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미쓰다 신조 / 민경욱
출판 : 비채
출간 : 24.04.30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세 번째 발표작이자 두 번째 이야기, <붉은 옷의 어둠>.
<검은 얼굴의 여우>, <하얀 마물의 탑>보다 뒤에 나왔지만 작중 시간으로 따지면 <검은 얼굴의 여우> - <붉은 옷의 어둠> - <하얀 마물의 탑> 순이다.
'붉다'는 말에는 다양한 색이 포함된다.
노란 기가 도는 밝은 '주 朱', 강렬한 '적 赤', 노을의 '혁 赫', 갈색에 가까운 '자 赭'...
원제는 <赫衣の闇>로 저자가 의도했던 붉음은 '혁'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읽으면 좋다.
전후 곤궁한 판자촌, 얼기설기 얽힌 벽들 사이로 흔들리는 붉은 장식, 홍등의 빛과 뒤섞인 노을 서린 붉은 골목...
작품 전체를 감도는 분위기는 이런 붉음이다.
<붉은 옷의 어둠>에서는 <도조 겐야 시리즈>의 도조 겐야가 모토로이 하야타를 조우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하야타가 스스로를 '연상'이라고 정확히 밝히는 만큼 시리즈 간의 연대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될 것 같다. 이때 두 사람의 대화를 기점으로 '혁 赫'은 '자 赭'와 '적 赤'을 이으며 깊어진다.
(<도조 겐야 시리즈>에서는 타인의 시선으로 본 도조 겐야가 등장하기 어려운 만큼, 어쩌면 가장 객관적인(?) 겐야의 외양이 서술되니 한 번쯤 읽어보시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모토로이 하야타>에서는 <도조 겐야>와 확실히 선을 긋기로 한 것일까. 아무리 괴이하더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파고들어 설명하던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하얀 마물의 탑>에서 이미 중도를 선택한 바 있긴 하지만) <붉은 옷의 어둠>에서는 아예 해석을 포기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설명할 수 없는 압도적인 괴이'와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인간이 접근해 설명할 수도 있는 괴이', 그 사이 어디 즈음에 위치하는 시리즈.
모든 것을 명명백백히 알아낼 수만은 없다는 타협점인 걸까.
작중 사건 자체보다는 그 사건을 둘러싼 시대 배경과 사회적 현상을 알리고 싶은 듯도 하다.
잘 읽었다.
끝.
- 1945년 여름,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에 패배한 일본의 주요 도시 대다수는 거의 다 불타 황량한 들판으로 변해버렸다. 특히 지독했던 곳 가운데 하나가 도쿄 대공습을 받은 과거의 도쿄시(현재의 23구 안쪽)였다.
도쿄역에서 후지산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전쟁 전에는 상상도 못 한 초현실적인 광경이 나타난 것이다. 간신히 목숨만 건져 전쟁터에서 귀환한 일본군 병사들이 전차 창문을 통해, 혹은 내려선 역 앞에서 실제로 바라본 광경은 그야말로 비일상적인 풍경이었다.
- 여기에 더 기괴한 광경이 더해졌다. 전쟁 전 일본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너무나도 기이한 '거리'가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암시장이었다.
- 패전으로 기아에 시달리고 삶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일본인 대다수가 그래도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건 이 암시장 덕분이었다.
- 모토로이 하야타는 전쟁 중 히로시마 우지나에 있는 육군 선박포병교도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승선한 무장선이 부산해협(대한해협 중 부산과 쓰시마 사이의 바다)에서 침몰한 뒤 우지나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탈 배가 한 척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연료조차 없었다.
한없이 초조해하며 하릴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어느 날, 그는 만주 건국대학에서 함께 공부한 동기 몇 명과 함께 대학 은사를 만나려고 노우미섬으로 건너갔다.
- 건국대학은 일본계와 만주계(중국인과 만주인), 조선계, 몽골계까지 아우르는 민족 자결을 이념으로 내세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배움터였으나 이들이 찾아간 교수는 군부가 점차 대학에까지 간섭하자 실망해 바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은사의 집을 찾아간 이 일이 하야타 일행의 목숨을 구했다. 그들이 노우미섬에 체류해 있는 동안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여기서 가혹한 갈림길에 선다. 이들은 서둘러 우지나로 돌아와 곧바로 폭탄 투하 지역의 구호 활동에 파견되었는데 하야타만 상관의 명령으로 타지로 보내졌다. 방사선 피폭이라는 사실조차 모른 채 피해 지역으로 들어간 학우들은 차례로 쓰러져 죽어갔다. 원자폭탄은 폭격이 이루어졌을 때의 대량 살상만이 아니라 이후로도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내는 악마의 무기였다.
... 나만 살아남았어.
- 이 암시장의 급속한 성장 배경에는 데키야라는 존재가 크게 관련되어 있다. 데키야를 쉽게 설명하면 신사 축제일 등에 다양한 노점을 내어 축제 공간을 만드는 등 자신들의 장사와 출점하는 자리의 연출을 담당하는 노점상 조직이다.
- 신주쿠를 예로 들자면 패전 다음 날부터 무질서한 암시장이 서자 나흘 뒤에 전쟁 전부터 이 지역을 자기 구역으로 관리해 온 네 개의 큰 데키야 조직 두목들이 그 운영에 나섰다. 여기에서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당시 관할 경찰서장이 물자 궁핍을 완화하는 응급조치로 암시장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소문이다. 즉 경찰이 나서서 데키야에게 암시장의 점포 관리를 의뢰했다는 얘기다. 그 증거로 패전한 해 10월에는 경시청 지도에 따라 '도쿄 노점상 동업조합'이 결성되었다. 이 조합의 목적은 행정 기관이 불법 상태의 데키야들을 단속하는 게 아니라 시장의 조직화와 질서 유지를 위해 그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데 있다. 조합 본부 아래에 경찰 관할별로 지부를 설치하고 그 지부 아래에 데키야의 각 조직을 배치한 조직구조만 봐도 도쿄 도와 경시청의 의도가 훤히 드러난다.
- 하야타가 이런 뒷이야기를 알게 된 것도 구마가이 신이치 덕분이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는 전쟁 전부터 이케부쿠로 데키야의 두목이었기 때문이다.
- 만주에 창설된 건국대학에는 동아시아 민족의 우수한 자제를 한 자리에 모아 교육받게 해 새로운 국가에 어울리는 인재를 육성한다는 사명이 있었다. 재학 중의 학비는 모두 국가가 냈고 학생들이 공동생활하도록 전원 기숙사에서 살았다. 방값도 식대도 전혀 들지 않았고 교복이나 교과서도 무료였으며 매달 용돈까지 나왔다. 하야타 같은 고학생에게는 그야말로 꿈만 같은 학교였다. 그런 까닭에 정말 가기 힘든 학교이기도 했다. 개교 이래 일본만 따져도 매년 합격자는 한 현에 한두 명 정도였다. 그래서 더욱 전국의 인재가 모여들었다. 수험에는 본인의 출신도, 부모의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 상태도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공부만 잘한다고 붙는 게 아니라 다른 뛰어난 재능이 있어도 합격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파격적인 대학이었다.
그래도 학생들 모두 중고등학교 성적은 우수했다. 이는 본인 능력과 노력에 따른 것이었겠으나 어릴 때부터 면학에 힘쓸 수 있는 유복한 환경에 있어서 그렇게 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유복하고 가문이 좋은 자제들 말이다.
