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칼 구스타브 융 / 김세영, 정명진
원제 : Aion: Untersuchungen zur Symbolgeschichte
출판 : 2016.09.20
출간 : 부글북스
시작하는 말
읽었다, 정도 외에 할 말이 많이 있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프로이트와 융, 아들러는 참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르네 지라르도 그렇게 피하려 했었는데.... 어쩔 수 없나 보다.
<인간과 상징> 정도만 읽었었는데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슬프지만 재독 확정이다.
<원형과 무의식> - <인간과 상징> - <카를 융 - 기억 꿈 사상> - <레드북> - <연금술에서 본 구원의 관념> 정도의 순서로 읽을 생각인데 시간은 좀 길게 잡아야 할 것 같다. 읽는다고 다 이해하는 것도 아니니 마음 편하게 기록만 남겨본다.
리뷰
표지부터 강렬하다. 본문에서는 에스겔의 환상과 성스러운 네 동물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지만, 황소는 보이지 않는다. 사자의 머리와 독수리의 날개, 인간의 몸과 상승하는 뱀은 사자의 몸과 인간의 머리를 가진 스핑크스의 변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온, 주르반 다양하게 부를 수 있겠다.)
이 책에서는 자아와 자기의 구분이 가장 중요한 개념이 아닐까 싶다. 책 전반에 걸쳐 개별화된 인격과 개별화된 무의식 너머 전체적으로 존재하는 통합된 무의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시성에 대해서도 가볍게 언급한다. 전체적으로 종교적인 시각과 상징을 이용해 접근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그나마 읽기에 조금 편했다. 점성술과 영지주의, 기독교에 대한 약간의 기본 지식이 있다면 편하게 읽으실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것들의 대립과 통합, 그리고 통합 이후의 전체.
개인적으로 가장 즐거웠던 부분은 콰테르니오를 입체적으로 연결하는 부분이었는데, 3차원 구조의 세피로트와 유사하게 느껴졌다. 저차원의 아담으로 연결되는 안트로포스와 그림자 콰테르니오는 세피로트와 클리포트, 그 자체로서는 천상의 삼각형을 하나의 점으로 하는 티페레트와 네 가지로 보인다. 상상이므로 이론화할 수는 없다. 다만 여기에 플라톤의 입체들을 얹어 생각해본다면 조금 더 재미있을 것 같다.
그리스도와 예수의 관계에 대해서도 약간의 실마리를 얻었다. 네빌 고다드의 책에서 나온 이야기들도 생각보다 훨씬 관련이 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과 4극 구조, 3과 3+1로 이루어진 대립 관계 등이 흥미로웠다. 헤르메스학에서 이야기하는 영혼육과 4극 자석과 연결된 이야기처럼 읽히는데, 저자가 영지주의와 연금술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을 보면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고 읽어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다. 개인적인 키워드들인 이집트와 영지주의와 점성술과 연금술과 심리학과 카발라와 신학을 혼합해 정리해준 책으로, 각각의 원전보다는 접근이 조금 더 수월하다는 점에서 감사하다. 얼마나 이해했는가는 별개다.
- 이 책의 주제는 '아이온' (Aion : 우주를 전부 포함하는 궤도나 원, 시간과 관련 있는 고대 그리스 신을 일컫는다. 일상의 언어에서는 주로 '영겁' 또는 '무한히 긴 시간' 또는 '시대'의 의미로 쓰인다)이다.
- 나는 기독교와 영지주의, 그리고 연금술의 자기 상징들을 바탕으로 "기독교 시대" 안에서 정신적 상황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밝히려고 노력할 것이다. 기독교 전통은 처음부터 시간의 시작에 관한 페르시아인의 사상과 유대인의 사상으로 넘쳐났을 뿐만 아니라, 지배적이었던 것들이 거꾸로 향하는, 일종의 방향 전환을 암시하는 것들로도 넘쳐났다.
- 우리 내면의 신의 형상은 "신중과 정의, 중용, 미덕, 지혜와 규율"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 여기서 샘은 바빌론의 헤라(Hera)를 가리키지만 기독교 언어로 바꾼다면 그것은 영지주의자들 사이에서만 아니라 정통 기독교인들 사이에도 '샘'으로 여겨져 온 마리아(Mary)를 의미한다.
- 마지막으로, 북쪽은 세계의 배꼽이고 동시에 지옥이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마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너는 심술궂게 북쪽으로만 가려 하는가? 네가 높이 올라가려고 서두를수록, 네가 정말로 가야 할 자리로 더 빨리 떨어지게 될 거야."
