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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다 신조] 산마처럼 비웃는 것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8. 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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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마쓰다 신조 / 권영주
출판 : 비채
출간 : 11.08.29


       

           

<도조 겐야 시리즈>를 총 13권으로 완결 지을 거라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한국에 번역 출간된 건 현재까지 총 5권, 곧 출간될 <흉조처럼 꺼리는 것>과 <기명처럼 바치는 것>을 포함하면 7권이다. 

모쪼록 신간이 큰 인기를 끌어 전 시리즈가 소개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산마처럼 비웃는 것>에는 본 줄거리 외에도 상당히 오싹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발견되지 않은 금광을 둘러싼 형제간의 암투.

팍팍한 생계에 찌들려 깊은 산중에 두고 와야만 했던 노모.

복을 비는 것인지 마를 경계하는 것인지 알아차리기 힘든 여섯 지장에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두려움이 새겨져 있었다.

 

최근 학계에서 조선에는 '고려장'이 없었고, 이는 일본에서 있었던 풍습이 와전되었다는 주장이 나왔다고 한다. 

정말 중요한 건, 그것이 어느 나라의 풍습이었냐가 아니라-

'일어나긴 했던 일'이라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두 늙은 여자>에서도 고된 겨울을 맞은 알래스카 부족이 두 노인을 남겨두고 떠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한다.

인체 또한 생존을 위한 에너지가 부족하면 중요도가 덜한 장기 및 저장물을 분해해서 사용한다.

 

당장 자신이 처한 상황이 아닐 때, 한 발 떨어진 위치에서 자신만의 도덕과 윤리로 현상을 재단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내가 옳고 상대가 틀렸다'가 아니라, '지금의 나와는 맞지 않다' 정도의 감각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저 '다를 뿐'임을, 혹은 '사실은 다르지 않음'을 기억해야 할 때가. 

 

<산마처럼 비웃는 것>에서 내가 읽은 것은 그런 것이었다. 

 

- 물론, 본문은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다...!

오싹한 체험 수기와 범인을 특정하기 어려운 연쇄 살인, 해결했나 싶을 때마다 발견되는 반전.

결국 마주한 범인과의 추격전...! 

 

<도조 겐야 시리즈>는 미스터리가 가미된 추리 소설 시리즈이므로 보다 폭넓은 독자층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중 시간 흐름이 있긴 하지만, 어차피 모두 독립적인 사건이므로 어떤 순서로 읽더라도 상관없다.

 

이번 여름은 <- 것>으로 끝나는 <도조 겐야 시리즈>와 함께 해보시는 게 어떠실지.

(조금 더 고즈넉한 맛을 원하신다면 <항설백물어>도 좋다! <전 항설백물어>도 출간 예정이니 많은 관심 가져주시길! 비채 사랑해요)  

 

 

   


   

 

들어가기에 앞서

 


고도 지방의 한 촌락인 구마도에서 발생한 연쇄살인사건을 기록하게 됐을 때 나는 본 사건의 특수성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그 특수성이란 내가 이 사건의 중심인물인 가스미 가 사람들, 즉 큰아들 다쓰이치와 그 가족, 둘째 아들 다쓰지와 그 가족, 그리고 셋째 아들 다쓰조와 안면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이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일개 아마추어 탐정에게 얼마나 불리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변명을 할 마음은 결코 없으나, 본 사건이 연쇄살인사건으로 발전한 것은 역시 내가 사건 관계자들 중 다수와 직접 대면하지 못한 탓이 아닐까 한다. 

이 기록은 고키 노부요시 씨의 원고로 시작된다. 불가항력이었다고는 하나 그가 삼산(三山)을 침범한 일이 이 사위스러운 사건의 발단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원고에는 하도 촌락의 필두 지주인 고키 가사람들, 즉 노부요시의 할아버지 도라노스케와 할머니 우메코, 아버지 도라오, 세 형인 다케시, 쓰요시, 고, 사촌형 다카시 등이 등장하지만, 이들 중에는 본 사건의 피해자도, 범인도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등장인물이 공연히 많아지면 기록을 읽을 때 번거롭기만 하지 않을까 우려되어 외람되지만 덧붙여둔다.

끝으로, 이 기록을 읽는 모든 분이 행여나 그 행운 가득한 인생에서 산마처럼 비웃는 것 같은 존재와 조우하는 일이 없기를 빈다.


쇼와의 어느 섣달에

도조 마사야, 또는 도조 겐야

 


 

옛날이야기를 '옛날 옛날에'라 한다.
그중 산어멈 이야기가 가장 많다.
산어멈은 산할멈을 이른다.
그중 한두 편을 다음에 기록한다.

야나기타 구니오, <도노 이야기 違野物語>에서





- 내가 고향 하도에 있는 삼산(三山)에 올라 예로부터 촌락에 전해지는 '성인 참배'를 한 것은 작년 가을 초입, 미야마 신사의 가을 정례 대축제가 거행된 다음 날이었다.

- 오쿠타마에 흐르는 히메가미 강의 원류 지역인 고도 고지(高地)는 해발 1천 미터 이하의 산들로 이루어진, 굳이 가리자면 저산대다. 그러나 그 산형은 대단히 복잡기괴하여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폭풍우 치는 바다의 사나운 파도처럼 이어지며 거대한 수목의 뿌리같이 사방으로 구불구불 뻗어나간다. 그런 봉우리들로 형성된 골짜기가 마치 미로와 같은 지형을 이루어 인간의 침입을 가로막는다. 
그럼에도 고키 가의 내 조상을 비롯해 개척정신이 왕성한 옛사람들이 고도 땅으로 이주해 천신만고 끝에 건설한 마을이 하도다. 그곳에서 고키 가는 삽시간에 촌락의 필두 지주로 등장한 동시에 고도에서 으뜸가는 산림 지주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래로 고도 지역의 임업을 장악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 그렇지만 나는 하도의 역사나 고키 가의 생업에는 관심이 전혀 없다. 아니, 그런 건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하고 싶다. 명색이 고키 가의 넷째 아들인데도...


- 세 형인 다케시(猛), 쓰요시(剛), 고(豪)는 이름 그대로 나서부터 건강의 축복을 받아 병치레 한 번 않고 건장한 사내로 성장해서 지금은 셋 다 가업을 이었다. 셋째인 고는 본래 아버지가 호저(豪猪)라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다는데, 읽기는 '고'라 한 모양이다. 참고로, 아버지 이름은 도라오(虎男), 할아버지는 도라노스케(虎之助)다. 즉, 고키 가의 사내들은 대대로 용맹스러운 이름을 짓는 풍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형들은 어렸을 때부터 고키 가의 어엿한 후계자요,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자식이었다. 반면에 나서부터 병약했던 나는 기운차다 못해 난폭하게 뛰어놀던 세 형과는 딴판으로 방 안에서 책만 읽는 내향적인 어린 시절을 보냈다. 


- 네 그루 소나무 집 오타네 할멈은,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딸이라 단정하고 '야스미(靖美)'라 이름을 지은 탓이라고 이제껏 험담하고 다닌다. 분명 자기에게 조산을 맡기지 않고 쓰이카이치의 의사에게 부탁한 것에 앙심을 품고 공연한 트집을 잡는 것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 정말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을 것이다.
건강한 아들을 셋씩이나 얻은 아버지는 어머니가 넷째를 배자 어울리지도 않게 딸을 바라며 그런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막상 태어난 아이는 허약한 아들이었다. 낙심한 아버지는 '노부요시'로 읽혀 이 중요한 차이를 간단히 해결했다.

- 어머니는 병약한 넷째를 측은히 여겨 무척 아껴주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 집안의 폭군인 아버지의 눈치를 보느라 그런지 늘 나와 거리를 두는 기색이었다. 아마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 이상으로, 남편이 원하던 딸을 낳지 못한 것, 또 고키 가의 남자답지 않게 연약한 자식을 낳은 것을 면목 없어하는 마음이 컸을 것이다.

- 결국 어린 내가 마음 놓고 어리광을 부릴 수 있었던 사람은 할머니 뿐이었다. 학교 교육법에 입각한 신제(新制) 소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도록 나는 할머니와 한 이불에서 자며 옛날이야기를 조르곤 했다. 물론 그 덕분에 어려서부터 독서의 즐거움을 알았으려니와, 그것이 결과적으로 우수한 학업 성적으로 이어졌고 할머니와 사촌형이 아버지를 설득해 준 덕에 대학에도 진학했다. 지금 이렇게 도쿄에서 교직에 몸담고 있는 것은 그 덕분인 셈이다. 무엇이 어떻게 작용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 도쿄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한 데에는 사촌형 다카시의 도움이 컸다. 아버지의 바로 밑 남동생의 셋째아들인 그는 어째선지 옛날부터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외모는 나와 마찬가지로 호리호리한 말라깽이다. 큰고모의 큰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우리 집 세 형과는 닮은 점이 전혀 없는 나이건만 웬일인지 그와는 공통점이 많았다. 그나 나나 운동은 젬병인 대신 공부 하나는 잘했다. 그쪽은 사립 고교, 이쪽은 사립 중학교라는 차이만 있을 뿐 영어 교사가 된 것도 같다. 다만 자비로 값비싼 영어 교재를 구입해 공부하는 나와 그런 돈이 있으면 펑펑 쓰고 놀겠다며 웃는 그와는 교직에 대한 생각에도 제법 차이가 있다. 부모 곁을 떠나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만끽하면서 사촌형의 성격은 많이 달라졌다. 

 

- 그런데도 아버지는 다카시만 인정하고, 나는 한 번도... 아니, 그만두자. 자기 자식이기에 더 성에 차지 않는다는 아버지의 복잡한 심정도 지금에 와서는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더욱이 친족 중에 가장 명민하다는 다카시가 대학에서 진탕 노느라 일반교양 학점을 따지 못한 것을, 내가 수차례 대리출석을 해서 출석 일수를 확보하고 공책도 빌려준 덕에 무사히 졸업했다는 사실이 내 속에 오랜 세월 응어리져 있던 뭔가를 불식시켰다. 아버지에 대해서라면 또 몰라도 사촌형에 대해서는 조금도 꿀리는 데가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역시 열등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대학에 와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나는 드디어 고도로부터, 하도 촌락으로부터, 고키 가로부터 정말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침내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 그대로 아무 일이 없었다면 그 뒤 죽을 때까지 나는 평범한 중학교 교사로서 그야말로 범용한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작년 초여름에 하도에서 편지가 왔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할머니였다. 아버지가 성인 참배를 마치라고 또다시 시끄럽게 굴기 시작했다는 것, 이 통과의례를 끝내면 나도 드디어 고키 가의 성인 남성으로 인정받으리라는 것, 하지만 할머니 자신은 내가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 그런 내용을 적은 편지였다. 