- 모토로이 하야타와 구마가이 신이치는 그들과 달랐다. 하야타의 집안은 화물 운반 거룻배 운항 일을 했고 신이치의 아버지 구마가이 조고로는 데키야의 두목이었다. 게다가 하야타의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가업을 물려받았을 무렵부터 동력으로 달리는 프로펠러 배가 등장해 거룻배의 수요가 점차 줄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장남 하야타의 성장에 비례하듯 모토로이 집안의 형편은 어려워졌다. 사실 대학 진학 따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는데 아마도 신이치 또한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비슷한 가정 형편이 둘을 가깝게 했느냐고 묻는다면 사실은 아니다.
- "상당히 놀란 모양이네."
"와카야마역 앞에는 그런 광경이 없었으니까."
"지방에는 좀 있어야 암시장이 서겠지. 도쿄역 앞에 암시장이 단숨에 선 데는 배경이 될 만한 이유가 있어."
"몇 가지 조건이 겹친 결과... 라는 말이야?"
"정말 이해가 빠르군."
신이치는 이렇게 하야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너무나 기쁜 모양이었다.
- "암시장은 공습으로 타버린 터에 세워진 듯 보이지만 사실은 강제 소개된 터가 많아."
"아! 그래서 역 앞이었나?"
강제 소개란 '건물 소개'와 '가옥 소개'라고도 불린, 전쟁 중에 벌어진 건축물 철거를 가리킨다. 그 목적은 공습 화재에 따른 중요 시설의 연소 방지였다. 철도역은 두말할 필요 없이 육군의 주요 시설이었기 때문에 그 주변은 전부 강제 소개 지역에 해당했다. 그러니까 아직 타지 않은 가옥을 미리 철거해 더 이상 불이 번지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에도 시대에나 썼을 소화 방식이 전쟁 중에도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우에노에는 전차 변전소가 있잖아? 그래서 아주 꼼꼼하게 소개되었지."
"그렇구나. 군 시설, 무기 공장, 탄약창고, 민간 군수공장 등과 제일 가까운 역은 거의 강제 소개 지역이 조성되었다고 봐도 돼?"
- "그렇게 생긴 공터 이용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누구겠어?"
"데키야겠지."
두 사람은 웃으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도 제일 먼저 장사를 시작한 사람은 평범한 일반 시민이었어. 데키야 세계에서는 옛날부터 전문적인 장사꾼이 아닌 사람을 초짜라고 부르며 깔보는 경향이 있었어. 그러니까 그런 문외한들을 모아 운영하는 역할을 당연히 자신들이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아무리 강제 소개 지역이라고 해도 원래 땅 주인이 있을 거 아냐? 불법 점거잖아?"
"아마 앞으로 그 문제가 불거질 거야."
신이치가 집안사람들의 귀를 신경 쓰듯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말이야, 데키야가 암시장을 운영하는 데 강제 소개 지역의 사용은 수도 부흥을 위해서이고 암시장은 물자 궁핍을 완화하는 응급조치라는 점을 행정 기관도 경찰도 묵인했다고 해."
하야타는 이 말을 듣고 적잖이 놀랐으나 곧 있을 법한 일이라 이해했다.
- 암시장의 '암 闇'은 암 가격, 즉 밀거래 가격이라는 의미도 있고 동시에 어둠의 경로를 통한 물자라는 의미도 있다. 암 가격의 반대말은 공정 가격이고 정부 허가를 받은 통제 상품을 '공정 상품'이라고 부르고, 그 이외에 비합법적으로 거래되는 밀거래 상품에 이 암 闇 자를 붙인다. 정부는 공정 가격을 내세우며 식료품의 통제와 배급을 실행하려 했는데 애당초 패전 후에는 행정 기관조차 제대로 기능 ...
- 노골적으로 굴욕을 당했다. 하지만 굶어 죽지 않으려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온갖 고난 끝에 어렵게 손에 넣은 쌀도 돌아오다가 단속에 걸리면 그대로 몰수였다. 국가의 형식적이고 어리석은 '결정'이 필사적으로 살려고 하는 국민을 아무렇지 않게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게 바로 전쟁이다.
- 그런데 이 국가의 '결정'을 완고하게 지킨 결과 '밀거래'를 거부해 굶어 죽은 사람이 패전 후에 나오고 만다. 1945년 10월 11일에 도쿄고등학교 독일어 교수 가메오 에이시로가 이상하게도 2년 뒤 같은 달 같은 날에 판사 야마구치 요시타다가 모두 '밀거래'를 거부하고 죽었다. 야마구치는 도쿄구 법원의 경제사범 전임 판사로 밀거래 물자를 소지해 식량관리법 위반으로 검거 및 기소된 피고인 사안을 직접 담당하는 위치에 있었다. '식량통제법은 악법이다. 그러나 법률인 이상 국민은 절대 이에 복종해야 한다. 나는 아무리 괴롭더라도 밀거래 상품 매매는 절대 하지 않겠다.' 그는 이 신념을 관철하다 굶어 죽었다. 특히 야마구치 요시타다의 죽음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다만 찬반양론이 거셌다. 판사라는 자리에 어울리는 고결한 행위라고 칭송하는 사람과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조롱하는 사람으로.
- 그답게 바로 솔직하게 물었다.
"그래서, 데키야는 야쿠자야?"
신이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데키야 집 아들에게 대놓고 묻다니 정말 너답다."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할게. 하지만 사실은 뭔데?"
하야타는 신이치에게 사과하면서도 날 선 질문을 거두지 않았다.
신이치는 정겨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하기야 너는 건국대학에 있을 때부터 자주 이상한 데 관심을 가지고 조사했지. 괴짜였어."
"그랬나? 정작 나는 무엇에 제일 끌리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어."
"그래서 대학에 다시 들어가는 거겠지."
신이치는 하야타가 고향 집에서 혼자 내린 결심 정도는 일찌감치 간파한 모양이다.
"전쟁으로 중단된 학문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패전 후 일본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방향성을 찾을지 몰라. 그렇게 생각한 결과야."
"내가 보기에는 괜히 돌아가는 느낌이지만 너랑은 잘 맞을지 모르겠다."
하야타는 진지하게 대답하는 신이치를 보고 눈앞의 친구가 자신의 미래를 심히 걱정하고 있음이 뼈저리게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 신이치는 그렇게 말하고 어디까지나 만약을 위해 충고하겠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손님으로 가면 아무 문제 없을 거야. 하지만 성가신 문제를 가지고 있는 암시장도 있어. 그러니까 그건 조심해야 해."
"예를 들어 어디가 그런데?"
"제삼국인이 운영하는 암시장이 존재해."
그건 다툼의 빌미가 되겠다고 하야타는 바로 이해했다.
- 전쟁 중에 일본의 지배를 받은 탓에 일본군 징용으로 끌려온 중국과 조선, 대만 사람들이 패전 뒤에는 아무런 보장 없이 버려졌다. 물론 귀국한 사람도 있었으나 다양한 사정으로 일본에 남은 사람도 많았다.
미국을 비롯한 점령군은 그런 그들을 연합국에 들어가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최대한 '해방 국민'으로 처우하려고 자신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뜻으로 '제삼국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그들은 점령군과 같이 일본의 법 규제를 전혀 받지 않는 위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 "신주쿠는 전쟁 전부터 네 개의 데키야가 담당하고 있었고 이케부쿠로도 마찬가지야. 둘 다 통제된 조직 아래에서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그러지 않은 암시장이 있다는 말이야?"