- 점성술적으로 쌍어궁 시대의 중간인 11 세기의 시작과 함께, 이교들이 곳곳에서 버섯처럼 생겨났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적, 즉 두 번째 물고기가 데미우르게로 나타났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이 사상은 일종의 영지주의의 르네상스로 여겨질 수 있다. 영지주의의 데미우르게가 모든 악이 생겨나게 한 열등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상의 중요성은 점성술적으로 정해진 시기에 일어났다는 그 공시성(Synchronicity : 외부의 어떤 사건이 마음의 심리적 상태와 의미 있는 방향으로 일치하는 현상을 말한다)에 있다.
- 이런 방향의 역전은 연금술의 심리학에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문가가 자신의 기술을 통해서 '대우주의 아들', 즉 그리스도와 대등한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전문가 또는 전문가의 도구는 에케네이스와 에케네이스가 경이로운 물질로 인정한 모든 것을 대체하기에 이른다. 전문가는 말하자면 물고기를 꾀어 비밀을 끌어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철학자의 아들', 말하자면 철학자의 돌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한다. 경이를 행하는 그 물고기를 표면으로 끌어올릴 "현자의 자석"은 가르쳐질 수 있다고 우리의 텍스트는 말한다. 이 은밀한 가르침의 내용이 연금술의 진정한 신비이다. "원리" 혹은 "이론"은 "평범하지 않은 메르쿠리우스(Mercurious non vulgi)"로, 철학적인 수은으로 구체화된다.
- "연금술"의 과정은 사람의 내면에서도 일어나고 외면에서도 일어난다. 자신의 영혼 안에 있는 "진리"를 족쇄로부터 자유롭게 풀어주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물리적 걸작을 만드는 데 절대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돌을 만드는 방법을 아는 사람도 정확한 원리를 바탕으로 할 때에만 성공할 수 있는데, 이때 사람은 이 원리를 통해서 스스로 변화하거나 스스로 원리를 창조하게 된다. 이런 고찰을 거친 끝에, 도른은 자기지식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일이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원하거든 당신이 먼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 "자신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에 의지하고 있는지, 또는 자신이 무엇 혹은 누구에게 속하는지, 또 자신이 세상에 만들어진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모른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한다."
"누구"와 "무엇"을 구분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추면 틀림없이 개인적인 측면에서 자아를 언급하게 되는 한편,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면 인격이 없는 대상을 제외하곤 어떤 것에 대해서도 단정을 짓지 않으며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 자아에 대한 지식과 자기에 대한 지식의 차이는 "누구"와 "무엇"을 구분하는 데서 가장 확연히 드러난다. 16세기의 어느 연금술사는 오늘날에도 일부 심리학자들이 걸려 넘어지곤 하는 문제를 건드렸다. "무엇"은 중립적인 자기와 전체성의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 반대로 자기지식은 어렵기도 하고 도덕적으로 엄격하기도 한 공부이다. 이 공부에 대해 소위 심리학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며 교육받은 대중도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연금술사는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자기지식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다. 연금술사는 전체의 일부로서 자신의 내면에 전체라는 어떤 이미지를, 예를 들면 파라켈수스의 표현을 빌리면 "하늘" 또는 "올림포스"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런 내면의 소우주가 바로 연금술 연구가 무의식적으로 추구한 목적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집단 무의식이라고 부르고 또 모든 개인의 내면에서 동일하고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을 "객관적"이라고 묘사할 것이다. 이 보편적인 '하나'로부터 모든 개인의 내면에 주관적인 의식, 즉 자아가 생긴다. "예전에 하나였던 것이 신의 창조 행위에 의해 분리되었다"고 한 도른의 말을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아니마/아니무스의 투사의 영향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 끊임없는 관찰이 무의식에게 협력을 다소 보장받을 수 있는 공물 같은 것을 제공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무의식을 단칼에 영원히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절대로 없다. 사실, 무의식의 내용물과 무의식적 작용의 증후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정신 건강에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왜냐하면 의식의 경우엔 언제나 편파적일 수 있고, 익숙한 길만을 고집하다가 막다른 길에 닿을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보완적이고 보상적인 기능은 신경증 환자에게 특히 클 수 있는 이런 위험들을 어느 정도 피하게 해 준다.
- 이 용은 입과 코로 3가지 성격의 연기를, 말하자면 "삼중의 무지 즉 선과 악, 진실과 허위, 적절한 것과 부적절한 것에 대한 무지"의 연기를 뿜어냈다. 아담스코투스는 "그것은 예언자 에스겔이 북쪽에서 오는 것을 보았다"는 그 연기이고, 이사야가 말한 "연기"이다.
