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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8. 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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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서련
출판 : 민음사 
출간 : 22.01.21


       


자식을 자신의 자아 대체물로서 사랑하는 시대.

라고 말하면 반발이 크겠지만, 그런 부모들이 종종 보이긴 한다.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은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읽은 후의 느낌은 좀 달랐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결과이긴 하지만, 당신의 정체성은 여전히 당신인데.

모든 것을 아이에 맞춘 채 살아가던 당신에게, 잘하고 싶고 잘하는 게임이 생겼는데.

거기에서 마저도 엄마를 엄마라고 표현하면 안 된다니.

그렇다면 엄마이자 자기 자신인 스스로는, 대체 무엇인 걸까.

 

 <미키마우스 클럽>은 작가의 데뷔작이다. 하지만 뭐랄까, 첫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다른 시기에 쓴 작품들과 자연스러운 연결감이 느껴지는 데다 '힘 준' 것 같지 않다. 다 읽은 후에 우연히 이 작품이 데뷔작이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여전히 얼떨떨하다. 결말이 무척 인상 깊었다.  

 

<보>. 덤덤한 느낌이 좋았다. 정말 아무래도 좋다, 같은 적당한 무관심함이 보혜와 남편의 관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아서. 왜 어떤 것들은 사실을 말하는 데도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못할까.   

 

<곤륜을 지나>. 지금의 나에게는 깊게 와닿는 작품은 아니었다.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의 특수성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관계와 어떤 교집합을 가지는 걸까. 현재에서 과거를 보고, 현재에서 미래를 볼 수 있다면. 무언가가 달라질까?   

 

<기미>. <곤륜을 지나>와는 반대로 섬짓할 만큼 현실적으로 다가왔던 작품. 무언가를 짊어지기는 버겁고, 무언가에 기대기엔 나달나달해진. 그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는. '완벽'해야만 하는 걸까. 그럴 수가 있을까.     

 

<그 소설>. -미쓰다 신조와는 다른 의미로- 박서련 또한 메타픽션적인 작가라고 생각한다. 허구를 진실 같이, 진실을 허구 같이. 이에 능하다는 건 소설가로서 재능이 뛰어나다는 의미겠지. "이런 얘기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설이 소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A Queen Sized Hole>. 작품 전체보다 몇 장면에 꽂혔다. "그렇지만 이게 내 일인 걸. 이 일이 직업으로서의 조건을 별로 못 갖추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나는 이 일로 내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는 걸." 어쩌면 작가의 말보다, 승희의 이 대사가 진짜 작가의 말일지도 모르겠다.      

           

 


   

 

 

- 나 가방 필요 없어, 내일부터 학교 안 갈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사람이 학교를 다녀야지. 왜 그러는데, 응?

 

- 채 다 자라지 못했기에 아직 좁디좁은 아이의 어깨가 씨근대는 숨소리를 따라 오르내린다. 아이의 가슴이 부풀었다 꺼질 때마다 당신은 조금씩 졸아든다. 뜻대로 안 풀리는 일이 생기면 그만두겠다고 악을 쓰는 것은 아이의 못된 버릇이다. 겨우 초등학교 5학년인데 뭐가 그렇게 힘들까. 아니야, 이해심 많은 엄마는 이런 생각하는 게 아니지. 당신은 아이가 원망스러워지려 할 때마다 아이 대신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다. 아이의 현재에는 당신이 열두 살이던 시절의 세계에는 없던 것들이 아주 많고, 그것들은 대부분 당신이 그때 알던 것들보다 중요하다. 당신은 자신이 그 사실을 이해하는 엄마라는 점을 뿌듯하게 여기고 있다. 

- 애들이 나 왕따 시키려고 해.
또?

 

- 아이는 3학년 때 이미 따돌림을 당한 적이 있다. 뚱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키 크는 한약을 지어 먹인 것이 원인이었다. 가리는 음식이 많던 아이는 냄새가 나는 한약을 물론 좋아하지 않았지만, 매일 두 번씩 한 달 반동안 총 100포의 약을 끝까지 잘 먹으면 새로 스마트워치를 사 주겠다는 아빠의 공약에 군말 없이 따라 주었 ...

- 어떻게든 아이한테 보상해야 할 일이었다.
이번엔 뭐 때문이야? 엄마가 가서 한마디 해 줄까?

아이는 물기가 고인 눈을 떨군 채 침대 하부 프레임을 발뒤꿈치로 퉁퉁 걷어찬다.
애들이 나한테 게임 존나 못한대. 나랑 못 놀겠대.

- 순간 당신의 말문이 막힌다. 또 피시방에 갔었느냐고 꾸중부터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 '존나' 같은 말은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느냐고도 해야겠는데 그것도 일단은 미뤄 둬야 한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이들이 공부를 못해서도, 운동을 못해서도 아니고 게임을 못해서 사람을 따돌린다는 점이다. 

 

- 좀 못하면 어때, 못할 수도 있지. 게임이 그거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너 잘하는 거 많잖아. 네가 잘하는 거 하고 놀자고 해 봐. 애들 초대해서 다 같이 거실에서 놀래? 엄마가 맛있는 것도 해 줄게.
당신의 남편은 일본에 본사를 둔 게임 회사의 한국지사에서 일하고 있다. 다른 아이들이 갖고 싶어 손톱을 물어뜯을 만한 게임 콘솔과 소프트웨어들이 당신의 집에는 얼마든지 있다. 그것들을 구경하고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은 자기 부모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부모가 원망스러운 만큼이나 당신 아이를 부러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서러운 울음을 터뜨린다.

- 당신의 아이는 나이답게 순진한 면도 있지만 나이보다 어른스러운 면도 있다. 홈스쿨링을 시켜야 하나. 남편에게 해외 발령 신청을 하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남편이 기러기 아빠가 되더라도 아이와 함께 외국에 가는 게 좋을까. 아이가 한창 따돌림을 당할 즈음 하던 고민은 답을 내리지 못한 채 보류 중이었다. 그래도 지독한 따돌림을 당한 후 아이에게는 친구가 생겼고 새로 사귄 친구들은 아이를 좋아해 주었다. 그래, 사람 사귀는 건 지금 실컷 배워 놔야지. 외국 갈 땐 가더라도 모국어 쓰는 친구들은 많이 만들어 두는 게 좋고말고. 정서 지능도 지능이라잖아. 이것도 때가 있는 거야. 우리 애는 잘할 거야. 

- 아이는 부족함 없이 자랐다. 전공을 시킬 생각은 없지만 악기 두 개를 가르치고 미술 학원에 보내고, 공부는 학원보다 과외가 나을 것 같아 일단 영수과외를 붙여 두고. 덕분에 아이는 성적도 전교권에 들고 운동신경도 특별히 나쁘지 않다. 아이가 배우고 싶다고 해서 케이팝 댄스 학원에 두어 달 보냈을 때는 습득 속도가 워낙 빨라 청소년반에 들어가도 되겠다는 칭찬을 들었다. 노래는 아빠를 닮아 잘하고 얼굴은 엄마를 닮아 준수하다. 엄마 아빠 둘 다 그리 크지 않아서 걱정이었던 키도 이제는 반에서 두 번째로 크다. 한두 해 사이 너무 빨리 자라서 오히려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겁을 먹기도 했지만, 성장 클리닉에서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리만 해주면 걱정 없다고 했다. 

