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미쓰다 신조 / 김은모
출판 : 한스미디어
출간 : 14.12.22
수월한 여름이라고 했던 발언을 철회한다.
며칠 사이 '힘들다' 싶을 만큼 더워졌다. 8월이 시작되었으니 앞으로 어떨지까지 살펴봐야 비교가 가능할 듯.
드디어, <사관장>이다.
<백사당>과 <사관장>을 노래노래해 온지도 십 년이 넘은 것 같다.
너무나 마음에 든 만큼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하겠었던 이중적인 마음.
이 두 작품만큼은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다고 추천하고 싶다.
읽는 순서는 <사관장>-<백사당>을 추천한다.
이 두 작품은 한 쌍이다.
각각이 온전하지만, 하나 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한 소년이 체험한 경험담인 <사관장>은 햐쿠미 가의 장례 의식과 그 당시 발생한 사건을 이야기한다.
그 체험의 화자인 다쓰미 미노부와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 미쓰다 신조의 이야기가 <백사당>.
백사당은 장례의식이 치러졌던 햐쿠미 가의 사당 이름이기도 하다.
<사관장>과 <백사당>은 <작가 시리즈>의 백미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작가 시리즈>의 완결이기도 하다.
시리즈가 더 이어지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다른 작품에서도 '미쓰다 신조'는 만날 수 있으니-
아스카 신이치로와 소후에 고스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야겠지.
그래서인지 <백사당>을 펼치자마자 등장하는 친구들에의 헌사 -혹은 메시지- 는 강렬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사관장>과 <백사당>은, 처음 읽었을 때도 강하게 매료되었고-
다시 읽었을 때도, 지금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작품이다.
여러 작품에 나눠진 '미쓰다 신조'의 조각들이 집대성된 호문쿨루스...
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어설픈 서평을 위해 허우적거리기 보다 깔끔하게 개인적인 감상만을 남기고 싶다.
좋았고, 좋으며, 좋을 것이다.
... 아마도.
- '금단의 방'이라고도 할 수 있는 햐쿠미 百巳 가의 그 불길한 곳에 들어갔던 게 몇 살 때더라. 정확하게 말하자면 금단의 '방'이 아니라 금단의 '별채'이지만...
- 엷은 막 너머의 풍경인 듯한 기억 속에서 그곳은 언제나 묘하게 으스스하면서도 말로는 다 못할 만큼 경외심을 자극하는 집으로 떠오른다.
- 유치원에 다니던 무렵 나는 나라 현 県 다우 군 郡 다오 초 町의 그 집에 거두어졌다. 여름철 한창 더운 시간대에 그 집으로 향하며 흔들대는 전철과 버스에 시달리느라 기분이 영 별로였다는 기억이 선명하다. 그때부터 새해 봄을 맞이할 때까지 나는 더 이상 유치원에 다니지 않고 거의 혼자(적어도 또래 친구는 없었다) 놀았다. 4월이 되어다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한동안은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담임을 애먹인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에는 분명 여섯 살에 입학하니 12월에 태어난 나는 다섯 살 적의 여름부터 그 집에서 살기 시작한 셈이다.
- 이런 회상을 하며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책상 위에 세워둔 작은 거울 속에서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기묘한 표정의 백발 남자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거울을 보고 있자니 문득 사람은 몇 살 때부터 거울 속 모습이 자기 자신이란 걸 알까 궁금해졌다. 언제부터 거울에 비친 얼굴이 자기 얼굴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토록 자신 있게 딱 잘라 말할 수 있게 될까.
- 적어도 내가 거울 그 자체를 의식한 것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긴 친구...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은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야기도 중요할지 모르지만, 일단은 초등학생이 되기 전 내가 그 지방으로 옮겨갔을 당시부터 상기할 필요가 있다.
- 만약을 위해 여기서 양해를 구한다. 내가 어린 시절에 체험한 사위스러운 일을 가능한 한 선명하게 떠올려 기록하기는 하겠지만, 현재의 내가 과거의 이야기를 기술하는 이상 표현과 문체, 그리고 '나'의 사고가 어쩌면 어린아이답지 않을 수도 있다.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기 바란다.
- 헌데 유소년기의 기억이라면 사람에 따라 두세 살 적의 일도 기억해 낼 수 있지만, 나는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은 거의 없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교토 집과 여름철 집 앞 골목길에 주르르 늘어서 있던 평상 같은 풍경이 지조본(地蔵盆, 8월 24일 즈음에 지장보살에게 불공을 올리는 행사) 때 매다는 초롱의 먹물 그림처럼 어렴풋이 떠오르긴 한다. 하지만 그런 건 어쩐지 진짜 기억이 아닌 듯 묘하게 애매모호하여 자신 있게 내 기억이라고 말할 수 없다.
- 그에 비해 교토 시에서 나라 현, 그리고 다우 군으로 들어와 다오 초에 다다를 때까지 내가 처음으로 '여행'했다고 할 수 있는 그날은 상당히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렇다고 그날의 기억이 전부 다 또렷한 것은 아니다. 그때까지 살던 집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즉 새로운 집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머릿속 풍경이 서서히 선명해지는 아주 기묘한 기억이다. 마치 태아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세상으로 나오듯이 내가 그 집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가서 하나의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묘한 기분이 든다. 그때까지 교토에서 보낸 나날은 내가 현실 세계에 태어나기 이전, 즉 이 세상이 아닌 어딘가 다른 세상이었다는 느낌이다. 뭐, 지금 돌이켜보건대 그 현실, 다우 군 다오초에 있는 햐쿠미 가라는 현실의 공간에서는 아주 요사스럽고 기괴한 일상이 터무니없이 담담하게 흘러갔지만...
- 어쩌면 그때 나는 어딘가 다른 세상에서 현실의 공간으로 여행을 떠나온 것이 아니라, 명백한 현실에서 기괴한 세상의 공간으로 빠져들었던 것은 아닐까.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장소야말로 현실이라고 불러야 할 세계였는지도 모른다.
- 몇 가지 일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교토의 어둑한 집에서 외출복을 입고(옷을 입혀주었던 중년 부인은 누구일까) 아버지가 재촉할 때까지 현관 마루에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 혼잡한 역에서 홀로 뭔가에 겁 ...
- ... 머릿속에 남아 있다.
하지만 결국 그 사람들은 내게 차창 밖을 지나쳐가는 전신주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와 가장 가까이 있던 아버지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교토 집을 나서서 새로운 집에 도착할 때까지 늘 곁에 있었던 아버지조차 기억 속에서는 아버지라는 존재로 남아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아버지보다 "얘야, 어디 가니?" 하고 역에서 말을 걸어준 노인이 좀 더 실체가 확실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분명 어릴 적부터 남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는 좀 별난 아이였지만 아버지는 그 이상으로 내게 거리를 두었다. 아니, 거리를 두었다기보다 나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었던 것 같다.
- 어릴 때는 억지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고자 하면 어렴풋하게, 극히 어렴풋하게나마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기와 따스하고 편안한 온기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한 감각은 기억의 미화작용이라고 하기 이전에 소설이나 영화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창조된 허구의 기억이 틀림없다고 지금은 판단할 수 있다.
-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엄청나게 무덥던 여름날에서부터 '나'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하기야 이 현실이라는 세계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한없이 현실 세계에 가깝지만 미묘하게 어긋난 살짝 일그러진 또 다른 세계였을지도 모르지만...
- 또 하나 말할 수 있는 것은 설령 그때까지 친부모와 함께 행복한 생활을 했고, 그 이후에는 가짜 가족과 함께한 형편없는 생활이었다고 해도 역시 그 여름날에서부터 내 모든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이전의 아마도 행복했을 가족생활에 관해 나는 잘 모른다. 기억도 거의 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일 때문에 이따금 방문하던 교토 술집에서 어머니를 만나 인연을 맺었다는 것. 그대로 고향집을 뛰쳐나온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살다 나를 낳았다는 것.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이 1년 반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고향집으로 돌아가 나를 햐쿠미 가의 호적에 넣었다는 것.
이 정도만 나중에 알게 됐다.
어머니가 작고하신 뒤 이년 반 동안 도대체 누가 나를 키웠을까. 내가 집을 떠나올 때 옷을 입혀주었던 부인일까. 그동안 아버지가 사귀었던 여자들 몇이 배턴 이어받듯 나를 맡아 돌봐준 걸까. 그러한 체험이 원인이 되어 내가 결국 어머니와의 추억이며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을 잃어버린 걸까.
지금도 이모저모 상상해 보지만 진실이 뭔지는 모른다.
- 기억 속 여행은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촌스러운 다오초 로우히 마을의 버스정류장에서부터 지루하게 이어지는 언덕길을 걷는 광경과,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커다란 대문을 통과한 후 거대한 두 그루 나무 사이를 빠져나와, 요란한 매미 울음소리의 환영을 받으며 현관 앞 포석에 발을 딛던 광경, 그리고 '또 하나의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 처음에는 천 조각이 떨어져 있는 줄 알았다. 그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물건이 어둠에 익숙해진 내 눈에 비로소 들어온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판단한 것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천조각 같은 물건이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왜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의아해하며 시선을 모으자 발이 보였다.
- 기모노 무늬는 기억나지 않는데 어둠 속에 똑똑히 떠오른 새하얀 그 발만은 지금까지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고작 다섯 살이었던 내게 그런 감정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때 느낀 가슴속 두근거림은 분명 성적인 충동이었을 것이다. 현관 안쪽은 어두웠으니 하얀 살결까지 똑똑히 보였을 리 없지만, 묘하게 요염하고 가느다란 발목과 함께 푸르스름한 인광처럼 창백한 살빛마저 내 망막에 또렷이 새겨지고 말았다.
- 그러나 그것이 결코 매료될 만큼 감미로운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발이 스르르 움직였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는지 안 닿는지 모를 만큼 묘하게 발을 놀려 걸음을 옮겼다. 얼핏 보기에는 우아한 걸음걸이였다. 그런데도 꺼림칙하고 무시무시한 뭔가가 바닥을 기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스륵 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이윽고 칸막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여 거대한 나이테 앞에 그것이 나타났다.
- "어서 오세요."
마침내 요괴... 새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매미가 다시 울 때까지 세 사람 모두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어서 오세요"라는 말이 모든 속박을 푸는 주문이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 말을 할 때까지 누구 하나 미동도 하지 않았다.
- 이것이 그날을 돌이켜볼 때 반드시 마지막에 떠오르는 장면이다. 어째선지 처음부터 또는 도중에 이 장면이 떠오르는 일은 일절 없었다. 늘 마지막이었다. 게다가 몹시 괴기하고도 환상적인 인상이 넘쳐나는데도 이 장면에는 언제나 생생한 현실감이 동반되었다. 전철과 버스를 타고 왔다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모습에 대한 기억 따위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 다만 어둠 속에서 본 발의 기억만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지 않고도 종종 떠오른다. 뽀야면서 어쩐지 창백한 빛으로 망막에 새겨진 그 요염한 발은 어느 틈엔가 그날의 추억에서 떨어져 나와 아무런 간섭도 없는 다른 기억으로서 머릿속 깊이 간직되어 있는 듯하다.
- 그 발을 본 순간, 아니, 뭔가 나타나리라 예감했을 때부터 그것은 평생 내게 들러붙었는지도 모른다.
그 징후였을까. 찌는 듯이 무더운 바깥에서 어둠으로 가득 찬 현관 안쪽으로 들어간 (그렇다, 나와 아버지는 어느덧 현관바닥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한여름 대낮인데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추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왠지 멋대로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 맹장지가 나란히 서 있었다. 짤막한 복도에서 본 첫 번째 장지문을 열면 이 맹장지 너머 방으로 통할 것이다. 즉, 맹장지는 두 방을 구분하는 역할을 했는데 다다미 여섯 장 짜리 방 뒤쪽에 기묘한 형태로 붙어 있는 다다미 두 장 짜리 방 왼편 부분만은 아래쪽 절반에 유리를 넣은 장지문으로 되어 있고, 중앙정원에 면해 있는 듯했다.
- 그 장지문의 유리를 통해 황혼 무렵의 핏빛처럼 불길한 볕이 방으로 비쳐들어 안쪽 방으로 통하는 맹장지를 독기 어린 색깔로 물들였다. 장지문 너머로 살짝 보이는 툇마루는 그대로 안쪽 방까지 쭉 뻗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안쪽 방 툇마루에서도 아담한 중앙정원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 별채 구조를 순간적으로 이해하면서도 내 시선은 붉게 물든 눈앞의 맹장지에 못 박혀 있었다. 손을 뻗어 열어볼까 했지만 아무래도 망설여졌다. 손을 뻗으면 찜찜한 주홍색 속에 손을 담그는 셈이다. 그러면 거기서 뭔가에 감염되어 분명 나는 큰일 난다. 머리가 이상해진다. 왠지 그런 기분이 들어서 불안했다. 그 이전에 내가 정말로 맹장지를 열고 저 으스스한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은 건지 몹시 의문스러웠다.
- 내가 굳은 듯이 가만히 서 있는 동안에도 오우마가토키(逢魔が時. 저녁 무렵을 가리키는 말. 어두워지면서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마물과 마주칠 수도 있는 시간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무렵의 불길한 빛은 점점 더 강하게 비쳐들었다. 게다가 장지문과 다다미뿐만 아니라 어느덧 내 몸까지 독기 어린 주홍색에 물들어 있는 것 아닌가. 당장이라도 내가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로 변해 ...
- 새어머니에게 그딴 걸 기대 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걸 처음 만났을 때 이미 깨달은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자 할머니가 다시 위에서 덮쳐서 온몸을 맡겼다.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러서 토할뻔했다. 어쩌면 그 끔찍한 냄새야말로 실은 시취였는지도 모른다.
이때 할머니가 몇 살이고 몸무게가 몇이나 나갔는지는 모르지만 온몸의 체중이 실리자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 그건 그렇고 할머니와 손자가 만들어낸 이 별난 광경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꺼림칙했을까.
시취를 풍기는 노파가 다섯 살짜리 아이를 몸으로 짓누른 채 "첩의 자식놈"이라고 소리치고 있다. 그 아래에서는 아이가 몸도 가누지 못하고 축 늘어진 채 조용히 울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런 두 사람을 계모라고는 하나 아이의 어머니라는 사람이 손 하나 까딱 않고 지켜보고만 있다.
그것은 지옥의 한 풍경이 아니었을까.
-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그것은 귀녀의 얼굴이었다.
- 새어머니를 처음 보았을 때 '가면 같다'고 느꼈는데, 밑에서 올려다본 새어머니의 거꾸로 된 얼굴에는 그 내면에 깃든 요사함이 비쳤다.
그런 새어머니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거꾸로 비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 표정 변화가 몹시 우스꽝스러웠다. 그 표정은 뭐였을까, 나중에 생각해 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알아차렸다.
'웃음'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새어머니는 비웃고 있었다.
- 아주머니는 할머니를 이부자리에 눕혀놓고 만주 부스러기가 흩어진 방을 청소한 후에야 나를 은거방에서 데리고 나갔다. 새어머니 앞이라서 그런지 아주머니는 내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지만 몸짓 하나하나에서는 일이 늘어서 짜증 난다는 속내가 여실히 느껴졌다.
새어머니는 뭔가 돕거나 아주머니의 노고를 치하하지도 않고 그저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런 새어머니의 눈길에서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방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 의미가 있는 듯하면서도 실은 전혀 없을지도 모를 새어머니의 그 으스스한 시선은 알고 보면 언제나 내게 못 박혀 있었다. 물론 하루 종일 나를 보고 있을 리는 없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어 집 안을 돌아다니다가 별생각 없이 뒤돌아보면 복도 모퉁이에서 새어머니가 얼굴 반쪽을 내밀고 이쪽을 보고 있다.
정원방에서 집 남쪽에 펼쳐진 석가산을 바라보다가 흠칫 놀라 고개를 뒤로 돌리면 살짝 열린 맹장지 틈으로 엿보는 새어머니의 눈이 보인다.
욕실에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젖빛 유리문에 새어머니의 기모노 무늬가 희미하게 비친다. 그리고 침으로 적신 듯이 젖빛 유리 일부가 살짝 맑아지고 거기에 욕실을 들여다보는 눈이 나타난다.
- 이렇듯 새어머니는 도처에서 나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감시당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연히 본 것도 아니며, 애정을 담아 새로 얻은 아들을 지켜보았던 것도 당연히 아닐 것이다. 새어머니는 틀림없이 자신의 의지로 나를 엿보았지만 그 시선에서는 늘 아무 감정도 없는 듯한 으스스함이 느껴졌다.
