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서련
출판 : 한겨레출판
출간 : 24.11.30
<체공녀 강주룡>은 오랜동안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박서련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내게는 <오늘은 예쁜 걸 먹어야겠어요>에서의, 17년도의 박서련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15년 등단 이후로 활발한 활동 중이지는 않았던 이가 이 작품을 18년도에 발간한 이후로 매해 최소 1권 이상의 작품을 내며 달려 나간다.
그리고 24년, 개정판까지 내게 된다.
아마도, 작가에게도 감사한 작품일 테고.
독자로서도 감사한 작품이다.
<체공녀 강주룡>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맛깔나는 지방어일 것이다.
맞춤법에는 맞지 않지만 읽는 순간 이해가 되는 주룡의 말들.
담박해서 더 깊게 찔러오는 말들.
독자는 혼기를 놓친 살림딸이었던 강녀를, 갓 결혼한 신방에서 독립군이 되고자 하노라는 어린 신랑 앞에 앉은 강녀를, 결국 고운 이를 혼자 보내지 못해 따라나서는 강주룡을 본다.
내 님이 원하기에, 그 님이 그리 살았으면 좋겠어서 독립군과 함께 활동하는 강주룡을 본다.
그러다 다시 친정으로 홀로 돌아오는 강녀를 본다. 그가 낭군을 보내는 것을 본다. 홀로 평양으로 들어서는 것을 본다.
한 몸 건사하기란 식구들을 업고 지내는 것보다야 홀가분했을 것이고, 한 입씩 나눌 짝지가 없어 적적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간다'에 대해 생각하는 강주룡을 본다.
그 이가 고무 공장에서 했던 싸움, 막 독립한 나라의 구 국민으로서 했던 싸움, 세상의 편견과 했던 싸움들을 본다.
살고 싶어서 제 몸을 허공에 매달았던 것임을, 죽고 싶지 않아서 싸웠던 것임을, 그래서 죽을 줄 알면서도 올랐을 것임을.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그 이가 스스로 생각하는 '강주룡'은, 윤심덕이었을까 유관순이었을까.
그 이의 죽음은, 심중이었을까.
그 품에 안았던 것은.
- 오래 주렸다.
씹어서 연하게 만든 것이 목구멍을 지나가는 느낌이 어땠는지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침만큼은 아직 나오지만 넘어가지 않고 입술 양옆에 고이기만 한다. 목구멍이 거칠어져 일부러 마른침을 삼켜보려 할 때마다 부대끼고 거슬린다. 주룡은 나무를 떠올린다. 손을 넣어 만져볼 수 있다면, 우선 식도를 지나갈 때 죽은 나무의 좁은 옹이구멍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는 듯한 통증을 느낄 것이고, 내장들은 손이 스치는 대로 낙엽처럼 바스러질 것이다. 그대로 뒷구멍까지 손을 밀어 넣어 뽑고 어깨를 구겨 넣고, 머리도, 나머지 한 팔도 넣으면... 배가 부르겠지. 나는 뒤집히겠지.
- 그런 상상을 하는 주룡의 얼굴에 희박한 웃음이 돈다. 나를 삼켜서 뒤집어진 나는 또 배가 비겠지. 모로 누운 채 주룡은 누군가의 배 속에 들어 있기나 한 듯이 양 무릎을 바싹 모아 끌어안는다. 잠들고 싶지만, 잠 말고는 누릴 것이 없지만, 오래 주렸기 때문에 주룡은 잠들지 못한다. 머리에 피가 돌지 않아 이미 잠 안팎의 경계가 흐리기도 하다. 눈을 감은 채로 선명한 고동을 느끼면서 자기를 잊어가는 것이다. 그 감각이야말로 제 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인 것을 안다. 때때로 귓전에 도는 소리가 있다. 강녀야, 강녀야, 하고 부른다. 허기가 심해서 들리는 소리인데 허기 때문에 대답할 수 없다. 이어지는 매미 소리... 매미 소리... 찢어지는 듯한 매미 소리. 이건 헛것인지 아닌지 구분되지 않는다. 지금이 여름인가? 주룡은 흐린 눈을 아주 감는다. 매미 소리가 머리를 때려 눈꺼풀 안쪽에 빛의 무늬를 그린다. 빛은 잎맥처럼 퍼지다가 삽시간에 구겨지기를 반복하지만 한 번도 같은 모양인 적은 없다.
- 발소리가 온다.
발소리를 들으면 주룡은 곧장 몸을 일으키곤 했다. 등을 곧추세운 채로 발소리를 맞는 것이야말로 굶주린 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가장 나중 된 저항의 몸짓이라고 여겼다. 오늘만은 그럴 수 없을 것 같다고, 주룡은 뒹굴며 생각한다. 그럴 수 없을 것 같다고 정한 것은 누구지. 그럴 수 없다, 가 아니라 그럴 수 없을 것 같도, 고 하는 것은 누구지.
- 팔 더 높이 들라. 팔꿈치랑 눈썹이 일자가 되게 들라.
시키는 대로 팔을 더 들기 직전에 주룡은 신랑 쪽을 본다. 사모관대를 그럴싸하게 갖춘 소년이 뻣뻣한 자세로 상 앞에 서 있다.
메야, 열댓 살 먹었다더니 내만 하겠고만.
주룡의 혼잣말에 어머니가 팔을 살짝 꼬집는다. 그 바람에 섬돌을 디디려던 주룡의 오른발이 흠칫 허공에 멈춘다. 어머니는 귀에 대고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누가 혼례도 전에 신랑부터 치어다보라던?
주룡은 소매 밑에서 입술을 비죽거린다. 방 안에서는 둘도 없이 살갑게 굴던 어머니가 언제 그랬냐는 듯 엄하게 구는 것이 서운하다.
- 머리 꼴은 또 왜 그러네? 그새를 못 참았네?
오마이는 인제 시집가는 딸아한테 그밖에 할 말이 없슴메?
주룡은 새 신에 발을 꿰어 넣으며 퉁명스레 대꾸한다. 다른 복색은 다 빌려 온 거라도 신만은 오늘을 위해 새로 산 주룡의 것이다. 품이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발에 꼭 맞는 걸로 보아 어머니가 고른 것일 게다. 밑으로 푹 꺼지듯 섬돌에 내려선 주룡의 팔을 어머니가 더욱 단단하게 감싼다.
시방은 무슨 말을 한들 아쉬울 거이니...
혼례 때 신부 얼굴을 가리게끔 하는 까닭은 언제고 눈물이 날줄을 알고 그런 것이 틀림없다. 주룡은 그런 생각을 하며 팔을 더욱 높게 든다. 앞을 볼 수 없는 주룡을 거들어 자리로 인도해 주며 어머니는 다시 속삭인다.
잘 살라. 알았지?
- 오마이나 잘 사시오... 주룡은 속으로 말을 삼킨다.
- 마침내 혼례상 앞에서 주룡은 신랑을 마주한다. 그새 소매 너머로 곁눈질하는 요령이 붙었거니와, 신랑 될 사람이 주룡보다 크다 보니 시선을 좀 높이면 어깨며 얼굴 언저리가 어렴풋이 보인다.
내가 다섯 살이나 많은데 나보다돔 크다니, 저 아이 클 동안에 나는 뭘 했나.
주룡은 제 생각이 부끄럽고 우스워 키들키들 어깨를 떤다. 키는 다 키워놨으니 어디 가서 꼬마 신랑이라고 놀림당할 일은 없겠고나.
- 최가라고 하였지, 이름은 전빈이고, 나는 이제 저 애를 뭐라고 부르나. 전빈아, 하면 시댁 어른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고, 서방님, 하자니 내가 간지러워 못 하겠고. 어머니는 왜 이런 것도 미리 알려주지 않은 거야, 하는 원망이 슬그머니 솟는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아버지를 뭐라고 부르더라? 느이 아바이, 느이 아바이, 하던 것만 생각나고 직접 부를 때는 뭐라고 했던가가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어머니는 결코 아버지를 먼저 부르는 일이 없다는 걸 지금 깨달을 건 뭐람. 낭패라는 생각이 든다.
- 주룡의 아버지와 기럭아범으로 따라온 신랑네 친척이 각자 잔을 채워 주룡과 신랑에게 건넨다. 애초 신랑네 큰어른이 짧은 축사를 읽고 서로 절한 다음 합환주를 나누는 것으로 간소하게 식을 치르기로 했다. 그러니까 합환주를 받는 이때가 바로, 주룡이 신랑의 얼굴을 똑바로 보는 첫 순간이 되는 셈이다. 주룡은 아버지가 건넨 잔을 받느라 공수를 푼다. 내내 긴장하여 바싹 들고 있던 팔이 그제야 아프다. 잔을 떨어뜨릴까 봐 급하게 입을 갖다 대면서도 신랑의 얼굴이 궁금해 주룡은 눈을 치켜뜬다. 꿀꺽. 주룡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야, 반만 마시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네?