- 어느 오후 아이가
그런데 오늘 우리 반에서 어떤 애가 어떤 애한테 너네 엄마 돼지라고 해서 걔가 울었어.
라고 한 다음 날부터 당신은 피부과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엄마 외모까지 평가한다는 걸 안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까지 한국무용 전공을 지망하던 당신은 여전히 곧고 탄탄한 골격에 살이 별로 붙지 않은 몸매를 유지하고 있지만 머리숱이 남들보다 조금 적고 성인 아토피 증상이 있었다.

결혼했다고 긴장 푸는 여자들하고 달라서 당신이 좋아.
언젠가 남편이 했던 평가와 아이가 그날 전해 준 이야기가 완벽하게 포개진다고 생각하면서 당신은 헤어 숍원장이 추천한 오가닉 블랙빈 탈모 방지 제품을 라인별로 주문했다. 탈모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아이가 당신 때문에 놀림당하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 

- 솔직히 말해서 당신은 가끔 당신 아이가 되고 싶다.
아이의 반에 당신이 사는 아파트보다 좋은 집에 사는 아이는 없다. 당신의 남편보다 좋은 차를 타는 아버지는 없다. 당신 어머니는 당신이 자라면서 겪어야 했던 일들에 책임 있게 나서 준 적이 없었고, 아버지의 경우는 굳이 떠올리고 싶지도 않지만 쥐어짜려야 쥐어짜 낼 기억조차 없다. 따라서 당신이 아이를 위해 하는 모든 일은, 어쩌면 아이를 위하는 그 이상으로 당신 자신을 위하는 길이기도 했다. 열두 살짜리 아이를 키우는 지금 여기의 당신이 아니라, 타인에게서는 보상받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당신을 위한 것. 당신은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의식하며 아이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서, 동시에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믿는 것이다. 

- 그런데 게임이라니. 그런 건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해?
아이가 방금 털어놓은 이야기는 당신이 거의 처음 맞닥뜨린, 당신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숙제 같다. 그러나 당신은 아이가 따돌림을 당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고백했을 때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답이 없다고 느껴지는 일에 도전한 전적이 이미 있다. 그때는 100퍼센트 당신의 뜻대로 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무엇이든 예방이 중요한 법이다. 당신은 아이가 또다시 따돌림을 당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 과외지 뭐.
영어 과외 교사를 아이 방 안에 들여보내고 친구와 나누던 메신저 대화에서 당신은 답을 찾는다. 등잔 밑이 어둡달까, 마침 아이가 과외를 받는 시간이어서 더 ... 

- 저는 선생님께 게임을 가르치는 줄 알고 왔는데요.

제가요? 제가 왜...
여자는 생긴 것만큼이나 대화에도 협조적이지 않다. 당신은 티 테이블에 놓인 S대 학생증과 여자를 번갈아보면서도 영 신뢰를 품지 못한다.

 

- 게임이 애들 일이라고 생각하셨으면 어른 강사를 왜 구하세요.
그렇지만 제게 필요한 일이 아니고 저희 애한테 필요한 일인데요.
당신은 애써 웃음 지으며 말했지만 여자는 뜻을 굽히지 않는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충분히 알았어요. 그런데 저는 일단 선생님께서 게임을 이해하셔야 아이를 이해하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한테 게임을 가르치고 싶으시면 선생님께서 저에게 배우신 다음에 아이한테 가르쳐 주시는 게 낫다고 봐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아이 생각하면 그게 훨씬 나을 거예요. 아이가 부모님이 모르는 게임을 더 잘하게 돼 봤자 부모님 하고 거리감만 생기거든요. 
저는 게임 같은 건 소질도 없는데요.
당신은 게임을 가르치러 온 선생이 도리어 당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손사래를 친다. 그렇지만 게임 실력과 부모와 아이의 관계를 들먹 ... 


- 공부랑 비슷해요.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는다고 다 명문대 가는 거 아니잖아요. 어떻게 하면 잘하게 되는지를 최대한 빨리 습득하는 게 중요하죠. 선생님은 조금만 더 하시면 금방 이 동네에서 제일 잘하게 되실 거예요.

- 여자가 다녀간 날 당신은 아이에게 피자를 시켜 주었다. 막 여드름이 생기기도 했고 재작년의 소아비만 사태 때문에 한동안 피자는 금지였다. 먹고 싶다고 떼를 쓰면 글루텐프리 호밀 가루와 락토프리 치즈로 당신이 직접 구운 피자만 먹여 왔던, 아이는 손가락을 빨면서 피자 한 판을 혼자 다 해치웠다. 당신은 아이가 마지막 남은 피자 조각을 먹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 당신의 할 일을 했다. 서재 컴퓨터에 게임을 설치해 게임을 한 것이다.

- 당신은 자정 무렵 남편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서야 컴퓨터에서 시선을 뗐다.
당신 뭐해?
어, 뭐 공부할 게 있어서.
당신은 게임 화면을 최소화하고 상기된 얼굴로 남편을 돌아보았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부끄러웠다. 남편은 더 묻지 않고 안방으로 갔다. 딱 한 판만 더 하고 자자. 당신은 다짐했다. 한 판만 더 해서 이기고, 이긴 기분으로 자자. 그렇게 다짐했는데 그만 져버렸다. 모르긴 몰라도 당신 탓이 아니라 같은 팀 플레이어 하나가 상대편에게 자꾸 물린 탓인 것 같았다. 두 판을 더 하고서야 승리를 거뒀다. 팀 운이 좋아 쉽게 이긴 것은 좋았는데 평균 플레이 타임에 못 미치는 15분 만에 이겨 버려서 그런지 이기고도 영 개운치가 않았다. 그래서 한 판 더 했다. 이번 판 역시 이기긴 했는데 갈증이 났다. 

- 결국 눈이 뻑뻑해서 잘 감기지도 잘 떠지지도 않을 즈음 컴퓨터를 껐다. 베란다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게임을 끄고도 눈앞에서 당신의 챔피언이 오락가락해서 당신은 자주 눈을 비볐다.

- 벌써 경쟁전 참가 경험치를 다 쌓으셨네요. 하루에 몇 시간씩 플레이하셨어요?
며칠 뒤 찾아온 여자는 당신의 계정 정보를 열어 보고 감탄한다. 그렇게 마다해 놓고 이렇게 열심히 게임을 했다는 사실을 멋쩍게 여기던 당신은 여자의 말이 칭찬처럼 느껴져 배시시 웃는다.
애 학교가 있는 동안 한 서너 시간 하고 애 재우고 두 시간 정도씩 했나 봐요.
하루 여섯 시간씩 했는데 벌써 경험치가 이 정도면 많이 이기신 것 같네요. 음, 그러네, 승률도 꽤 잘 나왔네.

- 피트니스 센터에 다니는 김혜지라는 아이도 떠오른다. 플레이어들 중 한 명의 이름이 실제로 혜지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아는 사람이어서 이름을 부른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런 것치고 모욕적인 뉘앙스로 여적지기는 했다.