- 으스스하다고 하니 생각나는데 한 번은 집에서 앉아 놀고 있는데 목덜미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벌레라도 달라붙었나 싶어 손으로 털었지만 그 느낌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목덜미를 털어내다 보니 손가락에 묘한 감촉이 전해졌다. 머뭇머뭇 집어서 눈앞으로 가져오자 그것은 기다란 검정색 머리카락 한 올이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수상한 기척이 느껴져 등골이 오싹했다.
뭔가 내 바로 뒤에 있다...
-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지만 그냥 있으면 더 무섭다. 용기를 쥐어짜내 뒤를 돌아다보자 맹장지 뒤편에서 새어머니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내 바로 뒤에 서서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내 목덜미를 들여다보던 새어머니의 아주 사위스러운 기척이 방 안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새어머니는 저만치 떨어진 맹장지 뒤편에 숨어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 이때도 정말 소름이 끼쳤지만 뒤돌아보자 바로 앞에 새어머니가 서 있었을 때는 그야말로 기겁했다. 그런 일이 두 번 정도 있었다. 새어머니는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는데 어째서인지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았다. 분명히 나를 보고 있는데도 마치 전혀 다른 나, 내 속의 다른 나를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더 이상 배길 수 없을 만큼 겁이 났던 기억이 선명하다.
- 새어머니는 도대체 뭘 보고 있었을까...
나는 그 답을 몇 개월 후에 알아차렸다. 하기야 알았다고 해서 개운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불안함과 불쾌함과 두려움이 더 커졌을 뿐이다.
- 새어머니의 시선도 성가셨지만 실은 그 이상으로 자주 느끼고 본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발이었다. 햐쿠미 가에 왔을 때 본 새어머니의 발, 어둠 속에 어렴풋이 떠올라 있던 창백한 발, 내 머릿속에 각인되고 만 요염한 발.
- 어스름한 복도를 걷다가 문득 앞쪽 모퉁이에 눈길을 주면 거기에 그 발이 있다. 금방이라도 새어머니가 모퉁이를 돌아 나올 것 같아 멈춰 서서 기다리고 있으면 발은 그대로 스윽 안쪽으로 사라진다.
그렇다. 마치 '요염하고 창백한 새어머니의 발'이라는 생물이 고양이처럼, 아니면 뱀처럼 집 안을 배회하고 있다... 그런 환상을 품을 만큼 나는 그것에 매료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새어머니의 시선은 언제나 목덜미에 소름이 돋고 몸이 덜덜 떨릴 만큼 무서웠다. 몇 번을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 발은 달랐다. 며칠 보지 못하면 어쩐지 나오기를 고대하게끔 되었다. 그것을 생각하기만 해도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양쪽 다 새어머니인데 그 차이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 그런데, 요염하고 창백한 새어머니의 발을 복도 앞쪽 모퉁이에서 보고 거의 황홀경에 빠진 채 멈춰 서 있는데 정반대 방향에서 새어머니가 나타난 적이 실은 몇 번 있었다.
그건 뭐였을까...
정말로 그 집에는 요염하고 창백한 새어머니의 발이라는 생물이 숨어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이렇듯 새어머니는 이상했지만 내게 전혀 말을 붙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극히 드문 일이기는 했지만 가끔은 말을 걸었다. 말을 거는 장소와 상황에 특별한 공통점은 없었다. 다만 그 목소리는 언제나 느닷없이 내 뒤쪽에서 들려왔다.
"뭐 하니?"
실제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새어머니가 알고 싶었을 리는 없다. 새어머니의 시선에서 의미를 찾아낼 수 없었던 것처럼 분명 이 말에도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덧붙여 햐쿠미 가에서는 새어머니만이 이 지방 특유의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어쩌면 아버지 역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
- 그 증거라고 해도 되리라. 다미는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갈 때가 많았다. 어린아이는 집 안보다 밖에서 놀아야 한다고 여겼는지도 모르지만, 밖에 나가야 다미가 어쩐지 안심하는 표정을 짓는 것으로 보아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밖에 나가도 마을은 거의 돌아다니지 않았다. 햐쿠미 가 뒤편에 있는 '뒷산'을 거닐든지, 오래전에 성이 있었다는 '성산 城山'을 오르든지, 아니면 집에서 조금 떨어진 우시나키가와 牛亡川 강가로 가든지, 이 셋 중 하나였다. 햐쿠미 가 사람은 절대로 만날 일 없는 장소라는 것이 세 곳의 공통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뒷산에는 햐쿠미 가의 묘지가 있었다. 하지만 자주 성묘를 가던 할머니가 은거방에 틀어 박힌 후로는 찾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 계단식 논 같은 지형의 계단마다 늘어선 햐쿠미 가의 묘비가 내 눈에는 몹시 기묘하게 보였다. 특히 윗단에는 훌륭한 무덤이 자리 잡고 있지만 아랫단으로 가면서 나무 묘비나, 묘비 대신 널빤지 쪼가리를 세운 허름한 무덤으로 변해갔다. 그런 광경이 마치 묘비의 진화나 쇠퇴 과정을 나타내는 것 같아 참으로 이상야릇했다.
느낀 그대로 다미에게 말하자 믿기지 않는 설명이 되돌아왔다.
"윗단에 있는 훌륭한 묘비는 바로 세우는 게 아니우. 3주기, 7주기, 13주기, 17주기... 이렇게 공양을 할 때마다 묘비를 새로 세운다우. 제일 위에 있는 훌륭한 석비를 세우려면 삼십삼 년은 걸린다우."
- 다섯 살인 내게는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긴 세월이었다. 그렇게 기다릴 것 없이 바로 묘비를 세워주면 될 텐데, 하고 어린 마음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다미 말로는 사람은 죽은 지 삼십삼 년이 지나야 겨우 조령 祖靈으로 모실만한 영혼이 된다고 한다.
묘지는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묻힌 햐쿠미 가 사람의 대부분이 아직 조령으로 모셔질 만한 영혼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자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다지 기분 좋은 곳은 아니었다.
- 실은 그런 무덤보다 더 무서운 곳이 있었다. '뒷산'이다. 교토 거리 한복판에서 자란 나는(그 기억이 거의 없다고는 하나) 자연 속에서 논 적이 없었다. 그래서 뒷산으로 들어가기만 해도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다. 묘지에는 조령이 되지 못한 죽은 자들이 잠들어 있다고는 해도 거기는 적어도 인공적으로 만든 곳이다. 하지만 뒷산 깊은 곳에는 인간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았다. 인위적인 요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 사실이 몹시 끔찍했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존재가 조금도 의미를 지니지 않은 곳도 있다는 사실을 아마도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 한동안 뒷산을 거닐 때는 내내 다미에게 꼭 달라붙어 있었다.
"도령은 사내아이면서 겁도 참 많수."
다미는 웃으면서도 반드시 나를 가까이에 두었다. 그리고 늘 내게 이것저것 가르쳐주려고 했다.
"도령, 이 풀은 말이우."
"도령, 거기 나무는 말이우."
"도령, 저기 있는 새는 말이우."
내게 다미는 할머니이자 어머니이자 누나이자 친구이자 또한 선생님이기도 했다. 인간관계의 전부였다.
- 덧붙여 다미도 고용된 아주머니와 이따금 방문하는 아저씨 일꾼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나를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들의 말투에 비웃는 기색이 깃들어 있음을 민감하게 눈치채고 그 호칭을 싫어했다. 그런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자 다미는 나를 '도령'이라고 불렀다.
- 다미가 가르쳐주는 모든 것이 내게는 신선했다. 이때의 나는 분명 엄청난 기세로 수많은 지혜와 지식을 흡수했다. 과장을 좀 보태어 말하자면 이후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 대부분을 다미와 지내는 동안 익히지 않았을까 싶다.
- 하지만 아무래도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다미는 미신을 신봉한다고 할까, 신심이 아주 깊었다. 영험을 믿고 액막이를 하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밖을 돌아다니다 길가의 작은 당집이나 도소진(道祖神, 악령의 침입을 막고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마을 입구, 언덕, 길 등에 모시는 신), 그리고 지장보살이 눈에 들어오면 반드시 멈춰 서서 두 손 모아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알았는데 신사에서 자란 경험이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부터 해오던 습관이리라.
하기야 당시의 내가 다미의 말과 행동에 의심을 품었을 리 없다. 오히려 뜻도 모르면서 어깨너머로 다미를 따라 하려고 했다. 물론 강요당한 것은 아니다. 다미를 믿었기 때문에 아무 의문도 품지 않고 흉내를 내고 싶었다. 그저 그뿐이다.
-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에 위화감을 느꼈을까. 바로 한 신당이었다.
- 햐쿠미 가 정문을 나서서 돌계단을 내려간 후 집 바깥 둘레를 따라 남쪽으로 걸어가면 이윽고 '미타마 巳珠의 덤불'이라는 곳에 다다른다. 아마도 정원방 앞의 광대한 정원을 가로질러 그 너머에 펼쳐진 '햐쿠미의 숲' 일대를 빠져나가면 미타마의 덤불에 이르지 않을까 싶은데, 그 덤불 근처에 위치한 거목 밑동에 작은 신당이 있었다. 신당은 거기 있는 줄 모르면 절대 찾아낼 수 없을 만큼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오도카니 자리 잡고 있었다.
- 작고 지저분하며 반쯤 황폐해진 분위기가 감도는 신당이 나는 왠지 무서웠다. 터무니없을 만큼 큰 공포와 함께 뭐라고도 형용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늘 느꼈다. 돌로 만든 지장보살과 도소진 그리고 다른 신당에 참배할 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그 고풍스러운 신당에서만은 이상한 요기가 느껴졌다.
내가 그 정도로 문제의 신당을 의식한 것은 어쩌면 다미 탓인지도 모른다. 하기야 이렇게 적었다고 해서 다미가 특별히 더 오래 참배하거나 특별한 공양을 했다는 뜻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다른 신앙 대상을 대할 때와 똑같은 자세로 임했다.
하지만 내게는 어쩐지 신당에 모신 뭔가를 공경하면서도 공경하는 마음 못지않게 아니면 그 이상으로 두려움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 다미를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으리라.
- "도령. 자, 다미에게 가르쳐주시우, 뱀신님이 얼마나 길었는지 다미에게 어서 보여주시우."
"..."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않자 애원하듯이 머리를 조아리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이우, 도령. 다미에게 알려주시우."
애가 타서 죽을 것 같은 다미를 보며 나는 어느덧 두 집게손가락을 내밀어 양옆으로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본 뱀의 길이만큼 됐다 싶을 때 움직임을 멈추고 다미에게 보여주었다.
그 순간 다미는 내 양 집게손가락 사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마치 날카로운 칼로 자르듯이 오른손 손날로 힘껏 내리쳤다.
"... 후우."
그리고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미는 절대로 뱀을 손가락질해서는 안된다고 일러주었다. 그런 짓을 하면 손끝부터 썩기 시작해 결국은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다. 만에 하나 실수로 손가락질했을 때는 양집게손가락을 뱀의 길이만큼 벌린 후 다른 사람이 손날로 자르듯이 그 공간을 내리쳐야 한다고 말했다.
무지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하늘에 뜬 무지개를 봐도 역시 절대로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 무지개는 하늘의 뱀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 그런 일도 있고 하여 나는 점점 그 신당이 거북해졌다. 한층 큰 공포를 품게 되었다.
이 일이 훗날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 무시무시한 그 체험으로 이어질 줄 이때의 나는 몰랐다.
- 늘 가슴 한구석이 찜찜했다. 허공에 매달린 채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는 듯한 기분...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나는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세상에는 이치에 맞는 이야기와 이치에 어긋나는 이야기 말고도 어떻게도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유의 이야기만은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 나는 나무가 우거져 그늘진 산길을 걸으며, 또는 다미의 방에서 현관 앞 포석을 때리는 음울한 빗소리로 귀를 적시며 다미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벌벌 떨면서도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몹시 무서웠지만 듣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그런 묘한 기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았다.
- 다미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는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어떤 여자가... 어렸을 적 이야기라우. 그 여자는 근처에 사는 사내아이와 함께 자주 가까운 산에 올라갔수. 그런데 그 산비탈에 아주 오르기 힘든 돌계단이 있었수. 이상한 돌계단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늘 올라갔수. 그런데 거기 갈 때마다 가족과 친척에게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나서 언제부터인가 산에 오르지 않게 되었수. 그 여자는 어른이 되어 도시로 나갔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으로 돌아왔수. 그때 문득 그리워져서 그 산에 갔수. 그런데 돌계단인 줄 알았던 것이 빼곡하게 줄지어 선 묘비 아니었겠수."
- "어떤 사람한테 고모 세 명이 있었수. 할머니 법사 날 모였을 때 옛 추억을 떠올리며 이야기꽃을 피웠수. 그러다 고모들이 어렸을 때 집에 불이 난 이야기가 나왔수.
그러자 한 고모가 '그때 불타는 집에서 어머니가 날 업고 나왔지'라고 그리운 듯이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다른 고모가 '아니우 어머니가 업고 나온 건 나라우' 하고 화를 냈수.
그러자 마지막 고모가 '둘 다 착각했구먼. 어머니가 업고 나온 건 나라우, 나' 하고 말하며 웃었다.
그 당시 상황으로 보아 할머니는 분명 한 명만 업고 나올 수 있었을 텐데 세 사람 다 업혀 나온 기억이 있다면서 모두 바득바득 우겼수. 이제 와서는 할머니한테 확인할 수도 없지 않수. 세 고모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수."
- "어느 집 식모가 밤을 먹고 있었수. 그러자 아궁이에서 하얗고 조그만 손이 나오더니 '다오, 다오'라고 했수. 식모는 깜짝 놀랐지만 바로 밤을 그 손에 놓아주자 하얀 손은 밤을 움켜쥔 채 아궁이 속으로 쑥 들어갔수. 도대체 뭘까 생각하고 있는데 또 하얗고 조그만 손이 나오더니 '다오, 다오'라고 했수. 식모는 겁이 나서 아궁이에 불을 지폈수. 다음 날 아궁이 속을 들여다보니 불탄 주걱과 밤이 하나 나왔다고 하우."
- "어떤 사람이 전쟁 때 어느 시골로 피난 갔을 때의 일이우. 밤에 잠을 청하는데 밖에서 뭔가가 들어와서 그 사람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마지막에는 머리맡에 앉더니 얼굴을 들여다봤수. 그런 일이 너댓새나 계속되었다.
그 사람은 무서우면서도 왜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하는지 정말로 궁금해졌수. 그래서 주변 사람에게 넌지시 물어보자 자신과 완전히 똑같은 일을 당한 사람이 근처에 있다는 것 아니겠수. 왜 자신과 그 사람이 그런 일을 당했는지 따져보는 중에 둘 다 묘지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뜯었다는 사실을 알았수.
그 이야기를 마을 사람에게 하자 '묘지에서 고사리를 뜯어서 그렇수. 묘지에서 고사리를 뜯으면 절대로 안 되우'라고 했수. 왜 그런지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충고를 새겨듣고 고사리를 뜯지 않자 밤에 뭔가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수. 그런데 같을 일을 당한 다른 사람은 어느 날 밤에 어디로 갔는지 감쪽같이 사라졌수."
- "어느 집 유모가 절 경내에서 아기를 어르고 있었수. 내리비치는 햇살이 참으로 포근하여 유모는 본당 난간에 기대어 깜빡 졸고 말았수. 문득 눈을 뜨자 등이 묘하게 허전한 기분이 들었수. 퍼뜩 놀라 등을 더듬거리자 업고 있던 아기가 없지 않겠수. 멋대로 엉금엉금 기어갔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자 기둥에 새겨진 괴물 입으로 아기 옷소매가 주르르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수. 유모는 아기가 기둥에 새겨진 괴물에게 잡아먹혔다며 난리를 피웠지만 주인 나리와 안주인은 물론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아기는 그대로 행방불명되었수. 유모도 반쯤 미쳐서 어딘가로 가버렸수."
- "어떤 영감님이 장례식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길 한가운데 있는 뱀을 보았다. 기분이 나빠서 피했는데 뱀이 아니라 낡은 새끼줄이었수. 고작 새끼줄이었나 싶어 그대로 지나쳐 걷는데 등골이 오싹했수. 뒤돌아보니 그 새끼줄이 바로 뒤에 있는 게 아니겠수. 무서워진 영감님은 친구 집에 들러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서 자기 집에 돌아갔수.