주룡은 아버지의 타박을 듣지 못한다. 신랑의 얼굴을 보고 너무 놀라서 합환주 첫 잔을 단숨에 마셔버린 참이다. 아직 소년티를 채 벗지는 못했어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해사해 귀여운 얼굴이다. 여복을 하면 주룡보다도 곱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주룡의 잔을 받아 신랑에게 건네야 하는 아버지는 난처해하며 잔에 새 술을 다시 반 붓는다.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와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새신랑도 어찌 된 노릇인지 알고는 풋콩 콩깍지 터지는 소리를 내며 웃음을 참는다. 주룡에게는 우스울 것 없는 상황이지만 웃는 신랑 얼굴이 고와서 주룡도 흐뭇해지고 만다.
- 야, 웃지 말라! 혼례 때 각시가 웃으면 첫아는 간나란다.
구경꾼의 흰소리를 듣고도 주룡은 웃음을 거두지 않는다.
- 각시가 맘에 안 차서가 아니면 어째 그런 얼굴을 하고 계십네까?
주룡의 말처럼 전빈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낯빛이다.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 마는 모습이 답답하면서도 귀여워 주룡은 농지거리를 덧붙인다.
이러다 소박맞기 딱 좋구나 싶어 나 잠 못 자갔소.
이 말에 전빈이 흠칫 소스라치는 기색을 주룡은 놓치지 않는다. 전반을 보기 전에야 소박 같은 것은 아무렇지 않겠다 여겼으나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괜한 소리를 한 제 입을 치고 싶은 심정이다. 무슨 소리든 해서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싶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 신세가 그렇지, 하는 심정으로 돌아누우려는 찰나 전빈이 주룡에게 말을 걸어온다.
야학 동무들하고 결의한 바가 있습네다. 독립군에 들어가리라고...
바로 누웠던 주룡은 벌떡 일어나 전빈을 바라본다. 이불이 폴싹이는 바람에 남폿불이 호르르 떤다.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주룡을 전빈은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뗀다.
사나가 되어서 동무들하고 약조한 것 하나 지키지 못하고, 집안 어른들 하란 대로나 한 것이 영 부끄럽고, 부인에게도 미안하여 어쨀 바를 모르겠슴메.
- 이제야 주룡도 이 혼담의 진의를 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채 여물지도 않은 아들이 독립운동을 한다고 떠날 것이 겁나 혼기 놓친 처녀라도 데려다 발을 묶으려 한 게로구나. 이 애의 조바심과 최씨 집안네의 불안이 서로 줄다리기한 결과가 나로구나. 생각이 여기에 닿고 보니 묘하게 마음이 가라앉는다.
- 난 또 메라고 걱정 말고 일단 누우시라요.
전빈은 눈자위를 힘껏 비비고 주룡을 쳐다본다. 젠장 맞게 곱고 처량하고나. 주룡은 속으로 한탄하면서도 차분히 할 말을 고른다.
집안 어르신들 뜻도 알갔고요, 그, 메냐, 서방님 뜻도 알갔습네다. 어르신들이라고 서방님이 큰일 한다는데 말릴라는 것은 아닐게라우요. 안즉은 아이로마 뵈이니 좀 더 키워보자 하는 게이지.
전빈은 그런 것쯤 저도 다 안다는 듯 입술을 비죽거린다. 주룡의 말이 이어진다.
나도 마찬가집네다. 보시라요, 나 공부 배운 것 없고 뾰족이 타고난 지혜도 없는 보통 간나임메. 그래도 내 서방이 큰일 하고자 하난 뜻을 막을 만치 무식하지는 않습네다. 내 손으로 직접 키워 더 큰일 하게 만들고자 하면은 하였지.
주룡은 말끝에 남포를 끌어와 머리맡에 둔다.
오늘은 늦었으니 예서 주무시고, 제 말이, 제가 정히 싫고 못살갔으면은 잠든 사이에 가시라요. 잡지는 않갔습네다.
- 그때 큰할머니 배 속에 시아버지가 있었다는 사연을 전빈은 담담하게 들려주었고, 주룡은 그것이 남 이야기 같지 않아 눈시울을 붉히며 들었다. 성정이 호랑이 같으신 데다 유독 주룡에게 모질어 어렵기 짝이 없는 큰할머니지만, 갓 시집와 홑몸도 아닌 채로 울며 간도까지 왔을 것을 생각하니 가엾어서 눈물이 났다. 변변한 철도도 없을 때여서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임자 눈에는 이 집안이 어드렇게 보이네?
이야기 끝에 전빈은 조심스레 묻고 주룡이 대답을 망설이자 다 안다는 투로 말을 마저 이었다.
보아서 알갔지마는 우리 집안은 벼슬 좀 지낸 집안입네, 하고 거드럭거리는 악습을 고치지 못하였어. 인제는 신분 고저가 없는 새 세상인 게를 아주까지도 모른 체하는 거이야.
- 주룡이라고 큰할머니가 형님보다 저를 더 괴롭히는 이유를 모를 리 없었다. 형님은 장남의 혼사라 고르고 고른 규수인 데다 친정이 멀지 않아서 함부로 대하기 어려울 게지만, 급하게 데려다 앉힌 작은애의 각시는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게 당연하다. 우리 집이라고 뿌리가 없는 건 아니라고 대거리를 하고 싶을 때마다 서방 얼굴에 먹칠하기가 싫어서, 딸년을 잘못 가르쳤다고 친정 욕이나 들을까 봐서 잠자코 있었다.
- 전빈의 손을 잡고 둘이 함께 판 설굴로 돌아간다.
늘 마주 보고 등 뒤로 팔깍지를 끼워주던 전빈이 오늘은 주을 등지고 돌아눕는다. 주룡은 이상하다 여기며 전빈의 등을 간지럽힌다. 전빈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 없는 간에 머인 일 있었네?
일 없어.
헌데 우에 그런다니?
전빈은 음, 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조심스레 말문을 연다.
임자하고 백 장군하고 낮에 그랬다메.
그랬다니 무어 말이네?
주룡은 전빈의 등을 더듬던 손을 멈춘다. 오줌 이야기가 벌써 소문이 퍼졌나. 백가 그이가 그렇게 입이 가벼운 사내였나.
부부인 척하였다메.
- 옳다. 너도 투기라는 것이 있는 아이로구나. 주룡은 웃음을 참으며 전빈의 허리를 껴안는다.
기런 거이 먼 소용이라니? 참서방은 예 있지 않아?
전빈이 돌아누워 주룡을 마주 본다. 주룡은 제 얼굴을 감싸오는 전빈의 크고 찬 손에 마음이 저려오는 것을 느낀다.
모르갔어. 임자가 공을 세웠다는 거이 좋고 뿌듯한데, 어인지 나 같은 거는 하찮아지는 듯한 생각이 자꾸 든다.
- 주룡 또한 고백하고 싶다. 당신이 다른 동지들이랑 조사 활동이니 뭐니 하느라 마을로 날 두고 내려갈 때마다 나 역시 그런 마음이었노라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기분이 뭔지 나도 잘 안다고.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고 나면 정말로 작아질 것만 같은 마음이다.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일이 될 것 같다. 주룡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전빈이 자기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욕망과는 별개로 하여 주룡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내가 세운 공이 네 공이 아니갔어?
전빈은 에이, 하고 웃으면서도 그 말에 싫은 내색은 하지 않는다.
- 애초 하고 싶던 말과는 딴판이지만 이 또한 참말이다. 주룡은 공을 독차지하고 이름을 떨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전빈이 언젠가 했던 말처럼 주룡이 독립을 원하는 것은 제 임자 때문이다.
당신이 좋아서, 당신이 독립된 나라에 살기를 바라는 마음.
- 아모 생각 안 한다. 임자는?
이 짧은 말을 하면서도 전빈은 숨이 가쁘다. 주룡은 전빈 쪽으로 돌아눕는다.
내가 당신을... 당신이 간다 할 때 홀로 보냈더랬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무신 말을 그래하니.
여느 규수들처럼 시댁에 잠자코 들어앉아 얌잔하니 기다렸대면... 서방 소식 언제 오난가만 기다렸댔으면...
그랬다면 내 죽는 소식도 모르고 혼차 늙었갔지.
죽는단 소리 말라. 재수 없니도.
