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이삭 / 남유하 / 배명은 / 사마란 / 서계수 / 유기농볼셰비키 / 장아미 / 전혜진 / 코코아드림 / 한켠
출판 : 한겨레출판
출간 : 22.07.14
한켠 작가의 글이 읽고 싶어져서 찾아 읽었다.
<우리가 다른 귀신을 불러오나니>는 <야운하시곡>과는 다른 느낌의 앤솔러지로 -그야 주제가 다르니까-, 여성 작가들이 모여 '호러'를 주제로 쓴 책이다. 보통 표제작을 정해 작품에서 제목을 따오는 형식을 취하는데, 작품 중 한 대사에서 제목을 따왔다는 점이 독특하다. -매우 잘 어울린다-
앤솔러지의 장점은 하나의 주제를 제각기 다르게 해석해 낸다는, 다시 말해 '다채롭다'는 점이겠다.
클래식한 호러, 해석할수록 짙어지는 호러,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니 호러 등등...
다양한 색색의 작품들을 무척 즐겁게 읽었다.
-일러스트에 너무 놀라지 마시길-
<시어머니와의 티타임>, 남유하
1인칭 시점 소설로, 귀족 영애 호러라고 부르고 싶다. 우아하게 찻잔을 홀짝이며 '그런 일이 있었죠, 어머 시간이 됐네'라는 듯이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매끄럽게 풀어낸다. 많은 부모들이 손에게서 자식을 본다는 걸 고려하면, 중의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해 더더욱 오싹하다.
<무진도 탈출기 게임 환불 보고서>, 코코아드림
신선했던 호러. <웨스트월드> 생각도 살짝 난다. 수없이 쏟아지는 타인의 비극에 관한 뉴스들, 그것을 일종의 흥밋거리로 소비하는 현대인의 모습도 겹쳐 보인다. '보호'라는 명목으로 고립되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모습도, 비인간종들도. ... 메일을 쓴 이는 환불에 성공했을까.
<큰언니>, 장아미
이미지적으로 강렬했던 작품. 자수 속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설정에서 환상 소설로 분류할 수도 있겠다. 어미 없이 남겨질 아이들이 눈에 밟히는 마음의 양면성을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애정을 기반으로 하더라도, 부모의 입장과 아이의 입장은 다를 수 있음을. 그럼에도 '지키고 싶은' 마음을. 고아한 표현들로 묘사된 손의 모습이 압권인데, 개인적으로는 <초혼>이 자꾸만 떠올랐다 -혼례복과 분위기 때문이지 않을까-. 모란의 마지막 선택은, 나와는 달랐다.
<창귀>, 전혜진
현실을 살짝 비튼 호러.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행간에 다 쓰이지 않은 것들까지 읽힌다. 헨리8세를 떠올려 보면, 해외 독자들에게서도 공감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매혹>, 배명은
역시 현실을 살짝 비튼 호러. 귀촌 귀농의 경험이 있는 분들이 주변에 계셨던 걸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큰언니>, <창귀>, <매혹>의 수록 순서가 굉장히 깊게 고려된 것 같다는 생각도. 세 작품 모두 선명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고, 세대를 건너가며 이어지는 일종의 '업' -창귀- 의 느낌이 있다.
<너의 자리>, 한켠
<야운하시곡>에서의 인상이 원체 강렬해서, <너의 자리>가 현대물이라는 점에서 잠시 인지부조화가 왔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아직도 제대로 찾아 읽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몇 문장 읽지 않아 아 '한켠'이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창공을 가르는 상서로운 흰 매도, 피에 젖은 흙을 파헤치는 쥐 떼도, 비슷한 온도로 서술할 것 같은 느낌. 나는, 좋았다. -근시일 내에 <탐정 전일도 사건집>을 빨리 읽어봐야겠다-
<성주 단지>, 김이삭
강렬한 첫문장과 끝문장,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는 소설. 아니... 저기요...? 단지를 깼지만 새로 모셔서 동티를 피하다니, 정말 운이 좋은데?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생각들은 계속 튀었다. 누군가는 공감하고 누군가는 혐오하겠지만, 끝끝내 생겨나고 만 '안전이별'이라는 단어를, ○○대학이 통합되며 사라졌다는 사실을 -다른 이름이 되었다-, 결국 한국의 민속학부는 멸종하고 말았다는 것을. 아아.
<산상수훈>, 서계수
앤솔러지의 제목이 된 '우리가 다른 귀신을 불러오나니'가 나오는 작품. 뭐랄까... 뜬금없이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홍수가 나 지붕 위에서 살려달라고 기도하던 사람이 구조보트도, 헬기도 거절하고 결국 죽고 말았다는. 사후세계에 가서 신에게 따져 물었더니 '내가 보트도 헬기도 보내줬지 않았느냐'고 하더라는. 내 편이면 선지자고 내 편이 아니면 이단이란 말인가. 그런 것들은 누가 정했나. 인간이 알 수는 있나. ... 네 탓이오, 네 탓이오, 네 큰 탓이로소이다.
<뷰티풀 라이프>, 사마란
와. 남자 신데렐라라는 설정에서 <모던테일>의 <신데렐라 프로젝트>가 떠올랐다. 명철의 토로들이 인간적으로 이해가 가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그렇게 생각할 법' 하기도 해서 읽기가 조금 힘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깔끔한 현실 공포. -아주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이 결말이 그래도 해피엔딩에 가까운 것 같다. 딸에게 감기 옮겼다고 노발대발하는 장인에게 전후 사정을 다 걸리는 것보다야...-
<그를 사로잡는 단 하나의 마법>, 유기농볼셰비키
피지컬 '마법소녀'... 라기엔 좀 많이 갑갑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도 좋은 변호사님을 만나 다행이라는 희선 씨는 얼마나 긍정적인 건지 감도 안 온다... 꼭 행복하시길. 그런데 작가님, 유기농 볼셰비키라뇨.
-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남자가 한 말은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 중국집에서 단무지를 먹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말했어요.
단무지 씹는 소리가 참 경쾌하네.
그 한마디에 공연히 단무지 씹는 소리를 의식하게 됐고, 더 이상 단무지에 손이 가지 않더라고요. 남자가 저를 보며 씩 웃더니 신경 쓰지 말라고, 칭찬이라고 하면서 이런 얘기를 해줬어요.
어떤 사람의 음식 씹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면, 너는 그 사람을 증오하고 있는 거야.
- 사람은 누구나 음식을 씹을 때 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데 유독 그 사람이 내는 소리만 듣기 싫다면 그 사람이 죽기를 바라고 있다는, 그런 얘기였어요. 인간은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면 죽게 되니까요. 그 당시에는 굉장한 논리의 비약이네, 라며 넘겨버렸지만 요즘 들어 그 이야기가 자꾸 떠오릅니다. 저는 요즘, 어떤 이의 차 마시는 소리가 거슬려 죽을 지경이거든요. 후루룩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고, 고요한 실내에서 찻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그 작은 소리조차 듣기 싫다고요. 작은 소리라 더 거슬리는 걸까요?
- 그나마 남편이 죽은 이후로 그 여자와 겸상을 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차 마시는 소리가 이 정도인데 음식 씹는 소리는 끔찍할 정도로 혐오스럽겠죠. 짐작하셨겠지만 그 여자의 이름은 박옥조, 제 시어머니입니다. 아니, 남편이 죽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시어머니가 아닙니다. 제가 재혼을 하지 않아서 법적으로는 시모와 며느리의 관계로 남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저 한집에 사는 동거인일 뿐이죠.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남편이 죽고 나서도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저를 효부라고 할 거예요.
- 시어머니와 저는 서울 근교의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지은 지 17년 된 43평형 아파트, 방 세 개와 욕실 두 개, 주방과 거실이 있고 거실만큼이나 넓은 베란다가 앞뒤로 있는, 공간 활용이 다소 비효율적인 아파트입니다. 저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 사용하던 욕실이 딸린 큰 방을 쓰고 있어서 시어머니와 부딪힐 일은 거의 없어요. 오후 세시가 사라진다면, ...
- 남편이 현관에서 구두를 벗지 않은 채 자기 어머니를 불렀어요. 보통은 구두부터 벗고 거실에 들어서서 인사를 하지 않나요? 그걸 보면서 저는 들어오라는 허가가 떨어지기 전에는 집에 들어갈 수 없다는 북유럽의 흡혈귀 전설을 떠올렸죠.
- "그래, 들어와라."
여전히 시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만 들려왔어요. 솔도 아니고 라에 가까운, 단번에 가성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목소리였죠. 역시 호락호락하지는 않겠다고 직감하며 거실에 들어서는데, "슬리퍼 신어라. 엄마가 오늘 청소를 못 했거든"이라는 말이 역시 라 톤으로 들려왔어요. 족히 40년은 넘어 보이는 등나무 소파 앞에는 직사각형의 낮은 티테이블이 있었고, 티테이블 주변에는 방석이 세 개 놓여있었지요. 남편 옆에 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도록 말이에요. 베란다 가까이에는 동그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어요. 맞아요. 매일 시어머니와 마주 앉아 얼그레이를 마시는 그 테이블이요.
- "앉아라, 차 마시자."
붉은 올림머리를 한 시어머니가 넓은 쟁반에 티포트와 찻잔을 가져오며 말했어요. 찻잔에 그려진 무늬가 예사롭지 않았는데 시어머니가 굉장히 자랑스러운 얼굴로 '포트메리온'이라고 하더라고요. 시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산 거라고 했죠. 나중에 검색해 보니 엄청 비싼 영국제 찻잔이었어요.
- 어떻게 하면 티타임을 끝낼 수 있을까.
요즘은 그걸 공상하며 시간을 보내곤 해요. 답은 정해져 있었죠. 시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저는 그 지긋지긋한 차를 더 이상 마시지 않고, 집주인이 될 수 있어요.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저는 우아하게 커피를, 아니 됐어요. 당분간은 아무것도 마시고 싶지 않을 것 같네요.
- 사실 시어머니를 없애고 싶다는 생각은 단지 티타임과 마시기 싫은 얼그레이 때문만은 아니에요.
한 석 달 전부턴가, 이 할망구 아니 시어머니가 좀 이상해졌어요. 원래도 이상했지만 그보다 더 이상해졌다니까요. 집 안에 기이한 물건을 들여놓기 시작한 거예요. 성기 형태를 본뜬 목각 인형이라든가 호루스의 눈 모양 펜던트처럼 국적도 근본도 없는 물건들이 집 안을 채워갔어요. 유럽풍 가구나 도자기 인형만으로도 충분히 그로테스크한 집이 사이비 주술사의 집처럼 변해갔죠. 그래도 새로운 취미 생활이겠거니 하고 내버려 뒀어요. 저한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니까 상관할 필요는 없잖아요.
- 오늘은 남편의 일주기 날이에요. 그래서 어제 티타임을 할 때 저는 시어머니가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어요. 의외로 아무 말 안 하길래 그냥 조용히 넘어가나 보다 했죠.
- 광기가 꺾이고 제정신이 좀 났는지 시어머니는 차분한 목소리로 저를 설득하려 노력했죠. 기분이 풀릴 리가 없었지만 그 정도 선에서 양보하는 척하기로 했어요. 이 집에서 독립하려면 돈이 필요했으니까요. 창문도 없는 고시원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제사상 앞에서 옷을 벗는 게 나았어요.
- "어서 마시려무나."
마지못해 티테이블 앞에 앉자 시어머니가 차를 권했어요. 시어머니의 머리카락처럼 검붉은 빛으로 우러난 차를 보면서 이 여자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끓어올랐죠. 어떻게 하면 시어머니를 없앨 수 있을까, 수없이 상상했던 경우의 수 중 하나를 실행해버리고 싶었어요.
"어서 마시렴. 왜, 독이라도 탔을까 봐 그러니?"
시어머니가 제 속을 읽은 듯이 말했어요. 저도 능청을 떨어야 할 순간이 온 거죠.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자기 전이라 망설이는 것뿐이에요. 진작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차에도 카페인이 있어요. 루이보스나 페퍼민트 같은 차 말고, 얼그레이나 잉글리시 블랙 퍼스트 같은 차에는 카페인이 특히 많다고요. 그래서 어머님이 밤잠을 설치시는지도 몰라요."
허, 제 말에 시어머니는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어요.
"역시 근본 없는 애는 어쩔 수 없구나. 누가 너더러 그런 ... "
- 잡혀갔죠. 퀭한 눈에서는 눈물이 질질 흘러내렸고요. 며칠 전에는 차를 따르던 손이 미끄러져서 왼쪽 볼에 타이완 지도 같은 흉터가 생겼지 뭐예요. 흉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저도 배꼽 주변에 오스트레일리아 섬 모양의 커다란 흉터가 남았어요. 집세를 치른 셈이죠. 일시불로요.
- "어머니, 전 좀 천천히 마실게요. 어머니가 항상 그러셨죠? 차는 한 모금씩 입안에 머금고 향을 음미하듯 마셔야 한다고요."
저는 이제 시어머니와의 티타임이 매우 기다려진답니다.
<시어머니와의 티타임>, 남유하
-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 [노동을 열심히 한 자에게는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습니다. 내일을 위해 여러분은 각자의 집에서 필요한 만큼의 휴식을 취하고 다시 일터로 돌아와 주십시오. 우리의 노동은 업보를 씻어내기 위한 행위입니다.]
- 퇴근 시간이면 지겹도록 듣는 마키나의 음성과 함께 하진은 공장 밖으로 나섰다. 옆에는 하연이 함께였다. 유독 오늘은 평소보다 더 피곤한 느낌이 들었다. 짧은 휴식이나마 남들보다 더 쉬었음에도 그러했다. 하연 역시 피곤한 것은 마찬가지인지 공장 밖을 나서면서 길게 하품을 했다. 해는 진작 떨어진 채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이제 한 시간 반 후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될 시간이라 어서 걸음을 옮겨야 했다. 하지만 하진은 쉽사리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아까 오전에 본 것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일을 하면서 자신이 인부들을 보고 잘못 판단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역시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본 것은 분명히 바깥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적잖게 먼 거리였지만 무진도 사람들이 입는 옷의 색깔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보였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어째서 이곳에 들어온 것인지, 하진은 그것이 궁금했다.
- "피곤하다, 그치."
"어? 어어. 맞아. 오늘은 평소보다 더 피곤한 거 같아."
"이것도 다 마키나 님의 뜻이겠지. 힘든 건 다 이유가 있 ... "
- [ ... 섬에 정착한 이들이며 현재는 2세대까지 자녀를 낳는 등 그들 스스로의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무진도는 과거 사용되던 마키나가 유일하게 사용되는 섬으로 어른들에게는 과거의 추억 여행, 아이들에게는 역사 여행을 할 수 있는 유용한 시간이 ... ]
- 믿기지 않았다. 하루아침 새에 자신이 알던 모든 세상이 부정당하니 당황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하진이 몇 페이지를 더 넘겼다. 이번에는 전체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섬의 전체적인 그림이 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반을 가르는 선에는 나무 그림이 여럿 그려져 있었다. 나무를 기준으로 왼쪽은 공장 그림이, 공장 아래에는 집이 여러 채 그려져 있었다. 그 위에는 주석이 달려 있었다.
- [무진도 주민들의 거주지이자 근무지가 위치한 곳입니다. 주민들의 업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관광 시간은 오전 여덟 시에서 오후 아홉 시로 제한합니다. 주민들의 생산품인 대체육 육포 EAT MEAT를 기념품으로 구매해 보세요!]
- 섬의 오른쪽에는 설명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몇 안 되는 그림 외에는 텅 빈 것과 마찬가지인 왼쪽과 굉장히 대조적이었다. 하진은 오른쪽이 무슨 구역인지 알았다. 마키나가 주민들에게 절대 가지 말라고 경고하는 공간, 동시에 자신이 호기심에 갔다가 하루치의 기억을 죄다 잃어버린 곳이었다. 빼곡히 달린 주석은 촘촘하게 한 페이지를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적혀 있는 이름들은, 지금까지 무진도에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시설들이었다.
"동물원, 식물원, 테마파크, 박물관...”