다음 날 그 친구가 와서 '어젯밤 우리 안사람이 낡은 새끼줄로 목을 매어 죽었수'라고 말하며 울었수. 영감님이 곧바로 집에 돌아왔다면 영감님 집안사람이 목을 맸을 거라는 이야기우."
- "고래 등 같은 집이 있었수. 그 집 뜰에는 커다란 녹나무가 있었수. 집주인은 그 녹나무를 베려고 마음먹었수. 그런데 인부들이 도끼로 찍자 찍은 곳에서 새빨간 즙이 뿜어져 나왔고, 즙을 뒤집어쓴 인부들이 모두 학질에라도 걸린 것처럼 부들부들 떠는 바람에 일은 전혀 진척되지 않았수. 다른 인부를 부르려고 해도 녹나무의 저주라는 소문이 퍼져서 아무도 나무를 베려하지 않았수.
집주인이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밤중에 뜰에 멍하니 서 있자니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수. 귀를 기울이자 이런 이야기였수.
'집주인은 꼭 벨 모양이우.'
'걱정 마우.'
'하지만 열 명이 얼굴에 붉은 칠을 하고 도롱이를 입고 양손에 도끼를 들고 동서남북 방향에서 차례대로 도끼질하면 어떻게 하우.'
그다음 날이우. 집주인이 어젯밤 들은 대로 인부 열 명을 준비시켜 동서남북 순서로 녹나무에 도끼질을 하자 녹나무는 주홍색 거품을 뿜으며 결국 넘어가고 말았수. 그 순간 두 동강 난 녹나무 속에서 웬 노파가 백발을 휘날리며 뛰쳐나와 집주인에게 덤벼들었수.
인부들이 허둥지둥 집주인에게 달려갔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고 하우."
- "교키라는 스님이 난바에 선착장을 만들고 법회를 열었수. 사람들이 잔뜩 모였는데 그 가운데 가와치 지방의 가와마타에서 왔다는 여자가 있었수. 여자는 아이를 업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엉엉 우는 바람에 스님 말씀이 들리지 않았수. 그 아이는 열 살은 되어 보이는데도 여자 등에 업힌 채 엉엉 우는 것도 모자라 계속 먹을 것을 쩝쩝대고 있었수.
교키 스님이 그 여자를 보고 아이를 물에 버리라고 말했수. 모여있던 사람들은 아무리 설교를 방해했기로서니 그렇게 잔인한 말을 했다는 사실에 모두 깜짝 놀랐다. 그 여자도 아이를 버리지는 않았수.
그다음 날이우. 여자와 아이가 또 와서 전날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수. 교키 스님은 다시 한번 아이를 물에 버리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자가 스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하고 망설임 없이 아이를 물에 버렸수. 깊고 깊은 물에 빠진 아이는 일단 가라앉았다가 바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발버둥을 치며 '안타깝다, 앞으로 삼 년은 들러붙어서 뜯어먹으려고 했는데'라고 말하고 물 밑으로 가라앉았수."
- 표현이 어려웠던 탓인지 사투리 탓인지 가끔 알아먹기 힘든 말도 있었지만 그렇게 큰 지장은 없었다. 다미의 독특한 말투가 아마도 최면술 같은 효과를 발휘한 것이리라.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어느 틈엔가 몸이 벌벌 떨렸다.
하기야 자란 뒤에는 <일본영이기 日本靈異記>나 <금석물어집 今昔物語集>(각각 헤이안 시대 초기와 후기에 쓰여서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집이다)이 그 이야기들의 출전일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가령 당시 그 이야기들이 어디에 쓰여 있는지 설명을 들었다고 해도 별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무서운 것은 무섭다. 그뿐이다. 아니, 어른이 된 지금도 역시 다미의 옛날이야기는 무섭다...
- "이건 비밀이우."
이 입버릇이 나오면 뭔가 새로운 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안에 침이 잔뜩 고였다.
나는 맛보기는커녕 구경도 못 해본 으름과 산수유 열매를 따는 다미를 보고 있으면 그녀가 정말 대단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이것이 진짜 다미의 모습이며 햐쿠미 가에 있는 그녀는 마물의 주문에 걸려 본래 힘을 내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다, 때때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미는 맛있는 나무 열매뿐만 아니라 약초와 독초를 구분하는 방법도 가르쳐주었다. 마치 내가 홀로 산이나 들에 내버려져도 충분히 살아갈 만한 지식을 미리 전수해두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 그 고상식 가옥(홍수나 짐승 등의 피해에 대비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짓는 집) 같은 묘한 집은 여섯 살짜리 아이도 이상하다고 여길 만큼 기이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불길한 공기가 건물 주위에 들러붙어 감돌고 있었다. 그런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커다란 당집인 줄 알았다. 당집치고는 너무 컸지만 정면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격자 쌍바라지 문이 자못 당집에 어울려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문은 이상하리만치 작았다. 어른은 쪼그리고 앉아야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호기심이 동해 나무 계단을 올라가 보았지만 격자문에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격자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아도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실망스런 가운데 시선을 모으자 문간에서 약간 들어간 곳에 빈지문 같은 널빤지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즉 격자문에서 널빤지 문까지가 현관바닥 같은 역할을 하는 공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비좁았다.
- 당집에서 그것과 대치한 이후의 기억은 그다지 없다.
마치 어머니 배 속에서 출산길을 통해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암혹을 헤맨 후에 눈앞이 희미하게 밝아졌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다만 어머니 배 속이나 출산길이라고 해도 따뜻하거나 편안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싸늘하고 무서운 느낌이 들었지만...
그러고 나서 푹신하고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보드랍고 따스한 것에 살짝 감싸인 느낌이었다. 나를 향한 절절한 애정이 듬뿍 담긴 포근함이었다.
하지만 바로 맹렬한 추위도 느꼈다. 동시에 몸이 떠올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둥실둥실 떠다니는 듯했다. 의식은 없었는데도 이때 눈을 살짝 뜬 듯한 기분이 든다.
눈 아래로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새하얀 구름이 틈새 없이 죽 이어져 있었다.
- "다미 씨도 좀 자야죠."
아주머니의 시선은 분명 내 뒤쪽에 머물러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그것을 향해 한 말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어째서 다미 할멈의 이름이 나온 걸까...
맹장지 건너편에는 그것이 있는데...
설마... 그런...
네 발로 기듯이 엎드린 자세로 나는 머뭇머뭇 뒤돌아보았다. 반대쪽 맹장지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그것에게 조심스레 눈길을 주었다.
새하얀 머리카락, 퀭한 눈, 쑥 들어간 뺨, 힘없이 늘어뜨린 어깨와 구부정한 등. 거기에는 단숨에 열 살도 넘게 늙어버린 듯한 다미가 앉아 있었다.
- "다미... 할멈..."
왜...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꿀꺽 삼켰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집에서 나를 구해낸 사람은 다미였다. 새하얀 구름으로 보였던 것은 눈이고, 하늘을 질주한 것은 내가 다미의 등에 업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대가로 다미는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 도대체 그 당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윽고 꺼림칙한 의문이 머릿속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무슨 일이...
나는 머릿속으로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는 것을 제외하면 얼빠진 상태였고 다미는 계속 울기만 했다.
- 지녀야 할 혼이라고 할까,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공허함이 느껴졌다.
"도련님은 열이 아주 높았어요. 바로 의원을 불러서 주사를 놓아달라고 했죠. 그 뒤로는 죽을 먹을 때 말고는 죽은 듯이 잤어요."
이 아주머니에게는 의원의 주사가 가장 훌륭한 치료법인지 자기 일처럼 아주 의기양양해했다.
"도련님이 잠든 내내 다미 씨는 곁에 붙어 있었어요. 뭐, 곁이라고 해도 맹장지 밖에서 들여다보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래도 큰마님은 둘째치고 잘도 마님이 허락을..."
입을 잘못 놀렸다고 생각했는지 아주머니는 느닷없이 슬쩍 말을 돌렸다.
"의원님도 다미 씨를 진찰하고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요. 그렇다기보다 의원님은 원래 다미 씨를 몰라요. 다미 씨가 유모를 그만두고 난 뒤에 전에 계셨던 의원 후임으로 들어오신 분이거든요. 그러니 도련님을 찾으러 갔다 온 사이에 할망구가 됐다는 말을 어떻게 믿겠어요. 나리랑 마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시지, 다른 사람들도 결국에는 입을 다물었죠. 저 혼자 진짜라고 거듭 말해본들 무슨 소용 있겠어요."
다미의 원래 모습을 모르는 사람에게 다미가 고작 몇 시간 만에 십 년도 넘게 늙었다고 말한다면 분명 믿어주지 않으리라. 하물며 상대는 의원이다. 게다가 아버지도 새어머니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고 하니 아주머니 혼자 주장해 봤자 아무 소용없었을 것은 ...
- 거기서 말을 끊고 침을 꿀꺽 삼키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드, 드, 들어갔어요?"
그 말투와 태도에 나는 즉시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공포로 몸이 떨리는 것 이상으로 아주머니가 거기를 당집이라 불렀다는 사실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당집이라면 나도 아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모두 다미가 가르쳐준 곳인데, 그중에 크기가 조그마한 집만 한 데다 기묘한 출입구가 두 개나 있고 정체 모를 그것이 있는 당집은 하나도 없었다.
다미는 당집이나 신당 앞에 오면 어떤 신이나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지 늘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즉 당집은 신불이 계시는 곳이다. 그렇다면 나를 쫓아왔던 그것도 실은 신이나 부처님이었을까.
아니다. 그런 숭고한 존재는 아니었다. 더 꺼림칙하고 부정한 것, 무시무시하고 불길한 것, 틀림없이 그런 것이었다.
- 다시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사레가 들려 하마터면 체할 뻔했다.
눈앞에 새어머니의 얼굴이 있었다.
어느 틈에 방에 들어왔는지 바로 옆에 새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변함없이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 봤니."
온몸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고 등골이 서늘해지며 오한이 났다.
그 순간 어째서인지 그것에 관해 입 밖에 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 당집을 언급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 다다음 날 아침까지 나는 이불 속에서 지냈다. 열은 내렸지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숙면을 취한 것도 아니다. 꾸벅꾸벅 졸다가 깨어나고, 꾸벅꾸벅 졸다가 깨어나고를 되풀이했다.
졸다가 깨어났을 때 오른쪽 맹장지가 닫히는 모습이 몇 번인가 시야 구석에 들어왔다. 분명 다미가 내 상태가 어떤지 보러 왔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내가 겁을 먹을까 봐 맹장지를 가만히 닫은 것이 틀림없다.
다미 할멈은 무섭지 않다.
목소리를 크게 내어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잠이 완전히 달아날 즘에는 늘 맹장지가 닫혀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맹장지가 먼저 닫혔다.
- 다쓰미 龍巳라는 성씨를 쓰는 낯선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딱 한 번 병문안을 온 적이 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아저씨는 햐쿠미 가의 분가에 해당하는 집안 사람으로 본가에는 오본과 정월 때 인사하러 온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꽤 나이가 많았지만 햐쿠미 가와 관련된 사람치고는 보기 드물게 둘 다 상냥해 보였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이런 걸 사 왔는데 마음에 들면 좋겠네."
아주머니가 빨간 망에 든 과자를 내 머리맡에 놓으며 말했다. 그것을 본 순간 앗, 하고 놀랐다. 우연하게도 무더운 여름날 햐쿠미 가로 오는 도중에 본, 역 매점에 매달려 있던 과자와 똑같은 것이었다.
- 진지하게 나를 보고 엄한 투로 충고했다.
"당집에서 마주친 것에 관해서는 절대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우."
아마도 내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을 것이다.
"도령, 내 말 새겨들으시우.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아는 사람 곁에 가려고 하우. 그렇게 해서 살아남으려고 하우. 그러니까 절대 다른 사람한테 그것 이야기를 하면 안 되우."
다미는 보기 드물게 무서운 표정으로 경고하듯이 힘주어 말했다.
- 그래도 미타마의 덤불 근처 신당에는 딱 한 번 다미와 함께 갔다. 이때도 다미는 신당에 합장한 후 여느 때와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도령, 잘 들으시우. 앞으로 이 신당의 뱀신님께 인사드리지 않고 백사당 百巳堂에 들어가면 절대 안 되우."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바로 그 당집이 백사당이라고 이해했다.
"아니, 아예 백사당에는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마시우. 가까이 가서도 안 되고, 뱀신님께 인사드리지 않고 그 당집에 들어가는 건 더 ... "
- 술래가 이 말을 끝마칠 때까지는 아무도 제자리에서 움직이면 안 된다. 그러므로 술래는 "뭐어라고 해앴어어?" 하고 가능한 한 한 글자씩 길게 늘여서 말하며 제일 가까운 사람을 향해 달려간다.
술래와 너무 멀어지면 도리어 달아나는 쪽이 불리해지는 규칙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대개는 문답을 서너 번 되풀이하고 나서 "그래"라고 대답했다. 언제 긍정의 대답을 할지는 대체로 구누기다가 결정해서 신호를 주었다고 기억한다.
이 놀이는 아주 즐거웠지만 동시에 몹시 무섭기도 했다.
"누구 등에 뱀이 씌었대요."
"나 말이야?"
"아니야."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면 술래를 맡은 아이 등에 정말로 뱀이 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두가 "그래" 하고 대답할 때는 실제로 그 아이가 뱀 괴물로 변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래" 하고 대답하고 술래가 뒤돌아서 쫓아오는 순간이 더할 나위 없이 무서웠다.
- 술래에게 쫓기다 잡힌 아이는 뱀이 된다. 뱀이 되면 술래와 함께 다른 아이를 붙잡으러 돌아다닌다. 술래와 뱀은 개별적으로 행동해도 되고, 서로 손을 잡고 도망치는 사람을 감싸며 몰아가도 상관없다. 따라서 뱀이 점점 늘어남에 따라 남은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도 커진다.
어쩌면 어릴 적에 느끼는 적당한 공포는 성적 흥분과 조금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이 술래잡기를 할 때 나는 꼭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으스스해서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인데 어쩐지 들떴다.
- 다만 나는 술래의 기분은 몰랐다. 모두가 "그래" 하고 대답하기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그 순간이 오면 뒤돌아서서 붙잡으러 쫓아다닌다. 그것이 어떤 기분인지 전혀 몰랐다. 왜냐하면 나는 단 한 번도 술래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처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나중에 냈다고 지적당한 아이들이 하나같이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묘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꼭 내가 가위바위보에 졌을 때만 누군가가 나중에 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다. 손을 조금 늦게 내는 아이가 있어도 그냥 넘어갈 때도 있는데 어째서인지 내가 졌을 때만은 반드시 누가 나중에 냈다며 가위바위보를 다시 했다.
- 그런 일이 벌어지면 또 다미에게 걱정을 끼치겠지만 호기심을 누를 수 없었다. 나는 도도야마 산에 매료되었다.
- 기세등등하게 오기는 했지만 나는 붉은 빛에 감싸인 도도야마 산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운두가 높은 밥공기를 엎어놓은 듯한 도도야마 산은 마치 땅에서 불룩하게 튀어나온 혹 같았다. 혹은 거대한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으로도 보였다.
- 왜 도도야마 百々山라는 묘한 이름이 붙었는지 산 이름을 가르쳐준 담임에게도 물어보았지만 "글쎄"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이다. 산 정면에 쓰쿠모 九十九라는 작고 아주 황량한 신사가 있는데 '구십구 九十九'와 '백 百’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산 이름과 신사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뒷산'이나 '성산'과 마찬가지로 그저 올라가 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도 아주 가까이에서 그 산을 보자 어쩐지 꺼림칙하게 들리는 도도야마라는 독특한 이름이 이 산에 매우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이름에 숨겨진 사악한 뭔가가 산이라는 위용 어린 모습으로 변해 웅크리고 있는 듯한 기척이 주변에 가득 넘쳤다.
산에 오르기가 조금 망설여졌다. 무섭다기보다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 아니냐는 기분이 문득 들었다.
- 뜻밖의 대답에 놀랐다. 내게 그런 반점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보통은 부모님이 이미 알려주었어야 마땅했지만 내 부모님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어떻게 생겼는데?"
