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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빈, 윤병현, 진위명, 김보람, 박해로, 원상이, 최철진] 10개월, 종말이 오다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7. 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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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최경빈 / 윤병현 / 진위명 / 김보람 / 박해로 / 원상이 / 최철진
출판 : 황금가지
출간 : 12.12.14


       

 

새삼스러운 깨달음 하나.

자신만의 목표를 세우고 그 달성을 축하하는 행위는 소소하더라도 삶에 활력을 준다.

예를 들면 흰 선 밟지 않고 길 건너기라거나 한 작가의 발표작을 모두 읽는다거나 그런 작고 소소한 것들.

 

박해로 작가의 발표작에 대해 남아있던 미진함을 털 수 있어서 무척 개운하다.

그에 더해 기대치 않았던 매력적인 작품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기쁨이었다. 

(보통은 새로 만난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며 또다시 문어발처럼 독서 목록이 늘어났겠지만, 지금은 '지정 도서'로 스스로 제약을 건 데다 소설판 원히트원더인 경우도 있어서 -지금은- 여기까지.) 

 

<10개월, 종말이 오다>는 신체강탈과 종말이라는 주제로 연 공모전 수상작들을 모은 단편집이다. '자신의 의사에 반해 행동한다'는 건 그 자체로도 두려운 일이지만, 희생자가 그 사실을 자각할 수 있느냐에 따라 매우 다양한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이렇듯 한 발 떨어져 감상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인간이란 호르몬과 생존욕구에게 이미 주체성을 강탈당한 존재가 아닐까...?) 

 

 

<10개월>, 최경빈

아주 인상적이었다. '신체강탈'을 폭넓게 해석해 특정 성별이 사라지는 현상으로 활용한 점이 신선했다. 설정이 비현실적이었던 것에 반해 그 상황 속 인물들의 내면은 극히 현실적이었던 점도 좋았다. 접접이 없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무작위로 연결되는 것이 묘하게 현실성을 더한다. (하지만 결국 그 파편처럼 흩어진 이들이 한 자리에...) 제목인 <10개월>은 임신한 여성의 경우 남성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곱씹어 볼수록 인상적이다. 인류에게 주어진 유예기간, 10개월. 

 


<베르테르 증상>, 윤병현

물을 보면 뛰어들어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수인성 전염병. 연가시(Gordius aquaticus)에서 따온 설정으로 보이는데 이 질병의 이름을 '베르테르'라고 명명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머메코네마 네오트로피쿰(Myrmeconema neotropicum), 벼룩파리(Apocephalus borealis) 등의 여러 기생균/충들이 자신의 번식을 위해 숙주에게 이상행동을 일으키는데, 이종족(異種族)인 인간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감염체는 자신이 감염되었음을 자각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감염된 숙주들은 무리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외부로 나와 자살하는 듯한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는 과연. 


<귀환>, 진위명

신체강탈이라는 주제와 직관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현생인류의 끝과 신인류의 시작을 함께한 D-008C '스파이더'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런 해석도 가능할 것 같다.


<미래도둑>, 김보람

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엘렉트라 컴플렉스를 한 방에. 그에 더해 <백설공주> 등에서 나타나는 어머니와 딸이라는 관계를 자기 복제 또는 강탈로 해석했다. 흥미롭고 매력적이었지만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법한 작품. 내 경우에는 호. 


<운수 나쁜 날>, 박해로

<운수 나쁜 날>과 <B사감과 러브레터>를 오마주한 작품. 사상이나 신념의 변질을 외계 존재에 의한 신체 강탈로 은유적으로 치환해 표현했다. 설정한 배경에 맞춰 문체나 표현을 잘 다듬는 것은 박해로 작가의 강점이기도 하다. 단편들을 읽다 보면 원래는 사회 소설을 지향했던 게 아닐까 싶어 지는데, 최근작으로 갈수록 특정 관점보다는 현상 자체를 보여주는 형식으로 쓰는 경향이 보인다. 호러를 선택한 건 조금 더 자유롭고 싶어서였을까?


<금연클럽>, 원상이

외계생명체에 의한 신체강탈을 그린 작품. 감염된 사람은 '시모토아 에시구아(Cymothoa exigua)'라는 기생충과 닮은 형태의 혀를 갖게 되고, 이쪽이 본체다. 실제 해당 기생충이 이상행동을 유발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현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에시구아는 형태만 변할 뿐 기능적인 이상은 일으키지 않는 공생체 쪽에 가깝다. 담배 연기로 쫓는다는 설정은 모깃불을 연상케 하는데... 마지막 돛대의 소중함이 잘 녹아든 절박한 결말이었다.  


<HOOK>, 최철진

'신체'를 폭넓게 해석한 작품. 어떻게 보면 정신적 강탈로도 보이고 -지소 팬- 또 어떻게 보면 육체적 강탈로도 보이는데 -화자의 구속- 중년의 열정과 새 출발을 이런 시각에서도 볼 수 있구나 싶다. 정답지처럼 강요해 놓고 정작 자신들을 탈주하느냐는 원망으로도 읽히고, '내 편'이라고 정한 이들을 무지성적으로 옹호하는 현상을 질타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작품 자체를 떠나 개인적으로 생각해 볼 지점이 많은 작품이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10개월>.

좋았다.

   


   

 

  종말 문학, 그리고 신체 강탈자

인류의 존망을 위협하는 가까운 미래를 만난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인류의 어두운 미래를 다루는 종말 문학과 신체강탈자 문학을 테마로 한 단편소설 일곱 편을 만난다. 인류나 지구, 혹은 여러 의미에서의 종말을 다룬 종말 문학은 오래 전부터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아 왔다.

 

100여 년 전, 외계인의 침공을 다룬 <우주전쟁>을 시작으로 싹을 틔운 종말 문학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냉전시대에 이르기까지 핵전쟁 위협으로 인한 첫 번째 융성기를 맞이했다. 이 당시 발표된 작품 중에는 세 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진 <나는 전설이다>, 방사능으로 인한 최후의 인류를 그린 네빌 슈트의 <해변에서>, 스티븐 킹의 대작 <스탠드> 같은 본격 종말 문학에서부터, 마이클 클라이튼의 <안드로메다 스트레인>, 아서 C 클라크의 <태양계 최후의 날>, <유년기의 끝>과 같은 SF를 비롯하여, 오에 겐자부로 <핀치러너 조서>, 왕리슝 <황훠(黄禍)>등 아시아 거장의 작품들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외에도 <라이보위츠를 위한 송가>, <세계가 충돌할 때>, <고양이의 요람>, <아아, 바빌론(Alas, Babylon)>, <지구는 죽지 않는다(Earth Abides)>, <기나긴 내일(The Long Tomorrow)>, <잔디의 죽음(No Blade of Grass)> 등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1950~1980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종말 문학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냉전 체제가 무너지자 종말 문학은 잠시 주춤하는 듯했다.

하지만 세기말의 도래와 불투명한 미래, 9.11 테러 등 새로운 위협 다가오면서 최근 종말 문학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로드>, <눈먼 자들의 도시>, <세계대전Z> 등의 베스트셀러가 두 번째 종말 문학의 융성을 이끌고 있는 대표작들이다.

종말 문학의 한 축으로 볼 수 있는 신체강탈자 문학은 존 W. 캠벨 주니어의 1938년 중편소설 <거기 누구냐?(Who Goes There?)>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이 작품은 존 카펜터의 유명한 영화 <괴물(The Thing)>의 원작이다. 외계 생명체가 인간의 육체와 기억을 점거하고 접촉을 통해 종족을 번식시켜 결국 인류가 멸망에 이르게 될 위기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이 작품이 정확한 의미의 '신체 강탈자'를 뜻하지는 않지만, 이후에 발전된 여러 작품들을 생각해 보면 <나는 전설이다>가 마치 좀비가 등장하지 않음에도 좀비 아포칼립스 문학의 기원인 것처럼, <거기 누구냐?>가 '신체 강탈자' 문학의 기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51년 발표된 로버트 하인라인의 <에일리언 마스터(the puppet masters)>와 1955년 발표된 잭 피니의 바디 스내는 '신체 강탈자'를 구체적으로 다룬 작품들이다. 흉측한 외계 생명체가 등판에 붙어 인간을 조종한다거나, 씨앗이 인간이 잠들면 육체를 점령한다는 내용은 종말 문학의 융성과 함께 큰 주목을 받았다. 이 두 작품은 영화로도 다양하게 발전했는데, 최근 영화 <인베이전>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패컬티>, <에일리언 마스터>, <바디 에일리언>, <우주의 침입자: 원제 신체 강탈자의 침입>(1978, 1956) 등이 있다.

본 도서에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 넓은 의미에서 종말 문학이다. 신체강탈자 문학 공모전 수상 작품을 이 작품집에 넣은 이유도, 신체강탈자 문학 역시 기본 개념은 종말 문학이기 때문이다. 일곱 작품 모두 재기 넘치는 이야기와 흡인력이 뛰어난 장점을 자랑하며 수상한 작품들로서, 국내 장르 문학에서 종말 문학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황금가지 편집장

 


 

최경빈 : 이십대 후반으로 연세대 국문과를 나왔다. 소설가 지망생이다.

윤병현 : 서울예술대학을 졸업했다.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25세기 인사법>을 게재했다.

진위명 : 1972년생으로 B급 SF와 호러에 무한한 애정과 집착을 가진 갈수록 늘어나는 허리굵기에 고민중인 자칭 1세대 오덕후 중년남. 생애 처음으로 쓴 글이 책으로 나온다는 사실이 무한정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누가 볼까 부끄럽기도 해서 가명으로 언더커버할 정도로 새가슴 소심남이다. 

김보람 : 1986년생.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미래도둑>이 게재되었으며, 연극으로도 만들어져 상연되었다.

박해로 : 1976년생. 1회 ZA문학 공모전에서 <세상끝 어느 고군분투의 기록>이 심사위원 추천작으로 선정되었고, 신체강탈 문학 공모전에서는 <운수 나쁜 날>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운수 나쁜 날>은 최근 KBS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인 라디오 독서실에서 드라마로 극화되기도 했다.

원상이 : 온라인에서는 보통 '탁사스'라는 닉네임으로 주로 활동한다. 10년전 쯤 인터넷에 호러 소설을 연재했으며, 그 때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지금도 종종 글을 쓰고 있다. 지금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글로 밥 벌어먹고 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최철진 : 1986년생, 한국예술종합학교 협동과정 서사창작과, 신체강탈자 공모전에서 <HOOK>으로, 제2회 ZA 문학 공모전에서 <나에게 묻지 마>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 그날도 그가 아내를 사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누군가 그에게 아내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언제나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매일 같이 자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랑을 자각하지 않는 순간에도 사랑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가 그날 아내를 사랑했는지 혹은 사랑하지 않았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한 건 그가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고 자각하는 빈도가 잦았던 시절은 이미 이십여 년 전에 지났다는 것과, 그 전날 밤 그가 당직으로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사실뿐이다. 

