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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다 신조] 죽은 자의 녹취록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7. 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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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출판 : 북로드
출간 : 24.04.05


       

           

 

드디어 장마가 시작되었다. 

 

아. 장마를 고대했던 건 아니다. 

비 오는 날 실내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건 좋아하지만, 장마 시기의 끈적하고 눅눅하고 어딘가 히끄무레한 느낌은 좀.

 

다만 이번에는 기다릴 이유가 있었다. 

 

 

<죽은 자의 녹취록>.

 

비 오는 날에 읽으면 훨씬 증폭될 즐거움을 추천하기 위해서. 

 

 

구판의 제목은 <괴담의 테이프>.

독자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굳이 나눈다면 <작가 시리즈>에 포함될 것 같다. 미쓰다 신조라는 이름의 작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태인데, 자캐를 넘어 자기 자신과 동명의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실화와 허구의 경계를 무너트린다. 인물의 이력이나 주변 설정도 실제와 거의 유사하고, 실제로 본인이 쓴 작품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경우 소설 속 '미쓰다 신조'는 대개 신작을 집필하는 중인데- 주변 인물이나 그 자신이 겪는 실화와 관련된 내용이라- '소설 속 소설'이라는 액자식 구성이 마치 맞거울 속에서 끝없이 연결되는 '거울 속의 거울 속의 거울 속의 나'처럼 느껴진다.

 

<죽은 자의 녹취록>은 6개의 괴담과 그 이야기 사이를 이어주는 막간,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종장으로 엮여있다. 

각 괴담은 작중 '미쓰다 신조'가 쓴 소설인 것으로 소개되지만, 그 자체도 타인의 경험담을 듣는 형태인 경우도 있어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느낌이 든다. 그야말로 '괴담의 테이프'다. 게다가 괴담 속에서 일어나는 괴이 현상이 막간 -즉 현실- 의 미쓰다 신조와 편집자 도키토에게 영향을 미친다.

각각 독립된 이야기로도 오싹했던 괴담들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무사하시기를...'

 

라고 시작과 맺음에 남긴 경고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아, 끝났다. 

한시름 돌리고 펼친 '역자 후기'에서 스르륵 발목을 휘감는 손길을 느끼게 된다. 

 

아... 

끝났다.

  

 

 

   


   

 

"그것보다 저는,
이 책을 둘러싼 괴이에 닿은 독자에게도
어떤 앙화가 생기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어요."

 

 


- [괴이 怪異, かいい] 요괴, 귀신 등의 초자연적인 존재 또는 그로 인한 불가해한 현상

- [앙화 殃禍, おうか] 어떤 일로 인하여 닥치는 재앙 혹은 재난

 




- 이 책은 소설 스바루 (슈에이샤) 2013년 3월호부터 2016년 1월호에 비정기 연재했던 여섯 편의 단편 괴담들을 <죽은 자의 녹취록> 한 권에 정리한 것이다.

- 이런 단편집을 엮어 낼 때 저자가 할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다시 각 작품들을 훑어보고 손본다. 각 화의 내용을 음미해 보고 수록 순서를 검토한다. 편집자의 의뢰가 있으면 '머리말'이나 '작가 후기' 정도의 원고를 집필한다. 뭐, 이 정도라고나 할까. 다른 작가나 평론가의 '해설'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당연하게도 그것에 저자 본인이 관여하는 일은 없다. 
이 책도 내가 간단히 '머리말'을 쓰는 것 외에는 평범한 수순으로 편집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올해 1월 초순, ...

- "어떠신지요?"
이와쿠라는 찬성하면서도 내 의견을 물었다.
"다섯 번째 <기우메, 노란 우비의 여자>와 그다음 작품 <스쳐 지나가는 것>은 괴이한 현상이 조금 비슷하지 않습니까?"
나는 여섯 번째 단편을 발표한 뒤에 뒤늦게 깨달았던 것을 편집자들에게 전했다. 그 이야기만으로는 알아듣기 힘들까 싶어 각각의 구체적인 부분까지 인용했다.
"아아, 그 부분 말이군요. 확실히 말씀하신 대로 조금 비슷할지도 모르겠군요."
이와쿠라의 재빠른 대응에 비해, 도키토의 침묵은 조금 의아했다.

- 그때까지의 대화를 통해, 이와쿠라가 내 작품을 별로 읽지 않았다는 것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와쿠라는 연작 단편을 정리하는 회의에 도키토의 상사로서 동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작품들의 내용을 도키토가 잘 파악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실제로 도키토는 아주 우수한 편집자였다. 그래서 그녀도 <기우메>와 <스쳐 지나가는 것>의 유사함이 신경 쓰였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대충 형식적으로 한번 읽은 듯한 이와쿠라가 내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다.
이상하군.

 

- "자네는 그렇지 않다는 건가?"
이와쿠라가 조금 따지듯이 물었다. 어쩌면 그도, 도키토의 태도가 평소와 다른 것을 간신히 알아차렸는지 모른다.
"확실히 조금 비슷하기는 합니다만, 일부러 순서를 바꿀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이와쿠라의 목소리에서 나무라는 듯한 울림이 느껴졌다.

 

- "괜히 그 이야기를 꺼내서 죄송합니다."
나는 이와쿠라의 말을 끊고, 도키토에게 물었다.
"수록 순서의 검토는 중요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분명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기껏해야 한 작품의 순서를 바꾸기만 하면 해결될 문제죠. 변경하지 않는 것보다 변경하는 편이 조금이라도 낫다면, 역시 변경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도키토 씨는 그것 말고 좀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 그렇게 물으면서도 내 머릿속에서는 어떤 예상이 떠올라 있었다. 다만 설마, 하는 마음도 강했다. 그래서 그녀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저희 잡지에 게재된 순서를 고수하려는 것은, 실은 그동안 제가 체험한 오싹한 일들을 그 단편들 사이에 삽입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 도키토 미나미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2012년 12월 중순쯤으로 기억한다. 그달 8일에 리쓰메이칸대학에서 강연을 했던 나는, 그대로 교토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해에 쓴 수첩을 확인해 보니, 나는 귀가한 뒤에 고단샤 講談社와 가도카와쇼텐 角川書店(현 KADOKAWA)의 편집자와 연이어 회의를 했고, 그 뒤에 도키토와 만났다. 교토에서 돌아온 뒤에 비교적 일찍 연락을 받은 셈이다.

- 내가 사는 동네에는 적당한 찻집이 없어서 처음에는 이탈리아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 만남을 가졌다. 안경을 낀 앳된 얼굴의 도키토 미나미는 왠지 모르게 못 미더운 신입 사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소설 스바루> 편집부에 근무한 지 5년째라는 말을 듣고 조금 놀라는 동시에 안도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안도감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점 커졌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많은 호러 관련 소설을 읽고 있는 점이 -그중에는 내 작품도 끼어 있었지만- 어쨌든 안심이 됐다. 무엇보다도 아는 체하지 않는 태도에 호감이 갔다.

- 당연한 이야기지만, 집필 의뢰를 하는 작가의 모든 작품을 사전에 읽어두는 편집자는 그리 흔치 않다. 가령 있다고 한다면 원래부터 그 작가 작품의 애독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편집자들이 마치 그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어본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말하자면 '어른의 대응'이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작가 입장에서는 적어도 그렇게 비친다. 물론 면전에서 "당신의 작품은 한 권밖에 읽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을 듣는 것도 난처한 일이긴 하다. 어쨌든 그런 편집자와는 대화를 풀어나가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일이 "저의 작품 중 이것은 읽어보셨습니까?"라고 내 쪽에서 물어보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 그런 점에서 도키토는 아주 확실했다. 내 작품 중에서 미스터리가 메인인 작품은 자세히 몰랐지만, 호러 작품 전반에 대해서는 빠삭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협의하기도 편해진다. 

- "선생님에게 의뢰드리고 싶은 것은..."
한동안 잡담을 나눈 뒤에 도키토가 의뢰 내용을 이야기했다.

"저희 회사의 <소설 스바루> 2013년 3월호에 예정된 '초봄의 호러 소설 특집'입니다."
"'초봄의 호러'라는 표현은 상쾌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잘못된 듯한, 어쩐지 모순된 느낌이 나는군요. 그런 의미에서는 광증적인 분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하자, 도키토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 나는 괴기 단편 집필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제까지 썼던 개별 단편 대부분은 비중이 많든 적든 초현실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호러였다. 그중에는 사이코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도 있었지만, '모든 것은 인간의 광기 때문이었습니다'로 끝나는 이야기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도키토는 그 부분을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내게 의뢰했을 터다. 

도키토 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이상심리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저에 전혀 다른 이야기가 깔린 것을 찾을 필요가 있겠군.

 

-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치 속을 꿰뚫어 본 것처럼 기대와 불안이 반반 섞인 표정으로 도키토가 물었다.
"선생님이 쓰신 호러 작품 대부분이 실화에 기초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네, 뭐... 그런 작품도 있죠."
애매하게나마 긍정하자, 그녀의 표정에 다시 밝아졌다.

"그래서 맨 처음에 저자인 듯한 '나'가 등장하고, 뒤이어 소개하는 체험담에 연관된 이야기를 늘 에세이풍으로 쓰시는 거군요."
"본편보다도 서두의 쓸데없는 이야기 쪽이 좋다는 독자도 있습니다."
"아, 그거 저도 알 것 같아요."
도키토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은 뒤에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저희 잡지에 싣게 될 단편도, 꼭 그런 방향으로 구성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깊이 고개를 숙여서, 나도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 이렇게 <소설 스바루> 2013년 3월호(발매는 지난달 중순, 이하동일)에 발표한 것이, 다음에 싣게 될 <죽은 자의 테이프 녹취록>이라는 작품이다.

 

더욱 갑작스럽지만
-쓸데없는 염려일지도 모르지만-
만약 이 책을 읽는 동안에
이후에 기록할 도키토 미나미와 비슷한 체험을 하신 분은,
일단 기분전환을 하고 나서
다시 이 책으로 돌아오기를 미리 부탁드립니다.

 

<서장>


- "요컨대..."
"그 사람이 자살을 결심하기에 이른 동기를 구구절절 호소하고 있다거나, 자살 현장의 상황을 아주 냉정하게 묘사한다거나 하는 식의, 그런 섬뜩한 내용을 아주 생생하게 텍스트로 옮겨서 독자에게 전할 수 있는지가 이 기획의 핵심 아니겠나?"

"..."

"그런 마이너스의 감정이 녹음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리 자살자가 남긴 테이프라고 해도 써먹을 수 없어."
"..."

"다만 회사에 대한 원한, 특정 인물로 인한 괴로움, 가족에 대한 증오를 이야기하고 있는 테이프는 실제로는 거의 없지."

"..."
"그러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건, 아직 에너지가 남아 있다는 증거야. 그러니까 자살까지는 이르지 않지. 이 세상에서 사라지려는 녀석들 대부분은, 이미 모든 힘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야. 설령 원한이나 괴로움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더라도, 그건 분노보다는 체념이지. 그걸 아주 음산하게 반복하는 거지."
"그, 그런 물건을 기류 씨는 대체 어디서 입수하셨습니까?"

나는 그쯤에서야 간신히 입을 열며 끼어들었다. 테이프의 내용도 신경 쓰였지만, 그 입수처에 엄청난 흥미가 솟았다.

 

- 어떤 책이든 기획을 진행할 때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내용일 따름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 시점에서 그 이상으로 무언가를 협의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데 기류 요시히코는 초판 인쇄 부수나 정가, 보증 인세율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해서 난처했다. 확실히 일본의 출판업계에서는 이런 중요한 이야기가 나중으로 미뤄지는 경향이 있다. 책이 간행되고 한 달이나 두 달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저자에게 부수와 인세율이 알려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전직 편집자였던 기류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이후에 계속 그와 만날 일을 생각하니, 금세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 그래도 기류에게 2주에 한 번꼴로 상황을 묻는 메일을 보냈다. 너무 귀찮게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까 싶어 내용은 간단히 했다. 자살에 관한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를 발견하면 알려주기도 했지만, 어떤 메일에도 그의 답장은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라는 문제에 부닥치자 골치가 아파왔다. 그러다 오봉(양력 8월 15일에 지내는 일본의 명절로, 한국의 추석에 해당한다-옮긴이) 연휴를 앞둔 8월의 어느 날, 갑자기 기류에게서 우편으로 샘플 원고가 날아와 몹시 안도했다.

