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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다 신조] 백사당 - 괴담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8. 6.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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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미쓰다 신조 / 김은모
출판 : 한스미디어
출간 : 14.12.22


       

미쓰다 신조가, 끝났다.

 

물론 새로운 작품이 발간될 테니 완전한 끝은 아니지만-

한 단락이 맺음 지어졌다는 느낌이다.

홀가분하고 상쾌한 기분.

 

<사관장>과 <백사당>,

이 두 작품만큼은 순서대로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다고 추천하고 싶다. 

 

<사관장>은 햐쿠미 가의 장례 의식과 그 당시 발생한 사건을 체험한 다쓰미 미노부의 이야기다. 

<백사당>은 그 이야기를 들은 미쓰다 신조의 이야기다. 

 

한국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작가 시리즈>의 외전 격인 <쉘터 - 종말의 살인>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내게 <작가 시리즈>의 완전한 결말은 <백사당-괴담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

내 기억인데도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

 

이인증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면 누구나 한두 번쯤은 경험하지 않던가?

어느 쪽이 꿈인지, 어느 쪽이 나인지, 지금 떠오르는 기억들은 '실제로' 내가 경험했던 것인지. 

 

비슷한 경험-

아마도 내가 <백사당>에 강하게 끌리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어설픈 서평을 위해 허우적거리기 보다 깔끔하게 개인적인 감상만을 남기고 싶다.

좋았고, 좋으며, 좋을 것이다. 

 

행복했다.

 


 

 

 

친구 아스카 신이치로와 소후에 고스케에게 이 책을 바친다.

 

 

 

- 몇 살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 묘한 외모의 남자는 길고 긴 이야기를 앞이야기와 뒷이야기로 나누어 도중에 한 번 쉬어가며 들려주었다.

- 남자의 길고 긴 이야기는 끝없이 계속됐다. 그것은 긴키 지방의 오래된 가문 햐쿠미 百巳 가에 있다는 '백사당 百蛇堂'이라는 기묘한 당집에 얽힌 그의 꺼림칙한 경험이었다.

 

- 나는 이 이야기를 처음에는 약간 느긋하고 편안한 자세로, 다음에는 조금 몸을 내밀고 반신반의하며 듣다가, 이윽고 한마디도 흘려듣지 않겠다고 온 신경을 집중했고, 나중에는 극도로 피로를 느끼면서도 마지막까지 귀 기울여 들었다. 

 

- 몇 살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 묘한 외모의 남자는 길고 긴 이야기를 앞이야기와 뒷이야기로 나누어 도중에 한 번 쉬어가며 들려주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알고 보니 실은 벌써 끝났는데 이야기가 처음으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모호한 기억을 더듬듯이 띄엄띄엄 풀어내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는 동안 마치 주문처럼 같은 내용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겨우 알아차리고 남자의 입을 막을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 문득 주변을 둘러보자 라운지에는 나와 남자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카사카에 있는 이 호텔은 밤 11시 반까지만 음료 주문을 받는다. 하지만 라운지 자체는 24시간 개방되어 있으므로 그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상대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자 새벽 4시 반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물론 전철은 끊겼으니 첫차가 다닐 때까지는 집에 못 간다. 이 긴 이야기를 듣기 전에 남자는 숙소를 예약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즉 우리 둘 다 여기서 시간을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 지금 들은 이야기에 관해 나는 깊이 있는 질문을 하고 싶었다. 한편으로 이제 쉬고 싶기도 했다. 남자가 이야기하는 동안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뭔가가 이야기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뚝 끊어져서 단숨에 피로가 덮쳐온 듯한 기분이었다. 진한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아까 전까지 소파에서 몸을 내밀고 열심히 떠들던 남자도 지금은 다른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멍하니 소파에 몸을 맡긴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여덟 시간 가까이나 이야기를 계속했으니 지칠 만도 했다.
설마 어제부터 시작해 자정을 넘겨 오늘까지 이런 체험을 할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 그저 초대받은 어느 문학상 시상식 겸 파티에 참석하여 분위기에 따라 2차까지 간다고 하더라도, 늦어도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갈 예정이었다. 

- 2001년 8월, 30대 후반의 나이에 내 첫 장편소설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이 출간되었다. 예전에 살았던 무사시나고이케의 '인형장'이라고 불리는 집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괴이한 사건에 대한 소설로, 뜻밖에도 일부에서는 호평이었다. 애당초 소설로 발표할 생각 없이 인형장에서 경험한 악몽 같은 기억을 내 속에서 정리하기 위한, 일종의 재활 차원으로 쓴 원고였다. 이 원고의 존재를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논픽션 작가 시마무라 나쓰에게 들켜서 바로 고단샤 출판사의 편집자 A를 소개받았다. 그녀는 <피렌체 연쇄살인>과 <엑소시스트와 나눈 대화>, 그리고 내가 기획 편집한 <이탈리아의 마력>의 저자로 호러를 아주 좋아한다. 나와 잡담을 나눌 때도 대개 호러 영화 이야기밖에 하지 않을 정도다. 그런 연유로 재활 삼아 적은 원고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 허나 당연하게도 독자들은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을 어디까지나 소설로 읽는다. 작품의 탄생 배경을 전혀 모르는 독자는 분명 취미 삼아 쓴 작품이라고 받아들일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호평을 받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대 이상이라고 할까, 생각지도 못한 호평이라 솔직히 꽤나 당황스러웠다. 아는 작가와 평론가의 말은 반으로 깎아 듣는다고 쳐도,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평가가 귀에 들어왔을 때는 정말로 기뻤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넷의 여러 사이트에서도 이 책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인터넷 사이트는 작가, 평론가, 편집자 등 문인에서 일반 독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으므로 상업지에 실리는 서평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극적이다. '어떤 의미'라고 전제를 단 것은 그 대부분의 후기가 서평이 아니라 감상, 그것도 좋다 싫다, 재미있다 없다라는 극히 주관적인 표현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러한 경우 당연히 후기를 올린 사람이 독자로서 쌓아온 경험과 교양, 독해력까지 훤히 드러나므로 상당히 재미있다.

- 책이란 기본적으로 독자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론가가 어떻게 평가하든, 학교 선생이 뭐라고 해석하든, 가이드북의 '독서법'에 뭐라고 나와 있든 간에 그 책을 읽은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즐기면 그만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다만 그 감상을 글로 옮긴 순간 바라는 바라지 않든 책임이 발생한다. 동시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셈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자각하느냐 못하느냐가 서평과 감상문의 차이라고 새삼스레 생각해보았다. 

- 어떤 작가와 이야기를 하다가 '내 작품을 완전히 이해받은 적은 없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말만 들으면 상당히 교만하게 느껴지지만, 데뷔하고 나서 순식간에 인기 작가의 반열에선 사람이라 이래저래 도마 위에 올랐을 테니 어쩐지 이해는 갔다. 즉 책이 독자의 소유물임을 깨닫는 것은 사실 예삿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 기성작가와 출판사가 신인작가 육성에 힘쓰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일단 세상에 내놓은 싹수 있는 신인의 무난한 작품'을 1500엔에서 2천 엔 가까운 돈을 들여 사는 독자는 도대체 뭐가 되는가. 독자에게 신인을 함께 키워달라고 부탁이라도 할 셈인가. 물론 아예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상 수상작'이 아니라 '우수작' 또는 '가작'의 이름으로 출판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신서판이나 문고본으로 내서 수상작인 양장본과는 가격 차를 두는 편이 바람직하다. 
심사위원 대표 아무개 작가의 말이 그 상 심사위원 모두의 의견인지, 출판사의 생각인지는 모른다. 다만 독자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문학상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 문학상 하면 거창해 보이지만 출판 역시 장사다. 수상작이 없는 해는 경비를 한 푼도 회수할 수 없으므로 분명 출판사도 그런 결과는 피하고 싶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수상작을 남발하면 상자체의 권위가 떨어져서 결국 독자의 외면을 받는다. 요컨대 확고한 이념과 그에 상응하는 체력이 없으면 안이하게 상 따위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 하기야 스즈키 코지의 <링>이나 타카미 코슌의 <배틀로얄>처럼 낙선했는데도(<링>은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 최종후보, <배틀로얄>은 일본 호러소설 대상 최종후보까지 올랐다) 간행된 후에 절대적인 평가를 받고 판매에서도 대성공을 거둔 예도 있으니 참 어려운 문제다.

- "그럼 거짓말로 책을 팔아먹는다는 거야!"

"유령 같은 건 없지만 요정은 있습니다. 원고 쓸 수 있는데요. 저라면 쓸 수 있어요."
"영능력자를 소개해주세요. 진짜를요. 능력이 강한 사람을 가능한 한 빨리 소개해주세요. 늦으면 곤란합니다."
"그 책에 실린 유령의 집이 어디 있는지 알려줬으면 하는데. 뭐? 물론 거기서 살려고 그러지."
"XX(해외)에 갈 건데요. 돌아오면 미스터리한 지역에 대한 원고를 쓸 테니까 여비를 부담해 주세요."
"나는 매스컴이 싫지만 댁들이 원한다면 흉가 순방과 관련해 원고를 써줄 의향이 있어요."
"ㅇㅇ 작가 책에 실린 이야기(괴담)는 도작이에요. 그건 원래 제가 체험한 일이거든요."
"여러분 일을 돕게 해 주세요. 돈은 필요 없습니다. 이런 일을 꼭 하고 싶습니다."

- 적어도 마지막 사람은 통화 목소리에서 성실한 인상이 전해졌고, 진심으로 우리 일을 돕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한순간 '아르바이트 비 없음=제작비용 절감'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정중하게 거절했다.

- 워드프로세서와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스스로 원고를 투고하는 사람들의 수가 확실히 늘었다. 하지만 넓은 의미의 미스터리 분야를 기획하다 보면 원고 이외에도 대처가 필요한 일이 생긴다는 것을 지긋지긋할 만큼 배웠다. 여기에다 방송국의 전화가 더해지는 정도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지만 방송국의 요구사항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방송국이라는 명함을 내밀며 유세하기 때문에 질이 더 나쁜지도 모른다. 

- 어쩌면 눈앞의 남자도 정신줄을 놓은 사람의 부류가 아닐까.
남자가 끈덕지게 달라붙어 난감해진 L이 그런 일이라면 내가 적임이다 싶어 이렇게 말하기는 뭐 하지만 '떠넘긴' 것 아닐까.
바로 그런 의심이 들었는데 그 불신감이 얼굴에라도 드러났는지 남자는 다시 기둥 뒤로 숨으려고 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돌아갈까 마음먹었을 때였다.

- L은 우수한 편집자지만 일단 말문을 열었다 하면 수다쟁이 아줌마 모드로 변하기 때문에 잠시 참는 수밖에 없다.
어느덧 나와 남자는 라운지 소파에 앉아 커피를 앞에 두고 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 그래서 엄청 바빴어요."
이 말이 나올 때까지 족히 삼십 분은 흘렀을까. 하지만 결국 L이 왜 바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집중해서 귀 기울이고 있었어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말에 맞장구치는 한편으로 실은 몰래 남자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상한 사람을 떠넘긴 것은 아닐까,라는 의혹은 여전히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L의 이야기를 듣는 남자의 태도에서 그런 사람들이 지닌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곧 깨달았다. 오히려 풍부한 교양과 반듯한 심성이 언뜻언뜻 엿보이는 듯했다.
그런데도 남자를 보고 있자니 묘하게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인격이나 인간성과는 관계없이 심상치 않은 뭔가가 그의 인생에 얽혀있다... 어떤 의미에서 정신줄을 놓은 사람보다도 훨씬 심각한 뭔가 걸려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 "... 그리고 말이죠, 다쓰미 씨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 하세요."

L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와서 나는 다쓰미 미노부 龍巳 美乃步라고 소개받은 남자에게 다시금 눈길을 주었다. 이름만 들으면 여자라고 착각할 만큼 희한한 이름이다.

- 내 눈길이 느껴져 쑥스러웠는지 다쓰미는 허둥지둥 L의 말을 부정하려고 했지만 L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오 년 전부터였나 우리 출판사에서 주관하는 상을 비롯해 다양한 상에 응모하셨어요. 물론 소설은 재미있어요. 다만 그 굳이 따지자면 우리 출판사 상은 미스터리나 서스펜스에 주목하잖아요. 그런데 다쓰미 씨 작품은 호러랄까, 괴담이라고 할까. 국내 시골 지역을 무대로 삼은 작품이 많고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반쯤 자전적이라고 할까 사소설 비슷해요."
"즉, 소설에 나오는 괴이한 부분이 자신의 체험..."

 

- 괴담과 동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다행히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옛날부터 통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분명하다. 올여름에도 괴담지괴(怪之談怪, 소설가 교고쿠 나쓰히코, 문학평론가 히가시 마사오, 괴이수집가 나카야마 이치로와 기하라 히로카쓰가 결성한 모임. 괴담을 이야기하며 괴담문화의 부흥을 꾀하는 것이 목적이다)가 주최한 행사에 갔을 때 우리 출판사 부스에서 관련 서적을 판매하고 있기에 나도 영업을 도왔는데 그때 왼쪽 옆이 국서간행회, 오른쪽 옆이 미디어팩토리 부스였다. 판매를 하면서 잡담을 나누는데 미디어팩토리의 여사원이 "우리 회사는 <신 미미부쿠로>를 한 권 낼 때마다 사원들이 모두 함께 액막이를 하러 가요"라고 말해주었다. 나 역시 비슷한 책을 편집하는 입장이면서 그 말을 듣고 역시 그렇구나, 하고 새삼 놀랐다. 상대방이 액막이를 중시한다는 것을 알아놓고 "저는 한 번도 간 적 없습니다"라고 말실수를 하는 바람에 부스에서 부리나케 빠져나온 씁쓸한 기억이 있다.

- 그런데 삼각 저택과 관련된 이야기는 액막이를 하는 정도로는 소용이 없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아는 독자는 이해하겠지만 다분히 초자연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유령에 얽힌 괴담과는 사정이 꽤나 다른 모양이다. 따라서 장편 실화 괴담을 기획하기는커녕 <괴담도연초>에서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될 가능성이 있었다.

- 세 번째는 고이케 다케히코의 <유령 건물 안내 2>에 마지막 편으로 수록된 <봉인된 옛 저택에 얽힌 이야기>다. 실은 이것이 제일 미지수였다. 왜냐하면 아직 현재진행형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원고로 적어서 책에 수록한 뒤에도 이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고 들었다. 

- 수다스런 목소리로 어릴 적에 겪은 운명적이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언제까지고 계속 들려주려고 했다.
나는 다쓰미의 체험담을 집중해서 들었다. 내용에 흥미를 느낀 것은 당연하다고 치고, 무대가 된 장소를 내가 알고 있다는 것에도 역시 영향을 받았을까. 아니, 가령 그런 우연이 없었다고 해도 나는 이 이야기의 포로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아니, 아니, 내가 이 이야기의 포로가 되지 않더라도 이 이야기가 나를 포로로 삼지 않았을까. 

- 그만큼 다쓰미가 들려준 체험담은 기이했다. 보통 이야기가 아니었다. 단순히 듣고 나면 끝이라는 식의 이야기는 결코 아니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본사로 발령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바로 퇴직해서 지금은 직업이 없습니다."
너무 개인적인 질문을 하기는 꺼려져서 무난한 말로 되받았다.
"교토에 계시는군요. 그럼 필요할 때 취재 가시기는 편하겠군요."

"... 예."
힘없이 대답하는 다쓰미를 보고 아차 싶었다. 역시 두 번 다시 그곳에는 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경솔했다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 "하지만 취재를 하러 가도 제 이야기에 살을 붙여줄 만한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을 겁니다."
겸연쩍어하는 나를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취재는 가지 않겠다고 미리 못 박아둘 작정인지 다쓰미는 먼 곳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 작별인사를 하고 나서도 십 분쯤은 라운지에 머물렀다. 역시 우리 말고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보였지만 라운지를 나서는 순간 구석 관엽식물 뒤편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근처에 앉아 있던 노인이 떠올랐지만 이런 시간까지 남아 있을 리 없다. 설령남아 있었다고 쳐도 저렇게 숨듯이 몸을 감출 필요는 없을 것이다.

 

- 조금 무서웠다. 누군가가 우리 대화를 훔쳐 들은 게 아닐까,라는 의혹이 스쳤다.
하지만 곧 망상에 불과하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 나사도라는 마을의 하숙집에서 발생한 대학생 독살 사건과 하쿠쇼 안뜸의 암벽장에서 발생한 고등학생 몰살사건, 게요라 제도의 쿠비 섬에서 발견된 다섯 개의 잘린 머리 사건 등 미궁에 빠진 몇 가지 사건을 해결로 이끈 아마추어 탐정의 일면도 있었다.

- 그건 그렇고 햐쿠미 가의 의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백사당이란 다쓰미 씨도 말했다시피 고인의 명복을 비는 특별한 장소, 즉 '모야 喪屋'야."
"딱히 진귀한 건 아닌가?"
"전국 각지에서 일찍이 다양한 장송의례가 거행되었던 건 사실이야. 하기야 장례식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지.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경험하는 다채로운 연간 행사에는 지방색이 뚜렷하게 드러나. 그중에는 네가 들은 의례 중 일부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어. 하지만 그토록 세세한 의식이 그 지방에만 집중되어 있다니 그건 좀 특이할지도 모르겠군. 아무래도 지방 풍습이라기보다 햐쿠미라는 가문, 아니면 다미라는 노파가 관장하는 특유의 의례 같은데." 
"장송백의례가?"
"집에서 모야로 고인을 옮길 때 관에 넣어서 옮겼는데, 탕관을 하기 전에 고인을 입관하는 건 몹시 드문 일이야."
"보통은 탕관을 한 후에 관에 넣어서 출관하나?"
"응. 그리고 이번 이야기에는 키워드가 두 가지 있어."
"뭔데?"
"백 百과 뱀 巳이야."

 

- 그러고 보니 '백 百'과 '뱀(蛇, 它, 巳)'이라는 한자가 많이 나온다.

- "다우 蛇迂와 다오 它邑라는 이름이 붙은 지역에 뿌리내린 오래된 가문이 햐쿠미 百巳가라니 우연치고는 너무 심하지 않나 싶지만, 미타마의 숲에 위치한 신당에 모셔져 있는 것이 뱀신님이라면 한자의 일치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지."
"무슨 소리야?"
"즉, 햐쿠미 가에서는 대대로 뱀신님을 믿어왔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야."

- "백이라는 한자가 많은 건 왜야?"
"백 이라는 한자는 숫자의 시작을 나타내는 '일 一'과 크다는 뜻의 '백 白'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른바 98, 99, 100이라는 숫자로서 기능할 뿐 아니라 막연하게 '많은 것'을 가리키기도 해. 예를 들자면 백귀야행 百鬼夜行은 온갖 잡귀가 밤에 돌아다닌다는 뜻이잖아. 그리고 하나 더 완전한 것, 완성된 형태, 완결된 상황을 가리키기도 하지."
"완전..."

"백물어는 아흔아홉 번째 이야기에서 멈춰야 한다는 규칙이 있잖아. 그걸 마지막까지, 그러니까 백 번째 이야기까지 하고 나면 괴이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하지. 그 전승도 '백'이라는 한자가 지닌 의미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어."

"아아, 그래서 햐쿠미 가의 장송백의례도 아흔아홉 가지인 건가?"
"안이하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의미일지도 모르지. 서양 고전 건축물을 보면 일부러 기둥 하나만 제대로 만들지 않고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서 의도적으로 옥에 티를 내놓은 경우가 흔히 있는데, 완전한 것에는 그 완벽함 때문에 악마가 깃든다고 믿었기 때문이야."
"즉 신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이 세상에 완전한 것을 내어놓을 수는 없다는 뜻인가?"
"그렇지. 그래서 장송백의례가 아흔아홉 가지 의례로 이루어진 걸 거야. 원래는 마물을 물리치기 위한 의례이지만 완벽하게 거행하면 오히려 마물을 불러들일 위험성이 있거든." 
"도도야마 산기슭의 신사가 쓰쿠모 九十九 신사로 불리는 것에도 그런 뜻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군."

"특유의 지명이 붙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 그 이유는 지방마다 다 다르고. 하지만 이번 경우는 아마도 지금 해석이 틀림없을 거야."

 

- 그렇게 말하면서도 신이치로는 좀 더 조사해 보겠다고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또 다른 친구 소후에 고스케는 전화를 해봤자 좀처럼 받지 않기 때문에 다쓰미의 체험담을 요약하여 메일을 보내놓았다. 신이치로와 마찬가지로 인형장 사건 때는 그에게도 신세를 졌다.
하기야 후에 고스케가 일본 호러소설 대상 심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 원고를 읽다가 미쓰다 신조의 이름으로 응모한 <백물어라는 이름의 이야기>라는 작품이 있다며(나는 응모한 기억이 없지만) 내게 전화한 것이 인형장 사건의 발단이었으니 아예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고스케에게 책임이 있느냐 하면 물론 아니 ...

- '견신'은 주고쿠와 시코쿠 지방에서 주로 믿는 신인데,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냈다는 점이 특색이다. 대표적인 방법을 적자면 일단 개를 머리만 꺼내둔 상태로 땅에다 묻고 방치한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은 일절 주지 않는다. 이윽고 개는 굶주림에 시달린다. 그때를 노려 가깝기는 하지만 절대로 입이 닿지 않을 곳에 먹을 것을 놓아둔다. 그러면 개는 침을 질질 흘리며 목을 뻗어 안간힘을 다해 그것을 먹으려고 애쓴다. 그 순간 바로 개의 머리를 댕강 잘라 신사에다 모신다. 그 머리가 '견신님'이라고 불리는 신이 되는 것이다.