- 운전 못하는 사람한테 김여사라고 하잖아요. 혜지도 그런 말이에요. 게임 못하는 사람한테 너 여자냐?라고 묻는 대신에 그냥 여자라고 단정하고 흔한 여자 이름으로 부르는 거죠. 여자는 게임을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상대방이 남자여도 상관없어요. 여자처럼 못한다는 말이니까 모욕감이 배가 되죠.
당신은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게임을 못하는 건 맞지 않느냐고 생각한다. 실제로 지금 당신을 가르치는 여자도 K대생보다 낮은 리그에 속해 있으니까.
저, 챌린저 리그하고 다이아 리그는 차이가 얼마나 나요?
당신은 K대생과 여자를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스레 묻는다. 친구로 등록되지 않은 플레이어가 당신에게 대화를 걸지 못하도록 설정을 바꿔 주던 여자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한다.
별 차이 없어요. 그거 그냥 줄 서기예요. 다이아 리그가 상위 0.1 프로에 드는 플레이언데 그중에서 500등까지가 챌린저에 해당돼요.  

- 나 회장 선거 안 나가.
9월 말 회장 후보 등록 기간에 아이는 폭탄선언을 한다. 예의 못된 버릇대로 가방을 거실 바닥에 패대기치면서.
이번엔 또 뭐 때문이야?
어차피 나가도 뽑아 주지도 않을 텐데 뭐 하러 나가.

왜 네가 안 뽑힌다는 거야. 엄마라면 지승이 찍을 거야. 착하고 이쁘고 공부 잘하고 춤도 잘 추잖아.
경헌이가 나오는데 애들이 왜 날 뽑아. 내가 잘하는 건 경헌이도 다 잘해. 경헌이는 내가 못하는 것도 잘해.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엄마는 이해를 못 해?
왜 해 보지도 않고 안 나간다는 거야. 선거 나가는 것도 좋은 경험이야.

- 당신은 좋은 엄마라면 이럴 때 아이에게 그래, 안 나가도 괜찮아,라고 해야 하는지 포기하지 말라고 다그쳐야 하는지 헷갈린다. 원래 아이는 회장 선거에 관심이 있었다. 왕년의 왕따가 회장으로 선출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이도 알고 있기 때문에.

- 경헌이가 나오지 말라고 했어.
경헌이가 그랬어? 엄마가 경헌이네 엄마한테 전화해 줄까?
아이는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걔가 회장 걸고, 게임하자고 해서, 안 한다고 했어.
 
- 엄마, 엄마라고 그만해. 계속 욕 쓰면 아이디 정지 먹어.
엄마가 왜 욕이야? 내가 네 엄만데.

- 당신은 마음을 가다듬고 적진으로 들어가 상대의 마지막 수호석을 파괴한다. 아이가 간신히 내뱉은 말이 당신의 귓전을 윙윙 돈다.

XX, 울어? XX, 괜찮아?

모니터에는 승리를 알리는 메시지가 뜨지만 당신은 더 이상 승자의 기분을 느끼지 못한다.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 플래시는 나쁜 소리를 내며 터진다. 삶은 달걀을 단단한 것에 내리쳤을 때 나는 소리. 날짐승이 훼손된 날개를 치는 소리. 저항하지 않는 살덩어리를 예리한 것으로 찔렀을 때 나는 소리.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소리들 모두와 유사하지만 무엇과도 같지 않다. 나는 좀처럼 적당한 비유를 찾아내지 못한다. 너무 많은 빛과 소음 때문에 생각이 자주 멈춘다. 회견장 이곳저곳에서 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는 맑은 강물 위로 난반사된 햇빛을 연상시킨다. 연신 무언가 찌르는 소리를 내며 강물이 흐르는, 어딘가 잘못된 광경이다. 

- 빛이 번쩍 지나가면 이따금 눈꺼풀 속에 먼지가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나는, 바로 옆에 앉은 네가 한쪽 눈을 유난히 자주 깜빡이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안다. 내가 고쳐 주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던 너의 틱. 말하다 찡긋 웃다 찡긋, 노래하다 찡긋하는 너의 장애를 대중은 사랑했다.

- 과거형으로 쓰이는 문장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 나의 곁에는 너 말고도 세 명의 소녀가 더 앉아 있다. 역시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나는 그 애들이 짓고 있을 침통하고 비굴한 표정을 알 수 있다. 어린 나이에 맛본 어설픈 성공 탓에 웃자라 버렸으되, 갓 스물 남짓한 나이에 걸맞게 순진하고 멍청하기도 한 아이들. 그 애들은 잘못한 것도 없이 벌을 서는 기분일 것이다. 아이들이 그런 생각을 품었을 때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 아이들은 사전에 지시받은 차례대로 회견문을 낭독한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점점 내 쪽으로 번져 온다. 회견문은 특별히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소녀들의 감수성과 진정성을 고려하여 어렵지 않은 어휘를 골라 작성한 것이다. 너희는 그 글을 소리 내어 윤독하고서야 이 사태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 듯하다. 데뷔 3년 차 전도유망한 현역 걸그룹의 전격 활동 중단. 우습게도 너희는 오늘로 보다 큰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회사는 이미 멤버들의 개별 활동 계획까지 마련해 놓은 상태다.

- 한 멤버의 건강 문제라면서, 해당 멤버를 탈퇴시키지 않고 그룹 전체의 활동을 중단하기로 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질문에 대한 답은 나의 몫이다. 답변은 이미 준비되어 있지만 고심하는 체하며 시간을 끈다. 이렇게 하면 답변의 진정성을 덜 의심받게 되고, 추가 질문을 회피할 수도 있다. 근래에는 가요계의 정서나 풍토가 상당히 자유로워져 개인의 그룹 탈퇴가 매우 쉬운 일처럼 취급되지만, 우리는 팀워크를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어느 한 멤버가 없으면 우리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멤버들의 동의하에 무기한 활동 중단을 결정했다, 고 나는 말한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매뉴얼에 충실한 이 답변에서 회사의 진의를 추출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최고 인기 멤버인 너를 탈퇴시키는 게 팀으로서는 오히려 손해이기 때문이라는 입장. 질문한 기자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려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플래시 세례와 다른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그의 음성은 지워지고 만다.  

- 건강 상의 문제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해당 멤버는 누구인지,
향후 멤버들의 활동 방향은 어떻게 되는지,
질문들은 하나같이 뻔하고 무난하며 회견문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상황이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통제될 때의 만족감이 행여 얼굴에 드러날까, 나는 조금 ... 

- 여경은 나를 흘끗 보고는 피식 웃는다. 형사도 뭐가 재미있는지 실실 웃으며 나를 본다. 나는 이럴 때 굴욕감을 다스리는 좋은 방법을 안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이 방법은 늘 효과가 좋다. 겪어 왔던 일들에 비하면 정말로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다.

- 내가 마우스케티어 선발 오디션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여섯 번째 시즌을 앞두고 공개 모집 광고가 시작된 때였다. 미국 전역에서 대대적인 오디션이 시행될 예정이었다. 문제는 양부모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나는 양부모가 거세게 반대할 경우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의 차를 세차하고 응접실 카펫 청소를 하겠다는 조건을 내걸 작정이었다. 예상과 다르게 양부모는 순순히 나를 오디션 장소에 데려가 주었다. 내가 오디션에 나가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들은 조금 신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입댈 것 없는 아이가 된 대신에 기르는 재미도 별로 없는 아이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 나는 오디션에서 선보일 장기로 카펜터스의 노래와 줄리 앤드루스 스타일의 눈물 연기를 준비했다. 캐런 카펜터처럼 흰 원피스를 차려입고 어머니의 스카프를 매자 꽤 그럴싸한 모습이었다.  

