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유재중 / 김재은 / 박해로 / 지난 / 정세호 / 장은호 / 우명희 / 황태환 / 김유라 / 엄길윤
출판 : 황금가지
출간 : 14.08.25
'되면 좋은 것'과 '이루고 싶은 것'은 다르다.
전자는 보너스 같은 개념이지만 후자는 골- 이른바 목표 지점에 가깝다.
전자는 포기할 수 있지만 후자는 그것을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원하는 것'을 분류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되면 좋은 것'과 '이루고 싶은 것'으로.
우선순위를 정하기가 어려울 때에는 이런 다소 극단적인 개념으로 나만의 '월드컵 게임'을 해보는 게 도움이 된다.
지금의 내가 지향하는 것을 구체화하면 지양해야 할 것들이 정리되니까.
나의 '작가 정해 읽기'는 이런 소소한 게임의 연장선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얻었다. 애초에 계획했던 바는 아니었는데, 그래서 얼떨떨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한 마디로 좋긴 한데 혼란스럽다.
<돼지가면 놀이>는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열었던 '공포 문학 공모전' 수상작들을 모은 단편집이다.
박해로 작가의 발표작을 찾아 읽다가 읽게 된 책인데, 의외의 보석들을 읽게 되어 행복했다.
그리고 다시금 깨달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박해로 월드는 다듬어지는 데 시간이 조금 필요했던 것 같다.
(박해로 작가가 이미 이때부터 다흥과 섭주를 설정했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교도소 생태에 대해 생각보다 깊게 알고 있는 것 같다는 것도.)
<돼지가면 놀이> : 왜 표제작인지 알 수 있다. 현재와 구술 시점을 오가는 연출이 번잡하지 않다. 이제는 반전을 위한 반전에 지쳐 오히려 평면적인 구성을 찾는다지만, 또 잘 된 작품은 취향을 뛰어넘는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편향을 꼬집는 듯했던 이야기가 사실은 전조를 경고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는 은유적인 연결도 좋았다.
<숫자꿈> : 매력적이었다. 왜 그 숫자가 그 의미인지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도 단편다워서 좋았다. 읽는 동안 표현이나 문장이 취향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마지막 문단이 조금 아쉽다. 다른 의미로도 쓸 수 있는 표현이라 해석하느라 순간 몰입이 깨졌다. 그래도 좋았다.
<무당아들> : 현재의 박해로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듯한 작품. <고문관>에서도 유사한 결이 느껴진다. 현시점에서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은 작은 일이 어떻게 연결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거에서부터 얽혀온 은원도, 지금부터 얽어갈 은원도.
<여관바리> : 호러 소설이긴 한데, 현대 문학으로 분류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묘하게 <무진기행>이 떠오르는 듯도 싶지만, 매력적인 장치들을 잘 활용해 으스스하게 풀어냈다. 돈통 소리를 낸 이는 다소 불명확하지만, 그래서 더 오싹하기도.
<낚시터> : 현대적 호러. 승천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으로 자기 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물귀신 이야기를 또 다른 존재 -다소 크툴루적이기도 한- 를 설정해 잘 풀어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느낌 -비현실이 가미된 산뜻함이 있는- 의 작품을 좋아한다.
<며느리의 관문> : <에반게리온>의 한 장면이 연상되는 동시에, 물에 퉁퉁 분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거대 수조가 상상되면서 오싹했다. 정말 '인사'만 드리게 하려던 거였을까...
<헤븐> : 타임 루프를 인간애를 놓치지 않고 활용한 작품.
<고양이를 찾습니다> : 현실 공포. 그런데 있을 법도 하다는 점에서 더더욱 공포.
<구토> : 첫 문단이 인상적이었으나, 전체적으로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배출된 것이 다시 찾아온다는 점에서는 정보라의 <머리>도 생각난다.
<파리지옥> : 툭 떨어진 마지막 문단이 좋았다. 군중 속의 고독, 거대한 무관심 등을 녹여내고자 한 듯. 하지만 본편의 스릴러적 공포와 매끄럽게 이어지진 못했다. 화자의 결말을 암시하기 위해서라기엔 너무 화려했고, 이전까지의 전개를 포장하기엔 조금 모자랐다. 하지만 파리지옥이 원래 그렇긴 하다. 화려한 붉은 잎 속과 은근히 가느다란 줄기.
읽고 단상을 남기는 자의 손가락은 가볍다. 한두 마디씩 감상을 남기는 일이야 얼마나 간단하고 홀가분한가.
쓰는 이들의 고충과 고뇌는 비할 바 없이 무거울 것이다.
감사히 읽었다.
- 어느 공사장 인부 셋이 작업이 끝난 뒤 집으로 귀가하지 않고, 공사장에서 밤늦게까지 술판을 벌였습니다. 인부들은 술 먹고 흥겹게 놀다가 어떤 여자가 창밖에서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술김에 인부들은 그 여자에게 욕을 퍼붓고, 음식물을 던졌습니다. 그 여자는 말없이 사라졌습니다. 인부들은 술을 계속 마시다가 잠에 들었습니다. 인부들은 다음날 작업 기록용 카메라의 필름을 인화하다가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세 명이 가지런히 잠든 모습이 카메라에 찍혔기 때문입니다. 세 명 모두가 자는데 어떻게 사진에 세 명 전부가 들어가 있을까요? 도대체 누가 사진을 찍은 걸까요? 참고로 공사장은 아파트 신축공사로 인부들이 술 먹던 장소는 3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90년대 말이어서 필름카메라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절대 자동으로 찍힐 수 없었죠. 그리고 찍힌 각도는 세 명 모두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치였습니다.
답을 생각하면서 본문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그래. 너도 벌써 이렇게 컸구나. 아니 빈말이다. 너와 내가 사이안 좋은 건 부정하지 않으마. 네가 예상했던 대로 네가 소아마비를 앓은 후 네 다리 저는 모습에 못마땅했던 건 사실이다. 그 때문에 네 아비와 많이 싸웠지. 사실 후유증으로 네 성장이 더디고 멈춰버린 것도 큰 이유였어. 우리는 뼈대 있는 가문인데, 네 아비는 자식을 더 낳기를 거부했지. 네 문제로 너무 오래 싸운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보지 않고 지냈다. 네 아비가 죽었을 때도 난 가지 않았지. 사람들은 나보고 독하다고 했지만 네 아비는 자식으로서 의무를 하지 않으면서도 내 재산을 탐냈어. 내 재산은 내 피와 살이야 내가 허락하지 않고는 누구에게도 넘어갈 수 없어. 그리고 너 역시 내 재산을 물려받을 거라 기대하고 있다고 들었다. 부정하지 말거라. 난 다 알고 있어. 네 아비만큼 너 역시 밉지만 그래서 네가 어려울 때 한 번도 찾아가지 않고, 도와준 적도 없지만, 그래도 내 혈육이니 내 마지막을 지키도록 지시하기 위해 널 불렀다. 너에게 나쁜 일은 아니다. 내가 죽으면 내 재산은 다 네 것이 될 테니. 확실히 말해 주마. 내 상속자로 정하기 위해 널 불렀다. 단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던 일인데... 네가 이 이야기를 들어줘야겠다. 죽기 전에 누군가에게는 꼭 한번 얘기하고 싶었다. 너도 내 나이 되면 알 거야. 인생은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와 얘기를 자주 못하고 침묵을 선택했던 어리석음에 자책뿐이다. 그때가... 6.25가 막 끝난 때였지.
- 난 그 시절 강원도 전선에 있었단다. 휴전 날이 되기 전날 밤 12시 전까지 모든 포격과 사격을 가하라는 상부의 지시에 전선은 온종일 포격소리로 진동했지. 낮부터 밤까지, 해가 져서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해져도 북한군과 국군의 포격은 끊이지 않았다. 매캐한 화약 냄새와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때문에 코가 막히고 눈물이 줄줄 흘렀지. 그런데 밤 12시 되기 5분 전에 사격 중지 명령이 떨어졌어. 명령이 떨어져도 길게 늘어선 전선에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는데, 그래도 밤 12시가 되자 모든 공격이 딱 중지됐어. 북한군 쪽도 마찬가지였지. 나와 전우들은 갑작스러운 침묵 속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상황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했어. 하지만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어디선가 만세 소리가 들려오고,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만세를 외쳤지.
- 다음날 학생 출신과 부상병에 한해 제대증이 발부됐어. 난 당시 대학교를 다니다가 기차를 타고 피난 중 징집됐기 때문에 나도 제대 대상이었지. 일부 전우들이 신분을 속여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려 했는데, 그게 꼭 탓할 일은 아니었지. 늦거나 빠르거나 이제 모두 집에 돌아갈 수 있으니까. 강원도는 산세가 험해, 차량이 다니기 어려운 탓도 있었지만 차가 한 대라도 부족한 상황에 전역자에게 내줄 차가 있을 리 만무했어. 나와 대부분은 걸어서 강원도를 벗어나야 했다. 제대증과 함께 받은 감자 세 알을 주머니에 쑤셔 넣거나, 손에 들고 무작정 남쪽으로 걸었지. 지도도 없었고 근처에 민가도 없어서 내가 어디까지 갔는지 알 수 없었지. 감자 세 알을 아껴먹으며... 그래. 네가 굶주림에 대해 뭘 아는지 모르겠다. 사지가 멀쩡하지는 못했지만 너는 굶주리지는 않았잖니? 네 아비도 그랬는데. 너희 둘 다 나를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지. 됐다. 원망하려 얘기한 것은 아니니 이만 하자.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너희 부자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내 덕분이라는 게다.
- 어두워지자 난 더는 걷지 않고, 생각에 잠겼지. 서울은 어떻게 됐을까? 대학은 어떻게 됐을까? 내가 다니던 대학은 도중에 해방을 맞아 학교 운영이 한동안 중단됐지. 전쟁 발발 삼 개월 전 3월달에 일제 때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으로 다시 학교를 열었어. 난 대학이 영영 사라져 버릴까 봐 걱정이었단다. 일제 강점기를 겪은 내 부모들은 비록 똥지게를 짊어지고 다니던 무식자들이어도, 배워야 출세한다는 걸 알고 나를 대학까지 뒷바라지했다.