- 그는 천천히 아내에게로 다가섰다. 무언가 조금 이상했다. 아내의 시신을 바라보며, 그는 무엇이 이상한지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 그는 눈을 의심하며 시신을 가까이서 살폈다. 사실을 확인한 그는 충격에 빠져 시신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비록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의 아내가 맞는 듯했다.
아내는 남자로 변한 채 죽어 있었다. 마침내 그는 주저앉고 말았다.

- 세상은 작년 12월 25일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왜 하필 크리스마스부터였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날의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들떠 있었다. 눈이 오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크리스마스는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그날에도 공장에서 먼지를 마시고, 누군가는 전 날의 당직으로 쌓인 피로에 종일을 잠자는데 보내고, 또 누군가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리에 반짝이는 알록달록한 불빛과 가수들이 부르는 캐럴, 그리고 어쩐지 평소보다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데 만족하고 있었다. 
 
- 그날이 좀 덜 특별한 날이었더라면 사람들이 받은 충격 역시 덜했을까, 또 내가 그날을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면 머릿속이 무거워진다.  

- 더 이상은 그녀와 함께 할 수 없다. '그녀'는 없다.

- 지난 두 달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따금 떠올리던 망상들이, 우리는 남들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우리만은 특별할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희망의 잔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소용없을 것을 알면서도 수시로 떠오르는 헛된 기대의 파편들을, 단지 떠올랐다는 것만으로 위로받으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던 두 달. 그럼에도 기대가 무너질 순간의 절망이 두려워 서로에게 그 희망을 감추던, 각자 가슴 깊숙한 곳에 희망을 파묻던 나날들의 적막함이 후회로 남아 날 괴롭혔다. 우리는 지난 두 달간, 아니 붙어 있던 열흘간이라도 희망을 가져야 했을까. 혹시 희망을 놓아버린 우리의 보잘것없는 의지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왜 우리는 우리가 특별할 것이란 믿음을 그리도 쉽게 포기해 버렸을까. 

- 앞날에 대한 막연함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허파를 짓눌렀다. 이제는 그 어떤 여자도 사랑할 수 없을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건 그녀와의 사랑을 과대평가하는 감수성이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전망일 뿐이다.
세상은, 아니 인류는 멸망해 가고 있다. 천천히, 혹은 빠르게. 인류는 번식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더 이상 후손을 남길 수 없는 상태로 죽어갈 것이다. 사라져갈 것이다. 여자가 사라져 간다. 12월 25일 이후, 모든 신생아는 남자로 태어나고 여자들은 소녀건 할머니건 남자로 변해가고 있다. 더 이상 태아는 수정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그렇다. 오늘 아침 본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밝힌 성비 추정치는 이미 7:3을 넘어섰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을 즈음에는 세상에 여자가 없을 테니까. 

- 모든 인류에 대한 거세 수컷의 슬픔은 공포와 절망의 색채를 띠었고, 수컷의 세상은 미쳐갔다. 남은 여자들이나마 유린하려 눈을 벌겋게 뜬 광기어린 사람들이며, 일찌감치 동성애로 눈을 돌린 영리한 사람들, 다 포기하고 경건히 수음하는 사람들, 그러한 무리 속에 이제 나 역시 속할 터였다. 절박하고 치열한, 그러나 아무런 희망도 없는 멸망의 심연. 그 한가운데에서 다만 내가 조금 특별한 점은 여느 이별한 연인과 같은 '평범한'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연인과의 이별은 그 상황이 어떻건 다른 모든 가치를 무색하게 만들고 한 사람을 단지 슬픔에 젖게 만든다. 그래서 난 거세된 수컷의 공포에 질린 어떤 한 부류에 속하기보단 한 명의 철저한 개인으로 실연의 슬픔에 지배당하고 있다. 나는 근본적인 절망보단 추억과 그리움 때문에 괴로웠다. 

- 비로소 내가 진정 원했던 바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사랑한 건 그녀 자체였다. 그녀라는 사람을 사랑했기에, 혹 그녀가 여자가 아닐지라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중요한 건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고, 그녀 역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였다. 그런 그녀와의 섹스는 결핍이 아닌 충족이었던 것이다.

 

- "괜찮겠어?"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안에 나를 조금 남겨두고 오는 그 행위를 지난 며칠 간 얼마나 하고 원했던가. 그녀가 내 것이란 사실을 얼마나 확인하고 싶었던가. 비할 데 없는 쾌감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을 감고 있는 채였다. 이건 새로운 시작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작은 우리의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그녀를 잃지 않을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선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나는 되뇌었다. 어떤 이들은 이 행위에 대한 역사를 논하고, 어떤 이들은 이 행위에서 보통 남녀의 성교로는 얻을 수 없는 쾌락을 느낀다고 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다른 어떤 이들에게 각광받고 있다면, 그 일은 분명 나름의 매력을 가진 일일 것이다. 아직 내가 모른다고 해서 배척해선 안 된다. 그 매력을 깨닫는 일일지도 모른다. 엎드린 그녀의 뒤에 무릎으로선 채, 어렵사리 눈을 떴다. 


-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항문을 들이민 채 삽입을 기다리는 한 남자의 육체였다. 어깨에서 둔부까지 이어지는 각진 선과 튀어나온 척추, 둔부 아래 다리 사이로 보이는 고환. 그 고환이 달랑거렸을 때, 고환 너머로 빳빳해진 남자의 성기가 보였다.
엉겁결에 나는 그를 밀쳤다. 갑작스레 밀쳐진 그는 경악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허겁지겁 팬티를 입고 바지를 입었다. 바지에 다리 한 쪽을 집어넣고 반대쪽 다리를 집어넣다가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넘어지며 가야금에 부딪쳐 가야금이 댕하고 울렸다. 

 

- 밤을 새워 생각한 끝에 인석은 여자가 아닌 아내는 아내로서의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내는 더 이상 섹스를 할 수도, 아이를 낳아줄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동반자가 있으므로 해서 생기는 수많은 장점들이 떠올랐지만, 인석은 자신이 남자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사실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함께 살아온 정 때문에, 비록 인정하기 싫지만, 자신의 아내였던 사람인 건 부정할 수 없기에, 그는 아내를 내쫓기까지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아내를 애정으로 대할 필요 역시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내의 뺨을 다시 한 번 때렸다. 
"저리 꺼져."
아내의 표정이 경악으로, 그러고는 이윽고 분노로 바뀌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안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그고 숨을 헐떡거리는 것만이 아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 인석이 유일하게 건드리지 않는 이는 큰 아들뿐이었다. 그는 큰 아들을 때리기는커녕 오히려 이전보다도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큰 아들은 그런 아빠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 큰 아들은 엄마와 동생을 때리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말을 했다간 자신 역시 아빠의 미움을 사게 될 것이라는 치사한 두려움과 자신을 아껴주는 아빠의 애정과 믿음을 저버려선 안 된다는 책임감이 반반씩 작용했다. 그래서 큰 아들은 아빠의 옆에 앉아 함께 TV를 봤고 아빠는 자신과 큰 아들이 먹을 2인분의 밥만을 짓거나 사왔다. 때로는 밥을 사러 나가는 길에 큰 아들이 좋아하는 책을 사오기도 했다. 엄마는 아빠가 방에 들어가 있을 때나 화장실에 가 있을 때만 부엌으로 나와 대충 밥을 지어 작은 아들과 나누어 먹었다.

 

- "아이야. 이 우물 안이 보이니?"
아이는 우물을 들여다보고는 말했습니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여요."
아이의 말에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난 가끔 마법으로 저 안을 보곤 한단다. 그러면 어둡고 까만 물 위로 비치는 날 볼 수 있어. 물이 일렁이지 않아서 꼭 거울을 보는 것처럼 선명해. 그리고 아이야."
마법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습니다.
"난 널 볼 때마다 이 우물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단다."
마법사는 말을 마치고는 허리를 꺾어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마법사의 말에 몹시 화가 났어요. 어제 아이가 마법사와 아이는 다른 사람이라고 그렇게나 말했는데 마법사는 하나도 못 알아들은 것 같았어요. 아이는 화가 잔뜩 나서는 마법사를 밀어버렸습니다.
마법사는 악! 소리를 지르며 우물 안으로 빠졌어요. 우물에서 풍덩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아이는 깜짝 놀라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는 성 안으로 도망쳤습니다. 우물에서 마법사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아이는 귀를 막고 방 안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날 밤 아이는 밤이 새도록 울었습니다.

- 다음 날부터 아이는 작고 예쁜 성에서 혼자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산책을 했습니다. 함께 지내던 마법사가 없어지자 아이는 심심했어요. 그래서 아이는 저녁마다 마법사의 안락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습니다. 무척이나 외로웠습니다.
어느 날 아이는 청소를 하다가 잔뜩 구겨진 노란 종이를 발견했습니다. 그 종이 가장 위에는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드는 법'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아이는 종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다음 날 아이는 주머니에 노란 종이를 집어넣고 가방을 메고 성 밖으로 나섰습니다. 아이는 숲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숲에 들어서자 작은 찌르레기가 말을 걸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마법사 님?"
"난 마법사가 아니란다. 찌르레기야. 난 아이라고 해."
"아, 그런가요? 안녕하세요, 아이 님?"
"응. 찌르레기야. 그런데 혹시 나에게 깃털 하나만 뽑아줄 수 있겠니?"
찌르레기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습니다.
"왜요?"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고 싶어서."

- 당신은 불행하다. 당신은 물론 때때로 행복하겠지만 대개의 경우 별다른 감상이 없는 일상을 이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간혹 불행하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당신은 불행하다. 행복의 순간은 불행을 예견하지만 불행의 순간은 온전히 불행만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행복과 불행에 대해 생각지 않는 모든 별 볼일 없는 시간들의 무의미함은 당신의 불행을 살찌운다.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행복만으로는 당신의 행복한 정도를 묻는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질문에 행복하다고 답하는 당신은 희망이라는 사기꾼의 봉이거나 행복에 대한 강박에 타협한 사회의 희생양일 뿐이다. 그래서 행복 앞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나름이다. 애써 위로할 거리를 찾아 타협하는 것이다. 그런 타협의 결과물인 나름의 행복은 불구니 어차피 당신은 불행하다. 행복의 결핍은 곧 불행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행복 추구의 이데올로기는 깊게 자리 잡고 있다.