- [겨우 발포주라니, 나도 참 초라하구먼.
(녹음을 멈추는 소리.)
(다시 녹음이 시작된다.)
... 이제 목욕도 했고 맥주도 마셨으니 슬슬 시작할까.
그건 그렇고 나는 대체 누구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이걸 듣는 건 경찰일까? 일부러 이런 걸 남기는 놈은 없을 텐데 말이야.
앗. 없네. 이거 큰일 났네. 허허허(마른 웃음).
목을 매려고 했는데, 로프를 걸 곳이 없어. 비즈니스호텔을 고른 게 실수였어.
하지만 정치인의 비서가 호텔 방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는 기사를 예전에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 그렇구먼. 그쪽은 고급 호텔이고 이쪽은 싸구려 비즈니스호텔이란 차이인가. 돈 있는 놈하고 없는 놈은 자살할 때도 차이가 난다는 얘긴가.
... 후후. 그런데 나도 정말 멍청하지. 이런 곳에 몇십 번은 묵었을 텐데, 목을 맬 곳이 있는지 어떤지도 따져보지 않았다니. 뭐, 이렇게 멍청하니까 이런 꼬락서니가 된 거겠지만.
자... 그러면.
(녹음을 멈추는 소리.)
(다시 녹음이 시작된다.)] 

 

- ["... 에는 처음이십니까?'
"네. 그런데 신관에는 빈 방이 하나도 없습니까?"
"아이고, 공교롭게도 내부 인테리어 공사 중이라서요. 쓸 수 있는 방도 있습니다만, 전부 예약이 차 있습니다. 그래서 구관으로 안내해 드렸습니다만... 들어가시지요."
(테이블에 찻잔을 놓는 듯한 소리.)
"뭔가 용무가 있으시면 프런트로 전화를 걸어주세요. 그러면 편히 쉬시길."
(옷이 쏠리는 소리와 다다미 위를 걷는 소리, 장지문을 여닫는 소리, 흐릿하게 창문을 열고 닫는 소리.)
... 거짓말이겠지. 내 옷차림을 보고 신관이 아니라 구관으로 보낸 게 틀림없어. 게다가 여기는 원래 안 쓰던 방이잖아.

(실내를 걸어 다니고 있다.)

역시 청소도 제대로 안 돼 있어. 나를 아주 우습게 보고 있구먼.

... 안내받았을 때부터 어쩐지 음침한 방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랫동안 닫아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 그러다가 급히 테이블이나 눈에 띄는 곳만 잽싸게 청소한 거겠지.
... 기기긱.
(창문을 여는 소리.)
아이쿠, 엄청 뻑뻑하네.
뒤편은 대나무 숲하고 개울인가... 이건 운치가 있다기보다는 어째 오싹한걸.
허헛, 자살할 놈이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걸까. 이곳의 숙박비도 떼어먹게 될 테니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프런트의 여자 담당자는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단 얘기네. 겉멋으로 서비스업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건가.
하지만 설마 자살할 거란 생각은 못 했겠지.
(다시 실내를 걸어 다닌다.)
어라, 맥주가 있었네. 그런데 미지근한 걸. 냉장고를 켠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지. 온도를 확 낮춰놓고 목욕이나 하고 올까.
(녹음을 멈추는 소리.)
(다시 녹음이 시작된다.)]

[역시 목욕은 좋아. 아주 느긋하게 푹 담그고 나왔네.
맥주도 딱 좋게 시원해졌어.
(병과 컵이 울리는 소리, 좌식 의자가 삐거덕거리는 듯한 소리.)
... 조용하네. 대나무 숲이 솨아솨아 우는 소리하고 개울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잘 들려. 밤에 잠이 안 오겠는걸.
(꿀꺽꿀꺽 맥주를 마시는 소리가 한동안 이어진다.)
... 여기서 자고 싶지 않네.
(맥주를 마신다.)
역시 여기, 이상하지 않나? 아니면 너무 예민해졌나?

(맥주를 마신다.) 
오래된 방이라서 그렇게 느껴질 뿐이겠지. 무엇보다 여기서 하룻밤을 지낼 리가 없으니 말이야.
(일어서서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고 있다.)
보통은 이왕 죽을 거라면 마지막에는 멋진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
(맥주를 마신다.)
... 그럴 기운이, 이제는 없어.
(한동안 맥주를 마시는 소리가 이어진다.)
살살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네. 발포주가 아니라 맥주를 이렇게 마시는 건 정말 오래간만이야. 게다가 빈속에 이렇게 마시면 몸에 안 좋은데.
(맥주를 마신다.)
여기라면 저 인방(창문 위로 가로지르는 나무-옮긴이)이 좋을까. 채광창에 로프를 맬 수 있겠지.
(맥주를 마신다.)
발판은... 없네. 테이블을 쓰기엔 너무 크고... 오호, 경대가 있네. 작으니까 쓰기 쉬워 보이니 딱 좋잖아.
(맥주를 마시면서 일어서서, 방 안을 걷고 있다.)
거울이 부옇게 흐려진 것 좀 보게. 내가 여자 손님이었으면 프런트에 클레임을 걸고도 남았을 거라고.
(경대를 옮기는듯한 소리가 난 뒤, 부스럭부스럭하며 뭔가 작업을 하고 ... )]

- ※ C의 바람과는 반대로, 그의 시신은 앞서 서술한 대로 4년 뒤에 발견되었다. 사인은 수면제 과다 복용이 아니라 심장마비였다고 한다.

- 나는 샘플 원고를 다 읽자마자 기류의 사무실 겸 자택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호출음이 계속 이어질 뿐, 받지 않았다. 그의 휴대전화로 걸었더니, "전원이 꺼져 있거나 전파가 닿지 않는 곳에 있다"라는 익숙한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날 다섯 번이나 전화를 했지만, 그와 통화할 수 없었다.

- 다음 날, 오전 중에도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나는 그의 명함에 적혀 있는, 오기쿠보에 위치한 사무실 겸 자택이란 곳을 오후에 방문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기류는 없었다. 연립주택의 그가 사는 호수 현관문 옆 우편함에는 사흘 치의 신문이 쌓여 있었다. 요컨대 기류는 나에게 원고를 보냄과 동시에 외출한 모양이었다.
오봉 연휴라 귀성한 걸까 생각했지만, 예감이 아주 안 좋았다. 샘플 원고를 읽는 동안, 꽤 오래전에 읽었던 어느 주간지의 기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 그것은 자살 실황을 녹음한 테이프를 다룬 기사였다. 빚 때문에 아내와 딸을 죽이고 며칠 동안 도피 행각을 이어나가던 남자가, 어느 호텔에서 목을 매 숨질 때까지의 상황을 녹음해서 남겼던 것이다. 
테이프의 내용도 충격적이었지만, 그것보다도 인상 깊었던 것은 그 테이프를 듣고 정신상태가 이상해지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다는 편집자의 뒷이야기였다. 그 기사를 읽고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기류는 그런 테이프를 몇 개씩이나 들은 것이다. 게다가 분명 연속해서 들었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샘플로서 녹취한 세 개는 명백히 이상했다. 단순한 자살 실황 테이프라고는 할 수 없는, 참으로 불가해한 내용들뿐이었다. 
대체 그것들은 무엇일까... 
 
- 오래간만에 기류에게 전화를 하고, 그 번호가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다는 걸 안 것은 한 달 반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시마무라 나쓰에게 연락을 했더니, 기류와는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이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고, 본가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듯했다. 그는 최근에 기류와 연락한 편집자가 있는지 알아본다고 했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말라고 했다.

- [유리창 너머로 비쳐 드는 강한 석양 때문에 실내는 후끈후끈한데, 어째서인지 오싹하군.
이렇게 불편하면서도 불길한 곳에 어째서 내가 찾아왔는가. 그 이유를 자네가 알면 필시...]


- 여기서 나는 서둘러 테이프를 멈췄다. '자네'가 나를 가리키는 호칭이 틀림없다고 알아차렸기 때문이지만, 그 이유만이 전부는 아니다.
테이프의 처음부터 묘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있었다. 이야기하는 그의 등 뒤에서 술렁술렁하고 뭔가가 속삭이는 듯한 기척이 있었다. 그 정체가 빗소리가 아닐까 하고 깨달은 것과, 기류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그래서 황급히 정지 버튼을 눌렀다. 

 

- 카세트레코더에서 테이프를 꺼내 봉투에 도로 집어넣고, 그대로 자료용 캐비닛 구석에 처박았다.
나는 이 테이프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잊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한 보람이 있는지 다행히도 이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다시 기억난 것은 연말의 대청소 때였다.
불필요한 자료를 버리기 위해 캐비닛을 정리하는데, 어느 단의 서류들이 조금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기가 없는 캐비닛 안인데?'하고 미심쩍어하며 안에 든 자료들을 꺼내보았더니 젖어서 변색된 듯 보이는 봉투가 구석에서 나타났고, 그와 동시에 기류가 떠올랐다. 
조심조심 봉투 안을 들여다보자, 곰팡이가 낀 테이프가 들어있었다.

- 나는 굵은 소금을 사 와서 테이프에 잔뜩 뿌린 뒤 그걸 봉투에 도로 집어넣고 신문지로 쌌다. 그리고 그 뭉치를 비닐봉지에 넣은 다음 다시 다른 종이봉투에 넣어서 박스테이프로 칭칭 감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뒤로 이따금씩 업계 내에서 기류 요시히코의 소식을 묻고 다니지만, 그에 대한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죽은 자의 테이프 녹취록>



- 남의 빈집을 봐준다.
요즘 시대에 그런 체험을 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옛날에 비해 인간관계가 빈약해져서 그런 부탁을 하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문이나 창문의 잠금장치는 튼튼해졌고, 개인주택에도 보안시스템을 간단히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 일본에서 빈 집을 지켜주는 일은 이미 사멸한 것이 아닐까. 
다만 서양 쪽은 다를지도 모른다. 베이비시터라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의 '베이비'란 갓난아이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아부터 초등학생까지의 어린이를 포함한다. 부모가 용무로 인해 외출해서 귀가가 늦어질 경우,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을 일시적으로 고용해서 부모가 귀가할 때까지 아이를 ... 

- 싸늘한 분위기가 떠도는 법이다. 하지만 이곳은 언덕이 많고 기복이 심한 지형이라, 마치 깊은 산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나타나는 작은 공원이나 정자나 벤치가 그런 감각을 금세 사라지게 만들었다. 외진 시골이라고 해도 틀릴 것 없는 환경인데 묘하게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간선도로를 자동차로 달리면 또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오겠지만, 적어도 산책로를 걸을 때는 그랬다. 