- 산길이 있었지. 이병연이가 이웃마을에 품일이라도 알아보러 샛길을 지나가는데 교수 딸이 별장 대문으로 나와 말을 걸었다는 거야. "저기 품삯을 쌀로 드려도 될까요?" 전쟁 통에 쌀이 귀할 때였는데 당연히 되지. 이병연이는 으리으리한 저택 안으로 들어갔어. 일거리는 대단치 않았어. 낡은 가구와 무너진 담장 보수였지. 딸이 열어준 창고로 가 공구를 찾다가 물을 게 있어서 딸을 찾으니 안 보이는 거야. 이병연이는 조심스레 별장 현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지. 그런데 거실에 교수와 딸이 있었어. 딸은 벌거벗고 소파 위에 서 있었고, 교수는 그런 모습을 화폭에 그리고 있었지. 이병연이는 벌거벗은 딸을 그리는 교수의 모습에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뻐끔댔지. 교수는 이병연이를 등지고 그림에 몰두하고 있어서 보지 못했는데 딸은 이병연이를 본 거야. 입모양으로 조용히 '쉿' 하더니 "방해하지 말고 나가주세요."라고 조금도 놀라지 않고 태연히 말했어. 이병연이는 다시 나와 놀란 가슴 진정시키고 일에 집중했지. 일이 끝날 때쯤 딸이 나와 일이 끝난 걸 보고는 이병연이를 데려가더니 쌀 반 가마니를 내줬어. 딸과 얼굴 마주치기도 민망해서 발끝만 멀거니 바라보는 이병연에게 딸이 살포시 웃었어. "천륜이 중요하지만 사람은 욕심을 못 이기고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거예요. 어디 가서 말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사람들 말에 민감해요. 말씀하시면 찾아가실 거예요." 이병연은 넙죽 인사만 하고 가마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지. 참 맞는 말이야. 아무리 하늘이 높다 하더라도 사람은 하늘도 이길 수 있어. 내가 그런 심정으로 맨손으로 살아왔다. 그러니 이만큼 떵떵거리며 살지. 네들 부자가 나를 싫어해도 내 돈은 그렇지 않잖 ...
- [신뢰성 높은 설명이 있는데 미군이 사용하는 명칭을 당시 국군이나 한국 사람들이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알아들을 수 있다면 당시로는 드물게 영어를 했다는 뜻입니다.]
- 중공군 개입으로 1월 4일을 기점으로 국군이 후퇴하는 때였지. 북한 사람들도 빨갱이라면 치를 떨었기 때문에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남쪽으로 내려왔지. 펀치볼은 분지지형이어서 피난 물결의 행로 한가운데 위치하진 않았지만, 주변 마을과 시장들이 영향을 받아 식량을 구하기 힘들었어. 산지가 많아 화전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마을 사람들은 전쟁으로 생필품이 늘 부족했고, 분지 지형은 안개가 심하고 습도가 높아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지. 외부에 의존해 마을을 유지했는데... 이제 점점 죄어오기 시작한 거야. 그때 이병연은 마을에 돌던 소문을 들었대. 안갯속에서 웬 돼지가 울고 있기에 혹시 누가 돼지를 잡으려다가 놓친 줄 알고 헐레벌떡 뛰어갔더니 사람이었다는 소문 말이야. 글쎄 조그만 꼬마가 돼지가면을 쓰고 안갯속에서 꿀꿀 소리를 내고 있었다고. 어떤 사람은 꼬마가 돼지 흉내를 내자 교수댁 딸이 홀연히 나타나 데려갔다는데, 전부 카더라 하는 소문일 뿐, 직접 본 것 같지는 않았다고. 이병연이 교수 가족 눈에 들어 어쩌다가 머슴 역할 하는 삼식이라는 동생에게 소문에 대해 물으려 삼식이 집 마루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 현철이 눈치를 보더라. "삼식아 뭔 일이여." "형님 비키소!" 하고는 삼식이가 자기 집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바닥에 한 바가지 가득 토악질을 하는 거야. 이병연이 등을 두드려 주며 "인마 아무리 굶어도 이상한 건 먹지 말아야지!" 하니 "형님, 나 돼지고기 먹었소." "인마 좋은 걸 먹고 왜 토해?" 하니 더는 대답하지 않고 구역질만 꺽꺽.
- 펀치볼은 원래 뱀이 가득 차서 뱀을 쫓으려 돼지를 길렀다는 전설이 있는 마을이야. 그래서 집집마다 돼지를 길렀는데, 빨갱이 놈들이 마을의 돼지를 모조리 잡아먹고 씨를 말렸지. 그런데 삼식이는 어디서 돼지고기를 먹었을까? 교수댁에서? 그 점잖은 사람들이 돼지나 키울 수 있을까? 이병연이 묻는 말에 삼식이는 대답하지 않고 드러누웠어. 원래 촌동네라는 게 그렇듯 소문은 삽시간에 온 마을을 돌았고, 먹을 것이 부족해 개와 고양이도 잡아먹고, 나무가구와 가죽 혁대마저 끓여 먹는 마을 사람들은 삼식이 상태보다 돼지고기를 어디서 났는지에 더 집중했지. 사람은 말이야, 굶주리거나 극한 상황에 몰리면 본성이 나와. 그게 사실 그 사람의 본모습이야. 내가 악으로 깡으로 돈 벌고, 네들 먹여 살릴 때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했지만 지금 나보다 잘 된 사람이 누가 있냐? 다 선비인 척, 점잖은 척하며 위선적으로 살았지. 그 사람들도 본성은 다 나와 똑같은 거야. 다만 아닌 척하는 거지.
- 어쨌든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병연이는 딸의 일을 도와준 일도 있어서 본인이 직접 가서 돼지고기가 안 되면 양짓살이나 비계라도 얻어 볼까 하고 가려했는데 다른 이가 나섰지. 마을에 단둘이 살던 형제가 있었는데 어린 동생이 배고파서 매일 징징대자 못 참고는 "사람이 같이 살아야지! 혼자만 맛있는 거 먹으면 뭔 재미야!" 일갈하고 기세등등하게 별장으로 향했어. 참 웃기지 않냐? 사람이 똑같이 사는 거 아냐, 달라. 아주 많이 달라. 네 아비나 다른 사람들 나한테 인생이 어쩌느니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마음 곱게 쓰라고 그렇게 부처님처럼 말을 했지만 결국은 다내가 모은 재산에 아쉬운 소리 하더라. 나한테 아쉬운 소리 했으면 도와줬을지도 몰라. 하지만 하나같이 돈! 돈! 돈! 그리고 여기서 얘기 듣는 너도 상속 때문이지? 그래. 부정 안 하겠다. 야 참 네 아비가 자식 하나 잘 길렀어. 뭐? 비꼬는 거 아니다.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그대로 말하는 게 어떻게 비꼬는 거냐? 난 독하게 마음먹었고, 거칠게 살았어도 마음은 항상 대로를 걷는 정도인이었어. 군자 대행로라는 말 알지? 그래 그 별장으로 향한 형이 어떻게 됐느냐고? 그는 돌아오지 못했지.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말이야. 그리고 그 사이에 삼식이는 뭐든지 먹으면 토하고, 가끔씩 눈을 허옇게 뒤집고 발광을 해댄 거야. 정신이 나가 버린 것 같이 말이야. 도대체 돼지고기를 먹고 왜 저러는지 아무도 몰랐지. 이병연이 말고는 아무도 삼식이를 챙기지 않았더랬지. 사람들은 그저 오매불망 별장으로 간 사람이 손에 돼지고기를 들고 내려오길 기다렸던 거야. 참 사람들 알고 보면 다 개새끼들이야. 그렇지?
- 이 얘기를 듣고 있는 와중에, 구석에 있던 현철이라는 그 음침한 놈이 자기 손가락을 쪽쪽 빨아대는 거야. 나이 맞지 않게 웬 지랄인가 싶어 이병연에게 눈짓을 주니, 이병연은 말을 하다 말고 현철이 손가락을 다 빨 때까지 그냥 쳐다만 보더구나. 나도 뭔 일인가 싶어 유심히 보니 그는 자기 손가락에 묻은 피를 빨고 있던 거야. 스스로 깨물어서 피가 나오자 하염없이 계속 빠는 거였지. 처음에 너 소아마비 후 걸음 연습 반복했던 것처럼 미련스럽고 한숨만 나오는 광경이었지. 그놈 두 눈은 당장에라도 쏟아질 듯 부릅뜨고 있었어. 무서웠지. 난 인정할 때는 인정하는 사람이야. 무서웠어. "어허, 현철아 왜 그러니?" 하니 이병연이의 눈치를 보며 손가락 크게 쭈욱 빨고 자기 사타구니 사이에 쑤셔 넣었어. 이병연이는 헛기침을 하며 내 눈치를 살폈지. 나는 애써 태연을 가장했어.
- [해안면의 해는 원래 바다 '해자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수많은 뱀들이 마을을 뒤덮자 고승의 조언대로 뱀과 상극인 '해'를 돼지 '해(亥)'로 바꾸어 쓰고, 돼지를 기르니 뱀들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해안면에 펀치볼 마을이라는 곳을 찾았습니다. 향토연구가 중 한 분이 저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 시 미처 기억해내지 못했다며 알려왔습니다. 휴전선과 근접한 지역이라 군부대가 많이 들어서 있는데, 일종의 기념으로 전쟁 시 붙여진 이름을 마을 이름으로 삼은 것 같습니다. 아마 연구가들이 말한 것은 아주 오래된 토박이들이나 일제 강점기를 거쳐 온 세대들이 펀치볼이라 부르지 않는다,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펀치볼 마을이 구술 중에 나왔다는 그 펀치볼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 어설프게 나무에 도끼질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보니 별장 교수댁 딸과 아들이었어. 딸이 가녀린 손으로 도끼를 잡고 나무에 도끼를 꽂았다가 놓쳐다가를 반복했고, 아직 어린 아들은 옆에서 멀거니 지켜보고 있었지. 김 씨가 다가가 아는 체를 하자 "가면을 만들어야 해서요. 저희 아버지가 가면을 조각하시고 싶어 해요. 도와주실 수 있나요?" 김 씨는 모두가 굶어가는 통에 조각이라 배운 사람들은 물만 먹고도 사나 보다 신기하게 여겼지만 금세 일제 때 완장 찼던 통밥을 굴려, 마을이 굶어가고 있다고 과장을 해서 처자식의 굶는 사연을 구구하게 털어놨어. "저희를 도와주시면 돼지고기를 드릴게요." 김 씨는 돼지고기라는 말에 득달같이 도끼를 뺏어 들어 나무에 흠을 내서 딸이 원하는 만큼의 목재를 떼어냈지. 완전히 나무를 무너뜨린 게 아니라 중간을 파낸 걸 거야. 일이 끝난 후, 딸은 김 씨를 데리고 별장으로 갔어. 이병연이처럼 별장 안에 들어오게 한 게 아니라 대문 앞에 세워뒀지. 잠시 후 딸이 광주리에 돼지고기를 수북이 담아 대문 앞에 나타났어 김 씨는 자기보다 한참 어린 여자에게 허리까지 꾸벅 숙여 보이고는 신나라 하며 마을로 돌아왔지. 얘기를 듣던 이병연이가 이상했다. 광주리에 담긴 고기는 아무리 봐도 돼지 고기로 보이지 않았거든. 고기 빛깔이나 두께로 보아 전혀 다른 종류로 보였거든. 김 씨는 이병연이가 이상하게 고기를 쳐다보자 혹시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말할까 봐 얼른 두 주먹 내어주며 조용히 해라 신신당부를 했지. 이병연이는 고기를 가지고 돌아와 잘게 잘라 죽에 넣었는데 왠지 그 고기가 먹기 싫었다. 그래서 삼석이한테만 죽을 떠먹였는데 여태까지 뭐든 먹으면 토하던 삼식이가 꿀떡꿀떡 ...