- "그게 말이야."
고스케가 말을 이었다.
"어느 날 Y의 할머니가 지금 견신님을 모시려고 하는데 보러 가자고 Y에게 제안했다. 당시 Y는 견신이 뭔지 몰랐던 터라 순순히 따라갔지. 할머니는 그를 화장장 뒤편으로 데려갔어. 화장장 뒤편 땅에 어째서인지 통 하나가 거꾸로 놓여 있더래. 할머니가 보라고 말하며 통을 치우자 땅에서 머리만 나와 있는 개 한 마리가 주변을 두리번대더라지 뭐야."
"어. 정말이야?"
엉겁결에 나도 간사이 사투리로 말했다.
"응. 그걸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Y는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야 할머니한테 자세한 사정을 물어볼 수 있었다. 그때 견신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고 하더군. 할머니한테 그렇게 묻어두면 개가 달아나지 않냐고 물었더니 십자로 얽은 대나무에다 개를 묶어서 대나무와 함께 묻기 때문에 절대로 못 기어 나온다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셨대."


- 그야말로 호러 재패니스크의 세계다.
이 이야기가 왜 대단한가 하니, '땅에서 머리만 나와 있는 개를 보았다'는 사실 이상으로 '십자로 얽은 대나무에 개를 묶어서 묻기 때문에 절대로 못 기어나온다'라는 할머니의 설명에서 압도적인 현실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 "알겠냐."
내가 놀라든 말든 고스케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Y의 나이에서 거꾸로 계산하면 그가 그 광경을 본 건 1960년대 초반, 연호로 따지자면 쇼와 30년대 후반이야. 그해에 갑자기 견신을 모시는 걸 그만두었을 리는 없으니 그 후로도 몇 년은 계속됐을 거라고 생각해 봐. 그럼 쇼와 40년대 일본에서 그런 인습이 행해졌다는 뜻이라고. 몇 년만 더 있으면 만국박람회(1970년에 오사카에서 개최되었다)가 개최되는 일본에서 말이야."
그에 비하면 햐쿠미 가의 장송의례는 전혀 신기할 것 없다는 말일까.

- "아니 그렇게까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Y에게 들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어."
고스케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더욱이 지금은 그러한 종류의 기행문을 쓰고 있어서인지 내버려 두어도 혼자서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다. 그건 그렇고 어느 틈에 Y에게 이런 이야기를 입수한 걸까. 과연 취재라는 방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 "Y는 곰곰 생각해 보았지만 도저히 모르겠더래. 다만 방울 이야기는 절대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면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는군."
어쩐지 등골이 오싹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말로 느닷없이 방울의 정체를 알아차렸대."

"뭔데?"
"Y 말로는 방울 하나가 사람 하나에 해당하지 않을까 한대. 마을에서 사람이 죽으면 신사 신당 뒤편에 방울을 하나 놓는 거지. 먹을 게 없어 갓난아이를 버렸을 때나 늙어서 쓸모없어진 노인을 내다 버렸을 때도 방울을 하나씩 쌓아 올리지 않았을까. 그렇게 해서 삼십사 호라는 숫자를 유지해 온 거라고 Y는 깨달은 모양이야."
"어째서 그 호수를 유지해야만 했지?"
"확실한 건 모른다고 했어.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최대 규모가 그 정도였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그야말로 뭔가 인습에 얽힌 사연이 있었을 수도 있고. 아무튼 Y는 그 마을에서 대대로 방울 의식을 지켜왔다는 걸 알아차렸대."
한적하고 조그만 신당 뒤편에 방울이 산더미로 쌓여 있는 광경이 문득 뇌리에 떠올랐다. 아래쪽 방울은 뭉그러져서 주변의 방울과 한 덩어리가 되었다. 조그마한 방울 하나하나가 모여 어느 틈엔가 정체 모를 거대한 괴물처럼 변했다. 그런 광경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 "조사대의 조사 결과도 Y씨의 생각과 같았어?"
망상을 떨쳐내고자 질문을 던졌다.
"글쎄, 모르겠는데. Y씨도 자기 생각을 조사대 사람에게는 들려주지 않았대. 어디까지나 사진가로서 참가 요청을 받았을 뿐이라 쓸데없는 참견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
설령 Y의 가설이 옳다고 해도 마을 사람들이 순순히 인정한다는 보장은 없다.

- "그 마을은 지금도..."
"아니, 조사대가 찾아간 지 몇 년 후에..."
고스케가 갑자기 말을 뚝 끊었다.
"왜 그래?"
고스케는 잠시 아무 말도 없다가 묘하게 한 마디씩 확인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이 이야기를 너한테 한 건 이번이 처음이지?"
"응,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그게 왜?"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럼 기분 탓인가. 그게 전에 같은 이야기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이야."
"기지감 旣感인가?"
"그렇겠지... 전에도 한번 말했던 것 같은,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장면을 제삼자로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그건 말도 안 되지."
"그렇지. 하지만 그것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는데... 뭐, 됐어. 미안, 무슨 이야기였지?"
말투에서 뭔가 머뭇거리던 느낌이 싹 사라졌다.  

- "실은 저도 아직 자세히 조사하지는 않았는데요. 아무래도 햐쿠미 가 근처에서, 게다가 미타마의 숲 근방에서 아이가 사라진 모양입니다. 그것도 세 명이나... 모두가 거기서 행방불명되었는지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다쓰미 씨 이야기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만 좀 신경이 쓰여서 혹시 아시는 게 있나 싶어 여쭤보는 겁니다만..."

"..."
괜히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기분이 상한 걸까.
"아니요, 모르시면 됐습니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일도 아니므로 선선히 물러서기로 했다.

 

- "그리고 원고를 읽으면 알긴 하겠지만, 새어머니 장례식을 치르러 언제 햐쿠미 가에 가셨나요?"
"..."

어째서인지 다시 침묵이 깔렸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설마 수화기를 팽개치고 가버린 건 아닐까, 나는 조금 안달이 났다.

"여보세요?"
변함없이 침묵이 흘렀다.
"다쓰미 씨?"
침묵이 잠시 더 이어진 후.
"... 죄송합니다."
드디어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 다마가와는 잠시 주저하는 것 같더니 불쑥 중얼거렸다.
"하지만 보는 관점을 바꾸면 인연이라고도 받아들일 수 있잖아요."
그 순간 웅성거리던 가게 안이 물살 빠져나가듯 조용해지는 느낌이었다. 목덜미에 찬 기운이 닿은 듯했다.

 

- "다쓰미 씨와 미쓰다 씨 두 분이 진짜 인연으로 연결돼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돌고 돈 끝에 하필이면 문제의 지방을 알고 있는 미쓰다 신조라는 편집자에게 그 원고가 다다랐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인연처럼 느껴진다고요."
"..."
입을 꾹 다문 채 서로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는 상태가 잠시 이어졌다. 주변 사람들 눈에는 이별을 앞둔 연인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보일 만큼 우리 자리에만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을 것이다.
"저도 원고를 읽어볼래요."
마침내 다마가와가 입을 열었다.
"으음, 그건..."
"원고를 안 보여주면 다른 사람들한테 다 말할 거예요."
그녀가 진짜로 발설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수작을 부릴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원고를 보여줘도 될까. 다마가와는 제 나름대로 걱정이 되어 이렇게 협박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를 골치 아픈 일에 끌어들이는 꼴이 되지는 않을까.

- '무슨무슨 고가네이'라든가, 비슷해 보이면서도 각기 다른 역명이 이어지는 구간이 나온다. 그중에 무사시나고이케가 늘 내가 타고 내리는 역이었다. 아직도 미타카에서 몇 번째 역인지 헷갈릴 만큼 이 구간은 번거롭다.
나는 무사시나고이케 역의 내리는 문 쪽 가장자리 자리에 앉아서 바로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차량 내부의 잡음이 들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원고에 몰두했다. 

- 다쓰미가 겪은 괴이한 일도 흥미로웠지만 그 이상으로 그를 둘러싼 민속학적인 세계가, 특히 장송백의례에 관한 묘사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부분을 읽고 있으면 뭐라고도 표현할 길 없는 감정이 솟아났다. 이것은 괴담 애호가로서의 감정일까, 편집자로서의 감정일까, 아니면 일본인으로서의 감정일까. 판단은 서지 않았지만 묘하게 달라붙는 듯한 감촉을 느꼈다. 결코 기분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혐오해서도 안 되는 감촉이었다. 좋든 싫든 나는 분명 이 이야기에 홀린 것이 틀림없었다.

- 그건 그렇고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데 도대체 왜 이다지도 빨려드는 걸까. 다쓰미가 들려주지 않은 자세한 설명이나 묘사도 많아서 좀 더 이해하기 쉬운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혼란스러워지는 기분도 들었다. 마치 바닥 없는 늪 깊숙이 가라앉는 듯한, 커다란 거미줄에 걸린 듯한 꺼림칙한 기분이었다. 

- 당시 다섯 살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당연히 나중에 지식을 보충해서 기억을 다시 쌓아 올렸겠지만, 그래도 어릴 적의 체험을 이렇게도 극명하게 써냈다니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다만 그렇게 감탄하는 한편으로 원고에 쓰여 있지 않은 중요한 뭔가가, 정리하지 않고 내팽개친 중대한 뭔가가 있는 것만 같아서 애간장이 탔다.

 

- 이야기했지만 쓰여 있지는 않은 것 같은 이 느낌...
적혀 있지만 들려주지는 않은 것 같은 무언가...
이것들에게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 나는 어느 틈엔가 원고의 행간을 좇는 것도 잊고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정체 모를 의혹에 고뇌하고 있었다. 그러다 수마가 덮쳐왔는지 고개를 떨구고 꾸벅꾸벅 존 모양이다.
어렴풋이 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떴다. 오른쪽 뺨에 뭔가 닿아 있었다. 따끔따끔하니 아팠다. 아직 잠이 반쯤 덜 깬 상태였지만 오른쪽 뺨에 머리카락 같은 것이 닿은 것만 같았다.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도 오른쪽 옆으로 여자의 검은 옷이 보였다. 내가 잠든 사이에 내 옆자리에 앉은 것이 틀림없다. 왼쪽의 출입문 쪽에는 회사원으로 보이는 양복 차림 남자가 서 있었다. 즉, 분명 오른쪽 옆에 앉은 여자의 머리카락이 내 오른뺨에 닿은 것이리라. 그런데 정작 기다란 머리카락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 기분 탓인가.
눈을 감고 다시 자려는데 이번에는 목덜미에 뭔가가 슬쩍슬쩍 닿았다. 게다가 그것은 움직이고 있었다.
난방이 잘 된 전철인데도 목덜미에 오싹 소름이 끼치면서 식은땀이 뺨과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 천천히 눈을 떴다. 역시 시야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목덜미에는 분명히 뭔가가 닿았던 감촉이 남아 있었다.

 

- 오른쪽 여자의 머리카락이 아닌가.
이대로 얼굴을 들고 아무렇지도 않게 오른쪽을 보면 될 일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만약 오른쪽을 보았는데 거기에...
거기에? 뭐가 있다는 건가. 설마 뭔가 있다고 해도 전철 안이다. 무서울 리 없다. 무서워? 지금 내가 겁을 먹은 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좋아,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마침내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렸을 때였다.

... 스륵.
파충류의 살가죽같이 서늘하고 습기를 띤 뭔가가 한순간이지만 분명히 목덜미를 스쳤다. 동시에 내 몸은 얼어붙고 말았다. 온몸의 모공에서 단숨에 땀이 솟아났고 몇 번이나 등이 부르르 떨렸다.

 

- 오른쪽 옆에 뭐가 앉은 거지?

더 이상 얼굴을 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고개를 푹 숙일 수도 없어 나는 어중간한 위치에 고개를 둔 채로 굳어버렸다.
두 눈은 부릅뜨고 있었지만 될 수 있는 한 오른쪽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도록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뛰었고 호흡은 거칠어졌다. 호흡곤란에 빠진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머리가 제멋대로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좌우로 살살 흔들렸다. 이대로 머리가 점점 더 심하게 흔들리다가 결국에는 비명을 내지를 나 자신이 보이는 듯했다. 그렇게 되면 끝이다. 

- 고집스럽게 전철에 등을 돌린 채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출발한다는 방송 뒤에 문이 닫히고 전철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는 내가 앉았던 자리로 눈을 돌렸다. 무섭지만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에 졌다고 해야 할까.

- 그 자리에는 이미 회사원 같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문 옆의 맨 가장자리 자리다. 그런데 그의 오른쪽 옆, 내가 방금까지 앉았던 자리의 오른쪽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째서인지 그 자리만이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전철이 만원인데도 아무도 않으려 하지 않았다. 마치 그 자리가 금기의 자리이기라도 한 듯이...

- 아까는 잠이 덜 깨서 그런 걸까.
인형장에서 불가사의한 체험을 한 뒤로 나는 예의 '또 다른 암흑언덕'(<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에 등장하는 언덕의 이름)으로는 지나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을 쓰고 나서 개운해졌는지 가끔 발길이 향할 때가 있었다. 특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는 무의식적으로 익숙한 길을 고르는 듯하다.  


- 이날 밤도 그랬다. 우울한 기분으로 전철에서 있었던 찜찜한 일을 곱씹다 보니 어느 틈엔가 도중에 미나미마치 상점가를 벗어나서 '또 다른 암흑 언덕'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이쪽 길로 갈 때 이용하는 편의점 불빛이 보여서 겨우 알아차렸을 만큼 나는 멍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되돌아가기도 귀찮아서 그대로 편의점에 들렀다가 집에 가기로 했다. 
환하게 불이 켜진 편의점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불현듯, 전철에서는 내가 잠이 덜 깨서 그랬던 것이 틀림없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밤길을 걸어오며 심각하게 고민했다니 바보처럼 느껴졌고 또한 부끄럽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현실적인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집에는 분명히 맥주가 다 떨어졌을 것이다. 맥주를 마시기에는 추운 계절이지만 위스키나 와인을 마실 기분도 아니었다. 말짱한 정신으로는 남은 원고를 읽을 마음이 들지 않을게 뻔하니 잽싸게 샤워를 하고 맥주를 쭉 들이켠 다음 단숨에 원고를 읽기로 했다. 

- 나는 샌드위치를 고르고 가게 안쪽에 있는 워크인으로 걸음을 옮겼다. 워크인이란 맥주와 페트병 등 음료수가 들어 있는 냉장고다. 도중에 가게에 들어온 여자가 물건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분주한 걸음으로 진열대 사이를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광경이 계속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추워서 계속 움직이나 보다고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여자는 11월 말인데도 거무스름한 원피스 같은 옷 하나만 입고 있었다. 문득 저 여자가 위험한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고 그대로 워크인으로 향했다. 

특별히 좋아하는 상표가 없어서 맥주 고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뭐든지 상관없으면 오히려 망설여지는 법이다. 냉장고 문을 열면 추우니 닫은 채로 맥주를 살펴보았다. 냉장고 문은 물론 안을 볼 수 있도록 유리로 되어 있다. 그 유리문에 뭔가가 비쳤다.

어...?

- 시선을 모으자 내 뒤에 여자가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미동도 없이 내 뒤에 가만히 서 있다. 왠지 참을 수 없이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뒤에 낯선 사람이 있어서 불편하다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강렬한 혐오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어째서 생판 모르는 남에게 그런 기분이 드는 걸까. 

- 뒤에 서 있는 여자도 맥주를 사려는 것뿐이라고 결론짓고 눈에 들어온 오백 밀리리터 짜리 캔 두 개를 꺼내 계산대로 향했다. 하지만 워크인에서 멀어지기 전에 내 뒤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 그 꺼림칙한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쫓아왔다.
헉... 겁을 잔뜩 집어먹은 다음 순간.
사사사사삭.
갑자기 발소리에 엄청난 기세가 붙었다. 섬뜩한 목소리와 함께 나를 바싹 뒤쫓듯이 따라왔다.

 

- 나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쏜살같이 달렸다. 옷매무새가 흐트러지든 말든 죽어라 뛰었다. 뒤를 따라오는 뭔가로부터 달아날 생각밖에 없었다.
라가하마 초 3번가 길로 나오고 나서야 겨우 멈춰 서서 두 어깨를 들먹이며 숨을 골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 나는 이내 뒤돌아보았다. 연립주택과 민가 사이로 뻗은 가느다란 길 앞쪽에 근처의 가로등 불빛을 받은 '또 다른 암흑 언덕'이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그 안쪽 어둠 한복판에 새카만 형체가 입을 벌린 채 아아아아앗, 소리 지르며 서 있었다. 마치 별개의 생물처럼 곤두서서 사방으로 퍼진 머리카락을 구불거리며 우뚝 서 있었다. 아니, 아니다. 그런 것이 보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뿐이다. 

 

-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아는 사람 곁에 가려고 하우.]
다쓰미에게도 들었고 원고에도 쓰여 있던 다미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말도 안 돼...
뭔가가 보인 듯한 기분을 털어내듯이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 순간 목덜미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 다. 


- 집에 도착하자마자 일단 욕조에 더운물을 받았다. 원래는 샤워나 할 생각이었지만 몇 초 동안이나 눈을 감고 참아낼 자신이 지금은 없었다.
뜨끈한 물에 들어가 양손으로 몇 번이고 얼굴을 씻었다. 식어버린 몸이 따스해지고 굳었던 근육이 풀리자 점점 마음이 진정됐다. 이렇게 더운물에 몸을 담글 수 있다는 현실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욕조에서 나온 후 맥주 한 캔을 눈 깜짝할 사이에 들이켰다. 방에 불을 켠 채 새 맥주와 원고를 끌어안고 침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맥주를 마시며 나머지 원고를 읽었다. 아니, 내 딴에는 읽으려고 했다. 확실히 눈으로는 글자를 좇았고 뜻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신이 종잡을 수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마치 잠들기 직전처럼 의식이 슥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으스스 추워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맥주를 마신 탓일까. 이불은 덮고 있지만 원고를 읽으려고 두 팔을 꺼내놓았기 때문일까. 하지만 타이머를 켜서 난방을 하고 있 ... 

 

- 자물쇠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끼이이이익...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와 함께 마치 나를 맞이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격자문이 저절로 열렸다.
묘한 기지감이 느껴졌다. 이 으스스한 당집도, 눈앞의 격자문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안에 들어가기는 싫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결코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허나 한편으로 미지의 것이 아니라면 괜히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순되는 마음이 마구 소용돌이쳐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 정신을 차리자 나는 격자문을 통과해 현관바닥 같은 기묘한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분명 격자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을 텐데 네 발로 엎드려 안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안쪽 문에 손을 댄 순간 절대 이 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에서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 문을 선뜻 열고 말았다. 내 머리와 두 손이 다른 사람의 것 같아서 기분 나빴다. 아니, 이왕 그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나' 자신이 어디의 누구인지 실은 잘 모르겠다.

- 컴컴한 당집 안으로 들어간 순간 문이 닫혔다. 주변을 손으로 더듬어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문은커녕 벽도 손에 닿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암흑 한가운데에 있는 모양이었다.
...
무슨 소리가 들렸다. 아는 소리였다. 기억에 있는 기척이었다.  

- 과학적으로 부정도 긍정도 되지 않은 현상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지 않느냐고 나는 단순하게 생각할 뿐이다. 믿지 않는다는 쪽의 비중이 월등하게 큰 이유는 그만큼 거짓말 같은 것이 많다고 느끼기 때문이리라. 

- 믿지 않는 비중이 그렇게 크다면 아예 부정하는 편이 낫지 않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새해 첫 신사참배부터 조상님 무덤 성묘는 물론이고 제야의 종까지 일본의 거의 모든 행사에 의미가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령의 존재나 오컬트 운운하는 현상을 인간이 신을 대하는 방식과 같은 수준에 놓고 다루다니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아예 상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누군가가 누군가를 그리는 마음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구분 없이 똑같지 않을까. 성묘가 가장 적합한 예다. 즉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양쪽을 위해 이런 종류의 문제는 회색인 채로 있는 편이 낫다.

- 갑작스럽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괴담은 프로레슬링이라는 견해를 품게 되었다. 한 해에 이백 수십 시합이나 벌이는 프로레슬러가 과연 진짜로 싸우는지는 따져볼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시합이 각본대로 연출된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진검 승부로밖에 보이지 않는 시합이 가끔이지만 정말로 열리기 때문이다. 물론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고, 불분명하다고 해서 문제도 아니다. 요는 관객이 그런 의혹을 품지 않을 수준의 시합을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 "그러자 갑자기 발소리가 멈추더라고요."
"멈춰 섰다고?"
"예. 저는 상대방이 그제야 이쪽에서 올라오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라 멈춰 선 줄 알았어요.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힘드네요. 계단으로 올라가려니까 참 피곤하네요' 하고 말했지요." 
"응." 
"그런데 대답이 없는 거예요."

"..."
"오히려 내 말에 더 겁먹었나 싶어서 저도 멈춰 섰는데 다시 발소리가 들려왔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찰딱, 찰딱... 이렇게 들리더라고요."
"..." 
"층계참을 사이에 두고 말을 걸었다고 했잖아요. 그때 내려오던 사람은 제가 멈춰 선 계단의 비스듬히 위쪽에 있었어요. 눈앞의 층참에서 꺾어서 올라가는 계단에 있었던 거예요. 비상계단은 계단 뼈대가 훤히 드러나 있잖아요. 그래서 문득 위쪽 계단을 올려다봤어요. 그랬더니..."
설마...
"계단과 계단 틈새로 찰딱 찰딱 내려오는 창백한 발만 보이더라고요."
그런...
"그런데 왼쪽 발만 묘하게 축 늘어진 느낌이... 마치 발목이라도 부러진 것처럼 보여서..."

- [탕관을 마치거든 고인을 관에 되돌려놓기 전에 다시는 걷지 못하도록 반드시 두 발목을 부러뜨려야 하우.]

