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카를로 긴즈부르그 / 조한욱
출판 : 길
출간 : 2004.11.15
이 책은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저서를 읽다가 언급된 내용을 통해 '베난단티'로 연결되어 읽게 되었다.
동 저자의 <밤의 역사>도 읽어볼 예정이다.
27세의 대학원생의 졸업논문으로 쓰여졌다는 이 글은 상당한 양의 종교재판 기록을 통해 정리된 '베난단티'에 대한 정리본이다. 각기 다른 시간대와 공간에 위치한 사람들 사이의 진술에서 공통적으로 묘사되는 부분, 최초의 기원으로 의심되는 의식, 그리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본류를 상실하고 흡수되어 '마녀'와 동일시되어가는 과정을 살펴본다. 또한 당대의 이단 심문에서 주교와 심문관, 그리고 국가적 분위기에 대해서도 가볍게 살펴볼 수 있다.
저자의 서문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이 저술서는 일반화나 법칙화를 지양하고, 개인들의 기록 속에서 '실제적으로 존재했던' 것들을 더듬으려 한다. 기록이라는 글자 속에 미처 다 담기지 못한 실상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고자 노력하는 저자에게서 이미 완숙한 역자학자로서의 사관이 느껴진다. 서문의 고비를 넘기면 본문은 구술 중심이라 수월하므로,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읽었다'는 것 외에 큰 의미가 없는 기록을 남기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고민 중이다. 깊은 이해나 새로운 해석이 담긴 것도 아니고, 저자나 저서에 대한 소개나 지식에 충실한 것도 아니다. 약간의 발췌문과 당시의 단상 정도인데- 그렇다하더라도 아무 것도 쓰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위안하고 있다.
- 이 주제에 수반한 긴 논쟁은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눈여겨봐야 할 중요한 점은 밤의 기마 행진에 관한 신앙이 옛 독일의 회의 총칙에 나타날 정도로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런 저작에서는 디아나라는 이름이 홀다처럼 대중적인 독일 신의 이름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자주 마주치는 모순이긴 하지만 홀다는 삶과 죽음 모두와 관련된 속성을 갖고 있었다. 실로 홀다는 남부 독일에서 자매 여신인 페르흐타와 마찬가지로 생장의 여신, 즉 풍요의 여신이자 동시에 '포악한 무리' 또는 '황야의 사냥' (Wütischend Heer, Wilde Jagd, Mesnie Sauvage)의 우두머리이다. 이들은 일찍 죽어서 무섭고 끔찍한 모습으로 밤에 마을을 지나가는 무리인데, 마을 주민들은 방어를 위해 문을 막아놓는다.
- 이탈리아에서는 페르흐타가 베파나(Befana:Epiphany)가 되었다. 그것은 빗자루에 올라타고 아이들에게 단 것이나 석탄을 선물로 주는 마녀를 말한다.
- 이러한 증거는 아분디아-사티아-디아나-페르흐타 등등 많은 이름의 대중적인 신과 베난단티를 둘러싼 복잡한 신앙 사이에 아주 일반적이긴 하지만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우리는 그 접합점을 더 정확하게 밝힐 수 있다.
- 이것이 이 민간신앙의 두 얼굴, 즉 '농경의식'과 '장례 행렬' 사이에 아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일련의 일화 가운데 마지막 이야기이다. 그러나 딜 브로일의 이야기조차 악마적 사바트라는 틀 속에 억지로 짜 맞춰졌다. 그는 고문 끝에 자신이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악마에 굴복했다고 자백했으며, 그 결과 1632년에 처형당했다. 이러한 신앙이 마법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결론은 불가피했다. 예컨대 몇십 년 전 심문관 이냐치오 루포(Ignazio Lupo)가 한 논문을 통해 베르가모(Bergamo) 주변 지역의 마녀들이 사계재일의 목요일에 베누스 산인 토날레(Tonale)에 모여 악마를 숭배하고 난잡한 향연에 탐닉한다고 단언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 체스 경기처럼 첫번째의 착수가 곧 이어지는 착수를 조건 짓는다. 베난단티를 연구하면서 나는 그들이 수행하는 밤의 과업에 대한 묘사가 샤머니즘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탈리아어 초판본의 서문에서 나는 프리울리의 베난단티와 아시아의 무당들 사이의 연관성이 단순히 유형적 유사성이 아닌 역사적 성격을 갖는다고 감히 기술했다. 그것은 단순한 직관에 근거했다. 적절한 설명을 위해서는 진정 사실적인 연구를 계획해야 했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회피하려 했다. 그 어려움은 넘어설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무엇보다도 언어를 비롯하여 내 인식의 부족한 점에 대처해야 했다.
