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출판 : 북로드
출간 : 26.03.27
한국어로 발표된 <집 시리즈>를 모두 다 읽었다.
미발표작인 <재원(災園)>은 원래는 <집 시리즈>였으나 개고 하면서 상당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고 하는데- 전후 작품을 다 읽어보고 비교해보고 싶지만 아쉽게 되었다. (북로드 출판사 화이팅 할 수 있다 북로드)
<괴담의 숲>, 구판 <마가>. 원제는 <魔邸>다.
이 작품만 제목을 바꾼 이유가 궁금하다. <흉가>와 <화가>는 이전과 같은 제목으로 재출간했고, <집 시리즈>로 묶여 있으니 <마가> 쪽이 통일성 있는 제목일 텐데. 의도적으로 분리하고 싶었거나, <괴담의 숲> 쪽이 더 대중적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이번에 읽을 때는 <화가> - <괴담의 숲> - <흉가> 순으로 읽었는데, 만족스러웠다.
개인적으로는 각 작품의 결말도 같은 순서로, <흉가>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집 시리즈>는 여운이 남는 결말이 특징인데, 이런 찝찝한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호평일 것이다.
다만 딱 떨어지는 결론이나 꽉 닫힌 결말을 좋아하는 분들께는 조금 아쉬울 듯.
나는 호 쪽인데, 분위기나 전개의 긴박감 면에서도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물론 작품의 최종 인상은 결말에서 완성되니 결말에 대한 호불호가 가장 큰 부분이겠다)
<괴담의 집> 또한 어린 남자아이가 새로운 집에 이사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다.
다만 <화가>나 <흉가>와 다른 점이라면, <괴담의 집>은 원 가족이 다시금 구성되면서 일차적으로 예전 집을 떠난 소년이, 삼촌의 별장이라는 새로운 환경으로 한 번 더 떠난다는 점. 그리고 그 집 근처에는 으스스한 숲이 있다.
미쓰다 신조의 작품을 연이어 읽다 보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설정들이 있다.
구불구불한 길, 영산,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사당과 의례.
어린 소년, 갑자기 찾아든 적막, 끝없이 반복되는 골목길 또는 어두운 숲.
어쩌면 아주 강렬한 체험(혹은 채담)이 그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읽는 입장에서는 '앗 이거 그 이야기네' 싶기도 하지만, 자기 복제라는 생각까지는 안 들기 때문에 매번 즐겁게 읽는 편이다.
가장 재미있는 것부터 읽는 것이 더 좋을지, 그 반대가 좋을지에 따라
그리고 개인의 취향과 선호에 따라
<집 시리즈>의 읽는 순서는 크게 상관없을 듯하다.
(나는 끝까지 읽기로 했다면 마지막이 가장 재미있는 쪽을 선호하지만, 어떤 작품이 가장 재미있을지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를 테니까)
사족.
예전에 어린 소년이 할머니 집에 맡겨지는 이야기를 읽었었는데... 일본 작가의 책이었는데 작가도 책 제목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린 소년이 가미가쿠시를 피하기 위해 할머니에게 맡겨진다. 소년은 본명이 아닌 이름(토리? 스즈메? 새 이름이었다)으로 불리며 할머니를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산중의 집은 북방 계열로 지어진 집인데, 정작 위치한 지역은 눈이 많이 오는 곳은 아니다. 절대로 울타리를 넘어서는 안된다고 했는데 -붉은 열매가 맺히는 나무로 산울타리를 쳤다- 산에서 내려온 또래 소년의 꾀임에 넘어가고 만 소년은...
모기장 주변을 무릎걸음으로 빙빙 도는 할머니가 자꾸 떠오른다.
두 이야기가 섞인 것 같기도 하고.
찾아서 다시 읽고 싶은데, 잊어버릴 것만 같아 기록해 둔다.
사족2.
악. 찾았다. 미쓰다 신조의 <우중괴담> 중 <은거의 집>이었다. <우중괴담>은 리뷰도 썼으니 건너뛰려 했는데 아무래도 다시 읽어야겠다. 이런...!
- 유마는 성씨가 '세토 瀬戸'에서 '세토 世渡'로 바뀌었을 때 난생처음 이사를 했고 학교를 옮겼다.