반점 때문에 나를 훔쳐보았다는 것을 알고 나자 반점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졌다. 모두가 보고 싶어 할 정도이니 아주 크고 몹시 추한 모양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커? 기분 나쁠 정도야?"
거듭 묻자 스나가와는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벌려 대강의 크기를 가르쳐주었다.
"음, 그렇지는 않아. 이만해."
- 스나가와의 손가락을 보자 마음이 약간 놓였다. 더 큰 줄 알고 걱정한 나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바로 스나가와에게 물어보았다.
"그 반점, 어떤 모양이야?"
또다시 머뭇거리던 스나가와가 처음으로 내 눈을 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 비늘.”
"..."
"그냥 그렇게 보일 뿐이고..."
"... 뱀의."
- 다미는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스나가와의 할아버지와 완전히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아주 놀란 것이다. 다미가 그토록 감정을 크게 표출하다니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착한 아이우?"
생각에 잠긴 것처럼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미가 물었다.
"예. 그 애 집에도 몇 번 갔었어요."
덧붙여 스나가와의 할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았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랬구먼요. 잘됐수."
다미는 어째서인지 안심한 듯이 빙긋 웃었다. 처음으로 보는 조금 눈부신 웃음이었다.
- "할아버지가 뭘 줬어요?"
다미가 보퉁이를 풀어보려는 기색이 없어서 나는 안달이 난 나머지 물어보았다.
"... 글쎄요."
대답은 했지만 다미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내 질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것처럼 보였다.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겠지만 다미가 그러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고 있을 때였다.
다미가 더 당혹스러운 말을 꺼냈다.
"... 도령, 내 말 명심하우. 착한 아이라니까 스나가와 하고는 같이 놀아도 상관없수. 하지만 큰마님은 물론 나리께도, 마님께도 말하면 안 되우. 아니, 집안사람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되우."
- 다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답답하고 찜찜한 뭔가가 어느 틈엔가 자연스레 마음속에 싹텄고, 그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그만 초조함으로 자라난 듯한 기분이 줄곧 들었다. 그 찜찜함의 정체 중 일부가 나를 대하는 반 아이들의 태도라는 것을 스나가와와 이야기하면서 알았다. 그 덕분에 정신적으로 상당히 편해졌다.
하지만 최근에 아무래도 스나가와의 존재 자체가 찜찜함의 정체에 포함되는 것 아닌가 하는 아주 꺼림칙한 예감이 들었다. 왠지 스나가와도 찜찜함의 정체에 관련이 있는 듯했다. 그런데 그 정체를 아무래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욱 조바심이 났다.
때문에 다미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다미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까지 내가 찜찜함을 견뎌오면서 쌓였던 울분이 그 순간 폭발하고 말았다.
- 다미를 기쁘게 할 생각으로 여름방학 때 스나가와와 함께 도도야마 산에 올라갈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장마가 시작될 무렵에 스나가와하고 친구가 되었기 때문에 산에는 장마가 끝나고 나서 올라가기로 했는데, 결국은 여름방학 때로 미루었다. 실은 스나가와와 둘만의 비밀이었지만 산길 거닐기를 좋아하는 다미에게 이야기하면 분명 기뻐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말을 듣자마자 다미의 안색이 변했다.
"도령! 그 산에는 절대 올라가면 안 되우!"
다미는 내 눈앞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대더니 몹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령, 그 산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지금 여기서 약속하시우!"
그동안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만큼 무서운 표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백사당에서 나를 구해낸 후 다미의 용모가 (이런 식으로 말하려니 괴롭지만) 추하게 변한 터라 나는 충격이 컸다.
- "그것 가지고는 안 되우."
다미는 납득하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이지 말고 말로 해서 제대로 약속하시우."
웬일인지 몹시 집요했다. 내가 입을 열 틈도 없을 만큼 몇 번이고 "약속하시우"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 다미의 태도와 표정이 갑작스레 싹 달라진 바람에 처음에는 순순히 다미의 말에 따랐지만, 짜증이 날 만큼 몇 번이고 약속을 요구하는 말에 진절머리가 났다. 어쩌면 다미는 용모뿐만 아니라 머리도 이상해진 것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을 정도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다미의 중얼거림을 들은 순간 그 생각이 완전한 착각임을 깨달았다.
"특히 지금의 도령은... 안 되우."
의미는 몰랐지만 섬뜩했다. 동시에 다미는 제정신이자 진심을 다하고 있다는 걸 이해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호기심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 저 산에 뭔가 있어요?"
머뭇머뭇 물어보자 뭐라고 중얼중얼하던 다미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했다. 다미는 다시금 내 얼굴을 빤히 보며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암요, 있수."
- 그리고 옛날이야기를 해줄 때와는 명백히 다른 말투로 도도야마 산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도령도 성산에는 몇 번 갔었수. 거기에는 옛날에 조그마한 성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일전에 했으니 기억하고 있을 거우. 그 성에서 귀문 방향에 있는 게 도도야마 산이우. 귀문이란 마물이 나오는 나쁜 방위를 가리키우.
그 성에서 보이는 도도야마 산의 비탈, 혹은 그 반대편 비탈에 돌부처라고도 묘비라고도 할 수 없는 똑같은 크기의 돌이 백 개 있다고 하우. 아무튼 산비탈에 돌이 백 개 늘어서 있다는 거우. 한쪽 비탈이 아니라 양쪽 다에 있다는 사람도 있지만 직접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수.
왜냐하면 그 돌을 본 사람은 두 번 다시 산에서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우. 또한 그렇게 산에서 나오지 못한 사람은 돌이 된다는 소문도 있수. 산이 제물로 백 명의 사람을 원한다는 말도 있수. 돌들이 비탈 양쪽에 있으니 2백 명을 원한다, 돌은 양쪽에 있지만 한쪽은 환상이다, 하는 이런저런 말이 전해지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르우."
- "그런데 어느 해 여름에 성의 무사 두 사람이 누가 더 담대한가, 즉 누가 더 겁이 없는가를 두고 말싸움을 벌였수. 평소부터 두 사람은 출세 경쟁을 하던 사이였는지라 서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수. 결국 도도야마 산에서 담력 시험을 하기로 했수.
도도야마 산에는 옛날부터 조그마한 신당이 있었다고 하우. 무슨 신이 모셔져 있는지 아무도 모를 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우. 마을 노인 말로는 무슨 재앙신이 모셔져 있다고 하는데 아무도 확실하게는 몰랐수.
두 무사는 하필이면 그 신당 앞에서 밤새 백물어를 하기로 했수. 백물어란 무섭고 겁나는 괴담을 하룻밤에 백 가지 이야기하는 거우. 하룻밤에 백 가지 괴담을 이야기하면 마지막 괴담이 끝났을 때 진짜마물이 나타난다는 말이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온다우. 그러니까 보통은 아흔아홉 번째 괴담에서 멈추는 것이 규칙이우.
그런데 하필이면 도도야마 산의 신당 앞에서 백물어를 마지막까지 하고 나서, 그러니까 백 번째 괴담까지 이야기하고 나서 달아나지 않고 남아 있는 쪽이 이기는 거라며 두 사무라이는 승부를 벌이고 말았수."
- "날이 샜지만 두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수. 걱정된 동료 무사가 도도야마 산에 올라가서 봤더니 한 무사가 신당 앞에 쓰러져 있었수. 안아 일으켜보니 칼을 맞고 죽어 있었수. 다른 무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서 싸움을 벌인 끝에 상대방을 죽이고 그대로 달아난 것이 아닌가 싶었수.
하지만 이상하게도 달아난 무사의 칼이 신당 앞에 떨어져 있었수. 게다가 사람을 베었던 흔적이 없었수. 당황한 동료는 칼을 맞은 무사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살펴보았수. 거기에 피가 잔뜩 묻어 있수. 즉 그 무사는 자기 칼에 의해 죽은 거라우. 게다가 칼을 맞았는데도 웃는 얼굴이었다고 하우."
- 다미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며칠 후 저녁이었수. 산에서 괴물이 나왔수. 괴물은 간신히 사람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온몸 가죽이 벗겨진 것처럼 색이 새빨갛고 팔다리도 목도 묘하게 비틀린 상태로 흐느적흐느적 걸어 다녔수. 그런데 웬걸, 그 괴물은 다름 아닌 행방불명되었던 무사였수. 확실히는 모르나 몸의 겉과 속이 뒤집어져 있었다고 하우. 그래도 잠깐 살아 있었던 모양이우."
다미는 여기서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 후로 그 산에 들어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수. 몇 명은 산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모두 이상해졌다고 하우."
- 아주 무시무시한 이야기였지만 어차피 무사가 있었던 시대의 일 아니냐는 안도감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다미는 하아, 하고 한숨을 한 번 쉬었다.
"지금 들려준 이야기는 옛날이야기지만, 전쟁 전 이야기도 있수."
내 기대와는 달리 다미는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 "그 후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산을 뒤졌지만 벌거숭이로 사라진 세 청년은 결국 행방불명됐다우.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댁에서 두 남자가 어떤 여자..."
거기서 다미는 느닷없이 말문을 닫았다. 마치 너무 많이 이야기했다는 듯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 말았다.
"도령, 지금 이야기한 것처럼 거기는 무서운 산이우."
그리고 내 얼굴을 보며 천천히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결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가서는 안 되우."
- 나는 다미와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시 한번 소리 내어 맹세했다. 스나가와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낮에도 도도야마 산에 가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것은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왔기(기괴한 사건도 실제로 일어났다) 때문이었다.
- 여름방학이 가까워진 7월 주말, 스나가와와 놀다가 다미가 들려준 이야기를 했다.
실은 더 일찍 학교에서 들려주고 싶었지만 좀처럼 기회가 없었다. 쉬는 시간마다 구누기다 무리 4인조가 놀자고 찾아왔다. 방과 후에는 늘 함께 돌아가자고 했다. 운 좋게 스나가와와 단둘이 남아도 반드시 그들이 끼어들었다.
- 열 명 정도가 강변에 빙 둘러앉아 저마다 성과를 보고했다. 하지만 다미에게 들은 이야기 이외에는 별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다미가 이야기해 준 네 청년 말고도 전쟁 전에 도도야마 산에 올라간 사람이 두 명 더 있었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누구이고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새로운 정보 중에 가장 구체적이었던 것은 사십 년쯤 전에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둘러싸고 다투던 끝에 도도야마 산에서 담력 시험을 했다는 나가미야의 보고였다. 다미가 마지막으로 말하려다 말고 부자연스럽게 그만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의 차이점은 두 사람이 무사히 산을 내려왔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마치 법칙처럼 한 사람만 내려오고(제정신인지 아닌지는 별개로 두더라도) 나머지는 행방불명되었는데, 이 이야기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무사했던 것은 아니라서 산에서 내려온 후 두 사람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어디가 어땠다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아무튼 이상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은 죽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죽었는지 이유는 안 가르쳐주시더라고. 그래서 다른 남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원하던 그 여자와 결혼했는지도 미처 못 물어봤어."
- 이마키는 무심코 변명을 늘어놓으려다가 구누기다의 표정을 보았는지 허둥지둥 이야기를 시작했다.
"할아버지, 요전에는 혼자서 올라갔다 왔다가 자랑하듯 말씀하셨지만, 실은 산에서 꽤 무서운 일을 겪었나 봐."
"미신이라고 콧방귀를 뀌지 않았던가?"
구누기다가 일침을 가하자 이마키는 고개를 저으며 할아버지 이야기를 계속했다.
"할아버지가 도도야마 산에 올라가려고 했을 때 실은 같이 올라가겠다는 친구가 몇 명 있었대. 그런데 막상 올라가려고 하자 모두 달아나서 할아버지 혼자 남았다지 뭐야. 하지만 할아버지는 오기로 올라가셨어. 처음에는 전혀 겁이 나지 않았대. 이런 산이 무서울 게 뭐 있나 싶어서 김이 빠질 정도였대. 그런데 정상의 신당에 다가갈수록 어쩐지 기분이 점점 나빠지더니, 신당이 보인 순간 인간은 여기 오면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어. 그렇게 생각하며 신당 쪽에 눈길을 줬더니 뭔가가 신당 격자 틈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모습이 보여서 신당 앞을 허겁지겁 달려서 지나갔다나 봐.
그게 뭐였는지는 할아버지도 모른대. 다만 인간이 눈을 마주쳐도 될 만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어."
- " 어느덧 해질녘이 다 되어 할아버지는 서둘러 내려왔다고 해. 할아버지가 그런 산길 굽이를 몇 번 돌았을 때였어. 똑바로 뻗은 산길 한가운데에 쪼그리고 앉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지. 도도야마 산에 사람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누군가 무서운 소문을 무시하고 들어와서 산나물이라도 캐다가 몸 상태가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싶어서 다가가 봤더니 웬 할머니였대. 역시 산나물을 캐러 온 사람이다 싶어서 '할머니, 무슨 일입니까' 하고 말을 걸었지. 하지만 할머니는 몸을 웅크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어. 몸 상태가 그렇게 안 좋은가 걱정돼서 할아버지도 쪼그리고 앉아 다시 말을 걸었지만 할머니는 대답을 하기는커녕 고개를 숙인 채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어.
아무리 말을 걸어도 반응은 없지, 해는 점점 지고 있지, 하는 수 없어서 할아버지는 기슭에 사는 사람을 데려올 테니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부랴부랴 발걸음을 옮겼대."
- 할아버지 말로는 산에서는 날이 저문다고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땅거미가 내린대. 그래서 걸음을 더욱 재촉하여 서둘러 산길을 내려갔대. 지루하게 이어지는 산길을 나아가다 되짚어가듯이 구부러진 굽이를 몇 번이나 돌아서 내려가셨어. 그런데 어느 굽이를 돌았을 때 눈앞에 뻗은 산길 한가운데에 또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어.
할아버지는 무심결에 '어' 하고 소리 낼만큼 놀랐어. 할머니가 자기를 앞질렀나 싶었지만 산길은 외길이었어. 게다가 노인이 바쁘게 걸음을 옮긴 자기를 앞지를 리 없지. 하지만 아까 본 할머니의 동무일지도 모른다고 마음을 고쳐먹고 '할머니 무슨 일입니까' 하고 또 따가갔다고 해.
그런데 그 할머니도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어. 게다가 곁에서 보면 볼수록 아까 전에 본 할머니와 똑같은 사람 같더래.
할아버지는 등골이 오싹해져서 허둥지둥 그 자리를 떠났대. 그리고 거의 달리다시피 산길을 내려왔어. 아무튼 기슭까지 내려가서 사람을 붙잡고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나 봐. 그렇게 산길을 내려오다 굽이를 돌았더니 또 길 한가운데에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어..."
-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할아버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난대. 정신을 차려보니 기슭의 쓰쿠모 신사 도리이(鳥居, 두 개의 기둥을 가로대로 연결한 문 주로 신사 입구에 세운다)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는 거야."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불안한 듯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우시나키가와 강변이 고요해지자 강물 흐르는 소리만 느닷없이 크게 들렸다.
- 어른들의 말다툼이 지겨워져서 본채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였다.
"이대로 여기에 모셔두면 될 것 같수."
아주 작고 소심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퍼뜩 놀란 내가 멈춰 서는 것과 동시에 실내에서 다투던 소리도 딱 그쳤다.
설마... 하면서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방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다미의 모습이 이번에는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 모두가 다미의 말에 따랐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놀라웠다. 의견을 내세운다기보다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정도의 분위기였는데도 그 한마디의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 할머니의 시신을 은거방에 안치하자니 안쪽에 위치한 감금방의 격자가 거추장스러웠다. 그래서 마을에서 바로 목수를 불러 지체 없이 격자 제거 작업을 시작했다.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새어머니와 아버지는 다미에게 시신을 안치하는 절차를 설명해 달라고 했다.
믿기지 않게도 다미가 경야를 도맡아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일꾼들과 업자들에게 지시할 때는 대부분 새어머니와 아버지가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결정을 내린 사람은 놀랍게도 다미였다. 이때 다미는 내가 말도 붙이지 못할 만큼 몹시 바빴다.
- "장송백의례 葬送百儀礼."
그런 말이 이따금 다미의 입에서 나왔다. 완전하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안간힘 다해 귀를 기울인 끝에 그것이 햐쿠미 가의 독자적인 장례식 절차임을 알았다.
'백의례'라고 부를 정도니 백 가지 의례가 있나 싶어 나는 흥미진진하게 다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다가 어떤 사실을 알아차리고 흠칫 놀랐다.