- 성인 참배란 하도에서 태어난 남자가 스무 살이 되는 해 백중에 삼산의 외사당에서 내사당까지 혼자 가서 배례하는 의례인데, 말하자면 우리 촌락의 성인식이었다. 예전에는 열다섯 살 때 치렀다고 하니 원래는 관례(冠禮) 같은 의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대학의 하계 강습을 구실로 귀성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도서관법에 따른 사서 및 사서보 양성 강습이 우연히 모교에서 개최되기에, 그것을 돌아가지 못할 핑계로 이용한 데 불과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것을 알아차릴 리 없었으므로 나는 마음을 턱 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본가뿐 아니라 촌락에서까지 내 입장이 꽤 나빠졌다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실 성인 참배를 거행할 마음만 있으면 구태여 백중에 구애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행여 그해에 못 해도 다음 해에 하면 된다. 요는 본인의 의사 문제라고 할 수 있다. 

- 그랬다. 나는 처음부터 고향의 의례를 업신여기고 있었다. 아니, 그 당시 성인 참배 따위, 애초에 염두에도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형들의 영향에서 해방되어 혼자만의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하던 나에게 하도는 아득히 먼 땅, 어지간하면 돌아갈 마음이 ...

- 평소 같으면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 거꾸로 나를 힘들게 했다. 할머니에게 아버지는 아들이지만 한편으로는 가장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늙어서는 자식의 뜻에 따르라는 말이 시골 구가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할머니가 아들과 손자 사이에서 마음고생하고 있을 것을 알기에 마음이 괴로웠다. 

 

- 결국 사촌형과 상의한 결과 나는 성인 참배를 올리기로 했다.
"앞으로도 본가와 거리를 둘지언정 연을 끊을 순 없으니 되도록 응어리를 남겨두지 않는 편이 나아."
고등학교 교사가 되어서도 놀기 좋아하고 장난치기 좋아하던 대학 시절 버릇을 못 버리고 여전히 바보짓을 하고 다니는 다카시가 진지한 표정으로 조언했다. 평소엉터리 같은 언동이 많은 사촌형이 정색하고 말하니 설득력이 있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소노코가 시집간다. 그것도 구마도의 가마이시 가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난 나는 우선 목욕재계를 하며 모든 잡념을 떨쳐버릴 기분으로 몸을 씻었다. 그제야 이 성인 참배가, 내가 온갖 것을 졸업하고 어른이 되는 의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서둘러 물기를 닦고 할머니가 준비해 준 옷을 입었다. 흰 무명옷을 입고 토시를 끼고 각반을 차고 짚신을 신었다. 목에 하얀 천을 감아주기에 농담 삼아 "머플러입니까?" 하고 묻자 할머니는 진지하게 설명했다.
"아니다. 이건 의식 중에 나쁜 것이 목덜미의 경혈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오는 걸 막아주는 거란다."

= 준비가 끝나자 할머니는 어깨에 지라고 자루를 건네주었다. 안에는 아침과 점심에 먹을 주먹밥과 차가 든 물통, 사당 네 곳에 바칠 신주(神酒)가 든 대통과 조그만 쌀주머니, 그리고 헝겊 지갑이 들어 있었다.
"산속에서 지갑이 필요합니까?"
이것이야말로 농담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돈은 들어 있지 않지. 밤 같은 나무 열매를 반지(半紙)에 싼 인삿돈을 몇 개 넣었단다."
"인삿돈이라고요? 그런 걸 왜..."
"산속에서 마주치거든 상대가 무엇이건 그걸 주려무나."

엇과 마주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인지는 도저히 물을 수 없었다.

 

- 예전에는 성인 참배 때 산속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영향으로 흰 무명 유카타와 흰 무명천 등을 넣은 버들고리까지 지자 겨우 준비가 끝났다. 물건 하나하나는 그리 무겁지 않은데 전부 지고 메고 하니 꽤 버거웠다. 당일로 돌아올 테니 버들고리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규칙이니 들고 가야 한다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내가 소형 라디오를 갖고 가려는 것을 알고는 문명의 이기는 필요 없다는 듯 손목시계와 함께 압수했다. 실행하는 이상규칙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뜻이 틀림없었다.

- 성인 참배를 나설 때는 일체의 배웅이 금지되기 때문에, 안에서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혼자 조용히 집을 나섰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들은 얼굴도 비치지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그런 안도감도 이른 아침의 냉기를 접한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려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 고키 가의 정면 현관에서 집 뒤쪽으로 돌아가자 부옇게 밝아오는 하늘 아래 봉긋 솟은 삼산이 어렴풋이 보였다. 높은 산형에서 느껴지는 상승감은 없는데 육중한 존재감이 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저 산의 존재감이 이렇게나 대단했던가. 이때껏 내가 알았던 삼산과는 전혀 다른, 생전 처음 보는 산과 대치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흡사 어린아이로 돌아간 양 그 낯선 산을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하지만 언제까지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천천히 첫째 산으로 걸어가 산길 초입에 모셔진 외사당에서 첫 참배를 드렸다. 사당에 보관되어 있는 술잔에 신주를 따르고 쌀이 든 조그만 주머니를 바친 다음 절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경건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 땅에서 태어난 이곳 사람임을 새삼 실감했다. 다행히 그런 고조된 기분으로 삼산으로 가는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 그런데 그런 좋은 기분도 오래가지 못했다. 산길을 오를수록 내가 당치 않은 곳에 침입한 듯한 불안과 터무니없는 곳으로 가고 있는 듯한 공포에 점점 휩싸였다

- 따져보면 실은 이 산에 무엇이 모셔져 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산신님'이 계신다고 예로부터 전해질 뿐이다. 고문서에는 '뱀산(巳山)'이라고도 '눈썹산(眉山)'이라고도 쓰여 있기 때문에('뱀산'과 '눈썹산'은 '삼산'과 일본어 발음이 같다) 전자로부터 산신의 정체는 '뱀신님'이 아닌가 하는 말도 있다. 그런가 하면 후자로부터 산신님은 ‘조령(祖靈)'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눈썹 미(眉) 자에는 '노년', '장수', '노인' 같은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고도 일대에 기로(棄老) 전설이 남아 있는 데서 삼산이 노인을 갖다 버리던 기로산이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조령이건 뱀신님이건 전쟁 전의 국가신도에는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일단 산과 바다의 수호신인 오야마즈미노미코토(大山祗命)를 제신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하도 촌락 사람들에게 삼산의 신은 어디까지나 정체불명의 산신님이었으며, 그런 의식은 전후 시대인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에도 시대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런 산속으로 혼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새삼 겁이 나려 했다. 외사당에서 느꼈던 신심에 가까운 감정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고 여기서 발을 돌리는 일은 논외였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아버지에게, 그리고 형들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알 수 없는 일 ... 

- 최대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여전히 갓난아기가 울고 있었다.
아니다. 그냥 운다기보다 꼭 학대를 당하는 것 같은, 흡사 짓밟혀서 울부짖는 듯한 소리로 들렸다.

 

- 초지에서 빠져나오니 강변이 나왔다. 아니, 그렇게 보일 뿐 물은 흐르지 않았다. 갈수기(渴水期)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돌멩이만 널려 있다.
이제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안도한 것도 잠깐뿐, 금세 내가 있는 곳이 보통 강변이 아님을 깨달았다. 곳곳에 돌이 쌓여 있었다. 돌로 쌓은 탑이었다.
주사위 강변(저승으로 가는 길에 있다는 삼도천의 강변으로, 부모보다 먼저 죽은 어린아이가 이곳에서 부모의 공양을 위해 탑을 쌓는다고 한다. 탑을 쌓는 족족 마귀가 와서 무너뜨리는 것을 지장보살이 구해주었다는 설화가 있다).
그 말이 뇌리에 떠오른 순간, 조금 전의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이곳에서 들려온 것임을 깨닫고 무릎이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여기 그냥 있으면 안 된다.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데 돌탑을 무너뜨릴까 봐 속도를 낼 수 없었다. 돌탑을 하나라도 무너뜨렸다가는 거기서부터 줄곧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쫓아올 것만 같았다. 그런 것은 싫었다.

- 겨우 강변을 벗어나 눈앞의 좁다란 짐승 길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체력이 없는 내가 산길을, 그것도 오르막으로 접어드는 짐승 길을 달려 올라갈 수 있을 리가 없다. 

- 분노하며 당장 쫓아내야겠다고 씩씩거렸다.
그런데 나무꾼이 급히 다가가자 여자는 나무 옆에서 쓱 떨어져 산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나무꾼은 이러다가 여자를 놓치겠다고 허둥대며 필사적으로 뒤쫓았다. 산신님의 노여움을 사기 전에 어떻게든 쫓아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곧 묘한 사실을 깨달았다.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어떻게 저렇게 빨리 걸을 수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복장도 간편하고 산길에도 더 익숙할 텐데 어째서 조금도 따라잡지 못하나. 그런 생각이 들자 불현듯 겁이 났다. 
그때 여자가 멈춰 섰다. 보아하니 낭떠러지 끝에 이른 모양이었다. 여자는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더니 낭떠러지 아래를 열심히 내려다보았다.
뭘 하는 거지?
공포심보다 호기심이 앞선 나무꾼은 여자에게 다가갔다. 눈치채지 못하게 옆으로 돌아서 간 나무꾼은 아침 햇살에 아름답게 빛나는 여자의 옆얼굴을 보고 숨을 훅 들이마셨다. 나이는 마흔 살 안팎인데 육감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여자였다.
그러나 나무꾼이 똑같이 벼랑 밑을 내려다봐도 여자가 왜 그곳을 열심히 보는지 알 수 없었다. 좌우지간 여자가 누구며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어진 나무꾼은 "여보시오" 하고 말을 걸었다. 그 순간, 
"닥쳐!"
여자가 노기등등해서 고함을 치더니 일어나 나무꾼에게 얼굴을 돌렸다.
왼쪽 절반은 육감적인 중년 여자, 오른쪽 절반은 늙어빠진 노파인 괴이한 얼굴이었다.

- 간신히 도망쳐 내려온 나무꾼은 자기가 산에서 한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십장이 무서운 표정으로, 산에 들어가기 전에 산신님께 인사를 드렸느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무꾼은 그날 아침인사를 깜박하고 빠뜨렸다.


- 어린 나는 그 여자가 산신님인 줄로만 알았는데, 할머니는 아니라며 산녀라는 존재를 가르쳐주었다. 혹시 마주치면 절대로 얼굴을 봐서는 안 된다는 주의와 함께.