 

- 역시 부자가 사는 곳은 다르구나.
새삼 마이코는 납득했다. 다타센아키 주변은 다양한 상점이 들어선 건물이 늘어서는 등 나름대로 발전해 있다. 자동차로는 다타키산에서 7, 8분이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마이코처럼 걸어서 이동하기 때문이다.
저도 모르게 마이코는 쓴웃음을 지었다. 본가가 있는 시골에서도, 이사한 도쿄 중심가에서도 이 무렵이 되면 저녁 식사를 위해 장을 보려고 바구니를 든 주부들이 슬슬 눈에 띄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여성은 걷든가 자전거를 탄다. 자동차를 이용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도보나 자전거로 다타센아키역까지 가는 사람은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 "상관하지 않았으면 해요. 아니, 전혀 어려울 것 없는 일입니다. 백모님은 주로 3층에서 지내시기 때문에 거의 내려오시지 않거든요."
그 창가의 인물은 역시 백모님이었구나, 하고 마이코는 생각했다.
"3층에는 부엌에 냉장고에, 욕실과 화장실까지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전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런 설비에 관해서는 어지간한 독신자의 집보다 충실하지 않을까 싶어요."
밖에서 올려다보았을 때는 그 정도로 넓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실제는 다른 것이겠지.
"어쨌든 시모쓰키 양은 3층에만 올라가지 않으면 됩니다. 다른 곳은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상관없고, 사용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혹시 백모님께서 내려오시거나 하면..."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때는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해 줄 수 있을까요? 아, 영화는 좋아합니까? 시어터 룸이 있는데, 그곳이라면 절대 백모님도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뭐, 당신이 3층에 가지 않는 한, 별 문제없겠지요."
"알겠습니다. 절대 3층에는 올라가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약속하고 나서 문득 마이코는 그 첨탑이 신경 쓰여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 "아, 올라가도 상관없습니다. 백모님의 방 옆에 계단이 있으니까, 거기를 지날 때만 조용히 하면 딱히 문제는 없어요. 이 근방은 밤이 되면 아주 어두컴컴해서, 가키사와 쪽을 바라보면 맨션들의 야경이 참 아름답죠."
그런 뒤에 미쓰노부는 시어터 룸과 도서실로 마이코를 안내해 주었다.
시어터 룸에서는 벽에 설치된 거대한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감탄했지만, 삼면의 벽을 메우고 있는 비디오 컬렉션에도 깜짝 놀랐다.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그 대다수가 미스터리나 호러 영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도서실도 마찬가지여서, 서가를 가득 메운 것은 미스터리와 호러 소설들뿐이었다.

- 황급히 나가는 미쓰노부를 배웅하더니, 히나코는 도서실에 있는 독서용 소파로 자연스럽게 마이코를 이끌고서 새삼스러운 어조로 이야기를 꺼냈다.
"백모님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어요."

 

- "저도 남편도 백모님의 방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놔두고 있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이 집에서 하룻밤 동안, 영화를 보거나 독서를 하면서 자유롭게 보내시면..."
그때 미쓰노부가 돌아왔다. 이후로 1층의 주방과 거실, 그리고 2층의 침실을 안내받은 후 마침내 설명이 끝났다.
다만 조금 묘했던 것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 미쓰노부가 늘 가장자리로 다녔다는 점이다. 난간을 붙잡기 위해서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있었다. 생각해 보면 복도에서도 그는 가장자리를 걷고 있었던 것 같다. 버릇일까? 그러나 복도 한가운데를 걸었던 곳도 있었다. 장소에 따라 다른 걸까.
마이코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히나코도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깨닫고 아주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 "잘 부탁드립니다."
히나코는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를 했지만, 그 눈빛에는 '백모님은 없으니까 편하게 지내세요'라는 메시지가 명백히 깃들어 있었다.

- 두 사람이 각자의 차를 타고 출발하자, 집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마이코밖에 없으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이 갑작스러운 정적은 참으로 기분 나빴다.
마이코는 대학 근처의 싸구려 연립주택에서 자취하고 있다. 그곳에서의 생활이란 곧, 주위에서 늘 어떠한 소리가 들리는 환경에 익숙해져야 하는 삶이었다. 옆집이나 위층 사람이 내는 소리,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소리, 집 주위에서 노는 아이들의 함성 등. 밤늦은 시간이 되지 않는 한 고요해지는 일은 없다. 아니, 심야에조차 자동차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잡음이 멈추는 일이 결코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하카마야 저택은 무서울 정도로 적막했다. 귀가 먹먹해지는 듯한 고요함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밖에서는 까악까악, 하고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집 안의 적적함을 한층 돋보이게 만드는 것 같아서 싫었다. 더군다나 짙고 흐린 하늘에 금세 어둠이 퍼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수십 분 안에 이 집은 완전히 밤의 장막에 덮여버리겠지.

- 마이코는 망설였다. 집 안의 고요함이 다시금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식사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장소를 거실로 옮기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먹기로 했다. 평소라면 절대 보지 않는 버라이어티 방송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시답잖은 내용이 지금은 큰 도움이 되었다. 어쨌든 시끌벅적하기만 하면 뭐든 좋았다. 
그러나 저녁 식사가 끝나고 텔레비전에만 집중하고 있자니, 다시 집 안의 정적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방송의 활기찬 분위기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마이코를 둘러싼 고요함이 강조되었다. 하카마야 저택에 무겁게 내린 숙연함을 불식하기에는 텔레비전 속 버라이어티 쇼의 활기찬 분위기는 완전히 언 발에 오줌 누기, 아니 오히려 역효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티브이를 끌 용기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헛된 저항인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볼륨을 높이는 것 정도다.

- 쿵.
그때, 위층에서 소리가 났다. 마치 시끄럽다고 항의하는 듯한 소리였다.
하지만 집 안에는 지금 마이코밖에 없다. 히나코의 백모는 세상을 떠났으니까...

 

- 집이 삐걱거리는 소린가?
아무리 고급스러운 주택이라도 이따금씩 영문 모를 묘한 소리가 나는 법이다. 옛날 사람은 '야나리 家鳴り'라는 요괴가 일으킨 것이라며 책임을 돌렸다. 마이코가 어릴 적 시골에 계신 할머니가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곧바로 텔레비전을 껐다. 어째서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이상한 소리를 다시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렇게 되면 그녀가 조금 전의 소리를 항의의 표시로 받아들인 게 되겠지만...

- 마이코는 챙겨 왔던 토마스 하디의 단편집 <마녀의 저주> 문고본을 가방에서 꺼내지 않고, 바로 도서실로 향했다. 자취방에서 짐을 꾸릴 때, 장편소설을 가지고 가야 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아무리 백모의 시중을 들지 않아도 된다고는 해도, 독서에 너무 몰두하는 것도 문제일지 모른다고 생각해 단편집을 골랐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하룻밤에 읽지 못할 분량의 장편을 읽으며 시간을 잊을 정도로 푹 빠지고 싶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정신이 들고 보니 이미 한밤중이어서 바로 잠드는 상황이 되기를 바랐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괴기소설은 제외하고 말이다.

- 그녀는 도서실의 책장에서 재미있어 보이는 본격 미스터리 장편을 발견하고 소파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 집의 오싹하리만치 고요한 환경이 독서에는 적합했는지, 어렵지 않게 작품 속 세계에 빠져들 수 있었다. 이거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갈 게 틀림없다. 
그런데 소설에 빠지면 빠질수록, 문득 현실로 돌아왔을 때 느끼는 적요가 더 어마어마해졌다. '무음의 압박감'이라고 형용해야 할 감각이 바짝 밀려든다. 이야기가 매력적이어서 열중하는 만큼, 잠깐이라도 현실로 돌아오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저택 안에 떠도는 적막한 공기가 피부를 찌르는 양 따갑게 느껴진다. 
어떻게든 계속 읽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 어떤 걸작이라도 이런 환경에서 제대로 읽는 것은 극히 어려울 듯했다.
아직 밤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마이코는 기가 막혔다. 책을 읽을 수 없다면 뭘 해야 한단 말인가.
아, 영화 감상이 있었지!

- 그곳에 가면 안 돼.
마음의 목소리가 멈춰 세웠다. 그러나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드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녀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호기심이 아니라 명백한 공포심이었다.

- 미쓰노부에게 안내받았을 때는 깨닫지 못했는데, 계단에도 다른 곳과 같은 아치 형태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2층의 복도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문부터 집 안까지 그것들이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2층 복도 구석까지 나아가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까지 왔을 때, 역시나 마이코는 주저했다.
백모의 존재 유무를 떠나서, 하카마야 부부에게 3층에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 계단을 올라가는 것은 두 사람의 신뢰를 짓밟는 짓이 된다. 이것은 빈집 지키기를 맡은 사람이 취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 아닐까. 
성실한 성격의 마이코는 한동안 이 문제로 갈등했다. 그런데 거기서 묘안이 떠올랐다.
그 탑에 올라가면 되잖아.
탑에는 들어가도 괜찮다고, 미쓰노부도 허가해 주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3층으로 올라가야만 한다. 번듯한 구실이 생기지 않는가.

- 그러나 계단 아래까지 떨어진 마이코는 곧바로 일어설 수 없었다. 온몸이 쑤셨다. 하지만 꾸물거리고 있다가는 모처럼 벌려놓은 거리가 금세 좁혀질 것이다.
초조해하는 그녀 곁에, "쿠당탕탕!" 하는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그것이 내려왔다. 아무래도 마찬가지로 발을 헛디딘 것 같다.
황급히 몸을 비틀어 마이코가 피한 자리에 그것이 굴러 떨어졌다. 그녀와 달리 앞 구르기를 하는 듯한 자세였다. 그랬기 때문인지,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 거친 숨을 헉헉 몰아쉬면서도, 마이코는 눈앞의 그것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을 텐데, 그것이 신경 쓰였다. 지금 바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도무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것이 슥 고개를 들었다. 얼굴 앞을 가린 긴 머리카락 사이에서 보이는 번쩍이는 눈동자가, 가만히 마이코를 노려보고 있다.
그것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마이코의 목덜미 털이 곤두섰다. 오싹하는 느낌이 들자마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 도망치고 있었다. 아무리 심한 몸의 아픔도, 역시 압도적인 공포 앞에서는 경감되는 듯하다.

- 그것이 길을 따라 추격해오지 않을까 신경이 쓰여 견딜 수 없었다.
지칠 대로 지쳐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야 간신히 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행인은 많지 않았지만, 모두가 잠옷 차림의 그녀를 호기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딱 한 대 주차돼 있던 택시에 올라타고 목적지인 자취방에 가면 돈이 있다고 말하자, 운전사는 잠시 주저했지만 곧 차를 출발시켰다. 사정을 물어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주행 중에도 아무 말이 없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령 질문을 받았다고 해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 택시비를 내고 집에 돌아온 뒤, 마이코는 침대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흥분으로 잠이 오지 않았지만 그대로 아침까지 시간을 보내고, 다음 날은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 하카마야가에서 택배가 도착해서, 깜짝 놀라는 한편으로 무서워졌다. 조심조심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마이코의 가방과 의복, 그리고 오다기리에게서 들었던 금액의 열 배에 달하는 아르바이트비가 들어 있었다. 

 

- 연휴가 끝나고 학교에 간 마이코는, 동아리 선배들에게 오다 거리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때 알게 된 사실인데, 실은 아무도 오다기리를 몰랐다. 오다기리가 몇 년 전에 졸업했던 부장의 이름을 말했기 때문에 선배들도 오다기리가 자기들 이외의 부원과 면식이 있을 거라고 굳게 믿어버린 듯했다. 그 정도로 오다기리가 능숙하게 행동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 결국 그날 밤의 사건을, 마이코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짐은 전부 돌아왔고, 고액의 아르바이트비도 받았다.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더 이상 기억해내고 싶지 않았다.
그 기억이 되살아난 것은 그해 여름 방학에 친구와 모 지방으로 놀러 가서 어느 신사에 참배했을 때였다. 그곳에서 마이코는 문득 떠올렸다.
하카마야 저택에서 봤던 문과 일련의 아치들은 혹시 도리이 鳥居(신사의 입구에 세우는 기둥 문-옮긴이)였던 게 아닐까. 백모의 방과 외부의 어딘가를 잇는 역할이, 그 아치들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미쓰노부도 히나코도, 그 아치가 있는 계단과 복도에서는 늘 가장자리로 걸었다. 왜냐하면 도리이부터 신사를 잇는 참배 길의 한복판은 신이 다니는 길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할머니에게 그렇게 들었다. 