- 몇 페이지를 더 넘기자 사진이 나왔다. 무진도의 사람들처럼 같은 색에 크기만 다른 복장이 아닌 형형색색의 다양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신나게 웃으며 찍은 사진이었다. 그들은 꽃 앞에서, 동물 앞에서, 놀이기구 앞에서 포즈를 취한 채 즐겁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 하진은 더 이상 지도를 보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보지 못했다. 급히 지도를 눈앞에서 숨긴 뒤 손전등을 끄고 이불밖으로 나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절대로 해선 안 될 짓을 한 것 같았다. 차마 치워버리지 못한 지도를 베개 아래에 숨긴 채 두 눈을 꽉 감았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기나긴 밤을 잠들지 못하고, 하진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여기까지가 제가 문제없이 게임을 진행했던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 하진이라는 캐릭터가 조금 이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대입한 캐릭터라서 계속 키워보려 했는데요. 이 이후에 게임을 진행할 때마다 캐릭터가 자꾸 저를 바라보는 기분이 듭니다. 아니, 저를 정말로 바라봅니다. 제가 선택지를 고르려 하면 마치 무슨 선택을 할 거냐는 듯이 바라보고 있어요. 그리고 선택지 조작 실수로 게임이 오버되면 짓는 그 표정이... 저를 원망하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처음에는 게임 자체가 그런 줄 알았는데 다른 게임 이용자들 후기를 보니 그런 말도 없고요. 원래 이런 게임인가요? 제가 잘못 느낀 것이 아니라, 게임을 할 때마다 자꾸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만약 이 게임에서 제가 느낀 이상한 점이 버그가 맞다면 환불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하진의 캐릭터로 쓰던 아이돌이 해체해서 기분도 안 좋은데 이런 버그까지 접하니 더더욱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이유까지 들었으니 이번에는 좋은 판단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무진도 탈출기 게임 환불 요구서>, 코코아드림
- 숲은 멀고 외딸았다. 또 고요했다. 별들도 졸음에 겨워 깜빡이는 듯한 새벽에는 풀잎 끝에 맺힌 이슬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 흉한 것들은 출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 숲 가까이에 이르러 구름은 흩어졌고 비는 잦아들었다. 비탈 아래 숨은 동굴들은 깊었으나 한숨 같은 바람이 새어 나올 뿐 이가 날카로운 맹수들은 살지 않았다. 그 숲에서는 씨앗이 익어 꼬투리가 벌어지는 소리조차 작고 나직했다. 노루들은 마른 풀 위에 웅크린 채로 단잠을 이루었고 새들은 정적 속에서 깃털을 흩날리며 낙과를 쪼아 먹었다.
- 그런가 하면 나무꾼들은 함부로 도끼를 휘두르지 않았다. 그곳의 나무들은 피를 흘린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그 같은 언사를 믿지 않고 멋대로 도끼질을 한 작자들은 머지않아 피눈물을 흘리며 실성하고 만다고 했다.
- 사냥꾼들은 아예 발을 들이지 못했다. 살해하려는 마음을 품은 이들은 그 숲에 우연히 들어왔다가 끝나지 않는 길을 영원히 맴돌아야 했다. 죽은 후에도 숲에 사로잡혀 빠져나가지 못했다.
- 메아리가 멀리 퍼져나가던 어느 날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숲을 찾았다. 남은 목숨을 모두 내놓는 한이 있어도 이루고 싶은 소망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그 밤, 우듬지 위로 떠오른 달은 유독 밝았다.
- 오로지 일말의 적의도 없는 사람들만이 빽빽이 들어찬 가시나무 군락을 가로질러 그 숲 깊숙이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면 낭떠러지 앞에 돌아앉은 집 한 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집 역시 숲의 경계 안에 위치해 있었다. 숲과 숲을 이룬 나무들에 보호받고 있었다.
- 단칸의 아담한 기와집이었다. 누가 언제 지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나 분명한 건 그 집이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긴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곳으로 이어지는 오솔길마저 지워져 있었다.
"언니, 모란 언니!"
부르는 말소리가 개암나무 이파리를 들썩였다. 다람쥐 한 마리가 쪼르르 나무 밑동을 타고 올라갔다.
숲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일고여덟 살쯤 먹었 ...
- 소리에 물기가 비쳐 있었다.
"작약아, 왜 그러니? 무슨 일이야?"
모란이 앉은 자세를 고치며 목을 뺐다. 걱정스러운 눈길로 동생을 뜯어보는 중에도 자수를 놓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한 땀, 또 한 땀, 벼랑 끝에서 내딛는 발걸음처럼 위태로우면서 과단성 있는 수(繡).
- 모란은 동생들과 나이 터울이 크게 지는 언니였다. 모란은 동생들이 태어나는 순간 문 너머에서 터져 나오던 울음소리를 기억했다. 갓 낳은 동생들을 양팔에 안은 엄마는 기진맥진했으나 한편으로 몹시 흐뭇해 보였다. 불을 때 뜨뜻하던 그 방에서는 땀과 피의 냄새가 감돌았다.
엄마가 누운 비단요 옆에 엉거주춤하게 서서 모란은 생각했다. 태어난다는 건 죽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구나.
-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어. 아파, 아프다고."
작약이 울음을 터뜨렸다. 작약은 작은 소동에도 호들갑을 피웠다. 사소한 다툼에도 악을 쓰며 고집을 피웠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이 일으킨 사고에는 무심하게 굴었다.
모란이 수틀을 내려놓았다. 작약을 당겨 바지 자락을 올린 다음 무릎을 확인했다. 바위에 찧은 살갗이 벗겨져 있었다. 상처가 난 곳에 후후 입김을 불어넣어 준 모란이 눈물을 글썽이는 동생을 달래주었다.
"뚝 그치렴. 착하지, 내 동생."
작약이 모란의 품속에서 숨을 가라앉혔다.
- 작약이 곯아떨어진 뒤에도 수련은 손가락을 빨면서 한참 뒤척였다.
모란이 수련 옆에 엉덩이를 뭉개고 앉았다. 동생들의 숨소리가 고르고 평화로웠다. 수실이 바늘구멍을 스치는 소리마저 귀에 거슬릴 만큼 고즈넉한 밤이었다. 다음 땀을 뜨려다 말고 모란이 불현듯 창백해진 얼굴을 들었다.
- 쉬지 못해 둔해진 감각으로도 모란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군가 고갯길을 지나 숲 가장자리를 넘고 있었다.
- 풀잎들이 속삭였고 억새들이 경고성의 휘파람을 불었다. 족제비들은 냄새를 지웠으며 개구리들은 죽은 시늉을 했다. 그런가 하면 뱀들은 다시없을 그 기회를 틈타 새 둥지에서 부화하기 직전이던 알을 훔쳐 먹었다.
- 엄마는 모란에게 신신당부했다.
"어두운 밤, 별들이 잠들어버리면 숲도 너희를 구해줄 수 없을 거야. 모란아, 명심하렴. 손님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 그가 어떤 감언이설로 너희를 구슬린다 해도 절대 넘어가면 안 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니?"
- 모란이 훅 입바람을 불어 등잔불을 껐다. 손님이 그 집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자신과 동생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눈먼 짐승처럼 숲을 떠돌다 사라지도록.
골무를 벗은 모란이 손가락 끝의 감촉에 집중했다. 비단의 결과 실의 방향을 헤아리면서 달빛 한 점 섞이지 않은 어둠 속에서 신중하게 바느질했다. 멈출 수 없었다. 오늘이 지나면 이틀밖에 남지 않으니까. 그때까지 이 자수를 반드시 마무리 지어야 하니까.
- 가시나무 숲을 배회하던 손님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손등을 뒤덮은 녹색 원삼이 불길한 빛을 번뜩였다. 오래전 혼례 때 입었던 옷이었다. 손님의 귀는 햇솜으로 만든 충이(充耳)로 막혀 있고 얼굴은 멱목(幎目)으로 감추어져 있었다. 그 천들의 겉감은 흑색, 안감은 홍색이었다. 습신이 날 듯이 재빠르게 나아갔다. 그의 걸음나비가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이제 와 벼린 톱날 같은 가시를 매단 나무들조차 손님을 저지할 수 없었다. 도깨비바늘이며 도꼬마리, 쇠무릎도 그의 치맛자락에 달라붙지 못했다. 물웅덩이는 함정은커녕 그에게 작은 즐거움일 뿐이었다.
- 모란은 숨도 못 쉬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들켰을까. 우리가 있는 장소를 간파당했을까. 그가 머지않아 이곳으로 들이닥치는 건 아닐까.
- 고개를 넘고 숲을 가로질러 온 손님은 어느새 집 근처에 다다라 있었다.
- 모란이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그러쥐었다. 작약과 수련은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동생들은 모르는 게 나았다.
- 어제의 실패 때문인지 손님은 흥분해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문턱을 넘어 집 안으로 곧바로 쳐들어오지는 못했다. 둔한 혀를 놀려 인간의 언어를 흉내 내보려 했지만 이 역시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노기가 치민 손님이 습신을 신은 발을 치켜들었다. 악수(幄手)가 뜯겨 나가며 새하얀 손이 드러났다. 멱목이 금방이라도 벗겨질 듯 펄럭거렸다.
마룻바닥이 울리고 서까래가 들썩였다. 집을 떠받든 힘이 토대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안 돼. 이러다 무너져 내리겠어. 모란이 새파랗게 질려 문고리에 매달렸다. 벽을 보고 돌아누운 수련이 악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끙끙거렸다.
- 그때 숲 저편에서 새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님이 울분에 찬 몸놀림을 멈추었다. 반신반의한 얼굴로 모란 역시 귀를 곤두세웠다. 또 한 번의 지저귐. 한 마리가 아니었다. 새들이 일제히 우짖고 있었다. 모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 "동생들을 데리고 이 안에 숨어 있는 거야. 사흘간. 어떠니, 할 수 있겠니?"
거기에 수놓아져 있던 무늬는 문이었다. 꽃살로 꾸민 화려한 맞미닫이.
"여기 이 자수 안에요?"
모란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엄마가 고갯짓 했다.
"그래, 거기에는 숲이 펼쳐져 있고 단칸의 기와집이 지어져 있을 거란다. 그래도 피할 수는 없을 거야. 손님은 그곳에 나타날 거거든. 너희가 그 집에 숨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 "왜냐하면 모란아, 그 손님이 바로 나일 거니까."
- 엄마는 뒤이어 깊고 외딸고 고요하다는 그 숲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이슬과 구름과 비, 나무꾼과 사냥꾼에 대해. 노루와 새, 청설모, 가시나무와 개암나무, 흉한 것들이 침입하면 옷자락에 새까맣게 달라붙는다는 도깨비바늘과 도꼬마리, 쇠무릎에 대해.
- 그곳은 엄마가 창조한 세상이었다. 딸들을 지키기 위해 엄마는 숲을 만들었고 거기에 사는 온갖 생명들에게 기원과 사연과 출처를 붙여주었다.
- "장담하건대 내 넋의 일부는 너희를 포기하지 않으려 할 게다. 내가 죽고 이곳에 남겨질 너희를 가련해하고 있거든. 너희를 엄마 없는 아이로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너희와 함께 저승으로 떠나는 게 낫다고 믿고 있거든. 이런 나를 나 역시 ... "
- 생쥐가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 나동그라진 수틀을 세워 비단에 꽂혀 있던 바늘을 잡아 뺀 다음 발톱 끝으로 매듭을 짓고 앞니로 수실을 끊어냈다.
곧이어 비단에 수 놓인 문양들이 생명을 얻었다. 복숭아 꽃잎이 나부끼더니 굳게 닫힌 맞미닫이가 스르르 틈을 벌렸다. 그 사이로 꽃향기를 머금은 훈김이 흘러나왔다.
- 손님은 어느새 앞마당에 들어와 있었다. 달빛 아래 상대를 똑바로 바라본 모란은 알고는 있었으나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비로소 마주해야 했다.
- 그는 천금(天衾)을 찢고 달려왔을 것이다. 칠성(七星板)이며 지(地)요는 갈기갈기 뜯겨 나갔을 것이다. 저런 것이 인간일 리 없었다. 인정이란 걸 품고 있을 리도 만무했다. 멱목 밑에서 안광을 번뜩이는 모습이 머리털이 쭈뼛 곤두설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죽은 자의 시선이었다. 잇새로 뭉그러진 채 새어 나온 숨결이 하얗게 너울거렸다. 거기에는 이미 부패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 겁먹은 수련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엄마가 아냐... 저 사람은 우리 엄마가 아냐..."
모란이 수련을 품에 안고 속삭여주었다.
"괜찮아. 우리는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엄마는 세상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하셨어."
- 모란이 수련의 손을 잡아 자수를 건드리도록 했다. 수련은 집게손가락 끝부터 당겨져 눈 깜짝할 사이에 원래 세상으로 넘어갔다.
수련을 놓쳤다는 걸 알아챈 손님이 광분해 괴성을 지르며 마루로 뛰어올랐다. 박새가 날아와 멱목 아래, 눈이 있는 자리를 쏘았다. 두꺼비가 독을 뿜어 그를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도움은 손님을 멈칫하게 만드는 데 그쳤을 뿐이었다. 손님의 원은 완강했고 이제는 이 집에 깃든 주술조차 그를 저지할 수 없었다.
- 모란이 넋을 잃고 주저앉아 있던 작약을 재촉했다.
"이리로, 서둘러야 해."
작약이 모란을 붙들고 울부짖었다.
"언니는! 언니는 언제 오는데!"
"곧 기다려 줘, 반드시 돌아갈 테니까."
해쓱한 낮에 미소를 머금은 모란이 작약의 손을 다정하게 이끌었다. 작약은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며 사라졌다. 작약마저 가버리고 남은 건 모란 하나뿐이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란이 등을 돌렸을 때 손님은 이미 방 안으로 들이닥친 뒤였다.
- 바닥에 떨어진 수틀을 곁눈질한 모란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엄마, 엄마가 맞아요?"
손님은 말없이 다가올 뿐이었다. 이 순간 그를 움직이는 것은 살의, 그 한 가지뿐이었다.
손님은 모란을 원했다. 맏딸의 목숨을 제 손으로 직접 거둘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를 저승으로 가는 길에 동무로 삼고자 했다. 더는 슬프지 않도록, 자신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도록.
-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까지 동생들을 보살펴달라고,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셨잖아요."
생쥐가 궤짝에서 뛰어올라 손님의 등에 달라붙었다. 녀석을 잡아채 홱 던져버린 손님이 점점 더 거대해졌다. 원삼이 눈부신 광채를 흘리며 나부꼈고 멱목이 흐느적거렸다. 오낭(五囊)이 흔들리면서 쉴 새 없이 달그락거렸다. 악수를 벗어던진 차디찬 손가락이 모란의 목을 금방이라도 비틀어버릴 듯했다.
"엄마, 제발."
모란이 눈물을 삼키며 방 모퉁이에 주저앉았다. 어쩌면 이 편이 나을지도 몰라. 절망 속에서 모란은 사투를 벌이기를 포기했다. 엄마와 함께 갈 수 있다면. 더는 혼자 싸우지 않아도 된다면,
- 그 방의 보료 뒤에는 병풍이 펼쳐져 있었다. 열두 폭 병풍의 첫 번째 폭과 마지막 폭은 몹시 닮았으되 미묘하게 다른 문을 새긴 자수로 장식돼 있었다. 꽃살문과 아자문(亞字門). 하나는 들어가는 문, 또 하나는 나오는 문이었다.
- 살림살이는 풍족했다. 모란은 너그러운 주인이었으며 일꾼들을 넉넉하게 먹이고 잘 쉬게 해주는 것으로 이름나 있었다. 겉보기에는 풍파가 전혀 없는 삶이었다. 마을에 사는 누구나 모란을 존경하고 부러워했다.
그러나 모란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숲에 버려진 누군가를. 명주실을 뽑고 비단을 염색하고 바늘귀에 수실을 꿰어 갖은 기교를 부리며 아름답다 못해 호사스럽기까지 한 자수를 놓으면서도 줄곧 그곳을 떠올렸다. 가시나무 숲을 맴돌며 그가 어떤 모습으로 죽어갔을지. 그리하여 진실로 평온해졌을지.
- 먼 훗날 머리가 하얗게 센 모란은 한 번 더 문을 열 것이었다. 그날 이후 그 숲을 빠져나온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도.
<큰언니>, 장아미
- 창귀란 범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귀신이다. 범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혼령은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범에게 붙잡혀 지내니, 늘 서러워하며 슬픈 노래를 부르고 다른 산 사람들을 같은 운명으로 끌어들인다.
- 창귀의 이야기로 가장 유명한 것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 <관내정사(關內程史)>에 실려 있는 이야기인 <호질(虎叱)>일 것이다. <호질>에서는 범이 개를 먹으면 마치 술을 마신 듯 취하고, 사람을 먹으면 조화를 부리게 된다고 말한다.
- 범이 사람을 처음 잡아먹으면 그 혼령은 굴각(屈閣)이란 창귀가 되어 범의 겨드랑이에 붙는다. 이 창귀가 범을 부엌으로 이끌어 솥을 핥게 하면 그 집의 주인은 문득 배가 고파지고 게걸스레 야참을 찾는다.
