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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로, 권정은, 강지영, 박애진, 류승현, 정지원, 방세현] 한국 스릴러문학 단편선 2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7. 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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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해로 / 권정은 / 강지영 / 박애진 / 류승현 / 정지원 / 방세현
출판 : 시작
출간 : 10.01.07


       

 

인간은 같은 크기의 이익보다 손실을 더 크게 느끼는 손실 회피 경향을 가진다고 한다. 

틀림없이 이익 상황인데도, 최고점을 기준으로 손실이라고 느끼는 것 역시 여기에 속할 것이다.

 

하반기는 여러모로 '지키는' 삶이 목표다. 매매도, 개인의 에너지도, 일상의 균형도.

 

<한국 스릴러문학 단편선 2>는 시작 출판사에서 '스릴러'를 주제로 엮어낸 단편집이다.

(공모전을 통한 선정인지, 앤솔러지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스릴러'라 하면 추리 소설보다는 조금 더 박진감 넘치고 무동기적일 것 같고, 괴이나 호러보다는 현실 공포에 가까울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책을 쭉 읽고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인간 혐오가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즐거움과는 별개로 살짝 우울한 기분이 들었는데- 개인적 취향에는 스릴러보다는 호러가 더 잘 맞는 것 같다. 

 

<7월의 사람들>

박해로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고 있다는 이야기는 앞서 <돼지가면 놀이>에서도 밝힌 바 있다. 호러를 지워내자 남은 것은 악연이었다.

 

<붕괴>

권정은 작가. 개인적으로는 가장 오싹했다. 스릴러와 호러의 경계에 선 작품이 아닌가 싶은데, 소유욕과 집착이 결합되면 어떤 감정이건 섬뜩하게 변질되는 것 같다.  

 

<우리는 미쳐간다>

강지영 작가. '재기'가 조금 아쉽다. 임의로 제기로 수정했다. 그 외에는 있을 법한 이야기라 더 강렬했는데, 케이크 장면을 조금만 더 뚜렷하게 연출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숏컷>

박애진 작가. 개인적으로는 중립. 소시민이 선을 넘는 과정을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그림자놀이>

류승현 작가. 음... 순기능적 덕질과 스토킹의 아슬아슬한 선을 다루고 싶었던 것 같지만. 거의 유일한 해피엔딩이라 기억에 남는다.  

 

<키다리 아저씨>

정지원 작가. 바바리맨의 진화형에다 양들의 침묵을 살짝 섞은 듯한 '키다리 아저씨'. 소녀와 아저씨라는 관계성을 비튼 점도 동명의 소설 속 존 스미스/저비스 펜들턴과 대비되며 섬뜩함을 강조한다. 컴플렉스를 건강하게 다루는 법에 대해 사회적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기도.  

 

<위험한 오해>

방세현 작가. 슈퍼맨 vs 배트맨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대결이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렇네. 슈퍼맨은 변신 전에도 모범생 너드지만 배트맨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두들겨 패주는 사업가였지. 아, 본문이 이런 내용은 아니다. 위와 같은 생각을 하는 한 인물의 오해에서 출발한 방화와 연쇄살인마와의 동거에 관한 이야기.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 2008년 7월의 어느 하루.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저지 촛불 집회와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고, 연일 상승하는 기온과 연료비와 물가에 사람들의 기운이 떨어져 가고, 그럼에도 어디선가 주얼리의 'Baby One More Time'이 신나게 울려 퍼지고 있을 때, 세상의 관심에서 소외된 지방도시 A의 버스 정류장에서 한 사나이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부주의에 대한 분노였다. 

 

- "큰일 났군! 전화받느라 짐을 두고 내렸어!"
막 내린 곳은 종착지인 K시로 가는 길의 중간쯤에 위치한 간이 정류장이었다. 그는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버스는 벌써 시야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 정류장에선 모자를 쓴 단 한 명의 승객만이 승차했기에 출발도 그만큼 빨랐던 것이다. 그는 안타까운 몸짓으로 버스를 세우려 했지만 이미 쏘아놓은 살이었다. 35도 기온이 달구어낸 아지랑이 속에서 버스는 빠르게 작은 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택시 한 대가 맞은편에서 서행을 해왔다.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 "그게 무슨 소리요?"
"무슨 소린지 몰라? 경찰에 연락하면 다 죽는 거란 말이오. 다! 그리고 난 저 버스를 세워야 하고, 당신 도움이 필요해. 내가 짐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줘. 짐만 찾으면 당신에게 아무런 해가 없을 거요. 일도 간단하다고. 손님이 두고 내린 짐을 찾아온다는데 누가 의심하겠어? 단지 저 안에서 예상 못한 일이 생겼고, 그게 더 틀어질까 봐 좀 당황하고 있을 뿐이라고. 난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오. 무사히 짐만 찾으면 날 도와준 대가로 2천만 원쯤 생각이 있소. 어때요? 요금치고 싼 편은 아니잖아." 

- 한영동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쌓은 경험과 직관으로 미뤄보건대 이놈의 말이 반드시 거짓말 같진 않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이 워낙 비현실적이라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믿을 수 없는 세상이긴 하지만 놈의 협박이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문제는 커진다. 나 하나쯤이면 몰라도 가족 걱정은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금관, 그리고 놈의 뒤에 있다는 조직의 두목.... 정말일까, 거짓말일까, 2천만 원은? 도대체 이게 뭐야?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 한영동은 고개를 저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래도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은 그렇게 구미가 당기지도, 그렇다고 결과가 겁나지도 않았다. 특전사 출신의 그는 한창 젊을 때 여기저기를 다니며 모험을 갈구하던 사나이였다. 그 모험이 여러 사업을 벌이게 만들었고 그런 도전마다 실패를 불러왔다. 치밀한 사업전략보다 무턱대고 덤비는 모험정신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그 뒤 덤프트럭을 몰 때도, 호떡장사를 할 때도 타고난 모험정신은 꺾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렵사리 이룬 가정에 자식이 태어나면서 그의 천성은 한풀 꺾였다.  

