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17)

[히가시노 게이고] 용의자 X의 헌신

일루젼 2012. 9. 21.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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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8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현대문학

406쪽 | 195*136mm | ISBN(13) : 9788972753698

2006-08-11

 

 

곧 한국판 영화가 개봉될 '용의자 X의 헌신'.

한국에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빠르게 교체된 띠지 보시라... 오히려 백야행의 경우는 저자의 이름보다 작품명 자체가 독자적인 유명세를 누렸음을 생각해보면, 효자 작품이긴 하다.)

 

우선, 개인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강렬한 의심을 제기한다.

그는 모든 것을 헌신하고 스러지는 남자 캐릭터에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작품들을 훑어볼 때, 아무래도 자신이 그런 사랑을 경험해보았거나(본인의 시각에서는) 동경하는 것 같다.

 

백야행, 환야, 용의자 X까지 모두 여주인공을 향한 남주인공들의 무한에 가까운 희생과 사랑이 그려지고 있다.

(그 사랑에 대한 여주인공들의 태도는 작품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모든 작품에서 상호적인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러나 백야행이 추리보다는 뒤얽힌 심리와 애정이 중심선이었다면,

(개인적으로 백야행의 백미는 그 마지막 장면이다. 그로써 완벽하게 완결되는 것이다!)

용의자 X의 경우는 마지막까지 치밀하게 뒤집히고 또 뒤집히는 복선과 반전이, 그리고 그 전체를 뒤엎는 충격적인 헌신이 독자를 압도한다.

 

아주- 아주 개인적인 생각인데, 어쩌면, 이런 것이 어떤 남성들에게는 '진정한 사랑의 표본'이라거나 '로망'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

다만 최근 슈테판 츠바이크의 '연민'이나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연이어 읽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것을 진정 '사랑'의 영역으로 둘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결국은 쳇바퀴처럼 원점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의문이 든다.

(이 의문은 결국 짝사랑도 사랑인가, 라는 질문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와 그 친우이자 형사인 '구사나기'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통칭 '용의자 X' 시리즈의 제 2권이자 본편이다. (사실은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가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그리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리즈의 첫 권인 탐정 갈릴레오의 실망스러운 이미지를 깨끗하게 날려준, '고백'과 더불어 유명세가 절대 허명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작품이었다. 이어지는 3편 예지몽의 경우는 어떨지 좀 두렵지만 마침 눈에 띄지 않고 있으니 순서를 좀 뒤로 미뤄둘까 한다.

 

 

상당히 다작을 하는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항상 평타는 쳐주는 작가, 망작이 없는 작가 (명탐정의 규칙이나 수상한 사람들은 호불호가 갈리나 난 둘다 즐겁게 읽었다), 그러나 대부분 범타인 작가 라는 평을 듣는 그.

 

그의 작품 중 '용의자 X'와 '백야행' 만큼은 단연코 수작으로 꼽는다.

(변신도 괜찮았는데 끝까지 읽기 전에 분실 상태라 언급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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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이웃집에 살고 있는 수학 교사와 이혼하여 단 둘만 살고 있는 모녀.

몇 번이고 거취를 옮기며 연을 끊으려 노력하였으나 어떻게 알았는지 다시 모습을 드러낸, 지워버리고 싶은 전 남편.

우발적으로 일어난 살인,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두 모녀 앞에 나타난 수학 교사.

 

결국 '무언가'를 해줌으로써, '무언가'로서 기억되고 싶었던 한 용의자의 눈물 겨운 헌신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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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흘끗 보았지 뭐. 일부러 살펴보려던 건 아냐."

장발의 남자는 이시가미의 책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시가미는 자신의 노트로 눈길을 돌렸다. 수식이 적혀 있었지만, 그것은 전체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언뜻 보고서도 그게 뭔지를 알았다면 이 문제에 도전해본 경험이 있다는 말이다.

"그쪽도 해본 적이 있어?"

이시가미가 물었다.

장발은 그제서야 턱을 괸 팔을 풀고 쓴 웃음을 지었다.

"난 불필요한 건 안 하는 성격이야. 물리학도라서 수학자가 만들어낸 정리를 사용하기만 하지. 증명은 자네들 몫이니까."

"그렇지만 이 일은 아주 재미있어."

이시가미는 자신의 노트를 들었다.

"증명이 끝났으니까. 증명되었다는 걸 알아서 손해는 없지."

그는 이시가미의 눈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4색 문제는 증명되었어. 모든 지도는 네 가지 색으로 칠해 구분할 수 있다."

"모든 건 아냐."

"그렇겠지. 평면 또는 구면 위라는 조건이 달렸지 아마."

그것은 수학계에서도 가장 유명한 문제 중 하나였다. '평면 또는 구면상의 모든 지도는 네 가지 색으로 칠해 구분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1879년에 A. 케일리가 제출했었다. 칠해서 구분할 수 잇다는 것을 증명하던지, 그것이 불가능한 지도를 고안하면 되는데, 해결되기까지 백 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증명한 사람은 일리노이 대학의 케네스 아펠과 볼프강 하텐인데, 두 사람은 컴퓨터를 사용하여 모든 지도가 약 150종류밖에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모든 지도를 사색으로 칠해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1976년의 일이었다.

"나는 그것이 완벽한 증명이라고 생각지 않아."하고 이시가미는 말했다.

"그렇겠지. 그러니까 종이와 연필로 문제를 풀려 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 방식은 인간이 수작업으로 조사하기에는 너무 방대해. 그러니 컴퓨터를 수용했을 테지만, 그 덕분에 그 증명이 옳은지 그른지를 완벽하게 판단할 수단이 없어. 확인하는 데도 컴퓨터를 사용해야 한다면 그건 진정한 수학이 아냐."

"역시 엘데슈 신자로군."

 

 

# 유가와와는 딱히 친하게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얼굴을 마주치면 반드시 다방면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박학해서 수학이나 물리학 외의 분야에 대해서도 상당한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이시가미가 내심 경시하는 문학이나 예술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기야 그 지식이 어느 정도 깊은 것인지 이시가미로서는 알 길이 없었지만, 때문인지 수학 이외의 것에는 아무 흥미도 없는 이시가미와 유가와의 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소원해졌다.

 

 

# 학생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수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꽤 오랜 세월 동안 이런 시간을 맛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시가미는 새삼 깨달았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처음인지도 몰랐다. 이 남자 이외에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은 없고, 또한 스스로 자신과 대등한 인간으로 인정한 사람은 유가와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지난번에도 말했었지. 고찰이런 것은 생각하고 추론한 내용을 가리키는 말이야. 실험을 해서 예상한 대로 결과가 나와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냥 감상에 지나지 않아. 애당초 모든 것이 예상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 실험을 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뭔가를 발견하기를 바래. 어쨌든 좀 더 생각해서 쓰도록 해."

드물게도 유가와는 짜증을 내고 있었다. 멍하니 서 있는 학생에게 리포트 용지를 내밀면서 크게 고개를 저었다. 학생은 머리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 그 말을 입에 담으면 앞으로 이 사내는 자신을 친구로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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