"신바시와 시부야에서는 대만계, 우에노에서는 중국 화교와 조선계 상인과 영역 다툼이 있었어. 하라주쿠의 아오야마 방면은 신흥 주택지라 오래된 데키야 조직이 원래 없어. 그래서 그곳은 대만인과 조선인이 관여하고 있지. 나카노 북쪽 출입구에 일본인은 손대지 못하는 고급품 전문 암시장이 존재하는 이유도 조선인이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야. 기치조지는 근처에 무사시노 군수공장이 있어서 그곳에 징용된 중국인이 암시장을 운영해 당장은 기억나지 않는데 이밖에도 또 있을 거야."
"혹시..."
잠자코 신이치의 설명을 듣고 있던 하야타는 문득 입을 열었다.
"행정 기관과 경찰이 데키야의 존재를 묵인한 이유에 일본인 노점상들을 하나로 묶어 일본의 법 규제를 전혀 받지 않는 제삼국인들의 견제 세력으로 세우겠다는 의도도 있지 않아?"
"여전히 예리하군."
신이치는 신나게 웃고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나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데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어. 그런데 너는 지금 설명만으로도 바로 알아차리는구나."
하야타는 친구의 칭찬에 특별히 쑥스러워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배경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군."
- "일본 정부와 경찰이, 그보다는 GHQ가 우려하는 일은 암시장이라는 혼돈의 장을 매개로 패전으로 궁핍해진 일본인과 제삼국인이 뭉쳐 혁명을 일으키지나 않을지 걱정하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야 충분히 있을 수 있지."
신이치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즉 유통 구조가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하면 곧바로 데키야가 운영하는 암시장은 필요 없다며 없앨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야?"
"응. 아마 틀림없이 그럴 거야."
"이용할 만큼 이용하고 그다음은 나는 모르겠다고 내버리다니. 패전 뒤 제삼국인에게 한 짓과 똑같잖아. 이 나라 윗분들이 옛날부터 써먹던 수단이지."
이 두 사람의 예상은 기가 막히게 적중하나 그것 또한 미래의 일이다.
- 하야타는 신이치와의 오랜 우정을 굳건히 다진 후 간사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구마가이 조고로가 소개한 오사카 데키야의 간판 얼굴 오사코 다이고를 찾아가 그 사람 소개로 하숙집을 찾아 자리를 잡고 한 국립대학에 편입했다.
하지만 본가에서 돈을 부칠 수 없는 형편이라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야 했다. 그 때문에 하야타는 매일 열심히 가정교사와 신문사, 출판사 아르바이트 일을 했다. 요컨대 고학생이었는데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 그리 드물지 않아 처음부터 고생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면학과 관련된 내용으로 돈을 벌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하야타는 당시 사람들을 괴롭혔던 것과 똑같은 문제에 시달렸다. 배고픔이었다.
- 일단 '제대로 된 식사를 하려면 농림성이 발행하고 배포하는 '주요식량 선택 구입권'이 필요했다. 통칭 '외식권'이라 불리는 것으로, 한 장마다 '일식권'이라고 인쇄된 표가 회수권처럼 붙어 있었다.
- 간장 몇 방울을 떨어뜨리고 잘게 다진 파를 넣은 게 전부인 국. 잘게 썬 우동과 정어리 토막이라기보다 거의 대가리만 넣고 구운 철판구이... 등이 그의 위장에서 사라졌다.
- 패전 뒤 일본인은 가축의 내장 요리에 가장 놀랐다. 일본인은 메이지(1868~1912) 문명개화로 육식을 처음 배웠는데 그래도 전쟁 전 식탁에 육류가 나오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특히 내장은 끔찍하게 여겨 먹지 않았다. 반대로 다이쇼(1912~1926) 시기부터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중노동에 종사한 조선 사람들이 체력 보충 요리로 내장을 아주 좋아했다.
- 그런데 시나가와에서는 태평양전쟁 말기부터 일본인도 소 내장 요리를 먹었다고 한다. 이곳에 조선인 마을이 있었고 그곳에서 만든 탁주 '막걸리'를 일본인도 사러 갔다가 곱창 맛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막걸리를 마시면서 먹으면 맛있고 덤으로 힘도 불끈 솟는다. 무엇보다 가격이 싸다. 그런 소문이 일본인 사이에 퍼졌고 식량난까지 겹쳐 순식간에 평판을 얻었다.
- 이 곱창과 함께 당시 일본 식탁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요리'가 또 있다. 점령군 식당에서 나온 잔반 잡탕이다. 요코하마 암시장에서 이 잔반을 드럼통에 모아 끓여 '영양 수프'로 팔았는데 같은 일이 도쿄에서도 벌어졌다.
점령군이 '가비지'(garbage, 쓰레기)라고 부르는 것들은 폐기되는 단계에서 이미 반쯤 건조된 덩어리 상태가 된다. 이것을 신주쿠 암시장이 큰 자루에 넣어 회수해 그 내용물을 커다란 솥에 몽땅 넣고 ...
- "사카구치 안고(일본 근대 소설가이자 평론가)가 시부야 우다가와초에서 맥주를 세 병밖에 안마셨는데 계산할 때 보니 스무 병이 되어 있었지. 항의하니 발밑을 보라는 말을 들었어. 정말 아래를 보니 이게 웬일! 빈 맥주병 스무 개가 바닥에 구르고 있었다더라."
"덫에 걸렸네."
질 나쁜 술집에서는 자주 하는 수법인지 신이치는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맥주는 더 속일 게 없으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메틸?"
"아아, 그건 조심해야 해."
- 나날의 일상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많은 사람은 술로 도망치려 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일단 마시려고 한다. 그런 수요는 언제나 있었으나 패전 후이니 더욱 술이 필요한 시대였을지 모른다. 다만 진짜 술은 압도적으로 적었다. 하지만 돈을 벌 수 있는 장사임을 알기에 불법적인 수단에 손을 대는 사람이 나타났다.
- 암시장 술로 유명한 게 가스토리와 바쿠탄이다. '가스토리 柏取り'는 그 이름 그대로 사케가스(酒柏, 청주 재료를 압착하고 남은 재료)를 원료로 한 증류주이다. 하지만 패전 후 청주는 버려야 하는 쌀이나 고구마 등의 재료를 닥치는 대로 사용했고 게다가 아마추어가 만든 솥에 속성으로 증류한 제품이었다. 냄새가 고약하고 알코올 도수가 40도로 높아 석 잔 이상 마시지 못한다고 알려졌다. 창간하고 3호 사이에 폐간한 잡지를 '가스토리 잡지'라고 부른 것도 이 술의 석 잔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바쿠탄' 또한 마시면 위가 타올라 찢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폭탄이라는 문자 그대로 강렬한 술이었다. 연료용 알코올을 물에 희석해 가솔린용 드럼통에 담아 팔았다. 무엇보다 싸고 단시간에 취해 인기가 많았는데 가스토리도 바쿠탄도 절대 방심할 수 없는 무서운 술이었다.
- 이들 밀조주에 공업용 메틸알코올을 섞는 악덕 업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실명하는 사람과 사망자가 속출했다. 전쟁 전 프롤레타리아 작가였던 다케다 린타로가 오랫동안 과음하다가 패전 다음해에 사망했는데 메틸이 들어간 술을 마신 탓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도쿄 도는 도내 62개소에 '음식물 간이 검사소'를 설치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주둔군은 "메틸로 병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자는 사형"이라는 공문까지 냈다고 하는데 후자의 진위는 밝혀진 바 없다.
- 하야타와 신이치는 비교적 안전한 술을 마시면서 여러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내 생각에 너는 학문의 길을 걷는 게 어울릴 것 같은데."
"그래?"
"응, 틀림없어."
