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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다 신조]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8. 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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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미쓰다 신조 / 권영주
출판 : 비채
출간 : 13.11.15


       


<도조 겐야 시리즈>의 리뷰 순서는 의도적으로 작품 내 시간 흐름에 맞추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읽은 순서는 발표된 순서에 따랐는데,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까지는 재독.

<하에다마처럼 모시는 것>만 이번에 처음 읽은 작품이었다.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을 처음 읽었던 때도 여름이었다.

근무처, 거주지의 변경과 함께 찾아왔던 평년을 웃도는 푹푹 찌던 여름. 

재독하면서 당시 기억이 많이 떠올랐는데, 막상 리뷰를 정리하는 지금은 그때보다 수월한 여름이라 기분이 좋다.

 

도조 겐야는 지인 아부쿠마가와 가라스와 함께 떠났던 여행길에서 '산마(山魔)'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바로 그쪽으로 노선을 변경한다. 처음 목표했던 '아오쿠비' 전승을 조사하기 위해 그대로 갔더라면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 사건에 휘말렸을 테지만, 목적지를 바꿈으로써 참사를 피하는 듯했으나... 그렇게 맺어진 인연으로 다시 찾은 부름산에서 <산마처럼 비웃는 것> 사건을 겪게 된다.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겨우 다스렸을 즈음. 다시 만난 가라스와 편집자 소후에 시노.

겐야를 걱정하기보다는 '그런 기회를 놓치게 하고 너만 재미를 보다니!'라고 다그치는 가라스에게,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함께' 움직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는 시노. 반색한 가라스가 가져온 것은 '미즈치 신'을 모시는 신사 촌과 감의/증의 의례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사정이 생겨 겐야와 시노만 방문하게 되는데...

 

여기서 '가가구시 촌'과 마귀 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겐야가 다음에 겪게 될 일은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일 테지만.

그전에 새롭게 만난 편집자의 소개로 들른 해안 촌에서 <하에다마처럼 모시는 것>을 겪게 된다. 

 

미쓰다 신조의 작품들을 연이어 읽다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들이 눈에 띈다. 

5-10세 사이의 소년, 격자무늬, 광이나 사당.

무더운 여름, 흔들리는 열차나 버스에 몸을 맡기고 멍하니 늘어지는 경험, 그리고 전학.

낯선 집, 기이한 구조 또는 구성, 주변에는 출입이 금지된 숲이나 뒷산.

뱀(蛇, 巳, 辰 ...) 류.

 

지속적으로 반복되지만, 매번 다른 이야기와 미묘하게 다른 설정들이 덧씌워져 각각의 작품을 읽을 때는 크게 티가 나지 않는다.

그만큼 잘 어우러졌기 때문일지도, 혹은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어쩌면 많은 이들이 한 번쯤 경험했을- 일이기 때문일지도.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에서는 시작은 미즈치지만, 격자창이 달린 광과 순례자 모녀, 앙화를 대신하는 희생물이라는 개념이 중심이 된다. 

그 변주로 팽것, 인신공양과 진흙녀 등 다채로운(?) 민간전승이 곁들여지므로 -보다 현실적으로는 가미가제까지도- 견식을 넓히는 차원에서도 추천.

 

어떤 주제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모으고 읽고 정리한다는 것은 보통 집념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기에 작가가 되는 것인지, 작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인지.

 

즐거웠다.

 

           

   


   

 

들어가기에 앞서

 


전쟁이 끝나고 십 년 가까이 지난 어느 해 6월 나라 현 다로 군의 하미 지방에서 벌어진 신남 神男 연쇄살인사건을 기록함에 있어, 나는 기본적으로 내 시점을 기축으로 하는 삼인칭 서술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그렇지만 미묘하게 다른 인물의 시점에서 묘사되는 부분도 작중에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상당히 느슨한 내 시점의 삼인칭 서술이라고 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다.

다만 구키 쇼이치 씨에게 취재한 부분은 분량이 워낙 많다 보니 도저히 본편의 기록에 편입시킬 수 없었던지라, 그 부분만 쇼이치 씨의 시점에 의한 삼인칭 서술을 시도했다. 따라서 해당되는 장은 취재노트를 토대로 하되 내 상상이 다분히 가미됐음을, 두 개의 기록이 반드시 시계열로 구성된 게 아니라는 사실도 포함해 사전에 분명히 밝혀두고자 한다. 한편 쇼이치 씨와 같은 수법으로 묘사된 인물이 한 명 더 존재하는데, 이쪽은 쇼이치 씨보다 더욱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기록할 수 있었다고 자부한다. 

 

쇼와의 어느 해 오월에
도조 마사야 또는 도조 겐야

 




- "엄청 불가해한 상황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기우제가 몇 년 만에 나라 지방의 산골 마을에서 거행되는 모양이야."

아부쿠마가와 가라스가 무거운 입을 연 것은, 교토 가와라 정의 양식집에서 라이스 카레를, 중국 음식점에서 볶음밥을, 백반집에서 닭고기계란덮밥을 연이어 먹은 뒤 찻집에서 핫케이크를 주문하고, 양식집으로 다시 돌아가 이번에는 팥소와 당밀을 얹은 삶은 콩을 먹으며 사이다를 마시고, 마지막으로 자리 잡은 또 다른 찻집에서 커피를 세 잔 째 시킨 다음이었다. 

"이거 정말 경비로 처리되는 겁니까?"
"다마키 씨 술값에 비하면 이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에요."

도조 겐야가 걱정스레 묻자, 편집자인 소후에 시노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것은... 겐야는 생각했다.
다마키 편집부장이 여러 쟁쟁한 작가들과 술을 마시기 때문이며, 그 성과가 괴상사 怪相舍 출판사가 출간하는 탐정소설 잡지 <서재의 시체>에 장편연재라는 형태로 나타나기에 인정받는 것이다. 지금 당신이 상대하는 아부쿠마가와 선배의 애초에 어디까지 믿어도 되는지 ... 

- "그렇지만 소후에 군도 내가 만날 때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데 들어줄 생각을 안 하잖아."
겐야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반격에 나섰다.
"선생님은 선생님이신걸요."
"그러니까 선생님이라고 부를 사람은 좀 더 경험 많은 대가들이고 나 같은..."
"풋내기에 인기도 없고 하잘것없기 짝이 없는 삼문문사 나부랭이 같은 한심한 애송이는 도저히 선생님이라 할 수 없다 이거지."
아부쿠마가와가 즉각 말을 받았다. 그는 이런 때 정말 혀가 술술 잘도 돌아간다.
"구로 선배,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비하하진 않아요."
"야, 너 자만하면 안 돼."
참고로 '구로(검정) 선배'는 아부쿠마가와의 '가라스(까마귀)'라는 특이한 이름에서 나온 별명이다.

- 아부쿠마가와 가라스의 본가는 교토에서도 유서 깊은 신사였다.. 출생만은 본인의 불쾌한 성품으로는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신사의 후계자로 태어나고도 본인은 대학 시절부터 뻔질나게 다니던 민속탐방을, 졸업한 뒤로도 계속하며 전국을 방랑하고 있었다. 지방의 기괴한 의례며 기묘한 풍습 등에 유별나게 밝은 데다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유서 깊은 신사인 본 가덕인지 좌우지간 발이 넓어 못 드나드는 데가 없었다. 덕분에 이제는 엄연한 재야 민속학자였다. 


- 한편 도조 겐야는 도조 마사야라는 필명으로 괴기환상소설이며 변격탐정소설을 발표하는 작가였다. 옛날부터 괴담, 기담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는데, 어느새 취미와 실익을 겸해 괴이담 수집에 열중하게 되어 일본 각지를 행각 중이다. 원고 집필도 대부분 여행 중에 하기 때문에 편집자들은 그를 '유랑하는 괴기소설가'라고 불렀다.

- 그런 편집자들 중 하나가 괴상사에서 도조 겐야를 담당하는 소후에 시노였다. <서재의 시체>라는 탐정소설 전문 월간지를 펴내는 괴상사는 전후에 창립된 신흥 출판사였다. <보석>에서 데뷔한 인기 작가 에가와 란코의 연재 등 다채로운 지면 구성을 위해 늘 신경 쓰는 덕에 다른 전문지들의 휴간이 잇따르는 중에도 안정된 부수를 유지하고 있었다. 

- 이 세 사람이 교토에서 얼굴을 마주하게 된 것은, 아부쿠마가와가 오랜만에 본가에 돌아와 있던 시기와 시노가 제사 때문에 오사카 본가에 돌아와 있던 시기가 우연히 겹친 데다 겐야가 그즈음 간사이를 지나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대한 이야기가 있으니 만나자는 아부쿠마가와의 제안에 두 사람은 교토로 발걸음을 한 것인데, 어쩐지 그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니, 이상한 것은 늘 그렇다지만, 일부러 불러다 놓고 아무리 기다려도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겐야가 이상하게 여기고 있으려니, 아부쿠마가와는 속 보이게도 배가 그득 차자 그제야 이야기를 시작했다. 맥 빠지는 동시에 지금까지 먹은 식비가 경비로 처리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시노가 묘한 트집을 걸고 나서는 바람에 이야기가 점점 곁길로 샜다. 아부쿠마가와가 편승하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역시 선배하고 소후에 군을 동석시키는 게 아니었어.
과거의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겐야는 후회했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어느 한쪽만 상대해도 충분히 힘든데, 둘을 동시에 상대 ... 

- 겐야가 드디어 문제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고 안도하려던 찰나, 아부쿠마가와가 묘한 말을 했다.
"잠깐만요, 구로 선배. 꼭 저한테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야기를 못하겠다는 것 같잖아요."
"아부쿠마가와 선생님이라고 불러."
"가라스 신이시여, 어찌 된 일이옵니까?"
"보라고, 하여간 이 녀석은 꼭 이렇게 딴청을 부린다니까.”
아부쿠마가와는 시노를 돌아보며 우는 시늉을 해 보였다. 어찌나 연기가 서툰지 삼류배우도 그보다는 나을 성싶었다.
"도조 선생님, 정말 짚이는 데가 없으세요?"
"으음... 없는데요."
서슴없이 부정하는 겐야를 시노는 가볍게 노려보고는 비장의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부쿠마가와 선생님, 가라스 신이시여, 부디 저를 봐서 부탁드리옵나이다."


- 겐야는 이대로 가다가는 끝이 없겠다 싶어서 진지하게 물었다.

"요는 나한테 정보만 빼내고 실속은 네가 차지하는 악행을 하지 말라는 거다."
"네? 제가 언제 그런 몹쓸 짓을 했죠?"
"아, 이놈이 또 시치미 떼네."
"그러니까 언제요?"
"음, 처음엔 작년 가을이었나."
"그거... 혹시 선배하고 오쿠타마에서 더 들어간 히메카미 촌에 가려다가 고도 지방의 구마도를 찾아갔을 때 말입니까?"
"그거 봐, 기억하잖아."
"작년 가을이란 말을 듣고 연상한 것뿐이에요. 그 이상은..."

"아직도 모르겠어? 히메카미 촌으로 가는 기차에서 먹을 것 갖고 쩨쩨하게 굴던 주재소 순사가 우리 앞자리에 있었잖아."

 

- 참고로 아부쿠마가와는 그 사람에게서 귤 한 개와 센베이 과자 한 봉지를 얻어먹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귤 반 개는 상대방이 겐야에게 준 것을 그가 옆에서 가로챘다. 그런 사람에게 먹을 것 갖고 쩨쩨하게 굴었다는 말이 잘도 나온다 싶었지만, 겐야는 이야기가 또 곁길로 샐까 봐 그냥 들어 넘겼다.

- "아오쿠비 님 이야기를 하셨죠."
"그래. 그렇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야."
"그다음이라면... 산마(山魔) 말입니까?"
"그래, 그거야. 애초에 노랑이 순사한테 산마 이야기를 꺼낸 건 나였잖아."
"그래서 중간에 기차에서 내려 같이 구마도로 갔잖아요."
"그땐 그랬지."
"네?"
"이게 진짜 시치미를 떼네. '네?'는 무슨. 두 달쯤 전에 너 혼자 구마도에 갔잖아."
"그건 소후에 군이 고키 노부요시 씨의 원고를 보여줘서..."

"구마도에 또 갈 마음이 날 만큼 재미있는 원고를 읽었으면 나한테도 연락하는 게 도리 아니냐?"
"구로 선배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생활인데 어떻게 연락을 하라고요? 게다가 저처럼 정기적으로 출판사 하고 연락을 취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발 닿는 대로 다니는 방랑의 까마귀 아닌가요? 어디 있는지 누가 안다고 그러세요?"

- 하여간 성가시다고 할지, 골치 아픈 사람이다.
"게다가 혼자 구마도로 간 것뿐이면 또 모르겠는데, 넌 거기서 기괴한 사건하고 마주쳤다고."
아닌 게 아니라 겐야는 그곳에서 예로부터 촌락에 전해지는 여섯 지장님 동요에 맞춘 기묘한 연쇄살인사건에 휘말렸다.
"그렇지만 구로 선배, 그게 어떻게 선배한테 정보만 빼내고 저 혼자 즐긴 겁니까. 살인사건이라고요. 오히려 생고생을 한 건데..."

"거짓말 마라. 산속 외딴 집에서 증발한 일가족에 밀실에서 발견된 얼굴 없는 시체, 동요살인, 금광의 수수께끼까지 재미있는 사건 아니냐. 그걸 네 녀석이 독차지한 거야." 
"무슨 그런 억지소리를..."
"도대체가 그때 도중에 기차를 내리지만 않았으면, 우리는 히메카미촌에서 잘린 머리 연쇄살인사건 하고 마주쳤을 거라고."
"마침 그 마을의 문학 동인을 찾아온 복면작가 에가와 란코 씨가 연관됐던 사건이죠."
란코는 그 사건을 토대로 서재의 시체>에 금년 1월호부터 <피투성이 혼사의 신부>라는 장편을 연재하는 중이었다.