- 범이 두 번째로 사람을 잡아먹으면, 이 혼령은 이올(彛兀)이라는 창귀가 되어 범의 광대뼈에 붙는다. 이 창귀는 호랑이를 높은 곳에 데려가 주위를 살피고, 만약 계곡에 함정이나 쇠뇌가 보이면 망가뜨려 호랑이를 보호한다.
- 범이 세 번째로 사람을 잡아먹으면, 이 혼령은 육혼(鬻渾)이라는 창귀가 된다. 이 창귀는 범의 턱에 붙어, 자기가 아는 이들의 이름을 죄다 알려준다. 마치 물귀신처럼. 그가 아는 이들이 전부 범에게 잡아먹혀, 아무도 남지 않을 때까지.
- 또 자꾸 그것들이 보인다.
땅에서 솟은 듯한 시커먼 것들, 사람의 몸에서 버섯처럼 자라난 것들. 불길하고 더러운 악의가 덕지덕지 묻어날 것 같은 그것들이.
- 윤서는 지하철 안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차를 수리 보내놓고 지하철을 타자마자, 수많은 환각이 윤서를 덮쳐왔다. 다른 사람들과 닿을 때마다 그 사람들의 어깨나 뒤통수, 턱과 이마와 광대뼈에 붙어 있는 끈적이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 귀신이나 괴물 같은 '환상'들이.
- "아가씨, 괜찮아?"
눈을 감은 채 비틀거렸는지 웬 아주머니가 윤서의 팔을 잡았다. 윤서는 천천히 실눈을 뜨며 자신을 도우려 한 친절한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일부러 눈의 초점을 흩트렸다. 하지만 눈을 뜨는 그 찰나의 순간에 윤서는 보았다. 더없이 선량해 보이는 초로의 아주머니의 겨드랑이에서 돋아나와 그녀의 목을 둘둘 감고 있는, 창백한 막에 둘러싸인 채 시퍼런 혈관을 비춰 보이는 내장 같은 것을.
"정말 괜찮아요."
"괜찮긴, 이마에 진땀 나는 것 좀 봐."
하지 마, 제발 그만두라고.
- 누군가의 몸이 닿을 때마다 윤서는 그 사람의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온갖 것들의 환상을 보곤 했다. 사람의 살갗 위에 싹을 틔워, 골수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참담하고 끈덕지게 그 사람의 생의 에너지를 빨아먹으며 거대하게 자라나는 것들을. 누군가의 인생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죽음의 조각 같은 것들을.
- 지하철 문이 열렸다. 윤서는 도망치듯 열차에서 내렸다. 전화를 걸자, 윤서의 직장 동료이자 남자친구인 준상이 서둘러 달려왔다.
"그것 봐. 내가 데리러 간다고 했잖아.”
"괜찮은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어휴, 이 식은땀 좀 봐. 넌 몸이 약해서 지하철은 정말 안 되겠다."
- 남자가 한 학기 학점을 날려먹은 것은 청춘의 방황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여자가 한 학기 학점을 날려 먹은 것은 불성실의 증거였다. 사고가 있었다는 변명도, 서류 전형을 통과해야 꺼내볼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 1년간의 공백에 대해 사고 후유증이라고 말하면 건강 상태를 의심받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말하면 꾀병 취급받고, 정신과 치료 때문이라고 진단서를 보여주면 아예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었다. 범죄 피해자라고 말하면 윤서가 뭔가를 잘못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거나, 압박 면접을 하다 못해 아주 맛이 가버린 면접관이 혹시 성폭력 피해자인 거냐며 끈적하고 비릿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 한 학기의 학점과 1년간의 공백에 발목을 잡히지 않으려면, 대학원에 가든가 공무원이나 공사 시험을 봐야 했다.
-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윤서는 계속 병원에 다녔다. 약을 먹어가며 정신을 다잡고 시험 준비에 매진했다. 그해에 원서를 넣을 수 있는 곳은 전부 넣었다. 수험 준비에 오래 매달려온 사람들이 들으면 얄미워할 테지만, 다행히도 졸업하고 1년이 지나지 않아 윤서는 합격했다. 원래 전공이 상경계열인 데다, 한국사나 국어 시험 급수도 1급이었고 영어는 병원에 있을 때도 놓지 않고 들여다본 덕분이었다. 합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서는 2년쯤 된 경차를 중고로 샀다. 지하철을 타기만 하면 수많은 괴물들에 둘러싸이는 상황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뒤에야 윤서는 조금씩 약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 그야말로 기와집만 한 호랑이가, 할머니의 옷고름을 펄럭이며 윤서의 등 뒤로 앞발을 뻗는다. 그보다 더 큰 호랑이가 옅은 지분 냄새를 풍기며 준상 어머니의 등 뒤로 달려든다. 더 늙은 호랑이 한 마리도 윤서를 향해 몸을 날려온다. 호랑이의 섬돌만 한 발톱이 윤서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스친다. 그 발톱이 머리카락 한 올을 톡 하고 끊는 느낌과 함께, 윤서의 머릿속에 옛날 영화처럼 비슷하고 또 다른 수많은 장면이 쏟아져 들어왔다.
- 장독대에 정한수를 떠놓고 올리는 기도, 하늘에 떠 있는 둥근 달을 올려다보며 깊은 숨을 들이마시는 아낙들, 이부자리 밑에 도끼날을 두고 배꼽 위에 소금을 올려 뜸을 뜨는 이들, 백일 동안 불공을 드리고, 돌미륵의 코끝을 정으로 쪼아 물에 타 마시고, 베갯속에 꼬깃꼬깃 접은 부적을 넣고, 이불 속에 말린 고추를 매달며, 깊은 산속 고요한 냇가에서 삼신받이를 한다. 아들, 아들, 아들 하나를 보기 위해서 수많은 열매를 맺는다 하여 밤나무에 빌고, 마디 쑥쑥 자란다고 대나무밭에 빌며, 한 뿌리가 십수 줄기로 뻗어 나온다고 모시 밭에 빌고 또 빌어도 본다. 아이 많이 낳은 남의 집 여자의 속옷을 훔쳐 입고, 아이 낳은 집의 삼신 밥을 얻어먹으려 머리를 숙인다. 개 삼신, 소 삼신의 힘을 빌어본다고 개나 소가 새끼를 낳는 자리에 치마를 깔아놓았다가 그 피가 묻은 옷을 입기도 한다. 자식을 많이 낳아야 한다고. 그러려면 하늘의 천자산이며 산의 산신, 물의 용신, 나중에는 나무나 들판이며 소 외양간에까지 빌고 또 빌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빌어도 누구는 귀하게 태어나고 누구는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는다. 범의 발톱이 할퀴듯이 작은 몸을 찢어발겨 죽이고 죽이고 쓰레기통에 처넣는다. 아들이 아니면 소용없다고.
- 그때 준상 어머니가 길가에 서 있는 낡은 트럭의 문을 열며 윤서의 등을 떠밀었다.
"히익!"
윤서가 운전석에 코를 처박으며 버둥거리는데 준상 어머니가 얼른 트럭에 올라 문을 닫았다. 트럭 뒤에서 호랑이 세 마리가 들썩거리기도 하고, 창문을 발톱으로 긁어대기도 했다. 준상 어머니는 죽을힘을 다해 문을 붙잡고 있었다. 차문은 고장이 난 것인지 온전히 잠기지도 않았다. 윤서가 얼른 핸들을 잡아 시동을 걸었다. 차가 들썩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어떻게 된 거예요? 그 호랑이는 다 뭐냐고요!"
"남의 집 사람이 알 바가 아니에요.”
준상 어머니는 문을 꼭 붙잡은 채 쌀쌀맞게 대답했다. 한밤중의 시골길은 텅 비어 있었고, 윤서는 신호를 무시하며 일단 마구 속도를 올렸다. 산군의 울음소리가 계속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 산그늘을 겨우 벗어나자, 호랑이들의 울음소리가 멀어져 갔다.
- "나는 너를 오늘 처음 보았다만, 네가 우리 준상이랑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준상이가 이 집을 아주 영영 버리기 전에는, 그 누구도 이 집에 새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럴 리 없겠지. 어떤 딸들은 살아남기 위해 집을 버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아들들은 그러지 않아. 지긋지긋하게도 제 뿌리를 찾아 되돌아오지. 그 뿌리라는 게 뭐겠니."
- "그런데도 모자라서 어디서 씨받이까지 데려와서는 뻔히 내 앞에서 남편과 애를 만들게 하고. 그렇게 만든 아이도 딸이라고 또 지우게 하고. 짐승을 접을 붙여도 그렇게는 하지 않을 거야. 나는 그렇게 살았다. 그게 아주 옛날 일인 줄 아니? 아시안게임 하고 서울올림픽 하던 그 시절의 일이었단다."
- "... 감사합니다."
"고마울 것 없어. 준상이가 태어나고서야 나는 이 집 '사람'이 되었지만, 남의 집 귀한 딸이 이 집에 또 끌려 들어와 그 꼴을 당하는 걸 어떻게 보겠니."
<창귀>, 전혜진
- 쾅 하고 대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집 안으로 들어온 정후는 보온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는 마루로 와 소파에 드러누웠다.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서은은 천장을 바라보며 씨근덕거리는 남편을 조심스럽게 쳐다봤다. 이내 그가 썅, 소리를 지르고는 자리에 앉았다.
"시골사람들이 순박하긴 뭐가 순박하고 정이 많긴 개뿔이 많아?"
서은은 그가 갑자기 화를 내는 게 이해가 가지는 않았으나 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으리라 짐작했다.
- 정우는 친구에게서 농사일이 돈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 지인의 지인이 양배추 농사를 시작했는데 백화점고 계약을 했다거나, 영농조합에서 추천한 품종의 배추 종자를 심자 수출 판로가 열렸다는 말도. 도시에서 치킨집을 하는 것보다 농업이 더욱 확실한 미래일 것만 같았다. 처음에야 당연히 고생하겠지만, 작물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어르신들의 말도 그럴듯하게 다가왔다.
- 정우는 인터넷에서 찾은 귀농 학교를 다녔다. 쌈 채소가 돈이 된다는 말에 이도 저도 따지지 않고 선택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을 통해 천룡리 마을 이장 백천두를 소개받았다. 이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정우의 말을 귀담아듣고 그에 맞는 땅과 집을 싼값에 빌려줬다.
"천룡리 전설에 따르면 천년 묵은 지네가 청수산에 살았는데 마을의 안녕을 위해 마을 사람들은 처녀들을 제물로 삼았다 해. 그래서 천룡리야. 그도 그럴 게 우리 마을에 지네가 좀 많긴 해. 그걸 좀 감안해 주셔. 그거 빼면 아주 살기 좋은 마을이지. 사람들도 다 가족 같고."
- 계약하기 전에 한번 땅과 집을 보러 갔었다. 잡초가 무성한 땅은 오래도록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맹지였다. 여름의 해가 길게 늘어졌어도 지척에 높다란 산이 둘러싸고 있어서 땅은 응달졌다. 농사일을 전혀 모르는 서은으로서는 의아했으나 남편이 옆에서 무조건 괜찮다고 하는 바람에 말도 꺼내지 못했을 때였다. 마을에서 몇몇 사람들이 달려왔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들이 이장을 부르더니 부부를 힐끗거리면서 뭐라 숙덕거렸다.
- 촛불이 일렁이자 여자의 얼굴에 어둠이 밀려났다가 드리웠다. 그럴 때마다 여자의 표정이 달라 보였다. 웃다가도 울고 있는 것처럼. 따뜻하다가도 차가운 것처럼. 부드럽다가도 딱딱한 가면처럼.
여전히 서은은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무얼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저 천녀라는 저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름다움을 넘어서 여자에게선 신비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경외감마저 들었다.
천녀의 존재는 마을에서 추앙하는 종교적 의미일까. 주화자가 공경한다면 마을 사람 전체가 공경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천녀님을 기쁜 마음으로 모시면 가내가 두루 평안해지며 하고자 하는 일도 쉽사리 이뤄지지."
- 그곳에서 머문 시간이 찰나 같았다. 계속해서 그 신비하고 아름다운 천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집으로 되돌아오는 발걸음은 추를 단 듯 무거웠고 온 신경은 여전히 외나무다리 너머의 집에 있었다. 오솔길에서 건네는 노인의 말이 눅눅한 바람에 실려 흩어졌다.
맑았던 하늘은 회색빛 구름으로 뒤덮여 사위는 어둑해졌고 바람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더는 산새가 지저귀지 않고 잠자리마저 날아오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하늘에서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노인이 뒤돌아 서은에게 말했다.
"믿으라고는 하지 않겠으나 부정은 하지 말게. 곧 자네도 알게 될 거야."
"무엇을요?"
"우리의 믿음을."
- 꿰뚫고 짓씹었다. 동시에 붉은 피가 사방에 튀었다.
-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불어난 계곡 외나무다리 앞에 우비를 입은 마을 여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흐느적거리는 찔레 덤불 밑에 숨었던 서은은 남편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달려가 바람에 흔들리는 대문을 붙들어 굳게 닫았다. 이내 품에 가지고 있던 커다란 자물쇠를 꺼내어 걸쇠가 움직이지 못하게 걸고 잠갔다. 두려움에 손이 벌벌 떨렸으나 모든 것은 연습했던 대로였다. 서은은 맞은편에 선 여자들을 향해 다리를 건넜다.
"남편이 빠져나오면 어떡하죠?"
"이건 그놈을 막는 게 아니야."
- 그들은 나무를 힘껏 들어 올려 계곡으로 패대기쳤다. 삐뚤어진 나무다리가 데구루루 굴러 물속에 잠겼다.
'마을 전설에 대해 들었나? 천룡 이야기 말일세.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마을의 평안을 위해 천룡에게 마을 처녀들을 하나씩 제물로 바쳤다네. 그러던 중 제물로 바쳐진 한 처녀가 산신에게 자신을 구해달라고 빌었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장이 해주었던 이야기가 기억났다. 뒷이야기까지 들었던가. 그때, 불투명한 시야로 집 안에서 나오는 무언가가 보였다. 천녀였다. 비에 젖은 한복 밑으로 드러난 거대한 몸체가 끝도 없이 현관문을 지나쳤다.
- "산신은 두 개의 주머니를 주었네. 처녀는 그걸 하나씩 던져서 도망쳤어."
주화자는 이어 말했다.
"주머니 하나를 던지자 가시덤불이 천룡을 막았지."
서은은 거대한 지네 형상의 천녀가 찔레 울타리를 연방 넘으려다 가시에 찔려 괴로운 비명을 내지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또 하나를 던지자 깊은 물이 천룡을 가로막았다네."
천녀는 몇 번의 시도 끝에 기어이 기어 나와 저편에서 떠내려가는 다리를 노려보았다. 꿈틀거리는 몸체가 불어난 물에 닿길 거부하는 듯 수많은 다리가 제자리걸음을 했다.
- 분노하는 천녀 앞에서 모두가 진창에 무릎을 꿇었다.
"그 처녀는 살아 이 마을을 떠났으나 마을에 남은 이들은 추위와 가난, 질병에 허덕여야만 했었다네. 떠난 이 말고, 남은 이들은 누가 구하겠나. 선과 악, 죄와 벌이 가난과 질병에 고통받는 이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일단 살기로 했어. 그렇게 우리는 다시 천룡, 아니 저 천녀와의 삶을 택했다네. 사람 목숨 하나로 나머지가 4년을 편히 산다는 게 그리 나쁘지는 않지 않은가. 적당한 거리와 추앙만 있다면 우리는 평생토록 행복할 수 있다네."
<매혹>, 배명은
- "이대리 오면 나한테 좀 알려 줘. 이 대리는 맨날 찾을 때마다 어디 간 거야? 돌아오면 한마디 해야겠어. 조직 생활에 기본이 안 되어 있기는..."
- 선정 씨는 나와 동갑으로, 나보다 11개월 먼저 입사한 계약직 직원이었다. 12개월 이상 일하면 그 이후로는 정규직을 시켜줘야 하니까 관행처럼 써먹는 꼼수였다. 선정 씨가 출입문 바로 옆자리, 나는 그런 선정 씨 옆자리에 앉았다. 선정 씨가 한 주 동안 내게 인수인계를 해주고 나가면 내가 그의 일을 이어받아야 했다.