- 누군지 예전부터 알았던 게지. 교수가 칼을 들고 몸을 벌떡 세웠어. "아버지 이 분은 그냥 보내드려요. 이미 먹을 건 충분해요. 아저씨, 사람은 욕망을 추구할 때가 가장 자유롭고 아름다워요. 그래서 하늘이 시기해서 천륜이나 뭐다 같은 금기를 만들었어요." 교수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다가 옆으로 비켜섰지. 이병연은 죽기보다 그 옆을 지나가기가 싫었지만, 딸이 앞장서자 뒤에 바싹 따라붙어 종종걸음으로 마당까지 따라 나갔어. 그때 등 뒤에서 날카로운 꿀꿀 소리가 들렸어. 뒤돌아 보니 서울 갔다던 그녀의 동생 역시 돼지가면을 쓰고 벌거벗은 채 2층에서 뛰어내려 오고 있었어. 이병연은 당장이라도 뛰어 달아나고 싶었지만, 딸이 뒤돌아 야릇하게 웃자 굳어졌어. "어디 가서 절대 돼지가면 놀이에 대해 말하지 마세요. 입에서 내뱉으면 돼지가면 놀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요. 저희 아버지는 예민하셔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바로 찾아가세요." 손을 내밀어 대문을 가리켰어. "자 여기까지 마중해 드릴게요." 이병연은 너무 놀라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허겁지겁 마당을 가로지르는데! 마당 어디선가에서 돼지가면을 쓴 남자 둘이 짐승처럼 기어 나와 이병연의 발 앞을 막아섰어. 형제는 팔꿈치 이하로 팔이 없고, 무릎 이하로 발이 없어서 잘려나간 끝이 붕대로 꽁꽁 감싸져 있었다. 형제가 돼지가면 얼굴로 이병연을 올려다보며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병연이 형! 살려줘요!"라고 외쳐댔어. 이병연은 형제가 자신의 발끝을 잡고 늘어지자 고개를 돌려 딸을 봤지. 딸 옆에는 어느새 벌거벗은 교수와 아들이 나란히 서서 이병연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어. 교수와 아들의 가면에서 웃음 섞인 꿀꿀 소리가 새어나왔 ...
- 이야기를 마친 이병연은 나와 눈을 마주쳤어. 이야기가 어땠는지 감상을 듣고 싶어 하기에 분위기를 바꿀 겸. "에이, 이 형, 오금저리는 얘기 잘하네. 나 전쟁에서 못 볼 것 많이 본 사람이에요." 이병연의 표정은 시무룩해졌다가 활짝 펴졌어. 웃는 게 아닌 뭔가 씌웠다고 할까? 갑자기 강한 힘을 낼 때처럼. "동생. 나 별장에서 먹은 고기가 뭔지 알고 있어. 현철이한테 내가 죽 만들어줬다고 했잖아? 사실 나도 그 고기 먹었어. 그래서 먹자마자 무슨 고기인지 알았지. 그리고 현철이도 슥삭 잘 먹었잖아? 왜인지 알아? 그 고기가 맛있어. 그 고기는 사실 이야기를 들었으니 무슨 고기인지 짐작 가잖아? 먹으면 안 되는 건데 또 먹고 싶어. 못 먹을 걸 먹으면 변하나 봐. 옛날에 사람 피맛본 호랑이가 다시 산으로 돌아가지 않듯이 말이야. 그렇지 현철아? 현철아? 삼식아! 어째 넌 네 이름 부르는데 대답 안 하니! 이제 컸으니 아명 떼고 어른 이름으로 불려야지. 너도 먹고 싶지?" 그때 현철이, 아니 삼식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나한테 득달같이 달려들어 이마로 내 얼굴을 들이받았어. 난 그대로 기절했지. 얼마 후에 눈을 떴는데 아직 깜깜한 밤인 거야. 주위를 둘러보니 광 안이었어. 이병연은 아궁이 재로 자기 얼굴에 돼지 귀와 입을 그렸더라고. 내가 정신을 차린 걸 봤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숫돌에 물을 부어 식칼을 북북 밀어 갈았어.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형이 고기 구워줄게." 고개를 돌리니 내 뒤에서 삼식이가 얼굴을 나한테 내리깔고는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더군. 손가락이 피가 나올 정도로 깨물고 피를 쭉쭉 빨 ...
-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였지만, 널 위해 한 거다. 이 내가! 바로 나! 라는 위인이! 그래도 우린 가족이니까! 돼지 맛이 어떤 고기 맛과 비슷하냐면...
※더는 텍스트화 할 구술이 없음.
- [조사보고 : X월 31일
본문 들어가기 전 이야기의 답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답은 관련자입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세 사람이 잠들었을 때 누군가가 찍은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여자가 귀신이고, 귀신이 찍은 걸로 많은 사람들이 짐작하지만 이야기 중간에 등장한 귀신도 관련자입니다. 귀신일 수도 그냥 지나가다가 장난으로 찍은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동료는 당연히 세 사람의 관련자입니다. 저는 90년대 후반 학비를 벌려 막노동을 하다가 이 괴담을 들었습니다. 실제 이야기의 정답은 밤늦게 현장을 정리하다가 장난친 동료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기보다 이야기 중간에 나왔던 귀신 존재에 더욱 주목합니다. 왜냐면 사람들은 시시한 진실보다 강렬하고 무서운 허구를 쫓아가기 때문입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할아버님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해안면 펀치볼이라는 곳에서 일어난 극단적인 살인행위에 대한 정보는 사건에 연루된 관련자가 아니면 알 수 없습니다. 그럼 누가 몇십 년 전에 은밀하게 일어난 살인행위에 대해 장소와 시대를 정확히 진술하겠습니까? 하지만 신빙성은 매우 적습니다.]
- [보고서 평과 요청에 대한 답변 : X월 2일
왜인지 모르나 문의하신 정신병원을 찾았습니다. 요구하신 조건대로 악독하다는 단어를 쓸 정도로 지독한 감금시설입니다. 본래 가족 동의 2인 이상이면 가족을 정신병명으로 구금할 수 있으나 이곳은 돈만 주면 해당 조건을 조작해 주기도 하며, 정신병명이 아니어도 돈을 보고 감금해 주기도 합니다. 환자 대부분 늘 신경안정제에 중독돼, 깊은 수준의 사고와 행동을 보이지 못하며 탈출은 한 번도 일어난 적 없습니다. 원인불명의 사망사고도 자주 일어납니다. 왜 이곳을 원하시는지 이유를 알아도 되겠습니까?]
- [to. 핀거튼 탐정 서울 지사 조사팀에게.
보고서 마지막 결론대로 저희 할아버지의 구술이 신뢰가 떨어지고 거짓말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만약에 정말 사실 그대로 말씀하셨다면 오히려 제가 놀랐을 겁니다. 제 할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늘 자신의 마음속에 자신만의 여과기를 가지고, 사실을 왜곡하고, 부풀리십니다. 저도 노골적인 할아버지의 인생관 가르침에 많이 불편했습니다. 대화의 90퍼센트는 입에서 나오는 단어보다 눈빛, 분위기, 자세, 목소리, 말투에 좌우됩니다. 구술 녹음으로 들으셔서 잘 모르겠지만 저는 할아버지 앞에서 이야기를 들을 때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즉석으로 꾸며낸 이야기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할아버지 식억지논리와 전개는 언제나 이런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실입니다. 거의 전부 거짓이라는 조사와 전문가의 견해가 있었어도 저는 이번에는 진실이라고 여깁니다. 이야기의 날개와 부리가 가짜라도 몸통은 진짜입니다. 이제 제가 왜 고도의 감금시설을 원하는지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이야기로 현 상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모든 공포이야기는 징조와 예고가 있다고 생각하시며 읽으시면 됩니다.]
- [유명한 도시괴담 중 하나입니다. 어느 여자가 몇 년째 보아뱀을 기르며 같이 살고 있었는데, 며칠 전부터 보아뱀이 자신 옆에 몸을 길게 늘어뜨리며 눕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뱀이 귀여움을 받으려 행동한다고 생각해 귀엽게 여겼는데, 어느 날 뱀의 시각은 열을 탐지하는 방식이라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즉 주인을 알아볼 수 없다는 얘기죠. 여자는 뱀 전문가에게 전화를 걸어 보아뱀이 자신 옆에 똬리를 틀지 않고 길게 늘어뜨리며 눕는다고 설명하며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뱀 전문가는 다급한 목소리로 여자에게 당장 집에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뱀은 먹이를 소화시킬 수 있을지 가늠하기 위해 먹이 옆에 몸을 늘어뜨려 크기를 재기 때문입니다. 괴담에서 살아서 빠져나오려면 징조와 예고를 느끼고,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제가 감금하려는 사람은 예상하시는 대로 제 할아버지입니다. 이유는 보아뱀과 같은 목적으로 행동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께서 강한 극기를 심어주시기 위해 저한테 얘기하셨다는 나름의 이유를 믿습니다. 그리고 극기를 유발시킨 공포체험도 믿습니다. 많은 부분이 진짜가 아니어도 아니 진짜인지 가짜인지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닙니다. 주목하실 점은 딸과 교수가 돼지가면 놀이에 대해 말하지 말라 경고한 부분과 이병연이 돼지가면 놀이에 대해 말하고 돌변한 부분입니다. 여기까지가 징조와 예고였습니다. 그래서 절대 입 밖으로 얘기하지 말고, 텍스트로 보고하고, 교류하라 지시했습니다. 조사팀과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공포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해도 듣지 않으려 해도 절대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을 겁주는 공포 이야기의 근본은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일로 확신을 얻었습니다. 돼지가면 놀이에 대해 말하지 마라. 이 금기는 예고이자 강한 저주였습니다. 지금 할아버지는 얼굴에 돼지가면을 그리고 꿀꿀대고 계십니다. 묶어놓기는 했으나 정상적이지 못한 몸으로 제가 앞으로 돌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하루빨리 입원시킬 겁니다.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한 번만 더 수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돼지가면 놀이>, 유재중
- 강은 꿈을 잘 꾸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꾸는 꿈은 언제나 흑백이었다. 언제였던가, 강은 예술가들이 컬러 꿈을 많이 꾼다는 토막글을 읽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에게 예술의 재능이나 예술적 감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예술이라는 말이 그에게는 허세, 변덕, 사치, 공상 같은, 그야말로 '개꿈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강은 자신이 현실적인 인간이기에 예술가들 같은 허황된 꿈은 꾸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강의 생활은 예술가와도, 예술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는 27세에 한 중소기업의 평사원으로 입사해 48세가 된 지금까지 같은 회사의 인재개발과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 "두 번째 숫자는 5! 세 번째 숫자는 23입니다."
벌써 세 개나 빗나갔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우습게도 눈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종일 만일에 대비해 상상해 온 비참한 자신의 모습은, 닥쳐온 현실에 비하면 훨씬 고상한 것이었다. 강은 자신이 눈물까지 흘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토록 미신이며 판타지, 허무맹랑함을 비웃어 왔는데, 고작 꿈찌꺼기 하나에 놀아나 하루 내내 어린애처럼 들떠 있었다고 생각하니, 누구에게 알려진 것도 아님에도 부끄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날의 당첨 수에서 강이 꿈에서 본 여섯 숫자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 월요일 아침, 강은 평소의 그로 돌아와 있었다. 일요일까지만 해도 우울하여 조금 풀이 죽어 있었지만, 복권에 당첨되지 않았다고 해서 비탄에 잠겨 있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만일 진짜 의미가 있는 꿈이었다면,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교훈을 남기고 싶었음에 틀림없다. 숫자 꿈은 이미 강의 뇌리에서 떠나가고 있었다.
