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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 세상물정의 사회학

일루젼 2015. 7. 21.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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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저자
노명우 지음
출판사
사계절 | 2013-12-3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세상물정 좀 아십니까? 세상물정의 비밀과 거짓말 속으로 뛰어든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싱숭생숭할 때는 뭐라도 끄적끄적 잡소리를 풀어야 한다.

(그것이 뒷날 흑역사가 될 지라도ㅠㅠ)

 

처음 이 블로그를 열었을 때는 책을 읽는 것도 좋았고, 읽고 무언가를 쓰는 것도 참 좋았었다.

조금씩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것도 수월해진다 싶었었는데

몇 년 정도 아무 것도 하지 않다가 다시 읽고 쓰기를 하려고 하니 온몸이 뒤틀린다.ㅋㅋ

 

 

<세상물정의 사회학>, 참 자극적인 제목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보통 저 단어들에서 느끼는 처세, 아부, 융통성에 대한 것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 단어들이 어떻게 변질되었는가에 대한 외침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프롤로그.

몇 번이고 다시 읽고, 휴대기기에 소장하고 싶어서 핑사(타이핑사... 필사하면 나도 내 글씨를 다시 못 읽는다...)까지 했다. 프롤로그만이니 모쪼록 넓은 마음으로 봐주시길.

 

본문은 짤막짤막한 챕터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 사회현상과 그에 대한 저자의 생각, 또 그에 관련된 책과 짧은 서평까지 곁들여져 있다.

 

내기 읽은 건 1권인데 읽어야 할 책이 50권 (25챕터, 1챕터당 1-3권) 은 빵!! 늘어나버렸다.

 

저자의 시각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지점에서 바라보려면 일단 좀 더 읽고 봐야 할 것 같다.... OTL

 

 

내게는 좋은 책이었다.

 

 

 

- 아카데미라는 성소 속에서 보호받던 과거의 학자들은 갖지 못했던 보편적 삶에 대한 감수성은 그래서 중요하다. (p.6)

 

- 프롤로그, 처세술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단어를 위하여.

 

- 상식과 상식이 서로 견제할 때는 몰상식이 생겨나지 않는다. 하나의 상식만이 존재하는 사회가 비상식적인 사건을 낳을 뿐이다. 부자 되기가 다른 상식을 모두 먹어 치우고 유일한 상식으로 등극하면, 상식은 괴물이 된다. (p.26)

 

- 학자들은 읽기 쉬운 책은 깊이가 얕고, 책이 난해하면 심오한 내용의 깊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나 분명하고도 불편한 진실은, 학자들이 거장을 지향하는 스타일을 고집하는 한, 동시대 독자들은 아예 처음부터 베스트셀러가 될 작정으로 이른바 소비자의 '니즈'를 시장조사를 통해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기획되고 마케팅에 의해 주물러진 책만을 읽게 된다는 점이다.

 악화에 의해 양화가 밀려날 때, 양화는 악화만을 탓한다. 물론 내용은 빈약한데 읽기 쉬운 책만 편식하는 독자들을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난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p.43)

 

- 복지국가는 성공한 소수의 개인보다는 성공한 사회가 공공선에 가깝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 창피하다는 느낌, 즉 수치심은 문명인의 전유물이다. 창피는 본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고 옷 매무새를 단정하지 못하게 흩트린 모습"을 묘사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머리가 헝클어졌다고 혹은 옷매무새가 단정하지 않다고 모든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지는 않는다. 수치심은 머리가 헝클어진 상태를 평소 경멸하던 사람이 헝클어진 머리를 타인에게 보여 줄 때 느끼는 감정이다. (p.137)

 

- 권위주의 사회에서 아버지로 소환된 남성에게 섹스는 욕망을 실현하는 통로가 아니라 권력을 확인하고 측정하는 바로미터에 불과하다. (p.158)

 

- 자기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인정투쟁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라면 개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인정투쟁을 벌이는 시위대를 보고도 "아니 배부르고 등 따스하면 그만이지 인정이라니 웬 지랄들이래?"라고 말을 뱉어 낼 주제들이다.   (p.211-212)

 

- 상품을 통한 개인 회복의 한계는 분명하다. 개인의 구원은 상품 소비에 의한 개성 회복이 아니라, 개인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를 문제 삼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개인 구원의 최종 책임은 개인에게 있지 않다.  (p.219)

 

- 침해받을 수 없는 개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과 자기의 이익만을 고집하는 경제적 개인주의는 다르다.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지 않을 때, 오히려 국가와 사회가 개인을 무명씨로 강요하는 악행의 근원일 때, 이를 목격한 어떤 사람들은 "나만 잘살면 된다"는 경제적 개인주의로 후퇴한다.  (p.221)

 

- 전 국민이 죽어라 공부하고 졸업 후에도 승진하기 위해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지식사회의 외양은 갖추었어도 성숙이라는 목표를 잃어버린 사회에서 배운 사람과 성숙한 사람은 일치하지 않는다.  (p.245)

 

- 나이 듦과 원숙함이 결합한 사람은 다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유작으로 남긴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는 원숙한 노년의 아름다움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아도르노가 후기 베토벤 그리고 쇤베르크의 위대함이라고 칭송했던 노년의 길을 따라 걷기 위해, 사이드는 아도르노를 읽었고 모차르트의 오페라 <코시 판 투테>를 참조하고 콘서트를 거부하고 레코딩에만 매달렸던 글렌 굴드의 기괴함에 귀 기울였다. 거장들은 인생의 끝에서 소박한 깨달음을 얻는다.  (p.253)

 

- 학생의 위치를 이처럼 오랫동안 유지한다는 것이 지위를 얻고도 식지 않은 탐구욕의 반영이라면 좋겠지만 학생 지위의 지연은 이런 겸허함이 아니라 우리 몸에 밴 공부를 하는 오래된 습관 때문이다. 공부는 학위를 받기 위한 수단이고, 교수로서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지식이 알리바이로 사용된다. 공부가 출세를 위한 수단에 불과한 이상, 우리의 공부는 학부생이든 교수든 막론하고 훈고학적 주석 달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책 속에서는 생각했지만, 세속 속에서 "내가 생각" 하지는 못했다. 어느새 책이 없으면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해 있던 것이다.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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