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서미애 / 민지형 / 전혜진 / 박서련 / 심너울
출판 : 안전가옥
출간 : 22.05.30
밤에는 창문을 여는 것만으로 그럭저럭 시원한 날씨가 되었다.
왜일까. 이번 여름은 유독 흐릿한 느낌이다.
이전 계절부터 이어져 온 것들을 정리하느라 그랬을까. 새롭게 시작한 것이 없어 그랬을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시원한 수박 한 조각 - 요즘은 조각낸 수박도 판다 만세- 이면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된다.
동화 비틀어 읽기는 -박해로의 <신 전래특급>도 있었고- 나름대로 역사와 전통이 유구한 장르다.
그럼에도 <모던 테일>이 신선하게 느껴졌던 건 아마도 시선의 방향 때문일 것이다.
성인들의 현실적인 시선으로 재해석한 동화는 곳곳에 숨겨진 은유와 생략된 뒷사정들이 재미를 준다.
인간이라는 시선으로 재해석한 동화는 한걸음 물러선 곳에서 살펴보는 권력관계나 인간 자체의 특성을 관찰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약자의 시선에서는?
약자가 곧 아이와 여성과 소수자는 아니겠지만,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약자에 속해 있기도 하다.
서미애,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는 '해님 달님'이다. 호환, 창귀가 아닌 가장 가까운 폭력으로 풀어낸 센스와 긴장감 넘치는 구성이 매력적이다.
민지형, <신데렐라 프로젝트>는 '신데렐라'다. 극사실적이라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입맛이 썼다. 성훈에 대해서는, 안쓰러운 마음도 약간 들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상당히 자기중심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이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되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진짜 '왕자'/'공주'나 '선비'는 상대의 거절은 거절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고, 마음처럼 풀리지 않으면 욕하지 않고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물론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왕자'/'공주'도 '선비'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신분 상승'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베풀고' 싶기는 했지만 그걸 '원하는' 건 속물적이어서 싫은, 자신은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대다수는. 좋았는데, 좋았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조심스러운 작품.
전혜진, <수경- 나선 미궁 속의 여자들>은 '숙영낭자전'이다. 전통적인 여성상, 모두가 함께 행복했다는 결말 뒤에 감춰진 음습함을 현대적으로 풀어낸다.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긴 습들을 다소 몽환적이고 호러틱하게 풀어낸 부분이 멋지다.
박서련, <천사는 라이더 자켓을 입는다>는 '당나귀 가죽'이고 '벌거벗은 임금님'이고... 여러 동화가 언급되지만, 역시 '당나귀 가죽'이다. 밝아 보이는데 어두운 듯도 한데 어딘지 미묘한, '박서련'인 작품. 자신이 고른 작품과 연결되는 점이 복선 같아서 좋았다. -그래서 '나'는 무슨 동화를 골랐나?-
심너울, <나의 퍼리 대통령님>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처음 읽었을 때는 모티프만 따온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발췌를 정리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여론전과 흑색선전과 프로파간다는 인류와 역사를 같이할 만큼 긴 전통이 있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그렇게 해석하다니...! 어릴 때는 남몰래 속풀이를 한 이발사에 이입했었는데, 이번에는 임금님에 이입하게 되었다. 이발사는 소리라도 질렀지, 실제로 당나귀 귀도 아닌데 체면을 지키느라 그런 모함을 들으면서도 억울함을 삼키는 임금님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아닌가. 당나귀 귀라고 한들 그게 뭐 그리 큰 죄라고. ... 근데 그건 소문은 날 만해. 그게 정말 나쁜 건 아닌데. 근데 정말 그랬으면 아기 때부터 소문이 나서 임금이 되기 좀 어렵지 않았을까? ... 등등. 디지털 파묘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정말 별 거 아닌데 별 것이 되거나,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툭 튀어나온다는 점에서- 누구나 이입해서 읽기 좋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앗, 잠깐. 그럼 김케일이 대나무숲, 우물, 구덩이 등등의 의인화된 인물인가...? 그래서 케일인가...? ... 음. 정말 그만해야겠다.
-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어흥."
"이제 떡이 없어요." 엄마가 말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배가 고픈 호랑이는 엄마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팔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팔을 주면 아이들 밥은 어떻게 해 주고 빨래는 어떻게 해?"
"그러면 잡아먹어 버릴 테다. 어흥."
- "오빠, 아직 멀었어?"
거실에서 혼자 동화책을 읽던 양희가 빼꼼히 문을 열고 눈치를 살폈다. 조금 전까지 책 읽는 소리가 들렸는데, 더 이상 지루함을 참기 힘든 모양이다.
영어 숙제를 하던 상민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동생을 쳐다보았다.
"책 보고 있으라고 했잖아, 아직 한 장 더 해야 돼."
- "미안해, 미안해. 오빠가 잘못했어."
상담실에 다닌 지 3년이 다 되어 간다. 온 가족을 힘들게 했던 양희의 증상이 거의 사라지자 엄마는 곧 상담실을 그만 다녀도 될 것 같다는 희망 섞인 말을 했었다. 그 말을 들은 뒤로 상민 역시 이제는 다 괜찮아졌다고, 양희를 힘들게 했던 기억들도 지워졌을 거라고 안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엄마나 상민의 바람일 뿐이었던 모양이다. 아직도 양희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어둡고 무서운 기억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
- 상민은 연신 양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생각했다. 동생은 언제쯤 그 기억들을 머리에서 털어 낼 수 있을까?
- 그 끔찍한 집에서 도망쳐 나온 뒤, 겨우 살 집을 마련하고 한숨 돌리나 싶었을 때 양희는 머리가 아프다며 벽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자다가 일어나 비명을 질러 대고, 어디서 큰 소리만 나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오줌을 쌌다. 물건을 집어던지고 자해를 했다.
겁이 난 엄마는 양희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다행히 외상은 없었지만 다른 곳이 아프다고 했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상담실에서는 '트라우마'라는 단어로 양희의 상태를 설명했다.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의 영혼에 남겨지는 상처.
- 트라우마는 문제를 회피하기보다 그날을 떠올리고 이야기하며, 그 상황을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엄마에게 양희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상민은 자신의 마음속에도 비슷한 놈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말해 봐야 엄마를 더 힘들게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의 생각들을 털어 내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핸드폰은 아내의 재킷 주머니에 있었다. 전화가 다시 걸려올지 모른다. 아예 전원을 꺼놔야겠다 싶었다.
화면을 밀자 채팅 톡이 화면에 나타났다.
[엄마 늦어요? 양희가 배고프대. 김밥 해 달라는데 어떻게 하지?]
상민이다. 아들 상민의 문자다. 채팅 앱을 닫자 바탕 화면에 아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상민도, 양희도 마지막 봤을 때와는 많이 달랐다. 3년 못 만난 사이 성큼 자라 있었다.
나쁜 년.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너 때문에 아이들도 못 보고. 그렇게 꼭꼭 숨으면 내가 못 찾아낼 줄 알아?'
그는 핸드폰을 점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이미 생명이 빠져나간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트렁크 문을 닫았다.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아내를 찾아온 것은 그 때문이다.
- 아내의 직장을 찾아내고 퇴근 시간에 맞춰 주차장에서 기다렸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아내는 틀림없이 다시 요리 학원을 내거나 비슷한 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끌어모아야 돈을 버는 사람은 숨어 살 수가 없다. 아내는 제빵 제과학원에 자기 이름을 걸고 강사를 하고 있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검색 몇 번이면 못 찾아내는 게 없다. 아내에게 요리를 배우는 수강생이 SNS에 올린 사진과 강사의 이름 덕분에 남자는 아내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아내의 직장을 알아냈다.
며칠 동안 학원을 기웃거리며 아내의 스케줄을 파악했다.
- 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양희 덕분에 자신이 살았다. 엄마는 집 안에서 있었던 일을 다 듣고도 상민을 칭찬했다. 민망하고 쑥스러웠다.
"엄마는 알아. 네가 얼마나 최선을 다해 동생을 지키려 했는지."
엄마의 말에 상민은 마음속에 자리한 무거운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 거실 한쪽에서 뭔가 꼼지락거리던 양희가 동화책을 들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엄마, 봐 봐."
양희가 몇 시간 전에 읽었던 <해님 달님> 동화책을 펼쳐 보였다. 동화책의 마지막 장에는 떡을 팔러 갔던 엄마가 해님 달님 옆에 나란히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동화책을 읽을 때도 마음대로 이야기를 꾸미더니 결말은 아예 종이를 오려 붙여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하지만 상민은 양희가 낸 결말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 "멋지다. 우리 양희, 작가 해도 되겠는걸?"
엄마가 두 팔을 벌려 양희와 상민을 향해 흔들었다. 상민도 팔을 벌려 엄마와 양희를 꼭 껴안았다. 잠시 엄마와 오빠에게 안겨 있던 양희가 말했다.
"엄마, 김밥."
-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서미애
- "학점도 이만하면 괜찮으시고 여대 나오신 게 아마 플러스 될 거예요. 사회에선 여전히 여대 출신 선호하거든요."
"어머, 그래요? 진짜 다행이다...!"
성훈의 말 한마디에 여자가 활짝 웃었다. 성훈 역시 마주 웃으며 눈으로 손에 들린 여자의 이력서를 몇 번 더 스캔했다.
'근데 주전공이 영문학... 기왕 복수 전공 하실 거면 경영 말고 차라리 경제가 더 좋았을 텐데... 교원 자격증이 있으시면 몰라도... 솔직히 영문학 전공은 좀 애매하긴 하네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이유는, 이 숙녀분이 성훈의 불알친구 진웅이의 지도 교수 따님이기 때문이다.
"제 생각에는... 올해 저희 그룹 공채에 맞게 이런 부분들을 잘 살려서 이력서 정리하시고 자기소개서 쓰시면... 좀 어필이 되실 것 같아요."
- 주말에는 놀랍도록 한산한 여의도의 한 카페. 대기업 공채 시즌이 다가오면 성훈은 평일뿐만 아니라 주말까지 바빠진다.
대한민국 넘버원, 굴지의 대기업 인사 본부 팀장이라는 위치에 있다 보니 주변에서 취업 상담을 부탁하는 친구, 친척, 지인들의 연락이 쏟아지는 것이다.
"제가 일정이 정말 바쁘긴 한데요."라며 답장의 서두를 열지만, 인간사 알 수 없으니 언제 또 부탁할 입장이 될지 모르는 거니까. 소화할 수 있는 만큼의 약속에는 최대한 나가려고 애쓰고 있다.
성훈 자신도 취준생 시절을 겪었으니까 잘 안다. 그분들의 입장에선 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귀중하겠는가. 가능하면 돕고, 항상 베풀면서 살아야지.
- "그리고 무엇보다... 희진 씨 인상이 너무 좋으셔요."
"아, 정말요?"
"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좋으세요. 면접 가시면 더 유리하겠어요."
"감사합니다. 팀장님도, 인상 좋으세요."
머리를 뒤로 넘기며 수줍게 말하는 희진의 모습에 성훈 역시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공채가 가까워질수록 일이 많아지고 피곤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이런 자리들이 조금은 활력이 되기도 한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저, 식사... 같이 하고 들어가실래요?"