- <7월의 사람들>, 박해로



- "예쁜 공주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어. 아버지 차에서 내리는 내 검은색 샌들에는 먼지 하나 붙어 있지 않았어. 난 내 얼굴이 비치는 샌들의 광택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네가 말을 걸어올 때까지 네가 거기 있는 것도 몰랐어. 나에게 인사하는 힘찬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네가 웃고 있었지. 넌 나와 다르게 후줄근한 몰골이었어. 다 늘어난 티셔츠에 너덜너덜한 반바지를 입고 있었어. 나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어. 사내아이 같은 네 모습이 우습게 보였거든."
"왜 갑자기 그때 얘기를 하는 거야?"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너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내 눈길을 끌었어. 늘어난 티셔츠를 입은 네가 공주옷을 입은 나보다 더 품위 있고 당당하게 사뿐사뿐 걷는 거야. 방끗 웃을 때마다 살짝 올라가는 눈매가 얼마나 예뻤는지. 널 처음 만난 날, 집으로 돌아온 내가 한 짓은 분홍 원피스를 벗어서 가위로 잘라내는 거였어. 그런 옷을 입지 않아도 아름답고 품위 있는 공주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거든. 자만심 가득했던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된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네가 얼마나 예뻤는데, 그것보다 수연아 무슨 소리 들리지 않니?"

 

- 조용히 옛 추억을 꺼내는 수연의 목소리에 섞여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조대가 작업을 시작한 듯했다. 습한 공기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무너진 건물 어딘가에서 불이 났을지도 모른다. 연기가 올라오면 구조를 기다리지도 못하고 질식할 것이다.

 

- "수연아, 덥지? 숨쉬기는 괜찮니?"
"응."
"공기가 너무 탁하니까 되도록 말하지 말고 구조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어둠 속에서 수연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 사람 처음 봤을 때... 전철 안에서 영주 네가 그 사람 발을 밟았어. 네가 미안하다고 꾸벅 절을 하니까 그 사람이 활짝 웃으며 괜찮다고 했어. 너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 사람 얼굴을 볼 수 없었겠지만 난 그 얼굴을 볼 수 있었지. 마치 태양 같은 미소를 짓는 사람이었어. 밝은 갈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게 보였어. 난 그 사람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어. 네가 내 옆구리를 찌르지 않았다면 난 그를 계속 바라봤겠지. 그 사람은 내 눈길을 피해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어. 스티븐 킹의 <불면증>이었어. 책을 잡고 있던 긴 손가락의 손톱이 단정하게 깎인 것까지도 기억해. 너는 기억나니? 그때의 그 사람?" 
"기억나... 그런데 왜 갑자기 그 사람 얘기를 꺼내는 거야? 너 그 사람 별로 좋아하지 않았잖아."
"뭐? 기억나? 그때의 그 사람 얼굴이 기억난다고?"
고양이가 낮게 우는 듯한 화난 음성으로 수연이 속삭였다.
"기억날 리가 없잖아. 너는 그때 그 사람 얼굴은 못 보았어. 네가 나한테 그랬지... 저 사람 목소리 너무 좋다고. 전철에서 내리면서 그랬지. 목소리가 너무 좋다고 그랬지? 응? 나는 얼굴을 봤고 너는 목소리를 들었어. 그런데 우리 뒤를 따라 내린 그 사람이 말을 건넨 건 너였어. 그렇지?" 
조용하던 수연의 목소리는 점점 흥분으로 떨렸다. 영주는 이렇게 흥분한 수연을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다.

-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그런 말할 때가 아니잖아. 너 괜찮은 거 맞아?"
"괜찮으냐고?"
수연이 웃었다.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목을 울리며 웃었다. 그 낮은 웃음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 "나를 걱정해주는 거야? 또 착한 척하는 거구나. 아... 이래서 나는 널 대놓고 미워할 수 없어."
"수연아 너 정말 왜 그래. 다친 거지? 너 다친 거지!"
수연은 다치고 아프고 두려운 거였다. 그래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였다.
"다 괜찮아질 거야. 나쁜 생각하지 말고 조금만 참자. 내가 곁에 있잖아."
"나는 너의 그런 면이 참 좋아.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야. 넌 무엇하나 부족한 게 없지. 돈도 친구도 가족도, 언제나 만족스러운 상황에서 그 예쁜 얼굴로 미소 짓고 다녔어. 행복했지? 너무 행복했지? 네 행복에 취해서 나를 돌아볼 여유 따위 없었지? 언제나 네 뒤에서 너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그림자 같은 내 존재 따위 생각이나 해봤냐고?" 
"나, 나는 잘 모르겠어.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 영주로서는 짐작도 못한 수연의 속마음이었다. 수연의 비난이 몸 위에 걸린 붕괴한 건물의 잔해보다 더 무겁게 영주의 몸을 짓눌렀다.