- 전빈의 말에 곧 핀잔을 주지만 주룡 역시 안다. 이 사람은 낫지 않으리라는 것을. 오늘에든 내일에든, 어린 제 서방이 세상을 등지고 말리란 예감이 주룡의 의식에 차가운 금을 긋고 있다. 문창호를 뚫고 들어온 흰 달빛이 전빈의 입술 윤곽을 훑는다. 달빛이 그린 그 입술을 달싹이며 전빈이 말한다.
임자가 이런 사람이어서 나는 좋았어요.
주룡은 바로 답하지 못한다. 그런 말 말지. 이미 한 번 버린 아내에게 이제는 아주 두고 떠날 사람에게 그리 다정한 말은 말지. 데리고 떠나지 말지. 정 주지를 말지. 첫날밤에 소박을 맞히지. 이럴 바에는 주롱은 손을 내밀어 전빈의 얼굴을 감싼다.
나도 전빈이가 내 서방인 게 좋았다.
- 간신히 말하고 나서야 주룡은 이상한 적막을 느낀다. 시근시근 움직이던 전반의 턱이 멈췄다. 방 안을 보이지 않게 어지럽히던 선변의 받은 숨소리가 끊겼다. 주룡은 몸을 벌떡 일으켜 전빈의 팔을 주목한다. 맥 노는 자리마다 귀를 대본다. 몸은 따뜻한데 숨소리도 맥도 없다.
- 달빛에 의지해 주룡은 짐 보퉁이를 뒤적인다. 보자기 귀퉁이에 찔러두었던 바늘을 뽑아 전빈의 몸 이곳저곳을 찔러본다. 손이 떨려 넉넉히 반 치쯤 찔러 넣고서는 제가 더 놀라 펄쩍 뛴다. 전빈은 바늘에 박힌 팔을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제야 주룡은 힘겹게 인정한다. 전반이 끝내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평생을 함께하리라 생각한 동무를 막 잃었다는 사실을.
- 주롱은 아까 몸을 뉘었던 자리에 그대로 들어가 잠을 청한다. 전반의 몸이 다 식기 전에 그 온기를 제 몸으로 옮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 까무룩 들었던 잠을 바깥 인기척에 깬다. 이미 날이 밝은 채다. 문을 열어보니 백광운 휘하 2중대에서 함께하던 장정들이 마당 가득 서 있다. 밝은 낮으로 다가오는 오가를 물리며 주룡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병문안들을 오셨지마는 조문을 하시게 되었습네다.
일순 좌중이 찬물을 맞은 듯 고요해진다.
들어오셔서 우리 서방님한테 끝인사 하시라요.
- 또래의 조선인 부인이라 말을 좀 나눌 만했는데, 어쩌다 들어왔는고 하니 중국인 가호에서 보리를 훔치다 걸렸다 했다. 그러는 댁은 어쩐 일이냐 묻기에 살인죄 고발을 당했다, 바른대로 고하니 웬걸 더는 말을 섞으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억울한 노릇이지만 굶으며 이틀쯤 보내고 나니 입 열 기운이 없어 차라리 잘되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나, 살인죄를 그대로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나?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중국 정부의 감옥에?
주룡은 옆 사람에게 닿지 않으려고 무릎을 동여 안고 생각에 빠진다. 처음에야 그래, 내가 잘못했지 다 내 죄니라, 하는 생각이 컸으나 곰곰 생각해 보건대 몇 년이나 갇혀 있어야 할지 모를 억울한 옥살이는 역시 너무하다. 결혼 생활 1년에 독립군 반년, 친정살이 반년 만으로 두 해, 햇수로 세 해를 남편만 위했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
그런 생각 끝에도 도무지, 전빈을 미워하기는 쉽지 않다.
- 밖으로부터는 빛도 들지 않고 다만 오촉 전구 하나가 내내 켜져 있을 따름이다.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만한 표시는 간수들의 교대뿐이다.
- 갇힌 지 대략 닷새째 되던 날에 보리 도둑이 쓰러진다.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큰 소리로 불만을 터뜨린다. 대부분 중국인들이어서 다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조선인들의 말을 듣자니 그 여자가 몸의 힘을 풀어서 가뜩이나 좁은 자리가 더 좁아진 모양이다. 죽었는지도 모른다. 주룡은 놀라서 뛰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생각한다. 저 다음은 나인지도 모른다.
- 아버지는 이런 일을 견딜 수 있는 위인이 아니다.
어릴 때 주룡은 제 아버지가 꽤 우러러볼 만한 인물인 줄만 알았다. 원체 잔정이 적기도 하거니와 딸애인 제 앞에서 유독 점잔을 빼는 게 섭섭도 하지만, 누가 뭐라든 일단은 제 식구가 우선인 사람이다. 아비로서 그거면 족하지 않은가. 시집가기 전만 해도 그런 생각이었다.
- 친정에 돌아와 지낸 반년 간 주룡은 제가 스무 해 넘게 아버지를 오해해 왔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아갔다. 아버지는 제 식구를 위해서가 아니고 밖으로 나돌지를 못해서 얌전히 지낸 것이었다. 햇수로 10년이 된 서간도 생활이 아버지에게는 아직도 낯설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렇게도 요령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주제에 제법 거들먹대며 살던 옛 생활은 좀체 잊지 못해 체면치레를 어찌나 하는지, 서방을 두고 친정에 돌아와 지내는 딸 때문에 어디서 손가락질이라도 당할까 봐 밤낮 전전긍긍이었다.
아, 이 사람은... 대체 아비 구실도 사내 구실도 시원치가 않구나.
예전 같았다면 주룡은 이런 생각이 너무 불경해 스스로를 나무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아버지는 시시한 사내라는 생각을 떨칠 길이 없었다. 제 살같이 아끼는 남편도 가져보고,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한 반년 간 별의별 사내들 틈바귀에서 지지고 볶아본 주룡이다. 모두 훌륭한 사내라곤 할 수 없으나 적어도 생존력과 행동력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는 사람들.
- 그러니까 아버지는... 나를 낳아준 아비가 아니고서야 크게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겠다.
이런 생각이 옳았음은 주룡이 구치소에서 돌아온 직후 더할 나위 없이 자명해졌다.
- 강녀야.
주춤거리며 사립문 안으로 들어서는 주룡을 보고 어머니는 들고 있던 채반을 떨어뜨린다.
이거이 사람이냐 귀신이냐. 이 몰골이 머이네?
- 조선 다시 가잔다 느이 아바이가.
서간도 안에서 이주하려는 거였다면 돌아오기 전에 이사를 갔대도 물어 물어서든, 어떻게 해서든 갈피를 잡아 따라갈 수 있었을 테지만, 조선이라니. 이건 뭐 일부러 주룡을 따돌리려는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먼 길이다.
내래 괜히 왔나 봅네다.
우에 그래 말하니. 이제나저제나 너 오기만 기다렸댔고만.
일없습네다.
어머니 마음이나 편하게 해주자고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실로 아무렇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을 때라면 속상해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아니다.
- 출타했다 해 질 녘에야 돌아온 아버지는 집에 주룡이 와 있는 것을 보고도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망신을 떨쳐서 이사를 결심하게 한 딸애가 집에 돌아온 것은 썩 반갑지 않지만, 그럭저럭 제 할 일은 챙겨 할 줄 아는 일손이 하나 더해져 득실이 반반. 어차피 만주를 곧 뜰 것이니 주룡을 데리고 있어도 실상 손해 날 것은 없다. 아버지의 그런 셈속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주룡 역시 아버지에게 별히 반가운 내색은 하지 않았다.
- 숫제 생트집을 잡아 제 분이 풀릴 때까지 매질을 하기도 한다.
새 직공이 들어오는 날에는 신고식을 한다.
- 넉 달 전 주룡이 처음 일을 시작한 날은 홍이 형님의 순번이었다. 홍이 형님은 쓰러져 발목을 밟히고 다음 날 절뚝거리며 출근했다. 제 딴에는 만만찮게 성질이 있다 자부하던 주룡도 눈앞에서 누가 저항도 못 하고 두들겨 맞는 꼴을 보고는 기가 질려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쓰러진 홍이 형님을 일으키려는 것조차 다른 여공들에게 만류당했다. 일으켜 세워놓으면 다시 쓰러뜨려 팬다는 것이었다. 작업반장이 식식거리며 밖으로 나가고서야 홍이 형님이 스스로 일어나 몸을 툭툭 털었다.
내래 일없어. 고저 새 직공이 들어왔다구 본뵈기를 한 거이라.
본뵈기요?
저치는 새 직공이 올 적마다 이처럼 아무나 잡고 두들긴단다. 자 보았지, 늬두 까불면 이렇듯 본때를 봬줄 수가 있다, 이거이지.
말로 하면 알아들을 것을, 멀쩡히 일하던 사람을 이래도 됩네까?