- 여기 어두운 방 안에 갇혀있는 이 남자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불행하다. 그는 나름의 행복을 찾기는커녕 희망이라는 사기꾼조차 함부로 찾아오지 못할 만큼 만신창이였다. 말하자면 그는 불행의 가장 깊숙한 곳에 침몰한 채 허우적댈 엄두조차 못 내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는 비극 속의 불행한 주인공도 아니었고 비장함을 머금은 순교자도 아니었다. 그러한 종류의 슬픈 불행은 아름다운 면이라도 있었다. 그는 고통조차 느끼기 힘든 상태였고 그저 빛이 새들어오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다는 느낌뿐이었다. 그러한 종류의 절망은 자아를 완벽히 수동적으로 만들었다. 불행의 첨단은 어둡고 고요했다.

- 고통과 불행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보통의 경우 둘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성립되지만 극한의 상태에 다다를 경우 둘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아진다. 고통의 극한 역시 어둡고 고요하기 때문이다. 정신적 고통, 육체적 고통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 남자는 지난 몇 시간에 걸쳐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이 놀라울 만큼 두드려맞았다. 아프고 아프고, 아프다보니, 아프지도 않았다. 피가 흐르고 살이 부어올랐지만 의식과 육체 사이에 담이 놓인 것처럼 아련하게만 느껴졌다. 남자의 정신적 고통 역시 마찬가지였다. 절망하고, 절망하고, 절망하다보니, 마치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 고통의 첨단은 그처럼 어둡고 고요했다. 

- 그는 딱히 게임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10년 가까이 하루에 열두 시간씩 게임을 했다. 그가 왜 그렇게 주야창전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었는지는 그 자신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렇게 재미있는 게임도 아니었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별 생각 없이 클릭만 계속하면 되는 게임이었다. 그건 일종의 관성이었다. 몇 시간 동안 클릭을 하다 보면 하루 종일 하게 되었고, 하루 종일 하다보면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클릭만 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십 년이 흘렀다. 그는 컴퓨터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라면이나 피자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이따금 아이템 현금 거래 사이트에서 아이템을 팔아 생활비를 마련하며 살아갔다. 그가 하던 게임은 현금성이 뛰어난 게임이어서 어차피 가족도 욕심도 없는 그에게 별다른 금전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희귀한 아이템이라도 얻은 날에는 그가 자주 시청하는 인터넷 개인 방송 BJ에게 수십만 원 어치의 '별'을 선물할 만큼 여유도 있는 편이었다. 대충대학을 다니다 대충 군대를 다녀오고 대충 지내다보니 어느샌가 그는 그렇게 살고 있었다. 

- 그러한 삶은 물론 불행했지만 어떤 의미에선 남들보다 덜 불행하기도 했다. 어차피 모두가 불행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바에야 발버둥치지 않고 가만히 있는 편이 나았다. 그는 관성에 의해 살아갔고, 당연한 얘기지만 능동적으로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다리가 아닌 관성의 바퀴에 몸을 맡기다 보니 행복한 순간이 적어지는 만큼 행복의 결여로 인한 불행도 적어졌다. 사회적으로 보면 용납할 수 없는 잉여 인간이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딱히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는 사회가 교육으로 주입한 생산성 높은 인간상에는 관심이 없었다. 높은 가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남들을 비웃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신도 그리 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관성의 바퀴는 꽤 안락 ...  

 

<10개월> 최경빈



- 자살이 병이라고 했어요.

- "통제되고 밀폐된 국가에서 군인 여섯 명이 다 함께 자살할 만한 이유가 뭐냐? 소총이면 그러기도 힘든데, 한두 명도 아니고 여섯 명이나 이럴 수가 있느냐, 음모다, 약이다, 애꿎은 종교인들을 잡아 치질 않나. 넌 이게 그것들 때문처럼 보이냐? 아, 물론 그것 때문인 경우도 있겠지. 북쪽에서 나름 먹고 산다는 군인들이 집단자살할 정도는, 글쎄, 난 이게 집단적으로 일으키는 병의 일종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 사실 자살 사고가 우리나라에서 드문 건 아니에요. 집단만 아니다 뿐이지 하루에 6명쯤은 가볍게 넘길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때부터 선배가 한 말이 제 머리에 총알처럼 와 박히더라고요. 팍! 하고. 그 총알이 제 머릿속에서 녹슬었어요. 한 단어가 사방을 좀 먹어 가는데 이제 눈에는 온통 그것만 보이더군요. 
우리나라에서도 대동강 사건 덕분에 신났잖아요. 부패하고 병든 괴뢰정권이 환부를 드러냈다, 독재정권의 몰락을 알리는 총성이다, 운운하는 신문들요. 물론 그치들이야 신났겠지만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어요. 사실 사건이 워낙에 국지적으로 발생해서 누구라도 제대로 알기가 힘들었을 거예요. 북쪽에서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심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쪽 사정은 파악할 수 없잖아요. 북쪽에서 배가 넘어와도 NHK방송에서 좌표 따와서 찾아간다고 하는 농담이 있을 정도인데. 그나마 알려진 사건이라면 서해안 초병사건이라고 해야 할까? 서해안에서 초병 둘이 근무하다가 둘 다 머리에 총 맞은 채 주검으로 발견된 사건이요. 사이좋게 탄창에 탄은 하나씩 비어 있고.  
언론에는 서로 쏜 걸로 되어 있지만, 지금 와서는 의심할 여지도 없죠. 증상을 일으킨 거죠. 그게 10월이었죠. 선배는 그 신문 기사를 가리키면서 말했어요. 거봐, 하고. 

- 가을이 시들자마자 그게 꽃을 피웠어요. 와, 엄청났죠. 대동강 일 같은 건 묻혀버릴 정도로 한꺼번에 일어났어요. 하찮은 자살 사건은 입에 오르지도 않았죠. 하나로 묶어서 불렀어요. 종교계에서는 말세, 심리학계에서는 집단 광기, 정치계에서는 여당 잘못, 야당 잘못. 그뿐이었어요. 겨울인데도 그건 엄청난 기승을 부렸어요. 그때 일어난 사건이라면, 그게 생각나네요. 수능 직후에 고등학생 일곱 명이 한강 다리 위에서 몇 분 간격으로 투신한 사건요. 한강 다리 전체에 펜스를 설치하게 되는 계기가 되긴 했지만 어디 자기 죽이기로 마음먹은 사람을 그런 걸로 막을 수 있을까요?

- 그때 누가 사회 전체에 자살이라는 병이 만연해 있다고 했었죠 그 사람은 비유한다고 한 거였겠지만, 그때 누가 한 말보다도 가장 진실에 가까웠어요. 그 전까지 자살은 사회적 문제를 도구로 한 체제의 살인이라고도 하고 우울증이나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어요. 주변의 따뜻한 관심? 과도한 경쟁으로 인해 낙오된 사람들의 비애? 손을 잡고 함께 가는 사회를 만듭시다, 라고 말하던 공익광고, 가족이 손을 잡고 함께 뛰어내리는 일은 있었죠. 언론은 개개인의 죽음은 제대로 잘 다루지 않아요. 집단 자살 사건만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데 그게 어디 눈에나 들어오겠어요? 물론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챈 게 저만은 아니었겠죠. 두 번째는 활자와 영상 대신 눈으로 확인해야 했어요.

- 식수 문제가 해결된 건 천만다행이었죠. 하지만 씻는 건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샤워는 이때까지 하던 데로 수건에 물을 묻혀서 닦아내면 되지만 머리를 감는 건 정말 어려워요. 눈이나 귀, 코, 입에 물이 들어가면 곤란하니까요. 마스크를 하고, 안대까지 끼고 최대한 머리를 숙여 감긴 했지만 결국 자주 감지 않는 게 답이었어요. 정말 포기해야 했던 건 양치질이었죠. 이건 어쩔 수 없었어요. 언제 해결될지 모르는데 식용으로 쓸 물도 부족했으니까요. 그것 말고도 정말 생활에 에러가 많았습니다. 민물에 소금을 푼다고 W충이 언제 죽으리란 법이 없어서 해양심층수로밥을 지었어요. 소금물로 밥 지어보셨어요? 짭조름한 게 간은 배는데 알이 물러지고 맛도 없어요. 쌀을 씻는 건 엄두도 못 내죠.

- 나름 살겠다고 이 짓을 했지만 사실 자신은 없었어요. 이미 그전에 감염되었을 확률이 높았으니까요. 그저 당장 죽지 않으니까 아직 감염되지 않았을 거라는 희망만 갖고 살 수밖에요. 사실 그런 부담감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어요. 자기가 감염됐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병원을 찾아가도 그 작은 충을 찾기도 힘들뿐더러 찾는다고 해도 어떻게 할 거에요? 두개골 갈라서 끄집어 낼 거예요? 어찌어찌해서 꺼내는 걸 성공한다면, 다시 감염되지 않을 자신은 있어요? 고도의 청결과 의학 수준을 유지할 만한 체계는 이미 감염 초기에 다 박살났어요. 베르테르 증상은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까요.

- 이 지경이 되니까 희생자 수가 줄어든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어요.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판국인데 치료는커녕 체제를 유지하는 것도 아슬아슬했죠.  


- 선배는 죽기로 작정한 사람이었어요. 선배는 제 표정을 보고는 깔깔거리면서 웃더라고요.

"왜, 죽을까 봐 무섭냐?"

선배는 그러더니 손에 물을 묻히고는 저한테 튕겼어요. 저는 기겁하면서 도망갔죠. 화도 못 내고요. 제가 선배한테 화를 낼 수 있을 리가 없죠.
선배는 걱정 마라, 그 정도로는 안 옮으니까 하면서 소매로 입술을 훔쳤어요. 저는 선배의 소매까지도 신경 쓰여서 안절부절못했어요. W충은 물이 없는 곳에서 마르면 바로 죽는 걸 알고 있는데도요. 그때야 화가 치밀 수밖에 없었죠. 화를 낼 수밖에 없는 부분요.

"선배, 죽기로 작정했어요?"

그러니까 선배의 표정이 이상하더라고요. 내가 왜 죽느냐는 표정이었어요. 아까 전까지만 해도 영정 사진 같은 얼굴을 하던 주제에. 그때 제가 느낀 건, 선배의 얼굴에서 본 건 선배의 죽음이 아니라 제 죽음을 봤었던 거죠. 감염자와 한집에 있다는 사실. 그건 공용 수영장에 가는 것만큼이나 감염확률이 높거든요. 