- 그러나 출근길에 강은 다시 그 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에스컬레이터를 오르고 있는 강의 눈에, 한 여자의 독특한 모습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냥 얼핏 봐서는 갈색의 얇은 바바리코트를 입고 생머리를 길게 기른 특이할 것 없는 차림새의 여자였다.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그녀는 무표정했지만 어딘가 우울감이 풍겼다. 월요일 출근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우울감도 이해 못 할 것은 없었다. 다만 그녀의 이마가 시선을 끌었다. 이마 위에 숫자가 쓰여 있었던 것이다.
- 강의 등에서 또다시 식은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피하고 싶은 상상이 자꾸만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강은 부러 머리를 흔들었지만,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4는 자살이다. 33은 살해당하는 것이다. 그럼 나머지 숫자는?'
그 숫자는 바로 죽음을 알리는 숫자다. 강은 이제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의 이마에 숫자가 쓰여 있는 것이 아님을 생각했을 때, 평범한 자연사를 예고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죽음이 가까워진 사람의 이마에만 숫자가 나타나는 것이리라. 한 번 시작하자, 생각은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 이 숫자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귀신이 들리기라도 한 것일까? 굿이라도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이마에 숫자가 나타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쫓아가며 당신은 조만간 죽을지도 모르니 각별히 조심하라는 조언이라도 해야 할 것인가? 하지만 그런 말을 누가 믿는단 말인가.
- 다음날부터 강은 사람들의 이마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강은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의 이마에 커다란 1이 쓰인 것을 보았다. 바쁜 출근길이었지만, 강은 도저히 그 아이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강은 남자아이의 뒤를 따라갔다. 남자아이는 강의 동네에서 지하철 정거장이 넘는 곳에 있는 중학교에 도착했고, 강은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마에 1을 달고 다니는 것이 그 남자아이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교문을 들어선 남자아이에게 어깨동무를 거는 다른 아이, 그리고 그 아이들이 합류한 또 다른 그룹의 아이들의 이마에도 1은 모두 똑같이 새겨져 있었다.
- 강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세 선생은 흩어져 버스에 올라탔다. 열 대 가량의 버스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운동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강의 눈에는 그것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영구차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강은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수련회에 가지 않는 소년들이 그런 강을 전봇대 아래 취객을 보듯 지나쳤다.
- 서울시 모 중학교가 수련회를 가던 중, 학생들을 태운 버스 한 대가 도로에서 추락해 탑승자 대부분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뜬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살아남은 아이들 중 혹시 강이 벌인 소동에 대해 이야기한 아이들이 있었을지도 모르나, 뉴스에서는 강에 대해서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1은 사고사다.'
강은 어딘가 맥이 빠져, 그런 결론을 내렸다.
-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세상은 놀라울 정도로 죽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실로 죽음은 숫자만큼 흔한 것이었다. 강의 일과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숫자가 이마에 적힌 사람을 쫓아다니거나 그들의 소식을 수소문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13은 병사이며 27은 돌연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때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숫자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9였다. 아마도 9는 굉장히 희귀한 죽음의 방법을 예고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강은 9를 보기 전에는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자꾸 만드는 것이었다.
- 강은 약 20년을 한 회사에서 일했다. 이직이나 전직을 시도한 적도 없으며, 언제나 묵묵하고 성실하게 맡은 직무를 해내 비록 인기는 없었으나 신뢰는 높았다. 허무맹랑한 것, 자극적인 것, 근거 없는 것을 쫓는 세태를 혐오하는 그의 성미 역시,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는 그의 특성이었다. 그랬던 강이 회사 일도 내팽개치고 타인의 죽음을 예고하거나, 예방하기 위해 분주히 쫓아다니는 데는 큰 결심과 절박함이 필요했다. 그런데도 강의 새로운 직무에는 조금도 성과가 없었다. 강은 여러 가지 방법을 연구했다. 대뜸 "당신은 조만간 죽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가 얻어맞은 적도 있다. 낯선 중년의 남자가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젊은 여자들은 경계했다. 이마에 숫자가 쓰인 사람을 쫓아가 우편함에 경고 메시지를 써넣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다. 지각과 결근이 늘어나자 회사에서도 강의 변화를 눈치채기 시작했고, 결국 강은 퇴사 권고를 받았다. 강은 가타부타 변명하지도 않았다. 강은 아침이면 밖으로 나가, 깊은 절망 속으로, 이미 죽은 자에 불과한 산 자들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 "당신 요즘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어느 날, 강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현관에 들어섰을 때, 아내는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물었다.
"회사 그만두고 새 직장 구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맞아?"
"그럼."
강은 아내를 지나쳐 현관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주저앉았다. 온종일 이리저리 돌아다닌 탓에, 다리가 무척 피로했고 발에서는 고린내가 났다. 강은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가 변해가고 있다고 느꼈다. 지금 그의 발 냄새는 예전의 그의 발 냄새와는 달랐다. 이전에, 그의 발 냄새는 삶의 노고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콧속에는 온통 시체 냄새, 죽음의 냄새만이 맴돌았다. 아무런 냄새를 맡고 있지 않아도 그는 그 냄새를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시체가 되어가고 있구나. 가끔 강은 섬뜩 놀라 거울을 바라보고는 했다. 하지만 강의 이마는 늘 허옇고 미끈했다.
- "당신 요새 이상해. 이상해졌어. 그거 알아?"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정신이 빠진 것 같아. 당신 원래 안 그랬잖아. 당신 입으로 험한 세상에서 등쳐 먹히지 않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그랬잖아. 당신 밖에서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밖에서 당신 본 사람 있대. 내가 대체 요즘 무슨 소리 들으며 사는지 알아?"
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내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내는 힘없이 어깨를 떨구고 방으로 들어갔다.
텔레비전을 틀자, 그 안은 여전히 떠들썩한 세계였다. 세상은 그대로다. 변한 것은 강뿐이다. 죽음도 삶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 강은 다시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강은 그토록 자신이 혐오하던 '비현실'의 영역에 자신이 이미 떨어져 버렸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 영역은 강이 모르고 있던 세계였다.
- 왜 하필 내가 그 꿈을 꾸어야만 했을까. 복권 당첨을 바란 것마저도 과욕이었던 것일까? 나는 연예인들처럼, 혹은 영화나 만화의 초인들처럼 특별한 매력이나 능력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나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고,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하필 불행은 나를 선택했는가.
- 부질없는 짓이었다.
강은 비척비척 욕실 안으로 들어가, 불도 켜지 않고 손을 씻었다. 그리고 눈물 콧물로 뒤범벅된 얼굴을 씻어냈다. 고개를 들자 그 앞에는 거울이 있었다. 어두운 욕실, 거실에서 비어져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받아 강의 턱 끝에 맺힌 물방울들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강은 자신의 이마에 쓰인 숫자를 보았다. 마침내 처음으로 맞이하는 숫자, 마지막 숫자인 9가 보였다. 강은 직감했다.
'죽인 자의 숫자다.'
몸의 힘이 빠졌다. 순간 강은 퍼즐을 완성한 어린아이처럼 안도에 잠겼으나, 다시 이마의 9를 노려보았다. 숫자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이번에는 내가 죽이려고 했는데. 어린 아들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가, 꿈에서 들은 땅울림이 되었다. 강은 오랜 시간 동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순간 거울 안에 비친 강은, 꿈속에서 본 희미한 그림자, 그 이외에 다름 아니었다.
- <숫자꿈>, 김재은
- "실무수습은 잘 받았겠지?"
"네."
"지금부터는 실전이야, 장난 아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초장부터 잘 쳐나가야 해. 저 놈들은 신규직원만 오면 요리조리 저울질을 해본다고. 좆같은 놈이 들어왔구나 싶으면 지들도 조심하지. 하지만 만만한 물이라고 생각되면 그 신규는 퇴직할 때까지 개고생 길만 걸어야 해."
두 남자의 걸음이 구령에 발 맞춰가듯 착착 나아가는 사이 나이 든 남자의 사설은 이어졌다.
"방 18개에 별의별 놈이 다 있다. 신문방송 크게 탄 애들도 있어. 건전지 잡아 펴서 문신 새길 줄도 알고 알약 캡슐 갖고도 흉기 만들 수 있어. 교도관 징계먹이는 데는 도가 텄지. 고소장으로 방을 채운 놈도 한둘이 아냐. 그러니까 규정 잘 숙지하고 원칙대로 근무해야 해."
- "하지만 전체 비율로 따지자면 '문제수'는 얼마 안 돼. 나머지 대부분은 말을 잘 들어. 하루빨리 출소하고 싶어 하거든. 지내다 보면 차차 알게 되겠지만 크고 작게 곤란한 일 많이 당할 거야. 방귀 뀌다 보면 똥 나온다고 사소한 범치기가 큰 교정사고로 이어지는 경우는 흔해, 매사 주의하고 잘 지켜봐야 해."
"잘 알겠습니다."
"너무 떨거나 의기소침할 필욘 없어. 재밌는 것도 많이 볼 테니까. 담당용 책상에 비상벨 하고 전화기 있는 건 알지? 지들끼리 싸우거나 근무자한테 욕하고 대들면 녹음기 버튼 바로 눌러버려. 홍분해서 같이 욕하고 싸우면 안 돼. 술수에 말려들지 말 것. 그건 기본이야."
"네, 알겠습니다."
"CCTV 계속 돈다. 도둑놈 아닌 직원 감시용이지. 간부들 저거 자주 봐. 졸거나 딴짓하지 말고 근무 잘 서."
- 그들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2사동의 앞이었다. 짧은 대답만을 하던 20대 초중반의 교도관만이 남고 수다를 퍼붓던 40대의 교도관은 손전등과 업무용 노트를 옆구리에 낀 채 3사동 쪽으로 걸어가다가 잠시 멈추었다.
"아 참. 처음 근무하니까 말인데."
그는 강의라도 하듯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사람도 그렇고 땅도 그렇고 물길도 그렇지만 건물들도 기(氣)가 센 경우가 있어. 내 생각엔 교도소야말로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봐. 폐쇄되어 있고 제한적인 정보밖에 없는 비밀의 집이니까.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로만 가득한 비밀의 집. 음, 가끔 말이지."
영맨이라 불린 신규직원은 의아스런 눈길로 주임을 쳐다보았다.
"밤에 근무하다 보면 이상한 게 눈에 보일 때가 있어. 하도 이상해서 꿈인지 생신지 분간 못할 때가 많아. 그 때문에 간 떨어질 뻔하거나 오줌을 지르기도 하지. 하지만 헛 거라고 무시하면 돼. 분명 헛 거니까."
구체적인 설명은 무시한 채 그는 등을 돌렸다.
"무시하면 되는 거야. 자, 진짜 간다."
- 신규직원은 잠시 사동 입구를 바라본다. 첫 출근이자 연수가 아닌 실전 야간근무의 첫 배치다. 무지막지한 재소자들을 직접 관리할 생각에 가슴은 떨려오고 저절로 긴장감이 엄습했다. 그의 담당 섹터인 제 2사동엔 18개의 감방에 17명의 문제들이 있다고 했다. 혼자서 이들을 담당해야만 한다.
