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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련] 나, 나, 마들렌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8. 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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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서련
출판 : 한겨레출판
출간 : 23.07.07


       


현재까지 읽은 박서련 작가의 작품 중 내적 1-2위를 다투는 책.

좀비부터 가벼운 SF와 순문학을 종횡무진한다.

 

<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팬데믹 시기에 집필한 게 아닐까 싶었는데 의외로 18년 발표작. 처음 읽었을 때는 전남편의 존재가 굳이 필요한가 싶었는데, 극한 상황에서는 그런 관계성에라도 기대고 싶어질 것 같기도 하고. 의리는 지켜주자 싶었을 것 같기도 하고. 좋은 기회다 이참에 싶었나 싶기도 하다.  

 

<젤로의 변성기>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 긴 시간 사랑받고 있는 <젤다 시리즈>와 <짱구는 못 말려>의 강희선 성우가 생각났다. <젤로의 변성기>는 한 세대가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 과정이 사랑이었다는 점도 좋았다. 모성애와 성애 그 사이 어디 즈음. 그랬기에 평생 소년으로 존재하기 위해 노화를 늦추어야 했던, 이라는 표현이 더욱 빛난다. 

  

<한나와 클레어> 

묘한 느낌으로 남은 단편. 좋았다. 결말의 문장이 주는 느낌이 극호. 

 

<세네갈식 부고> 

이 작품만 읽었을 때는 독특한 단편이라고 생각했다. 아진(1)과 드바(2)라는 작명도 기발하다고 생각했고. 한 사람의 죽음은 한 사람의 도서관이 불타는 것과 같다니, 진짠가, 멋지잖아 하고. 이 생각은 <오늘은 예쁜 걸 먹어야겠어요>를 읽고 당황과 떨림으로 바뀐다. 아. 그런 건가. 아냐, 아니겠지. 아니라면 세련된 것이고, 맞다면 토해내야만 했던 것이라고? 아니, 그런 게 아니다. 드바의 도서관. 실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그곳이 불타오르는 상상을 멈출 수가 없다.   

 

<김수진의 경우> 

약간 간지러우면서 좋았다. 부끄러워 해야 하던 것에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에서, 힙하거나 강인한 것을 거쳐 '그냥 존재하는' 것이 되어가고 있는 개념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 안에 숨기고 싶었을 수많은 뾰족한 것들에 대해서는 눈을 피하고 싶다. 엄마, 그 단어가 애틋한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관념에만 집중한다.  

 

<나, 나, 마들렌> 

이 작품도 좋았다. <나, 나, 마들렌>은 도입부가 끝내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적 갈등과 대립의 상황, 마치 내가 둘로 갈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기분에서 끝나지 않는다면. 책을 포장하고 송장을 붙이고 표면이 더럽다는 컴플레인을 걱정해 -그러라고 포장하는 게 아닌가- 담요를 까는 디테일이 주는 현실성이 공포가 된다... 이 소설의 어디까지가 메타포일까? ... 진짜로 둘이 되는 거면 어쩌지. 그럼... 그럼 죽는 쪽이 품었던 건 사라지나. 공유하고 있었으니 의미 없나. 그럼 정말 남는 건 유기체의 처리 뿐인가... 

 

<마치 당신 같은 신>

좋았다. 새삼스럽게 작가가 이상문학상 수상자라는 사실이 떠오른다. 우수작 수상작은 <나, 나, 마들렌>인데. <마치 당신 같은 신>에서.

본문에서 언급된 건 심수봉의 <개여울>이지만, 나는 전은진의 <소월에게 묻기를>로 들었다. 읽는 내내 그 목소리가, 정식 음원으로 발표되지도 않은 그 노래가 들려왔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죽어도 죽어도 죽어도

할 수 없네 난 할 수 없네 허튼 눈물을 감출 수 없네

답해 주오 시인이여

정녕 이것이 마지막인지
가르쳐 주오 왜 당신은 나의 손을 놓으려 하는지]

 

좋았다.

 


    

 

- 가끔 도시로 돌아가 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방송을 진행하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도 일었다. 도시의 상황을 알리는 유일한 프로그램은 <57분 교통정보>였다. 여전히 도로 상황을 다루고는 있지만 정체를 유발하는 건 더 이상 차들이 아니어서 그걸 과연 교통정보라고 불러도 좋을지는 모르겠으나.

- 서부간선도로에 수천 명 규모의 감염자들이 출현했습니다. 먼 길 가시는 운전자라면 안전을 위해 개인용 화기를 지참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바로 이런 식의 정보가 시간마다 주어졌다. 서울을 벗어난 이상 대개는 쓸모없는 정보였다. 그래도 듣고 있자면 일종의 체계가 느껴져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은 도시에서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어떤 인간이 죽지 않고 살아 뭔가를 하고 있다. 아무 접점이 없어 얼굴을 상상할 수도 없는 인간이, 인간들이... 살아 있다.

- 지나갈 만한 공간을 만드는 데 한참이 걸렸다. 비교적 형태가 온전한 뒤의 차량들은 운전석을 비운 뒤 직접 몰아 옮겼다. 캠핑카에 올라타 가지런히 세워둔 차들 옆을 지나갈 때는 은근한 쾌감이 들었다. 서행 중에 펑펑 울리는 폭발음이 들렸다. 옷가지에 붙인 불이 드디어 차에 옮겨 붙은 모양이었다. 캠핑카에서 내려 담배에도 불을 붙였다. 높아지는 불길 주변으로 파리 떼가 날아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해 질 무렵 주유소를 찾았다. 멀리서 보면 주유소는 고인돌이나 스톤헨지처럼 느껴졌다. 필요 이상으로 높은 지붕과 그걸 떠받친 기둥들이 기묘하게도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 주유소는 비어 있었다. 손도끼를 들고 내린 주제에 섭섭해졌다. 나 같은 사람 몇몇이 다녀갔는지, 주인이 직접 뽑아 갔는지 기름도 얼마 남지 않은 채였다. 잠은 주유소에서 청했다. 서울을 떠난 뒤로 차 밖에서 자기는 처음이었다.

- 가구 아웃렛 단지를 지나올 때 생각이 났다. 서울에서 멀어지면서 아무 가게나 그냥 들어가 하고 싶은 대로 휘젓고 나오는 재미를 알아가는 참이었고, 마침 그즈음 마땅한 차를 찾기가 어려워 단지 앞 도로를 한참 걷던 터라 피곤하기도 했다. 견물생심이라고, 저마다 침대가 얼마나 우수한 ... 

 

- 마지막으로 운 것이 그날이었다. 무사히 도망치려고 추파에 응하는 척해야 했던 게 자존심 상했다. 차를 세우고 마음껏 울고 싶었지만 다른 차를 찾아 타고 따라올까 봐 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달리다가 창밖으로 열쇠를 힘껏 던졌다.

- 도끼를 보여주며 가라는 손짓을 해 보이자 창밖의 남자는 털썩 주저앉았다. 김 서린 창에 어스름하게 무릎 꿇은 모습이 비쳤다. 남자는 와이퍼질을 하듯 창을 쓱쓱 닦았다. 그러더니 양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그렇게 목이 마르면 창에 서린 김을 핥아먹으면 되잖아. 한 점 악의도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장 안 꺼지면 죽여버릴 거야.
이번에는 목을 가다듬고 제대로 말했다. 남자는 주춤거리며 일어나 천천히 멀어져 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남자가 다녀간 것이 더는 실감이 안 났다. 귀신이었나. 창에 남은 손자국 말고는 방금 일어난 일의 증거랄 게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잠들지 못했다. 어디서 짱돌이라도 들고 와 창을 깨고 억지로 들어오면 어쩌나. 젊은 남자가 제대로 덤비면 이기기 어려울 것 같았다. 둘 다 크게 다칠 거고, 운이 나쁘면 둘 다 죽겠고, 최악의 경우에는 나만 죽겠지 그런 생각 ...  
 
- 자꾸 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막는 것은 어렵지 않다. 차만 있다면. 살기 위해서는 좀 더 먼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내게는 그게 남편을 면회하는 일인 거다. 지금쯤은 죽었을지 모르고, 죽기 전 적어도 마지막 1년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전남편을.

- 너 아직 군대 안 갔다 왔지?
남자애의 표정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앞으로도 못 갈 거 같은데요.
군번줄 있잖아. 개 목걸이라고 하는 거.
네.
전쟁 중에 군인이 죽으면 그걸 입에 넣고서 턱을 발로 찬대. 
왜요?
이 사이에 그게 단단히 박히게 만들려고. 시체가 다 썩어서 해골이 되어도 빠지지 않게.
그런데요?
남편이 그거 하는 사람이었거든, 군대에서.
그래서요?
그 새끼 죽었으면 내가 턱 차 주려고.
남자애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 여자애가 있다.
어리고 예쁘고 재능 있는 여자애.
어리기 때문에 아직 순진한 구석이 있고, 자기가 예쁘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 듯하지만 '그렇게' 예쁘다는 것만은 영원히 눈치채지 못할 듯한 아이. 재능에 대해서도 비슷한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스스로 좋은 목소리를 가졌음을 알고 이 업계에 관심이 있어 진입했지만 어째서인지 적당히, 그저 그런 '여자' 연기만을 해왔다. 
이름은 희강. 이희강.