- 선정 씨는 반갑다는 말도 없이 짐 정리를 도와주고는 업무에 필요한 프로그램들을 설명했다. 계약직으로 이 회사 저 회사 떠돌아다닌 시간이 길었는지 그런 것에 능숙했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당이 떨어진다 싶을 때 먹으려고 챙겨 다니는 과자를 가방에서 꺼내 건넸지만, 선정 씨는 짧게 괜찮다고만 말하고 받지 않았다. 그저 선의로 건넨 것이었을 뿐, 나 역시 일주일 후면 헤어질 사람과 굳이 친해질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컴퓨터에 사내 인트라넷을 설치하자마자 선정 씨는 능숙하게 '이 대리'라는 사람의 계정을 초기화하더니 기본계정으로 로그인을 해 이 대리의 퇴사 신청을 했다.
- 김대리, 최 과장, 정 팀장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박 차장은 계속 제자리에 있었다. 나와 선정 씨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선정 씨가 잘 알려줬어요?"
김 대리가 친한 척 말을 붙였다. 몇 년째 신입을 뽑지 않고 막내 사원급이 할 잡무를 11개월짜리 계약직 여직원에게 시키고 있는 사무실에서는, 정규직 중 김 대리가 제일 막내였다. 그리고 그 정규직은 다 남자였다. 일이 바빠서 여직원의 출산휴가를 기다려줄 여유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출산휴가를 마치고 다시 일하려는 소위 '경력 단절' 여직원은 아이가 자주 아프다거나, 아이 맡아줄 사람을 찾느라 동동거리다가 곧 그만둘 게 뻔해서 싫다고 했다.
- "사내 인트라넷 접속해 볼래요?"
김 대리의 손이 어깨를 타고 내려가 마우스를 쥔 오른손 위에 얹혔다. 김 대리의 손이 조용히 내 손에 깍지를 꼈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아무도 못 본 걸까. 사무실을 둘러봤다. 다들 자기 할 일을 하느라 바쁜지 이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김 대리를 불쾌하게 해선 안 된다. 김 대리는 나를 괴롭힐 수 있지만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뭐라고 해야 김 대리가 추행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고 주의를 끌 수 있을까. 같은 계약직인 선정 씨를 간절하게 쳐다봤다.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 다 봤는데, 선정 씨는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이 일부러 더 세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모니터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 김대리의 책상 위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아빠 사랑해요'라고 쓰여 있는, 종이로 접은 카네이션과 김 대리와 아내, 그리고 두 아이가 화목하게 웃고 있는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다. 아이들은 김 대리를 꼭 닮았다. 액자에 넣은 천 원짜리 지폐에는 어린아이의 서툰 필체로 '내가 돈 줄 테니까 아빠 회사 가지 마'라고 적혀 있었다.
목 뒤, 귓가에서 김 대리의 숨결이 느껴졌다.
- 인트라넷에 로그인하자 더는 참견할 거리가 없었는지 김 대리가 선정 씨에게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경비 정산은 오늘까지 맞죠?"
김 대리는 뻔한 걸 물으면서 선정 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숨을 삼키며 선정 씨를 관찰했다. 이런 사무실에서 오래 일했으니까 뭔가 노하우가 있겠지. 선정 씨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하철에 앉아 갈 때 옆자리 남성이 다리를 쩍 벌리면 나도 다리를 벌려서 부러 무릎을 부딪치며 주의를 주는 행동과 비슷했다. 선정 씨가 그러거나 말거나 김 대리는 선정 씨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김 대리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하는 거다. 그래도 되니까. 선정 씨가 내 쪽을 향해 눈짓한다. 거 봐요, 소용없다니까,라고 말하는 듯했다.
- 지금 사는 고시원의 공동 주방은 좁고 환기도 안 되어서라면 끓이는 것 외에 본격적으로 요리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해 먹는 것보다 삼각김밥이나 사 먹는 게 돈이 적게 드는 편이었다. 그런 사정상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우면 때웠지 반찬을 싸 올 수는 없었다.
= "다수결로 할까? 반대하는 사람 손들어 봐."
반대하면 손을 들라니. 약았다고 생각했다. 대놓고 정팀장에게 찍히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럴 때 손을 드는 용기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 쌀 씻고 밥 안치는 건 선정 씨와 나의 잡무가 되겠지. 잘못하면 탕비실에 가스버너, 도마, 칼 등등을 갖다 두고 반찬과 국 따위를 만들라고 할지도 모른다. 부디, 제발, 밥에서 끝나기를.
그 자리에서 손을 든 사람은 손끝이 귀에 닿도록 살짝 손가락을 치켜든 선정 씨밖에 없었다.
"그럼 다음 주부터 할까? 밥솥은 내가 쏜다."
- 점심을 다 먹은 직원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사 먹으러 나갔고 나와 선정 씨는 회의실을 정리했다. 남은 찌개국물을 변기에 버리고 건더기는 쓰레기통에 넣고 있는데 선정 씨가 말을 걸었다. 입사 이래 처음으로 나눈 사적인 대화였다.
"집에서 회사까지 몇 시간 걸려요? 많이 멀어요?"
"한 시간 반 정도요."
"이사할 생각 없어요?"
"있긴 한데 예산에 맞는 집이 있을지..."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올래요? 회사까지 삼십 분 정도 걸려요. 예산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계약 기간 끝나는 대로 나갈 거라서 새 세입자 구하고 있거든요."
- 입사 후 맞은 첫 주말에 선정 씨가 살고 있는 집을 보러 갔다. 집 뒤편으로 산을 끼고 있는 빌라 1층이었다. 집 안에 부엌과 화장실과 욕실이 있었다. 그런데도 월세가 고시원보다 저렴했다. 뒷산에 나무가 빽빽해서 음침해 보인다는 것도, 방 전체가 음침하기 짝이 없는 고시원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는 풍경이었다.
- "여기가 재개발 지역이라 전에 살던 주민들이 산에 버리고 간 개들이 많아요. 야생에서 살다 보니 걔네들도 어느새 들개가 되더라고요. 배고프면 사람을 공격하니까 종종 먹이를 챙겨주세요. 그럼 괜찮아요."
선정 씨는 말했다. 우리가 얘기하는 동안에도 뒷산 쪽에서 멀리 메아리처럼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다. 산 밑 빌라라고 해서 산모기 정도를 감수하고 있던 내게 들개는 너무 예상 밖이었지만 그 덕분에 월세가 싼 것이라면 감당할 만도 했다. 그날 바로 부동산에 들러서 계약서를 작성했다.
- 오늘 아침,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서려는데, 언제 넣어둔 것인지 주머니 안쪽에 엄지손가락이 들어 있었다. 선정 씨의 인수인계였다. 퇴근할 때 김 대리의 엄지손가락을 출입문에 찍어야 한다. 경찰에 신고했다가는 범인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적당한 때에 김 대리의 퇴사 처리를 마치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자. 이 회사 안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아무도 계약직 여직원이 정규직 남자 직원을 죽였다고는 짐작하지 못할 테니까.
- 새로 이사한 집 화장실에는 쓰다 남은 혈흔 제거제가 있었다. 처음엔 생리하는 날 옷이나 이불에 핏자국이 남으면 지우느라 사용했겠지 싶었다. 곧이어 옷장 안의 시체가 생각났다. 옷장 안 시체는 백골이었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본 미국의 바디팜(Body-farm)이 떠올랐다. 사람이 죽어 부패하는 과정을 연구하는 시설로, 시체 부패에는 신선기, 팽창기, 붕괴기, 붕괴후기, 골격기 총 다섯 단계가 있다고 설명하는 영상이었다. 그중 백골 사체는 자연 부패기 중에서도 마지막 단계, 골격기에 해당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빨리 백골화가 진행되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뒷산에서 들개들이 하울링을 했다. 선정 씨가 마지막으로 들개에게 먹이를 줘야 한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들개들은 무얼 먹고 자라는 걸까. 사람 고기 같은 것도 잘 먹을 수 있을까. 엄지를 잘라낸 시체를 개들에게 던져 주면, 개들이 뼈만 남기고 살을 발라 먹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백골 사체를 붙박이장 안에 두고 애써 잠이 들었다. 귀신보다 무서운 건 사람이고 사람보다 무서운 건 돈이었다. 지금 내가 가진 돈으로는 이곳을 나가봐야 고시원이었고, 지근거리에 예산에 맞는, 출퇴근이 가능한 곳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었다. 묵묵히 잠을 청했다.
- "역시 나이가 드니까 뜨끈한 국물 없이는 밥이 목구멍에서 안 내려가."
갓 지은 따듯한 밥을 먹던 정팀장이 국 타령을 했다.
"미역국이나 콩나물국, 계란국 정도는 간단하게 끓일 수 있지 않나? 집에서 국 끓이는 김에 물 좀 더 타서 보온병에 담아 오면 될 것 같은데."
정 팀장은 나를 보고 있었다. 국 값을 따로 챙겨줄 것도 아니면서, 한 번 밥을 짓기 시작하니까 국도 끓이라고 했다. 더 있으면 김치랑 밑반찬도 가져오라고 하겠지. 나 대신 남자 직원을 뽑았어도 밥과 국을 책임지라고 했을까..
- 퇴근 후 집 부엌을 뒤졌다. 요리라는 걸 한 번도 하지 않은 듯 깨끗했다. 수저나 그릇도 없었다. 혼자 사는 집에 어울리지 않는 곰탕용 큰 솥과 한때 홈쇼핑에서 대박이 났던 장미무늬의 부엌칼만 있었다. 무엇이든 썰고 베고 자를 수 있다는 그 장미칼.
- "국이 너무 싱거운데?"
다음 날, 미역국 라면에서 면발 없이 국물만 끓인 뒤 맹물을 타서 가져갔더니 정 팀장이 투정을 부렸다.
- 그다음 날에는 붙박이장에서 백골을 꺼내 뚝뚝 부러뜨려 사골국을 끓였다. 큰돈 들이지 않고 깊고 진한 맛의 국물을 내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람 뼈도 뼈라고 국물이 뽀얗고 진하고 고소하게 우러나왔다. 첫술을 뜨자마자 정팀장이 키야 하고 감탄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이야 이제 시집가도 되겠다."
그 말을 지금 칭찬이라고 하는 건가. 코웃음이 났다.
- 국물을 우려내어 부드러워진 뼈는 곱게 빻아 뒷산에 비료로 뿌렸다. 뼈 비료를 먹고 자란 나무들은 울창해져서 햇빛을 가리고 뒷산은 더 음침해지겠지. 계속해서 국을 끓이려면 뼈가 더 필요했다. 오래 우려 말라버린 뼈보다는 신선한 골수에서 국물이 더 잘 나올 것 같았다. 꼬리곰탕을 끓이고 싶은데 백골 사체에는 꼬리가 없으니 척추로 대신해야 했다. 사골을 육수로 쓰면 웬만한 국은 다 맛있어졌다.
- 선정 씨가 먹이를 준 이후로 아무도 챙겨주지 않았는지 굶주린 들개들이 뒷산에서 내려와 밤길을 어슬렁거렸다. 퇴근길에 송아지만 한 개 서너 마리의 그림자와 마주치기도 했다. 등 뒤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 "내가 애한테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그런데 애는 사춘기가 와서 아빠가 자기한테 해준 거 뭐가 있냐고 하고 와이프는 옆에서 애를 혼내기는커녕 같이 거들고 있으면, 얼마나 외로워지는지 알아?"
아니요.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러나 나는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그러니까 집에 가면 아버지 잘 챙겨드려."
- 괜히 아버지 핑계 대면서 자기를 챙겨 달라고 하는 뜻인 걸 너무 잘 안다. 그러나 순진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 그대로 더 이상의 함의 없이 알아들은 척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척, 남은 점심시간에 편의점에 들러 산 초콜릿 바에 '화이팅!'이라고 귀엽게 적은 핑크색 포스트잇을 붙여서 박 차장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윗사람이 징징댔는데 아무것도 안 하면 센스 없다고 하니까. 이것이 오늘의 미끼인 줄도 모르고 박 차장은 화장실에 들어갔다. 첫사랑하고 결혼했으면 내 아빠 뻘인 박 차장은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고 아랫도리를 만져보며 '나 정도면 아직 괜찮지'라고 자위하며 로맨스를 꿈꿀 것이다. 사무실 분위기를 위해 웃고 있는 내 미소에 화답하면서. 내 친절을 호감으로 착각하면서.
- 점심시간을 꽉 채워 쉰 최 과장과 오늘따라 비누로 손을 씻은 박 차장이 사무실로 돌아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경찰들이 찾아왔다. 이 대리, 김 대리, 이 과장, 정 팀장의 실종을 조사 중이라고 했다. 멀쩡한 성인 남성이 실종되자 처음에는 단순 가출로 여겼던 경찰은 한 회사에서 네 명이 연달아 사라지자 (참 빨리도) 수사를 시작했다. 경찰은 그 네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다 말해 달라고 했다. 나는 막내다운, 순진한 미소를 지은 채 계약직 여직원이라 많은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자리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는 것도 별로 없다고만 했다. 최 과장은 머지않아 떠날 회사에서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었는지 나처럼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 "짐승한테 잘해줘서 뭐 해. 차라리 아프리카 애들 결연 맺는 게 낫지."
나는 이런 류의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아프리카 애들에게 후원하면 왜 외국 애들 도와주냐고, 국내에도 불쌍한 애들 많은데 그 애들이나 도우라고 하면서 자기는 자식들 키우는데 돈 많이 든다고 아무 데도 기부하지 않는 사람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박 차장이 굳이 다시 말을 보탰다.
"봉사활동 같은 거 할 시간에 코딩이라도 배워서 정규직으로 이직해야지. 내가 딸 같아서 하는 말이야."
조카에서 딸로 승진했는데 기분이 별로였다. 코딩은 이미 익힌 기술이었다. 코딩도 외국어도 동영상 편집도. 그런데 다들 계약직으로 뽑았다. 이 회사처럼. 차장의 입을 닥치게 하고 싶다. 불판이 비어 가고 술병이 쌓여 갔다. 나는 물냉면, 박 차장은 된장찌개를 먹었다. 아직 배가 고팠다. 무언가가 허했다.
- "저희 집에 가서 라면 드실래요?"
"나느은, 가정이, 이써어..."
"뭐래요. 삼겹살이 느끼하니까 매운 거 먹으려는 건데요."
지금 박 차장은 오늘 단둘이 했던 점심식사부터 성숙한 어른으로서 내게 건넸던 조언들과 내가 핑크색 포스트잇을 붙여 준 초코바와 거울에 비쳤던 아직 굵은 주름이 지지 않은 자기 얼굴을 슬로비디오로 되감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되뇌고 있을 것이다. 나 정도면 아직 괜찮지, 하고.
- 선정 씨가 앉았던 의자에 누런 개털이 붙어 있었다. 바닥에는 아주 조그만 핏자국이 있었다. 선정 씨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도 선정 씨처럼 다음에 들어오는 계약직 직원에게 집을 물려주고 인수인계를 해줘야겠지. 뒷산의 개들에게 먹이 주는 걸 잊지 말라고. 나는 출입문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돌아오는 직원이 있는지 관찰했다.
- 하는 일이 없어도 시간은 흘렀다. 나에게 일을 던져주는 정규직 직원이 없어도 사부작사부작 내가 할 일을 했다. 혼자 하는 일은 금방 끝났다. 이른 퇴근을 했다. 사무실 바깥은 환했다. 햇살 아래를 걸었다. 통유리로 된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저녁은 국과 밥 말고 다른 걸 먹어볼까. 카페에서 조각 케이크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카페 점원이 날 보고 싱긋 웃은 것 같다. 내가 어제 뭘 하고 오늘 뭘 먹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 다음 날 최 과장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지문을 찍고 출근했다. 웃는 얼굴이 아닌 걸 보니 어제 면접에서 떨어졌나 보다. 내가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했는데도 대꾸하지 않았다. 남은 혈흔제거제의 양을 가늠해 봤다. 건장한 성인 남성 하나쯤은 처리할 수 있는 양이었다. 선정 씨는 머릿수를 계산해서 혈흔제거제를 남겨두었을까. 뒷산의 개들은 모두 몇 마리일까. 어제 우리 집에 들어왔던 개가 집 밖으로 나간 발자국은 없었다. 퇴근 후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개들이 꼬리를 흔들며 맞아줄까. 아니면 경계하면서 컹컹 짖을까. 아니면 내가 먹이를 줄 때까지 얌전히 꼬리를 말고 있을까.
- 한 계약직 여직원이 씩씩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선정 씨가 내게 해줬듯이 문 근처의 내 자리를 대체할 계약직 여직원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하고, 집을 넘겨주고, 뒷산 들개들의 먹이를 부탁하고 떠나야 한다.