다미의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 다미는 분명 고양된 상태였다. 평소의 다미한테서는 상상도 못 할 만큼 활기차 보였다. 당시의 나는 몰랐지만 어른이 보면 묘한 색기마저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백사당에서 나를 데리고 돌아온 후로 그렇게 빛나는 모습의 다미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 하지만 그런 다미를 보고 기뻤느냐 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다미를 정말 좋아했다고는 하나 말 그대로 물 만난 물고기마냥 죽은 사람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다미의 모습에서는 무심코 뒷걸음쳐질 만한 뭔가가 느껴졌다. 어쩐지 애처로우면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가 복잡한 심경으로 엿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평소 모습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수다스럽게 다미가 장송백의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할머니 시신은 은거방에 안치하면 문제없지만 '내침 內抌'으로 할 필요가 있다. 내침이란 잠잘 때 머리 위치를 평소와는 반대로 하는 것을 가리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뒤집은 기모노로 시신을 덮고 그 위에 칼집에서 빼낸 허리칼을 비스듬히 놓은 후, 머리맡에는 빗자루를 비질하는 부분이 위로 가게 하여 기대어둔다고 한다.
- 다미 말에 따르면 이러한 조치는 전부 마물이 시신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주술이라고 한다. 혼이 빠져나갔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몸은 이른바 빈 그릇 같은 상태다. 그러므로 그냥 내버려 두면 악한 것이 깃든다. 머리를 두는 위치와 기모노를 거꾸로 하는 것은 평소와는 정반대 되는 모습을 연출해서 마물을 현혹하기 위함이다. 그러고도 시신에 들어오려는 마물은 칼집에서 뽑아 놓아둔 허리칼이 그것이 몸에 깃들기 직전에 제지해 준다.
- "그, 그렇군. 그런데 빗자루는 어디에 사용하는 거요?"
할머니의 시신 주변이 서서히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휩싸이자 처음에는 재미있다는 듯이 듣고 있던 작은숙부가 기분이 오싹해졌는지 약간 머뭇대며 다미에게 물었다.
"고양이가 시신을 건드리면 시신이 몸을 벌떡 일으키우. 거꾸로 놓아둔 빗자루는 고양이를 때려서 쫓아내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우."
작은숙부에게 대답하면서 다미는 이미 다음 절차를 생각하고 있었다.
- "시신 주변에 병풍을 두르든지 모기장을 쳐야 하는데 어느 것으로 하시겠수?"
다미는 전권을 위임받은 모양새였지만 선택지가 있을 때는 독단으로 결정하지 않고 반드시 새어머니나 아버지에게 의견을 물었다.
"둘 다 괜찮을 것 같은데..."
아버지는 일단 새어머니를 보고 나서 다미에게 눈길을 주었다. 둘 중에 뭘 쓰든 상관없다는 것이 본심이겠지만 스스로 결정할 수는 없다. 새어머니도 마찬가지인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결국 자신 있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다미뿐이었다.
"집에서 고양이를 키우지 않으니 병풍도 괜찮을 것 같수. 하지만 만에 하나 도둑고양이가 들어올 수도 있으니 모기장을 치도록 하시우."
- 다미가 절차를 설명하는 동안 감금방의 격자를 다 떼어냈다. 그리하여 바로 시신을 안치하기로 했다.
다미는 확인하듯이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아버지와 숙부들이 모기장을 치기 시작하자 은거방에서 슥 나갔다. 곧바로 나도 그 뒤를 따라갔다. 나는 '투명인간' 입장을 이용해 절대 다미에게 말을 걸지 않고 내 모습도 숨긴 채 다미 뒤를 쫓을 생각이었다.
- 다미는 부엌으로 향했다. 고인에게 올릴 마쿠라메시(枕飯, 생전에 고인이 쓰던 밥공기에 밥을 수북이 담고 젓가락을 꽂은 것을 가리킨다)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다미는 아주머니들에게 쌀을 씻지 않고 밥을 지어야 한다고 알려주고 나서 마쿠라단고(枕団子. 멥쌀로 만들어 고인에게 올리는 경단)를 만드는 방법도 가르쳐주었다.
평소에는 거들먹거리던 아주머니들도 이때만은 다미가 하는 말을 순순히 들었다. 마쿠라메시는 빨리 올릴 필요가 있기 때문에 늘 음전했던 다미의 모습에서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아주머니들에게 척척 지시를 내렸다.
다미는 이윽고 완성된 마쿠라메시를 고인에게 올리러 갔다가 바로 부엌으로 돌아와서 다 만들어진 마쿠라단고에 바늘을 수없이 많이 꽂았다. 분명 이 바늘도 마물을 물리치는 힘을 지니고 있으리라.
- 잠시 후 마침내 시신 주변이 정리되었다. 이제 야가 시작되나 싶었는데 다미가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에서 밖으로 나가자 대문에는 이미 '상중'이라고 적힌 초롱이 걸려 있었다. 초롱을 확인한 후 현관 문간에 상중이라는 글자가 적힌 닥종이를 붙인 발을 치고 그 밑에 낫 두 개를 십자 모양으로 묶어서 매달았다.
나는 으스스하게 빛나는 낫을 바라보며 할머니 시신 위에 놓은 허리칼과 마쿠라단고에 꽂은 바늘과 마찬가지로 낫 역시 마물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짐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장송백의례라고는 하나 주술의 수가 너무 많은 것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지나친 것 아닐까. 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이처럼 수상하게 여겨질 만큼 다미는 장송백의례를 철저하게 진행해 나갔다.
- 다미가 하는 모든 일이 놀라웠지만 무엇보다도 다미가 햐쿠미 가를 쥐락펴락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넌지시 다쓰미 아주머니에게 물어보자 어린아이인 내게도 점잖은 말투로 설명해 주었다.
"옛날부터 다미 씨는 이 지방과 햐쿠미 가의 관습을 환히 잘 알고 있어서 할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할머님을 도와드렸단다."
할아버지 경야와 장례식 때 할머니를 보좌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때만은 할머니도 다미가 하는 말을 순순히 들었을까. 아니, 분명 들었을 것이다. 이번에 새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으로 판단하건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장송백의례에 연연하는 걸까. 왜 그토록 그런 절차에 집착하는 걸까.
- "글쎄. 옛날부터 햐쿠미 가에 전해 내려오는 관습이라서 그렇겠지."
내 의문에 다쓰미 아주머니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전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지만, 아주머니 입장에서는 하나도 신기할 것 없는 햐쿠미 가의 전통 중 하나였으리라.
-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미를 졸졸 따라다니며 놀랄 만한 일을 보고들은 까닭에 나도 모르게 녹초가 되었는지 어느덧 나는 이불 속에 있었다. 내 스스로 누운 기억은 없으니 다쓰미 아주머니가 눕혀준 것이 틀림없었다.
- 나는 다시 덤불 깊은 곳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숨지 않고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한 순간 왠지 등골이 오싹했다. 저 사람들이 여섯 살짜리 아이를 해코지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결국 컴컴한 덤불 속으로 걸음을 옮겼을 만큼 그 오싹한 감각은 강렬했다.
- 잠시 나아가자 돌기둥 두 개가 길 양옆에 나타났다. 풀과 나무가 무성하여 그것이 뭔지 짐작이 가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도리이였을지도 모른다.
장례 행렬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길이 구불구불 구부러진 탓인지 아무리 나아가도 행렬 끄트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달은 떠 있었지만 울창하게 우거진 덤불 때문에 달빛이 거의 비쳐들지 않아 주변은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덤불로 들어오고 나서 모기가 끊임없이 덤벼들어 물어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모기가 귀찮다거나 물려서 가렵다고 느낄 여유가 전혀 없었다.
- 나는 금방 후회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밤중에 어린아이 혼자 돌아다닐 만한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쫓아가고 있는 것은 할머니의 시신이 담긴 관을 옮기는 장례 행렬이다. 제정신으로 했다고는 할 수 없는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나아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지만 어쩌면 나는 그것에게 불려 갔는지도 모른다.
- 장례 행렬의 불빛에 주변 풍경이 희미하게 떠올랐을 때였다. 어른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째서 아버지가 그 신당에 참배를 했는지 드디어 알았다.
그 당집이다...
장례 행렬은 틀림없이 백사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 이 길을 내가 처음으로 걸었을 때는 겨울이라 주변이 눈에 덮인 상태였다. 지금은 오본이 가까운 여름이고 제대로 된 불빛도 없는 밤중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길이 그 당집으로 이어진다고 확신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앞쪽에 대나무 숲이 보였다. 대나무 사이로 달빛이 비쳐들자 대나무 숲 내부가 요사스럽게 빛났다. 요사스럽게 빛나는 대나무 숲을 나아가는 장례 행렬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미가 들려준 옛날이야기의 한 장면을 실제로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쩐지 애틋하고 향수를 불러일으키지만 계속 보고 있으면 점점 무서워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 다미는 양쪽에 다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에 잠잘 틈도 거의 없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아무래도 몸이 버티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다미는 하루 휴식을 취했다.
겨우 다미의 방에서 휴식을 취하던 다미가 그날 점심을 먹고 찾아간 내게 숨김없이 들려준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백사당의 또 다른 문으로 관을 넣고 정면 격자문으로 아버지가 들어간 것은 할머니를 탕관 湯灌하기 위해서였다.
탕관이란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기 전에 행하는 정화 의식으로, 오늘날은 일반적으로 시신을 관에 넣기 전에 더운물로 몸을 씻기는 일을 가리킨다. 가족이 수건을 더운물에 적셔 고인의 시신을 꼼꼼하게 닦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갓난아이를 목욕시키는 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일찍이 일본에서는 지방마다 탕관의 방법이 달랐고, 그중에는 정화 의식의 범주를 넘어서는 행위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장송백의례라는 독자적인 의례를 거행하는 햐쿠미 가에도 탕관이라는 말만으로는 정의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절차가 존재했다. 게다가 햐쿠미 가의 탕관은 바깥과 완전히 격리된 백사당이라는 밀폐공간에서 가장이 혼자 진행해야 했다.
즉 아버지는 장송백의례에 포함된 수많은 의례 중 탕관이라는 의례를 거행하기 위해 하룻밤 동안 할머니의 시신과 함께 그 당집에 틀어박힌 것이다. 그 과정은 그날 밤 내가 본 바와 같다.
- 어디까지나 뒷소문이 퍼졌다. 햐쿠미 가의 눈치를 보며 표면상으로는 아버지가 집을 나갔다는 극히 일반적인 이야기를 믿는 척했지만 뒤편에서는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은 미신으로 가득 찬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한 환경과 조건이 너무나 잘 갖추어져 있었다.
지방의 오래된 가문인 햐쿠미 가, 광대하고 으스스한 햐쿠미의 숲, 가출했다 돌아온 장남, 수렴청정을 하던 할머니의 죽음, 무슨 사연이 있을 법한 미타마의 덤불의 신당, 햐쿠미 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장송백의례, 밀폐된 백사당에서 행하는 탕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라진 사람, 상주인 아버지의 갑작스런 실종... 이러한 갖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마을 사람들이 불길한 상상을 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상상에는 당시의 나는 몰랐지만 햐쿠미 가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복잡한 심경(경외의 감정)이 적지 않게 가미되어 있었음이 틀림없다.
- 자존심 강한 새어머니는 그런 소문이 도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의 그러한 반응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렸지만 그 같은 사정은 왠지 이해가 갔다. 역시 내가 자란 환경이 특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왜 아버지가 사라졌는지, 어떻게 당집에서 나왔는지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날 밤 도대체 백사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 "... 큰마님이우."
다시 다미가 말을 툭 내뱉었다.
"어, 뭐가요?"
되물었지만 다미는 내 목소리가 들리는지 마는지 한층 폭삭 늙어버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 씌었수."
"엇."
"나리는..."
"아버지가."
"... 끌려갔수."
"누구한테."
"...마모우돈."
- 그 영문 모를 말을 들은 순간 거미와 지네, 뱀이 수십 마리나 기어 다니는 것처럼 등에 소름이 쫙 끼쳤다. 앉은자리에서 격하게 진저리를 쳤을 뿐 아니라 그 후로도 계속해서 몸이 바르르 떨렸다.
더 이상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안 된다. 귀에 담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순식간에 이해했다. 즉시 깨달았다.
- "마모우돈은...”
다미가 이어서 입을 열자마자 나는 냉큼 다미의 방을 뛰쳐나와 집 밖으로 달렸다.
그때까지 다미 앞에서 그런 식으로 달아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미의 이야기를 피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때는 달아났다.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 그리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말도 안 된다. 그것의 이야기를 하려던 사람이 진짜 다미가 아닌 듯하다는 기분이 들다니...
- 집을 뛰쳐나와서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새 도도야마 산기슭에 서 있었다. 쓰쿠모 신사 인근의, 스나가와를 처음으로 만난 곳 근처였다. 어째서 이런 곳에 왔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스나가와 하고 구누기다 무리와 도도야마 산에 올라가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역시 마음속에 앙금으로 남아 있던 걸까.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어쩔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그냥 그 부근에서 어정거렸다. 그런데 그렇게 반쯤 넋을 놓고 돌아다니다가 그 길을 찾아냈다. 눈으로 보고서야 내가 뭘 하고 싶었는지 겨우 알 것 같았다.
나는 도도야마 산에 올라가는 길을 찾고 있었다.
- 안간힘 다해 나아갔다. 달려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지만 간신히 참았다. 반대로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함으로써 분명 제정신을 유지했을 것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걸음이 상당히 느렸으니까 동굴의 실제 길이는 그다지 길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둠은 인간의 감각을 현저하게 망가뜨린다. 몇십 분이나 걸은 듯한 기분이 들었을 때 겨우 출구가 보였다.
어렴풋한 빛이 비치는 출구로 겨우 관목 동굴을 빠져나왔을 때 나는 "앗" 하고 다시 소리 지르기 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공포에 온몸이 꿰뚫려 제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역시 이곳은 무섭기 그지없는 산이었다...
-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뻗어 올라가는 한 줄기 산길에 독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진한 주홍색으로 칠해진 수많은 도리이가 마치 무한 증식이라도 하는 듯 줄지어 서 있었다. 도리이 자체는 평범하게 세워져 있었지만 줄줄이 늘어선 도리이를 보고 있자니 도리이 전체가 굽이치고 있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원래는 신성하게 느껴질 주홍색 도리이들이 몹시 사위스러운 악의에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여서 참을 수 없이 무서웠다. 왜일까 하는 의문이 들 틈도 없이 그 이유를 알았다.
... 뱀이다.
비탈에 자리 잡은 거대한 뱀 한 마리가 당장이라도 역겹게 몸을 꿈틀대며 독기를 내뿜으려 하고 있다. 그런 꺼림칙한 장면이 연상될 만큼 수많은 도리이에서는 차갑고 미끌미끌한 느낌의 생동감이 전해졌다.
- 소름이 끼쳐 몸을 벌벌 떨면서 나는 맹렬히 후회했다.
여기는 인간이 올 곳이 아니다. 절대로 와서는 안 되는 곳이다. 싫다. 기분 나쁘다. 무섭다. 여기는 싫다. 두렵다. 왜 얌전하게 집에 있지 않았을까. 집을 뛰쳐나왔다고 해도 왜 스나가와네 집에 가지 않았을까. 산에 올라간다고 해도 왜 '뒷산'이나 성산으로 가지 않았을까. 아니, 그런 건 따져봤자 소용없다. 아무튼 여기는 싫다.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이렇게 무섭고 찜찜한 곳은 처음이다. 다미 할멈, 다미 할멈, 다미 할멈 구해줘, 구해줘, 무서워 무서워, 싫어, 싫다고 오는 게 아니었어. 돌아가고 싶어, 구해줘, 무서워, 싫어, 다미 할멈...
- 너무나도 무서운 나머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냅다 달아나고 싶은데 다리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줄지어 서 있는 도리이를 보기가 무서웠지만 도리이에서 등을 돌리려니 더 무서웠다. 주홍색 도리이를 보고 있으니 온몸의 털이 곤두섰지만 아무래도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비명이 서서히 높아지면서 몸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목구멍이 찢어지고 머리가 폭발할 만큼 큰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다. 그 정도로 강렬한 느낌이 드는데도 여전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입은 벌써 벌리고 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마침 그때 오마가토키의 불길한 햇빛이 공터와 신당을 비추었다. 방금 전에 지나쳐온 도리이 아래와 똑같이 작은 신당과 좁은 공터가 독기 어린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그 붉은 세계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 산에 사는 작은 이형 異形의 존재들이 빈터를 집회소로 삼아 신당을 무슨 의례에 사용하는 광경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조그마한 신당도 작은 존재들에게는 훌륭한 당집이다.