- "잘된 일 아니냐. 발음은 똑같지만, 우리 성씨에는 '처세'라는 뜻도 있거든. 너도 장차 처세에 능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결혼식 피로연장에 딸린 친족 대기실에서 처음 만난 삼촌 도모노리는 이렇게 말하며 껄껄 웃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유마에게는 잘 와닿지 않았다. 열한 살 어린아이에게는 적절하지 않은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유마는 자신과 같은 간사이 출신의 이 삼촌이 금방 마음에 들었다. 새아빠인 세토 도모히데가 좋게 말하면 성실하고 나쁘게 말하면 고지식한 인물이라, 성격이 딴판인 삼촌에게 쉽게 친근감을 느낀 모양이다. 삼십 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언행 역시 좋은 인상을 주었다. 새아빠와 새 삼촌은 아버지는 같았지만 어머니가 달랐다. 그래서 새아빠는 간토 지방에서, 삼촌은 간사이 지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무엇 때문인지 이런 관계도 유마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말이다, 유마. 저래봬도 형님은 뒤를 이을 자식이 생겨서 아주 기뻐하고 있어."
삼촌은 유마가 자기만 잘 따르자 이건 좀 곤란하다고 생각했는지 세타가야에 있는 형님 집에 얼굴을 비칠 때마다 새아빠를 칭찬했다.
"네 아버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종합상사의 임원이고, 차기 사장으로 가장 유력한..."
하지만 새아빠의 회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유마는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마음이 전해졌는지 삼촌은 간단하게 정리해 주었다.
"요컨대 전 세계에 다양한 물건을 파는 회사의 높은 사람이야."
- 유마의 엄마인 유카가 도모히데와 재혼했을 때 유마는 초등학교 6학년으로 올라가기 직전의 봄방학을 즐기던 참이었다. 유마가 간사이 지방에서만 살다가 도쿄의 초등학교로 전학하게 되었으니 새 학교에서 새 학년을 맞이할 수 있도록 엄마가 배려한 듯하다. 이렇게 엄마가 재혼하자 유마의 생활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태어나고 자랐던 간사이 지방을 벗어나 생전 가본 적 없는 도쿄로 이주했다. 꾀죄죄한 방 두 칸짜리 연립주택에서 '저택'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세타가야의 고급 주택가로 이사했다. 사이좋은 친구들과 헤어져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초등학교로 전학하게 됐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새아빠가 생겼다는 점이다.
- 유마의 친아버지인 세토 마사오 瀬戸 眞大는 필명이 '도세 다이마 登勢 對馬'인 작가였다. 성씨 '세토'의 앞뒤 순서를 바꿔 '도세'라고 쓰고 발음이 같은 다른 한자로 바꾸었다. 이름은 '마사오'를 '마타이'라고 읽은 뒤에 역시 앞뒤 순서를 바꾸어 '다이마'라고 쓰고 발음이 같은 다른 한자로 바꾸었다. 유마는 엄마에게 이런 설명을 들었더랬다. 왜 그렇게 귀찮고 복잡한 짓을 했을까, 솔직히 이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버지가 순문학 작가이기에 왠지 납득이 되었다. 다만 당시나 지금이나 순문학이 무엇인지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요컨대 납득했다고는 해도 뭐 그렇겠거니 하며 대충 넘어간 수준이다. 그래도 의문을 품지 않은 이유는 필명에서 풍기는 성가시고 복잡한 느낌이 아버지의 이미지와 고스란히 겹쳤기 때문일 것이다.
-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서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 유마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키보드를 두드리며 소설을 쓸 때보다 그렇게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잘각잘각,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가 나면 어린아이라도 아버지가 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아버지의 두 손이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유마는 저도 모르게 말을 걸다가 야단을 맞곤 했다.
"아빠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때는 조용히 해."
그렇지만 아버지는 컴퓨터 책상을 벗어나면 놀아주는 게 아니라 책을 읽었다. 그래서 말을 걸면 이번에는 "책을 읽고 있을 때 말을 거는 녀석이 어디 있어"라고 혼을 냈다. 심지어 아무일 안 할 때도 "소설을 구상하고 있다", "한창 생각하는 중이야"라고 말해서 유마는 아버지와 오순도순 대화한 기억이 거의 없다.