- "물 마시다 체하면 약도 없다는 거야?"
선배는 그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더군요. 감염될지도 모른다는 뻔한 대답은 그 농담 앞에 꺼낼 수가 없었어요.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멍청해 보였어요. 선배가 말했어요.
"사람들이 죽었다면 옛날에 다 죽었지. 지금은 그냥 언제 죽을지 모르는 거야. 사실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 자체는 베르테르 증상 이전과 다를 게 없어. 단지 우리는 그 사실을 오감으로 만끽하면서 살고 있을 뿐이지. 메멘토 모리, 뇌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사는 거지. 특히 우리는 언제나 그런 땅 위에서 살아왔잖아?" 

- 멍청한 소리를. 안 터질 수도 있다고 지뢰밭 위를 걷는 거랑 뭐가 달라요? 자기 목숨 챙길 수 있을때까지는 챙겨봐야지. 하지만 그때 저는 그렇게 말을 하지 못했어요. 아마 지금 만나도 그렇게 말 못할 거예요. 항상 선배한테는 말도 안 되는 설득력이 있었어요. 언변으로는 이길 수가 없어요. 그때는 그게 매력이라고 느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스트레스 받는 매력이네요. 그래서 선배는 누가 죽이면 죽을 거냐고 물어봤죠. 선배는 히죽 웃었어요.

"좀비가 날 죽이려고 하면 머리통을 부숴줄 거야. 하지만 내가 날 죽이려고 하면 내가 어쩌겠어? 죽어줘야지."

명백하게 선배는 돌아 있었어요. 예전부터 종종 느껴왔지만, 더 심했죠. 자의식과잉에, 허풍선, 이젠 광기라니.

- 선배는 베란다 쪽으로 가서 해양심층수가 몇 개나 남았는지 확인했어요. "생각보다 일찍 왔네." 숫자를 다 헤아리던 선배가 한 말이었어요. 저는 선배한테 지금까지 뭘 했느냐고 했죠. 절대로 그럴싸한 대답은 해주지 않았어요. 캐묻는다고 해도 자기가 말하지 않기로 한 건 절대로 말하지 않는 성격이었죠. 늘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해요. 중국에 갈 때도 그랬죠. 그때 깨달았어야 했어요.
"청산에서 죽고 싶다. 못하면 백록담 맑은 물이라도 좋아." 중국 여행을 타령하던 선배가 한 말이에요.

- 그날 밤이었죠. 선배와 침대에 누워 있었어요. 저는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아 잘 준비를 하고 있었고요. 선배는 눕자마자 알약통 하나를 꺼내서 삼켰어요. 수면제였어요. 왠지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 걸 왜 먹느냐고 물어봤어요. 수면제는 그 원래의 의미보다 불길한 의미가 많이 담겨 있었어요. 특히 요즘 같은 ... 
 

- 언제 어떻게 옮은 건데요? 전 선배에게 손 끝도 댄 적 없거니와, 선배가 죽은 뒤에는 본 적도 없는걸요.

- 선배는 살면서 베르테르 증상을 길들였어요. 하지만 베르테르 증상 역시도 선배를 길들일 시간이 충분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W충이 이제 사람을 적게 죽이는 이유는, 개체 수를 조절하는 거라고. 제가 생각하는 정답이랑 비슷해요. 하지만 W충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요. W충은 그냥 정답을 요구하는 대중과 특종을 요구하는 언론, 사태의 무마를 원하는 정부가 합작해 낸 그럴싸한 적일 뿐이에요. 이미 학계에서도 그런 결론이 나오고 있을 거예요. 희생자의 수가 줄어드는 건 그거죠.

- 베르테르 증상이 자신의 개체 수가 과도하게 줄어드는 걸 막는 거예요. 물은 눈에 띄는 매개일 뿐이에요. 말 그대로 베르테르 증상이 계속해서 유지되려면 적당한 희생자 수를 유지 시켜놔야 해요. 증상이 갑자기 나타나기 전에는 한 해에 몇 명이나 자살한다고 나와있어요? 지금은 딱 그 수준이에요. 베르테르 증상은 우리를 자기들 대신 생각하는 기계로 만들어놨어요. 인류는 증상에 의해 사육당하는 겁니다. 벌레나 외계인, 그런 게 아녜요. 관념에 의학 사육입니다. 어떤 생각을 해도 자유로울 수가 없죠. 이게 증상 때문에 하는 일인지 아니면 정말 원해서 그런 건지. 그 속에서는 어떤 것도 자유로울 수 없어요. 선배가 분신자살을 한건 정말 자유로운 죽음이었을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 정말 베르테르 증상이 제가 생각하는 그런 거라면, 궁금한 게 있어요.
선배가 불타는 집에서 페트병을 넘겨주면서 한 말은, 제게 한 말이었을까요? 아니면 개체 수 보존을 위한 말이었을까요?

<베르테르 증상> 윤병현



- 길고 지루한 감속 과정을 끝낸 오디세이가 지구 궤도에 안착한 후에도 지구에서는 여전히 그 어떤 명령도 보내오질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궤도에 도착한 후 대기하던 유인우주선이 도킹한 후 알파센타우리에서 얻은 엄청난 양의 데이터와 샘플을 회수할 예정이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 몇 명의 사소한 장난기가 아니었다면 아마 오디세이는 여기에서 그 임무를 다 끝내고 지구궤도를 떠도는 수많은 인공물체 중 하나로 그 장대한 인생을 끝냈을 것이다.
궤도상에서 오디세이의 건조가 거의 다 끝나가는 동안 지상의 엔지니어들은 오디세이에 장착될 통제 컴퓨터의 프로그래밍 및 기타 작업을 행하고 있었고, 그 중 탐사 프로그램을 맡은 부서의 인원들이 작업 후 가진 맥주 파티에서 일어난 일이 발단이었다. 맥주가 위에 들어가 적당히 취하기 시작한 그들은 이런 저런 농담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엔지니어들이 그러하듯 자신들의 작품에 뭔가 재치 있는 자취를 새겨 놓을 궁리를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이 기껏 지구로 돌아왔는데 반겨줄 인간이 다 사라지면 저 놈은 어떻게 할까 라는 말을 내뱉었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럼 지구를 탐사하게 하면 되지 라며 맞장구를 쳤다. 그 후 다들낄낄거리며 남은 맥주병을 비웠지만 다음날 그 둘은 정말로 탐사 프로그램 코드에 그런 항목을 넣어버린 것이었다. 추가한 그 코드는 검수 과정에서 들통났지만 시스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정말 농담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검수 관계자들도 개발자들의 악의 없는 농담에 기꺼이 어울려줬다.  

- 추가된 코드는 간단히 표현하면 다음과 같았다.

'지구에 도착해서도 365일이 지나도록 그 어떤 접촉도 받지 못할 경우, 탐사모드로 전환해서 지구를 탐사할 것'

- 그리고 지구궤도 도착 후 365일이 지나자 농담으로 추가된 프로그램에 따라 오디세이의 통제 컴퓨터는 탐사모드로 전환했다.

- 탐사모드로 바뀐 후, 오디세이가 한 첫 작업은 궤도 아래의 행성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오디세이가 돌고 있는 주회궤도의 고도 및 행성의 직경을 통해 지표면에서 받게 될 중력이 1G라는 것을 계산한 후 각종 시각 센서를 통해 관찰한 후 밑의 행성을 액체상태의 물이 존재하는 매우 전형적인 지구형 행성으로 결론내린 오디세이는 계속해서 생명체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대기 스펙트럼 분석도 뒷받침해 줬지만 자외선 필터로 관측한 행성의 표면은 엽록소를 기반으로 한 식물이 매우 광범위한 범위로 서식하는 걸 보여줬고 원거리 적외선 관측은 동물의 존재도 역시 확인시켜줬다. 생명체 존재행성의 발견은 오디세이의 원래 임무에서도 매우 큰 우선권을 가진 임무였고, 이 경우 거의 모든 오디세이호의 리소스는 우선적으로 이 임무에 할당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디세이는 단순 원거리 관측탐사에서 직접 탐사로봇을 내려 보내는 적극적 탐사로 전환했다. 

- 탐사로봇을 내려 보내기 전,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을 발견시 동반되는 후속 절차에 따라 오디세이의 통제 컴퓨터는 지적명체의 존재를 확인하기 시작했고, 행성 전역에 걸쳐 인공 건축물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 옥상에서 리더의 신호에 맞춰 건물 밑의 로봇을 향해 떨어트린 것이다. 내부 구동계의 대부분이 손상되었고 특히 좌측은 완전히 회복불가능 상황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센서모듈을 포함한 로봇의 두뇌부는 멀쩡했지만 더 이상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다. 탐사로봇은 우측의 다리만을 이용해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계속해서 계산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네거티브였고, 설사 좌측을 짓누르고 있는 콘크리트 더미가 치워진다고 하더라고 한쪽 부위의 다리만으론 보행자체가 불가능했다. 탐사로봇의 AI는 임무속행이 불가능이란 최종결론을 내리고 자력 탈출을 포기한 후 지금까지의 상황을 오디세이에 보고하는 것으로 자신의 수명을 다하기로 결정했지만 오디세이가 지나가는 궤도는 건물에 가려져서 데이터의 전송 자체가 불가능했다.

- 탐사로봇의 AI에는 분함이라든가 억울함 같은 감정을 느끼는 기능은 없었지만 임무달성에 대한 목적의식은 존재했다. 극히 짧은 시간동안,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학감에 가까운 내부 연산을 행한 후 탐사로봇 D-008C '스파이더'는 영구동면모드로 전환하고 그 기능을 정지시켰다. 지적생명체들은 그들이 이뤄낸 성취감에 취해 승리의 외침을 울렸고 그들이 잡은 괴상한 벌레를 만찬으로 삼기 위해 껍질을 벗기려 여러 날 노력을 했으나 결국 수세대가 거치는 동안 그 어느 누구도 이 벌레의 껍질을 벗기는 자는 나타나지 못했다. 

<귀환> 진위명



- 아내가 자살했다.
두 달 전의 일이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외박을 한 날이었고, 아내가 출산한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맨정신이었다면 집 안에 인기척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르나, 밤을 새워 술을 마신 탓에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화장실로 향했던 것을 기억한다. 변기 뚜껑을 올리고 다리를 벌리는데 발이 미끄러졌다. 타일 바닥이 젖어 있는 것은 흔한 일이라 개의치 않고 오줌을 누었다. 물을 내리고 손을 씻으러 갈 때 다시 한 번 미끄러졌다.  