- "... 그래서 굴러 떨어지다시피 마구 뛰어서 1층으로 달아났어요. 엘리베이터 앞에 아직도 그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 신경 쓸 여유도 없었죠. 아무튼 정신없이 마구 뛰어 내려갔어요."
"..."
"그러자 마침 술에 잔뜩 취한 중년 회사원 두 명이 맨션으로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두 사람을 따라갔는데... 보니까 아직도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거예요. 그 여자가..."
"어?"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절대로 집에 못 간다는 생각에... 두 회사원 뒤에 숨어서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탔어요. 한 명이 '아가씨, 이 시간까지 야근한 거야? 아니면 데이트?' 하고 말을 붙였는데 아마도 제가 아주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나 봐요. 그 사람 갑자기 술기운이 확 달아난 것처럼 당황해서 눈을 돌리더군요."

"..."
"다른 남자는 '안 타세요?' 하고 여자에게 물었어요. 저도 바로 엘리베이터 밖을 봤죠. 그러자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등을 돌리고 서 있더라고요. 이상하죠. 저희가 현관에서 왔을 때 그 여자 뒷모습을 봤는데, 엘리베이터에 타고나서도 뒷모습이 보이다니... 그때 제게 말을 건 남자가 '이봐, 누구한테 하는 소리야?' 하고 물었어요. 다른 남자가 '누구냐니, 저 사람' 하고 엘리베이터 밖을 가리킨 채 '어?'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어요."

 

- 하지만 다마가와는 자신이 겪은 기괴한 일을 카페에서 들려주고 난 뒤 회사에 돌아오지 않고 어딘가로 가버렸다.
도대체 어디로?
도대체 왜?

- 결국 그날 다마가와는 출근하지 않았다. 친한 선배와 동료가 "무슨 일 있나?" 하며 맨션과 휴대전화에 전화를 걸었지만 양쪽 다 자동응답 기능이 설정되어 있었고, 용건을 남겼지만 답신은 없었다. 이른바 무단결근을 한 셈인데 무슨 사정이 있으리라는 생각에 편집부 인원 몇 명만 알고 있기로 하고 총무부에는 알리지 않았다. 

 

- 그 사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다마가와가 사라진 상황 자체는 분명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원고 탓을 하기는 망설여졌다. 개인적인 일 혹은 비밀로 해야 할 업무상 볼일이 있어서 어딘가로 간 것 아닐까. 여전히 그런 마음이 앞섰다. 
왜냐하면 괴이한 현상을 체험한 다쓰미가 쓴 원고를 읽은 탓에 다마가와 자신도 무서운 일을 당했다고 해서 직접적으로는 아무 관계도 없는 그녀가 사라질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무슨 이유가 있다면 나도 벌써 행방불명되었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분명 나도 무서운 일을 겪었다. 하지만 그건 다쓰미의 원고에 너무 몰두한 탓에 일어난 착각, 아니 망상이었다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분명 다마가와도 나와 비슷한 심리적 상황에 빠진 것이다. 틀림없다.
다만...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으로 나 스스로 앞에다 쓴 "묘한 ...

- ... 찾는다는 명목으로 다시 한번 슬쩍 서재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침실을 들여다보자 그런 꿍꿍이 속은 깨끗하게 날아가 버렸다.
"욱..."
침실문을 연 순간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일단 숨을 참았다. 그 순간 썩어서 형태도 알아볼 수 없게 변해버린 다마가와 야스요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구역질 나는 그 냄새는 더 비릿한 뭔가에서 나는 것 같았다.
"뭐, 뭡니까. 이거..."
"우아, 해 해괴망측해라..."
문간에 선 내 뒤에서 실내를 들여다본 관리인과 고스기가 한 마디씩 내뱉고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이상한 냄새를 맡기 전에 실내의 광경이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리라.

- 침실 벽에는 수십 장이나 되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볼 필요도 없이 그것은 다쓰미가 쓴 원고의 복사본이었다. 한 장씩 꼼꼼하게 붙인 것이 아니라 방에 돌풍이 몰아쳐서 날아오른 종이가 마구잡이로 벽에 찰싹 달라붙은 듯한 이상한 광경이었다.
게다가 벽에 붙은 원고지 위에는 뭔가가 기어 다녔던 것처럼 기분 나쁜 자국이 흡사 보디페인팅처럼 남아 있었다.

- "검은 것이 쑥 나와서 기이치를 붙잡았다고..."

"..."
"그 검은 손을 본 건 한 명뿐이었지만 걔가 '앗' 하고 소리를 질러서 다른 친구들도 골목길을 보자 마침 기이치가 쓰레기통 뒤편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휙 사라졌다나 봐."
"으음, 그거 재미있군. 유괴나 실종이라는 느낌이 아니라 마치 가미카쿠시(神隠し, 어린아이 등이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사라지는 현상. 예로부터 요괴나 신의 소행으로 믿었다) 같잖아. 그런데..."
고스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왜 이런 일에 관심을 두고 파고드는 거냐?"

 

- 나는 고스케가 왜 이런 말을 하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 내 이야기가 그에게 얼마나 갑작스러웠을지 곧 이해가 됐다.
그래서 그제야 나는 다쓰미의 원고를 읽고 나서 내게 일어난 일, 다마가와가 괴이한 일을 체험하고 행방불명됐다는 것, 그리고 다쓰미의 태도가 급변한 것까지 모조리 털어놓았다. 
"이게 다 뭔 소리야!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고스케는 반쯤은 화가 나고 반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그렇지만 나 스스로 알아낸 사실에(다쓰미의 원고와 어떻게 결부돼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푹 빠져 있던 바람에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이런, 이런."
고스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지만 내가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이해한 모양이었다.

- "그래서?"
"그것도 고치고 그대로 원고를 메일로 보냈지. 교정지가 나왔을 때 또 묘한 실수가 나오면 안 될 텐데 말이야."
"... 실수라니, 네가 잘못 썼다고 생각하는 거야?"
"글쎄. 나는 내가 그런 실수를 했다고 생각 안 해. 하지만 이런 실수는 본인 모르게 생기는 것 아니겠어?"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만으로 괴이 현상을 체험했다고 떠들어댈 수는 없다, 그런 마음이 전해져 왔다.

- "그런데 지금까지 그 원고를 읽은 사람은 너랑 나, 신이치로와 다마가와 씨, 네 명뿐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마가와 씨라는 사람은 잘 모르지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믿는 편인가?"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즉 원고를 읽은 네 명은 회의파인 너와 신이치로, 긍정파인 나와 다마가와 씨로 분류할 수 있겠군."
"다마가와는 믿었기 때문에 사라졌다고...?"
"믿어라, 그러면 구원받을 것이다. 그런 말도 있잖아. 그게 반대로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지. 그 말에는 나름대로 제법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 "그 원고의 내용을 믿었기 때문에 영향을 받아 실제로 괴이한 현상을 당해 행방불명됐다. 아니, 이 경우는 가미카쿠시라고 해야 할까."
"실은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꽤 많을 거야."
"다른 하나는 원고 내용을 믿었기 때문에 영향을 받아 실제로는 일어나지도 않은 괴이 현상을 체험했다고 망상하고 본인의 의지로 달아났다."
"첫 번째와 같은 해석을 하지 않는다면 가장 그럴듯한 진상이기는 하지."
"그래서, 어느 쪽인데?"
"그걸 내가 정하냐?"
고스케는 핀잔을 주며 쓴웃음을 지었지만 아마도 첫 번째 해석으로 기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맹목적인 긍정파는 아니었다. 때와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히 회의적인 견해를 보일 때도 있다. 그 자리의 상황에 맞추어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솜씨를 갖추고 있었다. 

 

- "...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내가 어지간히 불안한 표정을 지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악명 높은 <네크로노미콘>(미국 호러작가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에 등장하는 가상의 책)이나 서터 케인(호러영화 <매드니스>에 등장하는 소설가)이 쓴 소설, 또는 <I, Madmam>(영화 <하드카바>에 등장하는 책 이름)이나 <미궁초자>(이상 언급된 책들은 모두 그것을 접한 사람에게 '악영향'을 준다고 알려졌다)를 읽은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걱정할 거 없어."
고스케가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 것도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 

- "과연 그렇다면 마모우돈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장송의례를 거행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내버려 둠으로써..."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 말은, 마모우돈이라는 마물의 전승 자체가 어디서 비롯됐느냐는 뜻이야."

- "전에 전화로, 다미 할멈이 알고 있는 다양한 의례는 일본 각지를 돌아다녔다고 추정되는 순례자 부모에게 배운 것 아니겠느냐고 했잖아. 과연 마모우돈도 그럴까?"
"아니라고?"
"잘 들어. 죽은 자가 되살아난다는 마모우돈 전승이 요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던 지방에서 이런 장송의례를 행하지 않으면 마모우돈이 된다고 겁을 줘봤자 누가 그 말을 믿고 장송의례를 받아들이겠어? 하물며 상대는 햐쿠미 가라는 오래된 가문이야. 절대 만만한 호구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마물로 추정되는 것은 처음부터 햐쿠미 가에 있었어. 마물이 존재했기 때문에 다미 할멈이 자신이 지니고 있던 다양한 주술 지식을 선보이게끔 된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이치에 맞는군."
"그리고 그 마물이란..."
"... 햐쿠미 가의 업인가?"
내가 불쑥 내뱉자 고스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장 중요한 그 업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어."

- "일단 어떻게든 다쓰미 씨를 한 번 더 만나는 수밖에 없겠군."

"역시 그런가."
"문제가 된 원고를 썼을 뿐 아니라 실제 체험자이기도 하니까 우선은 다쓰미 씨를 쥐어짜보는 게 좋겠지.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아직 뭔가 숨기고 있는 것도 같으니까." 
고스케는 가능하면 자신도 함께 가고 싶지만 다음 일정이 빡빡해서 무리라고 아쉬워했다. 나도 고스케가 함께 간다면 마음이 든든하겠지만 애당초 다쓰미의 원고는 내 일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친구에게 자꾸 폐를 끼치지는 말자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우리는 카페를 나섰다. 그때 고스케가 불쑥 내뱉은 말은 언제까지고 내 귀에 남았다.
"이런 찜찜한 원고에 엮이는 건 <백물어라는 이름의 이야기> 이후 처음이군."

- 고속철도인 신칸센을 타고 출장을 갈 때, 특히 도쿄에서 교토 방면으로 갈 때는 늘 책을 읽든가 잠을 자므로 바깥 풍경을 볼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번만은 책을 읽어도 집중이 안 되고, 그렇다고 눈을 감아도 전혀 졸리지 않아서 나타났다가 사라져 가는 시골 풍경에 오로지 눈길을 주는 수밖에 없었다. 

- 금요일 기획회의 자리에서는 그렇게 재미있는 원고라면 소설로 발표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실화 괴담하면 짧은 이야기가 당연하다는 독서 시장에서 이만큼 긴 이야기를 책 한 권으로 정리해서 내면 얼마나 큰 이점이 있는지 설명한 결과 기획은 간단히 통과됐다. 
그날 바로 다쓰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발신음만 울릴 뿐 여전히 아무도 받지 않았다. 토요일에도 마찬가지였다.

- 잠시 근처를 돌아다니며 다쓰미의 소식을 물어보고 그 결과에 따라 월요일에 움직일 계획이었다. 주말을 이용하는 데다 본가에 묵으므로 경비도 절감된다. 만약 오래 끌 것 같으면 연말까지 유급휴가를 신청하고 움직일 마음까지 먹었다. 연말이라고 해도 두 주 정도밖에 안 남았고 마지막 주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 전주가 몽땅 날아가는 것은 큰 타격이지만 교토로 출발하기 전 어느 정도 일을 정리해 놓았고 나머지는 가방에 넣어왔으니 어떻게든 될 것이다. 연말이면 늘 기쿠치 히데유키가 주최하는 대송년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은 유감이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다마가와 야스요는 여전히 행방불명이었다. 회사 총무부에서 본가로 연락해서 상경한 부모님이 경찰에 수색원을 냈다고 한다. 회사에서는 다마가와를 당분간 휴직한 것으로 취급하기로 했다.
나는 경찰이 내게 사정을 물으러 올까 봐 반쯤 마음을 다져둔 터였다. 노련한 경찰이 다마가와의 침실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찰이 찾아올 낌새는 여전히 없었고 상경한 다마가와의 부모님이 날 보러 오지도 않았다. 

- 그건 그렇고 경찰은 그 침실을 보고 어떻게 판단했을까. 혹시 다마가와의 부모님이 수색원만 내고 경찰은 부르지 않은 걸까. 따지고 보면 그곳에 피가 묻어 있던 것도, 싸운 흔적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무슨 범죄에 휘말려서 침실에서 끌려갔다기보다 오히려 혼자 이상해져서 날뛰다가 집을 나갔다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아무 사정도 모르는 다마가와의 부모님에게는 딸의 침실이 그런 식으로 보였던 게 아닐까. 

- "말을 걸었더니 난리가 난 거야. 왜냐하면 S는 일주일이나 행방불명된 상태였거든."
"..."
"S가 아르바이트하러 간다며 집을 나선 뒤에 소식이 뚝 끊겨서 집에서는 아르바이트 가게를 비롯해 친구부터 친척에 이르기까지 온갖 곳에 연락해 보고, 결국에는 경찰에 수색원까지 냈대."
"S의 기억은?"
"문제는 그거야. S가 기억하고 있는 건 A역에서 B역으로 향하는 전철을 탔다는 것, 자리에 앉아 잠들어버렸다는 것, 잠에서 깨고 보니 B역에서 A역으로 향하는 전철을 타고 있었다는 것, 그뿐이었어. 그가 잠든 후에 눈을 뜰 때까지 일주일이 경과한 셈인데 그사이의 기억이 전혀 없는 거지." 
"그 사람한테 아무런 변화도 없었어?"
"S도 스스로를 점검해 보았지만 복장은 외출했을 때와 똑같았고 몸에 찰과상이나 타박상을 입지도 않았어. 다만 가지고 있던 돈이 아주 조금 줄었다는 거야. 그 조금은 성인이 일주일이나 생활할 만한 금액은 결코 아니었어. 수중의 돈이 조금 줄어든 것 말고는 정말 아무런 변화도 없었대." 
"병원에는 안 가봤고?"
"응. S는 기억이 없는 일주일 동안 무슨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까, 그게 밝혀질까 봐 겁먹고 일부러 병원에는 가지 않았대. 그래서 물어보니 이 S라는 사람이 그 단편소설을 쓴 작가의 지인이라더군." 
"그 사람의 불가사의한 체험을 소설 속에 집어넣은 거구나."

- "실은 그 단편의 주된 아이디어 자체도 작가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어. 너랑 신이치로가 읽으면 아마도 괴기단편이나 환상소설로 받아들일 테지. 하지만 문예지에 응모한 까닭에 심사위원은 작중의 괴이 현상을 현대사회에 대한 비유라고 판단했어. 작가에게 진짜 사정을 듣고 난 후에 심사위원 평을 읽으니까 웃음이 나더라구. 그 심사위원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지만 말이야. 카페에서도 말했잖아.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은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그래서 생각이 났지. 이런 작품도 창작에 얽힌 사정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읽는 방법이 완전히 달라져. 가령 이 작품을 순수 문예지가 아니라 추리문학 잡지에 응모했다면 완전히 다른 평가를 받았을 거야." 

 

- 고스케가 이런 이야기를 한 것도 다쓰미의 원고와 맞설 때는 결코 한 방향으로 너무 기울어져서는 안 되며, 괴이 현상의 영역만 봐서는 안 된다고 분명 그 나름대로 충고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젯밤에 전화가 왔을 때 내가 영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는지 고스케는 '이거 영 안 되겠구나' 하고 느낀 듯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전에 겨우 요전번에 만나줘서 고맙다고 감사 인사를 하고 오늘의 출장 이야기를 꺼냈다. 고스케는 요전에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거듭 자기도 가고 싶지만 연말까지는 일이 꽉 차 있어서 귀성하기도 여의치 않다고 했다. 
"조심해서 다녀와. 해석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알지?"
염려하는 마음이 담긴 그의 충고가 지금도 내 귀에 남아 있다.  

- 어떤 의미에서 가장 효과적인 고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꾸벅꾸벅 졸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당황해서 시계를 보자 교토에 도착하려면 삼십육 분쯤 더 있어야 했다. 나고야를 출발한 지 아직 십 분도 지나지 않았다. 
깨어 있기 위해서는 뇌에 자극을 주는 것이 최고다. 뭔가 생각을 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잠들지도 모른다. 머리로 생각하고, 눈으로 보고, 손도 움직여야 한다고 조건을 나열하다가 좋은 방법을 찾았다. 다쓰미의 원고를 읽으면 된다. 그 원고를 읽으면 잠이 올 리 없다. 게다가 이모저모 생각할 거리도 있다. 
나는 머리 위 선반에서 가방을 내려 옆자리에 놓고 원고 다발을 꺼냈다. 그런데 그 순간 뭐라고도 형용할 수 없이 꺼림칙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게 그 원고인가... 
원고 그 자체가 몹시 낡아 보였다. 늘 가지고 다녔으니 다소 보풀이 생긴 정도라면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몇십 년이나 전에 쓰인 것처럼 보일 만큼 원고에는 주름이 졌고, 햇볕에 빛이 바랬고, 얼룩이 눈에 띄었다. 읽기 편하고 아름답다고까지 생각했던 묘하게 여성적인 글씨체도 지금은 글자를 구성하고 있는 선 하나하나가 마치 악의를 담아 원고지에 새기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눈을 뗀 틈에 그 선이 굼실굼실 움직여서 다른 글자로 바뀌어 원래와는 전혀 다른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지만 진실한 이야기를 써나갈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에도가와 란포의 단편 <벌레>가 생각났다.

벌레, 벌레, 벌레,

- 더 뒤쪽 승강구까지 걸어간 걸까. 애당초 그런 여자는 없었나.
개찰구까지 가서 "자다가 내릴 곳을 지나쳤는데요"라고 말하자 "교토에서 히로시마까지 이동하신 요금을 내셔야 합니다"라고 역무원이 말했다. 하지만 내 모습을 보더니 뭔가 생각하는 바라도 있었는지 "개찰구 밖으로 나오시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으로 선뜻 추가요금을 면제해 주었다. 어쩌면 교토에 중요한 볼일이 있었는데 잠드는 바람에 일을 망쳐서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으로 오해하여 측은히 여긴 것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내 표정이 형편없었다는 뜻일까. 
교토까지 가는 상행선 신칸센 표를 끊은 나는 출발시간이 아직 멀었지만 플랫폼으로 나와서 넋이 나간 듯 벤치에 주저앉았다.
이건 나를 교토에 오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의사 표시일까...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동시에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도대체 그건 누구의 의사란 말인가. 그 원고?

- 아무리 괴담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어느 일선을 넘는 이야기에는 거부 반응을 보일 때가 제법 많다. 그 일선이 뭔지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이번 같은 일이 그것에 해당하는지도 모르겠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깜빡 잠드는 바람에 내릴 역을 지나친 것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절대로 히로시마까지 갈 만큼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고 주장해도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본인의 인식 문제이므로 그렇게 느꼈을 뿐이라고 하면 반론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나라면 그렇게 판단할 것이다. 

- 하지만 자신이 직접 체험하면 이야기는 별개다. 아니, 자신의 체험운운하기 이전에 이번 일은 명백하게 이상하다.
하나의 문장, 글자 수로 따지면 마침표를 넣어도 서른세 글자를 미처 읽기도 전에 잠든 것이 사실이었다고 쳐도 눈을 뜨자 두 시간반이나 지났다니 아무리 뭐래도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십 초에도 미치지 못하는 시간과 두 시간 반이라는 시간 차이를 단순히 본인의 인식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까. 

- 어디까지나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나르콜렙시(Narcolepsy, 발작적으로 수면 상태에 빠지는 병 같은 수면 장애)가 일어났다는 해석은 가능하다. 잠에는 얕은 잠인 렘수면과 깊은 잠인 비렘수면이 있는데, 보통은 비렘수면에서 렘수면으로 진행되며 이러한 주기가 잠자는 동안 몇 차례 반복된다. 하지만 나르콜렙시 환자는 이러한 주기가 역전된다. 깊은 잠인 비렘수면을 거치지 않고 얕은 잠인 렘수면부터 진행되기 때문에 현실과 꿈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폐해가 생긴다. 다쓰미가 겪었던 일을 마치 꿈에서 추체험이라도 하는 듯한 내게 이것은 상당히 현실적인 해석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느닷없이 그런 수면 장애가 생길 리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초자연적인 해석을 받아들이기도 뭐 하다. 왜냐하면 앞서 서술한 일선의 문제가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 내게 일어난 일이 단순한 내 실수였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초자연적인 '무엇'이라고 볼 수도 없다. 나는 그런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 그런데 그녀는 이따금 어머니가 무섭다고 한다. 그녀가 어렸을 적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일이 있었지"라고 말해도 어머니는 "몰라" "그런 일 없었어" "그런 곳에 간 기억 없다"라고 대답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잊어버린 줄만 알았다. 하지만 둘 사이에 기억이 어긋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혹시 자신은 의붓자식이 아닐까, 자신의 기억은 진짜 어머니하고의 추억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그런 사실은 없다고 한다. 자신의 기억이 틀렸나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런 것치고는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아무래도 영문을 알 수 없다. 
그런 이야기를 고스케에게 했다고 하는데 듣기에 따라서는 그녀 자신도 상당히 특이하게 느껴진다. 그런 그녀가 쓴 소설에 S의 일화가 실려 있었다. 실화가 아니겠느냐고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내 체험을 그 일화에 맞추어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당초 맞추어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다. 읽어본 적도 없는 단편에 실려 있던 일화 따위에...