- "이놈이 지금 뭔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게다가 복면작가란 족속은 대개 얼굴에 자신이 없는 주제에 자기애만 강한 인간들이라고. 그러니까 실제로 만나보면 대부분 너무 못생겨서 실망할 거다."

"복면작가를 만나본 적이 있으신 겁니까?"

"없어."
"..."

"안 만나봐도 그쯤은 알아.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도대체가 현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은 에가와 란코한테 짐이 너무 무거워. 그러니까 미제사건이 된 거 아니냐. 내가 그 마을에 갔더라면 쾌도난마의 명추리로 단박에 여러 수수께끼를 풀어서 지금쯤 명탐정 아부쿠마가와 가라스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을 걸 네놈이 망쳐버린 거야."  

이 정도로 시비를 걸고넘어지면 아부쿠마가와의 폭주에 익숙한 겐야도 뭐라고 대꾸할 방법이 없다. 그 이전에 우선 대꾸할 기력이 없어진다. 학창 시절에도 비슷한 트집을 잡힌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뿐, 그밖에는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소후에 시노가 한 말의 의미가 순간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 이번엔 구로 선배님도 나라의 산골 마을에 같이 가시면 되잖아요."

- "도조 선생님은 괴이담을 수집하러 가시는 데마다 기괴한 현상이며 불가해한 사건에 말려드시죠. 아니, 결국 가진 않았지만 가려고 했던 히메카미 촌에서도 무시무시한 잘린 머리 살인사건이 일어났으니 얼마나 확률이 높은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소후에 군, 대체 무슨 말을..."
"그러니까 도조 선생님이랑 같이 기우제에 참가하시면 어쩌면 엄청난 사건에 말려들 가능성이..."
“". 그거 좋은 생각인걸!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 했지?"
"네? 아, 아니, 잠깐만요."
겐야는 허둥댔다. 어느새 선배와 동행하는 것으로 되었다.
"물론 지도 갈 거예요!"
"뭐, 뭐라고?"
거기에 시노가 한 술 더 떴다. 그녀가 자신을 '지'라고 말할 때면 변변한 일이 없다.

 

- "소후에 군은 일도 있는데 도쿄로 돌아가야지."
"담당 작가 선생님 취재에 동행하는 것도 어엿한 일이에요."

"아직 현지로 간다고 정해진 건..."
"그걸 판단하기 위해서 지금부터 구로 선배님께 문제의 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거잖아요. 그렇죠, 아부쿠마가와 선생님?"
"그야 물론이지. 나랑 시노 씨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네놈이 자꾸 상관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니까 이야기가 한참 돈 거 아니냐."
두 사람은 완전히 의기투합했다. 겐야는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이 두 사람이 동석하는 자리에는 앞으로 절대 끼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 "나라의 깊은 산골에 하미라는 땅이 있어."
아부쿠마가와가 비로소 문제의 이야기를 꺼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동서로 긴 분지에 마을 네 개가 있지. 맨 안쪽 서쪽 끄트머리의 사요 촌이 처음으로 개척됐고, 이어서 모노다네 촌, 사호촌, 아오타 촌 순서로 동쪽으로 확장된 거야." 
"마을의 주된 산업은 농업, 그것도 논농사겠군요."
겐야는 마을 이름의 한자 표기를 확인한 뒤 물었다.

"그래. 어느 마을이나 남북으로 펼쳐진 땅 중 북쪽 오분의 사에 논과 거주 지역이 집중돼 있고, 남쪽 오분의 일에 신사가 있지."

 

- "도조 선생님, 논농사가 주된 산업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시노의 질문에 겐야의 말수가 많아졌다.
"마을 이름에서 그렇지 않을까 싶었어. 사요 五月夜 촌의 '五月'은 모를 심는 시기고, 모노다네 物種 촌의 '物種'은 봄에 뿌리는 씨앗을 의미해. 사호 佐保 촌의 '佐保'는 봄의 신인 사호 아가씨를 연상시키고, 아오타 靑田 촌의 '靑田'은 말하나 마나 벼가 푸르게 자란 전답을 가리키지. 참고로 物種은 4월, 佐保는 3월의 계절이거든. 즉 마을이 개척된 순서대로 5월, 4월, 3월로 거슬러 올라가는 거지. 네 번째 마을인 靑田이 6월의 계절어인 건, 아마도 2월이 겨울이라 그렇겠지." 
"어머, 재미있네요. 그렇지만 그럴 거면 맨 처음 생긴 마을을 아오타 촌이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럼 6월부터 3월까지 쭉 이어지잖아요."
"사요 촌 사람들은 자기들 뒤에 누가 와서 마을을 만들 거란 생각을 못한 게 아닐까."
시노의 당연한 의문에 겐야는 웃으며 대답했다.

- "그런데 선생님, 북쪽에 전답이 있으면 볕이 안 들지 않을까요?"
"하미 땅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니까 남쪽이면 산에 가로막혀 볕이 안 드는 곳이 생길 테지. 그 점에서 북쪽에 전답을 두면 전체에 볕이 내리쬘 거야."
"그런가요?"
"또 신사가 있는 남쪽을 성스러운 공간으로 간주한다면 마을 사람들이 생활하는 북쪽은 속세가 되겠지. 즉 성과 속을 의도적으로 구분했다고 볼 수도 있어."
"아, 그러고 보니 그렇겠네요."

 

- 겐야가 대꾸인지 감탄인지 한숨인지 알 수 없는 묘한 소리를 냈다. 시노의 눈에는 그가 마치 뭔가를 예감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아부쿠마가와는 후배의 그런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각 마을의 신사라는 게 또, 사요 촌이 미즈시 水使 신사, 모노다네 촌이 미즈치 水內 신사, 사호 촌이 스이바 水庭 신사, 아오타 촌이 미쿠마리 水分 신사, 이렇게 죄 '물'이 들어가 있지 뭐야." 
"한자의 표의도 제법 흥미로운데요.”
"그런 해석은 나중에 하고, 그보다 흥미로운 건 네 신사의 신체 神體라고."
"물의 신인 미쓰하노메노카미며 전답의 토양을 수호하는 하니야스히메노카미를 모시는 게 아닙니까?"
“모시는 건 그런 신이 맞는데, 내가 말하는 건 신체 자체라고.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게 여기 신체인데..."

- "수수께끼 같군요."
"그게 뭐예요?"
시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겐야를 보았다.
"물이 아닐까."
겐야가 중얼거렸다.
"네? 물...?"
"혹시 네 신사 모두 미쓰 천의 물을 각 본당까지 끌어오는 게 아닙니까?"
겐야가 바로 맞혀버린 탓에 아부쿠마가와는 김이 샌 표정이었다.

"그래, 그런 거야. 다만 끌어온 물을 도로 강으로 돌려보내니까 본당의 물이 특별한 건 아니고."

- "그렇지만 말 그대로 물의 신을 모시는 게 되지 않나요?"

"겉으로야 그렇지."
아부쿠마가와가 의미심장한 투로 말하자, 겐야는 별안간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지방의 신사에 가면 표면상으로는 <고지키 古事紀>나 <니혼쇼키 日本書紀>의 황실계보와 관련되는 신을 모시는 척하면서 실제 제신 祭神은 따로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요. 하미의 신사도 그런 겁니까?"

- "통문 樋門이란 농업용수를 끌어들이는 입구를 말해.”
겐야는 시노가 질문하려는 눈치를 채고 아부쿠마가와의 이야기가 중단될까 봐 앞질러 설명했다. 그런데 그 설명이 문제였다.
"서일본에선 '굴길'이라고 하고, 동일본에선 '둑굴'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산지에서 흘러온 강물이 평지로 나가는 지점에 부채꼴로 선상지가 발달해서 그 중심 부분에 작은 바위산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거든. 이 바위산 덕분에 물의 흐름이 안정되는 셈인데, 거기에 굴을 뚫어 용수를 끌어들이는 거야. 그래서 굴길이니 둑굴 같은 명칭이 붙은 거고. 이런 통문은 홍수의 영향도 잘 받지 않으니까 농업용수를 끌어들이는 입구로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 "미즈치? 물의 영이라고 쓰는 미즈치 水靈 말입니까?"
"그게 아냐. 물 '수 水'에 이매망량 魑魅魍魎 '이 '를 써서 미즈치. 정의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종의 용신 龍神이 아닐까 하는데..."

"뭐, 뭐, 뭐라고요? 정체불명의 신에, 이매망량의 '이'를 써서 미즈치!"
"이놈아, 갑자기 소리 지르지 마라. 간 떨어지겠다."
아부쿠마가와가 불평했으나, 겐야는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명백히 달라진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닌토쿠기 仁德紀>에 '미즈치가 있어 사람들을 괴롭혔다'는 말이 나옵니다. 뱀 비슷한 생물인데 네 발이 있고 입에서 독기를 뿜어내 인간한테 해를 미칩니다. 원래는 미쓰치라고 해서 청음이었는데, '미'는 '물'을 나타내고 '쓰'는 조사, '치'는 영을 뜻하니 그야말로 물의 정령이죠. 한자로는 '蛟'라고 씁니다만, 중국에선 용의 전신 前身으로 간주됩니다. 즉 승천해서 용이 되기 전에 물속에 사는 게 미즈치인 거죠." 

- 아부쿠마가와가 끼어들려 하지만 겐야는 틈을 주지 않았다.
"원래 중국에서 용은 봉황, 기린, 거북과 함께 신성시되는 사령 四靈 중 하나거든요. 구름을 일으켜 비를 부른다고 여겨지니, 물의 정령인 미즈치가 그 전신이라고 이야기되는 것도 납득할 수 있죠. 또 교룡 蛟龍은 비늘이 붙은 용이란 설도 있고 말이죠. 다만 중국의 용에 대한 이런 사상에 비해 일본의 미즈치에 대한 개념은 다소 명확하지 않다고 할 수 있거든요. 물의 신이었던 게 불교가 들어오면서 수해를 일으키는 악신이 됐다든지, 마찬가지로 물의 정령인 갓파를 일컫는 호칭이 됐다든지, 제법 다양하단 말이죠." 
"이거 봐..."
"야마타노오로(머리가 여덟 개 달렸다는 일본 전설상의 큰 뱀)를 대홍수로 보고 그걸 퇴치한 스사노오노미코토를 물의 신으로 여기는 설도 있으니까요. 즉 큰 뱀과 용의 대결인 셈입니다. 스사노오노미코토는 폭풍의 신이라고도 이야기되니 뭐, 용신으로 취급하는 게 꼭 무리인 건 아니죠. 다만..."
"이놈아, 언제까지..."
"맞아요, <만요슈> 16권에 '사카이베 境部 왕, 몇 가지를 노래하는 한 수'로 '호랑이 타고 오래된 집 넘어 푸른 심연의 교룡[미즈치] 잡아올 검 있다면'이라는 게 있는데..."

- 그제야 아부쿠마가와는 뒤늦게나마 도조 겐야의 건드려서 안 되는 부분을 자신이 건드리고 말았다는 것을 인정할 마음이 들었다. 이쯤 되면 제아무리 아부쿠마가와 가라스라도 겐야를 막을 수 없다. 그저 계속해서 달래고 진정시키는 수밖에 없다.

- "애당초 하미 彼美란 지명에 단서가 있었던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죠?"
아부쿠마가와가 상대하지 말라고 눈짓했으나, 시노는 아랑곳없이 질문했다.
"<와묘쇼 和名抄>에 보면 '蛇'를 일본어로 '헤미 倍美', '蝮'을 '하미 波美'라고 하거든. 즉 지명 자체에 뱀이란 뜻이 들어 있는 거지."
"그건 억지지. 도대체가 하미는 살무사 아니냐."
아부쿠마가와가 즉각 걸고넘어졌으나 겐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젠안 수필 善俺隋筆>에선 물속에서 사람을 잡아 죽이는 존재로 갓파하고 자라, 물뱀을 듭니다. 사람을 홀려 해를 가하는 물뱀은 '미즈치'라고도 했죠. 갓파도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는 걸 생각하면 제법 흥미로운데요. 어라? 이름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중요한 강이 미쓰 천 아닙니까!"

 

- "미쓰 深通 천의 [미]는 뱀을 가리키는 巳[미]랑 통하거든요. 다시 말해 뱀이 지나는 강인 거죠. 야마타노오로치를 수해로 해석하는 설하고 좀 비슷한데... 아니, 미쓰 천의 경우는 십중팔구 상류에 문제의 존재가 있는 게 틀림없어."
"문제의 존재?"
"그게 미즈치군요."
그제야 겐야가 아부쿠마가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아부쿠마가와 토라져서 그를 외면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어라, 아닌가요?"
겐야는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미즈시 신사에서 매번 기우제를 주관하지 않는 거죠?"
시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요 촌만 있었을 땐 그랬겠지. 그런데 점점 개척민이 늘고 새로운 마을이 동쪽으로 확대됐어. 그러면서 신사가 분사 分社됐고 이윽고 수리조합이 생겼어. 그때 번수 제도에 자연히 기우제가 편입된 거야. 그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 말이야."
"그렇군요."
"다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단 말이지. 아니, 방금 한 설명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야. 마을의 발전과 신사의 분사로 현재의 조직체계가 생겨났다는 건 틀림없겠지."
"그렇지만 그런 자연발생적인 요인 외에 더 강력한 원인이 있다는 거죠?"
겐야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그게 뭐냐 하면, 압도적인 공포란 말이지."

"네?"
"미즈치 님에 대한 강렬한 두려움이야."

- "음... 신사 神事란 아닌 게 아니라 원래 무서운 일이긴 하죠. 신을 모시는 의례에 소홀함이 있었다간 엄청난 노여움을 살 위험이 늘 따르는 법이니까요. 불교의 불사 佛事에선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에요. 그렇지만 구로 선배가 말하는 그런 압도적인 공포라든지 강렬한 두려움을 느끼는 의식이 요새 일본에 얼마나 있을지 생각하면..."