신이치는 확언하듯이 대답하고 조금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실내에서 얌전히 책 앞에 앉아 있을 인물이 아닌 것도 분명해. 그런 면에서 민속 채집이라는 활동을 펼치는 민속학은 너와 잘 어울리는 학문 아닐까?"
- "삼촌... 나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부르는데 저 녀석 성에 시장의 '시'가 들어간다며 아주 좋아해."
"장사의 성격상 미신을 믿는 거겠지, 당연해."
하야타는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너도 이름에 시장의 시가 들어가니까 어릴 때부터 기사이치 씨의 마음에 들었겠는데?"
"형님의 아들이라는 점도 있을 테지만 이름 덕도 봤을 거야.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사랑스러운 꼬마라는 점이었지만."
"주정은 하지 마라."
둘이 한바탕 실컷 웃어댔는데 이후 신이치는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어쨌든 아무래도 기시 녀석은 삼촌 눈에 든 것 같은데..."
"본인 실력이 부족한가?"
신이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 "어엿한 데키야가 되려면 '가세기코미(형님 밑에서 생활을 의탁하며 수습하는 생활)'에서 '잇폰(동료)' 그리고 '짓시붕(실질적인 부하)', 나아가 '잇카나토리(일가를 거느리는 조직의 두목)'에서 '다이메(후계자)'까지 순서대로 출세해야 해. 가세기코미와 잇폰은 '젊은이'라고 부르고 아직 어엿한 데키야로 대접받지는 못해.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젊은이라고 불러. 잇카나토리와 다이메가 되면 형님으로 인정받지. 짓시붕은 젊은이와 형님 사이에 해당하는데 그때그때 지위가 바뀌니까 지금은 이야기에서 제외하지."
"기시 씨는 수습에 해당하는 아직 가세기코미라는 거지?"
"잇폰이 되고도 남아야 하는데 저 모양이야. 그런데도 작은아버지는 놈을 특별 취급해. 그렇게 되면 다른 젊은이들에게 종종 말이 먹히지 않는 일이 생기지."
"그렇겠구나."
- 하야타는 친구의 말을 다 이해한 듯 굴었으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상대가 아버지의 부하이고 어릴 때부터 귀여움을 받은 '삼촌'과 관련된 일이라고 해도 기시라는 인물과 신이치와의 관계는 상당히 멀 것이다. 그런데도 친구가 그에게 이토록 집착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그 당시의 하야타는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던 데다 상당히 취해 있었다. 그래서 더는 사정을 캐묻지 않았다.
- 이날 밤, 신이치의 조언은 아주 소중했으나 하야타는 지금 대학에는 자신이 찾을 게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간사이로 돌아옴과 동시에 바로 퇴학하고 말았다. 그리고 1년쯤 신문사와 출판사 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결국은 '패전한 일본의 부흥을 뒷받침하기 위해 더 유익한 일을 하고 싶다'라는 뜨거운 마음을 품고 방랑의 여행에 나섰다.
구마가이 신이치를 비롯해 예전 동창들은 다들 말렸으나 아무도 그의 결의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도 하야타를 막을 수 없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북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향한 하야타는 마침내 기타큐슈의 게쓰네라는 작은 역까지 흘러갔다. 그곳에서 그는 과거 탄광회사의 노무 지도원이었던 아이자토 미노루를 만나 야코야마 지방의 누쿠이 탄광중 하나인 넨네 갱에서 탄 炭 광부로 일했다.
그런데 하야타가 마침내 탄광 일에 익숙해질 무렵 탄광 주택의 조악한 방을 무대로 불가사의한 연쇄 밀실 괴사건이 일어난다. 검은여우의 얼굴을 한 수수께끼 인물이 아무래도 사건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 기기괴괴한 사건에 그는 어쩔 수 없이 휘말리고...
어쨌든 하야타는 간신히 사건을 해결했으나 탄광부는 그만둘 수밖에 없어서 기타큐슈를 떠나 상경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하야타는 도쿄에 도착하는데 그곳에서는 '붉은 옷'이라 불린 의문의 괴인 怪人에서 시작된 너무나도 처참한 '붉은 미로의 붉은 옷 살인사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제 몫을 다 하게 교육한 다음에 뒤를 잇게 하지."
"친아들은 절대 안 돼?"
"꼭 하고 싶으면 일단 인연을 끊어야 해. 그리고 다시 아버지와 형님, 동생 관계를 맺어야 하고. 하지만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이지. 그렇게까지 해서 네가 뒤를 이을 필요가 있느냐는 소리가 나오지."
신이치가 다시 웃었는데 이번에도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듯했다.
"혈연관계가 없는 후계자라면 특별히 지적되지 않을 실수라도 실제 아들이 하면 '역시 친자식은 안 돼'라는 소리를 들어. 오래전부터 그런 독특한 분위기가 데키야의 세계에는 있어."
"하지만 너는 지금도 아버지 일을 돕고 있잖아."
"절대 나서지 않고 몰래 뒤에서 암약하고 있지. 그게 아주 재미있는데 이제 이 일도 슬슬 그만둘 때인 것 같아."
- "아니, 나보다 너는 어때? 전에 받은 편지에서는 그곳에서 무시무시한 살인사건에 휘말렸다고 적혀 있던데."
하야타는 넨네 갱에서 만난 금줄 연쇄 살인사건에 대해 그 내용부터 진상까지를 한바탕 설명했다.
"... 괴, 굉장해!"
신이치는 넋을 놓은 듯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기야 너는 탐정소설을 좋아했지. 탄광 사건을 소설로 써서 출판사에라도 보내봐."
- "탐정소설은 딱히 밀실 개수를 다투지 않아."
"무슨 그렇게 안일한 소리를 하나. 뭐니 뭐니 해도 후발 주자는 선발 주자를 뛰어넘어야 해."
"아니, 그러니까..."
"일단 제목은 그 두 작품을 모방해 <탄광 살인사건>, 아니면 <탄주 살인사건>으로 하면 어때?"
참고로 밀실을 소재로 한 작품은 <혼진 살인사건>과 <문신 살인사건>이고, 탄주는 탄광 주택을 줄인 명칭이다.
하야타는 완전히 흥분 상태에 빠진 신이치를 보고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네게는 탐정소설 재능은 없는 것 같다."
"아이고, 네, 네. 나는 원래 문학청년은 아니니까."
신이치는 토라진 표정을 지었으나 바로 호기심을 드러냈다.
"너라면 어떤 제목을 붙일 거야?"
하야타는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냥 솔직하게 <검은 얼굴의 여우>라고 지을까?"
- "그 결과 구역별로 각 점포가 생겼으나 각 점포가 집합해 뒤섞인 듯한 호쇼지만의 독특한 암시장이 생겼어. 잘게 나뉜 토지마다 저마다 점포가 있고 그 가게 사이의 빈틈을 잇듯 좁은 골목이 생겼지. 그래서 직선인 길이 적고 게다가 좁으니까 마치 미로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어."
"그거 재미있겠네."
신이치는 흥미진진해하는 하야타를 보며 예상했다는 듯 웃었다.
"너라면 그런 반응일 줄 알았어."
"완전히 탐정소설의 무대처럼 보이잖아."
- "암시장은 대부분 그렇지만 이곳에도 음식점이 많아. 특히 밤에는 술집이 번성했지. 해가 지면 각 점포가 등을 일제히 켜서 좁은 골목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붉은색으로 물들어. 아니, 그걸 붉은색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호지아케이드'라는 정식 명칭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곳을 '붉은 미로'라고 불러."