- 이런 것들이 내가 베난단티에게서, 그들에 관한 자료와 그 자료를 사용하여 내가 쓴 책에서 배운 것이다. 왜냐하면 텍스트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존중하는 것을 포함하여 독서란 저자와 독자가 같은 사람일 때조차 저자 측에서는 예상할 수 없는 유비의 차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경우에서처럼 책은 그것이 씌어졌을 때의 콘텍스트와는 아주 동떨어진 콘텍스트에서 읽히게 되는 것이며, 매번 읽을 때마다 생기는 간격은 더욱 커진다. 그렇지만 한 권의 책이 계속 살아있는 것은 이렇듯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해석 덕분이기도 하다.
(리뷰자 주 :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analogie) 개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 그것은 베난단티(Benandanti: 베난단티는 복수형이며 단수형은 베난단테이다. 그러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베난단티로 통일한다-옮긴이)처럼 명백하게 민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신앙이 어떻게 하여 이단 심문의 압박 아래 점차 전통적 마법의 특징적 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귀결되었는지 그 변모의 과정을 보여준다.
- 이 연구는 게르만과 슬라브의 전통이 합류하는 프리울리 같은 지역에서 풍요제가 비교적 늦은 시기인 1570년 이후부터 확실하게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 참여자인 베난단티는 수확과 비옥한 토지의 수호자들이다. 한편 이런 신앙은 (페르흐타· 홀다· 디아나라는 이름의 여신들이 주재했던 밤의 만남이라는 신화와 관련되어 있는) 더 광범위한 전통과 묶여 있고, 그 지역은 알자스에서 헤센, 바이에른과 스위스까지 펼쳐져 있다.
- 지난 7년 동안 마법에 대한 저작이 많이 나왔다. 그것은 새롭게 유행한 비학 연구의 물결을 타고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그 저작에는 일반적인 연구와 특수한 연구가 모두 있었으며, 때패로 유용하거나 흥미로운 것도 있었다(H. 트레버-로퍼 [Trevor-Roper]의 사례나 R. 망드루[Mandrou] 등등의 연구를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한 저작을 고려한다면 이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는 어느 정도 심각하게 재구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지 모른다.
- <치즈와 구더기>로 대표되는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미시사는 어느 정도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결코 그의 역사 세계의 전부가 아니다. 그는 문헌학· 종교 · 철학 · 문학· 예술 · 인류학. 민속학 정신분석 등등 인간 삶의 다양한 영역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방대한 지식을 축적했고 끊임없는 저작을 통해 그것을 증명했다. 종교개혁이 진행 중이던 16세기 유럽은 종교적 대립에 정치적 충돌이 더해져 혼란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 가톨릭이 지배하던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 교리를 믿으면서도 그것을 숨기던 사람들을 경멸하기 위해 칼뱅은 '니코메디즘' 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 주제를 다룬 <니코메디즘>에서 긴즈부르그는 지성사와 도상학의 연구를 결합시켜 뛰어난 추리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피에로 연구>를 통해 15세기의 이탈리아 화가인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세 작품을 분석하면서 도상학적 상징과 예술 후원자들을 다룸으로써 예술사의 분야로 영역을 넓히고, 역으로 예술사의 영역 확장에 기여하기도 했다. <밤의 이야기>에서는 마녀에 대한 연구로 촉발된 문제점들을 시간적 · 공간적으로 확대시켜 수 세기에 걸쳐 형성된 유럽과 아시아 대륙 문화의 심층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물론 그 문화의 내부에서는 궁극적으로 교육받은 계층의 문화가 민중문화를 억압하며 승리를 거두지만, 긴즈부르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민중문화가 갖는 독자성과 생명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권력관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로렌초 발라의 수사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하여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회의주의적 경향 속에서 종종 무시되고 있는 '증거'의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
- 사실 슈퇴클린은 재판장에서, 떠돌아다니는 데에도 세 가지 방식이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는 '밤의 무리'의 일원이 되는 것인데 슈퇴클린 자신은 거기에 속했다. 두 번째는 죽은 자들의 행진에 합세하여 원래 죽기로 예정되었던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세 번째는 마녀와 함께 사바트에 가는 것인데, 슈퇴클린은 거기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기 배문에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밤의 무리'의 여행은 어김없이 사계재일의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그들은 졸도하여 무기력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한 시간 남짓 무기력한 몸을 움직이지 않고 놔둔 채 떠난 것은 영혼이었다(또는 최소한 영혼만이 떠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일 그러는 사이에 몸이 엎어진다면 슬픈 일이다. 영혼이 다시 몸으로 들어가는 것이 고통스럽고 힘들기 때문이다.