- 엄마에게 비밀은 만들지 마라.
순식간에 너는 평정을 되찾고 한쪽 눈을 찡긋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네가 비밀을 털어놓은 것은 꼭 일주일 전의 일이다. 고백을 앞둔 너는 이상할 만큼 기분이 좋아져서 어쩐지 성스러운 분위기까지 자아냈다.
있죠, 엄마. 엄마는 어릴 때 뭐가 되고 싶었어?
나는 미키마우스 클럽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아닌 뭐든 되고 싶었어.

- 짧은 순간 너는 한쪽 눈을 빠르게 두 번 깜빡였다. 내 말을 단번에 알아듣지 못한 너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기색이 비쳤다. 나는 그 얼굴에 연민을 느낀다. 사실 나는 네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려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진실이라고 이제 와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너무 오랫동안 나와 너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너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어 놓고는 언제나처럼 보는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미소를 짓는다. 

- 그거 이상하네요. 나는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순간 네가 나의 마음을 읽었는가 싶어 얼굴이 붉어졌던 나는, 아까부터 자신의 배를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고 있는 너의 한쪽 손을 뒤늦게 알아챈다. 너는 더없이 순진하고 행복한 목소리로 말한다.
있어요, 이 배 속에. 아이가.

- 전설적인 마우스케티어였던 아네트 푸니셀로가 결혼할 때 만화가 찰스 슐츠는 본인의 작품 피너츠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아네트가 어른이 되다니. 너무 끔찍해.

영원할 것 같았던 미키마우스 클럽은 내 10대가 끝나기도 전에 해체되었다. 마지막 마우스케티어들은 거액의 투어 머니와 온갖 가십과 섹스 스캔들을 몰고 다니는 셀러브리티로 성장했다. 그들 중에는 결혼을 두 번 이상 한 사람도 있고 아이가 벌써 서넛씩 되는 사람도 있다.

 

- 말하자면 나는 너를 미키마우스 클럽이 없는 시대의 마지막 마우스케티어로 만들 작정이었다. 너는 최고의 마우스케티어가 될 자질을 타고 난 아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하기로 했다.
과거형으로 쓰이는 모든 문장에는 제각기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 네게 일어난 사건이 아이돌 스타들 사이에서 아주 드문 일은 아니다. 데뷔 시기가 지나치게 일러진 요즈음, 아직 서로의 아름다움에 면역되지 않은 어린 스타들이 뒷일을 상상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몸을 섞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그중에서도 임신은 아주 운이 나쁜 경우에나 생기는 일이지만, 아무튼 전혀 없는 일은 아닌 셈이다. 다른 모든 아이들과 너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네가 굳이 아이를 낳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기가 막히도록 너다운 발상이라 정말이지 할 말이 없었다. 

-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숨이 찰 때까지 맨손으로 너를 때린 나는 꼴사나운 땀투성이였고, 한참 동안 맞기만 한 너는 그마저 아름다워서 처연했다. 상대가 누구였냐는 말에 너는 끝끝내 입을 다물었다. 네가 얼마나 고집스러웠던지 나는 네가 정말로 동정으로 잉태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내 예감이 틀리지 않다면 아마 네가 보호하려 한 상대 남자 측에서 기자에게 정보를 흘린 것일 테다. 아니다. 이 시점에 억측은 의미가 없다. 잠시 후면 기자회견이 시작될 것이다. 마우스케티어로서의 네 커리어도, 한 사람만을 위한 미키마우스 클럽으로서의 내 삶도 조금 후면 끝난다.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 기자가 너의 아이와 너의 나이, 둘 중 하나에 관해서만 알고 있기를 바란다. 네가 미성년자의 몸으로 임신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 파괴력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 내가 고쳐 주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너의 틱. 대중이 사랑했던 너의 틱. 거짓말하지 않는 니나의 틱.

경외감이 들 만큼이나 순진한 너의 미소에서 나는 어느새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거물이 된 미키마우스를 발견한다. 모든 이들의 친구이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막강한 캐릭터. 의심할 나위 없이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불멸의 생물. 네가 피노키오라면 나는 너의 거대한 양심이다. 끝에 와서 마침표를 찍듯 감긴 너의 한쪽 눈이 온전히 너의 의지로 움직인 것임을 나만은 알아볼 수 있다. 나는 마치 오늘에야 처음으로 너라는 사람을 만난 것만 같다.

- 회견이 끝나고 수많은 플래시가 따라가며 너의 그림자를 지운다. 이제 나는 나의 미키마우스 클럽이 끝내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예감한다.

<미키마우스 클럽>



- 이제 그만해요.

 

- 보혜의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있었으므로, 남편의 입김이 치마 위에 뜨겁게 고였다. 보혜는 남편의 어깨를 가만히 밀었다. 동요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타이르듯 한 마디 보탤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내가 왜, 아이도 아닌 당신을, 하는 의문도 솟았으므로 보혜는 결국 아무 말 하지 않았다.

-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다시는, 응?
보혜는 전에도 남편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은 모습이라면 과장 없이 수만 번 보아 왔다. 말하자면 그것은 남편의 전문 분야이기도 했다.

- 하나님이 맺어 주신 부부는 헤어지는 게 아니야. 사망 권세로도 하나님 사랑 안에 이룬 부부는 끊을 수 없는 것이에요.
보혜는 그제야 남편이 가엾다고 느꼈다. 잘못을 빌 때조차 설교조로 말하는 사람. 다시 무릎에 감겨 오는 남편을 피해 몸을 뒤로 물리다가 보혜는 피아노 건반을 건드렸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본당 안에 둥 하고 낮은 음조 불협화음이 울렸다. 보혜는 헤어지자고 한 이유를 아직 말하지 않았다. 남편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들켰다고 생각하는구나. 또 무슨 일을 저질렀구나. 보혜는 피로를 느꼈다. 환멸이 아니라. 남편은 보혜에게 환멸처럼 거창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큼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보혜는 피로 속에 섞인 묘한 안도를 사금처럼 골라낼 수 있었다. 하지만.

- 하지만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 빌어도 소용이 없어요.
남편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번들거리는 얼굴의 붉은 기운이 어둠 속에서도 뚜렷했다. 보혜는 말을 골랐다.

- 아아 맞다 당신 거기 있었지.

보혜는 까맣게 잊고 있던 남편의 존재를 새삼 알아차렸다. 성가셨다.

이혼만 아니면 뭐든지 할게요.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바라는 게 없어요. 당신한테는...

 

- 보혜는 차근차근 자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통장을 따로 만들어 독립 후 당분간 쓸 생활비를 모았다. 남편이 이혼에 동의하지 않거나, 순순히 따르는 척하면서 아버지를 끌어들인다면 곧장 해외로 나가 입주 베이비시터로 취직할 계획이었다. 다행히 베이비시터가 되는 데에는 이렇다 할 경력이 필요치 않았다. 대학 시절 그 흔한 아르바이트 한번 해 보지 못했고, 목회자의 아내여서 세간에 통용될 만한 이력을 쌓기가 어려웠던 보혜에게 그보다 나은 자리는 없었다. 이력서를 검토해 준 해외 취업 에이전시에서 그나마 좋게 이야기해 준 부분은 전공이 영문학이라는 점, 피아노 반주를 제법 잘한다는 점 정도였다. 추천 직종 차트를 받아 든 보혜는 외국인 어린이들과 함께 피아노 치며 노래를 부르는 자신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 목사와 결혼하기 위해 보혜는 대학을 그만두었다. 3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치르기 직전이었다.  