- "그래. 너의 그 예쁜 꽃이 핀 착한 머릿속은 검게 썩어 문드러진 내 마음 따위 상상도 못 할 거야. 넌 언제나 예쁘게 웃기만 하면 되지? 네 앞의 모든 일은 척척 순리대로 이루어지고, 길은 언제나 반듯하게 포장되지? 세상이 아름답지? 영주야 말해 봐... 세상이 아름답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왜 나한테 말 안 했니? 나한테 말해줬어야 하잖아. 네가 언제나 내 옆에서 웃고 있으니까 난 네가..." 

- 그때였다. 엄청난 충격이 진동과 함께 영주를 뒤흔들었다. 이차붕괴였다. 영주는 자신을 잡고 있는 대장의 손아귀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걸 느꼈다. 그러고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 바람이 불어왔다. 영주는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눈을 떴다. 상아색 천장이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아 뱅글뱅글 돌았다. 거기서 살아 나왔나? 영주는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또렷하지 않은 의식이 파도 위에 누워 있는 듯 울렁울렁 물결치며 공중을 떠다녔다. 
살아 나온 건가?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이지? 수연이는 죽은 건가? 그럼 성호 씨는? 실종된 성호 씨는 어디에 있는 거지? 죽은 수연은 어떻게 말할 수 있었지? 다 내 잠재의식에서 나온 거짓이었나? 또렷했던 수연이의 목소리. 조롱하고 경멸하고 절망하던 그 목소리들이 다 내가 만든 거짓이었다고? 내가 왜? 사랑하는 수연이에게 그런 대답을 듣고 싶었을 리 없잖아! 나는 미쳤던 건가? 수연이가 죽은 건 사실인가? 그럼 내가 평생 사랑하던 수연을 잃은 건가? 그럼 성호 씨는? 수연이 한 말이 내 머릿속에서 나온 거라면 성호 씨는 살아 있는 건가? 뭐지? 건물 더미 속에서 미쳐버린 건가? 건물이 무너진 건 사실인가? 수연이 내 사무실에 왔었던가? 몽롱해 보이던 수연의 몸짓, 어디부터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내 머리가 만든 거짓이지? 

- 혼란스러운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영주는 참지 못하고 눈을 번쩍 떴다. 상아색 천장, 어지럽고 초점이 맞지 않는 눈에 힘을 준다. 갈증이 너무 심해 물이 마시고 싶었다. 사람을 부르려고 고개를 돌렸다. 넓은 병실을 기대했지만 눈에 들어온 것은 ...

- <붕괴>, 권정은


- 우리 마을에는 미친년이 산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녀와 연애 중이다. 자기 애인을 미친년이라고 부르는 한심한 놈. 그래 그게 나다. 하지만 모두들 그녀를 미친년이라 부르니 나라고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지금 그녀가 내게 다가오고 있다. 푸른색 티셔츠 위에 브래지어를 하고 한복 치마를 받쳐 입은 그녀가. 언뜻 보면 전위예술가 같은 복장이지만 1분만 시간을 내어 그녀를 관찰한다면 누구나 '아, 미친년이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미친년, 아니 내 사랑 미경이가 그 꼴을 하고 제기를 찬다. 제기도 없이 신나게.

- 미경이의 제기는 차지 않을 땐 공중에 떠 있는 모양이다. 그녀가 제기를 줍는 것처럼 허리를 숙인다. 그때 멀리서 어슬렁거리던 정삼이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와 미경이의 허리춤을 잡는다. 그리고 신나게 아랫도리를 놀린다. 정삼이가 보는 곳에서는 절대 허리를 굽히지 말아야 한다는 이 마을의 불문율을 깬 탓에 치르는 곤욕이다. 

"어제 약국 김 씨가 내 가슴을 만진 충격으로 나는 정신이 돌아온 거예요. 그래서 그를 고소하기 위해 지금 경찰서로 가는 길이죠. 오후엔 정신감정을 받으러 병원에 들러야 하고 내일부터는 이 어마어마한 재산을 내 앞으로 돌려야 하니 변호사도 사야 할 거예요. 그 일이 모두 끝난 후에 함께 축배를 들어요." 


-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삼 년 만에 멀쩡한 정신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미경을 유령 대하듯 바라보았다. 이제 누구도 미경의 품에 고구마나 누룽지 따위를 안겨주지 않았다. 그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그녀의 모습을 두 눈 멀뚱멀뚱 뜨고 지켜볼 뿐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미경을 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정삼이였다. 나는 습관처럼 그녀가 돌아올 시간이 되자 마을 어귀로 걸어 나갔다. 미경이 변호사의 검은색 중형 세단에서 막 내리려던 찰나였다. 
"미경이다. 미친년이다. 에라, 이거나 먹어라."
어디엔가 숨어 있던 정삼이 그녀 앞에 불쑥 나타나 검지와 중지 사이로 엄지손가락을 비죽 내밀었다. 미경이 피식 웃으며 정삼을 밀쳤다.
"어어, 저년이 왜 저래?"
엉덩방아를 찧은 정삼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앙칼진 미경의 목소리에 정삼이 찔끔하는 듯싶다가 다시 그녀를 막아섰다.
"형! 형! 옛날에 이년이 나 죽이려고 했다. 형도 조심해."
미경이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어 정삼의 얼굴을 내리쳤다. 철썩, 정삼의 얼굴이 돌아갔고 코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정삼이 얼굴을 제 위치로 돌리며 기묘하게 눈을 반짝였다. 
"아직 상속권은 장자인 내게 있다는 거 잊지 마."
정삼이 한쪽 입아귀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동네 미친년놈이라 불리던 둘이 멀쩡한 목소리로 지금 내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너, 정신이 돌아온 거야?"
미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정삼에게 물었다.
"미친 적 없어. 너처럼."