- 붙박이장 속에서 하얗게 마른 백골들을 보았다. 마지막 퇴근하는 길이었다.
<너의 자리>, 한켠
- 선생님. 선생님도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세요?
- 그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제게 미쳤냐고 물었어요. 정확히는 질문이 아니었죠. 어머니는 제가 미쳤다고 확신한 것 같았어요. 결혼 날짜까지 잡은 회계사 남자친구와 헤어진다는 게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인 걸까요? 네? 왜 그랬냐고요? 글쎄요. 저는 역으로 이렇게 묻고 싶네요. 선생님은 걔를 잘 아시나요? 제 전 남자친구 말이에요. 사실 잘 모르시죠?
- 그러니 묻지 마세요. 어차피 말해줘도 모를 거예요. 지방에 있는 민속학 연구소에서 세 달간 대체 인력으로 일하겠다고 했을 때도 대학원 동기들은 제게 미쳤냐고 반문했어요. 저와 무관한 전공, 무관한 학교에 있는 연구소였으니까요. 연구소에서 일하는 석 달 동안 외진 곳에 있는 고택에서 지내기로 했을 때는 지영이도 "너 미쳤냐!"라며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참, 지영이는 제 절친이에요.
-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열심히 항변했어요. 미치지 않았다고,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고 말이에요.
-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전 미치지 않았어요. 그저 귀신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들은 것뿐이에요.
- ○○시에 있을 때였어요. 한국 전통문화의 수도라는 ○○시 있잖아요. ○○시에 있는 300년 된 고택에서, 그 집에서 귀신을 봤어요.
- 저는 ○○시에 있는 유일한 대학에서, 정확히는 ○○대학에 있는 민속학 연구소에서 임시 직원으로 일했어요. 텅 빈 연구소를 지켜주는 대체 인력이었죠. 전임교원인 연구소 장이랑 계약직인 연구교수, 그리고 행정 업무를 도맡는 대학원생 조교까지 출국했거든요. 국제학술 행사에 참석한다는데... 석 달이나 진행되는 학술 행사 같은 건 없거든요. 학술 프로젝트라면 모를까 학술 행사는 며칠이면 끝나니까요.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굳이 제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면접관들의 의구심을 잠재우려고 노력했죠. 타지에서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절대 중간에 그만두지 않겠다고 말이에요.
- 단기 임대가 없다는데 어쩌겠어요. 안전한 곳으로 보여 달라고 하니까 부동산 사장이 손사래를 치더라고요. 제가 만족할 만한 집을 없을 거라고,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하겠대요. 이 동네 매물은 1학기 시작 전에, 그러니까 주로 겨울에 나온다고, 여름에 나오는 집들은 세입자가 중간에 나간 거라서 문제가 많다고요. 때가 안 맞는 걸 어쩌겠냐면서 꼭 구해야 하는 거면 기준을 좀 낮추래요. 집은 안전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걸 포기한 집이 어떻게 집이냐고요.
- 여섯 마당에 열두 문으로 이뤄진 아흔아홉 칸 저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더니,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그때 제가 무슨 생각을 한 줄 아세요? 여기다 싶었어요. 언제 이런 기회를 얻겠어요. 고택에서 살아보는 거요. 이곳에서 지낸 석 달을 평생 기억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죠.
- 생각해 보면... 그때 예감이 맞았던 거예요.
- 몇 분 뒤에 검은 세단을 탄 연구소장이 고택으로 왔어요. 제게 집을 안내해 주기로 했거든요. 보안카드로 솟을대문을 열더군요. 아, 솟을대문에는 도어락이 설치되어 있었어요. 검고 동그란 도어락이요. 이 시국에 노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리 오너라, 하고 열 수는 없잖아요?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연구소장이 자세한 상황을 알려주더라고요. 원래는 자기가 평일마다 머물렀대요. 친척들이 관리를 떠맡겨서요. 집을 비워두면 폐가가 된다고,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만 집이 되는 거라나?
그러니까... 그분은 면접 때 연구소 대체 인력만 구했던 게 아니었어요. 자기 대신 고택을 관리할 사람도 찾았던 거죠.
- 연구소장도 안전을 중요시하는 분이었어요. 문이 총 열두 개 있는데 중문에도 도어락을 달아놨더라고요. 그냥 도어락도 아니고, 매번 디지털 숫자가 다르게 형성되는 제품 있잖아요. 그건 도어락에 남은 지문을 확인해도 비밀번호를 유추해 낼 수 없거든요. 저는 그곳이 더더욱 마음에 들었어요. 그때 제게 안전만큼 중요한 것도 없었거든요. 곳곳에 CCTV를 달아놔서 앱에 로그인만 하면 내부는 물론 외부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에 무조건 여기서 지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대학 주변 원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죠.
- 예전에... 예전에 제 친구가요.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거든요. 현관문을 열고 자취방으로 들어가는데 누가 휙 하고 따라 들어오더래요. 문을 막고 있으니 밖으로 도망칠 수도, 몇 평도 안 되는 원룸 안으로 도망칠 수도 없잖아요. 몸은 냉동창고에 놓인 것처럼 덜덜 떨리고, 마음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대요. 그 사람은 그냥 서 있었어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요. 말을 걸지도 다가오지도 않았지만, 친구는 매분 매초 지옥을 겪었어요. 밤새도록요. 아침이 되니까 제 발로 나가더래요. 그때 제가 무슨 생각을 한 줄 아세요? 운이 좋았구나, 정말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길을 가다가, 집에 들어가다가 그런 사람을 만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무사히 풀려나는 경우는 거의 없죠.
- 그래서 그곳을 거절할 수 없었어요. CCTV로 사방을 수시로 확인할 수 있고, 문 앞에서 움직임이 감지되면 자동 녹화도 된대요. 혹시라도 문이 열리면 핸드폰에 알림도 오고요. 누군가가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해도 알림이 온다고 하더라고요. 앱이나 긴급 벨로 신고도 할 수 있고요. 어떻게든 이 기회를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가격도 나쁘지 않았죠. 한 달에 50이었거든요. 그것도 관리비까지 포함해서요.
- 여기서 지내고 싶다고 하니까 언제 이사 올 거냐고 묻더라고요. 빨리 내려와도 된다고, 자기가 쓰는 사랑채 누마루 방 빼고는 다 비어 있대요. 그래서 대뜸 오늘부터 지내고 싶다고 그랬어요. 연구소장이 알겠다면서 깔깔 웃더라고요. 저는 안채 안방을 골랐어요. 가장 안전해 보였거든요. 깊숙한 곳에 있으니까요.
- 툇마루에 걸터앉아 지영에게 전화를 걸고는 주소를 알려줄 테니 택배로 짐을 보내달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미쳤냐며 소리를 지르더니 제가 여기 상황을 설명하니까 혀를 쯧쯧 차면서 알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이런 말도 해줬어요. 하긴 그 미친 새끼한테서 벗어나려면 너도 미친년이 되어야지, 라고요.
- 가기 전에 전화로 그러더라고요. 사랑채 옆에 서고가 있는데, 이 집 아들이 책을 가지러 오기도 한다고요. 혹시 누가 들어와 서고로 가면 책 가지러 온 거니까 걱정하지 말래요. 제가 불안해한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해준 거겠죠? 그 뒤로는 고택에서 혼자 지냈어요. 편하더라고요. 몸도 마음도요. 안전하고 온전한 나의 집이잖아요.
- 마음이 편안해지니 칩을 둘러보고 싶었어요. 사랑채 쪽은 가지 않았어요. 거기는 다른 사람의 공간이잖아요. 안채 뒤에 담이 있는데 그 뒤에도 건물이 있거든요. 그 집에서 유일하게 옛 모습으로 남은 곳이에요. 별당채인 줄 알았는데, 반빗간이라고 하더라고요. 궁궐로 따지면 소주방이라고 할까요. 그때는 그곳을 자주 찾았어요. 그곳에 있으면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거든요. 앉아서 넋을 놓곤 했죠.
나중에 사고만 치지 않았어도 자주 머물렀을 거예요. 부엌 선반에 머리를 부딪쳐서, 선반 위에 놓여 있던 쌀 항아리가 깨졌거든요. 뭐라더라... 아, 시렁. 시렁이라고 하더라고요. 시렁 위에 엄청 오래된 항아리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떨어졌어요. 항아리는 산산조각 났지, 누런 쌀은 알알이 쏟아졌지, 큰일 났다 싶었죠. 연구소장에게 연락하니까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면서 잘 치워서 버리면 된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 그래도 미안하잖아요. 함부로 망가뜨린 거니까요. 그래서 학교 근처에 있는 상점에 가서 작은 항아리를 사 왔어요. 국밥집 가면 흔히 보이는, 테이블 위에 놓인 김치 담는 항아리 같은 걸로요. 깨진 항아리에 묵은쌀이 담겨 있던 게 생각나서 쌀도 넣었어요. 시렁 위에 항아리를 얹으면서 보니까 다른 항아리들 위에도 먼지가 쌓였더라고요. 겸사겸사 반빗간 청소를 했어요.
- 두 달 정도는 정말 평화로웠어요. 시간이 가는 게 아쉬울 정도로요. 그런데 일상이라는 게 시렁 위에 놓인 항아리보다 약해서 아주 작은 일 하나로도 쉽게 깨질 수 있더라고요.
- 그럼 둘 중 하나잖아요. 센서가 고장 나서 누군가 왔는데도 녹화되지 않았거나, 알림 자체가 잘못 온 거거나. 이거나 저거나 다 불안하더라고요.
-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제가 여기 있는 걸 아는 사람 이지영이 한 명뿐이라는 거였어요. 대학원 사람들도 제가 어느 학교 무슨 연구소에 있는지는 몰랐거든요. 자세히는 말을 안 해줬어요. 전공과 무관한 분야를 연구하는 곳이라고만 했죠. 민속학 연구소는 전국에 몇 개 없어서 쉽게 저를 찾아낼 수 있거든요. 누군가 학과 사무실에 전화해서 박사생인 누구누구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하거나 요즘 뭘 하고 있는지 물어보면, 대학원생 조교들이 별생각 없이 답해줄 수도 있잖아요. 그게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도 있다는 걸, 사람들은 잘 모르더라고요.
- 방학에는 연구소도 단축 근무를 해요. 오후 세시에 공식 업무가 끝나서 보통은 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갔죠. 저는 연구소장이 빌려준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출퇴근했어요. 하루는 전임 연구소장이라는 사람이 와서 아주 당당하게 일을 시키더라고요. 연구실에 있는 복합기로 책을 스캔하라고요. 어느 과 교수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직이 바뀐 거면 제가 일하는 연구소와도 무관한 사람이잖아요. 금요일이었는데 다음 날 아침까지 메일로 스캔본을 보내라면서 책을 툭 던져주고 가버리는 거 있죠. 토요일 출근을 할 수는 없으니 그날 다 끝내고 가야 했죠. 백중일인지 중원절인지, 죽은 이의 혼을 불러 대접하는 민속 명절에 관한 책이었는데 분량이 2000페이지나 되었어요. 어쩌겠어요. 시키니 했죠.
- 그와 동시에 시야가 검게 물들었어요. 제가 정신을 잃었거든요.
- 눈을 뜨니까 제 방 안이더라고요. 상반신을 일으키니 살짝 열린 문 사이로 그 사람이 대청마루에 앉아서 책을 읽는 게 보였어요. 태연하게 말이에요.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했어요. 시침이 2와 3 사이에 있더군요. 정신을 몇 시간 정도 놓았나 봐요. 작은 탁자 위에 제 가방과 핸드폰이 놓여 있기에 전화를 집어 들었어요. 알림은 오지 않았더군요. 그것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거예요.
- 안도의 한숨을 토해낸 뒤, 일어나서 문을 드르륵 열었어요. 그 사람이 고개를 들어 저를 보더니 책을 한 권 주더라고요. 읽어보래요. 책은 무슨 책이에요. 제가 책이나 읽게 생겼어요?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다 막혔죠. 근데 그 사람 눈빛이...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걸 꼭 읽어야 한다는 외침이 머릿속에서 울렸어요. 어느 순간 제 손에 책이 들려 있더라고요. 홀린 듯 책을 읽었죠. <기문총화(記聞叢話)>라고 들어보셨어요? 나중에 찾아보니까 조선 후기에 편찬된 설화집이더라고요. 그가 보라고 했던 부분이, 그 내용이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요.
- 원주에 사는 한 인삼 장수의 어머니 이야기였어요. 그녀는 스무 살에 아들을 낳고 과부가 되었는데 어느 날 남귀(男鬼)가 찾아와 자기가 이 집 가장이라고 했대요. 그러고는 그녀를 강간했죠. 그녀는 귀신을 막을 수 없었어요. 고통스러울 뿐이었죠. 귀신은 매일 밤 찾아와 그녀를 범하고는 금은보화를 남기면서 떠났어요. 여기까지 읽자 불쾌하더라고요. 이걸 왜 읽으라는 건지, 그 저의가 의심스러웠어요. 제 속내라도 읽었는지 그 사람이 끝까지 보라고, 그럼 자연스레 알게 될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마저 읽었죠...
- 하루는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뭐냐고 남귀에게 물었대요. 귀신은 노란색이라고 답했어요. 그래서 그녀는 집 안을 온통 노랗게 칠했어요. 귀신을 쫓으려고요. 그러자 더는 귀신도 그녀의 집을 침범할 수 없었어요.
- 그때 제 머릿속에 있는 어떤 끈이 툭 끊어지는 것 같았어요. 가슴이 두방망이질하며 쿵쿵 뛰고, 뜨거운 피가 온몸으로 퍼졌어요. 공포 영화 보신 적 있으세요? 무서운 괴물을 피해서 도망만 치던 여자주인공이 어느 순간 도끼를 들고 괴물을 공격하잖아요. 극한의 공포에 사로잡히면 두려움이 다른 감정이 되거든요. 분노가 되는 거죠.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더는 걔가 무섭지 않았어요.
- 그런데 있잖아요...
그 책 말이에요. 국역본이 아니었어요. 한문으로 적힌 책이었죠. 저는 한문을 전혀 몰라요. 근데 그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요?
- 그날 어떤 일이 있었냐고요?
저는 현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숨도 쉬지 못했어요. 걔가 또 찾아왔거든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신고도 못 하겠더라고요. 연애할 때 찍은 사진 몇 장만 보여줘도, 사랑싸움인 줄 알고 가버리거든요. 다들 걔 말만 믿었어요. 사랑싸움이라니.
- 쾅쾅. 문 열어! 안에 있는 거 알아! 문 안 열어?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왜! 시발, 왜 사과를 안 받아주냐고! 쾅쾅.
-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어요. 손바닥으로 귀를 틀어막았죠.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공포에 휩싸이면 시간 감각도 없어지거든요.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 아세요?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릴 때 쓰는 말이거든요. 무서울 때도 비슷하더라고요.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얼마나 바라게 되는지, 그 바람이 얼마나 매정하게 저를 배신하는지 선생님은 잘 모르실 거예요.
-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멎더니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뭐라고 했냐고요? 모르겠어요. 저는 귀를 막고 있었잖아요. 잘 들리지 않았어요. 손을 떼고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볼까 했지만, 문고리가 돌아가면서 문이 덜컹거리는 거예요.
- 그때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살려달라고 했던 것 같아요. 제 이름을 부르면서 저를 찾았어요.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희미한 목소리로요. 저는 계속 귀를 막으며 못 들은 척했어요.
왜 그랬냐고요? 무서웠으니까요. 걔는 항상 그런 식이었거든요. 불길을 내뿜으며 화를 내다가도 눈물을 쏟아내며 제게 빌었어요.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말이에요.
마지막은 없었어요. 마지막의 탈을 쓴 다음만 있었죠.
그래서...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 현관문 앞에서 한참 난리를 피웠는데 바로 옆집 사람이 나와서는 조용히 하라고 그랬대요. 소리 지르면서 위협했으면 개도 바로 떠났을 텐데, 좋게 좋게 이야기했나 봐요. 걔는 전형적인 강약약강이라 그러면 더 안 듣거든요. 그러다가 싸움이 커졌고, 옆집 사람이 칼까지 들고 나온 거죠.
- 그걸 어떻게 아냐고요?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걔가 말해줬다니까요.
그날요. 제가 더는 두렵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아뇨. 그날 말고요. 다른 그날 말이에요. 제가 한문책 읽은 날이요. 그날 걔랑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세상에서 뭐가 제일 무섭냐고 남귀에게 물어봤던 그 여자처럼 말이에요. 걔가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면, 저도 그런 용기를 내지 못했을 거예요. 근데 걔는 죽었잖아요. 노란색이 무서워서 도망가버린 남귀처럼 말이에요. 사람은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귀신은 사람을 죽일 수 없거든요. 전 귀신은 무섭지 않아요. 사람이 무섭죠.