"거짓말 같지? 그렇지만 하미 땅엔 존재한다고. 미즈치 님의 신기 神器라 불리는 칠종 보물이 그 상징일지 몰라."
"삼종신기도 아니고 그 갑절도 더 되는 칠종인가요."
"미즈치 신의 뿔, 수염, 송곳니, 비늘, 뼈, 꼬리, 벼락인데, 의식을 거행할 신사에서 모시거든. 다음번 의식이 결정되면 그걸 담당할 신사로 넘겨주고. 그렇게 네 신사를 순서대로 도는 거야."


- "본 사람 말로는 상아 같더라고 하던데..."
"그렇지만 뼈라니... 미즈치 님은 죽은 거예요?"
"용의 뼈란 뜻이겠지."
"게다가 벼락은 물건이 아니잖아요."
"그러게. 보아하니 벼락은 철제 같더군."
아부쿠마가와와 시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겐야만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미즈치 님에 대한 압도적인 공포라는 게 대체 뭡니까? 실제로 사람이 죽은 사례가 있어서 그런 건가요?"
"그에 관해 뭐라 말할 수 없이 불가해하고 기묘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해줄 테니 들어보라고."

- "미즈치 님과 관련된 의식은 두 종류가 있어. 미쓰 천의 증수를 진정시키는 감의 減儀, 반대로 갈수를 해소하기 위한 증의 增儀. 감의는 진신호도, 류쇼 폭포도 거칠어져 있는 상태니까 의식을 올리기가 쉽지 않아. 호수 동쪽 기슭에 설치된 무대에서 '예녀(刈女, 가리온나)'라고 불리는 무녀가 춤추는 동안, 그 옆 나루에서 '신남(神男, 가미오토코)'이라는 신관이 집배처럼 생긴 특별한 배를 타고 폭포로 다가가 신찬 神饌과 공물이 든 나무통을 물에 던지면서 축사를 읊거든."

 

- "신남도, 예녀도 원래는 '가남(假男, 가리오토코)'에 '가녀(假女, 가리온나)'였던 모양이야. 전자는 음이, 후자는 한자가 변한 거지."
"''는 신관도, 무녀도 제의에선 일시적인 대역에 불과하다는 의미일까요."
"아마 그렇겠지. 어디까지나 주체는 미즈치 님이라는 뜻 아니겠냐."

도조 겐의 물음에 아부쿠마가와는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의식을 집전하는 신관까지 '대역'이라고 하는 건..."

"그러니까 신관에 어울리게 '신남'이란 명칭으로 바꿨겠지. 그 김에 벼농사에서 연상해 예녀로 바꾸고."

- "신찬은 뭡니까?"
"호박이나 무처럼 밭에서 수확한 작물에 멧돼지의 간, 전복, 미역 등 산과 바다의 산물을 더한, 별로 진기할 것도 없는 내용이야. 거기에 커다란 조롱박이 포함되는 게 유일한 특징일지 모르지."
"왜 그런 게..."
"조롱박이란 게, 이게 꽤 재미있거든. 쑥쑥 잘 자라는 성질 때문에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로 여겨졌어. 왜 있잖아, 서양의 <잭과 콩나무>처럼."
의아스레 묻는 시노에게 겐야가 대답했다.
"아, 그렇군요."
"하늘을 향해 뻗는다는 건 하늘로 올라가 비를 내리는 용신하고도 통해. 더욱이 조롱박은 불로불사로 대표되는 영원성, 이승과 저승의 경계도 상징한단 말이지."

- "감의에 따르는 위험이란 건 세찬 비바람이나 거친 물, 번쩍이는 번개 같은, 그야말로 자연이 주는 물리적인 공포야. 물론 그걸 미즈치 님이 진노한 걸로 보는 셈이긴 하지만, 신남이랑 사공이 주의해야 하는 건 배가 뒤집혀 물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거거든. 과거에 물에 빠져 못 돌아온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대부분은 자기 힘으로 배에 기어올라 목숨을 건졌어. 즉 자연의 맹위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면 이럭저럭 무사히 끝낼 수 있다는 이야기야."
아부쿠마가와는 여기서 의미심장하게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겐야와 시노에게 시선을 주었다.
"역설적인 말이 되지만, 감의 때 미즈치 님은 이미 노여워하고 있으니까 어지간히 실례되는 일만 안 하면 그 이상의 노여움을 사진 않아. 그렇지만 증의 때 미즈치 님은 말하자면 평상시 같은 상태로 호수 밑바닥에 계신단 말이지. 거기에 인간이 침입하는 거야. 즉 평소 상태의 신을 쓸데없이 집적이는 셈이라고. 인간계는 비가 안 와서 큰 일이지만 신한테는 그런 거 관계없지. 어때, 이거 잘 생각해 보면 무섭잖아?" 

 

- 한편 겐야는 짚이는 데가 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흉어 때 어부 우두머리가 평소엔 여인금제 女人禁制인 배에 자기 부인을 태워 배의 수호신께 부인의 음부를 보여주고 풍어를 기원하는 의식이 있죠. 그건 여성인 배의 수호신 앞에 동성의 음부를 드러내는 실례를 일부러 범해서 노여움을 사는 게 목적입니다. 요는 수호신의 분노에 힘입어 풍어를 유인하려는 겁니다. 그와 비슷한 행위를 기우제 ... "

 

- "그럼 더 그랬겠죠. 미쿠마리 신사는 네 신사 중 가장 역사가 짧았습니다. 신관이 미숙했던 탓에 하미 사람들한테 대단히 중요한 의식을 망치고 말았다, 그 대가를 대체 어떻게 치를 것인가,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당시 마을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말도 안 돼요! 마을을 위해 목숨을 잃은 신관은 생각도 않고 자기들 걱정만 하다니요! 그런 건 너무 가혹한 거 아닌가요?"
시노의 노여움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공격 대상이 겐야였던 탓에 아부쿠마가와는 히죽거리며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한테도 사활이 걸린 문제니까..."
"신관은 진짜 죽었다고요."
"응, 그렇다고 다쓰오 씨의 죽음을 경시해도 된다는 건 아니지. 그렇지만 그 지역에 밀착된 종교가란 존재는 가문이나 가족, 개인 같은 단위를 넘어서 완전히 지역의 일부로 화하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 말하자면 자연의 일부인 셈이야. 바로 그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가를 존경하는 동시에 두려워해. 그리고 그렇기에 대단히 인간적인 실책을 저지르면 배신당하는 것 같은 거야. 종교가로서 권위가 실추되는 정도가 아닌 문제가 갑자기 출현하는 거지. 이런 경향은 토착 종교일수록...." 
그러나 시노는 겐야의 설명을 듣고 있지 않았다.
"도조 선생님이 그렇게 차가운 분이신 줄 몰랐어요."
"저기, 소후에 군...?"
 
- "외눈 광은 다르지. 오히려 은폐되어 있거든. 결코 공개되지 않는 존재야. 그런 사실을 고려할 때, 이건 어디까지나 대담한 가설이지만, 외눈 광 자체가 소위 주술적 장치로 기능하며 그게 미즈시 신사가 거행하는 의식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해석하는 게 가능한 거야."
"뭐, 대충 그런 이야기지."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아부쿠마가와가 진지하게 대답하는 데 비해 시노는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어. 현재로선 이 이상의 해석은 무리니까."

 

- "그러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단계에선..."
"네. 그건 알겠어요. 그렇지만 선생님이라면 확신은 없어도 그 이상의 해석도 하셨을 것 같거든요."
"그게 정말이냐?"
아부쿠마가와까지 나섰다.
"아뇨, 해석 같은 건 아니고 그저...”
"뭐가 있긴 있군. 남만 떠들게 시키고 자기 생각은 꿍쳐놓겠다고?"
"아뇨, 그런 건 절대..."
"그럼 빨리 불어." 


- "미즈치 님은 용신에 가까운 존재라고 하지만 정체가 정확히 밝혀져 있진 않죠."
"그래."
"용신의 경우 신인 동시에 용이란 생물이기도 합니다. 물론 용은 가공의 동물이지만 이런 예는 마귀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거든요."
"개 犬 신이나 구다 管 같은 건 결국 그렇지."
"어쩌면 미즈치 님도 그런 생물로서의 모습이 있는 게 아닐까요. 외눈 광 안에서 그런 신에 가까운 미즈치란 생물을 기르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
시노는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잃은 듯했으나, 아부쿠마가와는 어처구니가 없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 "그때는 분명히 자기를 구멍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손으로 보였던 모양이야. 하지만 배 위로 올라와 의식을 마치고 신사로 돌아와서 아들들을 만날 즈음이 되니 확신이 없어졌던 거지. 당시는 세이지의 형들이 아직 살아 있었거든."
"그럼 스이바 신사 쪽은요?"
겐야가 물었다. 아부쿠마가와는 겐야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또다시 시노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스이바 신사의 증의 때는 통들이 이상 없이 가라앉은 모양이야. 다만 신관이 바닥의 구멍으로 마지막 통을 빠뜨리고 물속을 살펴보니, 흔들흔들하는 희끄무레한 뭔가가 보이더라는 거야." 
"꼭 신관이 잠수하길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지."
"흰 손이 아니라 희끄무레한 뭔가란 말이죠."
겐야는 자신에게 매달리려는 시노를 피하며 확인했다.
"그래. 스이바 신사 신관의 인상으론 사람처럼 보이더라고..."
"사람..."
"그것도 벌거벗은."
"그럼 미쿠마리 신사의 선대 신관이... 다쓰오 씨가 동료를 부른 걸까요?"
"꺅! 선생님..."
점점 더 매달려드는 시노를 피해 거의 격투를 벌이다시피 하는 겐야를 바라보며, 아부쿠마가와는 재미있어하는 것도 같고 샘내는 것도 같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을 노인들은 팽것이 나왔다고 수군거렸어."

- "잠깐! 어원은 알 수 없지만 물속에 가라앉은 시체는 팽창하잖냐. 그러니 팽창한 것을 의미한다는 설이 있어. 죽고 나서 성불 못 하고 방황하는 사람을 '방것'으로 부르는 것하고 마찬가지야."
겐야가 표변하기 전에 아부쿠마가와가 소리 질러 재빨리 가로막고 빠른 말투로 설명했다. 그 덕인지 겐야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말했다.

- "세이지도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겁에 질린 정도가 보통이 아닌 거야. 왜 그러느냐고 물어도 '무섭다, 정말 무섭다'라고만 하고." 
"류이치 씨는 분명 그렇게까지 소심한 성격이 아니었을 테죠. 세이지 씨도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기이할 정도로 겁에 질려있었어요. 그렇기에 영 석연치 않았던 겁니다."
"세이지가 묘하다고 느낀 건 일종의 예감이었는지 몰라."


- "'龍'이나 '辰'(각각 [류] 혹은 [다쓰]) 자를 쓰거나 '류'(일본어로 '용'이 [류])를 넣은 이름이 많은 걸 보면, 역시 다들 미즈치 님의 정체는 용신 님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요." 
"그러게. 게다가 미즈시 신사하고 미즈치 신사에선 '龍'자를 쓰는데, 스이바 신사의 류코는 '龍虎'가 아니라 '流'를 써서 '流虎'고, 미쿠마리 신사의 '다쓰조 辰卅'도 '辰' 자를 썼거든. 이름만 봐도 신사의 세력관계를 알 수 있잖아?"
"류코 씨의 경우 정말 용과 호랑이라면 이름으로는 최강이죠."

"아무리 그래도 그건 곤란하니까 '流' 자를 썼겠지."

 

- "그렇게 생각하면 미즈치 신사의 넷째 아들 세이지 씨는 반대로 특이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큰아들 다쓰이치로 밑으로 둘째 다쓰지로, 셋째 다쓰사부로가 있었으니, 넷째 아들 정도는 세상을 보고 다니라고 다쓰키치로가 '세이지 世路'라고 이름을 지었다는데..."
"설마..."
"큰아들하고 둘째 아들은 전사, 셋째는 병으로 죽었어. 지금은 세이지가 신관 대리를 맡고 있다더라."
"비뚤게 보면 '龍'이란 이름이 너무 센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요. 하미란 지역에 관해 알면 알수록."
"그렇지, 도대체가 이름이란 건..."
"두 분, 언제까지 이름 이야기를 하고 계실 거죠?"
시노는 기다리다 지쳤다기보다 어처구니가 없는 듯했다.

- 구키 쇼이치는 귀국선이 마이즈루 항에 도착하기 며칠 전 배 위에서 다섯 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 때문에 나서 자란 고향 만주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뇌리에 남아 있는 세 가지 사건은 하나같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모두 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집 안에서 벌어진 것이라 온갖 소리가 곁들여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쇼이치가 방 안에서 노는데 퉁탕퉁탕 바쁘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리고 장지가 드르륵 열리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누가 자기를 확 떠밀어 뒤로 쓰러졌다. 딱히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꼼짝 않고 누워 있으려니, 이윽고 위이잉 하는 불길한 폭음이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졌다. 순간적으로 얼굴을 내밀고 천장을 올려본 그때, 집 상공에서 타타타타 소리가 잇따라 울렸다. 동시에 눈 깜짝할 사이에 천장널에 구멍이 뚫리는 모습을 그는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자신을 지켜준다는 안심감 때문이었을까. 
아니, 그것만은 아니었다. 구멍이 뚫릴 때마다 어둑어둑한 실내에 비쳐드는 햇빛이 뭐라 말할 수 없이 환상적이기 때문이었다. 가느다란 광선 속에 반짝이는 먼지가 무척 탐미적이었다. 그때 그는 난생처음으로 이 세상 것이 아닌 별세계의 광경을 본 기분이었다. 현실적인 공포보다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 두 번째 기억도 같은 방에서 시작됐다. 쇼이치가 그림책을 보는데 뒤에서 삐걱삐걱 이상한 소리가 나서 돌아봤다가 놀랐다. 방 중앙에 어머니가 사다리를 세워놓고 올라가 천장널을 떼고 있었다. 그러더니 두 누나를 부르고 쇼이치에게는 사다리를 옆방에 감추어놓으라고 이른 뒤 셋이 천장 위로 올라가 버렸다. 
당시 그에게 사다리는 지나치게 무거웠지만, 그래도 애써 옆방으로 옮겨 그럭저럭 커튼 뒤에 숨겼다. 작업을 마칠 때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이 기묘한 숨바꼭질에서 술래는 대체 누굴까?
자신은 어머니와 누나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니 술래가 아니다. 쇼이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지나자 군화 소리임이 명백한 복수의 묵직한 발소리가 다가왔다. 갑자기 주택가가 소란스러워지고 여기저기에서 젊은 여자의 비명이 잇따라 들려왔다.
쇼이치의 집 앞도 곧 시끌시끌해졌다. 현관문이 부서지고 두 병사가 구둣발로 올라왔다. 소련군이었다.
"마담, 다바이!"
소련군 병사들은 몇 번씩 같은 말을 소리쳤다. 쇼이치는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 '여자를 내놔라'라는 뜻이었음을 알고 비로소 어머니와 누나들이 숨은 이유를 깨달았다. 진짜 의미를 이해한 것은 더 큰 다음이었지만.