- 희강과는 오디오북 녹음을 할 때 처음 만났다. 살아 있는 이상, 같은 일을 하는 이상 어떻게든 만나게 되었을 것이고 그게 언제가 되었든, 어떤 방식으로 변주되었든 일어나야 할 일들은 일어났을 것이다.

- 그때 아리데쟈의 머리 위로 모여든 빛이 화살 모양으로 변하며 시위에 내려와 걸렸다.
나는 가득 모아뒀던 숨을 터뜨리듯 내뿜으며 외쳤다.

"안돼, 쏘지 마!"
하뮈티온의 목소리가 카밧사산의 검붉은 밤하늘을 찢었다. 놀란 산새들이 일제히 솟구치듯 날아올랐다.
수천수만 개의 깃발이 한꺼번에 나부끼는 듯한 효과음이 울렸다.
나는 문득 헤드폰 밖 공간이 얼마나 고요할지를 생각했다.

 

- 녹음실 유리 너머에서 피디가 바로 지금이라는 듯 손으로 허공을 내리쳤다. 급히 대본을 보고 다시 숨을, 왜냐하면 대사 앞에 숨을 몰아쉬며,라는 지시가 있기 때문에 숨을 모은 다음 ...

- 아무 말이라도 내게 건네서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조바심. 그게 전부 한 얼굴에 담겨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했다.
"선배님 정말 팬이에요. 젤로 목소리도 너무 좋아하고요. 이번 하뮈티온 캐릭터도 멋있어요."
나는 가만히 눈만 아래로 내려 떠서 그 애의 이름과 캐릭터를 확인했다. 아리데쟈 역 이희강. 치아프 숲 출신 엘프. 용병으로 추정되는 수수께끼 인물에 의해 친누이 이마라를 잃었다. 이마라를 보호해 주지도, 그녀가 떠난 후 제대로 예를 갖추지도 않은 엘프 사회에 환멸을 느껴 인간들 틈에 섞여 살아가고 있다. 복수하고자 직접 용병이 되어 정보를 수집하던 중 고용주의 명령으로 주인공 제나 일행과 동행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친누이 이마라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자신의 오해로 죽일 뻔했다는 죄책감에 일행을 떠나려 한다. 


- "저는 원작 팬이기도 한데, 하뮈티온 정말 인기 많거든요. 특히 동인녀들은 주인공보다 하뮈티온 더 좋아해요. 선배님 캐스팅 정보 풀리면 난리 날 거예요." 
하뮈티온은 콘사다성 성주의 이복동생으로 성주 세습의 권력 다툼에서 벗어나 마법사가 된 인물이다. 과묵하나
지혜로워 제나 일행의 등대 역할을 수행한다. 불같은 성격의 제나와 얼음 같은 성격의 스뮤키다를 중재하며 코믹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제나 일행과 만나기 전부터 인연이 있던 이마라가 자신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녀의 언니 아리데쟈를 사랑하게 된다.

-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희강을 쳐다보았을 때 모든 것이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그때 이미 많은 것을 예감한 듯하다. 정확히 무엇에 대한 예감인지는 모른 채로.

-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희강의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봤다.
이희강, 21세, 소속사 세컨드임팩트, 데뷔 케이블 2U <픽업 라디오스타>(세미파이널). 케이블 2U 성인 다큐멘터리 <리얼남자>(내레이터), 케이블 애니월드 <스타☆스타 레볼루션>(예라 역), 모소프트 <섹시맞고>(클럽녀 역)...

데뷔 프로그램명이 눈길을 끌었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인기에 편승해 어느 케이블 채널에서 단 한 명의 성우 ... 


- 일본 원작의 성우조차 두 번이나 교체된 마당이니 젤로를 연기한 사람의 의견 중에 내 의견보다 고유하고 정통한 것은 앞으로도 나오기 어려울 터다. 그렇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는 아무에게도 내 생각을 밝히지 않을 작정이다.

- 나의 젤로를 생각하면 늘 석류가 함께 떠오른다.
왕년에 미녀 배우로 추앙받았으나 이제 엄마나 이모 배역밖에는 주어지지 않는 여자들의 연로에 대해서도.

 

- 성우들은 다르다. 관리만 잘하면 오랫동안 같은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다.
당연히 젤로를 맡았던 첫 순간부터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내가 이렇게 오래 이 역할을 맡을 거라 예상하지 못하기도 했고.

 

- 문득 내 안의 젤로가 변성기를 맞으려 한다는 생각이 든 순간이 있었을 따름이다. 일정한 호흡과 일정한 정서로 연기하는데도 어쩐지 전과는 다른 소리가 난다고 느낀 순간.

그즈음 생리가 완전히 끝났다. 남들보다 빠른 줄은 알았지만 병원에서 말한 것처럼 조기 폐경이라고 느끼지는 않았다. 그것만 빼면 건강한 편이었고 오히려 앞으로 편해지겠다는 안도가 더 컸다. 애정을 갖고 있는 주특기 캐릭터 연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랬다.

- 다른 노력은 할 줄 몰라서 꾸준히 먹는 것으로 극복하려 했고,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잠들기 두어 시간 전 무조건 온수에 일대일 농도로 희석한 석류즙을 마셔 왔다. 따뜻한 석류즙은 역하지만 차갑게 마시면 목이 칼칼해 기침이 나니까. 기침을 해서 기도와 성대에 무리를 주는 것보다는 코를 쥐고 단순한 온수라 믿으며 마시는 편이 나으니까. 장복을 견디면서 역한 목 넘김도 그럭저럭 참을 만하게 되었다. 냉장고 야채 칸을 신선한 석류즙으로 그득히 채워둔 지가 5년이 넘었다. 기분 탓인지 실효가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러고부터는 다시 젤로를 연기하는 데에 무리가 없어졌다.

- 그러니까, 영원히 열여섯 살 소년이기 위해 여자로서의 노화를 최대한 유예해야 했고 실제로 그러려고 노력해 왔으니까, 이런 말을 한들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테고 이해받기를 기대하지도 않으니까 아무에게도 이에 대해 말할 수 없다.

- 누군가는 이해하리라고 믿지만 그건 내게 직접 들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알아차려서라야 한다.

 

- 안경점 주인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시력검사대에 올려둔 턱에서 긴장이 빠져나갔다.
"당뇨 같은 건 없으시죠?"
"네."
노안이라는 낱말의 질감은 오래 도망치다 마침내 붙잡힌 사람이 느낄 법한 무력감과 이상한 안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늙었구나. 모르지 않았으나 남의 입으로 듣고 싶지는 않은 말이었다.

 

- "나이 마흔 넘으면 이르든 늦든 누구에게나 노안이 와요. 오선재 님도 연세에 비해선 불편을 늦게 느끼신 것 같네요. 지금부터만 관리 잘하면 걱정하실 것 없어요."
안경점 주인이 고객 카드에 적힌 이름과 나이를 건너다보며 말했다. 그 건조하고 사무적인 태도가 고맙기도, 조금 불쾌하기도 했다. 고마움도 불쾌함도 이유는 같았다. 그가 나를 이 정도 나이에 이른 누구와도 다르지 않게 대하고 있다는 것. 
"그럼, 어떡해야 하나요."
"안경을 맞춰야겠지요?"
주인은 안경점에 뭐 하러 왔냐는 투로 되물었다.
 
- "그런데요. 저 진짜 진지해요. 좋은 성우가 되고 싶어요."
떨리는 목소리를 붙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다못해 손이라도 다시 잡아주어야 하나 고개를 숙인 채 골똘해졌다. 잡아주어야 하는 게 맞는지 그냥 내가 그러고 싶은 건지 헷갈려하면서. 

 

-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진작부터 선배님 팬이었어요. 저 덕질 오래 했거든요. 전문 성우가 되기엔 소질이 부족하다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 선배님 연기 보면서 꼭 성우 되고 싶다 생각했어요."
그 말을 듣자 의중에도 조금 우쭐해지려고 했다. 어른스럽지 못하다 스스로를 나무라면서 애써 얼굴의 웃음기를 지웠다. 희강은 조금 떨면서 말했다.
"꼭 선택님처럼 되고 싶어요."

 

- 그 말은 엄마 같다는 말보다 훨씬 슬펐다. 나처럼은 안돼,라는 말이 울음이 터질 듯 부풀어 좁아진 목 안을 자꾸 더듬어 나오려 했다. 왜요,라고 묻겠지. 나처럼 되어선 안된다는 말이 나처럼은 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리겠지. 저주라고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그 애가 이해할 수 있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 꼭 나처럼 되렴 하고 별 마음 없는 덕담을 건넬 수도 없었다. 그거야말로 저주라는 사실을 내가 아니까. 거의 평생을 소년의 목소리로 살고, 그걸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까지 쳐야 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 끝내 희강의 손을 다시 잡지는 못한 채로 지하철역에 다다랐다. 그쯤에는 손을 잡으려는 마음이 내 욕심일 뿐이라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해져 있었다.