- 하야타는 소리 내지 않고 그 단어를 머릿속으로 읊조려봤다.
... 붉은 미로라.
하야타는 그 이름에서 외설스러움, 신비함, 혼돈, 배덕함, 탐미, 환상적인 요소를 느꼈다.
- "그건 경찰 일이야."
"기사이치 형님도 이미 경찰에 얘기했어. 그래서 파출소 정관도 순찰할 때 더 신경을 써준다고 해. 하지만 소문이 가라앉을 기미가 전혀 없어, 아버지는 그런 면에서 너에게 일종의 귀신 퇴치를 원하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에 어떤 합리적인 해석을 내려 소문 자체를 없애달라, 그런 소리야?"
"오호 역시 말이 잘 통하네."
대놓고 기뻐하는 신이치와는 대조적으로 하야타는 완전히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말은 쉽지만, 막상 하려면 어려운 일이야."
"그런가?"
"이런 종류의 소문은 좀처럼 출처를 알 수 없어. 게다가 내용에도 실체가 없어. 전혀 짚이는 구석이 없는 얘기가 많지. 그래서 소문이 사라지는 것 자체가 거의 무리야.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손 놓고 기다리는 수밖에."
"그러면 곤란해."
- "쇼와(1926~1989) 초기에 유행한 빨간 망토 이야기는 알지?"
하야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신이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 당시를 떠올렸는지 정겹게 대답했다.
"어렸을 때 듣고 상당히 무서워한 기억이 있어."
"어떤 얘기였어?"
"해가 저물었는데도 계속 밖에서 놀면 빨간 망토에게 잡혀간다고 동네 어른들이 겁을 준 게 처음이었지."
"해가 지면 어디선가 빨간 망토를 입은 괴인이 나타나 아이를 유괴해 죽인다. 기본적인 이야기는 이게 다야. 다음은 학교 화장실에 나타나 아이를 죽였다. 혹은 어디선가 여러 명이 희생되어 군대와 경찰이 그 사체를 처리했다. 나아가 빨간 망토를 잡으려고 경찰이 출동했다. 그런 소문이 흘렀는데 전혀 구체적인 게 없었어."
"어디 사는 누군가가 장난으로 흘린 지어낸 얘기라는 소리야?"
"아마 그렇겠지. 그 출처를 알아내 본인에게 거짓말임을 실토받았다면 이 소문은 사라졌을지 몰라."
"하지만 실제로는 무리였을까?"
"게다가 소문은 퍼지는 과정에서 변해 처음 이야기가 부정된다고 해도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퍼지고 있지."
- 신이치는 붉은 미로에서 퍼지고 있는 괴담을 '해결'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빨간 망토는 에도가와 란포의 <괴인 이십면상>과 종이 인형 연극의 괴기한 이야기가 바탕에 있다는 고찰이 있어."
"오호, 신빙성이 높아 보이네."
- 아케요는 하야타의 해석에 완전히 감격한 듯했다.
"그럼, 바로 묻겠습니다. 목격한 붉은 옷에 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질문을 듣자마자 일단 흠칫 몸을 굳혔으나 이 사람에게는 괜찮겠다고 생각한 듯 열심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케요의 경험담으로 넘어가기 전에 그녀들 창부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팡팡, 어둠의 여자, 길거리 창녀, 창부, 밤의 천사... 등 호칭은 다양하나 그 근원을 따지자면 패전 후 불과 13일 만에 정부가 서둘러 발족한 '특수위안시설협회 RAA'가 거의 모든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조직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새로운 일본의 재건발족과 모든 일본 여성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점령군 미국의 '간토 지역 주둔 장교와 일반 병사의 위안'인데 일본 여성의 '순결'과 미군 병사의 '위안'은 너무나 상반되는 단어이다.
실제로 협회가 '신 일본 여성에게 고함, 전후 처리의 국가적 긴급시설의 하나로 주둔군 위안이라는 일대 사업에 참가할 새로운 일본 여성의 솔선 협력을 요청한다'며 긴자 대로에 커다란 간판을 내놓고 모집한 결과 미군 병사를 상대로 매춘하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젊은 여성들이 스스로 달려왔다. '나이 18~25세, 숙소, 의복, 식량 등 전부 지급'이라는 조건이므로 당연했을 것이다.
- 거리에 넘쳐나는 창부들은 대개 '게다(일본인들이 신는 나막신)를 신은 천사'와 '손톱을 붉게 물들인 동반 아가씨'로 나뉘었다. 전자는 일본인을, 후자는 미군 병사를 상대하는 팡팡이다. 양쪽에 주어진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일본인을 상대하는 '천사'에서는 어딘가 때 묻은 인상이 있는데 미군 병사를 상대로 하는 '동반 아가씨'에게서는 화려한 느낌이 난다. 이는 그녀들의 차림새에서 오는 차이도 있겠으나 그보다 고객층의 차이에서 오는 이미지가 크다.
- "일본인 상대 팡팡은 뭔가 거칠어."
배달된 가리에 커피를 맛있게 마시면서 강력하게 주장하는 아케요는 말할 것도 없이 미군 병사 전문이다.
"게다가 그쪽은 일곱 살부터 마흔다섯까지 나이 폭이 너무 넓다잖아."
"고가 밑 어두운 곳으로 가면 온갖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있지."
"잠깐만! 신이치 씨, 혹시 갔어?"
"당연하지."
신이치는 바로 대답했다.
그 행위를 했는지 아닌지는 제쳐두고라도 그라면 '사회 견학'이라며 구경하러 갔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하야타는 생각했다.
"그에 비해 우린 열여덟에서 스물다섯 정도에 모여 있어. 게다가 온리도 상당히 있어서 자기는 팡팡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애도 있지."
여기서 '온리'란 특정 미군 병사만 상대하는 창부를 가리킨다. 불특정 다수를 손님으로 맞는 게 아니므로 매춘부라기보다 '애인'의 ...
- 아니야, 그것만이 아니야. 그전에도 이미 본 것 같다.
그 후로 그녀는 좌우로 흐르는 가게의 모습을 기억하기로 했다. 그리고 몇 번째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역시...
아무래도 자신은 고스트타운의 똑같은 장소를 계속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끔찍한 사실을 마침내 깨달은 것이다.
... 안 되겠어. 도망칠 수 없어.
- 아케요는 필사적으로 달리면서 한편으로는 포기의 눈물을 흘렸다. 곧 체력이 다해 더는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었다. 두 다리가 완전히 막대기처럼 느껴졌다. 다리를 멈추면 바로 붉은 옷에 따라 잡히고 만다. 그 뒤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잠깐 상상했을 뿐인데도 머릿속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적색이라기보다 주색....
그 주색에서 신사의 도리이를, 도리이에서 이나리(신사에 모시는 오곡의 신), 이나리에서 여우(여우는 오곡신의 사자)를, 여우에서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라는 식으로 그녀는 차례차례 연상했다.
...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여우에게 속았음을 안 남자가 정신없이 돌아다니기를 멈추고 담배 한 대를 피움으로써 원래 세계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만약 그게 실제 경험담이었다면...
지금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할머니는 분명 진짜 사실인 듯 이야기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 "실은 너한테 붉은 옷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문득 연상된 게 있기는 했어."
하야타는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 대답했다.
"뭔데?"
"붉은 옷의 색깔 말이야."
"적색을 말하는 거야? 사람에 따라서는 좀 밝은 주색으로도 보였다는..."
"예전에 호쇼지가 모신 부처는 사원 이름이 한자로 보생 宝生인 걸로 보아 보생여래(대일여래의 평등성지로부터 나온 여래로, 네 보살을 거느리고 일체의 재물과 보배를 맡고 있다)가 아닐까요?"