- 한데 오랫동안 줄곧 이상하게 생각한 일은 아버지는 나름대로 소설가임에도 집에는 도세 다이마의 책이 아주 적었다는 것이다. 데뷔 작품집인 <생사규묵>을 비롯해 세 권 정도밖에 없었을 것이다.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더라도, 책으로 묶어 내기가 쉽지는 않거든."
처음 엄마의 설명을 들었을 때는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이내 묘한 사실을 깨달았다. 책으로 만들지는 않더라도 출판사에서 작품이 실린 잡지를 보내주지 않을까? 실제로 자신의 소설이 실린 문예지가 도착하면 아버지는 몹시 좋아했다.
- "이제 우리가 가는 하쿠쇼라는 곳은..."
차 안에서 두 사람은 대부분 별장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삼촌 나름대로 배려하는 모양이었다.
"시자쿠 산지의 아라레가다케 기슭에 있어. 메이지 시대 중반쯤에 개발된 꽤 유서 깊은 곳이지. 다만 당시에는 화족의 별장들만 있어서 서민들은 얼씬도 안 했지."
"화족?"
"유럽에서 말하는 귀족 같은 거야."
해외 미스터리 소설에 영국 귀족의 성을 무대로 한 작품이 있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유마는 새삼스레 깜짝 놀랐다.
- "우와, 일본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구나."
"그러니까 하쿠쇼는 원래 화족들의 별장지였다는 말씀. 그런데 쇼와 시대에 들어서면서 재벌들의 별장이 세워지기 시작했어. 아, 재벌이란 엄청 돈이 많은 집안을 말해."
너무나 성의 없는 설명이었지만, 유마도 특별히 딴죽을 걸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자 자연스레 화족들의 별장이 있는 데는 가미하쿠쇼, 재벌들이 별장을 세운 데는 시모하쿠쇼라고 구별해서 부르게 되었어."
"구별이 아니라 차별 아니야?"
유마의 소박한 지적에 삼촌이 감탄한 듯이 말했다.
"너, 꽤나 예리하구나! 당시 화족들에게는 틀림없이 그런 차별 의식이 있었겠지."
- "어허, 좀 기다려봐. 하쿠쇼에는 가미와 시모 말고도, '오쿠하쿠쇼'란데가 있어. 가미하쿠쇼보다 더 깊은 데지. 거기에 별장을 처음으로 세운 이는 시자쿠 신사의 신관이었어. 신관이란 절에 있는 스님 같은 사람이야."
삼촌은 여전히 성의 없이 설명했다.
"신관은 아라레가다케산허리에 '간베키장'이라는 별장을 세웠어. 이것을 포함해서 오쿠하쿠쇼에는 별장이 세 채 있는데, 그중 하나가 지금 우리 ... "
- "그런데도 삼촌만 갑자기 사라졌다..."
"그랬나 싶었는데 행방불명된 아이를 데리고 훌쩍 나타난거라고. 엄청 수상한 상황이잖아."
"구사마 씨는 어디 있었는데?"
"수색대 사람들하고 같이 있었어. 그래서 나와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시를 떠올렸는지, 다시 삼촌이 먼 데 시선을 두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관리인인 요시마타에게 물어봤어. 분명히 우리에게 하쿠쇼 일대의 지리를 알려주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고무로 저택 뒤편에 있는 숲의 지리는 전혀 가르쳐주지 않았거든. 어째서 요시마타는 그 숲을 쏙 빼놓은 걸까? 거길 들어가면 안 된다고 무언의 충고를 해준 게 아닐까? 그 양반이 넌지시 주의를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지."
- "관리인은 뭐라고 했어?”
"응. 처음에는 말하기를 꺼리며 무슨 질문을 해도 입을 다물었어. 아르바이트가 끝나기 전날에 겨우 입을 열더구만. 오쿠하쿠쇼의 깊은 숲 가운데 고무로 저택 뒤편의 숲은 '사사숲'이라 불린다고 말이야."
"사사숲? 무슨 뜻이야?"