- 신학교에 다니면서 아직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지방 교회 유적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복원 논의가 시작되기 전에 최대한 인근 지역에 자리를 잡을 생각이라고. 아버지에게 그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이야기처럼 들렸던 것이다. 교회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지역에서 목회를 시작해서 그 뜻을 이어받아 큰 사역을 하고 싶고, 그 사역에 보혜가 사모로서 꼭 동행해줬으면 한다는 이야기.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늘 시원찮은 늦둥이 취급을 받던 보혜까지 큰 믿음의 자녀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 바라던 대로 목사 사위를 보게 된 아버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같고, 야곱의 아내 라헬 같고, 담대하게 왕 앞에 나아가 민족을 구한 에스더 같고... 반주에 기분 좋게 취해 믿음의 아내들을 열거하는 아버지 앞에서 보혜는 하품을 참으며 생각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갈이라는 첩이 있었고 야곱은 라헬의 언니 레아와 먼저 동침했으며 에스더는 페르시아 왕비였는데, 앞뒤로 후궁이 천 명은 있었을 텐데.

 

- 아버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좋았지만, 보혜가 자라면서 이룬 어떤 업적보다도 이 결혼이 더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는 사실이 묘하게 섭섭했다. 이것만은 딱히 보혜가 노력해서, 보혜의 힘으로 이룬 일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 <보>



- 애인도 없는 원희가 멋 부리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는 한편 통이 큰 원희를 좋아했다. 옷이나 화장품을 아낌없이 빌려주고는 망가뜨려도 물어내라 하지 않는 원희. 제 물건을 그리 아까워하지도 않는 원희가 그래도 멋을 부리고 다닌 까닭은 공장에 다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원희는 공장에 다니는 것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고 오히려 공장을 좋아했지만 사람들이 공순이를 어떻게 보는지에는 신경을 썼다. 멋을 내고 외출하면 원희보다 한참 어린 남자들이 따라다니는 것도 은근한 보람이 있었다.

- 그런 시절도 있었다는 것을 원희는 그동안 생각도 않고 지냈다.

- 원희는 카세트테이프 조립 공장에서 고데기를 만드는 공장으로, 고데기를 만드는 공장에서 휴대용 포토프린터를 만드는 공장으로 이직했다. 원희가 나 그거 만들어요, 하고 말하면 열에 아홉은 원희가 공장에 다닌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제품의 개발 부서쯤 되는 곳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원희는 점차 어떤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만 갖게 되어 갔다. 더는 아무도 만나지 않게 된 지도 여러 해가 된 참이었다.

- 앞으로 그럴 일이 있을까.

- 주말이어서 학원 차를 몰 필요도 없고, 학원 차를 몰 때야말로 화장할 필요가 없어 항상 맨얼굴이던 원희가 오랜만에 화장대 앞에 앉은 것은 성미가 산악회에 원희를 초대했기 때문이다. 성미는 나이트니 카바레니 다 소용없고 이게 최고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다 늙은 인간들이 서로 등 떠밀어 주고 헉헉대면서 산 타는 게 뭐 그렇게 신통한 일이라고 그럴까. 원희는 화장을 다 하고도 뭔가 빠뜨린 듯한 기분에 한참 거울 앞에 그대로 앉아있다가 나와서 방문을 걸어 잠근다. 자기 차를 몰고 집 앞까지 마중을 온 성미가 경적을 울린다. 

 

- "데리러 올 것까진 없는데."
"데리러 안 오면 뭐, 학원 차 끌고 나오려고 했어?"
성미의 핀잔에 원희는 배시시 웃는다. 어쩐지 화장을 할 때부터 속이 근질근질했는데 이제야 웃음이 난다. 어렸을 때는 새 옷을 입을 적마다 이렇게 속이 간지러웠는데, 그러고 보면 뭔가 새로운 경험을 할 거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게 된 지가 오래됐다. 집에서는 영 나지 않던 웃음이 성미의 차 안에서는 터져서 잘 그치지 않는다.

- 성미가 원희를 데려간 곳은 고향 소읍에서 차로 30분쯤 떨어진 산이다. 소읍 사람들은 별로 찾지 않지만 오히려 산 타기 좋아하는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더 이름이 난 산. 주차장도 널찍하고 올라가는 길에 절도 있고 쌍쌍이 앉아 있기 좋은 장소도 곳곳에 있다고 성미가 귀띔을 준다.
 
- 아끼기에는 늙은 몸이야. 원희는 군데군데 희끗한 털이 솟은 남자의 가슴팍을 손끝으로 쓸면서 생각한다. 하나도 아깝지 않다. 원희에게는 아까운 것이 하나도 없다.
"가봐야 해요."
일어나 브래지어 훅을 다시 채우는 원희에게 남자는 다 안다는 투로 말한다.
"남편 때문에?"
"남편 없어요."
"나도 혼자예요. 자고 가지 그래요."
남자는 나이에 맞지 않게 응석을 부리듯 원희를 부른다. 돌아보니 남자가 손을 내밀고 있다. 원희는 피식 웃는다. 데려다준다는 말을 거절하고 모텔을 나와 걸어서 집까지 간다. 서울로 통하는 국도변에 자리한 모텔에서부터 원희의 집까지 걸어서 40분이 걸린다.

- 자물쇠를 따고 들어간 안방의 어둠 속에서 원희는 잠시 머뭇거린다.
소리가 안 들린다. 아무 기척도 없다.
그만 숨을 놓아 버린 걸까. 엄마는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언제 숨을 놓아도 이상하지 않을 엄마는. 하필이면 원희가 남자와 몸을 섞는 사이에 엄마는. 불을 켜야 하는데 스위치가 잘 짚이지 않는다. 원희는 귀와 손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면서 벽을 더듬는다.

- 언니야.
불쑥 엄마의 목소리가 나타나 원희의 발목을 잡는다. 언니야,라고 한 걸까 원희야,라고 한 걸까. 엄마의 맑은 정신은 아주 드물게 돌아오곤 한다. 엄마의 정신이 분명해지는 순간은 원희가 엄마를 돌보는 고생이 모두 헛것이 아니었다는 아주 작고 뚜렷한 위로인 동시에, 나머지 모든 시간의 죄책감을 서너 배로 부풀리는 것이다. 손끝에 형광등 스위치가 닿는다. 원희는 숨을 한껏 들이쉬어 머금은 채로 방 불을 켠다. 

- 엄마는 자고 있다.
소리 없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엄마의 윗몸을 원희는 한참 보다가 주저앉는다.
제발 그만하면 안 될까. 엄마.
숨을 그만 쉬면 안 될까. 원희는 아무런 원망도 품지 않은 마음으로 되뇐다. 그러다 문득, 엄마가 숨 쉬는 공기를 아까워해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소스라친다. 