하야타의 질문에 기치노스케는 자신 없어하며 대답했다.
- "인도 불교에는 5대 요소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땅, 물, 불, 바람, 하늘로 여기에 황, 백, 적, 흑, 청이라는 색이 호응하죠."
"얘기가 거기까지 가?"
신이치가 훼방을 놓으며 지적했다.
"전에 너한테 들은 헤이안쿄교토의 옛 이름의 풍수에도 그런 색 구분이 있었지."
"동쪽의 청룡이 청, 서쪽의 백호가 백, 남쪽의 주작이 적, 북쪽의 현무가 흑이고 천상의 북극성이 황이야. 똑같은 얘기를 불교에도 적용할 수 있어. 여기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아축여래는 청, 아미타여래는 백, 보생여래는 적, 불공성취여래는 흑, 대일여래는 황으로 다섯 여래와 오색의 대응을 설명하는 사고방식이 있어."
"이 설에 따르면 보생여래는 적색인가?"
- 먹을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전소한 집터에 한없이 머물러있을 수는 없다. 애당초 친척이 다 죽었다면 이렇게 기다리는 행위 자체가 낭비다
하지만 곧 나랏일 하는 사람이...
혹시 나를 찾아 보호해주지 않을까. 세이이치는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야스쿠니가 남긴 아이'였으니까.
-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은 전쟁 중에 '영예로운 아이'라고 불렸다. 전국에서 뽑힌 그들의 대표는 야스쿠니 신사 행사에 출석했다. 아이들은 '신전의 대면'이라는 행사를 통해, '명예롭게 전사한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라고 배웠다. 행사는 황후가 과자를 하사하고 내각총리대신이 훈시하는 순서로 진행되는데 일곱 살 때 참석한 세이이치는 모든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마음만은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신전의 대면은 1939년에서 44년까지 6년 동안만 이루어졌다. 야스쿠니가 남긴 아이들은 늘어나기만 할 뿐이고 전쟁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랏일 하는 사람이 데리러 올 기미는 없었다. 영예로운 아이라고 칭송하던 어른들도 지금은 아무도 그를 살피지 않았다.
세이이치는 어쩔 수 없이 교토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그곳에는 아버지 친척이 살고 있고 전에도 여러 번 그 집에 묵으며 놀았던 적이 있다.
- 폐 가리에에 묵기로 했다. 가리에의 2층이 하야타가 지낼 곳이었다. 파친코 가게 주거 공간에서 지내면 파친코 기계와 군함 행진곡 소리가 시끄러울 거라며 기치노스케가 배려한 것이다. 기치노스케가 가리에의 주인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사례를 했다고 한다.
즉 내일 늦게 일어나도 전혀 상관없는, 세 사람만 남았다는 소리다. 그래서 하야타는 연회를 파하느라 고생했다. 내 환영회가 아니었나... 라며 쓴웃음을 지으며 간신히 새벽 3시에 끝낼 수 있었다.
- 드디어 하야타와 신이치가 주거 공간을 나왔을 때 기치노스케와 아케요는 그대로 오늘 밤은 이곳에서 자겠다고 남아 있었으므로 둘이 다시 마시기 시작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야타도 거기까지는 그들을 챙기지 않았다.
"너는 여전히, 정말 성실하기 그지없구나."
가리에의 2층 다락방 같은 공간에 오를 때까지 하야타는 신이치의 말에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야타는 자신이 묵을 공간을 보자마자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방을 둘러보며 입을 뗐다.
"설마 여기, 전에는 손님을 받았어?"
"사실은 그래."
신이치는 싱긋 웃고는 그 화제를 꺼냈다.
"여자애가 도망치고 대신할 애를 못 찾아서 그쪽 장사는 끝냈다. 나는 그렇게 들은 게 다인데 아무래도 미군 병사 잭 때문이 아닐까?"
"아케요 씨의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생각한 거야?"
"아아, 덕분에 이렇게 우리 보금자리도 생기고 잘됐어."
하야타는 이 말이 걸렸다.
- "그런데 괜한 질문일지 모르겠으나 이 가게에서 사시나요?"
"아니, 아니지, 손님. 아무리 나 혼자라고 해도 이렇게 좁은 데서는 못살아."
주인은 특별히 불쾌한 기색 없이 씁쓸하게 웃었다.
"호쇼지역 남쪽에 빈민굴이 있어. 그곳에서 매일 출근해."
굳이 '굴'이라고 표현한 건 자조를 담은 것이다.
- "... 길을 헤매시진 않나요?"
그 질문에 주인은 순간 굳은 표정을 지었다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자기 가게까지 오는데 헤매는 녀석은 없지."
호쾌하게 웃었으나 어쩐지 허세를 부리는 듯 느껴졌다.
"당연하죠. 실례했습니다."
하야타가 바로 사과하니 갑자기 가게 주인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한참 입을 다문 채 생각에 빠진 표정을 짓고 나서 말했다.
-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아마 여기에 가게를 낸 사람 대다수는 자기 집에서 가게까지의 길 외에는 모를... 겁니다."
"그 밖의 붉은 미로는 모른다?"
"일에 필요해서 가야 할 가게 정도는 알겠지만."
"붉은 미로 전체는 거의 파악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가게 주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손님이라면 그냥 얘기해도 될 것 같은데."
마치 자신을 설득하듯 말했다.
"일부러 조금 멀리 돌아가요."
"집에서 가게까지?"
하야타가 바로 확인하니 가게 주인은 다시 말없이 끄덕였다.
"다른 가게 주인들도 마찬가지인가요?"
"... 아마도."
"왜죠?"
"여기서 가게를 낼 때 주위 가게 사람이 그렇게 알려줬으니까. 이유를 물으면 '헤매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지... 뭐, 이리저리 말은 많지만, 그 고장에 가면 거기 법을 따르라는 말도 있잖소. 그래서 사실은 가게까지 가장 빨리 가는 길을 몰라요."
- 하야타는 문득, 붉은 미로의 비밀을 얼핏 들여다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이 땅에 관한 숨겨진 정보가 달리 또 없을까 싶어 캐물으려 했으나 가게 주인은 이미 원래 태도로 돌아와 아무리 속을 떠보려 해도 더는 나오는 게 없었다. 계산하려 했는데 통상 암시장의 우동 가격보다 훨씬 비싼 가격을 불렀다. 일본산 밀가루를 사용했으니까 어쩔 수 없단다. 그래서 손님이 없었던 거였다. 그래도 맛있어서 상당히 만족한 데다 붉은 미로의 새로운 지식까지 얻었으므로 하야타는 불평하지 않기로 하고 기분 좋게 값을 치르고 가게를 나왔다.
- 아무래도 그게 아닌 듯한데 이유는 모르겠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손님 일부일 뿐인데 그런 녀석들이 아침과 오후에 집중해서 오는 게 아닐까... 달랑 하루 도울 뿐인데도 신이치는 이상한 자신감으로 그런 결론을 내렸다.
- 실은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 아까부터 파친코 기계에 앉아 있는데 이 녀석이 너무나 수상했다.
열여섯이나 열일곱이려나 아직 성인이 되지도 못했는데 묘하게 어른스러워 보인다. 그것도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다. 중년 남성이 인생에 느끼는 권태감 같은 게 이 녀석에게서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강한 혐오감이 느껴지는 기척을 몸에 두르고 있을 만큼 이 녀석은 길지도 않은 인생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해왔을까. 그게 좋은 경험이 아님은 확실했다.