- 집에 도착해서는 공기청정기 파워를 3단계로 올리고 샤워를 한 뒤 더운 물에 탄 석류 음료를 마시고 양치에다 꼼꼼하게 가글링까지 한 다음 바로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눕기까지는 늘 하던 대로와 같지만 평소보다 일찌감치 잠을 청하기로 했다. 피곤했으니까. 잠과 깸의 경계에서 문득 나를 만지는 차고 부드러운 손길을 알아차렸다. 어떤 이도 이런 방식으로 나를 만지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골반 부근을 헤매는 손 위에 손을 포개고, 거기 이어진 손목과 팔을 이불 속에서 천천히 더듬어 올라갔다. 돌아누우면 이제 손에 닿는 것은 차고 가냘픈 어깨, 다음은 드디어 유방이다. 부드럽고 벅찬 탄성.  

- 브리핑이 필요한 것은 이번에 유독 연예인 출연자가 많아서겠지. 작품에 애정이 있든 없든 홍보 효과만을 노리고 억지로 모셔 온 귀하신 몸들. 배급사가 바뀌었다더니 새 극장판 성우진에는 나도 TV로밖에 본 적 없는 연예인이 꽤 많았다. 하기야 이런 식의 캐스팅이 아니었다면 애니메이션 커리어가 적은 희강도 출연하기 어려웠겠지. 
조연출의 손길을 따라 젤리, 젤라 역의 성우들이 소개되었다. 각각 한두 번씩 교체되어 들어오기는 했어도 함께 작업한 세월이 짧지는 않아서 친근한 사람들이었다. 젤로의 이름이 불릴 때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했다. 멀리에서 희강이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젤리, 젤라 성우도 웃으며 손을 모았다. 배급사에서 흥행을 노리고 데려온 중견 개그맨들은 손을 움직이면서도 왜 저 여자가 박수를 받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조연출의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오선재 선생님은 TV판 시청률 절반을 책임지고 계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주인공인 젤로몬 주니어, 통칭 젤로 목소리를 완벽 소화하고 계시거든요." 
박수 소리는 한층 커졌지만 아까의 몇몇은 더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힐끔거렸다. 

- "원래 젤로 음성도 좋지만 지금 톤도 느낌이 좋네요. 섬세한 톤인데 그걸 잘 잡아내시는 것 같아요."
도리어 칭찬이 돌아오자 더 당황스러웠다. 그게 아니야. 톤을 잘 잡아냈다든가 섬세하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고. 진짜 변성기가 온 거야.

- 그리고 이번에는 막거나 피할 수 없어.

- 아무 위화감도 느끼지 못한 채로, 그저 언제나와 같은 맹목으로 내 입만을 쳐다보는 희강을 마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건 다 너 때문이야.

- 명목상의 주 관람 타깃인 초등학생들의 여름방학과 실질적 주 관객층인 2030 여성 팬들의 휴가 시즌에 맞춰 개봉일을 정한 극장판 애니메이션인 만큼 작업 일정은 촉박했다. 배급사에서 무리해 섭외한 연예인들의 스케줄이 들쭉날쭉한 탓에 최고참인 나도 예외 없이 밤샘 녹음을 이틀이나 해야 했다. 배급사의 어린 여직원들이 미안해하며 사다 놓은 자양강장제를 한 시간에 한 병씩 마시며 버텼다. 

-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희강은 발끝을 내려다보며 감정과 호흡을 다잡은 다음 젤로의 시그니처 대사를 읊었다.
악마보다 나쁜 인간을 진짜 악마가 가만둘 순 없지! 젤로 님이 단죄해 줄 수밖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 조금 뒤늦다 싶은 순간에 박수가 나왔다. 박수 소리가 개인기를 선보이겠다 선언했을 때보다 오히려 작아져서 희강은 멋쩍어했다.

 

- 당연하지, 이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사실 우리 애니메이션에 별 관심이 없으니까. 오리지널 젤로의 목소리 같은 건 아직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 훨씬 많을 테니까.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면 곧 그 애 목소리가 얼마나 완벽했는지를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그 증거로 내내 작업을 함께해 온 출연진이 먼저 놀라고 있잖니. 내가 이렇게 놀랐지 않니. 단숨에 소년 악마 역할에 몰입했다가 순식간에 긴장과 불안을 품은 예쁜 여자애로 돌아온 희강의 옆얼굴을 보면서 나는 평생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갈증을 느꼈다. 영원히 목이 쉴 것만 같은 진하고 고통스러운 갈증이었다. 

- "오선재 선생님, 어떻게 들으셨나요?"
진행자 역시 젤로의 목소리를 몰라서인지 평가를 내게 떠넘기려 했다. 그게 얼마나 잔인한 질문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젤로뿐. 그러니까 아마도 너와 나, 그렇게 오직 둘뿐. 나는 목이 멘 기색을 숨기려 애쓰며 말했다.
"저는 이제 은퇴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나의 대답이 제법 괜찮은 농담처럼 들렸는지 객석에서 박수와 폭소, 함성이 터져 나왔다. 희강이 완벽한 젤로 연기를 선보였을 때보다 더 큰 반응이 나온 것이 다소 모욕적이라 느끼면서 나도 웃었다. 그게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그걸 농담으로 생각할 요령조차 없는 희강만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 질문은 다시 연예인 출연진에게로 돌아갔고 나는 테이를 아래를 더듬어 희강의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이윽고 희강이 그 위에 손을 겹쳐 깍지를 꼈다. 지금 하는 행동이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를 이 애가 알고 있을까 의심하면서, 그러나 영원히 몰라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손과 무를 사이의 온기로 손끝에서부터 녹아 없어지는 나를, 나의 젤로를 상상했다.

- 네가 사랑하는 젤로는 너를 사랑해서 어른이 되어버렸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이 말을 소리 내어 발음하지 않겠지만 언제가 되었든 어떤 계기로든 네가 이 마음을 알아 ...

 

<젤로의 변성기>


- "평일 베이컨시가 많아서 룸 업그레이드까지 도와드렸어요. 그럼 향기로운 시간 보내세요."
캐시 트레이에 카드 키 파우치가 가로로 놓인다. 과연 그렇구나. 이렇게 두면 키 파우치를 집어 올리는 순간 키파우치에 각인된 로고 뒤로 트레이에 새겨진 똑같은 로고가 한 번 더 눈에 들어오지. 세심한 부분까지 접객 트레이닝을 하는 티가 딱 나네.

 

- 한나는 로비 직원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애초부터 입꼬리를 한껏 당겨 웃는 얼굴이었던 직원 역시 한나의 인사에 눈까지 구부리며 웃어 보인다. 쾌적한 상호작용. 한나는 망설임 없이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는다.

- "주워주세요."
한나의 말에 드디어 룸메이드의 표정이 변한다.

 

- 뭐지? 미친년인가?
"주워 오시라고요."

클레어는 그대로 선 채 눈만 더 크게 뜨고 고객을 바라본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진상이 진상이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진상 부릴 타입처럼 보이지 않아서 더 놀랍다.
어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연푸른색 셋업. 떨어져 있는 휴대폰도 요새 유튜브 틀 때마다 광고하는 신모델. 발 뒤에 떨어진 가방은 그 자체도 명품이지만 손잡이에 감아놓은 스카프가 더 명품이다.

 

- 스태프를 종년 부리듯이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라면 클레어가 잘 안다. 평소 럭셔리한 대접이 익숙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았던지라 억지를 부려가며 일하는 사람을 막 대한 다음, 상대가 껌뻑 죽는시늉해 주는 꼴을 기어이 봐야만 하는 인간들. 그러지 않으면 고급 호텔에 투숙하는 걸 도통 실감할 수 없다는 듯이, 클레어가 그걸 잘 아는 이유는 일하면서 심심찮게 진상을 겪어봐서기도 하지만, 본인도 스트레스 푼답시고 다른 호텔에 묵으며 아주 꼬치꼬치 진상을 떨어봐서기도 하다. 진상은 궁상의 친척이다. 그러니 한마디로 눈앞의 고객은 그것들과는 연이 없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지랄이지?

- 클레어는 트롤리 손잡이를 놓고 쪼르르 달려가 허리를 접는다. 아니 허리가 아니라 무릎을 접어야 하나... 이 사람이 왜 이러는지를 모르겠어서 자기가 지금 제대로 처신하고 있는지가 헷갈린다. 휴대폰을 집는 김에 바닥에 흩어진 카드 키와 카드 키 파우치까지 모아서 양손으로 건네준다. 이거면 마음이 풀리셨을까요? 그런 심정으로. 애초에 화난 얼굴이 아니었던 고객은 여전히 별 감흥 없는 표정을 띤 채로 클레어가 건네는 물건들을 받는다. 기분 탓인가? 약간 낚아채듯 가져가네, 아무리 원래 다 자기 물건이라지만. 띠리릭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고객은 인사도 없이 쏙 들어가 버린다.
 

-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못하나? 그런데 이런 사소한 일에 분통 터뜨릴 때가 아니다. 콜이 와서 부랴부랴 달려가던 참이다. 호텔 규정상 스위트룸 이상은 반려동물 동반 투숙이 가능한지라 베딩을 다시 해달라는 둥, 수건 여벌 좀 넉넉히 갖다 달라는 둥 콜이 매일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침대에다 볼일을 보는 반려동물은 마려워서 싸는 게 아니라 환경이 바뀐 스트레스를 표현하는 것이어서 하루에 몇 번씩 똑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다. 베딩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다시 콜이 들어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예 자포자기해서 여분 시트와 이불을 주고 가면 알아서 하겠다는 고객들도 꽤 있지만 운영 방침상 베딩 용품을 고객에게 그대로 제공해서는 안 된다. 왜? 도난 위험이 있으니까. 물론 고객한테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할 수는 없어서 그냥 언제든 부르시라, 얼마든지 다시 해드리겠다 해야 하고, 그러면 정말이지 몇 번이고 그런 일이 반복될 수가 있는데 그게 뭐... 
 