 

- 설마 그런 게 정말로...
괜히 기분 나쁜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후회하며 나는 숨을 죽인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한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더니 대각선 오른쪽에 있는 덤불에서 버석버석 잎사귀 스치는 소리가 났다. 정말로 뭔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동물일 것이라고 현실적으로 생각해 안도하려던 나는, 금세 곰이면 어쩌나 싶어 또 다른 의미에서 겁이 났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근 산에서 곰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늑대는 이미 모습을 감춘 지 오래다. 남은 것은 멧돼지나 여우, 너구리, 아니 승냥이일지도 모른다. 

 

- 잎사귀 스치는 소리와 움직임은 덤불 아래뿐 아니라 위에서도 들렸다. 즉 두 발로 걷는 뭔가가 그곳에서 나오려 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울창하게 우거진 덤불 속 어둠에서 천으로 싸인 덩어리 같은 것이 쑤욱 나왔다. 형태는 사람인데 어째선지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느껴졌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무서웠다. 겁이 나 죽을 것 같았다.

- 그 천 덩어리 같은 것은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산길로 천천히 나아오더니 멈춰 서서 꼼짝 않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분명히 나를 본다는 생각은 드는데 실제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어째서 확신을 가질 수 없는지 스스로도 이상했다.
그런데 그것이 갑자기 가까이 다가왔다. 똑바로 나를 향해 왔다! 오한이 등골을 훑고 지나가는 동시에 어째서 그것의 시선을 명확히 알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이해했다.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덜너덜 떨어진 두건 속에 얼굴이 보이는데도 얼굴 자체에 명확한 윤곽이 없었던 것이다.

 

- '산녀의 얼굴은 절대 봐서는 안 된다.'

 

- 어느새 그것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지저분한 갈색 두건을 쓰고 본래는 감색이었을 다 떨어진 기모노를 입고, 덩굴무늬 보자기로 싼 보퉁이를 어깨에서 겨드랑이 밑으로 묶고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들었다. 모양새만 보면 노파인데 노파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인가. 역시 산녀인가...

'산속에서 마주치거든 상대가 무엇이건 그걸 주려무나.'
갑자기 할머니의 목소리가 뇌리에 메아리쳤다. 나는 황급히 자루에서 헝겊 지갑을 꺼내고는 오른손에 인삿돈을 쥐어 부들부들 떨며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러자 그것이 얼굴을 내 손 앞으로 뚜두둑 갖다 댔다. 인삿돈과 함께 내 오른손까지 잡아먹힐 것 같아 벌벌 떠는데 한 손이 쓰윽 ...

 

- 천구 불과 마주치면 병이 난다고 했다. 또, 부르면 가까이 다가오므로 마주쳤을 때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고 그 자리에 납작 엎드리는 게 좋다고 했다. 나는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도깨비불은 나를 향해 왔다. 이곳이 부름산이기 때문인가.

- 어째서 부름산이 흉산으로 기피되는지 그 이유는 나도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다만 '부름'이란 말 그대로 부른다는 뜻으로, 산속에서는 누가 말을 걸어도 절대 대답해서는 안 된다는 민간전승이 전해진다. 산마(山魔)라는 마물의 짓이라 대답을 하면 엄청난 조소를 산다는 것이다.

 

- "산마가 비웃으면 어떻게 되는데?"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돌아온 대답은 한 마디.

"끝..."
할머니의 그 음성과 말이 견딜 수 없이 무서웠다. 끝이란 무엇인가. 자기가 끝난다는 뜻인가. 그렇지만 자기가 끝난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당시 뇌리에 떠오른 것은 산마가 비웃음과 동시에 주위가 어둠에 싸이고 더욱 캄캄한 움으로 떨어지는 광경이었다. 그러면 두 번 다시 햇빛을 보지 못하는 생활을 산속에서 하게 될 것이라며 몸서리를 쳤다.
바로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 그런데 그때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어어이!
뒤쪽에서 어렴풋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기분 탓이라고 생각해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어어이!
뭔가가 나를 부르는 듯했으나 일부러 무시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어어이!
그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나를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안 순간, 나는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 예전에 할머니가 자주 그런 말을 했다. 부름산이 아니어도 산속에서 "어어이" 하고 누가 부르면 절대 대답하지 말라고. 하물며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사람이면 산속에서는 반드시 "야호"라고 한다. "어어이" 하고 부르는 것은 마물뿐이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산속에서 "어어이"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친구가 말리는데도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간 사람이 행방불명됐다는 이야기는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런 불길한 사례의 주인공이 될 생각은 물론 없었다. 

- 간신히 걸음을 멈춘 것은 완만하게 이어진 비탈을 다 올라가서였다. 건빵이 든 버들고리를 놓고 온 것을 깨달았지만 가지러 돌아갈 마음은 나지 않았다. 손전등을 놓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 이곳에서 목욕을 하는 모양이었다. 장식단으로 보이는 공간이 있는 오른쪽 벽에는 선반이 있었는데, 그 절반에는 냄비와 솥 같은 생활용구가, 나머지 절반에는 비슷비슷한 크기의 단지가 빽빽이 놓여 있었다.
그 어수선한 안쪽 마루방 한복판에 노파와 젊은 여자가 마주 앉아 있었다. 젊은 남자 뒤로 보이는 그들은 기모노라도 깁는지 시선을 떨어뜨린 채 손을 놀리고 있었다. 두 사람 뒤에서 부스스한 단발머리를 한 여자애가 오자미를 갖고 놀더니 이윽고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를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낯선 사람이 신기한지 두 사람 뒤에 숨어서 나를 엿본다. 젊은 여자가 알아차리고 주의를 주었지만 소녀는 그만두려 하지 않았다. 

- 처음에는 나이 많은 남자와 노파가 부부고,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가 그 아들 부부, 그리고 소녀는 젊은 부부의 자식인 줄 알았다. 그런데 분위기가 영 묘했다. 가족끼리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중에 타인이 끼어든 탓인가 했는데, 그런 것도 아닌 듯한... 뭐라고 하면 좋을까, 좌우지간 어쩐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벌써부터 이 집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집을 처음 발견했을 때 느꼈던 불안감이 다시금 가슴속에 치밀더니 서서히 번져나갔다.

- "저녁은?"
불편한 기분으로 잠자코 있는데 나이 많은 남자가 물었다.
그러자 허기진 배가 강렬하게 의식되었다. 내가 하나 남겨놓은 주먹밥을 자루에서 꺼내자 남자가 갈고리를 이용해 노에다 무쇠냄비를 걸었다. 삽시간에 된장국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 일단 다쓰이치와 대화를 계속해 최대한 정보를 얻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연고를 상처에 바르며 물었다.
"어르신은 산카 같은 생활을 하셨던 겁니까?"
산카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산에서 산으로 이동하며 산속이나 강변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 살면서 대나무와 넝쿨로 세공품을 만들어 팔고 고기잡이나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유랑민을 말한다. 어렸을 때 촌락에 죽세공품을 팔러 온 산카를 본 기억이 있다.
"음, 뭐 그렇지."
그러나 다쓰이치는 과거의 생활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지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말을 이었다.
"실은 우리도 길을 잃어 말이네."

- "그런데 하필이면 길을 잃고 이 산속으로 들어오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이것도 인연일지 모르지.”
"하, 하지만 이 집은..."
지은 지 꽤 오래돼 보였다. 또 설사 다쓰이치 일가가 산속에 거처를 마련한다 해도 이런 이층 집을 짓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이 집을 지은 사람은 내 동생일세."
"설마 가스미 가의 다쓰지 씨가..."
고도에서도 특히 구마도 사람들이 이 부름산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 마당에 숯쟁이 우두머리 집 ...

- 도망쳐라.
본능이 그렇게 부르짖는데도 나는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고 말았다.
지금도 이때의 경솔함을 후회한다. 돌아보지 말았어야 했다. 보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리 후회해도 이루 다 후회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내가 무엇을 봤는지 실은 잘 모르겠다. 내리막인 산길이 어두웠던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아마 인간의 시각으로는 충분히 인식하기 어려운 존재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 비탈 위에 그것이 있었다. 가까스로 사람의 형상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상당히 일그러져 있었던 것 같다. 머리는 뾰족하고, 온몸에 기분 나쁜 뭔가가 우글우글 돋아 있고, 거무스름한 가운데 녹색이 섞인 듯한 인상이었다. 잠깐 본 것뿐이라 이 묘사가 맞는지는 자신이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사악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 물론 나는 당장 도망쳤다. 그러느니 처음부터 도망치면 좋지 않았느냐고 후회한 것은 훨씬 나중 일이다. 그때는 그것이 비웃으며 쫓아올까 싶어서, 머리가 돌아버릴 것처럼 겁이 나고 무서워서 구르듯이 비탈길을 달려 내려갔다. 실제로 두 번쯤 넘어졌다. 발이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은 덕에 다행히 큰 탈은 없었다. 만약 머리부터 앞으로 넘어졌다면 크게 다쳤을 것이다. 그런데다 그것에게 따라잡혀...

 

- 아니, 어쩌면 정말로 내 바로 뒤까지 그것이 와 있었을지도 모른다. 달리는 동안 등 뒤에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 사악한 시선이, 비릿한 숨결이, 꺼림칙한 존재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런 상황이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집에서 나올 때 할머니가 목에 둘러준 하얀 천이 없었다. 어제 자기 전에 풀고...
아아, 당장에라도 뒤에서 손이 쑥 뻗어와 내 목덜미를 잡고 목의 경혈을 통해 몸속으로 스르르 들어올 것 같다. 어느새 나 자신이 미친 듯이 웃어댄다. 그런 소름 끼치는 상상을 한 순간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가파른 비탈을 다 내려온 곳이라 눈앞의 덤불에 처박힌 덕에 무사했다. 거기서부터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비탈길 대신 구불구불한 산길이 이어졌으나 넘어져 추락할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다. 그렇게 몇 번째인지 모를 모퉁이를 돌았을 때 길 앞을 가로막고 선 그것이 보였다. 내 비명은 어느새 무시무시한 절규로 바뀌었다.

- 여기서부터는 별로 쓰고 싶지 않다.
월요일 아침 일찍 삼산을 향해 출발해 이튿날인 화요일에 부름산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말하자면 모든 것이 비일상적인 체험이었다. 그런데도 그사이에 겪은 기괴한 일들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반대로 그 뒤 일상으로 돌아온 다음의 기억이 왜 그런지 모호하다. 이것이 터무니없이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흉산에서 보낸 하룻밤>
고키 노부요시

 




- 그런데 종수가 원체 많다 보니 잡지의 질은 옥석이 뒤섞여 <보석>이나 <기괴(그로테스크)> 등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잡지가 창간 1년에서 4년 사이에 폐간되는 불행을 당했다.