- 퍼뜩 고개를 들자 이미 플랫폼에 신칸센이 정차해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나머지 하마터면 기차를 놓칠 뻔했다. 허둥지둥 올라타자 토요일의 어중간한 시간대여서인지 자유석 표를 끊었지만 여유롭게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안도한 것도 한순간, 신칸센이 출발하자 다시 불안해졌다. 교토를 지나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인 것이다. 만에 하나 또 못 내리면 이건 거의 코미디다. 아니면 교토에 영원히 도착할 수 ... 

- 제일 가깝다고 생각되는 지하철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나온 뒤 일단 세로로 뻗은 가이마치 길을 찾아서 올라갔다. 바둑판 눈 같다고 표현되는 교토 거리에는 동서와 남북으로, 즉 가로와 세로로 수많은 길이 뻗어 있다. 그 세로 길을 북쪽으로 향하는 걸 '올라간다', 남쪽으로 향하는 걸 '내려간다'고 표현한다. 주소도 'ㅇㅇ마치 길 오름 XX'라는 식으로 되어 있다. 다쓰미의 집은 '가이마치 길 오름 도카야쿠시 골목 안쪽'이었다. 

 

- 가이마치 길은 비교적 쉽게 찾았지만 거기서 옆으로 들어가는 도카야쿠시 골목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가이마치 길을 올라가면서 옆길로 들어갈 때마다 죽 이어진 교토의 마치야(町家, 점포와 주거가 결합된 일본의 전통가옥)가 눈에 들어왔다. 양옆이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그 집의 앞쪽 현관인지 얼핏 보아서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놀랄 만큼 정면 폭이 좁아서 작아 보이지만 격자문을 통과하면 집이 안쪽으로 뻗어 있다. 그야말로 기차처럼 좁고 긴 구조가 교토 마치야의 특징이었다.

- 일찍이 나라 슈쿠인 초에 살던 할머니 집이 이것과 같은 구조였다. 할머니는 거기서 다도와 꽃꽂이와 바느질을 가르쳤다. 나는 매주 토요일 다도 수업일에 유치원에서 바로 할머니 집으로 가서 수강생들이 끓이는 차를 마셨다. 물론 당시는 차보다 다식이 더 탐났지만, 아무튼 할머니 집은 아주 마음 편한 공간이었다. 그에 비해 다쓰미가 다실에서 할머니와 함께했던 추억은...
어느덧 나는 포석이 깔린 어스름한 길 한복판에 서 있었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회상하는 사이에 그 골목으로 들어선 모양이다.

- 탁,탁,탁...
그때 뒤에서 포석을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다보니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급히 집으로 가고 있는 것이리라. 옆으로 비켜서 길을 터주자 남자아이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내 눈앞을 달려갔다. 
무심코 눈으로 그 뒷모습을 좇았다. 그때 전신주 근처에서 남자아이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넘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순간 아이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후로는 좌우로 비틀거리면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달려갔다.
...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단순히 균형을 잃은 것치고는 기울어지는 모양이 이상했다. 기울었다기보다 구부러졌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반신은 그대로인데 상반신만 전신주 쪽으로 구불텅하게 구부러진 것처럼, 마치 빨려 들어가서 기묘하게 어긋난 것처럼 보였다.

- 나는 전신주 뒤편에 숨은 무언가의 정체를 확인하려다가 절의 조그만 문 옆에도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보면 안 된다.
나는 곧 전신주에서도 절의 문에서도 눈길을 돌려 그 앞쪽 마치야를 보았다. 그러자 출창(出窓, 벽보다 튀어나오게 만든 창)처럼 튀어나온 격자 너머에서도 검은 것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골목길을 둘러보면 더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러볼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 정체 모를 검은 것들이 이쪽에 등을 돌린 사람 형체처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부 다 몸을 숨기듯이 절 문 옆, 전신주 뒤편, 격자 너머에서 흔들흔들 움직이고 있었다. 
그 검은 사람 형체 같은 것이 천천히 이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 나는 그것들을 똑바로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전부 시야 안에는 넣어두었다. 그것들이 나를 보려고 하는 것은 일단 틀림없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주문처럼 '돌아서면 안 돼, 돌아서지 마'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검은 것들의 움직임에 맞추어 나도 조금씩 몸의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골목길에서 몸을 돌려 왔던 길로 곧장 달아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조금 늦었다. 내가 발걸음을 완전히 돌리기 전에 검은 것들이 휙 돌아서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 나는 부리나케 뛰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하늘이 어둠에 감싸이며 눈앞이 별안간 캄캄해졌다. 나는 포석 위에 자빠지고 말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건대 분명 현기증을 일으킨 것이리라. 
땅에 호되게 찧어서 아픈 팔과 다리를 감싸며 일어서자 골목길에는 이미 밤의 장막이 내려져 있었다. 가늘고 긴 골목에 줄지은 집들이 마치 우물 바닥에 잠긴 것처럼 희미하게 보였다. 머뭇머뭇 절 문 옆과 전신주 뒤편, 격자 너머에 눈길을 주었지만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한시라도 빨리 이 골목을 벗어나기로 하고 들어온 쪽으로 향했을 때였다. 문패가 눈에 들어왔다. 
다쓰미.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도카야쿠시 골목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 '다쓰미'라는 문패가 달린 대문 양옆에는 2층에 무시코마도(촘촘한 살로 나누어진 살창)가 보이는 마치야가 인접해 있었다. 지금은 교토에서도 살이 가로로 들어간 무시코마도는 보기 드물지도 모른다. 
나는 양옆의 집 중 하나가 다쓰미의 집 안채라고 생각했다. 앞쪽 현관 폭이 좁은 것이 마치야의 특징이라고는 하나 눈앞의 대문은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옆을 살펴보았지만 둘 다 다른 이름이 적힌 문패가 달려 있었다. 아무래도 다쓰미의 집은 이 대문 안쪽 공간뿐인 듯했다. 
초인종이 보이지 않아서 조심스레 대문을 두드렸다. 한밤중은 아니므로 더 세게 두드려도 됐지만 골목에 깔린 분위기 때문에 주눅이 들었다. 잠시 대문을 계속 두드렸지만 아무 응답도 없었다. 
주저하면서 쪽문에 손을 대자 어른 키의 반 정도 되는 문이 소리도 없이 슥 열렸다. 그 뒤편에는 컴컴한 공간이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쪽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들어가면 꽉 찰 만큼 작은 부엌이 보였다. 복도는 도중에 오른쪽 절반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이어져 폭이 반으로 좁아졌다. 왼쪽 벽에는 헛방의 문으로 보이는 널빤지 문이 줄지어 있었고, 그대로 계속 나아가자 안쪽 방의 맹장지에 다다랐다.
"누추한 곳입니다만."
다쓰미의 재촉을 받고 안쪽 다다미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 그때까지 막연하게 느껴지던 인상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 "갑자기 이런 말씀드려 죄송합니다만, 이 집은 원래 다실로 지어진 것 아닙니까?"
다쓰미는 조금 감탄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잘 아시는군요. 원래는 이웃집 선대 가장이 은거할 곳을 겸해서 만든 다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나무로 된 벽에 포석 통로, 바닥에 뿌린 물, 홀연히 나타나는 뜰, 아담한 집의 구조, 이 모든 것에 풍류가 느껴졌던 것이다.

- "그 노인장도 한참 전에 돌아가셨고, 옆집도 옛날처럼 장사를 할 생각은 없다고 해서 이 집을 빌렸습니다. 저는 잘 곳만 있으면 되는지라 이 정도 넓이면 생활하기에 충분하죠." 
혹시나 싶어 물어보자 불이 켜져 있던 앞쪽 다다미 넉장 반짜리 방도 다실이라고 한다. 여기는 다다미 여섯 장 크기니까 분명 다회 참석자 수에 따라 구분해서 사용했으리라. 그야말로 풍류의 극치다. 이런 내 생각을 말하자 다쓰미는 더 놀랄 만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물론 사람 수에 따라서 구분한 것도 맞지만 이쪽은 서원풍 書院風 다실이고, 앞쪽은 초암풍 草庵風 다실입니다."
다시금 실내를 관찰하자 분명 검게 칠한 도코노마의 바닥 가로대만 보더라도 묵직한 차분함이 느껴지는 것이 과연 서원풍이었다.

- "저는 차를 전혀 즐기지 않아서 화로도 겨울철에 물을 끓일 때나 즐겨 쓰는지라..."
그 자조적인 말투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바로 그의 할머니가 차를 마실 때 어찌했는지 생각나서 이해가 갔다.
"하지만 이런 화로가 방에 있으면 역시 운치가 있습니다."
그래도 꺼림칙한 기억을 떨쳐내기라도 하려는 듯 다쓰미는 물병을 들고 화로에 얹은 주전자에 물을 더 채웠다.
"지금은 막아두었지만 전에는 계단 아래에 옆집으로 오갈 수 있는 문이 있었습니다. 뭐, 이상적인 은거지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그렇다. 식사나 다른 일상의 일을 안채에서 마치고 나면 계속 여기 틀어박혀 있을 수 있다. 작다고는 하나 부엌도 있으니 내키면 스스로 밥도 지어 먹을 수 있다. 안채로 오갈 수 있는 문을 통하지 않고 앞쪽 대문의 쪽문으로 들어와 포석 통로를 따라오면 별채에 온 듯한 기분에 젖을 수도 있다. 그야말로 어른의 은신처다. 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공간인가. 

- 우리는 잠시 이 멋진 일본 가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쿄에서 만났을 때 원고 이야기가 아니면 입을 거의 열지 않았던 다쓰미도 흥미로운 화제여서인지, 오래 살아 편안한 공간에 있어서인지 놀랄 만큼 말수가 많아졌다.
그런 환담이 삼십 분 정도 계속되었을까. 등 뒤에서 맹장지가 열리는 기척이 났다. 돌아보려는데 시원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오셨어요."
허둥지둥 몸을 돌리자 기모노를 입은 젊은 여자가 바닥에 꿇어앉아 예의 바르게 절을 하고 있었다.

- 고개를 든 여자의 얼굴은 교토 미인이라는 말이 퍼뜩 떠오를 만큼 차가우면서도 아름다운 한 송이 얼음꽃 같았다. 가늘면서도 또렷한 눈썹, 눈빛만으로 뭔가 말을 거는 듯한 기름한 눈, 결코 높지는 않지만 쭉 뻗은 콧대, 고상한 붉은빛으로 부각되어 보이는 작은 입술, 그리고 폭신하게 쌓인 눈처럼 하얀 살결...
지금까지 다실의 칭찬을 늘어놓으면서도 솔직히 마음 한구석으로는 초로의 남자가 살기에는 적적한 곳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여자를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단숨에 흩어져버렸다. 눈앞의 광경만 떼어내서 보면 기온 거리의 요정에라도 와 있는 것처럼 화사한 분위기가 느껴질 것이다. 

- "... 따, 딸입니다."
다쓰미가 어색하게 소개했다. 자기 딸이라고는 하나(딸이라서 더 그럴까) 허둥대는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바, 밤중에 죄송합니다. 아버님께 도움을 받고 있는 도쿄 출판사 직원입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딸은 다시 한번 절을 했다.
"별것 아닙니다만."
그녀가 맹장지 뒤편에서 위스키 병과 잔, 안주 그릇을 얹은 쟁반을 꺼내더니 스윽 미끄러지듯이 방으로 들어왔다. 지금까지 남자 둘이서 열기 있게 떠들던 분위기가 묘하게 긴장된 분위기로 변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쓰미까지 굳어버리다니 참으로 우스웠다.
"오유와리(소주나 위스키 등에 더운물을 타서 묽게 만들어 마시는 술)로 드실 것 같아서 얼음은 가져오지 않았어요."
다쓰미와 나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양해를 구하며 그녀는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 "아아."
그러면서 다쓰미는 눈부신 듯이 딸을 바라보았다.
뒤이어 딸이 화로 위의 주전자를 들고 물을 따르려 할 때였다.

"아앗!"
다쓰미가 소리를 질렀다.
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다쓰미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아, 그게, 방금 전에... 차, 찬물을 채웠거든."
"어머, 그러셨어요."
주전자에서 다쓰미에게 돌린 눈길에서 섬뜩할 만큼의 색기가 느껴졌다. 저런 눈으로 쳐다본다면...
"이, 이제, 아, 아버지가 할 테니까..."
"그러실래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녀는 내게 인사하고 방에서 나가더니 다시 맹장지 밖에서 정좌했다.
"아무 대접도 못 해 드려 죄송하지만, 부디 천천히 계시다 가세요."

- 분명 다쓰미의 새어머니와 닮았다고 나와 있었다. 방금 전 본 딸의 얼굴에는 흡사 가면과도 같은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다쓰미와 미와코의 자식이 아닐까. 
내가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 동안 다쓰미는 오로지 주전자의 물이 얼마나 뜨거워졌는지만 살피고 있었다. 이윽고 물이 끓었는지 위스키를 따라놓은 잔에 따르고는 막대로 휘젓고 나서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둘이서 조용히 건배를 했다. 잠깐 동안 원래 다실이었던 공간에 따끈한 오유와리를 마시는 소리만 흘렀다.

- 슬슬 원고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원래 다실이었던 집과 숨이 막힐 듯 아름다운 다쓰미의 딸 때문에 처음부터 이야기가 엇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느닷없이 원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보다는 낫다. 그런 의미에서는 용건을 꺼내기에 앞서 잡담으로 친근감을 끌어올렸는지도 모른다. 물론 다쓰미는 내가 뭘 하러 왔는지 안다. 언제까지고 원고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도리어 부자연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애당초 나는 멍청하게도 어떻게 이야기를 이끌어갈지 아무 준비도 해오지 않았다. 그런 나 자신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오로지 다쓰미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머릿속에 없었던 것이다. 완전히 편집자 실격이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으니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다쓰미가 말을 꺼냈다.
"사람은 죽을 때를 미리 알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글쎄요, 어떨까요."

정말로 느닷없는 질문이라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 "제 대학 친구 중에 어느 대기업 인사부에서 일하던 녀석이 있는데요."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다쓰미가 더듬더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 큰 회사에는 직원도 많죠. 그중에는 병이나 사고로 죽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업무상 제 친구는 병으로 결근한 직원의 집이나 병원으로 병문안을 자주 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주 다니다 보니 죽을 때가 된 사람은 척 보기만 해도 알겠더라고 하더군요."
"얼굴에 죽을 조짐이 드러나는 걸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오히려 반대로 그런 사람은 몹시 담담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영위하는 모든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어쩐지 숭고한 분위기마저 띠고 있죠. 그 친구 말로는 실제로 보이는 건 아니지만 그런 사람은 몸에서 뭔가가 슉슉 빠져나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군요." 
몸에서 빠져나오는 뭔가란 역시 혼 같은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어느덧 말을 꺼내고 있었다.
"이건 술집 호스티스한테 들은 이야기인데요..."
무언가에 등을 떠밀리듯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도 잘 모르는 묘한 상태로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 "아직 교토 본사에 있던 시절에 몇 번인가 가본 스낵바의 호스티스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여자 말로는 호스티스들 중에는 그런 부류의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제법 많다고 하더군요. 그 여자가 잘 아는 호스티스 한 명도 죽음에 임박한 사람을 알아본다는군요. 그렇다고 어느 날 죽는지 예언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무튼 죽음의 얼굴이 보인다고 하더군요."
"... 얼굴?"
"매일 손님을 접대하다 보면 가끔 손님 얼굴 앞에 전혀 다른 사람 얼굴이 희미하게 떠오를 때가 있답니다. 그러면 반드시 며칠쯤 지나서 그 손님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와요. 얼굴 앞의 얼굴을 보면 아아, 이 사람은 이제 곧 죽겠구나,라고 짐작하지만 상대방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없잖아요. 결국 입 다물고 있는 수밖에 없어서 정신적 스트레스가 엄청나답니다."
"그렇겠군요."
"하루는 그 호스티스가 밤에 가게 옆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양복 차림 남자가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멀리서도 남자 얼굴 앞에 있는 다른 얼굴이 똑똑히 보였어요. 그래서 꺼림칙한 마음에 다가오는 남자에게서 눈을 돌렸는데 스쳐 지나갈 때 힐끔 쳐다봤다고 합니다. 그러자 지독한 악의를 품고 히죽히죽 웃는 젊은 여자의 얼굴이 지금까지 봤던 그 어느 얼굴보다 뚜렷하게 남자의 얼굴 앞에 떠올라 있었죠. 그렇게 흉악한 얼굴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더랍니다. 그 후로 그 호스티스는 잠시 앓아누웠다고 들었습니다." 

 

- 나는 단숨에 말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입 밖으로 꺼내야 한다는 초조함에 떠밀리고 있었다.
다쓰미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물었다.
"그 얼굴은 뭘까요?"
"괴담으로서 이야기를 분석하자면, 그 얼굴에 씌어서 저주로 죽는다는 거 아닐까요?"
"그렇군요. 하지만 누군가를 저주한다고 해서 꼭 그 누군가의 얼굴 앞에 자기 얼굴을 비추는 건 아니겠죠. 누구나 다 그게 가능할 리도 없고요.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사람이 죽을 시기가 얼굴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 게 아닐까 싶은데요."
"역시 일종의 죽을 조짐일까요?"
"예. 그러니까 얼굴 그 자체에는 별 의미가 없지 않을까. 단순히 그렇게 생각할 뿐 아무 근거도 없습니다만,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덜 끔찍합니다." 
"저주를 받을 만해서 그렇게 죽는다면 자업자득이겠지만, 자기 탓도 아닌데 저주를 받으면 그것도 재난이겠지요."
반쯤 농담 삼아 말했지만 다쓰미는 뜻밖에도 진지했다.
"죽음이라는 현상은 한 가지입니다만, 죽음의 형태는 여러 가지 아니겠습니까. 반드시 자기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원인만으로 죽는 것은 아니라고..."
자기 체험을 말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빨리 원고로 화제를 바꾸어야겠다는 조바심이 났다.

- "미쓰다 씨, 본가가 나라에 있다고 하셨죠?"
"앗, 예."
대답을 하면서도 이번에는 그가 무슨 말을 꺼낼지 걱정됐다.
"제가 초등학생 때였으니까 상당히 오래전 이야기인데, 민영철도 K선 근방의 G에 유명한 유령의 집이 있었습니다."
"어... 그곳에 대한 소문은 제가 초등학생일 때도 있었는데요."

- "... 따르릉 따르릉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네 아이는 일제히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그 집에는 전해져 오지요."
내가 아는 이야기와 내용이 거의 같았다. 민영철도 K선 근방의 신홍주택지 G 하면 한 군데밖에 없다. 분명 같은 집 이야기일 것이다. 탐험해 보았다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곳을 아는 사람은 수두룩했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깔끔한 보통 집이라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두세 명한테 들은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간사이 지방 초등학생 사이에서 계속해서 전해져 내려오는 걸까. 
아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원고다. 원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 "저는 그 이야기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네 잔이라는 부분이 묘하게 실감 나게 느껴지더군요."
다쓰미의 감상에 맞장구를 치면서 우리가 있는 방이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묘한 기운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을 맛보았다.
"거창한 예일지도 모르지만, 미시마 유키오가 지적한 '숯바구니가 돌았다'는 구절과 비슷한 감각이랄까요."

- 야나기타 구니오에게 '도오노 이야기'를 들려준 사사키 기젠의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밤, 할머니와 어머니는 불을 살려놓기 위해 이로리(囲炉裏, 방바닥의 일부를 네모나게 잘라낸 후 재를 깔고 취사용, 난방용으로 불을 피워놓는 곳) 옆에 앉아 있었는데 뒷문에서 발소리가 들려서 쳐다보자 돌아가신 증조할머니가 방으로 들어와 두 사람 옆을 지나갔다. 그때 근처에 놓아둔 숯 바구니에 증조할머니의 기모노 자락이 닿아서 숯 바구니가 빙글빙글 돌았다. 숯 바구니가 돌았다는 구절은 이 이야기에 나온다.

- 이 "동그란 숯 바구니가 빙글빙글 돌더라"라는 구절에 다쓰미는 실감을 느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건 그렇고 다쓰미는 왜 이렇게 괴담을 계속 들려주는 걸까. 설마 의도적인 걸까. 내가 원고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도록 화제를 돌리는 걸까.

- 그 후로도 다쓰미의 괴담은 계속되었다. 나는 화제를 바꾸려고 애썼지만 실제로 입을 타고 나오는 말은 어째서인지 괴담이나 기담뿐이었다. 내가 아무리 괴이한 이야기를 좋아해도 이 상황은 이상했다. 아무튼 서로가 뭔가에 띈 것처럼 오로지 괴담만 늘어놓는 모습은 내가 당사자라고는 하나 섬뜩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황홀한 흥분도 느껴졌다. 원고에 관해 잊어버린 것은 아니라고 나 자신에게 변명하면서 나는 그와 나누는 괴담에 푹 빠져버렸다. 

- 몇 잔 째인지 모르겠지만 다쓰미가 오유와리 잔을 내밀며 말했다.

"이건 어리석은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일 무서웠던 이야기는 뭡니까?"

 

- 아마도 인간의 모든 감정 중에서 공포만큼 개인차가 심한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다쓰미도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선을 그은 다음에 물은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그 이야기밖에 없다.