- 그 후로 그는 종종 악몽에 시달렸다. 밤중에 퍼뜩 잠이 깨면 머리 위의 천장널이 조금씩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장 위의 어둠 속에서 여자의 잘린 머리가 나타나 그의 눈앞까지 내려왔다. 
얼굴은 어머니 것이었지만 진짜 어머니가 아니라 괴물이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그의 눈앞까지 단숨에 늘어져 내려왔다. 쑤우욱 뻗어왔다. 그 순간의 끔찍함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고 심장이 쭈그러들었다. 온몸의 모공에서 땀이 왈칵 쏟아졌다. 학질에 걸린 것처럼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여자의 잘린 머리와 대면하자마자 악몽에서 깼다. 그러나 언젠가 그다음을 체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꿈에서 깨기 직전 늘 괴물이 입을 열기 때문이었다. 뭐라 말하기 때문이었다. 쇼이치는 그 무시무시한 잘린 머리의 말을 조만간 듣게 될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만주 집 천장 위에서 얼굴을 내민 것은 물론 진짜 어머니였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어머니는 그를 끌어안고 "너라면 해낼 줄 알았어"라고 말하더니 한동안 그를 놓으려 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어머니의 생각을 이해했다. 그 절박한 상황에서 어머니는 생각했던 것이다. 소련군 병사도 어린 남자애에게는 볼일이 없을 것이다. 절대 안전하다는 보증은 없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 걷지 않아도 되니 기뻤다. 차 안은 콩나물시루라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후텁지근했고 갓난아기들이 쉴 새 없이 울어대는 통에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특히 문이며 연결기 부근은 늘 분뇨의 악취가 떠돌아 숨쉬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좌우지간 집을 떠난 뒤 지나칠 정도로 강렬한 체험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한 발짝 한 발짝 고국을 향해 나아가던 그들은 그나마 행복했는지 모른다. 귀국은 고사하고, 개척촌을 떠나기 전 중국인의 습격을 받았으나 남자들 대다수가 소집되고 없었던 탓에 자위가 여의치 않자, 분촌이민단장의 결단으로 약 오백 명에 달하는 마을 사람들이 다이너마이트로 집단자결을 도모한 예도 있었다. 당초 정예를 자랑하던 간토 군도 그 무렵에는 은밀히 남방으로 옮겨가, 개척민의 소집은 완전히 그들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한 것이었다. 많은 남자들이 자신의 가족조차 지키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죽어갔다. 
또 수용소에 도착하기 전에 많은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쇠약해져 목숨을 잃었다. 어머니들도 마찬가지였다. 죽어 누워 있는 어머니의 가슴에, 등에 매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내일은 내 신세일지 모른다.
그런 공포가 늘 따라다녔다. 쇼이치는 어머니와 누나들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늘 겁에 질려 있었다. 겨우 철이 들었을 무렵 눈앞에 나타난 것이 폭력과 공포,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가 미치지 않은 것은 순전히 누나들의 헌신 덕이었다.

- "우리가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라."
한 번은 사요코가 별안간 그렇게 중얼거렸다. 쇼이치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음... 뭐라고 하면 좋을까. 당시 어머니는 꼭 달관한 사람 같았어. 소련군이 쳐들어와서 천장 위에 숨었을 때도 그랬어. 나랑 쓰루언니는 이제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이상하게 냉정했거든. 마치 꼭 무사할 거란 자신이 있는 것처럼."
그러더니 사요코는 그녀답지 않게 우물쭈물했다.
"사실은 나, 만주 집을 떠나서 일본에 도착할 때까지 어머니가... 묘하게 무서웠어."

- 그러고 보면 어머니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쇼이치는 만주 집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탓에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어머니와 비교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전화 戰禍가 남은 이국땅에서 어린 세 자식을 데리고 도피했던 것을 생각하면 다소의 이상한 언동은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사요코도 인정하다시피 어머니가 구체적으로 문제가 될 행동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 "그렇지만 어머니, 어쩐지 이상했어."
이상하다는 의미로는 사실 쇼이치도 마음에 걸리는 기억이 있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무사를 빌면서도 한편으로는 만주를 떠나기를 주저한다는 느낌이 문득 들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그곳에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왜?
어쨌든 구키 일가 네 사람이 다 같이 귀국선에 탈 수 있었던 게 기적이나 다름없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종전 뒤 이 년이 지났을 때였다.

- 귀국용 화물선은 온갖 공간이 작게 나뉘어 밑바닥까지 사람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일본에 겨우 돌아갈 수 있다는 흥분에 선내의 분위기는 기이할 정도로 고조되어 있었다. 그러나 배가 출항해 오랜 항해가 시작되자 금세 어둡게 침체된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선내의 열악한 환경과 빈약한 식사, 그리고 고국에 관한 온갖 소문이 사람들에게서 점차 희망을 앗아간 것이다.
"일본에 신형 폭탄이 떨어져서 싹 사라져 버린 모양이야."
가장 충격적이었던 게 원폭투하였다. 다만 정보가 대단히 불분명해서, 지방 도시 한두 개가 없어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국토의 태반이 초토화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구나 고국의 안부를 염려했다. 

- 쇼이치의 가족에게 할당된 자리는 맨 아래 선창의 한 구역이었다. 그런 곳이라도 자신들 가족의 공간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그에게는 만주 집보다 그 먼지투성이 구획이 진짜 집처럼 느껴졌다. 
옆에 앉은 사요라는 가족과는 금세 친해졌다. 어머니는 예전에 알던 사람과 성이 같다고 기뻐했고, 또 젊은 사요 부인이 홀로 사내애 넷을 데리고 있었던 것에 친근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것저것 돌봐주고 배고픔을 참아가면서까지 얼마 안 되는 식량 중 일부를 네 아이들에게 나눠줄 정도였다. 

- 선내에서도 죽는 사람이 잇따라 나왔다. 다수는 귀국선에 타기까지 겪은, 그리고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너무나도 가혹한 환경 탓에 병으로 죽은 것이었다. 기껏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배에 탔건만 죽고 만 사람들은 얼마나 원통했을까. 그나마 구원이라면 선상에서 죽은 사람은 모두 수장된 터라 사후에 옷가지를 빼앗길 염려는 없었다는 걸까.

- 그러나 사인은 병만이 아니었다. 그 밖에도 끔찍한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쇼이치는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날 밤, 그는 사요코에게 같이 가달라고 해서 갑판 위에 마련된 변소로 갔다. 잠에 취한 채 흔들리는 변기를 향해 소변을 보고 나왔을 때 별안간 누나가 끌어안았다. 
"앗, 보면 안 돼!"
반사적으로 몸을 비튼 쇼이치는 누나가 보여주지 않으려 한 어떤 것을 순간 보고 말았다.
배보다도 높은 시커먼 산이었다. 바다 위인데도 크고 시커먼 산이 바다에서 우뚝 솟아 있었다. 그 검은 산을 향해 여자가 두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거대한 검은 산을 맞아들이려는 것 같기도,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기묘한 광경이었다. 게다가 그 산이...
"보지 마!"
사요코는 소곤거리면서도 매서운 목소리로 그를 야단치더니 "가자, 얼른" 하며 그의 손을 꽉 잡고 서둘러 갑판을 벗어났다.

- 그들의 자리로 돌아온 사요코는 흥분한 표정으로 어머니에게 뭐라 귓속말을 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어머니가 이윽고 누나에게 귓속말로 대답하자, 사요코가 흠칫 놀라 긴장했다. 그러더니 슬픈 표정을 지었다.

쇼이치는 자신이 본 게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날 밤은 뜬눈으로 새우고 말았다.

 

- 이튿날 이른 오후, 사요코는 아무도 없는 갑판 구석으로 그를 데리고 가더니 전날 밤 이야기를 꺼냈다. 
"네가 어디까지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는 사요 아줌마였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아기를 바다에 던진 거야."
"뭐?"
"어머니가 그랬어. 아줌마는 영양부족 때문에 젖이 안 나오게 됐다고."
그러고 보니 제일 어린 갓난아기는 거의 울지 않았다. 그 말은 울 기운도 없을 만큼 쇠약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어머니 젖을 충분히 먹지 못했던 탓에.
"일본에 신형 폭탄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전에 퍼졌잖아? 아줌마는 큰 애들한테만이라도 조국을 보여주고 싶다고 어머니한테 말했나 봐."
"그럼 아기는..."
사요코는 고개를 살짝 흔들더니 수용소며 귀국선에 다다르기 전에 자식을 버린 부모들이 많다는 사실을 가르 쳐주었다.

- 가슴속에 순식간에 시커멓고 질척한 뭔가가 가득 차올랐다. 많은 부모들은 자신이 살려고 자식을 버린 게 아니리라. 이대로 데려간들 어차피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 하는 수 없이 두고 오지 않았을까. 그때의 부모 심정과, 어쨌거나 버림받은 셈이 된 아이의 심정을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어머니와 누나들과 같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새삼 곱씹었다.

- "사요 아줌마한테도, 애들한테도 잘해줘야 해."
사요코가 타이르듯 말하고 돌아가려고 하기에 쇼이치는 여자보다 마음에 걸렸던 존재에 관해 물었다.
"그 이상한 검은 산은 뭐였어?"

- 직원이 정리해 귀국자들을 지원국으로 인솔했다. 아주 천천히 걷는 것은 귀국한 사람도, 마중 나온 사람도 눈을 등잔만 하게 뜨고 육친을 찾기 때문이리라. 이윽고 재회를 기뻐하며 포옹하는 부모자식이며 형제자매, 부부의 모습이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큰 종이에 이름을 써서 명함처럼 든 여자들도 여럿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름 옆에 '만주 XX부대' 'XX소대' 또는 '쇼와 몇 년생'이며 '몇 년, 어디에서 출정' 같은 정보가 적혀 있었다. 이른바 안벽 岸壁의 어머니, 안벽의 아내가 소집되어 만주로 간 아들이며 남편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 

- 지원국까지 몇십 미터 남겨놓았을 때였다. 그곳으로 갔다가 그 뒤 어떻게 될지 물론 그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 무렵에야 비로소 어머니, 누나들과 함께 일본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살아있다는 기쁨을 사무치게 느끼고 있었다.
그때 묘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위는 가족을 찾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혼잡했고 누구를 부르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렸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그 목소리가 특히 귀에 들어온 것은, 부르는 방식이 명백히 기묘했기 때문이었다.
사기리 님.

- 쇼이치가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기 전에 어머니가 별안간 멈춰 섰다. 마치 어두운 밤 홀로 걷다가 느닷없이 뒤에서 이름을 불린 것처럼 몸을 흠칫 떨면서.
어머니의 이름이 실은 '사기리'임을 그가 안 것은 그 직후였다.

- "돌아오신다면 여기로 오실 게 틀림없다 싶어서 말이죠."

"그건..."
"네. 류지 님의 의향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노인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어머니를 맞이하는 기쁨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지시한 게 류지라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불만인 듯했다. 

- "앞으로 몸을 의탁하실 곳은 정하셨습니까?"
"네..."
대답하기는 했지만 어머니는 명백히 주저하는 어조였다.
"죄송하지만 어디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시댁에..."
그러자 시게조의 표정이 별안간 험악해졌다.
"그건 안 됩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미즈시 가로 돌아가시는 편이 낫죠. 어쨌거나 사기리 님께서 자라나신 본가 아닙니까.”
어머니는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잠자코 생각하는 듯했다. 시게조도 그 이상 말하지 않고 어머니가 결단을 내리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자 사요코가 노인의 웃옷 소매를 잡아끌었다.
시게조는 씩 웃고는 세 아이를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 이름과 나이를 물었다. 십중팔구 어머니에게 방해되지 않게 마음을 써준 것이리라.

 

- 사요코가 대표로 세 남매를 간단히 소개했다. 시게조는 쓰루코의 상태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린 듯했다. 이때 노인의 반응이 기묘하게도 어머니와 똑같았다. 측은한 눈초리로 큰누나를 보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납득하는 느낌이었다.
"쫓아왔나..."
게다가 그런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사요코는 시게조의 불가해한 언동보다는 외가가 궁금한지 어디냐고 물었다.
"나라 현 다우 군 산속에 하미라는 곳이 있단다. 그곳에 네 마을이 있는데 맨 처음 개척된 사요 촌이 너희 어머니 고향이지."

- "친가는 어디인데요?"
사요코의 질문에 시게조의 얼굴이 흐려졌다.
"교토야. 그렇지만 그곳에 가는 게..."
과연 행복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노인은 말하고 싶은 듯했다. 어머니를 흘깃 보는 시선이 매우 걱정스러워 보였다.
"우리도 아버지네 집엔 가기 싫어요."
사요코가 똑똑히 말하자 노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음, 뭐, 본인이 의절당한 집에..."
말하다 말고 허둥지둥 입을 다물었다.
"어? 아버지, 집에서 의절당했어요?"
"아, 아니..."
"그래서 사요 촌 쪽이 그나마 낫다는 거예요?"