- 남자는 군인 아파트에 산다. 자기야말로 혼자라는 남자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원희는 단 한 번 나갔던 산악회에 더는 나가지 않고, 학원 차 운행 시간이 비면 남자의 집에 들른다. 산악회 모임에 나가지 않는 것은 남자도 마찬가지다. 쉽게 만났지만 진심이라는 의미에서. 원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남자는 그날 모임에서 원희가 아닌 누군가를 만났을 것이고 누구를 만났어도 정성을 다했을 것이다. 원희는 그 점에 아무런 감흥이 없다. 바로 그 점에서 이 관계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요한 것은 그 남자가 아니라 이런 얘기를 하고 가끔 몸을 나눌 만한 낯선 사람이었으니까. 

- "한 번은 엄마가 없어졌었어요."
남자는 원희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 발작 있고 치매기 생길 무렵이었는데, 멀리도 갔더라고요. 시외버스터미널 가는 길에서 찾았어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원희는 남자의 눈빛이 어쩐지 부담스러워 자기가 붙들고 있는 그의 손목을 내려다보면서 말을 잇는다.
"어디로 가고 싶었던 걸까요? 엄마가 길 줄만 알았지 걸을 줄도 안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 그래서 방 문고리를 빼놨어요. 원희는 고민하다 그 말을 삼킨다. 엄마가 예전의 엄마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엄마를 가둬 놓은 것에는 죄책감을 느낀다. 엄마를 잃어버리면 엄마를 제대로 모시지 않은 것이 되는데, 엄마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가둬두면 학대가 된다. 엄마가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억지로 뭔가를 먹이는 것도 학대고 아무것도 먹이지 못해 엄마를 굶기는 것 또한 학대.

 

- 엄마와 관련된 일마다 빠짐없는 모순이 있다. 엄마를 사람으로 유지하기 위해 하는 일이 엄마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일이 되는 모순. 보다 근본적인 모순이 있으리라는 짐작이 불쑥불쑥 원희의 속을 뚫고 나온다. 엄마가 아직도 사람일까 하는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대체 사람일까 하는.

- "가끔은 집에 불이 나는 꿈을 꿔요."
"불나는 꿈은 좋은 꿈이라던데. 불도 나오고 피도 나오면 더 좋고. 복권 사지 그래요."
“꿈이 반대라고도 하고 간절히 바라는 게 꿈에 나온다고도 하잖아요. 꿈에서는 내가 집에 없을 때 불이 나요. 엄마는 몸을 못 일으키는데.”
그리고 엄마의 방은 맹꽁이자물쇠로 잠겨 있는데.

- "집에 불이 났으면 좋겠어요?"
원희는 머뭇거리다 적절한 대답의 때를 놓친다. 정말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는 하다. 집 안 곳곳에 깊숙이 밴 노인성 질환의 냄새를 지우느라 촛불을 켰다 끄곤 하니까. 어느 날 원희는 외출 전 촛불 끄는 일을 깜빡할 수 있다. 엄마는 버르적거리다가 초를 쓰러뜨릴 수 있다. 촛농을 먹은 요가 불타고, 장롱도, 텔레비전도, 엄마의 몸도, 엄마의 마음도, 불에 휩쓸려 사라져 버릴 수 있다. 

<기미>



- 제목은 '내 얘기'.
그렇다고 진짜 내 얘기는 아니다. 당연한 소리. 소설인데 그러면 안 되나.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 소설인데.

- 아니, 나 화 안 났어. 왜 화났다고 생각하지.
그냥 얘기해.

듣고 있으니까.
통화 상대는 나에게 화났냐고 물으면서 화내고 있었다. 귓구멍이 콕콕 아파왔다. 휴대폰을 얼굴에서 떼자 화면에 상대의 전화번호가 떠올랐다. 원래 이 번호였나. 연락처를 삭제한 지도 오래라 가물가물했다. 어떻게. 니가. 거짓말. 나한테 이럴 수. 어떤 단어는 정확히 들리고 어떤 단어는 뭉그러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내내 똑같은 말이어서
아니라니까.
대답도 똑같을 수밖에.

- 통화 상대는 악을 쓰기 시작했다. 단순하고 아무 의미 없는 고성. 음 지겹다. 그냥 끊을까. 막 끊는다는 말을 하려던 찰나 상대방이 물었다.
왜 그런 얘기를 썼어?

 

- 질문이 너무 광범위했다. 글쎄 태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같은 말로도 충분히 답할 수 있는. 나는 비아냥대기 전에 생각부터 해야 한다. 지금까지 그 문제로 나를 혼낸 사람의 수가 국회 의석 수 정도 되니까.

- 상대방은 한참 만에 덧붙였다. 그게 정말 우리 얘기가 아니라면,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런 걸 썼냐고.

- 소설가니까 소설을 썼지. 청탁을 받았으니까 썼지. 그런 구상이 떠올라서 썼지.
쓸 수 있으니까 썼지.

- 나는 그 소설을 2019년에 썼다.
앤솔러지 청탁이었다. 가제는 '여자, 진실을 말하다'. 기획서에 뮤리얼 루카이저의 시 <케테 콜비츠>의 한 구절이 적혀 있었다.

"한 여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계는 터져 버릴 것이다."

당연하게도 여성 작가 앤솔러지였다. 20대 작가 두 명, 30대 작가 두 명, 40대 작가 세 명이 참여하기로 했다.
반갑고 감사한 제안이었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주어진 시간은 두 달. 누가 먼저 한다고 했다가 마음을 바꾼 게 아닐까, 그래서 내게 기회가 온 게 아닐까. 감사합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문예지 마감이 하나 더 있었다. 문예지 쪽 원고야 미리 짜둔 게 있어서 쓰기만 하면 됐는데, 그와 동시에 여자로 산다는 일의 진실을 담은 단편을 두 달 만에 써내는 건 아무래도 무리로 느껴졌다. 남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손이 느린 편이어서. 그렇다고 좋아하는 작가들과 이름을 나란히 할 기회를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청탁 메일을 받고 꼬박 며칠간 답장을 어떻게 보낼지를 고민했다. 

- 그때 대학 시절 쓴 단편이 떠올랐다. 외삼촌의 빈소에 엄마와 마주 앉아 영정 속 저 사람이 자신을 추행했다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딸의 이야기. 합평 수업에서 혹평을 듣고 봉인해 둔 지라 신춘문예나 신인상에도 내지 못했고, 따라서 까맣게 잊고만 있던 원고.

 

- 그땐 왜 그렇게 욕을 먹었지?
시대가 달라서 그랬나?
겨우 10년인데?

 

- 다시 보니 감정과잉과 쓸데없이 멋 부려 복잡해진 문장만 좀 털어내면 책에 실을 만한 글 같았다. 오히려 너무 기획을 의식하며 쓴 글로 오해받으면 어쩌나 싶었다. 송고하기 전까지는 그런 걱정을 했다.

- [작가님, 송구하지만 이전에 혹시 필명으로 이 작품을 발표하신 적이 없는지 조심스레 여쭤봅니다. 미공개 작품이 아닌 것 같아서요...]