- 우리말의 마녀는 여자를 가리키지만, 같은 뜻의 이탈리아어 'strega'에는 남성이 포함되기도 함-옮긴이
- 크루시우스가 언급하였던바, ('포악한 무리', 베누스 산 등) 죽은 자들의 세계와 밭의 '풍요' 사이의 관련성은 1630년 헤센에서 벌어졌던 마법사 딜 브로일(Diel Breull)에 대한 재판에서 더욱 예리하게 부각된다. 그 전해에 그는 수정구슬을 보면서 주문을 읊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아 추방 판결을 받았다. 두 번째 재판 과정에서 브로일은 8년 전 아내와 자식을 잃었던 극심한 흉년에 잠에 빠졌다가 깨어났더니 베누스 산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장소의 신인 '홀트 부인'(Fraw Holt)이 물동이에 비친 아주 이상한 그림을 보여주었다. ('홀트'는 게르만어 계통에서 '홀레'와 같고, 그것은 베누스와 동의어로 간주된다.) 그가 본 것은 멋진 말들과 불 가운데에서 잔치하며 앉아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그중에는 오래전에 죽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홀트 부인은 그들이 악행을 저질러서 거기에 있다고 설명했다. 딜 브로일은 곧 자신이 밤의 무리의 일원인 '나흐트파르' (nachtfahr)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이에른의 목동 콘라트 슈퇴클린이 거의 50년 전에 사용한 것과 똑같은 표현이었다.
- W, Liungman, "Traditionswanderungen" II, pp. 885~1013. p. 897에서 저자는 '아름다운' 페르흐테와 '못생긴' 페르흐테 사이의 전투를 바빌로니아에서 있었던 창조의 세력과 혼돈의 세력 사이의 투쟁과 결부시킨다. 바빌로니아에서 그 전투 의례는 마르두크 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정초에 열리는 축제기간에 벌어졌다. 또한 p. 990에서는 페르흐텐라우펜을 겨울 몰아내기 의례의 원형으로 보고 있다.
- 조르조 수도사는 의심을 품고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그것은 세례 요한 축일 전야에 대한 언급 때문에 생긴 의심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 그날은 온갖 종류의 미신과 연루된 날이었기 때문이다.
- 프리울리 심문관들이 이렇듯 널리 퍼진 미신에 대한 재판에서 관대한 태도를 취한 이유로서는 그들이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속했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16세기 초에 마녀의 처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처음 냈던 사람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사무엘레 데 카시니스(Samuele de Cassinis) 수도사였다.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신랄한 논쟁을 벌였던 사람은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빈첸초 도도(Vincenzo Dodo) 수도사였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대립되는 교단이자 신학의 학파에 속하는 수도승들 사이의 논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티프가 후에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마녀재판에 대해 의심하는 전통으로 이어져 마법 혐의자들에게 더 관대한 태도를 취했으리라는 가능성도 있다.