- 객관적으로 보아도 평소 인기가 없는 편은 아니지만, 이런 자리일수록 난이도가 반의반으로 줄어든다. 농담도 훨씬 잘 먹히고, 호감도 쉽게 산다. 당연히 대기업 팀장이라는 배경이 한몫 단단히 했으리라는 걸, 굳이 부정할 만큼 순진한 나이는 지났다. 그러니까 이런 일이 이토록 쉽다는 것에 이제는 죄책감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성훈의 귓가에 회사 동기들의 장난스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죄책감? 죄책가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누가 봐도 완전윈윈이지, 저거 또 지 혼자 씹선비질이네."
-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성훈은 여자를 만날 때 회사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 부끄러워 숨기곤 했다. 고작 그런 간판으로 자신을 어필할 만큼 초라해지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지만, 더 솔직히 말하면 고작 그런 걸로 꼬셔지는 사람에게 큰 기대를 걸기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게 솔직히 더 재수 없는 태도라는 것이 여자들의 반응이었다. 회사 역시 네가 가진 자원 중의 하나인데, 활용을 안 하는 건 미련한 처사라는 것이 동기, 친구들의 중론이기도 했다. 아마 그즈음부터 '씹선비'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도 같았다.
그래서 성훈은 이제 조금 더 자연스러워지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 "그럼, 준비 잘 하시구요.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네. 오늘 고맙습니다, 오빠."
"궁금한 거 없어도, 연락하셔도 되구요."
"풉. 꼭 연락드릴게요."
- 이렇게 자기 손으로 명함을 건네는 세리머니를 하는 것마저도 성훈에겐 나름 장족의 발전이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직책을 걸고 나온 자리였으니까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저 이런 사람입니다'하고 빼기는 것 같아 여전히 쑥스러웠다.
희진이 잠시 명함을 들여다보더니, 묘하게 더 환해진 얼굴로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성훈도 마주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자리는 내내 화기애애하게 즐거웠고, 서로 어렴풋한 호감만 간직한 채로 다음을 기약하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 그러나 성훈의 마음 한편에는, 마지막에 조금 더 환해지던 희진의 얼굴이 깊게 남았다.
역시 누군가에게 수단이 되기는 싫다. 이젠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대기업 정직원이 되는 것이 작은 신분상승의 기회라고 한다면, 그의 와이프가 되는 것은 언제나 더 쉬운 ...
- 부장님은 잠깐 미간만 찌푸리시면 그만이지만 실제로 그 일을 맡아서 다 해치워야 하는 사람은 저랑 팀원들이지 말입니다...
"그래도 어쩔 수 있나?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목소리를 낮게 깔고 을러대는 부장의 한마디에, 성훈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넵, 알겠습니다."
네, 그럼 까야죠, 어쩌겠습니까. 이렇게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통지라니, 참으로 회사생활다웠다. 부장은 성훈의 복종 의사를 확인한 뒤 거침없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 "인턴 활동 심사는 2차 면접 통과자들 대상으로 하는 거니까 그 앞까진 어차피 똑같고. 인턴 평가 내용은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이랑 상급자 평가... 인원 상관없이 기준점 이상 도달하는 사람은 최종합격인 것으로, 무슨 뜻인지 알지? 다 같이 열심히 하면 전원 합격도 가능하다는 거고..."
"바꿔 얘기하면, 합격자가 아예 없을 수도 있단 거네요."
"그렇지, 역시 한 팀장. 이해가 빨라. 2차 합격자들한테 그 내용 안내로 넣어 주고... 각 부 부장들한테 미리 고지도 넣어 놓고."
"네. 근데 한 달이나 인턴들 왔다 갔다 하면 부장님들 되게 싫어하실 텐데..."
"그래 봤자 뭐 어쩔 거야. 부장급들 컴플레인 들어오면 바로 나한테 보내."
"넵!"
"어휴. 이번 공채, 한 달은 더 길어지게 생겼네. 수고하라구."
잠깐 믿음직스러운 말을 하나 싶더니, 부장은 부장답게 폭탄만 ...
- 하긴, 이런 역발상의 기브 앤 테이크도 있을 수 있구나 싶었다. 요즘 워낙 회사원 수명도 짧고 경쟁력 갖기도 어려우니까, 한편으로 이해는 되지만... 성훈 입장에서는 역시 별로 내키지는 않는 게 사실이었다.
솔직히 그런 집안에 장가가면 평생 얼마나 시달리겠는가? 집에서라도 눈치 안 보고 좀 편하게 지내고 싶지 않나? 그냥 평범하게, 조건 같은 거 상관없이 진심으로 끌리는 사람이랑 오순도순 사는 거, 그게 진짜 행복이지 말이야.
하지만 성훈의 생각이야 어떻든, 친구 녀석들은 그 ‘따님’이 누군지 알 때까지 자신을 들들 볶을 참인 것 같으니 일단은 이번 인턴들을 좀 열심히 관찰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 맥락 없이 짜증을 내고서 혼자 민망해진 성훈은, 잠시 뒤 김대리가 올린 공지문과 자신에게 전달한 이메일을 확인하고서 사내 메신저로 "잘했어!"라고 격려해 주는 센스를 잊지 않았다.
- 그리고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성훈은 나름 10년의 채용팀 경력을 살려서 관상만으로 전무님의 딸을 찾아보겠답시고 자기 전까지 몇 번이나 명단을 들여다봤다.
그 때문인지 성훈은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인턴들이 회사에 왔고, 그중에 가장 얼굴이 예쁜 여성이 성훈의 팀에 배치되었다. 친구들과 달리 성훈은 모두를 공정하게 대했지만 그쪽에서 먼저 유독 성훈에게 살갑게 대하며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서 자연스럽게 교제를 하게 됐는데, 최종 합격이 결정되고 나서야 성훈은 그가 전무님의 딸임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성대했고 모두의 부러움과 축복이 쏟아졌다.
다음 날 아침, 꿈에서 깨고 나니 성훈은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거참, 유치하게 내가 왜 이런 꿈을 꿨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 드디어 인턴들의 출근 날이 다가왔다.
아니나 다를까, 준태가 기밀이라고 을러댔던 내용이 이미 암암리에 사내에 다 퍼진 듯했다. 안 그래도 처음으로 인턴을 받는데 그 소문까지 더해지면서 모든 사원의 관심이 인턴들에게로 쏠렸다. 각 부서 팀장급에게 인턴 평가 방식을 공유하려고 만나면 다들 친한 척 그 소문에 대해 물었다.
그러면 성훈은 사람 좋게 웃으며 "아유. 저흰 아무것도 몰라요." ...
-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다. 단발머리에 화장이 짙지 않아 깔끔하고 청순한 인상이었다. 의외로 치마 정장이 아닌 똑 떨어지는 바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옷 태를 보니 제법 늘씬한 듯했다.
"혹시 인사부 한 팀장님...?"
"네, 인턴 대상자 맞으시죠? 일찍 오셨네요. 커피 한잔 사드릴까요?"
카운터 근처에 선 참이었기 때문에 성훈이 상냥하게 물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한 투로 성훈의 친절을 거절했다. 성훈이 의례적인 웃음을 만면에 띄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내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성훈에겐 조금 의아한 일이었지만 일단은 계속 웃으면서 말했다.
"어, 괜찮아요, 어차피 회사 법인 카드라..."
"아... 그럼 다른 인턴분들 오시면 그때 마시겠습니다."
"그, 그래요 그럼."
- 성훈은 우선 자신의 커피를 먼저 주문했다. 그러는 동안 여자는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조용하게 앉아 회사 로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훈은 저도 모르게 여자의 구두와 가방, 옷가지들을 관찰했다. 모두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저가의 실용적인 브랜드 제품이었다. 수수한 인상에, 패션센스도 그저 그렇고, 금수저 후보일 가능성은 아무래도 별로 없어 보였다. 이런 말이 좀 그렇지만, 뭐 사실이니까.
게다가 제스처도 너무 딱딱했다. 긴장한 것일 수는 있겠지만, 쉽게 호감을 살 수 있는 태도는 아니었다. 인턴 첫 출근 날 이렇게 일찍 온 것만 봐도, 굉장히 성실하고 열의가 있는 사람이라는 점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요령은 좀 없는 것 같네. 과하게 원칙적이려는 태도, 세련되지 않아. 그런 면모 역시 성훈의 관점에서는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 혹시, 들킬까 봐 일부러 쌀쌀맞게 구는 건가? 그 가능성도 잠시 생각했지만, 이내 성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그건 너무 하수지. 진짜로 정체를 숨기려는 사람의 태도는 아니다. 게다가 나중에 본인의 정체가 드러나면, 분명 전무님 평판에도 영향을 미칠 텐데. 그리고 요즘 금수저들, 얼마나 정서적으로 여유롭고 살가운데.
- 지루한 회사 생활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사실 이런 소소한 이벤트구나, 하고 성훈은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았던 인턴 송예은 씨는 결국 마케팅 1팀에 배정되었다. 배속 팀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준태와 현성이 볼썽사납게 신경전을 벌였다 카더라, 하는 소문이 다양한 버전으로 사내에 떠돌았다. 팀장님들 귀엽네, 짜식들 남자네, 정도의 평가가 덧붙었다. 어쨌거나 1팀 팀장 준태는 그날 이후로 싱글벙글이었고, 갑자기 새 옷을 엄청 사들인 듯했다.
- 개발부에 배정된 윤하나 씨는 권욱이 팀장으로 있는 팀에 배정되었다. 늘 점잖은 척하는 녀석이라 강하게 의견을 피력하지는 않았겠지만 권욱은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여론을 은근히 끌어당기는 데 천부적인 재주가 있었으니 윤하나 씨가 어떻게 그 팀으로 가게 됐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게다가 권욱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이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최소한 성훈과 친구들은 다 알고 있었다. 일단 상대의 경계심을 낮출 수 있으니까 빨리 친해지기에 매우 유리했고, 그 입장에서 제법 괜찮은 전략을 펼쳐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 그 두 사람 외의 다른 여자 인턴들 역시 마이너 취향인 사원들의 원픽 후보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중이었는데, 신리라는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없는 후보였다. 일단 별 존재감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신입 특유의 활기 같은 게 전혀 없고 이미 몇 년 회사에 다닌 사람 같은 분위기가 있어서 일반 사원들 사이에 섞이면 ...
-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에 조금 뜨끔했지만, 성훈은 태연한 척하며 계속 이야기를 들었다.
리라의 말에 따르면,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너무 비싸거나 부담스러운 물건들이 오가게 되었고, 본인 역시 계속 그런 선물을 받다가 부담이 되어서 인턴들이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그 사실을 언급했다고 한다. 조금 덜 부담스러운 선물을 주고받았으면 좋겠다고. 이런 선물을 받자니 너무 염치가 없는 것 같다고.
저런.