소리 낮추라, 들을라. 네가 한마디 하면 네 말고 기옆 사람을 팬단다. 다른 직공들이 네를 미워하게 하려구.
사람이 어드렇게 그래 할 수가 있답데까?
사람이 아닌가부다 하라. 그럼 일없어.
- 같은 반 여공들의 말에 주룡도 끄덕이고 결코 그만두지 않겠다 결심했다. 그만두는 다른 사람을 잡을 도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만은 그만두지 말자. 내가 그만두면 새 직공이 들어오고, 새 직공이 들어오면 또 누가 두들겨 맞게 된다. 나 때문에 누군가 맞는 일만은 없게 하자.
- 처음부터 평양으로 돌아오려던 것은 아니었다. 고무공이 될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
일단 집 안의 돈을 주워 모아가지고 나왔지만 멀리 갈 기찻삯은 되지 못했다. 빨리 사리원을 떠나지 못하면 도로 붙잡혀 갈 것이 훤했고, 푼돈이지만 우선 아끼고 보자 하고 기차에 올랐으니 결국은 무임승차였다. 얼마나 달렸을까. 검표원이 돌아다니기에 얼른 내리고 보니 멀리 오지도 못해 평양이었다. 10년 만이었다.
- 돌아와 보니 평양은 별천지였다. 어릴 적에도 평양이란 도시가 흥청거리기로는 조선에서 으뜸가는 도시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간도에서 산기슭을 헤매고 사리원에서 농사만 짓다 대도시로 오니 별안간 눈이 확 넓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화려한 차림으로 신작로를 거니는 기생들, 중산모에 스리피스 정장을 한 모단 뽀이들.
구경거리가 많아 마음이 들뜨기도 하는 한편 앞으로 살길이 막막했다. 젠장, 아직 젊어 내 돈 내가 벌어 쓸 수 있는데 뭐가 걱정이람.
- 금일 일 끝나면 무어를 하려네?
눈을 반짝이며 물어오는 이는 주룡이 들어온 직후에 취직한 삼녀다. 공장 들어온 이력으로야 막내지만 나이는 주룡과 같아서, 반에 손윗사람이 둘밖에 없다. 그중 홍이 형님하고는 성씨가 같으니 친척이 아니냐고 서로 반가워도 하였다. 딸 이름 성히 짓는 부모가 드물다 보니 삼녀라는 이름이 놀림거리는 아니련만 성씨가 홍가인 것은 얄궂은 일이다. 그래도 정도 많고 속이 깊어 저보다 어린 간나들이 홍삼이, 홍삼이, 하고 놀려도 웃을 줄만 아는 애다.
- 글쎄 극장 구경을 갈고 산보를 가볼고.
극장 구경 어데, 비싸서 가기 좋던?
삼등석 삯이 대략 하루 일당이나 마찬가지니 여공 주제로는 패사치스러운 일이 틀림없다. 주룡도 아직까지는 지난달에 큰맘 먹고 단 한번 가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일 마치고 피곤한 채로 가서인지 중간에 곯아떨어졌지만, 난생처음으로 극장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퍽 마음에 들어 혼자 의기양양하던 참이다. 다음에 갈 때는 남들처럼 찐 계란이며 음료수 같은 것도 사 먹어보고, 절대로 절대로 잠에는 들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과 더불어.
- 야, 룡이는 밥상 펴 바칠 서방두 거둬 먹일 아새끼두 없으니 신세가 폈다 폈어.
홍이 형님의 말에 모두 입을 다물고 주룡의 눈치를 본다. 일시에 고요해지자 홍이 형님도 아차 싶은지 입을 가린다.
아이 이러시기요? 내 신세 좋은 것 모르는 사람 뉘 있슴?
주룡이 너스레를 떨고서야 다들 비실비실 웃는다. 모두의 웃는 낯을 한 번씩 살피고서야 주룡은 마음을 놓는다. 그래도 앞으로 취미 이야기는 조심해야지. 아무렴 과부라 제 입만 챙기면 되는 티를 낼 것은 없지. 주룡은 마주 앉은 직공들에게 벙싯, 뜻 없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온갖 나물이 엉킨 보리밥 마지막 한 술을 입에 꽂아 넣는다. 점심시간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린다.
- 다시 시집갈 마음도 없고, 부양할 가족이 없으니 집이니 땅이니 하는 것도 관심 없다. 그저 제한 몸 재미나게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극장 구경도 하고. 저 커피에도 맛을 들이고, 양장도 맞춰보고, 빼딱구두에 실크 스타킹이니 하는 것도 신어보고. 고무 냄새 나는 보리밥 먹어가며 내가 번 돈, 날 위해 쓰지 않으면 어디에 쓴담.
그러나 당장 여공 봉급으로는 양장도 빼딱구두도 어림없다. 그 잘난 모단 껄 옷 한 벌, 신한 켤레 맞출 돈이면 월세 한 번을 내고도 남는다. 월세 한 몫을 뚝 자르고 식비며 다달이 필요한 것 사쓸 돈을 제하면 겨우 오륙 원 남는다. 이삼 원 저축을 하고 그 나머지로 큰맘 먹고 모단 껄 놀이를 하는 것이다.
- 주룡이 서간도를 떠나온 해에 백광운이 죽었다. 이 일을 주룡은 사리원에서 평양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 처음 알았다. 맞은편에 앉은 주룡의 눈치를 보며 두 남정네가 주고받던 이야기를 엿듣고서였다. 계집이 좀 듣는들 뭘 알겠는가, 하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으리라. 주룡은 순간 차갑고 거대한 손이 제 몸통을 쥔 것처럼 숨이 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 표가 나는 것을 앞의 남정네들이 알아볼까 봐 전전긍긍하며 태연을 가장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들은 주룡의 표정이 심상찮게 변해가는 것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희 앞에 앉은 꾀죄죄하고 조그마한 아낙이 남편과 함께 백 장군 휘하에서 활동한 적이 있고, 그 백 장군과 함께 기차를 탄 적도 있으리라는 사실을 그들이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으랴.
- 평양에 와서는 틈날 때마다 지난 신문이며 소문 따위를 캐며 백광운이 어찌 죽었는지를 알아보았다. 통의부가 내부 마찰로 분열하자 상해임시정부 산하로 들어가 임시정부 직할 부대로 개편하고 명칭 또한 참의부로 변경한 것이 그해 6월, 그로부터 석 달 뒤에 통의부의 옛 동료 문학빈이라는 자에게 습격을 당했다고 한다. 남만주에 살던 때를 이따금 떠올리며 막연히, 백 장군 그이는 여전한 활약을 펴고 있겠지 생각하던 지난 한 해가 무람하게 여겨졌다.
비록 주룡 자신은 식견이 짧고 경험 일천한 보통 간나라 잘 모르지만 척 보기에도 비범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였다. 그만한 인물을 잃었으니 독립군에도 큰 손해, 동지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는 슬픔이었을 테지. 주룡 또한 그를 동지라고 불렀다. 마음 둘 구석 없던 시절 오라비처럼 의지한 바도 있었다.
뜻이 같아서 동지라는 말을 쓴다지만, 뜻이 같다고 뜻의 그릇까지 같으라. 그의 뜻에 대면 저의 뜻은 숟가락만도 못하다고 주룡은 여겼다.
그런 그이가 죽고 저는 살아 멀리멀리 도망을 온 것이 영 이상하게만 느껴진다. 이제 간도에 자기를 기억해 줄 이가 몇이나 살아남아 있을까, 하는 쓸쓸함 또한 지울 수 없는 것이다.
- 광운 씨라는 사람이 잘생겼더랬네?
잘생기기로는 우리 전빈이 따를 이가 없었니라.
기래 별히 잘생긴 것도 아닌 사나 얘기를 우에 하오?
내 참 유별난 간나도 다 보갔구나.
기껏 이야기를 들려달라더니 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헛소리를 지껄이는 옥이가 미워서 주룡은 홱 돌아눕는다. 이불을 반절 가까이 빼앗긴 옥이가 칭얼칭얼 투정을 부린다.
춥다. 이불 주시라요.
- 공장 일을 부업처럼 여기는 부인네들이 필요한 것이다. 옥이처럼 집에서 출퇴근하는 아이는 옥이네 공장에 손꼽히게 적고 그나마도 아버지 연줄이 인사 책임자하고 어찌어찌 닿아 기숙생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취직할 수 있었다고 들었다.
잔업이 없으면 퇴근길도 동행이다. 고무 공장 잔업이 나는 날은 흔치 않고, 주룡이 일 마치고 슬슬 제사 공장 정문까지 옥이를 마중가는 일이 많다. 앞마당에 옥이 또래 계집애들이 나오고 있으면 끝난 것이고 사람이 없으면 잔업이 있는 것이다. 아직은 해가 길어 잔업이 나도 해 질 무렵까지는 기다려보기도 한다.