- 물론 가게에 들어와 양민이 담당하는 '구슬 판매 · 경품 교환소'에서 파친코 구슬을 사서 기계를 고르려고 가게 안을 어슬렁거릴 때까지, 그 행동만 보면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신이치는 이 녀석이 절대 기계를 고르려고 하는 게 아님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대놓고 가게 전체를 관찰하며 값을 매기는 불온한 냄새가 사방에 퍼졌기 때문이다. 그는 파친코 기계 뒤쪽 통로에 설치된 '부정방지 감시용 구멍'을 통해 그 기척을 내내 살피고 있었다.
- 그곳에 가려면...
그날 밤, 신이치와 헤어져 걸었던 길을 떠올리며 나아갔다. 하마마쓰야의 사토코의 비명을 들었던 지점에서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뛰기 시작했다. 최대한 비슷하게 움직임으로써 기억을 더 선명하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덕분에 몇 번의 갈림길 모퉁이를 왼쪽으로 돈 순간, 그 골목 앞에 자리 잡은 사당을 발견하고 하야타는 안도했다.
... 헤매지 않고 찾아왔네.
하지만 기뻐한 것도 찰나였다.
그 사당 뒤에서 어떤 검은 것이 쓱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그림자처럼 보였는데 이런 곳에, 게다가 저런 사당 뒤에 왜 인간이 숨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인간일 리 없다. 흠칫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선 하야타에게 사당 뒤에서 나온 그것이...
- "으악!"
의외로 비명을 질러 깜짝 놀랐다. 하야타는 놀라면서도 눈을 응시하고 그것에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상대도 조심조심 이쪽으로 오는 게 아닌가.
"뭐지?"
"한숨 돌렸네요."
서로 자기가 본 게 인간임을 확인하고 보란 듯 나란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는 상대가 인간이 아닌 존재...라고 생각하고 순간 겁먹은 겸연쩍음을 숨기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 "아!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피차 마찬가지니까 그건 신경 쓸 필요 없지."
하야타는 예의 바르게 사과하는 상대에게 대답하면서도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학생인가?"
"네. 그렇습니다."
동안의 청년은 아케요가 쇳소리를 올리며 요란을 떨 법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무엇보다 품위가 있었다. 그러므로 붉은 미로의 고스트타운 안에, 복잡한 사정이 있을 법한 사당 뒤쪽에서 나타날 인물처럼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그 사당 뒤에는 뭐가 있었나?"
"팽나무로 보이는 큰 나무의 그루터기가 있었습니다."
"사당은 그걸 모시고 있나?"
"그렇게 보였는데 사당 안에 위패 같은 것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하야타는 사당에 관해서 더 물으려다가 이 청년의 신원이 궁금해졌다.
"붉은 미로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아뇨, 이번이 처음입니다."
청년은 바로 부정하고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 "여기 관계자는... 아니신 것 같네요."
"아무래도 피차, 관계자는 아닌 듯하군."
"그런데도 저는 그 사당 뒤에 있고, 당신은 그 사당에 가려고 했죠. 어째서일까요?"
"연상의 특권으로, 먼저 자네 사정을 들어볼까?"
"좋습니다."
청년은 구김 없는 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괴기담이라면 사족을 못 씁니다. 그래서 붉은 미로의 붉은 옷 이야기를 듣고는 조금 조사해 보자는 마음이 들었죠. 그 과정에서 고스트타운의 존재와 이 땅의 과거를 알고 아주 큰 사연이 있다고 느껴서..."
- "예전에 감옥과 처형장이 있었다는 건 아십니까?"
"응. 그건 들어 아네."
하야타가 대답하자, 청년은 살짝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면 이곳에서 대량의 포의 항아리가 나온 건요?"
"... 포의 항아리?"
"여성이 출산하면 태아를 감싸고 있던 태반과 태막, 탯줄 등을 항아리에 넣어 그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하기를 바라며 땅에 묻는 풍습이 있는데 그때 사용하는 항아리입니다."
"아아, 포의를 넣는 항아리라는 뜻이군."
"보통은 출산한 집의 봉당 같은 데 묻습니다. 그런데 왠지 이 땅에서 대량으로 발굴되었다는... 이야기가 실은 이곳에 감옥과 처형장을 만들 때 있었답니다."
- 하야타는 이때가 되어서야 임산부 쇼코 살해와 같은 임산부인 야요이, 사토코, 아케요의 습격 사건이 이 포의 항아리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예감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청년은 아직 이야기를 끝내지 않았다.
- "그런 땅에 감옥과 처형장이 만들어졌다면 조금 내력이 있을 법하지 않나요?"
"생명 탄생의 상징 같은 포의 항아리와 죄인들의 처형이라는 죽음은 완전히 정반대...라는 말인가?"
"네, 너무나 얄궂은 이야기죠."
"하지만 실제로는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왜 그런가요?"
청년은 그렇게 되물으면서도 바로 하야타의 대답을 알아차린 듯했다.
"원래는 출산한 집 봉당 같은데 묻어야 할 포의 항아리가 이곳에서 대량으로 출토되었기 때문이지. 누가 어떤 의도로 많은 포의 항아리를 모아서 일부러 이 땅에 묻은 게 아닐까라고 추측할 수 있어."
"그, 그러네요."
청년은 같은 뜻을 품은 동지라도 만난 듯 기뻐했다.
- "게다가 중국 진나라 때 얘기인데 죄인들은 '자의 赭衣'라고 하는 죄수복을 입었습니다. 이게 글자 그대로 붉은 옷이죠."
하야타는 한자의 설명을 듣고 다시금 오싹해졌다.
"고사성어에 '자의의 길이 막혀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길에 가득 있다는 표현으로, 즉 죄인이 많다는 뜻입니다."
청년은 흥분한 모습이었다.
"이미 아시겠죠? 이 붉은 미로에서 일어난 임산부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여겨지는 붉은 옷은 이 포의 항아리와 자의에서 명명된 게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야타는 청년의 지적에 충분히 충격을 받았으면서도 반론했다.
"죄인들이 검붉은 옷을 입은 건 진나라 때 일이야. 일본과 그리고 이곳과는 거리도 시간도 너무 멀어."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무엇에 이름이 붙여질 때는 너무 엉성한 설명 같아도 약간의 관련성만 있으면 이름이 되는 예가 많습니다. 예전 이곳에 감옥과 처형장이 있었고, 그전에는 대량의 포의 항아리가 있었다...라는 지역의 기억을 가지고 있고 또 붉은 옷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 이 지역에 출몰하는, 무차별 폭행범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순간적으로 '붉은 옷'이라고 명명했다 해도 과히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 그렇겠군."
"또 그 사람이, 이 사당이 팽나무 같은 큰 나무의 그루터기를 모시고 있고, 과거에 <곤자쿠모노가타리슈(헤이안시대에 편찬된 설화집)> 제27권 <혼초쓰케타리레이키>에 기록된 '레이제이인 히가시노토인의 소즈도 귀신 이야기 4'를 알고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 "교토의 레이제이인 골목 남쪽과 히가시노토인대로 동쪽이 만나는 모퉁이에는 불쑥 '소즈도노'라는 불길한 저택 터가 있었는데 그곳은 이른바 '마가 낀 자리였습니다. 고로 아무도 살 수 없었죠. 레이제이인 골목 북쪽에는 조정의 최대 관직 중 하나인 사이벤 재상인 미나모토노 스케요시의 저택이 있었고 그곳에서는 소즈노의 북서쪽 구석에 있는 커다란 팽나무가 보였는데 노을이 질 무렵이면 소즈도의 침전에서 새빨간 옷이 훨훨 날아 팽나무 쪽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고 합니다."