"오쿠하쿠쇼에서 옛 목재 운송로를 따라가다 보면 '가가구시'라는 지역이 나와."
삼촌은 한자를 풀어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곳에는 마을이 있는데, 옛날에 아이들이 '가미카쿠시(어린아이가 갑자기 행방불명되는 일로, 옛날에는 마신의 소행으로 여겼다-옮긴이)', 요컨대 행방불명되는 일이 꽤나 잦았대. 그래서 가가구시 마을이 아니라 가미카쿠시 마을이라고 불렸다지."
"가미카쿠시 마을..."
소리 내어 중얼거리기만 해도 어쩐지 나까지 행방불명될 것처럼 여겨져 무서웠다.
- "요시마타의 설명이 좀 어려워서 나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아마도 '가가구시'라는 말은 여러 마리의 뱀이라는 뜻인가 봐."
"왜?"
삼촌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묻지 말라니깐. 내 기억으로는 한자 발음하고 뜻이 뱀을 가리킨다나, 뭐 그런 얘길 했었어."
"사사숲의 '사'가 뱀이란 뜻이라고?"
"그런 모양이더라고."
요컨대 뱀 사 蛇자가 반복되어 '사사숲'이다. '사'라는 한자 표기를 상상만 해도 유마는 절로 혐오감에 휩싸였다.
- 유마가 '여기는 아닌, 어딘가 다른 세계'에 처음 들어간 때는 유치원에 다니기 전이었다. 그렇다고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막연히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그날 아버지는 담배를 사러 나갔다. 소설 쓰기가 잘 안 되면 아버지는 자주 담배를 피웠다. 유마는 담배 연기도 냄새도 싫었지만, 담배를 입에 물고 생각에 잠긴 아버지 얼굴은 조금 멋지다고 생각했다. 다만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가 느껴져서 몰래 훔쳐볼 수밖에 없었다. 유마가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면 아버지는 대뜸 '정신이 산만해진다'라면서 화를 냈다.
어느 가을날 저녁이었던 듯하다. 아직 친구가 없었던가? 유마가 연립주택 앞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집에서 아버지가 나왔다. 유마를 흘끗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딘가로 ...
- 그런데 이내 주변의 길거리가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담배 가게까지 가본 적이 있기는 해도 가는 길까지 자세히 기억하진 못한다. 이런 환경에 어린 유마는 흥분을 억누를 수 없었지만 동시에 조금 무섭기도 했다. 혼자서도 돌아올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여전했지만, 무슨 일이 생겨 아버지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아버지의 낯익은 뒷모습이 생명줄처럼 느껴져 필사적으로 따라갔다. 그런데도 아버지한테서 시선을 떼고 말았으니, 어디선가 들려온 남자의 과장된 대사가 너무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림 연극이라도 진행하는 걸까?
- "남자는 저녁이 되자 마을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어딘가로 데려간 것입니다. 마을 아이들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좁고 어두운 골목길이 보였다. 앞쪽 오른편 공터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남자의 매혹적인 목소리에 섞여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물론 유마가 '그림 연극'이 무엇인지 알 리는 없었다. 다만 왠지 모르게 재미있어 보이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고 아이들이 듣고 있다고 막연히 추측했을 뿐이다.
- 흘끗 아버지의 등을 보고 나서 유마는 골목길에 발을 들였다. 잠깐 엿보다가 바로 아버지를 뒤따라갈 생각이었다. 골목길을 몇 걸음 걸어가는데 갑자기 오한이 느껴졌다. 그늘이 진 탓이겠지만, 앞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묘하게 싸늘했다. 게다가 이상한 냄새도 났다. 유마는 일단 발을 멈췄다. 돌아가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 앞의 공터에서 들리는 남자의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았다. 똑똑히 들리지 않는 '무슨무슨 남자'라는 괴인의 이름도 꼭 듣고 싶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핑계를 대면서 유마는 골목길을 나아갔다. 이윽고 잡초가 나 있는 공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자전거가 세워져 있고 짐칸에는 작은 그림 연극 장치가 놓여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지만 유마는 곧바로 구조를 이해했다. 저 장치 너머로 그림을 보여주면서 이야기하는 거구나. 그런데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남자가 어디에도 없었다.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아이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사람 한 명 없는 공터에, 그림 연극 장치가 놓인 자전거만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 유마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골목길을 되짚어 서둘러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두세 걸음 걷다가 돌연 멈춰 서버렸다. 유마의 눈앞에는 골목길이 끝없이 길게 뻗어 있었다. 이렇게 길리가 없는데,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저 멀리 이어져 있었다. 이 골목에 들어오기 전에 아버지의 등을 보면서 걸었던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골목길을 가로지르는 길 따윈 있지도 않고 그저 똑바로, 골목길이 끝없이 뻗어 있었다. 양쪽에는 집들이 있었다. 두 번 다시 아버지와도 엄마와도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의 형체가 커다랗게 한 걸음 내딛자 더는 도망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황급히 일어서서 비틀비틀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쫓긴다는 두려움, 사냥당한다는 전율, 잡아먹힌다는 공포로 인해.