- 이렇게 단명한 잡지가 수두룩한 가운데 괴상사의 <서재의 시체>는 어엿이 월간지로서 명맥을 이어갔다.
특히 작년 12월에 발행된 신년호는, <보석>에서 데뷔한 뒤 순식간에 인기 작가가 된 에가와 란코의 신작 본격 추리소설 <피투성이 혼사(婚事)의 신부>의 연재가 시작되고, 미궁사라는 지방 출판사에서 나왔는데도 처녀작 <아홉 바위 석탑 살인사건>이 호평을 얻은 바 있는 도조 마사야의 괴기 중편 <검은 중 고개>가 실린 덕에 날개 돋친 듯이 팔려 창간 이래 판매 신기록을 세웠을 정도다.

- 참고로, 도조 마사야는 괴기소설 및 변격 탐정소설을 쓰는 작가로, 본명은 도조 겐야다. 그는 문단에서 '방랑 작가' 혹은 '유랑하는 괴기소설가'라고 불릴 정도로 거의 1년 내내 일본 각지를 여행하며 취미와 실익을 겸해 괴이담을 수집한다. 그뿐이면 약간 특이한 작가라는 정도겠으나, 어째선지 가는 곳마다 기괴한 사건과 불가사의한 현상, 기묘한 일, 믿기지 않는 괴이와 마주쳐서는 어쩌다 보니 해결까지 한다는 색다른 경험이 풍부했다. 
그런 소문이 어느덧 업계에 퍼지자 도조 겐야에게 원고 의뢰가 아닌 사건 해결 의뢰가 각 출판사를 경유해 다양한 곳에서 밀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인이 싫어하기 때문에 그때마다 각 출판사 담당 편집자가 애써 거절하곤 했다.

 

- 그러나 괴상사에서 도조 겐야를 담당하는 소후에 시노는 별개였다. 
왜냐하면 그녀의 의뢰는 대부분이 다마키 편집부장에게서 나온 것이며, 그 출처를 추적하면 사장에 이르기 때문이다. 십중팔구 매번 회사로서 어떤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겠지만, 물론 도조 겐야는 그런 것과는 무관하다. 따라서 시노는 늘 양측의 틈바구니에 끼여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이번 1월에도 구히코지 정이라는 고급주택가에서 발생한 전(前) 공작 가문 영애 살인사건에 관해, 내켜하지 않는 겐야에게 협조를 청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도 그것만으로 끝내지 않고 <서재의 시체> 다음 호에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도조 마사야의 단편 <목 베기처럼 가르는 것>을 싣는 약삭빠름을 발휘했다. 아직 신인이기는 해도 역시 편집자다. 제법 빈틈이 없다.

 

- 하지만 그녀가 이번에 고키 노부요시의 원고를 구태여 도조 겐야가 머무는 곳으로 보낸 것은 드물게도 회사 사정과 무관했다. 그 내용이 그의 관심을 끌 것은 분명했지만 그 때문에 보낸 것도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작년 늦가을에 겐야가 아부쿠마가와 가라스와 함께 구마도 촌락을 찾아가 그곳에서 가지토리 가의 리키히라를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 아부쿠마가와 가라스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인물은 도조 겐야의 대학 선배였다. 교토의 유서 있는 신사 집안 아들인 그는 겐야와 마찬가지로 괴이담이라면 사족을 못 쓰기 때문에 전국을 여행하며 괴이담을 수집한다. 그리고 기괴한 전설이나 기이한 일, 수수께끼 같은 사건의 정보를 입수하는 족족 후배인 도조 겐야에게 편지로 (그중 다수는 괴상사를 경유해) 알린다. 겐야가 구로 선배라고 부르는 그의 정보를 참고해서 여행 계획을 세우는 일도 빈번했다. 

 

- 보통은 단독으로 행동하는 두 사람이지만 작년에는 우연한 기회에 오쿠타마 깊숙이 위치한 히메카미 촌으로 둘이 함께 향했다. 수백 년 전부터 받들어 모신다는 아오쿠비 님이라는 화신(禍神)과 쿠비나시라는 정체불명의 마물에 관해 민속 탐방을 간 것이었다.
그런데 가쓰마오 역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히메카미 촌 주재소 순사를 만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중간에 열차를 내려 구마도의 부름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순사에게서 '산마(山魔)'라는 마물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도조 겐야가 즉석에서 계획을 변경한 것이었다.

- 실은 겐야에게는 난감한 버릇이 하나 있었다. 자기가 몰랐던 괴이를 조금이라도 접하면 그 순간 다른 모든 것을 잊고 그 대상물을 향해 돌진한다는 기벽이었다. 눈앞의 인물이 미지의 괴이담에 밝다는 사실을 알면 그가 방금까지 대판 싸웠던 사람이라도 중요한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 쫓아다녔다. 여기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두 손 든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자기가 엄청난 불편을 끼친다는 자각이 없었다. 하여튼 성가신 버릇이다.

- 괴상사 편집자인 소후에 시노가 자신의 담당 작가인 도조 마사야 또는 도조 겐야와 대면한 것은 올 4월 초순의 어느 이른 오후였다.
장소는 진보정의 다방 '에리카'다. 이곳은 재즈 다방, 노래 다방, 미인 다방 등이 주류이던 당시 음악도 여자 점원도 없이 오로지 커피 맛 하나로 승부하겠다고 개점한 찻집이었다. 이 집 커피를 겐야가 무척 사랑하기 때문에 시노와 만날 때는 대개 이곳을 약속 장소로 정했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제 돌아오셨어요?"
전후에 간사이에서 상경한 시노는 그쪽 말씨를 좀처럼 버리지 못했다.
"아니, 오늘 아침에 야행으로..."
졸린 듯 눈을 슴벅거리기는 해도 보자기에 책을 여러 권 싸들고 있는 것을 보면 겐야는 오전 내내 고서점을 돌고 온 모양이었다. 아마 민속학 관련 서적을 사들였을 것이다. 
"점심은 드셨고요?"
"라쿠요켄의 라이스 카레를..."
"앗, 거기 카레 맛있죠. 카레의 매운맛이랑 채소 장아찌의 새콤달콤한 맛의 조합이 뭐라 말할 수 없다고 할지. 하지만 선생님, 고요테이의 볶음밥은 드셔보셨나요? 아뇨, 거기는 나쁜 기름을 쓰지 않아요. 진짜 돼지고기를 쓰고요. 게다가 특제 소스의 매운맛이랑 재료의 단맛이. 이게 또 절묘한..."

- 겐야는 맛있게 커피를 마시며 태평하게 말했다.

"선생님, 그럼 꼭 제가 장점이 먹성 말곤 없는 것 같잖아요."

"어, 그런가? 그런 거 아냐."
"그럼 제 장점, 특히 편집자로서 뛰어난 점을 들어보세요."
"그거야 쉽지. 우선..."
"선생님, 지를 놀리시는 건가요?"
그녀가 자신을 '저'가 아니라 '지'라고 하기 시작하면 요주의였다. 완전히 신나서 주위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거나, 아니면 화가 났을 때이기 때문이다.

- "그, 그런 게 아냐. 그보다 매번 하는 소리지만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으면 안 될까? 꼭 무슨 노인네가 된 기분이 든다고."
이목구비가 제법 단정한 데다 당시 아직 흔치 않았던 청바지를 무심하게 입은 겐야는 상당히 종잡을 수 없는 인물로 보였다. 적어도 선생님이라 불리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겐야 자신은 지방에서 지방으로 도는 자신을 이방인 같은 존재라고 늘 말하곤 했다.

- 겐야가 얌전히 고개를 숙이자 시노는 이제 됐다는 양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갑자기 정색하고 말했다.
"그런데 원고를 읽은 감상은 어떠셨어요?"
이런 신속한 전환도 그녀만의 장점일지 모른다.
"편지에도 있었지만, 고키 씨가 괴상사로 원고를 보낸 게 이월 초 ... "


- "또 그런 전설이 얽힌 기괴한 사건을 몇 번이나 보기 좋게 해결하셨으니까요. 다카시 씨는 선생님의 그런 활약을 알고 있었던 거예요. 참고로 <서재의 시체> 애독자랍니다.”
마지막 말은 약간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랬더니 노부요시 씨가 자기가 한 체험을 원고로 쓰겠다고 하더래요. 다카시 씨 생각으로는 사촌동생이 구마도나 하도 본가에서 몇 번이나 그 체험을 이야기했는데도 결국 아무도 믿어주지 않은 게, 그...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은가 봐요.”
"있을 수 있는 이야기군."
"그런데 원고를 쓸수록 노부요시 씨가 더 이상해지더라고 다카시 씨가 슬퍼하지 뭐예요."
“과거를 작품으로 승화시킴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집필 과정에서 다시 한번 체험하면서 뜻하지 않게 과거가 더욱 가까워지는 경우도 있을 테니까... 유감스럽게도 노부요시 씨한테는 나쁜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군."

- "음? 아, 그건 몇 번까지 유효한가요, 같은 질문은 없기야."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남을 돕는 일이란 말씀은 알겠지만, 그 사람을 만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일부러 구마도까지 가시려는 이유는 뭘까 싶어서요." 
"이야기만 들어선 모른다고. 실제로 현장에 가봐야..."
"하지만 그건 노부요시 씨 이야기를 들어본 다음에 결정하셔도 충분한 거 아닌가요?"
"..."
"대체 왜 그렇게 열심이신 거죠?"
잇따라 질문을 퍼부어대던 시노는, 어느 순간 조용해진 겐야가 자못 관심이 있는 양 보자기에 싼 고서를 살펴보는 그 옆얼굴을 보고 비로소 이해했다.
고키 노부요시가 아버지와 갈등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 아마도 도조 겐야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도조 가의 조상은 도쿠가와 가의 남계 자손이었다. 그 때문에 메이지 2년(1868)에 행정관이 내린 포고에 의해 탄생한 화족 계급 중에서는 공작에 서임되었다. 화족이란 가문과 국가에 대한 공적, 이 두 가지 기준으로 선택된 특권 계급이다. 전자는 이전의 황족과 귀족, 제후, 승려와 신관, 충신 등의 가문이 대상이었으며, 후자는 정치가, 관료, 학자, 사업가 등의 문공과 군인 등의 무공으로 나뉘었다. 작위는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다섯 개였는데, 도조 가는 공작으로 서임되었으니 그 가문의 지위가 어떤 것이었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 아버지인 도조 가조는 완전한 합리주의자였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이지를 중시하고 논리를 존중했다. 괴담 따위는 일소에 부치며 가능한 합리적인 해석을 그 자리에서 두 개고 세 개고 제시했다. 그런 사람이 왜 그런지 요괴는 좋아한다는 별종이었다. 당연히 그 존재를 믿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옛날이야기로서 취미 삼아 즐기는 것이었다.