설마...
망상을 떨쳐내며 공터 저편으로 눈길을 주자 다시 짐승길 같은 산길이 어둠 속으로 뻗어 있었다. 분명 저쪽이 내려가는 길이 틀림없다. 이제 적어도 온 길로 돌아갈 필요는 없어졌다.
살짝 안도한 나는 천천히 신당으로 다가갔다.
- 그건 그렇고 도대체 이 신당은 언제부터 여기 있었을까. 다미가 들려준 사무라이 이야기에도 나오니 꽤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러고 보니 이마키의 할아버지도 이 신당을... 하고 생각하다가 묘한 사실을 깨달았다.
어째서 이마키의 할아버지는 도리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한번 슬쩍 보기만 해도 강렬한 인상이 남을 텐데 설마 잊어버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도도야마 산에 올라갈 작정이었는데 실은 터무니없는 곳에 더욱 무시무시한 곳에 발을 들여놓은 것 아닌가 ...
- 확실히 들렸다.
대체 누가 어디서.
나는 천천히 일어나서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얼굴을 향했다.
그곳에는 신당이 있었다.
얼어붙은 상태로 가만히 신당을 바라보고 있자니 십자 모양 격자 안쪽에서 도깨비불처럼 푸르스름하고 희미한 불빛이 켜졌다.
이윽고 끼이이익... 격자문이 열리더니.
... 기어 나왔다.
- 그 땅에서의 내 여섯 살 적 기억은 여기서 끝이 났다...
- 말을 마친 고모는 복도로 나가서 예상대로 집 안쪽으로 향했다. 앞장서서 걸어가는 고모의 등 너머로 연결 통로 너머의 은거방이 보인 순간 입안에는 씁쓸한 차 맛이, 손등에는 자로 얻어맞았을 때의 고통이 되살아났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화끈해진 것은 물론 그리움 때문은 아니었다.
연결 복도를 건너 안쪽 장지문을 열고 다다미방으로 들어갔다. 기억대로 오른쪽에는 불단과 도코노마가, 왼쪽에는 이웃한 다실로 통하는 맹장지가 있었다.
- 그런데 놀랍게도, 내 기억 속의 불단은 장롱처럼 독립된 물건이었는데, 이제 보니 시골집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 위치한 전형적인 붙박이 불단이었다. 이러한 불단은 기둥 사이에 이 단으로 선반을 만들어 윗단에는 쌍바라지 문을 달아 감실(龕室, 신주를 모셔두는 장)로 사용하고 아랫단에는 미닫이문을 달아 수납공간으로 삼는데, 햐쿠미 가 정도되는 오래된 가문의 불단치고는 상당히 수수했다.
도코노마도 기억과는 달랐다. 분명 승천하는 용의 모습을 그린 수묵화 족자가 걸려 있었을 텐데 아니었다. 족자에는 거대한 구렁이가 어두운 땅속에서 기어 나오려는 순간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 붙어 있었다. 땅속 가득 무수히 많은 뱀이 뒤엉켜 있어서 으스스하다. 수묵화 풍의 그림은 치졸하다고 할까 결코 사실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점이 오히려 거대한 구렁이의 박력을 살렸고 그림에 섬뜩함을 더한 것은 틀림없었다.
- 다미는 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띠었다. 어린 시절 처음 만났을 때 방글방글 웃어 주었던 얼굴과 똑같았다.
"도령, 늠름해지셨수."
그 한 마디에 모든 감개가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을 하시우?"
나는 교토에서는 제법 오래된 축에 드는 어느 학술서 출판사 이름을 대고 그 출판사의 조그만 도쿄 지사에서 편집자로 일한다고 대답했다. 다미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어떤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오오, 대단하시우."
다미는 감탄하고 기뻐하며 아무튼 내 이야기를 반겼다. 내가 보기에는 콧대가 몹시 높은 지방 출판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다미에게는 유서 있고 견실한 기업으로 느껴졌으리라.
- "새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내가 백사당에 들어가야 하나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미 앞에서는 '저'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라는 말이 나왔다. 다미는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 들으시우, 도령..."
다마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꺼내다가 빙긋 웃고 나서 고쳐 말했다.
"이제 도령이 아니우. 지금은 나리우."
"아니, 도령이면 돼요."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다미의 말을 사절하고 중요한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 백사당이라는 건물은 이른바 모가리야 殯屋죠?"
- 학술서를 편집할 때 민속학 관련 서적은 내 담당이었다. 그 때문에 그쪽 방면 지식이 조금은 쌓였다.
모가리야란 고인의 명복을 비는 특별한 장소로, 모야 喪屋나 이미야 忌屋라고도 불린다. 일찍이 일본에는 이렇듯 특별한 의례에 사용하는 건물이 많았다. 임신부가 아이를 낳을 때 사용하는 산실이나 소년이 어른이 되기 위한 의식을 치르는 가옥 假屋 등이다. 백사당도 그런 기능을 지닌 곳 중 하나였다.
- 이런 설명을 늘어놓은 후에 만약을 위해 백사당에 대해 확인하자 다미는 선선히 인정했다.
"그런 어려운 이야기는 모르우. 햐쿠미 가에서는 대대로 그 백사당에서 시신을 씻어왔수."
- 백사당은 분명 햐쿠미 가에서 대대손손 이어받아온 모가리야다. 다만 어느 지방에서든 이렇게 특수한 건물은 의례가 끝나면 보통 바로 불태운다. 가옥이라는 명칭이 가리키듯이 어디까지나 임시로 만든 공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산실과 모가리야처럼 의례를 치를 때 부정을 타기 쉬운 경우는 의례 장소를 태움으로써 부정을 씻어내는 의도도 있었다. 언제까지고 남겨두어야 할 곳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데 햐쿠미 가에는 모가리야로 상용되는 백사당이라는 건물이 존재했다. 이는 상당히 특이한 예다. 여성의 생리를 부정한 일로 간주하던 시대에 마을마다 생리 오두막을 지어 공동으로 사용한 예는 있다. 생리 중인 여성이 들어가 머물도록 만든 오두막이다. 그런데 생리는 매달 찾아온다. 개인을 위해 다달이 오두막을 세웠다가 태우는 건 비생산적인 일이라 마을 공동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가령 백사당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용했다면 그 존재 이유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실제로는 햐쿠미 가에서만 사용했다. 묘한 일이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기묘했다.
- "탕관을 하려고 굳이 그런 당집에 틀어박힐 필요는 없잖아요."
재차 그렇게 말하자 다미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거기서 할 필요가 있수. 앞문과 관 출입구를 꼭 닫은 백사당에서 햐쿠미가 가장이 탕관을 할 필요가 있수. 그게 상주의 임무라우."
아무래도 햐쿠미 가만의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 설마... 말도 안 된다.
분명 그 조건에 들어맞는 사람은 다미밖에 없지만, 반대로 말하면 다미만큼 그런 짓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 또한 없다. 아니, 절대로 다미일 리 없다.
"아, 아무튼 나랑은 상관없지만..."
나는 아버지 이야기를 꺼낸 것을 후회했다. 한순간이라고는 하나 다미에게 의심의 눈길을 던지다니 부끄러웠다.
-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 들어 주거리고 있자니 다미가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다 도령을 위해서라우."
"아..."
"백사당에서 도령 자신을 위해 탕관을 하는 거라우."
"그런..."
무슨 뜻인지 몰라 잠자코 있자니 다미가 불쑥 내뱉었다.
"... 업이우."
- "몰라도 된다니. 여차하면 당집에 들어가는 건 나잖아요."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다그쳤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이 문제의 '업'에 연관되어 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미는 고개를 몇 번이고 저었다.
"업이란 건 알고 나면 더욱 강해지는 법이우. 사람이니까 알게 되면 의식하우. 의식하면 마음이 동조하기 쉬워지우. 마음이 동조하기 시작하면 마지막에는 씐다우."
- "다미 할멈, 뭐에 씐다는 건데요?"
앗!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가 씌었다는 건가요? 씌어서 어딘가로 가버린 건가요?"
다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 다미를 보고 있으려니 괴로웠지만 꼭 알고 싶었다.
- 어쩐지 대화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당시에 다미에게 똑같은 말을 들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점점 기억이 자극되어 뭔가가 머릿속에 떠오를 것만 같았다.
"결국 백사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렇게 물으면서도 어느 틈엔가 머릿속에 어떤 광경이 떠올랐다. 그것은...
- 당집 안에 할머니 시신이 담긴 관이 놓여 있다.
관뚜껑이 천천히 열리고 뭔가가 기어 나온다. 관에서 기어 나온 그것이 어둑어둑한 당집 바닥을 기어간다. 구불구불 기면서 아버지 쪽으로 조금씩 다가간다. 아버지는 벌벌 떨다가 그것이 할머니임을 알고 절규한다. 당집을 돌아다니며 필사적으로 그것을 피해 보지만 이윽고 구석에 몰리고 만다.
- 눈앞에서 전병이 흔들렸다.
"드시구려."
어딘가에서 똑같은 체험을 한 기분이 들었다.
"먹으라고!"
[첩의 자식놈 입에는 안 맞는가 보구나.]
[첩의 자식놈 입에는 너무 고급이야.]
[너무 고급이라 못 먹는 게야.]
별채의 은거방에서 별안간 이상해진 할머니가 내 입에 곰팡이 핀 만주를 억지로 쑤셔 넣던 기억이 느닷없이 되살아났다.
그 순간 깨달았다.
... 이것은 요모쓰헤구이 黃泉戸喫다.
- 요모쓰헤구이란 죽은 자의 나라인 황천에서 만든 음식을 가리킨다. 이것을 먹으면 이승으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입에 대면 죽은 자와 동류가 된다.
황천 아궁이 불로 만든 음식을 먹지 말지어다.
이자나미노미코토 伊邪那美命는 불의 신인 가구쓰치 迦具土神를 낳을 때 음부에 화상을 입어 황천으로 갔다. 이자나기노미코토 伊邪那岐命가 데려오려고 했지만 이자나미노미코토가 이미 요모쓰헤구이를 먹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한다.
- 즉 이 노인은...
나는 허둥지둥 일어나서 들어왔던 방향으로 달려갔다.
- 그해 여름 우리는 결국 도도야마 산에 올라가지 않았던 것 아닌가...
폐가에서 체험한 괴이 현상 때문에 몸이 벌벌 떨렸지만, 머릿속에는 기슭에서 올려다본 도도야마 산의 골짜기가 떠올랐다.
애당초 그 산은 뭘까...
-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죽은 사람의 혼은 산으로 간다고 여겼다. 마을에 가깝고 밥공기를 엎어놓은 듯이 봉긋한 산을 야산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산속에서 정화된 죽은 사람의 혼은 이윽고 조령이 되어 마을의 후손들을 지켜본다고 믿었다. 바로 야산 신앙이다.
그런 풍습이 뿌리 깊었다는 증거로 '산 만들기'나 '산 장만하기'라고 하면 무덤 만들기를, '산일'은 실제로 산에서 일하는 것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장사 지내는 것을 의미했던 지방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날은 일본의 3대 영산 중 하나로 꼽히는 고야산 高野山도 구카이(空海, 일본 헤이안 시대의 승려로 진언종의 창시자)가 절을 세우기 전까지 기슭에 사는 사람들은 망자의 산으로 여겼다고 한다. 일찍이 고야산 부근 마을에서 고야산에 납골하는 것을 장례식으로 간주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즉 산과 죽은 사람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셈이다. 도도야마 산도 분명 그런 신앙의 대상 아니었을까.
다만 왜 마을 사람들이 그 산을 두려워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산과 햐쿠미 가의 관계가 마음에 걸렸다. 특히 장송백의례와 ...
- 다미가 이마가 다다미에 닿을 만큼 머리를 숙여 절했다.
"잘 부탁해요."
"마지막 봉공이라고 생각해요."
"다미 씨가 있어서 다행이야."
고모와 숙부들이 저마다 다미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 말이 나를 향한 말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물론 응해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나는 승낙의 의사도 거부의 의사도 표시하지 않았다. 그 지시에 따를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다미뿐이었다. 내가 지시를 요구할 사람 또한 다미 한 명 뿐이었다.
- 작업이 끝나자 다미는 새어머니가 누워 있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이부자리를 다시 깐 후 시신을 눕혔다. '내침'이다.
"머리가 북쪽을 향해야 하지 않나요?"
나는 소박한 의문을 던졌다.
"고인의 머리를 평소에 자던 방향과 반대로 두면 되우."
지방에 따라서는 머리를 서쪽으로 향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해가 지는 방향이기 때문인데(물론 서방정토 사상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지방에서는 보통 해가 뜨는 방향, 즉 동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잘 때가 많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도연초 徒然草>(일본 중세 초기의 수필)에도 "천황은 밤에 침소에 들면 머리를 동쪽에 두고 잠을 청했다.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고 자야 양기를 받을 수 있으므로 공자도 그리하였다. 따라서 잠자리에 들 때는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거나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보통이다"라고 적혀 있다.
요컨대 고인을 평소와는 반대 방향으로 눕히는 것이 중요하다.
- 잠시 후 다미가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칼을 새어머니 가슴 위에 내려놓은 순간 하아... 하고 모두가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예로부터 예리한 칼에는 마물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여겨왔기 때문에 이 절차는 이해하기 쉬웠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똑같이 한다고 나중에 다미가 가르쳐주었다.
- 지어진 밥을 꼼꼼히 확인한 후 다미는 아주머니에게 마쿠라메시를 들려 은거방에 보내고 자신은 마쿠라단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마쿠라단고는 내 기억 속에도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만들어진 경단이 고슴도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경단도 보통 경단과는 달랐다. 멥쌀가루를 물로 반죽해 동그랗게 빚어 만든다. 역시 사람 입맛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렇게 만든 경단에 바늘을 꽂는다. 말 그대로 바늘 산처럼 무수히 많이 꽂는다.
"원래는 마쿠라메시와 마쿠라단고 중 하나만 올려도 되우."
다미가 경단에 바늘을 꽂으며 가르쳐주었다. 즉 내침, 기모노, 허리칼, 모기장, 빗자루도 전부 다는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부 다 해야 할 만큼의 뭔가가 있다... 그런 뜻일까.
다 만든 마쿠라단고를 다른 아주머니가 은거방으로 가져가자 다미는 상중임을 알리는 초롱을 걸고 발을 치는 방법을 부엌에 모인 일꾼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특히 현관에 친 발 밑에 십자 모양으로 묶어서 매다는 낫은 집 정면을 지키는 물건이기 때문인지 집요하게 느껴질 만큼 몇 번이고 되풀이해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 사각각형 한가운데에도 점을 찍듯이 오 엔짜리 동전이 하나 놓여 있었다.
다미는 다시 머리를 숙인 후 오 엔짜리 동전을 하나씩 주웠다. 내가 도울 틈도 없이 전부 줍더니 골라놓은 땅 옆으로 자리를 옮기고 말을 꺼냈다.
"그럼 잘 부탁드리우."
남자들은 동전으로 이루어진 정사각형을 다시 그리듯이 일단 삽으로 땅에 금을 그었다. 그렇게 네모난 테두리를 그리고 나서 그 안을 교대로 파기 시작했다.
정사각형 크기는 한 아름쯤 되는 단지가 들어갈 정도였다. 분명 여기에 새어머니의 뼈 단지를 납골하는 것이리라. 그건 알겠는데 어째서 구멍 파는 위치를 오 엔짜리 동전으로 표시해 두었을까.
- 내가 의아해한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다미가 슬쩍 가르쳐주었다.
"파기 전에 오 엔을 놓아두는 건 토지 신께 땅을 산다는 의미라우. 땅을 사지 않으면 토지 신이 재앙 신으로 변한다우."
요컨대 집을 짓기 전에 지내는 지진제 같은 것이리라. 옛날에는 삼도천을 건너는 배의 삯으로 육 문 짜리 엽전을 죽은 사람에게 쥐여주었다고 한다. 그 밖에 돈과 관련된 의례가 더 있어도 결코 이상할 것 없다.