 

- 물론 이 해석이 옳다고 한들, 그럼에도 알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은 그대로다. 이것저것 생각해 봤자 헛수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났음에도 그날 밤에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려 했던 걸까, 하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마이코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 그때였다. 다타센아키의 공원에서 발견되었다던 유기 사체의 의미를, 마이코는 별안간 이해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 다리를 벌리고 눕혀진 시체의 배 위에, 절단된 두 짝의 팔이 가로로 얹혀 있다...
그 시체의 하반신 형태는 도리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이코는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다...
동기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범인이라면 짐작 가는 인물이 있었다.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가발의 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던, 광기 서린 미쓰노부의 눈동자를 마이코는 아직도 잊을 수 없었으니까...

<빈집을 지키던 밤>



- 그것이 재생 가능한지를 확인한 다음 도키토에게 보냈다. 그러는 동안, 왠지 흐릿한 불안을 계속 느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일은,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내면의 목소리가 그런 식으로 귓가에 속삭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기에 점차 나는 초초해지기 시작했다. 도키토와 의논할 때는 내 쪽에 아무런 리스크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엄청난 오산이었는지도 모른다. 

- 이런 불안과 초조함이 수그러든 것은, 도키토에게서 "몇 가지 재미있는 체험담을 찾아냈습니다"라는 내용의 메일이 도착했을 때였다. 놀랍게도 그녀는 체험자의 이야기를 받아 적은 문서 파일을 첨부했다. 읽자마자 괴기 단편의 소재로 써먹을 만한 이야기를 발견함과 동시에, 그녀의 대응에 몹시 감탄했다.
이렇게 완성시킨 것이 -신년호에 어울리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소설 스바루> 2014년 1월호에 발표한 <빈집을 지키던 밤>이다.

- 첫 번째와 두 번째 작품의 의뢰 사이에 공백이 있었기 때문에 세 번째 의뢰가 있다고 해도 아마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키토에게 금방 연락이 와 2014년 5월 하순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앞의 두 번과는 달리, 이탈리아 식당이 아니라 모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만난 것으로 기억한다. 의뢰는 마찬가지로 괴기 단편의 집필이었지만, 이후로는 정기적으로 써줬으면 한다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도키토는 연작 단편을 희망했다. 요컨대 한 편씩은 독립된 이야기지만, 단행본으로 엮어서 모든 단편을 읽으면 전체적으로 이어지는 구성이다. 

- 물론 반가운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때 나는 잡지 <메피스토>에 괴기 단편을, <미스터리 매거진>에 '범죄 란포환상'의 연작 단편을 집필하고 있었다. 게다가 신작 장편 의뢰도 상당히 쌓여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데다 <소설 스바루>에는 두 작품을 이미 발표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것들을 감안해서 연작으로써 나가야만 하는 문제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내게 괴기 단편이란 너무나도 쓰고 싶은 분야와 형태가 어우러진 소설이기에, 다소 무리해서라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그녀와 상담한 결과 다른 두 잡지와 마감이 겹치지 않게, 그러면서도 같은 간격으로 게재가 되도록 고려하여 <소설 스바루>에는 넉 달마다 싣기로 했다. 삽화는 앞선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내가 좋아하는 나라키 하치 씨에게 계속 의뢰하기로 결정했다.

- 어려웠던 연작 단편의 구성도, '괴담의 테이프'라는 이면의 설정을 사용하는 안을 생각했다. 도키토에게 제안하자 "재미있어 보이네요"라면서 응해주었다. 다만 각 작품을 발표 순서대로 늘어놓기만 해서는 평범한 단편집이 되어버린다. 독자에게 연작의 의미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간단히 내가 '머리말'을 쓰기로 했다. 모든 작품의 소재가 꽤 오래전에 녹음된, 괴이 현상을 겪은 사람들의 체험담이라고 글 첫머리에 설명하는 것이다.

- 그 말대로 도키토는 신속하게 쓸 만한 체험담을 텍스트로 옮겨서 메일로 계속 보내주었다. 덕분에 <소설 스바루> 2014년 9월호에 실린 <우연히 모인 네 사람>을 쓸 수 있었다.

 

- 그런데 도키토가 보내온 메일에, 여름 끝자락부터 묘한 문장이 섞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뭔가 실수로 썼으려니 했지만 아무래도 그렇지가 않은 듯했다. 마치 내게 읽으라고 쓰고 있는 듯했다. 아니, 아무런 설명도 없으므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그 내용이란 것이...
'홍차를 마시려고 하면, 어쩐지 이상한 것이 비칩니다.'

'자판기 안에 뭔가 있는 걸까요?'
'샤워를 하고 있으면 맑은 날인데도 빗소리가 들립니다.'

이렇게 너무나 엉뚱한 것들이었다. 전후 문장과 조금도 관계없는, 맥락 없는 한 문장이 갑자기 섞여 있다.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다. 물론 적혀 있는 내용은 이해할 수 있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 역시나 신경이 쓰여서 전화를 걸어보았다. 처음에는 에둘러 물어보았지만, 진전이 없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랬더니 도키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그런 이상한 문장이, 제가 드린 메일에 적혀 있었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것도 갑자기 튀어나온다고 할까, 중간에 끼워 넣은 느낌이라고 할까."
설명을 하다 보니, 그녀의 말투가 조금 마음에 걸렸다.
"이 전화를 받고 놀랐다는 것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는 겁니까?"

"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도키토 씨가 납득하는 기미가 느껴지는 건 내 기분 탓일까요?"
그렇게 말을 잇자 다시 그녀는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 역시 선생님은 예리하시네요."
"그렇다면 분명?"
"그 기묘한 문장의 내용은, 요 몇 달 사이에 제가 직접 체험했던 일들이거든요."
"네에?"
이번에는 내가 말을 잃을 차례였다.

- 요컨대, 문제의 문장에 거짓은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도키토는 그런 문장을 쓴 기억이 전혀 없다. 평소 같으면 그녀의 짓궂은 장난이 아닐까 의심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그녀와는 고작 세 번밖에 만나지 않았지만, 그 정도의 판단은 할 수 있다. 

- 전화로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그녀는 매일 아침마다 홍차를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설탕과 우유를 넣지 않은 홍차를, 매일 아침마다 빵이나 과일과 같이 먹는다. 어느 날 아침, 평소와 마찬가지로 홍차를 마시려고 하는데 컵 안에 묘한 것이 비쳤다.
반원형의 그림자... 

 

- 그 뒤에도 그녀는 이 기묘한 그림자를 보게 되었다. 매일은 아니지만, 그것은 갑자기 나타났다. 게다가 형태가 조금씩 바뀌어간다.
반원에서 커피콩 같은 모양으로...
커피콩 모양의 한쪽 끝이 움푹 들어가고, 조금 늘어난 형태로...
조금 늘어난 끝이 좌우로 넓어지고, 커피콩의 두 배도 넘는 크기로...

 

- 솔직히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지만, 도키토는 어느새 그것의 변화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 그 형체의 정체를 깨닫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사람의 형체였다. 요정처럼 작은 사람의 상반신이 홍차의 수면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마치 컵의 가장자리 밖에 달라붙어 조금씩 기어서 올라온 것처럼.
그녀는 아침 식사 때 홍차 마시기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막간 (1)>


- 참고로 여섯 번째 영화화는 아널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액션물 <사보타지>(미국, 2014)라고 하니 참으로 놀랄 일이다. 대체 원작의 요소가 얼마나 남아 있을지 불안해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 이와 같은 서론을 늘어놓았다고 해서 이 글에서 소개하는 오싹한 체험담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비슷한 이야기인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시 체험자의 심정을 헤아려보는 데 이 정도로 어울리는 작품은 없으리라 생각해서 처음에 언급한 것일 뿐이다. 
또한, 이제부터 적게 될 오싹한 이야기를 체험자 -'오쿠야마가쓰야'라고 해두자- 로부터 내가 직접 들은 것은 아니다. 특정 분야의 전문서를 많이 내는 모 출판사의 아는 편집자가 어느 자리에서 한 이야기를, 내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 것뿐이다. 본래대로라면 그 편집자에게서 체험자를 소개받아 내가 다시 취재를 해야 하겠지만, 그 사람과는 이미 연락이 끊겨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 지금부터 소개하는 이야기는, 문제의 체험담을 오쿠야마 가쓰야의 시점에서 재구성하고 정리한 것이다. 만일을 위해 말해두자면, 이 원고에 나오는 고유명사 대부분은 가명이다. 그럼에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책임은 저자에게 있음을 밝혀둔다. 

- 가쓰야는 새삼 감탄하다가, 문득 마리의 눈치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뭔가 문제라도 있어?"
"그게..."
그녀는 전화기 화면을 천천히 가쓰야에게 보이면서 말했다.
"이런 메일, 사흘 전에는 없었는데....."
뭘까 하고 들여다보니,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다.
'산 친구들과 만났어. 새로운 루트를 발견. 예쁜 돌을 사람 수만큼 챙겨줬어. 산행 당일의 즐거움이 늘었네.'

- 다 읽었지만 특별히 이상하다는 느낌은 없다. 다만 어째서인지 마음에 걸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쓰야는, 왠지 모르게 기묘하다...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마리가 말했다.
"사흘 전의 메일 뒤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어요."
그녀는 메일의 내용보다도 그 점을 더 신경 쓰고 있었다.

 

- 볼 것도 없이, 편의점은 고사하고 구멍가게 하나 눈에 띄지 않는다. 애초에 민가조차도 드문드문 세워져 있다.
먼저 내린 연배 있는 여성들 무리를 뒤따라가는 형태로, 가쓰야 일행은 우선 네가히산 기슭에 있는 고쿠지츠 신사로 향했다. 사전에 가쓰야가 읽었던 가이드북에 의하면 이곳은 고쿠지츠 신사의 사토미야이며, 오쿠미야는 산 정상에 있다고 한다(하나의 신사에 두 곳 이상의 제단을 두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 산기슭에 있는 신사를 가리켜 사토미야 里宮, 산 정상에 있는 신사를 가리켜 오쿠미야 奥宮 혹은 야마미야 山宮라고 부른다-옮긴이). 그래서 자동차나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오쿠미야와 달리, 가장 가까운 역에서 상당히 오래 걸어가야만 한다. 주변 도로가 협소해서 소형차 밖에 들어갈 수 없다. 사토미야는 참배객도 적은 듯했다. 한데 네가히산에 오를 거라면 반드시 오쿠미야에 참배해야만 한다. 이를 소홀히 했다가는 산속에서 외눈에 외다리인 마물과 마주치게 된다는 무서운 전승이 이곳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 탓이다.

(리뷰자 주 : 문맥상 '자동차나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건 입구 쪽에 가까울 사토미야 아닐까?)  


- 다만 마물 운운하는 것은 가이드북의 정보가 아니라 인터넷상의 괴담 사이트에서 발견한 체험담이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의 체험이 적혀 있어서, 그런 쪽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인 가쓰야조차도 조금 오싹하게 느낄 정도였다. 괴담 이야기를 듣거나 읽거나 하는 것은 즐겁지만, 자신이 실제로 그곳에 가게 되면 역시 이야기는 달라진다.  


- 시간이 지나자 아키히코도 그럴 상황이 아니게 된 듯했다. 그녀가 넘어질 뻔해도 모르는 체했기 때문이다.
정작 당사자인 마리는 가쓰야의 목소리나 아키히코의 배려가 없어져도 전혀 상관없는 듯했다. 선두에 선 가쓰야에게 뒤처지지 않고 제대로 따라오고 있다. 다만 산에 막 들어섰을 때는 "저 꽃은 아주 예쁘네요"라는 잡담도 했었지만 지금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결국, 산길에 익숙하지 않은 세 사람은 금세 자기 몸 하나 간수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진 것이다.