- 얼마 달리지 못했는데 참으로 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뭔가 변해가고 있었다. 그런 기미가 느껴졌다.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몰라.' 어떤 변화의 정체를 찾는 것처럼, 유마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윽! 주위에 있는 집들의 모든 창문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의 형체가 유마의 눈에 들어왔다. 2층 창문뿐만이 아니라 1층 창문, 화장실이나 욕실 창문, 심지어 현관문 유리창 너머에서도 유마를 엿보는 사람의 형체가 있었다. 마치 골목길에 길을 잃고 들어온 아이가 밋밋하고 두 팔이 긴 새까만 그림자에게 붙잡혀 머리부터 잡아먹히는 꼴을 구경하는 것처럼. 유마의 정신은 거의 꺾여가고 있었다. 창문에 비치는 형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어렴풋이나마 눈치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엿보기만 하고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 '끝.' 그림책에서 이야기 맨 마지막에 나오는 글자가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끝. 인간이 끝나버리면 대체 어떻게 될까. 얼핏 스친 생각만으로도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혔다.
- 놈이 이제 거의 다 왔다. 유마는 덤불 안의 구멍에서 언제라도 도망칠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야옹.
그때, 등 뒤에서 흐릿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자기도 모르게 돌아보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갈색 줄무늬 길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너, 언제 왔어?"
유마가 고양이를 안아들자마자 술렁거리며 주위가 시끄러워지더니 키잉 하고 양쪽 귀가 울렸다. 바로 운동장에서 수많은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혹시? 서둘러 덤불에서 나와 보니, 몇 개 반 학생들이 체육 수업을 하고 있는 광경이 두 눈에 들어왔다. '아- 돌아왔구나.' 유마는 고양이를 안은 채로 비틀거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고양이는 야옹거리며 잠시 울다가 이내 어디론가 가버렸다.
- 이윽고 유마를 발견한 교사가 "왜 그러니? 이런 데서 뭘 하고 있어?"라고 말하며 다가왔다. 하지만 유마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교사에게 안겨서 보건실에 와 있었다. 또다시 몸에서 열이 나고 있었다. 엄마가 학교로 데리러 왔고 유마는 사흘간 학교에 가지 못했다.
- 이 두 번의 무서운 체험을 떠올린 이유는 물론 삼촌의 고약한 장난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터였다.
- 천천히 부드럽게, 뭔가를 호소하려는 듯이 팔랑팔랑 손바닥을 흔들고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끄덕 움직였다. 그의 완만한 움직임을 보는 동안, 마치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유마는 남자가 부르는 대로 정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다가가서는 안된다고 마음이 경고를 보내는데도 의지와는 반대로 발이 먼저 움직였다.
- 무슨 일이 있으면 사토미 씨를 부르면 돼. 이렇게 생각했지만 여차할 때 과연 큰 소리를 지를 수 있을까? 아니, 전혀 자신이 없다. 그런데도 왜 발이 멈추지 않는 걸까. 저 사람 말을 들어야 해, 이런 생각이 마음속 어딘가에 숨어 있는 걸까. 혹은 유마의 무의식이 계속 충고하고 있는 걸까.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남자 앞에 서 있었다. 생울타리 틈새로는 길가에 세워진 경트럭이 보였다. 상대와 유마의 거리는 1미터도 안 됐다.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 생울타리가 있어서 덜 불안했다. 그렇지만 유마는 당장에라도 뒤돌아서 도망치고 싶었다. 실제로 발길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네가 세토 군의 아들이냐?"