 

- 경찰은 형식적인 조사를 마치고 아내의 시체를 구급대원에게 인계했다.
아내의 장례식은 지체되었다. 어느 상조를 가나 예약이 밀려있었다. '요즘 자살하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요.' 상조 직원의 변명이었다. '살해당하는 사람도 많고...' 직원이 말꼬리를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분위기 아시잖아요. 종말이다 뭐다...' '예예.' 다른 사람에게서 같은 변명이 되풀이될 때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 실제로, 분위기가 그랬다. 신문이건 뉴스건 전 세계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이변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 이변은 임산부들의 이상(異常) 출산이었다. 언제부터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언제부턴가 임산부들이 외계인을 낳기 시작한 것이다. 외계인(外界人). 공상 과학 소설에서 지구 이외의 천체에 존재한다고 생각되고 있는 인간형의 지적 생명체. 지구인의 배를 빌어 지구에서 태어난 그 아기들은 그러나 지구인이라고 불리기엔 심히 무리가 있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크고 둥근 머리와 색소 없이 하얀 몸, 얼굴의 반은 아니더라도 삼분의 일 정도는 차지하고 있는 아몬드형의 눈, 코뼈 없이 콧구멍만 있는 코와 입술 없이 가늘고 길게 찢어지는 입. 신문이나 뉴스에 실린 사진으로 본 것보다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내가 낳은 아이가 그랬으니까.

- "안녕? 나래야, 엄마야..."
아내는 흰자위 없이 까만 눈을 들여다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름다우면서도 혐오스러운 장면이었다.

- 아내의 표정이 굳었다. 아내는 양손으로 외계인의 두 귓구멍을 막고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뜻이야?"
"어떻게 내가 아빠냐고! 네가 안고 있는 걸 좀 봐! 그게 사람이냐? 네가 사람이야?"
나는 폭발했다. 거의 미쳐 있었다. 살다 살다 외계인이랑 붙어먹은 년은 처음 본다, 더러운 년, 비위도 좋다,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냐, 그렇게 10분가량을 몰아붙였던 것 같다. 
"어떻게 그런 의심을 할 수가 있어. 내가 자기 옆에만 붙어 있었던 거 알잖아! 나한테 바람피울 틈이 언제 있었다고 그래!"

아내는 울었다.
"씨발, UFO라도 타고 왔다 갔나보지!"

 

- "네 자식이랑 꺼져. 알겠어? 꺼지라고. 같은 공기 마시는 것도 불쾌하니까, 지구 밖으로!"
아내는 그렇게 했다. 아내가 유서 대신 남긴 친자확인 감정서는 나와 외계인의 유전자가 99.9%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내와 같은 공기를 마시지 않는 것이 더 불쾌 ... 

- 쌍둥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이게 뭘 뜻하는 걸까. 나는 고민했다. 혼자만의 고민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아 남편에게 물었다.
"은혜가 당신 딸이라는 걸 뜻하지."
남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지방으로 발령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말마다 올라오던 남편은 육아에 관심이 없었다. 나보다 세 살이 어린 남편은 아직 이십 대 후반이었고, 자기보다 세 살이 어린 여직원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 남편의 바람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은혜가 태어난 지 다섯 달이 지났을 때부터, 월차만 쓰면 여행 가던 남자가 집에서 휴가를 보내기 시작했다. 인혜가 놀아달라고 보챌 때는 짜증부터 내던 남자가 은혜가 놀러가자고 하면 옷장부터 열었다. 남편은 은혜를 사랑했다. 인혜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했듯이 사랑하는 게 문제였다. 남편은 은혜의 앞에 설 때마다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나는 그 미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연애 초에 자주 지었던, 수줍어하는 표정이었다. 

- 생후 6개월이 지난 은혜는 스무 살 처녀로 보였다. 쌍꺼풀진 큰 눈과 콧방울이 작은 코, 작은 인중 아래 윗입술보다 아랫입술이 도톰한 입술은 단정한 이목구비를 이루는 요소였다. 눈가에 잡히기 시작한 잔주름과 입가에 생기기 시작한 팔자 주름을 빼면 거울 속 내 얼굴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어쩌다 같이 나가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모녀지간이 아니라 자매지간으로 생각했다. 남편은 칭찬으로 들으라고 했다. 은혜가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나한텐 욕이야."
 
- 어느 날 남편이 내 가슴에 매달려 말했다.
"은혜를 보고 있으면 우리 연애할 때 생각나."
"뭐?"
"은혜랑 당신이랑 꼭 닮았잖아. 당신 젊을 때 모습이 딱 저랬어."
나는 남편의 손길을 뿌리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왜 그래?"
"은혜가 날 닮은 거야. 내가 은혜를 닮은 게 아니라."
"그게 그거지."
"아니야."
  
- 방문을 열자 은혜가 서 있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덩달아 깜짝 놀란 남편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은혜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아빠 방에서 안 잘 거야?"
"뭐?"
"그럼 내가 아빠랑 같이 자도 돼?"
"안 돼!"
나는 식겁해서 은혜의 어깨를 밀쳤다. 은혜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등 뒤로 문을 닫으며 문을 막고 섰다. 은혜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 벌컥 문을 열고 남편이 나왔다.
"안 되긴 왜 안 돼. 은혜 들어와, 엄마 언니랑 잔대."
남편이 내 등을 밀치며 말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다 큰 애를 왜 데리고 자!"
"나 한 살인데?"
은혜가 싸늘한 얼굴로 대꾸했다. 남편이 시누이처럼 맞장구쳤다.

"완전 아기네."
그리고 남편은 내 면전에서 문을 닫았다.

- 은혜의 모습이 원숙해지면서부터 큰애는 더 이상 은혜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동생을 무서워하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동생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 건 다행 중 불행이었다.
"엄마가 둘인 것 같아서 좋아."
큰애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 은혜의 모습이 서른 남짓해지자 큰애는 은혜에게도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엄마로 생각해서가 아니라, 나하고 헷갈려서였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아내도 못 알아봐? 쏘아붙이는 나에게 억울하다는 투로 대답하면 '완전히 쌍둥인데 어떻게 알아 봐?'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은혜는 나를 은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아이가 내 흉내를 너무 잘 냈기 때문에, 남편도 큰애도 나와 은혜를 구분하지 못했다.
어느샌가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은혜만 두 명이 있었다. 

 

- 그날부터, 언젠가는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엄마, 나 동생 생겨?"
큰애가 은혜를 향해 물었다.
"그래, 인혜야. 또 생길 거야."
은혜가 눈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가 갈렸다.
"아냐, 인혜야. 동생이 아니라 조카가 생기는 거야"
남편이 정색을 하며 끼어들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는 남편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 "그만 못 해! 넌 아내랑 딸도 구분 못 해? 안 해?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아니, 어떻게 딸한테 그럴 수가 있어!? 네가 저지른 게 뭔지 알아? 불륜이고 패륜이야! 이 더러운 새끼야!"
남편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그를 더 흔들고 싶었다. 마구 흔들어서 정신 차리게 해 주고 싶었다.
"아내랑 딸도 구분 못 하면서 어떻게 잠자리를 가질 생각을 해? 네가 사람이니? 네가 사람이야?!"
내 고함 소리에 흔들리는 것은 남편뿐만이 아니었다. 집안도 흔들렸고 가정도 흔들렸다. 모든 것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개새끼! 그래 개니까 자식이랑 붙어먹었겠지!"
그 순간 물벼락이 내렸다. 문자 그대로 아닌 밤중에 물벼락이었다. 너무 놀라 얼어붙은 나에게 은혜가 말했다.
"머리 좀 식혀. 애가 듣잖아."
그제야 큰애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어어엉, 엄마, 허엉, 엄마, 엄마아, 어어엉." 큰애는 누가 엄마인지도 모르면서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었다. 귀를 통해 눈으로, 코로, 입으로 울음이 번졌다.

- "애 버릇 좀 고쳐, 집에 있는 사람이..."
그리고 남편은 등을 돌렸다. 남편의 말을 들은 큰애가 내 손을 뿌리치고 은혜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무너졌다. 아니, 무너진 것은 나뿐이었다. 나를 빼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남편도 큰애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문제는 내 자리에 은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은혜가 문제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은혜가 문제였다. 답답하고 막막했다. 내가 낳은 문제였으나 그 답을 알 수가 없었다.

- 답을 알려준 것은 9시 뉴스였다. NASA는 돌연변이들이 모체의 체세포를 복제하여 외모뿐 아니라 기억과 인격까지 같은 인간으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화면에서는 갓 태어난 돌연변이가 고치를 벗기까지의 과정을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밀가루처럼 하얀 피부에 균열이 가고, 갈라진 틈으로 발그스름한 손이 나왔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외계인의 형상을 한 고치를 쩌억 벌리며 나온 아기는 지구인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은혜도 돌연변이였던 것이다. 조산으로 인큐베이터에 있다 나온 아이였다. 간호사는 다른 돌연변이들보다 빠르게 고치를 벗은 은혜를 보통 아기라고 오해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러했듯이. 


- NASA의 대변인 스티븐 벤너 박사는 현재 돌연변이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을 개발 중이며, 성공하는 즉시 전 세계에 무상으로 배포할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기자회견을 마무리했다. 
화면은 다시 MBC 뉴스데스크로 넘어와 중년 앵커의 엄숙한 얼굴을 비추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어제 오후 4시 20분경, 서울 불광동에서 일가족 참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망자는 정 모씨(34)와 이 모양(30), 그리고 그들의 다섯 살배기 아들과 세 살배기 딸입니다. 용의자는 사망자 이 모양(30)의 돌연변이로 추정되며, 출생신고를 하지 않고 쌍둥이로 위장하여 함께 생활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돌연변이에 의한 살인 사건이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다시금 돌연변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사건이었습니다. 자세한 소식 현장에 나가 있는 김민욱 기자를 통해 전해드립 ... "

- 나는 엄마에게 안겨 울었다. 내가 아직 빼앗기지 않은 마지막 지위가 그 품에 있었다.

- 두 달이 지나, 친정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남편이었다.
"여보, 여보."
수화기 너머의 남편은 울고 있었다. 젖은 목소리가 낯설었다.
나는 한 번도, 남편이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인혜 아빠.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희미하게... 울음을 억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불안한 침묵이 심장을 조였다.
"인혜 아빠, 여보. 왜 그러는데, 무슨 일 있어? 말 좀 해봐.”
흐느끼던 남편이 간신히 속삭였다.
"그 애가 나를 낳았어."
남편의 말이 맞았다. 두 달 만에 돌아간 집엔 새 식구가 들어와 있었고, 아직 어리긴 했지만 그 아이는 틀림없는 남편이었다.

- "혼자 죽을래, 같이 죽을래?"
문제도 이해하지 못하고 답도 풀지 못한 채 나는 큰애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주여 주여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 나는 지금 두 달 전에 태어난 아들의 목을 조르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내 모든 인생을 기억하고 있는 타인을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면 셋째 아들인 셈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충치다. 부주의로 생긴 것이며, 방치하면 나를 갉아먹기 때문이다. 생활과 지위는 물론이고, 삶까지 위태로워진다.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다.