- 아들인 도조 겐야는 입장이 늘 불안정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시노가 지금까지 그와 주고받은 대화 중에 인상에 깊이 남아 있는 말이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인간의 이지만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그렇다고 안이하게 불가해한 현상을 불가해한 현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으로서 너무나도 한심하다'

괴이담을 수집할 때 그는 이야기로서 괴담을 즐길 뿐 결코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그것이 어리석고 멋대가리 없는 행위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방 특유의 괴이한 민간전승이 현실의 살인사건 등과 관련된 경우는 별개다. 괴이담이 전해지는 진짜 의미와 그 이면에 숨은 진실을 밝혀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사건을 지벌이나 저주의 탓으로 돌리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지 않다고 설득한다. 아니,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건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다만 철저하게 조사, 추리, 검증한 결과 아무리 해도 해결되지 않는 괴이가 남는 경우에는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한 다음 고키 가에서 나왔다. 노부요시의 아버지와 형들은 만나지 않았다. 겐야 치고는 흔치 않게 약간 감정적인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촌락에서 마차를 고용한 겐야는 절구산으로 향했다. 마부는 작년과 같은 노인이었는데 겐야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보아하니 그를 기억하는 이상으로 아부쿠마가와 가라스라는 강렬한 인물을 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다고 겐야는 생각했다. 

- "미야마 신사의 가을 정례 대축제에 맞춰서 일단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산길만은 먼저 냈지만... 그 뒤로 진척이 없답니다."
"저, 그런데 영감님은 별로 곤란하지 않으신 것 같군요."
겐야는 문득 의문이 들어 물었다.
"촌락에서 촌락으로 어디나 길이 닦여 차가 다니게 되면 내 마차를 세낼 사람이 줄어들 테니까요."
편리해짐으로써 이익을 얻는 사람이 생기는 반면, 종래의 일거리를 잃는 사람도 생긴다. 겐야는 지방을 돌면서 그런 현실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런데도 노인의 불안을 짐작하지 못한 것을 그는 부끄럽게 생각했다.
조용해진 겐야를 실은 마차는 때깍때깍 경쾌하게 나아갔다.
"이 말도 이제 늙었으니 마침 은퇴할 때가 되긴 했군요."
노인은 뒤늦게 승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싶었는지 짐짓 태평스럽게 말했다.
겐야는 그런 노인에게 말을 맞춰주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대방이 상처를 입지 않게 적당히 맞장구를 친 다음 일에 얽힌 추억담을 들려달라고 청하자, 노인은 신이 나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 "그렇게 많지는 않아도 구마도의 여섯 지장님을 참배하는 분들이 계시니 뭐, 내 마차도 아직은 쓸모가 있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네. 실은 며칠 전에도 순례자 한 분을 태워다 드렸거든요."

- "그래서 다쓰조 씨가 먼저 노다지꾼에게 접근해서 부름산에 금이 잠들어 있다는 기라우치 씨의 말에 덤벼든 거로군요."
겐야의 말에 리키히라는 다소 재미있어하는 어조로 말했다.
"기라우치는 부름산에서 순철(純鐵)이 뿜는 불길 같은 빛이 하늘로 올라가는 걸 봤다고 했다던데,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는지요?"
"에도 시대 후기의 농정학자인 사토 노부히로는 광산학을 집대성한 <산상비록(山相秘錄)>에서 금의 정(精)은 '꽃 같은 황적색 빛'이고 은의 정은 '용 같은 청백색 빛'이라고 기록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광맥 자체가 금속의 유화물과 산화물인 거죠. 특히 유화물은 습기에 의해 발열할 때도 있는 것 같으니 그런 현상이, 즉 자연 현상입니다만, 발생해도 이상할 것 없어요. 문제는 기라우치 씨가 정말 그걸 봤는지 못 봤는지, 오히려 그쪽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거야 원, 선생과 이야기를 하면 정말 즐겁습니다. 재미있어요."
"무, 무슨 말씀을, 그저 벼락치기 공부의 성과일 뿐인데... 찾아뵙는 게 늦어진 것도 도쿄를 출발하기 전에 한 번 더 이것저것 조사하느라 그랬습니다." 
필사적으로 겸손해하는 겐야를 리키히라는 재미있어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아무튼 다쓰조는 결국 금에 완전히 홀리고 말았습니다. 일부러 선친에게 머리까지 숙여가면서 부름산을 파겠다고 양해를 구하려 한 걸 봐도 얼마만큼 빠져 있었는지 알 수 있겠죠. 게다가 산에 들어간 뒤로는 어째선지 군복을 입고 다니는 겁니다."
"과거에 징병됐었습니까?"
"아뇨. 만주사변 때 이미 서른 살이 넘었으니까요."

 

- "아니, 그전에 중요한 문제가 있군요. 그래서 실제로 금맥은 발견됐습니까?"
"그게... 발견됐지 뭡니까." 
"네?"
"사기를 치는 노다지꾼들이 곧잘 쓰는 수법으로, 사금을 바른 암석을 현장에 미리 갖다 놓고 거기서 그걸 파낸 것처럼 교묘하게 꾸미는 게 있답니다. 나도 당시 공부를 좀 해서 말입니다. 이것 참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선친은 맘대로 하게 두라고 하셨지만 만약 부름산이 정말 금광일 경우 가스미 가에서 독점하는 건 역시 문제가 있다고 혼자 분개하고 있었거든요." 
"그게 일반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대인처럼 달관하기가 어디 쉽습니까. 그래서 발견된 금맥은 진짜였습니까?"
"바위밭에 판 굴에서 금이 발견됐다더군요. 사전에 위조하는 게 불가능한 암석 속에 금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도 기라우치 릿시란 인물은 역시 사기꾼이었던 걸까요?"
겐야가 의아스레 묻자 리키히라는 난처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고는 생각합니다만, 단정하기는 영 쉽지 않은... 그런데 금광석을 파내는 순서는 아시는지?"

- "중세까지는 사금 캐기가 주였습니다. 자연의 힘으로 금광석이 땅 밖으로 드러나고 깨져 강으로 흘러들면 물살에 의해 더욱 잘게 부서져 그 결과 금 알갱이가 되는 겁니다. 그러다 중세 말기에 지질, 제철, 채굴, 야금에 관한 지식과 기술이 해외에서 유입되면서 광석 자체에서 금을 추출할 수 있게 됐죠. 저 유명한 사도 금광이 막부에 의해 개발된 건 에도 시대가 시작된 것과 동시였어요." 
"금광맥이란 금을 함유한 광석이 이어져 있는 부분을 말하는데, 너무 깊은 곳에는 생기지 않는다죠? 사도 광산에서도 수백 미터쯤 되는 곳을 팠다고 하고요. 즉, 지표에 가까울수록 금 함유량이 높은 경향이 있는 겁니다. 파봤자 겨우 지표에서 천 몇백 미터 정도라던데요."
"그렇죠, 그렇죠."
리키히라는 이야기가 수월할 듯하자 기뻐했다.
"광맥을 파면 띠 모양의 하얀 줄기가 땅 속을 향해 뻗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 하얀 암맥은 석영인데 그 줄기 속에 거뭇한 부분이 있거든요. 금은은 여기에 함유되어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걸 '지네'라고 불렀어요. 물론 광맥의 형태는 다양했고 금은의 함유량에도 큰 차가 있었습니다. 전문가라면 대략 예상은 할 수 있어도 실제로 파보지 않으면 모르는 게 탐광이라는 세계였죠."
"끄트머리가 지표에 나와 있으면 광맥을 찾기도 파기도 한층 수월했습니다. 위에서 파면 그대로 채취할 수 있으니까요."
"맨 처음 하는 탐광이죠. 능선 끄트머리 같은 데서 광맥이 노출된 노두를 찾아 거기서부터 수직으로 땅을 파거나 도랑 형태로 파거나 하는 겁니다."
"하지만 노두를 파는 건 한계가 빨리 오거든요. 광맥은 기울어 있을뿐더러 그곳의 독자적인 지형 문제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광맥을 따라 비스듬히 파 내려가는 방법으로 옮겨갔습니다. 다만 그러려면 본격적으로 굴을 파야 하다 보니 조명, 환기, 배수, 기재 ... "

- "그 지장님에 얽힌 기묘한 노래가 이쪽 지방에 남아 있지 않던가요?"
그러더니 겐야는 여행가방에서 미리 꺼내놓은 취재 노트를 펴 리키히라에게 내밀었다. 노트에는 히라가나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 고오도의, 구마도의, 여섯 지장

백색지장님, 오오른다

흑색지장님, 뒤이진다

적색지장님, 수움는다

청색지장님, 가아른다

황색지장님, 부울탄다

금색지장님, 비잋난다

나머지는 여섯 지장님

하안 분씩, 사라지고

남은 거언?

- "요새는 거의 못 듣습니다만 아이들이, 특히 여자애들이 무슨 놀이할 때 부르는 옛날 동요로군요. 여섯 명이 둥글게 손을 잡고 각 지장님을 연기하는 놀이일 겁니다. '바구니 코, 바구니 코'(술래를 에워싼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돌다가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멈춰 서면 술래가 자기 뒤에 있는 아이가 누구인지 맞히는 놀이)와 비슷하게 노는 식도 있다고 합니다만... 그게 왜요?"
"부름산이 정말 금광임을 말하는 노래가 아닐까 싶거든요."

