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17)

[슈테판 츠바이크] 연민

일루젼 2012. 9. 28.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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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 10점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지식의숲(넥서스)

434쪽 | 225*152mm | ISBN(13) : 9788991762459

2007-12-10

원제 Ungeduld des Herzens (1939)

 

 

이 책에 대해 끄적여보기까지, 참 많이 망설였다. 

나의 무의식이 그렇게 선택했기 때문인지 우연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책으로부터 시작되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서울대 야구부의 영광', '턴', '리셋'까지 -결국 그것이 인간이라고 말하면 할 말은 없으나- '사랑'이라는 감정 상태에 대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무척 원하는 바였으나, 동시에 무척 두려운 일이었다.

객관성을 잃고 주관적인 경험과 감정에 휘둘린 내갈김이 될까 하는 두려움.

그래서 무척 좋게 읽은 작품들에 대해 실례가 되는 것은 아닐지, 혹은 나를 너무 내보이게 되는 것은 아닐지하는 가지들을 가진.

 

그러나 이런 두려움 또한 내가 '사랑'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지나치게 민감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소설은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글이며, 그것의 주제가 어떠한가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본질적으로는 '인간'에 대해 말한다. 그러므로 한 글에 대한 어떤 것도 '객관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거리감은 다를 수 있다. 조금 더 가까이, 혹은 조금 더 멀리.

그러나 한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에서 '주관적'인 모든 부분을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허구가 아니겠는가.

 

애초에 글을 읽고 무언가를 끄적여 남기겠다고 결정했던 것에는, 그 글을 읽은 직후의-그러므로 그 시간의- 나의 생각을 박제하겠다는 의도 역시 존재했으므로.

그래서 언젠가 다시 그 글을 읽어보며 찰나의 박편들일지언정 '나'를 더 이해해보고자, 혹은 이미 변화하고 스러져 다시 볼 수 없는 '나'를 추모하고자 끄적이기로 했던 것이니.

 

더 고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생각해 이 일련의 '미뤄둔' 작품들에 대해 손을 놀려본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 중 내가 읽어본 것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

이 책을 구매하게 된 계기도 곧 절판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듣고 그렇다면 일단 구해두고 읽어볼까, 했던 정도가 다였다.

그러나 책을 덮을 때는 '이 글을 읽지 않았다면 그건 정말 큰 비극이었을 것이다!' 따위의, '이 책은 소장할 가치가 충분하고도 넘친다!'는 흥분상태였다.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이 글이 쓰여진 시대가 1939년임을 떠올려보면, 그리고 그 글이 2012년의 지금에도 강렬한 울림을 지니고 있음을 덧붙여보면.

어쩌면 인간이란 지독스럽게도 변하지 않는 생물인지도 모른다.

 

줄거리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하는가- 라는 것은 최근 내가 고민 중인 문제인데... 

연민의 줄거리는 간략하자면 다음과 같다.

 

 

[줄거리] ----------------------------------------------------------------------------------------

 

작가인 '나'는 우연히 호프에서 마주치게 된 전역 장교 '호프밀러'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게 된다.

젊고 평범한 소위였던 한 젊은이가 어떻게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훈장을 받게 되었는지를.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빠른 독립과 생활고의 탈피를 위해 군에 자원한 한 소년은 별다른 의문없이 군에 남아 소위가 되고, 기마대에 배치되어 그럭저럭한 일상을 보낸다. 그리고 1913년, 새로운 지역으로의 배치 명령을 받은 그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국경 근처 한 소도시로 가게 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곳의 유명 지주인 귀족 '케케스팔바'씨를 풍문으로 듣고, 장교를 좋아한다는 말에 힘입어 소개를 부탁해본 호프밀러는 그의 초대를 받아 생애 처음으로 맛본 화려함과 풍요로움, 그리고 아름다운 아가씨 일로나에게 매료된다. 그리고 그 흥분됨 속에서 영애 에디트에게 큰 결례를 범하고 저택을 뛰쳐나오게 된다. 지역의 유지에게 밉보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휩싸인 그는 사과의 메세지를 보내고, 의외로 흔쾌히 사과를 받아들인 케케스팔바 쪽의 호의로 그 저택을 드나드며 두 다리가 자유스럽지 못한 소녀인 에디트의 말벗이 되어준다.