잠자코 듣던 성훈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 "그랬더니 갑자기... 예은 씨가 눈물을 흘리시는 거예요. 마니또 분이 잘해 주고 싶어서 선물한 걸 텐데 그렇게 부담으로만 받아들이면 준 사람이 얼마나 상처가 크겠냐고... 그 바람에 갑자기 옆에서 하나 씨도 같이 글썽거리고... 분위기가 완전 숙연해지면서 저만 순식간에 나쁜 사람이 되어서..."
"아유, 저런... 리라 씨도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을 텐데..."
속으로는 아무리 부담스러워도 나 같으면 그런 말은 안 했겠다, 생각했지만 성훈은 일단 리라를 위로했다.
"네에! 정말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거든요."
리라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성훈의 말에 동조하더니 말을 이었다.
"솔직히 저는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건 좀 별로인 것 같아서요. 인턴 월급을 받긴 하겠지만 저희 아직 다 취준생이잖아요... 감당하기 버거운 게 사실인데, 아무래도 저만 그런 생각을 했나 봐요."
"에휴. 예은 씨 아니면 하나 씨가 리라 씨 마니또였나 보네. 그 두 사람은 많이 친해졌어요?"
"네에, 두 분은 꼭 자매처럼 붙어 다니셔요."
호오. 벌써 그렇게 됐다 이거지... 참 신기하게도 어느 집단에서든 눈에 띄는 사람들은 서로를 귀신같이 알아보고 먼저 그렇게 편을 먹는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는 모양이었다. 아마 자기들이 어떤 이유로든 주목받는다는 것도 다 알고 있을 거다. 정말 둘 중의 하나가 전무 딸이긴 한가 보다. 한 명은 공주, 한 명은 시녀. 여자들 사이엔 원래 그런 친구 관계도 많다고들 하니까.
- "저, 근데 팀장님. 제가 이런 얘기한 거 절대, 꼭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아셨죠?"
잠시 딴생각에 잠겼던 성훈은 리라의 말에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걱정 마요. 절대 안 할게요."
일단 시원하게 대답을 하고서 성훈은 저도 모르게 눈앞에 있는 리라를 새삼 찬찬히 살펴보았다. 요즘 젊은 친구들에 비해서 리라 씨는 참... 눈치도 없고 요령도 없고... 이제 그 여왕벌 둘한테 미움까지 받게 생겼으니 이를 어쩌나... 그 자체가 일단 짠하기도 했고, 평소답지 않게 약해진 모습에 묘하게 마음이 갔다.
"이제 와서 제가 갑자기 마니또 선물 금액 제한 같은 걸 걸어버리면 너무 티 나겠네요. 그쵸?"
"앗, 네. 그건...”
리라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 정말 오묘하게 매력적인 존재다. 첫인상은 분명 별로 안 좋았는데. 생각해 보면 공채에 지원하는 인턴 신분으로 팀장인 날 만났으니 무조건 잘 보이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할 법한데도, 리라는 다른 인턴들과 달리 딱딱한 태도를 보여서 튀긴 튀었다. 겪어 보니 알겠다. 워낙 편법을 싫어하고 깔끔한 성격이라 아부하는 것처럼 보이기가 싫었던 거다. 오늘 일만 해도 그렇다. 감정이 많이 격앙된 상태였을 텐데도 험담이 될 수 있는 얘기는 최대한 삼가고, 대놓고 도움을 구하지도 않는다. 확실히 리라에겐 요즘 사람답지 않은, 좀 선비 같은 면이 있다. 그동안 만났던 여자들하곤 다르다.
그런데 그렇게 대쪽 같은 한편, 알고 보면 마음이 여리고, 요령도 없고, 혼자 어떻게든 해 보려고 하는 모습이 더 애처롭다. 이거 정말 너무...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캐릭터네?
성훈의 가슴이 또 쿵쾅대기 시작했다.
- 역시 전무님 사위가 되기 위한 신데렐라 레이스는 내 체질에 안 맞는다. 차라리 내가 왕자가 되는 게 낫지!
대놓고 도움을 요구하는 누군가의 도구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을 직접 찾아내서 도움을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동안 왜 알아보지 못했지 싶을 정도로 리라야말로 여러모로 성훈의 '애인' 자격시험을 능히 통과할 만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곧은 마음을 가진 리라가 감사와 함께 호감을 표시했으니, 그건 내 지위나 조건과 관계없는 진짜 호감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내가 기다렸던 순수한 여자가 나타난 건가?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고 봐야 된다니까..!
그렇다면 나는 그토록 기다려 왔던 이 순수한 사랑의 찬스를 반드시 붙잡고야 말겠어...!
그동안 애써 억눌러 왔던 로맨스에 대한 불타는 열망이 성훈의 가슴속에서 뜨겁게 끓어올랐다.
- "아, 리라 씨. 지금 교육 가요? 이 소프트웨어 배운다며. 이 책 한번 봐요."
바로 다음 날부터, 성훈은 지체 없이 왕자님 작전을 개시했다.
전날 밤에 방을 샅샅이 뒤져서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을 하나 찾아낸 것이다. 덕분에 약간 위축된 것처럼 보였던 리라의 안색이 조금 밝아지는 듯했다.
"아. 네, 팀장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강의실로 향하던 예은과 하나의 눈에 딱 걸린 게 문제였다.
"어~ 한팀장님. 그거 뭐예요? 저한테도 좀 보여 주세요~"
"저도요~"
완벽한 메이크업과 착장으로 출근한 두 사람이 순식간에 성훈을 둘러쌌다. 리라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성훈은 정신을 꽉 붙잡고 태연한 척 대답했다.
- "팀장님! 커피 뭐 좋아하세요?"
"아우, 괜찮아요. 저 기프티콘 많아요."
"어머, 기프티콘이라뇨. 같이 마시러 가자고 하려고 했는데? 헤헤. 그냥 알아만 둘게요~"
"알려 주세요~"
준태와 권욱이 요즘 싱글벙글하면서 다니는 이유가 다 있었구나, 성훈은 새삼 실감했다. 두 사람의 고급 애교 스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적당히 둘러대고 그들을 떼어 낸 뒤에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리라는 강의실에 들어간 뒤였다. 혼자 멀리 떨어진 자리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는 모습에서, 벌써 성훈의 짐작대로 다른 인턴들과 어울리기 어려워진 티가 났다.
하아, 아까 그 모습 보고 괜히 오해하면 안 되는데. 나는 네 편이라고, 신리라!
- 그 후로 며칠간, 성훈은 리라가 더는 곤란해지지 않도록 다른 인턴들 몰래 관심을 표현하려고 나름 애를 썼다.
다행히 같은 팀 소속이어서 티 나지 않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리라가 업무 시간이 끝난 뒤에 회사에 남아 인턴 수업과제를 하고, 최종 PT 준비를 하는 동안 야근할 게 많다고 핑계 대며 같이 사무실을 지키기.
그리고 리라가 퇴근할 때 자연스럽게 시간 차를 두고 내려와서, 리라가 버스를 타는 정류장 앞으로 차를 가져가 집까지 태워주겠다고 하기.
리라는 정말 괜찮다고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지만, 성훈이 탈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버티면 뒤에서 다른 차들이 빵빵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성훈의 차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 "남녀 사이에 집 주소가 노출되는 건 여성 입장에서 부담스럽단 거 저도 잘 아는데요. 부서 들어오실 때 이력서에 나온 주소를... 어쩔 수 없이 이미 봐 버려서요. 이해하시죠? 저희 집이랑도 별로 안 멀더라고요. 바로 집 앞 말고 집 근처에 내려 드릴게요."
"네에..."
간만에 보는 눈 없이 단둘이 되어 성훈은 신이 난 반면, 리라는 목소리가 착 가라앉은 데다 무척 피곤해 보였다. 역시 업무도 많은데 인간관계까지 꼬여서 힘든가 보다 싶었다.
"리라 씨, 우리 잠깐 드라이브할까요? 요즘 너무 힘들어 보여서 걱정돼요. 한강에 가도 되고, 아니면..."
- "조직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조직 내 문화와 분위기가 충분히 성숙해져 있어야 합니다."
인턴의 생각이라고 하기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통찰력 있는 관점이었다. 사원들이 모두 집중해서 듣고 있는 분위기가 성훈에게도 느껴졌다.
"그러나 제가 인사 본부에 있으면서 느낀 것은, 그런 리스크에 대한 직원들의 인식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높은 수준의 젠더 감수성이 요구되고 있는 지금, 제가 경험한 팀은 놀라울 정도로 뒤처져 있었습니다."
응? 갑자기 무슨 소리지?
성훈이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리라가 딸깍 하고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음성 변조된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남녀 사이에 집 주소가 노출되는 건 여성 입장에서 부담스럽단 거 저도 잘 아는데요. 부서 들어오실 때 이력서에 나온 주소를... 어쩔 수 없이 이미 봐버려서요. 이해하시죠? 저희 집이랑도 별로 안 멀더라고요. 바로 집 앞 말고 집 근처에 내려 드릴게요."]
- "리라 씨. 신 전무도 이 사실 알아?"
아뿔싸.
리라가... 리라가, 소문 속의 전무님 딸이었던 거다!
그 사실이 앞쪽에서부터 빠르게 전해졌고 다시 한번 모든 사원들이 충격의 소용돌이 속에 빠졌다.
리라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대강당 뒷문 쪽을 곁눈질했다. 본사 감사 팀 직원들 세 명이 들어오고 있었다.
상황을 대충 파악했다는 듯, 회장님이 눈을 질끈 감으며 그들을 향해 무대 쪽으로 턱짓을 했다.
그 사인을 받자마자 감사팀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 명은 무대로, 둘은 객석에 앉아 있는 두 명의 팀장에게로.
-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흥미로운 쇼는 처음 본다는 듯, 객석에 앉은 사원들은 숨을 죽인 채 눈을 빛냈다. 머리 회전이 빠른 몇몇은 리라가 전무님 딸이라는 첩보를 성훈이 혼자 몰래 알고 집적거리다가 저렇게 됐나 보다 하고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현성은 조용히 어둠 속에서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은이 준태네 팀으로 간 것이 그에겐 신의 한 수였다.
- 그럴 리가 없어, 분명히 주소도... 도저히 전무님 따님이 살 것 같은 동네가 아니었는데...?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그럴 리가 없단 말이야. 저... 미친년, 내가 너... 절대 가만 안 둬!!!
감사팀 직원에게 거의 끌려 내려오다시피 하는 순간에도 성훈은 현실을 부정했다. 그러곤 끝없이 '썅년'이라는 한 단어를 후크송의 후렴처럼 무한 반복했다.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라고!
- "야이 개새끼야, 넌 다 알았던 거 아냐?"
"그니까 시팔, 알았음 미리 말을 했어야지!"
"뭐, 이 새끼들아? 그랬으면 내가 이 꼴을 당해??"
감사팀의 검은 차 안에 나란히 앉아,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악몽 속에서 세 친구는 오래오래 서로를 향한 쌍욕을 뱉어댔다.
- 그렇게, 그들 각자의 신데렐라 프로젝트가 끝이 났다. 햇볕이 좋은 늦가을의 도로를 검은 차가 아름답게 미끄러져 갔다.
옥상에서 그 모습을 보며 리라와 예은과 하나가 비로소 사이좋게 웃었다.