- 그 뒤로 어떻게 되었냐고요?
걔는 입을 굳게 다물고는 밤새도록 저를 보았어요. 제가 입을 열고 말을 뱉어주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에요. 맞아요. 그걸 바랐던 거예요. 그래서 저를 다시 찾아왔던 거겠죠. 그날 일을 경찰에게 말해달라고, 범인을 잡아달라고 말이에요.
- 인터넷에서 이런저런 검색을 했어요. 그거... 신을 모시는 단지더라고요. 제가 깨뜨린 항아리요. 주방에 놓인 건 조왕신, 화장실에 놓인 건 측신, 대들보에 놓인 건 성주신을 모시는 단지인 거죠.
제가 새로 장만했던 항아리는 대들보 위에 놓여 있었거든요. 성주신을 모시는 성주 단지였나 봐요. 제가 항아리를 깨뜨리기는 했지만, 성주 단지도 새로 준비하고 반빗간 청소도 했잖아요. 그래서 성주신이 제게 나타나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던 건 아닐까요?
- 그날 저는 귀도 보고 신도 보았던 거예요.
역시 안 믿으시네요. 솔직하게 이야기해 달라고 하셔서 말해드린 건데.
저 안 미쳤다니까요?
<성주 단지>, 김이삭
- 그 애가 그림처럼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가슴이 철렁 했다고밖엔 못하겠다. 정말 그랬으니까.
- 아스팔트 도로로 세차게 내던져진 듯이 아프던 그날의 심장이, 살인 시도를 들켜서 그런 게 아니었단 걸 깨달은 건... 더 먼 훗날의 이야기이고.
- 그 순간, 그 애의 목에 두른 내 열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주다가 풀어버린 그때엔 오직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거', 어떻게 죽이지?
- 나는 더 크게 웃었다.
망했구나, 나는.
정말 좆같이 망했다.
떠올려본다. 흰 종합장에 예수님을 그리고, 배경으로 에덴동산을 그려 칭찬을 받던 시절을. 적당히 데워진 욕조 물에 온몸을 맡긴 것처럼 안온하다 느낀 날들을.
언제부터 망가진 거지?
- "영상 잘 봤죠, 여러분? 복음의 새순이 이렇게 무서워요. 다들 설교 시간에 졸지 말고, 공과 공부 시간에도 장난만 치지 마. 그러다 교회에 잠입한 복음의 새순 신자들이 여러분 꾀어내면, 평소에 성경 공부 열심히 안 하던 여러분은 '어? 목사님, 전도사님이랑 별로 다른 말 하는 것 같지 않은데?' 하면서 어어, 하는 사이에 이단이 지껄이는 말들에 정신 쏙 빠진다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전도사가 오른 손날로 왼손바닥을 탁 쳤다.,
"지옥 가는 거야."
정지 화면 속의 여자아이는 무어라 말하려던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굳어 있었다. 빈말로라도 못생겼다 하기 힘든 애였다. 피부가 눈처럼 하였다.
아, 이단 사이비들은 저렇게 생겼구나.
- "'기적'을 보여주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세요. 복음의 새순은 자기들 말론 예수님의 힘으로 모자에서 비둘기를 꺼내고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한다고 말하니까. 아 그리고 동성애자들도 조심하세요. 남자끼리 사귀고 뽀뽀하자고 하는 애들 말이에요."
나도 손을 들었다.
"근데, 근데... 어... 그 사람들은, 이단은 어떻게 '기적'을 하는 거예요...?"
전도사는 달란트 대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건 기적이 아니에요. 그냥 눈속임이지."
- "... 우린 연애한 적 없어."
조금 고통스러웠다. 새인은 여전히 우리가 연인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새인이 팔짱을 꼈다.
"연애할 때 하는 거 다 해놓고, 연애한 적이 없다고?"
"그냥 호기심에 해봤던 거야. 어릴 때, 그냥 해본 거라고. 그리고 난 회개했어."
눈을 감은 새인의 입에서 금방이라도 '취소'라는 단어가 튀어나올까 봐, 나는 황급히 덧붙였다.
"나는 이제 가정을 꾸리고 살아. 너도 그래야 해."
"이 얘긴 그만하자. 어쨌든..."
새인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다시 '그짓'을 시작하자, 이거지."
- "그런 짓 하는 거 아니야."
손에서 볼펜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나와 다른 여자애 세 명이 동시에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키가 큰 새인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2박 3일짜리 중등부 여름 성경 학교의 첫 번째 밤이었다.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뭐야 너, 안 잤어?"
"그런 짓이라니, 우리가 뭘 했길래 그래."
새인이 입을 열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교회 수련회 와서 분신사바를 한다고?"
그제야 우리는 우리가 어디 있는지를 깨달았다. 한 아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야, 좀... 조용히 말해."
- 새인의 눈에 우리가 켜둔 핸드폰 불빛이 어려 있었다. 푸르스름한 인공광이 닿자 그 애는 더욱 창백해 보였다. 그리고 엄숙해 보였다. 나는 갑자기 화가 났다.
내가 잘못한 것은 맞았다. 여름 성경 학교에 와서 분신사바를 하면 안 되지. 하나님께 죄송한 일이 맞지. 그러나 내가 화가 난 것은 새인의 이중성이었고, 내가 하는 일과 행동을 모두 부정하려 하는 오만한 태도였다. 자기보다 나이 많은 언니들이 불 꺼놓고 남자친구와의 섹스 이야길 하며 낄낄거릴 땐 가만히 듣고만 있었으면서... 그건 참 성스러운 짓이라 그랬나, 뭐.
- 나는 바닥으로 볼펜을 집어던졌다.
"야, 됐다. 그만하자."
내가 일어나고 다른 여자애들도 일어나자 새인의 표정이 멍해졌다.
"왜 화를 내?"
“화 안 나겠냐? 네가..."
새인의 뚝뚝한 질문에 씩씩거리며 운을 뗐지만, 막상 덧붙일 말이 없었다.
"난 위험해서 하지 말라고 한 거야."
- "뭐가 위험한데. 그냥 장난치는 건데 그게 위험해?"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새인이 중얼거렸다. 나는 할 말을 잃고 그 애를 바라보았다. 다른 애가 대꾸했다.
"잘난 척하지 마. 십계명은 우리도 알아."
나는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독실했다고 그래?"
복음의 새순이면서. 그 말을 토해내려다 간신히 삼켰다. 무언가가 내 입을 꿰맨 것 같았다. 수많은 순간이 있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남들 앞에서 새인의 본질을 까발릴 수 없었다. 이것도 새인이 행한 '기적'일까? 그런 새인은 순순히 인정했다.
"나는 독실하진 않지..."
핸드폰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새인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너무 좁아서 한 명밖에 잘 수 없는 방이었기에, 여럿이 모여 성경 학교의 밤을 즐길 예정이던 여자애들에겐 버림받은 방이었다.
- 방이 너무 더웠다. 온몸이 데워지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수치심 때문일지도 몰랐다. '복음의 새순'인 새인의 목전에서 내 불경을 드러낸 셈이었다.
그날 나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저질렀다. 그러나 당시엔 그 행동 말곤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 모두가 잠든 새벽 나는 새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원래 좁다란 창고여서 그런가, 방은 방이라기보다는 관 같았다. 새인 한 사람을 위한 관.
나는 주저했다. 새인의 목을 조르는 것을 망설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 새인의 몸에 올라타야 한다는 것이 꺼림칙했다. 아니, 생각해 보니 목을 조르는 것도 꺼림칙했다. 내 몸과 새인의 몸이 닿는 것이 거북했다. 그땐 베개로 누를 생각을 못 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우리의 관계는 정말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 잠시 머뭇거린 나는 새인의 몸에 올라타 목에 손가락을 감았고, 그대로 졸랐다. 새인은 죽은 듯이 평온하게 제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신은 이미 죽은 지 오래고, 오직 살아 있는 것은 다리 아래로 느껴지는 따뜻하고 말랑한 몸뿐인 줄 알았는데...
새인이 눈을 떴다.
입을 열었다.
너희가 다른 귀신을 불러왔구나.
-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온 마음, 미움과 증오를 다해, 나의 미래를 위해 그 애의 목을 조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새인은 말했다.
- 다른 귀신이 한 명의 몸에 붙었다. 그 애는 여자인데 귀신은 남자이니까, 곧 다른 몸으로 찾아갈 것이다.
나는 벌떡 일어나다 낮은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고, 문손잡이에 등을 찧었다.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새인이 조용히 속삭였다.
"들었구나."
- 그러나 놀랍진 않았다. 나는 새인이 아주 오래전에 심어진 복음의 새순, 이단, 사이비, 마녀, 악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악마는 쉽게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조차 광야에서 시험당하지 않았던가. 그 후로 꽤 오랫동안 나는 새인에게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 애가 하자는 대로 했다. 새인은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동전이 떨어지도록 할 수 있었고, 사람을 저주해 죽일 수도 있었다. 고작 분신사바로 사람이 죽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건 분명 새인이 일으킨 어떤 '기적'일 터였다.
- 그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약간의 이득을 볼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전화위복이었다.
- "돈을 받고 이 짓을 하자고?"
내 아래에서 새인이 물었다. 나는 새인의 목이 졸릴 때마다 새인에게 뭔가가 빙의한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철저하게 그 애에게 휘둘렸다. 이따금 나는 그 애가 시키는 대로 목을 졸라주어야 했다. 치가 떨리게 징그러운 행위였으나, 나는 할 수밖에 없었다. 새인이 무서웠다. 오토바이를 타다 트럭에 치여 죽은 여자애처럼, 나도 죽일까 봐 겁이 났다.
- 그러나 죽음의 공포도 매일같이 겪다 보면 무뎌지는 법인지, 어느 날 나는 제법 과감한 제안을 해낸 것이다. 나는 신중하게 할 말을 골랐다.
"너는 목이 졸릴 때마다... 어떤 힘이 생기잖아."
나는 새인의 표정을 살폈다. 무감동하게 나를 올려다보는 커다란 눈, 다리 아래로 새인의 복부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애는 고르게 숨을 쉬고 있었다. 딱히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새인의 목에 감고 있던 손가락을 떼어냈다.
"나더러 무당이 되라고?"
"네가 목이 졸릴 때 하는 말들, 그러니까 예언이나 그런 거... 다른 사람들도 궁금해하는 종류의 말들이니까... 어때?"
새인의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하며 나는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하는 거, 돈을 벌면서 하면 좋지 않아?"
"너는 가끔 굉장히 미친년 같은 구석이 있어."
새인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자 입이 비죽 튀어나왔다.
"싫으면 말고."
"하자."
새인이 웃었다.
"어차피 하는 거 네 말대로 돈 벌면서 하자고."
우리의 사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다시 사업을 시작하며,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새인의 목을 조르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었다. 그건 그 애가 원한 거였으니까. 나는 내 남편, 내 배 속 아기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어쩌면 새인이 나에게 '우리의 연애'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내가 남편을 배반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 이유는... 게다가 배 속 아기는 목에 탯줄이 감겨 있었다. 며칠 전 산부인과에 갔다가 초음파 영상을 보았을 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나는 곧장 새인을 의심했다.
- "네가 그랬지?"
나는 새인에게 전화를 걸어 소리 질렀다. 그러나 새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목소리였다. 다 알고 있으면서. 내가 전화한 이유까지. 심지어 전화할 시간조차 다 알고 있었을 거면서.
"우리 하람이 목에 탯줄이 감겨 있다고. 그거 네가 한 짓이잖아."
[그게 어떻게 내가 한 짓이 돼?]
새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네가 했잖아. 내가 널 떠났으니까! 아니야?"
[정말 미안한데, 나는 그 일에 유감없어. 그리고 그렇다고 한들, 내가 왜 네 배 속의 태아 목에 탯줄이 감기게 하겠어?]
나는 부정하는 새인을 향해 쏘아붙였다.
"네가 설명해야지. 너 혹시 내가 네 목을 조르는 게 화가 나서 그래? 그렇지만 네가 원해서 그런 거잖아! 나는..."
갑자기 나는 끔찍한 상상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우리 하람이가... 강새인과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건 아닐까? 목이 졸리면 예언을 뱉는 이단, 사이비, 마녀, 악마로...
그때 새인이 말했다.
[뭔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그거 아니야.]
- "여보, 무슨 일이야?"
잠에서 깬 남편이 졸린 눈을 비비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목소리를 죽였다. 내 일을 남편이 알게 할 수는 없었다. 남편에겐 조만간 부업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말해놓았다. 그게 무슨 일인지, 남편이 알아서는 안 되었다.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고, 과거엔 내 주일학교 선생이었다. 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게 뻔했다.
- 내 삶을 저주해 망가뜨린 여자가 다 안다는 듯 말했다.
[이봐, 사업파트너. 너무 나를 싫어하지 마. 이제 네게 옛날 같은 감정 없어. 그리고 우리, 앞으로 같이 일해야 하잖아. 좋든 싫든. 아니야?]
- "시작하자."
새인은 그렇게 말하곤 눈을 감았다. 우리는 구인구직 앱에 광고를 냈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라는 촌스러운 캐치프라이즈는 새인이 고집했다. 옛날부터 새인이 산상수훈을 좋아한 것은 알았지만, 이런 곳에서조차 그 스타일을 선택할 것이라곤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요.
애통해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받을 것이요.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방금 너, 뭐라고 말했어?"
새인이 눈을 뜨지도 않고 답했다.
"방금 말한 건 내가 아니야. '그분'이지."
- "그분이라니."
목소리가 떨렸다.
"어떤 악마인데?"
눈을 뜬 새인이 나를 노려보았다.
"악마라고 생각했어?"
"아니란 말이야?"
"여태 그렇게 생각한 거야?"
나는 처음으로 새인의 경멸과 마주했다.
- "그랬단 말이지...”
그러나 새인은 화를 내는 대신 다시 눈을 감았다. 내 속에서 무언가 울컥, 하고 솟아올랐다.
"그럼 뭔데? 네가 악마가 아니면 뭔데!"
-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나는 새인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주려 했으나, 이상하게도 자꾸 손가락에서 힘이 풀렸다. 또 공황 발작이 오나 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이 흐려졌으니까. 그러나 공황 대신 눈물이 찾아왔다. 새인은 제 얼굴에 떨어진 내 눈물을 닦아냈다.
"네가 내게 했던 모든 말, 모든 행동. 다 그분이 내리신 시련이라고 생각하며 견뎌냈어. 목이 졸릴 때도,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고통도 나를 향한 험담, 증오, 복수도."
그리곤 말했다.
"나는 선지자야."
- 그럴 순 없어. 나는 필사적으로, 온몸의 힘을 끌어모아 새인의 목을 졸랐다. 그러면 내 인생, 내 망가진 인생은 뭐가 되지? 목에 탯줄이 감긴 내 아이는? 내 남편의 사업이 망한 건? 내 인생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 네 탓이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산상수훈>, 서계수
- 차라리 연차를 내고 같이 가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전화기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내 전화기는 늘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새로 사야 했다. 배터리가 배겨 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일 영미와 카톡을 하고 통화하느라 점심도 먹지 못했다. 오후 세시쯤 신상 원피스 한 벌을 사서 집으로 간다는 통화를 끝으로 오늘 일은 일단락이었다. 전화를 내려놓자마자 거짓말처럼 복통이 사라졌다.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전 내내 설사를 한 엉덩이가 홧홧했다.
- "등신 새끼."
입에서 나를 향한 욕이 튀어나왔다. 구역질 난다. 그 옛날 아씨를 모시던 몸종도 이보다는 나을 거 같다. 진현 그룹의 단 하나뿐인 사위. 남자 신데렐라, 마리오네트, 허수아비, 낙하산, 바지 이사, 영미의 충실한 개... 사람들은 뒤에서 나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그들은 쉬쉬하듯 공공연하게 나를 무시했다. 나를 향해 인사하는 사람들의 미소에서 경멸과 조롱을 보았지만 모른 척하는 건 늘 나의 몫이다.
- "좆같은 세상..."
죽어버릴까. 난간 아래로 아득히 보이는 보도블록이 아찔하게 멀다. 현기증과 함께 욕지기가 치민다. 0.5초쯤 뛰어내리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몇 초만 견디면 이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그럴 수 있는데. 그렇긴 한데... 그렇지만...