 

- 이곳 산과 숲, 강에는 평범한 자연으로 전락하기 이전의 뭔가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이 침범해서는 안 되는 원초의, 본래의 위협이 깃든 참된 어떤 것이. 그는 그 비밀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셈이었는데,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요코에게 털어놓으려도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것이니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대자연이다. 처음부터 인간이 맞설 수 있을 리 없다. 

- "여기가 하미에서도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아오타 촌이란다."
시게조는 오는 길에 어머니뿐 아니라 세 아이들도 다정하게 보살펴주었다. 그 덕분에 쇼이치도 조금씩 노인에게 익숙해졌다. 사요코는 마이즈루 항에서 만났을 때부터 노인과 친해져서 지금은 둘이 아오타 촌을 이곳저곳 가리키며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쓰루코도 자연스럽게 그의 존재를 받아들인 듯 보였다. 

- 마차는 굽이치며 흐르는 큰 강의 북쪽 길을 따라 나아갔다. 강을 따라 뻗어 있다고 단순히 '강길'이라 불리는 흙길이었다.
"이건 미쓰 천이라고, 하미의 벼에 은혜로운 물을 주는 고마운 강이지."
그러고 보니 아오타 촌뿐 아니라 가는 길에 마주치는 마을마다 너른 논이 펼쳐져 있었다. 강 북쪽이 전부 논이었다. 면적으로 보건대벼 수확량이 꽤 될 성싶었다.
"미쓰 천은 마을에 은혜뿐 아니라 화도 가져다준다만."
시게조는 그렇게 말을 잇더니 강이 범람해 마을이 입는 수해의 공포를 이야기했다.  

- 그러고는 배례전에 들어가 다 같이 참배했다.
그동안 배례전 안쪽에서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신비한 음색에 귀를 기울이는 사이에 마음이 정화되는 양 기분이 좋아져 잠에 빠져들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감싸고 있던 음침한 기운이 슥 걷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 순간,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상쾌한 기분이 들었을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목 뒤로 스멀스멀 들어오려 한다는 불쾌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너무나도 생생한 감촉에 나지막이 "힉" 하고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목덜미를 있는 힘껏 털었다.
"쇼이치?"
사요코는 놀라면서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그의 손을 잡고 재빨리 배례전 밖으로 데리고 나와서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너도 엄마처럼 여기 신하고 안 맞는지 모르겠구나."

"무슨 뜻이에요?"
쇼이치보다도 먼저 사요코가 물었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방금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해야 해. 특히 이제부터 만날 사람... 너희 할아버지께는 절대로 말하면 안 돼요. 알겠니?”
어조는 차분했지만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박력이 느껴졌다. 두 아이 모두 허둥지둥 약속했다.

- 바깥 도리이 밖에서 기다리던 시게조는 그들이 돌아오자 미즈시가 본채로 안내했다. 왜 그런지 정면 현관으로 가지 않고 옆으로 난 뒷문으로 향했다. 그는 널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쪽을 향해 사람을 불렀다. 
얼마 지나자 젊은 하녀가 나왔다. 그러나 시게조를 보더니 별안간 쩔쩔매기 시작했다. 노인이 류지 님께 안내해 달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가 소란을 들었는지 나이 지긋한 하녀가 얼굴을 내비쳤다.
그런데 어머니를 보더니 몹시 허둥댔다. 다만 그래도 나이를 먹은 덕인지 바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좌하고 머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그것을 보고 젊은 하녀가 나직이 비명을 질렀다. 서둘러 자신도 정좌하고 바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절했다. 거의 엎드려 비는 듯한 모습에 쇼이치도, 사요코도 어안이 벙벙했다. 
하녀들의 그런 모습을 어머니는 아무 말도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가볍게 답례하고 나이 지긋한 하녀에게 "오랜만이에요" 하고 말을 건네는 태도는 매우 담담했다.

- 쇼이치의 가족은 꽤 오랜 시간 별채에서 기다려야 했다. 자신들의 존재를 잊어버린 게 아닐까 진심으로 걱정이 될 만큼 오래 방치되었다.
사요코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마이즈루 항에서 시게조가 그런 반응을 보였기 때문인지, 누나는 어머니에게 그때까지 사요 촌이며 미즈시 신사에 관해 구체적으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누나치고는 보기 드물게 소극적이었던 셈인데,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됐다고 판단했는지 조금씩 캐묻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대답해 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자신은 철들 무렵 이 집에 들어온 양녀라는 것. 양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못해 가출하다시피 교토의 구키 가로 시집갔다는 것. 그 뒤 쓰루코를 뺀 채 만주로 건너가 본가로 돌아온 게 오늘이 처음이라는 것. 그리고...

- "그럼 어머니는 어디서 태어났어요?"
사요코의 질문에 어머니는 한참을 꼼짝 않고 생각하더니 먼 곳을 바라보는 눈길로 "소류 향의 가가구시 촌..." 이라고만 대답했다. 게다가 금세 방금 말한 지명은 아무에게도 밝혀선 안 된다고 했다.

- 그러나 어머니는 쓸쓸하게 미소를 지을 뿐 그 이상 아무 말도 하려 하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어머니의 표정은 자신의 과거보다 자식들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귀국을 주저했던 것은, 어쩌면 결국은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하미 땅으로, 사요 촌으로, 미즈시로 돌아오게 될 운명을 어머니 나름대로 예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사요코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좌우지간 모든 악의 근원은 류지라고 단정했다. 물론 그 말이 옳기는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에게 느끼는 무서움이 본인의 성격에서 비롯되는 데 반해, 할머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였다.

- "쇼..."

어둑어둑한 본채 복도에서 별안간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돌아봐도 아무도 없다. 잘못 들었나 싶다가 복도 모퉁이에서 꼼짝 않고 자신을 엿보는 할머니를 알아차리고 등골이 오싹한다.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똑같은 일을 몇 번씩 당하는데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윽고 복도를 걸을 때면 겁에 질려 벌벌 떨게 되었다.

- 그러다 어느 날 할머니가 모습을 온전히 드러냈다. 식사도 할머니 혼자 방에서 하는 터라 그녀의 모습을 제대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이래로 그는 조심조심 할머니와 대화를 하게 되었다.
"쇼... 네가 쇼."
쇼이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없었다. '쇼냐?' 하고 묻는 것 같기도 하고 '쇼다' 하고 단정하는 것처럼도 들렸다. 게다가 할머니는 사투리 억양이 심해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 됐든 이 말에 대한 대답은 똑같았다.
"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역시 그렇구나. 쇼... '소나무'에 하나 둘의 '하나'라고 써서 쇼이치 松..."

"네?"

"그러니까 쇼..."

"아, 아니에요. 제 이름은 '바르다'에 '하나'라고 써서 쇼이치 正一예요."
"바르다? 아니다, 넌 '소나무'에 '하나'인 쇼이치야."
할머니와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엇나갔다.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쇼이치라는 애가 있나 싶어 시게조에게 물어봤지만, 그가 알기로 하미에는 그런 아이가 없다고 했다.

 

- "쇼, 넌 세 눈."
"눈은 두 개뿐이에요."
"후후... 최소한 외눈은 아니야."
수수께끼 같았지만 할머니가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 "쇼, 밥을 더 든든히 먹어야지. 그렇게 말라선 미즈치 님을 모시는 무당이 될 수 없어."
어쩌다 할머니답게 걱정하는 말을 하는 것 같다가도 결국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진지한 표정으로 했다. 전에는 이쓰코 자신이 무녀였던 모양인데, 정말로 후보를 생각한다면 역시 쓰루코나 사요코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쇼이치는 무당이 될 마음이 없는 데다가 그 이전에 할아버지가 인정할 리 없었다.

 

- 할머니 이야기를 해도 사요코는 머리 옆에 검지를 빙글빙글 돌리며 "여기 문제니까 신경 쓸 거 없어"라고만 했다.
그러나 쇼이치가 느끼기에, 할머니는 사람들 말처럼 노망 난 게 아니라 말하자면 몸 절반이 별세계에 있어서 가끔 인간이 아닌 쪽 몸 절반이 표면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신과 함께 있을 때 그게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반쯤은 체념하고 ...

- "내일 의식을 앞둔 중대한 시기에 마중까지 나와주시고 이것저것 폐를 끼치게 됐습니다."
기고만장한 시노가 폭주하기 시작했으므로 겐야는 황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아이고, 아닙니다. 원래라면 미즈시 신사의 신관이 직접 나왔어야 하는데, 내일 준비도 있겠다, 실례를 무릅쓰고 제가 대리로..."
여기에 이르러 세이지는 정작 중요한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그런 그의 대각선 뒤로 서른 전후쯤 될 듯한 남자가 빈정거리는 옷음을 띠고 서 있었다. 의식 준비가 없어도 미즈시 신사의 신관이 마중 나올 리가 없다. 남자의 눈은 그렇게 말하는 듯 보였다.
세이지와 분위기는 전혀 딴판이었지만 제법 미남이었다. 그늘이 느껴지는 미소가 마치 개성파 영화배우 같았다. 다만 키가 그리 크지 않아 외모에서 다소 손해를 보는지도 모른다. 키가 큰 세이지가 옆에 있는 탓에 작은 키가 더 눈에 띄었다. 
겐야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세이지가 별안간 뒤돌아보며 말했다.

"이 친구는 사호촌 스이바 신사의 스이바 류마입니다."

- 미즈치 신사와 이바 신사의 현 신관이 다쓰키치로와 류코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하미의 수리조합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신사의 후계자들을 보내 겐야 일행을 마중하게 한 셈이다.
물론 겐야는 그런 대우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다만 상대방의 이런 대응은 자신들이 정말 환영받고 있는지, 실은 불청객이 아닌지를 파악하는 데 지침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판단은 영 쉽지 않았다.

- "그렇지만 명색이 편집자라면서 다른 특공대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몰라요."
"후... 딱 부러지는 성격이군."
울컥할까 했는데 류마는 오히려 재미있어하는 듯했다.
"충돌하는 건 가미카제랑 똑같지만 '쓰루기 剣'란 전투기가 있었어. 이건 이륙하는 동시에 바퀴가 떨어지거든. 즉 두 번 다시 착륙할 수 없으니 적을 향해 뛰어들 수밖에 없는 자살특공 전용의 기체인 거지. 그리고 '오카 桜花'란 것도 있었는데, 이건 폭탄 속에 사람이 타는 거야. 그래서 전투기 뱃속에 싣고 가서 적함에 접근해서 투하해." 
"어째서 폭탄에 사람이 타죠?"
"그냥 폭탄을 떨어뜨리면 적을 못 맞힐 수도 있어. 하지만 폭탄을 인간이 조종할 수 있다면 어떻겠어?"
"아..."
"이거의 해군판이 가이텐 回天이거든. 쉽게 말하면 인간어뢰인 거지."

- 할 말을 잃은 시노에게 류마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어딘지 모르게 태연했던 어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그렇지만 가미카제 특공대뿐 아니라 쓰루기도, 오카도, 가이텐도 그나마 폼은 나잖아."
"폼이 나다니요, 그런 건..."
"후쿠류 伏龍 특별 공격대를 알아?"
반론하려는 시노를 무시하고 류마가 말했다.

"아뇨."
시노가 고개를 흔들며 겐야를 얼핏 보았다.
"잠수복과 압축 공기통을 장비한 수중 특공대죠."
겐야는 말했다.
"과연 선생님이라 불릴 만하군."
"류마 씨는 그 후보생이셨던 겁니까?"
"..."

류마는 신음인지 한숨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소리로 대꾸했다.

 

- "편집자 분은 여자라 모르는 것 같으니 설명하자면, 그쪽 선생 말처럼 잠수복을 입고 압축 공기통을 진 대원 십여 명이 기뢰를 붙인 길이 2미터쯤 되는 막대를 들고 먼저 물속에서 대기해. 그러니 키 작은 나도 후보생이 될 수 있었던 거지. 참고로 잠수 장비만 해도 부피가 큰데 몸하고 다리에 추를 달아. 그러니 연습할 때마다 정말로 두 번 다시 못 떠오를 것 같은 우울한 기분이 들곤 했지. 실전에선 그런 모습으로 적 함선이 머리 위로 올 때까지 꼼짝 않고 기다렸다가 막대로 배 밑바닥을 찔러서 기뢰를 폭발시켜 적을 격침시키는 거야. 그게 후쿠류 특별 공격대의 임무였어."
"육군에 지뢰를 안은 채 적 전차의 무한궤도에 뛰어들게 하는 니쿠하쿠 肉薄 공격대란 특공대가 있었는데..."
겐야가 다른 예를 들어 시노에게 설명하려는데, 류마가 또렷한 목소리로 부정했다.
"아니, 다른 특공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생각은 없어. 다들 무의미하게 죽어야 했다는 점에선 다를 바가 없지. 그렇지만 후쿠류만큼 초라하고 괴롭고 비참한 자살은 없다고. 자기 몸에 추를 단 상태로 적 양륙함이 머리 위로 오길 꼼짝 않고 물속에서 기다리는 거라고. 다른 특공대처럼 스스로 뛰어드는 것도 아니고, 다른 대원들이 ... "

- "이게 참... 과연 선생님이 만족하실 이야기인지 다소 불안하긴 합니다만..."
보아하니 그는 아직 겐야를 경계하는 듯했다. '진흙녀'라고 한 마디 했을 뿐인데 그런 소동이 벌어졌으니 주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 점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자, 부탁드립니다.”
물론 겐야는 어떻게든 이야기를 들을 작정이었다.