- 인격을 형성하는 것은 기억이다. 결국 내 밑에 깔린 채 헐떡거리며 발버둥치는 것도 나인 셈이다. 때문에 죽여야 한다. 내가 나이기 위해서, 나는 한 명이어야 한다. 벌써 세 번째다. 나는 이제 도구를 쓰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안다. 목숨은 의외로 질긴 것이어서, 맨손으로는 끊기가 어렵다.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첫째의 목을 조를 때였다. 처음으로 얻은 자식이 자식 같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어느 날이었고, 힘으로 누르기엔 너무 커버린 첫째에게 힘으로 밀리던 순간이었다. 몸싸움을 벌인 직후라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게서 벗어난 첫째는 식칼로 ... 

- 공익 광고가 나오고 있다. 일정 제품을 홍보하고 있지는 않지만 피임약과 콘돔 사용을 적극 권장하는 광고다. 돌연변이 바이러스가 성행하면서부터 피임약과 콘돔은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아내는 피임약을 먹지 않는다. 콘돔도 못 쓰게 한다. 내가 택할 수 있었던 건 피임약과 콘돔에 비해 단연 임신율이 높은 질외사정뿐이었다. 그 결과가 내 옆에 죽어 있고 앞서 얻은 두 가지의 결과는 썩어 문드러진 지 오래다. 전 세계가 피임을 하는데 오직 내 아내만 임신을 원하는 이유는 그녀가 돌연변이이기 때문이다. 죽은 아내가 낳은 내 딸.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아내의 모든 인생을 기억하고 있는 타인을 딸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아버지가 옳았다. 유전자가 일치한다고 내 자식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자기야.' 연애할 때부터 고수했던 호칭이, 옹알이를 뗀 아내의 첫마디였다. 그 한 마디로, 내가 데리고 온 아이가 자식이 아니라 아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은 것은 결정이었다. 나는 아빠가 되거나 남편이 되어야 했다.

- "네 자식이잖아, 개새끼야!" 죽은 아내가 말했다.
"자기야." 살아 있는 아내가 말했다.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내게 필요한 건 살아 있는 아내였다. 그러나 아내의 유골이 안치된 납골당을 찾을 때마다 번민은 반복되었다. 아내는 그 안에 있었다. 20센티미터 크기의 유골함 안에.

- 아내는 울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종종 납골당을 찾는다는 것을 알았던 모양으로, 손에는 자신의 유골함을 들고 있었다.
"봐." 아내가 말했다. "나를 봐."
아내는 내가 보는 앞에서 납골함에 손을 넣었다. 그러더니 그 안의 뼛가루를 퍼먹기 시작했다. 말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망연히 서서 아내를, 작고 부드러운 입술 속으로 사라지는 아내의 유골을 바라보았다. 아내의 손가락 사이로 눈처럼 희거나 재답게 어두운 뼛가루가 모래처럼 흘러내렸다. 아내는 유골을 싹싹 긁어먹은 것으로 모자라 유골함을 들어 자신의 입 안에 남김없이 털어 넣었다. 그리고 유골함을 던져버렸다. 자기 깨지는 소리가 뇌리에 날아와 박혔다. 뇌리에 남아 있던 아내의 잔상이 깨진 자기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봤지?" 아내가 물었다. "나 여기 있어." 아내가 말했다. "나 여기 있다고!"

- 나는 아내의 잿빛 입술을 바라보았다. 아내의 말이 맞았다. 아내는 그 안에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다가가 뼛가루가 허옇게 묻은 입술에 키스했다.

- 뻐꾸기가 운다. 시계를 보니 시침과 분침이 직선으로 서 있다. 커튼 사이로 새벽이 스민다. 나는 셋째의 시체를 안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한강이다. 자살은 한강에서 대다수의 인터넷 사이트 메인에는 자살 명소로 한강을 홍보하는 배너가 걸려 있다. 1년 전이라면 모를까, 더 이상 한강엔 구조요원이 없다. 임신율은 낮아지고 자살률이 높아졌다. 인구는 현저히 줄어들었고, 여전히 줄어들고 있다. 종교인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신을 버렸다. 

<미래도둑> 김보람



- 박첨지는 치삼을 무시하고 자신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뼈가 앙상한 박첨지의 등에 치삼이 주절거리는 말들이 날아와 박혔다.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도 막걸리 한 잔 주지 않는 놈. 지 할 말만 딱 떠벌리고 마는 놈. 그렇게도 악착같으니까 돈도 잘 버는 거겠지.

- 치삼의 모습이 서서히 멀어져갔다. 하지만 그가 남겨놓은 말들은 귓속을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병 수발도 못해 주고, 돈벌이도시원찮은데 대책 없이 두고 온 아내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을까. 그는 인력거를 끄는 걸음을 재촉했다. 손님을 잡아야 해 손님을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어느 순간, 서둘러 그 곳을 벗어나려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삼이 남긴 말이 갑자기 뒷머리 털을 곤두서게 한 까닭이다.
"나도 모르겠어. 분명 내 마누라야. 하지만 저건 꼭 내 마누라가 아닌 거 같다니까!"

- 광동학교까지 가자는 교원인 듯한 양복쟁이 하나를 태운 것은 그로부터 차 한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집에 들어갔다가 아내와 개똥이 얼굴이나 한 번 보고 나갈까 생각할 무렵 골목에서 등장한 손님이었다. 가무잡잡한 얼굴이 재수없게시리 평소와 달랐던 치삼을 잊기에 돈벌이보다 더 좋은 약은 없을 터였다. 금방이라도 뭔가 싸지를 것처럼 하늘이 점차 먹 가는 벼루가 되어가던 정오 무렵이었는데,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던 ... 

- 화수분이란 친구에게 어느 날 어떤 여자 손님이 찾아들었다. 인력거에 오른 그 색시는 다급한 목소리로 어디든지 가자고 했다. 화수분이 '어디라니요, 행선지를 말씀하셔야죠'라고 대답했더니 '빨리 뛰어 이 무식한 인간아!'하고 그 색시가 소리쳤다고 한다. 몇 백석 부자의 후예다운 기백으로 화수분은 예끼 이년아 안태운다 당장 내리거라 맞고함을 쳤다고 하는데, 그 순간 색시가 더욱 날뛰더니 평소 운행비의 두 곱절이나 얹어주고 일단 달리고 보자더란 것이다. 색시의 고함은 무식한 인력거꾼의 예상도 못했던 항변 때문이 아니었고 부지불식간에 현장을 급습한 시커먼 순사들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놀라운 사실은 순사들이 그 색시를 연행하는 데만 신경이 쏠리어 화수분이 받은 돈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질 않았다는 것이다. 화수분은 현행범의 돈을 꿀꺽하고 입 다물었다고 나중에 걸고 넘어질까 봐 색시한테 받은 운임비를 고스란히 바쳤지만, 순사들은 이를 무시하고 색시를 끌고가는 테만 몰두했다고 했다. 아울러 화수분은 '이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에요! 도와주세요!' 하고 소리치던 색시의 일갈에 다소 마음이 주춤했지만 쪽바리 순사가 사람도 아니란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지라 자신이 연루되지 않은 것에 흡족해하며 번 돈을 뺏길세라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 화수분은 타향에서 정신이 이상해져 세상 종말이 온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해대다가 최근 산속에서 얼어죽었다.)

- 지금의 박첨지도 그랬다. 돈을 더 준다는 약속을 이 양복쟁이가 어기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남의 나라를 집어삼키려는 것들은 유식한 놈, 있는 놈부터 손보려 하지 무식한 놈따윈 안중에도 없다. 만약 이 양복쟁이가 어떤 범죄나 일제가 싫어할 운동에 연루된 자라면 동포로서 안타깝기는 하겠지만, 못 본 척할 수밖에 없다. 박첨지 자신에겐 더 다급한 자신의 일이 있다. 자신의 일도 해결 못 해 피가 마르는데 남의 일을 돌볼 여유는 없다. 남은 상관없이 자신은 돈만 벌면 된다. 돈만. 나라가 어떻게 되든, 세상이 어떻게 되는 자신은 모른다. 무식해서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돈만 벌면 된다.

- 물론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인적이 드문 겨울엔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고갯길이지만 말이다. 그거야 어떠랴. 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만 혈안이 된 박첨지에게 풍광과 낙엽의 정취 혹은 민족정기의 파괴 따위는 아무런 관심사도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지금 그가 진행하는 덕상사의 이 가로수 길은 500미터 길이의 오르막으로 되어 있고 경사도 아주 급하다는 것이다. 인력거를 끌고 올라가는 길은 힘이 들고 내려가는 길은 위험하다. 아마도 이 오르막을 다 오르면 오늘 하루 인력거는 더 이상 끌지 못할지도 모른다.  

- "내 말 잘 들으시오... 놈들은 우리가 잠들 때 우리... 몸과 마음을 빼앗소. 잠을 조심하시오... 두 사람 이상이... 서로 교대로 경계 해줘야 하오." 
"아... 나는..."
"죽어가는 사람의 부탁이오... 쿨럭! 얼른 가시오. 놈들이 오고 있소."
그러자 어딘가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분명히 내리는 비 소리 같았지만 사람의 목소리라 생각하니 꼭 비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어떤 소리인들 박첨지에게 극도의 공포를 심어주기엔 충분했다.

-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양복쟁이가 말을 이어나갔다. 들으면 들을수록 박첨지의 등골은 오싹해졌다.
"만약 다음에 날 만나게 된다면 그때의 난 지금의 내가 아닐거다. 겉가죽만 똑같고 내면은 다른 존재인 이색인간이란 말이오... 그때는 날 피해야만 할 거요. 아니면 죽이든지... 자, 가시오. 내 부탁을 잊으면 안 되오. 가서 당신의 정당한 돈도 꼭 받아내시길 바라오..."
말은 마친 그는 스르르 무너져갔다. 박 첨지는 육혈포 맞은 양복쟁이를 내버려두고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거기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라보고 놀란 사람이 솥뚜껑만 봐도 놀라는 꼴이었다. 그의 모습이 사라질 즈음 양복쟁이는 상한 배추를 실어놓은 나무 쓰레기 상자를 안고 대(大)자를 그리며 고꾸라졌다.  