- "이 산은 아마치 지방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지오 지방 사람들의 신앙을 모으고 있었어요."
쇼조는 예외였다.
"죽은 자는 모두 이 산으로 돌아온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이제까지의 소극적인 태도와는 완전히 딴판이 되어, 마치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기운이 난다는 듯 이야기를 술술 늘어놓고 있다.
"세상을 떠난 육친과 만나고 싶다고 바라는 사람은, 조금 전의 고쿠지츠 신사에 참배를 하고 산 정상으로 올라가곤 했어요." 
누가 질문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네가히산에 대한 해설을 시작해서 가쓰야도 깜짝 놀랐다.

 

- "네가히산에는 '삼도천의 강변'이 있어요. 물론 진짜 강이 흐르는 건 아니에요. 돌멩이 밭이 띠처럼 길쭉하게 이어지고 있는 경치를 강으로 빗대어 부르고 있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걱정은 하지 않았다. 나머지 세 사람은 이야기할 기력도 없으니,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곳에서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돌을 두들겨 소리를 내면, 그 사람의 영혼이 나타난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게다가 쇼조가 하는 이야기는 이 산에 대한 가이드였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의식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마냥 돌을 두들기며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에요. 그러면 관계없는 망자까지 나와서 그대로 산에 머무르게 되어버린다고 해요."
다만 그 내용이 조금 문제였다.
"또, 한 사람이 같은 돌을 계속 사용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어요. 그런 행동을 하면 그 돌에 죽은 자의 사념이 깃들기 때문이죠."
산을 둘러싼 전승이라기보다, 아무래도 괴담 같은 이야기로 점점 변해갔다.
"물론 삼도천의 강변 외의 장소에서 돌을 두들겨 소리를 내는 행동도, 절대 해서는 안 돼요. 망자를 불러들일 뿐이니까 말이죠..."

 

- 자신들이 그런 무서운 장소에 침입한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쓰야는 도저히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 하물며 쇼조가 하는 이야기는 평범한 괴담이 아니라 몇백 년의 역사로 뒷받침된 괴이이니 더욱 그렇다. 

"이 산에서 누군가와 만났을 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는데 상대가 '어어이!' 하고 마치 먼 곳에 있는 사람을 부르는 듯한 반응을 보였을 경우에는 즉시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해요. 절대 그대로 대화를 나누어선 안 돼요. 그런 짓을 했다간 그것에 끌려가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쇼조의 능숙한 화술 때문일까, 아니면 들어두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것 같기 때문일까.

- "분명히 그거야. 지름길이야."
갑자기 기운이 난 듯한 아키히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가쓰야는 순순히 기뻐할 수 없었다.
"돌이 있어."
정확히는 바위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큼직하고 중후한 분위기의 돌이, 불쑥 눈앞에 나타난 산길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마치 길을 막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
가쓰야에게는 그것이 마치 통행금지 표식같이 느껴졌다.
"일부러 누군가 저곳에 놔둔 걸까요?"

- "가는 길을 막고 있는 바위도 그렇고, 산길을 감추듯이 덤불로 보이게 만든 덮개도 그렇고, 이 길로 잘못 들어가는 등산객이 없도록 누군가 손을 쓴 게 아닐까?"
"생각이 너무 많으시네."
완전히 기운을 되찾은 아키히코가 곧바로 부정했다.

- ... 발자국이 찍혔다. 즉 이 발자국을 찍은 자는 외다리로 걸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외다리의 그것은 우선 감춰져 있는 진흙길로 발을 들였고, 다시 외다리로 이 길을 통해 나왔다. 그런 이야기가 되는 것일까. 
외눈에 외다리의 마물... 
인터넷에서 읽었던 이 산에 얽힌 괴담이 문득 뇌리에 되살아난다.
 
- "점심을 먹기에 딱 좋은 바위가 있네요."
마리의 말대로 풀밭 저편에 넓적한 바위가 보였다. 네 사람이 앉아서 점심을 먹기에 안성맞춤인 크기였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발이 그 바위로 향한다. 산 정상에 도착한 것도 아닌데 모두의 발걸음이 가볍다.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모두가 기운이 난 듯하다. 

 

- 가쓰야는 어느덧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하고 있었다. 리더로서 자각이 다시 싹튼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바위가 가까워짐에 따라, 또다시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어쩐지 이상한데?
그때까지는 막연히 직사각형의 테이블처럼 보이던 바위를 두 눈으로 또렷하게 포착한 순간, 마치 무언가의 제단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싹하다.
그냥 자연 속에 있는 바위인데 왠지 모르게 인공물 같은 느낌도 든다. 그렇지만 언제, 누가, 무엇을 위해 이런 것을 준비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냥 기분 탓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가 계속 마음에 걸린다.
 
- "아, 있어요!"
마리의 기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저게 가쿠 씨의 선물일 거예요."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넓적한 바위에 도착한 뒤에, 가쓰야 일행을 빙글 돌아보며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곳에는 달걀 정도 크기의 아주 예쁜 돌이 얹혀 있었다. 표면이 무척 매끄러운 게 계란과 정말로 비슷했다. 백색과 회색과 흑색이 뒤섞여 있는 색조도 결코 어둡지 않고 오히려 은근히 차분한 느낌이다.

- "오쿠야마 씨 것도 있어요."
마리의 목소리를 듣고 넓적한 바위 위를 보니, 정말로 계란돌이 하나 남아 있었다.
"저기, 나는..."
돌의 생김새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움켜쥐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가쓰야는 간신히 자제했다.
기분 나빠.
넓적한 바위에서 받았던 것과 같은 혐오감을, 그 돌을 보면서도 느꼈다.
어째서 이 돌은 이렇게나 알과 닮은 걸까.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매끄럽고 아름다운 표면이 되는 걸까. 애초에 이것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 거절의 말을 생각하며 쩔쩔매는데, 남은 돌이 하나인 것을 가쓰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남은 게 하나뿐이니까, 이건 야마이 군에게 양보할게."

"어라? 그러고 보니 세 개밖에 없네요."
마리가 넓은 바위 구석구석을 둘러보았지만, 그 밖에 계란돌 같은 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세 사람에게서 조금 떨어진 지점에 멈춰 서 있던 쇼조가, 이제까지 해오던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 ... 계란돌이 나왔다. 분명히 두 사람의 돌과 함께 저 멀리 던져버린 돌이, 배낭 바닥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서둘러 창문을 열고 돌을 바깥으로 던져버렸다. 두 사람에게도 주의를 주려고 하는데, 버스가 산의 영역 밖으로 나온 것을 이내 깨달았다. 물론 경계선이 보인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틀림없을 것이다. 


- 그다음 주, 두 사람에게서 거의 동시에 휴대전화로 메시지가 날아왔다. 용건은 아마치의 네가히산에 가자,라는 것이었다.
'야마이 쇼조 군이 안내해 줄 거예요.'
가쓰야는 답신하지 않고 두 사람의 전화번호에 수신 거부 설정을 했다. 그 뒤로 두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가쓰야 대신 누군가를 초청해서 다시 네 사람이 함께 그 산을 오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떨쳐지지 않을 뿐이다. 

- 가쿠 마사노부에게는 몇 번이나 연락을 취하려고 했다. 그러나 휴대전화는 받지 않았고, 그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 사정사정해서 알아낸 연립주택의 자취방은 언제 가봐도 비어 있었다. 우편함에는 신문이 쌓여 있었는데, 바깥으로 밀려 나와 있는 최근 일자 신문들이 가쿠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한편 본가의 연락처를 아르바이트하는 곳에도 물어보았지만 그것까지는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 오쿠야마 가쓰야는 대학을 졸업하고 도쿄에서 취업했다. 그는 그 일이 있은 뒤로 누가 아무리 간절하게 청하더라도 산이나 그 주변에는 절대 가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올라간 산속에서 불쑥 누군가와 만나게 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무서워서 도저히 갈 수 없다는 듯했다.

- 이 원고를 끝낸 뒤, 담당 편집자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거기서 나는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야마이 쇼조에 대한 어떤 해석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편집자가 재미있어하며 꼭 덧붙여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래서 사족임을 알면서도 그 해석을 아래에 적어둔다.

- 야마이 쇼조 山居章三의 성씨 '山居'를 일본어 발음이 같은 한자 '病'로 바꾸고, 그것을 부수 '疒'로 표기한다. 그리고 이름인 쇼조의 첫 글자인 ''과 합치면 '瘴'자가 된다. 남아 있는 '三'자를 일본어 발음이 동일한 한자 중 하나인 '山'으로 바꾸고 두 한자의 앞뒤를 바꾸면 '山'이 된다.
'山瘴'('산쇼'로 읽는다-옮긴이)란 산이 지닌 독기나 산속의 나쁜 공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연히 모인 네 사람>

 
- 신참 편집자였던 20대 중반쯤, '의료와 종교를 생각하는 총서' 시리즈를 담당한 적이 있다. 내가 직접 기획하지 않아서 책을 가지고 있지는 않고, 물론 당시의 자료도 남아 있지 않으므로 불확실하긴 하지만 거의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다고 기억한다. 

- 우리나라에는 서로 교류가 적은 의학계와 종교계 현장에서 각각 유식자를 초청해 강연을 하고, 장기이식이나 연명 의료 등의 까다로운 문제를 넓은 시야에서 생각하려는 취지의 모임이 있었다. 그 강연록의 출간을 D 출판사가 하게 되었고 담당 편집자로 내가 지명되었다. 매번 새로운 테마를 잡고, 강연자의 면면을 고려하면서 네 개의 강연을 한 권으로 정리한다. 그것이 기본적인 구성이었다. 나는 첫 번째 권부터 네 번째 권까지를 담당했고, 다른 사람이 다섯 번째 권과 여섯 번째 권을 냈을 텐데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모임의 활동이 줄어들었든 D출판사가 손을 떼었든, 어쨌든 그리 활발해지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 나는 강연 녹취 원고를 읽어보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강연회에도 참석했다. 거기서 강하게 느낀 것은, 얄궂게도 의학계와 종교계의 '단절'이었다. 그때까지 교류했던 일이 극단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그런 모임이 탄생한 것이므로, 발족한 의미는 아주 컸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러나 병원이라는 현장에서 매일처럼 삶과 죽음을 접하는 의료 종사자와, 그 사람이 망자가 된 뒤에 관계를 갖게 되는 다수의 종교자는 강연에서 하는 말의 무게가 전혀 달랐다. 전자가 실제 증상을 거론하며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반해, 후자는 자신이 믿는 종교의 사상을 이야기하며 추상적으로 이야기하게 된다.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양자의 강연을 교대로 들어보면 후자의 말이 참으로 공허하게 느껴진다.

- 참고로 그 모임에서는 특정 종교로 한정해서 강연을 의뢰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불교와 기독교 종파가 주가 되는 것은 틀림없다. 그중에서 가장 공허하게 들렸던 강연 중 몇 가지가 바로 불교계 사람들의 강연이었다. '장례불교'라고 야유받으면서도 많은 관계자들이 단가제도 檀家制度(일본의 가정은 대부분 불교 사원에 소속되어 죽음에 관련된 의례를 일임하고 있다. 사자 의례를 중심으로 맺어진 불교 사원과 가정 혹은 개인 사이의 대를 이어가는 지속적인 관계를 일컫는다-옮긴이)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으니 뭐, 무리도 아닐 것이다.