 

그녀에 대한 연민으로, 선의로 시작했던 주기적인 만남이 이어질수록 그는 케케스팔바와 에디트, 그리고 자신에 대해 때로는 그 자신의 깨달음으로, 때로는 그들의 고백으로, 그리고 대부분은 그들의 주치의인 콘도르의 지적으로- 알아가게 된다.

 

모든 것을 짊어질만큼 충분하지 못한 연민은 죄와도 같은 것.

결국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그와 그로 인해 필연적이라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된 결말, 그리고 그 결말로부터도 도피한 호프밀러.자신의 훈장을 껍데기뿐인 일종의 주홍글씨라 자조하는 그의 이야기가 끝나며 소설도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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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롯은 화려하지 않다.

구성에 있어서도 예정된 결말을 향한 치달음이라는 점에서, 별다른 이야기를 할 것이 없다고 본다.

 

그러나 저 날카로운 문장들, 그것에 갈가리 찢겨지는 듯한 인간 심리의 내면이란!!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수조차 없도록 끌려들어가버리게 되는 독백들!!!

 

프로이트의 친구이기도 했다는 그의 글은 섬세하면서도 날카롭고, 아름다우면서 아프다. 마치 피아노줄로 촘촘하게 짜여진 격자를 향해 사정없이 밀어붙여지는 듯한, 올올이 살을 옥죄어오는 듯한 파고듬. 그러면서도 투명에 가깝게 반짝이는 줄들과, 그 부딪침이 울리는 건반의 소리들이 울려퍼지는 듯한....

 

내가 뭐라니.

여튼. 기회만 된다면 꼭, 꼭 구해 읽기를 권한다.

 

 

이제 어마어마어마하게 그냥 마구잡이로 내가 이해한 대로 스포해버릴 예정. 패스할 사람은 패스.

 

호프밀러 : 가장 평범하다면 평범할, 적당한 동정심과 적당한 자기애를 가진 인물. 그런 그가 훈장을 단 장교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 인간이 극한으로 치닫는 것에 대한, 혹은 타인이 보기에 화려한 경력이 갖는 허구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느낀 기분이었다. 그는 그저, 남들보다 조금, 아주 조금 더 동정심이 있었고 판단이 느렸을 뿐이었다. 적당히 비겁햇고, 적당히 현실적이었고, 또한 적당히 도덕적이었다. 내가 다소 남성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모르곘으나, 나는 호프밀러가 성별을 떠나 충분히 대중적 공감을 살만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흔들림과 번복은, 그것이 그의 인생에 처음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가진다. 이전까지의 삶이나 이후에서 그 흔들림이 몇 차레 반복되었더라면 그것은 오히려 한 우유부단한 개인의 특질이 되어 공감력을 상실헀을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흔히 저지를 수 있는 그 단 한 번의 실수, 몰랐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경계심이 없었고, 그의 실수에 비해 과하게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에서 그는 오히려 대중성을 확보한다. 한 번의 실수에 대해서는 누구나 관대함을 가지고 동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며,  모든 인간은 완벽할 수 없으므로 그를 외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케케스팔바 : 지극한 부성애, 그러나 그 안에 도사린 기회주의와 이기심, 교활함. 충분히 개인 차가 있을 수 있겠으나 대부분의 딸을 가진 아버지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그의 도를 넘어선 듯 싶기까지 한 사랑은 순수하게 '딸'에 대한 것일까? 그 자신의 죄책감을 투사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완벽'을 위해 노력해온 그의 모든 과거가 헛된 것이 된다는 두려움 때문은 아닌가?

 

 

일로나 : 그녀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을 찾기가 어렵다. 적절한 주변인. 그녀는 독자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존재하면서도 가장 먼 심리적 거리를 유지한다.

 

 

콘도르 : 그는 호프밀러와 같은 실수를 저질렀으나 그 실수로부터 회피하지 않고 그것을 짊어진, 또 하나의 사랑의 양식으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자신의 생을 바친, 삶으로서 실천해버리는 그 앞에서는 그의 오만하고 때로 불쾌한 언동에 대해서조차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다. '나', 즉 자기 자신을 온전히 포기하고 모든 것을 '타인들'에게 바친 자. '이런 삶을 살 각오가 없이 남발하는 연민이란', 이 글의 핵심 주제에 대해 호프밀러와 대치점에 선 인물. 아니, 다른 선택을 한 인물.