- "아닌 게 아니라 예로부터 이 동요는 부름산이 금광이라는 노래라고 해석한 사람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무슨 도쿠가와  가의 보물도 아니니 다들 그냥 헛소리라고만 생각했습니다만... 이렇게 한자로 바꿔놓고 보니 신빙성이 높아진다고 할지, 어이구, 이거 정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아뇨, 원래 여자애들 놀이노래라 하고 어렸을 때 귀로 듣고 외운 노래니 일부러 한자로 바꿔가면서까지 뜻을 생각할 기회도 없었겠죠. 게다가 전후엔 아이들에게도 거의 잊혀진 노래가 되지 않았습니까. 또 부름산은 흉산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보니 금광일지도 모른다는 전설을 처음부터 수상쩍다고 판단하게 되고요. 그런 경향이 이곳 사람들에게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 리키히라는 무안함과 분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백색지장님'의 '백색'은 하얀 줄기고, '흑색지장님'의 '흑색'은 소위 지네란 말입니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 뒤의 '적색', '청색', '황색'이 금의 제련을 나타내는지 그건 약간 의문입니다만, 마지막에 '금색'이 왔으니 그렇게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


- "노랫말은 경고의 의미라고..."
"여기선 '여섯 지장님'이라 불리지만, 여섯 좌의 지장보살님이라 하면 보통은 묘지 입구 같은 데 모셔진 육지장을 말합니다. <겐페이 성쇠기>에는 교토의 일곱 네거리에 사이코(西光) 법사가 육지장을 세워 악령이나 역신의 침입을 막았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게 육지장의 기원으로 여겨지거든요. 이곳의 여섯 지장님은 꼭 촌락을 둘러싸듯, 즉 수호하듯 모셔져 있죠. 그리고 부름산은 여섯 지장님이 둘러싸는 범위 밖에 있어요. 게다가 산에서 내려오는 두 길 끝에는 각각 백색지장님과 흑색지장님이 계십니다. 나아가 가지토리 가와 가스미가의 중간에 해당되는 산기슭에 금색지장님이 자리하고 계시고요. 그 정도로 부름산을 경계하고 있었던 겁니다." 
"기록엔 남아 있지 않지만, 예전에 부름산을 둘러싸고 금 때문에 소동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겠군요."

리키히라는 무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소동으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것도 기록에 남길 수 없을 만큼 꺼림칙한 일이..."
"그때 무서운 사건이 일어나 어쩌면 희생자가 발생했을지도 모르죠. 그게 여섯 명이었다면... 여섯 지장님... 탐광을 위해 판 구멍이 여섯 개... 그리고 이십 년 전에 모습을 감춘 다쓰조 씨와 노다지꾼 기라우치 릿시 씨, 네 광부 또한 여섯 명... 어째 죄 여섯 같지 않습니까?"
"기라우치가 자기와 다쓰조를 포함해 작업에 관여할 사람을 여섯 명으로 한 건 <곤자쿠 이야기>에서 따온 것 같더군요. 노토의 사금꾼이 사도 섬으로 건너가 금을 캐는 이야기에 '그 철 캐는 자가 여섯 명 있었으니 저들끼리 이러저러 이야기하는 중에 그중 나이 많은 이가 '사도 지방에는 꽃 피듯 황금이 널려 있는 곳이 있다'고 하여'란 구절이 있거든요."
"과연 억지로 꿰맞추는 재주가 있는 인물이군요."

- "하지만 이십 년 전에는 여섯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네? 그 밖에도..."
놀란 겐야에게 리키히라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든 인과로 생각하면 그렇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도 이 세상엔 존재한다는 말이죠."
"무슨 말씀이시죠?"
"당시 다쓰지에겐 전처인 사키에 씨에게서 얻은 이쓰지와 조지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죠."
"후처인 시마코 씨에게서 얻은 아드님이 셋째 아들인 고지 씨가 되는 셈이군요."
"그렇죠. 사키에 씨가 본부인이었을 당시의 첩이 시마코 씨였습니다. 사키에 씨가 조지 군을 낳았을 때 시마코 씨는 고지 군을 출산했죠. 그리고 시마코 씨를 본부인으로 들였을 때 둔 첩이 슌기쿠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넷째 아들인 다쓰하루 군입니다." 
"그렇군요. 꽤 복잡한..."
"그런데 그게, 이쓰지와 조지는 이십 년 전에 행방불명돼서... 그래서 지금은 사망했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이십 년 전... 설마?"
"네, 다쓰조를 비롯해 여섯 명이 차례차례 모습을 감춘 직후군요. 마지막으로 다쓰조가 사라진 뒤 사나흘 지났을 무렵이었나요. 당시 일곱 살이던 이쓰지 군이 사키에 씨에게 자꾸만 '삼촌이 부른 ... "

- 사박사박하고 산녀가 다가왔습니다.
남자가 능선 밑을 내려다보니 한쪽은 강변이고 한쪽은 숲이었습니다. 강으로 뛰어들기엔 너무 멀어요. 그렇다면 나무 위로 뛰어내릴까 했지만 결심이 영 서질 않거든요. 그러는 동안에도 산녀가 천천히 다가왔습니다. 사박, 사박, 사박, 하고 다가옵니다. 이제 틀렸다, 도망칠 수 없다고 체념한 남자는 쭈그리고 앉아서 자기도 모르게 어머니! 하고 소리쳤습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요. 정신이 들어보니 산녀는 사라지고 없었고, 남자는 그때까지 길을 잃고 헤맨 게 거짓인 양 들어가서는 안 되는 산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 훗날 남자는 불제를 위해 삼산에 참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런데 제이중사당에서 내사당으로 가는 길에 어쩐 일인지 길을 잃고 말았어요. 여러 번 다닌 길인데 웬일일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몇 년 전 눈썹산 깊은 곳에 갖다 버린 어머니가 눈앞에 나타난 게 아니겠습니까. 유령인가 하고 겁에 질렸는데 자세히 보니 살아있는 인간이었어요. 어떻게 용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느냐고 놀라서 묻자 어머니는 '며칠 전에 부름산에서 네가 만난 산녀는 나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로산에 버려진 노파가 여섯 단지 굴을 통해 부름산으로 넘어가면 그곳에서 산녀가 된다. 그렇지만 다시 굴을 통해 눈썹산으로 돌아오면 도로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 인간인 채로 계속 있으면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또 흉산으로 가서 산녀가 된다. 산녀로 지내는 동안에는 사람으로서의 기억을 대부분 잃는다. 사람으로서의 의식은 없다. 
그런데도 그날 네가 어머니! 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머잖아 다시 그쪽으로 가야 한다. 그렇게 몇 번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언젠가는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완전히 산녀가 되는 것이다. 

- 그 말을 들은 남자는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버렸던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 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업고 걷던 남자는 또다시 길을 잃고 부름산에 발을 들여놓고 만 겁니다. 얼마 있어 뒤에서 뭔가가 따라오는 기미가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바로 옆 나무 뒤에서도, 대각선 앞쪽에 있는 덤불 속에서도 찰박찰박하고 비슷한 기미가 무수히 느껴졌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내려달라고 하기에 시키는 대로 하자 어머니는 아들에게 혼자 산을 내려가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미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나 보다. 그러니 여기서 헤어져야 한다. 단, 한 발짝이라도 걸음을 떼고 나면 뒤돌아봐선 안 된다. 절대로 돌아보지 마라.'

어머니는 그렇게 단단히 일렀습니다. 
남자는 또다시 어머니와 마지막 이별을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산길이 없어도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걸었습니다. 그러자 뒤를 따라오던 뭔가의 기척이 차츰 약해지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엔 찰박찰박 소리 하나만 남더니 이윽고 그마저도 사라졌습니다.
마지막까지 따라오던 게 어머니였다고 생각한 남자가 작별을 고하는 마음으로 돌아보자 바로 뒤에 무수히 많은 산녀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자기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 그 뒤 어찌어찌 산에서 내려온 남자는 사흘 밤낮을 고열에 시달리다가 일어나서는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 "그, 금을 함유한 광석이 내 눈앞에 있었단 말씀입니까?"
"검은 말을 탄 쇼토쿠 태자, 즉 구로코마 태자는 이와테의 금광 관계자들에게 신앙의 대상이라는 내용의 자료를 도서관에서 봤습니다. 어쩌면 예전에 전국을 떠돌던 노다지꾼 기라우치 릿시 씨가 들여놓은 걸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다쓰이치 씨 일가가 없어진 건 금을 이미 충분히 캤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 하기엔 사라진 정황이 예사롭지 않습니다만."
"자발적으로 모습을 감췄다고 생각하기엔 어르신 말씀대로 너무 부자연스럽죠."
"누군가에게 납치라도 당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고 제삼자의 개입을 생각한들 상황은 더욱 불가해해질 뿐입니다만."
"한두 명이 아니라 일가 모두가 사라졌으니 말이죠."
"그것도 대단히 기묘한 상황에서..."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리키히라는 다쓰이치 일가의 숨은 목적을 알고 조금은 납득이 된 듯했다. 한편 겐야는 그것을 밝혀냄으로써 일가 증발의 수수께끼가 더욱 오리무중이 된 기분이었다. 

- 어둑어둑하고 좁은 산길을 나아가니 이윽고 시야가 트이면서 문제의 능선으로 나왔다. 능선은 미지의 거대한 네 발 짐승이 몸을 비트는 듯한 모양새로 남서쪽으로 뻗어 있었다. 그 끄트머리에서 초입 부분까지 굴 여섯 개가 드문드문 파여 있는 광경은 흡사 외과 수술에 실패한 거대 생물처럼 터무니없이 그로테스크했다. 
겐야는 조심스럽게 능선을 걸으며 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굴 속으로 내려가보고 싶었지만, 사다리도 로프도 없는 상태에서는 위험하리라고 생각해서 참았다. 헛간에서 본 것과 같은 통나무는 아마 사다리의 잔해일 것이다. 그 밖에는 만년필형 손전등으로 굴속을 비추어도 딱히 수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여섯 지장님에서 따온 깃발은 능선의 초입부터 끄트머리까지 백색, 흑색, 적색, 청색, 황색, 금색 순으로 이어지는군.'
깃발은 물론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면서 갈기갈기 찢어지고 헤졌지만, 간신히 붙어 있는 쪼가리에서 이럭저럭 색깔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 금맥이 있나, 아니면 없나...'
불가해한 일가 증발과 처참한 다쓰지 살인사건이 결부돼 있다면, 그 원인은 부름산에 잠들어 있는 금인지도 모른다.

- 여섯 개의 굴을 모두 확인하자 마지막으로 여섯 단지 굴로 향했다. 굴 옆에 건립된 석탑은 무참하게도 비스듬히 금이 가 있었다. 자연스러운 균열로 보이지만 이런 게 쉽게 생길 리 없다. 게다가 그곳에 새겨져 있는 말은 '一切呪詛靈等爲善心菩提也'다. 도무지 공양탑에 새길 만한 글귀 같지 않다.
이끼로 뒤덮이고 붕괴의 조짐이 보이는 석탑, 눈썹산에 버려진 노파가 기어 나와 산녀가 된다는 여섯 단지 굴...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겐야의 등줄기를 차가운 것이 훑고 지나갔다.
'이 사위스러움은 예사롭지 않은 걸.'
괜히 흉산이라 두려워하는 게 아님을 실감하는 한편, 용케 이런 곳에서 탐광을 했다고 감탄했다. 어지간히 겁이 없었나, 아니면 워낙에 둔감한 사람들이었나. 아니, 금이란 존재가 그 정도로 절대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다.