"팽나무와 붉은 옷..."
청년은 조금 전 사당 뒤쪽에 팽나무 같은 커다란 나무의 그루터기가 있었다고 했다.
"홑겹 옷이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침전에서 팽나무까지 날아갔을 뿐만 아니라 슬금슬금 나무를 기어 올라갔답니다."
"거참 너무 기분 나쁜 광경 아닌가."
"그래서 인근에서는 아무도 다가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미나모토노 스케요시의 저택에서 숙직 당번을 서는 무사가 그 옷을 '내가 활로 쏴서 떨어뜨리겠다'라고 했답니다. 동료들이 '그건 못할 거야'라고 놀리며 선동하자 무사는 '꼭 쏘겠다'라고 장담하고 실행에 옮겼죠. 그 결과 멋지게 붉은 옷을 맞혔는데, 그래도 옷은 나무를 기어 올라갔답니다. 땅에 엄청난 양의 피를 흩뿌리면서..."
"... 붉은 옷의 선혈이라."
"무사는 저택으로 돌아와 그 광경을 동료들에게 말했습니다. 다들 찜찜하게 생각했지요.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습니다. 그날 밤, 무사는 잠든 채 죽었다고 합니다."
- 지금까지 나온 그의 이야기에 지적할 부분은 많았다. 그런데도 하야타는 이상하게 믿음이 가는 청년의 말에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재미있는 학생이군.
그래서 그도 아케요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왜 붉은 옷이라 불리는지, 그 계기가 된 일이나 사건이 과거에 있었나, 실은 아무것도 몰랐다고 해. 이 땅에 옛날부터 산 사람이라면 아마 뭔가 알았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도 말하지 않고 있지."
"꼭 알아내고 싶네요."
청년의 두 눈이 호기심에 번쩍이기 시작했다.
"옛날이야기를 알 만한 사람을 모르세요?”
"미안하지만 나도 외지인이라."
청년은 실망한 듯 보였으나 바로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 청년의 말로는 사당 안에 조그마한 돌이 모셔져 있는데 아무래도 사형된 자들을 공양하고 있으리라고 추측했다. 다만 돌 주위에서는 작은 항아리도 여럿 있었는데 포의 항아리와 관련이 있을 수 있겠다는 것이다.
"정말 고맙네."
하야타는 감사 인사를 건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기를 당부하고 간단히 기사이치유기장 살인사건과 자신과의 관계를 말했다. 처음 만난 상대에다가 그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데도 이 청년에게는 뭐든 알려줘도 상관없겠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아하하, 그렇다면 당신은 아마추어 탐정인가요?"
그렇게 말할 때 청년의 음색이 너무나 이상했다. 동경하는 듯도 안됐다는 듯도 부럽다는 듯도 꺼리는 듯도 한, 너무나도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정말 불가사의한 청년이군.
하야타가 다시금 상대를 자세히 관찰하는데 그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멀리서라도 사건이 해결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꾸벅 인사하더니 자리를 떠났다.
- 하야타는 패전 직후였던 그 시기, 아직 일본인은 거의 입지 않은 청바지를 익숙하게 입은 모습의 청년을 배웅하면서 다시금 그의 이야기 가운데 걸리는 게 있음을 느꼈다.
... 포의 항아리와 검붉은 옷과 붉은 홑겹 옷.
모두 '옷 의 衣'자가 들어간다.
그리고 검붉은 옷이라고 할 때의 자 赭에도 붉을 적 赤이 들어가고, 홑겹의 옷도 붉다.
셋을 합치니 '혁의 赫衣', 곧 붉은 옷이라는 괴이가 탄생했다.
딱히 이상한 부분은 어디에도 없다. 그 청년이 지적했듯 그런 게 바로 명명이라는 과정이다. 게다가 그 대상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이니 이름에 불분명한 부분이 있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 "그렇다고 해도 기사이치 씨가 저지른 죄에 어떤 새로운 해석이 생길 일도 없으니까 괜한 지적일지 모르지만..."
"... 아냐, 괜찮아."
두 사람 사이에 오랜 침묵이 아주 무겁게 떨어졌고 그 상태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거, 나도 좀 해볼까?"
하야타는 완전히 낙담한 신이치를 지나쳐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 어눌한 손놀림으로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다. 그러곤 신이치에게 권했다.
"자, 마셔."
"... 음, 너는 안 되겠다."
신이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지적했다.
- "그렇게 되면 경찰은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까..."
"미궁에 빠진... 셈인가?"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러나 두 사람의 예상은 반쯤 빗나가고 반쯤 맞게 된다.
- 사실 앞의 소문에서도 당연히 붉은 옷이 관여한 듯 소문이 나돌았다. 기치노스케라는 사람이 저지르기에는 무리한 범행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붉은 옷의 소행으로 여겨졌다.
"... 결국은 의뢰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네."
하야타는 호쇼지역 앞까지 배웅 나온 신이치에게 말했다.
"붉은 옷 말인가?"
"결국은 수수께끼인 채로 남았잖아."
신이치는 잠시 침묵하고 말했다.
"쇼코가 살해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붉은 옷의 정체를 제대로 밝혀냈을 것 같아?"
"아니, 무리였을 거야."
하야타가 즉시 답하니 신이치가 싱긋 웃었다.
"그렇다면 됐잖아?"
"된 건 아니지. 일로 의뢰를 받은 거니까."
"너는 진짜 지나치게 성실하다니까."
신이치는 졌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바로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우리 집에 원하는 만큼 있어도 되는데 앞으로 어쩔 셈이야?"
"역시 나는, 광부처럼 패전한 일본의 부흥을 밑바닥에서 지탱하는 일을 하고 싶어."
"너 같은 남자가 아깝게..."
신이치는 대놓고 투덜댔으나 하야타의 결심이 굳건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 "살 곳이 필요하면 우리 아버지와 의논해."
"고마워. 꼭 그럴게."
두 사람은 곧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으나 신이치는 예상보다 훨씬 오래 붉은 미로에 머물러야 했다.
- 기사이치유기장은 기사이치 신지와 야나기다 세이이치, 양쭤민 세 사람이 다시 문을 열었으나 사건의 영향 때문인지 손님이 줄어 결국엔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말았다. 그 결과 신지는 이 씨 부인 곁으로 돌아가 신주쿠 곱창 가게를 돕게 되었고, 세이이치는 붉은 미로의 다른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세이이치는 얼마 후 가게를 그만두고 붉은 미로에서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신이치는 사타케의 관여를 의심하고 크게 걱정했는데 세이이치의 행방은 끝내 알 수 없었다.
야요이테이의 야요이와 하마마쓰야의 사토코는 무사히 출산했다. 야요이가 아들, 사토코가 딸인데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했다고 한다. 그리고 덴이치 식당의 가즈코는 요리사 청년과 경사스럽게도 결혼했다.
- 모토로이 하야타는 신이치가 보내주는 편지를 통해 관계자의 소식을 들으면서 자기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그런 그가 관심을 가진 일은 해상보안청의 항로표식 원이었다. 이른바 '등대지기'라고 하는 직무였다. 등대지기는 해상을 항해하는 선박의 안전을 짊어지고 있다. 패전 후 일본 경제를 다시 세우는 데 필요한 해운과 수산을, 그야말로 배후에서 지탱하는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천직을 발견한 것인지 모른다.
하야타가 매우 흡족해하며 부임한 등대에서는 너무나도 비밀스럽고 기괴한 사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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