- 할머니 때의 기억이 있다고는 하나 새어머니가 죽은 후 연달아 눈앞에 펼쳐지는 다양한 의례는 상당히 특이하게 느껴졌다. 이 지방 특유의 햐쿠미 가만의 독특한 풍습이라고 어쩌면 마음속으로 야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그러니까 약 이십 년 전까지는 일본 이곳저곳에서 비슷한 의례가 당연하다는 듯이 거행되었다. 미신으로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이렇게 직접 체험하자 그렇게 간단히 무시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까지 하는 이상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 아닐까.
- 모든 의례의 공통점은 '죽음'에 대한 압도적이라고 할 만큼의 두려움이다. 아니,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이 초래하는 것, 죽음이 불러오는 것, 죽음이 끌어들이는 것, 그것들에 대한 강렬한 공포가 느껴진다.
- 뻥 뚫린 네모난 공간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이 정도의 구덩이를 파는 데 성인 남자가 두 명이나 필요할까, 한 명이면 충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두 명이서 파는 것에도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들에게 눈을 돌렸지만 그들은 땀을 폭포수처럼 흘리며 말없이 서 있을 뿐 내가 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참 잘 파셨수."
다미가 불쑥 말을 꺼내자 비로소 남자들은 후우, 하고 한숨처럼 ...
- "토장을 했을 때는 묻은 뒤에 흙 위에 대나무를 세웠수."
뻥 뚫린 구덩이를 보며 다미가 잡담이라도 하듯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불을 피운다우. 시간이 흐르면 열기로 대나무가 터져서 소리가 난다우. 대나무에서 소리가 날 때까지 불을 계속 피워야 하우..."
예로부터 불은 마물을 없애는 큰 힘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졌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모닥불의 불길과 대나무가 터지는 커다란 소리로 마물을 퇴치한 것이 틀림없다.
- "돌아가시지우."
다미의 재촉을 받고 나는 햐쿠미 가 묘지를 뒤로했다.
집에 돌아오자 친족들이 모여들고 있었지만 할머니 때와 비교해 그 수가 명백히 적었다. 새어머니의 부음을 전한 것이 오후였음을 감안해도 할머니 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다쓰미 씨 부부처럼 새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많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자식이 전혀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오래된 가문의 몰락...
문득 그런 말이 떠올랐는데 그날 밤이 되어도 햐쿠미 가로 달려온 친족들 수는 크게 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다들 태도가 묘하게 서먹서먹했다.
- "붙잡히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우. 나리가 어디로 가셨는지 아무도 모르우. 하지만 아마 끌려가셨을 것이우. 마모우돈과 함께 저세상으로 가신 게 틀림없수."
"..."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모우돈이 영원히 성불할 수 없기 때문이우."
"..."
"그런데..."
"..."
"성불하지 못한 마모우돈이 이 세상에 남을 때가 있수."
남는다... 어디에... 설마...
"백사당에!"
- 정신을 가다듬자 다미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소리 지른 나를 걱정해서라기보다 뭔가를 확인하는 표정이었다. 마치 내게 과거의 기억이 돌아왔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도령, 아무튼 정신을 단단히 챙기시우."
다미는 방석 위에서 자세를 바로하며 말을 이었다.
"넋이 빠져나간 마음의 구멍에는 마물이 깃드우.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순서대로 탕관을 하는 것만 생각하시우. 그러면 문제 없수."
나는 삼십 년 가까이나 햐쿠미 가와 떨어져 지냈다. 하지만 호적 문제로도 알 수 있듯이 완벽하게는 벗어나지 못한 속박이 이 집과 ...
- 몸과 마음에 바로 긴장감이 들었다. 기모노는 유카타(浴衣, 목욕 후나 여름철에 주로 입는 무명 홑옷)처럼도 보였지만 상복이었다. 띠도 평범한 띠가 아니라 새끼줄로 된 것이었다. 죽은 사람의 이마에 두르는 삼각형 종이를 유족 역시 두르는 지방이 있어서 나도 그래야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것만은 정말 두르기 싫었는데 다행히 장송백의례에는 그러한 절차가 없는 모양이었다. 띠를 두른 뒤에는 새 짚신을 신는 정도로 상복 착용이 끝났다.
- 목욕하러 갈 때 입었던 옷을 정리하는 것부터 상복 착용과 야식 준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미와코가 거들고 나섰다. 틀림없이 고모가 시킨 것이리라. 혼자 할 수 있다고 몇 번이고 사양했지만 미와코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거들었다.
다미는 상복 매무새를 다듬는 등 필요한 부분에서 조언을 하기는 했지만, 그럴 때 말고는 미와코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한 발 물러나 있었다. 다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미와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꼭 한 번은 다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 이윽고 자정이 되어 다미와 함께 은거방으로 향했다. 출발 준비가 다 끝나 새어머니는 이미 납관되어 있었다. 고모와 두 숙부를 비롯해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 긴장돼 보였다.
고모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나는 다미가 설명해 준 의식의 절차를 떠올렸다. 이제부터 내가 이끌고 가야 한다.
"이제 백사당으로 향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중앙정원으로 내려가자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좌우로 쫙 갈라졌다. 길을 열어준 것이지만, 흡사 무슨 전염병에 걸린 사람으로부터 황급히 멀어진 것처럼도 보여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 "으랏차."
그때 뒤에서 힘쓰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다보자 은거방에서 새어머니를 납관한 관이 나오는 참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장례 행렬이 생기기를 기다렸다가 나를 선두로 조용히 대문으로 향했다. 장례 행렬이라고는 하나 솔도파(위쪽이 뾰족하고 갸름한 나무판자로 고인의 공양을 위해 경문 등을 적어 묘지에 세운다)도, 종이 깃발도, 천개(天蓋, 신상, 불상, 제단, 성물 聖物 등의 윗부분을 덮는 장식물. 장례식에 사용하는 것은 대부분 종이나 천으로 만든다)를 든 사람도 없다. 역시 진짜로 장사를 지내러 가는 장례 행렬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대문을 빠져나가자 돌계단 아래 길가에 죽 늘어선 마을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군수군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내 모습을 본 순간 입을 딱 다물었다.
- 당집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 그날 밤 아버지가 그랬듯이...
앞쪽에 대나무 숲이 보였다. 울창한 대나무 사이를 나아가는 장례 행렬이라니 마치 옛날이야기에라도 나올 법한 광경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기억을 자극받았다.
... 이 풍경은 본 기억이 있다.
- 할머니 장례 행렬을 따라왔을 때 본 것을 제외하고도 똑같은 풍경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고 뭔가가 다르다는 위화감이 들었다. 도대체 이 기묘한 감각은 뭘까. 그런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위화감의 정체를 밝혀내서는 안 된다, 떠올려서는 안 된다는 느낌도 들었다. 이제 뭐가 뭔지 모를 지경이었다.
- 혼란스러운 머리를 끌어안고 주저앉을 뻔했을 때, 나는 대나무 숲을 빠져나와 그것 앞에 서 있었다. 눈앞에 백사당이 있었다.
- 어릴 적에는 크다고 생각한 것도 어른이 되어서 보면 작게 느껴질 때가 간혹 있다. 게다가 이 당집은 할머니 경야 날 밤에 한 번 보았을 뿐이다. 그래, 딱 한 번이다. 그날 밤 한 번 보고 엄청나게 크다고 느꼈다. 그 건물이 조금도 변함없이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다.
한 채의 검은 집처럼 보였다. 백사당은 아다치가하라의 외딴집(인간을 잡아먹는 요괴 할멈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이나, 마물들의 둥지, 혹은 산속에 숨어 사는 살인귀의 은신처로 착각할 만큼 불길한 기운을 띠고 서있었다.
마치 내가 올 것을 훨씬 오래전부터 알고서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눈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 동그란 구멍 두 개를 찾아냈다.
메밀국수 밀개로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가는 막대기 두 개를 구멍 두 개에 꽂고 지레처럼 움직여 바닥판을 벗겼다. 그 순간 입을 떡 벌린 벽 아래 직사각형 구멍에서 뭔가가 훅 솟아올랐다. 동시에 비린내가 코를 찔러서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한 손으로 코를 막은 채 다른 손으로 손전등을 들고 구멍을 비추자 커다란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이 항아리가 뭔지 아무리 물어도 다미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다만 부디 소중하게 다루라고 몇 번이고 다짐을 두었다. 절대로 항아리의 봉인을 뜯어서는 안 되며 물론 떨어뜨려도 안 된다. 기울이거나 옆으로 눕혀도 안 된다. 아무튼 신중하고 주의 깊게 다룰 필요가 있다. 다미는 그렇게 신신당부했다.
-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항아리를 잡자 서늘하면서도 어쩐지 미끌미끌한 감촉이 전해져 왔다. 어른 머리보다 훨씬 크지 않을까. 갈색 기가 도는 항아리는 꽤 오래되어 보였다. 뚜껑이 덮여 있어 뭐가 들었는지는 모른다. 게다가 뚜껑에는 네 군데에 봉인지로 추정되는 것이 붙어 있었다. 도대체 이 속에는 뭐가 들었을까.
... 스륵.
갑자기 항아리 속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그런 감촉이 양손에 전해져 왔다. 그 순간 양손부터 양팔, 양 어깨, 등, 결국에는 온몸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그 뒤를 따르듯이 오한이 들었다.
항아리를 놓칠 뻔해서 황급히 양손에 힘을 주었다. 양손에 어마어마한 혐오감이 느껴졌지만 다미의 당부를 지켰다. 만약 충고해 준 사람이 다미가 아니었다면 이미 항아리를 내던졌을 것이다.
- 부르르 떨리는 양손으로 구멍에서 항아리를 꺼내어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항아리 밑바닥이 당집 바닥에 닿는 희미한 소리가 들릴 때까지 절대로 마음을 놓지 않았다.
... 탁.
겨우 그 소리를 듣고 쥐어짜내듯이 한숨을 내쉬며 항아리에서 손을 뗐다. 그제야 비로소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묘하게 답답했던 것이다.
한숨 돌리는 것과 동시에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땀을 닦을 기력조차 없어서 잠시 제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 하지만 인간에게는 코와 귀 입 말고도 눈과 요도, 항문이 있다. 이것들을 흔히 인간의 여섯 구멍이라고 하는데 여자는 음부가 추가되므로 일곱 개다. 그렇게 따져보면 꽤나 어중간한 미신인지도 모른다. 정말로 구멍이 문제라면 모공은 어찌 되는 걸까. 아예 고인의 온몸에 염료라도 바르는 편이 낫지 않을까.
다미가 의식의 내용을 들려주었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탕관을 시작하자 결코 이치로 따질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시신의 코와 귀와 입에는 솜을 채울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채우는 것이다. 굳이 이유를 달고 싶다면 마물은 시신의 머리로 들어가기 쉽기 때문...이라고 해두면 된다. 그런 기분이 강하게 들었을 만큼 그 자리에 감도는 분위기는 괴이했다.
-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본뜬 물건에는 마물이 깃든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머리카락이 자라는 인형이나 배회하는 밀랍인형처럼 말이다. 그 때문에 주술의 대상으로도 사용되어 왔다. 종이인형이나 히나 雛 인형(여자아이들의 무병장수와 행복을 빌기 위해 해마다 3월 3일에 치르는 히나마쓰리 때 장식하는 인형), 밀짚인형이 그 예다. 즉 치졸하거나 정교하다는 인형의 완성도와는 관계없이 사람 형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시체야말로 이상적인 그릇일지도 모른다. 일찍이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사람이 아닌 것...
나는 장송백의례를 거행하는 진짜 이유를 드디어 정말로 이해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솜을 다 채우고 나면 수의를 벗겨야 한다. 다행히 고인에게 입히는 수의는 사후경직과 납관을 고려해 앞부분과 뒷부분이 깔끔하게 나누어지도록 되어 있다. 몇 군데를 끈으로 묶어놓았을 뿐인지라 끈을 풀기만 하면 된다. 그러고 나서 이불을 걷듯이 수의 앞부분을 걷어내고...
... 순서를 틀렸다.
- 수의 앞부분을 벗기는 것은 관 속에서 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면 관에 수의 뒷부분이 남으므로 시신을 되돌려놓을 때도 편하다. 수의를 벗기지 않고 배수판 위에 놓으면 앞부분을 벗긴 후에 시신을 옮겨야 아래쪽의 뒷부분을 치울 수 있다. 즉 수고를 두 번 해야 하는 셈이다.
다미에게 몇 번이나 순서를 듣고(게다가 나 스스로도 복습해서) 외웠지만, 막상 새어머니의 시신을 앞에 두자 혼란스러워진 것이리라. 어쩌면 관에서 알몸의 새어머니를 안아 올리고 싶지 않아서 무의식 중에 깜빡 잊었는지도 모른다.
- ... 스슥. ... 스슥. ... 움찔.
공허함을 느끼며 새어머니 얼굴을 면도하다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 지금의 묘한 감촉은 뭐였을까.
겨우 죽은 사람의 얼굴을 면도하는 데 익숙해진 손에 뭐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감촉이 느껴졌다.
... 어째서.
이유를 생각할 뻔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재빨리 수염을 깎는 시늉만 한 후 국자로 얼굴에만 물을 끼얹어 면도를 마쳤다.
- 조금 쉬고 싶었지만 보퉁이에 손을 뻗어 짤막하게 몇 가닥으로 끊은 새끼줄을 꺼냈다. 새끼줄을 한데 뭉쳐 들통에 담그고 이제 미지근해진 물속에서 새끼줄에 물이 스며들도록 손으로 계속 주물렀다. 충분히 물을 먹은 새끼줄 뭉치를 꺼내 새어머니의 시신을 닦았다. 물론 발부터다.
원래는 수건으로 닦지만 다미는 새끼줄이 제일 좋다고 했다. 지방에 따라서는 새끼줄로 시신을 묶는 곳도 있다고 한다. 확실히 다양한 의례를 거행할 정도라면 마물이 들어와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아예 처음부터 시신을 묶어두는 편이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합리적이라는 표현도 이상하기는 하지만, 목적을 고려하면 제일 좋은 방법 아닐까.
- 하기야 묶는다고 해도 형식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자니 정말로 움직이지 못하게 꽉 묶는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일단 양손은 뒤로 돌려서, 다리는 무릎을 구부린 상태로 묶는다. 다음으로 손목과 발목을 묶은 새끼줄을 다른 새끼줄로 연결해 시신을 U모양으로 만든다. 마지막은 손목과 발목을 연결한 새끼줄로 목을 감고 시신을 칭칭 얽어맨다. 그런 새끼줄을 가리켜 '지옥 새끼줄' '부정 새끼줄' '극락 새끼줄' '왕생 새끼줄' '정토 새끼줄' '아미타 새끼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정말로 입이 떡 벌어질 만한 풍습이다.
- 하지만 더 엄청난 지방도 있다고 다미가 가르쳐주었다. 거기서는 묶는다는 번거로운 짓을 하지 않고 시신을 훼손시킨다. 대부분 두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목을 자르는 모양이다. 확실히 묶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인 조치이지만, 그래서야 죽은 사람을 거의 흡혈귀 취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 노인을 내다 버리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지방의 고문서를 조사해 보면 산에 노인을 버릴 때 두 다리를 부러뜨렸다는 내용이 발견되기도 한다. 즉 다리를 부러뜨린다는 행위가 풍습으로 존재한 지방이 적지 않았던 셈이다.
- 하지만 시신까지 훼손할 줄이야. 이미 주술이라는 의례의 범주를 넘어선 듯하다. 진짜로 경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짜 두려움이 느껴진다.
일찍이 지방에 관계없이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전국에 퍼져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토장의 대부분이 굴장이었던 점도 그 증거다. 시신을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로 만들어 둥글고 조그만 토장용 관에 납관함으로써 시신을 훼손하거나 새끼줄로 묶는 것을 대신했다고 볼 수 있다.
-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에 대한 공포심은 일본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흡혈귀다.
예전에 유럽 대륙의 민간전승을 지역별로 분류한 총서를 편집한 적이 있는데, 예를 들어 흡혈귀의 발상지인 동유럽 편에는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이야기를 몇 가지나 수록한 기억이 있다.
- 어떤 상인이 어느 지방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다가 한 집에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했다. 그 집 사람의 권유로 저녁을 함께 먹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웬 남자가 들어와 밥상 앞에 앉았다. 집안 가장이 돌아온 모양이라고 상인은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모두 그를 모르는 척했다. 그 남자가 가족의 얼굴을 한 명씩 쳐다보는데도 모두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그런데 다들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를 완전히 무시하면서도 그 존재에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상인은 이상하다 싶었지만 남의 집 일에 참견하기도 뭐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음 날 그 집을 떠났다. 다음 마을에서 그는 전날 신세를 졌던 집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딸은 아주 건강해 보였다. 느닷없이 죽다니 믿기지 않았다.