- 겐야는 잠시 주저하다가 한쪽 무릎을 꿇고 굴속을 들여다보았다. 가는 나무뿌리가 무수히 늘어진 움은 아닌 게 아니라 작은 짐승의 굴로 보였다. 그러나 동물이 사는 굴에서는 결코 풍기지 않을 꺼림칙한 기운이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빤히 응시하고 있으려니 머리가 쑥 빨려들 듯한 공포가 엄습했다. 한편으로는 스스로 굴속에 머리를 처박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허둥지둥 굴에서 떨어지려던 겐야는 문득 묘한 것을 발견했다.

'방금 그건...'

굴 가까이로 조심조심 얼굴을 들이미니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곳에 조그맣고 동그란 검정 알갱이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작은 짐승 똥인가 했으나 아무리 봐도 그와는 다른 듯했다. 순간적으로 오른손을 내밀어 집으려다가 흠칫 놀라 손을 도로 뺐다.
굴 속에서 손이 쑤욱 나와...
그런 영상이 뇌리에 떠오른 탓이었다

- "모습은..."
"못 봤습니다. 아예 당집에서 나가질 않았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흉산에 오르는 데는 어지간한 연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인간이란 존재는 본인만이 아는 여러 문제를 안고 있는 법입니다. 저쪽에서 저에게 상의라도 했다면 또 몰라도 제가 먼저 참견해서는 안 되겠지요. 또 애초에 저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떨어뜨린 단부는 다시 얼굴을 들고 흥미 어린 투로 물었다.
"그래서 당신은 어째서 오늘 동트기 전에 기도당 뒤 계단을 올라간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방금 왔다 간 형사는 그런 건 전혀 모르는 것 같던데요." 
겐야는 조금 주저하다가 부름산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다는 것, 그 피해자가 계단을 올라간 듯한 흔적이 발견됐다는 것 등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렇군요. 그런 사건이... 참혹한 일입니다. 그나저나 당신은 꼭 탐정 같군요. 아니, 그리 겸손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서 또 질문하실 게 있습니까?"


- 그뿐이었다. 게다가 방에 들어온 이래로 주고받은 말은 인사말 정도였고, 사건은 아직 건드리지도 않았다.
'뭐, 뭐지? 이 묘한 기지감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거지? 뭐에 대해 느낀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실제로 이때 겐야가 이 기묘한 기지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면 사건은 연쇄살인으로 발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그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었다.

- "듣고 있는 건가?"
"네? 아, 아뇨, 저, 처음부터 다시 부탁드립니다."
"뭐야? 처음부터?"
기나세 경부는 진짜 귀와로 변할 태세였다. 시바자키 형사와 리키히라가 애써 달래 겨우 상황이 수습되었다.
"이번 한 번만 봐주는 거니까 그리 알라고."
경부는 한마디 내뱉고는 다시 처음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 "으음. 여기도 이미 앞치마가 없어졌군요."
널문을 연 겐야가 사당 안을 살피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으므로 리키히라는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앞치마가 전부 도둑맞았으리란 건 예상하셨던 일 아닙니까? 범인은 다쓰지를 살해하기 위해 백색지장님의 앞치마를 훔치면서 다른 다섯 지장님들 앞치마도 같이 가져가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게, 어제 아침 일찍 저희가 부름산에 오르기 전에 흑색지장님께 참배를 드렸잖습니까? 그때 지장님은 분명히 검정 앞치마를 두르고 계셨거든요."
"어... 앗! 맞습니다. 틀림없어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다쓰지 씨를 살해한 뒤에 연쇄살인을 결심했다고 보이는군요. 또는 그 결과로서 연쇄살인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됐다고도 볼 수 있고요."

- 겐야는 리키히라를 채근해 걸음을 뗐다. 리키히라가 '메리 셀레스트호'에 관해 물었다.
"천팔백칠십이 년 십이월 오일, 데이 그라티아 호란 범선이 뉴욕과 지브롤터 해 사이를 항해하던 중에 기묘한 배와 마주쳤습니다. 마스트가 두 개인 횡범선이었는데, 꼭 술 취한 사람이 키를 잡은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메리 셀레스트 호입니까? 난파선인가요?"
"네, 데이 그라티아 호가 신호를 보내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장은 메리 셀레스트 호와 배를 나란히 한 다음 보트를 내려 이등 항해사 등과 함께 그 배로 건너갔습니다. 그러고 이물부터 고물까지 온 배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뭐, 난파선이면...."
"그런데 배는 매우 멀쩡했거든요."
"네?"
"배에 고장을 일으킬 만한 파손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선창엔 화물인 술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식료품과 마실 물도 완벽하게 비축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선원들만 사라졌단 말씀입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선장실엔 먹다 만 아침식사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조리실엔 음식이 든 냄비가 화로에 얹어져 있었고요. 항해사 방에는 뭔가를 계산하다 만 종이쪽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한 선실엔 어린이용 나이트가운이 바느질을 하다 만 상태로 놓여 있었죠. 선원실에선 사용했던 흔적은 있는데 녹슬지 않은 면도칼이 발견됐습니다. 금고엔 지폐 다발과 보석이 보관되어 있었고, 구명보트도 매달려 있는 채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배 안의 상황이 그야말로 일상적인 모습 그대로였던 겁니다. 참으로 섬뜩하게도..." 
"으음, 아닌 게 아니라 다쓰이치 씨 일가와 상황이 비슷하군요. 하지만 그 배 선원들은 모두 바다에 빠졌다고 보면 설명이 됩니다만, 다쓰이치 씨 일가는 대체 어디로 갔는지..."
"하지만 전원이 바다에 빠질 만한 상황이 뭔지, 그걸 모르거든요. 거기다 선내 상황을 더하면 불가해함은 더욱 커질 뿐입니다."
 
- "그날 부름산 동쪽 산길에서 어르신과 마사오 씨가 한 시간씩이나 서서 이야기를 나누리라는 건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겁니다. 즉, 흉산의 밀실 상태는 어디까지나 우연히 그렇게 됐을 뿐입니다. 어쩌면 다쓰지 씨는 서쪽이 혼례로 소란스러운 틈에 다쓰이치 씨 일가가 동쪽 산길로 떠난 것처럼 위장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호오."
"하기야 형 일가가 들어가서는 안 되는 산에서 사라진 걸 어르신이 그렇게 일찍 깨달으실 것도 몰랐겠죠. 그러니 이건 운 나쁘게 형 일가가 사라진 일시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졌을 경우를 대비한 방책이었을 겁니다." 
"으음, 선생의 추리를 트집 잡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만, 다쓰지가 그렇게까지 머리를 쓸 수 있었을지..."
"앗, 그렇군요. 아닌 게 아니라 제 생각이 너무 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다쓰지와 고지 군이 다쓰이치 씨 일가를 죽였다면, 이 연쇄살인은 그에 대한 복수가..."
"맞습니다. 다만 그렇게 되면 대체 누가 그 복수를 하고 있는지가 문제죠. 다쓰이치 씨 일가가 모두 살해됐다면 범인이 없거든요."

 

- "웬 걸요. 이런 촌구석까지 오는 건 삼류 이하의 퇴물 배우들뿐입니다. 그래도 단고로 씨가 특별히 총애하는 극단은 있었던 모양이더군요. 게다가 그분은 <거미줄 활시위>만 공연할 수 있으면 만족했다니, 극단에서도 새로운 작품을 준비할 필요가 없어서 꽤나 편했을 겁니다."
"그 작품은 분명히, 한 배우가 유녀에서, 맹인 악사, 시동, 보조 유녀, 약장수, 무당거미 정령까지 일인 육역을 하는 게 아니던가요?"
"호, 역시 모르시는 게 없군요. 난 쓰이카이치에서 그런대로 이름 있는 극단의 공연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무당거미 정령보다 단발머리 시동 쪽이 훨씬 무섭던데요." 
"하하, 그러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여기 극장에선 별로 관람하지 않으셨습니까?"

 

- "한 반년 전부터 태평극단이란 자들이 눌러앉았다고 들었습니다. 극장이 무슨 제 집인 양 그곳에서 지내면서 여기저기 다닌다고 하니, 그것 참 뻔뻔하다고 할지, 뭐라고 할지."
"하도에선 공연을 않고요?" 
"글쎄요, 모르겠군요. 그런 소문은 못 들었습니다만. 설사 하더라도 예전처럼 일부러 하도까지 보러 가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다들 좀 더 읍내 쪽으로 나갈 테니까요. 게다가 태평극단은 ... "

- "노인이 금년 삼월에 시체로 발견됐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던데, 동행했던 개 초퍼가 시신에서 십 미터 정도밖에 안 떨어지고 계속 주인을 지켰더라고 하잖아." 
"선생님... 지금 지가 죽는단 말씀인가요?"
"앗, 아, 아니, 비유야, 비유, 개는 인간의 벗이라는... 그, 그보다 그 사람이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지... 어쩌면 이 연쇄살인사건의 수수께끼를 풀 열쇠가 거기 숨어 있는지도 몰라."

"네? 왜요?"
"구마도에서 산마가 자기를 쫓아온다고 느끼는 건 지금 그 사람한테는 자연스러운 망상이랄지, 공상일지도 몰라. 그 산마한테 잡아먹힌다고 믿는 것도 뭐,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 하지만 그 산마가 여기서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의미가 좀 다르잖아? 그 나름의 근거가 있으리란 생각 안 들어? 물론 근거 자체가 완전히 망상일 가능성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단서가 될 것 같거든." 
"그러니까 그 사람은 뭔가를 알아차렸다는 말씀이세요?"
"응, 다만 그 사람은 자기가 알아차렸다는 걸 몰라.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거든. 그래서 그런 기묘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닐까."
막연하게나마 겐야의 의도를 짐작했는지 시노는 마지못해 고키 노부요시를 찾아갈 것을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 "그렇군요. 하지만 남자들이 먼저 나서지 않아도 슌기쿠 씨 쪽에서...”
"그게 성가신 겁니다. 그 여자는 자기 입장을 전혀 몰라요."
"마사오 씨도 유혹을 받은 적이 있지 않나요?"
이런 미남을 그녀가 가만둘 리 없다고 생각해서 물은 것이었는데 상대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아, 아뇨. 저 같은 게 무슨.... 뭐, 첩하고 데릴사위는 집에서 처한 입장이 비슷하다면 비슷합니다만."
"그렇군요. 서로 상대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말씀입니까?"
"그, 그런 뜻은 아닙니다. 게다가..."
"네?"
"며칠 전부터 그 여자한테서 묘한 눈초리가 느껴진다고 할지."
"유혹하는 그런 게 아니라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럴 리 있겠습니까. 뭣보다도 그 시선이란 게 교태 어린 것하고는 전혀 달랐는데요.""
슌기쿠 본인에게 물어봤자 순순히 대답할 리 없겠지. 겐야는 마사오의 등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검은 점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점 하나만 더 있으면 잘하면 북두칠성이라 해도 되겠는데요."