 

- 그 점에서 기독교 계열의 강연자는 달랐다. 그들에게는 호스피스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호스피스의 기원은 중세 유럽의, 여인숙을 겸하고 있던 지방의 작은 교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곳에 묵은 여행자 중에 질병으로 여행을 계속할 수 없게 된 사람을 간호했던 것이 시초라고 여겨지고 있다. 그런 시설이 이윽고 호스피스로, 그리고 무사의 정신으로 간호를 하는 성직자의 행위가 호스피털리티라고 불리고, 거기에서 '호스피털(병원)'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터미널 케어'를 행하는 시설, 또는 재택으로 이루어지는 말기 간호를 호스피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 이러한 실적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계 강연자의 경우에는 종교적인 사상 이야기에 실제 사례가 당연히 따라온다. 이것이 가슴을 울리는 어떤 빼어난 교의보다도 설득력이 있다.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현장에 몸담고 있는 종교인이기에 갖는 고민과 긍지가, 아마도 그들에게는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이 호스피스에 대해서 불교계 관계자로부터 불평 섞인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신부나 목사는 병원에 드나들어도 아무 말도 듣지 않지만, 중머리에 승복을 입은 그들이 들어가려 하면 "대체 누가 죽었느냐?"라며 술렁거려서 난처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은 그야말로 장례불교가 되어버린 불교계의 책임이 아닐까. 본래 절이란 항상 문을 열어놓고, 찾아오는 이는 누구든 받아들이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죽은 사람이 생겼을 때만 열게 되었다.  

- 만일을 위해서 이야기해 두는데, 절대적인 존재라 여겨지는 '신'을 믿는 기독교보다는 인간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불교 쪽에 나는 보다 친근함을 느낀다. 다만 그것과 이 이야기에 적는 문제는 별개다.

- 불교계 관계자들 중에도 이 근심스러운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해 보려고 행동에 나서는 이들이 있었다. '비하라' 활동이 그것이다. 비하라란 산스크리트어로 승원 僧院이나 휴양하는 장소를 의미하며, 그것이 불교 호스피스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의료와 종교를 생각하는 강연회가 시작되기 3년 전쯤부터 활동을 시작했으므로 그야말로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비하라 외에도, 어떻게 의료 현장과 관계할지를 생각하는 젊은 승려들의 대처도 확실히 있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그 이후로 비하라 활동이 불교계에 퍼졌는가 하면, 유감스럽게도 그렇지는 않다. 


- 이런 이야기부터 본 원고에 쓰기 시작한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올해 봄에 나라시 와카쿠사 중학교의 동창회가 반 모임이 아니라 학년 전체 모임이 있어서, 그리운 면면들과 만날 수 있었다. 참고로 본교는 졸작 작자미상 속에서 '료쿠요 중학'이라고 이름을 바꿔서, 괴이에 쫓기는 주인공이 도망쳐 들어가는 장소로 등장한 바 있다. 

- 간사이 지방을 떠나 산 지 오래된 나에게, 동창회는 수십 년 만에 만나는 사람이 많아서 여러모로 즐거운 한때를 보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K와의 대화가 인상에 남았다. 
당시에는 통통했는데 지금은 홀쭉해진 그녀는, 내가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더니,
"역시나. 미쓰다 군은 분명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어"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해서 놀랐다.

 

- 대체 무엇을 휴대하고 있지 않은 것인지, 가장 중요한 부분이 수수께끼였다. 게다가 어린아이가 뭔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휴대하지 않았다"라고 표현할까? 노인이 어린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하는 듯하다는 점은 일단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대든 유대든 휴대든, 전부 적절하지 않다. 
어쩌면 '희대'를 잘못 들은 것일까 하고 의심해 보았지만, 그러면 맥락이 불규칙해지는 데다 '희대' 역시 어린애가 쓸 만한 말은 아니다.

- 그 밖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특정한 지방에 전해지는 풍습과 관련한 용어가 아닐까 하는 견해다. 소년이 부여받은 용무와 그의 할머니의 언동으로 추측하면, 그런 해석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약간의 조사만으로는 해당될 만한 단어를 찾을 수 없다. 하다못해 어느 지방인지만이라도 알면 또 다른 조사방법이 있겠지만, 노인의 이야기에 구체적인 지방의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아니 단 하나, 지명이 아닐까 생각되는 단어가 있었다.
뉴루우스.

- 곧바로 어머니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큰일 났네.
소년이 침울한 기분에 잠겨 있는데, 할머니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얘, 할머니 방으로 오려무나."

시키는 대로 따라갔더니 할머니가 천천히 '곳쿠리 님(동전과 연필 등으로 하는 주술. 국내에서는 '분신사바' 등으로 알려져 있다-옮긴이)'을 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해서, 소년은 가슴이 철렁했다.

 

- 백지 중앙에 간단히 도리이 형상을 그린 다음 그 좌우에 '네'와 '아니오'를 적고, 왼쪽 비스듬히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일본어 오십음도를 적어 넣는다. 그런 뒤에 도리이 위쪽에 동전을 놓으면 준비가 끝난다. 

 

- 인생의 고비나 중요한 행사가 있기 전에 할머니는 반드시 '곳쿠리 님'을 했다. 그 덕분에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 불가사의한 이야기는 몇 번이나 들었는데, 소년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것은 그의 아버지가 초등학생 때 규슈로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에 받았던, 수수께끼의 계시에 대한 이야기였다. 

- [고양이와 타지 마.]
그대로 해석하면 "고양이하고 뭔가에 타지 마"라는 의미일까. 규슈까지는 열차로 가고, 현지에서는 버스로 이동할 예정이다. 그러나 버스는 대절해서 갈 예정이니 그곳에 고양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혹 전철 탑승객 중에 고양이를 데리고 타는 사람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버지는 열차에 타자마자 모든 차량을 살피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고양이가 들어 있는 케이지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규슈에 도착해서 탄 버스에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이번에는 빗나간 걸까?
그때까지 긴장의 연속이던 아버지가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고 할 때였다. 두 번째 버스에 올라타려는데, 문득 운전사의 이름표가 눈에 들어왔다.
'根子勝之'.
"서, 성함을 뭐라고 읽나요?"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자, 운전기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코 가쓰유키'라고 읽는단다."

 

- 소년의 아버지는 갑자기 몸 상태가 나빠진 체하며, 아무리 교사가 달래도 그 버스에 타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리고 결국, 나중에 출발하는 다른 반의 버스에 타게 되었다.
먼저 출발했던 아버지의 반 버스는, 운전 실수로 도중에 절벽에서 떨어져 학생 다수가 중경상을 입는 사고를 냈다. 만약 아버지가 탔더라면, 앉을 좌석의 위치로 보아 중상을 입었을 것이 틀림없다-자칫하다가는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 이 이야기는 소년의 마음에 곳쿠리 님은 무섭다,라는 강렬한 의식을 심었다.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원래대로라면 고마운 존재로 인식할 참이겠지만, 소년은 도저히 그런 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무서운 계시를 하는 존재.
그것이 소년이 인식하는 곳쿠리 님이었다. 가능하면 관여하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 안 그래도 꺼려지는데, 왜 할머니는 손자를 위해서 그 의식을 하려는 걸까.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도 소년을 불안하게 했다. 불행한 일이 생긴 친척에게 그냥 편지와 부의금을 전해주는 것뿐이다. 일부러 계시를 받아야 할 정도로 중대한 용무도 아닐 것이다.
물론 소년에게는 큰일이다. 가능하면 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머니도 할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짐이 조금 무거운 심부름이기는 해도, 이 정도 일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곳쿠리 님'을 할 생각이다. 모순되지 않은가?

- 이윽고 "오셨습니까?"라는 할머니의 몇 번째인가의 물음에 스스스슥 하고 동전이 '네' 쪽으로 움직였다. 소년은 화들짝 놀라서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들 뻔했다. 
"안 돼!"
곧바로 할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져서 움찔했다.
"곳쿠리 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손가락을 떼서는 안 돼. 자, 알았지?"

- 그런데 아무리 빌어도 동전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할머니는 믿기지 않았는지, 미심쩍어하는 얼굴이다. 계속해서 곳쿠리 님에게 말을 걸자 결국 간신히 움직였지만, 
무... 섭... 다.
세 글자에서 딱 멈춰버렸다.

- 시... 카... 바... 네... 와... 잠... 들... 지... 마... 라.

"시카바네라는 건, 시체(일본어 '시카바네'는 시체를 뜻하는 한자의 훈독이다-옮긴이)를 말하는 것입니까?"
곧바로 할머니가 물었지만, 그 뒤로는 무엇을 물어봐도, 몇 번을 물어봐도 곳쿠리 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간신히 동전이 움직인 것은, "부디 살펴 돌아가십시오"라고 할머니가 말했을 때였다.

- '곳쿠리 님'을 마친 뒤, 할머니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로 뭐라 중얼중얼하고 있었다.
"시카바네는 시체를 뜻하니까, 이 상황에서는 부고가 들어온 시신밖에 없겠지. 그렇지만 그 시신과 우리 손자가 같이 잠을 자다니, 그런 일은 있을 리 없어."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소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그러고는 갑자기,
"아니, 아니, 설마..."
두렵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곧 소년에게 시골의 장례식 절차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그중에서도 그가 오싹했던 것은 탕관불교식 장례에서 시신을 씻기는 일-옮긴이)에 대한 설명이었다.

- 대개의 지방에서는 시신을 천으로 닦는 정도고, 그것도 장의사가 해준다. 다만 아직 옛날 풍습이 이어지는 곳에서는 다양한 의례가 이루어지기도 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장례식 전날 밤에 친족이 시신 옆에서 함께 자기도 한다. 이제부터 방문할 친척집이 그런 곳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가령 그런 습관이 남아있다고 해도 소년이 그것을 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러니까 걱정할 것 없다고 할머니는 말했지만, 그렇다면 곳쿠리 님의 계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 흘끗흘끗 노인을 보면서, 소년은 초조해했다.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지 겁이 났다. 가능하면 자리를 옮기고 싶었지만, 몸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노인의 시선에 의해 좌석에 그대로 묶여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그렇구나. 곳쿠리 님인가."
그러자 노인이 또다시 이상한 소리를 했다.
어떻게 봐도 노인이 말한 '곳쿠리 님'은 주술의 곳쿠리 님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집을 나오기 전에 할머니가 했던 그 곳쿠리 님을 말하는 걸까. 하지만 어째서 이 노인이 그런 것을 알고 있는 걸까. 
분명히 우연이겠지.

- "죽은 사람하고 같이 자다니, 그거 참 싫겠구나."
그리고 노인이 세 번이나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서, 소년은 부르르 떨었다.
이것은 곳쿠리 님의 계시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까지 오싹할 정도로 일치하면, 그렇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 "그게 아니야. 친척 집의 장례식에 가던 어느 이름 모를 소년이 열차 안에서 로쿠바 히로라는 수수께끼의 인물과 만나고, 거기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거지..."
"무슨 일이?"
이쯤에서 조금 주저했지만, 나는 나의 망상 추리를 말했다.
"두 사람의 혼, 기억, 인격, 의식 같은 것이 그 자리에서 뒤바뀌었다..."
"뭐어?"
"S병원의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로쿠바 히로라는 노인의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실은 이름 모를 열 살 정도의 소년이었다고 한다면..."
"..."

"너는 그래서 위화감을 느낀 거야. 말하고 있는 건 노인일 텐데 어린애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진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고 한다면..."

 

- "곳쿠리 님의 계시는 옳았다고 생각해. 다만 '시카바네'라는 건 시체를 뜻하는 일본어가 아니라 로쿠바 히로의 이름을 의미했던 거지."
"'鹿羽'란 한자를 '로쿠바'가 아니라 '시카바네'라고 읽는다는 건가. 그것도 곳쿠리 님이..."
"노인은 이름표가 붙은 가방을 가지고 있었어. 그런 것이 없어도 곳쿠리 님이라면 훤히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 시체가 아니라, 시카바네와 잠들지 마라."
"그런데 소년은 노인의 옛날이야기를 듣다가 잠들고 말았지. 물론 그 노인이 그렇게 만든 게 틀림없어. 너무 나이를 먹어버린 늙은 몸을 벗어버리고, 젊고 새로운 몸을 손에 넣기 위해서."
 