- <신데렐라 프로젝트>, 민지형
- 꿈을 꾸었다.
- 꿈이라고는 했지만, 어딘가의 드라마에서 본 장면 같았다. 한국의 사극 드라마에서 보았던 아흔아홉 칸 한옥 앞마당에, 한 여자가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마당에 끌려 나와 있었다.
"시부모님의 간택으로 육례를 치르지 못했다고는 하나, 저는 이 집의 며느리입니다. 어찌하여 그다지도 끔찍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천상에서 나고 자란 제 몸, 지금은 비록 인간 세상의 때가 묻었을지언정 빙옥과도 같은 굳은 정절로 살아왔건만 이런 더러운 모해를 듣다니 견딜 수 없습니다. 억만 번을 고쳐 죽는다 한들, 사실에 없는 일을 어찌 여쭈겠습니까."
끌려 나온 여자는, 억울한 마음을 억누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구겨졌지만 본디는 고왔을 초록 저고리에 붉은 치마며, 곱게 틀어 올린 머리에 꽂은 초록색 옥비녀가 눈이 시리도록 선명했다.
- 호통을 치는 소리, 하인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들 사이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느리인 숙영은 얼음같이 차고 옥처럼 맑은 성품에, 그 절개는 송죽과 같이 굳은 여인이거늘, 어찌 외간 남자를 끌어들여 음탕한 일을 하겠습니까.”
저기 끌려 나온 여자가 숙영인 모양이었다. 억울한 누명을 쓴 걸까. 그래도 누군가는 편을 들어주는 건가.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하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대개 무사히 누명을 벗는 법이다. 하지만 그때, 숙영의 편을 들던 목소리가 머뭇거리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 없는 것인즉, 아무래도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뿐인데도, 심장이 아프도록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 숙영이라 불린 여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은 이 몸을 굽어 살피소서. 5월에 서리가 내리게 하고 10년을 원망할 이 한을 어찌 풀 수 있으리까.”
가슴이 찢어지고 내장이 다 뒤틀리는 듯한, 고통스럽고 절절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머리를 틀어 올린 옥비녀를 뽑아 손에 들며,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제가 만약 불의한 일을 하였다면 이 옥비녀가 가슴에 꽂힐 것이요, 억울한 누명을 썼다면 이 옥비녀가 섬돌에 박힐 것이옵니다!"
- 뻥 뚫린 인천공항 고속도로 위에는 해무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수경은 차창을 조금 내렸다. 안개에 섞인 짭짤한 바다냄새가 흘러들어 오자, 희원은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 공기 별로 안 좋아요."
"미안해요."
희원은 수경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바로 창을 닫았다. 그리고 룸미러로 수경을 흘끔 돌아보며 빈정거렸다.
"현중 도련님께서 특이하신 분인 것은 집안 사람들이 다들 아는 일이지만, 고르고 고른 분이 이래서야 어른들께서 뭐라고 말씀을 하실지 모르겠네요."
"제가 왜요?"
대꾸를 하다가, 수경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현중은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자기는 외아들이고, 부모님께서는 작은 사업을 하시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장사를 물려받을 생각은 않고 미국으로 도망쳐 공부나 하고 있는 것을 영 탐탁지 않아 하신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그런데 도련님이라니.
- "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떤 분을 데려오셨더라도 어른들 마음에는 들지 않으셨을 테니까."
"...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에요, 그거."
"이런 집안에서는, 보통 부모님이 정해 주시는 결혼을 하죠. 가끔 도련님처럼 연애로 결혼을 하시는 분이 나오더라도, 결혼 준비는 어른들께서 해 주시는 것이고요."
- 수경은 한국에 들어와서야, 정확히는 자신을 마중 온 희원과 만나고서야 자신과 결혼한 남자가 선군그룹 회장의 무녀독남 외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현중이 말하던, 부모님이 하시는 작은 사업이라는 게, 전 세계의 중공업과 산업용 로봇 시장을 주름잡는 다국적 기업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 "이사장님과 회장님께서는 도련님께서 결혼하셨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며칠 동안 아무 말씀도 못하셨습니다. 이런 중요한 일을 상의도 없이 결정하고, 혼인신고부터 하다니. 상대 여자네 집안에서는 따님을 어떻게 키운 거냐는 말씀도 하셨지요. 그런 데다 도련님께서 학업도 마치시기 전에 임신부터 하셨다고요.”
수경은 운전석에 앉은 희원을 쳐다보았다, 희원은 몸에 딱 맞는 까만 스커트에, 부드러운 광채가 흐르는 블라우스, 얇지만 우아한 화장과 잔머리 한 올 비어져 나오지 않게 틀어 올린 머리까지, 그야말로 빈틈없이 완벽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희원이 몸에 걸친 것들은 수경이 대충 걸친, 임신으로 부른 배를 적당히 가리기 위해 입은, 대학 로고가 새겨진 후드 원피스와는 비교할 수도 없게 비싼 물건들로 보였다.
"희원 씨라고 하셨죠."
같이 있자니 숨만 쉬어도 기가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수경은 알고 있었다. 빌 게이츠의 비서는 수트를 입고 넥타이를 매겠지만, 빌 게이츠는 편한 옷을 입고 다닐 거라는 것을. 미국 대통령처럼 아침부터 한밤중까지의 일거수일투족이 세상에 노출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진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굳이 불편한 옷을 입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수경은 푹신한 가죽 시트에 등을 기대며 짐짓 냉담하게 대꾸했다.
"희원 씨가 날 싫어한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내가 어떤 ... "
- 예희는 조금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큼직한 보석 반지를 가리켰다.
"자식이 결혼을 하는데 예물 같은 것도 준비해 주지 않았다니, 내가 현중이 엄마인데 너무 무신경했지. 이번 기회에 네게 어울릴만한 것도 몇 가지 더 장만해야겠다. 젊디 젊은 사람에게 어울릴 만한 게 많지 않아서 조금 미안하구나."
"이런 귀한 걸... 제가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현중이의 앞날에 대해서는 우리 나름대로 생각한 바가 많았다만, 현중이는 결국 자기 뜻대로 공부하고, 자기 뜻대로 결혼했지. 너는 그런 현중이가 선택한 사람이잖니."
"하지만..."
현중과 결혼하긴 했지만, 이 집안 며느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걸까? 평범한 결혼 선물이나 예물 한두 가지라면야 기쁘게 받았겠지만, 이건 많아도 너무 많고, 귀해도 너무 귀했다. 수경은 조심스럽게 그 물건들을 들여다보았다. 너무 탐을 내는 듯한 눈치도, 그렇다고 옛날 물건이라고 무시하는 눈치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면서.
"현중 씨가 돌아오면, 그때 의논해 보고 받을게요."
수경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 "그러면 일단 한 가지만 먼저 골라 보렴. 언젠가는 전부 네 것이 되겠지만 말이다."
예희의 권유를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수경은 잠시 상자를 뒤적여 보았다. 화사한 조명 아래, 비단 보자기에 감싸인 패물들이 서로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듯 반짝였다. 한참 그 패물들을 들여다보다가, 수경은 가장 안쪽에 놓인 길쭉한 것을 집어 들었다.
오래된 천인지, 감겨 있는 비단 겹보자기는 검은색에 가까운 붉은색이었다. 그 안에는 투명하고 반짝이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맑은 느낌의 초록색 옥비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것을 어디서 보았더라.
어째서인지 낯이 익었다. 처음 보는 물건인데도 선뜻 집어 들 만큼.
"그러면 이것을..."
"옥비녀잖니. 넌 머리도 그렇게 길진 않은데..."
"예, 하지만 예전에 한국에서는 결혼한 여자가 비녀를 썼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제가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 한국 풍습은 잘 모르지만 할머님께서 주신 거니까, 갖고 있으면 아이들을 지켜 줄 것 같아서요."
예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경은 자신의 대답이 예희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속으로 안도했다. 희원은 수경이 풀어놓은 패물들을 다시 원래대로 꼼꼼하게 싸서 정리하고, 상자를 닫았다.
- 작은 사모님이라는 호칭이 낯설었다. 그리고 그 호칭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은, 회원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이사장님, 그건 신연옥 자수장께서 만드신 건데요."
"응, 알아. 아주 마음에 쏙 들게 잘 만들었지. 그런데 왜?"
"그런 걸... 이 분께요?"
"왜? 좋은 물건을 써 봐야 안목이 늘지."
예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수경은 등에 진땀이 솟았다. 잠시 후 희원이, 자수 명장이 만들었다는 매듭 달린 귀주머니를 나무쟁반에 받쳐 가져왔다. 예희는 수경이 고른 옥비녀를 검붉은 비단보에 싸서 귀주머니에 넣었다.
- "현중이가 돌아오고, 아이들도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나머지 물건들 받는 것 사양하지 말고."
수경은 눈을 내리깔았다. 동양의 시부모님들이 원하시는 겸손과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회원이 죽일 듯이 노려보는 상황에서, 표정을 관리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딱히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할 이유가 없는데도 잘해 주는 시어머니도 신경 쓰였지만, 이 집에서 제일 신경 쓰이는 것은 희원의 존재였다.
저 사람은 누굴까. 예희의 비서인 것 같은데, 왜 저렇게 날을 세우는 걸까. 현중을 좋아하기라도 했나? 그게 아니면, 상냥하게 대하는 태도는 그저 가식일 뿐이고 예희의 태도 쪽이 시어머니의 본심에 가까운 걸까? 어느 쪽이라도, 수경으로서는 무척 신경이 쓰였다.
- 괜찮을 거다. 여기 영원히 있을 것도 아니고. 처음 만났으니까 더 예민하게 구는 것일 수도 있겠지. 설령 계속 심술궂게 나온다고 해도, 현중이 돌아오면 지금처럼 굴지는 못할 것이다. 논문만 통과되면, 약속대로 돌아올 테니까. 아이가 태어나면, 지금의 이 팬데믹 상황이 끝나면,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가면, 지금 이 모든 일도 그냥 해프닝이 되겠지. 그러면 괜찮을 거야. 수경은 예희가 손에 쥐여 준, 옥비녀가 든 자수 귀주머니를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 연분홍 꽃잎들이 바람에 휘날렸다. 얼핏 보기에는 벚꽃 같았지만 그보다 화사한 것이, 복숭아꽃인 듯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살면서 복숭아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그 꽃보라 속에, 현중이 있었다. 지금보다 어리고 앳되어 보이는,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도련님께서는 저를 모르십니까."
말을 해 놓고도 흠칫 놀랐다. 자신의 목소리인데도 무척이나 낯설었다. 마치 녹음된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나는 진세의 속객이고, 남자는 천상의 선녀가 아닙니까. 낭자께서는 어찌 저를 찾아오신 것입니까."
"도련님께서는 원래 천상에서 비를 내리는 선관이셨습니다."
- 복도로 나왔다가 조금이라도 길을 잃은 듯한 모습을 보이면 누군가 바로 수경을 도우러 나왔고, 아침 7시든 오후 2시 반이든 새벽 3시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의 희원이 곧이어 나타나 못마땅하다는 태도로 수경의 상태를 확인했다.