- 편집자는 상상도 못 한 반응을 보였다. 미숙한 부분을 고치라는 코멘트라면 얼마든지 수용하려 했는데 미공개 작품이 아니지 않냐는 지적에 말문이 막혔다. 미공개 작품이란 건, 발표 또는 발간 기준이 아닌가요? 문예지나 단행본에 싣지 않았다면 미공개 작품으로 치는 게 아닌가요. 이 소설은 수업 때 합평받은 게 전부인데요. 합평이란 수강생 한 명의 작품을 두고 나머지 수강생과 강사가 함께 소설의 평가와 감상을 나누는 일로서... 
아니다. 문학 편집자가 합평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는 없겠지. 메일에 답장을 쓰다 말고 소설 일부를 복사해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붙여 넣었다.

- [버터플라이 허그라는 말 알아?
양손 손바닥이 보이는 상태에서 엄지손가락을 교차해서 그대로 가슴에 얹어 봐. 그리고 손으로 가슴을 다독이는 거야. 나비가 날갯짓하는 것처럼. 
이렇게 하면 마음을 쓰다듬을 수 있대.]

- 서른 개가 넘는 어절이 정확히 일치하는 검색 결과가 나왔다. 어느 대학 문학상의 가작 수상작으로 전문 공개되어 있었다. 합평 때 들은 혹평이 신경 쓰여 어디 내보일 엄두도 못 냈던 내 원고가 수상작으로 게시된 지 2년도 넘은 상태였다.

- 이건 제가 아닌데 이건 제 소설이에요.
쓰던 메일을 다 지우고 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어 그렇게 말했다. 편집자는 노련한 사람이었다. 판단이 빠르고 정확했다. 작가님, 상황은 안타깝고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겠지만 당장 이 원고를 이번 앤솔러지에 싣는 건 무리가 아닐까 하는데요... 왜요? 제 소설인데요? 제 소설을 맘대로 도용한 사람이 있고 저는 피해를 봤는데 왜 제 원고를 빼야 하나요? 빼라는 게 아니고요, 저희도 안타까운데요 작가님, 시간은 충분히 드릴 수 있으니 새 원고를 쓰심이 어떨까... 제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말씀드렸다시피 원칙적으로 미공개 원고라야 하는데... 아니 제가 공개를 안 했는데 그게 어떻게 미공개 원고가 아닌 게 되나요...

 

- 편집자도 틀리지 않았고 나도 틀리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는 도용범보다 편집자가 미웠다. 내 소설을 훔친 사람보다 내가 고른 내 소설을 책에 실어 줄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더 나쁘게 느껴졌다.

- 우여곡절 끝에 그 소설은 앤솔러지에 실렸다. 편집자가 편집장에게 내 상황을 전달했고, 편집장은 대학 문학상 심사위원이자 교수인 평론가와 나를 연결해 주었다. 대학 신문사에서 도용범과 주고받은 메일에 남아 있는 연락처를 찾아냈다. 도용범은 합평용 소설을 업로드하는 카페에서 내 소설을 다운받아 공모전에 냈다고 실토했다. 대학 신문사는 사고를 냈고 도용범은 자필 사과문을 보냈으며 편집자는 내 소설을 미공개 원고로 인정해 주기로 했다. 상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편집장이 말리지 않았어도 법정까지 가져갈 생각은 없는 사안이었다.

 

- 지금 와서 이 사건을 재평가하건대 작품을 되찾아 왔다는 것을 빼고는 내겐 딱히 득 될 것이 없었다. 중견 작가들도 다들 신작으로 참여하는 앤솔러지에 한참 전에 쓴 원고를 낸다는 사실을 들켰고, 새 원고를 쓰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기도 했으며, 고집대로 그 작품을 실었으니까. 심지어 '가작' 평가를 받았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사람은 다 아는 상태여서 더 모양이 이상해졌다. 대학 문학상에서 가작 정도 타는 수준의 소설을 감히 여기에, 같은 말을 누가 소리 내서 한 적은 없지만 왠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설상가상 출간 후에 앤솔러지 리뷰를 검색했을 때 내 소설을 언급한 독자도 별로 없었다. 한 줌 될까 말까 한 리뷰는 내 작품을 두고 기획을 너무 의식해서 재미가 없어진 소설이라고들 했다. 내 소설이 기획보다 먼저 쓰였다고 일일이 해명하고 다닐 수도 없고, 총체적으로... 그 난리를 피워 되찾아 왔어야 할, 되찾아 굳이 실었어야 할 작품인가. 
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 앤솔러지 출간이 두어 달 연기된 이유를 전체 필진에게 설명하는 메일에서 편집자는 원고 일부와 관련한 불미스러운 사고가 있었다고 썼다. 불미스럽다는 표현이 내게는 도용이 아니라 나를 겨냥한 것처럼 보였다.

 

- 내가 밉겠지? 
이 편집자는 나를 미워하게 됐겠지?

- 곰곰 생각해 보면 나는 상대방의 잘못이 아닌 사고로 피해를 입었을 때 그를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라 믿으면서도 남들은 내게 그렇게 해 주지 않을 거라 단정 짓는 것은 상당한 오만이다. 당신의 인격은 나의 인격만큼 훌륭하지 않겠죠?라고 생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렇지만 어떤 사고가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해서 나 때문에 피곤한 상황에 처한 제삼자가 나를 원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뻔뻔한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편집자가 나를 미워할 것이라는 판단에 다다른 채, 평단과 대중에 더해서 편집 인력까지 등지는 선택을 한 것 같다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그때는 그 소설을 반드시 앤솔러지에 싣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되찾아 온 작품을 당장 발표해서 내 것이라는 영역 표시를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 그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새로 쓴 소설이 있다는 것은 밝히지 못한 채로.

- <내 얘기>는 2019년에 쓰였다.
수업에 가져갔다면 자퇴를 결심할 만큼 혹평을 들었을 것이다.


- 제발 너희 임신하고 낙태하는 소설 좀 쓰지 마라.
그 말을 한 선생이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당시 교·강사진 누구라도 할 만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누구의 합평작 소재가 임신이다 하면 한숨부터 푹 내쉬는 교수, 낙태를 다룬 소설을 보면 학생들과 눈빛 교환을 한 다음 합평 대상자를 은근한 시선으로 보는 강사. 그런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고 그 정도면 양반이기도 했다. 공정하게 말해서 그런 소재로 소설을 쓰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야 갓 스무 살 먹은 대학생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사건이 대충 그런 것이니까. 열 명 중 서넛의 비율로 남자애들은 섹스, 그중에서도 첫 섹스와 관련된 소설을 썼고 여자애들은 임신이나 낙태를 중심에 둔 소설을 썼다. 낙태를 해본 것 같다, 는 이유에서 윤리적으로 매도당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분위기라면 오히려 너무 뻔하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런 걸 해 봤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그냥 그걸 소설 소재로 쓰는 게 구리다, 그렇게 쿨한 척하는 게 당시의 대세였다. 왕따 소재와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문창과 온 애들 중에 왕따 안 당해 본 사람 있냐? 누가 경험했어도 비슷할 법한 일, 대단히 개성 있게 쓸 자신이 없다면 그냥 다른 걸 써라. 그런 말들. 그 나머지가 소재 삼는 것들도 그렇게 다양하다고 볼 수는 없었는데 유독 낙태 소재만은 닳고 닳은 취급을 받았고, 쓴 사람은 여지없이 뻔한 작가 취급을 받았다. 