그래, 먹고사는데 쉬운 게 뭐 있겠니.
- 입구의 녹슨 자물쇠를 열쇠로 열었다. 서울이 고향인 23세의 청년 진영민은 경상북도 성주군 다흥면에 위치한 섭주 교도소로 신규발령을 받고 2동 근무에 본격적으로 임하게 되었다. 그가 고향과 멀리 떨어진 곳을 자원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홀어머니는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었다. 하지만 백발백중이란 간판과 달리 내리는 신령님 말씀마다 틀리기 일쑤여서 거센 비난을 받았고 굿판 도중 사람을 다치게 해 합의금을 물기까지 했다. 신령님도 포기하고 떠난 듯 나이가 들면서는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하더니 결국 하나뿐인 아들한테 칼을 들이대며 네게도 신기가 있으니 내림굿을 해야 한다며 을러댈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영민은 어머니와 의절했다. 과거를 지운 그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 출발을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영민은 근무에 관해 질문하고 싶었으나 그의 행동으로부터 건방지게 묻지 말고 그냥 스스로 깨우치라는 암시를 강하게 받았다. 그냥 하다 보면 돼, 다 그렇게 하는 거야. 여긴 연수원이 아냐. 토론하는 무대가 아니고 피가 튀는 현장이지. 죽어봐야 저승 맛을 알아. 그러니 직접 해 봐.
영민은 질문 대신 수고했다는 경례를 붙였다. 이 사람이 나가면 이제 2동에는 자기 혼자만 남는다. 17명의 죄수들하고, 그들은 살인, 연쇄방화, 시신유기 등 강력범죄를 저질러 전국 각지에서 중구금 교도소인 섭주 교도소까지 이감을 온 문제들이다. 18개의 방 모두 튼튼하게 잠겨 있지만 그래도 긴장감은 남는다.
- "끝방인 18방 있잖아요... 거긴 공방이에요. 공방이 뭔지 알아요?"
"빈 감방을 말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요. 18방은 1년째 손님을 안 받고 있어요. 그러니까 거기엔 형광등 켜지 말아요."
독사 같은 그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뭐, 전기 많이 쓴다고 간부들이 잔소리하니까 켜지 말아요."
"예, 알겠습니다."
영민은 이 사람이 자기에게 조금은 겁을 준다고 생각했다.
"갈게요. 참, 인사 늦었네, 같은 직장 직원이 된 거 축하합니다."
간단한 악수가 끝나자마자 안대섭은 바로 걸어 나갔다. 곧 자물쇠 잠그는 소리가 차갑게 울리고 그는 사라졌다. 이제 영민은 혼자였다. 시각은 밤 9시였다.
- 9시 30분이 되자 연속극과 뉴스를 방영하던 텔레비전은 꺼졌다. 재소자들은 양치질을 하고 일기를 쓰는 등 바깥사회와 다를 바 없는 취침 전의 행동들을 보이다가 이부자리를 폈다. 그들이 말을 걸까 봐 긴장했던 영민은 맘 한편으로 안도감을 느꼈지만 곧 새로운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17명을 데리고 있는 혼자가 아니라 잠이 들어 아무것도 모르는 17명을 데리고 남은 진짜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 영민은 30분에 한 번씩 1방부터 18방까지 시찰했다. 생각보다 안 자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둬놓고 지켜보는 일이 교도관의 업무일진대 쇠창살을 지날 때마다 영민은 감방 안에서 그를 노려보는 재소자들의 눈에서 달갑지 않은 빛을 보았다. 공을 세워보려고 무슨 꼼수를 부리나하는 경계와, 초짜 주제에 제복 입었다고 어깨 힘주고 다니는 꼴 봐라 하는 듯한 경멸이 반씩 섞인 빛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영민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영민은 전과가 많은 능란한 재소자들일수록 신규직원을 경계한다는 말을 연수원에서 들었다. 신임 시절에는 융통성보다는 규정으로 승부하는 시기라는 걸 잘 안다는 것이다.
- 배치주임이 눈을 감다가 다시 떴다.
"대학 다니고 여학생들이나 만나다가 직장이라고 들어온 곳이 흉악범들만 우글대는 교도소다. 적응이 쉽진 않겠지.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자네뿐만 아니라 모든 교도관들이 한 번씩 겪는 일이야."
영민은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교도 때 사동에서 졸다가 그런 걸 자주 겪었어. 잠결에 돌아보면 한 방에 취침하는 애들이 분명 넷이었는데 다음날 아침에는 세명으로 되어 있다거나, 한밤중에 생판 처음 보는 재소자가 빈 방에 들어앉아 빤히 날 노려보는 것 따위 말이야. 알고 보니 그는 수십 년 전에 그 방에서 죽은 사람이었고."
하지만 전 졸지 않았습니다, 이 말이 입술을 간질였다.
- "이 일 하다 보면 더 힘든 거 숱하다. 정신 바짝 차려라."
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귀신이 뭐 무섭다고? 먹고사는 게 더 무서운데 좀만 더 있어봐라, 저절로 알게 될 테니."
말을 마친 50대의 배치주임은 히죽 웃었다. 분위기에 위축된 영민은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다시 2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시각은 자정을 갓 넘긴 시각 교대시간까지는 아직 조금 더 남았다.
- 출입문을 나서니 바깥은 딴 세상으로 보였다. 하늘은 페인트처럼 맑았고 과일 냄새를 담은 농촌의 미풍이 가을을 재촉하듯 얼굴을 어루만졌다. 교도소는 사람 올 데가 못 된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온 영민은 쓰러지듯 누워 잠이 들었다. 몸살에 걸린 것처럼 온몸이 쑤셨는데 특히 어깨가 지독히 아팠다.
"교도소 야간 근무가 이런 것이었나? 꼭 노가다한 것처럼 아프군."
식사도 잊은 잠은 먹물처럼 깊고도 검었다. 그를 눈뜨게 한 것은 스마트폰의 알람 신호였다. 시각은 아침 7시.
"세상에! 20여 시간을 내리 잤다니!"
출근을 위해 일어나자 몸살기는 거짓말처럼 가셨다. 그는 어제 걸어둔 제복을 다시 쇼핑백에 넣고 서둘러 집을 뛰쳐나갔다.
- 어지러운 꿈에 파묻힌 나를 깨우는 어떤 소리가 있었다. 툭, 툭, 툭 하는 소리 말이다. 소리는 살아있는 것처럼 내 몸도 두드렸다.
눈을 뜬 순간 죽어 있던 나의 머리카락은 잔털 하나까지도 위로 솟구쳤고 겁에 질린 내 눈알은 안쪽에서부터 찌릿찌릿한 게 바깥으로 튀어나가려고 용을 써댔다.
그년이 또 쇠창살 틈으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있지도 않은 눈, 있지도 않은 대가리로. 방에는 돌멩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내가 죽여 시체를 버렸던 산속에 있던 것과 똑같은 돌멩이가 목 없는 귀신은 창살 밖에서 돌멩이를 던져 잠이 든 나를 기어이 깨운 것이다. 시각은 정확히 새벽 2시였다. 나는 소리쳤다. 사람 살려, 살려줘, 이 씨발놈들아, 잘못했어요, 개년아. 그러고는 화장실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다.
- 기동대가 달려왔을 때 이미 귀신은 사라진 뒤였다. 당연히 기동대는 귀신을 못 봤고, 나는 소란을 피운 죄로 수갑에 묶이는 신세가 되었다. 계장에게 무릎 꿇고 애원했다. 징벌 사동에 보내지 마십시오. 혼거사동으로 보내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는 죽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진정 죄를 뉘우친다고도 했던 것 같고 계장더러 아버지라고도 불렀던 것 같다.
그러자 계장은 딱하다는 듯 수갑과 포승을 풀어주고는 앞으로 생활 잘 하겠다는 자술서를 쓰게 하고 날 풀어줬다. 나는 2동 18방으론 절대 못 돌아간다고 완강히 버텼지만 신약성서를 손에 쥐여준 계장은 모든 일엔 절차가 있는 법이라며 차분히 이거 읽고 기다리라고 했다. 당신 같은 예수쟁이... 난 불교 믿는데...
- 세 사람에겐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영민은 444의 복수전이 성공적으로 개시된 걸 분명히 알았다. 동해보복이라! 피는 피를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안대섭과 그 친인척은 들어오지 말아야 했던 저주받은 18방에 들어온 것이다. 영매 역할의 무당 아들이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영민은 자신의 어깨에서 통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반면 안대섭은 그 순간부터 주먹으로 어깨를 치기 시작했다.
"아버지, 문 열다 담이 걸렸나 봐요. 어깨가 왜 이리 아프지."
- <무당아들>, 박해로
- 코 근처에 부스럼이 진 노파가 희끄무레한 것이 잔뜩 낀 열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루 묵고 가려는데요. 방 있습니까?"
"없어, 방은 꽉 찼슈."
콰광, 밖에서 건물을 때려 부술 것 같은 뇌성벽력이 으르릉 울었다. 나는 손에 든 우산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절망적인 기분으로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방 하나라도 어떻게 안 될까요? 바깥 날씨가 저 모양이라..."
"쓸 만한 방은 다 나갔어. 쪽방으로 사글세 치는 방들이 많아설람... 오면서 터미널 근처에 공사하는 거 못 봤는겨?"
"그런가요."
- 억수 같은 장대비가 문짝을 덜걱덜걱 붙들어 흔들었다. 저 빗속으로 다시 나가서 묵을 곳을 찾을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망할 비... 머리를 북북 잡아 뜯으며 몸을 돌리는데 잔뜩 쉰 노파의 목소리가 나를 붙들었다.
"하룻밤만 묵고 새벽 일찍 나갈 셈이라면 어떻게 방 하나야 변통해 줄 수 있을 것도 같은디..."
"네? 될까요, 그렇게? 저는 내일 아침 첫차로 올라갈 거라서 그렇게만 해 주시면 감사하죠."
"으으음... 기달리보게."
노파는 잠깐 내 얼굴을 꼼꼼히 살피더니 미닫이를 각 닫아걸었다. 닫힌 창 너머에서 노파가 웅얼웅얼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한참 이어지더니 위층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산 손잡이를 쥐고 꾸물거리는데 꽉 닫혔던 미닫이창이 열리고 노파가 눈짓을 했다.
"3만 원, 204호실이여."
-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서는 등 뒤로 창이 드륵 소리를 내며 닫히다 잠깐 멈추었다. 노파의 목소리가 검은 복도를 타고 흐느적거리며 기어와 등 뒤에 달라붙었다.
"... 거시기, 누가 와도 문 열어주지 말여."
"네?"
희미한 소리에 갸우뚱거리며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지만 미닫이창은 이미 닫혀 있었다. 콰르릉, 지축을 울리는 천둥소리에 바르르 떠는 문 너머로 억센 빗줄기의 그림자만이 복도를 길게 가로질렀다.
- 이번에는 머리 위였다. 나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차마 위를 올려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허리를 굽혀 비누칠을 하던 자세 그대로 나는 실눈을 떠서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았다. 눈 사이로 비눗물이 들어가 따끔거렸다.