"저... 스마트폰이 없어진 것 같아요. 도착한 날에는 몸이 너무 피곤해서 확인을 못 했는데."
"공항에서는 가지고 있었니?"
"예, 도착해서 회원 씨에게 전화를 했으니까요."
반지가 사라졌다는 말은 어쩐지 하기 어려웠다. 아들이 사준 반지를 잃어버렸다는 며느리를 탐탁히 여길 시어머니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스마트폰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는 해야 했다. 예희는 그 말을 듣고 딱하다는 듯 말했다.
"네 몸도 홀몸이 아니기도 하고, 도착한 날 공항에서 바로 병원 가느라 얼마나 정신이 없었니. 바쁘게 움직이다가 잃어버린 모양이지. 나중에 잘 찾아보고, 다음에 병원 가는 길에 새로 만들자꾸나."
- 며칠 뒤 희원은 일단 임시로 쓰라며 선군그룹 마크가 박혀 있는 업무용 스마트폰을 하나 가져다주었는데, 어쩐지 찜찜한 기분이 들어 쓰고 싶지는 않았다. 개인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받고 나서야 수경은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수경은 낯선 카페 같은 데서 공용와이파이에 연결한 채 중요한 메일을 쓰면 안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스마트폰과 반지가 사라진 것부터 해서 이 집에서 겪는 모든 일이 계속 신경에 거슬렸으나, 아무리 그래도 ...
- 전화기 저편에서 현중이 머쓱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평소의 수경은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세상과 맞서려는 듯 열심히 사는 현중의 모습을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현중의 말이, 세상 물정 모르고 어리광을 부리는 도련님의 발언처럼 느껴졌다. 뭐라도 자기 힘으로 이루고 싶어서 집을 떠나, 열심히 살았다니. 누구는 자기 힘으로 해 나가지 않으면 무엇 하나 손에 넣을 수 없어서, 죽을 만큼 필사적으로 살았는데.
"아... 그래도 당신에게 나쁘진 않을 거야. 지금 이 상황이."
"그런 것 같더라. 들어올 때도 어머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어."
"그렇지?"
기색을 보아하니 현중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현중은 곧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당신이 배신감 느낄지도 모른다는 건 알아. 하지만 맹세해. 당신 속이려던 거 아냐. 난 대한민국 어디에 가도 우리 집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답답했고, 그래서 미국에서 혼자 열심히 해 보려고 한 거야. 그리고..."
- "논문은 잘되어 가? 어머님께서 걱정하시는데."
"응. 잘되고 있어."
"학위 과정 마치고 돌아오면 여기서 후계자 수업받는 거야?"
"어머니는 그러길 바라시지."
"그렇구나... 그러면 좋든 싫든 내년 초에는 어차피 알게 되었을 일이겠네."
"미안."
현중은 수경에게 몇 번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 "놀랍지 않나요? 근본 없는 집안이 아니라, 오히려 뿌리가 깊은 집안이었기에 살아남은 것이랍니다. 이 집안의 선조는 육충대왕 때 장원급제를 하셨고, 천상의 선녀와 지상의 숙녀를 두 부인으로 맞아 해로하다가, 셋이 같이 하늘로 승천하셨다고 하죠.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보신 적 있나요?"
"아뇨."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곱지 않게 미친 여자였다. 사람이 하늘로 승천하다니, 어디 고대국가의 건국신화 내지는 <홍길동전> 같은 데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수경은 저런 이상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아무래도 불안하여, 자신의 배를 손으로 가리며 희원을 바라보았다. 회원은 미소를 지으며 수경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수경이 고개를 돌리자, 회원의 숨결이 수경의 귓가에 부딪혔다.
"이 가문은 그만큼이나 오래되었죠. 그러다 보니 따르는 전통이랄까, 그런 것도 많습니다. 도련님께서 제 이야기는 안 하시던가요?"
수경은 고개를 저었다. 빨리 이 미친 여자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그때 희원이 수경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안잠자기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나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 "조선 시대에는 원래, 높으신 분들이 생활하시는 방 옆에 구들이 팔리지 않은 옷방이라는 방이 있었습니다. 안잠자기란 그 옷방에서 기거하면서 높으신 분들 말벗도 되어 드리고, 잠자리 시중도 해드리는 여자 하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당신은, 어머님의 레이디스 메이드(lady's maid) 같은 건가요? 전속 시녀?"
수경은 희원의 말을 최대한 자기가 아는 개념에 맞추어 보려 애썼다. 하지만 희원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도련님의 안잠자기였습니다."
"...?"
"역시 외국 출신이셔서 늦으시네요. 보통은 이 정도만 설명해도 알아듣는데."
아니, 짐작은 갔다. 자신이 짐작하는 게 맞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내 희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가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 "아시다시피, 한참 자라는 나이의 남자아이들에게는 걸리적거리는 게 많죠. 성욕이라든가. 저는 도련님의 안잠자기로서, 도련님 공부하시는 동안 시중을 들고, 도련님의 욕망이 학업에 방해가 되면 적당히 해소하시는 것도 도와 드리곤 했어요. 어설픈 여자애들이 꼬이지 않게 감시하는 역할까지 했죠. 그 나이대 남자애들이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건, 사실 사랑이 아니라 욕정에 가깝잖아요? 적절히 풀 곳만 있으면, 공연히 이상한 여자애들과 사고를 치다가 발목을 잡히는 일도 없으니까요. 특히 이런 집도련님들께는, 그런 여자애들이 흔히 꼬이는 법이고."
"그런..."
아랫배가 덜컹거리듯 움찔거렸다. 벌써부터 태동이 느껴질리는 없는데, 무언가 뱃속을 격렬하게 두드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이제 짐작이 가시나요? 저는 도련님을 어릴 때부터 모셨습니다. 번듯한 가문의 따님을 다음 이사장님으로 모실 때까지, ... "
- 수경이 차분하게 묻자 희원은 웃었다.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니 오컴의 면도날이 뭔지 말씀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고요. 작은 사모님, 드라마를 별로 안 보신 것 같은데,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질투가 문제인 거잖아요? 제가 현중 도련님을 사모해서, 그래서 열심히 음모를 꾸미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하지 않나요?"
"제일 단순한 해가 반드시 참이라는 보장은 없죠."
수경은 자수 놓인 주머니에 달린 매듭 술을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이 이야기가 막장드라마라면, 물론 희원의 말이 정답일 것이다. 희원은 수경의 위치를, 현중과 결혼하고, 현중의 아이들을 임신하고, 예희에게서 집안의 패물을 물려받고 며느리로 대접받는 상황을 탐내고 있으며, 희원의 목적은 수경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 "그래서 희원 씨는, 혹시 내 반지 못 봤어요?"
수경이 묻자, 희원은 그제야 입가에서 웃음기를 지운 채 수경을 바라보았다.
"그 질문을, 정말 빨리도 하시네요."
"당신이 훔쳤다는 뜻인가요?"
"누가 갖고 있는지 안다는 뜻이에요."
수경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빈정거리듯 웃었다.
"되게 재미있네요. 어머님께서는 당신을 그렇게 애지중지 아끼시면서도 나한테는 당신이 미친 여자라고 하시지 않나, 당신은 어머님을 그렇게 존경하시면서도 어머님이 반지를 훔치셨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들고. 대체 두 사람, 무슨 사이예요? 오래오래 함께해서 정이 깊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되고 싶었는데, 미국에서 굴러온 돌이 끼어들어서 당황한 사이?"
- "어떤 관계는 너무 오래되면 저주가 되는 법이에요."
희원은 몸을 일으켰다. 허리에 두른 앞치마에 손을 닦고, 그녀는 수경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숨결에는 마치 향목을 태우고 남은 매운 재에서 나는 듯한 향기가 섞여 있었다.
"먼 옛날, 세종대왕 때 경상도 땅에 정씨 성을 쓰는 여인이 살았습니다. 일찍이 백씨 집안의 상자 군자 쓰는 군자와 부부의 연을 맺어 20여 년을 한 쌍의 원앙처럼 살았으나,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지요. 정씨 부인은 천지신명께 아들 하나 점지해 달라고 빌고 빌었는데, 과연 아들을 얻었습니다."
"...?"
"남편이 씨받이 처녀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얻었지요."
"아, 저런."
"씨받이 처녀가 아이를 배자, 정 씨는 자기가 회임을 한 듯이 입덧을 하고, 열 달 꼬박 태교를 하였습니다. 처녀가 아들을 낳자, 정 씨는 그 아들을 제 친자식처럼 길렀지요. 아들의 이름은 선군, 그 자(字)는 현중이라 하였습니다."
- 수경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이건 무슨 이야기지. 설마 예희의 이야기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시기가 맞지 않았다. 세종대왕 때의 일이라고 했으니까. 그럼 대체 이건 뭘까. 회원은 어떻게, 수경이 꿈속에서 들었던 이름을 아는 걸까. 수경은 혼란스러웠다.
- "비록 제 태로 낳은 자식이 아니라 하나, 얼마나 기다리던 자식입니까. 정씨는 선군 도령을 훌륭하게 길러 내었습니다. 용모가 수려하고 성품이 온유하며 문재가 뛰어나니, 어디다 내놓아도 흠잡을 데 없는 청년이었지요. 당연히 명가의 요조숙녀를 육례를 갖추어 짝으로 맞아,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 댁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세가 유복하고 덕이 높은 임 진사라는 양반이 있었는데, 이 댁에는 무남독녀 외동딸이 있었지요. 정씨는 임 낭자를 며느리로 맞아, 아들과 더불어 금슬 좋게 살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지요. 선군도령이 공부를 한다고 산세가 수려한 옥연동에 갔다가, 그만 숙영낭자라 하는 여자를 데리고 돌아와 버렸으니까요."
"지금 그건..."
"사돈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육례도 치르지 않은 채 며느리를 맞게 된 정 씨도 정 씨지만, 혼담이 오가다가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자 임 진사 댁 규수는 이미 사주단자가 오갔는데 다른 데 시집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선군 도령이 혼인하기 전 시첩 노릇을 하던 매월이도 마찬가지였지요. 매월이는 선군 도령을 모시다가, 도령이 혼인을 하여 정실이 들어오면 그늘에서 별당 구석 천첩으로나마 소실 노릇을 하리라 생각하였는데, 선군 도령 눈에는 숙영낭자 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니, 비단옷은 못 입어도 고된 일은 아니하고 살리라는 그나마의 꿈도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 "숙영낭자가 두 아이를 낳은 뒤, 선군 도령은 과거를 보아 급제하였습니다. 정 씨는 이제 마음이 급해졌지요. 선군 도령의 눈에 다시 들고 싶어 했던 매월이에게 사주하여 숙영낭자에게 누명을 씌우고, 숙영낭자가 억울함을 못 이겨 자결을 하자 지난번 혼담이 오간 이후 혼인도 하지 않고 늙어 가던 임 진사 댁 규수를 며느리로 맞아들입니다. 하지만 선군 도령은 죽은 숙영낭자만을 그리워하며 임 낭자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일부종사(一夫從事)가 여인이 지킬 절개라는데, 사내가 되어 일부종사(一婦從事)를 하였으니 갸륵하다면 갸륵하지만, 남은 사람들은 딱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도 임 낭자는 숙영낭자가 낳은 두 아이들을 정성껏 길렀습니다. 제 태로 낳은 자식이 아니라 하나, 어디다 내놓아도 흠잡을 데 없이 길렀지요. 인근의 명가에서 훌륭한 규수를 골라 며느릿감으로 점찍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소용없었지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계속 반복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계속."