- "소년의 아버지가 수학여행으로 규슈에 갔다는 부분. 소년의 나이로 봐서, 그 애의 아버지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것은 아마도 메이지 시대(1868년부터 1912년까지-옮긴이)가 되겠지." 
"... 그 무렵에는 아직 수학여행이란 것이 없었다든가 하는 얘기야?"
"아니, 있었어. 다만 초등학교에서 수학여행을 실시하게 된 것은 쇼와 시대(1927년부터 1989년까지-옮긴이)에 들어서부터야."
"아버지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자신의 수학여행 체험과 헷갈렸다든가 할 가능성은?"
"그것도 있을 수 없어. 태평양전쟁 이전의 수학여행은, 국가에서 신도 神道에 대해 교육하기 위해서 이세신궁이나 가시하라 신궁 같은 곳을 목적지로 삼았거든.”

 

- 다시 생각에 잠긴 K에게, 나는 또 다른 추리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소년의 할머니가 탕관에 대해서 설명할 때 '대개의 지방에서는 시체를 천으로 닦는 정도고, 그것도 장의사가 해준다'라고 했는데, 이것도 태평양전쟁 이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지방으로 가면 갈수록 천으로 닦는 것 외에도 다른 의례들이 있었고, 그것을 상주나 친족들이 행했을 거야. 그런 습속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적어도 쇼와 40년대 후반이나 50년대 초반(1970년대-옮긴이) 일 거야."

- "그래. 그냥 휴대전화의 약칭이었던 거야. 다만 소년은 아직 가지고 있지 않았어. 만약 있었다면 따분한 열차 안에서도 시간을 때울 수 있었을 테고 오싹한 노인과 얽혔을 때도 그것으로 어머니나 할머니에게 연락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그는 어쩌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몰라."

 

- 거기서부터 두 사람 모두 한동안 말이 없어졌다. 이윽고 K가 무난한 화제를 입에 올리기 시작했지만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고, 그대로 헤어지게 되었다.
그날 자택으로 돌아가보니, K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밤에 어머니의 상태를 보러 갔는데, 그 노인이 병실에서 사라져 있었다. 간호사에게 물어봐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시체와 잠들지 마라>


 

- "'괴이 현상의 진리'에 대한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이젠 괜찮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건 진리 같은 게 아니라..."
"저한테는 120퍼센트의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저 회의적인 나에 대해 도키토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이상하네요. 당사자인 제가 납득하고 있는데 글을 쓰신 선생님께서 부정적으로 반응하시다니, 완전히 반대 아닌가요?"

 

- 일련의 현상을 그녀가 기분 탓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면 분명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이때 나는 아무래도 불안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괴이에도 실은 어떠한 법칙성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생각이 들어맞는 현상을, 실제로 나는 몇 가지나 알고 있다. 그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말 아무런 해석도 불가능한 엉터리 같은 괴이가 이어진 사례 또한 많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또한 사실이었다. 도키토가 겪은 현상이 과연 어느 쪽인지, 이 단계에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염려했던 것이다.

 

- 그렇다고 해도 당사자가 조금도 위기감을 품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아무리 카세트와 MD를 듣지 말라고 주의를 줘도, "이것도 편집자의 일이니까요"라고 대답하면 이쪽으로서도 할 말이 없어진다. 가령 그녀의 상사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이것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좋단 말인가. 어쨌든 상대는 작가에게 도움이 되는 테이프 녹취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칭찬은 못할망정, 그것을 말리는 행동은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 뻔하다. 

- 뭐라 말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통화를 마친 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시체와 잠들지 마라>처럼 다음 작품도 내가 직접 소재를 찾겠다고 말해도, 도키토가 청취를 멈추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번 텍스트 데이터에도, 실은 <기우메, 노란 우비의 여자>의 소재가 되는 체험담이 들어 있다. 요컨대 번듯하게 나의 창작 활동에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단행본으로 내기 위해서는 <기우메> 뒤에 한 작품을 더 쓸 필요가 있다. 마지막 작품이라고 하면 그녀가 오히려 더욱 힘을 내지 않을까?

- 대체 어떡할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서도, 나는 작년 말에 착수했던 <검은 얼굴의 여우>의 집필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 작품은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일본의 탄광을 무대로 한 미스터리풍의 장편으로, 당초에는 '도조 겐야' 시리즈의 신작으로서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료를 모으며 읽는 동안, 이것은 별개의 작품으로 내야 한다고 깨달았다. 그래서 예전에 의뢰를 받았던 문예춘추 쪽에서 낼 신작 장편소설의 테마로 변경하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쓰기 시작하니 특수한 시대와 무대, 테마 설정 때문에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자료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다는 사실도 새삼 통감했다. 그래서 100페이지 정도에서 집필을 중지하고, 먼저 '사상학 탐정' 시리즈(가도카와 호러문고)의 신작인 <12의 제물>을 집필하기로 했다. 이쪽을 탈고한 뒤에, 검은 얼굴의 여는 주요 자료를 다시 읽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쓸 생각이었다.

- 이 시도는 의도대로 잘 풀렸다며 당초에는 남몰래 미소 짓고 있었다. 적어도 12의 제물을 탈고하는 7월 상순까지는...
그런데 그 무렵에 마치 계산이라도 한 것처럼 도키토로부터 메일이 왔다. 첨부 파일을 읽은 시점에서 나는 안 좋은 예감을 느꼈다.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카세트와 MD에서 녹취한 체험담 텍스트였다.

- "저도 가을이 된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선생님, 한동안 카세트와 MD에서 떨어져 있으면 너무너무 듣고 싶어져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오싹해졌다.
"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무리 들어도 쓸데없는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최대한 양을 늘려보려고 하는 동안에 어쩐지 중독된 것처럼 되어버려서..."
그것은 중독 증상이라기보다 오히려 '홀렸다'고 표현해야 하는 상태가 아닐까. 그렇게 느꼈지만, 물론 도키토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막간 (2)>



- 누군가의 죽음에 입회한다. 혹은 조우한다.
시체와 대면한다. 혹은 발견한다.
현대인이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은 가족을 떠나보낼 때 정도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물며 일면식도 없는 타인의 죽음에 관여하는 일 따위야, 그런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분명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것이다. 

 

-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취재를 하는 동안, 어느 점성술사나 절대 거절하겠다고 답한 고객의 질문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도박의 승패에 대해서.
다른 하나는 고객 자신이 죽을 때에 대해서.
전자를 묻는 손님은 꽤 많지만, 후자도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나 결코 응하지 않는다. 취재에 그다지 의욕이 없는 점술가마저도 이 건에 대해서는 "딱 잘라 거절하겠다"라고 단언했을 정도다.

- 그러나 그런 점성술사들 중에서도 전자는 상대하지 않겠지만 후자는 "손님에게 이유를 물어보고,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응해주겠다"라고 대답한 사람이 있었다. 그것이 앞서 말했던 여성 점술가로, 동양 점성술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 그러나 그녀를 설복시킬 만한 이유를 가진 고객은 그 일을 20년 가까이 해오는 동안 단 두 명뿐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중 한 사람은 그녀의 설득으로 후자의 질문을 취소했다고 한다.
"남은 한 사람에게는 본인이 죽을 때를 점쳐서 알려준 겁니까?"
내가 질문하자, "네"라고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어떤 이유로 그 사람은 자기가 죽을 날을 알고 싶어 했죠?"

"그건 알려줄 수 없어요."
 
- 하지만 이내 남자 친구가 내 자취방에 오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죠. 남자 친구의 방은 언제 가도 어질러져 있었고, 내가 정리해도 금방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기우메'라고 이름 붙인 여자 때문이었어요.
노란 우비의 여자, 그래서 '기우메 黄雨女'예요. 내가 멋대로 정한 이름이니까 들어본 적 없는 게 당연해요.

- '기우'라는 거 알아요?
일본어로는 기우. 한자로는 '귀신의 비'란 뜻으로 '귀우', 즉 '鬼雨'라고 쓰는데 무시무시한 양의 비가 내리는 걸 말해요. 이 경우에 '鬼'는 상식의 정도를 벗어난 것을 가리키죠. 
똑같이 '기우'라고 읽는 한자로 비를 바란다는 뜻의 '귀우 祈雨' 가뭄 끝에 내리는 반가운 비란 뜻의 '희우 喜雨'도 있어요.

 -
우리 둘 다 화들짝 놀랐죠.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봤어요.
"내가 1학년 때, 동아리 선배한테 들은 이야기 중에서 말이야..."
그렇게 운을 뗀 미조구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 노란색 우의를 온몸에 걸친 초로의 여자가, 이 부근에서 계절과 날씨를 불문하고 출몰한다. 다만 가만히 서 있을 뿐이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통행인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경우도 없다. 그러나 이따금씩 갑자기 누군가를 응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든 눈을 맞춰서는 안 된다. 모르는 체하고 그 자리를 바로 떠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큰일을 당한다.

- 여기서 사토루가 크게 탄식해서, 나는 미조구치 선배에게 사토루의 체험을 간추려서 말했어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갑자기 웃기 시작하는 거예요.
"일단 얘기를 끝까지 들어봐. 이 우비여자란 건 일종의 도시전설 같은 거야. 다시 말해, 실질적인 해는 없어. 눈을 마주친 것이 우리 학교의 학생이라면, 유급한다든가 졸업하지 못한다든가 하는 그런 결말을 맞는다는 얘기지." 

- 아뇨, 기우메를 본다는 게 아니에요. 그럴 걱정은 없으니 안심해요.
하지만 말이죠, 비 오는 날에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그야말로 지금 막 숨이 끊어지려고 하거나 혹은 방금 숨을 거둔 시신과 만나게 돼요. 네, 이 이야기를 들은 뒤에... 아, 하지만 그건 꼭 인간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모양이에요. 동물이거나 벌레인 경우도 있겠죠.
아주 흐리긴 한데 비는 내리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야기할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지금요? 글쎄요, 어떨까요?
만약 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내리기 시작했다면...

<기우메, 노란 우비의 여자>


- 여기서 갑작스럽지만, 만약 이 작품을 제대로 쓰려고 할 경우에는 아버지가 실종된 날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다든가 하는 설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사건과 연결시키지 않는 한, '며칠 전의 아침에는 지나쳤지만 다음 날에는 만나지 않았다' 같은 사실은 대개는 기억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창작에서는 이런 세세한 곳의 완성도가 중요해진다.
그런데 그날 일어난 대사건 덕분에 슌스케의 물음에 "아, 그날 아침 말인가요?"라면서 반응하는 사람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같은 시도를 사흘 동안 계속했더니, 아버지와 매일처럼 스쳐 지나가던 사람들 거의 모두와 접촉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아무래도 아버지는 네 번째 증인과 다섯 번째 증인 사이에서 사라져 버린 것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일, 처음으로 스쳐 지나간 사람부터 네 번째 사람까지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증언했는데, 다섯 번째 이후로는 "보지 못했다"라고 부정했기 때문이다. 장소로 말하면 20여 년 전부터 영업하지 않은 대중목욕탕과 역 근처의 이발소 사이의, 단 100미터 정도 구간이었다. 이 대중탕부터 이발소 사이의 어딘가에서 아버지는 길을 벗어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스스로의 의사일까, 누군가의 강요였을까. 그것은 여전히 수수께끼였지만...

- 슌스케는 거의 폐허 같은 옛 대중탕부터 조사해 보기로 한다.
나중에 증축된 건물 앞쪽의 빨래방만 영업하고 있을 뿐이고 그 밖의 건물은 폐쇄되어서 전혀 인기척이 없지만, 왠지 모르게 수상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처에 이것저것 물어보고 다녀봐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 폐건물에 관해 돌 법한 소문, 이를테면 불량소년들의 소굴이 되어 있다든가 노숙자가 살아서 곤란하다든가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다든가 하는 이야기조차 전혀 들을 수 없었다.
헛수고였나 보다고 슌스케는 의기소침해지지만, 이윽고 그의 주변에서 기괴한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 도입부로서는 재미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지금까지 그 뒤는 쓰지 않았다. 왜 아버지는 실종되었는가,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매력적인 해답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던 탓이다. 흔한 동기로는 납득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의외성이 있는 동기도 떠오르지 않아서 결국 그대로 방치하고 말았다. 
언젠가는 써먹을 수 있는 설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포기하는 쪽이 나아 보인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어떤 곳에서 알게 된 후지사키 유나라는 20대 중반의 여성으로부터 아래에 소개할 체험담을 들었기 때문이다. 
 
