는 아니다. 자국민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은 잊지 않고 있으니 나보다 몇 배는 더 양심적인 사람이다. 통상국장은 내 침묵을 패배 인정으로 해석했는지 부드러운 말투로 다독거렸다.
"박사의 고민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대를 위해 소를 버린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아 주세요."
"뭐가 대고 뭐가 솝니까."
"뭐긴 뭐겠어요. 대한민국이 대의지, 박사같이 양심 타령하는 게 소고."
"아닙니다. 더 이상은 아니에요."
"아이고, 박사 왜 자꾸 고집을 핍니까. 당신은 조국애란 것도 없소? 이 나라가 절단 나든 말든 양심만 지키면 다예요?"
"저도 대의를 위해서예요. 제가 생각하는 대의와 소의가 국장님과 다를 뿐이죠."
"그러니까 박사는 양심이 대의라는 거잖소."
"아니오. 대의는 인류죠."

- "정말 모르시겠어요? 이젠 한국의 실리를 따질 단계가 아닙니다. 대를 위해 소를 버려야 한다고 하셨잖습니까. 인류를 위해 한국을 버릴 때가 온 겁니다."

- "이제 결단을 내릴 때가 왔어요. 더 이상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미 보균자들이 국외로 빠져나갔을 거예요. 외국에서도 대처가 필요합니다. 한국인으로 인해 인류가 멸종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 난 식구들과 따로 만나 얘기를 나눴다. 같이 있자고 울먹이는 식구들에게 격리병동이 몇십 배는 더 안전하다고 안심시켰다. '나쁜 감기 고치는 약 빨리 만들라'는 딸아이의 응원을 가슴에 묻고 연구단지 밖으로 나왔다.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던 김민해와 함께 격리병동으로 출발했다. 

- 정부는 짧은 성명을 발표했다. 대통령의 담화문은 유사 이래 가장 비통한 내용이었다. 진실에 대한 반응은 바이러스 감염 속도보다 훨씬 더 빨랐다. 다른 나라들은 즉각적으로 한국인 입국금지를 선포했고 국내 항공기들이 타국 공항에서 쫓겨 되돌아오는 일이 속출했다. 통상국장의 예측대로 심각한 고립 사태가 확산돼 갔다. 우리나라 정부는 양심의 대가가 이런 거냐며 항변했지만, 왜 이 지경이 돼서야 밝혔냐는 적대감만 쏟아질 뿐이었다. 

- 진실을 알고 싶다며 다그치던 여론은 정작 무서운 진실이 발표되자 침묵과 절망으로 변해갔다. 진실 발표가 촉매제라도 됐던 것인지 잠복기에서 깨어난 발병자들이 전국 곳곳에서 등장했다. 군대 안에서까지 발병자들이 나오면서 감염자 사냥 작전에도 문제가 생겼다. 위성으로 감시 체계를 총동원하고 있던 주변국들은 상황이 심각해지자 한국 정부가 거부하건 말건 유엔결의를 속성으로 해치우고 군대를 파견했다. 한국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진원지를 더 신속히 차단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정부가 처음에 강원도를 고립시켰듯이 주변국들은 한국을 고립시킬 생각인 것이다. 
그들 역시 같은 실수를 하고 있다. 인간은 바이러스를 고립시킬 수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가. 기껏해야 잠시 지연시킬 뿐이다.

- 연구실 분위기는 더 치열해졌다. 절체절명이 오히려 그들을 열정적으로 만들었다. 추락하는 조국을 일으킬 방법은 오로지 백신뿐이라며 모두들 악패듯 몰두하고 있었다. 항상 화난 얼굴로 앙다문 채 실험에 매달리는 이들, 볼 때마다 눈물을 그렁거린 채 자료집을 뒤적이는 이들, 몸소 나가 면역자로 추정되는 사람들한테서 직접 피를 뽑아오는 이들도 있었다. 절망 속에서 핀 용기는 훨씬 더 위대한 법이다. 어렵사리 핀 꽃에 열매가 맺힐 날이 올 거라 그들은 최면하듯 다짐하고 있었다.

- 김민해가 마을 정보를 처음 본 곳은 인터넷이었다. 바이러스가 공식 발표되고 발병자가 늘어나면서 자살률도 급증했는데, 강원도에 살던 한 여고생이 자살 직전에 제 미니홈피에 올린 글이 웹상으로 퍼졌다. 그 자살 여고생이 올린 글에 의하면, 동네에서 자기 할머니만 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민수가 삼십여 명인 작은 마을이긴 하지만 충분히 주목할 만한 확률이었다. 시내에서 학교를 다녔던 여고생은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시골마을로 내려갔고, 감염자들을 피해 할머니를 데리고 숲 속 움막으로 숨어들었다. 