- 옥이는 누에 찌는 열기에 온몸이 푹 젖어 녹진녹진해진 채로 나온다. 저도 고무 찌는 공장에서 일하느라 고생했으면서도 옥이를 보니 안쓰러워, 주룡은 손부채질을 하며 다가간다.
고생했네.
형님두.
돌아가는 길에 옥이는 주룡이 처음 듣는 노래를 부른다.
고거이 먼 가락이냐? 애닯기두 하다.
오날 참 시간에 동무들이 배워준 창곡이지비.
다시 한번 불러보라.
-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 옥이는 고 창곡 노랫말이 머인 뜻인지 다 알갔니?
말 그대루지 머이가 더 있간?
옥이는 아직 아이티를 벗지 못한 새된 소리로 노래를 끝까지 부른다. 평소처럼 우리 옥이 재주 났다. 옥이 노래 가락 좋다 추어줄 것을 기대하며 바라보지만 주룡은 가사를 곱씹느라 사뭇 어두운 표정이다.
창곡 이름이 머이니?
윤심덕이가 부른 <사의 찬미>.
아조 슬픈 노래로고나.
기렇지? 윤심덕이는 이 창곡 레코오드를 취입하고선 제 애인하구 심중하였단다.
심중이 머이니?
연애하는 사이끼리 목숨을 버리는 거이래.
- 옥이는 이웃 사람의 시시한 소문을 전하는 조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그 말의 울림은 주룡의 가슴 깊은 곳에 닿는다. 옥이는 주룡의 생각까지는 모른 채로 제 감상을 늘어놓는다.
얼마이나 서로 깊이 사모하였더래면 같이 세상을 버릴 생각마저 하였을까? 나두 그와 같은 연애 한번 하였으면.
- 아이다. 괜한 소리 하였다.
의아하단 듯이 눈을 굴리던 옥이는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는다. 제 시집 밑천을 버느라 공장에 다니는 애다. 때에 따라 그건 자랑이 되기도 하고 비관이 되기도 한다. 제 밥벌이는 물론이고 동생들 학비를 보태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옥이. 새벽같이 일어나 종일 궂은일을 하는 게 고작 시집이나 가고자 하는 것임은 영 시시하다 여기는 옥이.
- 학교 계속 다니구 싶다.
제사 공장에 다니기 전에 옥이는 1년 남짓 여학교에 다녔다. 가갸거겨를 떼고 나눗셈, 곱셈을 배웠다.
학교 머이가 좋네. 골치 아프니도.
주룡은 평양을 떠나기 전, 그러니까 10년도 더 전을 떠올리며 말한다. 여름에서 가을까지 여학교를 기웃거리다 동무들한테 기별 한마디 못 전하고 간도로 가던 때를.
난 장차 번듯한 모단 껄 되구 싶구 모단 껄이 되어 인텔리 남자 하구 자유연애두 하구 싶은데, 춘원 소설만 보아두 길치 않아? 적어두 고보는 나와야 주인공이 되는 거이지. 주인공까지는 몰라두 소학교는 나왔으면.
- 옥이의 부친은 간나가 많이 배워 무엇에 쓰냐며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옥이의 동생들만 학교에 보냈다. 옥이가 벌어오는 돈으로 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세도 놓고 농사도 짓고 어머니와 딸 둘이나 공장에 다니는 집이니 썩 부족할 게 없지만 악착같이 모아 아들 하나라도 대학까지 보내고자 하는 것이 그네들 뜻이다.
추룡은 옥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안다. 제가 번 돈을 시집 밑천 따위로 쓰는 대신에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것이다.
- 형님처럼 혼자서 살구 싶다.
혼차 사는 거이 아니래두 기러네.
옥이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분한 듯 서러운 듯 눈썹을 움칠거리고 입을 비죽거리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주룡의 소매를 제 손으로 쥔다.
- 종생토록 형님하구 살면 좋갔소.
소매를 꼭 쥐고 있는 옥이의 작은 손이 안타깝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서 주룡은 다른 편 손으로 옥이의 어깨를 쓸어준다.
- 잠결에 끙끙 보채는 옥이 때문에 깬다. 옥이 이마 언저리에 식은땀에 전 잔머리들이 엉겨 있다. 주룡은 주전자에 든 자리끼를 헝겊에 적셔 이마 선을 닦아주고 자리에 눕는다. 그만 꾸고 싶은 꿈을 꾸던 참이다.
- 요사이 주룡은 간도 시절 꿈을 자주 꾼다. 주룡 자신이 주인공인 활동사진을 보는 것 같다.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의 자신이 관객이 되어 어린 자기가 자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똑똑히 아는 채로.
- 주룡은 말을 건다. 얘, 강녀야. 넌 곧 시집을 간다. 몹시도 고운 이하고 부부가 된다. 강녀야. 너는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그런 것 상상이나 해봤니. 서방은 널 집에 돌려보내고 곧 죽는다. 넌 살인범 누명을 쓰고 감옥에도 간다. 하나만 일어나도 기가 막힐 일이 연달아 일어난다. 이 같은 말들을 꿈속의 강녀는 듣지 못한다. 극장에서 관객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활동사진의 등장인물에게 닿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 꿈은 이따금 궤도를 이탈한다. 꿈에서 전빈이 죽지 않는다. 꿈에서 주룡이 시집을 가지 않는다. 꿈에서 열네 살 주룡이 간도에 가지 않고 평양에서 쭉 산다. 집이 망하지 않아서 학교에 계속 다닌다.
이런 꿈은 오래지 않아 끝이 나고 만다. 제 상상력이 그저 그 정도이기 때문이리라고 주룡은 생각한다.
자라서 무엇이 될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하루하루 살았다. 살아 있기는 고되고도 즐거운 일이었다. 살아 있기만 해도 바빠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장차 무엇이 되고 싶은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이도 없었다.
- 간도에 갈 여비만 모으면 그만두려던 공장 일을 여태 하고 있는 것도, 평양에 계속 머무르게 된 것도 이런 생각과 멀지 않으리라. 비록 대단한 일은 아닐지 몰라도 주룡은 평생 처음으로 제가 고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머리를 풀고 옷을 벗을지 옷을 벗고 머리를 풀지를 선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부모를 따라서 이주하고, 시집을 가래서 가고, 서방이 독립군을 한대서 따라가고, 그런 식으로 살아온 주룡에게는 자기가 무엇이 될 것인지를 저 자신이 정하는 경험이 그토록 귀중한 것이다. 고무 공장 직공이 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은 일말 서러운 일일지언정.
- 앞으로 너는 네가 바라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주룡은 잠든 옥이의 이마를 다시 한번 쓸어준다. 당차고 명랑하되 조금 덤벙거리는 것, 뭐 하나 별스러울 것 없는 보통 간나. 유행에 관심 많고 배움에 욕심 많은 아이. 어설프게 바라는 것은 많아졌는데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서 늘상 조금 찌푸린 얼굴, 잠든 지금마저도 무슨 꿈을 꾸는지 미간이 좁다. 그 얼굴에서 주룡은 강녀를 본다. 제 어린 날의 낯을 본다.
- 옥이를 위하는 길이며 저 자신을 위한 길인 것을 왜 몰랐을까.
이어 신입 조합원이 결의 발언을 발표할 차례가 된다. 주룡은 양손을 번쩍 들다 못해 아예 벌떡 일어나서는 나오라 지시하기도 전에 앞으로 성큼성큼 나간다.
반갑습네다, 동지들. 평원 고무 공장 장부공 강주룡이 인사드립네다. 내래 차기 평양고무직공조합의 장이 되려구 가입했습네다.
순간 고요해졌다가 일순간에 웃음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온다. 웃고 있는 그들 사이에서 삼이의 얼굴이 유독 환하게 보인다. 주룡은 쑥스러우면서도 의기양양해져 말을 이어간다.
기실은 내래 모단 껄이 되는 거이 꿈이었습네다. 아이디, 안즉도 모단 껄 되구자 하는 꿈은 저버리지 못했시요. 기래도 인제는 파업단에서 선봉이 되는 거이 나의 바람입네다.
저건 뭐 하는 물건이냐, 하는 조로 웃음소리가 더욱 커진다. 나잇살은 집어먹곤 철이 덜 나서 허풍 떠는 여편네, 또는 앞에 나서서 좀 웃겨보자고 나온 사람으로 보이리라.
- 우에 웃으십네까? 근로하는 고무 직공은 모단 껄 못 하란 법이 있습데? 내 일 막 시작하였을 적에 우리 반장이 내 머리채 잡구 뚜드려 패면서 그랬습네다. 모단 껄은 학생 아이면 기생이라고. 모단 껄 할라면 저하구 자유연애 한번 하자구 드런 소리까지 하였습네다.