죽어버리기엔 내가 가진 60평대 아파트의 대리석 마루가, 자랑스럽게 빠진 벤츠 e클래스가, 수십 벌 걸린 이태리제 정장이, 손목에서 번쩍거리는 롤렉스 시계가, 국내 최고시설 골프장 VIP 회원권과 함께 얼마 전 구입한 수입 골프채 세트가 내 발목을 붙잡는다. 내 힘으로는 절대 손에 쥘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이 주어졌다. 우화처럼, 오랜 시간 그 많은 것들에 길든 나는 이제 신발 없이는 살 수 없는 원숭이다. 구역질 나는 세상이다.
- 띠리리리리.
전화벨 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설마 원피스를 교환하러 가는 건 아니겠지? 등줄기에 서늘하게 한기가 흐른다. 벌써 배가 아파오는 것 같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핸드폰 액정을 바라본다. 액정에 뜬 '건일산업'이란 이름을 보자 복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급격히 올라가던 혈압은 심장의 두근거림으로 바뀐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가볍게 떨린다.
"유정이?"
[명철아. 뭐 하고 있었어?]
허스키한 톤의 부드러운 목소리.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는 배꼽이 간질거릴 정도로 달콤하고 부드럽다. 목소리만으로도 본능을 깨울 수 있구나. 새삼 그녀가 사랑스러워 죽을 지경이다.
- "뭐 좀 생각하느라고 정신없었지."
[일이 바빠? 뭘 그렇게 생각했는데?]
"... 유정이 생각."
말끝에 기분 좋은 콧바람이 섞인다. 이역만리 저먼 곳에서도 내가 미소 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그래서 같이 미소 지을 수밖에 없는 말. 수화기 너머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유정이는 웃음까지 차분하고 고상하다. 오전 내내 영미에게 시달린 고막이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었다.
- "지금 거기 새벽 아니야?"
[응, 새벽이야. 오랜만에 와인 한잔했어. 잠은 안 오고 누군가와 밤새 소곤거리며 대화하고 싶은 밤이거든. 문득 명철이 네 생각이 나더라.]
명치끝이 찌르르 울렸다. 혀가 약간 풀린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귀를 훑었다. 입꼬리가 귀밑까지 올라가고 나도 모르게 자꾸 웃음이 난다. 상상 속에선 이미 그녀가 내 팔베개를 하고 가슴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정말, 미칠 것같이 좋다.
- 유정이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간 날은 기억한다. 초등학교 5학년 방학이었고 더운 여름날이었다. 나는 침대를 유정이에게 양보하고 그 밑에 이불을 깔고 잤다. 에어컨이 흔하지 않은 시절이라 더위를 식히려 틀어놓은 선풍기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트려댔고 깔깔거리다 혼이 난 후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키득대다 잠이 들었다. 오래된 방충망은 짝짓기 철을 맞아 기승을 부리는 벌레들의 침입을 막지 못했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온몸 여기저기를 모기에 뜯겼던 기억만 날 뿐, 무슨 이야길 했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머리를 굴려봤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럴 때는 괜히 아는 척하다 된서리를 맞을 수 있다. 워낙 오래된 일이니 기억 못 하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닐 것 같았다.
- "글쎄... 그날 엄청 더웠던 거랑 모기에 잔뜩 물린 기억은 나는데. 하핫. 무슨 얘길 했는지는 잘 모르겠네."
[아... 남자들이란. 너무한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날 한 이야기, 엄청 덥고 습했던 날씨며 저녁으로 먹은 너희 어머니 카레 맛까지 생생하게 다 기억하는데!]
"미안, 미안. 기억나는 척하려다가 이실직고하는 거야. 유정이한텐 거짓말하기 싫거든."
[그래. 거짓말하는 것보단 낫네.]
유정이가 웃었다. 다행히 쉽게 넘어간 것 같다.
- [그날, 우리 나중에 크면 결혼하자고 약속했었는데...]
더 할 말이 있지만 하지 못하는 듯 유정이가 말끝을 흐렸다. 아. 나도 모르게 작은 탄식이 나왔다. 그랬나. 그랬었나. 그렇게 중요한 말을 나는 왜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심장이 빠르게 뛰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대학 시절 빈 강의실에서 영미의 과제를 해주다 "오빠 나랑 사귀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는 다르게, 너무나 설레고 가슴 저릿한 기분이었다. 유정이는 말끝에 걸린 작은 얼버무림까지도 정말 사랑스러웠다. 그 약속을 지켰으면 좋았을걸. 옆에 있었으면 그녀의 사랑스러운 입술을 확 덮쳐버렸을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몸이 반응했다. 재킷의 단추를 잠그고 재떨이 옆에 놓인 간이 의자에 앉아 슬그머니 다리를 꼬며 누군가 옥상으로 올라오는 건 아닌지 사방을 살폈다.
- 일주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 가는 소풍보다도 더 설레는 날들이었다.
- "아니... 네가 너무 예뻐서."
어눌한 나의 말에 유정이의 커다란 눈이 더 커지더니 이내 웃음으로 바뀌었다. 주위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깔깔거리며 웃어대는 유정이를 바라보며 나도 웃음을 터뜨렸다. 머쓱하게 같이 웃고 나니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웃음을 수습하는 유정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내 앞에는 내 기억보다 너무 세련되고 예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실망한 건 아닌 듯해서 다행이야. 명철이는 어린 시절 모습이 그대로 있어서 들어오자마자 금방 알아봤어. 난, 많이 변했지?"
"아니. 어릴 때도 예뻤어. 지금은 더 예뻐졌을 뿐이야."
"짓궂어, 암튼."
유정이 나를 향해 눈을 흘겼지만 이내 또 피식 웃었다.
- 어색한 분위기는 금세 사라지고 어릴 적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야속한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근사한 한정식을 먹고 그녀가 묵고 있다는 호텔 바에서 간단하게 칵테일을 마셨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나는 사랑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지적이면서도 여성스러운 유정이는 말이 통하는 여자였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조금씩 과장스러워지는 내 말에도 유정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작은 탄식과 긍정의 제스처가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그녀는 내가 하는 말에 말꼬리를 잡지도 않았고 정신없이 자기 이야기만 하지도 않았다. 실로 오랜만에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었다. 작은 흥분과 설렘이 가득한 그 시간을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붙잡아두고 싶었다. 오늘 너를 이렇게 보내기 싫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섣부른 한마디가 우리 사이를 망칠까 두려워 밤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초조해졌다.
- "잠깐 올라갔다 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바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헤어지기 싫어 안절부절못하는 나에게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참을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이 나를 덮쳤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유정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문이 닫히기도 전에 유정이와 격렬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꿈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 품 안에 있었다.
- 행복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유정이에게 오피스텔을 하나 얻어주고 같이 가구며 식기를 사러 다녔다. 영미와 결혼할 적에는 피곤하기만 했던 일이 그렇게 행복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욕실에 놓인 칫솔 두 개를 볼 때마다 가슴 저 밑에서 벅찬 느낌이 솟아올랐다. 일주일에 두 번, 골프 연습을 핑계로 오후 일정을 비워놓고 일찍 퇴근해서 유정이의 오피스텔에 들르면, 정성 가득한 밥상이 나를 기다렸다. 밥을 먹고 나면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영미와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나를 지배했다. 소곤거리며 밀어를 나누다 집에 가면 대궐같이 커다랗지만 암흑 같은 소굴이 나를 기다렸다. 집에 들어가는 게 예전보다 더욱 싫어졌다.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 같았다. 자꾸만 귀가가 늦어지는 나를 영미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참을 수 없었다. 유정이 없는 삶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유정이와 함께라면 남자로 사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바라보고, 나를 존경하며, 나를 기다리는 여자가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따듯하게 마련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소파에 앉아 설거지하는 유정이의 뒷모습을 보면 내 안의 남성성이 불끈거리며 올라왔다. 사라졌던 자신감이 회복되고 삶에 의욕이 생겼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결혼반지가 끼워진 내 손가락을 바라볼 때마다 유정이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알고 있다. 진심으로 영미 대신 유정이가 나의 아내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60평대 아파트의 대리석 마루가, 자랑스럽게 빠진 벤츠 e클래스가, 수십 벌 걸린 이태리제 정장이, 손목에서 번쩍거리는 롤렉스 시계가, 국내 최고 시설 골프장 VIP 회원권과 함께 얼마 전 구입한 수입 골프채 세트가 내 발목을 붙잡는다. 나는 정말 구역질 나는 놈이다.
- 어느 날은 으슬으슬 한기가 들고 눈알이 빠질 것처럼 아팠다. 아무래도 몸살이 난 것 같았다. 일찍 퇴근해 집에 들어가니 어쩐 일로 영미가 쪼르르 달려 나와 내 목에 매달렸다.
"오빠! 내일 주말인데 양평으로 나들이 가자. 거기 유명한 레스토랑이 있대. 그 연예인 이미혜 알지? 그 사람 단골이라더라고. 그 옆에 있는 미술관도 한번 둘러보자. 거기 커피가 그렇게 맛있다네."
영미는 나를 잡아끌며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주방에서 일하던 이모님도 뒤따라 나오며 인사를 했다.
"오셨어요, 사장님? 어머, 근데 어디 몸이 안 좋으세요?"
이모님이 놀라 물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영미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눈을 깜빡였다. 이모님이 급히 수건을 갖고 와 나에게 건넸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어 있었다.
- 영미는 인상을 찡그리며 잡고 있던 내 손을 놓고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아이, 참. 오빠는, 빨리 말을 하지. 난 감기 걸리면 금방 폐렴 되는 거 알잖아. 작년에도 오빠한테 감기 옮아서 입원하고 우리 아빠 노발대발했던 거 기억 안 나?"
순간 명치끝에서 욱하고 뜨거운 덩어리가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정신을 부여잡았다. 내 눈앞에 있는 건, 영미였다. 내가 섬겨야 할 공주님. 그 대가로 누리고 있는 이 거대한 집과 재력이 떠올랐다.
- "자, 그럼 또 어떤 방법이 있느냐. 그냥 돈 급한 사람 하나 사서 사고사로 위장하는 게 그나마 안전해요. 비용도 훨씬 저렴하죠. 당장 빚에 시달리는 사람 중에 몇 년 들어갈 각오하고 일을 맡아주는 사람들이 널렸긴 한데... 이건 또 자칫 실패할 확률이 있다는 게 흠이고. 그래도 이 상황이면 저는 후자를 권해드리고 싶네요."
이자의 말이 맞다. 영미가 사라진다면 그냥 자리에 앉아 경찰만 믿고 기다릴 장인어른이 아니다. 혹여 내가 한 짓이란 걸 알게 되면 내 허벅지 살로 포를 떠서 영미 제사상에 놓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사고사로 위장하는 게 최선일 것이다.
"생각을 좀 더 해보겠습니다."
남자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더니 내 얼굴을 향해 연기를 후 뱉으며 실실 쪼갰다. 불쾌함이 표정에 드러났지만 말을 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남자였다.
"그러시죠. 아쉬운 건 내가 아니고 선생님이시니까요. 왜 사모님을 없애고 싶으신 건지, 그래서 뭘 얻을 건지 저희는 일절 관심 없어요. 소개해준 그 녀석한테도 비밀 엄수죠. 사건을 맡은 사람 역시 함부로 발설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걸 아니까 걱정 붙들어 매십쇼. 마음 정해지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우리는 정해진 금액만 받으면 입에 지퍼 채웁니다."
남자가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맞잡고 입술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남자의 미소가 섬찟했다. 섬찟해서 짐짓 불안했고 섬찟한 만큼 묘하게 믿음이 갔다.
- 서운하다니. 그 언니가 눈물 나게 고마울 지경이다. 부디 오래도록 영미와 친하게 지내주었으면 좋겠다. 옆에 있다면 달려가 두 손 꼭 잡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음... 영미가 오빠한테 전화 안 하는 건 조금 질투 나지만 영미만 행복하다면 난 다 괜찮아."
이런 말이 술술 나오는 내가 구역질 난다. 영미가 폴짝 뛰어 내 입에 뽀뽀를 했다. 하하하하. 어색한 촌극처럼 과장된 웃음과 과장된 대사를 하는 것이 내 역할이었으니 나는 역할에 충실했다.
- 별난 성격 탓에 친구가 별로 없는 영미는 그 압구정 언니에게 푹 빠졌다. 나에겐 너무나도 고마운 일이었다. 하루 종일 전화 한 통 없는 날이 잦았다. 이렇게 숨통을 틔워주기만 한다면 영미와의 결혼을 유지하면서 유정과의 밀회를 즐기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죽여버리기엔 내가 갖고 있는 60평대 아파트의 대리석 마루가 자랑스럽게 빠진 벤츠 e클래스가, 수십 벌 걸린 이태리제 정장이, 손목에서 번쩍거리는 롤렉스 시계가, 국내 최고 시설 골프장 VIP 회원권과 함께 얼마 전 구입한 수입 골프채 세트가 내 발목을 붙잡는다. 포기하기엔 영미가 내게 줄 수 있는 것들 또한 너무도 달콤했다.
- 유정이와의 밀회도 다섯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영미의 집착이 덜해진 만큼 나의 삶도 여유로워졌고 유정이와의 만남도 조금은 시들해졌다. 내가 시들해진 만큼 유정이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한식을 좋아하는 내가 영미 때문에 샐러드나 빵쪼가리 같은 서구식 식사를 주로 하는 게 안타까워 매일 종류를 바꿔가며 찌개를 끓이던 유정이는 요즘엔 같은 음식을 여러 번 내놓기도 하고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사랑을 나누고 집을 나설 땐 늘 문 앞에 나와 배웅을 했었지만 최근엔 잠이 들어버려 나 혼자 그곳을 나서는 일도 많아졌다. 서운하기도 하고 슬그머니 부아가 날 때도 있어서 예전처럼 참새가 방앗간 찾듯, 틈날 때마다 유정이의 거처를 찾지 않는 것도 변화 중 하나였다. 언제 오냐는 유정이의 전화에 예전만큼 설레지 않고 조금은 귀찮다는 생각까지 나서 정리해 버릴까 하는 마음이 처음으로 든 날이었다. 늘 예쁘게 단장을 하고 식사를 차리고 있던 유정이가 외출하고 와서 피곤하다며 막 씻고 난 민낯으로 나를 맞이했다. 전이라면 물기가 촉촉한 유정이의 머리카락을 보곤 곧바로 안아 들고 침대로 뛰어들었을 텐데 오늘은 그렇게 준비하지 않은 모습이 실망스러웠다. 시큰둥한 나에게 유정이 무슨 일 있냐고 물었지만 그저 피곤해서라고 답했다. 마음이 복잡했다.
- "여기 올 땐 그 반지 좀 빼놓고 오면 안 돼?"
배달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벌러덩 침대에 누운 나의 가슴팍에 파고들며 유정이가 말했다. 나는 왼손을 들어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결혼 후 살이 붙어 약간 헐렁하던 반지 아래위로 손가락 살이 불룩하게 삐져나와 있었다.
- 벌떡 일어나 앉은 유정이의 말투가 조금 격앙되었다. 가슴에 투명한 창이라도 있어서 유정이가 내 마음을 다 읽은 건 아닌가 심장이 두근거렸다. 속내를 들켜버린 부끄러움과 고분고분하기만 했던 유정이 긁는 바가지에 대한 분노로 역정이 솟구쳐 오르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참고 싶지도 않았다.
- "그만 좀 해! 이렇게 쪼아대면 뭐가 달라져? 그렇게 못 참겠으면 헤어지든가!"
생각이 말이 되어 몸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 함부로 옷을 꿰어 입고 신경질적으로 현관문을 닫고 나왔다. 속이 답답했다. 무작정 차를 몰아 고속도로를 달렸다. 닥치는 대로 밟다 보니 속초였다. 담배를 물고 바닷가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영미가 있어서 생길 메리트와 없어지면 생길 메리트를 비교하고 유정이와 꿈꿨던 미래를 다시 곱씹어보았다. 오늘 본 유정이의 모습은 내가 꿈꿨던 미래의 모습에 검은 얼룩을 만들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은 여자인 줄 알았는데 그냥 그런 평범한 여자였구나, 하고 탄식을 했다. 어떻게 해야 깨끗하게 정리가 될까 고민하다가 어둑해질 무렵 다시 서울로 차를 몰았다.
- 집에 도착해 현관을 보니 낯선 신발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오빠 왔어?"
영미가 쪼르르 달려 나와 팔짱을 끼며 조잘댔다. 오늘은 영미의 수다를 견딜 에너지가 남지 않았다. 그저 누워서 쉬고 싶을 뿐이었다.