- 이 같은 사실 때문에 "우리의 자석"이 철의 진정한 "물질"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자석은 숨겨진 어떤 중심을 갖고 있으며, 이 중심은 "뜨거운 욕망"을 갖고 철의 미덕이 높이 칭송받는 북극으로 향한다. 이 중심은 "소금이 풍부하다." 이 소금은 틀림없이 지혜의 소금일 것이다. 바로 다음의 텍스트가 이런 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현자는 기뻐할 것이지만 바보는 이런 것들에 별로 주의를 주지 않을 것이며 전능하신 분의 표시가 두드러진 북극을 보면서도 지혜를 배우지 않을 것이다."
- 극에서 메르쿠리우스의 심장이 발견된다.
- 반면에 육체는 무겁고 어둡고 불순하고 빛을 박탈당하고 여전히 무의식이고 형태가 없을지라도 그래도 세 번째 아들의 신성한 씨앗을 내포하고 있다. 이 씨앗이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일깨워져 정화되고, 예수의 내면에서 수난을 통해 상반된 것들이 분리됨으로써 (즉, 4개로 분리됨으로써) 승천의 능력을 갖추게 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어둠 속에서 잠자고 있는 세 번째 아들을 일깨울 원형이다. 그는 "영적 속사람"이다. 그는 또한 자체로 완벽한 삼분법이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지만, 그의 직전 선임자는 '헤브도마드' 중에서 가장 톺은 아르콘의 아들인 두 번째 그리스도이고, 그의 첫 번째 원형은 '오그도아드'를 지배하는 창조신 여호와의 아들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안트로포스의 이런 삼분법은 비존재인 신의 삼중 아들과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또 인간 본성을 세 부분으로 나누는 것과도 일치한다. 따라서 우리는 3개의 삼분법을 갖게 된다.
- 불은 3가지, 말하자면 육체와 정신과 영혼, 즉 태양과 수성, 영혼을 결합시킨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불 안에 예술의 신비가 봉인된다. 성부와 성자, 성령이 3개의 위격으로 하나의 핵심 안에 정말로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 불은 "불이면서 동시에 물"이다. 철학자들은 그것을 "살아있는 물 안에서 스스로를 스스로와 섞는" 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살아있는 불"이라고 부른다.
- 블레즈 드 비제네르에 따르면, 그 불은 두 가지가 아니라 4가지 양상을 갖고 있다. 모두가 불이 지혜가 있고, 열과 불의 활동인 신성이 있고, 낮은 세상에 속하고 빛과 열과 열정으로 이뤄진 원소가 있고, 마지막으로 지혜와 정반대로 아무런 빛이 없이 불타기만 하는 지옥이 있는 것이다.
- 17세기 연금술사 에레네우스 필라레테스의 '인트로이투스 아페르투스(Introitus apertus)'에서, 불가사의한 물질은 "칼립스"(chalybs : 철)라 불린다. 이것은 "금의 근원적 물질"이며, "우리 작업의 진정한 열쇠로, 이것이 없으면 어떠한 기술로도 램프에 불을 붙이지 못하는 그런 물질"이다. 칼립스는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정신"이며, "은밀하고, 지독하고, 그러면서도 더없이 폭발적인 불"이고, 세상의 경이이며 낮은 곳에 있는 보다 높은 권력 체계이다.
- 플라톤의 '티마이오스'(Timaeus)가 발표된 이래로, 영혼을 하나의 구로 보는 관점이 거듭 되풀이되어 왔다. '세상의 영혼(anima mundi)'으로서, 영혼은 세상의 바퀴와 함께 돌며, 세상의 바퀴의 중심이다. 그것은 '세상의 영혼'인 "메르쿠리우스의 심장"이 거기서 발견되는 이유이다. '세상의 영혼'은 정말로 천국의 동력이다. 법이 총총한 우주의 바퀴는 "출생의 테마"라 불리는 12 궁도에 반영되어 있다.
- 모든 원형적 배열은 원형이라는 표현처럼 나름의 초자연적인 힘을 갖고 있다.
- 다른 사람이 실수를 저지르는 곳이 어딘지를 아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당신 자신이 실수를 저지르는 곳을 아는 것만이 중요하다.
-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인식하는 것은 정신분석가에게 주어진 아주 특별한 경험이다. 그럼에도, 문학을 조금이라도 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니마가 어떤 형상인지 그림을 그리는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아니마는 소설가들, 특히 라인 강 서쪽의 소설가들이 즐겨 다룬 주제이다. 단지 아니마를 알기 위해서라면, 꿈에 대해 주의 깊게 공부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여자의 아니무스를 찾아내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아니무스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료들의 적의 앞에서도 거기에 영향을 받지 않고 꿋꿋이 버티면서 동시에 그 적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침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기분과 그 기분이 자신의 인격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깊이 반성해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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