"쥐... 쥐일 거야."
낡은 여인숙이니까, 쥐가 천장을 돌아다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아까의 소리도 분명히 쥐였을 것이다. 나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허리를 폈다. 비누 거품이 묻은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 문 앞을 서성이며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초조했다. 비닐이 부스럭대는 소리, 그 안에서 찰캉 대며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같이 들려왔다. 나는 문에 몸을 바싹 붙인 채로 대답했다.
"저는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요."
"아, 당황스러우실 거란 건 아는데... 아 진짜 저 노망 난 할망구가... 그래도 어쨌든 제 방인데요."
"이렇게 나가라고 하시면 어쩝니까? 이 빗속에서 뭘 어쩌라고요."
"... 하, 나 참 미치겠네... 음. 일단 문 좀 열어보실래요?"
한참을 갈등하다 손잡이에 문을 가져가며 나는 문득 내가 뭔가를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잠시 멈칫거리는 사이에, 문 너머의 여자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정 안 되면 같이 자야지요 뭐. 술 하세요?"
찰캉, 다시 한번 들려온 그 마찰음은 캔과 캔이 부딪히는 소리 같았다. 갈증이 갑자기 목구멍을 타고 밀려들었고 나는 뭔가에 홀리듯 문을 열었다.
- 마르고 키가 큰 여자였다. 가슴 부분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워낙 말라 색기라고는 없어 보였다. 문이 역리자 척척 걸어 들어와 앉은 그녀는 비닐봉지를 풀어헤치더니 맥주 캔을 꺼내 들어 내게 밀었다. 딱히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그저 당황스러워 나는 그녀가 권하는 맥주를 받아 든 채로 그녀를 조심스레 훔쳐보았다.
- 달각.
다시 그 소리였다.
달각달각달각.
달각달각달각달각달각달각달각달각달각,
- 방안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양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 위에 올라탄 채로 그녀는 벌벌 떨기 시작했다. 아아, 안 돼, 때리지 마세요. 신음을 내뱉으며 양희는 얼굴을 두 팔로 가렸다. 안돼... 아파요 사장님. 엉덩이가 꽉 다물려 나를 조였고 나는 그너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비명을 지르며 사정했다. 불꽃이 튀기는 동시에 바깥에서 비가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현실감 있게 울려 퍼졌다.
- 내 위에 올라탄 그녀의 묵직한 느낌이 갑자기 사라졌다. 달각달각달각 소리도 함께 사라졌다.
나는 텅 빈 방 안에 홀로 대자로 누워 멍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반쯤 벗겨진 추리닝 바지와 가슴께까지 말려 올라간 티셔츠 사이. 조금씩 나잇살이 붙기 시작한 배 언저리에 아직도 뜨끈한 나의 정액이 뿌려진 채 식어가고 있었다. 꿈처럼 희미한 것들이 눈가에 몰려와 눈을 덮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썩은 내가 코끝에 달라붙었다.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랬다. 확실히 그건 쥐 소리는 아니었다.
- 한바탕 씻고 나와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하고 초조하게 옷을 갖춰 입고 기다리다가 터미널에 첫차가 들어오는 시간이 될 무렵, 그 방에서 뛰쳐나왔다. 어스름히 새벽동이 터오는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자 열린 현관문 사이로 비가 거의 그친 바깥의 풍경이 보였다. 나는 시퍼렇게 멍이 든 입술 주변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현관을 향해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걸었다. 미닫이창이 제멋대로 드르륵 열렸다.
"... 그러게 내가 뭐랬슈.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잤는겨?"
노파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나를 한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 앞에 우뚝 서서 노파를 내려다보았다. 노파는 대답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킬킬 웃으며 주름이 잔뜩 진 손을 내밀었다.
"여관바리가 왔다 갔구먼."
- "그년은 아주 질이 나빠. 뒤지고 나서도 그 지랄이니 말 다했지 않여."
"... 그건 대체 뭐였습니까?"
"말했잖여, 여관바리랑게. 그년 돈통 흔드는 소리여. 사장 놈한테 돈통 안 뺏기려고 지랄발광하는 소리, 나도 몇 번 들었지."
노파가 입술을 보기 싫게 비틀었다. 누렇게 썩어 끝부분이 까맣게 갈라진 이가 장아찌 같은 입술 사이로 메스꺼운 모습을 드러냈다.
"썅년이 뒈질 데가 없어서 여서 뒈지고 말여. 물장사하면서 여관바리질까지 해서 뭔 돈을 그로코롬 악착같이 벌었는지 몰라도, 몸 파는 년들 돈주머니에 돈 차는 꼴 내 본 일이 없구먼. 돈 노리고 곰팡이 같은 놈들이 달라붙는 법이지. 하필이면 여기서 뒈져서, 사람 치는 바람에 재수가 옴이 붙었어. 그런데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구신이 돼서도 손님을 쳐받으러 오는겨. 미친년이지."
"..."
"갸도 결국은 구신. 구신이여."
"..."
"그래서 내가 문 열어주지 말라고 그로코롬 얘기를 했는디, 말을 안 듣고 그러슈."
- 나는 한참 동안이나 노파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쭈글한 손 위에 던지듯 키를 놓고 돌아서서 그곳을 나왔다. 킬킬거리며 웃는 듯, 우는 듯한 목소리로 노파가 뒤에서 속살거렸다.
"집에 가거들랑 소금이나 뿌리시게."
-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욱씬거렸다. 나는 여관을 떠나 터미널에서 버스표를 끊고, 옥천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 눈을 감고 간밤에 못 잔 잠을 마저 자려 차창에 이마를 기대었다. 소금이나 뿌리라고.
여관바리, 갸도 결국은 구신. 구신이여.
이를 까득 깨물었다. 양희가 핥았던 턱 주변은 얼음처럼 얼어붙어 감각이 없었다. 출발이요 꺽꺽거리며 그렇게 소리친 운-전사가 시동을 거는 순간 버스가 투웅하고 몸을 떨었다. 간밤의 양희처럼, 버스가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다. 나는 두 팔을 끌어안았다.
악몽을 그림자처럼 진 채 새벽의 어스름 사이로 버스가 달려갔다.
- <여관바리>, 지난
- 2년 전 잘린 내 오른손 검지를 경대 위에서 발견한 시간은 금요일 아침 6시였다.
손가락은 아내의 화장품 사이에 정물처럼 놓여 있었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보는 듯 낯선 기분이었지만, 어린 시절 불장난을 하다 첫째 마디와 둘째 마디 사이에 난 흉터 덕에 첫눈에 내 손가락임을 알아보았다. 아내가 먼저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비명소리와 함께 아침을 맞이하기는 싫었으니까.
- 난 올해 서른넷의 오른손잡이 남자이며, 보안 솔루션 업체의 사업부 실장이다. 손가락이 잘렸다는 사실은 IT 직종의 30대 남자에겐 생각보다 큰 핸디캡이다. 그나마 의지(義指)만으로 일하기가 익숙해진 이후엔 좀 나아졌지만, 내 몸이 아닌 실리콘 덩어리를 부착할 때의 감촉은 몇 년이 지나도 긁기 힘든 곳에 생긴 부스럼처럼 거슬렸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항상 잃어버린 손가락이 아쉬웠다. 다용도실에 처박힌 낚시 도구들을 볼 때면 더했다.
- 튼실한 녀석이었다. 종은 모르겠지만 시커멓고 묵직해 보이는 고기를 사투 끝에 간신히 물가까지 끌고 와 뜰채로 뜨려고 했을 때, 어느 결인지 뜨끔한 아픔과 함께 주저앉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생긴 일이라 한동안 무슨 일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검지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렇게 어떤 물고기인지도 모를 녀석에게 1년 전 뜯어 먹힌 내 손가락이, 경대 위에 놓여 있다.
- 아내의 향수병을 쓰러뜨릴 뻔하며 손가락을 집어 들었다. 이상하게도 이 비논리적인 상황에 대한 의문은 생기지 않았다. 나는 잠이 덜 깨 멍한 눈으로 내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둘째 마디 가운데서 잘려나간 손가락 마디는 뭉툭한 살덩어리처럼 보였다.
'붙을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손가락을 잘린 곳에 가져다 붙였다. 순간 지독한 아픔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참으려 했으나 결국 이빨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경대 위에 손가락이 있고, 갖다 대니 다시 붙어? 그 말을 믿으라고?"
예상한 상황이다. 누구나 이런 얘기를 들으면 똑같이 반응하겠지만, 나 역시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한동안 말싸움을 했다. 아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어디선가 불법이식수술 같은, 뭔가 뒤가 켕기는 짓을 하고 오지 않았나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전날 밤에는 일찍 퇴근해 내내 함께였다가 잠이 들었으니 말이 안 되는 의심이었지만, 아내 딴에는 자신이 모르는 틈에 남편의 신체에 생긴 중요한 변화를 감지조차 못했다는 사실이 섭섭하기도 했을 터다.
- 논리적인 설명이 안 되는 점이 찝찝했지만 일단은 잃어버린 신체를 되찾았다는 사실 자체를 즐기기로 했다. 아내도 결국은 화를 내다가 지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를 일이지만.
- "삐진 척하고 나 놀리려는 것 같다고."
"사랑은 지랄, 놀리긴 뭘 놀려? 그냥 헛소리라니까! 됐으니까 그냥 넘어갑시다! 예?"
"아니, 아니 너 눈빛 보니까 헛소린 아냐. 방금 말했잖아. 믿으려고 애쓰는 중이라고. 그리고 이전에 비슷한 얘길 본 적도 있고."
"뭐?"
예상치 못한 소릴 한다. 비슷한 얘기라니, 누가 이런 말 같지 않은 상황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걸까.
- "누가 블로그에 올린 소설이었는데, 꽤 재밌어서 기억하고 있었거든. 근데 소설 말미에 추신을 보니까 경험담도 섞였다고 하더라. 워낙 황당한 이야기라 어느 부분이 경험담인지 궁금했는데..."
형이 들고만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이제 대충 짐작이 가네."
- 퇴근 후, 집에서 형이 메신저로 링크해 준 블로그를 방문했다. 성실하게 운영되는 블로그는 아니었다. 낚시에 관한 인터넷 기사의 스크랩이나 소소한 단상 등을 적어놓은 포스팅 몇 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예의 소설은 놀라웠다. 주인공의 직업이나 세세한 배경 등은 달랐지만, 낚시터에서의 사건 이후, 집에서 잘린 손가락을 발견하는 등 내게 일어난 일들과 전개가 똑같았다. 소설은 주인공이 식탁 위에서 본 손가락을 잘린 자리에 붙이며 괴로워하는 장면에서 멈췄고, 말미에는 추신이 붙어 있었다.
[갑자기 생각나서 끼적여 본 소설입니다. 일단은 여기서 멈춥니다. 조만간 이어서 써야 할 텐데 뒷부분 전개가 얼른 떠오르질 않네요.]
- "작은아버지 댁은 우리 집이랑 옛날부터 가까이 살아서 저도 종종 따라나섰거든요. 딸만 둘인데, 사촌 누이들은 다들 낚시를 싫어했어요. 작은어머니도 그렇고."