- 차이를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한나와 클레어는 사실 옷만 바꿔 입는다면 누가 한나고 누가 클레어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서로 닮았다.
그런 경우는 뜻밖이랄 것도 없이 흔하다.

 

<한나와 클레어>



- 오늘은 도서관에 불을 지를 계획이다.
휴가 기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그 밖에도 많고 휴가를 보내는 방식으로 선택하기에 불 지르기 같은 것은 일반적이지 않음을 알지만 어쨌든 내 경우에는... 그러려고 한다. 어차피 휴가 중이라 시간은 넉넉한데 어쩌면 이틀이나 사흘 정도 구치소에서 보낼 수도 있으므로 첫날에 지르는 것이 좋다. 아무래도 방화 경험이 전무하다 보니 정확히 어느 정도가 중죄인지에 대한 감각이 없고 따라서 며칠 구금되는지를 모르는데 휴가 기간보다 구금 기간이 길어지면 곤란하겠지만 사실은 그렇게 간절히 계속 다니고 싶은 직장은 아니고 해서... 결론적으로는 크게 상관이 없다.

 

- 그건 그렇고 사람들은, 이라고 말할 때마다 내가 사람들에 대해 대체 무엇을 아는지 자신이 없어지지만 이것만은 확언할 수 있다고 믿으며 말하건대, 대체로 휴가 기간이든 근무 중이든 방화광이든 그렇지 않든 하필 도서관에 불을 지르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모처럼 푹 자고 개운하게 일어난, 마침 날씨도 좋은 날에, 내가 가지 못했던 장례식과 장례식이 있기 몇 주 전 장례식의 주인공 하고 나눈 대화를 연속으로 떠올린 이상은 도서관에 갈 수밖에 없게 되었고, 도서관에 가면... 불을 지르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 아무 도서관에나 무턱대고 불을 지를 생각은 아니다. 드바의 도서관에 가야 한다.
물론 드바의 도서관이란 우리가 함께 다녔던 학교의 생활도서관.
집에서 버스로 삼십 분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졸업하고는 단 한 번도 얼씬거린 적 없는 곳이다.

- 아무려나 그렇다면 달리 어디를 드바의 도서관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곳에서 드바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이 있을까. 드바보다 그 도서관에 더 많이 기여한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 기여도의 중점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서는 학교에 생활 도서관을 만들고자 투쟁한 1990년대 학번 선배들의 공이 더 크다고 할 수도 있겠다. 생활 도서관을 만든 것이 그들이라면 2010년대 생활 도서관에 산소호흡기를 대고 있던 사람은 드바였다. 학생운동이란 말이 사어가 되어가는 대학 캠퍼스에서 일평균 한두 명 정도밖에는 찾아오지 않는 작은 도서관, 어학용 소강의실 두 칸을 터서 만들어 모양새로는 도서관이라 부르기에도 실은 민망한 구색인 그곳에 드바는 묵묵히 머물며 신간에 십진 분류표를 붙이고 역시 한두 명밖에는 참석하지 않는 세미나를 준비하고 청소와 문단속과 그 밖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했다. 평회원이었을 때부터 긴 관장 임기를 마친 뒤 운영 위원이 되고 졸업한 이후에도 종종 그러다 마침내는 불타오를 때까지. 

- 얼핏 만드는 일과 지키는 일 중 전자가 더 중요하고 어렵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그건 착시다. 인간을 만드는 것까지야 뭐 대충 아무나 최소한 두 사람만 모이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기껏 만들어놓은 한 인간이 죽지 않게 돌보아 주는 일은 누구한테나 어려운 것처럼... 


- 드바가 그렇게 지킨 도서관에 내가 불을 질러야 한다는 사실이 다소 고약하게 느껴지기는 해도 큰 내적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내게는 언제나 도서관보다 나의 친구 드바가 중요했고 나는 드바가 바란 대로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뿐이다.

- 세네갈식 부고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몇 달 전이다. 물론 그 이야기를 해준 사람도 드바였다. 세네갈에서는 어떤 사람의 죽음을 예의 바르게 표현할 때 "그 사람의 도서관이 불탔다"라고 말한다. 드바는 수전 올리언의 책에서 이 표현을 읽었다.

- 세네갈? 그 아프리카 세네갈?
그럼 경기도 의왕시 세네갈구 세네갈 동이겠냐.
세네갈에 그런 세련된 표현이 있다고? 세네갈에... 도서관이 있어? (말하고서야 깨달았지만 이런 말을 무례하지 않게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거 봐, 자기도 똑같은 소리 하면서, 컬추얼 인센서티비티는 너나 나나.
드바는 사레가 들린 듯이 켁켁거리며 웃었다.
있긴 있겠지. 책 한 100권 정도 꽂혀 있는 마을문고도 도서관이면 도서관이잖아. 장서 수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런 얘기 하려고 전화한 거야?
응.

- 그리고 드바와 나는 둘 중 한 명이 죽으면 세네갈식 부고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산 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의 도서관에 불을 질러주기로. 그때는 약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드바와 자주 주고받던 농담의 일종 또는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고상하고 많이 상스럽고 쓸데없이 비장하며 매우 구체적으로 실없는 농담, 애서가들만의.

- 드바의 도서관은 그로부터 2주 후에 불탔다.

- 오늘에 와서야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드바의 함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해본다. 드바는 자신의 도서관이 불탈 것을 알고 자신의 도서관에 불을 질러달라는 주문을 남긴 건 아니었을까. 드바라면 그럴 수도 있다. 반대의 상황을 상상했을 때 드바라면 이런 의심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애초에 그 요청을 먼저 한 쪽은 내가 아니라 드바니까...
이런 생각이 들어도 무리는 아니다.

- 종종 드바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상상했다.
도서관지기로서 일찌감치 과 생활을 포기했으니 과동기나 선후배는 거의 오지 않았을 것이다. 생활 도서관의 2010년대 학번인 우리에게는 선배가 많고 후배는 손에 꼽는데 어느 쪽이든 부조를 넉넉히 할 만한 사람은 별로 없다. 나는 드바의 부모님을 그의 졸업식 때 딱 한 번 뵈었다. 두 분 모두 너그럽고 긍정적인 성격 같았다. 

- 4층 중간까지 헉헉거리면서 오르고 보니 5층 복도가 어두웠다. 설마 하며 층계참을 돌아 올라가자 계단 앞에 공사중 표지판이 놓여 있었다. 표지판을 슬쩍 밀며 고개를 빼고 보니 생활 도서관 문 앞은 각종 공사 부자재들로 가로막힌 채였다.
전체 학생 대표자 중에서도 절반 정도는 존재를 모르고 나머지 절반 정도도 그냥 뭐, 원래부터 있으니까 있는 것이려니 해왔기에 큰 존재감 없이도 학생 자치기구 지위를 오랫동안 유지해 왔던 생활 도서관은 학교 청소 노동자 파업 때 '튀는' 바람에 이듬해 전체 회의에서 자치기구 자격을 박탈당했다. 전체 학생 대표자, 그러니까 총학생회와 졸업위원회 국장 이상 임원 및 각 단과대와 과 학생회장단을 합쳐 80여 명 중 과반이 동의한 결과였다. 

- 먼저 떠날 수도 있었다. 나는 그냥... 보고 싶지 않았던 거다. 드바의 영정 사진 같은 것은.

- 나는 드바를 진심으로 좋아했지만 드바를 생각하면 피곤하기도 했다. 드바는 늘 싸우고 있었고 그건 생활 도서관 관장으로서 드바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며 나 또한 항상 물러서지 않는 드바를 좋아했다. 그러니까 총체적으로 엉망이었던 거다, 내가 드바를 좋아하는 마음이란 드바와 함께 하는 동안에 느낀 피로감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전화가 오면 피하지 않고 받았고 드바가 늘어놓는 요설을 끊임없이 들어주었지만 내가 먼저 전화를 걸거나 만나자고 한 적은 없었다. 졸업하고 나는 사회생활이라는 이상한 것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노력 중이었는데 학번이 같은 드바는 나보다 훨씬 늦게 학교를 떠났고 우리가 함께 누렸던 도서관 생활 이야기를 한참 동안 했다. 정다운 이야기였으나 꼭 그만큼 지긋지긋하기도 했다.

- "미안하게 생각해."
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문을 밀고 나가던 아진이 갑자기 멈춰 서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학형, 드바 좋아했죠?"

 

- 아진은 러시아어로 1을 뜻했고 그건 드바와 짝이라는 뜻이었다. 별명을 그렇게 지어서인지 원래 의도가 불순해서 별명을 그렇게 지었는지 모르겠으나 아진이 생활 도서관 관장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사귀기 시작했고 제법 오래 만났다.

 

- "좋아했지."

그래서 일이 이렇게 된 거지.