- 사무엘을 사울 앞으로 출두시킨 것은 엔도르의 마녀였다. 피토네스는 아폴로의 여사제로서 예언 능력을 갖고 있다-옮긴이
- 이 한 토막의 자료는 발칸 반도에 보존되어 있던 케르스트 니키(Kerstniki) 신앙과 견주어볼 때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케르스트 니키란 빌레(Vile)라는 나무와 식물의 신과 신비하게 엮여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 이유에서 이들을 빌레나치 (viljenaci)라고 부르기도 한다.
- 1575년 11월 21일 월요일
가장 존경하는 아퀄레이아의 주교 대리이자 교황의 행정관인 야코포 마라코와 아퀄레이아 교구의 이단 심문관인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 줄리오 다시 앞에 브라차노 본당의 보좌신부 바르톨로메오 즈가바리차가 치비달레의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증인으로 출두했다. 앞서 언급한 주교 대리에게 서약을 한 뒤, 경고를 듣고 조사를 받고 심문을 받은 뒤 그는 이렇게 진술했다.
(리뷰자 주 : 그런데, 그레고리력이 1582년에 지정되긴 했지만, 1575년이 아니라 1574년이 맞다고 보인다. 월요일이라는 점에서 역산해도 그렇게 보인다.)
- 체스 경기처럼 첫번째의 착수가 곧 이어지는 착수를 조건 짓는다. 베난단티를 연구하면서 나는 그들이 수행하는 밤의 과업에 대한 묘사가 샤머니즘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탈리아어 초판본의 서문에서 나는 프리울리의 베난단티와 아시아의 무당들 사이의 연관성이 단순히 유형적 유사성이 아닌 역사적 성격을 갖는다고 감히 기술했다. 그것은 단순한 직관에 근거했다. 적절한 설명을 위해서는 진정 사실적인 연구를 계획해야 했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회피하려 했다. 그 어려움은 넘어설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무엇보다도 언어를 비롯하여 내 인식의 부족한 점에 대처해야 했다.
- 아마도 이단 심문소에서는 카타리 신앙(12세기에 융성했던 이단으로서, 신이 창조한 영혼세계와 악마가 창조한 물질세계의 이원론을 믿음-옮긴이)이 붕괴되었던 곳의 모든 지역에서 움튼 신앙을 집대성하며 그것을 반영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 가설은 여기에서 논의하기에는 너무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 회플러(Kiultiscbe Gebeimbünde, p. 352)는 이 재판기록에 관해 '겨울'과 '여름' 사이의 전투 의례를 상기시킨 것에 덧붙여 (이 책 92~93쪽을 볼 것), 여기에서 조사한 신앙을 발데르(Balder: 오딘의 아들로서 여름 태양의 신-옮긴이)-아티스(Attis: 부활을 상징하는 프리기아의 신-옮긴이)-데메테르(곡물의 여신-옮긴이)-페르세포네(데메테르의 딸로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잡혀 지하로 내려감-올긴이)-아도니스(페르세포네가 사랑한 미소년. 그의 피에서 아네모네가 돋아남-옮긴이)로 이어지는 신비 숭배의 복합체 속에 끼워 넣는다.
- 켐나트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야코부스데 보라지네(Jacobus de Voragine)의 <황금 전설> (Legenda Aurea)에 나오는 성 제르마노(Gemano) 생애의 한 일화를 인용했다. 거기에는 "밤에 밖에 나가는 선량한 여인들"(bonis mulieribus quae de nocte incedunt)에게 바친 제물과 이상한 밤의 여행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 자취가 사라지고 있던 '나쁜 평판이 덜한' 이 종파가 민중 신앙의 잔재였으며, 여기에 15세기 말에 마법이 접목되었다는 추정이 그럴듯해 보인다. (켐나트는<마녀들의 망치>[Malleus maleficarum: 1486년에 발간된 이단 심문관들을 위한 지침서. 마녀를 식별하는 방법, 처형하는 방법 등을 다루고 있다-옮긴이]가 등장하기 이전에 그 연대기를 썼던 것이다). 루체른(Lucerne)과 티롤(Tyrol)에서 열렸던 최초의 마녀재판에서 피고들은 사계재일의 목요일에 사바트에 갔다고 진술했지만, 나중에 같은 지역에서 열린 재판에서는 다른 사항이 없이 단지 목요일에 갔다고만 말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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