"네? 아아, 등에..."
돌연한 말에 당황해 중얼거리던 마사오가 느닷없이 겐야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새, 생각났습니다! 고지 군의 등에도 저, 점이..."

- 마음속에 들끓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것만 같았다. 한번 휩쓸렸다가는 당분간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 따위 무리다. 즉, 리키히라의 원수를 갚을 수도 없게 된다.
'리키히라 씨의 원수...'
그런 식으로 생각한 자신이 뜻밖이었다. 그러나 다쓰지와 고지가 살해됐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노여움이 불끈불끈 치솟는 것은 분명했다.
'이러면 안 돼. 냉정해야지.'

 

- 범인은 어째서 피해자의 시신을 절단했나?
동요에 맞춰 '적색지장님 숨는다'를 연출하고 싶었다면, 시신을 그냥 굴속에 넣으면 그만 아닌가. 그 집 헛간 옆에는 방치된 손수레가 있었다. 그 손수레를 이용하면 여섯 무덤 굴까지 피해자를 운반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범인은 시신을 구태여 여섯 토막으로 절단했다.
'설마 시신을 모든 굴에 버리고 싶어서?
그렇게도 생각해 봤지만 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 아니, 잠깐 그래! 손수레가 있다는 걸 몰랐나? 그런데다 시신을 운반할 체력이 없었다면? 그래서 시체를 절단해 한 토막씩 운반했고 장난으로 굴마다 하나씩 버렸다고 생각하면 일단 조리는 서지.'
하지만 범인이 그 정도로 부름산의 집 사정을 잘 몰랐다는 가설이 아무래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적어도 다쓰지를 살해할 때 그 집에 한 번쯤은 가봤을 텐데. 수수께끼는 그 밖에도 더 있었다.
범인은 어떻게 피해자를 부름산의 집까지 불러냈나?

- "그때, 그럼 제가 그때 만약 확인을 했더라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그렇다고 해도 단부 씨께는 의무도 책임도 없잖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가지토리 가의 쓰키코 씨께 식사뿐 아니라 옷과 일용품까지 여러모로 신세를 졌는데.."
"그렇군요. 하지만 이런 말씀은 드리고 싶지 않지만, 자칫했다간 단부 씨까지 살해됐을지도 모르는 일이거든요."
"..."
그는 겐야의 말에 놀란 듯했다.
"이제 그만 다음 순례지로 이동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겁을 주고 만 모양이었다.

- '잇따라 셋씩이나 살해된 데다 사건에 관여했다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당연한 반응인가'
더욱이 범인의 동기가 보이지 않는 연쇄살인이다. 설사 사건에 관여하지 않는다 해도, 다시 말해 단부 같은 외지인이라도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저는 가지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법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전국을 행각하기만 하는 무력한 순례자일 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그런 핑계라고도 볼 수 있는 말을 하고 고개를 떨어뜨렸으므로 겐야는 황급히 감사를 표하고 기도당을 나와 가스미 가로 갔다.

- "그나저나 노부요시 씨는 어떻게 구마도 사건의 범인을 알아냈을까요?"
신나서 안미쓰를 먹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노를 겐야는 생기 넘치는 눈초리로 쳐다보며 말했다.
"바, 바로 그거야, 이 사건의 수수께끼를 풀 열쇠는."
"무슨 말씀이세요?"
"들어 봐. 노부요시 씨는 나처럼 현장에 가진 않았지. 소후에 군한테 다쓰지 씨와 고지 씨 살해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전해 들었을 뿐이야. 그런데도 범인을 안 거야. 이건 완전히 안락의자 탐정인 셈이잖아. 그 사람만 알 수 있었고 난 입수할 수 없었던 단서가 이번 사건에 있을 것 같진 않지. 아무래도 그 반대인 경우가 많지 않겠어? 즉, 노부요시 씨가 아는 사실만으로도 범인을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잖아."
"그러네요."
저도 모르게 안미쓰를 떠먹던 손을 멈춘 소후에 시노에게 도조야는 여행가방에서 취재 노트를 꺼내며 말했다.
"마지막 의문점이자 아마도 단 한 줄기의 광명을 이끌어내 줄 수수께끼..."


-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산속에 주사위 강변이 있죠?"
우습게 보는 듯한 경부와는 달리 다니후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삼산과 부름산의 경계이기 때문이겠죠."
"주사위 강변이 말씀입니까?"
"원래는 산 자가 머무는 이승과 죽은 자가 가는 저승을 갈라놓기 위해, 양쪽을 오가는 걸 가로막기 위해 만든 경계, 그게 주사위 강변이거든요. 그래서 '주사위(賽) 강변'이 아니라 '가로막이(塞) 강변'(일본어 발음이 비슷하다)이란 설도 있답니다."

- "그 사람은 그걸 모르고 넘은 건가요? 그리고 그 결과 공중을 날아다니는 소름 끼치는 정체불명의 절규와 마주치게 되는데요."
"처음엔 새라고 생각하고 조사해 봤습니다만, 외침 소리는 바닥 쪽에서 들려왔거든요. 해당하는 새가 없더군요. 저도 모르게 머리를 싸안았습니다만, 가만 생각하니 좌우에서 들린 목소리가 똑같은 목소리라는 증거는 없다는 걸 깨닫고부터는 아주 간단했습니다." 
"네? 같은 목소리가 아니라고요?"
"발정기의 야생 여우가 서로를 부르면서, 또는 짐승 두 마리가 서로 위협하면서 그 사람의 좌우를 같은 방향으로 이동했다면 어떨까요? 오른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나 했더니 이번엔 왼쪽에서 들렸다, 이어서 또 오른쪽에서, 또 왼쪽에서... 이렇게 계속되면 목소리가 공중을 날았다고 착각할 만도 하겠죠."  
"그렇군요. 그럼 그 사람을 응시했던 끔찍한 시선은요?"
"제아무리 산에 익숙한 사람도 어둠 속에 있으면 문득 한기를 ... "

- 질문을 한 다니후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경부와 시바자키는 안색이 확 변했다.
"그게 뭡니까?"
"수목이 울창한 산속 깊은 골짜기, 가파른 벼랑, 다리가 놓이지 않은 강변 등을 잇는, 보통 사람은 절대로 알지 못하는 좁디좁은 한 줄기 길입니다. 아마 지역 주민들도 그 존재를 모르는 비밀의 길일테죠."
"네? 그게 개라의 길입니까? 그런데 선생님, 개라가 무슨 뜻이죠?"

"한센병입니다."
"네? 나, 나병... "
"다니후지 씨, 그 호칭은 옳지 않습니다. 항산성균의 일종으로 보이는 균이 발견되기 전까지, 한센병과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는 피부병까지 포함해서 나병이라고 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나병으로 여겼던 병을 전부 한센병이라고 할 순 없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나병 예방법'이 '한센병 예방법'으로 개정됐지."
경부가 험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말했다.
"앗, 설마 노파가 가고 있었다는 우즈하라의 요양소가..."
"그렇습니다. 조사해 보니 우즈하라엔 정신병원 외에도 한센병 시설이 있었습니다."
흥분하는 다니후지와는 달리 겐야는 담담히 대답했다.

- "전국을 돌아다니는 사이에 하반신이 단련됐나 봅니다."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다른 분들은요?"
"탈락된 사람도 있고, 시바자키 씨 지휘 아래 삼분의 일은 기도당 뒤 계단으로, 삼분의 일은 부름산 서쪽 산길로 갔습니다."
경계 태세는 완벽하다는 뜻이다. 그 말을 듣고 겐야는 안심했다. 자신은 전력을 다해 범인을 뒤쫓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하지만 흑색지장님 사당을 지나 부름산의 구불구불한 산길에 접어든 언저리부터 두 사람의 속도가 눈에 띄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리 돌고 저리 돌며 뻗어나가는 비탈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돼서 두 사람이 동시에 멈춰 선 것은 결코 지쳐서가 아니라...

- "선생님... 저 소리가 들리십니까?"
"네, 소름 끼칠 정도로..."
구불구불한 비탈길 위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앞을 달리는 단부가 줄곧 웃고 있는 것이었다.

"저, 저 녀석은 뛰면서 내내..."
"웃고 있는 모양입니다."
잠시 꼼짝 못 하고 서 있던 두 사람은 이내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인 뒤 또 달리기 시작했다.

- 이윽고 구불구불한 산길이 끝나고 기괴한 구렁이 비탈이 나타났다. 절구통같이 파인 채 좌우로 휘돌며 이어지는 비탈길은 그 형태뿐 아니라 발치에 걸리는 돌멩이와 양쪽 벽에 드러난 굵직한 나무뿌리 때문에 달리기가 그 이상 불편할 수 없었다.
"제, 젠장... 저놈은 어떻게 저, 저렇게 잽싼 거죠?"
"씌었을지도 모르죠."
"네?"
"그 때문에 도무지 예사 사람 같지 않은 저런 괴력을 낼 수 있는 거라면..."
다니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겐야의 말이 어디까지 진심인지 모르겠다는 당혹감이 느껴졌다.

- "앗, 저거..."
구렁이 비탈의 끝이 보일 무렵 다니후지가 소리쳤다.
비탈 머리에 시커먼 그림자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서서 멸시하듯, 비웃듯... 아니, 실제로 비웃고 있었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웃음소리를 온 흉산에 울려 퍼뜨리려는 듯 요란하게 웃고 있었다.

 

- "갑시다."
두 사람은 남은 산길을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꼭대기에 발을 딛자마자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껏 벌어진 차를 단숨에 만회하려는 듯 맹렬한 기세로 쫓아갔다.
덕분에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여섯 무덤 굴로 통하는 남쪽 길을 달려가는 단부의 뒷모습을 가까스로 볼 수 있었다.
"제 발로 막다른 길로 가다니 멍청하군요. 이제 저놈은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니후지는 기뻐했으나 왜 그런지 어조에는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실은 겐야도 같은 기분이었다. 몹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이상 가서는 안 된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니후지가 없었다면 이는 정말로 되돌아갔을지 모른다.
"네, 드디어 잡았군요."
그러나 입에서는 마음과는 정반대 되는 말이 나오고 두 발은 되돌아가기는커녕 앞으로 서둘러 나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 그림자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제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저 이쪽을 꼼짝없이 바라보며 뒷걸음치더니 겐야의 시야에서 훅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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