- 내 대답에 아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나갔다. 훨씬 어린 상근자들은 문 쪽과 내 쪽을 번갈아 보며 영문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드바가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아진이 자꾸 우리 사이를 두고 불안해한다고. 현 애인한테 구 애인보다 더 무서운 건 사귈뻔한 사람인 법이라고.
아진은 드바가 나에게 그런 말까지 한 줄은 몰랐겠지만 드바는 그 정도로 나를 좋아했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으로 할 수 있을 만큼만. 

<세네갈식 부고>



- 수술 및 회복 과정에서 행해지는 의료적 처치 전반의 녹화 및 녹취 등을 승인함, 기타 등등.

최종적으로 인공 자궁 이식 수술 실험 참여에 동의함.

 

- 실상 수진에게는 다시없을 기회였다. 가끔 드나들던 트랜스젠더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실험 참여자 구인 공고를 보고서는 주변 친구들에게 글을 복사해 보내며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얘들아, 이것 봐, 대박이지 않니. 해당되는 사람 다 지원해 보자. 성인, SRS(Sex Reassignment Surgery) 후 3년 이상, 법적 성별 정정 완료자에 한함. 수진을 비롯해 지인들 대부분은 가볍게 통과할 수 있는 제한 사항들이었다. 수진은 지원 마감일을 한참 남겨두고 접수를 해치운 다음 친구들을 닦달했다.

 

- 그거 했어? 그거 접수 다음 주까지래. 빨리 해, 마감 날 울면서 지원서 쓰느라 힘 빼지 말고. 나라에서 연구 차원에서 해주는 거라 비용 부담 없는 대신에 면접이 빡셀 것 같더라. 접수 서류에 별 질문이 다 있는 거 있지. F64(성주체성 장애) 코드 받을 때 하던 질문들 기억나? 그거랑 비슷해. 모성애를 느낀 적이 있다면 그 구체적인 경험에 대해 서술하시오, 막 이런 질문에 500자 이상 서술하래. 웃기는 게 뭔지 알아? 500자 언제 다 쓰냐 하면서 쓰기 시작했는데 쓰고 보니까 세상에 1200자 넘었더라. 혹시 도움 될지 모르니까 어떻게 썼는지 좀 들려줄게, 내가 있잖아 무슨 얘기를 썼냐면...

- 언니, 적당히 좀 해.
듣다 못한 친구들 중 하나가 싫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무도 관심 없어 그거. 내가 여자 된다고 했지 언제 엄마 되고 싶댔어? SRS 할 때도 그 개고생을 했는데 배에다 뭘 또 집어넣어. 나 안 할 거니까 언니 그거 꼭 돼. 알겠지?

- 그렇게 말한 친구는 다른 애들이 다 착해서 언니 말 듣고만 있는데 생각은 자기랑 똑같다며, 본인이 총대를 메고 나선 거니까 다신 그런 얘기 꺼내지 말라고 했다. 수진은 민망하고 머쓱했다. 싫으면 마라, 얼마나 의미 있는 수술인데. 자궁 단다고 다 엄마 된다고 누가 그래? 그냥 자궁은 갓난아기한테도 있고 쭈그렁 할머니들한테도 다 있어. 자궁 없다고 여자 아닌 거 아니듯이 자궁 단다고 꼭 엄마 해야 하는 건 아니야. 무슨 말들을 그렇게 하니. 덕분에 경쟁률 줄어서 고맙긴 하네, 뭐.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진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여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태어날 때부터 여자였는데 어째서 여자가 되고 싶어야 하는가?) 엄마가 되고 ... 

-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얘, 미안하다."
"뭐가?"
"몰랐어, 이제 생리는 안 해도... 난자는 그냥 몸 안에 있는 거라서 줄 수 있는 줄 알았어."

 

- 엄마는 알아야지. 나는 자궁은 있어도 난자가 없어서, 생리를 안 해서 그런 거 하나도 모르지만, 생리해서 나를 낳았고 이제까지 평생 생리를 했을 엄마는 그런 거 다 알고 있었어야지. 왜 안 되는 걸 가지고 헛걸음을 하고 쓸데없는 희망을 품게 해, 사람 비참하게.

- 수진은 그런 말들을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엄마를 한참 쳐다보다 다시 앞서 걸었다. 수진을 따라잡기가 벅찬지 숨을 몰아쉬며 엄마가 계속 말을 걸어왔다.
"그냥 네 그거 쓰면 안 되니? 왜, 너 남자일 때 얼려둔 거..."
"내가 언제 남자였어?"
수진은 엄마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날을 세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남자 아니었어. 뭐가 달렸든 안 달렸든 나는 남자인 적 한 번도 없어. 엄마 말대로 내가 남자인 적이 있다고 쳐. 그때 남긴 걸로 자식을 만들면 내가 자식을 볼 때마다 뭐가 떠오를까? 사랑하는 자식을 볼 때마다 내가 그걸 매번 떠올려야 해? 내가 여자가 아니었다는 거?"

 

- "수진아, 자식을 정말 사랑하면..."
엄마는 간신히 따라잡은 수진의 소맷부리를 겨우 붙들고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말했다.
"정말 사랑하면 그런 건 상관없어질 거야..."
수진은 엄마의 손을 뿌리쳤다. 엄마가 뭘 안다고 그래. 이런 삶에 대해서 엄마가 얼마나 안다고 그렇게 마음대로 말해.
손으로 두 귀를 막고 수진은 달리기 시작했다.

 

- "엄마가 다 미안하다."
엄마는 따라오기를 포기했는지 뒤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엄마가 너 원치 않는 몸으로 낳아서 미안하고... 폐경이 벌써 와서 미안해."
길 가던 사람들이 수진과 엄마를 번갈아 흘깃거렸다. 아, 쪽팔려. 쪽팔려 죽겠어 진짜.

- 누가 봐도 남자 같은 사람이었다. 떨떠름하게 인사와 소개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상대가 빠르게 사연을 설명했다.
"비수술 FTM이었어요. 지금은 논바이너리고요."
"그럼 디트랜지션 중이세요?"
"딱히 뭘 하고 있진 않아요. 임신 전에 호르몬 그만둔 게 전부예요."
"제 친구 말로는 레즈비언 커플이시라고..."
"와이프가 그분 친구고 저는 잘 몰라요.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아요."
그러면 당신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난자를 나눠주겠다고 왔단 말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일깨우면 저만 손해일 것 같아서 수진은 잠자코 있었다.

- "저희 부부도 정자 공여받아서 아이들 낳았으니까 한 번은 공여해서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중에서도 수진 씨한테 드리는 건 트랜스젠더 재생산권에 기여한다는 의미도 있을 것 같았고."
"아이들이요?"
"네, 와이프랑 저랑 같이 임신했거든요."
자궁이 둘이어서 그런 것도 되는구나. 수진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을 은밀한 질투를 품었고 이내 그에 대한 부끄러움도 느꼈다. 상대는 아무렇지 않은 눈치로 말을 이었다.

 

- 그런데 그런 얘기를 왜 저한테? 수진은 묻고 싶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아이를 만들고 낳고 기르는 문제는 아직까진 엄청나게 정상 규범에 가까운 일인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거기서 뛰쳐나온 지가 한참이잖아요. 그래서 헷갈리는 것도 당연하겠지만요, 생물학적으로나 전통적으로 누가 아이 엄마고 아빠고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따지면 입양부터가 말이 안 되는 거고."

이 사람, 약간... 나를 가르치려고 하는구나.

 

- 그렇지만 어쩐지 순순히 듣고만 있기는 조금 억울했다. 나라고 꽉 막히고 생각이 없어서 그런 고집을 피웠던 건 아닌데.

"저도 궁금한 거 여쭤봐도 될까요? 별건 아닌데..."

"뭐든 물어보세요. 제가 먼저 아이를 낳았으니까 난자 공여 말고도 알려드릴 만한 게 많을 거예요."

"좀 이상한 질문 같은데 아이들이 엄마라고 부르나요, 아빠라고 부르나요?"

상대는 크게 웃었다. 

"마침 둘 다 이제 입이 트이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저랑 와이프 둘 다 엄마라고 불러요. 아빠보단 엄마가 발음이 쉬워서겠죠. 저는 어느 쪽도 그렇게 선호하진 않아요. 좀 더 자라면 이름으로 부르는 게 어떤지 제안해 보려고요."

확실히 이 사람보다는 내가 훨씬 유교적이고 봉건적이구나. 수진은 새삼 생각하면서 따라 웃었다. 

 

- 인공적으로 조성된 착상 환경에 배아가 거부감을 느끼면 출혈과 조직 탈락이 일어날 거라고. 수진과 함께 실험에 참여한 이들 중 절반에게서 그런 사례가 나타났다고. 표현이 무서워서 겁을 집어먹은 수진이 심각한 거냐고 묻자 담당의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굉장히 비싼 생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삽관으로 배아를 주입한 후 사흘에 한 번꼴로 초음파검사를 받았다. 세 번째 촬영에서 착상 성공이 선언되었다. 배아와 태반이 성장하고 있다고. 이날 수진은 산모 수첩과 배지, 키링을 받았다. 수진은 배지와 키링을 옷과 가방에 달까 말까 수백 번 고민하다가 모두 주머니에 그냥 넣었다. 너무 자랑스러웠지만 꼭 그만큼 두렵기도 했다. 예상할 수 없는 위험들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려면 아이를 드러내지 않는 게 오히려 나을 것 같았다.