희원은 문득, 이젠 다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와 이사장님은 수도 없이 생을 반복하며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만났지요. 이 집안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집안의 안주인은 될 수 있어도, 이 집안의 아들을 낳을 수는 없었어요. 마치 개가 목줄에 매여 끌려가듯이, 우리는 매번 이 집으로 이끌렸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예외는 없었으니, 운명을 거스를 수도 없었습니다."
- 수경은 혼란스러웠다. 그때 회원의 손가락이 수경의 목을 휘감았다. 수경은 뒤로 물러섰지만, 두어 걸음도 못 물러나 발이 나무뿌리 같은 데 걸리는 바람에 피할 수 없는 꼴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사장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셨죠."
"문제라니..."
"매번 돌아오는 그 여자를, 숙영낭자를, 일찌감치 죽여버리셨습니다."
- "현중 도련님은, 이사장님이 낳은 아드님이시죠. 그래요, 그게 답이었어요. 숙영낭자가 두 아이를 낳기 전에 세상을 떠나자, 이사장님은 그제서야 자신의 아이를 낳을 수 있었어요. 그 수많은 생을 거듭한 끝에 처음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제 운명은 바뀌지 않았고, 당신은 또다시 이 집으로 돌아왔네요. 이번에는 두 아이를 한 번에 품은 채로요."
수경은 숨이 막혀 왔다. 하지만 수경의 목을 누르는 손가락 끝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 수경은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희원에게는 자신을 죽일 생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어떻게든 내쫓아 버리면 된다고 생각해서, 그동안 모진 말들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예희는 왜 수경을 내버려 두었던 걸까. 어차피 현중은 자신의 아들이니까, 수경과 희원 둘 중 어느 쪽이 며느리가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심산이었나.
아니, 그것만은 아니다.
수경의 머릿속에 희원의 이야기가 다시 한번 되감기듯 지나갔다. 세종대왕 때 태어난 선군 도령, 선군 도령에게 거는 기대가 컸던 양어머니 정 씨, 선군 도령의 정혼자였던 임 낭자와 선군 도령의 첩이 될 꿈에 부풀었던 매월이, 그리고 그들 세 사람의 ...
- <수경- 나선 미궁 속의 여자들>, 전혜진
- 나머지 승객들의 반응은 거의 모두 비슷했다. 크고 못생긴 앵무새처럼 떠드는 남자 때문에 터져 나오려는 비웃음을 참느라 전체적으로 조금 진동하고 있었다. 상황 파악을 전혀 못한 외국인 승객 하나가 해맑은 표정으로 목소리 큰 남자와 나머지 승객들을 연신 번갈아 쳐다보았다.
- 요새 뉴스에 그 나이대 남자들의 죽음이 많이 보도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사건을 살인 사건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고인은 저 남자와 나이가 비슷할 뿐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 감정을 이입하기에는 지나치게 유력한 이였다. 한 마디로 남자의 말은 피해의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들렸다. 나이깨나 먹은 듯이 보이는 남자 입에서 난데없이 요새 젊은이들이나 쓸 법한 '남혐'같은 신조어가 튀어나온 것도 제법 우스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연속성이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연쇄적인, 그러니까 살인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친 일을 살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모자라, 남혐이라니. 하루에 많게는 예닐곱 번까지도 지하철을 타다 보니, 황당한 소리를 하는 괴인들을 너무 자주 보게 되었다. 공항철도는 그런 사람이 비교적 적어서 좋았는데. 내리기 직전 돌아보았을 때에도 남자는 묘하게 어린애같이 열중한 표정으로 천장 모니터의 뉴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 디자인 랩에서도 그 사건이 화제인 모양이었다. 패스 태그를 출입구에 찍고 들어가자마자 보인 신입 사원 자리에서부터 제작 1팀 팀장 자리 모니터에까지 속보가 떠 있었고, 파티션 모서리마다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 자기 데스크로 흩어졌다. 나는 좀 더 오래 엉거주춤 서 있다가 A룸 앞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회의실 문을 통과한 이사의 목소리는 조금 희미했고, 어쩐지 피로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 원칙적으로는, 또는 상식적으로는, 텍스처 랩에서 디자인 랩에 전달할 것이 있을 때는 퀵 서비스를 이용하고, 디자인 랩에서 공유사항이 발생했을 시에는 인트라넷을 이용했다. 텍스처 랩에서 보내는 것은 주로 실물이고, 디자인 랩이 발신처일 경우에는 대개 무형의 디지털 문서를 공유하는 편이니까. 그랬던 기존 방침이 변화한 것은 퀵 서비스 사고가 발생한 뒤부터였다.
- 사고를 낸 퀵 서비스 기사는 로터리 가운데 내동댕이쳐지듯 크게 굴렀다고 들었다. 천만다행으로 퀵 기사의 부상은 사고 규모에 비해 가벼운 선에 그쳤지만 그가 운반하던 신소재 샘플은 난리통에 분실되었다. 해외에서 비밀리에 입수해 온 에코 퍼소재 10여 점과 해당 소재들을 분석해 우리 회사에서 모방 제작한 샘플 3종이 한꺼번에 증발한 것이다. 자체 제작한 상품 샘플이야 여분이 있기는 하지만 회사 기밀에 해당하는 부분이었고, 해외에서 입수해 온 레퍼런스 일부는 여분이 따로 없었기에, 따지자면 피해 액수가 이만저만이 아닌 대형 사고였다. 이런 상황에 우리 회사는 퀵 기사에게 보상을 해 줘야 하는가, 손배소를 걸어야 하는가. 이런 웃지 못할 소리가 한동안 직원들 사이에서 인사이드 조크로 통했다.
- 그런 배경에서 탄생한 새로운 지침은 아무래도 중의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내부 자료 전달은 "안전 문제상" 직접 전달 및 수령을 원칙으로 합니다.]
텍스처 랩과 디자인 랩에서 인원을 하나씩 지정해 제작 재료와 자료를 직접 운반하게 되었고, 텍스처 랩의 전달담당 인원은 내가 되었다. 왜지? 나 핵심 인력 아니었나. 이사랑 같은 학교 나왔다고 좋아해 줄 때는 언제고 심부름꾼 신세를 만들어. 하긴 내가 생각해도 나만 한 적임자가 없었다. 말이 좋아 자료 전달이지 심부름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일을 전담해도 좋을 만큼 말단인 동시에 이사와 독대하며 자료 설명을 할 수 있을 만큼 전문성과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 텍스처 랩에 나 말고 더 있나.
- 그리고 텍스처 랩은 인천 검암에, 디자인 랩은 서울 상암에 있었다.
- 선릉 본사 건물에 속해 있는 영업 부서와 경영지원실에서야 뭐, 검암이나 상암이나 거기서 거기 아냐? 둘 다 암으로 끝나고,라는 식으로 만만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공항 철도에 올라야 하는 당사자의 입장으로서는, 조선 시대 파발꾼의 처지도 나보다는 나았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희망은 오로지 내년으로 예정되어 있는 신사옥 이전뿐이었다. 상암 신사옥이 완공되면 수도권 각지에 드래곤볼 내지 사혼의 구슬조각처럼 흩어져 있는 어패럴 사업부가 드디어 한 곳으로 모이게 된다는 것. 그건 나만의 꿈이 아니었다. 전 직원의 드림스 컴트루였다.
- "몇 시에 찍힌 거죠?"
"오후 10시경입니다."
"그 시간에 제가 선릉 본사에 있었으니까 지리적으로 가깝기는 하겠는데, 저는 어제 전혀 다른 옷을 입었어요. 스웨이드 재킷은 사진에 이렇게 안 나오죠. 제가 어제 입은 옷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을 거고, 구태여 증언 모을 것도 없이 본사 쪽 폐쇄 회로 카메라를 확인해 보셔도 되고요."
"옷이야 갈아입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캡처 화면 자료를 들고 있던 경찰이 말했고 곧 아차 하는 기색이 그 얼굴을 지나갔다. 이것 당신 사진 아니냐는 말을 대놓고 해 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사가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간접적으로 그 전제를 표현하는 것과, 경찰이 그 전제를 이사 앞에 엎지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러면 출석 요구서를 보내세요."
이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감당할 수 있으면."
소름이 돋을 만큼 냉정한 태도였다. 말실수를 저지른 경찰을 대신해 다른 한쪽이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실례했습니다. 하고는 동료를 끌고 나갔다. 이사는 깍지 낀 손에 이마를 괸 채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어쩌면 저렇게 무례할 수가 있지.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제작 1팀 팀장의 말이 옳았다. 조사 대상이 채나연 이사가 아니라 다른 재벌가 자식이었다면 절대로 이런 식으로 쳐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정중하게 돌려 쓴 공문 같은 걸 띄워 ...
- "옷에 대한 동화 많잖아요. 은혜 갚은 학이라든가."
"그건 뭔데요?"
"일본 동화인데,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위해 자기 깃털을 뽑아서 천을 짜는 학 이야기."
"듣고 보니까 마음에 드는데 일본 동화라니 안 되겠네요. 그걸로 쓰면 일본인인 줄 알 것 같아요."
딱히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언니는 웃었다.
"그럼 뭐가 좋아요? 우리나라 동화 중에."
"선녀와 나무꾼으로 써 볼까?"
"그건 사기 결혼 얘기잖아요. 정말 그게 좋아요?"
"아, 생각났다. 도깨비 감투. 도깨비 감투 얘기 좋아해요."
"그거 좋아하는 거 보니까 뭔가 큰 비밀이 있나 보네."
"뭐예요, 그건. 심리 테스트?"
"그렇다기보다는 이 에세이 A 받는 요령에 가까운 얘기죠.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옷에 관한 동화 요약, 거기서 내가 끌린 이유는 무엇인가 셀프 분석, 동화 분석에서 알게 된 나의 흥미와 관련된 개인적인 에피소드 몇 개 추가, 진출하고 싶은 분야에 대한 생으로 끝. 참고로 신데렐라는 쓰면 안 돼요. 최소 다섯 명은 그걸로 쓰고 있을 테니까."
- 언니는 어디서 그런 요령을 터득했을까. 나는 언니 말대로 에세이를 구성해 마감을 아슬아슬하게 앞두고 제출했고, A 마이너스를 받았다. 교수의 코멘트가 길었다. 미스 채가 썼던 방식 그대로 쓰는 학생이 워낙 많아져서 독창성 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지만 정체성과 관련된 자기 문화권의 동화를 인용한 것은 훌륭했고, 2학년 진급 시에는 텍스타일 전공을 고려해 보면 좋겠다. 요약하면 그런 이야기였다.