이 한마디가 유마를 멈춰 세웠다.
"아, 아뇨, 아니에요. 조카예요."
잠시 망설였지만, 이렇게 대답해주면 문제는 안 될 것이다.
- "어린아이가 발견되지 않더라도 당시 상황을 종합해서 원인을 추측하기가 어렵지 않은 경우가 있지. 예를 들면 큰비가 와서 강물이 넘쳤는데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아이가 목격됐다면 실수로 강물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고. 또 아이가 발견되지 않더라도 강물에 휩쓸려 갔다고 쉽게 추론할 수 있거든."
유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요시마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이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발견되지 않아서 왜 사라졌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어. 옛날 사람들은 그걸 신이 감추었다고 생각해서 '가미카쿠시'라고 한 거야. 아이가 없어졌다, 이런 무시무시한 사태가 발생했는데 상황이 전혀 설명되지 않아. 인간은 영문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주치면 어떻게든 이유를 붙이려고 해. 하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을 경우에는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힘이 작용했다고 생각하지. 그게 다가 아니야. 사람은 안심하고 살고 싶거든. 수수께끼인 상태로 방치된다? 세상에 이보다 무서운 일은 없으니까. 물론 가미카쿠시임을 인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야. 그래도 '가미카쿠시였다'라고 납득할 필요가 있어. 이해가 되니?"
"네, 대강은요."
그러자 요시마타는 갑자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면서 말했다.
"그런데 아이가 발견되지 않아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 "
- 이 집이란 물론 고무로 저택을 말한다.
"그러다 나하고 마주치면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래 봤자 별장지나 마을 이야기이고, 아니면 날씨 이야기 정도였을까."
요시마타는 일단 말을 끊고서 어인 일인지 의미심장하게 숲쪽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행방불명된 히사시가 발견된 뒤에 내 기억으로는 두 번인가 고무로 도쿠야 씨와 만났어. 이 집을 세토 군에게 넘긴다는 얘기도 그때 들었지. 다만 만날 때마다 고무로 씨는 이상한 이야기를 했어."
"무슨 얘기를요?"
"숲에서 세토 군이 발견한 아이는 히사시가 아니라는 기분이 든다'고 하더구나."
"네?"
무슨뜻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유마는 당황했다.
- "'체인질링' 같네."
가만히 유마가 중얼거리자 요시마타는 몹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무슨 소리지?"
"유럽의 옛날이야기 중에 요정이 인간 아이를 납치하는 얘기가 있어요. 납치한 아이 대신 아이와 쏙 빼닮은 요정의 아이를 놓고 간대요."
"호오."
"하지만 요정 아이는 인간 아이보다 머리가 좋아서 곧 들키게 돼요."
"아주 비슷하구나."
요시마타는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고무로 도쿠야 씨가 이런 말도 했지. '돌아온 히사시가 ... '"
- 유마는 알아차리지 못한 척하며 사토미 쪽을 보았다.
"좋아, 나도 해볼까."
"도모노리 씨는 별 도움이 안 되잖아."
"뭐라고요?"
사토미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삼촌의 모습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수상쩍은 구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마를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조금 전에 내가 잘못 본 걸까. 독서에 열중한 나머지 백일몽이라도 꾼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자고 있던 사람이 유마라면 잠이 덜 깼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유마는 깨어 있었다. 잠들어 있었을 텐데도 두 눈을 뜨고 있던 쪽은 삼촌이다. 삼촌은 나와 눈이 맞은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거야. 그랬는데 없었던 일로 치부하고 넘어가려 하는 걸까. 켕기기 때문일까. 애초에 삼촌은 어째서 그런 시선으로 유마를 본 걸까.
- 셋이 함께 식당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유마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사토미 씨를 거들어줄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방해만 되었다. 삼촌이 놀려서 얼굴이 굳을 뻔했지만, 자연스럽게 웃는 표정을 지으며 받아쳤다. 삼촌에게 들키지 말아야 한다. 논리가 아니라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삼촌을 방심하게 만들어놓고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없는가를 살펴야 한다. 방법은 이것뿐이다.