- 오래 지나지 않아 수진은 처음으로 담당의가 뭘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착상이 가장 어렵고 중요한 단계라고? 의사한테나 그렇겠지. 산모인 수진에게 어려움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참이었다.
입덧이 시작되었다.

- 모든 장면이 빠르게 뇌리를 지나치는 것 같았고 그 모든 순간순간을 빠짐없이 후회했다. 통증이 물러가자 머쓱해졌고, 아이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후회해서 미안해. 너 낳기도 전부터 너 낳기로 한 거 후회해서.

- 문득 한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아이를 만들고 낳는 데에도 어쩌면 그런 게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있잖아, 보통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 둘이서 만드는데 말이지. 너를 만드는 데에는 수 세기에 달하는 시간에 걸쳐 누적된 의료 지식과 수백 수천억 대의 자본과 엄마와 엄마의 엄마와 엄마 친구들의 노력이 들어갔어. 너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아이야. 괜히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로 그래서 그렇다고 하는 거야. 잠깐이지만 그런 너를 가진 걸 후회해서... 미친 진짜 너무 아파서 쌍욕이 막 자동으로 나오네.

- 무엇보다 끔찍한 점은 분만 시점이 다가올수록 통증 간격은 짧아지고 통증 시간은 길어질 거라는 사실이었다. 수축제 투여 시간은 36h로 적혀 있었다. 서른여섯 시간... 아가, 지금 당장 나오면 뭐든지 해줄게. 동생 낳아달라는 말만 빼고 뭐든 들어줄게. 입원 전날 밤부터 금식했는데 앞으로 서른여섯 시간쯤 더 굶어가며 고통받아야 한다니 ...

- 엄마도 웃지 않았다. 엄마는 울고 있었다.
왜 울어? 나 살아 있고 애도 무사한데 왜 울고 그래.

 

- 엄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어렵사리 한마디 했다.
"고생했어, 우리 딸."
수진은 엄마가 참 뻔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김수진의 경우>



- 나는 목이 잘려 죽는다. 언젠가. 오늘은 아닌 미래에. 멀거나 머지않은 미래에. 그렇게 믿는다는 말은 언제나 부족한 느낌이 든다. 나는 이 사실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하게 감각한다. 마치 이미 나 자신이 목 잘려 죽는 걸 목격한 적 있는 것처럼.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 또 그 꿈 꿨어

라고 말하려고 했다. 잠에서 막 깨어나 머리가 목에 잘 붙어 있다는 게, 그래서 목소리가 목을 지나 입으로 새어나갈 수 있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 마들렌은 내가 이런 꿈을 꾸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좋아한다. 그다지 특이하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 내가 꿈만은 조금 색다른 걸 꾼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말해주려고 했는데, 잠이 덜 깬 머리는 간신히 마들렌이 집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마들렌은 교대역 근처 친구네 집에 하루 신세를 지기로 했다. 아침 일찍 변호사 사무실에 갈 예정이었다.

- 차츰 머리가 맑아지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지금, 내 팔에 닿아 있는 이 미지근한 건, 누구 살이지... 

- 전날 밤 나는 분명 혼자 누웠다. 무척 피곤했기에 맑은 정신으로 누웠다고 할 수는 없지만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내겐 실수를 저지를 만큼 가까우면서 물리적으로도 가까이에 사는 지인이 없다.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넬 만한 담력도 없다. 혹시 마들렌이 마음을 바꾸어 돌아와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옆에 누운 사람은.
상대방이 깰까 봐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린 나는 나와 동시에 같은 속도로 내 쪽을 쳐다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거울을 보듯이. 거울을 향해 돌아눕듯이.

- 악 소리를 지를 뻔했을 때 상대방의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나도 상대방의 입을 막았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쪽도 나와 똑같은 크기로 눈을 키웠다. 내가 옆사람 입에 대고 있던 손을 가져오자 내 입도 자유를 되찾았다. 나는 자유로워진 입으로 누구세요 묻는 대신 되찾아온 손으로 뺨을 힘껏 내리쳤다. 꿈이 아님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 내 곁에 누워 있는 낯선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 나와 똑같이 생긴 얼굴을 나와 똑같은 손으로 후려친 다음 아파하면서, 동시에 나처럼 놀라고 불안해하면서 나를 보고 있는 나의 존재가 꿈이 아니었다.

- 문학이 위대한 이유는 아무리 형설하기 어려운 사건이라도 이미 그것을 상상한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게 유일한 이유는 아닐지라도, 또 정확히 이런 상황을 예견한 건 아닐지라도.

프란츠 카프카식으로 말하기: 어느 날 아침 목 잘리는 꿈에서 깨어난 나는 자신이 침대에서 두 개의 몸으로 분화한 것을 알아차렸다.

마르셀 에메 인용하기: 그녀는 동시에 도처에 공재 가능했다. 즉 그녀는 자기 자신을 여럿으로 불어나게 할 수 있으며 원하는 장소마다 동시에 존재할 수 있었다.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 나와 나는 동시에 천장을 올려다보는 평평한 자세로 누웠다.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고 소용도 없었다. 나와 나는 둘 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알지 못했고 알고 싶었다.

 

- 우리-는 복수의 1인칭이므로 나와 나의 집합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들은 일어나기로 했다.

 

- 출근 태그를 찍으면서까지는 오늘 연차를 쓰지 않아도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연차를 쓰기에는 너무 바쁜 시기였고, 물론 바쁘든 말든 회사를 빠질 구실은 언제나 좋은 것이지만 과자 친구의 재판은 좋은 일도 아니고 연차 사유로 적절하지도 못했다. 무슨 회사가 그래? 개인 사유라고 쓰면 되잖아. 마들렌은 섭섭해했고 나는 난처했다. 회사 다녀보면 안 그래, 사유란에는 그렇게 쓴다 쳐도 제출할 때 꼭 무슨 일인지 꼬치꼬치 물어본단 말이야.
그럼 거짓말하면 되잖아.
나 거짓말 못 하는 거 알잖아.
조금도 못 해? 그냥 친구 재판 방청이라고 해, 과자 친구 재판이 아니라.
세상에 누가 그냥 친구 때문에 회사를 빠져.

-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냥 연차를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과도하게 남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라는 것이 회사 사람들의 중평이었고 그건 사실이었다.

-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마들렌은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고, 자기는 재판 전날 친구네 집에서 자겠다고 했다. 연차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갈등은 재판 전날까지 줄곧 이어졌고, 밤 11시가 넘어서야 파주에서 서울로 나오는 차에 몸을 실은 채 나는 어떤 각오를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마들렌이 나와 헤어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일 연차를 쓸 수 없겠다. 쓰고 싶지 않았을 뿐 아니라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들렌이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 재판 전날 나는 회사에서 에어캡봉투 1000장에 택배송장 스티커 1000장을 붙이고 거기에 책 1000권을 담았다. 물론 정규 근무시간 이후고 우리 회사는 야근 수당을 따로 쳐주지 않는다. 너무 영세해서, 영세한 우리 회사는 일전에 20대 여성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기획 도서를 크라우드 펀딩으로 내서 꽤 재미를 본 이후 자꾸 비슷한 방법으로 책을 팔려고 들었다. 예약판매 방식으로 1쇄 물량을 한 방에 소화해 이득을 보는 사람은 따로 있었지만 그 물류를 관리하고 발송하는 건 당연히 직급이 낮은 편집자와 마케터의 몫이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우리 출판사 같은 곳은 거들떠도 보지 않을 듯했던 스타 작가가 사장의 친구라 원고도 주고 친필 사인도 1000부나 해주었고, 나는 그 책을 편집한 죄로, 마케터는 그걸 펀딩 사이트에 올린 죄로 지문이 닳도록 스티커를 떼고 붙여야 했다. 다 시켜서 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손 많이 가는 일은 어제 다 했으니까 이제 안심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와 마케터는 출근하자마자 회사에서 공동으로 쓰는 카트에 전날 포장한 책들을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만요. 뭐 좀 깔고 해요. 나는 내 자리로 달려가 담요를 가져왔다. 더러워질 텐데요. 마케터는 석연찮은 얼굴이었다. 그러니까요, 지난번 펀딩 때 봉투가 더럽다는 항의 전화가 온 적이 있어서요. 마케터는 아 하고 해탈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쌓아두었던 책 봉투를 치워주었다. 끈끈한 테이프 자국을 비롯해 여러 정체불명 오염 물질이 묻은 카트에 폴리에스테르 100퍼센트인 파란색 체크무늬 담요를 덮고 그 위에 책을 쌓았다. 나와 마케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래도 회사에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잠깐 생각했다. 계단으로 책 1000권 나르기는 얼마나 고되고 개 같았을까. 1층 현관 앞에서 택배 차량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계단 옆 경사로를 조심조심 구르던 카트는 비포장 바닥에 진입하면서 잠시 멈추었다. 이게 왜 이러지. 마케터는 당겼고 나는 밀었다. 그러자 담요 자락이 바퀴에 휘말려 들어가면서 카트가 크게 휘청거렸고,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책 봉투가 땅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하필 바닥은 질었고 하필 담요는 책 봉투를 보호하지 못하는 방향으로만 흘러내려 있었다.

- 루쉰의 묘비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나는 하나의 종착지를 확실히 알고 있다. 그것은 무덤이다.