<운수 나쁜 날> 박해로



- "후우우우."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던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어 물고 깊은 한숨과 함께 연기를 내뱉었다. 좁은 방 안에 꽉 차 있던 정사 후 특유의 살 냄새와 땀 냄새를 쾨쾨한 담배 냄새가 한구석으로 몰아냈다. 
정사 후의 담배는 흔히 '식후땡'이라고 말하는 식사 후의 담배와는 맛이 또 다르다. 식후의 담배가 '포만감의 맛'이라고 한다면, 정사 후의 담배는 '허탈함의 맛'이라고 하면 어울리려나. 
항상 머릿속으로는 할리우드 영화 속의 '분위기 있는' 정사를 꿈꾸지만, 실상은 일본의 포르노나 한국의 몰래 카메라에나 나오는 오직 사정만을 목표로 질주하는 '분위기 없는 정사로 끝나는데에서 오는 자괴감이라고 하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 "뭐야, 또 담배야?"
속옷을 제대로 챙겨 입지도 않은 채, 욕실 문 앞에서 수건으로 젖은 몸 여기저기를 닦으며 나오던 미연이 투덜댔다. 뭐, 거의 부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왔으니, 부끄러움이라는 게 남아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피곤할지도 모르겠다.
"좀 봐줘라. 오늘 자기랑 있으면서는 그래도 거의 안 폈잖아."
어차피 질 게 뻔했지만 그래도 한 번 시도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나 역시 짜증을 담아 투덜거렸다. 그녀와 내가 사귄 지도 근 4년이 다 되어 가는데다가, 이미 그녀를 만났던 시점부터 펴왔던 담배이건만, 최근 1개월 동안 담배에 대해 투덜대는 횟수와 강도 모두 예전에 비해 부쩍 늘었다. 

- "아유, 진짜 대리님, 제 차 안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몇 번 말씀드렸잖아요."
조수석에 앉아서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최대리를 보며 투덜거렸지만, 최 대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열린 차창 밖으로 입 안에 머금었던 연기를 내뿜었다.
"아, 거참. 사람 빡빡하게 구네. 태워다 준다고 유세 떠는 거야, 뭐야? 왜, 김 대리의 그 우렁각시가 담배 냄새 맡으면 쪼그라들기라도 해? 달팽이처럼 말이야."
'이봐요, 그건 담배 연기가 아니라 소금 때문이라고요.' 속으로 되뇌어보지만, 굳이 그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나보다 1년 정도 일찍 회사에 입사한 도진이기에 직급은 같은 대리이지만 어쩔 수 없이 선배 대접을 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 최도진. 입사 1년 선배. 집이 비슷한 방향이라 내가 차를 산 후부터는 아침마다 도진의 집에 들러 그를 태우고 출근하고 있다.
주말에는 미연과 자주 내 차로 드라이브를 나가기 때문에, 그때마다 그녀의 짜증을 받아줘야 하는 나로서는 매일 아침 출근길마다 똑같은 대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인간, 천성이 짠돌이에 뻔뻔스러움의 극치(그러고 보니 이 두 성격은 세트로 묶이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이 더 피곤할 것 같기는 하다)를 달리다 보니, 내가 이 정도 면박을 줬다고 해서 내일부터는 지하철 타겠어! 따위의 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이 인간은 내가 면박을 준다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그 놈의 우렁각시 얘기 좀 그만하면 안 돼요? 나도 내 여자 친구가 차라리 우렁각시였으면 좋겠네."
"하긴. 우렁각시가 여자 친구보다 낫지. 생각해 보면 그 새끼, 완전 땡잡은 거라니까. 몰래 와서 밥해 줘, 설거지해 줘, 동화라 제대로 설명을 안 해서 그렇지, 모르긴 몰라도 밤에는 그거까지도 해줬을걸. 마을 원님 나부랭이가 눈독 들일만도 하지 뭐."
내 짜증을 도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으로 받아쳤다. 장점이라고 한다면 참 낙천적으로 사는 새끼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단점이라면 거 참 독하게 눈치 없는 새끼라는 거다.
도진이 이야기하는 우렁각시 이야기도 대체 몇 번을 말해야 그다지 재미도 없고, 결정적으로 내가 미연을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는 걸 싫어한다는 걸 눈치채려는 기색이라도 보일는지.

- 우렁각시는 도진이 미연에게 붙인 별명이다. 물론, 내 여자 친구가 미연이라는 걸 생각 못하고 지은 것이다. 미연과 나는 사내커플이다. 그것도 흔히 말하는 비밀 연애. 주변의 사내 연애 커플을 직접 보거나 여기저기서 들은 사내 커플의 말로(물론 잘 사귀다가 헤어진 커플 한정의 이야기이다)를 잘 알고 있기에 내가 먼저 미연에게 제안했고, 미연 역시 거기에 별 이의 없이 동의했다. 근 4년이란 긴 시간 동안 회사의 누구한테도 연애 사실을 들키지 않은 건, 같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서로에게 큰 간섭을 하지 않는 우리 둘의 성격 때문이리라. 
그렇다고는 해도 어쩔 수 없이 주위에는 연애 사실 자체는 숨기기가 힘들었고, 도진처럼 눈치 없는 사람들에게는 4년이란 긴 시간을 (그나마도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를 밝힌 것도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았다) 소개나 인사도 해주지 않고 사귀고 있다 보니 어느 날부터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연인이라는 의미로 '우렁각시'라는 되도 않는 별명이 붙어버렸다. 생각하자면 그다지 큰 의미 없는 별명이기도 하지만, 그 출처가 도진이란 사실, 그리고 이 별명을 말할 때의 도진은 마치 내가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연인을 만들어냈다는 묘한 뉘앙스를 풍기며 떠들었기 때문에, 그의 입에서 이 별명이 나오는 걸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다. 

- "아, 김 대리 혹시 금연클럽이라고 들어 봤어?"
도진이 어느 샌가 화제를 바꿨다. 또 그 이야기인가. 나도 모르는 새에 정부에서 담뱃값을 몇 십 만원 인상하겠다는 발표라도 했나, 왜 이리 내 주변에서 계속해서 같은 이야기가 돌고 있는지 ...

- 만면에 미소를 띤 채로 도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마도 도진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모임의 기존 멤버들일 것이다.
"이거 이렇게 주야장천 껌만 씹다가는 턱이 아파서 담배를 못 피우겠는데? 그런 건 아니지? 응? 응?"
도진이 다시 우물거리며 김 대리에게 말을 건넨다. 껌? 지금 씹고 있는 게 껌인가? 무슨 금연 껌 같은 건가? 도진의 말을 듣자면 아무래도 모임이 시작한 6시부터 지금까지 저렇게 모여 앉아 계속해서 껌만 씹고 있었던 모양이다. 뭔가 대단한 프로그램을 기대했던 나는 약간의 실망감을 느끼며 보고 있던 창에서 시선을 돌렸다. 

 

- 그때, 무엇인가가 돌아서려는 내 발목을 붙잡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이상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회의실 안쪽을 바라보았다. 회의실 안의 광경은 조금 전과 비교해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었다. 여전히 도진은 껌을 씹으며 뭐라고 계속 김 대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고, 김 대리는 옆에 앉아 미소를 띠고 열심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그래, 다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뭔가 이상하다. 10명 정도가 앉아 있는데, 그 누구도 도진의 말에 대꾸하지도 않고, 역시나 얼굴에 미소를 띤 채로 도진을 주시하고만 있다. 도진이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이유도, 자신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이 민망해서일 것이다. 

 

- 그렇지만, 이 기분은 무엇인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회의실 전체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왠지 이곳에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심지어 처음 이상한 기분이 들었을 때 바로 돌아섰어야 했다는 후회감마저 들 정도였다.

- 금연 클럽의 멤버들이 도진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며 여전히 도진은 껌을 씹으며 김 대리에게 무엇인가 말을 건네고 있다.) 나는 살금살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 내 쪽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던 멤버 중 한 사람이 갑자기 내 쪽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고,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씨발...'
분명 오가며 흡연실에서 마주쳤던 우리 회사의 직원이다. 하지만 흡연실에서 마주쳤던 그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이 사람도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지만, 조금 전에 느꼈던 위화감은 그대로다.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나는 그대로 돌아서서 계단을 향해 뛰었다. 이제는 도진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복도에 다급하게 달려가는 내 구둣발 소리만이 큰 소리로 울려 퍼졌다. 

- 그제야 그의 눈빛 자체가 어제와는 사뭇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반쯤 풀려 있다고 해야 할까, 분명 정상적인 사람의 눈빛은 아닌 것 같았다. 어제 내가 간 후에 정말로 무슨 약이라도 먹인 걸까? 그래서 그렇게 쉽게 담배를 끊을 수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면 분명 회사 내에 금연 클럽에 참가하는 사람들 모두 이런 증세를 보여야 할 텐데, 내 기억으로는 최근에 이런 눈빛을 하고 회사를 돌아다니는 사람을 본 기억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모두들 이런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워낙 내가 주위에 관심이 없다 보니 눈치채지 못 했을 수도 있다. 다시 한 번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면서 조수석을 쳐다보니, 도진은 마치 조금 전까지 나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은 사람처럼 다시 말없이 앞만 쳐다보고 있다. 

- 대체 왜 내가 이 이름도 밝히지 않는 남자에게 껌을 언제 씹을지를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 남자는 나의 대답이 불만족스러운지 짧게 '흐음'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게다가 여전히 몸은 흡연실 문을 가로 막고 서 있다. 정말 이 남자, 내가 여기서 껌을 씹기 전에는 비켜 주지 않을 생각인 것인가.

- 잠깐의 대치 후에,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나는 남자의 옆구리를 밀어 내가 빠져나갈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슬쩍 팔을 뻗었다. 이 남자가 내가 밀어붙이는데도 불구하고 버티고 서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잠시, 남자는 의외로 내 팔이 그의 옆구리에 닿기도 전에 빠른 걸음으로 문 옆으로 비켜섰다. 뭔가 더러운 물건이 자기 몸에 닿는 것이 싫기라도 한 것처럼. 

- 그래, 딱 그 반응이었다. 조금 전에 내가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을 때도 그렇고, 담배를 끈 후에도 그렇고, 이 남자는 시종일관 내가 뭔가 더러운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되도록 나의 가까이에는 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상황을 생각해 보면 남자가 느끼는 더러운 물건이라는 것이 무엇일지는 충분히 추측이 가능하다. 내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와 그 담배 냄새가 몸에 밴 나의 몸. 길거리에서 종종 옆을 지나가던 젊은 여성들이 노골적으로 내가 내뿜는 담배 연기에 대해 싫은 표정을 짓는 것을 수없이 경험해 보긴 했지만, 이건 또 다른 느낌이다. 더러운 물건 취급을 당해서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오히려 이 남자가 나를 피해줘서 안심된다는 느낌. 