 

- 역시나... 같은 세계.
일필휘지라고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쓰면서 딱히 막히거나 걸리는 부분이 없었던지라 쉽게 썼다. 초고를 쓰는 데에 2주 정도. 초고를 다 쓴 다음 날 도용범의 자필 사과문을 받았고, 편집부에서도 기존 원고로 진행해도 괜찮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여차하면 기존 원고 대신 내려고 쓴 소설인데 이득 봤네, 그런 생각을 했다. 

- 새벽에 전화했다고 욕을 한 친구에게 초고를 보냈더니 '지나치게 시의적절하고 구성이 단순한 것은 단점이지만 묘사의 핍진함이 제목과 맞물려 계속적인 메타 반응을 일으킨다'고 평가해 주었다. 작의가 거의 정확히 읽히는 소설이라는 것. 쓰면서 기획을 초과하지 못하는 원고는 대부분 구리지만 이 작품의 경우 기획의 초과분을 독자들 스스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과찬이네. 칭찬 맞... 지?

 

- 그런데 친구는 이런 말도 했다.
너 근데 감당 가능하겠어 이거?

- 감당 못 할 건 뭐람, 살인자가 주인공인 소설도 써봤는데, 살인해 봐야 살인자 나오는 소설 쓰나? 낙태해 봐야 낙태 소설 쓰나? 낙태 소설 썼다고 작가한테 낙태충이라고 한다면 그건 독해력 문제지. 대충 이런 비아냥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던 기억이 난다.

- 이제 와서 비밀로 할 것도 없으니 말이지만 살인은 안 해 봤고 수술은 받아 봤다. 어떤 사람들은 그 수술이 살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아무튼 나는 둘 중에 한 가지만 해 봤다.

-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고... 호사다마라는 말도 있다.
그러니까 그건 우리 얘기잖아.
이런 식으로 갑자기 연락해 온 사람이 지금의 통화상대 하나뿐은 아니다.

- 2019년에 쓴 <내 얘기>는 2020년 여름에 발표되었다. 2020년 1월 초에 계간지 봄호 청탁이 왔고 마침 준비가 되어있던 셈이니 선선히 응낙했는데 월말에 다시 혹시 여름호도 괜찮으시냐 하는 재청이 와서 그것도 좋다고 대답했다. 발표가 유예된 건 내 의지가 아니라는 소리다.

 

- 발표 직후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래 그렇지, 요즘 계간지 보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나중에 따로 내 소설집에 실린 다음에나 반응이 좀 있으려나. 그런데 그건 2년 뒤일지 3년 뒤일지 알 수 없는데, 그쯤이면 낙태죄 대체 입법이 어떻게 되어 있으려나. 그때도 의미 있는 소설일까. 당시성을 반영한 아카이브로서의 작품으로 남으려나. 

- 낙태죄 폐지의 대체 입법으로 임신 주수 차등 처벌법안이 논의되던 시기여서 발표 시기는 어쩌다 보니 딱 맞는 게 되어 버린 참이었다. 그 마침맞음이 허탈하고 ...

 

- 그건 심각한 망상이다.
그건 소설이야.
이런 얘기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설이 소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 마음대로 해 봐.
마침내 전화가 끊겼다. 손바닥이 뜨끈뜨끈했다. 이걸로 정말 끝일까. 나는 조용해진 휴대폰을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화면 잠금을 해제한 후 뉴스 피드를 불러왔다. 피드를 힘껏 끌어당기고, 끌어당기고, 끌어당기고 끌어당기고 끌어당기고 또 끌어당겼다.
새로운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소설>



- 부업자도 아니고... 이 대출 심사에서 요구하는 스탠더드대로 근로소득 신고를 하지는 못했지만 사업소득으로 제가 번 돈에 대한 신고를 꼬박꼬박 했고 당연히 그에 대한 세금도 냈고... 애초에 저는 겁이 많아서 그런 거 제꺽제꺽 챙기는 편이거든요. 아무튼 그런데도... 심지어 이건 무직자한테도 대출이 가능한 상품이라면서요, 청년층이 집을 구할 수 있게 정부가 지원해 주는 게 목적이라서. 그런데 제가 프리랜서라서, 소설가라서 대출이 불가능한 거라면, 그런 거라면, 저 같은... 저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사나요? 어떻게...

- 고객님, 저희는 고객님을 괴롭게 하려는 게 아니라 도와드리려고 하는 거고요. 최대한 많은 분들이 이 상품을 이용하실 수 있게 마련한 방식이 지금 말씀하신 그 스탠더드인 거예요. 기준의 우선순위에서 다소 뒤떨어지는 고객에 대해서는 저희도 아직 부족한 점이 있는 게 사실이긴 해요. 그래도 아직 대출 심사에서 아예 탈락한 걸로 확정받은 게 아니니까 너무 염려하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번에 준비해 주실 서류는 아마 무리 없이 통과될 거예요. 

- 승희는 뒤늦게 얼굴을 붉혔다. 단순히 대출 상품 안내를 하고 있을 뿐인 직원에게 자기 자신을 거절당한 것으로 느끼며 말했기 때문에 '저 같은 사람'은 '어떻게 사나요'라니, 이 사람의 귀에는 얼마나 황당한 자의식 과잉으로 들렸을까. 그렇지만 자격을 증명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스스로가 거절당한 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가 없는걸. 눈물이 쏟아지지 않게 붙들고 있느라 얼굴근육을 온통 긴장시키고 있는 승희와 달리 직원은 사무적이고 프로페셔널한 친절의 표정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승희는 자기와 직원의 대조되는 안색을 머릿속에 문장으로 기록하면서 더더욱 막막함을 느꼈다. 

- 소설에다 이 얘기나 써 볼까 봐.

너무 프로파간다적이려나? ㅋㅋ;

젊은 예술인의 현실 고발 막 그런 느낌?

- 승희가 농반진반으로 보낸 메시지에 유민은 딱딱한 답장을 보내왔다.
그런 구상하고 있는 것부터가 일 생각은 뒷전인 거잖아.

일을 하라고

일을.

- 승희는 휴대폰을 침대 위에 툭 떨구었다. 그렇지만 이게 내 일인 걸. 이 일이 직업으로서의 조건을 별로 못 갖추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나는 이 일로 내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는 걸. 물론 새 옷을 사지 못한 지도 한참이고 ... 

<A Queen Sized Hole>

 




작가의 말



여기까지 7년.

꽤 오랫동안 소설 쓰는 일을 나 혼자의 작업으로 여겼다. 완전히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을 최근에는 하고 있다. 7년은 여기 실린 소설들을 쓰는 데에 든 시간이기도 하고, 첫 정규 소설집을 내는 데에 든 시간이기도 하며, 이 일을 직업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걸린 시간이기도 하다.

책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배운 다음에야 첫 정규 소설집을 내게 되어 다행이다. 책임감이 생겼다. 이전 작업보다 뒤처지지 않으며 이후 작업에 부끄럽지 않을 지금이 되도록 노력하는 태도. 책을 만들고 알리고 읽어 주는 고마운 이들을 향한 마음이기도 하다. 이것이 생기고부터는 결코 쓰는 일을 혼자의 일로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쓰는 동안 완전히 혼자가 되는 순간은 그럼에도 기어이, 우연하게 오곤 한다. 나는 그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순간을 좋아하는 것 같다.

2022년 1월

박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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