- "음, 이런 이야기입니다. 옛날 옛적 사요 촌 어느 집에 타지에서 '쓰루 鶴'란 이름의 여자가 시집왔는데, 그 뒤 바로 모심는 시기가 됐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내로 모심기를 끝내라' 하고 며느리한테 터무니없는 일을 시켰다. 그것도 며느리 혼자 하라고 했다. 며느리는 하는 수 없이 모심기를 시작했지만 넓은 논인데 혼자서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시어머니가 시킨 일이라고 며느리는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다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주위가 점점 어두워지는데, 이대로 가다간 그날 중으로 못 끝낼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모를 심은 며느리가 간신히 일을 마치고 허리를 편 순간, 해가 뚝 떨어졌다. 애쓰는 며느리를 보고 해님이 기다려준 것이었다. 아아, 드디어 끝났다... 그렇게 생각한 며느리가 미쓰 천에서 팔다리를 씻으려고 논에서 올라왔다가 픽 쓰러져 죽었다. 큰 소나무가 있던 그 주변이죠.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찾으러 온 남편은 소나무 밑에 죽어 쓰러져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발작적으로 목을 매려 했다. 여담이지만 남편의 이름은 '쇼 松'랍니다. 어떤 운명 같은 게 느껴지죠. 그러나 소나무에 건 밧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실패하자 미쓰 천에 몸을 던져 아내의 뒤를 따랐다. 이후로 타지에서 시집은 여자가 모내기를 하면 논의 진흙 속에서 손이 나와 발목을 붙들기 시작했다. 도망치면 이번에는 미쓰 천에서 나온 익사체 요물이 강물로 끌고 들어가려 했다. 그런 일이 빈번히 일어난 탓에 며느리가 죽은 논에 공양비를 세우고 그곳에만 말뚝을 둘러 모시게 됐다는 이야기랍니다. 못 알아차리셨을 수도 있겠는데, 다리 어귀에 있던 수신탑은 강물에 뛰어든 남편의 공양을 위해 세운 거죠. 또 그 소나무 앞에서 짚신이나 게다 끈이 끊어지면 가까운 시일 내에 가족이 죽는다고 두려워했습니다. 목을 매는 데 실패한 남편의 저주라고 생각한 거죠. 그리고 팽것이라는... 앗, 아뇨..."

 

- 세이지는 팽것에 대해서도 말하려다가 허둥지둥 입을 다물었다. 또 겐야가 모르는 이름을 꺼냈다간 조금 전 같은 소동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걱정한 것이다.
겐야는 상대방을 안심시키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팽것은 압니다. 혹시 미쓰 천에 빠져 죽은 며느리의 남편 이야기에서 팽것이란 요물의 전승이 비롯됐을까요?"
"십중팔구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만..."
"진흙녀에 대한 옛날이야기는 전형적인 며느리 밭 전승이군요."

"네? 다른 지방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까?"
"시어머니한테 하루 만에 모내기를 끝내란 말을 듣고 애써 일을 ... "

- "놀러 왔냐?"
시선을 떨어뜨린 쇼이치에게 류마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히죽히죽 웃었다. 거짓말인 게 뻔하리라. 그렇지만 화를 내는 눈치는 조금도 없었다.
"이 안, 볼래?"
눈앞의 널벽을 가리키며 손짓을 하기에 쇼이치는 같이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그곳 벽에 널문이 있었다. 류마가 안으로 문을 밀어 열자, 표면이 이끼로 뒤덮인 돌우물이 나타났다.
"지금은 안 쓰나요?"
"그래, 물은 잘 나오지만."
"어째서 이렇게..."
벽을 둘러놨느냐고 눈빛으로 묻자,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꿈에 계시를 받았거든"이라고 대답했다.

- "내가 양자로 들어오고 나서 얼마 지났을 때 꿈에 미즈치 님이 나왔어. 이 우물의 물은 미쓰 천이 바짝 말라붙어도 마른 적이 없는 특별한 우물이니 잘 모시라고. 그것도 나 혼자 하라고 말이야. 처음엔 사당을 만들 생각이었는데, 내가 목수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잖냐. 간신히 사방을 벽으로 두르고, 그 뒤는 물을 길어 깨끗이 청소하는 게 고작이야. 하지만 같은 꿈을 그 뒤로 안 꿨으니 이러면 된 거겠지."
그러고 보니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류마가 자기만의 신을 모시기 시작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물론 나빴다. 스이바 신사의 신관이 될 자격이 있음을 주장하려고 꿈 이야기를 꾸며냈다고 수군댔다. 하지만 류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하게 둔 ...

- 그렇게 생각한 쇼이치가 일어선 순간, 꺼림칙한 논의 벼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주위 전답의 벼도 바람에 너울거리고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움직임이 달랐다. 다른 논은 자연의 바람에 몸을 맡기고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휘는데, 꺼림칙한 논의 벼만은 마치 그 안에서 뭐가 나오려 하는 것처럼 술렁술렁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큰일 났어. 얼른 도망쳐야겠어.
조바심이 난 그가 시선을 돌리자 소나무가 보였다. 꺼림칙한 논 쪽으로 튀어나온 굵은 가지에 목을 맨 시체가 덜렁덜렁 흔들리고 있었다. 보고 싶지 않건만 그에 맞춰 두 눈이 움직여 이내 쇼이치의 고개도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목 맨 시체가 그리는 호가 커지면서 고개를 흔드는 것도 점차 격해지더니 이윽고 상체가 좌우로 흔들렸다. 좌에서 우로 한층 세차게 부웅, 하고 고개가 움직인 찰나 시체가 스르르 사라졌다. 시선 앞에 또다시 꺼림칙한 논이 있었다. 
벼 사이로 진흙으로 범벅이 된 손 하나가 나와 있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의 어깨를 칠 듯한 모습으로 쑤욱 뻗었다. 그 손이 천천히 위아래로 팔랑팔랑 움직였다. 이리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부르는구나.
윗다리를 건너며 쇼이치는 전에도 비슷한 체험을 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도 분명히 누가 손짓했다. 그런데 그가 가려고 했을 때 뜻하지 않게 방해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문제없이 그쪽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를 부르고 있는 쪽이 아니라 그것이 사는 세계 자체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쪽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 것이다. 
저쪽으로 간다고?
그러면 자신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생각을 하니 별안간 오싹했다.

- 그때 다리 건너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네."
쇼이치는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발길을 돌려 꺼림칙한 논 앞을 벗어났다.
강길을 가로질러 윗다리 어귀까지 왔을 때 퍼뜩 정신이 들었다. 허겁지겁 다리 건너를 살펴봤지만 어머니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조심조심 돌아보자 진흙 손 두 개가 이리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황급히 눈을 질끈 감고 다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 눈을 뜨면 다리 반대편에 어머니가 서 있지 않을까. 그런 어렴풋한 기대가 있었다. 천천히 눈을 떴다.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
환청은 아니다. 분명히 어머니가 도와준 것이다.

 

- 그러고 보니 시게조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옛날 한 마을 사람이 병이 나 열이 펄펄 끓었다. 마을 의사는 '오늘 밤이 고비'라고 했다. 본인은 열에 들떠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세계를 헤매고 있었지만, 머리맡에서 의사가 한 말은 똑똑히 들렸다. 간병하던 아내가 최악의 상황을 각오한 것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아무리 애써도 말을 할 수 없었다. 간신히 이야기할 수 있게 됐나 싶으면 꿈이었다. 그런 상황을 거듭하다 보니 스스로도 자신이 깨어 있는지 잠들어 있는지 알 수 없게 됐다. 문득 보니 발치에 누가 앉아 있었다. 날이 저물어 가는지 방 안이 어둑어둑했다. 그 사람도 검은 그림자로만 보였다. 그런데 앉은 자세로 검은 그림자의 상반신이 자신 쪽으로 쑥 뻗어왔다. 발치에서 얼굴 앞까지 단숨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났다. 다음 순간 그림자가 철썩 떨어졌다. 온몸이 그림자에 싸였다. 어느새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어나 밖으로 나온 듯, 캄캄한 흙길을 걷고 있었다. 앞쪽에 그림자가 있었다. 떨어져 나간 모양이었다. 그럼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어디로 가는 건지 호기심이 들었다. 잠깐 확인해 보자고 생각하던 차, 앞쪽에 널따란 강이 보였다. 강에 걸린 다리를 그림자가 건너기 시작했다. 막연히 저쪽에 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림자가 돌아보고 손짓했다. 그에 이끌려 다리에 발을 디디려 한 순간, 뒤에서 "여보, 도시락 두고 갔어요!" 하고 아내가 불렀다. 앗, 그랬던가, 하면서 돌아갔다가 이불속에서 깨어났다. 머리맡에는 '이제 고비를 넘겼다'라고 하는 의사와 울며 기뻐하는 아내가 있었다.

- 시게조에 따르면, 그 강은 삼도천이었으며 다리를 건넜다면 그 사람은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아내가 실제로 머리맡에서 도시락을 두고 갔다고 말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남편을 잃고 싶지 않다는 강한 마음이 죽음의 세계에 반쯤 발을 들여놓은 그를 되부른 것이다. 검은 그림자는 사신 같은 것이라는 말을 듣고 쇼이치는 팔에 소름이 돋았다. 

 

- 이 이야기에서는 반쯤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남편을 살아 있는 아내가 도와준 셈이다. 하지만 지금 이 경우는 살아 있는 쇼이치를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어머니가 도와준 것이다. 
어머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싫어서 쇼이치가 고개를 숙이자 다리 어귀에 커다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때 시야 끄트머리에 묘한 것이 보였다. 급히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난간 밑 부분으로 시선을 돌렸다. 팔 같은 것이 쑥 나와 있었다. 오랫동안 물속에 잠겨 있었던 탓에 부푼 데다가 물고기 등에게 뜯어 먹혀 부패한 듯한, 매우 끔찍한 상태의 팔이 강가 비탈을 기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팽것... 
진흙녀를 피한 것도 잠시, 다음 괴이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미쓰 천에서, 윗다리 밑에서 그것이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더는 어머니의 도움을 바랄 수 없다. 이대로 꾸물대고 있다간 그것의 전신을 보게 된다. 

- 쇼이치는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윗다리를 달리며 저쪽 편으로 앞질러 가 있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지만,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 꺼림칙한 논에 진흙녀가 있다. 강길보다 참배길 쪽이 훨씬 안전하다. 무엇보다도 이곳을 통과해야 미즈시 가로 돌아갈 수 있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다리를 건너서는 그대로 참배길을 뛰어갔다. 되도록 다리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미즈시 가까지 반도 못 가서 숨이 차기 시작했다. 금세 한 발짝도 더 못 가겠기에 하는 수없이 멈춰 서서 휴식을 취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조심 돌아보았다. 진흙녀도 팽것도 없었다. 시체가 목을 맸던 소나무 가지만 저물녘의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 결국 미즈시 가 남쪽 끝에 우거진 대숲 앞에 쇼이치가 선 것은 태양이 후타에 산 너머 숨은, 황혼이 저무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 그때 굴속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도, 웃음소리도, 고함소리도, 신음소리도 아닌 이상한 소리가 마치 미친 여자가 내지르는 것 같은 소리가 굴 안에서 들렸다. 게다가 점점 커졌다. 굴 밖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 
이윽고 연기 속에 꿈틀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멧돼지가 아니었다. 두 발로 선 어떤 것이었다. 엽총을 겨누고 있던 한 명이 별안간 웃기 시작했다. 그냥 웃음이 아니라 조소였다. 나머지 세 사람은 사냥한 짐승을 전부 버리고 허둥지둥 그를 데리고 도망쳤다. 
남자는 마을로 돌아온 뒤로도 계속 그렇게 빈정거리듯 웃었다. 이튿날, 엽총을 겨누고 있던 나머지 한 명이, 그다음 날 또 한 명이 그렇게 웃기 시작했다. 첫 번째 사람이 사흘을 내리 밤낮으로 웃다가 죽자,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명은 부젓가락으로 자신의 두 귀를 찌르고 인두로 귓구멍을 지져 막았다. 그 덕분에 목숨만은 건졌다. 

 

- 마을 노인에 따르면, 산의 여신님이 진노해 귀녀가 되어 네 사람 앞에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그 모습을 잠깐이라도 봤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미쳐 죽었을 것이라고 한다. 조소는 귀녀에게 옮은 것으로, 옮은 사람은 자신의 웃음소리를 계속 듣다가 죽게 된다. 마지막 사내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깨달은 덕에 목숨을 부지했을 것이다.

- 그 뒤, 쇼이치는 사흘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자신도 언제 웃기 시작할지 모른다. 그렇게 되기 전에 두 귀를 막아야 하는 걸까 고민했다. 하지만 도무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성싶지 않았다. 사요코가 "요새 계속 가위눌리던데, 너 괜찮니?" 하고 물었다. 별일 없다고 대답했지만 누나는 믿지 않는 듯했다. 

- 도움을 청한 걸까.
아냐, 혼자 할 수 있어.
본인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쇼이치는 이때 정작 중요한 목적을 잊고 있었다. 어째서 굴 안쪽으로 가는 건지 잊은 채 그저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시게조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뭔가가 부르는 거야...

 

- 쇼이치는 초를 꺼내 적당한 곳에 놓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연줄을 풀어 물가 근처의 석순에 붙들어맸다. 이어서 손전등을 기름종이로 싸고 옷을 벗었다.
물속으로 들어가 그 너머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광기에 가까운 이 방법이 떠올랐을 때 그는 거의 주저하지 않았다. 오히려 훌륭한 생각이라고 자화자찬했다. '너머'가 존재하지 않고 수중동굴이 계속 이어질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다. 귀녀의 웃음소리가 들리니 이곳과 비슷한 공간이 있을 게 틀림없다. 

- 움막에서 살던 시절 사요코에게 수영을 배웠다. 누나는 쇼이치가 헤엄칠 수 있게 되는 것에 집요하리만큼 집착했다. 십중팔구 귀국선에서 본 바다의 괴이 때문이리라. 하미 같은 산속에 살면서도 언젠가 바다 괴물이 동생을 잡으러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수영 자체는 별로 재미있지 않았지만 잠수는 즐거웠다. 물 위를 헤엄쳐가는 것보다 물속에 있는 게 더 좋았다. 누나는 유별나다고 웃었지만 실제로 그러니 어쩔 수 없다. 
그게 이런 곳에서 도움이 될 줄이야.

- "왜?"
"널 데려갈 수도 있으니까."
"..."