"그래서 조우(釣友) 노릇을 해 준 건가."
"자주는 아니었지만 못 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갔어요. 초등학생 되고 나서부터 그러다가 언제였더라. 중학생 때였는데, 명당을 찾았다 하시더라고요. 산속 소류지인데 주변 경치도 끝내주고, 물도 좋고, 근처 마을 인심도 좋더래요. 거기 위치가 충남...”
"서산 쪽?"
"그렇죠."
역시나 위치가 맞다.
- 낚시를 자주 다니는 사람들은 장거리 운전을 하다 낚시하기 좋은 둠벙이나 소류지 등을 우연히 발견하곤 한다. 지방을 지나가다 내비게이션에 보이거나 하면, 혹시나 명당 아닐까 싶어 잠시 들르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곳 역시, 결혼하기 전 지방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잘못 접어든 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장소였다.
- "소문이 안 돈 게, 아까 말씀드린 이유도 있겠지만... 그런 장소 다 발품 팔아가며 어렵게 알아 가는 데잖아요. 정말 친한 사이 아니면 공유 안 해요. 꾼들이 인터넷 못 쓰는 사람 없는 요즘도 그런데, 하물며 그 때야 오죽하겠어요? 아예 장소를 아는 사람 자체가 많지 않으니까 그런 해괴한 일이 벌어져도 퍼지질 않았죠."
"하긴, 찾기 쉬운 장소는 아니었지."
- <낚시터>, 정세호
- "와, 대단하다."
은해는 시동을 끄고 숨을 한 번 내쉰 뒤, 말했다.
"어머님도 계신데..."
"뭐? 어머님 돌아가셨다 그랬잖아."
관상목으로 둘러싸인 벽돌 길을 지그시 밟으며 은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미는 대답 듣기를 포기하고 집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깎은 돌로 둘러싸인 연못은 쑥색 덩굴이 넘어 들어가 발을 담갔다. 비틀 듯이 올라간 나무줄기에선 금방이라도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 뒤로 솟아 오른 아름드리나무는, 정원을 벗어나려는 듯 담장 위로 줄기를 뻗었다. 은미는 고개를 들어 나무 높이를 가늠하다 은해를 따라 총총 달려 현관문 앞에 섰다.
- 육중해 보이는 현관문 앞에 노인이 둘을 반겼다.
"아가씨 오셨네요. 옆에 계신 미인은 동생인가요?"
"네, 얘는 은미라고 해요. 은미야, 인사해. 집사님이셔."
허허, 노인은 눈가의 주름을 깊게 그리며 들어오라 손짓했다. 은미는 꾸벅 인사하고 운동화를 벗었다. 은해가 벗은 구두 옆에 가지런히 놓은 후, 약간 떨어져 둘의 뒤를 걸었다.
노인은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말했다.
"응접실에서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선생님? 회장님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건가?'
은미는 은해를 따라잡아 눈짓을 보냈으나 별 반응이 없었다. 치, 한 마디 뱉고는 암갈색의 복도 벽을 따라 시선을 이동했다.
- <며느리의 관문>, 장은호
- 석태는 기도실을 나왔다. 욕실로 가서 몸을 씻고 단정하게 머리를 빚었다. 준비해 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섰다. 처음 본 사람을 마주할 때처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구석구석 관찰했다. 살빛은 한층 밝아졌고 눈빛은 생기에 차 있었다. 곧장 두 아들이 잠든 방으로 가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이들이 걷어차 낸 홑이불이 침대 끝자락에 돌돌 말려 있었다. 이부자락을 끌어와 덮어준 뒤 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석태는 무언가에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큰 아들, 지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이마에 멈춰 있던 손은 낮은 콧등을 지나, 살짝 벌어진 입술로 옮겨졌다. 뜨뜻한 입김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잠시 숨을 고르고 빈약한 아래턱을 쓸어내듯 만졌다.
"이제 가자."
- "소름 끼치게 웬 기독교 방송?'
무신론자인 미라는 개척교회 목사로부터 삽화 의뢰를 받은, 3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성경 동화책이었는데 메일로 보내온 원고와 15점의 스케치가 담긴 파일을 살펴본 후 목사의 의뢰를 거절했다. 대가도 만족스럽고 일주일만 매달리면 끝낼 수 있을 만큼 비교적 쉬운 작업이었지만 어린이 도서라기에는 내용도, 삽화도 소름이 쭉 끼칠 정도로 잔혹했다. 어린이들에게 유해하다는 이유로 목사의 의뢰를 거절했지만 그는 몇 차례 메일을 더 보내와, 내용은 수정이 불가능하나 그림은 삽화가의 도안에 따른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게다가 선입금에, 웃돈을 얹어 주겠다며 교회를 방문해 달라고 재차 요구했다.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 라디오 진행자는 소양강 댐 인근 야산에서 발생한 산사태 사고 소식을 전했다. 13명의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가운데 브라이언 애덤스의 <헤븐>이 흘러나왔다. 미라는 시속 100킬로로 달리며 멜로디에 맞춰 흥얼거리다가 문득, 3년 전 이맘때 비슷한 참사가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소양강댐 인근 야산에서 발생한 산사태로 인해 펜션 두 채가 매몰되었고 희생자의 다수가 초등학교 과학체험 자원봉사를 떠났던 대학생들이라 더욱 안타까웠던 사고였다. 기묘한 건 그 사고 때도 희생자가 13명이었다. 확률로 따지자면 제로에 가까운 오싹한 일치였다.
- "이틀이나 지났는데 못 깨어나서 이대로 영영..."
미라는 하, 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사흘이든 열흘이든, 효주를 다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기쁨도 잠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올해가... 2014년 맞지?"
효주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멀쩡하시네. 의사 선생이 사고 충격으로 부분기억상실도 일어날 수 있다고 했는데. 다 기억나는 거지?"
"내가 무슨 사고당했는데?"
"급정거 사고라는데. 짙은 안개 때문이었겠지. 곧장 신고가 들어와서 천만다행이었지 뭐야."
"푸조 운전자는?"
"푸조 운전자? 네 차가 푸조야. 넌 차 안에서 발견됐고, 신고자는 남자애라던데."
"내 차가 푸조라고?"
미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아직도 꿈속인가.
효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차라리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별 볼 일 없는 삽화가인 자신에게 그런 횡재가 일어난 적도, 일어날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 <헤븐>, 우명희
- 편의점 창고 뒤편의 작은 창문 너머로 고양이 울음이 들렸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언제나처럼 오후 여섯 시였다. 쿠키는 고양이 주제에 시간관념이 확실했다. 나는 창고에 들어가 미리 준비한 소시지의 포장을 벗겨 바닥에 내려놓았다. 휘파람을 불자 쿠키가 창문을 타 넘어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으레 그렇듯 녀석은 내 발치에 놓인 소시지부터 야금야금 깨물어 먹었다.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쿠키의 엉덩이에 난 검은 점박이 무늬가 리드미컬하게 씰룩거렸다. 마지막 한 조각까지 남김없이 삼킨 쿠키는 만족스러운 듯 혀로 앞발을 적셔 입과 콧등을 닦았다. 일련의 절차를 마친 뒤에야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야옹' 하고 알은체 했다.
미소를 지으며 쿠키의 머리를 쓰다듬고 새로 전달된 쪽지가 없나 녀석의 목덜미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동그란 구슬이 달린 목걸이에 작게 접힌 메모지가 끼워져 있었다. 찢기지 않도록 조심하며 메모지를 꺼내 펼쳤다.
-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난 한 달간 쿠키를 통해 쪽지로만 연락을 주고받던 사람들과 만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각자 닉네임을 사용했는데, 지니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자는 제안을 했다. 모두 동의하자 오늘은 아예 만날 날짜와 장소까지 정해 버렸다. 나는 메모지에 '저도 찬성이요. [선우]'라고 마지막 댓글을 달았다. 메모지에 적힌 사람들의 닉네임으로 미루어보아 쿠키를 돌보는 사람은 나까지 모두 다섯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쿠키를 만나 돌보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사정이지 않을까 짐작만 할 뿐이다.
- "날 때리겠다는 거야? 지금쯤 경찰도 거의 다 도착했을걸?"
광필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옆에서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그라인더맨은 전직 복서에게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얻어터졌을 것이다.
"놔봐. 저 새끼 죽이고 나 감옥 간다."
"그러든지."
그라인더맨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낡은 소파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의 태연자약한 모습에 섬뜩함을 느꼈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사이코패스가 이런 건가 싶었다. 그는 끔찍한 행위를 통해 사람들을 조롱했을뿐더러 그것이 법률로는 처벌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모두가 힘을 합쳐 녀석을 붙잡았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자 속이 쓰렸다. 우리는 결국 며칠 동안 놈의 손에 놀아난 셈이었다.
- 그때 반쯤 썩은 쿠키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던 순임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쿠키를 죽였나요?"
"겨우 고양이 한 마리라고. 왜들 이렇게 흥분하는지 모르겠네."
순임이 갑자기 품 안에서 빈 주사기를 꺼냈다. 그러곤 능숙한 솜씨로 팔뚝에 바늘을 꽂았다. 금세 주사기 안에 붉은 피가 가득 찼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우리가 당황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때만큼은 그라인더맨도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 순임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병에 걸린 후로 굉장히 외롭게 살았어요.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쿠키를 만났죠. 그때부터 쿠키는 내 전부였고, 자식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내 자식을 죽인 거예요."
눈물을 흘리던 순임은 어느 순간 놀랄 만큼 차분해졌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두려울 게 없답니다. 당신은 쿠키의 턱을 자르고, 무시무시한 폭행을 가해 죽였어요. 그 말 못 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순임은 목이 멘 듯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쿠키가 살아 있었다면... 아니, 적어도 당신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었다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거예요."
-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당황한 그라인더맨이 소리치자 순임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후천성 면역 결핍증을 앓고 있어요. 에이즈(ADIS)라고 들어봤죠? 이제 당신도 나와 같은 처지가 되었답니다."
그 한마디에 지금까지 그라인더맨의 표정에 맴돌던 여유로움은 사라졌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그는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손으로 배를 쥐어짜며 순임의 피를 빼내려고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순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고양이를 찾습니다>, 황태환
- 인간은 먹는 기계다. 먹기 위해 존재하는 거대한 입이다. 인간이 한평생 먹는 음식의 양은 평균 6만 4000킬로그램이며 위장을 채우고 비우는 일을 죽을 때까지 반복한다. 요컨대 4시간마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 36도가 넘는 체내에서 똥이 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 그날 난 다니던 헬스클럽을 3개월 연장했다. 카드 단말기가 16만 원의 명세표를 토해내는 동안 후회와 오기가 고막을 쉴 새 없이 때려댔다. 이번엔 제발 제대로 운동하자. 빠지지 말자. 돈지랄도 정도껏 해야지. 병신! 병신! 나의 애타는 울분이 전파라도 탄 것일까? 소파에서 신문을 뒤적거리던 관장이 카운터 여자에게 한 마디를 던진다.
"우리 회원님, 15일 더 추가해 드려."
- "기막혀. 꿍꿍이는 무슨 꿍꿍이? 걱정도 못 하니?"