- 자기도 바쁜 사람이라고 택배 기사는 화를 냈다. 죄송합니다. 이따 다시 연락드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흙탕물이 튄 책 봉투는 100개가 조금 넘었고 훼손된 봉투에 붙은 주소들을 하나하나 체크해 다시 송장을 출력한 다음 새 봉투에 붙이는 데는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오전 중으로 발송하지 못하면 배송 일자가 밀릴 텐데. 그러면 문의 전화 항의 전화 장난 아니게 올 텐데. 택배 기사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나는 이 모든 일을 뒤로한 채 사표나 쓰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슬그머니 솟아오른 내면의 항의도 있었다: 연차에도 그렇게 벌벌 떨면서 사표는 쉬울 것 같아? 그게 나 자신의 생각인지 내게 깃든 마들렌의 목소리인지 헷갈렸다.

- 대조적으로 뚜렷하게 느낀 건 법원에 간 내가 마주한 분명한 당혹이었다. 법원에 간 나 역시 회사에서 내가 곱씹는 사표 생각을 함께하고 있었다. 큰 충돌이나 모순 없이 나와 나는 모든 경험과 감각을 공유했다. 먼 곳에서 나의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침울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인지할 수 있었다. 

- 재판에 대해서라면 나는 단 하나의 사례를 기억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은 어머니의 장례식 날 슬펐습니까? 아니, 울었습니까였나. 카뮈의 주인공은 외국인, 즉 이방인을 죽여서 기소되지만 수사관들과 법관들은 왜 어머니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가를 묻는다. 이 소설 이후 내 의식 속 상상의 법정은 그리스 비극 공연장 같은 형태가 되었다. 코러스: 유죄, 유죄, 유죄, 혹은 길티, 길티, 길티, 단조 3화음. 당연하지만 현실의 법정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 정도 상상과 비슷하다고 느낀 부분은 판사가 입장할 때 법정 내 전원이 기립해야 했던 것, 우르르 일어나는 사람들의 옷자락이 일제히 낸 부산한 소음 같은 것. 나는 끝나면 간식을 준다는 꾐에 넘어가 억지로 교회에 간 아이처럼 산만했다. 마들렌은 그 일에 대해 내가 알기를 원했으나 나는 마들렌이 겪은 일을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증인신문에 마들렌이 호출되었다. 마들렌은 내 손을 살짝 잡았다가 놓으며 나갔다.
이제 내가 정확히 알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 그것은 7주 차, 꿈을 소재로 한 콩트를 발표했을 때였다. 문학에서 꿈을 사용하는 건 지금부터 치트키를 쓰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 이상 또는 의외의 효과를 반드시 발생시킬 자신이 있을 때에만 사용하는 것이 좋겠죠? 자, 이 작품을 보세요. 목 잘린 인물이 자신의 독립된 머리와 대화하며 모종의 모성애를 느끼고 있지요. 기이한 장면을 흥분하지 않고 묘사한 것 또한 이 작품이 지닌 매력 중 하나입니다. 제가 언제나 강조하듯 이야기꾼이 먼저 흥분해 버리면 청중은 오히려 흥미가 가라앉기 때문에... 아마 그쯤이었을 것이다. 나와 마들렌의 눈이 처음으로 마주친 것은. 대각선 앞자리에 앉아 있어 내 위치에선 소설가와 반쯤 겹쳐 보이던 마들렌이 문득 고개를 돌려 귀 끝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나를 돌아본 것은. 마들렌이 내게 말을 건넨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소설 너무 재미있게 봤어요. 아, 네, 고마워요. 언니 소설...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언니 소설 참 잘 쓰시는 것 같아요. 나는 다른 사람도 아닌 마들렌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게 기만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내가 가져간 콩트는 내가 언젠가 실제로 꾼 꿈과 같은 내용이었고, 따라서 소설가의 칭찬처럼 분방한 상상력과 도발적인 감각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냥 본 것을 봤다고 말하는 증언에 가까웠다. 

 

- 역시 몸이 예뻐서 소설도 예쁘게 쓴다고 했어요.

어째서인지 마들렌의 그 증언은 내가 그때 마들렌을 얼마나 심하게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했는가와 또 얼마나 소설가를 동경하고 추앙했는가를 떠올리게 했다. 만약 소설가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나는 그것을 희롱이라 받아들였을까? 소설가가 만진 게 마들렌이 아니라 나였어도 나는 마들렌의 감자 친구가 되려고 했을까? 

 

- 나는 마들렌이 먼저 문제를 눈치채고 괜찮다고 말해주기만을 바랐다. 그것만이 내가 기댈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적인 방향이었다. 솔직히 아직까지 내가 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마들렌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한테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알 수 있지 않나? 내가 그렇게 치밀하게 증거를 없애고 다닌 것도 아닌데. 


- 나 할 말 있어
하고 마들렌이 메시지를 보내왔을 때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내가 요즘 이상해서 헤어지고 싶다거나 내가 요즘 이상해서 걱정이 된다거나. 어느 쪽이든 이제는 결착을 지어야겠다고 나는 마음을 먹었다. 알았어, 오늘 최대한 빨리 들어갈게. 나는 마들렌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가 너무 궁금하고 불안해서 반차라도 쓰고 싶은 지경이었다.

- 무슨 일 있어? 내가 짐짓 걱정스레 묻자 마들렌은 말했다. 언니, 내 부탁 하나 들어줬으면 해.
무슨 부탁? 정말 헤어져 달라는 부탁인가?

 

- 나는 마들렌이 몹시 미웠고 그에 못지않게 스스로가 싫었다. 나의 마들렌이 나에게 질리지 않았기를 바랐고 동시에 이 모든 상황에 나 스스로 질려 있었다. 지긋지긋한 나들의 의식의 연쇄 속에 불쑥 하나의 목소리가 솟았다.
진정해. 또 쪼개지면 어떡할 거야.

- 나는 나를 향해 결심에 찬 눈빛을 보냈다. 나 역시 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결의를 표했다. 역시 이 방법 말고는 없는 걸까. 머리가 셋이라도 사람은 하나다 보니 그보다 더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결정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구나. 언젠가 목이 잘려 죽을 것 같았던 나의 오랜 예감은. 나는 싱크대 하부장에서 식칼을 꺼내와 나와 나 사이에 내려놓았다. 나와 나는 식칼을 가운데 두고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 곧 또 하나의 내가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나, 나, 마들렌>

 


- "둘이 친하다던데요."
노래가 끝났다. 진행자 멘트가 나올 줄 알았는데 다른 댄스곡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채널도 있나. 나는 라디오 소리를 조금 더 줄였다.
"그런데요."
"뭐?"
"생각해 보니까 만약에 송대관이 그 노래 가사의 화자라면 호남 사람더러 막연히 고향이 남쪽이랬지 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호남 쪽은 자기가 대충 다 알 테니까."
"그러면?"
"자기가 잘 모르는 지역 이름이 나왔으니까 어렴풋하게 남쪽으로만 기억하는 거 아닐까 해서요. 그러면 그 사람 고향은 아마 영남이겠죠."
P는 갑자기 웃었다.
"야, 작가는 작가다. 그게 그렇게 되나."
적당히 잘 넘긴 거겠지. P는 가요나 요즘 개봉한 영화에 대해 내가 늘어놓는 궤변이나 음모론을 좋아했다. 나도 P가 내 말을 잠자코 듣다 웃는 순간들이 싫지 않았다. 멀고 지루한 출장길을 그럭저럭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작은 유희.

 

- 그냥 잘 모른다고 할까. 기억이 안 난다고 싫다고도 좋다고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마흔이 다 되었고 고향을 떠나서 산 시간이 고향에서 산 시간을 추월한 지도 몇 년인데, 지금 그립지 않다면 평생 그립지 않겠지... 그런 어렴풋한 생각이 전부였다.

- "좀 잘래?"
그래야겠어요, 대꾸하며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라는 건 그냥 해본 말이었다는 듯 P는 라디오 볼륨을 올렸다. 소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감겼다. 계기판을 보지 않아도 속도가 올라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깨어나자 시내였다.

- 장거리 운전자의 조수석에 앉아 푹 자버린 것이 미안해 P를 쳐다보았는데 차창 가득 햇빛이 들어와 모자를 쓴 P의 얼굴에는 깊은 그늘이 져 있었고, 그래서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이따 피곤할 텐데 눈 더 붙여두지."
P가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뒷좌석 스태프들도 말이 없을 뿐 이미 깬 기색이었다. 침이라도 흘린 게 아닌지 입가를 문질러 보는 사이 차가 급정거했다.  

- 온 동네가 어린애들의 것이지만 많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어울려 놀만큼 넓은 공터는 좀체 없어서 당연히 가까운 집 애들끼리 삼삼오오 어울렸다. 동네에서도 꽤 아래쪽에 사는 한동희 남매와는 학교에서가 아니면, 할머니 손에 이끌려간 목욕탕에서가 아니면 말 섞을 기회조차 아예 없었다. 
한동진이라면 몰라도 한동진의 동생하고까지 친하게 지낼 생각은 없었다. 한동희는 저학년이어서 4학년인 우리보다 빨리 하교했으면서도 교문 근처에서 저희 오빠를 기다리곤 했는데 나하고 한동진이 나란히 교문으로 나오면 나를 빤히 쳐다봤다. 민망해진 내가 다른 친구와 가겠다고 할 때까지, 또는 저희 오빠가 먼저 가라고 쫓아 보낼 때까지.