- <도도 사피엔스>, 안치우

 
  
- 제보를 받은 교도소 기동타격대가 긴 수색 끝에 공장 재료창고 천장에서 담배 500개피를 찾아낸 것이다. 16절에 볼펜으로 써넣은 제보에 따르면 폭력으로 입소한 1647번 이형식이 교도소 동기였던 친구와 접견 시 몰래 반입해 은닉해 둔 담배라고 했다. 담배 문제는 대형 교정사고와 작지 않은 연관이 있는지라 관련 재소자의 독방 수용과 담당근무자 문책이 뒤를 이었다. 그런데 위탁공장 안의 52명 중에는 이형식을 추종하던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영치금 많은 이형식으로부터 담배는 물론 과일이나 라면 따위 구매물까지 얻으면서 이형식을 '형님'으로 모시고 있던 어깨들이었다. 돈 많고 잘 쓰는 자가 대접받고 없는 자와 짠돌이는 무시당하긴 바깥사회나 교도소 안이나 똑같았다. 그들은 사기로 들어온 956번 변용석이 담배 반입 사실을 알고 협박 반 청탁 반으로 이형식에게 얻어 피우고자 했으나 그가 거부 의사를 표명하자 보복의 일환으로 '이형식이 담배를 반입해서 질서를 흐리고 있습니다. 그를 처벌하여 주십시오'라는 내용의 무기명 투서를 진정함에 넣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이형식의 독방 조사 수용으로 담배와 구매물을 얻지 못하게 된 이형식의 동생들은 차례로 변용석을 찾아와 운동시간에 네놈 모가지를 따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러자 언제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몰라 똥줄이 타던 변용석은 자수를 선택했다. 내가 바로 제보를 한 사람이다, 취업장 내 담배 반입을 좌시할 수 없었다, 이제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으니 당장 안전한 독방으로 보내달라, 자수의 요지는 대충 이러했다.

 

- 이 위탁공장의 담당교도관이 바로 정유남이었다. 10년 근무 경력 중 장관, 청장 표창장을 여러 번 받고 나름 근무 잘한다는 평판 자자하던 그는 자기 근무지에서 벌어진 담배사건 때문에 체면이 손상됐고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였다. 그는 어이없음과 분노가 반씩 섞인 얼굴로, 계장한테 보고해 줄 테니 기다리라 했고 손 쓸 시간만 노리던 이형식의 동생들은 이 광경을 정확히 포착했다. 그중 하나가 손날로 자기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기다릴 여유가 없었던 변용석은 관물대 모서리에 수차례 이마를 찧어 자해를 했다. 
"날 당장 독방으로 보내줘! 당장 독방으로 보내달란 말이야!"

유남이 달려가 변용석을 끌어안아 말리고 작업반장 및 여럿 모범수들이 그를 도왔다. 검정 기동복을 입은 기동타격대가 달려올 때까지 변용석은 피를 흘리며 고함을 멈추지 않았다.  

- 밀고자로 찍혀 모두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던 변용석은 담당 교도관마저 핀잔을 주자, 순간 급격하게 솟아오르는 적의를 느꼈다.
"담당근무자 정유남도 담배 반입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담배가 돌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걸 알면서도 근무 편하게 하려고 이를 묵인했다!"

 

- 그런데 하필이면 이날 이때 위탁공장 옆을 지나던 교도소 외부참관인 무리들이 있었다. 갱생 직업훈련 현황을 시찰하기 위해 온 이 민간인 사절단 중에 한 사람이 수행 교도관들을 뿌리치고 위탁공장으로 달려갔다. 진실의 보도보다 명성과 권력의 추구에 골몰해 몇 년째 특종을 찾아 헤매던 지역신문사의 기자였던 그는 볼펜과 수첩을 꺼내 들고 교도관 정유남이 아닌 재소자 변용석에게 직접 물었다.
"방금 한 말이 다 사실입니까?"

- 때마침 수행교도관들이 달려와 기자더러 여기는 바깥이 아니고 위험한 교정시설 안인데 왜 마음대로 행동하느냐고 꾸짖었다. 교도소 내 민간인에 대한 사건사고를 자주 보아왔던 그들의 당연한 야단이었지만 제삼자의 눈에 이 시추에이션은 진실을 은폐하고 언론을 마비시키려는 교정행정의 밀행적 위압감으로 비쳐졌다. 그러자 작은 일이 순식간에 커져버렸다. 정유남이 부정공무원으로 의심받게 되었던 것이다.

- 외부인의 주관적인 시선이 개입된 소동 직후 유남은 근무를 정지당했다. 직원 숙직실에 반감금 상태로 머물면서 퇴근도 못하고 조사를 받게 되었다. 냉소적이고 붙임성이 없다는 단점은 있지만 평소 책임감 있고 뒤탈 있는 일 싫어하던 성품의 그가 부정사건에 연루될 리 없다고 동료직원들은 입을 모았다. 게다가 변용석의 진술은 조리에도 맞지 않고 아무런 물증도 없어 자체 조사 직원들 역시도 유남의 혐의 없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특종을 이뤄내려는 신문기자의 칼보다 강한 펜 덕분에 사건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급기야 광역시의 교정에서 감사직원이 내려오게 되었고 ...