 

- 버스 한 대가 마을 앞에 섰다. 노인 셋이 짐 보따리를 들고 내리느라 허둥댔다.
"정삼아, 너도 얼른 정신 차려야지. 니 새어머니처럼."
머리에 보자기를 쓴 할머니가 정삼이의 손을 한번 쓰다듬고는 관절염으로 뒤틀린 걸음을 옮겼다. 미경의 눈썹이 파도처럼 요동쳤다.

"가요, 빨리!"
미경이 내 손목을 잡고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나는 그런 미경을 데려다주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당에서 미경이의 어머니인 중년 부인과 마주쳤다.
"미경이가 전하래요. 식탁 위에 올려놨어요."
식탁 위에는 생일 케이크가 있었다.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것조차 잊을 만큼 바쁘고 정신없던 하루였다. 나는 케이크 한 조각을 먹어보았다. 빵은 딱딱했고 생크림은 절반쯤 녹아 맛이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종합해 미경과 정삼의 관계를 연결시키느라 골머리를 썩였다. 아까 노인의 말에 따르면 미경이는 정삼이의 새엄마였다. 그렇다면 정삼이는 본부인의 자식일 테고 그래야 장자에게 상속권이 있다는 그의 말이 들어맞는다. 미경은 내 생각보다 더 영악하고 무서운 여자일지 몰랐다. 내일 이 마을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쉽사리 끝날 일이 아니었고 나 같은 얼치기가 들러붙을 일도 아니었다. 이미 이중인격에 욕망의 화신인 미경이의 사진은 충분히 찍었다. 

- 취직을 해야겠다. 양복을 입고 면접을 보고, 사람 구실하며 살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미경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저택을 찾았다. 그러나 저택에는 이미 나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로 붐볐다. 낯익은 얼굴을 찾다 잡화점 주인을 만났다.
"안에 무슨 일 있어요?"
"어이구, 미경이가 죽었대요. 끔찍하게 살해당했답니다."
그러고 보니 경찰 몇 명이 넓은 마당을 뒤지고 다니는 게 보였다.

"누가 그랬답니까?"
"그게... 그러니까, 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모두들 그쪽을 의심하던데."
그 순간, 형사 한 명이 내 곁에 다가와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이범수, 너를 최미경의 살인용의자로 체포한다. 묵비권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 선임할 수 있고..."
형사가 나를 경찰차에 태웠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 사이에 말간 얼굴의 정삼이 보였다. 

- <우리는 미쳐간다>, 강지영



- "밟고 싶었을 거야. 당연하지. 나도 이해해. 다 이해한다고."
윤배는 뭐가 웃긴지 낄낄 웃었다.
"내가 하루 종일 생각해 봤어."
영진은 침을 삼키고 윤배가 할 말을 기다렸다.
"풀어주자. 풀어주고 끝내자.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것 같지 않아. 설사 너는 신고할 생각이 없어도, 네 가족들이 가만있을까? 네 꼬락서니를 봐. 딱 봐도 웬 미친놈에게 걸려 반 뒤진 꼴이잖아. 어느 가족이 그걸 보고 가만 있겠냐?"
"내가 둘러댈게. 내 목숨을 걸고 약속할게."
영진이 급하게 말했다.
"내가 신고하면, 날 죽여. 진짜야. 죽여도 돼."
"네가 신고하면 난 경찰서에 있을 텐데, 널 죽이긴 어떻게 죽여."
"신고 안 한다니까!"
영진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윤배가 눈을 치켜뜨고 주위를 살피더니, 영진에게 도로 재갈을 물렸다. 영진이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윤배는 손목과 발목도 제대로 묶였는지 확인했다. 
"안 돼. 생각해 봐. 사람들이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지하실에 사람을 가뒀다? 우리 부모님이 이걸 알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안 돼, 절대로 안 돼."
윤배는 혼자 떠들었다.
우리 부모님은 생각 안 하냐?
영진은 재갈 물린 입으로 외쳤지만 웅얼거리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윤배는 무시한 채 김밥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긴 트림을 뱉었다. 그는 잠깐 영진을 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을 잠그고, 아까 영진이 지른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나 사방을 살폈다.  

- <숏컷>, 박애진



- 의뢰인의 시각적 인지력에 중대한 이상이 발생했다. 원인은 나로 추정된다. 문제는 심각하다. 정신의 붕괴를 막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

 

- 새벽 3시, 이십 대 후반의 여자가 편의점에 들어왔다. 여자는 쇼트커트에 검은 뿔테안경을 쓰고 있다. 수수해 보이는 외모지만 다리가 길고 키가 늘씬하다. 그녀는 냉동고에서 아이스크림 한 개를 꺼내 들고 카운터로 왔다. 난 미리 타임 한 갑을 꺼내 손에 들었다. 그녀는 지친 얼굴로 지갑을 꺼내며 말했다.  
"타임 라이트 하나 주세요."
난 손에 든 담배의 바코드를 찍었다. 그녀는 내가 미리 담배를 꺼내 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피곤한 것 같다. 아마도 룸살롱의 손님이 그녀를 귀찮게 한 모양이다. 지금은 화장을 지운 평범한 차림이지만 그녀는 룸살롱에서 일한다. 오후 6시에 출근해 새벽 3시쯤 귀가한다. 그녀가 일하는 룸살롱의 위치는 서울 강남역 1번 출구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P업소다. 그녀의 이름은 홍민정이다. 나이는 28세다. 생일은 9월 19일이다. 