- 나는 내 전공에 대한 코멘트보다 점수를 깎은 이유에 흥미를 느꼈다. 어디서 얻어 온 족보에서 본 게 아니라 언니가 창시한 방법이었구나. 패션 전공, 그것도 어지간한 부잣집 자제 아니면 다니기 어려운 학교 학생이면서 너무 아무거나 대충 주워 입고 다니는 것 같아서 솔직히 허술하게 봤는데, 대단한 사람이구나. 나는 차림새만 보고 언니를 마음대로 판단해 버린 것에 새삼스러운 부끄러움을 느꼈고, 언니가 귀국한 다음에야 그 대단한 사람이 재벌가 자식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거 봐 재이, 나이욘이 뉴스에 나왔어. 어느 날 동기가 호들갑을 떨며 보여 준 유튜브 영상 속에서 언니는 생로랑 재킷을 입고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나이욘이 채볼이야?"
경영진이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는 한국의 대기업들을 영어로도 재벌(chaebol)이라고 한다는 사실 또한 그때 알았다. 어쩐지 밥을 너무 잘 사주더라니.
- 채나연이 살인 같은 걸 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믿는 첫 번째 근거는 그런 것이었다. 너무 뛰어난 사람은 누구한테 미움을 받을망정 다른 사람을 미워할 일이 없다. 가령 대기업 이사씩이나 되는 언니는 지하철을 탈 일이 없으니 지하철 광인을 보고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 같은 걸 할 일도 없잖아. 모두가 알고 있듯 부유함이 선량함으로 일대일 환산되지는 않지만, 부유함은 때로 한 사람을 모종의 악의와 적의로부터 완벽하게 차단해 주기도 한다. 어떤 살인에나 동기가 있게 마련이다. 하다못해 사이코패스의 연쇄살인에도 쾌락이라는 동기가 있다. 동기는 곧 콤플렉스고, 콤플렉스는 결핍에서 비롯된다. 내가 아는 한 채나연에게 결핍 같은 것은 없었다. 돈 많지, 유능하지, 그 자존심 강한 뉴욕 패션스쿨 아티스트들로부터 끊임없이 모델 제안을 받을 만큼 외모마저 매력적. 같이 학교에 다니는 내내 나는 언니의 '옷걸이'가 아까워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 그렇다고 성품은 별로인가 하면, 다른 장점들이 워낙 눈에 띄어서 그렇지, 언니는 타고난 성품도 매우 선량한 사람이었다. 한 번은 내가 눈보라를 뒤집어쓰며 학교에 간 적이 있는데, 언니는 나를 보자마자 얼어붙은 내 양손을 끌어 자기 목에 둘렀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언니의 손을 뿌리치다시피 하며 언니 목을 놓았다. 내 손이 너무 차가워서 언니 목은 거의 뜨겁게 느껴지기도 했고, 평소에는 스킨십을 극도로 꺼려서 팔짱 한 번 낀 적 없는 언니가 갑자기 목을 만지게 해 준 것이 어색하기도 해서였다.
이 사람 미쳤나 봐. 내가 별안간 자기 목을 조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나를 그 정도로 믿는 거야, 아니면 누구에게나 이렇게 해주는 거야? 제발 언니가 누구에게나 그렇게 해 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기를 바랐다.
- 경찰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기를 의심하고 있음에 너무 피곤해지고 스트레스를 받아, 차라리 정말 자기가 그랬으면 억울하지나 않겠다고 자조한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까지도 화가 나려고 했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 언니가 뜬금없이 한 그 말이 정말 자백이었다면... 오직 나에게만 털어놓고 싶었던 비밀이 맞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 무언가 미싱링크가 있는 듯한, 앞뒤를 연결하는 부품 하나가 사라진 듯한 위화감이 들었지만 그게 대체 무엇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 언니가 학교를 떠난 지 2년 만에 나도 학업을 마치고 귀국했다. 개인 브랜드 런칭에 도전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입학하기 전부터 꿈꾸었고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내내 구상해 왔으니까. 준비 기간에만 1년이 걸린 첫 브랜드를 접은 것은 런칭 7개월 만의 일이었다. 내 이름을 딴 레이블을 갖는 기쁨 자체는 꿈꾸던 그대로였지만, 막상 사업에 뛰어들고 보니 경영과 디자인을 겸하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 같았다. 동업자가 간절히 필요했지만 막상 구하려니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내가 공감할 수 있는 패션 철학을 지닌 사람이어야 경영에 참여시킬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을 경영에 참여시키려면 디자인에도 발언권을 줘야 한다는 점이 싫었다. 그러니까 혼자 다 할 역량은 안 되지만 혼자서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모순 때문에 개인 브랜드 사업은 지속할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내가 개발 팀장한테서 받은 무언가를 이사에게 전달할 때마다, 남자가 하나씩 죽었다.
- 언니가 복식사 수업 첫 번째 에세이에 어떤 동화를 인용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당나귀 가죽>. 그건 언니의 별명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게 너무 나쁜 별명이라고 생각했다. 늘 세컨핸드 의류, 그중에서도 굳이 허름하고 칙칙한 것만 골라 걸치고 다니는 언니를 비꼬는 거라고.
- <당나귀 가죽>이라는 동화는 구전동화가 아니고 원작자가 있는 이야기다. <신데렐라>의 원저자이기도 한 샤를 페로가 쓴 또 다른 작품으로, 두 이야기에는 손발에 딱 들어맞는 퍼스널 커스텀 아이템으로 인해 주인공의 정체가 밝혀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나귀 가죽>의 시작 부분에서 주인공 공주는 아버지로부터 달아나는데, 공주의 친아버지인 왕이 공주에게 청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전에서부터 명확하게 밝혀져 있는 갈등의 시작점이다. 여러모로 <신데렐라> 이야기와 유사한 이 이야기에서는 <신데렐라>에서처럼 요정 대모도 나오는데, 요정 대모는 공주에게 왕이 아끼는 당나귀 가죽을 결혼 선물로 요구하라 조언한다. 왕은 금은보화를 배설하는, 그러니까 국가 재정의 근본이나 다름없는 요술 당나귀를 죽여 공주에게 선물하고, 공주는 그 가죽을 뒤집어써서 흉측한 모습을 가장하여 왕국 바깥으로 달아난다.
- 왜 <당나귀 가죽>이었을까. 무슨 그런 얘기를 에세이에 쓴담.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너무 이상해서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는데 막상 언니와 마주치면 잊어버려서 어째서 <당나귀 가죽>을 선택했는지 도통 물어보지 못했다. 대신에 언니가 어떤 방식으로 에세이를 썼는지는 복식사 수업에서 교수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어떤 의상은 드러내고 싶은 정체성을 표현해 주고 어떤 의상은 감추고 싶은 정체성을 은닉해 준다. <당나귀 가죽>은 어떤 정체성을 입을 것인지가 선택의 영역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해 준 이야기다. 언니는 그렇게 썼고, 교수는 언니의 글에 대해 언급한 다음 최초의 의상과 관련된 기록들에 대한 수업을 이어 갔다.
- 입고 있는 옷이나 입고 있지 않은 옷 때문에 그 사람의 본질이 변하지는 않는다. 당나귀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을 때도 공주는 자기가 공주라는 사실을 기억했다. 한참 뒤에 동기가 보여 준 언니의 인터뷰 영상을 감상하면서 나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왜 내 깨달음은 매번 이렇게 한 발짝 뒤늦을까.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 그의 죽음은 그전까지의 사망 사건들과 다르게 살인으로 보도되었다. 연예인 2세로서 그 자신도 연예 활동을 하고 있는, 그러나 아버지만큼의 명성은 쌓지 못한 그의 아들이 부검을 요청했고, 시신에서 주사 자국이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약물 주입이 의심되었으나 공기를 주입해 인위적으로 색전을 일으킨 ...
- "내일부터 조사받게 되어 있어. 아마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겠지만 경영에서는 물러나야 할 거야. 그전에, 경영인으로서 직원이랑 잠깐 만나도 수상할 것 없을 때 좀 보고 싶었어."
"우리 그냥 만나도 수상할 거 없어. 학교 동문이잖아."
급한 마음으로 내뱉은 말에 언니는 웃었다. 언니가 살인자인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아니 살인자인 것을 알게 되어서일까, 그 웃음에 가슴이 찌릿하게 아파왔다.
"왜 그랬어?"
"음..."
언니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그런 표정으로 읽혔다.
- "벌거벗은 임금님은 정말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걸 몰랐을까?"
심각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우스워졌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람. 언니는 웃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내 생각은 이래. 가능성은 두 가지. 비록 자기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착한 백성들의 눈에는 틀림없이, 훌륭한 옷이 보일 거라 믿고 광장에 나갔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선의를 믿는 선한 임금님이었기에 순진하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반대의 가능성. 벌거벗은 권력자를 보고도 백성들이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를 조아릴 것이라는 사실을, 왕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기의 권력을 확인하고 그 맛을 만끽하고 싶어서,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 "그게 그냥 허영심에 관한 동화라고 믿는 건 권력을 가져본 적 없는 사람들만의 관점이라고 생각해. 벌거벗은 권력자는 벌거벗어도 되니까 벌거벗은 거야. 그래도 되니까 그렇게 한다. 그게 권력자의 사고방식."
자기 관자놀이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면서 언니는 말했다.
"그리고 벌거벗은 권력자의 딸은, 벌거벗은 권력자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당나귀 가죽을 뒤집어써야만 하는 거지."
나는 병상에 누워 있는 우리 회사의 회장을 떠올렸다. 설마 회장도 자기 아버지도 언니가 직접...
- "유학 가기 전에 내 꿈은 의사였어. 공부 잘하고 효심 지극한 딸인 척하면서 나중에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 방법으로 아버지를 죽여 버리고 싶었거든. 그때 내가 제일 좋아했던 친구는 나랑 같은 일을 겪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애였어. 그런데 그 친구네 집은 형편이 안 좋았어. 딸이 하도 굶어서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공부에 열심이면 나가서 돈을 벌어 밥을 먹여 주든가 하다못해 칭찬이라도 해주든가, 그래야 하잖아? 그런데 걔네 아버지는 술을 하도 처마셔서 딸하고 마누라도 구분을 못 했어. 마누라한테도 하면 안 되는 짓을 걔한테 무수히 저질렀어. 그런 환경에서 걔는 의사가 되려고 했어."
언니는 잠깐 말을 멈췄다.
"그러다가 죽었어."
울음을 삼켜 넘기려 하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버텨 주지. 그러면서 엄청 울었지. 나야 아버지가 지방 공장에 있을 때 서울로 대학 오면서 그런 일로부터 잠깐 벗어났지만, 걔는 과외로 돈 벌어서 가족들 부양하느라 계속 그런 쓰레기와 같은 집에 살아서 그런 일을 계속 당하고 있었던 거야. 장례식장에서 만난 걔 동생한테 걔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 얘기를 했어. 동생은 전혀 몰랐다고 하더라. 자기가 아버지 죽여 버린다고, 지금 당장 죽여 버릴 거라고 하는 걸 잘 타일렀지... 네 꿈은 배우잖아. 그런 일을 저지르면 네 미래는 사라져 버려. 흔적이 거의 남지 않는 방법을 내가 알아..."