"또 뭐 이상한 거 본 건 없고?"
사요코의 시선을 받고, 아오타 촌의 미쿠마리 신사에 갔다 오는 길에 꺼림칙한 논과 윗다리에서 진흙녀와 팽것을 마주쳤던 일을 이야기했다.
"역시 그렇구나. 쓰루 언니랑 넌 어머니한테 힘을 물려받았다고 했는데, 넌 그런 묘한 것들을 보게 되는 모양이지."
"응..."
"보이기만 하는 거면 문제없지만, 자꾸 그런 것들에 관여하다 보면 너도 영향을 받을 위험이 있어. 그러다가 저쪽에서 널 부를지도 몰라."
"따라가면 어떻게 되는데?"
"아마 두 번 다시 못 돌아오겠지. 설사 돌아와도 그건 진짜 네가 아닌 다른 어떤 거 아닐까."

 

- 누나의 그런 생각은 보아하니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인 듯했다. 시게조가 이야기하는 온갖 괴이담이 그에 더해져 한층 보강되었다.
쇼이치는 외눈 광에도, 뒷산에도 절대로 접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굴은 그렇다 치고 광은 쓰루코와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당분간은 피하고 싶었다. 미즈시 가의 첫 번째 별채를 지나 그 남쪽 일대에는 한동안 발을 들여놓기 싫다는 게 본심이었다.

- 깊숙한 곳에 짓는다고 별 차이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반대 방향인가.
겐야는 몸을 돌려 별채 안쪽, 남쪽에 위치한 산을 향해 서둘러 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본채에서 누가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얼른 별채 뒤로 숨고 싶었다. 
자신과 시노의 방을 지나자 갑자기 불빛이 사라졌다. 다행이라고 하자니 마을 사람들에게 미안했지만 달밤이라 문제없었다. 하늘이 흐렸다면 애초에 미즈치 님 제의를 거행할 리 없다. 달빛의 은혜는 당연한 것이었다. 

- 세 번째 별채 뒤로 돌아가자 울창한 대숲이 나타났다. 느닷없이 앞을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실제로 이 이상 진입금지라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겐야가 제아무리 괴이를 좋아한다지만, 그냥 산책이었다면 그냥 되돌아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좌우지간 수상쩍어 보였다. 안쪽을 살펴봐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발밑을 주의하며 대숲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시야가 어두워졌다. 눈이 어둠에 익을 때까지 얼마 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안쪽으로 들어갔는데... 아무리 가도 반대편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겨우 나왔나 싶으면 원래 있던 별채 뒤였다. 왜 그런지 출발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상한데, 뭐가 있군.
십중팔구 결계 같은 것을 친 모양이라고 판단했지만 그것을 깰 힘은 없다. 결계의 종류나 수법이라도 알면 그나마 대처할 방법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간단히 밝혀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거 난감한 걸." 
세 번째로 별채 뒤로 돌아온 겐야는 기껏 수상쩍은 곳을 알아냈는데 싶어 아쉬웠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먼저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는지 조사한 뒤 그것을 풀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

 

- 겐야는 낙심해서 터덜터덜 별채로 돌아오며 몇 번씩 대숲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돌아보다 말고 어떤 것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앗!"하고 소리쳤다. 서둘러 방으로 돌아와 가방을 열고 교토 역에서 아부쿠마가와가 준 죽통을 꺼냈다. 
한쪽 단면에 구멍이 있고 나무 조각으로 마개를 막았다. 속에 액체가든 것이, 옛날 물통처럼 보인다. 이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겐야는 죽통을 들고 대숲으로 돌아가서 네 번째로 시도했다. 맥 빠질 정도로 간단히 반대편으로 나올 수 있었다.
통 안에 역시...
진신 호의 물이 들어 있는 게 틀림없다. 또는 류쇼 폭포나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 원류의 물이 든 것이리라.

 

- 그러나 겐야가 죽통에 관해 생각한 것은 잠깐 뿐이었다. 대숲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눈앞에 홀연히 오래된 광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게 외눈 광...
그렇게 생각하며 봐서 그런지, 2층의 닫힌 철창문이 외눈처럼 보이는 게 흡사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정도로 신사에서도, 본채에서도 떨어진 곳에 광을 지은 것은 처음부터 무서운 목적이 있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원래는 다른 용도가 있었는데 주술적인 장치로 개조한 것인가.
물은 어디서?

- "그런 전승은 존재하는지요?"
"여기 오는 길에 윗다리는 거치셨나?"
"네. 강길에서 참배길로 들어갈 때 건넜습니다. 사요 촌의 그 다리 말고는 사호 촌의 동쪽 끝에 있는 아랫다리밖에 없는 것 같던데요."
"실은 그 윗다리도 놓기가 영 쉽지 않았나 보더군."
"떠내려가는 겁니까?"
"그래서 인간기둥을 세웠다는 걸세."
"아..."
"아니. 실제로 그랬는지 아닌지는 몰라. 윗다리 어귀에 수신탑이 있잖나? 진흙녀의 남편인 팽것을 위해 세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생매장당한 사람을 모셨다는 전승이 있어. 다른 수신탑이 마을 경계의 표지 역할도 하는 걸 생각하면 아닌 게 아니라 그것만 특이하긴 하지."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면..."
"물론 확증은 없네만, 외눈 광이 미즈치 님께 산 제물을 바치는 장소라는 건 적어도 틀림없다고 생각하네."
다쓰키치로는 모호하게 말했다.
"뭔가 다른 점이 있는 겁니까?"
"보통... 보통이라 말하는 것도 이상하네만, 우리가 떠올리는 산 제물하고 달리 완만한 산 제물이라고 할까."
겐야가 기묘한 표현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다쓰키치로가 느닷없이 기이한 이야기를 꺼냈다.

- 과거 하미 땅에 아름다운 순례자 모녀가 나타났다. 비렁뱅이나 다름없었는데도 류지가 거두어 보살펴주기에, 마을 사람들은 그의 ... 

- "수리조합에도, 심지어 다쓰키치로 씨께도 안 가르쳐준 겁니까?"
"그래. 그러니 그 반대인 걸세. 내가 처음 생각했던 건, 사기리의 본가가 민간의 수상쩍은 그렇지만 대단한 힘을 가진 행자의 가계가 아닐까 하는 거였네만." 
"그런 의미였군요. 지금도 자세한 건 모르는 겁니까?"
겐야는 납득하는 동시에 사기리의 출생이 더더욱 궁금해졌다.
"아니, 시간이 흐르면서 대강 알게 되더군. 신불과 관련된 자의 세계는 일반 민속신앙까지 포함하면 꽤 넓거든. 하지만 그 덕분에 정보도 전달되지. 곧바로는 무리라도 몇 년, 몇십 년 지나면서 어느새 소문이 돼서 귀에 들어오게 마련이네."
아부쿠마가와의 본가로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정보가 그 증거일지도 모른다.

 

- "도조 씨, 소류 향의 가가구시 촌이란 곳을 아는가?"
"잠깐만요.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음, 댁 같으면 그렇겠지. 그쪽 세계에선 아주 두려워하는 어느 마귀 가계가 대대로 이어지는 곳이라네."
"그러고 보니 마귀 촌이란 별명이 있다고..."
"그래, 별별 이름이 있는 모양이더군. 어쨌든 문제의 집안엔 대대로 쌍둥이 딸이 태어나는데, 전부 '사기리'라고 이름을 짓거든."
"그래서 사기리 씨..."
"다만 쌍둥이는 둘 다 그 집안의 소중한 후계자란 말이지."
"지방의 구가에서 그러는 것처럼 쌍둥이는 불길하니 한쪽은 남의 집에 준다는 풍습 때문에 양녀로 보낸 게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분명히 특수한 사정이 있었겠지. 어쨌거나 사기리가 특별한 힘을 갖고 태어났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걸세."
"어떤 힘일까요?"
"글쎄, 나도 자세히는 모르네. 게다가 사기리는 그곳에서 자란 게 아니니까."
다쓰키치로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 집에서 자랐다면 후계자로서 교육을 받았겠지.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가진 힘을 쓰는 방법뿐 아니라 아마 제어하는 방법도 배웠을 걸세. 딸 쌍둥이가 가지는 힘의 정체를 그 집 사람들은 이해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사기리 씨는 사요 촌에서 자란 탓에 힘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씀이군요."

 

- 다쓰키치로는 느닷없이 사기리 가족의 만주 생활과 귀국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본인에게 들은 게 아니라 사요코와 쇼이치가 세이지에게 말한 내용을 전해 들은 모양이다.
"예를 들어 사기리는 기총소사를 당하기 전이나 소련군 병사의 습격을 받기 전 그걸 미리 예지한 것처럼 행동했지. 그 힘이 최대한으로 발휘된 게 귀국 때가 아닐까 싶네. 특히 귀국선 안에서 쓰루코, 사요코, 쇼이치까지 자식들이 잇따라 쓰러졌을 때... 아니, 그보다 더 전부터 사기리는 자신의 힘을 사용한 게 틀림없어." 
"설마... 사요란 부인의 갓난아기를 뺀 세 아이들..."

겐야는 그때 터무니없는 상상이 들었다.
"그래. 자기 자식의 목숨이 위험해졌을 때 자식들을 대신하도록 세 아이한테 미리 어떤 주술을 쓴 게 아닐까, 난 그렇게 보고 있네. 식량 사정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 제 자식도 아닌 아이들한테 음식을 나눠줬다는 행위가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럽지 않나."
"..."
"하기야 사기리가 어디까지 자기 의사로, 의도적으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 자연스럽다고 할지, 본능적인 행동이었을 수도 있어."
"아무런 교육을 못 받았기 때문이란 말씀이시죠. 하지만 자신한테 기묘한 힘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류지 씨도 그걸 노린 거고요."
"그래.”
"하지만 그렇다면 류지 씨는 어째서 일부러 그런 집의 딸을 양녀로 들였나."
"지금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고 있지?"
"네..."

겐야가 대답하자 다쓰키치로는 멈춰 서서 돌아보았다.
"어디 말해보겠나?"
"쓰루코 씨를 노리기 훨씬 전부터 류지 씨는 너무나도 끔찍한 계획을 꾸미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외눈 광의 산 제물을 처음부터 직접 길러낸다는 계획을..." 

- "사기리 씨가 돌아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셨겠습니다."
"네. 처음엔 이해가 안 됐지만 생각해 보면 달리 갈 데가 없죠. 다만 쓰루코를 보고 첫눈에 이거 큰일일지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류지 씨가 쓰루코 씨를 제2의 사기리 씨로 삼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군요. 한편으로 류지 씨는 따님이 손주들을 데리고 돌아왔을 때 처음엔 착각하고 기뻐하시지 않았는지요?" 
"무슨 소리지?"
"손주들의 이름을 듣고 당치 않은 상상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고개를 돌려버린 류지를 대신해 세이지가 몸을 내밀며 물었다.

 

- "인간기둥 전승은 아시겠죠."
"계속 다리를 놔도 폭우가 쏟아질 때마다 떠내려갔다, 그래서 사람을 산 채로 매장해 주술적인 힘으로 튼튼한 다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 하는 이야기죠? 사요 촌의 윗다리에도 같은 전승이 있습니다."
"네, 다쓰키치로 신관님께 들었습니다. 유명한 이야기로 <신토슈 神道集>에 다리 아가씨에 관한 게 있죠. 나가라 다리 건설이 난항을 겪으면서 인간기둥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때 흰 천으로 하카마를 기운 사내가 처자와 함께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꿩이 울다가 잡히는 모습을 보고 울지 않았으면 됐을 것을 하고 독백했습니다. 이어서 다리를 보더니 흰 천으로 옷을 기운 사람을 인간기둥으로 삼으면 된다고 무심코 입을 놀리고 말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공사 책임자가 남자가 바로 그렇다는 걸 깨닫고 즉시 잡아 인간기둥으로 매장했습니다. 남자의 아내는 자식을 업은 채 남편 뒤를 따르듯 물에 빠져 죽었는데, 그때 '말해서 나가라 다리의 기둥, 울지 않았으면 꿩도 잡히지 않았을 것을' 하고 읊었습니다. 이 여자가 후일 다리 아가씨가 됐다는 유래가 기록되어 있죠."
"미즈시 신사의 외눈 광은 인간기둥을 참고로 했단 말씀입니까? 하지만 다리 아가씨의 유래나 윗다리의 전승은 그렇다 치고, 인간기둥이 정말 있었던 겁니까?" 
"다이쇼 14년(1925) 4월에 황거 皇居에서 인간기둥 소동이 있었지."
다쓰키치로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겐야는 자연스레 그 말을 이었다.
"이 년 전, 간토 대지진의 복구공사 중 황거의 망루 밑에서 인골 여러 구가 발견된 사건이죠. 게다가 모두 서 있는 자세였고, 머리 위에 옛날 동전 한 닢씩 있었습니다."
"참으로 주술적인 광경이군요. 그게 인간기둥이었던 겁니까?"

세이지의 질문에 겐야는 고개를 내저었다.
"당시 그렇게 생각한 지식인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궁내청에서 의뢰한 정식 조사 결과, 완전히 부정됐거든요. 하지만 이 조사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 "음, 황거로 말하자면 쇼와 9년(1934)에 사카시타 문 근처에서 역시 옛날 동전과 함께 인골이..."
"선생님, 문제는 인간기둥이 아니라 쓰루코 씨 남매 이름이라니까요!"
겐야가 질리지도 않고 이야기를 계속하려 하자, 시노가 강한 어조로 나무랐다.
"응... 그렇지만 인간기둥이 관계없는 건 아닌데. 아니, 미즈치 님이란 신의 산 제물이라 생각하면, 인간기둥을 예로 드는 건 좀 다르긴 한데..."
"뭘 그렇게 주절주절하시는 거죠!"
"아니, 그러니까 산 제물은 어디까지나 신께 바치는 거지만 인간기둥은 그렇지 않거든."
"미즈치 님께 바치는 산 제물이랑 다르다고요?"
"그래. 인간기둥의 경우, 매장되는 사람의 영이랄지, 혼이랄지, 말하자면 그 힘으로 다리를 지탱하는 거야. 그 때문에 다리뿐 아니라 제방처럼 사나운 물줄기에 의해 붕괴되는 곳에도 전승이 남아 있지. 하지만 인간의 목숨을 바친다는 공통점이 있거든. 사기리 씨는 거기에 착안한 게 아닐까 싶어." 
 