 

-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곳은 없다.

 

- 난 알고 있었다. 이런 모든 현상이 실제로 벌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단지 내가 정신적으로 어딘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난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 어떤 약물치료도, 심리치료도 날 정상으로 되돌리지 못했다. 여러 번의 자살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난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을 택했다.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상가 지하의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후 손목을 그었다. 

 

- 그런데 정신을 차리니 병원이었다. 누군가 화장실 바닥에 흐르는 피를 발견하고 문을 부수고 날 꺼낸 것이다. 2개월 동안 입원했다. 그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멍하니 텔레비전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텔레비전 속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사 인조 아이돌 그룹 A의 일원이었다. 난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청초하고, 사랑스러웠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는 와중에 오직 그녀만 온전히 맨얼굴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있어 중요한 일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지나였다. 물론 가명이고 본명은 홍민정이었다. 

- 화장 따위 죽을 때까지 안 하더라도 상관없다. 가면처럼 밋밋한 표정으로 돌변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녀는 내가 아는 인간 중에 유일하게 정상으로 보이는 인간이다.
그것만이 나의 구원이었다. 난 아이돌 가수 지나가 아닌 일반인 홍민정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 아이돌에서 은퇴한 그녀는 다니던 대학도 그만두고 모은 돈으로 월세 아파트로 들어가 혼자 살기 시작했다. 5개월 정도 아는 후배 연예인의 매니저로도 일했지만 곧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한 것이다. 슬픈 일이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억대의 보험금이 외동딸인 그녀에게 돌아갔다. 어머니는 10년 전에 이혼했기 때문에 보험금은 온전히 수취자인 그녀의 몫이었다. 
그 후 그녀는 6개월 정도 해외여행과 쇼핑으로 돈을 탕진했다. 난 그녀가 간 터키 여행의 여행사를 알아내 패키지여행에 동행했다. 물론 그녀는 날 모른다. 나 역시 그녀를 모른 척했다. 그래도 같이 여행을 한다는 점은 정말 좋았다. 평상시에는 그녀를 보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만족했지만 터키에서의 나는 그 이상을 상상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 그렇다. 인정하고 말 것도 없이 난 스토커다.
다만 난 내가 스토커라는 자각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그녀의 생활에 해가 되거나, 그녀의 일상을 깨버리는 행동은 결코 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생활 패턴이나 스케줄을 알기 위해 그녀의 집에 도청기를 달거나, 이메일 주소를 해킹하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범죄란 걸 알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난 생존을 위해 그녀를 스토킹 하는 것이다. 

- 스토커는 지문인식 도어록과 이중 잠금 자물쇠 중 한 개를 해제했지만, 다른 자물쇠와 보조 잠금장치까지 해제할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난 곧바로 열쇠수리공을 불러 현관을 수리했다. 수리공이 올 때까지. 그리고 와서 현관을 수리할 때까지 홍민정은 내 팔을 꼭 껴안고 절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밤 10시 30분. 수리가 끝나고 수리공이 돌아가고 나서야 난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 나가시려고 한 거 아니에요?"
"아, 저요? 그게 출근하려고 하긴 했는데..."
그녀는 수리가 끝난 지문인식 도어록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그냥 안 갈래요. 심장이 두근거려서 아무 일도 못하겠어요."
"그게 좋겠어요. 그럼 저도 돌아갈게요. 혹시 또 뭔가 수상한 소리가 나면 곧바로 제게 전화하..."
"저기, 지금 꼭 집에 돌아가셔야 하나요?"
현관에 들어선 홍민정이 간절한 눈으로 말했다. 난 잠시 고민했다. 아니, 고민하는 척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집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 목적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더 이상 의뢰인의 정신붕괴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의 정신이 붕괴되는 것은, 즉 나의 소멸을 의미하니까.

 

- <그림자놀이>, 류승현

 


- 하교시간이라 아파트촌 옆 중고등학교 앞으로 차들이 줄줄이 늘어섰다. 학부모들은 제각기 자기 아이들을 태워 사라졌고, 부모가 오지 않는 아이들은 끼리끼리 어울려 집으로 향했다. 딱히 어두침침한 골목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아파트 단지 근처라 크게 위험할 일도 없었다. 
서인은 성주와 함께 학교에서 나왔다. 어둠이 내린 길거리에는 학부모들의 차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서 있었고, 교문 앞에는 어머니들이 삼삼오오 팔짱을 끼고 서서 아이가 나오는지 힐끔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부분은 어느 학원이 좋은지, 어떤 과외선생이 좋은지 하는 것들이었다.  