- 행방불명됐던 고무로 히사시는 무사히 돌아왔다. 그동안 겪은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심신이 다 온전해 보였다. 다만 할아버지인 고무로 도쿠야는 가미하쿠쇼의 별장 관리인인 요시마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숲에서 세토 군이 발견한 것은 히사시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고. 히사시의 어머니도 같은 의심을 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할아버지도 어머니도, 돌아온 아이를 고무로 히사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유마는 유럽의 '체인질링' 이야기를 연상했다. 나라와 시대는 달라도 어린아이가 겪게 되는 괴이쩍은 현상이라는 데 생각이 미쳐 몸서리를 쳤다. 한데 그것이 어른에게도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사사 숲에 삼촌이 들어갔는데 나와 보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응접실 소파에서 자는 척하면서 몰래 유마를 바라본 삼촌은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났는지를 가늠해 본 게 아닐까. 정말?
유마는 이런 사실을 납득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응접실에서 들려오는 오싹한 혼잣말에 귀를 기울일수록 저 사람은 삼촌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가설을 결정적으로 믿게 된 것은 삼촌의 혼잣말 중에서 새아빠나 엄마, 유마 자신의 이름이 또렷하게 나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저것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연습을 하고 있어.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다면, 틀림없이 유마의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무서운 것이리라.
- 도망쳐야 해. 이 자리에서, 아니면 이 집에서? 실은 유마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냥 여기에 있으면 목숨이 위태로워질지도 모른다고, 본능이 필사적으로 경고하고 있었다. 응접실 문 앞에서 살며시 벗어났다. 우선 지금은 침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계단까지 가서 첫째 단에 발을 얹으려고 하는데 몸이 굳었다. 2층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계단을 내려왔다. 사토미 씨가 틀림없을 것이다. 화장실에 가려는 걸까? 아니면 삼촌에게 볼 일이 있는 걸까. 사실 어느 쪽이라 해도 사토미 씨에게는 들켜도 상관없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다고 말하면 되니까. 유마는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다가 딱 발을 멈췄다. 사토미 씨가 이미 저것의 동료라면...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떠올랐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데 사토미 씨를 의심하는 거냐며 자신을 다그쳤지만, 곧바로 안 좋은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내가 침실에 올라온 뒤에 사토미 씨는 저것과 응접실에 단둘이 있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까. 사토미 씨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저것에게 질문을 했다. 그리하여 저것에 의해 비슷하면서도 다른 존재로 변해버렸다.
이런 생각에 빠졌지만 유마가 오래 멈춰 서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순간, 숨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계단에서 벗어났다.
- 삼촌이 고무로 저택에 돌아왔다가 다시 나갔던 날이었다.
"당일 바로 장례식을 치렀고, 다음 날 발인을 했어."
그래서 삼촌은 빨리 돌아와봤자 모레가 될 거라고 말했던 것이다.
"일단 별장에 돌아올 수 있어도, 다음 날에는 가봐야 한다고 말한 이유는 금방 초칠일을 맞이하기 때문이야."
초칠일이란 사람이 죽은 뒤 7일째에 행하는 법사다.
"바쁘긴 해도 장례일로부터 초칠일까지 시간이 있어서 유괴계획을 다시 짤 수 있었어. 다만 협상 상대가 형님에서 네 엄마로 바뀌었지..."
이때 삼촌은 빤히 유마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네 엄마의 반응이 좀처럼 예측이 안 되어서 말이야. 자기 자식이 유괴되었다면, 무엇보다 아이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며 곧바로 경찰에 연락하지는 않을 거야. 만약 형님이었다면 얼른 돈을 내고 마무리하려고 했겠지. 전에 내가 말했던 대로 이런 점은 고무로 도쿠야와 비슷할 테니까. 어쩌면 형님도..."
- 잠시 숨을 고르다가, 또다시 삼촌은 유마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고이즈미 마사토의 양아버지와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엄마가 임신했으니까..."
"머리가 너무 좋은 것도 애한테는 불운인가."