- "그, 그러니까 전승에서 인간기둥이 되는 사람의 이름이, 소녀는 '쓰루 鹤'나 사요 小夜', 소년은 '쇼 松'나 '이치 いち'인 경우가 많거든. 또, 어머니와 자식인 경우도."

한자까지 설명하자 쇼이치가 '앗' 하고 놀라는 표정을 보였다. 뭔가 짚이는 데가 있는 걸까.
그러나 겐야는 '사요'를 '佐用'이라고도 쓴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귀국선 안에서 쇼이치 가족 옆에 있었던 게 사요 用 부인이었다. 단순한 우연에 불과하겠지만, 사기리는 그 사실에 운명을 느꼈을 게 틀림없다. 이 모자가 자신들의 인간기둥이 될 것이라는 운명을.

- "사기리 씨는 왜 아이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까요?"
시노가 쇼이치를 마음 쓰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류지 씨도 놀라셨을 거야. 집을 나갔어도 딸은 역시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여 자식들 이름을 그렇게 지었구나, 아마 그렇게 착각하시지 않았을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류지에게 시선을 돌렸으나, 본인은 모른 척했다.
"물론 사기리 씨는 그런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어. 오히려 자식들을 지키려고 했지."
"그렇지만..."
"어제 다오 정에서 하미로 오는 차 안에서 류마 씨가 이 일대에 전해져 내려오는 흥미로운 풍습을 가르쳐주셨거든."
"네?"
"이 지방에선 옛날 자식한테 일부러 나쁜 이름을 지어줘서 재난을 물리치는 풍습이 있다고 말이야."

 


- "만주로 건너간다고 해도 사기리 씨는 불안했을 겁니다. 몸을 의탁한 세이지 씨의 친구분, 결국 사기리 씨의 남편이 되셨습니다만, ... "

-

지금은 시간이 걸리든, 상대방이 뺀질거리며 대답을 피하든, 끈기 있게 질의응답을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보면 모순되는 점이 반드시 나올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문제가 드러날 것이다. 그것을 상대방에게 날카롭게 지적하는 동시에 그것들을 바탕으로 추리해야 한다. 경찰의 수사를 바랄 수 없는 지금, 사건의 진상에 다가설 방법은 그것뿐이다.
일단 이야기를 진행시키기로 했다.


- "알겠습니다. 다루미 이치고로 씨 문제는 일단 넘어가죠. 십삼 년 전 미즈시 신사의 증의가 끝난 뒤, 미즈치 님 제의에서 변고가 있었던 건 이번이 처음입니까?"
류지와 류코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칠 년 전, 사기리 씨가 세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셨습니다. 쓰루코씨를 보고 류지 씨는 외눈 광의 산 제물에 적합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류지는 여전히 침묵했지만, 부정하지 않으면 긍정하는 것이라는 암묵의 양해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 때나 미즈치 님 제의를 거행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증의나 감의를 올리게 돼도, 갈수나 증수의 규모가 웬만큼 돼서 산 제물의 위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게 아니면 의미가 없다. 류지 씨는 그렇게 생각하셨습니다." 
"..."

- "그게 무슨 뜻입니까?"
겐야는 세이지뿐 아니라 류지와 류코도 돌아보며 설명했다.
"외눈 광의 역할에 관해선 이미 말씀드렸죠. 다쓰키치로 신관님은 그 광에 갇힌 사람을 가리켜 완만한 산 제물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과거에 왔던 아름다운 걸인 모녀가 가장 생생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측은한 일이야."
류코가 시선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네. 동시에 매우 끔찍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광 안에서 지낸 기간이 짧으면 그나마 원 상태로 회복될 가망이 있거든요. 모녀의 경우는 광에서 몇 년이나 생활했기 때문에 외모가 몰라볼 만큼 달라진 겁니다."
"십중팔구 그랬겠죠."
세이지가 맞장구를 쳤다.

"즉 외눈 광의 인신공양은 그야말로 완만한 산 제물인 셈입니다. 그 성질상 증의나 감의의 유무와 관계없이 평소에도 계속 미즈치 님께 산 제물을 서서히 바치는 셈이니까요."

"어? 어째 이상한데요?"
"맞습니다. 쓰루코 씨의 도피 소동이 벌어진 건 이번 증의 전날입니다. 원래라면 이미 오래전에 광에 들어가 있어야 하죠. 이건 제 근거 없는 상상입니다만, 신남이 재계를 시작하는 날, 의식을 올리기 일주일쯤 전이 타당하지 않을까요?"
"네, 그럴 테죠."
"그런데 사요코 양이 사라진 시간을 생각해 보면 의식 당일일 것 같거든요."

- 그 때문에 그녀의 등 뒤를 흘끔흘끔 보았다. 그러다가 무서워져서 얼굴을 숙였다. 이윽고 견디지 못하고 창살 방 앞을 떠났다.
말해주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저것의 존재를 가르쳐주었다고 해서 과연 자신이 믿었을까를 생각하니 확신할 수 없었다. 쇼이치도 불안했던 게 틀림없다. 말해도 그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가르쳐준들 어차피 시노는 창살 방에서 나올 수 없다. 그런 지경에 몰아넣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으리라. 
하지만 이제 시노는 알아차리고 말았다. 유일한 희망은 불을 끈 효과다. 이로써 저것이 목표를 잃으면 좋겠다. 원래 있던 어둠 속으로 돌아가면 더 좋겠다. 
시노는 문살문에 바짝 다가앉아 숨을 죽였다.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자신이 창살 방에 들어오기 전과 되도록 같은 상황을 만들려고 했다.
저것이 사라지게...

- 창살 방은 캄캄했다. 광도 마찬가지였다. 2층 창문은 열려 있는 듯했지만 밖에 비가 오니 어둑어둑할 게 틀림없다. 그래도 광 안에 비하면 꽤 밝을 테니 쇼이치는 2층 창가에 있는지, 아까부터 광 전체가 조용했다. 그녀가 바랐던 대로 창살 방은 어둠과 정적에 싸여 있었다.
이따금 부스럭부스럭 나는 소리는 쇼이치가 내는 것이리라. 그 소리에 저것이 반응하지 않을까 겁이 났지만, 그런 한편으로 소년의 존재가 마음 든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광 안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좀 조용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시노는 비로소 그 소리가 자신의 뒤에서 들려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 슥, 슥.

등뒤에서, 대각선 맞은편의 구석에서, 다다미에 발을 스치며 걷는 듯한 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듯한 소리가, 확실히 들렸다.

저것이 오는 거야?
순식간에 목덜미에 소름이 돋고 오한이 등줄기를 훑었다.
사라지지 않았어?
창살 방에 어둠과 정적을 되돌려놓았는데도 저것은 여전히 존재했다.

나, 날 알아차려서?
인기척을 채고 찾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이러다가 들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하니 끔찍함에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안돼! 진정해!
여기서 비명을 질렀다간 절규를 멈추지 못할 듯한 공포에 휩싸였다. 저것에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셈이다.
내가 있는 곳?
시노는 허둥지둥, 그러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고는 왼손으로 창살을 짚으며 벽을 따라 다른 구석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대각선 왼쪽 뒤에서 슥슥 하고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앉아 있던 구석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는 소리였다.

 

- 시노가 다른 구석에 다다른 것과 그것이 창살문 쪽 구석에 이른 것이 거의 동시였다.   


- "그럼 더더군다나 왜 사요 촌일까요? 아닌 게 아니라 5월은 모를 심는 시기입니다. 벼농사에 적합한 하미 땅의 마을 이름으로 잘 어울릴지도 모르죠. 하지만 막 이주한 마을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모를 심어 이제부터 자랄 계절보다 이미 생육해 벼가 푸르게 우거진 계절 쪽이 더 강하게 와닿지 않을까요? 아니면 아예 수확의 계절이라든지요."
"듣고 보니 그런데요."
"사요 촌이란 이름이 꼭 이상하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어떤 다른 이유가 있어 그런 이름을 선택하지 않았나 싶은 거죠."

"그 이유란 게 뭡니까?"
겐야는 세이지의 물음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또 다른 의문점을 추가했다.
"미즈치 님 제의의 가남과 가녀라는 명칭도 잘 생각해 보면 묘합니다. 무대에서 춤추는 무녀도, 의식을 거행하는 신관도 '대역'이라면 대체 뭐의 대역일까요? 원래는 뭐가 주체였죠?" 
"대역과 주체..."
"신찬과는 별도로 왜 여섯 개씩이나 되는 통을 공물로 준비해야 하는가. 그 통들도 혹시 뭔가의 대역이 아닌가."
"공물이 든 통이 대역..."
"후타에 二重 산은 아무리 봐도 두 겹으로 포개진 산이 아닙니다. 좌우 산과 기슭에서 이어지지만 어디까지나 하나의 산이죠. 그런데 왜 후타에 산이라고 부르나."
"잠깐만요. 그게 전부 연결되는 겁니까?"
세이지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류마도 마찬가지였다.

 

- "또 있습니다. 다쓰키치로 신관님께서 신찬의 선별에 특별히 신경 쓰셨던 이유도 그에 포함됩니다만... 아니, 단순히 연결되는 이상으로, 바로 여기에 사건의 본질이 숨어 있는 겁니다."
"네? 아닌 게 아니라 아버지는 다른 신사에서 의식을 집전할 때도 신찬을 고를 때 곧잘 참견하곤 하셨습니다만..., 그건 장로 같은 존재로서 일종의 의식처럼 생각하셨기 때문이 아닌지..."
"내 생각도 그런데."
"그런데 거기에 의미가 있단 말씀입니까? 대체 어떤 의미죠?"

- "이 경우, 신찬을 해석해 보면 가장 이해가 빠를지도 모르겠군요."

겐야는 그렇게 말하고는 노트를 펴고 백지에 그림을 그리며 설명했다.
"큼직한 호박은 머리, 대량의 미역은 머리털, 크고 윤기 흐르는 조롱박은 몸통, 가느다란 무 두 개는 양팔, 둥글고 모양이 고른 순무 두 개는 좌우 유방, 멧돼지 간은 내장, 전복은 여성의 성기, 큰실말 한 움큼은 음모, 굵은 무 두 개는 양다리. 이런 식으로 신찬은 산 제물로 바치는 소녀의 몸을 나타내는 겁니다."
"아니, 그런..."
"..."
세이지와 류마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신찬을 넣은 궤짝의 뚜껑에 솥이나 냄비 뚜껑처럼 기름한 손잡이 두 개가 붙어 있죠. 그 때문에 뒤집어 놓으면 손잡이가 다리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 모습이 꼭 커다란 도마 같지 않습니까?"

- 시노가 뒤를 돌아보며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리조합에서 남은 사람이라곤 류코 신관과 류마 씨, 그리고 세이지 씨뿐이야. 현재 세 분 중 하미 땅에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세이지 씨밖에 없지."
"미쓰 천의 범람 대책이나 유사시의 피난 안내 같은 건 각 마을의 촌장들로 조직된 촌장회에서 대처할 수 있어. 하지만 그걸 주도하는 게 수리조합이라면 아무래도 세이지 씨한테 부담이 가겠지."
켄야가 냉정하게 대답하자 류마가 앞만 보고 운전하며 말했다.
"그럼 더더욱 세이지 씨가 남는 게 정답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건 그런데... 문제는 수리조합에서 감의를 요구할 때야."

"세이지 씨밖에 없다는 걸 알면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는 안 하지 않을까요."
류마가 입을 다물자 차 안에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하지만 선생님, 교토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그 지역에 밀착된 종교가란 존재는 가문이나 가족, 개인 같은 단위를 넘어서 완전히 지역의 일부로 화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말하자면 자연의 일부인 셈이다. 세이지 씨가 바로 지금 그런 입장 아닌가요?"
시노가 조심스레 말했다.
"..."
이번에는 겐야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참배길을 동쪽으로 달린 차는 이윽고 아랫다리를 건너 강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계속 가서 하미 땅을 벗어나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류마 씨, 잘 부탁드립니다."

- 결국 과거의 사분의 일쯤 되는 사람들이 하미 땅에 남았다. 예전의 사요 촌 인구보다 다소 적은 정도다. 그중에는 미즈우치 가이지와 쓰루코, 그리고 스이바 류코와 류마도 있었다. 그들은 사요 촌이 있던 자리에 새로운 마을을 일구었다. 이윽고 미즈우치 가와 스이바 가에 의해 신사도 재건되어 또다시 미즈치 님을 모시게 되었다. 

- 몇 년 뒤, 미즈우치 가이지와 쓰루코가 혼례를 올리는 동시에 류마도 신부를 맞았다. 일정 연령 이상의 마을 사람들은 신부가 사기리의 젊은 시절을 닮았다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곧 지나갔다. 쇼코라는 이름의 신부는 명랑하고 다정한 성격에 일도 아주 부지런히 잘했고 금세 마을 사람들 틈에 섞여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시아버지 류코를 정성껏 모시는 터라 효부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런 그녀가 남편과 시아버지를 제외하고 가장 친하게 지낸 사람이 가이지의 아내가 된 쓰루코였다. 두 사람은 흡사 친자매처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 누나가 죽어...
쇼이치가 들은 잘린 머리의 계시는 사요코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을까. 아니면 계시 따위 본인이 하기 나름으로 얼마든지 바뀌는 걸까.
도조 겐야도 그 진상은 알 수 없었다. 그저 먼 하늘 아래에서 두 쌍의 부부가 행복하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새로운 하미 땅의 발전을 진심으로 바랐다.
과거가 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참극을 일으키는 일이 없기를, 그저 한결같이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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