미선은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웃긴 농담이라도 되는 것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 진짜 걱정해서 그러는 거야? 속으론 비웃고 있을 텐데? 예전의 홍드럼이 이런 모습으로 변했으니 얼마나 배 아프겠어. 하나라도 더 먹여서 이전처럼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는 거 아냐?"
예리한 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틀렸다. 난 궁금할 뿐이다. 네가 숨기는 게 뭔지. 네 다이어트의 진짜 비결이 뭔지.
- "너 나하고 만나고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먹은 거 알아? 점심도 안 먹고 왔다면서? 오늘만 그런 것도 아냐. 저번에도 그렇고 지지난번 극장 갔을 때도 그랬잖아."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 살아 있잖아! 이렇게 건강하게. 그거면 충분한 거 아냐?"
내가 궁금한 게 바로 그거지만 더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잠시 후 미선은 지나치게 예민하게 굴었던 자신의 행동이 후회스러웠는지 가는 길에 맥주를 사겠다고 했다. 난 실소를 금치 못했다. 결국 나 혼자 먹고 마실 게 뻔했기 때문이다.
- 아니나 다를까 내가 맥주를 들이켜고 안주에 포크질을 하는 동안 미선은 음식엔 손도 대지 않고 떠들어대기만 했다. 펜팔 하던 남자애에게 몸무게를 속여 약속장소까지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온 일, 장례식장에서 잡친 기분을 풀러 백화점에 갔다가 옷을 못 입게 한 점원과 싸운 일, 변신에 성공하고 처음 사회에 나갔는데 사장이 변태라 일주일 만에 그만둔 이야기가 지루하게 이어졌다.
-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 36도가 넘는 체내에서 똥이 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똥이 되지 못한 토사물의 반란이라니 우습기 짝이 없지만 결국 놈들은 본능대로 행동한 것뿐이다. 어떤 책에서 본 구절처럼 모든 동물적 생명의 기본은 그 흉포한, 무엇이든 잘 먹고 잘 삼키는 큰 입이니 말이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알 수가 없다. 다만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음식섭취에 있어 주의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어느 날, 당신이 버린 토사물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 <구토>, 김유라
-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고교 동창회에서 술을 마시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는 머릿속이 온통 깜깜하다. 말 그대로 블랙아웃. 벌써 새벽 2시가 넘었다. 그때가 밤 11시쯤이었으니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건 아니다. 서울 어디쯤이겠지. 주변은 토요일 밤인데도 사람 하나 없이 한산하다. 보이는 거라고는 불이 꺼진 주택과 문이 닫힌 상가들뿐이다. 곳곳에 깔린 어둠은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 모처럼 만의 동창회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한 자리가 되고 말았다.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영식이 새끼가 자꾸 나를 걸고넘어졌기 때문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내가 제일 잘 나갔다는 둥 몇 번이나 나한테 이유 없이 맞았다는 둥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여댔다. 미친 새끼! 어찌 보면 치욕스러운 이야기일 텐데도 놈의 얼굴은 우월감으로 가득했다.
- 고등학교 시절 영식이 높은 일명 내 '꼬붕'이었다.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지만 말이다. 난 벌이도 시원찮았고 번듯한 대기업에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친구들에게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회사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실은 직원이 열 명인 중소기업에 불과했다.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놈의 빈정거림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모멸감에 쓴 소주만 연거푸 들이켰다.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했다. 그게 술자리에서의 마지막 기억이다. 한심하게도 이제 와서야 분통이 터졌다.
- 졸다가 깨서 그런지 온몸으로 한기가 돌았다. 목도 타고 속은 부글부글 끓어 괴로웠다. 너무 마셨나 보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헛구역질도 계속 나왔다. 차라리 게워내면 속이라도 편하겠는데 아무리 입속에 손가락을 넣어도 토악질은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기분만 잡치는 동창회에는 나가지 말걸 후회하는 와중에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혹시 강도나 살인범이라도 만나는 것 아냐? 몸이 약해지니 저절로 신경이 곤두섰다. 이 빌어먹을 동네는 왜 이리 조용한 거야? 얼마 전 뉴스에서 봤던 연쇄 살인 사건도 떠올라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피해자들도 이렇게 어두운 골목에서 변을 당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두통과 복통으로 끙끙대며 걸음을 재촉했다. 찬바람이 불어와 몸을 움츠렸다. 냉기는 온몸을 훑은 후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빨리 어떻게든 하자. 너무 춥다. 덜덜 떨며 어둠 속에서 헤매다 밝은 빛을 발견했다. 24시간 내내 문이 열린 개인 편의점이었다.
- 몸도 충분히 녹이고 그 사이 속도 가라앉았다. 우쭐대며 편의점을 나서다가 이대로 가기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우위에 선다는 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흔치 않은 기회다. 참지 못하고 계산대 앞으로 와 사장에게 말했다.
"가기 전에 충고 한마디 할까? 나, 이 동네 유지야. 시내 편의점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동네 편의점은 이런 식으로 장사하면 안 되지. 왜 시골 가면 텃세라는 게 있잖아? 동네 편의점도 그 부분을 무시 못 한다니까. 나에게 밉보이면 여기서 장사 못 한다고. 알아?"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만족하며 등을 돌렸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또 마누라가 한바탕 바가지를 긁어대겠구먼. 택시는 어디서 잡는담?
- "그런데 선생님, 혹시 편의점 CCTV에 대해 아세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가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사장은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실제로는 말이에요. 개인 편의점은 CCTV 잘 안 돌려요. 또 돌린다 해도 용량 때문에 금방금방 지우고요. 선생님 바로 위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 보이시죠? 저거 가짜예요. 그저 구색일 뿐이죠."
그래서 뭐 어쩌라고? 계산대 위의 모형 감시 카메라를 살피다가 천장 구석에 설치된 다른 카메라로 눈길을 돌렸다. 이상했다. 모두 모형 감시 카메라였다.
- "우리 편의점은 CCTV가 작동되지 않아요."
말을 마친 사장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물기를 머금은 두 눈이 반짝거렸다. 슬쩍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이 위화감은 대체 뭘까? 그러고 보니 이곳은 보통의 편의점과 달랐다. 상품이 진열되지 않은 텅 빈 매대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가격표나 행사 알림판도 붙어 있지 않다. 매출에 별 관심 없는 내부와는 달리 출입문과 유리창에는 광고지가 빼곡히 부착되어 밖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광고지를 붙일수록 지원금을 많이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 사장이 내 앞으로 걸어왔다. 이유를 알 수 없어 긴장했다. 눈길도 주지 않고 나를 지나쳐 출입문으로 향했다. 위로 손을 뻗어 문의 잠금장치를 돌리고는 계산대에 들어간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왜 출입문을 잠근 거지?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뭔가 잘못됐다. 계산대에 선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왜일까, 이 씨발놈아?"
갑자기 사장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자 당황했다. 속된 말로 똥줄 탄다고 하지 않는가. 습한 기운이 항문에서 시작해 엉덩이골을 뜨겁게 훑으며 위로 올라왔다. 저렇게 욕을 내뱉는 건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거였다. 빨리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 아무 거리낌 없는 저 당당함이 두려웠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
- 안심이 되기는커녕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건 더 큰 고통의 시작이었다. 사장이든 점원이든 하나같이 미친 새끼였다. 환청을 동반한 어둠은 놈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목이 바짝 타들어갔다. 마른침을 삼켰다.
문이 열리고 불이 켜졌다. 문을 닫은 사장이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놈의 이중적인 모습에 겁부터 났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이코라는 걸 다시금 상기시켰다. 내 앞으로 걸어온 사장이 대뜸 말했다.
"너, 편의점이 존나 만만하지?"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당황했다.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아, 아, 아니에요."
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뭐가 아니야, 씨발아 만만하잖아? 만만하니까 네가 그런 거 아니냐고?"
- "뭐, 널 다그치려는 건 아니고, 나도 네가 만만하거든. 하여튼, 난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많이 다니고 시체 처리까지 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이거야. 근데 찾기가 어디 쉽나? 그렇게 몇 년을 삽질만 하다가 보니 편의점이 딱 맞아떨어지더라는 거지. 만만하잖아? 누구나 쉽게 들어오고, 시체를 처리할 작업장은 없었지만 그거야 만들면 되니까."
놈이 코를 벌름거리며 피식 웃었다.
"누가 편의점에서 사람을 잡아 죽인다고 생각하겠냐? 더 웃긴 게 뭔지 아냐? 어제도 형사 하나가 왔다 갔어. 며칠 전에 동네 사람이 실종됐다면서 나에게 수상한 사람을 보면 연락해 달라더라. 실종됐다던 놈은 여기에 갇혀 온갖 고문을 당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웃음을 주체하지 못해 목을 뒤로 꺾어 한바탕 웃고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괜한 기대 품지 마라. 누군가 구해줄 것 같아? 네가 여기 있는 거 아무도 몰라. 위치 추적? 네 핸드폰은 이미 이곳에 없어. 어떤 식으로든 손님에게 도움을 청해도 상관없어. 그 사람이 도움이 될까? 여차하면 붙잡으면 되는데, 우린 한 명만 있으면 돼. 다른 놈이 여기로 들어오면 넌 아까 그 남자처럼 되는 거고, 너 때문에 잡힌 놈 인생도 끝장나는 거야. 그럼 넌 뭘 해야 할까?"
- 가슴이 터져 버릴 듯 쿵쾅거리고 숨이 턱 막혔다. 놈의 말대로라면 여기에서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헤어날 수 없는 절망으로 온몸을 떨었다.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까지 왔는지 몰라 흐느꼈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괴로워하자 놈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너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으면 돼."
- 이런 상태로는 빠져나가는 게 불가능할뿐더러, 그런 시도를 하다 발각되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두려웠다. 지금의 나는 놈들이 어떤 짓을 하든 고스란히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놈들에게 잘 보여야 했다. 반항이나 탈출은 상대방을 실망시키는 행위였다. 내 잘못인 거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부터 굴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이라도 난 것처럼 온몸이 따끔거렸다. 너무 창피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제기랄!
- 며칠이 지났다. 음식 진열대의 포장된 과일에 날벌레가 붙어 있다. 사람의 손이 불쑥 나타나 날벌레를 향하나 싶더니 과일을 집어 들었다. 날벌레는 과일이 요동치며 위로 솟자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과일로 날아왔던 날벌레는 아무리 입을 들이밀어도 과일을 먹을 수 없었다. 이상한 말이다. 분명히 눈앞에 먹이가 있건만 포장 비닐에 막혀 입도 대지 못했다.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모든 과일이 다 마찬가지다. 다른 먹이를 찾기 위해 편의점 안을 돌아다녔지만 먹을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었다. 하나같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신을 가로막았다. 거대한 문이다. 모든 힘을 소진한 날벌레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다시 과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과일에 꼭 들러붙은 채 굶어 죽었다.
- 차가운 바닥에 버려진 날벌레는 아무런 미동이 없다. 사람들이 물건을 고르며 그 앞을 무심히 지나쳤다. 그들은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이 편의점은 소비의 배출구일 뿐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내어줄 수 없는 욕망의 발현지였다.
- <파리지옥>, 엄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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