 

 

에디트 : 결국, 사랑을 거절당하고 좌절한 적이 있는 이라면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인물. 그 신경질적인 모습까지도, 나 역시 그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살짝 눈썹을 찌푸린 채로 안타깝게 바라볼 수 박에 없는- 연민이 그녀에게 독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건네게 될 수 밖에 없는 인물이다.

나는 여기서 이것이 궁금하다. 평범한 소녀였던, 사랑스러웠던 그녀가 장애를 안게 되었다는 점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눈이 먼 여인에 대한 콘도르의 감정과 에디트에 대한 호프밀러의 감정을 연이어 볼 때, 그녀들이 받을 수 있는 감정은 결국 연민 뿐이라는 것인가? 두 사람의 차이는, 그 연민을 품은 이의 인내심의 차이였을 뿐 결국 그녀들은 살아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인지?

치유될 수 없는 장애이기에 근원적인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나, 바로 그렇기에 '손상'과 '결여'된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 극복해내고 타인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로도 보이는 것이다. 그 장애가 자신의 선택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러나 동시에, 이 글 안에서 그런 순수한 애정 관계는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에디트의 열정이 가장 순수했다)

결국 사랑이란 허상이라는 이야기로까지 전개될 수 있는 것일까?
사랑이란, 깊고 깊은 연민일 뿐이라는? 모든 이는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기에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동 저자의 다른 작품인 '체스 이야기', 올해 안에는 읽을 생각이다.

 

 

 

[발췌]

 

#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으로, 남의 불행을 통해 받은 충격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려는 조급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남의 고통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려는 본능적 욕망일 뿐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를 가진 것이기도 합니다만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 연민은 인내하고 참으면서 자기의 힘이 한계에 부딪힐 때까지, 아니 그 이상까지 견디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 당연히 모든 사람이 이런 내 의견에 반박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기기만적인 본능은 내면에서 의식하는 위험을 애써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함으로써 실질적인 우험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또 이런 싸구려 낙관주의에 대한 나의 경고는 옆방에 마련되어 있는 푸짐한 저녁식사의 분위기를 망칠 염려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 이제 내가 아닌,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 일단 어떤 감정으로 뒤흔들리면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청춘의 특징이다. 이 연민이 나를 즐겁게 할 뿐 아니라 주변까지도 편안하게 만든다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내 안에서 기이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연민이라는 새로운 능력을 스스로 인정하자 내 피에 어떤 독소가 침투해 피를 더욱 뜨겁고 빨갛게, 빠르고 격렬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 이 힘겨운 걸음걸이에서 나는 쇠 부딪치는 소리가 내 가슴을 조여왔다. 그녀가 휠체어도 사용하지 않고, 아무도 자신을 돕지 못하게 하는 데는 전시적인 의도가 있다는 것을 곧바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로 나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자신이 다리병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녀는 절망에서 나온 일종의 불가사의한 복수심에서 우리를 아프게 하려고, 그녀의 고통으로 우리를 고통스럽게하며 신 대신 우리 건강한 사람들을 책망하려고 하는 것이다.

 

# 이런 이상한 망설임이 나를 덮친 바로 그 순간, 나도 이런 고행이 어리석고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른 사람이 즐기지 못한다고 해서 나의 즐거움을 포기하거나 다른 사람이 불행하다고 해서 나의 행복을 피하는 것은 아무 의미없는 일임을 알고 있다. 우리가 가벼운 농담을 즐기는 매순간 어딘가의 침대에서는 호흡하기 힘들어 그르렁거리며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수많은 창문 뒤에서 버티고 있는 비참함이 사람을 굶겨 죽인다는 것을. 병원, 채석장, 탄광, 공장, 관공서, 감옥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매 시간 강제노동을 한다는 것을. 그리고 아무리 이런 의미없는 일들로 자기 스스로를 괴롭힌다 할지라도 이런 곤경에 처한 사람은 조금도 더 편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시대의 비참함을상상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한숨도 못 자고 단 한 순간도 입가에 웃음을 담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지어낸 고통, 상상한 고통은 늘 우리를 놀라게 하고 절망하게 하지는 않는다. 영혼이 직접 느끼며 봤던 것만이 진심으로 영혼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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