내 배운 것이라군 예서 배워준 교육밖에 없는 무지랭이지마는 교육 배워놓으니 알겠습데다. 여직공은 하찮구 모단 길은 귀한 것이 아이라는 것. 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 고무공이 모단 껄 꿈을 꾸든 말든, 관리자가 그따우로 날 대해서는 아니 되얐다는 것.
- 좌중은 고요해진다. 누군가 손뼉을 치기 시작한다. 조용히 시작된 박수 소리가 점점 커진다. 주룡은 박수 소리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며 목으로 올라오는 울음의 기미를 누른다.
- 금일 내래 가입하고 내 이웃하여 일하는 내 동지, 내 동무가 탈퇴하게 되었습네다. 연고를 아십네까, 동지들. 우리 공장주가 동무의 가정으로 사람을 보내 파업단을 나오지 않걸랑 이혼을 당하게끔 수작을 부렸다구 합데다.
우리도 기랬소,
우리도 당했습네다.
곳곳에서 말들이 솟는다. 주룡은 삼이가 울먹이는 것을 본다.
- 생각거니 저들은 우리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거이 분명합네다. 우리가 사람인 것을, 그것도 저들보다 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인 것을 우리 손으로 보여주자면 저 강덕삼이 형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의 단결된 뜻을 총파업으로 보여주어야 됩네다. 내래 이레인가 여드레인가 조합원 교육 배워놓은 거이 다인 햇병아리지마는 감히 힘주어 다시 말하고자 합네다. 총파업 선봉에 이 강주룡이가 설 것입네다.
내 동지, 내 동무, 나 자신을 위하여 죽고자 싸울 것입네다.
- 총파업 대회는 축제와 같이 치러진다. 멋 부려 쓴 걸개를 줄지어 서서 들고 공장 지대를 행진하고, 어느 동리에서 지고 온 것인지 북과 꽹과리에 옷까지 사당패처럼 차려입은 조합원들이 연신 흥을 돋운다. 인력거는 또 어디서 난 것인가. 행진 대오 곳곳마다 파업단 간부들이 자전차 인력거 위에 올라 구호를 외친다.
- 고무 직공 요구 앞에 공장주는 자진하라
이천 직공 하나 되어 파업 투쟁 승리하자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자본가여 먹지도 말라
- 주룡은 얼른 인력거 앞으로 달려가 묻는다.
시방 외친 구호가 머인 뜻임메?
기실은 야소쟁이들이 보는 성서에 있는 말이랍데다. 일을 한 만큼 권리가 있다는 거이지.
알려주어 감사합네다.
- 9월 초에 파업단이 스스로 쟁의 중단을 선언한다. 해산 대회를 열기로 하지만 경찰의 방해로 그 또한 무산된다. 밖으로는 그와 같은 경찰의 탄압이 안으로는 파업단 임원진과 교섭 주체들, 일반 단원들의 갈등이 최고조로 무르익은 시점에서 한 달에 걸친 총파업이 마무리된다.
공장주 단체인 평양고무동업회 측에서는 경찰이 제안한 조정안에 무조건 찬성했다. 경찰 개입으로 마련된 조정안은 기존 요구안에도, 타협안에도 한참 못 미치는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다. 한 달간 평양의 고무 직공 이천삼백 명이 참여해 육십여 명이 검거되고 파업 참여 인원 중 1할에 해당하는 이백여 명이 완전 해고된 대가로는 모자라다. 약소하기 짝이 없다.
- 한 달여 만에 공장에 돌아온 주룡은 햇수로 4년 넘게 하던 작업을 그새 까먹은 듯이 작업대를 만지작거리기만 한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동료들도 저처럼 헛헛한 얼굴을 하고 있다. 작업반장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이편에서 저편으로 왔다 갔다할 뿐이다. 주룡은 행진 중에나 파업단 본부 근처에서 그의 얼굴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차마 동지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이가 나와 같은 대오에 속해 있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은지 주룡은 배운 적이 없다. 달려가서 뒤통수를 때리고 감히 네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나오느냐고 따지고 싶은 동시에 한편으로는 저 사람도 노동하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을 느꼈다. 출근한 지금은 더하다. 기대 이하의 패배로 끝난 파업 후의 허망함을 저 사람도 함께 느끼고 있다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고 있자니 꿈인지 생시인지 영 분간이 되지 않는다. 다만 각 공장에서 선출된 교섭단원들이 저 사람과 같은 남자였지, 하는 생각이 들자 이것에 대해서만큼은 제대로 화가 난다. 주룡의 공장에서 교섭단원으로 선출된 사람은 배합부와 롤러부를 겸하는 남직공이었다. 눈앞에 없는 그 사람보다는 늘 마주하던 작업반장의 얼굴이 실감 나게 얄밉다.
- 무슨 정신으로 일을 했는지 모르는 채로 퇴근하는 주룡 앞에 얄밉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위인이 나타난다.
간만이오.
가던 길 가시라요.
주룡 씨 보러 왔는데요. 이게 내 길이란 말이오.
주룡은 대꾸도 않고 집으로 가는 길을 내처 걷는다. 그 뒤를 달헌이 쫄래쫄래 따른다. 한참 걷던 주룡은 분통을 터뜨리며 돌아선다.
사나들이래 우에 그 모양입네까?
무엇 말입니까?
고무 공장 직공 9할이 여자인데 남자들이 타협안 잘못 맨들어가지구래 우리 파업 다 망했습네다. 상공협회구 교섭단이구 사나들끼리 만나서 짝짜꿍이 아주 잘 맞았갔지요.
- 기차역, 커피 하우스, 극장... 중국 감옥도 그러고 보니 공구리쳐서 만든 양식 건물이었던가. 당은 뭐고 당사는 또 뭔가. 당사라는 곳에 들어가며 주룡은 똑같이 평양에 사는 사람인데도 달헌과 저의 세상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생전 처음으로 세미나라는 것에 참여한다. 콜론타이라는 로씨야 여자의 책을 읽은 젊은 회원들이 토론이라는 것을 한다. 잠자코 듣던 달헌이 한 마디씩 얹을 때마다 회원들이 선망과 동경의 눈길을 던지는 것을 주룡은 금세 눈치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열광적인 눈빛들이다.
- 정달헌이라는 이가 기리두 대단한 사람입네까?
넌지시 묻자 옆 사람은 정색을 한다.
처음 와서 모르시나 봅네다. 정달헌 동지는 조선노동당 청년들의 별 같은 사람입네다. 당의 추천으로 로씨야 모스크바공산대학까지 다녀온 에리뜨라요. 작년에 귀국하여 얼마 전까지래 함흥에 있었답데다.
인텔리 중의 인텔리였구나. 별안간 기가 죽은 주룡은 좀 전에 나눠 받은 자료지에 눈을 떨군다. 그러는 주룡을 알아본 건지 그저 골려주려는 건지 달헌이 주룡을 지목한다.
다음으로는 이 자리 유일한 여성 동지인 강주룡 씨의 의견도 들어보고 싶군요.
네? 저 멋이냐 일단, 내래 책을 읽디 아니하얐습네다만...
주룡이 당황하여 손사래를 치지만 달헌은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자료지를 열심히 보시던데요? 꼭 세미나 주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좋소. 참석 소감 같은 거라도.
- 그럼...
주룡은 목을 가다듬고 묻는다.
시방 정달헌 동... 달헌 씨가 말한 대루 이 자리에 여성은 나한 사람뿐입네다. 하여 내래 예 모이신 분들께 한마디 여쭈려 합네다. 결혼하신 분이 계십네까?
열예닐곱 남짓한 남자들 가운데 서넛을 빼고 모두 손을 든다.
여러분은 자기 부인이 자기와 같은 사상을 가졌으리라구 보십네까?
손을 든 사람끼리 서로 마주 본다. 난데없이 나타난 여자가 뜻 모를 물음을 연거푸 던지는 것이 썩 유쾌하진 않은 것이 분명하다. 달헌 만은 상글상글 웃고 있다.