 

- "캐애액캐애액캐애액!"
변한 그들의 괴성과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지옥의 난타공연이 되었다. 유남은 땅바닥에 있던 자물쇠를 빗장걸이에 끼웠다. 정문 빗장을 고정시키는 자물쇠도 어른 주먹만 한 것으로 무려 세 개나 되었다. 초대형 새떼들이 쪼는 쿵쿵 소리를 그대로 들으며 유남은 초소에서 꺼내 온 열쇠 뭉치에서 출입문 자물쇠에 맞는 열쇠를 하나하나 밀어 넣었다. 문이 안전하게 봉쇄되고 유남은 바깥세상과의 단절에 성공했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 안에 아무도 없는 이상 나는 안전하다. 나는 폐쇄된 교도소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나는 나가면서 자유롭게 된 것이 아니라 갇히면서 안전하게 된 것이다.

- 몇 센티미터 바깥에선 변한 자들이 멈추지 않고 문을 두드려댔다.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무렵 눈을 뜬 유남은 초소를 지나 마당을 가로질러 뛰었다. 마당 중간께의 피바다 안에는 K2 소총이 있었다. 유남은 총을 외면하고 중앙감시탑으로 올라가려다가 다시 내려왔다. 잠시 후 교도소 옥상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중앙감시탑에 오른 그의 손에는 K2 소총이 쥐어져 있었다. 감시탑은 열려 있었지만 경계근무를 서는 경비교도대원은 죽었는지 도망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먼저 교도소 안쪽부터 샅샅이 조망했다. 살아있는 자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가로막는 게 있으면 처치하라는 교도소장의 마지막 당부가 떠올랐다.

- 유남은 세 발 정도 위협사격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더 아우성을 칠 뿐이었다.
몇 명이 서로 등을 밟으며 올라타려다가 넘어지고 또 저희들끼리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유남은 알 수 없다는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놈의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 감시탑 철망이 쾅하고 소릴 냈다. 소리는 곧 여러 개로 늘어났다. 그들이 돌을 던진 것이다. 유남은 조준사격으로 대응했다. 조금 전의 사격이 공포탄이라면 이번은 실탄이었다. 올라타려던 자 하나와 돌을 던지던 자 하나가 살점을 터뜨리며 쓰러졌다. 그러자 모여 있던 군중들은 우워우워 아우성을 치며 뿔뿔이 흩어졌다. 시신은 그냥 둔 채로. 
저희들끼리는 잡아먹지 않는구나.
한 가지 깨달음을 얻은 유남은 그러나 곧 다른 번민에 빠졌다. 
내가 방금 사람을 죽인 건가?

- "어떻게 된 거냐? 말을 해다오. 누군가 내게 말을 해다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싫어 독고다이를 고집해 왔던 그의 입에서 연극 대사 같은 독백이 여러 차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귀 기울여 주는 건 저 푸른 허공뿐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아무리 고독을 고집하는 사람도, 우울증에 걸린 사람조차도 궁극적으로 혼자서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리 혼자이고자 해도 생산품을 사야 하고 남이 이룩해 놓은 걸 이용해야만 하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틀림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유남은 평소에 극히 말수가 적었다. 가정교육이, 재미없었던 20대가, 관료주의가 웃을 수만은 없는 현실의 자각이 그를 과묵하게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젠 자신과라도 대화를 해야 했다. 안 그러면 미칠지도 모르니까. 

- 또 한 달이 흘렀다. 여전히 똑같은 일과가 반복됐다. 생존자 탐색과 방송 유무의 확인. 부식창고의 음식은 아직 충분했지만 유통기한이 넘어서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야채는 건냉한 곳에 보관해도 상해버렸다. 보급로도 보급직원도 없는 마당에 유남은 유통기한 긴 통조림을 아껴야 했다. 이런 자원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심은 안의 사정보다 바깥쪽을 향해 있었다. 저 건물들 어딘가에는 자기처럼 숨어 지내는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을 거다, 전염성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세상사람 모두가 다 깨물리고 변했을까. 인간이란 종자는 대단히 독하다. 독종 중의 독종이기에 저항할 줄을 알고 살기 위해 남을 속일 줄도 안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고유성은 특기할 만하다. 역사상 인류는 자기들끼리 쉴 새 없이 죽여 왔고 그럼에도 줄기차게 살아남았다. 핵폭탄이 터져도, 그보다 심한 최악의 환경에서도 생존자는 늘 있었다. 그러니까 저 밖도 틀림없다. 

-하지만 정유남 만의 세상에선 아직까지 생존자가 발견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있어야만 해. 그래야 뭐든지 알 수도 할 수도 있는 거야, 혼자선 안 돼."

- <세상 끝 어느 고군분투의 기록>, 박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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