 

- "딱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이것이다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무서워하지는 않겠지만 저는 지금도 엄청난 공포를 느끼는 실화가 하나 있습니다." 
아직 좀 뜨거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머릿속으로 잠깐 정리했다. 숫자가 몹시 많이 나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 "영국 웨일즈 지방에 위치한 메나이 해협에서 1664년 12월 5일에 배가 가라앉았습니다. 여든한 명이 탄 여객선이었는데 단 한 명만 살아남았죠." 
가만히 다쓰미를 바라보자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백 년 이상 지난 1785년, 역시 12월 5일에 같은 장소에서 이번에는 예순 명이 탄 여객선이 가라앉았는데 이때도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이었습니다." 
다시 다쓰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칠십오 년이 지난 1860년 12월 5일, 역시 같은 곳에서 스물다섯 명이 탄 여객선이 가라앉았는데 역시 단 한 명만 살아남았죠."
다쓰미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에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연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세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하지만 공통점이 딱 하나 있었죠."
"뭡니까?"
"동성동명입니다. 세 명 다 휴 윌리엄스라는 이름이었죠."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양팔에 소름이 끼쳤다.

- "이 이야기가 왜 제일 무서우냐 하면 우연이라는 설명 말고는 모든 해석을 부정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유령이 눈앞에 나타나면 무섭지만 일단 괴이 현상은 유령 때문에 일어났다고 해석할 수 있죠. 물론 유령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 등 여러 가지 문제는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괴이 현상을 설명할 수는 있고 액막이나 공양 등 대처 방법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이 현상이 유령이 아니라 영문 모를 괴물 같은 존재 때문에 일어났다면 공포는 더욱 커집니다. 유령은 사람이 죽어서 되는 것이라는 공통 인식이 있습니다만, 정체불명의 괴물에게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괴물도 정체가 밝혀지면 괴이 현상 그 자체의 공포는 옅어집니다. 예를 들어 흡혈귀나 늑대인간의 짓이라고 판명됐다고 칩시다. 그럼 그 존재 자체는 무섭지만 괴이 현상은 그러한 존재들이 일으킨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죠. 그렇게 되면 괴물에 맞서 싸우고 퇴치할 방법을 고안해 낼 수도 있는 겁니다. 즉 유령과 똑같습니다." 
다쓰미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유령도 괴물도 나오지 않습니다. 뭔가의 탓으로 돌리거나, 어떤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거죠. 장소, 날짜, 침몰한 배의 종류, 생존자 수와 그 이름, 이것들이 세 번이나 일치한 건 전부 우연이었다고 밖에 해석할 방법이 없어요. 아마 제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 한 잔 더... 이게 두 잔 째일까. 하지만 다쓰미 딸이 방에서 물러가기 전에 첫 잔을 비웠을 리 없다.
아니다. 애당초 다쓰미 딸은 한참 전에 방에서 물러가지 않았는가. 그 후 다쓰미가 오유와리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인사부 친구 이야기가 나왔고 봇물이 터진 듯 괴담을 이야기하다가...

 

- "바로 그 친구에게 '너 뭔가 이상해. 보통이 아니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혼란에 빠진 내게는 아랑곳없이 다쓰미는 계속 말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그에게 혹시 내가 언제 죽을지도 알겠느냐고 물어봤죠."
혼란스러워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지만 다쓰미의 이야기는 사정없이 귀를 파고들었다.
"두려웠지만 만약 안다면 개의치 말고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어떤 말도 없이 오로지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그런 나를 다쓰미도 가만히 쳐다보았다.
"고개를 저으며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 넌 이미 죽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라고 하더군요."

"..." 
"그는 딱하다는 듯이 울상을 지으며 '오래전에 죽었어. 그렇게 보여'라고 말했습니다."
 
- 그날 밤 내가 잠자리에 든 앞쪽 다다미방은 다쓰미가 말한 대로 초암풍 다실이었다. 포석 통로에서 보았던 빛은 이방의 대나무 살창으로 새어 나온 것이었다. 자세히 보자 대나무 살창 대각선 아래에는 다실 특유의 니지리구치(초암풍 다실에서 손님이 드나드는 작은 문)가 있었다. 안쪽 서원풍 다실과 달리 안뜰에 면한 그곳으로 들어올 수 있는 모양이다. 지리구치를 정면에 두고 왼편에는 사도구치(차 끓이는 사람이 드나드는 다실 출입구)가, 오른편에는 후미코미도코(아래쪽에 가로대를 대지 않고 다다미와 똑같은 높이로 만든 도코노마)와 시타지마도(흙벽 속의 뼈대를 보이게 해서 만든 창가) 보였다. 천장은 무늬목과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반자(지붕 밑을 막아서 평평하게 만든 천장)와 반자틀(반자를 고정해 주는 나무틀)로 이루어져 있었다.
순수하게 일을 목적으로 찾아온 작가의 집이었다면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다실에 묵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 나는 뜨뜻한 이불 속에 누워 있으면서도 몸속에는 서늘한 공포를 끌어안고 있었다.  

- 아니면 역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부부였나? 사실을 밝히기가 부끄러워서 다쓰미는 아내를 딸이라고 소개한 걸까?
하지만 그건 이상하다. 나는 여행 중 차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낯선 사람이 아니다. 다쓰미의 원고를 책으로 만들 편집자다. 한때의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그런 거짓말을 할까. 
그렇다면 진짜 부녀가 아닌 걸까. 양녀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부인이 데려온 아이일 수도 있다. 그런 사례는 실제로도 있는 모양이다. 양녀나 재혼한 부인이 데려온 여자아이가 점차 자라는 걸 보고 아버지가 이성으로 의식해 구체적인 행위에 나서는 사건 말이다. 가정 내부의 일이라는 비밀성과, 혈연은 아니지만 부녀라는 관계성 때문에 좀처럼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다. 가령 어머니가 알아차리더라도 바깥 소문이 두려워 은폐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 그건 그렇고 다쓰미의 부인은 미와코 아닌가? 아니, 누구든지 간에 부인은 살아 있을까? 다쓰미의 나이로 추정하건대 부인은 죽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다. 하지만 함께 살고 있다면 인사하러 얼굴 정도는 내비칠 것이다. 병이나 사고로 요절한 것일까? 그래서 다쓰미가 후처를 얻어 딸이 생겼다. 그런데 두 번째 부인도 세상을 떠나서 부인이 데려온 딸만 남았다. 부인을 두 번이나 먼저 보내 쓸쓸한 나머지 다쓰미가 못된 마음을 품고... 

 

- 이런 상상을 하는 것도 이 두려운 상황을 내 나름대로 견뎌내기 위한 것이다. 일과 다쓰미의 사생활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는 하나 앞으로도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이해시킬 설명이 필요했다. 

 

- 아니, 스스로를 속이는 짓은 그만두자. 그런 생각도 들기는 들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분명히 다른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것에 가장 가까운 말은 아마도 공포... 
잘 표현하지는 못하겠지만 두 사람에게 감도는 퇴폐적인 분위기는 그저 피가 섞이지 않은 부녀관계에서 비롯됐다기보다 더욱 꺼림칙한 뭔가를 포함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실은 친부녀라고 하는 편이 납득이 갈 만큼 두 사람의 관계에서는 심상치 않은 뭔가가 느껴졌다. 
오늘 밤의 이상한 일이 두 사람에게 심상치 않은 뭔가가 있음을 여실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닐까. 여기서 이상하다는 것은 수양딸인가 친딸인가는 일단 제쳐두고, 자기 자식과 성적인 관계를 맺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그것도 이상하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손님인 내가 앞쪽 방에서 자고 있는데 주저 없이 그 행위를 하는 두 사람의 심리다. 설령 그러한 관계라고 해도 오늘 밤은 참는 것이 보통 아닐까. 딱 하룻밤이다. 게다가 평소에 많은 손님이 번갈아 찾아온다면 모르지만 이 집에 손님이 온 것은 오랜만이 아닐까 한다. 내 상상이지만 분명 그럴 것이다. 하필이면 왜 손님이 온 날 안쪽 방에서 그런 짓을 할까,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하지만 그래도...
"이래도 아직 틀렸어?"
역시 신이치로는 내 본심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던 듯하다.

"..."
고개를 저어 부정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까지 신이치로에게 요구하는 것은 몹쓸 짓인 줄 알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백사당 말이야?" 
바로 그 단어를 신이치로가 입에 담았다.

- 신이치로는 서궤 옆에 있는 전통 양식을 살린 수납장 서랍에서 다쓰미의 원고 사본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이 원고 말인데..."
바로 그때였다. 나는 몹시 중요한 가능성에 늦게나마 생각이 미쳤다.
"자, 잠깐... 그러고 보니 너한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다마가와 야스요, 나, 소후에 고스케. 정도에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그 원고를 읽은 사람은 모두 괴이한 현상을 경험했다. 아스카 신이치로만 예외일 리는 없었다.
돌이켜보니 고스케 때도 그랬다. 두 사람은 육친처럼 친절하게 나를 걱정해 준다. 반면에 나는 나 자신을 챙기는 것이 고작이라 두 사람에게 나와 똑같은 위기가 닥쳤는지 바로 확인하는 것조차 잊어버린다. 정말로 한심했다. 친구로 지내는 보람이 없는 놈이다 싶어 나 자신이 싫어졌다.

- "뭔가 일어났다는 자각은... 없는데."
부끄러워하는 내 기분을 꿰뚫어 보았는지 신이치로는 참으로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고 그는 묘한 표현을 썼다.

"무슨 뜻이야?" 
"보내준 원고 사본은 여기서 읽었어."
여기란 이 방을 가리키는 모양이었다.
"묵혀두지 않고 바로 세 번 읽었지."
좀처럼 재독을 하지 않는 신이치로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단순한 소설이 아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를 위해서일까?
"얼마쯤 지나서 아스카가 방에 오더니 묘한 소리를 하더라고."
"아스카가?"
"응. '오빠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 이런 소리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가족들 몰래 여자를 별채에 불러들이는 건 좋지 않아'라고 했어."

- "내가 별채로 여자를 불러들였다고 오해할 줄이야. 충격받았어."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신이치로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동생을 아주 귀여워한다.
"그래도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물어봤지."

"..."
"그러자 소리가 들렸다는 거야."

- 나만 계속 질문해서 미안했지만 사정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실은 K의 연락처를 묻고 싶었지만 그러면 계속 꼬치꼬치 물어볼 것 같아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더 이상 L의 행방을 쫓아봤자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오늘 아침에 일어날 때 느꼈던 상쾌함은 이미 산산이 흩어지고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같은 말이 계속해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L도 사라졌다...

- L이 실종되어 받은 충격은 아무래도 내 예상보다 훨씬 컸던 모양이다. 워낙 모진 표현이라 본인에게 미안하지만 다마가와 야스요만 사라졌다면 나는 아직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그 원고를 읽었다고 추정되는 L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G의 정신이 이상해진 듯하다는 소식을 접한 순간, 재앙이 나를 향해 한꺼번에 닥쳐오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다마가와가 나를 부르고 있다...
L이 내게 손짓하고 있다...
두 사람 뒤에는 그것이 있다...

- 밖은 해가 눈부시게 빛나고 방안도 충분히 밝은데 내 주변만 어둡고 축축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흙을 완전히 덮지 않은 깊은 광중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머리 위에 구멍이 뻥 뚫려서 푸른 하늘이 보인다. 하지만 광중에서 빠져나가려고 해도 주위의 흙벽이 자꾸 무너져서 기어 올라갈 수가 없다. 꾸물대는 사이에 구멍 밖에서 뭔가가 쑥 나타나 재빨리 흙을 끼얹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광중이 흙으로 메워지기 시작한다. 죽을힘을 다해 달아나려고 하지만 몸은 조금도 올라가지 않는다. 몸이 차차 흙에 덮여서 서서히 움직임이 봉쇄되고 마침내 완전히 파묻힌다. 그때 현실의 나도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소후에 고스케가 아무리 찾아다녀도, 아스카 신이치로가 아무리 추리해도 내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다. 아무리 애를 써도 찾아낼 수 없다. 

- 정신을 차리자 몸을 떨고 있었다. 학질에라도 걸린 듯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만큼 무서웠다. 내 죽음을 상상하는 것도 무섭긴 하지만, 어딘가로 사라진다는 상황에 비하면 그나마 죽음이란 아무것도 아니지 않을까. 극락이나 지옥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라진다는 건 뭘까. 그건 뭘 의미할까. 어떤 현상일까.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그런 상태에 있다고 생각만 해도 덜컥 겁이 났다. 

- 인간은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아무것도 못 하거나 반대로 과감한 행동에 나서는 법이다. 이번에 나는 후자였다.

햐쿠미 가로 가자.
다쓰미가 체험한 괴이 현상의 원흉인 그 집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었다. 아니, '계획'과는 거리가 멀었다. 햐쿠미 가를 찾아가서 어떻게 할 것인가. 구체적인 방안은 전혀 없었다. 충동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테면 궁지에 빠진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것과 같을까. 

- 그 밖에도 달랐던 점은 그 분위기다.
아니, 다르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뭔가가 느껴졌다. 고인을 탕관하는 부정한 장소에서 느껴지는 불길함... 그런 진부한 불길함을 가볍게 뛰어넘는 무언가가 여기에는 배어 있었다. 이 당집 자체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마이자 사악한 의사를 지닌 존재처럼 여겨졌다. 
백사당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나는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을 듯이 감싸오는 한여름 밤의 어둠을 느꼈다. 어느덧 덥다거나 춥다는 감각은 희미해졌다. 그 대신에 뭐라고도 표현하기 힘든 초조감을 맛보았다. 중요한 의례를 거행해야 한다는 결의와 그 의례를 결코 거행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심이 반씩 내 안에 자리 잡아 몸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 하지만 이 두 가지 감정의 저 아래쪽에서는 완전히 다른 감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바로 지독한 두려움이다. 잘 생각해 보니 도대체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보다 더한 공포는 없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뭔가 당치도 않고 되돌릴 수도 없는 짓을 저지를 것 같아서 참을 수 없이 무서웠다. 그 무언가를 실행했을 때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것과 대치할 것만 같았고, 그렇게 되면 도저히 제정신으로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어떻게 될까... 

- 그래도 당집을 한 바퀴 돌고 나자 당연하다는 듯이 나는 모두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마지막으로 다미와 눈을 맞추고 나서 백사당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썩은 계단에서 끼익, 끼익, ...

- 짜증이 났다. 반쯤 떼어냈을 때 억지로 잡아 찢듯이 확 잡아당겼다. 스륵. 잡아당긴 순간 스륵스륵 웃었다.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가 나도 모르게 입에서 스륵스륵스륵 흘러나왔다. 백사당의 암흑 한복판에서 바닥 아래에서 꺼낸 항아리를 앞에 두고 어느덧 나는 스륵스륵 너털웃음을 스륵스륵하고 있었다.

- 드디어 마지막 한 장이 남았다. 단숨에 떼어낼 생각으로 손을 댔지만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첫 번째 봉인지를 떼어낼 때와 같은 실수를 범했다. 그걸 알면서도 손가락은 멋대로 움직였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봉인지처럼 차분히 다루기만 하면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도 내 손가락은 한시라도 빨리 떼어내고 싶어 폭주한다. 손가락의 난폭한 움직임에 맞추어 머리가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고개가 저절로 비스듬히 기울고, 양손 손가락이 미친 듯이 움직였다. 그런 짓을 계속하다 보니 봉인지가 반쯤 떨어져 있었다. 떨어진 반쪽을 꽉 움켜쥐고 단숨에 뜯어내려는데 등 뒤에서 어떤 기척이 있었다.
돌아다보니...
"앗..."
다쓰미가 있었다.

- 그의 얼굴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쓰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치 울며불며 난리 치는 아이에게서 장난감을 빼앗듯 천천히 내 손을 항아리에서 떼어놓았다.
그리고 내가 벗겨낸 봉인지를 한 장 한 장 가급적 원래대로 모두 붙이고는 항아리를 구멍에 넣고 바닥 판자를 냉큼 덮었다. 군더더기 없이 척척 움직여 탕관구 판자 뚜껑도 원래대로 끼웠다. 나는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 정신을 차리자 나는 내 몸을 끌어안듯이 부축한 다쓰미와 함께 당집 밖에 나와 있었다. 좁다란 현관바닥 같은 공간과 계단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돌아다보자 다쓰미가 격자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있었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다쓰미가 말했다. 그러고는 나를 재촉해 앞쪽 대나무 숲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대나무 숲에서 햐쿠미의 숲, 그리고 미타마의 덤불을 거쳐 거기서 조금 더 떨어진 와지에 세워둔 차에 올라탈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자, 마시세요."
차에 탄 다쓰미는 휴대용 포트의 커피를 종이컵에 따르고 주머니에서 꺼낸 위스키를 몇 방울 떨어뜨려 내게 건네주었다.
컵을 쥐고 커피 향을 맡은 순간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갈수록 점점 더 심하게 떨렸다. 결국에는 몸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지독한 오한이 났다. 아무래도 커피 향이 나를 현실로 끌고 온 모양이다. 
떨리는 양손으로 커피를 흘리지 않고 마시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조금씩 입에 머금자 오한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차 안에는 잠시 동안 내가 커피를 홀짝대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 "... 감사합니다."
커피를 다 마시고 약간이나마 마음이 차분해지자 나는 다쓰미에게 고개를 숙였다. 커피를 줘서 고맙다는 인사로도, 백사당에서 데리고 나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로도 들릴 만한, 나 자신도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아무튼 다쓰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 아니요. 저야말로 당치도 않은 일에 끌어들인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이때 나는 분명 넋이 나간 상태였음이 틀림없다. 머릿속에는 다쓰미에게 물어보고 싶은 많은 말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전혀 의미 없는 말을 뱉어내고 말았다.

- 그 후로는 침묵이 이어졌다. 다쓰미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잘 정리해서 말할 자신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미와코 씨하고는 결혼하셨습니까?"
나는 느닷없이 물어보았다. 차 안에 감도는 묘한 분위기가 그런 무례한 질문을 할 용기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
뜻밖에도 다쓰미는 아무 망설임 없이 긍정했다.
그 여자가 두 사람의 딸임을 재인식한 순간 나는 그 괴이한 밤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몹시 불쾌했다.
이 남자는 친딸과...
그런데 그때 다쓰미가 묘한 말을 꺼냈다.
"미와코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미와코는, 만나셨죠?"

- 아무래도 맞은편 절의 묘지에서 나타난 듯하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씀입니까?"
나는 다쓰미의 등에 대고 물었다.
"전부 착각 또는 망상이었음이 이제 곧 확실해질 겁니다.”
다쓰미는 그 대답을 끝으로 입을 딱 다물었다.

-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한기가 손발에서 뼛속까지 전해져 왔다. 나라 시내에 비해 춥다는 다우 군의 기후가 새삼 떠올랐다. 그리고 문득 배가 고팠다. 본가를 나선 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공복감이 추위를 부추기는 것처럼 느껴져 몹시 괴로웠다.
어둡고, 춥고 배고프고, 그리고 무섭다... 내가 이런 상황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12월도 중순이 지나 세상 사람들이 한 해의 결실을 맺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시기가 왔다. 한편, 크리스마스가 일주일도 남지 않은 데다 일찌감치 송년회를 여는 회사들도 있어서 벌써부터 들뜬 분위기가 감돌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 나는 뭘 하고 있는 걸까? 사회에 나온 지 십오 년 정도 지났고 그동안 다양한 경험을 쌓아왔지만 설마 무덤을 파헤치러 가게 될 줄이야!
그런데 내가 정말로 무덤을 파헤칠 수 있을까...

- 무덤을 파헤친다는 말에서 연상되는 말은 '보디 스내처스 Body Snatchers', 이른바 '시체 도둑'이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빈슨의 작품 중에도 <시체 도둑>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는데, 실제로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 영국에서는 시체 도둑이 횡행했다. 헨리 8세가 의학교 해부수업에는 사형수 시체를 한 해에 네 구만 제공한다는 칙령을 내린 것이 문제였다. 사실 한 해에 네 구로는 모자랐다. 그래서 교수형에 처해진 죄수의 시체를 직접 사들이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윽고 시체가 심각하게 부족해지자 애가 탄 의학교 교사들은 당시 정부에 청원했다. 그 결과 흉악살인 방지법이 제정된다. 이는 교수형에 처해진 후 시체를 그대로 교수대에 매달아 방치해 둘지, 아니며 해부용으로 제공할지 사전에 죄수가 직접 선택하게 하는 제도였다. 영국에서 처형된 죄수의 시체를 교수대에 방치하는 행위는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방식이다. 특히 정치범은 본보기 삼아 시체가 완전히 썩어서 땅에 떨어질 때까지 방치해 두었다. 죄수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그렇게 비참한 꼴을 당할 줄 알고 있으므로 누구나 해부용 시체로 제공되기를 희망할 것이다. 그것이 정부의 예상이었다.  
그런데 교수형에 처해질 경우 숨통이 바로 끊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죄수들도 알고 있었다. 실제로 강간범 로이드가 해부대 위에서 의식을 되찾은 사건이 일어났고, 순식간에 그 소문이 죄수들에게 퍼졌다. 결국 흉악살인 방지법은 아이러니하게도 해부용 시체를 의학교에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기보다 그 명칭이 가리키는 대로 흉악범죄를 줄이는 데 더 큰 힘을 발휘했다. 

- 그 무렵 해부학 분야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존과 윌리엄 헌터 형제가 파리에서 돌아와 런던에 의학교를 세웠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병원에서 사망한 무연고자 시체를 해부할 수 있었지만 영국에서는 그게 금지돼 있었다. 해부용 시체가 없으면 파리 방식의 해부학 강좌를 열 수 없고, 학생들도 모이지 않는다. 그러면 학교를 경영할 수 없다. 이는 헌터 형제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의학교가 안고 있던 문제였다.
그래서 헌터 형제는 묘지에서 직접 시체를 조달하기로 했다. 당시 법률상 시체는 소유주가 없는 물건으로 간주되었다. 소유주가 없으므로 누가 가져가도 죄가 되지 않았다. 다만 시체에 입힌 수의나 매장할 때 사용한 천을 한 장이라도 가져가면 절도죄로 처벌받았다니 재미있는 사실이다. 이리하여 시체를 도둑질하는 신사가 여기저기 출몰하게 되었다. 