- 자료지를 보고 문득 궁금해진 것을 물어본 것이니 마음 쓰지들 마시라요. 실례했습네다. 한데 생각한 것 보담두 대답들이 시원찮습네다. 비록 짧은 생각이지마는 내래 여러분의 배우자들은 여러분과 같은 사상을 가졌으리라구 생각하지 않습네다. 해가 저문 시방 이 시각에 여러분은 이 자리에 있구 그네들은 가정을 지키구 있는 탓입네다. 내처 한마디 덧붙이자면 여러분은 그네들의 사상이 어떤지 궁금해본 적 없을 거입네다. 내심 아녀자의 무학무식이 당연하구, 여러분이 공산자인가 공산주의자인가 하는 거이니 부인도 도매금으루 공산 부인인 거이 당연하다 여기시디요. 이 말이 옳지 않다면 시비 가려주시라요. 틀렸다 하신들 여러분이 부인에겐 이런 배움의 기회를 주지 않고 혼자서 예 와 있는 것은 변하지 않습네다. 부인들께선 아일 적부터 배운 법도대루 남편에게 순종하여 집을 지키고 있는 거이 아닙네까.
- 쥐 죽은 듯 고요해진다. 달헌이 손뼉을 친다. 눈치를 보던 젊은 회원들도 마지못한 기색으로 달헌을 따라서 손뼉을 부딪친다.
옳은 말씀이오. 더구나 오늘은 여성 저술가가 여성 노동에 대해 쓴 글을 읽었는데 정작 이 자리에 그 당사자가 한 사람밖에 없다는 것은 우리가 크게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더구나 이 평양의 노동운동 지형이 직공 9할 이상 여성인 고무공업 위주로 구성되어 가는 이상은 앞으로 여성 당사자들에 대한 깊은 연구와 이해가 더욱 더더욱 필요하게 될 것이고.
주룡이 말할 때는 미심쩍고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회원들이 달헌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에 슬그머니 짜증이 나려 하는 것을 꾹 참으며 주룡도 달헌에게 박수를 보낸다.
일단 그러면 우리 동지들, 가정부터 의식화하는 것을 당장의 목표로 두고 다음 세미나에는 부인들을 모시고 오는 것으로 해봅시다.
- 이거이 머인 짓입네까.
주룡이 따지고 들자 달헌은 아픈 옆구리를 쓸며 답한다.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주룡 씨가 그런 욕을 하는 것은 듣기가 싫어서 그랬소.
저짝이 먼처 모욕을 하였는데 내래 욕 좀 하면 어드렇습니까?
그런 욕을 할 줄 안다는 것은 그런 욕을 들으며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욕설은 듣는 쪽보다 하는 쪽의 품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룡 씨는 어떻습니까?
- 주룡은 잠시 말을 잃는다. 어느 정도는 달헌의 말이 옳다. 방금 한 욕은 주룡이 언젠가 들어보았던 욕이다. 그런 욕을 들으며 살았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드러내는 일이 어디가 잘못되었다는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 달헌 씨 말은 반은 료해가 되고 또 절반은 아니 됩네다.
그게 뭐 어떻다고 그러시오. 자기 자신을 다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까?
주룡은 소매며 치맛자락을 팡팡 소리 나게 털며 대꾸한다. 기런 말씀이 특히 그러합네다.
- 되고 안되고는 두고 볼 일이지요? 오늘은 말씀이 조금 지나치십니다.
내친김이니 내래 할 말이나 시원하니 다 하구 갈랍네다. 경찰 감시 삼엄하구 기런 거이는 문제가 아니 됩네다. 댁들 같은 인텔리들이 속으로는 쁘로레따리아 계급을 무시하면서 저희들이 가르쳐야 하는 족속으로 여기는 거이 제일의 문제입네다. 허지만 조질 공장 노동자들은 대개가 남성이겠디요? 그들도 속으로는 달헌 씨네들을 무시하고 있을 거입네다. 저의 손으로는 땀 흘려 먼들 일구어본 적 없으면서 실지로 노동하는 주체들에게 감 놓아라 배 놓아라...
거기까지 하시오. 알아들었습니다.
늘상 웃는 낯이던 달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주룡은 멈추지 않는다.
내 말 안즉 안 끝났습네다. 말해보시기요. 나한테 접근한 것두 첨부터 간판이 필요했던 거이 아닙네까? 무식한 여공들이 에리뜨 남성의 말을 고분고분 듣기 보담은 거부하는 색을 뵈일까 봐 그럴싸한 꼭두각시 하나 앞세우는 전술을 친 것이지요?
그 무슨 피해의식입니까?
그짝이나 말씀 가려 하시라요. 내래 진정으로 느낀 대로만 말한 거입네다.
- 주룡 씨.
뱁새가 황새 따라갈라다 다리짝이 찢어진다구 당신 같은 인텔리들하고 어울려 다니기가 나 세상 부끄러워 못 견디갔습니다.
주룡 씨!
얼마이나 내 처지가 우습네까? 이 꼴을 하구선 피양의 내로라하는 인텔리들이 내 동지라구 나 혼차 들떠서는, 당신을 비롯하야 그 인텔리들은 내 같은 것 동지로 생각이나 하는지 마는지 알지 못하구서...
주룡의 말을 막는 달헌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다.
그쯤하시오. 알았다고 했잖습니까.
머이를 알았단 말입네까?
주룡 씨 말이 다 맞습니다. 나 주룡 씨 이용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용하려고 접근했습니다. 됐습니까?
- 주룡은 말문이 막혀 달헌을 그저 바라본다. 막연히 생각해 오던 것들을 부러 가시 돋친 말들로 한 것은 주룡이 먼저였지만, 그것을 달헌의 입으로 다시 듣자니 새삼 충격이 커서 귀에 윙윙거리는 이명이 울린다.
- 주룡 씨 같은 사람, 필요합니다. 주룡 씨가 필요합니다. 주룡씨가 아니면 안 됩니다. 주룡 씨가 나를 대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룡 씨의 몫을 내가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게 어디가 잘못된 일입니까?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주룡 씨도 이용하면 됩니다. 나를, 내 조직을 얼마든지 이용하라 이겁니다.
- 지붕에 단단히 걸리도록 힘껏 던진다. 한 번으로는 잘되지 않아서 여러 번 다시 던진다. 일목이 팽팽하게 걸린 다음에는 다시 매듭을 만들어 그네 뛰듯 체중을 실어 매달려본다. 그러다 또 헛웃음을 치고 마는 주룡이다.
오르다 떨어져 죽는다 해도 그건 내 뜻대로 되는 것인데, 이제 와서 죽는 것이 무서운가.
아무려나 주룡은 일목에 매달려 을밀대 벽을 디뎌 올라간다. 누군가 따라서 올라오기라도 할까 봐 긴긴 일목을 제 팔로 감아올린다.
사위가 밝아온다. 아찔하다. 굴러 떨어지면 크게 다치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자꾸 눈이 감긴다. 파업단 꾸리고 제대로 자본 기억이 별로 없다. 아사 투쟁을 결의한 날부터는 숫제 한숨도 못 잤다. 허공의 바람이 시리다. 주룡은 감아올린 일목을 제 몸에 감는다.
- 저기 사람이다. 사람이 있다.
깜빡 잠들었다 눈을 뜬 주룡은 구경꾼 여남은 명이 축대 위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광경을 본다. 그들 뒤로 밀봉을 부지런히 올라오는 또 다른 이들이 개미처럼 작게 보인다. 아침 산보를 나온 사람들이 저를 보고 놀란 모양이다.
날은 어느덧 밝아 있고 제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주룡은 몸을 칭칭 동였던 일목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구경꾼들이 어어, 하고 가슴 졸여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방대를 부르네 경찰을 부르네, 소란을 피우며 축대를 내려가는 사람도 보인다.
존경하는 인민 여러분, 내래 평원 고무 공장의 고무 직공 강주룡입네다.
주룡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음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고 우렁차다. 입을 열자 가늘게 떨리던 사지가 도리어 굳세어진다. 스스로의 웅변에 저 자신마저 압도되는 것을 느끼면서 주룡은 말을 이어간다. 이 순간 주룡은 저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저보다 훨씬 더 큰 것, 옳고도 위대한 것이 저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 구경꾼들이 속속 몰려들고 누구 하나 내려가려 들지를 않아 축대에는 이제 발 디딜 틈조차 없다.
우리는 이미 목숨을 내놓기로 각오하고 싸우고 있었거니, 나 또한 예서 내려가는 길은 죽어서 내려가는 것뿐이라 여깁네다.
다시금 주룡의 뇌리에 <국제가>의 후렴구가 떠오른다.
이는 우리의 마지막 판가리싸움이니...
- 그러니 인민 여러분, 내 목숨을 내걸고 외치는 말을 들어주시라요.
마흔아홉 파업단 동지들의, 이천삼백 피양 고무 직공의, 조선의 모든 노동하는 여성의 단결된 뜻으로 호소합네다.
- 수감번호 121, 면회.
달헌은 귀를 의심한다. 체포되고 엉터리 예심 재판에 회부된 이후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러는 사이 면회는 이번이 처음이다. 다소간 포기하고 있던 부분이다. 적색노동조합 관련인 여럿이 달헌과 함께 체포되었으므로 면회를 올 만한 사람이 없기도 했고, 심지어 달헌은 지도자급이라 면회 요청이 거부될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 주룡 씨?