- 그것은 징그러운 벌레처럼 생겼다. 몸통은 지네의 몸통처럼 관절이 여럿으로 나뉘어 있었고, 색 자체는 혀와 비슷한 선홍색이라 입 안에 자리하고 있어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크게 어색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각 몸통 마디마디에는 벌레의 다리처럼 보이는 것이 마디별로 좌우 두 개씩 총 네 개가 달려 있고, 몸통의 맨 끝에는 네모형의 몸통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동그라미 형태의 머리가 달려 있다. 그리고 그 머리에는 눈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조그만 검은색 점이 양 옆에 하나씩 박혀 있다. 
'시모토아 에시구아(Cymothoa exigua)'

머릿속에 맴돌기만 하던 그 이름이 불현듯 떠올랐다. 물고기의 입 속에 기생하여 혀를 갉아 먹은 뒤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기생 동물. 인터넷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봤던 그 시모토아 에시구아'의 형상에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것의 형상이 겹쳐졌다. 문제는 이번에는 인터넷에서 한번 본뒤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사진도 아니며, 이것들이 뭔지는 모르지만 기생하고 있는 것이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점이다. 

- "기생충..?"
"음. 기생까지는 맞을지 모르겠지만 '충'은 아닙니다. 인간들은 이런 감정을 불쾌함이라고 부른다죠?"
나도 모르게 생각한 바를 입 밖에 내뱉은 순간, 김 대리가 다시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이제는 숨길 것도 없다는 듯이 ...

<금연클럽> 원상이

 


- 멜로디 역시 제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작곡가를 욕할 정도였으니까요. 분명 손가락으로 책상을 무의식적으로 두드리다 '아, 이번엔 이런 템포로 해볼까. 잡다하게 이것저것 효과를 넣으면 멋있어 보일거야' 하고 대충 만든 게 분명합니다. 돌림노래 같은 가사와 멜로디였죠. 그렇지만 아버지는 그 음악에 열광했습니다. 네, 솔직히 미친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그렇게 대중음악을 사랑하는 문화인인지 몰랐습니다. 그저 트로트 가수 송박자의 <네멋대로>라거나 나잡초의 <야, 훈아> 정도만 따라 부르는 아저씨인 줄 알았지요. 그런데 이럴 수가, 아버지가 <HOOK>를 따라 부르면서 안무를 맞추다니. 왼손을 허리에 얹고 오른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골반을 좌우로 흔들고 상큼한 표정으로 웨이브를 하다니 아버지가 그 그룹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왜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습니다. 아버지는 진정으로 행복하게 웃었으니까요. 그렇게 아버지는 똥 씹은 얼굴을 한 어머니를 안방에 두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머니가 한숨을 쉬고 말씀하셨죠. 
"저런 인간인 줄 왜 여태껏 몰랐을까?"

-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법한 식품회사 과장이셨죠. 회사에서 부르면 회사에 나가고 집에서 부르면 집으로 오시는 모범적인 아버지셨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시고, 아그렇게 유명한 데는 아니고 그래도 이름은 댈 수 있을 만한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시고 변변한 직장에 취직하시고 우리 어머니처럼 참한 색시를 얻으신 분이시죠. 그런 성공을 하셨음에도 독서와 자기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아버지는, 절대, 지소 팬클럽 회장이 되실 분이 아니란 말이죠. 저는 아버지의 가르침 대로 TV에 나오는 시시껄렁한 쇼프로나 가요프로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단 말입니다. 주로 뉴스나 시사프로를 시청하고 아니면 신문이나 책을 벗 삼았어요. 맞아요, 그래서 제 말투가 문어체이기도 해요. 아, 당연히 연예인 얘기하는 또래애들이랑은 상종도 안 했죠. 아버지의 지성을 그대로 본받아야겠다고 다짐했으니까요. 
물론 아버지의 감성도 닮아 보려고 했습니다. 감성이라고 해야할지 본성이라고 해야 할지. 사춘기 시절 이성에 눈을 뜬 아버지는 어떤 모습이었나 궁금해지네요. 하지만 전 아버지의 학창시절 사진 한 장 본 적도 없고 그 시절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군요. 

- 제 기억으로 그 막내는 다른 멤버들에 비해 볼 살이 많다는 이유로 악플이 달린 적이 있었는데 말이죠. 지소뿐만 아니라 어느 연예인이든 마찬가지로 공격당하는 점이 있죠. 성형수술. 댓글을 보면 성형의과에서 일하는 사람인지 약물이나 수술에 대해 빠삭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무플에서 악플, 그리고 선플이 달리기까지 데뷔 후 일주일도 안 걸렸다는 겁니다. 댓글을 단 날짜를 보면 계산이 그래요. 물론 인터넷이나 미디어의 파급력이 그만큼 무시무시하다는 뜻이겠죠. 그래도 이건 너무 빠르다 싶었습니다. 안 그래요? 쳇, 그럴 줄 알았어요. 다들 그런 반응이죠. 지소니까 당연하다. 그럼 왜 지소만 그랬나요. 다른 아이돌 가수나 연예인들은 대형 소속사에서 아무리 밀어줘도 못 뜨는 경우가 허다한데. 데뷔한 지 얼마 안 돼서 신인상과 대상을 동시에 수상했는데, 외계인이라니 무슨 허무맹랑한 소립니까? 제가 그런 얘길 하고 다녔다고요? 지소가 외계인이라고? 아, <패컬티>나 <인베이전> 같은 영화처럼 말이군요. 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군요. 그건 모함입니다. 아무리 제가 지소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런 얘기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지소의 무지막지한 인기를 보면 그런 상상을 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런 빈곤한 상상력보다 더욱 우리 사회에 긴밀한 내용이란 말입니다.  

- 다들 미친 거 아냐?
저는 잠시 넋을 놓았습니다. 이 댓글을 쓴 사람이 미친 게 아닐까 순간 의심스러웠습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반가운 마음에 아이디를 클릭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쪽지를 보내려고 하니까 탈퇴한 회원이라고 창이 뜨더군요. 알 만했습니다. 그런 글을 남겨놓고 무사할 리가 없었을 테죠. 저라도 지소팬들의 뜨거운 관심을 견디지 못해 탈퇴했을 겁니다. 하지만 전, 여기서 희망을 얻었습니다.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었어!

- "공부도, 취직도, 그리고 아버지도 저를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분해요. 저는 아버지를 존경했는데, 그 아버지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게 너무 분해요."
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제 어깨에 손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 배를 하나 갖는 게 소원이었다. 마도로스, 바다를 유랑하는 선장이 되고 싶었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이런 꿈은 현실 앞에서 무력해진단다. 대학교에 합격하고 취직을 하면서 내 안정적인 위치에 만족해야 했어. 너희 어머니를 만나고 너를 만든 게 후회된다는 건 아니다. 다만 충분히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저버린 자신이 한탄스러웠을 뿐이란다. 너도 알다시피 내 연봉이 꽤 됐잖냐. 하지만 여행조차 가고 싶지 않았어. 타성에 젖은 거지. 그러다 네가 중국에 다녀오고 상당한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가슴 한구석에서 뭔가가 끌어 올랐지. 이때 아니면 갈 수 없어! 그래서 한겨울에 무작정집을 나갔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인천으로 갔지. 그곳에는 항구도 있고 공항도 있으니까 일단 가 보면 어디라도 나갈 수 있겠다 싶었어. 사실, 난 여행을 해본 적도 없어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전혀 몰랐다. 할 일 없이 돌아다니다 네가 말한 중국이 생각나서 차이나타운을 찾아갔다. 내가 지금껏 살면서 본 적 없는 분위기였어. 그러나 내게 충격을 준 건 차이나타운이 아니라 어느 작은 무대였다. 그 위에는 맨살을 거의 드러낸 다섯 명의 여자들이 살갗을 뜯어버릴 듯 추운 날씨에도 웃으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오리털 파카를 입은 나를 바라보며, 나를 원한다고 손짓하고 있었다. 물론 착각이란 건 잘 알았어. 그러나 정말 그 순간, 푸른 바다 위에 두 팔을 벌리고 서서 나는 살아있다고 외치는 기분이었어. 그런 매력이 있던 거야. 한 번 쳐다보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고양이처럼. 얼핏 보면 정말 고양이 같은 인상이기도 하지. 그래서 지소의 상징을 고양이로 한 거란다.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알고 보니 그 그룹은 소속사도, 매니저도 없는 걸 그룹이었던 거야. 그래서 내가 팬클럽도 만들고 매니저를 하기로 했다. 의외로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더군. 나 역시 나 자신에게 놀랐어.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를 봐도 흔들리지 않았는데, 어째서 지소에게 끌렸던 걸까. 아무런 기반이 없이 가수라는 꿈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게 딱해서였을지도 몰라. 아니면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저들이라면 나를 알아줄 거라고. 어쩌다 보니 수많은 시간을 제자리걸음 한 나를 말이다. 우리는 그 날 처음 만났지만 서로에 대해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지." 

- 그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입니다. 아버지는 지소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자기의 꿈조차 취소했습니다. 아니 변경했습니다. 지소와 함께 바다를 누비며 전 세계를 여행하는 걸로. 아버지와 제가 만났을 때 그 꿈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셈이었죠. 지소가 해외에서 콘서트를 하거나 앨범 작업을 할 때면 아버지도 함께 갔습니다. 그 와중에도 그룹과 매니저 사이에 스캔들은 없었다고 하더군요. 아버지에게 지소는 단순한 걸 그룹이 아닌 하늘이 내리신 은혜라나요. 

- 네, 거짓말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왜 가출했는지, 어째서 지소를 선택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 아버지도 걔네들에게 홀린 거예요, 서로를 이해하기는 개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확히 꼭 집어서 말할 수 없네요. 뭐, 이제 됐어요. 저는 죽을 때까지 그녀들의 춤을 추어야 하고, 앞으로 저 같은 테러범은 나오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지소 덕분에 저도 스타가 됐네요. 아마 당분간은 지소만큼이나 유명한 사람으로 기억될 겁니다. 잊지 않았죠? 약속대로 연예기사 특집으로 싣는 겁니다? 사회면에서 다루는 건 싫습니다. 어제 어떤 영화감독이 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하기에 허락했습니다. 단, 저작권은 아버지에게 있다는 전제하에. 이렇게라도 용서를(이때 카메라 배터리가 닳아서 전원이 꺼졌다. 그는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빌어야죠. 저에 대한 배신감이 클 테니까요. 아버지는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습니다. 그럴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허전하네요. 바쁘시겠죠. 지소 말고도 '미소'라는 새로운 그룹 매니저까지 하신다니까 걔네들은 평균연령이 11.6세라던데. 정말이지, 세상은 쉴 새 없이 우리에게 갈고리를 던지는군요.

 

<HOOK> 최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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