-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 도둑에게서 시체를 구입한 의사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실은 오심이었지만 한번 내려진 판결은 뒤집을 수 없으므로 그 이후로 묘지에서 시체를 가져가는 행위는 위법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갱들이 눈독을 들였다. 위험하고 손해 볼 가능성이 높은 범죄에 손을 대는 것보다 시체로 장사하는 일이 쉽고 수입도 짭짤하다. 그래서 해부용 시체를 둘러싸고 갱들끼리 피 튀기는 싸움을 계속했는데, 그사이에 장물 매매의 대가였던 벤 크라우치오가 시체 판매권을 독점하고 만다. 경쟁 상대가 없자 크라우치오는 시체 가격을 끌어올렸다. 의사들은 불만스러워하면서도 그에게 시체를 사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체 도둑과 시체를 구입한 학생의 재판이 열렸다. 그런데 끝까지 딱 잡아뗀 도둑은 무죄로 풀려난 반면에 시체를 구입한 학생은 유죄 판결을 받아서 큰 문제가 되었다. 그제야 하원에 해부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었지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채 위원회는 해산된다. 결국 변함없이 크라우치오의 장사가 번성했을 뿐이었다.

- 그런데 이때 한 사건이 발생한다. 1827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슬럼가에 사는 윌리엄 버크와 윌리엄 헤어는 각각 헬렌 맥두걸과 마가렛 레어드라는 여자와 동거하고 있었다. 헤어는 하숙집을 운영했는데 어느 날 하숙인 한 명이 죽은 채로 발견됐다. 버크와 헤어는 그 시체를 써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에든버러 의과대학의 녹스 박사에게 가져갔다. 두 사람의 예상대로 해부용 시체가 부족해 고민하고 있던 박사는 그 시체를 비싼 값으로 샀다. 
돈독이 오른 버크와 헤어는 시체 도둑이 되어 박사에게 시체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선한 시체를 손에 넣기는 쉬운 일이 아닌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상품으로 팔아넘길 시체를 직접 제조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희생자를 하숙집으로 꾀어서 술을 잔뜩 먹였다. 희생자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면 질식사시켰다. 그런 식으로 신선한 시체를 녹스 박사에게 제공했다. 박사는 의문을 품었지만 두 사람 덕분에 시체가 넉넉해졌으므로 군말 없이 돈을 지불했다. 희생자는 모두 슬럼가에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행방이 묘연해져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버크와 헤어의 새로운 사업은 탄탄대로를 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라 결국 두 사람의 범죄는 발각되고 만다. 버크와 헤어가 체포된 후 헤어와 맥두걸은 버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다는 조건으로 검찰과 거래를 한다. 둘 다 기소된 후 결국 헤어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방면되었지만 버크는 교수대에 매달리고 말았다. 참고로 burke('질식시켜 죽이다. (사람을) 몰래 제거하다'라는 뜻)라는 영어 단어는 바로 이 사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 이윽고 런던에 이 질식 살인사건의 불똥이 튀었다. 1831년 존비숍, 제임스 메이, 존 헤드 세 사람은 희생자를 약으로 마비시킨 후 익사시키고 그 시체를 의학교에 팔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들에게 시체를 구입하려고 살펴보던 의사가 수상쩍게 여겨 경찰에 신고함으로써 이들의 범죄 행각은 발각되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영국 의회는 해부법을 시행했고, 마침내 시체 도둑이라는 사업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 오로지 다쓰미의 뒤를 따라가면서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무덤을 파헤치는 짓은 결코 거창한 행위가 아니다, 시체 도둑 같은 도굴꾼이 설치던 시절도 있었다는 식으로 받아들여 내가 하려는 짓을 조금이라도 정당화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어리석게도 죄악감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기 때문일까. 아무튼 결과적으로 그런 효과는 별로 얻지 못했다.

- 다쓰미가 느닷없이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앞쪽을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햐쿠미 가입니다."
눈을 돌리자 어렴풋하기는 하지만 숲의 나무들 사이로 거뭇거뭇하고 거대한 덩어리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 세골이란 매장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무덤에서 백골로 남은 시신을 파내어 말 그대로 씻는 의례다. 그렇게 씻은 뼈를 다시 매장하는데, 이때 이장을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두 번 장사를 지내는 셈이다. 세골을 마치지 않으면 죽은 사람을 완벽하게 장사지낸 것으로 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이어져오는 풍습이므로 긴키 지방에 그러한 풍습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햐쿠미 가에는 장송백의례라는 독자적인 풍습이 있지 않은가. 결코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 
다만 만약 세골을 했다면 그 단계에서 다쓰미의 새어머니가 저지른 범죄는 발각되었을 것이다. 매장하고 몇 년이 지나서 세골을 하느냐에 달렸는데, 보통은 이삼 년이나 육칠 년의 기간을 두니 뼈에 이상이 있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


-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아주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야말로 펄쩍 뛸 만큼 놀랐다. 지금까지의 작업이 모조리 헛수고로 끝날지도 모를 만큼 큰 문제였다.
무사히 관 속을 조사한다고 해도 과연 전문가도 아닌 우리가 뼈를 구별할 수 있을까...


- 땅에 묻힌 지 보통 칠 년에서 십 년이 지나면 시체는 백골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파내려는 관 속의 시체는 이미 백골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시랍이라도 되지 않은 한 살점이 어중간하게 붙은 시체와 맞닥뜨릴 위험은 없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조사할 것은 뼈밖에 없다는 소리다. 신이치로가 추리한 대로 관 속의 머리는 할머니, 머리 아래 몸체는 아버지의 것이라 치고 우리가 그 차이를 알아볼 수 있을까. 머리와 그 아래 몸체가 서로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무엇을 근거로 판단한다는 말인가. 
일단 전체적인 균형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깊은 병을 앓다 쇠약해진 끝에 사망한 할머니의 두개골과 건강한 몸으로 살해당한 중년 남자의 몸체 골격을 이어 붙이면 명백한 불균형이 생길 것이다. 작은 머리와 커다란 몸이 함께 있어서 이상해 보일 것이 틀림없다. 

 


- 각각의 부위를 봐야 하는데,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성차다. 남자와 여자의 두개골을 비교하면 안면, 이마, 머리통 모두 남자보다 여자가 작고 좁다. 백골 시체가 발견되어 성별을 확인할 때는 보통 이러한 성차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허나 무덤에서 파낸 두개골을 보고 우리가 그러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비교해 볼 수 있는 남녀의 두개골 견본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이 지식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래턱뼈를 잡은 상태로 두개골을 평면에 두면 남자의 두개골은 안정되지만 여자의 두개골은 불안정하다는 성차 정도는 써먹을 수 있을까. 이건 시험해 볼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 그 노인 아닐까?
이 세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면 상당히 일찍부터 우리와, 아니 다쓰미와 얽혀 있었던 셈이다. 정말로 다쓰미의 집 맞은편에 사는 사람이라면 예전부터 다쓰미의 동향을 감시하고 있었을 가능성마저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무엇보다 그 노인은 누구란 말인가...

- 나는 흥분한 목소리로 노인에 관한 추리를 다쓰미에게 들려주었다. 하지만 다쓰미는 눈을 감고 좌석에 몸을 맡긴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다는 보장은 없다. 들리기는 해도 머리가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당분간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소용없겠다 싶어 나는 말하기를 포기했다.

- "하필 이 시점에 다마가와 씨가 발견됐다는 게 정말 마음에 걸려. 과연 우연일까..."
아무래도 내가 도쿄로 돌아간다니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부디 몸조심하고 될 수 있는 한 고스케와 행동을 함께하라고 전화를 끊기 전에 신신당부했다. 
신칸센에서는 곯아떨어진 것 같았다. 내 생각에는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아 몸만 뒤척뒤척한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옆에 앉은 사람 좋아 보이는 노인이 두 번이나 나를 깨웠다. 다만 노인 말로는 내가 몹시 끙끙대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게다가 몹시 묘한 말까지 했다는 것이다.
"오지랖이 넓은 줄은 알지만 말일세, 너무 괴로워 보인 데다 깨우지 않고 내버려 두면 자네가 어디 이상한 곳으로 가버릴 것 같았거든."
그래서 두 번이나 깨웠다는 것이다. 물론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순순히 고맙다고 인사했다.
이제 그 원고를 읽든 말든 언제 어느 때라도 다른 세상으로 끌려갈 우려가 있다는 말일까? 전혀 자각이 없지만 사실 나는 이미 악몽에 나오는 격자 안쪽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 나타난 여자는 백사당에서 시신이 사라진 그의 새어머니가 아닐까,라는 그 해석이다.
그 해석은 나도 묘하게 가슴에 와닿았다. 한 핏줄이든 아니든 부녀가 그런 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그럴듯하다고 여긴 탓이리라. 물론 현실세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만큼 말도 안 되는 해석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죽어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괴물로 변한 것과 그런 행위를 하다니, 그건 말이 되느냐는 다른 문제도 있지만. 아니, 이 경우는 말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따지는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된 셈이지만... 

- "어린아이 행방불명 사건에 관해서 신이치로가 내린 해석도 통화하면서 들었어. 밀실 상태인 백사당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해석도 과연 신이치로다 싶었지. 양쪽 다 흥미로웠어."
"하지만 무덤을 파헤쳐보니..."
"백사당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추리는 부정된 셈이지. 그렇다면 어린아이 행방불명 사건 쪽도 불리해지는데."
"역시 그런가."
"신이치로의 추리가 빗나갈 줄이야. 그것 참 별일일세."
나는 고스케와 얼굴을 마주 보았다. 분명 내 얼굴에는 절망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스케는 달랐다.
"뭐 됐어. 신이치로도 추리 기계는 아니니까 그럴 때도 있겠지. 그것보다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있는데."
고스케는 가방에서 공책 한 권을 꺼내 어떤 페이지를 펼쳐놓았다.

"다쓰미가 정확하게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에도 그랬듯이 ... "

 


- かかわるな   み       とりか         つか

         たつ   と           だ   ふ            おなじま   った

 

    おなじひ              あ  ち  いけない

 

        くる  くる  くる  くろい           やってくる

まどうもの          くる

 


- "연필이군, 그것도 H 정도로 연한."
옆에서 들여다보던 고스케의 말처럼 아주 연한 연필로 쓴 글씨였다. 군데군데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은 약하게 눌러써서 그런 것 같았다. 본인은 제대로 쓴다고 썼지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마가와 씨한테 보여줘도 뭔지 모르던가요?"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지만 고스케는 꼼꼼하게 확인했다.

"아니요, 언니한테는 보여주지 않았어요."
"어, 왜요?"
뜻밖의 대답이라 나도 모르게 따지는 투로 내뱉고 말았다.
"... 뭐라고 표현을 잘 못하겠는데, 이 내용이 아주 좋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어요. 이 종이가 언니가 그렇게나 무서워하는 기억을 되살리는 계기가 될 것만 같아서...”

 

- 여동생의 기분은 이해가 갔지만 본인에게 보여주고 반응을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분명 고스케도 같은 생각이었으리라.
"부디 그 종이를 가져가 주세요."
고스케가 취재 노트에 종이의 글자를 베껴 쓰는 모습을 보고 여동생이 애원하듯이 말했다.
"여기 놓아두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그렇다고 버리기도 께름칙하고... 제발 부탁드릴게요."
"제가 가져갈 테니 안심하세요."
내가 문제의 종이를 안주머니에 넣자 여동생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 여동생을 현관에서 배웅한 후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다시 종이를 꺼내어 그 기묘한 글씨를 살펴보았다.
"일단 뜻을 알 것 같은 부분만 한자로 바꿔볼까? 그럼 뭔가 더 알아낼 수 있을지도."
고스케는 취재노트를 꺼내 다음과 같이 썼다.

 

- 역주 : 関わるな. 관여하지 말라는 뜻


- "첫 번째 줄의 '도리카쓰카( とりか つか)'는 '도리쓰카레타(取り憑かれた)'(뭔가에 씌었다는 뜻)를 잘 못 쓴 것 아닐까."

"말의 앞뒤가 바뀌어서 '도리쓰카레타'가 '도리카스카'가 됐다는 거야?"

"이걸 썼을 때 다마가와 씨의 정신상태가 어땠는지 모르니까."
"평소에는 글씨를 깔끔하게 썼어. 다마가와가 글씨를 이렇게 지저분하게 썼다는 건 몹시 조바심이 났든가..."
"아니면 무의식 중이었든가."

- "

두 번째 줄의 앞부분은 모르겠어. 그리고 '오나지(同)'(똑같다는 뜻)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군. 도대체 뭐가 똑같다는 거지?"
"네가 쓴 것처럼 '오나지히(じ日)'의 '히'가 날짜를 의미한다면 뭔가와 뭔가가 똑같은 날이다,라는 뜻 아닐까."
"그럴듯해."

- "세 번째 줄의 '아치이케나이'(あ ち いけない)의 공백에 들어가는 글자는?"
"글쎄. '앗챠이케나이(今っいけない)'(만나면 안 된다는 뜻)라든가."
"응. 그러면 의미는 통하네. 그런데 누구? 그리고 누가..."
"그것까지야 모르지. 하지만 문제의 '똑같은 날'에 '만나면 안 된다'라는 해석은 가능해."

- "다음은 곧이곧대로 읽으면 '쿠루(来)'(온다는 뜻)겠지."
"빙글빙글 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다음에 '얏테쿠루(やって)'(다가온다는 뜻)가 나오니까 역시 '온다'겠지."


- "무슨 의미인지 영 감이 안 온단 말이야."
문제점을 지적하자 고스케는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다마가와 씨가 일어나기 전에 네게 말하려고 했는데, 그 뒤로 그 지방에 대해 여러모로 조사해 봤거든."
그러고 보니 고스케가 그런 말을 했다.
"실은 실제로 가서 조사하고 싶었지만 그럴 틈은 없었어. 그래서 진보초의 단골 헌책방 아저씨를 찾아가서 이런 책을 얻었지."

- 고스케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A5판 크기의 동인지 같은 지저분한 책자였다. 하얀 표지에 <오다우 大蛇迂의 민속>이라는 제목과 헤미야마 나오쿠니 閇美山犹国라는 저자 이름이, 그리고 그 아래에는 문양이라고도 도형이라고도 할 수 없는 묘한 것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것은 표면이 뇌처럼 울퉁불퉁한 기이한 구체처럼 보였다. 어린아이가 삐뚤빼뚤 그린 그림처럼도 보였지만 천진난만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보고 있자니 물컹물컹한 구체의 감촉이 손가락에 전해지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 "그 아저씨 책방에 민속학 관련 책이 잘 갖춰져 있거든. 그전에도 여러 자료를 사곤 했는데, 그 지방에 관련된 책은 없냐고 물었더니 이 책자를 꺼내주더라구. 대강 훑어보기만 했는데 저자는 그 지방향 토사가인 모양이야."
"오다우는 지명이야?"
"다우 군의 원래 지명이겠지. 그것보다 재미있는 건 이거야."

고스케는 내가 들고 있는 책자의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 고스케가 어느 페이지의 한 문장을 가리켰다.
[세상을 떠난 고인의 시신에 마물이 들어가서 변화하는 마모우돈(マモウドン)은 '마도우모노(惑う者, 헤매는 자)'에서 변한 것이라고 나는 고찰하는 바이다.]

- "마도우모노라니, 이거..."
"응, 다마가와 씨가 말한 '마도우모노는 헤맨다'는 '마모우돈은 헤맨다'라는 뜻이 아닐까?"

 

- 고스케가 쓴 '일본 괴담 기행' 원고에서 할머니가 들려준 옛이야기에 나오는 무카에이누라는 괴물 이름이 전부 '마모우돈(マモウドン)'으로 바뀌어 있었다고 전에 들었다. '마모우돈(マーモウドン)'이었느냐고 거듭 물어봤지만 고스케는 장음부호가 없었다고 단언했다. 이 책에도 '마모우돈( マモウドン )'이라고 적혀 있다. 이 일치는 단순한 우연일까?

- 더 자세한 설명이 없는지 앞뒤 문장부터 앞뒤 페이지까지 훑어보았지만 그 밖에 마모우돈의 정체에 관한 설명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페이지를 할애해 도도야마 산에 대해 길게 설명해 놓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 나는 대답하면서도 어쩐지 내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듯한 묘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마치 몸은 여기 있는데 유체이탈이라도 한 것처럼 의식만 다른 곳에 가 있다. 아니, 가버리려고 하고 있는 위태위태한 느낌이었다.
"이건 이번 일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을지도 모르지만..."
겉보기엔 멀쩡한지 고스케는 내가 묘한 감각에 빠져든 줄도 모르고 아무래도 이에 뭔가가 낀 것처럼 찜찜하다는 투로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다쓰미의 원고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어."

"..."
"너랑 진보초 카페에서 이야기를 하던 중에 나, 상태가 조금 이상했잖아."
확실히 그때 고스케는 주의가 좀 산만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일단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현재는 내가 당시의 고스케와 비슷한 상황이라 더 이상은 생각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여자만 태어나는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네게 들려준 건 그때 그 카페에서가 처음이었어. 그렇지?"
내가 겨우 고개를 끄덕이자 고스케는 으스스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아무래도 전에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이야."
기지감인가?
그러고 보니 전에도 고스케가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실은, 그런 식으로 느낀 게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어."

 

- 민속사진가 Y가 촌락 조사를 하면서 겪은 일을 고스케가 전화로 들려주었을 때도 분명 그랬다는 것이 어렴풋하게 생각났다.

하지만 내 의식은 여전히 몽롱하여 내가 여기 없는 듯한 기분이 계속 들었다. 결국에는 다른 곳으로 완전히 옮겨가 버릴 것 같아서 몹시 두려웠다.
짝!
그때 눈앞에서 뭔가를 후려갈기는 소리가 났다.

- "뭐야?"
정신이 번쩍 들어 앞을 보니 고스케가 진지한 얼굴로 관찰하듯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소리는..."
얼빠진 목소리로 물어보자 고스케가 답해주었다.
"네코다마시(스모 시합에서 상대편의 눈앞에서 손뼉을 쳐서 기선을 제압하는 전법)야." 

그가 내 얼굴 바로 앞에서 재빨리 손뼉을 친 모양이었다.
"대답하는 모양이 영 수상해서 찬찬히 살펴보니 마치 뭔가에 씐 느낌이라 이거 안 되겠다 싶었지. 그래서 재빨리 네코다마시를 쓴 거야. 그래, 어땠어?"
"그게... 모르겠어. 아니, 설명을 잘 못하겠어."
"그래? 그럼 됐어."
선뜻 대답했지만 고스케는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다마가와처럼 될까 봐 걱정하는 걸까.

- "그 기지감에 대해 넌 어떻게 생각해?"
이제 괜찮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내가 묻자 고스케는 내가 자기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었다는 걸 알고 놀랐는지 입을 떡 벌렸다.

"음."
그리고 약간 망설이는 투로 말했다.
"너랑 이야기하다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기지감을 느꼈어. 그것도 괴담 비슷한 이야기를 할 때만 말이야. 그렇다면 내가 예전에 같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했는데 그걸 완전히 잊어버렸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을 너랑 혼동했을 가능성이 있지."
"있을 법한 일이야."
"그래. 허나 너하고 내가 한두 해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닌데 그런 착각을 할까?"

 

- 드디어 내가 정신을 차렸다고 안심했는지 고스케는 몸을 살짝 앞으로 내밀고 말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말이야. 내가 이 기지감 자체를 '나 자신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장면을 객관적으로 본 적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야."
"..."
"기지감이든 기시감이든 그런 느낌은 전부 주관적인 거잖아. '어, 이거랑 완벽히 똑같은 경험을 했는데'라고 생각하는 게 주관이 아니면 뭐겠어? 그런데 난 '객관적으로 본 적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든 거지. 이건 참 희한한 일이라고."

-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입 다물고 있었는데 말이야."
고스케는 다시금 주저했다. 역시 고스케답지 않았다.
"실은..."
다시 한번 망설인 후 이번에는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내 기지감의 정체는 어쩌면 <백물어라는 이름의 이야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어."

- 말 그대로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앞서 서술했듯이 <백물어라는 이름의 이야기>는 '일본 호러소설 대상'에 미쓰다 신조 명의로 응모된 호러소설이다. 고스케가 작품 심사를 돕기 위해 원고를 읽다가 수상하게 여기고 연락을 준 덕분에 이름만 지은이인 나도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사연이 있는 소설이었다. 
고스케가 내용까지는 가르쳐주지 않아서 어떤 이야기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작중의 '나' 즉 미쓰다 신조의 일인칭으로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예전에 내가 홈페이지 '백 가지 방'에 실제로 공개한 백 가지 괴담(그 대부분은 편집자라는 직업을 이용해 다양한 사람에게 들은 실화였다)을 거의 다 무단으로 사용해, 이른바 메타픽션 구성을 취했다고 한다. 물론 누가 썼는지는 모른다.

- "그 원고와 관계가 있다면..."
나는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내 생각을 말하려고 했다.
"아마 네가 예전에 '백 가지 방'에서 읽은 괴담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다가 같은 이야기를 도용해서 쓴 <백물어라는 이름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 처음으로 접했다고 착각해서... 아니, 아니지. 그게 아니야."
"그래. 그랬다면 이해가 가지만, 그게 아니야."
고스케는 뻔한 사실을 확인하는 투로 말했다.
"난 내가 직접 네게 들려준 이야기에 기지감을 느꼈어. 만약 그 이야기가 '백 가지 방'에 있었다면 너도 알았을 거 아냐."
하지만 고스케의 이야기는 전부 처음 듣는 이야기뿐이었다.