- "2반에 장효원이라고 있잖아. 알아?"
성주가 서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성주의 팔꿈치가 서인의 옆구리 아랫부분 정도밖에 오지 않는 탓이었다. 서인이 간지러워서 움찔거리고는 성주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몰라. 왜?"
"나랑 민지랑 작년에 걔랑 같은 반이었거든. 근데 민지가 그러는데 걔 가출했대."
"왜?"
서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성주를 바라보았다. 성주가 주위를 둘러본 다음 목소리를 낮추고 속닥거렸다.
"임신했나 봐."
"에엑?"
서인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성주는 진짜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 "너도 걔 본 적 있을걸? 되게 예쁘게 생겼고, 잡지 모델 같은 것도 한 적 있는데, 몰라? 하여튼 남친이 무슨 학원 강사라는데, 나이가 서른도 넘은 아저씨였어. 만날 학교 앞으로 차 끌고 데리러 왔거든."
"우와, 서른도 넘은 아저씨랑 사귄 거야? 우웩이다."
"돈 절라 잘 버는 학원 강사였대. 막 몇 십만 원씩 용돈으로 주고 그랬대."
"음, 그럼 인정."
성주가 뭐가 인정이냐 하는 눈으로 서인을 힐끗 보다가 갑자기 흠소리를 냈다. 서인이 의아하게 마주 보자 성주가 말했다.
"너도 키 크고 날씬하니까 잘 꼬시면 넘어오지 않을까? 너도 돈 많은 아저씨 꼬셔봐."
"으엑, 진짜 싫다! 이래 봬도 내가 눈은 좀 높거덩?"
"하긴. 그 사람 머리도 벗겨져서 하이모 쓴다더라. 그 학원 댕기는 애들이 그랬어."
"거봐, 거봐! 아무리 돈 많아도 대머린 진짜 싫어!"

 

-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며 슈퍼주니어와 빅뱅 중에서 누가 더 좋은지 몇 분 동안 이야기하던 중 갑자기 서인이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럼 그 학원 강사 애 생겨서 장효원이 가출한 거야? 그 사람이랑 동거한대?"
"거기까진 나도 모르지. 하여튼 학교 안 나와서 엄마가 막 학교로 찾으러 오고 그랬대. 근데 학교에서도 모른다고, 애들이 그 남자랑 도망간 거 아니냐고 그러더라. 민주도 그러고. 신문부에서 찾아가서 인터뷰 같은 거 할라고 했는데 신문부 선생님이 하지 말라 그랬다. 풍기문란이라고."
"뭐가 풍기문란이야. 열여덟 살이면 민증도 나오는데."

- 상계동의 대형 단과학원에서 강의하는 수학 강사 조용우는 효원과의 관계를 완전히 부인하다가 납치 이야기가 나오자 재빨리 태도를 바꾸었다. 효원과 몇 번 만난 건 사실이지만 그냥 선생과 제자 관계였을 뿐이다. 아이가 착하고 호기심도 많고 그래서 과외로 수업을 따로 몇 번 해준 거다, 없어졌다는 당일에는 오후에 계속 수업이 있어서 아무 데도 나간 적이 없다, 학원 측에 물어봐라, 수강생이 몇백 명인데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냐라고 했다.  

- 효원의 어머니가 자신의 언니 남편의 대학 선배라는 방송사 피디에게 상황을 이야기했고 여고생 실종사건은 뉴스를 타게 되었다. 경찰의 늑장 초동수사로 실종된 여고생에 대한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효원의 어머니는 방송에 나와서 그렇게 울부짖었고 경찰서 내에는 즉각 특별수사팀이 꾸려졌다. 
솔직히 가영과 관우는 특별수사팀 같은 게 생긴다고 이렇게 실마리 하나 없는 사건이 당장 어떻게 풀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납치사건이라면 지금쯤 연락이 하나라도 왔어야 한다. 돈을 요구하든지 협박을 하든지 하나쯤은 해줘야 수사할 게 생기는데, 이건 뭐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 사라졌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모를 상황이었다. 

 

- "개구리 소년 꼴 나는 거 아니야?"
"야산이 없잖아."
관우의 말에 가영이 힘 빠진 어조로 대꾸했다. 관우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야산이라도 뒤지면 차라리 속이 편하겠네. 방송에 두들겨 맞는 건 진짜 싫다."
두 사람은 평소 효원이 하교하던 코스를 돌아보았지만 여기서 뭔가를 발견할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기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애엄마가 딸의 하교 코스를 제대로 아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딸이 만나는 남자조차 모르는 사람이 뭘 알겠는가?

-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탐문해 보았지만 그저 형식적인 절차일 뿐, 소득은 전혀 없었다.
"강간범이라니까. 강간범은 대부분 면식범이라고. 분명히 아는 사람이 차 태워줄 테니까 같이 가자 그래서 따라간 거야."
관우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아이들은 결국 시체가 되어 나타나곤 했다.
"그럼 주위 사람들을 짚어보자고, 이웃집? 학교 앞에 갑자기 이웃집 아저씨가 나타나서 차를 태워준다고 했다? 그건 좀 이상하잖아. 이 학교가 대로변에 있는 학교도 아닌데."
"집에 가는 길이라면?"
"애 엄마가 애 하굣길이 이 뒷길로 해서 가로질러 아파트 안쪽으로 오는 거라고 했잖아."
"조 형사도 애 엄마가 뭘 아냐고 그랬었잖아. 혹시 알아?"

 

- "부근에서 사고 난 거 없는지 그것부터 확인해 보고, 그다음에 서에 연락하는 게 안전하겠지?"
"괜히 지금 연락했다가 실종 24시간도 안 지났는데 기자들이 먼저 터뜨리면 골치 아프지. 그랬는데 애가 내일 아침에 멀쩡하게 돌아와 봐. 우린 과장님한테 죽을걸." 
가영도 같은 생각이었다. 특히나 가출이 잦은 고등학생의 경우에는 실종 판정을 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웠다. 
하지만 정말로 이게 연쇄납치의 전조라면? 지금 별생각 없이 느슨하게 수사한 게 나중에 치명적인 실수가 되면 어떡하지?
"난 이럴 때 경찰이 된 걸 정말로 후회해."
그녀가 중얼거렸다. 관우가 나직하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좋게 생각해. 진짜로 어디서 사고 나서 병원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라고."
하지만 학교 밖으로 나서는 두 사람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 사라진 아이의 가족들 취조는 서에서 맡기로 했다. 서의 형사들이 집에 있던 어머니를 불러 상황을 설명하고 질문할 동안 가영과 관우는 아이가 지나갔을 만한 길을 따라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수상한 사람을 본 적이 없는지, 혹은 수상한 차량을 본 적이 없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짧은 시간에 사람을 납치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승합 ... "

 

- <키다리 아저씨>, 정지원



- 처음엔 누군가가 담장 위에 음식쓰레기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충동적으로 먹을거리를 샀다가 배가 불러 미처 다 먹지 못하고 적당한 곳에 슬쩍 놓고 가버리는 그런 음식쓰레기 말이다. 