- 알고 보니 한동희는 저희 오빠의 친구, 나와도 같은 반인 어떤 남자아이를 좋아해서 매일 한동진을 기다린 거였다. 나도 속으로 좋아했던 그 남자애, 그 남자애가 어느 날 나를 좋아한다고 했고 그게 하루 사이 전교에 소문나자 한동희가 우리 반으로 달려왔다. 할머니와 목욕탕에 가서나 보던 애, 매일 마주치게 되었어도 인사 한마디 변변히 나눠본 적 없는 애가 소리쳤다. 니도 그 오빠 좋아하나? 정말로 그 남자애를 좋아하긴 했지만 부끄러워서 우물쭈물하던 차에 한동희는 내 머리채를 잡아 뜯으며 악을 썼다.
이 남자에 미친 년아. 니가 뭔데, 산동네 사는 주제에.

- 당시에는 그럭저럭 충격을 받았지만 자라서 생각해 보면 뭐라 말하기도 참 애매한 일이었다. 산 높은 곳 살수록 못 사는 집이라는 것도 옛말, 그러니까 목욕 동무인 그 집 할머니와 우리 할머니 때 이야기고 수도 전기 다 들어올 무렵 태어난 우리하곤 상관없었는데 그 어린애가 어디서 산동네 사는 주제 같은 말을 배워 써먹은 것일까. 평지 동네보다 산동네 사람들 형편이 기우는 게 현실이라 해도 우리 집이 좀 더 높이 있었다 뿐 그 애네 집도 언덕 중턱에 있기는 마찬가지였는데.

- 그 후에도 한동희와 가까워질 수는 없었다. 4학년 때 그런 일이 있고 보니 5학년 때도 그게 떠올라 데면데면했고, 6학년 되어서도 5학년이 된 그 애가 서먹했으며, 중학교에 가서는 초등학교 때 걔랑 나랑 사이가 안 좋았지... 그렇게 기억하게 되어 끝까지 곱게 볼 수 없었다.

- "니가 그때 내한테 죽으라 캤다."
나는 한동희도 나와 같은 때를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랬나. 내가 당한 일은 그럭저럭 기억났지만 어떻게 되받아 쳤는가는 기억하지 못했다. 비겁하게도 내가 먹었던 욕만 곱씹으며 한 살 어린 여자애한테서 무시무시한 치욕을 당한 듯이, 일방적인 피해를 입은 듯이 기억해 왔다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웠다. 

 

- "진이 언니 니가 내한테 죽으라 캐서 진짜 죽을병 걸린 것 같다."
"그런 말 하지 마, 농담이라도."
"농담 아니다. 진짜 그런 것 같더라."
한동희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반쯤 얼이 빠진, 그러면서도 진지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내는 다 봤다. 쭉 여기 살면서 다 봤단 말이다. 언니 니하고 사이 안 좋던 사람 다 망하고 니 친구들은 다 시집 잘 가고 돈 잘 벌더라."

- 그렇게 보이는 것도 이해는 됐다. 교지 편집부 동창 누구는 어느 기업 사모님이 되고 누구는 국비 유학까지 다녀온 박사님이 되었다는 소식은 나도 들었다. 당시 나와 어울려 다니던 교지 편집부 아이들은 대개 학교에서 손꼽히는 모범생들이었으니 그 애들 중 일부가 그대로 잘 자라 후일 부러움을 살 만한 사람이 된 것이 놀랍지는 않았다. 흔치 않고 쉽지 않은 일일 뿐 기적까지는 아니었다.

- 하지만 망한 사람들 모두 나와 사이가 나빴을 리는 없었다. 애초에 세상에는 흥하는 사람보다 망하는 사람, 지지부진한 사람이 훨씬 많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보일 뿐 ...


- 나는 P의 눈치를 살폈다. P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희는 침상 옆 수납장에서 고무줄 통을 꺼내달라고 하더니 노란 고무줄 하나를 집어 검지, 중지, 약지를 잇는 사슬 모양으로 끼웠다.
"언니야도 이렇게 해가 발밑 쫌 문대주라. 베개에 머리 대고 누워만 지내는데 와 발밑에 난리가 나는지 모르겠다."
요청대로 침상 아래쪽을 고무줄 끼운 손으로 문질렀다. 침상 쪽으로 고정된 카메라 화면에 내가 한동희를 가리며 걸릴 거라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손에 낀 고무줄에는 머리카락과 체모가 도르르 말려서 금세 까맣게 되었다. 언뜻 보면 손에 돈벌레 같은 게 앉아 있는 듯했다.
"내 노하우다. 털 치우는 노하우."
나는 P를 쳐다보았다. P는 입 모양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거 살리자.
"잘됐지요, 병 걸려서. 내도 작가가 꿈이었는데요. 요즘 에세이 작가 잘 나간다 아니에요? 내 환자 노하우 모아서 책내면 안 좋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한동희는 나를 쳐다보았다.

- 물론 한동희가 믿는 것처럼 내가 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 듯싶었다. 나를 신이라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했다면, 언젠가 자기에게 죽으라 했던 이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그건 신에게 저항하겠다는 의미였다.  
당신은 나한테 죽으라고 했지만 그렇게 순순히 죽지는 않겠다는 말.

- P와 스태프들이 장비를 치우고 나갈 동안 끝까지 출연자 곁에 있는 것도 나의 일이었다. 모두 나간 걸 확인한 후에 한동희는 또다시 태도를 바꾸었다.
"언니야."
응. 나는 한동희의 부름에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응답했다.
"진심이다. 내한테는 그게 너무 당연해서 아무 의심도 안 든다."
"뭐가?"
"언니 니가 신일지도 모른다는 거."

 

- 알고 있었다. 그게 나를 떠보려거나 놀리려고 꾸며낸 말이 아니라 그 애의 절박한 믿음이라는 것. 하지만 만약 내가 신이라면 나야말로 가장 잘되어 있었겠지. 방송국에 납품할 최루성 다큐나 찍으러 다니는 조연출 겸 구성 작가로 너를 만나러 오지도 않았겠지. 그 모순을 지적할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죽음을 앞둔 지금까지 그 애가 품어왔을 순진하면서도 악의적인 믿음을 굳이 정정할 수 없었다.

 
- "아니면 아예 1박 청구하고 내려올걸."

"결재 안 났을 걸요."
네비게이션은 병원 둘레를 반 바퀴쯤 돌아 시내로 나갔다가 도시 외곽으로 나가기를 권하고 있었다. P는 네비게이 선이 추천하는 경로로 차를 돌렸다. 나는 라디오를 틀었다. 심수봉의 <개여울>이 나오고 있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P는 습관처럼 그 후렴을 따라 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나는 채널을 돌리려던 손을 멈췄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도리 없이 한동희가 떠올랐다.

- "갑자기 든 생각인데요."
뭐가? 하고 P는 무심히 대꾸했다.
"이게 기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음. P는 평소처럼 웃는 대신 신음하듯 반응했다.
"김소월 시잖아요, 가사가.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그렇게 시작하잖아요. 기도라고 치면 신에게 당신이 하는 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도 같단 말이죠."
"그렇게도 되겠네."


- 한동안 P도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애처로운 노래 구절이 차 안을 떠돌았고 익숙할 리 없으나 익숙한 불빛들이 유령처럼 어두컴컴한 창을 지나가고 있었다. 다시 돌아올 일이 있을까. 모르지, 또. 어두움은 어떤 도시나 공평하게 만든다는 평범한 사실을 나는 곱씹었다. 익숙한 도시를 모르는 곳으로, 또 낯선 도시를 친숙한 곳으로 만드는 밤. 도시 안팎의 경계는 흐려지고 고향은 고향이었던 곳이 되며 고향이 아닌 곳은 고향이 아니었던 곳이 된다.

- "갑자기 겸손해지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P가 말했다. 그러네요. 나는 작은 소리로 답했다. 노래는 끝나가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밤을 추월할 수 없었다.

<마치 당신 같은 신>



 

작가의 말



깊이 들이쉬고 길게 내쉬기. 왜 자꾸 한숨을 쉬느냐는 말을 듣는다. 딱히 안 좋은 의도는 없다. 방충망에 구멍이 나 있다. 올해는 처음으로 수면 내시경을 받았다. 이제 굽 높은 신발은 영 못 신겠다. 시선을 먼 곳에 두지 못한 지 오래됐다.

건강을 생각해서 식사량을 줄였다. 때로 슬프고 때로 관대해진다. 먹고 싶은 것만 먹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많이 먹지 못할 바에야 먹기 싫은 걸 억지로 먹지는 않기로 결심했다. 지금은 과일 사탕이 먹고 싶다.

가끔 웃고 공공연히 운다. 어째서인지 화난 걸 들키면 부끄럽다. 사랑은 분수를 모르고 늘어만 난다.

내내 이대로일 거라 믿는 마음과 영영 이대로일까 두려워하는 마음. 어느 쪽이 낙관이고 어느 쪽이 비관인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나는 살아 있다.
가끔은 믿어지지 않지만 정말로 그렇다.

2023년 여름

박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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