- "백 가지 방에서 도용한 괴담이 <백물어라는 이름의 이야기>에 많이 나온 건 사실이야. 하지만 전부 다는 아니지. 즉, 출전을 모르는 이야기도 있었어."
"설마..."
"어쩌면 내가 네게 들려준 이야기는 출전은 모르지만 <백물어라는 이름의 이야기>에 실린 괴담 아닐까? 그런데 난 그 사실을 잊어버렸어. 잊어버렸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고 믿었다면..."
"그래?"
"확인하고 싶어도 이제는 원고가 없어. 심사가 끝나고 수상작이 결정됐을 때 원고를 처분했거든. 일차 심사에서 떨어진 원고는 출판사에도 남아 있지 않을 거야. 즉 확인할 방법이 없지."
"그런데 어째서 그런 일이..."
"전혀 모르겠어. 과연 내 추측이 진상인지 아닌지도 포함해서 말이야. 내가 그렇게 추측한 것도 이번에 다쓰미의 원고에 관여하다 보니 예전에도 으스스한 원고가 있었다는 게 생각났기 때문이야."

- 이때 문득 불길한 상상이 고개를 들었다. <백물어라는 이름의 이야기>는 다쓰미의 원고에 연관된 탓에 괴이 현상에 시달리고 있는 현재의 우리 모습을 그린 작품이 아닐까...라는.

하지만 바로 무슨 헛소리냐고 스스로 부정했다. 몇 년이나 전에 정체불명의 인물이 쓴 원고에 현재 진행 중인 우리의 현실이 담겨 있을 리 없다. 그건 말도 안 된다... 

- 그런데 느닷없이 모건 로버트슨의 소설 <무용지물 Futility>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1898년에 사우샘프턴에서 첫 항해에 나선 호화 여객선이 빙산에 부딪쳐 몸체에 큰 구멍이 나는 바람에 수많은 승무원과 승객들이 함께 침몰한다는 이야기다. 
이 내용을 듣고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비극의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를 떠올리는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 빙산과 충돌했다는 사고 원인뿐만 아니라 배의 크기, 속도, 승객 수, 침몰한 장소까지 소설과 현실은 똑같았다. 그런데 타이타닉호가 가라앉은 것은 1912년, 즉 이 소설이 쓰인 지 십사 년이나 지나서였다. 덧붙여 소설에 나오는 배의 이름은 타이탄이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면 그뿐이지만 배 이름을 비롯해 유사점이 너무 많아서 무섭다. 둘 다 절대 가라앉지 않는 배라 하여 '불침선'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것까지 똑같다. 그리고 어쩐지 섬뜩한 소설은 <무용지물>뿐만이 아니었다. W. T 스테드가 1892년에 쓴 단편소설도 타이타닉호 사건과 내용이 흡사했다. 뿐만 아니라 스테드는 나중에 타이타닉호에 승객으로 승선했다. 즉, 작가 자신이 배와 운명을 함께해 북대서양에 가라앉은 것이다. 

- 다쓰미에게 내가 가장 무섭게 여긴다고 밝힌 우연이라는 공포가 이 이야기에도 있다. 마치 현실에서 일어날 일을 예언한 듯한 소설 ... 

-

"왜 그러십니까?"
노인의 두 눈이 죽은 물고기의 눈처럼 순식간에 생기를 잃었다...
뭔가 불분명한 소리가 들렸다.
우욱... 
귀를 기울이자 여자에게서 나는 소리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다음 순간, 요란한 웃음소리가 다다미방을 가득 채웠다.
미친 여자처럼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직접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이대로 머릿속이 붕괴하는 것은 아닐까 겁이 날 만큼 무시무시한 웃음소리였다. 양손으로 귀를 막고 웅크리고 앉아도 손가락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올 만큼 지독했다. 계속 듣고 있다가는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은 끔찍한 웃음소리였다. 그 웃음소리가 방 안에 가득했다. 
... 털썩.
인간의 목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여자 발치에 미라처럼 바싹 마른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여자는 내게 등을 돌린 채 여전히 웃고 있었다.

- 그 웃음소리가 딱 멈췄다.
잠시 후 여자가 천천히 내게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 여자가 완전히 돌아서면 끝이라는 것을 나는 바로 알아차렸다.
다시 한번 이것에게 안기면 멀쩡한 상태로는 이 집에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애당초 집에서 나갈 수는 있을까.

-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만큼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며 나는 다다미방 문간으로 돌진했다.
여자 옆을 빠져나갈 때 돌아서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나를 좇아 고개만 휘리릭 방향을 바꾼 듯한 말도 안 되는 광경이 시야 가장자리에 들어온 것 같았다. 고개만 뱀처럼 길게 뻗어 나와서 내 바로 뒤를 쫓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정신이 흐트러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이때 나는 잡생각을 다 떨쳐내고 이 집에서 달아나는 것에만 집중했다.
안쪽 다다미방에서 복도로 나오자마자 목덜미가 찌릿찌릿했다.

- 앞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내가 달려가는 암흑에 끝이 있음을 인식한 순간 정신을 차렸다.
쾅!
바로 널빤지로 된 문에 부딪쳤다. 그 충격으로 쓰러질 뻔했지만 간신히 버텼다. 의식이 몽롱해졌다. 의식을 되찾으려 애쓰며 손으로 더듬어 안간힘을 다해 손잡이를 찾았다. 손잡이가 손에 닿자 서둘러 당겨서 쪽문을 열고 밖으로 기어 나왔다.
갑자기 얼굴에 한기가 느껴졌고, 한순간이라고는 하나 해방감을 맛보았다. 하지만 여기가 밖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문 건너편 또한 다쓰미의 집 안뜰과 포석 통로와 마찬가지로 어둠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괜찮아?"
그때 머리 위에서 아주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공기가 몹시 고여 있군."
팔 윗부분에 느껴지는 손의 감촉이 재촉하는 대로 일어서자 어둠 속에 아스카 신이치로의 얼굴이 떠올랐다.

- "이 근방에서 멀어지는 편이 좋겠어."
신이치로는 재빨리 걸음을 옮기다가 내가 따라오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장님을 안내하듯이 팔을 붙잡아주었다.  

- 이 정도쯤 되면 피해망상에 가깝다.
상점가를 지나쳐 이리저리 구부러지는 외길을 잠시 따라가자 길 맞은편에 강이 나타났다. 두 갈래로 갈라져서 흐르는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모래톱이 있었다. 게다가 그곳에는 집이 한 채 서 있었다. 이건 다쓰미가 이야기한 스나가와네 집이 아닐까? 

- 차 안에서 바라보았을 뿐인데도 스나가와네 집이 폐가로 변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목조 2층 건물의 바깥에 댄 판자가 모조리 휘는 바람에 집이 저 자신을 비틀고 있는 것 같아서 몹시 으스스했다. 그야말로 기형적인 모양의 집이었다.
집 앞 마당은 썰렁하게 느껴질 만큼 황량했다. 마치 두 갈래 삼도천 사이에 낀 사이노카와라(賽の河原, 죽은 아이가 저승에서 부모의 공양을 위해서 돌을 쌓아 탑을 만든다는 삼도천 강변의 자갈밭) 같았다. 하기야 쌓을 돌은 하나도 없는 곳이지만...

- 그때 시야 한쪽 구석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잘못 봤나 싶어 눈길을 주자 마당의 나무 그루터기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노인이었다. 저런 곳에서 뭘 하는 걸까? 내가 여기 차를 댔을 때부터 저기 앉아 있었던 걸까?
나이가 제법 많아 보이는 그 노인은 이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 그대로 걸음을 옮기자 전형적인 옛 일본 가옥에 다다랐다. 낡기는 했지만 훌륭한 목조 2층 건물이다. 어째서 이런 집을 폐가라고 생각했을까.
노인에게 떠밀리듯이 문간을 통과할 때였다.
... 쿵.
가슴에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느껴졌고, 아픔과도 같은 감각이 느껴져서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자, 어서 집으로 들어가시오."
목덜미에 노인의 목소리가 와닿았다.
다시 발을 내딛으려고 하자 또 가슴에 뭔가가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 쿵.
암만해도 수상하여 가슴에 손을 대고 나서야 생각났다. 가슴 호주머니에 신이치로의 할머니가 주신 부적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자, 어서 집으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노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돌아서서 부리나케 달렸다.
모래톱의 모래가 발에 엉겨 붙어서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고 달렸다.
"... 갔지."
즉시 뒤에서 목소리가 따라왔다.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였지만 어째서인지 똑똑히 들렸다.

- [마도우모노 온다.]
다마가와 야스요가 전단지 뒤편에 적은 그 말은 역시 마모우돈을 가리킨 걸까?
"뭐, 명칭은 지방에 따라서도 변하니까. 무조건 마모우돈(マーモウドン)이 틀렸고 마모우돈(マモウドン)이 옳다고는 할 수 없지."

나는 헤미야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라 현 다우 군에서는 원래 마모우돈(マモウドン)이라고 불렀지만, 전국을 순례하는 부모에게 다른 지방의 표현, 즉 마모우돈(マーモウドン)이라고 배운 다미가 그 표현을 썼기 때문에 어느 틈엔가 말이 바뀐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 내 해석을 노인에게 들려주자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명칭은 어쨌거나 마모우돈과 똑같은 사고방식은 일찍이 일본 각지에 존재했지. 죽은 사람은 공경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부정한 것으로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어. 죽은 사람과 모야에서 함께 밤을 지새우는 것은 부정한 죽음을 일상과 격리한다는 의미이자 시신의 변화를 보고 죽음 그 자체를 확인하는 의미였지. 그리고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영력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 이어받는다니 유족이 말입니까?"
"고인과 같은 이불을 덮고 자는 것도 마찬가지일세. 죽은 사람은 그저 무섭기만 한 것이 아니야. 다만 그 정반대에 있는 것이 바로 마모우돈일지도 모르네." 
"죽은 사람에게 마가 침입하는 셈이니까요."
"하지만 장사를 지내는 방법이 토장에서 화장으로 바뀌고 나서는 그런 풍습도 쇠퇴했지. 죽은 사람의 시신이라는 구체적인 그릇이 없으면 마물도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 서양에 흡혈귀며 되살아난 시체 등의 전승이 많은 건 대부분이 토장이기 때문일세."

- "그 마모우돈이라는 인습이 햐쿠미 가에만 뿌리 깊게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인습이라."
노인은 하늘을 우러러보듯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 지방에는 요즘 사람이 보기에는 의미가 없는, 때로는 야만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풍습이 있었지. 그게 살아가는 방식이 변하면서 점차 사라져 갔어. 물론 사라지는 게 나은 풍습도 있었겠지. 하지만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전승되는 게 많다네." 
"그렇겠죠."
"옛날 사람이 마모우돈을 두려워한 건 죽은 사람을 매장할 때까지 시신을 계속 눈앞에 두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계속 시신과 대치하다가 무사히 매장해야 하지. 그런 상황에서는 싫든 좋든 죽은 사람에게 두려움과 거리낌을 느낄 걸세. 그런 감정이 마모우돈을 낳았다고 볼 수 있지. 그게 첫 번째." 
"또 있다고요?"
"그렇게 상식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한편으로 옛날 시골에는 사람들 가까이에 마물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 "어... 있었다고요? 실제로 존재했다는 말씀입니까?"
"하하."
헤미야마는 가볍게 웃고 나서 말을 이었다.
"자네는 그런 걸 믿지 않는 축인가? 나 같은 영감탱이의 이야기를 들으러 여기까지 찾아왔을 정도니 싫어하지는 않는 모양이네만."
"이야기만 재미있으면 됩니다.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습니다."
이어서 '다만...' 하고 덧붙이고 싶었던 말을 목구멍 속으로 꿀꺽 삼켰다. 지금 시점에서는 그런 것의 존재에 확신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굳이 입 밖에 낼 것까지는 없었다.

"정직한 사람이구먼."
노인의 눈빛이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난 있다고 생각한다네. 정체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은 있어. 지방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쇼와 3, 40년대의 일본에는 분명히 있었어."
"지금은 없습니까?"
"그것을 느끼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완전히 변했거든. 사람이 인정하지 않는 것은 존재해 봤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옛날에는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도처에서 그런 마물이 느껴졌지. 마물이라고 하면 끔찍하고 나쁘기만 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기 십상이지만 그렇지 않아. 마물에는 신도, 여우와 너구리 종류도 요괴 같은 것들도 전부 포함된다네."

 

- 헤미야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해했지만 그게 햐쿠미 가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통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 의문이 내 얼굴에 드러났는지 노인은 딱 잘라 말했다.
"즉 햐쿠미 가에는 옛날부터 마물을 두려워하는, 다시 말해 두려워해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말일세."
"혹시 햐쿠미 가의 당주가 대대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썼다는 소문과 관계가 있을까요?"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와 이어지지는 않을까 싶어서 나는 조금 흥분했다.
"호오, 자네도 조사했나 보구먼."
감탄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평가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대대라고 하지만 기껏해야 메이지 시대 말부터지. 당시 마을 사람들은 모두 도도야마 산의 지벌이라고 여긴 모양이야."
"왜 여기서 도도야마 산이 나옵니까?"
뜻밖의 이름이 언급되자 나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호오, 도도야마 산도 알고 있는가?"
헤미야마는 더더욱 감탄한 투로 말했다.
"무서운 걸로 치면 햐쿠미 가보다 도도야마 산이 훨씬 무섭지."

그는 다쓰미가 어릴 적에 다미와 친구들에게 들은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 "... 그런데 벌을 받아 마땅하게도 그 영산에 올라간 사람 중에 당시 햐쿠미 가의 당주가 있었지."
노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메이지 시대 말기, 당시 당주 햐쿠미 기헤에가 햐쿠미 가에 드나들던 벌채업자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그와 함께 ...

 

- "... 것이 마모우돈이라는 마물로, 아니 시신에 들어가는 마물 그 자체로 변한 게 아닐까 싶어."
의식이 한 덩어리로 뭉친 것... 
"아는가? 햐쿠미 가가 두려워하는 마모우돈이 모두 여자라는 사실을."
다쓰미의 할머니와 새어머니... 분명히 둘 다 여자다.

그건 그렇고 왜 당주의 시신 그 자체에 씌지 않는 걸까?
"햐쿠미 가의 여자, 그것도 대부분 당주의 부인에게 씌는 건 햐쿠미 가의 차기 당주에게 재앙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해. 햐쿠미 가에서는 당주의 부인이 배 아파가며 낳지 않은 남의 아이가 대를 잇는 경우도 많았던 모양이니까."

 

- 다쓰미 미노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몇 대에 걸쳐 자손에게 재앙을 내린다는 말인가. 여자를 밝히고 잔인하게 굴었던 햐쿠미 가 당주의 피를 그 자손들도 대대로 이어받았다는 이유로... 
그게 진실이라면 결코 끝이 없는 원한의 연쇄가 아닌가.

- "이겼다고요...?"

"나오호 씨는 분명 교토에서 다른 여자를 만났고, 일단 돌아오기는 했지만 또 다른 여자를 만들어서 행방불명 됐지."
다쓰미 아버지의 이야기다.
"그래도 그전까지의 햐쿠미 가 당주에 비하면 꽤 얌전한 편이었어."
확실히 햐쿠미 나오호는 햐쿠미라는 가문을 내세워 여자에게 몹쓸 짓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햐쿠미 가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나오호도 별수 없는 양갓집 도련님이었는지라 집을 나오기는 했지만 자립하지 못하고 결국은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아들을 희생양 삼아 평안한 여생을 보내려고 했다. 이전 당주들에 비하면 좀 나을지도 모르지만 역시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다.

"보통이라면 그 가문은 벌써 망했을 거야. 마나님이 별세하고 그 직후에 나오호 씨는 다시 집을 나가서 자취를 감추었지. 안주인인 도미 씨도 세상을 떠났어. 보통 가문이라면 벌써 몰락했을 걸세."

 

- 헤미야마의 그 말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벌써 망했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실제로는 망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기분 탓인지 노인의 목소리가 작아진 것 같았다. 갑자기 침착성을 잃은 모습에 나까지 불안해졌다.
"어째서일까요?"
머뭇머뭇 물어보자 노인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가문은 빙물(憑物, 특정 집에서 신으로 모시는, 또는 사역하는 동물령. 이 동물령은 집주인의 명령을 받아 타인에게 빙의하고 병이나 죽음을 가져온다고 일컬어진다)을 다루는 혈통이거든.”

- "입 밖에 내는 사람은 없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 아는 사실일세."

"빙물을 다루는 혈통이라면 견신 같은..."
"햐쿠미 가는 뱀신을 신앙하지. 엄밀히 말하면 뱀신 신앙 말기에 아류로 나타난 항아리신 신앙이지만."
"항아리신..."
그러고 보니 햐쿠미 가는 대대로 뱀신을 믿어왔을지도 모른다던 신이치로의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집안의 특별한 방에 제단을 만들고 항아리 열 개를 안치하지. 항아리 한 개당 뱀이 열 마리씩 들어 있는데, 그 항아리들을 백 일간 정성껏 모신다네. 그동안 항아리 속에서는 뱀들이 서로를 잡아먹지. 백일이 지나면 결국 항아리 한 개당 뱀 한 마리만 살아남아. 이렇게 살아남은 뱀 열 마리를 다시 모아서 다른 항아리에 집어넣고 또 백일 간 모시지. 그리하여 백 마리 중 살아남은 뱀 한 마리를 비틀어 죽인 다음 신으로 받드는 거야. 그게 햐쿠미 가의 항아리신 신앙일세."

"그, 그거... 고독 蠱毒 아닙니까?"
"호오, 잘 아는구먼. 뭐, 변종의 하나겠지."

- 고독이란 중국에서 전하여 내려오는 주술이다. 독을 지닌 벌레 또는 뱀이나 개구리 몇 마리를 항아리에 넣고 서로 잡아먹게 한 후 살아남은 마지막 한 마리의 생명력을 이용하는 주술로서 '무고 巫蠱'라고도 불린다.

- ... 스륵.

그때 갑자기 어떤 항아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의식이 몽롱한 가운데 내가 백사당 바닥 아래에서 꺼냈던 기분 나쁜 항아리. 문득 그것을 손으로 들어 올렸을 때의 감촉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두 팔에 소름이 쫙 끼쳤다.
설마 그 항아리가 그것이었던 것은...

- "다우 군이라는 지명에는 뱀 사 蛇자가 들어가 있지."
충격을 받은 나머지 멍하니 있는 내게는 아랑곳없이 헤미야마는 말을 이었다.
"다오 초의 它(사)도 뱀이라는 뜻이야. 햐쿠미 가의 분가인 다쓰미 가의 巳(사) 역시 뱀이라는 뜻이고. 예로부터 지명과 이름에는 나름대로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네." 
마모우돈이라는 괴물만으로도 위협적인데 거기에다 항아리신이라는 빙물까지 존재할 줄이야...

"이곳은 옛날부터 그러한 것들이 모여드는, 이른바 집중되는 곳이 아닐까 하네."
"예...?"
햐쿠미 가라는 오래된 가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인가.
"그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도도야마 산이지."

- 노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햐쿠미 기헤에가 도도야마 산을 침범한 것이 발단인 듯하다. 허나 어떻게 보면 그 산 자체가 수수께끼에 ...

- 일단 목욕을 하고 나서 산의 계단식 밭에서 수확한 채소와 마을 어물전에서 배달해 준 대구를 된장으로 양념하여 만든 냄비요리에 백탁주라는 이름의 토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저택 안쪽 다다미방으로 안내받았다. 그러는 동안 내 머릿속은 거의 멈춰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촌구석이라 아무것도 없다네. 오랜만에 온 손님이라 좀 더 붙들어놓고 싶네만 실은 나도 좀 피곤해서 말이야. 미안하지만 오늘 밤은 이만 실례하겠네."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고령인 노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이야기만 실컷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에 사과를 하려는데 노인은 오히려 나를 한 번 더 배려해 주었다.
"밤이 길어서 지루하거든 서재와 거실에 있는 책을 마음대로 읽게."

 

- 노인이 방에서 나가고 홀로 남은 나는 불 기운이 없는 방에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나 너무 추워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의식이 또렷해졌다.

나는 방에 있는 전기난로를 켜고 바로 다쓰미의 원고를 꺼내 문제의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밤이 길어서 지루할 틈은 없었다.

 

- 다쓰미는 원고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초등학교에는 분명 여섯 살에 입학하니 12월에 태어난 나는 다섯 살 적의 여름부터 그 집에서 살기 시작한 셈이다.
이런 회상을 하며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책상 위에 세워둔 작은 거울 속에서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기묘한 표정의 백발 남자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이 앞이야기의 회상이 끝난 후에 나오는 뒷이야기는 30대 초반인 듯한 다쓰미가 다시 햐쿠미 가를 찾아가는 내용이다. 그래서 나는 현재 다쓰미가 50대 초반이라고 오해했다. 그래서 두 번째로 다쓰미 가를 찾아간 것이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십오 년은 전이라고 착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실제로는 육 년 전이었다. 그렇다면 같은 시기에 왜 어린아이 연속 행방불명 사건이 일어났는지도 이해가 간다. 마모우돈으로 변한 다쓰미의 새어머니는 탕관이 끝난 후 바로 다쓰미를 쫓아 교토로 향한 것이다. 

 

- 교토 다쓰미의 집...
그제야 교토에서 헤어진 아스카 신이치로가 떠올랐다.
도대체 신이치로는 그 후에 어떻게 된 걸까...
허둥지둥 신이치로가 준 휴대전화를 꺼내 그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갑자기 수마가 덮쳐왔다. 저녁 반주로 마신 토주가 예상외로 독했던 모양이다. 피곤하여 술기운이 더 빨리 올랐는지 어느 틈엔가 나는 잠에 빠지고 말았다. 