- 몇 개월 후 장사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상인은 위로의 말을 전하고자 그 집에 들렀다. 그런데 딸뿐만 아니라 아들과 어머니까지 죽었다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에게 그 사정을 들은 상인은 무척이나 놀랐다.
그날 밤, 식탁을 함께했던 남자는 반년도 전에 땅에 묻힌 그 집의 가장이었다. 아무 예고도 없이 집으로 돌아와서는 가족과 하룻밤을 보내고 딸, 아들, 어머니 순서로 조금씩 피를 뺀 후에 다시 무덤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 일본에는 이렇듯 직접적으로 되살아나는 이야기는 적을지도 모른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피를 빤다는 전설이 없다는 것도 큰 이유지만, 육체를 지닌 죽은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혼이 성불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더 큰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마모우돈 같은 존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햐쿠미 가의 장송백의례는 죽은 사람이 유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의례가 아니다. 죽은 사람이 깨어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주술이다.
사람이 죽은 집의 지붕에서 죽은 사람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는 이야기. 죽은 아버지가 밤마다 딸 곁에 와서 너도 아비를 따라오라고 부추긴다는 이야기. 마찬가지로 죽은 남편이나 아내가 홀로 남은 배우자를 데리러 온다는 이야기. 그런 사례는 제법 많다. 다만 실제로 죽은 사람이 깨어나서 지붕에서 춤을 췄다거나 땅에 묻힌 시체가 되살아나서 돌아왔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역시나 유령 같은 부류에 속하리라.
이 묘한 차이는 뭘까. 아니면 마모우돈도 일종의 영적인 존재일까.
- 무슨 소리를, 아니다.
그건 절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건 환청이다. 새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다. 모든 의례는 끝났지 않았는가.
... 그렇다. 탕관은 끝났다. 이것으로 다미가 가르쳐준 절차를 전부 다 밟았다. 이제 시신을 관에 다시 집어넣고 날이 새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나는 탕관이라는 임무를 멋지게 달성했다.
... 정말로 그럴까.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좋지 않다. 다미와 모든 의례를 반드시 다 거행하겠다고 단단히 약속하지 않았는가.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지 않은가.
- 실은 각 지방에 남아 있는 시신 훼손 풍습에 대해 생각할 때 의도적으로 제쳐둔 사실이 있었다. 햐쿠미 가의 장송백의례에도 역시 시신 훼손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 다미는 탕관에 관해 설명하고 나서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탕관을 마치거든 고인을 관에 되돌려놓기 전에 다시는 걷지 못하도록 반드시 두 발목을 부러뜨려야 하우."
항아리가 들어 있던 바닥판을 벗길 때 나무 막대기 두 개를 사용했는데 그것을 다시 사용해야 한다. 그렇다기보다 그 막대기는 본래 발목을 부러뜨리는 데 쓰는 도구였다.
방법은 이렇다. 눈앞에 머리를 오른쪽으로 향하고 누워 있는 시신이 있다고 치고, 일단 막대기 하나를 시신 왼쪽 발목 바로 아래에 넣는다. 그리고 다른 막대기를 발목 위에 얹는데 아래쪽 막대기와 끝부분이 교차하도록 비스듬히 얹는다. 이때 위쪽 막대기는 반드시 아래쪽 막대기의 왼쪽 옆에 오도록 댈 필요가 있다. 그러고 나서 발목 너머에서 교차한 두 막대기의 끝을 새끼줄로 묶는다. 즉 두 갈래가 된 막대기에 한쪽 발목을 끼운 상태를 만든다.
이렇게 한 다음 위쪽 막대기에 체중을 싣기만 하면 어려움 없이 발목을 부러뜨릴 수 있다고 한다. 위쪽 막대기를 아래쪽 막대기 왼쪽에 두는 것은 정강이뼈와 발목뼈 사이에 위쪽 막대기를 대기 위해서다. 그래야 발목을 부러뜨리기 쉽다고 한다.
이 큰일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다.
- 사실 보퉁이에는 손도끼도 들어 있었다. 막대기 두 개로 발목을 부러뜨리지 못했을 때를 대비해 준비해 온 것이었다. 하지만 선택지가 두 개라고 해서 편해지는 것은 아니다. 뭘 고르든지 간에 할 일은 똑같으니까.
- 격자에서 햇빛이 어렴풋이 비쳐들었다. 아무래도 날씨가 흐린 것 같았지만 지금의 내게는 분에 넘치는 빛이었다. 그야말로 구원의 빛이라 할 수 있었다.
황급히 당집을 둘러보았다. 구석구석까지 완벽하게 보이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것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촛대를 든 채 머뭇머뭇 당집 앞쪽 문 좌우에 길게 뻗어 있는 공간도 확인했지만 역시 없었다.
문득 생각이 나서 관을 보자 뚜껑이 비스듬하게 어긋나 있었다. 저기로 되돌아간 걸까.
하지만 뚜껑을 열어서 확인하기는 싫었다. 그것이 관 속에서 새어머니의 시신이라는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면 그걸로 됐다. 그것이 왜 나타났다가 사라졌는지 이유는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새어머니가 관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뚜껑을 열어보는 것만은 절대 사절이었다.
- 격자로 비쳐드는 햇빛이 점차 강해졌다. 날이 완전히 밝았다.
... 드디어 끝났다.
크게 한숨을 내쉬며 채광용 격자를 올려다보고 기지개를 켜는데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 천장에 달라붙어 있는 그것의 모습이...
휙.
천장에서 그것이 내려왔다. 거꾸로 떨어져 내렸다. 나를 향해 똑바로.
마치 느린 화면을 보고 있는 것처럼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 눈을 뜨자 다다미방에 깔린 이부자리에 누워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중간방임을 알았다. 어쩌면 예전에 내가 사용했던 방인지도 모른다.
그 때문인지 한순간이지만 여섯 살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때도 당집에서 그것의 습격을 받은 후 정신이 들자 중간방에 누워 있었다.
기억이 혼탁했다.
옛날에 백사당에서 체험한 꺼림칙한 일의 기억이 이번에 백사당에서 겪은 무시무시하고 괴이한 기억에 콸콸 흘러들어 와서 엉겨 붙으며 과거와 현재를 뒤섞는 듯한, 기묘한 기분이 잠시 계속되었다.
의사는 어릴 적 기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나서 혼란에 빠진 데다 갑자기 고열이 나서 그런 것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내게는 전부 다 새어머니의 소행으로 여겨졌다.
- 나는 만 하루도 넘게 잠들어 있었다. 눈을 뜨자 탕관을 마친 날(새어머니를 확장하여 장사 지내는 날)의 다음 날 아침이었다.
- 일시적으로 여섯 살로 돌아간 나는 소리 내어 울었다. 물론 백사당에서 체험한 일이 무서웠기 때문이지만, 나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뭔가를 억지로 짊어지는 바람에 괴로워서 엉엉 운 것 같은 기분도 든다.
흐느껴 울고 있는데 소리도 없이 맹장지가 열리더니 방 밖에 앉아있던 다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미는 몹시 지친 모습이었다. 안색이 나빴고 무엇보다도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반쯤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다미는 내게 방긋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두세 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조용히 맹장지를 닫았다.
다미를 보고 안심했는지 아주 먼 옛날에 지금과 비슷한 일이 있었지... 하고 생각하다가 의식이 멀어져서 다시 잠에 빠졌다.
- 그리고 꿈을 꾸었다. 캄캄한 어둠의 바닥에서 빛나는 하늘 위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처음에는 몸이 가벼웠고 아래에 새하얀 구름만 보였는데, 점차 몸이 무거워짐에 따라 하얀 구름이 녹색 땅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높은 구름 위를 가뿐히 날아다녔는데 몸이 무거워지며 서서히 내려와 땅에 스칠 듯한 높이를 기듯이 나아갔다. 가벼워졌다가 무거워졌다가,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높은 하늘에서 낮은 하늘로, 하얀 구름 위에서 녹색 땅 위로, 이러한 변화가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다.
- 다미의 얼굴은 엄숙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렇게 바라보며 예전과 비슷한 무시무시한 괴이 현상이 이번에도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먼 옛날, 백사당에서 그것에게 습격당한 나를 구해내기 위해 다미는 자신의 소중한 뭔가를 희생시키고 부쩍 늙어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으로부터 나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대가로 내놓고 말았다.
어쩌면 백사당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다미는 살아날 가능성이 있었던 것 아닐까. 그런데 무리해서 나를 햐쿠미 가로 옮긴 탓에 결과적으로 명을 재촉한 것은 아닐까.
내가 백사당에 두 번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면, 햐쿠미 가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다미는 지금도 건강하게 살아 있었을 것이다. 아니, 애당초 아버지가 나를 햐쿠미 가로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다미가 나라는 인간과 알고 지내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평안한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 자책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다양한 영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 분명 나를 걱정해서 먼저 간 것이라 여기고 다른 사람들도 당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백사당에 도착하자 정면 격자문이 열려 있었다. 잠시 기다렸지만 다미와 내가 나올 낌새가 전혀 없었다. 고모의 지시로 큰숙부가 당집에 들어가자 당집 거의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는 다미가 눈에 들어왔다. 다미는 마치 뭔가에 달라붙어 있기라도 한 듯한 자세로 죽어 있었다. 한편 나는 당집 안에 없었다고 한다.
- "돌아와 보니 네가 중간방에 잠들어 있어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너... 도대체 어떻게 집에 돌아온 거니?"
나는 등골이 오싹하다는 듯이 묻는 고모를 무시하고 당연한 의문을 입에 담았다.
"다미 할멈을 어떻게 했어요?"
만약 부엌 아주머니들 중 한 명이라도 다미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면 벌써 내 귀에 들어왔을 것이다. 즉, 고모와 숙부들은 다미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겼다.
허나 당집 밖에는 사람이 있었다. 장례 행렬에 들키지 않고 다미를 햐쿠미 가로 옮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아니면 장례 행렬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가 셋이서만 몰래 당집에 가서 다미를 옮겨온 걸까. 그런데 고모와 숙부들이 과연 그렇게까지 하려 할까. 오히려 백사당에 그대로 방치하려 하지 않을까. 거기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 걱정은 일단 없다. 굳이 집까지 다미를 옮겨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 웬일로 큰숙부가 고개를 떨구었다.
"저기."
고모가 이쪽으로 몸을 내밀며 청천벽력 같은 말을 꺼냈다.
"실은 너뿐만 아니라 네 어머니도 없었어."
-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새어머니도 없었다.
있든 없든지 새어머니는 죽었으니까 관계없으리라.
- "아니, 그러니까 말이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고모가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 유일한 공통점은 양쪽 다 눈앞의 대상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랄까.
나는 미와코의 풍만한 가슴을 주무르며 비밀스러운 부분을 부드럽게 만졌다. 하아... 하고 토해낸 숨이 귀에 닿자 등줄기가 바르르 떨렸다. 미와코가 충분히 젖었음을 확인하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 스륵.
미와코의 따뜻한 안으로 들어간 순간 왠지 내가 뱀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 소름 끼쳤지만 그대로 순식간에 절정에 달할듯한 흥분도 동시에 느꼈다.
나는 미와코 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방금 전에 압도적인 공포를 느낀 만큼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미와코를 사정없이 괴롭혔다.
... 스륵.
미와코의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내가 뱀에 가까워져 가는 느낌이 강해졌다. 몹시 불쾌하면서도 황홀한 그 느낌이 되풀이되다 보니 머릿속이 마비되었다. 이제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었다.
... 스륵 스륵, 스륵.
나는 점점 더 깊이 파고들었다. 미와코와 동화되고 싶다고 바랄 만큼 그녀의 몸에 탐닉했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기진맥진하여 축 늘어진 채 서로 끌어안고 이불 위에 누워 있을 때였다.
손바닥에 까끌까끌한 느낌이 들어 당황스러웠다. 왼손으로 미와코의 몸을 어루만지다가 목덜미를 쓰다듬었을 때 이질적인 뭔가가 느껴졌다. 미와코가 몸을 비틀어서 한순간밖에 만지지 못했지만 부드럽고 탄력 있는 피부와는 명백히 달랐다.
다시 한번 목덜미를 만지려다 등에 손바닥이 닿자 거기서도 똑같은 감촉이 느껴졌다.
아...
그대로 아래로 쓸어 내려가자 등판이 전부 똑같은 느낌이었다. 까끌까끌한 비늘 같은 것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있는 듯한, 따뜻한 가운데 서늘한 냉기가 서린 듯한 감촉이 전해졌다.
기분 좋게 흘리고 있던 땀이 대번에 싹 가시고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아아아아아.
환희의 목소리로 들리던 미와코의 신음소리가 순식간에 전혀 다른 소리로 변했다.
"우와와와와아아아아악!"
엄청난 절규가 정원방은 물론이고 심야의 햐쿠미 가에 메아리쳤다.
- 내가 비명을 지르며 이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것과 동시에 그것은 사아아악, 스륵 스륵... 하고 으스스한 소리를 내며 다다미를 기어 눈 깜짝할 새에 정원으로 사라져 버렸다.
- 내 물음에 고모는 입을 열다 말고 고개를 살짝 젓더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그 후에 나는 다시 그것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방의 불을 켜놓은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래도 새벽에는 잠에 빠졌는지 미와코가 깨웠을 때는 이불 속에 있었다.
- 은거방에서 내가 직접 다미를 탕관했다. 하지만 절대로 햐쿠미 가의 장송백의례를 따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미가 마모우돈으로 변한다면 그런 다미와 만나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왠지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내가 그렇게 느꼈을 뿐 아무 근거도 없었지만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지금도 믿는다.
그래서 탕관을 할 때도 다미가 여한 없이 성불할 수 있도록 보통 수건으로 정성 들여 몸을 닦았다. 대대로 내려오는 관습이니까.
- 고개를 들자 노인들 너머에 있는 나무 그늘에 미와코가 서 있었다. 고모 몰래 다미의 명복을 빌어준 모양이었다.
나는 사전에 절에 맡겨둔 짐을 받아 들고 다우 군 다오 초 로우히 마을을 뒤로했다. 햐쿠미 가에 이별을 고했다.
- 절 경내의 거목에서 들리는(저건 참매미였나) 요란한 매미 소리의 배웅을 받으며 문득 햐쿠미 가의 대문으로 처음 들어갔을 때도 이런 울음소리가 맞이해 주었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내리쬐는 강한 햇빛에 달아올라 그런 기억도 순식간에 녹아서 흘러가 버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 이곳의 기억이 머리에서 줄줄 빠져나간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기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몇 번이고 되풀이해 불길한 악몽을 꿀 것 같았다. 어릴 적에도 백사당에 다녀온 뒤에 몇 날 며칠 동안 무시무시한 꿈에 시달렸으니까...
하지만 이곳의 기억이 사라지면 다미와 쌓은 추억도 없어진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괴롭다.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왠지 그러한 괴로움을 맛보는 한이 있어도 지워야 할 기억이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옛날에 백사당에서 겪은 공포스러운 일은 햐쿠미 가를 다시 찾을 때까지 머릿속 깊은 곳에 꼭꼭 숨어 있었다. 이 땅을 밟고 그 집에 돌아오자 과거에 체험한 무서운 일이 떠올랐다. 여기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혹시 평생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직 떠오르지 않은 기억이... 떠올리고 싶지 않고, 떠올려서는 안 되는 금단의 기억이 실은 또 있는 것 아닐까.
햐쿠미 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 당연히 다미의 무덤에 성묘를 하러 가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를 마지막으로 나는 그 지방에 단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에는 다시 그곳을 찾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예감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줄곧 그런 두려움을 품고 지내왔다.
그것의 기억과 함께...
- 그래서 나는 기억이 허락하는 한 어린 시절에 체험한 일을 모조리 적어두기로 했다. 그 작업이 자극을 주어 묻혀 있던 기억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분명 대처법도 생각날 것이다.
- 아니면 떠올린 것을 후회할까. 몸부림칠 만큼 무서운 체험이 되살아나 진심으로 후회하게 될까. 아니, 분명 이대로 끙끙 앓는 것보다야 나을 것이다. 용기를 내어 과거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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