- 그 뒤로 일어난 일에 대해서라면 조금 알고 있었다. 우리 그룹의 회장이자 채나연 이사의 아버지인 그 사람은, 언니가 대학에 다니던 중에 차기 경영자로 지목되어 지방 공장에서 서울 본사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온 집안이 서울로 이동하면서 언니는 다시 안전하지 않게 되었다. 도망치듯 유학을 결정하면서 언니는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딸을 아내처럼 대했던, 아내에게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저질렀던 아버지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계획을.
- "언니가 선택한 거지?"
마음이 급해서 목적어도 없이 물었다.
"날... 선택한 거지?"
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전달 담당이 된 것은 우연히 그 일에 들어맞는 위치에 있어서가 아니라 이사가 믿을 수 있는 ...
- <천사는 라이더 자켓을 입는다>, 박서련
- 손가락에 갈퀴를 단다든지, 발뒤꿈치에 굽을 이식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이게 문신이랑 뭐가 크게 다르냐고 하는 애들도 있는데 당연히 다르지. 마약에 쩔 대로 쩔었거나 아니면 인간의 몸에 만족을 못 하는 미친 변태성욕자들이나 받는 수술이었거든. 그중에서도 특히 퍼리들이 많이 받았는데...
퍼리가 뭐냐 하면, 영미 문화권에는 의인화된 동물 캐릭터가 많잖아? NHL 마스코트들 보면 대부분 짐승이랑 사람이랑 반반 섞은 모습이거든. 이런 캐릭터들을 퍼리라고 하는데, 이 퍼리들한테 친숙함을 넘어서 욕망을 느끼는 애들이 있다. 그런 애들도 퍼리라고 불러. 물론 퍼리들 중에서도 신체 개조를 받으면서까지 퍼리 캐릭터를 '닮고 싶어 하는’ 애들은 극단에 속하는 애들이었지.
문제는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우리 대통령이 퍼리였고 신체 개조마니아였다는 거다.
절대 대통령은 훌륭한 학생 따위가 아니었다. 어딜 개조했는지 확실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하나만은 분명하다. 귀를 당나귀 귀로 바꿔 달고 다녔거든. 뾰족한 귀를 달고 사진도 찍고 퍼리 파티에 다녔는데, 지금은 대통령이 됐네. 그 귀는 뗐는지 숨기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다.
밑에 사진이랑 영상 있다. 참고로 역겹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 스크롤 내리기 전에 주의해라.
- [장문충 극혐하는 놈들을 위한 세 줄 요약]
1) 15년 전 대통령 유학 시절에 가까이 지냈음
2) 깨끗한 척하는 대통령 사실 퍼리충, 미국 유학 시절에 신체 개조수술도 받음
3) 념글 올라가면 추가 사진이랑 영상도 뿌림
- 나 39세 이한결, 한국의 여당인 대한쇄신당 국회의원 유생강의 지역구 보좌관이다. 4급 공무원 아니냐고? 6급 비서다. 유생강은 대한쇄신당의 4번 비례대표 국회의원이고 지역구 따위는 없다. 내 직함은 유생강의 지역구에 대한 순수한 희망사항에서 비롯된 것이다.
총선이 이제 1년도 남지 않았다. 다음 해에 치르는 선거에 아직 대중은 별 관심이 없지만, 나는 몸이 다섯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유생강은 내게 지역구 보좌관이라는 직함에 걸맞는 노동량을 요구하는데, 정작 내가 받는 대가는 다른 6급 비서와 같은 수준이다.
사실 거기까진 괜찮다. 과로를 나 하나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건 우리나라 사람들 노멀 컨디션이지. 진짜로 나를 괴롭히는 건 괴소문이다.
-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두건장이’란 닉네임을 쓰는 미친놈이 올린 바로 그 당나귀 귀 이야기 말이다.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1000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설화가 현대에 다시 생명을 얻은 것인가? 하지만 두건장이가 올린, 15년 전의 대통령님이 당나귀 귀를 달고 '섹시하게' 춤추는 영상은 정상이라는 단어의 스펙트럼을 최대한 넓혀도 거기에 속할 수 없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디지털 송장벌레라고 할 수 있는 기기묘묘한 이름의 언론들과 1인 방송인들이 그 떡밥을 쉴 새 없이 나르면서 소문이 순식간에 웹상에 쫙 퍼졌다.
- 노란 조명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래도 무슨 일인지 한번 들어 볼 수는 있잖니."
김케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귀 게이트, 알아? 하긴 모를 리가 없겠지."
"어. 나로서는 왜 논란이 되는지 잘 이해가 안 가긴 하지만. 어릴 때는 실수할 수 있잖아? 사실 취향이 어떻든 남이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수인이라는 게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걸 좋아한다는 게 남한테 피해를 끼치는 일도 아니고. 아, 그런 표정 짓지 마. 혹시나, 혹시나 사실이라고 해도 말야. 그건 정치랑 상관없는 문제잖아."
"일단 말해 두고 싶은데, 대통령님은 그럴 분이 아냐. 정치는 철저히 인간적인 일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도 사람들이 대통령님에게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도록 유도할 수 있어. 실제로 대통령님의 지지율이 분명히 떨어지고 있단 말야."
김케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래서 내가 정치 일을 안 하는 거야. 이해할 수 없어."
"이해하기를 바란 건 아냐. 내가 너한테 원하는 건 하나뿐이야. 도대체 누가 이 루머를 퍼뜨리고 있는지 알아내서 그 사람을 같이 잡자. 따지고 보면 이게 그렇게 정치적인 일은 아니지 않니? 그냥 거짓말쟁이 하나 잡는 거잖아. 원래 너는 항상 진실을 찾는 데엔 앞장서 나섰구."
김케일이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는 말했다.
"하나만 물어볼게. 누가 시킨 거니?"
어쩔 수 없이 옛 기억이 의식의 전면으로 차올랐다.
- 뻔뻔한 인간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라임은 자신의 신상이 노출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시점에 더한 치욕을 보기 싫었는지 뉴질랜드로 도망쳤다. 나귀 게이트는 이제야말로 끝을 보는 듯했다.
나는 오랜만에 진짜 휴가를 보내기 시작했다. 유생강이 내게 나흘의 휴식을 선사한 덕이다. 일단 나는 집에 돌아가 20시간을 잤다. 그 뒤에야 사물에 색상이 돌아왔고 세상의 여러 좋은 향기를 다시 맡을 수 있었다. 문제는 김케일이었다. 일이 꼬여 있었을 때는 매일같이 나에게 먼저 연락하던 애가, 일이 잘 풀리게 된 이후로는 아예 아무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
삐진 건가? 뭐, 기분 좋은 내가 양보해야지. 나는 그와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밤에 침대에 널브러져 있다가, 김케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선 이어폰으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케일! 왜 연락 안 해. 우리 멋지게 해냈잖아. 그동안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 최 수석이 날 아끼는 거 같아. 어쩌면 다다음 총선에서 쇄신당 후보로 출마할 수 있을지도 몰라. 와, 그럼 나한테도 보좌관 생기는 건가? 나도 유생강처럼 지역구 보좌관을 들여야 하나. 흐흐.”
"난 아직 잘 모르겠어. 그냥 인터넷 여론 싸움에서 이긴 거지, 대통령에 대해서 밝혀진 진실은 아무것도 없잖아. 심지어 두건장이가 올린 사진이 조작된 건지도 아직은 몰라."
"왜, 이라임은 아예 외국으로 떴잖아. 찔리니까 도망친 거지."
"자기 성벽이 나라 전체에 소문이 나면 그럴 만하잖아."
- 대통령님이 잠시 침묵하더니 담담히 말했다.
"제 과거의 큰 실수입니다. 그 사진과 동영상 속에 있는 사람은 제가 맞습니다."
대통령님이 직접 인정하자, 청와대 춘추관은 정적에 휩싸였다. 찰칵거리는 카메라 소리마저 잠시 멈췄을 정도였다. 대통령님은 입을 굳게 다문 채로,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대통령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쫑긋한 귀로 국민 여러분의 목소리를 듣겠습니다."
즉시, 무수한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그렇게 나귀 게이트는 끝났다. 두건장이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해의 할로윈에는 당나귀 귀를 달고 나타나는 사람들이 한가득이었다. 우리의 당나귀 대통령. 그전에도 대통령님은 이미 수많은 별명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지만, 이제 당나귀를 대체할 만한 별명은 아무것도 없었다.
- 자, 그럼 쇄신당과 대통령의 지지율은 어떻게 됐을까? 쇄신당은 말 그대로 분쇄되었을까? 탄핵 시비가 공공연히 떠돌기 시작했을까? 쇄신당은 급속히 쭈그러들어 결국 완전한 소멸에 다다랐을까?
- 아니다. 지지율은 잠시 세차게 진동하다가, 이전과 같은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사람들은 다들 젊을 때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명인은 내면에 검은 구석이 없는 인간이 아니라, 검은 구석을 잘 숨기고 혹여 들통나면 빠르게 ...
- "이라임? 두건장이는 대체... 어쩌면 강태영이 그랬을지도...."
"헛소리하지 마. 그럼 왜 대통령님께서 그런 기자회견을 했는데?"
"강태영의 프레임에 휘말렸는데 총선이 코앞이라 시간은 없으니 정면 돌파한 거지. 대통령은 참 영리한 사람이야. 성공했으니까."
김케일의 목소리에 들뜸이 묻어났다. 마치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고 자랑하는 초등학생 같았다. 이 복잡한 세상에 꼭 하나의 진실만 있어야 하니. 김케일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어지러웠다. 분명히 맥주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웃음이 났다.
"아니, 네가 틀렸어.”
"왜? 이건 네 마음에 맞는 증거 아니니? 대통령은 그런 사람 절대 아니라고 잡아뗐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또 대통령 말이 맞다는 거야? 진실 따위가 아니라 그냥 네가 보고 싶은 세상만 보겠다는 거니?"
나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김케일, 내가 숱한 한숨을 쉬게 만드는 사람.
- "원하는 대로 생각해. 어쨌든 네가 틀렸으니까."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는 바닥에 옹송그렸다. 조용했다. 그 정적 속에서, 어떤 가상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 어쩌면 김케일이 내게 완전히 질려, 몇 년 동안 질척대며 간직해 왔던 애착의 끈을 끊어 내는 소리를 진짜 들은 건지도 몰랐다. 상관없다. 괜찮다. 나의 퍼리 대통령님이 있으니까.
- <나의 퍼리 대통령님>, 심너울
서미애
2020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후배 작가들을 통해 두어 번 이름 정도만 들었던 '안전가옥'이라는 출판사에서 원고 청탁 메일이 왔다. 일면식도, 작은 연결 고리도 없는 회사의 메일에 선뜻 같이 일해 보고 싶다고 느꼈던 건 <모던 테일>의 기획이 참신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때 성인판 전래 동화가 붐을 이루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가 아는 동화의 원래 결말이 이렇다며 낯선 버전의 결말을 보여주거나, 잔혹 동화라는 이름으로 자극적인 내용을 강조해서 담은 책들이 서점에 깔렸다. 몇 권 보다가 흥미를 잃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모던 테일>의 기획은 참신하다고 느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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