- 꿈을 꿨다.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꿈이었다. 그 후에 격자가 나오는 악몽이 이어져서 가위에 눌렸다.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은 꿈속에서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빨리 깨어나려고 했다. 일어나려고 안달했다. 눈을 뜰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 아니, 그것보다 그 여자는...?

궁금하여 속으로 안달하는 내게는 아랑곳없이 신이치로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와서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라 그 해석은 일단 내 추리에도 포함되어 있었어."
"야, 신이치로..."
나는 목소리를 죽이고 이대로 통화를 계속해도 괜찮으냐고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거리낌 없는 것 아닐까.
"전부는 아닐지라도 이제 서로 상대에 대해 알고 있는 마당에 소곤소곤해 봤자 무슨 소용이겠어."
휴대전화에서 들려온 신이치로의 목소리는 어쩐지 밝게 느껴지기조차 했다. 뻔뻔스럽게 밀고 나가기로 한 걸까. 확실히 여차할 때는 고스케보다 배짱이 두둑한 녀석이기는 한데...
당사자인 신이치로가 태연한데 나만 마음을 졸여봤자 뾰족한 수도 없으니 나는 그냥 눈앞의 의문을 던지기로 했다.

"남의 외모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할 생각은 없지만 어떻게 봐도 다쓰미 씨는 쉰 살 아래로는 안 보여. 어째서 다쓰미 씨 나이가 더 젊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거야?"
헤미야마가 증언했고, 신이치로가 추리했으며, 무엇보다도 다쓰미 본인이 인정했으니 실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실제로 다쓰미와 몇 번이나 만나본 내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일단 원고 내용을 읽고 뭔가 좀 이상하다 싶었어. 꽤나 사소한 부분인데 예를 들어 다쓰미 씨와 스나가와가 뽑기를 하는 장면을 ... "

- "할머니가 매장되었고, 그로부터 삼십삼 년이 지나지 않았다면 다쓰미 씨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봐야 서른아홉보다 아래야."
"아아..."
"그렇다면 다쓰미 씨 아버지가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것도 아무 문제가 안 돼. 오히려 다쓰미 씨 나이가 겉보기보다 훨씬 적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가장 큰 증거지." 

- 실은 알기는커녕 머릿속이 엉망진창인 기분이었다.
"지금 실제로 눈앞에 다쓰미 씨가 있잖아. 네가 보기에 그 사람이 30대 후반으로 느껴져?"
내 물음에 신이치로는 이런 말로 답했다.
"본인을 앞에 두고 실례되지만, 이렇게는 생각할 수 없을까. 사실 다쓰미 씨는 겉보기보다 꽤 젊어. 그런데 진짜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건 오 년쯤 전부터 그의 새어머니에게 즉, 도미 씨에게 생기를 조금씩 빨렸기 때문이라고..."

 

- 오 년쯤 전이라면 다쓰미가 햐쿠미 가로 돌아간 육 년 전부터 일 년 후, 즉 마모우돈이 다오 초에서 나라 시로 들어온 시기다. 그 후에 바로 교토 시에 사는 다쓰미에게 갔다면 말은 된다.
"너도 마모우돈의 존재를 인정하는 거야?"
"여기까지 와서 인정하고 자시고 할 게 있겠어?"
그의 대답에 나는 다시 흠칫 놀랐다.
"야, 정말로 이런 이야기를 본인 앞에서 해도 괜찮아? 게다가 그 여자는..."
"응. 만났어. 지금은 여기 없지만 네 말대로 예쁘더라."
겨우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갑자기 몸이 떨렸다. 어느 틈엔가 전기난로가 꺼져 있었다.
"다쓰미 씨 원고, 많이 읽었지?"
내 걱정은 무시한 채 어째서인지 신이치로가 다른 말을 꺼냈다. 왠지 목소리도 변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응. 읽었지."
"햐쿠미 가와 백사당, 마모우돈 말고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없었어?"
"그거 말고 또 뭐?"
"원고에도 쓰여 있다시피 다쓰미 씨는 대인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이잖아."
나고 자란 환경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건지도 모르지만 그는 어른이 되고 나서도 분명 그 성격을 극복하지 못한 듯하다.
"친아버지인데 햐쿠미 나오호라는 이름은 딱 한 번밖에 안 나와. 도미 씨는 더하지. 새어머니라고는 하나 다섯 살 무렵을 회상한 부분에서는 이름이 한 번도 안 나와. 할머니도 마찬가지고."
"그랬지."
그가 두 번째로 햐쿠미 가를 방문했을 때 고모 입에서 '도미'라는 이름이 나오고서야 나도 그의 새어머니 이름을 알았다.
"고모와 숙부들 역시 그렇고. 두 명 있는 숙부는 큰숙부와 작은숙부라는 식으로 구분할 뿐이야."

- "무슨..."
바로 그때 방구석에서 무언가의 기척을 느끼고 나는 말을 삼켰다. 어제부터 여러 가지 일을 겪었다.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째서인지 나는 휴대전화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마치 어떤 감정이 싹트고 있다는 사실을 얼버무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무슨 관계가 있는데!"
한순간 조용해졌다가 다시 신이치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전학생이 너라는 관계가 있지."

- 방구석의 무언가가 암흑 속에서 꿈틀거리는 다른 어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어둠에서 달아나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나는 신이치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구누기다 무리의 부모들은 지방의원이나 학교 교장, 촌장, 또는 경찰서와 소방서의 고위직이었어. 경찰서의 고위직은 경찰서장이고 그게 네 아버지였다면, 네가 그 지방의 추억으로서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구누기다 같은 골목대장'이 '같은'이 아니라 실제로 구누기다 본인이었다면, 즉 다쓰미 씨와 우리는 동갑이자 같은 학년이고 너하고는 다오 초등학교에서 같은 반이었다면 어떨까."
몸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줄곧 마음에 걸렸던 시간적 배경에도 문제가 없어지지. 지금으로부터 육 년 전에 다쓰미 씨는 새어머니인 도미 씨 장례식에 참석했고, 그로부터 근 삼십 년 전에는 할머니 장례식을 경험했어. 그 체험을 그대로 쓴 거야."

- 신당의 격자...
"두 사람이 만난 순간 헤미야마 씨의 해석대로 죽은 사람을 산사람으로 바꾸는 장치인 영산의 영향을 받았다면..."
신당의 격자 안쪽...
“그 결과 미쓰다 신조와 다쓰미 미노부가 뒤바뀌었다면..."
신당 격자 안쪽에 내가...

- "지금까지 산에 올라갔다가 발견된 사람들의 상태를 근거로 판단하건대, 육체적 정신적으로 인간이 뒤바뀌는 현상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라는 한 가지 해석이 성립하지. 그래서 두 명 이상이 올라가면 뭔가 깔끔하게 수습이 되지 않았어. 또한 자아가 완전하게 형성된 어른은 둘이서 올라가도 결과가 매끄럽게 나오지 않을 때가 많았지. 아직 성장단계인 아이들이 둘이서만 영산에 올라갔을 때 비로소 순수하게 영향을 받아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온 거야. 물론 이러한 작용 그 자체가 영산의 원래 기능은 아니지. 영산의 정체는 어디까지나 죽은 사람을 산 사람으로 바꾸는 장치일 거야. 다만 그 장치에 산 사람이 들어가면 영향을 받아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 아닐까?" 

 

- 걸쭉한 어둠이 움찔움찔하며 굼실거리기 시작했다.

 

- "네가 자주 꾼다는 악몽에 나오는 격자는 도도야마 산 정상의 신당에 숨어서 다쓰미 씨를 기다리던 중에 보았던 것이 아닐까? 그나저나 점점 되살아나는 다오 초의 추억과 빈번하게 꾼 악몽은 과연 정말로 네 기억일까? 너 자신만의 기억일까? 넌 정말로 다쓰미 씨가 겪은 몇몇 일들을 추체험한 것일까? 그것이야말로 진짜 네 기억이 아니었을까?" 

- 어둠이 하나로 뭉쳐지려 하고 있었다.
"넌 알고 있었어? 다쓰미 미노부의 '다쓰미'를 '미쓰다'로 바꾸고 '미노부'를 '노부미' 즉 '信三'(일본어로 '신조' 또는 '노부미'라고 읽는다)로 바꾸면 '다쓰미 미노부'가 '미쓰다 신조'가 된다는 사실을."

 

- 시선을 모으자 어둠 속의 어둠이 구슬처럼 보였다.
"물론 단순한 우연이나 억지 해석으로 치부할 수도 있어. 호적상으로는 '다쓰미'가 아니라 '햐쿠미'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고 그는 왜 고집스럽게 다쓰미라는 성씨를 썼을까. 그리고 우연이라고 하면, 영국 메나이 해협에서 연도는 다르지만 똑같은 12월 5일에 침몰한 세척의 배에서 구조된 유일한 생존자가 세 명 다 휴 윌리엄스였다는 사실도 틀림없는 우연이지." 

 

- 어둠 속에서 어둠의 구슬이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다쓰미 씨의 새어머니 도미 씨도... 마모우돈도 이 놀라운 사실을 알아차린 게 아닐까?"

- 어둠의 구슬이 구르면서 점차 커지는 것처럼 보였다.
"너와 다쓰미 씨가 실은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 이윽고 어둠의 구슬 표면이 맥박이 뛰듯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래서 널 원했어."

- "즉 예전에는 햐쿠미 가와 동등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는 거지."

얼마 후 나는 어둠의 구슬이, 구불구불대는 뭔가가 무수히 많이 모여서 이루어진 덩어리임을 알았다. 문득 <오다우의 민속> 표지에 그려진 치졸한 그림이 떠올랐다.
"어쩌면 헤미야마 씨의 집안도 원래는 햐쿠미 가의 분가가 아니었을까. 헤미야마란 이른바 뱀산이니까 말이야."
툭, 툭, 툭... 구불거리며 꿈틀대는 것들이 차례차례 어둠의 구슬에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네가 무사한 건 지금까지 해석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야. 애당초 그것이 너와 다쓰미 씨의 관계를 알아차린 건 일련의 괴이 현상이 일어난 후였는지도 몰라."
구불거리며 꿈틀대는 것들이 방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 이전부터 그것은 꼭 네가 필요했어. D 출판 편집자이자 호러 재패니스크 총서의 기획자인 네가 반드시 필요했어. 왜냐하면..."

 

- 그때 갑자기 전화가 뚝 끊겼다. 그 순간 컴컴한 방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뱀 백 마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문득, 지금까지 어둠의 구슬을 이루고 있던 뱀 백 마리가 어쩌면 '미타마'라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뱀신님을 모시는 조그만 신당이 있는 곳이 그래서 미타마의 덤불이라고 불렸던 게 아닐까.

... 스륵.

목덜미에 소름이 쭉 끼쳤다.
고개를 돌리자 눈앞의 어둠 속에 격자가 보였다.

 

- 또 격자다...

그 격자 건너편 어둠 속에 그것이 서 있었다. 우두커니 서서 격자 너머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떨리는 오른손으로 가슴 호주머니를 뒤져 신이치로의 할머니에게 받은 부적을 꺼냈다. 부적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부스러졌다. 재처럼 변한 그 잔해가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며 떨어졌다.
부적이 사라진 오른손에서 고개를 들었다.
역시 눈앞에는 격자가 있었다... 

악몽에 나온 격자는 도도야마 산 신당의 격자가 아니라 이 격자였으리라.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겨우 알아차렸다.
어느 틈엔가 내가 햐쿠미 가 은거방의 안쪽 다다미방에, 그 감금방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 그렇다, 틀림없이 나는 격자 안쪽에 있었다.

- [남자의 길고 긴 이야기는 끝없이 계속됐다...]
나는 <백사당, 괴담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원고를 쓸 때 이 문장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 말 그대로 사족 蛇足이다. 내가 앞서 쓴 <사관장>과 이 작품 <백사당, 괴담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이 글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 작년 2월 중순에 다우 군 다오 초 햐쿠미 가에 이 책의 초고 교정지가 도착했다. 미쓰다 신조 씨가 실종된 지 어느덧 두 달이 다 되었다.
재작년 말, 나는 교토의 집에서 햐쿠미 가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고는 하나 역시 나는 햐쿠미 가 사람이다. 요번에 <사관장> 원고를 써보고 그 사실을 확실히 알았다.

 

- 미쓰다 씨가 행방불명됐다고 알려준 사람은 시나노메 료코라는 여자였다. 어디서 이쪽 연락처를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햐쿠미 가에 전화가 왔을 때 이야기해 보니 적어도 D출판 사원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튼 앞으로는 자신이 내 원고를 담당할 것이니 승낙을 바란다는 말이었다. 물어보니 그녀는 미쓰다 씨와 안면도 있다고 한다.  
미쓰다 씨가 없는 이상 내가 이러쿵저러쿵 따질 계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시나노메 씨와 D출판이 어떤 계약을 맺었는지는 모르지만 대리 편집자 같은 입장일 것이라고 이해했다. 

- 그 후에도 몇 번인가 시나노메 씨와 통화를 했는데 놀랍게도 1월 말쯤에 미쓰다 씨가 이 책 원고를 보내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게다가 그 원고에는 미쓰다 씨가 나와 아카사카의 호텔에서 만난 후 행방불명될 때까지 일어난 일이 적혀 있다고 했다. 뜻밖의 기괴한 전개에 몹시 놀랐지만, 어쨌거나 미쓰다 씨가 무사하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 그런데 내 원고 <사관장>과 미쓰다 씨의 원고 <백사당, 괴담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합쳐서 책 한 권으로 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는 진심으로 놀랐다. 그것이 미쓰다 씨의 의사인지 확인했지만 그는 여전히 행방불명 상태라고 했다. 배달된 원고에는 안라시 중앙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을 뿐 보낸 사람의 주소도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야 정말로 미쓰다 씨가 쓴 원고가 맞는지 모르지 않느냐고 하자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틀림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미쓰다 씨 부모님에게도 허락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약간 떠밀리는 듯한 형태로 나는 그 제안을 승낙하고 말았다. 그 초교 교정지가 그로부터 보름도 지나기 전에 나에게 배달된 것이다.

- 그런데 그 후 D출판이 판매를 위탁하고 있던 모 출판사가 계약을 위반해 D출판은 신간서적을 더 이상 취급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시나노메 씨가 연락해 왔다. 그녀가 무슨 연유로 D출판의 내부 사정을 잘 아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해 5월에는 D 출판 자체가 해산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쓰다 씨가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면 내 원고에 대해 거취를 표명하라고 따질 생각이 없었지만, 대리인 입장의 시나노메 씨가 있었기 때문에 솔직하게 사장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미 고단샤 출판사에 넘겼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고단샤는 내 원고와 미쓰다 씨의 원고를 각각 한 권의 책으로 낼 생각이라고 했다. 다만 미쓰다 씨가 지금까지 쓴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과 <작자 미상, 미스터리 작가가 읽는 책>의 후속작으로서 어디까지나 미쓰다 신조 명의로 간행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 물론 다쓰미 미노부라는 내 이름으로 내는 것보다 이미 몇 권의 책이 나온 미쓰다 씨 이름으로 내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애당초 미쓰다 씨가 내 변변찮은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면 내 보잘것없는 원고가 빛을 볼 일은 없었다. 그런 연유로 미쓰다 씨의 <백사당> 말미에 그 후의 경위를 적은 '후기' 형식의 짧은 글을 넣을 필요가 있다는 말에 내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사족을 달고 있는 것이다.

 

- 이 경사에 나는 매우 기뻐하는 한편으로 왠지 지나친 것은 아닌가 하는 기분도 맛보았다. 미쓰다 씨의 행방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 것일까.
나는 그런 솔직한 심경을 아내에게 털어놓았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그 원고를 접한 독자와 나는 직접 이어질 수 있어요. 여보, 그대로 책을 내요. 미쓰다 씨의 역할도 책을 내는 거였으니까요."
그 당집에서 아내는 타이르듯이 말했다.
아내가 말한 '나'는 분명 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내 기분을 대변해 준 셈이다. 나는 아내의 말을 받아들였다.
참고로, 나는 아내와 함께 일생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개장한 백사당에 살고 있다. 쾌적하고 살기 좋은데도 고모와 두 숙부를 비롯한 햐쿠미 가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이곳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 우스운 일이다.

- 나는 지금 백사당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제 더 이상은 딱히 쓸 말이 없다.
미안하게도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미쓰다 씨가 이전 두 작품을 각각 부모님과 두 할머니에게 바쳤으므로, 전례에 따라 이 책도 미쓰다 씨의 원고에 등장한 두 친구에게 바치고자 한다. 이 책이 출판될 수 있게끔 도움을 준 분들이기도 하므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들의 이름을 책 앞머리에 실었다. 
그런데 불확실한 소문이기는 하지만 소후에 고스케 씨는 입원 중이던 병원에서 행방을 감추었고, 아스카 신이치로 씨는 교토에  간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선 후 돌아오지 않는다는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들었다. 허나 어디까지나 소문이다. 사실 여부가 확인된 것은 아니다.

- 그리고 한 가지 더.

미쓰다 씨의 원고에 제목만 나온 <백물어라는 이름의 이야기>라는 원고에 기지감이 느껴진다. 후에 씨의 기지감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데...

 

- 아니,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두자. D 출판에서 초교 교정지를 보내준 지 벌써 일 년도 넘게 지났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 체험에 얽힌 책이 이렇게 두 권이나 출간되었다. 정말로 감개무량하다. 
시나노메 료코 씨와는 <사관장>과 이 책 편집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두 번 만났다. 두 번 다 검은 옷을 입고 왔는데 무척 차분한 여성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 그건 그렇고 마지막으로 묘한 일을 적겠다. 이 원고를 보내기 위해 봉투를 먼저 준비해 놓았는데 두 번이나 실수를 했다. 이런 이상한 일이 또 있을까.
내 이름을 적을 때 어째서인지 두 번이나 미쓰다 신조라고 적었던 것이다.

 

2003년 4월 길일

다쓰미 미노부

 




옮긴이의 말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반드시 <사관장>을 먼저 읽고 나서

<백사당, 괴담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기관, 호러 작가가 사는 집>(이하 <기관>), <작자 미상, 미스터리 작가가 읽는 책>(이하 <작자 미상>)에 이어 미쓰다 신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가' 시리즈의 집대성이자 종착점 <사관장>과 <백사당, 괴담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이하 <백사당>)가 발간되었습니다.

하지만 <사관장>에는 미쓰다 신조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미쓰다 신조는 <백사당>에 등장하여 다쓰미 미노부라는 인물이 들려준 체험담을 <사관장>이라는 책으로 펴내는 경위를 그려냅니다. 사실 일본에서는 <사관장>을 출간한 지 몇 달 후에야 <백사당>을 펴냈는데요. 즉 <기관>에서 미쓰다 신조가 연재하는 '모두 꺼리는 집'과 <작자 미상>에 수록된 동인지 '미궁초자'처럼 작품 속의 작품으로 취급되어야 할 만한 <사관장>이 실제로 먼저 출간되어 미쓰다 신조가 지향하는 메타픽션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허구와 현실이 애매모호한 두 작품에서 작가가 풀어내려고 한 소재는 바로 '실화 괴담'입니다.

다쓰미 미노부가 오래된 가문 '햐쿠미 가'에서 햐쿠미 가의 장송의례 및 백사당과 관련하여 겪은 일은 그야말로 괴담입니다. 그 이야기를 장편 실화 괴담으로 펴내려다가 미쓰다 신조가 겪는 일 또한 괴담의 부류에 들어갈 수 있겠지요.

이유와 정체가 불분명하지만 등장인물의 주변에서 자꾸 일어나는 괴이한 일들은 독자에게도 공포와 불안감을 선사합니다. 허나 독자는 등장인물에게 일어난 괴이한 일들을 읽으며 벌벌 떨면 그만이지만 등장인물, 특히 주인공인 미쓰다 신조는 그렇지 않지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무섭습니다.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모르면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쓰다 신조는 친구 아스카 신이치로와 소후에 고스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불가해한 상황을 논리적으로 파악하고자 애씁니다.

이러한 의미에서는 이 두 작품 역시 본격미스터리적인 성격이 가미된 '호러 미스터리'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제는 '수수께끼 풀려도 공포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풀려진 수수께끼에서 밝혀지는 뭔가가 등장인물과 독자를 더욱 깊은 공포의 늪으로 끌어들입니다.

무슨 말인지 궁금하신가요?

 

미쓰다 신조가 괴담이라는 재료를 어떻게 요리하여 극상의 공포를 만들어내는지는 <사관장>과 <백사당>을 직접 읽고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족입니다만, <사관장 蛇棺葬>과 <백사당 百>이라는 제목에는 '뱀'이 들어갑니다. 그 밖에도 뱀과 관련된 이름이 많이 나오는 편인데요. 미쓰다 신조의 소설에 독특한 양념처럼 가미되는 민속학적인 소재(뱀과 관련된)가 이 두 작품에도 등장합니다. 역시 소설을 읽고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은 

마지막으로 앞서 <사관장>과 <백사당>이 '작가' 시리즈의 종착점이라고 썼는데 사실은 외전에 해당하는 작품이 한 편 더 있습니다.
바로 <셸터, 종말의 살인>이라는 작품인데요. 핵 셸터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연쇄 살인이 일어나는, 본격미스터리적인 취향이 강한 작품입니다. 미쓰다 신조가 등장함에도 이 작품이 왜 외전인지는 <사관장>과 <백사당>을 끝까지 읽어보시면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드디어 '작가' 시리즈 번역이라는 대장정을 마쳤습니다. 번역을 하면서 어려워서 골머리를 썩인 적도 많았고, 겁이 나서 새벽산책을 나가지 못한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뿌듯한 마음으로 역자 후기를 마무리합니다.

<기관>, <작자 미상>, <사관장>, <백사당>.

이 네 작품이 오래도록 사랑받으면 좋겠습니다.

2014년 12월

김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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