 

- 적어도 처음 일주일 동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집 담벼락이 쓰레기 버리기에 '적당해' 보일 만큼 지저분한가 하는 자성의 마음을 갖고 쓰레기를 치웠다. 
하지만 3주째 같은 일이 반복되자 생각이 바뀌었다. 40년 묵은 낡은 담벼락을 어찌할 방법도 없거니와, 설사 더럽다고 해도 그것이 남의 집 담이라면 그곳에 음식쓰레기를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이 예의 없는 놈은 쓰레기를 꾸준히 버리고 있다. 

- 드디어 본래의 선하지 못한 성격을 드러내며 욕지거리와 함께 담벼락에 놓인 쓰레기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도대체 어떤 자식이야!"
사실 이보다 세 배는 더 강한 표현으로 욕했다. 숨어서 내 모습을 지켜보는 놈이 있기라도 한 듯 부라린 눈으로 주변을 훑으며 소리를 질렀지만 근처엔 아무도 없었다.

- 내장을 다 드러낸 채 바닥에 뒹구는 음식쓰레기를 여전히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던 나는 결국 쭈그리고 앉아 조용히 치우기 시작했다. 허공에 내지른 카리스마가 무너지는 순간이었지만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으니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도를 닦는 자세로 쓰레기를 치우다가, 불현듯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먹다 남긴 줄 알았던 음식쓰레기가 사실은 온전히 멀쩡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싸구려가 아닌 꽤 비싼 것이었다.

- 이거 이상하다. 뭔가 잘못됐다.
누군가, 멀쩡한 음식을 우리 집 담벼락 위에 갖다 놓은 것이다. 그것도 매일 말이다.
'스토커'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였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그 누구도 스토킹 대상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강간당할 뻔한 세상이라지만 와이프와 나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초면인 사람을 긴장시키는 강한 외모와 게으름으로 단련된 뱃살은 날 세상 사람들로부터 늘 안전하게 지켜준다. 와이프의 타고난 검은 피부, 운동으로 단련된 근육질의 몸은, 추리닝에 모자만 씌워놓으면 영락없는 남자고등학교 배구부 선수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런 인물들에게 스토킹을 할 이유는 전혀 없다.

- 그럼 도대체 이유가 뭘까?
담벼락 마니아?
오래된 담벼락에 신기(神氣)를 느낀 사람이 제를 올리듯 토템 의식을 치르는 것일까?
그냥 이것저것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먹어버릴까?
만약 청산가리나 비소가 들어 있다면?
와이프가 끔찍이 여기는 우리 집 개에게 먼저 먹여볼까?
이유가 바로 이 음식 때문일까?

연상퀴즈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만 가지 생각을 떨쳐버리고 당분간은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실제로 음식을 갖다 놓는 장본인이 정신병자일 수도 있기에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 당신, 정말 최고야. 베스트 중에 베스트라고.
내 삶도 평범하진 않다고 생각해 왔지만 당신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겸손해지더군. 당신을 처음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게 뭔 줄 알아? 배트맨이야. 정확히 말하면 배트맨 몬스터 버전쯤 되겠지만 말이야. 배트맨의 가장 큰 매력은 재력도 아니고 화려한 첨단무기도 아니야. 바로 완전한 이중성이지.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은 단순해. 자신만의 복장을 입고 벗는다는 게 특별할 뿐 그들은 잠시도 모범시민이 아닌 적이 없거든. 하지만 배트맨은 기업가와 사냥꾼의 역할까지 완벽히 소화해 내지. (지킬 박사나 헐크는 아예 제외하자고. 그 친구들은 변했을 때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다고!) 그뿐만이 아니야. 슈퍼맨과 스파이더맨은 오지랖 넓게도 재난과 사고까지 막으려 하지만, 배트맨은 달라. 오직 싫은 놈 때려주는 거 말고는 관심이 없지. 

 

- 사실 처음부터 당신 팬이 된 건 아니야. 거부감이 먼저였지. 처음 마주쳤던 당신의 행동은 정말... 심했거든. 나 정도의 강심장이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었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 자리에서 졸도를 해도 백 번은 했을 거라고. 
내가 당신에게 반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지. 지난밤엔 지옥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는데, 정작 일을 벌인 당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깨끗이 잘 손질된 정장을 입고 출근하더군. 와! 어쩜 그럴 수가 있지? 사람이라면 그런 일을 겪고, 악몽에 시달리다가 불면증에 걸려 괴로워해야 정상 아닌가? 지하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멀쩡한 모습이 정말 인상 깊었어. 그 철저한 이중성에서 풍기는 위험한 모습이 내게는 매력으로 느껴졌어. 
'정신 차려! 근처에도 가지 마! 그 사람과 스치기만 해도 죽을지 모른다고!'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외쳐댔지만, 당신도 잘 알다시피 '위험'이란 건 중독성이 강하잖아. 특히 나의 안전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면 위험은 스릴이 되지. 마약보다 열 배는 더 쾌감을 준다는 그 스릴 말이야.
새벽에 검은색 모자를 눌러쓴 채 집을 나서는 당신을 보면 흥분을 느껴. 첫날 본 인상이 워낙 강했기에 더 이상 당신을 따라나서지 않아도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머릿속으로 충분히 상상되었거든. 그러면 난, 상상을 통해 안전하게 당신과의 위험한 여행을 즐길 수 있지.