삼촌은 동정하듯이 유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네가 사라져버린 거야. 사토미한테서 연락이 왔지. 어디로 갔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말이야. 네 엄마에게도 언제까지나 얼버무릴 수는 없었어. 그래서 결심했지. 그 양반은 여차하면 혼자서도 엄청난 결단을 내릴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말이야."
유마도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엉뚱하게도 삼촌의 혜안에 감탄했다.
- 새아빠라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돈을 지불할 것이다. 그래서 유괴한 뒤 2, 3일 내에 승부를 볼 심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촌은 왜 책을 다섯 권이나 샀을까. 권수를 보면 적어도 일주일은 상정한 것 같은데 말이다.
도모노리 씨는 은근히 감이 좋거든. 무의식 중에 작용하는 특별한 감각이 있다고나 할까. 다만 사업에는 별 도움이 안 돼서라고 혀를 차던 사토미 씨의 말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삼촌은 다섯 권이나 책을 샀는데 이건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을까. 하지만 적중해 버렸다. 큰 실패는 하지 않지만, 결코 성공도 하지 못한다. 마치 삼촌 인생의 비밀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사실이라면 아주 무서운 일이라고 유마는 생각했다. 이계에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무서울지도 모른다. 만약 삼촌이 학창 시절에 이 지역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오지 않았다면, 가령 방문했더라도 구사마의 유괴 사건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만일 알아차렸더라도 히사시의 발견에 관여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고무로 저택을 받지 않았더라면, 사사 숲의 집에서 살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그 후의 사건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운명이었다. 이런 의미에서는 삼촌도 사사 숲에 홀렸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의 경우는 가미카쿠시의 피해자이고, 어른이면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걸까.
- 유마는 여기까지 필사적으로 추리하다가, 갑자기 생각을 멈췄다. 지금 이런 걸로 고민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의 나는 그야말로 '생사규묵'이었다. 아버지의 작품집 제목 <생사규묵>은 '화복규묵 禍福糾纆'이라는 사자성어에서 따왔다고 엄마에게 들었다. 유마가 사용하는 국어사전에는 실려 있지 않아서 아버지의 책상에 있던 사전으로 찾아보고 '화와 복은 꼬인 새끼줄처럼 교대로 찾아온다. 화와 복은 서로 맞닿아 있다'라는 뜻임을 알았다. 아버지는 '화'와 '복'을 '생'과 '사'로 바꿔서 '생사규묵'이라는 말을 만든 모양이었다. 유마의 생과 사도 서로 맞닿아 있었다. 고무로 저택에서 도망치면 '생'에 가까워지지만, 계속 갇혀 있으면 '사'를 만날 뿐이다.
- 계단 아래에서 가림벽에 이르는 최단 경로를 따라 조심조심 나아갔다. 홀의 바닥은 계단처럼 삐걱거릴 걱정이 없으므로 편했다. 다만 1층 홀에서 나는 소리는 의외로 크게 울린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간신히 가림벽에 도달해 이 벽 뒤편을 지나 현관문 앞에 섰다. 유마는 문을 열려고 오른손을 뻗었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없어? 지금 살고 있는 세토 가도, 전에 살았던 연립주택도, 문 밖에서는 열쇠로 문을 잠그고 열지만, 집 안에는 안쪽 자물쇠를 돌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눈앞의 문에는 자물쇠가 없고 열쇠구멍 뿐이었다. 당연히 열쇠가 없으면 문을 열 수 없다.
- 무섭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곧바로 도망치듯 돌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창고실 지하나 옥상에는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냥 저택 안을 돌아볼 수는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고무로 저택 현관홀은 고사하고 부지에 발을 들일 수도 없었다. 열린 문 앞에서 가만히 집을 바라볼 뿐...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유마는 문을 닫고 자전거에 올라타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때 문득 세이의 목소리가 들려온 듯했다.
"새아빠가 죽은 일에 죄책감을 느끼냐?"
황급히 유마는 고무로 저택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어디에도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집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유마는 또렷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냐? 그거 참 믿음직스럽네."
그러자 세이의 감탄하는 듯한 대답이 바로 돌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고무로 저택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 그래도 유마는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RC카는 깜빡 잊고 놔두고 온 게 아니니까. 일부러 두고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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