- "너무 재미있겠다. 그치?"
영미가 박수를 치며 신나 했다. 핸드폰을 들고 어느 리조트가 좋은지 어디가 예약 가능한지를 유정이에게 보여주며 계획을 짜는 동안 나는 토할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일단은 영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있어야 했다. 동시에 유정이의 의도가 뭔지 짐작하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그동안 영미가 내 부인이라는 걸 알고 만난 걸까. 그렇다면 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하자 우리 집에 찾아온 건... 그렇다. 협박. 이건 더도 덜도 아닌 협박이었다.
- 그날 이후로 유정이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오피스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연기처럼, 내 옆에서 사라졌다. 초조하고 겁이 났다. 무슨 짓을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영미에게 슬쩍, 아직도 그 언니와 만나느냐고 물었다. 영미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요즘은 내가 언니랑 연애하는 건가 싶다니까. 매일 통화하고 매일 만나는 걸!"
생전 처음 겪어보는 공포가 나를 지배했다. 당장 해결사를 만나야 했다.
- "계약을 하고 싶어요. 근데 대상을 바꿔주세요."
- 여자가 표정을 바꿔 안쓰럽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유정이도 영미도 아닌 사람의 표정이었다. 처음 보는 여자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유정이가 널 차지할 수 없다면 이제는 영미가 되려고. 첫사랑 명철이를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한 유정이는 그 첫사랑이 이렇게 등신인 걸 모르고 관 속에 누워 있지. 유정이가 되려고 내가, 후후훗, 내가..."
유정이가 아닌 그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세차게 들썩였다. 안개처럼 형태가 없는, 그래서 잡히지도 않는 강한 공포심이 밀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든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웃는 것 같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 그녀가 나를 향해 다가오며 소파 옆에 세워놓은 골프채를 잡았다. 나는 전력을 다해 현관으로 뛰었다.
"어딜 가? 영미 여기 있잖아! 내가 영미라고. 넌 영미의 충실한 개잖아!"
여자의 새된 고함이 뒤통수에서부터 들려온다. 불과 몇 걸음 되지도 않는 현관문까지가 멀고도 멀다. 양말이 대리석 바닥에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져 제대로 뛸 수가 없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에서 상상도 못 할 통증이 느껴진다. 사방이 빙글 돌더니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바닥이 내 몸에 들러붙는다.
<뷰티풀 라이프>, 사마란
- [그를 사로잡는 단 하나의 마법!]
이번에 소개해드릴 신상 매직 포션은 바로바로~ '사랑의 물약'입니다!
전설 속에 내려오던 사랑의 묘약 레시피 그대로! 사랑의 마법이 익기에 가장 좋은 시간 66시간 6분 동안 숙성하여 사랑의 여신에게서 내려받은 여신님의 힘을 가득 충전했답니다★
이 제품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태어나서 35년 동안 모태 솔로이던 저희 단골 고객님께서 생애 처음으로 행복한 연애를 시작하게 될 만큼 강력한 사랑의 힘이 담겨 있답니다. '그를 사로잡는 단 하나의 마법!' 포션은 나 자신에 대한 자책을 벗어던지고 더 나은 내 모습을 만들어주는 특단의 사랑과 아름다움의 마법이 걸려 있어요. 그래서 당신이 사랑 앞에 섰을 때 아름다움을 최대한으로 떨칠 수 있는 무한한 힘과 매혹을 드립니다! 사랑의 여신께 내려받은 특별한 여신님의 힘, 숨겨진 나의 아름다운 잠재력을 개화시켜 당신의 그를 저절로 사로잡게 만들어주는 특단의 사랑비결 러브-포션.
집중력의 허브로 알려진 로즈메리는 정신을 맑게 해 주고, 장미는 사랑을 끌어옵니다.
사랑을 향하여,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딜 맑은 정신과 집중력과 용기를!
이 포션은 당신에게 그를 사로잡는 힘을 선사하며 그 힘이 가장 올바르고 아름다운 방향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는 마법의 러브 포션입니다.
시제품들부터 사랑 성공의 후기가 넘쳐나는 전설의 연애 꿀템! 늘 그렇듯 언제나 강력한 후기로 보답하는 저희 <연금술사 공방>의 얼티밋 스페셜 포션, 밸런타인데이 시즌을 맞이해서 더 많은 분들이 사랑에 성공하시라고, 오픈 기념으로 착한 가격에 드려요.
문의는 DM 주세요(찔러보기 사절).]
- 주말 아침, 하릴없이 인스타그램의 피드를 내리다 발견한 괴상한 광고가 희선 씨의 눈을 사로잡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인스타그램의 광고 추천 알고리즘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정체불명의 '사랑 물약'을 팔자고 광고를 내놓았을까. 희선 씨는 졸린 눈을 비비며 다시 한번 스크롤을 내려 광고와 후기들을 확인했다.
- "이게 뭐야? 이런 게 효과가 있다고?"
희선 씨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그녀의 간절한 짝사랑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손가락에 실려 어느새 연금술사 공방 계정의 피드와 가격표를 하나하나 스캔하기 시작했다. 쓰면 사랑이 이루어지는 물약이라고? 진짜로 효과를 봤다고? 후기에는 하나같이 믿을 수 없는, 기적에 가까운 사랑이 이루어졌다는 간증이 폭발했다. 후기 중 어떤 경우에는 손님을 끌어들여서 사업의 수입이 증가했다거나 살이 빠져서 아름다워졌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희선 씨는 어느새 판매자의 계정에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 판매자는 친절하게 한 병에 십만 원이라는 금액을 알려주었다. 사랑의 여신을 소환하는 의식을 통해 마녀들과 연금술사들이 한데 모여 제작하고 힘을 넣었으며 그 효과는 대단하고, 그전과는 달라진 자기 자신을 발견하실 수 있을 거라며 판매자는 희선 씨의 호기심과 구매 욕구에 불을 질렀다.
- 희선 씨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회사에서 그리 대단하지 않은 계약직 사무원으로 일하는 대한민국에 사는 20대 후반 여성. 어릴 때부터 체격이 남들보다 크고 체력도 좋은 편이어서 한때 체육교육과와 경찰대 입시를 준비해 본 적도 있었지만, 공부 머리도 운동 신경도 애매한 그녀는 모든 지망에서 낙방하고 성적에 맞춰 2년제 대학에 들어갔다. 그 어중간한 학교를 졸업하고 그럭저럭 자신이 갈 수 있는 기업 중에서 괜찮은 곳에 취직했지만, 차라리 구멍가게가 더 크다 싶을 정도로 열악한 스타트업이던 첫 직장은 입사한 지 6개월 만에 부도가 났다. 그렇게 직장을 한 번 잃고 약 1년간을 백수로 지내다 다시 동종 업계의 경력 있는 신입으로 들어와 조용하고 평범하게 다니기를 어언 3년, 누가 보아도 별볼 일 없는 얼굴과 몸매, 경력이라는 건 희선 씨도 잘 알고 있었다.
- 집안도 빵빵해서 외삼촌이 이 회사의 전무이사이며 그 자신도 부잣집 아들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게다가 스펙만 좋은 게 아니라 얼굴도 꽤 반반한 편이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남자 아이돌 밴드 그룹의 기타리스트를 닮아서 한때는 길거리 캐스팅이 될 뻔했다는 이야기까지 돌 정도였다. 스스로를 별 볼 일 없이 재미없는 삶을 사는 여자라 생각한 희선 씨가 그처럼 빛나는 남자에게 끌리는 건, 어찌 보면 인간이 어둠 속에서 광명을 찾듯이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그가 희선 씨의 옆자리에 배정되었을 때, 희선 씨는 딱히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감사하다고 속으로 기도할 정도로 기뻤다. 그는 심지어 친절하고 다정하기까지 했다. 모든 여자에게 다 그런 것이 아니라, 회사 안에 있는 더 예쁘고 어린 여직원들을 두고 희선 씨에게 더욱 그러했다.
- "희선 씨, 어제 회식 자리에서 많이 취했던데 오늘은 속 괜찮아요?"
하면서 희선 씨의 책상에만 간식과 숙취해소제를 놔주기도 했고,
"희선 씨, 주말에 시간 되면 우리 영화나 볼까요? 갑자기 표가 생겨서 말이에요."
하고 팝콘까지 다 자기가 살 정도로 살갑게 데이트 신청을 하기도 했다.
- 그러나 그는 절대로, 사귀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희선 씨가 관계를 더 발전시키고자 연애 서적에서 본 대로 이런저런 운을 띄워보았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오히려 희선 씨가 서툴게 마음을 표현할수록 그는 그것이 부담스럽다는 듯 머뭇거리며 그녀가 그의 취향에 걸맞는 충분한 여성스러움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핀잔을 주곤 했다. 희선 씨가 그에 실망하고 두려워하면 세상 다정하게 그녀를 달래어 모텔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난 아직 연애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연애에 대해서는 매우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한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희선이 너는 좋은 여자야. 우리 관계, 이대로도 충분히 특별하지 않을까?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나도 너도 결혼 전까지 충분히 자유를 즐기는 거야. 연애는 아주 깊고, 진지하게 서로를 사랑해야만 하는 관계잖아? 그렇지?"
- 그때 그 말투와 미소에서 느껴지는 싸한 감각을 믿었어야 했다. 도망쳤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만큼 모두에게 부러움을 살 만한 남자는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다는 걸 희선 씨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 사랑의 마음이 괴로워서 이틀에 한 번씩 각기 다른 타로집에 가서 그의 마음은 어떤가요, 저 그 사람이랑 정식으로 연애할 수 있을까요, 사귈 수 있을까요,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하고 한 번에 이삼 만원씩을 쓰곤 했다.
- 비록 국선 변호사와 의뢰인 사이로 만난 인연이지만 양희선 씨는 박 변호사가 그간 만났던 모든 여성들 중에서도 꽤 특별한 사람이었다.
- 정말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 여성의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길래 피투성이가 다 되어서 경찰서까지 갔던 걸까? 그런 장정들을 혼자서, 그것도 말도 안 되는 무기들을 갖고 물리쳤던 사람이 그전까지는 그들의 무력한 피해자였다는 사실도박 변호사의 관심을 유발했다. 온갖 흉악한 범죄자들이란 범죄자들은 다 만나본 박 변호사로서도 이번 사건은 정말 설명하기 힘든, 신기할 정도로... 꼭 마법 같은 일이었다.
- "그렇다면 김성택이 교제 중에 폭력을 사용한 적이 있었나요?"
"직접 때리지는 않았어요. 다만...”
희선 씨는 입술을 떨며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그 기억을 회상하기조차 고통스럽다는 듯 두려움에 차 있었다. 박 변호사가 믹스커피 한 잔을 더 건네자, 희선 씨는 조용히 그것을 받아 마시며 섧게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믹스 커피를 마셨는데 믹스 커피 맛이 나는 건."
"그럼 그동안은 대체..."
"이렇게 불투명한 액체를 마시라고 그가 명령했을 땐, 항상 두 경우 중 하나였거든요.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를 때랑 뭐가 들어있는지를 알려주고 빨리 다 삼켜버리라고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협박할 때."
진술하는 희선 씨의 목소리에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법과 함께 하는 삶은 예상보다 순조로웠다. 사흘을 기다려 배송받은 러브 포션은 '사랑의 마법이 담겼다'라는 판매자의 말처럼 달콤한 향과 그 뒤의 상쾌한 로즈메리 향을 함께 갖고 있었다. 그냥 향수로만 제조했다고 해도 시향을 해보았다면 샀을 법한 달달한 향에, 약간의 기름 재질에 알코올이 섞여 있어서 '향수를 뿌렸다'라고 둘러대도 좋을 수준이었다. 더 감동적인 것은 이 물약이 담긴 예쁜 병이었다. 핑크색 하트 모양의 유리병에 빨간 액체가 들어차 있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만화 속 마법 소녀들이 쓸 법한 감성인지라, 희선 씨는 포션을 받자마자 다음 날 기쁜 마음으로 몸에 바르고 출근을 했다.
- 결과는 왠지 신비로웠다. 회사에서 평소와 똑같이 일했을 뿐인데도 묘하게 사람들이 그녀를 존중하고 툭툭 던지는 말로 '희선 씨 오늘 스타일 좋네' 라는 둥 각종 칭찬을 늘어놓았다.
희선 씨는 점차 마법을 믿기 시작했다. 왠지 자신감이 샘솟고, 조금이라도 더 부지런해졌다.
- "그랬더니... 그 개새끼가..."
희선 씨의 감정이 격해졌다. 박 변호사와 희선 씨 둘 다, 그 사건의 다음 과정은 이미 알고 있었다. 김성택은 몸을 팔아서라도 그 돈을 벌어오라고 했다. 업소에 빚을 지게 해놓진 않을 테니까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그래서 희선 씨는 팔자에도 없던 '마조히스트 여자'의 정체성을 연기하며 그가 시키는 대로 자신의 신체 일부 사진을 올려놓았다. 올라오는 사진들은 점점 더 수위가 높아졌고, 그 언어 또한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해졌다. 국내 최대의 불법 촬영물 공유 사이트가 이미 법의 철퇴를 맞아 없어진 지 오래임에도, 악인의 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그 행위는 점점 더 음지로 내려 들어갔다. 희선 씨처럼 착취와 협박에 구속된 여성은 구조적으로 그 늪에 더 빠질 수밖에 없었다.
- '자발적'이라는 타이틀이 걸린 희선 씨는 이제 성폭행을 신고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고 수많은 남자에게 조롱당했다. 네가 원해서 한 것처럼 올라간 게시물이니 신고한다 한들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그녀의 문란한 행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꼴이라고 그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희선 씨에게 주입시켰다. 그리고 반복된 협박은 어느새 진실처럼 다가왔다. 법은 멀리 있고 그는 가까이 있었다.
- 이상하게 손에 잡히는 무기들마다 착착 감겼다.
마법은 존재할까? 희선 씨는 모른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마법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사람을 움직이고 기적을 일으키는, 그런 추상적이고 신비로운 일들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해도 되는가. 희선 씨는 모른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희선 씨는 지금, 적어도 포션 값 십만 원의 효과만큼은 톡톡히 느끼고 있었다.
마법이 무엇인지 딱히 알 길이 없겠지마는, 심지어 사랑에는 실패하고 사랑 때문에 나락까지 끌려왔지만, 그 나락의 바닥에서 올라오는 로즈메리 향기가 지금 이 순간 그녀 자신에게 맑은 정신과 강인한 육체의 힘을 주고 있었다.
- 위이이잉.
전기톱이 맹렬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 증거물들을 모조리 제출했다.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저,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제가 변호사님같이 좋은 분을 만난 것도... 마법일까요?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까요?"
"글쎄요. 저는 법은 알지만 마법은 잘 몰라요. 그렇지만 희선 씨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힘을 얻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할 수 있지 않을까요?"
- 희선 씨가 집으로 돌아간 직후, 사건 현장의 바닥에서 검출된 문제의 마법 포션과 포션의 본품을 분석한 국과수의 결과지가 변호사 사무실에 도착했다. 포션에는 그 어떤 마약성 물질이나 환각 물질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희선 씨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던 러브 포션은 로즈메리를 비롯한 몇 가지 에센셜 오일들과 인체에 무해한 허브, 산패 방지를 위한 비타민E 오일과 에탄올 등을 향기롭게 섞어놓은 평범한 향수였다. 포션을 만드는 작업실도 어느 평범한 아로마테라피숍이었을 뿐 수상한 증거는 일체 발견되지 않았다. 제작자는 참고인 조사에서 자기가 믿는 신비주의적 자연 친화 신앙 체계의 종교의식을 간단하게 치렀다고 밝혔다. 수사관들이 입회하여 의식을 참관하고 가게와 작업실을 수색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포션의 축성 의식은 일체의 반인륜적이거나 비위생적인 행위 없이 아주 조용하고 소박한 기도 의식이었다. 의식에 들어가는 재료 또한 식약처에서 금지하는 불법적인 물질 없이 그저 아로마 기름 몇 방울과 공장제 향초, 숍 주인과 동업자가 미국 하와이에서 기념품으로 구매한 커다란 수정 구슬 한 알과 톡 튀어나온 뽕주둥이가 매우 귀여운 하와이안 몽크 물범 봉제 인형 한 개뿐이었다.
- 집에 돌아가는 희선 씨의 밝은 미소를 떠올리며 박 변호사는 흐뭇한 마음으로 희선 씨가 선물한 로즈메리 오일을 아로마 램프에 떨어뜨렸다.
<그를 사로잡는 단 하나의 마법>, 유기농볼셰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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