- 당신은 오늘도 말끔한 정장차림으로 나서는군. 그거 알아? 남자인 내가 봐도 지금 모습보다 밤의 모습이 더 섹시하다는 것. 난 이제 눈 좀 붙여야겠어. 오늘 밤에도 당신이 외출하기를 기대하겠어. 

 

- 이제 일주일만 더 지나면 두 달이다. 그동안 담 위에 놓인 음식값을 계산해 보니 거의 60만 원이 넘는 금액이다. 그동안의 패턴으로 알아낸 사실은, 일요일은 쉰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어쩌면 이 담벼락은 놈에게 성지가 아닌 직장과 같은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정신줄을 놓은 놈이다. 
내가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다. 특히 우리 동네 경찰은 동네 할아버지가 벌인 '개구리 사건' 때문에 이 지역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 방화의 매력이 뭔지 알게 됐어. 불을 지르고 불길이 치솟는 흥분보다 이렇게 구경꾼 사이에 섞여 보는 게 훨씬 짜릿하군. 날 홀대한 대가치고는 값이 좀 비싼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저지른 일 같은 거 걱정해서 뭐 하겠어.
그런데 말이야. 상당히 기이한 점이 있어.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당신 집에서 두 명이 튀어나오는 걸 봤거든.
사람 사는 집에서 두 명이든 백 명이든 사람이 나오는 게 딱히 이상하진 않지만, 왠지 모르게 당신 내외 두 사람만 살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쭉 지켜봐 오는 동안 부부가 같이 나오는 모습은 봤지만 세 사람이 같이 모습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못 봤거든. 내가 너무 과민한 건가?
어쩌면 말이야... 아니, 잠깐.
설마, 서로 모르는 사이는 아니겠지?

-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경찰과 구급대원들, 그리고 다시 개미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하는 동네사람들.
구급차가 출발하면서 그 정신없는 장면들이 영화 속 장면처럼 점점 멀어져 갔다.
내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안면이 있는 형사 두 명이 찾아와 형식적인 안부인사를 건넸다.
"좀 어떠세요?"
"많이 나아졌습니다. 수사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아, 예."
나이 든 형사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며 물었다.
"집에 지하실이 있었던 거 아세요?"
"지하실이요?"

- 벌써 몇 년째 살았던 집이지만 지하실이 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전 주인이 담 밑 구석진 곳의 균열과 사용하지 않아서 막아버린 굴뚝 얘기는 해주었다. 하지만 지하실 얘기는 하지 않았다. 겉보기에도 출입구 비슷한 것은 현관 말고는 없었다. 60년대에 지어져 장독대까지 있는 단층짜리 낡은 집에 지하실이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못했다.
형사는 거보란 듯 동료 형사를 툭 치면서 말했다.
"역시 모르셨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불 때문에 집 바닥이 무너지지 않았으면 저희도 몰랐을 겁니다."

- [다음엔 죽인다]라고 쓰여 있었다.
"방화범이 지내던 방에서 일기와 함께 찾아낸 겁니다. 필체 감정을 해봤더니 선생의 글씨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답장을 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형사도 내 생각을 읽었는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을 이었다.
"도끼살인범이 답장을 준 거죠. 그런데 여기서 일이 한 번 더 꼬입니다. 선생이 방화범에게 남긴 쪽지를 도끼살인범이 받은 거죠. 정리를 하자면..."
형사는 복잡한 문제를 계산하듯 병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방화범은 선생을 도끼살인범으로 착각한 거고, 도끼살인범은 자신의 신분을 위협하는 방화범이 선생이라고 오해한 거죠. 방화범은 선생에게 무시당했다고 느꼈고, 도끼살인범은 선생이 자신의 신분을 가지고 위협한다고 생각한 거죠. 이래저래 선생은 저 두 놈의 적이 된 거였습니다." 
형사의 마지막 말에 소름이 돋았다. 단지 내 집 담 위에 누군가 음식을 올려놓는 게 싫었을 뿐이었다. 정말 그뿐이었다.

- 형사가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에게는 지명 수배자를 끌어들이는 매력 같은 게 있나 봅니다."

난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저주로 들리네요."
"저에게 그런 매력이 있다면 지금쯤 최소한 경찰서장은 하고 있지 않을까 싶네요. 몸조리 잘하시고 수사에 진전이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 나는 두 가지를 몸소 깨달았다.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과 사소한 착각이나 오해가 어마어마하게 큰 파장을 몰고 올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한 번쯤은 내가 알고 있는 게 착각은 아닌지, 오해는 없었는지 한번 더 돌아볼 필요가 있다. 범죄자들의 놀이터였던 우리 집을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곳이라고 믿었던 것처럼 말이다.

 

- 당신이 살고 있는 집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당신의 생각을 얼마나 확신하는가? 당신의 착각과 오해가 누군가를 죽게 할 수도 있다.

 

- <위험한 오해>, 방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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