- 이럴 때, 자신이 평소보다 얼마나 늦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은 시각이 아니다. 집에서 출발하는 시간은 7시 45분으로 확실히 정해져 있지만,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에 접어드는 것이 몇 분이며 편의점 옆을 지나는 것이 몇 분이란 식으로 기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도 의지가 되는 것은 거의 매일처럼 자신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다.
평소에는 유나가 교차로의 횡단보도를 건너거나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도로 맞은편에 나타나던 양복 차림의 남자가, 오늘 아침은 이미 이쪽으로 건너와서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 사실만 봐도 자신이 어느 정도 늦었는지를 알 수 있었기에 유나는 발걸음을 한층 재촉했다.

- 물론 저 남자가 평소보다 빨리 일어났거나 혹은 늦잠을 잤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저 사람만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매일 아침마다 반드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그 외에도 여럿 있었다. 유나가 역에 도착할 때까지 적어도 일고여덟 명은 될 것이다. 가령 한 사람이나 두 사람 정도가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얼굴만 아는 몇몇 사람과 계속 지나치며 살다 보면 오늘 아침에는 어느 정도 늦었는지 자연스럽게 눈치채는 것은 간단하다. 

- 그렇다고 해도 생각보다 상당히 오랫동안 집 앞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구나.
만약에 빈 깡통이었다면, '이런 곳에 버리다니!' 하고 화를 내면서 곧바로 출발했을 게 틀림없다. 그렇게 되지 않았던 것은 들꽃이라고는 해도 한 송이의 꽃이 꽂힌 유리병이 자기 집 문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누군가 죽은 현장에 가만히 바친, 죽은 이를 공양하기 위한 헌화 같지 않던가.
대체 무슨 생각이람.
재수 없는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행위를 면식 없는 어른이 할 리 없다고 다시 한번 생각한 유나는, 역시 어린아이의 장난이었으리라고 판단했다. 
텔레비전에서 비슷한 광경을 보고 그 장면을 흉내 낸 것이겠지. 오늘 아침에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등원 혹은 등교하기 전에도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510호실이 선택된 것은 정말로 우연이 아닐까. 분명 깊은 의미는 없을 것이다. 
건널목 앞까지 왔을 때 그렇게 최종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내일 이후로도 계속된다면 관리인에게 이야기하면 된다. 노다씨는 거주자의 바람이나 고충을 잘 듣고 반영해 주므로 안심할 수 있다.

 

- 하지만 그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요컨대 검은 사람의 정체는 그 건널목에서 죽은 누군가이며, 그것은 공양으로 바친 꽃을 찾으러 R맨션의 510호실까지 오려고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일을 당하기 전의 유나라면, 분명 말도 안 되는 괴담이라고 피식 비웃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유나는 상당히 진지했다. 

- 그런데 아무리 조합을 바꿔서 검색해 봐도 해당 기사가 나오지 않았다. K역에서 일어났던 인신사고 기사는 찾을 수 있었지만, 사고 현장이 전철역 플랫폼인 데다 사망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이지? 
가설이 빗나가서 유나는 당황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해석 자체가 날조다. 증명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녀는 그런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막다른 구석에 몰려 있었다. 
 
- 일요일에도 그녀는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는 아무런 해결도 되지 않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를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을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 그리고 월요일 아침을 맞이한 유나는 계속 망설였다.
언제까지나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다. 회사에도 출근해야 하고, 식료품도 곧 바닥날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과 조우할 것이 확실한데도 일부러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닌가. 아니, 그것과 스쳐 지날 뿐이라면 괜찮다. 어쩌면 이미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상황이 된 것은 아닌가... 
문득 한기를 느낀 그녀는, 조용히 현관까지 가서 도어스코프로 복도를 가만히 내다보았다.
...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여.

-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고 들여다보았지만,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어스코프가 고장이 났나 싶었다. 한데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새까맣게 되는 걸까?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린 다음 순간, 유나는 깨달았다. 그것이 문 앞에 서 있다...

 

- 하지만 복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K역까지 가는 길에도 검은 형체와 스쳐 지나가는 일은 전혀 없었다.
열차 안에서 유나는 히나타에게 메일로 이 기쁜 사실을 보고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히나타의 답신이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어도, 퇴근 시간이 되어도 여전히 메일은 없었다. 

 

- 아주 안 좋은 예감이 든 유나는, 그날 점심시간에 히나타가 근무하는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히나타가 무단결근 중이라는 대답을 듣고,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 그래도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면 회사에 가야만 한다. 이번 주는 월요일과 금요일, 이틀이나 쉬었다.
다음 주 월요일 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온 유나는 평소처럼 현관에서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집 안에서, 어서 와...라고 전혀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가 말했다. 
황급히 복도로 뛰쳐나온 유나는, 도로 문을 잠그고 S역까지 돌아가 비즈니스호텔에서 묵었다.
그 후 그녀는 다시는 그 맨션의 방에 돌아가지 않고 -이사 준비는 전부 어머니에게 부탁했다- 다른 연립주택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스쳐 지나가는 것>


 
- 이 책에 대한 회의를 하던 모 패밀리 레스토랑 자리에서 내가 도키토 미나미의 오싹한 체험을 간소하게 정리한 이야기를 마쳤을 때, 이와쿠라 마사노부는 곤혹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지금 말씀하신 내용을 새롭게 더한다는 겁니까? 하지만 그걸 어떤 형태로 독자에게 전하실 생각입니까?"
"다행히,라고 해야 좋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서 생각난 안을, 나는 우선 설명했다.
"도키토 씨에게 의뢰를 받고 나서 마지막 작품을 써낼 때까지, 거의 끊임없이 도키토 씨와 얽힌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섯 편의 작품 앞뒤나 사이사이에 그것들을 '서장', '막간', '종장'이라는 형태로 흩어놓는 것은 어떨까요?"


- "이 책이 미스터리 소설이었다면 절대 불가였겠지요. 하지만 호러니까 딱히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 법일까요?"
이와쿠라는 아직 마음에 걸리는 눈치라서, 나는 조금 더 상세히 말했다.
"도키토 씨가 좋아하는 '괴이 현상의 진리' 말입니다만, 그것에는 다른 '진리'도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체험자가 괴이의 정체나 이름을 깨닫자마자 그 현상이 멈춘다는 것입니다."
"호오."
솔직하게 감탄하는 이와쿠라에게 도키토가 보충 설명을 했다.
"이번 경우에는 여섯 개의 단편과 저의 체험에서 보이는 숨겨진 공통점이, 그것에 해당하는 거죠."

- 마치 물속에서 이야기하는 것 같은...
전혀 수영을 못했던 어린 시절, 초등학교의 수영장 물속에서 부글부글 소리를 들었을 때의 기억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기류가 물속에서 말을 걸고 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상황인데, 묘하게 납득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전혀 짐작도 되지 않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조금씩 머릿속에 물이 채워지는 듯한 감각에 빠진다. 점차 숨이 가빠지는 감각도 느낀다. 그래도 듣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그가 하는 한 마디 한 구절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전혀 인간의 언어가 되지 않았고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데, 필사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가 정지 버튼을 누른 것은, 어떤 의심이 떠올랐던 탓이다. 그의 섬뜩한 수중 언어를 듣고 있는 동안, 말도 안 되는 의심에 사로잡힌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과연 나 자신의 의사였을까?
어쩌면 기류 요시히코에 의해서 망자의 테이프 녹취를 하게 된 것은 아닐까?

- 그런데 이 무렵에 들어서 도키토와의 연락이 뚝 끊어졌다. 재교지를 수령했다는 답신조차도 없었다. 정중한 대응을 하는 그녀치고는 좀처럼 생각할 수 없는 일이어서 아무래도 나는 불안해졌다.
도키토에게 전화를 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이와쿠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의 건강이 안 좋아져서 나머지 업무는 자신이 인계한다는 연락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딱 감이 왔다. 이와쿠라의 눈치가 이상했던 것은 아니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 "도키토 씨에게 무슨 일이 생겼군요."
"아뇨, 그런 건..."
이 대답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말로 건강이 나빠진 것뿐이라면 몸 상태를 설명할 것이다. '무슨 일이 생겼는가?'라는 물음에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 나머지는 이 책이 무사히 간행되고, 독자 여러분이 물에 관한 오싹하고 나쁜 현상을 겪지 않기를, 이라고 멀리서나마 기도할 뿐입니다.

<종장>

 

 


 

 

역자 후기

 


저는 늦은 밤에 미쓰다 신조의 책은 번역하지 않기로 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내용이 내용인지라, 새벽에 혼자 작업을 하다 보면 괜히 기분이 묘해지더라고요. 실제로 예전에 <노조키메>를 번역하던 시기, 새벽 2시쯤에 갑자기 방의 형광등이 툭 하고 나가버리거나 다락 계단에서 어이없이 미끄러져 구르거나 한 뒤로는 기본적으로 계속 지켜오던 방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봄이었던가요, 아직 날씨가 조금 쌀쌀했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경기도 북쪽 외곽의 모 지방 도시에 살고 있는데, 밤에는 더 쌀쌀해지기 때문에 창문은 늘 닫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늦은 밤에 접어들었는데도 길 건너 맞은편 집에서 여자가 수다 떠는 목소리가 계속 들렸습니다. 창문을 닫았는데도 맞은편 집 안까지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죠. 그래서 저는 일도 밀렸고 하니 저만큼 시끄러우면 오늘은 밤에 작업해도 괜찮을까 싶어서, 그날은 새벽 2~3시 정도까지 <죽은 자의 녹취록>을 계속 번역했습니다. 그러다가 잠시 쉬는 타이밍에 문득, 오늘은 마당의 길고양이들에게 저녁 사료 주기를 깜빡했다는 걸 떠올렸습니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가보니, 평소 같으면 한두 마리쯤 어슬렁거리고 있었을 고양이들이 한 마리도 없고 주위는 싸늘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오늘은 다들 어디로 놀러 나갔나? 하고 사료 그릇에 사료를 적당히 담고 있던 중, 저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맞은편 집들의 불이 다 꺼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지금도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목소리는 사람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집 근처 쓰레기 버리는 곳의 전신주에 설치된, 쓰레기 무단 투기 경고 시스템의 자동 음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날 비가 잠깐 왔는데 그 비 때문에 고장이라도 난 것인지, 2초 정도 되는 구간의 음성이 무한 반복하고 있었던 거죠. 창문이 닫혀 있어서 똑똑히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그것이 이웃집에서 밤새 대화하는 소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실제로 그 주변에는 깨어 있거나 돌아다니는 사람은 물론이고 고양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적막했던 겁니다. 무한 반복되는 자동음성을 제외하면... 

기계한테 뒤통수를 한 방 맞은 듯한, 그러면서도 뭔가 괴이한 일을 현재진행형으로 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과 함께 저는 곧 집안으로 쪼르르 돌아왔습니다. 거 참 묘한 일도 다 있네, 하고 마음을 추스르고서 그날은 다행히 별일 없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애써) 기억에서 잊어가고 있었는데, 이 작품이 마무리될 무렵에 담당자님께서 <노조키메> 때처럼 뭔가 또 겪은 것이 없느냐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때는 "그 뒤로는 없었어요. 그리고 그런 일은 읽는 사람은 재미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겪은 사람은 진짜 소름 끼친다구요!"라고 정색을 했었는데... 결국 기억해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적어봅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이번 경험에도 비가 관련되어 있군요... 우연이겠죠. 어쨌든.

저는 늦은 밤에 미쓰다 신조의 책은 번역하지 않기로 하고 있습니다.

현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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