면회실에 들어선 달헌은 눈을 비빈다. 착각이었다. 쪽찐 머리에 주룡 또래, 초라한 행색을 한 다른 여자다. 달헌이 알지 못하는 여자다. 여자는 우물쭈물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제 소개를 하고 다시 앉는다.
주룡이 동무 삼녀라구 합네다. 룡이하구는 같은 공장 다녔구, 룡이는 내를 삼이라구 불렀댔습네다.
면회 요청이 수락된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사상적으로 아무 의심되는 구석이 없는 평범한 여자라 이거지.
- 실례했소. 죄수복이나 간수복 안 입은 사람을 아주 오랜만에 보아서 반가운 마음에 그만. 그래, 어떻게들 됐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영 알 길이 없어서 말입니다.
우리가 이겼습네다.
달헌은 저도 모르게 아이처럼 손뼉을 친다.
하라쇼! 역시 강주룡. 내가 보는 눈이 있었지.
삼이는 흘긋흘긋 간수의 눈치를 보며 소매에서 작은 종이 꾸러미를 꺼낸다.
이거이 그간 룡이 나온 기사 오려서 모은 거입네다. 룡이가 신문 잡지에 아주 많이 나왔습네다. 저, 말재간이 없어설랑... 날래 챙기시기요.
- 간수는 분명히 달헌이 뭔가 넘겨받는 것을 본 눈치지만 아무 말 않는다. 아무래도 삼이가 몇 푼 찔러준 듯싶다. 달헌은 종이 뭉치를 소매 깊은 곳에 단단히 넣어두고 태연한 얼굴로 다시 삼이를 마주 본다.
정달헌 씨 말씀 많이 들었습네다.
삼이는 뭐라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이 입을 달싹달싹 움직이다 말고 그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디 가시오? 면회 시간 아직 남았는데, 말동무나 해주십시오. 민간인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모릅니다.
달헌의 만류에도 삼이는 면회실을 나가버린다. 퍽 이상한 일이다. 달헌은 다소 불길한 예감을 품고 소매를 만지작거린다. 승리 소식을 전하려면 주룡이 직접 왔어도 좋았으련만. 혹시 주룡마저 투옥된 걸까. 배제할 수 없는 가능성이 있다. 쓴 입을 다시며 달헌도 일어나 면회실을 나선다.
- 모서리를 향해 앉은 채로 달헌은 삼이가 건네준 쪽지를 펼쳐본다. 가장 바깥쪽 포장지로 쓰인 종이는 무호정인이라는 기자가 쓴 인터뷰 기사다. 을밀대상의 체공녀, 여류 투사 강주룡 회견기? 제목 한번 걸작이다. 기사를 읽을수록 달헌의 입은 점점 벌어진다. 끝내는 껄껄 소리 내어 웃고 마는 달헌이다.
강주룡. 조선 최초로 체공 농성을 벌인 노동운동가. 당신을 알아본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그런 자부심으로 달헌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 나머지 종이쪽도 비슷한 내용을 담은 신문 기사다. 체공녀 강주룡 투쟁기. 을밀대 지붕에서 수 시간을 농성하며 버티던 그를, 일본 경찰이 밑에 그물을 쳐놓고 밀어 떨어뜨린 것. 그길로 체포되어 구류된 사흘 동안 옥중에서도 단식을 강행하며 임금 감하 철회를 부르짖은 것.
내가 말했지, 당신은 싸우려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아주 탁월한 투사라고, 달헌은 미소를 짓는다. 벅찬 마음에 눈가가 젖어온다.
- 풀려난 직후 공장으로 돌아가 신입 직공을 뽑아 태워 오는 통근차 앞에 누워 또다시 농성을 벌인 것. 끝내 직접 교섭으로 공장주를 이끌어내 임금 감하 철회 선언을 하게 했으나, 파업 참여자 전원 복직은 관철하지 못해 정작 주룡 자신은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
- 이어지는 기사들을 읽어가는 동안에 달헌의 가슴은 뜨거워졌다가 식기를 반복한다. 단련되는 무쇠가 극도로 달구어졌다가 이내 급격히 냉각되는 것처럼. 그러나 인간이라서, 인간의 정신이라서, 달헌의 마음은 무쇠처럼 단단해지지 못한다.
- 마지막 기사는 주룡의 사망을 다루고 있다.
달헌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주먹으로 벽을 치며 절규한다.
- 독방에서 달헌은 닳도록 외도록 주룡의 체공 연설 내용을 읽는다. 들끓는 괴로움의 원인을 도무지 짚어낼 수 없다. 동지를 잃었다는 슬픔. 적색노동조합이 아니었더라면 주룡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감. 홀로 그 모진 투쟁을 이끌어갈 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무력감. 그저 미안한, 미안한 마음.
- 달헌은 사망 기사로부터 시작해서 역순으로 다시 기사를 읽는다. 몇 번이고 그 일을 반복한다. 그 모든 일을 제 눈으로 본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까지 읽고 또 읽는다.
- 죽었던 주룡이 두 달을 앓다가 병원에 간다.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간 병원에서 주룡은 소화불량과 신경쇠약 진단을 얻는다. 병원을 뒷걸음질로 나와서 감옥에 간다. 1년을 거슬러 공장주와 교섭을 하고, 통근 버스 앞에 누워 파업단 복직을 요구하고, 단식하러 구치소에 들어갔다 뒷걸음질로 나온다. 그물에서 튀어올라 을밀대 지붕에 올라앉는다.
해가 동쪽으로 기울어 주룡은 광목천을 타고 을밀대 누대에서 내려온다. 달헌은 감은 눈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그 광경을 본다.
- 거기서부터 다시 모든 것이 시작된다.
- 달빛이 흰 광목을 훑는다. 그 빛나는 줄을 잡고 지붕 위로 올라가려는 주룡은 마치 선녀 같다. 달헌은 그 아름다운 광경을 감히 해칠까 봐 잠시 망설이다가 힘겹게 말을 건넨다. 올라가지 말아요. 거기 올라가면 죽게 됩니다.
주룡은 답한다. 알고 있다고.
- 달헌은 제 머릿속에서조차 말을 듣지 않는 그 여자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본다. 하늘로 올라가는 길처럼 빛나는 광목을 주룡은 단단히 붙든다. 사실은 두려워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이면서 사실은 살고 싶어서, 그 누구보다도 더 살고 싶어서 활활 불타고 있으면서.
- 지붕 위에서 잠든 그 여자를 향해 누군가가 외친다.
저기 사람이 있다.
투쟁, 이라 말했고, 무엇과 싸우겠느냐는 물음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모든 것과 불화하며 그 모두와 사랑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으로 오래 있었기 때문에 그게 어떤 일인지 알 수 있다. 만나보지 못한 채로 죽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
다시는 미치지 않을게. 다시는 죽지 않을게. 내게 함부로 다정했던 사람들에게, 앞질러 가는 약속으로
이 책의 이름은 끝의 끝까지 내 이름의 옆에 놓일 것이다.
이후로 길지 않으나 짧다 하기도 어려운 시간이 지났다. 나는 종종 이 책에 대한 질문을 듣고, 꼭 이 책에 대한 질문이 아니어도 이 책과 관련된 답변을 하기도 한다. 가령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내 소설 속 인물이 누구냐고 하면, 언제나 답은 강주룡이다. 다른 대부분의 인물들은 완전히 내 속에서 나왔으나 강주룡은 내가 역사에서 빌려 온 사람이고, 애초에 내가 그에게 그토록 반하지 않았더라면 이 소설은 아예 쓰지도 않았을 터라서.
그런 가정은 내 나쁜 취미 중 하나다. 이 책을 쓰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 한겨레문학상을 타지 못했을 것이고, 다음 소설을 쓸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고, 나 자신의 쓸모를 발견하지 못한 채로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겠지.
그러나 스물아홉 살에 이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서른아홉 살에 쓰려 했을 것이다. 서른아홉 살까지도 이 소설을 쓰지 못했다면 마흔아홉, 쉰아홉에라도. 이 소설을 쓰기 전까지 나는 거의 소설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는 이상, 그러니까 살아 있는 이상 나는 언제고 이 소설을 쓰려 했을 것이다.
쓰는 일이 고되다고 느낄 때 나는 이 소설을 쓰기 전의 나를 떠올린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이게 나의 마지막 소설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각오로 쓴 이 소설이 첫 책이 되었다는 것은 내 자존의 가장 깊은 근거 가운데 하나다.
나는 썼고, 내가 쓴 소설이 나를 살렸다.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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